2023/02/08

제3부 웬 넋두리인가 - 하느님이 주신 손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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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웬 넋두리인가
하느님이 주신 손전화_마당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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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학회 ・ 2020. 12. 23.

 

하느님이 주신 손전화

한반도가 대륙을 향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서한만의 대동강으로 문물을 받아들이고 경기만의 한강에서 이를 소화한다. 소화된 활력이 단전丹田으로 모이니 아산만 연안이다. 이 일대 들판을 가르며 깊숙이 들어오는 바닷물을 따라 뱃길이 열리고 곳곳에 나루가 생겨 안개(內浦)로 아우러진다. 단전을 이어 받고 골골이 흐르는 안성천, 삽교천, 광천천이 많은 인물을 쏟아내니 대륙인들 어찌 멀겠는가.

하여 내포 땅에는 눈앞에 영리보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선비들이 많이 태어났다. 최근만 해도 동학군 의병장 독립투사 혁명가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특히 아산만은 사리와 조금의 차이가 열 길이나 되고, 이들이 모두 달이 차고 이지러짐(盈虧)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었기에 천간지지天干地支로 사람의 운명이나 나라의 안위를 따지는 천문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저마다 서당을 차려놓고 밤하늘을 응시하며 내일을 실험하기 바빴다.

내포를 지나 금강을 넘으면 공주가 있다. 가렴주구苛斂誅求의 본거지로 특히 관수물자를 생산하는 노예들이 많아 고려 때부터 반란이 잦았다. 동남으로 우뚝 솟은 계룡산 기슭에는 과거를 준비하는 서생뿐 아니라 새 세상을 꿈꾸는 역술가들이 들끓었다. 충현서원이 그 중심에 섰다. 그러나 그게 다 아니었다. 관도의 실체가 부패 특권임을 깨달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 진정한 민생의 길을 열려고 애썼다. 의술醫術·복술卜術·무술巫術로 백성의 건강 안정 희망을 챙기려 했다. 

권력이 주는 민안民安이란 애초에 없었다. 성리학 이태조도 폭군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골육상쟁이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처족과 세자의 처족까지 몰살한다. 개혁적 유생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강권정치에 앞잡이가 될 뿐이었다. 성군이라는 세종도 북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백성들의 통곡 소리를 외면했다. 화폐 유통을 강행했지만 물물교환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또 아사자는 얼마던가. 태장 소리 요란하더니 읍소자까지 처벌하기에 이른다.

권력이 학자 유생을 우대할수록 호가호위狐假虎威만 부추길 뿐 백성의 고통을 더는 일은 손대지 않는다. 어린 단종이 걸어가기엔 앞길이 너무 험난한데 등극을 걱정하는 중신들은 없었다. 불안을 털기 위해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세조의) 철권이었다. 권력은 계속 허둥댔다. 어미를 죽이고 그 아들(연산군)을 왕위에 올리면 어찌 되겠는가. 명나라에 무거운 조공을 받치고 칙사 대접만 잘하면 그만인가. 그렇듯 대신들은 동서로 갈려 싸우기 바빴다. 

임진왜란을 왜 몰랐을까. 이태 전 정여립 모반으로 동인 선비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2천 명이 넘는 호남 유생들이 살해되었다. 십대홍문十代紅門 출신 이발의 80 노모도 압슬형으로 죽어야 했다. 4년 후 이몽학난 때도 그나마 호남 유생들이 희생을 당했으며, 호남의병장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親鞫으로 사망했다. 50년 전에 삼포 거주 왜인 3천 여 명이 난을 일으켰고, 40년 전에는 경복궁이 전소됐다. 30년 전에 의적 임거정이 횡횡했다.

20년 전에 백호가 나타나 가축이 상하고 낙동강이 말라 민심이 흉흉한데 궁중은 서로 노려보기 바빴다. 10년 전에 모처럼 십만 양병이 나왔으나 여지없이 거절되고 3년 전에는 조헌(임난시 의병장)이 광구책을 내놨으나 광론狂論으로 몰려 귀양 간다. 명나라 관보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 가계를 바로잡기 위해 70년간 10여 차례 특사를 보낸 끝에 결실을 맺자 왕이 모화관에 나아가 명사明)를 접견하고 20명 가까운 공신을 책훈한 것이 2년 전이었다. 

권력 주변은 늘 승평일구昇平日 천하태평이었다. 너무 태평해서 오히려 노역과 병역을 꺼리는 백성들의 원망소리가 걱정될 뿐이었다. 왜군이 입성할 때 왜 서울이 불탔는가. 개경에서는 누가 왕에게 돌을 던졌는가. 왜 왕자를 잡아 왜군에게 넘겼는가. 조선 백성 천만이 7백만으로 줄었다는 데 그들은 다 어디에 묻혔는가. 명군과 왜군의 강화 교섭에서 국토의 분할이 논의되는데 조선의 목소리는 왜 없는가. 당대 명신 류성룡의 승평이란 누구의 승평인가. 

그래도 인재들은 권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문의 영광은 최우선의 가치였다. 모두 승자가 되어 패자의 고초를 비켜가려 했다. 조락을 노리는 많은 적수들의 광분이 훤히 보이기에 더욱 더 감시의 불을 켜고 귀동냥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개국 2백 년에 골육상쟁 권세 다툼 각종 민란으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피보라를 뿌려대다 왜란을 맞았으니 선비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진정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해낼 지혜와 용기를 가진 자 누구인가. 

벼슬을 마다하고 천문 지리 의술로 민생을 챙겨 온 선비들이 임난 후 곧 많이 아산만에 터를 잡았다. 약재를 걸고 농사를 지으며 제자를 가르치고 원근의 동학同學들과 교류하며 민생 안정을 위한 지혜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조정은 한 치의 반성도 없이 권력 다툼 사색당쟁 세도 싸움이었고 민생은 점점 더 도탄에 빠졌다. 견디지 못한 백성은 여기저기서 항쟁을 벌였다. 끝내 고종 재위 40년은 거의 대소 민란의 세월이었다. 

동학란은 엄청난 기세였다. 아산만의 향사들은 제자들을 많이 단속했지만 이미 귀신이 들어 뿔뿔이 흩어졌다. 반군과 관군, 청병과 왜병이 뒤엉키자 많은 지사들은 세거지를 떠났다. 더러는 압록 두만을 넘었고, 더러는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은거했다. 안아락 선생의 할아버지도 경기 쌍부의 소울음산(솔재)으로 옮겨와 진인眞人을 기다렸다. 글방을 열어 아희들을 가르치고 손수 심은 약재로 백성들의 병을 다스렸다. 침과 뜸이요 끝에는 굿으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버지가 가업을 이었으나 이미 보통학교가 생겨 전 같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세상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마음의 고향 내포를 자주 찾으셨다. 고심 끝에 스물이 다 된 아들을 학교에 보낸다.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가정까지 가진 아들이지만 서양을 이해하지 않고는 앞날을 내다보기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아들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양 문물이 자리 잡은 인천·서울·평양을 돌아본다. 평양은 인천·서울과는 딴판이었다. 온통 민족주의요 무정부주의였다.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도 무정부에 동조한다니 내용이 궁금했다. 조선이나 중국이나 백성을 위한다면서 실제 한 일은 무엇인가. 요순시대요 백성을 인의로 다스려야 한다면서 수천 년간 왕과 신하는 무엇을 했는가. 자기들을 위해서 권력을 하늘 같이 섬겨왔을 뿐 외적이 넘볼 때까지도 영화를 누리기 급급했다. 태평천국이요 의화단이요 조선에서의 동학란이 그 반발 아닌가. 이제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지식인들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백성을 뜯어먹는 정부를 다시 세울 것인가. 다들 백성을 하늘 같이 아는 나라를 떠올렸을 것이다. 지난날 너나없이 관문의 틈만 엿보며 정작 백성의 고통을 외면했으니, 과거를 준비하는 열의와 정성으로 백성을 위한 일거리를 찾았다면 벌써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조선에서처럼 농사가 유일한 생업이었던 시대였으니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할만 했지만 정작 고관들은 이를 천시했으니, 다 농민이 되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 농민을 괴롭히지는 말았어야 했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첩경이었는데도 앞 다투어 권력자의 부귀영화를 뒷받침하기 바빴으니 백성의 시름은 잘 날이 없었다. 그럴수록 너나없이 권문에 들거나 그 언저리에서 백성으로서의 아픔을 벗어던지기를 염원했다. 그만 못한 향사라도 조금이나마 탐학을 막을 길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지사志士는 매우 드물었다. 화제和劑를 내주고 병을 고치기는 했지만 백성들의 탄원歎願을 도와주고 또 연소連訴에 앞장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지방 유생들이 때때로 상소를 올린다 해도 그 속내는 뻔한 것들이었다. 동학란 직전에 올린 만인소만 해도 김홍집이 올린 ‘조선책략’을 비난하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개화를 반대만 했지 그 대안은 없었다. 50년 전 아편전쟁, 3년 전 청일전쟁으로 대국이 망해 가는데 재야 선비의 안목은 고작 그랬다. 개화는 노복을 풀어주고 상투를 자르고 과거제를 없앴지만, 일부 선비들은 여전히 소중화小中華를 꿈꾸며 의병에 가담했다. 정분들 갈피를 잡을 수 있었겠는가. 

다 자업자득이었다. 청나라 사신조차 지기들의 용기龍旗를 닮은 국기를 제안하며 개화를 권했을 때 고종은 실력자 이홍장에게 그 허락을 받고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태극기였다. 누가 이런 속국에 안주해 왔는가. 개화 반대파는 다시 친로파가 되어 왕을 아관에 피신시킨다. 고종은 김홍집을 죽이라 명하고, 그 주검을 창 너머로 내다본다.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니 무슨 제국이란 말인가. 8년 후 보호조약, 2년 후 군대 해산, 다시 3년 후 합방이었다. 

안아락이 오랜 장고 끝에 다시금 무정부주의를 곱씹으니 바로 천상天常이 뚫리는 듯했다. 평양은 온통 민족주의였다. 들리느니 독립운동이요 임정 소식이었다. 만보산 사건이 터져 화교상점은 쑥밭이 되었다. 일본의 이간질은 무서웠다. 내전에 빠진 중국이라 독립군은 어디를 짚어도 허정이었다. 항일운동은 승산보다 명분이라지만 백성에게 희망은 주어야 한다. 그 독립군이 절망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은 무정부주의였다. 백성을 보듬는 어머니 정부였다.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조선족은 하느님께 소원을 빌었다고 하셨다. 왕과 귀족들은 천제 상제 천신이니 또 옥황대제 옥황상제니 하며 왕이나 황제의 더 윗분에게 제사를 지냈지만, 백성들이 줄창 매달리는 하느님은 한문 표기도 없이 무시당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백성들의 소망을 가납하는 하느님을 천상天常으로 해야 옳을 것이었고, 서학을 흉내 내서 천주라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하셨다. 하늘의 주인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였다. 

오직 하나시며 언제부터 늘 계신 분 아니신가.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서삼경 외로 천상을 가르쳤다. 여기서부터 천문지리의 좌표를 다시 잡아야 한다시며 역학과 명리학을 비교하시길 여러 해. 하늘 천상님께 올리는 제사와 제문을 유신하셨다. 제는 소제와 대제였다. 소제는 징 하나로 열고 하늘에 닿을 만한 함성으로 축을 마감토록 했다. 푸닥거리와 굿은 제로 통합되고 대신 한을 푸는 절절한 소리를 제단에 곁 드리셨다, 

제 다음은 소疏였다. 소두는 때때로 목숨까지 각오해야 했지만 왕이 가납한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소는 천상에 올려야 한다. 지성 감천이란 바로 소제小祭요 대제大祭다. 예부터 시 3백이 거의 다 소라 했지만, 왜 그 성현들의 발분發憤이 시객들의 자미刺美를 돋우었을 뿐 3천 년간 공허하게 공전하고 말았는가를 따져야 한다. 또한 서경書經의 시일갈상時日害傷이나 시경의 불소찬혜不素餐兮도 폭군을 질타하고 있지만 왜 조신들은 끄떡도 안하는가.

나라란 권權이요, 권은 원래 형평을 잡아주는 저울대 아닌가. 백성과 고통을 함께 하고(仁) 백성들이 서로 사랑(禮)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군자가 먹는 녹은 소찬(공밥)이 된다. 그래도 모든 군자가 녹을 먹으려 걸걸한다. 권에 귀신이 붙어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귀신이 아니면 어찌 벼슬이 돈이 되겠는가. 그래서 권력을 외면한 지사들이 제를 올려야한다지 않는가. 스스로 약초를 길러 민생을 보듬고 각종 제문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내야 한다.

안아락은 아예 호를 안아락安亞樂으로 삼는다. 안아락은 무정부의 아나르키를 음차한 것이지만 아락亞樂, 즉 동락에 만족하자는 뜻도 된다. 권귀를 몰아낼 부적을 찾은 듯 기뻤다. 갑자기 고향의 솔재가 떠올랐다. 안아락은 격양가를 부르는 백성을 꿈꾸며 귀향을 서둘렀다. 특히 무정부주의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억압적 권력을 백성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기막힌 타산打算 아닌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게서 이 작업을 끝내야 한다. 

책을 짊어지고 고향에 돌아온다. 귀향길에 틈틈이 천황제를 부정하는 일본인 고도꾸(幸德)와 오오스기(大杉)의 글을 읽는다. 특히 슈노(狩野)를 통해 알려진 안도(安藤)의 불경탐식不耕貪食 성인강도론聖人强盜論은 너무도 통쾌했다. 막부 최성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토해낸 소문疏文이었다. 아버지는 충현서원에 권귀를 몰아내자는 동학同學들이 많았음을 상기시키신다. 그 연줄에 신채호, 유자명, 김좌진, 안재홍과 이을규·정규 형제가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삼한갑족으로서 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형제들이 어느새 무정부 사상에 중심에 서서 그 운동을 이끌고 있음에 매우 놀라시는 듯했다. 다만 사람을 상하고 시설을 파괴하는 짓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하셨다. 첫째도 둘째도 많은 사람이 일심으로 고사를 지내는 일이었고, 고사문으로 하느님을 감복시킴만 못하다는 생각이셨다. 아버지는 짐작되는 바가 많으셨지만 내내 침묵하시다가 이제야 깊은 뜻을 말씀하시는 듯했다. 

이회영은 오래 전부터 무정부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今是昨是). 정부가 아니라 생산 단체의 자유연합이면 충분하다는 깨우침이었다. 권력(정부)이 있으면 아무리 군자라도 행도行道보다 양명揚名에 급급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효경孝經에서도 입신행도로 이름을 날림이 효라 했는데, 행도는 쓱 빠지고 입신양명이 돼버린 것이다. 이회영은 실권 없는 임정에서조차 지역별 인맥별 자리다툼이 심한데 크게 실망하고 더욱 무정부 결속에 진력했다.

무정부란 바로 왕도정치요 지덕요도至德要道로 대동大同을 이루자는 것 아닌가. 조선에서도 멀리 8조금법 시대가 있었고 가까이는 서화담의 주기론이 그 꿈 아니었나. 군자가 리理로 백성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생산자인 백성(氣)이 서로 잘 사는 길을 알기 때문에 군자는 백성의 지혜가 한껏 발휘되도록 그 길(理)을 터주면 된다고 했다. 성리학이 이기론으로 세월을 허송하자 왕양명이 다시 대동사회(異業同道)를 외친 것도 바로 그게 무권국가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무권국가의 실천을 위해 다시 권도를 찾으니 그 그림은 지워지고 말았다. 일제하에서도 뜻있는 수재들조차 한결같이 고관되기를 바란 것은 다 권귀에 홀려 그 영화만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상사회를 꿈꾸며 만주로 건너간 선열들도 그 권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었다. 권귀는 얼마나 무서운지 세계를 다 집어 삼키고 있다. 지금 조선에 고통을 안겨주는 제국주의도 바로 그 권귀에 다름 아니다. 권귀와 싸우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왜 하필 이 좁은 조선이 앞장서야 하는가. 하지만 조선같이 오랫동안(약 7천 년간) 농사를 지은 나라는 없다는 게 그 답이다. 중국은 2천 년간 양자강 늪지대에서 채취를 일삼았기에 농사는 성하지 않았다. 황하 유역을 따라 농업 그것도 맨 처음으로 벼농사를 일으킨 조선은 중국에 밀려 반도까지 물러났지만, 평화적 농경문화를 이어갔기에 심정적으로 권력이 요구하는 세역 병역 노역에 동조할 수 없었다. 농사는 하늘과 땅이지 정치는 보탬이 되지 않았다. 

격양가란 이런 농민의 바람이다. 중국은 처음부터 백성을 지배하는 왕국이었지만, 조선은 나라도 나래(백성을 품는)였으며 임금도 도움이(쟁기잡이 君)였다. 조선이 침략에 맞서려고 왕국을 세운 것은 고작 2천년의 역사다. 그래도 백성은 약탈로 알고 세금을 안내려 했고 부역도 날짜만 채우려 했다. 관군보다 가족과 농토를 지키는 민군에 더 많이 가담했다. 대규모 토목건축이 불가능했고 불탄 경복궁도 3백 년간이나 복원할 수 없었다.

중국은 또 그 많은 고천제에서 왕권의 번영을 빌었지만 옛날 조선 백성들의 영고와 무천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축제였다. 또한 권력은 한가위에 길쌈대회를 열었지만 백성들은 망월제로 감사와 소망을 빌었다. 국가가 종묘사직을 위해 단을 쌓고 묘당을 치장하지만 조선 백성들의 가슴 속에는 늘 하느님(天常)이 계셨다. 이제 제문을 가다듬어 7천년의 정성을 모으면 하느님이 어이 감동하지 않으시겠는가. 안아락은 매진의 결의를 다진다. 

할아버지의 솔재는 소가 송아지를 부르듯(牛鳴聲狼藉) 나라가 백성을 보살필 도를 닦는 도량이었지만, 안아락은 그 높은 길마턱에 다시 난익卵翼당을 짓는다. 나라가 알을 품듯 백성을 키우도록 간절히 기원하는 제단이다. 천지 운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산만을 향해 무권無權국가의 전형인 중국의 요순시대, 조선의 단기檀箕시대의 재래齎來를 열망하면 하늘이 어찌 무심하겠는가. 안아락의 머릿속으로는 벌써 고천제문을 향한 간절한 신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온 백성이 한 소리로 제를 올리는데 하느님이 굽어보시지 않겠는가. 한 줌도 안 되는 친일파들의 영화는 물거품이 되어 떠내려간다. 일본이 무어라 해도 우리는 우리말을 지켰고 부모님을 공경했다. 조상님께 제를 올리고 이웃의 어려움을 위로했다. 가족들의 순혈을 지켰고 싸우기보다 양보를 미덕으로 삼았다. 조선의 조선다움을 잃지 않는다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승리했다 해도 조선은 조선으로 남을 것이었다.

일제는 물러갔지만 다시 외세가 맞붙으니 안아락은 앞이 캄캄했다. 친미 친소 권귀들이 창궐하여 조선다움이 흔들리고 있다. 수재들은 권귀에 휘말려 모두 한 자리하기 바쁘다. 거기다가 물신物神까지 엉겨 붙으니 조선족의 진로는 암담해진다. 급기야 분단이다. 분단을 놔두고서는 조선은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단방색기원대동제를 지내야 했는데 제꾼들이 모두 미소 진영으로 몰려갔으니 허사가 되고만 것 아닌가. 

독립전선에 섰던 많은 인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6·25가 터졌다. 안아락은 쌍부에 칩거하며 난리를 넘겼다. 아버지는 여전히 노구를 이끌고 아산만을 맴도신다. 외귀를 몰아내고 조선을 회복하랴 물신을 내쫓고 강토를 보전하랴 노심초사하신다. 귀신을 내쫓아야 한다. 하느님의 심부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단 제문 제각 등을 더욱 장려하게 다듬어야 한다. 아들 안아락은 강론 제사를 구상한다. 조용한 숫자가 많아야 한다. 시끄러우면 또 살귀가 날뛴다. 

향리에 안거하며 수시로 천제天祭를 열어 백성들이 조령祖靈을 굳게 믿고 새 귀신에 들지 않도록 금줄을 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간절한 유훈을 떠올릴수록 안아락은 더 어깨가 무거워진다. 의로운 사람들이 그렇게 수천 년을 대망해온 세상. 하 많은 인재들이 한숨짓고 아쉬워하며 끝내는 역적으로 민란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백성의 고통은 좀처럼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여전한 권귀였다. 관비官匪였다. 이들 귀신이기에 악착이요 더 끈질겼다. 

결국 권귀를 내쫓는 일이 무정부운동의 심장 아닌가. 지사들이 이 일을 주선하고 앞장서면 하늘(님)도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섬을 칭찬하시고 기꺼이 맞아해 주실 것이 분명하다. 하나 모두 관계 진출을 모색하며 무슨 작당질로 무정부를 실천하려 한다면 이 또한 다른 권귀의 책동이었다. 과거나 관도의 유혹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삶과 밀착하여 고락을 함께한 선학들의 삶은 퍽 고달팠지만 오늘의 무정부 운동의 산 증인들 아니겠는가. 

하나 사특을 주저하지 않는 입신양명이 아직도 가문을 빛낸 선조로 숭앙되고, 출새 떼들이 산천을 뒤덮은 그들의 송덕비를 징검징검 날아다니며 관문을 기웃거리는 풍경을 놔두고, 또 이들을 이 지경으로 홀리고 있는 권귀들을 잡도리하지 않고 어찌 무권정부를 세울 수 있겠는가. 또 그래야 비로소 민생의 안락이 있을 것이어늘 생각하니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폭력을 구상하는 것은 또 달리 귀신을 부르는 짓일 뿐 아닌가.

그래서 아무리 대의를 내세워도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靖多) 게 우선이지 세를 모으면(動多) 곧 난으로 발전한다. 귀신이 부추겨서다. 호왈 개벽이라니 더 동세動勢였다. 수운도 처음 민란이 두려워 남원 땅 은적암에 피신하면서 수도에 전념하도록 신칙했으나 허사였다. 고달픈 백성들이 운집하여 이미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두 귀신놀음이었다. 우금치에서 최후를 맞은 10만 동학군의 몰사로 계곡은 모두 송장배미가 되었으니 다 살귀가 부른 피보라였다. 

조·일군은 겨우내 방방곡곡을 돌며 잔당 색출과 부역자 처단에 신바람을 냈으니 또 다른 귀신이었다. 그래서 귀신 쫓는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무정부는 천제天帝요 고문告文이요 읍소泣訴였다. 예부터 귀신(天)을 받드는(亨之) 게 덕치의 근본(敎之至)이라했지만, 실제로 권력(王)의 만세융창을 위한 장치로만 가동되었을 뿐 그들에게 진정한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외면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어찌 무권정부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락은 마음이 침통할 때면 늘 사당 앞에 엎드린다. 창 너머로 솔재가 보인다. 내려다보면 원(뚝)을 막아 생긴 쉬(개간)논에 약초가 무성하다. 조용히 향을 사르고 축을 읽었다. 귀신을 쫓아주소서. 안아락은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모든 귀신 특히 권귀를 몰아내기 위한 제단법과 제문 축문 그리고 소문을 바로잡아 나아갔다. 전기가 들어와 신식이라 하지만 선현들의 오랜 정신적 체험을 잊고 딴 길을 찾는 것도 귀신 때문이다.




조선족의 기록은 모두 음양복서(卜筮)요 제축문이였다. 조선족이 제일 먼저 벼농사를 지었다. 나라 이름도 부여(벼)라 했다. 농사는 하느님이셨다. 하느님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기에. 중국도 말로는 하느님이라 했다. 우주적 순환기운이요 그 행함(天行)이 귀신이라면서 하느님을 받드는 것(合鬼與神而亨之)이 교화의 으뜸(敎之至)이라 했다. 그러나 제사는 늘 권력(王)의 만세융창을 위한 장치로만 가동되었을 뿐 애민성군이 돼야 한다고 하면 죽임을 당했다. 

조선도 점점 중국을 빼닮아 지사들의 탄압이 일상화 돼갔다. 이조만 해도 건국 100년에 인현을 내세운 조광조가 서른일곱에 사사된다. 그를 지극히 아끼던 중종은 그가 읽던 ‘소학’小學에 치를 떨었고, 소학은 100년간이나 금서가 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받드는 제사는 어진 백성들 농꾼들 손에서 겨우 맥을 이어갔다. 하늘에 순종하는 길이 풍년이기에. 그런 백성들의 염원이 하늘에 사무치게 하려면 제주 제단 제문에 공을 들여야 한다. 지성감천 아닌가. 

그래서 역술 대가 원천강이나 서자평도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 천문지리는 어디까지나 국태민안이지 권력을 옹호하는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백성의 부담을 덜고 억울함을 줄이는 정권正權을 세우는데 전용돼야 한다. 하나 사람이 어질러 놓은 것을 쉽게 치어주실 하느님이 아니시지 않는가. 관도에 들겠다는 잡념이 끼어들면 부정을 탄다. 선생은 더더욱 하느님을 받들기 위해 감농監農에 머물렀던 논밭 일에 뛰어들어 백성의 고통을 가까이 체험한다. 

주체할 수 없는 땀과 끊어질 듯한 허리, 벼 포기에 팔뚝이 베어나가고 손목엔 자가품이다. 거머리가 줄줄이 피를 빨고 까라기로 등덜미는 자꾸 깔끄럽다. 가뭄 장마에 물 고생은 또 얼마인고. 일을 끝낸 선생은 다시 난익당에 오른다. 아산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꿈꾸게 한다. 멀리 입파섬 도리섬 위로 섬놀이(신기루)가 한참이다. 큰 기와집이다. 제단 아니겠는가. 물동이를 이고 아낙네들이 분주하다. 제수 준비다. 그 뒤로 희미하게 갓을 쓴 어르신네가 울렁거린다. 

이윽고 물안개가 걷히면서 바닷물은 지는 해로 수 없는 금빛을 조각내며 나문재를 자주 빛으로 물들인다. 선생은 슬그머니 아버지가 여러 번 손질해 둔 고告문을 읊조린다. 일본을 내쫓은 기원문이었다. 3백 년 전에도 온 땅을 들쑤셨던 왜가 최고사령관의 급사로 도주했다. 제국 일본에게는 원자탄이었다. 또 달리 더 큰 제국이라 해서 조선을 만만히 넘볼 수 있겠는가. 그 부귀영화는 끝내 애국 세력의 절절한 소원으로 작살당할 것이었다. 

요즘 밤하늘을 바라보면 늘 높이 떠 있던 태극 위로 무언가 새로운 광망이 서린다. 순간 광망은 바퀴가 되어 점점 환한 빛을 내뿜는다. 그 빛 속으로 태극이 숨는다. 그러지 않아도 태극이 양의兩儀를 품기 전에 그 원圓을 뱉어낸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러면 양의로 풀지 못한 천수天數를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천 년 동안 많이도 천천天天했지만 천은 성性이었지 쉽게 능能은 아니지 않았는가. 그래서 고천제 밖에 길은 없는 게 아닌가. 

또 어려서부터 사람이 할 도리를 챙기는 수신지침은 얼마나 창궐해 왔는가.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격몽요결 계몽편, 또 중국의 소학, 대학, 사서삼경은 어떻고 주자의 동몽수지가 아니더라도 사마광의 통감 294권은 모두 요순시대(무정부)를 그리며 부침한 인물들의 이력서 아니던가. 성인군자라도 귀신에 홀리면 다 가렴주구요 권력의 주구가 됨을 어쩌랴. 그러니 모두 권귀를 쫓는 일에 열심이면 하늘인들 어찌 굽어보시지 않겠는가. 일어설 지어다, 백성이여.


[권귀들이 기승을 부리니 하느님은 더 바빠지셔 자주 제자들에게 전화를 돌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