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식민지와 무사도
1. 제국일본의 무사도 동원 이데올로기: 사무라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개혁의 속도를 가속화 시키면서 천황제 중심의 이데올르기를 근본으로 하여 중압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복구하였고 특히 서구의 신군사무기체를 빠르게 구축함으로서 아시아 대륙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적 모델을 실험하였다.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에서 명치유신까지 약 700년간은 직 간접으로 지배계급으로서의 영주와 천황 그리고 무사계급인 사무라이와의 관계로서 권력관계가 규정되어져 왔다. 중세 막부체제의 성립 그리고 메이지 혁명의 근대화를 추진 시켰던 주도세력들이 사무라이 출신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평지가 협소한 산지지형을 이루며, 대륙에서 볼 수 있는 광대한 구조성의 평탄지역은 볼 수 없다.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생산 활동의 무대로 삼아온 평탄지는 산간의 분지나 하천의 퇴적 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곡저평야 그리고 충적평야 등으로서, 좁은 일본열도 안에 점점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점이 분포한 평지를 중심으로 막부체제의 특징인 270여 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인 ‘번’으로 구성되어지는데 이는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로서,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킨다. 오늘날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 그 밑의 가신들을 번사라고 부르지만 실제 그 당시에는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 호칭을 붙이거나 본래 관직명을 부름으로써 번주를 호칭한다. 에도 시대부터 ‘폐번치현’ 직전까지 존재했던 번들은 보통 ‘에도 300번’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어 졌지만 실제 존재했던 번들의 수는 500여개에 이르지만 신설, 폐지 합병을 거듭하면서 평균적으로 270개의 번이 열도에 분포되어 있었다. 에도시대에는 국가를 뜻하는 ‘구니’가 ‘번’을 의미했다. 그 당시에는 통일국가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으로서 도쿠가와막부에 의해 전국통일은 이루어 졌지만, 그것은 막부의 수장인 쇼군과 번의 영주인 다이묘의 군사적 관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막부는 약 800만 석 규모의 직할영지에 대해서만 징세권과 지배력이 있었고 각 지방, 곧 번에 대한 징세권과 주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영주에게 전권이 주어져있었다. 다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각 번은 그 규모에 따라 군사동원의 의무만 있었다. 막부의 수장인 쇼군을 정이대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납세와 국방의 의무라 본 다면 번의 주민은 막부에 대해서 국방의 의무만 있었고 납세의 의무는 전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번에 대해서만 부담했다. 번의 주민은 영주의 승인 없이는 번의 경계를 넘을 수 없었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일반 주민에게 번은 곧 국가였다. 각각의 번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번의 지역을 벗어나려면 번청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번의 경계지점에는 ‘세키쇼’라는 검문소가 있고 다른 번으로 갈 때는 지금의 여권에 해당하는 ‘데가타’가 있어야 통과 할 수 있었다. 무단으로 번의 경계를 넘을 때는 탈번의 죄를 짓게 되고 영주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며 사형에 처할 정도의 무거운 범죄행위가 되었다.
사무라이란 기본적으로 번주에 의한 자기 무장세력 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부담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집단이다. 근대국가의 군인이 국가의 중앙 행정관청으로 부터 무기를 부여 받아 무장하고 국고로부터 급료를 받는 관료적이고 타율적인 무장 집단이라고 한다면, 사무라이란 지방의 번주의 재정으로 전투를 위해 농민으로부터 분리된 전문적인 전사 집단을 가리킨다. 본래 이러한 전사 집단은 고대국가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의 실력자가 자기 집단을 방어하기위해 무장하였던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 탁월한 사무라이의 지도 아래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생활규율과 에토스를 가지고 집단을 형성하여 중앙화된 율령 국가의 바깥쪽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천황이나 귀족들에게는 그러한 무장 세력이 사병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그들은 독립적으로 장원을 개척하여 중앙의 귀족이나 승려들에게 기부하면서 조건적으로 징세권이나 재판권의 중재로부터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치외법권적인 무장집단간의 헤게모니 각축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기까지 전국적인 동란을 거쳐 1615년 도요토미의 붕괴와 도쿠가와에 의한 통일과 전국지배의 확립에 이르게 되는데, 사무라이들에 의한 일본의 지배는 12세기말 가마쿠라 막부에서 막번체제에 이르기기까지 수백년의 시기를 거쳐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무라이에 의한 장기적인 제도의 완성이 근대의 메이지 혁명까지 이르러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사도라는 말은 전국시대 말기와 근세 초기에 걸쳐 무장들에 의해 사용되어 지던 용어로서 가훈류의 형태로 전승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일본과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된 것은 1899년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잠시 체류하면서 영문으로 집필한 퀘이커 신자이며 미국과 독일에서 학자로서 명성이 나 있었고 1920년대 국제연맹에서 중역을 맡았던 일본의 국체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인 니토베 이나조의 ‘일본의 영혼, 무사도’가 저술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에 참여하고 4년 뒤에 저술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5년 뒤에 러일전쟁을 일으키었다. 두 차례의 일본인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해외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무사도’는 일본인의 전쟁에서 승리한 정신력의 우월성의 골격을 설명하는 해설서로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근대일본은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비서구권의 세계에서 유례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는 국가이었다. 니토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사이에서 무사도와 기독교적 기사도를 대비하면서 일본을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 둔다. 그는 여기서 서구인들이 설정한 동양에서 일본을 분리해내어서 서구와 일본을 동등하게 위치 지운다. 그렇게 함으로서 일본의 위상을 이웃 나라인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일본을 분리해내어 ‘인류가 고안해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인 무사도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등 국민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 시킨다. 이 책에서 니토베는 외국인들에게 유럽의 역사와 문학을 소재로 비교하면서 일본인의 정신생활을 중심을 설명한다. 니토베에게 있어 무사도란 무사가 그 직업에서 또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 이해하였는데 무사의 법도, 즉 무인계급의 신분에 수반하는 의무이다. 그에게 있어 무사도는 현재에도 과도적인 일본의 지도원리이며, 또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힘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원동력, 청일전쟁에서 나타난 불굴의 인내와 용기도 무사도의 유산이다. ‘일본인이 외국으로부터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되는 것을 못 견디는 명예심’이 무사도의 발현에 따른 결과이다. 러일전쟁 후 문명개화의 반동으로 일본의 복고주의가 대중화될 즈음에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동양의 정신문명 그 가운데 일본의 특수성의 산물인 일본정신 으로 무사도를 소개한 이가 동경제국대학의 철학과 원로이며 천황제 국가의 이념적 틀을 준비한 관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 이다. 그는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비판하면서 무사도에는 경전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무사도의 지적계보 중에서 야마다 소코의 ‘무교소학’을 가리키며 일본의 전통과 사상에 기원을 두지 않은 니토베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니토베의 무사도론을 단순히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연속적인 승리를 기초로 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으로서의 자의식의 통합을 강조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서양과 동양의 대등성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 서구의 역사와 철학이나 문학의 설명이 필요치 않고 무사도는 오히려 야마가 소코로부터 시작해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거쳐서 막부말기의 지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으로 이어오다가 메이지 군인을 통해 발현되는 일본민족의 정통성안에서 그 실천적인 가치를 이끌어 낸다. 무사도란 실행에 따르는 일종의 정신훈련이며 일본고유의 상무기상과 유교, 선 이 삼자가 융합 조합되어 발전된 것으로서 그 시원과 운명을 일본민족과 함께하는 초역사적인 것이다. 금후 일본의 도덕을 정립하는 방식은 반드시 무사도의 정신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노우에는 무사도를 민족과 함께하는 역사적 실체로 봄으로서 도쿠카와 시대의 무사의 생활윤리로 기능하였던 무사도는 메이지유신에서 국민도덕으로 변용되어야한다. 각 번의 번사가 주군에 대하여 충절을 지키던 도투가와 시대의 무사도는, 명치국가의 성립과 함께 무사의 조직이 군대의 조직으로 바뀌었으므로 군대는 천황에 대해 충절을 지키는 무사도가 되어야한다. 이와 같이 이노우에게 있어서 무사도는 번과 주군에 대한 충절로서의 윤리는 천황제국가에서 국민도덕인 천황에 대한 충성의 윤리로 재정립된다.
이노우에 이후 무사도 담론은 총력전 체제하의 기능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이는 와쓰지 데쓰로이다. 와쓰지 데쓰로는 1980년대의 신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서 조명 받은 인물로서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의 서구철학자에도 정통해 있는 도쿄제국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와쓰지는 전전 일본인문학의 총제적 대표주자로 불리 우기도 한다. 그는 초기작인 ‘니체연구’(1914)와 ‘시렌 키에르케고르’(1915)를 통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니체나 키에르케고르는 유럽의 대표적인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자로 ‘초인’ 그리고 ‘단독자’등의 주요개념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러한 명성을 얻고 5년 만에 ‘일본고대문화’(1920)에서 기존의 실존주의적 연구에서 전향하여 ‘천황이 폭압을 쓸 것도 없이 모든 백성의 마음을 표현했던 군신일체의 무비의 고대 국체’를 찬양했다.
2. 식민지 조선의 무사도 동원 이데올로기: 화랑도
한국인의 정신을 표상하는 대표적인것 하나는 화랑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열망하였던 대한제국 애국계몽기의 이상적인 국민상이라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화랑을 개인의 도덕적 완성의 모델이자 국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국민의 자질로서 소환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화랑은 근대 한국의 자기구성 과정에서 100여 년 동안 변주되며 만들어진 전통표상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기에 발명되기 시작한 화랑도 이데올로기는 고정된 형태로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자들의 조선적인 고유한 것에 대한 구성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민족 이데올로기와 식민 말기의 총동원 체제하에서의 동원 이데올로기로서의 화랑도에 대한 표상은 그 의의를 달리하고 있다.
화랑도에 대한 담론의 문제는 화랑에 대해 어떤 것을 논하기 전에 화랑 그 자체의 실체 즉 화랑의 실재성에 관한 문제이다. 화랑의 존재를 확인 해 줄 수 있는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아직까지는 문헌학적 검증이 이루어지 않은 가설의 단계에 있다. 이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540년부터 681년까지 기간 동안의 전기이다.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이 문헌에 대한 해석은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의 견해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일본제국 시대 관 학자들의 식민사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강한 민족, 자랑스러운 역사의 실증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사를 탄생시켰던 학자들은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역사소설로 폄하하면서 위작으로 판정하였다. 다른 하나는 관학사학자들의 민족사학 그리고 실증사학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한국사의 원류를 내물왕 이전의 신라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화랑세기’를 진본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화랑세기의’ 위작이냐 진본이냐의 시비를 떠나서 화랑에 대한 전승 문헌은 단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 기사와 ’삼국유사의 권3, 미륵선화 미시랑 전자사 조‘ 기사와 함께 두 기사만이 원본으로 남아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413-491)은 국토를 넓혀 북으로는 부여성과 요동성을 포함한 만주일대를 지배했고, 남으로는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을 점령했다. 수도를 통구에서 평양으로 옮긴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게도 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리하여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523-554)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기에 이른다(551). 그러나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독점하게 되자 백제와는 또 다시 적대관계가 된다. 이러한 시점에 진흥왕은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주체성의 확립된 청소년의 양성을 목적으로 화랑제도를 조직하게 된다. 고구려의 군사대국과 백제의 문화대국에 맞서 후발 주자인 신라의 진흥왕은 남쪽의 가야을 병합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등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황륭사를 건립하여 호국불교의 이념을 확립하여 국기를 다졌다. 특히 진흥왕은 가야의 우륵으로 하여금 전통 가무 예술을 정립하고 이러한 전통을 승계할 목적으로 화랑제도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에는 화랑의 전말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겨있다.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보다 먼저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놀게 하며 그들의 행실을 보아서 이를 등용하려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인을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라 하였고, 하나는 준정이라 하였다. 그들은 그 무리를 300여명이나 모았는데, 두 여인은 차츰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게 되었다. 준정은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독주를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그를 이끌어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나 사건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그 무리들은 실망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락을 즐기고,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랑을 하였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 좋은 사람을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말하기를 ‘어린 재상과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뛰어난 장사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모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하는데,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 하였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실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라’ 하였고, 당나라 연호징이 ‘신라국기’에서 말하기를 ‘귀인의 자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섬겼다’고 하였다”
대한 제국기의 여러 문서들을 통해 볼 때, 이때의 지식인들에게 상무정신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공의 장에서 담론화 되고 있었다. 1901년과 1904년의 황성신문에 실린 논설문과 기고문에서는 “문을 숭상하고 무을 숭상하지 않는 민은 필히 멸망할 것”을 주장하거나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길은 상무로써 정신을 삼고 ‘유혈’로써 주의를 삼고, 모험으로써 성질을 삼고, ‘파괴’로써 방침을 삼는데 있다”고 하여 상무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무정신을 강조하는 기고문에는 상무정신의 모범적인 예로 일본의 무사도를 들고 있다. 박은식의 경우 서우학회지인 ‘서우’에서 조선의 문을 숭앙하고 무를 천시하는 풍조가 극에 달해 조선은 남의 노예가 되는 처지에 놓였으나 일본의 경우에는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무사도와 같은 상무적 국풍이 청국과 러시아에서 승전할 수 있었다‘고 논술하였다. 1906년 6월 8일 황성신문 서점광고란에 양계초의 ’중국의 무사도‘ 그리고 ’일본유신세년사‘,’일본유신활력사‘,’일본무비교육‘ 등의 책명이 실려 있었고 이러한 책들을 통해 일본의 무사도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906년 5월 황성신문에는 ’일본유신삼십년사‘ 제1회 학술편 제4장의 번역문이 실렸고 이 글의 논지는 명치유신 이후에도 무사도가 쇠미한 것 같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07년 2월의 황성신문에 실린 ’정신과 감각‘이라는 논설에서는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의 발전은 서양으로부터의 신문화나 신기술이 아니라 무사도의 정신에 기인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의 유학생 최석하도 ’조선혼‘이란 논설에서 양계초가 ’중국혼‘을 그리고 무사도를 숭상하는 일본에서 대화혼을 강조한 것처럼 ’조선혼‘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한국 근대 내셔널리즘의 정초자이면서 무정부주의자였던 단재 신채(1880-1936)는 1920년경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여 단군조선 2000년의 정치제도, 종교, 철학, 문학, 풍습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종교와 관련해서 선교와 화랑을 언급한다. ‘단군은 선인의 시조이고 선인은 곧 우리의 국교이며, 우리의 무사도며, 우리 민족의 넋이며 정신이며 우리 국사의 꽃’ 이라고 언급하면서 선교를 화랑의 연원이고 조선의 무사도의 연원임을 강조한다. 1920년경에 쓴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화랑은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의 중심‘이라 선언하고 이러한 화랑정신이 나말여초의 유교도에 잔멸을 당하여 그 역사의 형체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채호는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쓴 ‘조선상고사’에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 책의 제8편 제1장 ‘신라의 발흥’에서 화랑을 신라가 발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으로 보고 후세의 역사는 한문화의 지나친 사대주의로 인하여 조선의 중국화로 화랑의 정신이 잃어져 가는 것으로 보며 통단한다. 그러므로 단재는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짓 이라고 질타를 가한다. 신라의 화랑은 이제 무사도에서 벗어나 조선에 까지 확장되어 조선을 조선되게 하여온 것으로서 평가를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후기저작으로 가면 화랑도에 대한 인식은 점차 유가나 불가의 수준과 같은 낭가로 발전해 나아가지만 낭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신채호의 기본적인 사상적 구성이 양계초의 중국사상사 구성에서 보여 지는 ‘중국지무사도’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조선의 무사혼론은 양계초의 중국의 무사도론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진다. 신채호의 화랑도 논의는 1890년대 이후에 동아시아의 담론으로 부각된 일본의 무사도론과 이것에 도전을 받은 양계초의 중국 무사도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것 이다. 양계초는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상무정신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그는 1904년 ‘중국지무사도’라는 그의 책에서 중국사에 있어 춘추 전국시대를 가장 무사도가 왕성했던 시기로 보나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유교 국교화로의 과정에서 무사도가 쇠퇴하게 되었다는 논지를 핀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 ‘중국혼안재호’라는 글에서는 사라져버린 무사도를 회복시켜 중국의 혼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는 삼국에 국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었다. 이는 일본의 경우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측면에서 국민의 동원이 필요하였고 무사도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1940년대부터 조선은 제국 일본의 한 지방으로 통합되면서 조선의 문화도 제국의 문화 안으로 서서히 통합되어 간다. 화랑도는 더 이상 일본의 무사도와 구별되는 조선 고유의 표상이 아니라 일본과 조선이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서 기록된다. 일제는 국가총동원과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충성을 위해 일본의 무사도와 한국의 화랑도는 그 기원에 있어 하나가되어 지고 공통된 기원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서 고대의 일본과 조상의 관계가 재구성되고 이러한 신화를 통하여 조선은 현실적으로나 상상의 영역에서도 일본제국의 동일자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고대 신라무사 화랑은 대동아 전장으로 불려진다. 1943년 10월20일에는 ‘반도인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의 소환은 각계의 명사들이 신문을 통해 혹은 직접 강연에서 화랑도 이데올로기를 통해 학병의 출진을 독려하게 된다. 정운형이 엮은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는 징병에 대한 당시의 공통된 인식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주체화’의 논리‘와 ’숭무의 논리‘로 압축할 수 있다. 무기가 주어지는 것은 국민적 평등의 구체적인 실현이며, 조선의 멸망이 유교의 숭문에서 망하게 된 것이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나약한 문이 아니라 무인 화랑도의 정신 이라고 말한다. 유명인사 중 최남선은 ’매일신보‘에 다가 시국에 직면하여 고민을 물어오는 조선의 청년들이 많다고 전제하고 ‘임전무퇴’ 의 계율을 도덕적 명령으로 제시한다. 화랑 오계 중 임전무태의 강조는 임전무태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하고 죽음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안재홍도 ‘1943년 11월 15일자의 ’매일신보‘, ‘특집: 학도에게 고한다’에서 ‘우리 역사는 고려 말엽부터 숭문천무의 사상이 반도를 휩쓸어 이조에 들어와서는 더욱더 그 경향이 농후하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무사정신을 결한 이조 중엽의 우리 선조를 원망하기 전에 제군은 멀리 신라의 화랑도와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상기하라’고 학도병을 지원을 독려하였다. 또한 1943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 ‘특집: 학도에게 고한다’에서도 조만식은 ‘이 땅에도 장구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무인의 늠름한 대오가 다시 소생되었다. 제군의 선배된 우리들이 그처럼 숙원하고 고대하던 무장반도가 지금 제군의 세대에 이루어지려 함을 목전에 보게 되었으니 이 이상 더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무인의 재현‘,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제군의 광영, 반도의 영예를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학도병을 권유한다. 마찬가지의 권유문도 1943년 11월 8일자에서도 양주삼도 ‘반도의 문약을 일소하고 무의 전통을 이곳에 창조’하자고 쓰고 있다. 이러한 지배집단과 사회명사들의 화랑을 활용한 동원 이데올로기의 권유문을 통해 수많은 학병들은 실제로 화랑도의 구현하기위한 신라의 청년처럼 전장으로 나갔다. 이러한 학도병 동원 이데올로기로 쓰였던 저명인사들의 화랑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원의 장애였던 주부들에게도 향하게 된다. 그 당시의 매일신보의 한 특집호에서는 반도 여성이 ‘상무적 교양에 힘써 국군의 어머니로서 손색없는 총후여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과 출진 학도와 어머니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신라시대의 화랑의 정신과 그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학도에게 전한다. 이병도는 신라의 어머니 교육의 정형으로 화랑 원술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을 군국의 어머니의 상으로 주조한다. 원술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짧은 이야기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당병과 싸우다 패해 적진에 돌진해 죽으려다 부하의 만류로 살아 돌아오자 김유신이 이를 수치로 여기고 원술을 평생 만나주지 않고 죽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찾아간 원술을 그 어머니인 지소여인도 역시 자신도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이다. 이광수의 ’원술의 출정‘은 위의 기록에 원술의 정혼녀 아좌희라는 인물을 추가한 단편으로서 삼국사기의 서사를 통해 학병들에게는 임전무퇴, 조선반도의 여인들은 지소부인처럼 상무적 교양을 갖춘 국군의 어머니 그리고 아내는 화랑의 아내 아좌지 처럼 자식과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총력전에 가담하는 총후부인이 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