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

제대로 사는 방법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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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사는 방법
등록 :2022-11-15

성서강좌에서 영적 스승 이현주 목사님은 “잘 주무셨습니까. 안 죽고 살아 있네요.”라고 웃으시며 운을 띄우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를 몰랐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대로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을 모르니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지 고생할 필요가 없는데 무진장 고생하며 삽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머리로만 아니라 말씀과 실제 삶으로 하느님의 뜻, ‘제대로 사는 방식’을 보여주셨습니다.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배우고자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못됩니다. 선생이 아닙니다. 그저 배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 많이 알려 주곤 했습니다. 한 달 전 경험했습니다.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깨달았습니다. “네가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정신 차려라.” 감당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의도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4장 43~54절을 직접 읽으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기적을 이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잘 안다고 하면서 제대로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명절 쇠러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예수를 만났습니다. 깜짝 놀라며 생각이 바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는 간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려고 하자, 예수님은 “당신 아들은 살 거요.”라고 말하며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살 거야’라는 가장 단순한 말을 믿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왔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서, 어떻게 올까요. 사람은 어떤 것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좌우합니다. 마음이 없이는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만으로 믿어집니까. 믿음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이 믿음을 주어야 사람은 믿게 됩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안에 있는 누군가가 열어 주어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거나 믿으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믿음과는 별개입니다. 그분이 주셔야 합니다. 간절히 원하며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면 건강을 주라고 기도하십시오.
아들이 살아난다는 믿음이 생겨 집으로 가는 도중에 종을 만나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적의 시간을 물었습니다. 어제 1시,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 시간이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가나의 기적 후에 일어난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입니다.
관옥 이현주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천사랑어린학교 모임. 순천사랑어린학교 제공
관옥 이현주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천사랑어린학교 모임. 순천사랑어린학교 제공
우리는 간절히 소원을 말합니다. 그럼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저하지 않고 물으면 즉각 나오는 게 소망입니다. 무엇을 생각한다면 그건 간절한 소원이 아닙니다. 이미 머리에서 조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뚝 건드리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이런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만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간절함이 있어 기도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요한복음 5장 1~18절을 읽었다.) 18년 된 병자는 병이 낫고 싶은 소망보다는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먼저 못에 들어가 병을 낫고 싶은데 다른 이들이 앞섰습니다. 아무도 그를 못으로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낫기를 바라는 소망보다는 사람에 대한 분개가 가득했습니다.
환등기를 비추는 화면에 점이 하나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고 계속 머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렌즈에 티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화면을 닦을 것이 아니라 렌즈를 닦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가 아니라 내가 나를 힘들게 해서 항상 고통스럽습니다. 렌즈를 닦음이 나의 눈을 닦는 것입니다. 내 눈이 맑아지면 하느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하느님이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지병을 갖고 살았습니다. 간질로 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고백처럼 병이 짐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교만하지 말라고 병을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병은 병이 아니고 은혜였고, 병이 은총이었습니다.
세상의 논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세상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군대에서 많이 쓰는 용어 아시죠. ‘선착순’. 베짜따 연못에 일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치료됩니다. 선착순의 논리입니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강연을 시청했습니다. 아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초지일관 1등 해야 산다는 논리였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논리였습니다. 은메달 10개 필요 없습니다. 금메달 하나가 더 낫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누가 먼저냐고 경쟁합니다.
하느님의 논리는 다릅니다. 꼴찌와 첫째를 똑같이 여기십니다. 베짜따 연못은 오늘날 우리 세상의 논리입니다. 어린 시절 경쟁의 세상을 맛보았습니다. 계속 1등을 강조하는 불공평한 세상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시오.”라고 말씀하시며 베짜따의 논리를 부정했습니다. 네 발로 걸어가라고 하시면서 다른 이와 겨루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하늘의 논리는 세상의 논리와 다릅니다.
독일 유학생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양팔이 없어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이 손이었습니다. 전신이 마비되어 얼굴만 살아 있었습니다. 이 절망 속에 예수를 만나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살아 있는 얼굴로 말하고 얘기하며 이웃과 행복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골목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무개야’ 하며 인사했습니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소문이 돌았습니다. 아침 일찍 공장에 가는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나면서 인사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런 처지에서도 행복을 나눈다고 감탄했습니다. 그 여자가 죽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공장이 하루 문을 닫았습니다. 그 여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픽사베이
픽사베이
“일어나 걸어가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인데 걸어가냐고 대꾸합니다. 하나에 집착하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공을 이루고서는 슬그머니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걸어가라고 말하며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예수가 영원히 사는 이유입니다.
수레를 생각해 봅시다. 수레가 달리는데 바퀴가 안 굴러가겠습니까. 간디는 ‘우리는 하느님의 기계 부속품’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일을 멈추지 않으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기차가 달리는데 바퀴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복숭아를 들어봅니다. 손이 일합니까, 내가 들어 올립니까. 손으로 집었으나 손이 한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몸으로 일하십니다. 그렇다고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것입니다. 숨조차도 내가 쉬지 않고 당신이 쉬게 해야 우리가 호흡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믿었습니다. 만군의 주 아버지는 어머니가 포함된 말입니다. 부모가 없으면 내가 여기에 없듯이 우리의 숨 자체도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머리만 가지고 끄떡끄떡할 것이 아니라 몸의 온 세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 아버지는 바로, 너와 나의 아버지입니다. 이유인즉슨 우리가 모두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안동의 어느 교회에서 세례식을 앞두고 목사님이 면접을 했습니다. 목사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할머니는 ‘오빠’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동생이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하며 어쩌고저쩌고하기를 바랐는데, 목사는 ‘오빠’라는 답을 엉뚱한 답으로 여겨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지 못한다는 말에 할머니는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했고 나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니 당연히 예수님은 나의 오빠라고 항변했습니다. 목사가 맞습니까, 할머니가 옳습니까…
진리는 물이고 교리는 그릇입니다. 교리는 시대와 역사마다 다릅니다. 교리는 필요하면서 고약합니다. 컵이 없으면 진리라는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성공회대학 강사로 나갈 때 교수로 있는 후배와 만났습니다. 후배는 시간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인사동에 차 마시러 가자고 합니다. 지하철을 타는데 교수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나는 유별나게 내 속도로 천천히 걸었습니다. 지하철에 탔던 교수는 타지 않는 나를 보고 급하게 뛰어내렸습니다. 어깨를 다칠 뻔해서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사람 앞에는 침묵이 제일입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장작을 넣어주지 않으면 20분도 안 되어 불꽃 같은 ‘화’가 사라집니다. 처음부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자고 인사동에 가는데 서두를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나의 템포로 걸었습니다. 사람은 경쟁할 때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지 못합니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사실을 가지고 잘했다, 못했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 모든 것을 더불어 할 수 없습니다. 네발로 일어나 걸어가라, 너의 가능성을 찾아라. 너의 값을 찾음이 정답입니다. 오늘 성서 여행은 이 정도로 마칩니다.
‘제대로 사는 방법.’ 머리만 끄떡 끄덕할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가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 깊숙이 절실히 새겨진다. 배우고 느껴도 알다가 사라짐이 우리의 삶의 대부분이다. 내 몸의 온 세포에 말씀이 스며들 때 조금이라도 당신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네덜란드 출신 가톨릭 사제인 헨리 나우웬은 하느님의 사랑을 ‘번지점프’로 비유했다. 우리가 번지점프를 처음 할 때는 엄청 두렵지만, 일단 믿고 놔버리면 엄청난 스릴이 오고, 그다음부터는 무섭지 않다. 번지점프를 할 때처럼 하느님에게 다 맡기는 것이 ‘제대로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두려움 때문에 뭘 못 할 이유가 없다. 하느님께 맡기면 되는 것이고 당신 처분에 따를 따름입니다.
위대한 영적 스승과 만날 수 있는 축복 주신 하느님과 성서 여정의 모든 분께 마음 깊숙이 경의를 보낸다. 살아온 날에 감사하고 살아갈 날은 더 은혜롭기를 기원하며!
글 최백용(순천 사랑어린학교 공동체원)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 교장인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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