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토베 이나조 [新渡戶稻造, Nitobe Inazo] | |
1862. 8. 3 일본 모리오카[盛岡]~1933. 10. 15 캐나다 빅토리아. 일본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의 사상가·농정학자(農政學者)·교육자. 도쿄 영어학교를 거쳐 16세 때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에 들어가 W. 클라크로부터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때 일본의 대표적 그리스도교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1884~91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삿포로 농학교의 교수로서 농정학·농학사·경제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병으로 사직하고 요양을 겸해 1898~1901년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으며 그사이 영문으로 〈Bushido:The Spirit of Japan〉(〈무사도 武士道〉)를 집필해 1900년 미국에서 출판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후 타이완 총독부를 거쳐 1903년 교토제국대학 법과대학의 교수에 취임하여 이때부터 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1906년에는 제1고등학교 교장이 되어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1913년에는 도쿄제국대학의 전임교수로서 식민정책 강좌를 담당했다. 한편 1911년에는 최초의 미·일 교환교수로서 미국의 6개 대학에서 강의했다. 1920~26년에는 국제연맹 사무국 사무차장으로서 국제무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 귀국 후에는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회원, 귀족원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태평양문제조사회(IPR) 이사장으로서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도쿄여자대학 초대 총장도 역임했다. 1933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일본대표부의 위원장으로 출석했으나, 회의가 끝난 후 병으로 쓰러져 빅토리아에서 객사했다. 그는 학자·교육자·국제인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고, 그의 활동에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정신은 동서양의 융화에 대한 신념과 실천이었다. 그는 동서문화의 융합에서 서양문명의 일방적 수입이 아니라 일본문화를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영문저서를 다수 집필하여 일본문화를 널리 소개했다. 문하에서 학계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정계의 마에다 다몬[前田多聞] 등 일본의 지도적 인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농업본론 農業本論〉(1898)·〈수양 修養〉(1911) 등을 비롯한 많은 저서는 〈니토베 이나조 전집〉(16권, 1969~70)에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