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튼의 평화론> / 토머스 머튼 지음 / 조효제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288쪽 / 9,000원
토머스 머튼은 20세기 가톨릭을 대표하는 영성가다. 개신교 복음주의는 헨리 나(우)웬을 사랑하지만, 나웬은 머튼을 자신의 멘토로 생각하고 일평생 따랐다. 나웬이 신비적 영성가인 동시에 정치적 실천가였던 것도 머튼의 삶을 따라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일생을 수도원 안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했음에도, 토머스 머튼은 주요한 정치적 이슈에 공개적으로 간여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암살로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실상 그에게 있어서 '신비적 경건'과 '정치적 참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가톨릭과 사회적 영성

사실 가톨릭 영성이라 하면 수도원에 틀어박혀 명상하는 것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중세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신비 체험보다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처럼(굶주린 이웃이 찾아오거든 환상을 보다가도 나가서 죽을 줘라) 가톨릭 영성은 피안적으로 경도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톨릭 영성의 유구한 전통은 철저하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이건 개신교와 유대교를 망라한 모든 참된 영성의 올바른 지향점이라고 봐야 옳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영성을 사변적이고, 신비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영성가들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복음주의 영성가들의 일반적 지향성은 가톨릭의 이런 사회적 영성과 다르다. 복음 전도(혹은 영성 훈련)와 사회참여를 새의 두 날개로 인식하며, 경우에 따라 후자를 우선하기도 한다. 하나 양자가 서로 다른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 메타포 자체가 문제적이다.

물론 가톨릭 안에서도 정치적 사제들은 이 둘을 나눈다. 그래야 외려 정치적 보호를 받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니까 그런 것이다. 당장 머튼이 복종해야 했던 대상인 돔 가브리엘 소르테스 신부부터가 그러하다. 실은 한국 가톨릭에서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진지하게 구도하는 영성적 수도자들은 대체로 내면적 관조(theoria)와 정치적 실천을 합치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만큼,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성의 올바른 방향이다. 토머스 머튼은 이런 면에서 20세기 영성가의 모범인 셈이다.

실은 신앙인이 가꿔가는 내면의 평안과 신앙인이 살아가는 사회의 샬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세상에 샬롬이 없다면, 그만큼 내면에도 통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은 정상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영성이 따로 있지 않다. 모든 영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냉전 시대의 평화주의자 머튼

머튼에 대해 피상적으로 접한다면, 그저 내면의 영성을 강조하는 신비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한 트라피스트회 안에서 오랜 시간 수도한 그이지만(가령 신문도 매일 읽을 수 없는 처지였다), 외려 그러하기에 더욱 간절하게 세상의 아픔에 마음을 썼다.

수도원에 갇혀 산다고 말해도 무방할 머튼이 왜 세상에 관심을 갖는지 이해한다면, <머튼의 평화론>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다. 그가 내놓은 수많은 저술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색채가 두드러진 텍스트이기 때문에 멋모르고 읽는다면 당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머튼의 평화론>의 원제는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이다. 그러니까 탈기독교 시대를 맞이한 유럽과 미국을 위한 메시지이다. 원서는 2004년 출간했지만, 원래 1962년 출간할 예정이었다. 당연히 어떤 부분에서는 낡은 책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지금은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예고 없이 전 지구적 핵 재앙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시대이므로 국제 문제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철폐하기 위한 우리의 의무를 게을리할 수 없게 되었다."(38쪽)

<머튼의 평화론>은 냉전 시대에 쓰인 글이다. 그렇기에 핵무기에 대한 당시의 두려움이 책의 갈피마다 짙게 배어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2차 대전으로 인해 아우슈비츠 이후를 묻게 되었듯이 그 당시(1960년대)에는 냉전 체제로 인해 핵 이후를 진지하게 묻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냉전의 맥락 속에서 정당 전쟁론이 교회의 주된 입장으로 수용되던 때였다. 냉전은 결코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전쟁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공산국가들이 상시적인 주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주의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른바 일부 '평화 교단' ­― 퀘이커 교도, 메노파 교도 등 ­― 에서는 핵무기를 일체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핵전쟁을 전통적인 '정당한 전쟁'(正戰) 이론의 틀 속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을 많이 취해 왔다."(36쪽)

우리 시대를 위한 <머튼의 평화론>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그러나 평화의 모드로 전화된 것이 아니라, 또다시 전투의 양태만 바뀐 것이다. 국지전이 늘어나고, 핵무기 대신 전통 무기와 생화학 무기가 사용되고 있다. 더불어 주적이 공산주의에서 이슬람교로 바뀌었을 뿐이다. 세상은 여전히 싸우는 중이다.

한국의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지금 상황도 앞서 언급한 서구의 냉전 상황과 비슷하다. 지금 남한과 북한이 처한 상황은 결코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다. 사실상 전쟁 중인 것이다. 그 이유가 뭐가 됐건 북한의 지속적인 위협은 우리의 상황을 깨우쳐 준다.

이렇게 전투의 방식과 무기와 대상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머튼의 평화론>은 여전히 유효한 책이다. 책의 서문에서 짐 포리스트는 2장("우리는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가")의 (두 번 나오는) 단어 하나를 바꿔서 아래의 문장을 인용한다.

"전체주의와 관련해 우리 외부의 적인 [알 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의 파시즘적 경향 또는 집단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 전쟁과 관련해서도 호전적인 [알 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폭력과 공기와 탐욕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28쪽)

원래의 문장에서 등장하는 주적이 공산주의인데, 이를 지금의 주적으로 바꾸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내면의 공포와 이로 인한 외면의 대립이 지속되는 한 마음의 평안과 세상의 샬롬에 대한 토머스 머튼의 가르침이 여전히 절실한 것이다.

예언자적 평화주의

<머튼의 평화론>은 시대를 앞선 예언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에도 등사본으로 일부 독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제한되게나마 일정한 수준의 영향력을 주었다. 하나 결코 공개적으로 출판하지 말라는 장상의 제한 조처로 인해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머튼의 평화론>의 출판을 가로막은 돔 가브리엘 소르테스 신부야말로 냉전이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왜곡하고 잠식하고 있는 충격적 현실"(145쪽)의 한 사례일 것이다. 그는 국가의 방어를 위해 핵무장을 할 권리를 지지했다. 냉전은 이렇게 종교인도 왜곡시킨다.

하나 이제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 무엇보다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기독교계 상황이 변화되었다. 평화주의에 대한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더불어 세상 또한 그의 올바른 주장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다. 평화의 가치를 세상 또한 인식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토머스 머튼이 평화에 대해 설파하는 가르침을 읽노라면, 바로 우리 시대에 직접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더욱이 그의 평화주의는 그저 더 나은 도덕률 정도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참된 영적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흔들어 놓는다.

또한 토머스 머튼은 4장("그리스도인은 평화를 가꾸는 사람들")에서 (평화주의의 적극적인 표현인) 원수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것은 메시아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의 표현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인간 삶에 대한 증거였다."(75쪽)

세상의 빛과 소금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가 평화를 추구한다면, 세상이 전복될 것이다. 하나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문제는 그 소문의 진원지가 종종 교회라는 것에 있다. 평화는커녕 외려 다툼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한답시고 서울광장에서 개최 중인 퀴어 문화 축제 앞에서 부채춤을 추는 것이 과연 교회의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우상숭배를 타파한답시고 모 사찰의 대웅전에 들어가서 파이프로 불상을 때려 부수는 것이 도대체 기독교인의 원수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이처럼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보다는 "도덕적 수동성과 악마적 능동성"(12장)을 발견하게 된다. 도덕적 수동성으로 특징되는 나름 선량한 공동체도 문제지만, 지금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악마적 능동성으로 나아가는 사악한 조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교회가 증오로 일그러진 개독교가 아니라, 평화를 구현하는 대조 사회라면, 세상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촛불이 되어 세상에 빛을 밝혀야 하고, 소금(방부제)이 되어 세상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교회라는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이원석 / 작가, 문화연구자, <뉴스앤조이> 편집위원. 한국 교회와 사회의 본질이 교양의 부재에 있다고 보기에 교양 사회의 구축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집필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거대한 사기극>·<공부란 무엇인가>·<인문학 페티시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