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8

Namgok Lee |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강해’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1]
22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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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후배로부터 선물받은 책을 보기 시작했다.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강해’다.
후배의 소개로 한 번 뵌 적이 있는 선생님이시다.

내가 논어를 접한 것은 60이 넘어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 하나의 필연처럼 느껴진다.
불교는 청년 시절부터 접했지만, 노자와 장자, 묵자는 논어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접하게 되었다.
중용도 한번 슬쩍 본 것 같은데, 나에게는 논어가 가장 깊게 다가왔었다.
요즘은 불경(佛經)을 많이 보게 되는데, 논어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성경(聖經)도 훨씬 편견없이 읽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 같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전(古典)이 더 빛을 발한다.
한 쪽이 높이 올라갈수록 그 균형을 잡지 못하면 위험하게 된다.
지금의 문명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뇌과학을 비롯해 인간의 정신에 관해서도 과학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 분야에서도 고전(古典)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물질과 정신, 과학과 종교, 특히 고금합작(古今合作)을 생각하게 된다.

청년들보다는 나이 든 세대(世代)가 고전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고도화한 것도 원인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인생의 사이클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논어 산책을 하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세대 간의 역할 같은 것이 있는 것도 같다.
나이 든 세대는  나이 들어갈 세대에게 고전의 가치를 잘 전승해 줄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오늘 읽은 중용의 문장이다.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발이개중절위지화(發而皆中節謂之和)
중야자천하지대본야(中也者天下之大本也)
화야자천하지달도야(和也者天下之達道也)

성재 선생의 번역이다.
<기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함이 발(發)하지 않음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다 절도(節度)에 맞음(中)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통달(通達)한 도(道)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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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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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강해 중에서.
蓋中無定體 髓時而在 是乃平常之理也

‘대개 중(中)은 정(定)한 체(體)가 없고 때를 따라서 있으니 
이것이 이에 평상(平常)의 이치라“


강해

‘가운데(中)’란 정체(定體)가 없어요. ‘이것이 중(中)이다’라고 이름을 지어 놓는다고 중(中)이 되지 않습니다. 한가지 것을 가지고 ‘옳다’고 해놓으면 세속 사람들이 그것만 옳은 줄 알아요.
이치가 바뀌지 않으니까 수백년이 지나더라도 원리야 변동이 없지만, 원리에 맞게 하자니까 그 형태는 늘 변동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중(中)은 체(體)가 없어요.
‘시(時)’자는 오전 오후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일 초까지 논해요. 초에도 변하고 분에도 변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회는 더 변동됩니다. 지금이 격변기이거든요.

독후감 

‘가운데(中)’란 정체(定體)가 없다.
다만 ‘이치가 바뀌지 않으니까 수백년이 지나더라도 원리야 변동이 없지만, 원리에 맞게 하자니까 그 형태는 늘 변동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중(中)은 체(體)가 없어요.’라는 강해는 좀 이상하게 들린다.
무슨 원리가 있어서 그에 맞게 하자니까 그 형태가 변한다는 것은 좀 뒤바뀐 것 같이 들린다. 
현상이 그러니까, 그것을 나타내는 말로 ‘중무정체(中無定體)’란 원리(관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같은 격변기에 격변하는 현상과 좀처럼 변하지 않는 강고한 관념(의식)의 괴리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은 관념을 현상에 맞추게 되겠지만, 그 과정의 더딤이 인류라는  종(種)에 치명상(致命傷)을 입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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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3] 
221227
  · 
성재 봉기종 선생의 ‘중용(中庸) 강해’를 한꺼번에 읽지 않고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유교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 때문에 읽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그 진의(眞義)가 마음 깊이 느껴질 때가 많아 귀한 보물을 접하듯이 읽게 됩니다.
역사나 인류의 정신이 크게 변화할 때 ‘귀(歸)’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상향(上向)의 나선형 순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재 선생님의 중용강해 가운데 오늘 읽은 부분을 발췌 소개합니다.

“공부 전체가 ‘진실로 성(誠)’입니다. 그렇다면 ‘성(誠)’이란 무엇이냐? 이치의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은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써 눈을 부릅뜨고 하는 것인데, 그 정성은 얼마가지 않아 피곤해져서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참의 정성이 아니겠지요. 우리의 정성은 고집부리는 ‘혈성(血誠)’입니다.
그러면 참의 정성(精誠)은 무엇이냐? 사념(私念)이 하나도 없고 천지원리로 된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거에 조금도 사로잡히지 않고,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정성은 사념이 자꾸 이렇게 침범하니까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려서 사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을 쌓고 또 쌓아서 사념이 제거된, 옳은 성(誠)의 경지에 가서 오직 그 자리만 있게 되면 참의 정성이 됩니다“

이런 정신은 고대에도 희귀한 것입니다. 
하물며 현대인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런 글들이 어떻게 다가갈지, 말투도 고어(古語)체지만, 내용이 다가가기 힘들 것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같은 단어가 과거 악(惡)한 전체주의와 연결되어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도 같습니다.
 인류 역사와 인류 정신의 진화 과정에서 ‘개인의 해방’은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입니다.
 과거의 개인(私)이 억압된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보(進步)의 명백한 표징으로 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해방이 자본주의와 개인중심민주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폐단은 그 긴 여정을 지나 다시 공(公)의 세계를 돌아보게(歸)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단어가 활사개공(活私開公)입니다. 자신을 최대로 살리는 과정이 공(公)이 열리는 즉 공(公)을 위하는 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향은 옳지만 어렵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신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나도 원하지만, 그랬다가는 나만 낙오된다’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재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오상(五常;仁義禮智信)을 그대로 기른다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육신이 있기에 육신의 사사(私邪)가 오상(五常)을 , 천연성(天然性)을 침범하려는 것을 제재(制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전부요 정치의 전부입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가 현대적인 어법(語法)으로(좋게는 bts의 노래와 춤으로) 달빛 속에서 햇빛 속으로 나왔으면 합니다.
교육과 정치의 역할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교육이나 정치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선공후사(先公後私)’ '선사후득先事後得'
  정도의 선구성(先驅性)은 있어야 그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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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4] 
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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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선생님의 ‘중용강해’를 읽습니다.

“학문이나 정치가 민심의 기본에 자연스럽게 맞아야 합니다. 민심에 배반하면 안 됩니다. 무엇인가 끼어 있기에 민심에 배반됩니다. 순후(淳厚)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민심(民心)의 기본’ ‘민심’은 무엇일까요?
실체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추상적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요?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것은 대단히 낙관적인 진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은 동물계로부터 진화한 인간의 특성이 동물적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숭고지향성’을 갖는 존재라는 관점입니다.
그것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떠나서, 나는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그 입장에 서 있습니다.
‘군주(君主)’주의 시대에는 군주(를 비롯한 지배층)가 주(主)가 되어 이 ‘민심의 기본’을 앙양(昂揚)하는 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성왕(聖王)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왕(聖王)보다는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을 쟁취하며 유지하기 위한 정치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유교는  ‘성왕(聖王)’이라는 도덕정치를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왕권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민주(民主)’주의입니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시대이지요.

이제는 윗물이 민(民)입니다. ‘민심의 기본’을 앙양(昂揚)하는 주체는 이제 민(民)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군주(君主)’주의의 의식이 여기 저기 남아 있습니다.
북(北)의 경우는 노골적이어서 실제로도 군주(君主)의 모습이지만, 많이 민주화된 남(南)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런 의식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민(民) 스스로 주(主)가 되는 의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로 되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정치, 경제, 학문 사상, 종교)권력을 주무르는 자(者)들이 ‘민심의 기본’을  타락시키는 작업을 일삼고 있는 것을 중단시켜야합니다.

이 두 과제는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윗물(민심) 맑히기’로 아랫물(정치권력)을 맑히는 것이 민주(民主)의 제대로 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되는 민주화(民主化)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와 실천의 물줄기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감지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름의 방략에 대해 생각도 하고 제안도 하고 있습니다.
모순이 중층적이고 복잡할 때는 그를 풀어가는 일의 순서가 있고,  방식이 있습니다.
힘과 지혜를 잘 모아야할 때입니다.
새벽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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