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5

Philo Kalia ‘仁義’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고, 본성이란 하늘이 내린 명이라면(天命之謂性)

 Taechang Kim | Facebook

Philo Kalia is with 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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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원로 철학자이신 김태창(Taechang Kim) 선생님과 페북에서 뵙고 포스팅과 미학적인 글에 큰 사랑과 지지도 받고 더 넓은 생각의 지평을 얻을 수 있는 코멘트를 달아주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최근 포스팅에도 코멘트를 해주셨고 서너 번 대화가 오간 것을 기록해두고 싶어 차례로 모았다.


‘仁義’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고, 본성이란 하늘이 내린 명이라면(天命之謂性),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는 야훼 하나님의 의나 맹자를 통해 告한 하늘이 명한 인간의 본성(인의)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이리라.


Taechang Kim
相通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호이해는
중요하지만 서로의 고유가치를 동일의 사유로 묶어버리면 서로 다른 것의 아우러짐을 통한 새엶의 지평을 닫아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심광섭
Taechang Kim 相通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숙고해보니 통하는 점들이 있어 공감, 공명, 교류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상이한 것들이 상보함으로써 풍부해진다는 것이고, 고유 가치는 다른 개념(표현)으로 언표되는 한 훼손되거나 일방적으로 통일될 수 없음이지만, 여기서 내용이란 사람이라면 상황과 방도는 달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큰 이치(天理)에서 나온 情의 用이란 점에서 같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合理合情이고 順理順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Taechang Kim
Philo Kalia 그래도 기독교의 義와 유교의 義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기독교와 유교의 共存相尊을 의미있게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르다고 생각해 왔는데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은 동시에 거의 같다고 느껴진 것이 다 깊은 곳에서 다르고 그러면서도 함께 있음으로써 이제까지 몰랐던 새 지평열기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심광섭
Taechang Kim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중용의 '중용'은 정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義와 유교의 義사이에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는 깊은 곳에서 다른 존재론적 차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차이"라는 지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적인 혹은 생활세계적인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대의명분이 있는 어떤 절박한 문제의식이나 역사적 과제 앞에서 근본을 생각하면 동학의 가르침인 吾心卽汝心의 계기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계기(실존적 순간)는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다윗에게서(삼상 13:14)도 나타난 것이 아닐런지요. 그렇지만 인심은 늘 인욕이 되기 쉽고 위태하니 誠敬의 태도가 필수이듯이, 역사적, 제도적, 교리적, 전례적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존중심은 모든 종교에 상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근원 체험(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개신의 역사)에 근거하여 상고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aechang Kim
Philo Kalia 예. 대화가 되어서 기쁩니다. 선생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지나 저의 미흡한 생각입니다만, 역사적 상황적 접근은 가능하지만 다름아닌 존재론적 차이가 기독교와 유교사이에 엄존한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인간존재의 근원(본성)은 죄지은 존재(=근본악)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인정받아야 할('義認')존재론적 실상을 전제로 해서 구제론적 복음의 실존관련적 뜻매김 자리매김이 뚜렷해지지만, 정통유교의 인간본성론의 핵심은 본질적 선성(善性)에 전제로하기 때문에 초월적 타자에 의한 의롭다함을 필요로 하지 않고 거기서 義의 대의명분을 빙자한 独善-独断-独裁에 의한 전체주의적 지배구조의 정당화 근거가 되기도 했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내면에 깊이 잠재한 근본악에의 편향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없는 仁義만으로는 뿌리깊은 偽仁偽義의 창궐에 대 개신적 대응이 곤난하다는 것이 저 자신의 체감 체험 체듣한 바 입니다. 유교에서 배울만한 점이 많지만 인간 본성론만으로는 근본악의 문제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없었고 황제의 선의지와 사대부의 선인식이 부합되면 선한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낙관론이 황제의 흑심과 사대부들의 욕심때문에 왜곡되고 변질되는 역사와 상황을 뿌리 바탕으로부터 바꿀 수 있는 초월적 타력의 개입을 처음부터 차단해 놓은 데서 오는 한계요 모순이라 생각됩니다. 구태어 제도적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초월적 타자의 눈과 귀와 입이 있어서 인간의 오만과 자기의인(=스스로 의롭다함)이 근원적 악에로의 편향을 제어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행태를 목격해온 저로서는 유교적 인간본성론과 기독교적 인간본성론과 부분적으로 겹치고 상통하는 점이 적지 않게 있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선생님 생각으로 존중하고 배우려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대화은 계속하고 십습니다.

심광섭
Taechang Kim 선생님의 고견을 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의문이 생겨 대화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1)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유학(유교)의 차이가 존재론적 다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역사적 과정과 지리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되어 2~3천 년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것인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저는 후자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물론 신학자 존 캅은 <존재구조의 비교연구>라는 책에서 세계 종교의 차이를 존재구조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
(2)기독교의 인간 본성론이 원죄라는 근본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성악설과 가깝다는 것이 전통적 이론이고 중론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해에 기초한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완전폐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또한 유학의 인간본성론도 성리학에서 人心道心說로 세미하게 전개된 것도 있고, 논어의 처음 장들에서 외적인 巧言令色을 금하고 내적인 성찰(一日三省吾身)을 다각도로 강조하고 있으며, 敬과 誠, 愼獨 등의 사상은 偽仁偽義가 생길 위험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학의 인간본성론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사상이 감언행(感言行)의 일치를 통해 체감, 체득되어야 한다면 초월적 타자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타율적 인간 도덕을 벗어나 궁극적으로 자발적, 자율적, 주체적 인간의 도덕 형성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목적에 잘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평소 강조하시던 “脫在”신학과 어떤 연관성 있을까, 順연관성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정의’, 유학의 기초 사상인 ‘仁義’는 존재론적 차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생성과정에서 형성된 차이라고 생각하며, 역사적 차이라는 관점에 설 때 오늘날 지구적 소통과 사유가 일어나는 시공간에서 동서양 사상이 잘 만나 공명하고 지구적 난제들을 극복하고 인간성을 심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면서 동양사상을 이웃으로 벗삼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제 인격과 우리 문화 안에 동서양의 사상과 문명이 혼합되어 새로운 실재를 형성해가는 도중(途中)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
+Giovanni di Paolo ,Dante and Beatrice before the Light, 1450.
33 comments

Reply22 w
유용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대학 때 동양종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추구하고, 경전들을 열독한 사람으로 과연 '차이' 혹은 '특징'을 심도깊게 연구했었습니다. 완전한 결론에는 못 이르렀지만, 제 생각으로는 장로교를 위시한 개혁교회의 신앙원리에 '완전타락'과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 파괴'가 있어서 인간이 자의적으로 신을 알 수도 없고, 신의 계시를 수용할 수도 없으며, 거룩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리와 신조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감리교의 해석이나 수용이 다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감리교는 완전한 타락, 파괴에 동의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든지 동양사상과의 접촉점이 가능해 질 수 있지요.
Reply22 w
Philo Kalia
유용현 네, 논점을 콕 집어 주셨습니다. 원죄와 악에 기초한 전통적 기독교의 인간이해가 종교와 철학을 포함한 제학문에서 탐구 되는 인간이해와 잘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ply22 w
윤세형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논쟁을 보는 듯 합니다.
Reply22 w
Philo Kalia
윤세형 격조 높게 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Reply22 w

Taechang Kim
정말 함께 서로 절차탁마하는
대화과정이 열리는 것같아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제 90을
바로 앞에 든 삶자리에서 남들
이 어떻게 말했다가 아니라 저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익
히고 깨닫고 삶속에 녹여 뼈와
창자에 새겨온 생각을 말씀드
리는 것이며, 저는 가르치는데
는 더디고 배우는데는 서두르
는 常学人(学者나教師가아님)
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배우려
는 의도에서 현재까지의 체감
체험 체득의 일단을 말씀올림
을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 바
랍니다. 저는 할아버지에게서
중국고전을 배웠고 그기초위에
서 중국사상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미국과 유럽에서 서양
사상을 공부하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몇몇 다른 나라에서 서
양과 동양의 사상 철학 문화 종
교들사이의 대화가능성에 촛
점을 둔 철학대화를 30년 넘게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중국대륙을 10년동안 동서남북에 있는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아다니면서 자유롭고 활발한 대화를 전개
해서 많은 현장검증도 쌓았습니다. 서양에서의 체험
학습과 중국에서의 체험학습,
그리고 일본과 한국사이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에 있는
분들과 나누고 있는 대화를 통
해서 몸으로 느끼고 맘으로 가다듬고 얼로 삶에 살린다는
자세와 방법으로 쌓아 온 깨달
음의 현단계의 한쪼각에 불과
합니다. 서론이 길어 졌습니다.
1. 한마디로 유교라고 말할 때
공맹유교의 성선설과 순자-한비자등의 성악설이 대립해 있고 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
는 공맹유교를 유교의 대표성
을 유지해 왔고 심교수님이 거
론하신 유교관련 언급이 그 쪽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는 것
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기독교
쪽도 소위 정통기독교라 칭해져왔던 입장과 관점에다
촛점을 맞춘 논의를 전개하려
했습니다. 평소에 존재신학적
인 말씀이 많으셨기 때문에
그쪽에서 논의하자면 정통기독
교와 정통유교사이에는 인간존
재의 파악과 인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양쪽이 우리의 사
고발전에 좋은 시사를 던져주는 기본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로 피차
간의 역사적 상황적 변화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기독교와 유교의 양쪽에서 정통과 다른 새로운 생각이
생성 정리 정립됨에 따라 성선
과 성악의 두 기틀이 겹치고
포개져서 기독교도 유교도 비슷한 인수분해과정을 걲게
되어 상호간의 대화가능성의
폭이 넓어젔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역사적 상황적 변화에
따른 인식-실천의 파라다임이
상호접근했다는 것이지 본래
의 차이가 없어진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기독교는 그 뿌리
바탕이 인간개개인의 영혼구제
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계시
하는 복음인데 비해서 유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지향하
는 통치철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계구조가 다르고 인간존재
의 파악이 다르고 핵심주체가
다릅니다. 서양과 동야의 접근
만을 주안점으로 한다면 희랍
인문주의와 유교인본주의를
비교연구하는 쪽이 훨씬 공통
점을 많이,그리고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적 변화에 따른 상호접근성이라는 각도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살펴
본다는 것은 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
에 개활적인 언급으로 끝내거나 한두가지 사례로 해
결하기에는 신중한 심사숙고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입
니다. 서로 다르면서 함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일이 다 같다고 해서 끝내는 것보다
다이나믹한 사고력-상상력-
구상력을 기르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Reply22 w
Philo Kalia
Taechang Kim 선생님의 노숙한 사유와 너른 지평을 가늠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새기며 두고두고 제 공부의 과정에서 성찰하겠습니다.
Reply22 w
손미옥
Taechang Kim 선생님,멋지고부럽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학문의 경험과 체득을 쌓을 수있는 귀한 축복을 받으신 분^^
Reply22 w
Taechang Kim
손미옥 아닙니다. 너무 아둔해
서 남이 금방 깨닫는 것도 남
보다 몇배 힘들여야 깨닫게 되
기 때문에 노력하고 또 노력한
것뿐입니다. 공자께서 태어나
면서 아는 것이 으뜸이고 배워
서 아는 것이 중이며 힘들여 아
는 것은 하라고 하면서 힘들여
애를 써도 배우지도 알지도 못
하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한 듯
한 말씀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은 공자가 포기한 그 그
룹에 속한 스스로를 알아차려
서 남보다 더 힘들여 애썼습니
다. 그러니까 배울 수 있는 기
회를 찾아 다녔습니다. 아직도
남을 가르치기 보다는 제가 배
워야할 것이 많으니까. 심광섭
선생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
와 거기 계신 분들을 만나 배우
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지 노년의 값진 学-思-行을 함
께 갈고 닦을 수 있는 哲友들의
모임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Reply22 w
손미옥
Taechang Kim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단 말이 실감나네요^^
저는 공부해나가는 것이 실력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배움을 즐기심은 벌써 학문의 樂 으뜸이지 않으신가요?
두분 선생님의 깊은 학문의 세계와 겸허함에 늘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Reply22 w
Taechang Kim
손미옥 예.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Reply22 w
송명호
Taechang Kim 장자에 묻지도 않았는데 끼어든다는 불사이응이란 말이 있어서 용기를 냅니다.
저는 공맹 유교라는 용어가 틀렸다고 봅니다. 공자의 유교는 동서양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르며, 공자와 맹자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맹자와 순자의 유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겅조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생각합나다.
인성 논쟁도 맹자와 공자는 다르며, 인의도 공자와 맹자는 다릅니다 공자는 인을 올바른 것을 찾아가는 과정과 이를 실천하려고 살산성인 목숨을 바침이 두었는데 맹자는 측은지심이라는 천리나 먼 것에서 찾았습니다. 안중근이 아등박문을 죽이는 것은 인의입니다. 그런데 측은지심하면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도 사양지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의 예를 새소한 매너 수준을 파악악한 것입니다. 공자의 예는 천하를 바꾸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사양지심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는 김일성 좋아하는 좌익에게 아무 말도 않습니다. 예는 사양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Reply59 m


김영훈
아주 좋네요, 두 분의 생각의 차이가 충분히 논쟁거리가 되고 또한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네요.
두 분께 감사할 따름!
Reply22 w
Philo Kalia
김영훈 읽어 주시니 천망관중의 박수소리를 듣는듯 합니다. 🤣
Reply22 w
Troy Clapton Choi
교수님께 과외받고싶습니다 ㅎㅎ
Reply22 w
Philo Kalia
Troy Clapton Choi 영광입니다. ㅎㅎ
Reply22 w
손미옥
가장 본성은 죄없으신 순수? 하나님의 영을 받아 사람이 생령이 되었을 땐, 하나님께서 하나님만큼 존중하여 주신 자유의지가 존재했을 땐 아예 선악이 없는 에덴은 인간의 존재적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요?
인간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된 때부터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고 선악이 나뉘는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흔히 말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동인형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인간과의 참 대화와 소통하는 관계를 원하셨던 것이니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레벨만큼이나 우리를 존중해 주시고 높여주심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원죄 이전에는 성악설이 성립되지 않는단 생각을 해봅니다.
원죄 이후 인간은 전적인 타락으로 성악설에 해당하고 저는 태창선생님의 입장이 더 와닿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연이구요.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知)는 피조물인 인간의 인성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성선설의 仁은 인간이 잉태되었을 때는, 태고의 에덴동산의 원죄 이전 상태, 최초의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을 때의 선악 이전의 순수한 상태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인간에게 탯줄을 끊은 이후 배꼽이 남듯 그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말의 양심?으로 선의 흔적이 남아있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지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공자의 성선설보다 맹자의 성악설이 더 매력있게 다가오더이다.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라, 선을 추구하며 현실적으로 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세상에 악을 없애고 실질적인 선을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입니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일전에 중독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전문가들이 말하길, 중독자가 치료의 가망성이 보이는 때가 역설적이게도 본인의 힘으로 절대 고칠 수 없다는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본인은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고백할 때 구원의 가능성이 시작되듯이 말입니다.
깊고 높고 넓은 학문적 경지에서 나누시는 대화에 저는 학자로서가 아닌 구냥 상식을 가진 일반 성도로서 제 의견을 개진한 것이오니 그릇된 견해가 있으시면 바로잡아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Reply22 wEdited
Philo Kalia
손미옥 (1)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인간이 계속 악만 저지르고 산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절망하실까요? 성악설, 성선설을 논의하자는 게 아닙니다. 해답이 없는 난제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선한 본성을 믿을 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惡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믿음이지요 (2)유학은 인간의 원래의 성품에 인의예지의 본성이 있다고 봅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경악하면서 구출하려고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런 본성이 없는 것인가요? (3)맹자 성선설이고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맹자의 성선이든 순자의 성악이든 인간의 원래 선한 본성을 회복하자는 사상입니다. 성선을 강조하면 덕성을 강조하게 되고 성악을 강조하게 되면 외왕(外王)의 방향으로 나갑니다. 內聖外王 (4)중독은 심각한 질병입니다. 타자의 도움이 있어야 중독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벗어나서 주체로서 의존과 노예적 타율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치유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중독에서 벗어나서도 타자에 계속 의존해서 살아간다면 이것 또한 온전한 해결책이 아닐 것입니다. (5)기독교의 원죄나 전적 타락이 인간의 본성을 짓누르고 억압하며 어둠 속에 가둬두고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인간론이 아니길 바랍니다. 기독교의 인간론의 현재와 미래는 구원받고 해방된 인간으로서 기쁨과 감사의 삶, 정의와 평화를 지어나가는 인간상이 아닐까요?
Reply21 w
Taechang Kim
Philo Kalia 일본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을 인정 존중하면
서,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가장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될 수 있
는 화두로 도겐(道元1200-12
53 일본 曹洞宗의 개조)의 자력도와 신란(親鸞1173-1262 일본 浄土真宗의
개조)의 타력도를 둘러 싸고
오래고 신중한 논재이 이어지
고 있으며 전문가에 따라서는
정통유교는 도겐의 자력도에
가깝고 기독교는 신란의 타력도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참고가 될거라는 이야기를 합
니다. 한편 유교를 연구해온 사
람과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
은 주자학과 카토릭, 양명학과
개신교를 각각 연결시키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조직체
계와 계율과 행사에의 참여를
중시하는 카토릭은 다분히 주
자학적인 경향으로 이해하고
인간개개인의 근원적 선성과
그것의 발현(치양지)를 기본으
로 삼는 양명학의 특징으로 보고 개신교(특히 무교회주의
의 개신교)의 개인주체성을
강조하고 조직이라는 타자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개개
인의 주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설정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어데까지나 불교
또는 유교의 입장과 관점에서
기독교를 앞에 놓고 대화가능
성을 모색하면서 함께 새로운
인식지평을 열어 보려는 노력
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저 자신
은 한국의 여러분과 함께 기독
교의 입장과 관점을 공유한다
는 전제에서 불교와 유교와의
대화가능성을 모색하고 함께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차원열
기를 시도하는데 중점을 둔다
는 것입니다. 어데까지나 각자
의 고유성과 가치성을 인정 존중하면서 함께 대화를 통해
서 새 차원 열기를 기도하려
면 우선 서로의 근원적인 차이
에 대한 철저한 인식 각성 자각
이 있고 거기서 함께 개신할 수
있는 차원 지평 경지를 열어 나
간다는 신중하고 인내있는 자
세와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
니다. 영합이나 흡수가 아닌
상호이해요 相反相成을 통한
共進化를 공통목표로 한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체험지입
니다.
Reply21 w
손미옥
심광섭 에공 맞자요.
순자가 성악설이었지요.
1. 성선설, 성악설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떠오른는 저의 소견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을 뿐 저도 성선설 성악설을 논의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저희가 악한 행동을 할 때,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슬피 우시지요. 존재론적 죄성-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하심-을 말하는 것이지 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지적인 노력과 선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데서 출발하기에 교만이나 아상이 있을 틈이 없다는게 제가 특히 기독교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믿음도 선물인 것도 자랑치 못하게하려고 주신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로 이루심요
2.믿지않는 사람에게도 양심이란 존재하므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 존재는 점점 악해져 사이코패스의 인성,묻지마 살인 등도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3.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전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를 믿은 후 거듭남의 과정요.
4.중독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 구원이 시작됨같이스스로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고 문제가 있음을 부정하지않고 수용,인정할 때 어떤 치료든 출발이 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렸던 겁니다.
친절햐고 다감하신 답변 감사드려요~♡
Reply21 wEdited
Philo Kalia
Taechang Kim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에 공감, 동의합니다. 모든 만남과 대화의 시도와 결실은 차이를 전제로 한 것임은 당연한 전제이겠지요. 차이가 없다면 대화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차이가 존재론적인 것인지,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형성된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대화를 넘어 실천을 목표로 할 때 그 목표가 같지 않으면 공동 실천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사료됩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각각의 사상, 교리, 예전, 법, 관습 등을 무시하고 영합, 흡수하려는 식민주의적 발상의 시도는 대화가 아니라 폭력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교간 대화와는 별도로 자신의 정신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제종교사상의 이해와 통합은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유학과 도불을 공부하는 것은 그들 종교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 보다 한국인으서 저 자신의 정신적 역량과 지평을 확장학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儒佛道基가 활연관통되고 원융회통되어 일심에 이를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이 있음을 말씀드리면서, 선생님의 지혜를 구하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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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Philo Kalia 예. 저는 저 자신
의 문제보다는 한일관계의 악
화가 심신혼을 아프게 하기 때
문에 그 아픔을 함께 하는 분들
과 힘을 합쳐서 생명개신의 새
경지를 열어가는데 전력투구하
는 입장이라 자기정체성확립과
자타관계정상화를 가능한 변행
개신하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서양사상만이 아니라 중국사상
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
의 사고와 판단과 행위를 틀지
어 왔는가를 냉정하게 살펴보
고 있습니다. 저 자신은 중국고
전에의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자
사용도 중국식 표현을 인용 차
용 원용하는 것으로는 중국화
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서요. 중국에 가서 10년동안
중국인들과 치열한 대화를 해
보고 우리가 쓰는 한자표현이
결국 자기네의 모방 응용 적용
에 불과하다는 폄하적언급에
대항하기 위해서 한겨레의 감
성과 역사적 체험이 녹아 들어
있는 한자활용을 창안함으로
써 비로서 걸맞는 인정과 대화
가 가능했던 경험을 여러번 했
습니다. 영어도 서양 사람들이
미쳐 생각지 못했던 우리 생각
을 담은 신조어를 통해서 고유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이해 납득시킬 수 있다는 경험
의 축적이 있습니다. 한자가
가진 동아시아사상-철학-문화-
예술-종교에서 갖는 소통창달
력을 중국모방적이 아닌 한민
주체적으로 선용-활용-창용하
는 효과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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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Taechang Kim 동북아 및 유럽의 맥락에서 한국 사상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찾아 궁리하시는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과 부단한 노력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대학생 시절부터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을 통해, 선생님과 같은 안목과 관점을 익혀왔으며, 때문에 지금 intra- + inter religious Dialogue에 손원영 교수와 함께 진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불도가 중국 및 인도에서 유입된 사상이지만 한국에 와서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중국과 일본과는 다르게 뿌리내리고 성장했는지에 대한 연구,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 맥락과 함께 하는 기독교 신학 연구는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양 모방, 중국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사상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위한 연구들이 그간 다행스럽게 많이 나와 있고, 이 성과 위에서 고무되어 계속 공부할 수 있고, 미학적 관점을 더하기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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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호
Taechang Kim 장자에 묻지도 않았는데 끼어든다는 불사이응이란 말이 있어서 용기를 냅니다.
저는 공맹 유교라는 용어가 틀렸다고 봅니다. 공자의 유교는 동서양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르며, 공자와 맹자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맹자와 순자의 유교는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성 논쟁도 맹자와 공자는 다르며, 인의도 공자와 맹자는 다릅니다 공자는 인을 올바른 것을 찾아가는 과정과 이를 실천하려고 살신성인 목숨을 바침에 두었는데 맹자는 측은지심이라는 엉뚱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안중근이 아등박문을 죽이는 것은 인의입니다. 그런데 측은지심하면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도 사양지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자의 예를 사소한 매너 수준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공자의 예는 천하를 바꾸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사양지심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저는 김일성 좋아하는 좌익에게 아무 말도 않습니다. 예는 사양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Reply53 m
송명호
저의 인터넷이 고장이라 모바일로 쓰다 보니 오타가 많아서 고쳐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위의 잘못된 글도 지우지 못해서입니다
Reply51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