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한가? [용서의 심리학]
업보의 수레바퀴를 벗어나기 위하여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고통의 근원이라는,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탐(貪)·진(瞋)·치(癡)—탐욕·성냄·어리석음—삼독(三毒)으로부터 벗어나 자비와 용서를 통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생각해본다. 좋은 말씀 늘 마음에 담고 살고자 하나 그마저 제 뜻대로 잘 되지 않아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흔들리며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방송을 하는 정목 스님이 언젠가 내게 이런 메일을 보내주었다.
“중생심으로 반복되는 이 무지의 행진은 언제나 끝날는지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존재계의 의식은 피어나는 꽃처럼 활짝 개화할 것입니다. 사바세계의 모든 원한은 오직 자비로서만 해결할 수 있다 하신 부처님 말씀이 더욱 깊이 가슴에 와 닿는 날들입니다. 용서하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과거의 기억과 고통에서 일어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며 과거의 미움과 원망으로부터 결연히 걸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상처일지라도, 그리고 어떤 끔찍한 기억일지라도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우리는 매순간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해야 합니다. 용서는 종교의 전유물이거나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녀야 할 제2의 천성이자 덕목입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과거에 묶여 있는 습관 때문이고 과거의 습관은 우리의 삶을 제약하고 방해합니다.”
얼마 전 입적하신 법정스님은 어느 해 봄 정기법회에서 이렇게 설법하셨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종점에서는 용서 못 할 일은 없습니다. 한 세상 업의 놀음에서 풀려나야 됩니다. 용서는 내 입장이 아니라 저쪽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거쳐 저쪽 상처가 치유될 뿐 아니라, 굳게 닫힌 이쪽 마음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일단 마음의 문이 열리고 나면, 그 문으로는 무엇이든 다 드나들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부려 놓고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얽히고설킨 업(業)의 관문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풀리지 않은 매듭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면 생의 수레바퀴에서 그 업보(業報)를 끌어안고 다시 고통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범부들이 너무나 많은 탓인지 고통의 수레바퀴는 이전 세대로부터 지금 세대, 또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대물림 되어 집단과 개인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멈출 줄 모른다. 아니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야만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 같다.
사람과 사회의 불건강함은 각 구성요소들 간의 원활한 소통의 장애, 그리고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지구 위에서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순간 평화로웠던 적이 없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가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잠시 잠깐의 세월동안에라도 내 뜻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성내지 않고 지혜롭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는 없는 걸까.
미국의 긍정심리학자 William Compton은 ‘용서할 능력이 없으면 화 ․ 분노 ․ 상처가 사람들의 삶을 모두 소모해버릴 것이고, 영원히 증가하는 적개심과 복수심이 순환될 것’이라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투 대주교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존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용서가 필요합니다.”
남아공의 첫 흑인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투투 대주교를 ‘진실 화해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었다. 이 위원회는 인종 차별 정책으로 학대받은 사례를 파헤치고, 희생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명예를 되찾고 배상을 받도록 도왔다. 위원회는 그동안 진실을 말하고 행동에 옮겼던 양심수들 모두를 사면 받게 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위원회를 통해 아픔을 치료받고 위안을 받았으며, 희생자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 가해자들을 용서하기도 했었다. 우리도 그런 아픔의 역사가 있었고, 그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 상처들이 말끔히 아물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용서를 통한 치료적 접근과 방법론이 종교를 비롯한 여러 차원에서 제시되어왔다. ‘잘 살아가기(Well-being)’를 모색하기 위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긍정심리학’은 그중에서도 합리적인 대안들을 제시해주고 있어서 심리학을 전공한 ‘온전한 건강’ 테라피스트이자 연구자로서 눈길이 많이 간다.
진정한 용서 또는 용서 아닌 것
용서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는가.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인라이트(Robert Enright)와 동료들은 <용서에 대한 심리학(The psychology of interpersonal forgiveness)>에서 이렇게 연구결과를 밝히고 있다.
“용서는 부당하게 우리를 상처 입힌 사람을 향한 분노와 부정적 판단, 그리고 무시하는 행동을 할 권리를 버리려는 의지와 함께 동정과 아량, 심지어는 그 사람을 향한 사랑까지도 품는 것이다. 이 정의에는 정서적(분노 극복하기), 인지적(부정적 판단 바꾸기), 그리고 행동적(무관심 종식시키기)인 여러 측면들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용서에 대한 정의는, 상대방의 부당함의 정도에 상관없이, 그 일을 통해 얻은 상처와 분노, 공격성을 극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용서는 상대방이 나의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아는 것과 무관한, 나의 개인적인 행위이다.”
이들은 또한 무엇이 용서가 아닌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용서는, 정의롭지 못한 일을 단순히 참거나 잊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분노를 멈추기 위해 부인이나 억제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상처를 망각, 부인, 혹은 최소화하거나, 이미 일어난 사건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행해졌던 범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이를 초월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우리에게 행해진 잘못과,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 모두를 놓아주는 것이다.”
손에 아주 작고 얇은 가시라도 박혀 있으면 신경이 쓰여 마음은 물론 몸까지 불편해지고 습관과 성격까지도 바뀔 수도 있다. 위생적인 처치를 못하고 있으면 곪아 버려 생명의 위협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가시를 일단 뽑아야 한다. 상처 준 사람에 대한 분노를 품는 것은 가시를 끌어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음의 상처가 곪으면, 나무로 말하자면 옹이와 같이 마음 속 응어리가 된다. 분노로부터 비롯되는 복수심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손에 박힌 가시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
최근 심리학에서의 연구결과를 보면, 용서는 슬픔 ․ 불안 ․ 분노에 대한 열망을 줄여주고, 개인적인 안녕감을 회복시켜줄 뿐만 아니라, 용서에 대한 경험은 상처 받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 상처에서 회복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가해자에게 보복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란 원한을 말끔히 지우는 일이 아니다. 기억 끝에 달려있는 꼬리말만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 그 분노를 유발한 사건이나 사태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과거에 대한 나의 태도와 생각만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상처는 그대로일지라도,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내 삶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고통이 내 삶의 체험 속에 없다면, 삶의 굴레 속에서 또다시 그런 일과 맞닥뜨렸을 때 더 나은 선택의 지혜도, 기쁨과 행복의 순간의 아름다운 체험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삶에서 체험하는 고통의 순간마다, 삶의 고통을 체험하는 그 장(場)마다, 삶의 고통을 체험하게 해주는 그 ‘누군가’가, 더 나은 나의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감사해야 할 사건이고 대상인지 모를 일이다.
용서와 자비의 마음은 그런 긍정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열쇠임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바보의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신 것처럼, 바보처럼 내게 상처 준 사람과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고, 마음을 열어 용서함으로써 헛똑똑이들이 아니라 바보들의 ‘온전하게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