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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5

알라딘: 길과 꽃 - 도법 스님 1966~, 끝나지 않는 생명의 순례 김왕근 2017

알라딘: 길과 꽃




길과 꽃 - 도법 스님 1966~, 끝나지 않는 생명의 순례   
김왕근 (지은이)불광출판사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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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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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생명평화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도법 스님. 열일곱 출가 이후, 간디와의 만남, 화엄경 탐독, 종단개혁,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창립, 생명평화 탁발순례, ‘붓다로 살자’ 운동, 평화의 꽃길, 기쁨의 세월호까지, 지난 50여 년 동안 스님은 이 땅에 무엇을 싹 틔우려고 한 것일까?

3년 동안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함께한 공부와 일들. 이 축적 속에서 저자가 본 도법 스님은, 『화엄경』이라는 무변(無邊)한 세계에서 찾은 길 위에 ‘생명평화’라는 꽃을 피우고자 늘 깨어 있었다. 이 책은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의 삶 마디마디에 망울져 있는 뜻을 추적하며, 신념을 꽃피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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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 말
프롤로그

1부 길 찾기
1. 출생, 출가 그리고 화두(話頭)
2. 성철, 지월: 도법과 스승들
3. 간디와 화엄경: 책에서 길을 찾다

2부 혁명
4. 혁명을 향한 성찰: 화엄학림과 선우도량
5. 종단개혁, 종단사태, 백인 대중공사: 종단 내 민주주의를 이끌다

3부 진리
6. 인드라망생명공동체
7. 생명평화결사운동과 탁발순례
8. 생명평화무늬: 불교 세계관의 시각화
9. “붓다로 살자”: 불교 실천론의 요약

4부 실천
10. 21세기 아쇼카선언: 종교 간 벽 허물기
11. 민중총궐기와 ‘평화의 꽃길’: 불교와 민주주의가 만나다
12. 기쁨의 세월호: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분투

5부 공부
13. 붓다의 공부방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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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왕근 (지은이) 

신문기자, 논술강사, 토론코치 등의 직업을 거쳤다. 언어로 소통하는 일을 평생 했기 때문에 스스로 ‘소통전문가’를 자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주변 인물들과 갈등을 겪었고 “왜 소통 전문가인 내가 소통을 못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2013년 여름, 도법 스님과 인연을 맺은 후 불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 소통 중에는 논리의 소통 이외에 정서의 소통이 중요함을 깨달았고, 이를 위해 불교가 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모든 사람이 붓다의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회’가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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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길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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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의 삶과 뜻

“생명은 자기 몸의 아픈 곳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불교도 세상의 아픈 곳을 보듬어야 한다.” - 도법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생명평화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도법 스님. 열일곱 출가 이후, 간디와의 만남, 화엄경 탐독, 종단개혁,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창립, 생명평화 탁발순례, ‘붓다로 살자’ 운동, 평화의 꽃길, 기쁨의 세월호까지, 지난 50여 년 동안 스님은 이 땅에 무엇을 싹 틔우려고 한 것일까?
3년 동안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함께한 공부와 일들. 이 축적 속에서 저자가 본 도법 스님은, 『화엄경』이라는 무변(無邊)한 세계에서 찾은 길 위에 ‘생명평화’라는 꽃을 피우고자 늘 깨어 있었다. 이 책은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의 삶 마디마디에 망울져 있는 뜻을 추적하며, 신념을 꽃피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길을 나서다

만으로 열일곱이던 1966년, 도법은 김제 금산사로 출가한다. 2년 뒤인 196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도법, 출가자는 세속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평소처럼 생활하던 그를 한 사미승이 불러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데, 니가 아무리 중이지만 어머니 아들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이 말에 ‘어머니’가 아닌 ‘삶과 죽음’ 문제가 가슴에 사무친 도법은 죽음을 경험해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한밤중 다리 위에 선 그는, 장마로 물이 불어난 하천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 여기서 뛰어내려서 죽으면 삶이 끝나니까,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고 마는 것이구나.”

도법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고 싶었다. 금산사에 가만있어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법은 은사스님께 말씀드리고 합천 해인사로 길을 나선다.


간디와 화엄경

당시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수도였다. 성철 스님(1912~1993)이 구축한 엄격한 수행 가풍 아래로 도(道)를 찾는 수많은 승려들이 운집했다. 도법 역시 문제 해결의 기대를 품고 해인사로 향했다. 하지만 성철 스님 가르침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후 도법은 김천 수도암, 순천 송광사를 거쳐 다시 해인사를 돌며, 참선해서 도인 되겠다고 몸부림쳤다.
그렇게 보낸 10여 년의 끝인 1970년대 후반, 도법은 간디 자서전을 만난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자비의 마음으로 불살생을 실천했으며 비폭력 불복종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도 영국을 미워하지 않은 간디. 그는 힌두교도였지만, 도법에게는 “석가모니 붓다의 정신에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를 계기로 도법은 붓다의 삶과 불교경전을 ‘사회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법은 『화엄경』도 만났다. 『화엄경』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평등하게 연결되어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으며 ‘생활이 곧 도(道)’임을 깨달았다. “세계를 포용하는 크나큰 인간의 가슴, 생명을 향한 깊고 깊은 애정의 관심, 이웃-생명-세계를 가꾸기 위한 뜨거운 정열의 헌신이 우리들 인간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생각할 때 환희가 솟구침을 느낀다. 인생이란, 삶이란 정말 이래야 된다고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회 속에서, 생활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겠다고 마음먹은 도법은 1990년, 도반들과 함께 불교의 풍토를 바꾸고자 ‘착한 벗들의 수행 공동체’인 ‘선우도량(善友道場)’ 결사운동을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불교의 현실은 올바른 수행의 부재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기뻐하고, 나누는 실천행으로 새로운 승풍(僧風)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불교 개혁에 나선 도법은 이후 94년 종단개혁, 98년 종단사태에서 ‘개혁의 아이콘’이 된다.


생명평화의 길을 걷다

도법의 이러한 성찰은 1998년 문을 연 ‘실상사 불교귀농학교’, 1999년 창립된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모습으로 기어코 현실화된다. 이 둘을 통해 도법은 우리 사회가 “세계, 산천, 초목, 부처님, 보살, 중생, 이것과 저것, 시간과 공간, 유정과 무정 등 모두가 함께 어울려 출렁이는 생명의 큰 바다”가 되길 바라는 큰 꿈을 이루고자 했다.
드디어 2004년, 도법은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한다. 그해 3월 1일부터 2008년 12월 12일까지 장장 1,747일 동안 3만 리를 걷고 8만 명을 만난 이 순례를 통해, 상호의존의 세계관과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한 몸임을 자각하여 내는 큰 자비심)의 실천론을 축으로 하는 도법의 생명평화 사상은 완성된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때로는 누룽지를 끓여 먹고, 출발지에 집합해서 생명평화백배서원 절명상 하고, 걷고, 점심 먹고, 그날 종점에서 절명상 하고, 저녁 먹고 대화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성찰하고 확인한 생명의 구체적 양상이 사상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이전부터도 그래왔지만, 이후 도법의 모든 행보는 ‘너와 나를 함께 살리는’ 생명평화의 길 위에서 이뤄진다.


정의(正義)를 새롭게 정의(定義)하다

2001년, 도법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처님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바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해야 할 대상에 화내지 않고 증오해야 할 대상을 미워하지 않고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냄)의 길을 가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등졌을 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만일 당신과 나라는 인간 존재가 좌익, 우익, 친북, 친미 따위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이고 더 귀중한 존재임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어도 극단적인 좌우대립 동족상잔 남북분단의 비극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래도 오늘의 비극과 고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언뜻 반대로 읽히는 이 두 발언은, 사실 근본 뜻에서 차이가 없다. 도법에게 정의(正義)란 “한 몸인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생명의 길”이므로, 그는 ‘선(善)’뿐만 아니라 ‘악(惡)’과도 ‘잘’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 도법은 악을 뿌리 뽑아 없애는 게 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을 증오하지 않고, 악과 마주쳐 상처받지도 말고, 악에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자며 머리를 맞대는 것이 된다. 이런 행보를 밟기에 도법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출가 후 50여 년, 도법 스님 중간점검

도법은 누구보다 많은 존경과 많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생명평화를 위한 순례자” 도법은 존경을 받지만, “성격 급한 스님들이 적지 않은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대화론자”인 도법은 비판을 받는다.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교(기독교)에 무릎을 꿇는다고 비판을 받았고, 조계사에 들어온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을 경찰에 내주었다고 비판을 받았으며, 세월호의 슬픔을 세월호의 기쁨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해 또 비판을 받았다. 그가 무슨 문제이든 대화로 풀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약자의 편을 드는 대신 강자의 입장을 두둔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에,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에 도법은 비판을 받는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비판일까? 비판을 하며 그와 거리를 두고 외면하는 대신, 비판을 하되 그와 함께하며 우리사회를 더 낫게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책은 문제적 인간, 도법의 입장에서 그의 50여 년 승려의 삶을 돌아본다. 베트남 출신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은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된 이해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해하려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진정 도법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 책이 그를 이해하고 (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길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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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길과 꽃

자주 못 가지만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미사를 드릴 때면 ‘예수라는 한 사내‘와 그의 삶을 생각한다. 그가 행한 기적이나 부활의 이야기보다 내게는, 처형당하기 전날 사람들을 모아놓고 벌인 만찬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채 하늘을 향해 왜 나를 버리셨느냐고 울부짖었다는 ‘인간‘ 예수의 이야기가 어쩐지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그의 삶과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을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도.

예수는 인간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책으로 기록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그가 한 이야기를 되새기고, 그가 했던 만찬을 재현하기로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성경이고 미사다. 미사에서 신부님이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 ˝너희는 모두 이를 마셔라.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구절을 읊을 때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놓을 각오를 한 사내의 힘든 결심, 그 선한 마음을 떠올린다. 이렇게 산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생각한다. 이게 나에게 미사다.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읊고, 기억하고, 노래할 때 느껴지는 따뜻한 일체감은 내가 미사를 좋아하는 또하나의 이유다.

기독교와 불교는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종교지만 내게는 비슷하다. 한 인간이 그의 삶을 온통 바쳐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깨달은 것을 이야기했고, 직접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작년 봄부터 참가하고 있는 불한당(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모임)에서 도법스님께 들은 불교의 핵심은, 우리 안에 이미 붓다의 마음이 갖추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그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가르침은 이렇게 쉽고, 명확하고, 현실적인데, 삶은 여전히 어렵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곤과 분노, 내 바램과는 달리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슬픔, 미래에 대한 온갖 걱정과 불안, 그리고 삶이, 이 모든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긴 한가 하는 자괴감과 허망함 같은 것들이 삶을 짓누른다. 오죽하면 붓다도 깨달음을 얻은 후 

˝내가 아무리 진리를 설해도 이기심에 가득 찬 중생들이 그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는 스스로를 지치게 하는 일일 뿐이지 않을까.˝라며 망설였을까(이 대목을 읽으며 반가워서 울 뻔했다. ˝나 이 심정 알아!˝하고).

얼마전 불한당의 김왕근님이 쓰신 도법스님 평전 ‘길과 꽃‘을 읽었다. 에필로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석가모니를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이 불교를 살리는 길이다. 석가모니가 인간이어야 우리가 그를 본받을 수 있다. 석가모니를 인간으로 알고, 또한 우리 자신이 바로 ‘붓다‘임을 알고 살자는 것이 ˝붓다로 살자˝ 운동이다.‘

‘(절대자로서의) 신이 있는가, 나는 그의 존재를 믿는가‘라는 의문은 보류해두었다. 절대자라면 당연히 강인하고 옳게 살았겠지. 근데 나는 그냥 약한 인간일 뿐이지 않나. 지금 내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내 소원을 들어주고 기적을 일으켜줄 신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온 삶으로 보여주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쉽지 않은 이 삶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게 해줄 나와 같은 ‘인간‘이다.

어려운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 후의 삶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너무 연약하고 잘 잊어버리니까. 기도를 하고 미사를 드리고 수행을 하는 것은 절대자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도, 어떤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일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감각이나 탐욕, 분노에 붙들리지 않고 부처의 마음을 내고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도시락을 싸듯 그렇게 준비한 ‘마음‘을 가지고 또 하루하루 일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간다.

도법스님은 평생 이것을 해온 분이다. 도법스님이 쓰신 책이나 도법스님의 강연, 말씀을 옮겨적은 책들을 몇권쯤 읽었지만 정작 도법스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한 책은 처음이다. 열여섯에 출가해 간디와 화엄경을 만난 이야기, 안으로는 종단개혁과 대중공사, 밖으로는 실상사 불교귀농학교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최근의 한상균 위원장 관련 사태와 ‘평화의 꽃길‘까지, 도법스님은 시대의 가장 뜨거운 전쟁터 한가운데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도법스님의 고민, 노력, 깨달음을 보며 ‘인간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라고 또 생각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덕분에 삶은 더 복잡해졌다(;ㅅ;). 이전에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나와 맞지 않는다 싶으면 무슨 일이든, 무슨 관계든 미련없이 발을 뺐다. 그런데 이제는 한번 더 마음을 내고, 한번 더 얘기해보자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최선이고 어디서 그만둬야하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겠어서 힘이 든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와중에 이전처럼 내가 자괴감을 느끼거나 피폐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부딪힐 때 ˝위협적으로 들리는 험악한 말도 잘 들어보면 ˝내 삶을 도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일 때가 많다˝는 이 책의 한 구절을 되새긴다. 그 사람의 말과 더불어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 절망, 혹은 탐욕이나 거짓을 바라보고,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방을 바라본다. 우리는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더 나은 해결책을 낼 수도 있다. 애써 준비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도법스님은 ˝찻잔으로 물을 떠내면 호수는 찻잔 한 잔만큼 달라지고, 절을 하기 전이나 절을 한 다음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절한 만큼 달라진다˝고 말했다. 여기에 적어도 상대방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달라진 내가 있고,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아는 만큼 상대방은 달라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삶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게 하는 게 어디 예수나 석가모니, 도법스님 뿐일까. 내가 지켜보는, 나를 지켜봐주는 모든 인간이 나를 이끌어가는 ‘붓다‘이다.
그렇게 서로를 지켜봐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삶의 의미가 아닐까.

발췌 보기 : http://noyuna.tistory.com/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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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a 2017-05-2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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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와 도교사상 :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장호두

도교와 도교사상 : 네이버 블로그
도교와 도교사상

1.도교사상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도가사상 또는 도교적인 요소가 깊이 깔려있다. 도가사상은 억압당한 계
층들에게 도교나 불교 무속신앙은 현실적인 고통과 불만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1.도교신앙의 계층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양반들이 도가사상을 이해하였다면 생산을 담당한 백성들과 천인,부
녀자들은 종교로서의 도교에 더 친숙하였다.
2.도교사상
윤리적인 부분은 유교와 이론도 받아들였고 조직의 체계형성에는 불교를 모방하기도 하였으며
종교,심리적인 면에서 무속신앙의 요소를 강하게 띈다.
3.민중도교
농민과 민중을 주제로 하는 도교를 '민중도교'라고도 한다.
민중도교는 농민과 민중의 사회적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삼교 합의 문화운동을 일으키기도 하
는데, 송대 이후에는 이른바 민중 도교의 시대가 전개된다.

(2)한국도교의 특징
한국도교는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닌다.
1.단군신화를 뿌리로 하여 전개된 선가설이다. 선가설의 정착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국 시
대 이전부터있었다.
조선시대까지도 전해져 내려온다.
도교의 제례인 재초를 통하여 국가의 재앙을 막고 복을 비는 의례적인 도교로서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사이에 수련 도교가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수련 도교는 단축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공행을 쌓아 도를 얻고 신선이 되려는 내단법이다.

2.도가
(1)도가의 사상
도교의 모태가 되는 도가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삼는 사상이다.
1.정치사상
도가 사상은 실제로 춘추 전국 시대라는 난세에 대응하여나온사상이기 때문에 개인적 윤리론
이기 보다는 하나의 정치사상이다
2.화평윤리
도가의 도는개인의 명상적 도가 아니라 세상을 화평하게 하려는 도라고 할 수 있다.
(2)동양적 사유
역사적으로 유가의 적극성은항상 도가의 소극성에서 힘을 빌려갔다.그런 ㄸ늣에서 우리가 보
통 동양적 사유라고 하는 말은 도가사상의 측면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개인적 처세술
도교를 통하여 세속하게 된 도가의 정신은 개인적 행복 추구와 처세방법론으로도 자리잡는다.
2.삼보
노자에서는 도가의 세가지 보배와 자애와 검양의 양보를 꼽는다.도가의 실천방법론을 한마디
로 요약한다면 청정자수라 하겠다.

03.불교와 불교사사아

1.불교의 발생
(1)인도문명
인도문명은 세계어느 문명보다도 고도의 정신적 체험을 기반으로하는다양한 사상을 갖는다.
1.개혁사상
불교는 베다적 전통을 부정하는 비교적 비정통 사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대 가장 개혁적인 인
도사상이라 할 수 있다.
2.신중심에서 탈피
불교사상이 인도 정통 브라마니즘에서대해 개혁적인 저은 철저하게 계급적으로 짜여진 정통사
회의 폐쇄화된 인간관을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한 것과 신중심적 세계관의 제의 중심
적인해탈관을 인간중심적 세꼐관과 자기구제적 해탈관으로 전환시킨 데 있다.
(2)불교의 발생
기워전 6세기경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의해 시작된 이 사상은 종교적 교단으로 발전하였고 당
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가던 크샤트리아 계급에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통일왕조의
지배적 이념이 된다.
불교의 가르침
흔히 사성제와 12연기, 그리고 팔정도로 요약된다. 그 핵심은 속박을 현실에서의 인간 삶을 투
철하게 직시할 것과 그에대한 해방의 가능성을 믿으며 아울러 그 실현을 자기 스스로 얻어야한
다는 전제 아래 추제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2.부파불교
불교 사상은 여러 갈래로 분화되면서 각기 자기의 논리와체계를형성하였다.부파불교시대(아비
다르마 불교)라 일컬어지는 이 단계에 오면 교단 비구 위주로 흘러가게 되자 재가신자들의 구
제문제는 자연 소홀하게 취급된다.
(3)대승불교
기운전후 시기 구제에서 소외된 재가신자들의 이러한 불만을 간파한 기존 교단 내부의 진보적
비구들은 새로운 종교 혁신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한다
1.중생구재
대승 불교의 이념은 기존 교단의 자기 구제 방식을 지양하고 타인 구제까지도 고려한 방식을
채택할 것과,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실천할 것을 주장한다.
2.보살의 이념
대승운동에 걸 맞은 이상적 모델로서 '보살'의 이념을 제시하고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구
제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2.중국불교
(1)중국불교의 교단
중국적 불교종단인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1.교학불교
천태종과 화엄종의 두 종파는 불교이론의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왕조라는 역사적 조거네도 부응하고 있으며 나아가 중국적 사변을 마음껏 발휘한다.
2.교학불교의 한계 0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교학불교는 역사적 조건에 부응하려 한 결과 통합의 논리가 너무 낙관적이고 도 지나치게 사변
적 이어서 구체적 개별자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다.
(2)선불교
당나라 중엽 이후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통일 왕조가 서서히 무너지게 되자 시대정신을 지
도하고 있던 고그스런 불교 이론도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1.선불교
선불교의 기본 명제는 인도 불교에 대한 중국적 해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현실
지향적인 중국적 사유에서 볼때 필연적 귀결이었다.
2.중국적 사유
선불교는 각자의 현실적 조건에서 주체의 자기 각성을 강조한 점은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일찍
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으로, 중국적 사유에 입체적 깊이를 더해 주고 치밀성과 세계관의 확대
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다.

3.한국불교

(1)불교의 수용
주욱 불교가 한국에 수용되는 시기는 부족연맹체적역사단계를 극복하고 고대국가를 형성해가
는 시기였다.
1.통치이데올로기
확대된 영역국가로서한국의 불교수용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건에서 고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보
편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요청된다.이것은 한국불교가 처음부터 국가불교적 성격으로 수용됨으
로써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갖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무속과 결합
고대국가 건설의 주체들은 이러한 과제를 결국 무속 관념의 불교적 해석과 무속 형태의 불교적
변용이라고 해결한다.
(2)불교 사상의 전성기/통일 신라 불교
신라의 삼국 통일은 이 새대를 이끌어나갈, 용청인 통합을 위한 보편적인 이념이 필요하였다.
비록 성격의 차이는 있었으나, 삼국이 고대국가를 완성했을때의 지도적 국가 이념은 은 다 같
은 불교였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불교가 가진 시대적 과제는 다양한 갈래의 불교 사상을 체계
적으로 통합시켜 내부적으로는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외부적으로는 당제국에 대응할 수
잇는 자주력의 강화에 있었다.

1.한국적 불교
ㄱ.통일 신라의 불교는 의상의 화엄종과 원측계통의 법상종이었다. 그러나 이 두종교는 엄밀히
보면 중국불교의 한국적 전개에 불과하며 국제성을 띠기는하지만 자주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
다.
진정한 의미의 해결은 원효에 의해 실현된다.
통일 신라의 불교는 의상과 화엄종과 원측계통의 법상종이었다.그러나 이 두종교는 엄밀히 보
면 중국불교의 한국적 전통에 불과하며 국제성을 띠기는 했으나 자주성을 가진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의 해결은 원효엥 의해 실현되었다.
원효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과제로 남아있떤 중관학파와 유가학파의 사상적 통일이라는 대
승불교의 최고의 과제를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매우 훌륭하게 해결한다.이것은시라의 불교가
국제불교로서 자주성을 보인 동시에 매우 시대적 문제의 해결을 사상적으로 성취시켰음을 의
미한다.

2.민간불교
원효의 사상은 지배계급에서 관념적으로만 수용되어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했던 이론 0 Orbis terrarum by Walker.Hodu.J
불교를 민중생활 속의 실천불교로 전환시킨다. 이것은 민중의 지각성을 진작시킬 뿐 아니라, 중
앙에 집중되었던 불교교단을 지역적으로 분산시켜 차후 선불교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날 수
있던 계기를 만든다.
(3)선교일치와 고려불교
고려왕조의 정치적 본질이 호족들의 연합세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를 뒷받침했던 사
상적 지도이념의 선불교 였다.
1.선불교의특징
선불교는 교학이론의 통일성을 거부하는 개체지향적 선불교의 분산적 성격이다.
2.광종의 통합
광종에 의해 추진된 오교양종의 정비는 새로운 교학이론을 동원하여 교종과 선종을 통합시켜
왕권지배체제를 강화하려 한다.
3.의천의 교선일치
의천의 천태교학을 통하 교선일치사상으로 나타난다.물론이것은 그 이전 제관의 천태사교에의
해 나타나는 바와 같은사상적 발전의 현실적 결실이기도하다.

4.지눌의 돈오점수
지눌의돈오점수설은 의천에 의해 제시된 이론 중심의 불철저한 교선일치사상을 주체를 강조하
는 선 중심의 교선 일치사상으로 전개시킨다. 이것은 현실에 대응하는논리이기도 하지만한국
사상사에 있어서 원효에 비견되는 자기 사상의 발전적 단계이다.
도 그의 수선사 결사운동의 불교의 대사회적 역기능과 비민중성을 개혁하려는 실천운동 이었
따.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여러 갈래로 발전된 선종의 각 유파들을 취사선택하고 중요한 교학적
성과들까지 반영하고 있는 독자적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4)숭유억불정책의 조선불교
여말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말부터 원나랄르 통해 받아들인 성리학적 시각에서 고려사회의 모순
을 비판한다.
1.정치적 목표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은 단순한 사상적 대립에서 나온 선택적 결정이 아니라,조선왕조의 유지
를 위한 정치적 목표가운데 하나였다.
2.조선불교의 특징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의 공세에 대해 방어적인 유불조화의 논리를 편다던가, 혹은 유학의 도
통관에 영향을 받아 한국적 법통설을 세우려는 점과 같은 것이다. 조선의 불교는 교단의 외형
적 발전이나 교리의 발달은 없었으나, 억압당한 민중의 정서가 불교를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불교는 대개 민중적이고 토착적 불교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2021/10/26

유동식2 | 부처님, 공자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 | 풍류도를 알면 모든 종교를 알 수 있다 | 풍류신학 유동식 교수



*자막있음 | 부처님, 공자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 | 풍류도를 알면 모든 종교를 알 수 있다 | 풍류신학 유동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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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TV 휴심정

유동식 교수는 황해도 평산 남천에서 태어나 연희전문대를 거쳐 일본 도쿄 동부신학교에 유학 중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한국전쟁 직후 감신대를 거쳐 미국 보스턴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어 감신대와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2021년 그는 100살이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연세대 옆 단독주택에서 홀로 산다. 부인 윤정은 전 이화여대 교수가 4년 간의 암 투병 끝에 2004년 별세했으니, 사실상 20년 넘게 홀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며 산 셈이다. 그런데도 초인종을 누르자 2층에서 내려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손수 열어줬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운동 삼아 직접 나온다고 한다. ‘원활한 대화와 인터뷰가 가능할까’라는 염려를 일거에 날리고, 무려 3시간 동안 질문에 자세히 답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기독교인에게는 교회라는 공간을 넘어 참 신앙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 전통의 얼을 풍류도로 보고 풍류신학을 연 그는 케이팝의 원류를 풍류도라고 본다. 그는 “춤과 노래와 예술혼인 풍류도를 마음껏 발현하라”고 젊은 세대를 격려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줬던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영어로 줄줄 외웠다. 그러면서 ‘동방의 등불’은 풍류도를 오늘에 알린 최치원이 썼던 말이라고 했다. 유동식 교수가 생각하는 한국문화의 원형과 풍류신학, 한국 기독교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
Transcript


00:00
유동식 교수님은
00:03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 타는 모습을 보시고
00:08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이 말(馬)로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는데
00:12
싸이가 우리 기마 민족의 말 타기 동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00:15
하셨는데요 요즘은 싸이도 그랬지만
00:19
BTS,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를 휩쓸고 한국의 국악 같은 이날치밴드
00:26
이런 것에 전 세계인이 열광을 한단 말이에요 한국 전통 국악, 우리는
00:30
서양인들이 귀담아 들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음악과 춤으로
00:38
전 세계인을 열광 시키는 힘이 풍류도에서 나온다고
00:44
보십니까 그렇지!
00:50
내가 홍콩 대학에서 강의해 달라고 가서 바로 그걸 얘기했는데
01:02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세계를 정복하고
01:08
하려다 파키스탄까지 와서 죽고 말았는데
01:15
싸이라는 사람은 말 춤을 타고 파리에 이르렀어
01:22
파리의 그 사진 봤어? 에펠 탑 앞에
01:27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였어, 그 말 춤 보려고
01:35
싸이가 참 대단한 인간이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01:45
그건 내가 어딘가 신문에 난 걸 잘라 놨는데
01:53
아시아의 아주 독특한 민족이야, 우리가
01:59
중국이, 주변국을 다 먹어 가지고 큰 영토를 만들었는데
02:07
요 조그만 나라가 안 먹히는 거야
02:15
당나라 때부터 전부
02:21
위구르 족까지, 이슬람은 민족적으로 다른 것까지
02:29
다 합쳤거든
02:34
그런데 요 조그마한 한국은 그게 안 되는 거야 그게
02:40
거기에 우리의 독자성을 찾아야 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느냐
02:46
내가 말 춤 얘기를 어디에 썼었나? 내가 홍콩 대학에 가서
02:53
강의할 때 그 얘기를 했지. 알렉산더는 말 타고 티벳 와서 죽었지만은
03:02
싸이는 말 춤 갖고
03:06
파리까지 점령했다고 파리에서
03:12
신문에 났던 것 잘라 놓은 게 나한테 있어
03:17
그야말로 새까맣게 모였더라고
03:22
기마 민족의 후예라고 내가...
03:25
그것이 우리 풍류도 전통의 혼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03:30
발현된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럼
03:37
우리 피 속에 굉장히 사람의 의식 구조라는 것은
03:43
단 시일 내에 변하는 것이 아니야
03:49
나는 기독교 신앙도
03:53
갑자기 늘어나다시피 하고
03:57
아시아에서는 인구 비례로 제일 많지만
04:02
이제 정말로 유대 민족의 기독교가
04:10
우리의 피 속까지 들어오려고 그러면
04:17
토착화라는 얘기 썼지만, 상당한 세월이 걸린다
04:26
많은 경우, 학자들은 성경에 입각해서 해석을 하지만
04:34
많은 신도들의 경우에는
04:38
무속과 혼합돼 있어
04:45
무속이라는 것이 세 가지야, 비는 것이
04:53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제석신(帝釋神)(*민간신앙에서 가옥에 있다고 믿는 신)
04:59
대감(大監)이라는 건 부자 되는 거(*대감 : 무속에서 인간의 재복과 집안의 평화 및 번영을 담당한다고 믿어지는 신령)
05:08
평화, 종교가 공통된 건데
05:18
초월적인 신, 창조주를 믿는 것이 기독교고
05:29
무속은 하나하나의 신이 따로, 말하자면 다신교야
05:37
제석은 수명 장수하게 하는 것
05:45
대감은, 터줏대감이라는 말 잘 쓰지? 대감신은 부유하게 사는 거
06:01
우리의 의식 속에 그것이 있는데
06:05
다만 천지창조
06:15
자유의 영, 평화와 사랑
06:23
특히 사랑
06:30
요한서신에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건 자유의 영이고
06:39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건 평화. 자유와 평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
06:51
이게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행복, 그 연장선 상에서 내세를 보는 거거든
07:07
그게 기독교의 핵심인데
07:12
부분적으로 무속이, 부분적으로 불교가 부분적으로 유교가
07:20
요소들은 다 들어가 있어
07:25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해
07:30
자기를 극복하고 천성으로 돌아가서
07:36
예를 지킨다
07:40
위인(爲仁), 인은 사랑이지 말은
07:45
기독교적인 요소와 유교도 들어 있고 불교의 자비도 들어가 있고
07:52
다 들어가 있어. 그것이 완성이 된 것이
07:56
완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탄생과 십자가와 부활로
08:10
지금 인류에서 신도 수가 제일 많은 것이 기독교지
08:24
미국과 한국은 프로테스탄트가 많고, 다른 데는 다 가톨릭이지만
08:32
전 세계의 제일 큰 종교는 기독교지
08:37
신앙적으로 우리나라 기독교가 끼친 아주 좋은 영향이
08:43
굉장히 많기도 하고 우리나라 발전과 시민 의식을 함양하고 사람들이
08:50
역동성을 키우고 서구화 동력을 갖도록
08:54
하는데 굉장히 큰 힘이 됐는데요
08:59
신앙적으로는 미국의 근본주의적인 영향을 받아서 너무 지나치게
09:05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런 식으로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09:09
그러면 예수 안 믿었던 우리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갔단 말이냐
09:14
이런 점은 어떻게 봐야 됩니까
09:18
히브리서의 첫 줄에
09:24
하나님께서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다가
09:30
마지막 날에 외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09:37
나는 이걸 아주 제일 핵심으로 생각해 불교를 통해 말씀하시고, 유교를 통해 말씀하시다가
09:46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09:50
우리의 종교문화사를 엮어내는 거야
09:55
불교를 통해서도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다
10:01
나는 불교도, 부처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라고 생각해
10:09
공자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야 그러니까 이사야(*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나
10:18
구약만이 아니고
10:21
우리한테는 더 풍요롭게
10:25
부처님을 통해 팔만대장경이라는 그 방대한
10:31
교훈을 해주셨고 또 유교
10:37
나는
10:40
극기복례위인이면 기독교의 전부인데 뭐 자기를 극복하고 하늘의 뜻으로 돌아가서
10:48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기독교지 뭐
10:55
하나님이란 말을 안 써서 그렇지
11:03
우리 조상 때부터 하느님 신앙, 그러다가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11:14
거기서 딱 맞는 거지
11:18
그 대신 어떤 위험이 있느냐면 전통적인 신앙하고 혼동해 버리는 것
11:24
또 하나는
11:28
무속
11:34
병 낫게 해주는 거
11:38
기도하는 건 당연한데 그걸 위해서
11:43
하나님께 그 것만
11:49
God bless...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11:56
좋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병 낫는 거
12:02
전화 받아서 어디 아프냐 기도해주는 프로그램 있지
12:10
매주 목요일인가 해 나도 재밌어서 매주 보는데
12:15
그걸 극단으로 몰고 가면 무속이 되고 말아
12:20
병 낫기 위해서
12:24
병이 나면 고쳐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당연한데
12:29
그것이 삶의 목적이, 신앙의 목적이 될 적에는
12:34
무속화 되는 거야 부자되는 것도 마찬가지야
12:39
종교 간에는 공통점이 있고
12:45
독자성이 있는데
13:00
기독교가 한국에 끼친 제일 큰 영향은
13:05
문화적인 현대화야 들어오자마자 배제, 이화
13:13
배화 세웠잖아 그게 한국 근대화의
13:19
첫걸음이지 그 분들이 들어와서
13:23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어
13:28
교육부터, 교육과 자선사업
13:33
홀트가 근자에 와서는
13:41
고아들까지
13:44
바탕에 깔린 어려움을 해소해 준
13:49
한국 근대화와 기독교는 절대로 뗄 수 없는
13:54
그것을 뭣 모르고들
14:01
유물사관을 가지고.... 역사 공부를 해봤나, 그런 생각이 들어
14:09
유동식 교수님은 100세까지 살아 오시면서 지금까지 만나본 수많은 인물들
14:15
근현대사 인물들이 많을텐데
14:18
가장 인상적인 인물, 기억 나는 분 있습니까
14:26
내가 공부, 학위를 그 사람 따라 했지만은
14:34
내 신학의 조상은 불트만(Bultmann)이야
14:43
내가 불트만의 '케리그마와 신화'를 처음으로 번역했어
14:56
내가 유럽에 있을 적에 그 댁에 찾아가고 그랬는데
15:08
우리는 영의 세계를 믿는데 그걸 표현하려고 하면 이 세상적인 걸로 표현
15:15
할 수밖에 없잖아
15:18
영의 세계를 이 세상적인 걸로 표현한 것이 신화가 된 거야
15:26
근데 희랍신화라고 하는 것은
15:29
무슨 옛날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철학을
15:34
영적인 철학의 세계를 신화로 표현한 것이지
15:44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려고 그러면 이 세상적인 걸로, 말로 표현할 수
15:51
밖에 없으니까 그것을 해석을 해야 한다
15:58
이게 비신화화라는
16:04
쉽게 말해서 죽으면 천당 간다, 하늘 간다
16:08
저 하늘을 생각을 하잖아
16:13
그게 아니라 영의 세계
16:18
차원으로 말하면 4차원의 세계가 아니야
16:23
그 초월의 영의 세계에서
16:27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형상을 갖고 생각을 하는 건
16:33
일종의 신화지
16:37
그것을 해석해야 된다
16:42
신화의 세계를 영적인 세계로
16:46
그것을 어떻게 정신 생활 문화에 적용할 수 있느냐
17:02
내가 학문적으로 눈 뜨게 된 건 불트만 교수. 내가 보스톤에서 요한복음으로 논문 쓴 것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17:22
한국인이라는 자각과 더불어 불트만 교수
17:34
불트만의 영향으로 한국의 전통 한국의 문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을 발견하는
17:40
시도를 하신 거죠 유동식 교수님은 연희전문
17:44
들어 오셨을 때 윤동주 시인이 1년 선배이셨다는데
17:50
그 때 윤동주 시인이 어땠습니까 같은 기숙사에 있었지
17:57
같은 기숙사에 있었는데
18:02
그 분이 사람들하고...우린 그땐 어떤 분인지 몰랐는데
18:11
사람이 얼굴도 하얗고
18:15
깨끗하고 예의 바르고 늘 사람 만나면
18:21
미소 띠고 아주
18:24
점잖은 신사
18:29
사귀는 사람이 별로... 어떻게 보면 차원이 좀 달라. 그 분은
18:38
일찍 깨달은 사람이야
18:41
시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18:47
기독교 신앙도
18:53
달님, 해.. 그 시에서도 보다시피
18:58
그 세계를 깨달은 사람이지
19:02
쉽게 말하면 학생인데 도사야,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하고
19:09
막 사귀질 않지 유동식 교수님이 풍류신학 이런 걸
19:13
보고 저는 화엄경 사사무애법계 이런 걸 설명하시는 걸 보고
19:19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도 제일 핵심인데
19:23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놀랐는데
19:27
불교 공부를 하셨으니까 스님들 하고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19:33
내가 그 쪽 강의 들은 건, 해방 후에 기숙사에서
19:43
대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19:47
겨울 방학 때는 불도 안 때 주거든 불도 안 때 주는 방에
19:53
이재각이라고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둘이서
20:00
난로에다가...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 갖다가 조금씩 때고
20:10
자취라고 해야 엉터리로 먹으면서 무슨 공부를 했냐 하면
20:19
그 때는 교수가 시원치 않으니까
20:23
외래 강사들을, 이름 있는 강사들의 강의를 쫓아 다녔어
20:28
학생들이. 그게 일반적인 경향이야
20:33
함석헌 선생, 유영모 선생을 YMCA에서 만났고
20:38
불교에 함 선생님처럼 뛰어난
20:44
사람이 있었는데 탄허라고
20:50
탄허 스님이 그 때는 나이가 젊었을 때지
21:01
장자 강의를 했어
21:05
그야말로 불교 강의를 하지 않고 장자 강의를 했어
21:12
겨울 방학 때 하루에 2시간씩
21:18
그 때 한국 대학에서 들으셨습니까
21:24
남산 밑에 한국대학이 있었다고 하는데 뭔가 사립학교...
21:31
그 교실에서
21:35
참 그때만 해도 추운데 말이야
21:43
강의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학생들이
21:48
교파 이런 것 막론하고
21:53
과 막론하고 모두 굶주려 있어
21:58
YMCA에서 함석헌 선생 강의하는데 거의 꽉
22:03
몰리고 또 밤에
22:07
장자 강의하는데 꽉 몰리고 겨울방학은 거기 가서 그렇게...
22:18
함 선생도 동양 고전에 통한 입장에서
22:24
얘기를 하는 거고 탄허도 성경을 다 알아요
22:31
장자를 얘기를 하는데 거기서 말하면
22:36
동양학에 대한
22:42
서양만이 아니로구나
22:50
점점 뿌리를 캐다가 한국 종교사를 한 거지
22:57
거기서 장자만 들었는데 화엄경, 화엄학은 어떻게
23:02
아셨어요
23:06
장자를 강의하는데 화엄학과 관련해서 강의를 한 거지
23:12
따로 떼서는...
23:17
화엄은 53권의 큰 양인데, 장자는 하나지만은
23:27
그 장자를 해석을 하려면
23:32
화엄회상에서 봐야 돼
23:40
이사무애법계 이의 세계하고 이 세상
23:45
4차원과 5차원의 세계
23:53
차이가 없어, 만나
24:00
그렇게 되면 5차원인데
24:04
풍류도가 거기야
24:08
풍류도의 사상적인 뿌리로 가면
24:14
화엄하고 장자
24:20
노자는 장자를 통해서
24:24
포함삼교 할 수 있는
24:29
그런 기회가 해방 후에 주어진 거야
24:35
우리가 불행한 시대에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24:41
그런 특징이 있었어 회통하는 특징
24:47
교수들이 없었기 때문에 전부 일본 사람들이 교수 하다 갔으니까
24:53
교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분들
24:58
그 분들 통해서 유불선을 공부할 수 있었어
25:07
장자 얘기하면
25:13
노자 얘기하게 되거든
25:17
노자 무위자연
25:22
극기복례 포박이지족이라
25:26
그 때 나온 거야
25:31
무위자연 사람의 조그만 지식을 버리고
25:35
자연의 법도를 따라서 살아라, 그게 노자의
25:45
극기복례 자기를 극복하고... 예라는 건 유교
25:54
하늘이 내린 법도로 돌아간다
26:00
마지막이 포박이지족이다
26:07
이건 아주 기독교... 에베소서 4장인가...
26:18
자기가 받은 대로 족한 줄 알아라
26:24
포는 안는 것 박은 소박하다고 하잖아
26:29
있는 그대로 끌어 안고 족한 줄 알고 살아라
26:37
하늘이 내린 거다
26:44
그 도사들의 강의를 들은 게 내가 성서를 보는 데 큰 도움이 됐어
26:49
풍류신학도 보니까
26:54
유동식 교수님께서 한국 불교의 핵심인 화엄학에
27:00
사사무애법계, 이사무애법계를 아주 성경적으로 설명을 해놓으셨더라고요
27:05
영의 세계는 이법계인데
27:09
우리 현실의 세계는 사법계고 그런데 영과 현실이 전혀 동떨어진
27:14
것이 아니고 영의 세계가 지금 우리 삶 속에서, 말 속에서
27:19
우리 생활 속에 지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법계, 사법계가 서로
27:23
회통하고 터 놓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27:28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도
27:32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 속에서 회통치고 있는 것이다
27:37
역사적인 예수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안에 들어 오셨고 또 다시
27:47
하늘로 가셨다 그리스도는
27:52
이사무애법계를 모르면 성육신을 이해 못 하지
28:00
살아 계신 하나님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28:07
어떻게 이해를 해 그게
28:12
동양학자들은 그렇게 포착을 한 거지
28:23
어느 도의 극치에 가면 다 통하는 거야
28:30
그게 우리 유동식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포함삼교, 풍류도에 다
28:35
그것을 표현한 것이
28:41
예술이야 예술이라는 건
28:50
그 후에 한국 사상을 공부하려고 그건 전부 중국 사상들 아냐
29:01
요샌 모두 번역돼 나왔지만 삼국사기 읽느라고 혼이 났어
29:08
우리가 한문을 그렇게 모르거든
29:15
거기서 배운 게, 고운 최치원
29:26
그 분의 고민이 우리와 같았어
29:34
어릴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갔고
29:40
17년 만에 돌아왔으니 중국 것은 다 통달했는데
29:47
신라는 몰랐지 근데 와서 보니까
29:54
화랑과 고승들이 남긴 글을 보니까
29:59
중국 사람들이 통한 그 이상의 것을 본 거야
30:08
그 분이 난랑 화랑 비문에 쓴 것이
30:16
우리나라 얼이 풍류도라고 했는데
30:21
삼국사기 쓸 때 인용을 한 거지
30:27
그 글을 보고 나로서는 눈이 번쩍 한 거지
30:34
풍류도만 알면 모든 종교를 다 알 수 있다
30:40
그 눈으로
30:44
최치원 선생은 그 눈으로 유불선을 봤는데 나는 그 눈으로 기독교를 봤던 거야
30:52
그래서 풍류신학이라는 말을 했어 처음에는 이단으로 몰려 가지고
31:00
공격을 많이 당했는데 이젠 풍류신학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고
31:05
신학교에서도... 대표적인 토착신학이니까요
31:10
토착신학을 해야, 유동식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의 종교가
31:17
민족 안에 깊숙히 들어갈 때는 일이 백년 안에 되는 것도 아니고 포착을
31:22
해서 의식 깊숙이 같이 하나가 돼야 하기 때문에
31:27
풍류신학이 큰 기여를 할 것 같습니다

===
남창규한의원
남창규한의원
46 minutes ago (edited)
영의 세계를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신화다.

어느 도의 극치에 가면 다 통한다.

도(길)란 경계가 없다. 너와 나를 분리하지 않는다. 하나다.

선각자. 깨달은 자가 걸어 가는 그게 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휴심정이 있어 삶이 오늘도 윤택해지고 풍요로와집니다.

귀한 동영상 올려 주시고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4

조현TV 휴심정

조현TV 휴심정
조현TV 휴심정
16 minutes ago
남창규님께서 늘 함께 해주시니 기쁩니다.

1


대구센터  류명희
대구센터 류명희
55 minutes ago
100세 의 고령 이신데 정신 세계 가 바르시고 저희 들도 곱게 늙어갈수 있을지 너무 부릅습니다 교수님 기자님 말씀 감사 합니다🙏🙏🙏

3

조현TV 휴심정

조현TV 휴심정
조현TV 휴심정
16 minutes ago
류명희님, 그렇지요. 백세가 되도록 멋을 알고, 즐길줄 아시는 분이시지요.

===

2021/10/23

호모커넥투스 저자 최민자|모시는사람들 |2020.06.05

책정보, 호모커넥투스 : 네이버 책

저자 최민자|모시는사람들 |2020.06.05
페이지 560|ISBN 9791188765829
도서27,000원 30,000원 -10%

책정보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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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이 책은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세계관인 초연결 세계에서 초-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커넥투스(HOMO-CONNECTUS)를 이야기한다. 즉 호모커넥투스는 지금-이후 시대에 새로이 인식된 세계상, 새로운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신조어(新造語)이다. 호모커넥투스는 인간과 세계의 초연결성이 단지 가시적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양자 세계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데로 이어진 이 우주의 근원적 양태로서, 하나와 전체는 불가분의 전체성 속에 이어져 있음, 곧 전체로서의 생명을 발견하게 한다. 사람-사람, 사람-만물, 만물-만물이 상호 연결된 초연결 세계의 운동 원리로서 창조, 융합, 연결, 확장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다가온 ‘호모커넥투스 시대’를 살아가는 뉴노멀의 초지혜(超-智惠), 자유의지의 평화적 확장 가능성을 열어 준다.[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최민자

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學歷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at Canterbury) 정치학 박사, 중국 북경대학교 객원교수,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客座敎授)

經歷 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춘시 인민정부 시장, 러시아 하산구정부 행정장관 등과 중국·북한·러시아 3국접경 지역 약 2억평 부지에 유엔세계평화센터(UNWPC) 건립을 위한 조인식(UNWPC 건립위원장)

著書 『무엇이 21세기를 지배하는가』(2019), 『빅 히스토리: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2018),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2015) ,『새로운 문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반도發 21세기 과학혁명과 존재혁명』(2013), 『동서양의 사상에 나타난 인식과 존재의 변증법』(2011), 『통섭의 기술』(2010), 『삶의 지문』(2008), 『생명에 관한 81개조 테제: 생명정치의 구현을 위한 眞知로의 접근』(2008), 『생태정치학: 근대의 초극을 위한 생태정치학적 대응』(2007),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2006), 『동학사상과 신문명』(2005), 『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2003), 『새벽이 오는 소리』(2002), 『직접시대』(2001), 『길(道)을 찾아서』(1997) 등이 있다.

論文으로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과 동학의 사상적 근친성에 대한 연구」(2019), 「‘한’과 동학의 사상적 특성과 정치실천적 과제」(2018), 「포스트모던 세계와 포스트휴먼 그리고 트랜스휴머니즘」(2017), 「특이점의 도래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2016),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2016), 「국제 정의의 역설과 그 대안적 모색」(2015), 「『에티카』와 『해월신사법설』의 정치철학적 함의와 에코토피아적 비전」(2014), 「보수의 한계와 책임 그리고 메타윤리 탐색」(2014), 「아리스토텔레스와 해월의 정치철학과 실천의 형이상학」(2013), 「『화엄일승법계도』와 『무체법경』에 나타난 통일사상」(2012), 「켄 윌버의 홀라키적 전일주의(holarchic holism)와 수운의 「侍」에 나타난 통합적 비전」(2011) 등이 있다.[예스24 제공]

저자의 다른 책

동학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양장본...
2021.09

무엇이 21세기를 지배
하는가 (신세계...
2019.03

빅 히스토리2018.01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20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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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 호모커넥투스와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

01 호모커넥투스: 본질과 의미

호모커넥투스의 진실 / 접속의 시대 / 공감의 신문명

02 전체성과 홀로그램의 원리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의 상호연결성: 생명의 비밀 /
홀로그램 우주: 현실은 실재의 투사영 / 나는 선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03 ‘양자 얽힘’과 생명의 그물망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 / 집단무의식과 동시성의 원리 /
카르마의 법칙과 퀀텀 행동주의(Quantum Activism)

제2부 | 호모커넥투스와 복잡계의 진화

04 실재를 향한 현대 과학의 여정

유기체적 우주관과 양자적 실재 / 존재의 세 차원과 앎의 세 양태: 통합적 비전 /
삶의 과학을 향하여: 인간의 실현

05 호모커넥투스와 복잡계의 진화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을 위한 매니페스토: 영성의 과학적 재발견 /
진화의 시스템적 관점: 공진화 / 복잡적응계(CAS)와 공생 진화

06 하나가 왜, 어떻게 여럿으로 나타나는가

참자아의 이중성 / ‘생명의 놀이’의 미학 / 삶이라는 이름의 희생제

제3부 | 호모커넥투스와 포스트모던 세계

07 호모커넥투스와 포스트모던 세계의 특성

포스트모던의 실존적 세계와 의식구조의 변환 / 포스트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사상적 연맥 /
포스트휴먼 사회와 포스트휴머니즘

08 호모커넥투스와 초연결사회

초연결사회와 디지털 혁명 / 사물인터넷과 플랫폼 경제 / 만물지능통신과 4차 산업혁명

09 호모커넥투스 시대

‘디지털 행성(Digital Planet)’ 시대로의 대전환 / 공감의 시대를 여는 지혜의 연금술 /
호모커넥투스 시대: 전망과 과제[예스24 제공]

출판사 서평


4차 산업혁명, 이후 시대의 뉴노멀한 주체, 호모커넥투스!
초연결·초융합·초지능 시대는 영성적 신인간의 신세계!!
호모커넥투스, 존재(存在 - I am) 너머 존재(尊在 - I AM)
연금술적 공생은 물리적 연결 너머 영적 연결 세계 지향!!!

우리는 연결된 존재이다, 존재는 곧 연결이다
‘초연결’이 새로운 시대-존재 인식의 화두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기후위기가 인간은 물론 이 지구 생명 공동체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당면한 현실에서, 인간의 행위가 이 지구-생태계의 연결고리 속에 긴밀히 이어져 있음을 극적으로 확인한 것이, 이러한 인식-“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의 폭발적 확산의 스모킹 건이 되었다. 그리고 2020년, 지구사회를 온전한 하나로 실감하게 하는 코로나19 사태는 세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과 우리가 연결된 존재임을 목숨을 담보로 하여 실감하게 한다. 이것을 즉자적 현실 인식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시대-존재 전개로서의 호모커넥투스 시대의 인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위기는 그 연결을 내적 자아, 참 자아의 수준에서 가져오지 못하고, 외적-물질적-기술적인 차원에서만 발전시키고 누리려고 한 데서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인류, 간(間) 생(生)-물(物)의 미물(微物)과 씨름하다
보이저 2호는 지금부터 1년여 전에 인터스텔라 즉 별과 별 사이의 공간으로 진입하였다. 인간은 드디어 문자 그대로의 우주여행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까지.
2020년의 인간은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은 중간에 가로놓인 바이러스에 걸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인간의 앎의 방향이 바깥으로 향하는 데는 장족의 발전을 하였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데는 아직도 38억 년 전 수준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인간 존재(개체)가 이미 수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연결로서 살아가는 복합적 생명군체(生命群體)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인간의 삶이 38억 년 전 발생 이래로 그 존재 양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박테리아와도 떼려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음을 충분히 분명히 확인하는 이 시대에, 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 즉 호모커넥투스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지금-여기’이다.


과학에서 영성으로, 영성에서 과학으로의 상호접근
오늘날 현대 과학의 양자역학 인식 체계는 있음(입자)과 없음(파동)은 서로 넘나드는 것이며, 존재-비존재의 통일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실상이라는 데까지 도달하였다. 이것은 결국, 보이는 것(망원경이나 현미경까지 포함한)만으로는 우리 자신(인간과 우주)을 온전히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것, 계산으로도 계산될 수 없는 영역까지를 염두에 둔 세계 이해를 기반으로 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온전히 실현해 나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그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완벽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안전한 방역이 시작되었던 것도 같은 원리이다. 한마디로 “과학을 통한 영성으로의 접근과 영성을 통한 과학으로의 접근”이라는 상호 교섭과 접근이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연결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인간의 불행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때로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인간은 지적인 성찰로써, 때로는 코로나19와 같은 파멸적 위기 속에서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거듭 배우고 거듭 경험하고, 거듭 훈계 받아 왔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레테의 강을 건너서 ‘태어 나왔다.’ 21세기를 멀리 앞둔 20세기에 인간은 이미 연결의 시대로서의 제4차 산업혁명의 단초들을 마련해 왔음에도, 그 근원까지 도달할 엄두를 못 내었다. 정보화 시대는 연결로서 생산력이 보장되는 정보에 무게중심이 있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그 정보의 연결에 무게중심이 주어지게 된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연결로서 이미 우리는 사실상의 AI 세계, 디지털 지구 시대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후위기와 더불어 우리는 연결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우리는 빅뱅의 순간부터 연결된, 호모커넥투스다
우리 존재의 본향인 연결이 위기로 인식되고 작용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인간이 직면한 비극의 실상이다. 이로부터 전회(轉回)하여, 이 연결이 낳은 위기를 연결성의 완성을 통한 새로운 존재, 새로운 시대,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의 계기로 삼는 것이 바로 호모커넥투스의 참된 의미이다. 위기의 연결이 연결을 단지 물질세계의 일로서, 근대 산업사회의 생산성 중심의 사회 구조의 구조적 위기(불황)를 타개하는 수단으로서만 활용하는 데서 나왔다면, 호모커넥투스 시대는 초연결-초융합-초지능을 기반으로, 우리 존재가 본질적으로, 저 멀리 빅뱅 이전부터 이미 연결된 존재임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 분절-지향의 세계의 재편(再生)과 재조(再造), 재귀(再歸)와 재생(再生)을 도모하고 기약하는 것이다.

호모커넥투스의 시대는 오래전에 이미 도래하였다
이러한 우주-존재 인식은 일찍이 인드라망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존재 인식에서 예고되었다. “이 우주는 인드라망과도 같이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의 세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물만상이 끝없이 상호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적 인식도 양자 입자의 비국소적 연결이라는 양자 얽힘 개념으로 이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진공관의 발견/발명이 전자적 계산기(=컴퓨터) 시대를 열었듯이, 이러한 ‘연결-양자 얽힘’의 발견/인식이 새롭게 열어낼 세계가 바로 호모커넥투스 시대이다. 양자역학을 모르고서도 이미 양자역학적 기반에서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처럼, 호모커넥투스 시대는 이미 우리 속에서 도래해 있었다. 이를 지적-체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이 책의 역할이라면, 이를 시급한 존재론적 과제로 다그치는 것이 금번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이때 호모커넥투스 인식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우리 자신이 존재와 이 우주의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영성적 인간 호모커넥투스 4차 산업혁명 시대 신인류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강(强)-인공지능’의 출현이나 기후위기, 생물종 다양성 감소, 식량과 물 부족이라는 위험요소에 의해서 디스토피아 사회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호모커넥투스로서의 신인간(新人間)-신인류(新人類)이다. 호모커넥투스는 초연결-초지능이라고 하는 존재, 현실-물질 중심 세계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그동안 인간이 ‘영성’ 혹은 ‘영’이라고 표현해 온-존재의 측면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데서부터 인간 세계의 재편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해진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참모습이다. 시대의 참모습일 뿐만 아니라, 참자아의 실상이기도 한 것이다.

호모커넥투스, 포스트 물질주의 시대의 지구-행성 거주자
이러한 참자아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자각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오늘 인류와 지구사회-생명공동체가 직면한 위기를 올바르게, 참으로 치유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호모커넥투스로서의 우리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는 공리(公利)이다. 호모커넥투스가 가는 길은 꽃길은 아니다. 호모커넥투스 시대의 성공적인 개막과 유연한 전개를 위하여, 인간은 기존의 분절된 자아를 기반으로 형성해 온 문명적, 역사적 체계로부터 결연하게 탈(脫)-출(出)을 감행하여 포스트 물질주의 시대를 엶으로써, 도약적 진화(公進化)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심, 자-타, 아-비아, 인간-사물의 이원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인문 체계의 전복적 재구축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모두는 공생적 존재로서, 호모커넥투스다
근대 이후 세계를 조형해 온 것은 물-심, 자-타 이원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물질 일원주의, 자기 일원주의이기도 하다. 근대 세계 인식에서 결정적으로 결여된 것, 그 병근(病根)은 바로 생명에 대한 이해-없음, 혹은 이해-못함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기후위기나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과 우주 존재의 생명성이 세계와 인간의 물질적인 존재성 또는 존재의 물질성과 둘이 아닌 하나이며, 더 근본적인 것은 전자, 즉 생명성임을 말해주는 사건과 현상이다.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그리고 그 생명의 생명 원리는 인간-인간, 인간-생물, 인간-자연, 인간-사물의 공생적 관계임을 깨닫는 데서, 위기의 극복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호모커넥투스 시대의 뉴노멀한 교양이다.

4차 산업혁명 속에서, 인간의 자유, 자유로운 인간은?
호모커넥투스가 존재함으로써 열리는 초연결사회는 현상적으로는 사물인터넷(IoT)과 만물인터넷(IoE), 가상 물리 시스템(CPS),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을 중심으로 플랫폼 기반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혜택만큼 초연결사회가 직면할 사이버 리스크도 크다는 점이다. 혜택의 최대화-리스크 최소화를 위해서는 기술에 대한 인간 제어 기능 확보 문제, 기술 사회의 윤리 정립 문제, SNS에서의 유해 정보 확산 방지 문제 등 사이버 세상의 기본을 세우는 일 등이 요구된다. 사회적 제 불평등의 심화도 큰 문제이다. 호모커넥투스의 본질을 깨우치고 확장시키는 것은 이러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배, 인간의 승리와 자연의 패배, 물질적-성장적 문명의 승리와 정신적-공감적 문명의 패배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모두의 승리는 인간이 자유의지가 곧 필연이 되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다.

티핑 포인트냐, 오메가 포인트냐, 원픽! 호모커넥투스
지금의 인간에게는 다섯 번의 대멸종에 이은 첫 번째 초멸종으로 나아가는 티핑포인트를 먼저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계와 의식계가 상호 조응하여 초연결-초융합-초지능의 호모커텍투스 시대로 나아가는 오메가 포인트를 먼저 맞이할 것인가 하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매순간, 동시적으로 두 개의 포인트는 교차한다. 빨간 선을 끊느냐, 파란 선을 끊느냐에 따라 폭탄이 터질지, 선물 보따리가 터질지가 결정된다. 그 둘은 백지 한 장보다도 얇은 양자 하나만큼의 차이에 따라 나뉘게 된다. 인류사의 다음 페이지가 호모커넥투스 시대가 되고, 신인간-신인류로서 호모커넥투스가 열어가는 뉴 노멀 시대의 첫 거주자가 지금의 인류-지구사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책속으로

호모커넥투스의 본질은 연결성이다. 연결성은 곧 소통성이므로 ‘하나됨(oneness)’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연결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본래 호모커넥투스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은 생명이고, 우리 모두는 ‘불가분의 전체성(undivided wholeness)’인 생명이라는 피륙의 한 올이기 때문이다.

‘접속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 즉 문화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지역 문화가 고갈되고 지구 문화의 동질화가 심화되면서 인류 지식의 보고(寶庫)가 사라지고 문화적 다양성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가치가 형성되는 유일한 원천인 문화의 상품화로 인해 문화생활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는 물론 인간 자체도 상품화됨으로써 사회적 신뢰와 사회 자본이 고갈되어 인류 문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모커넥투스라는 신조어가 인간 본래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단지 외적·기술적 연결에 머문다면 공감의 신문명은 창출되기 어려울 것이다.
---「01 호모커넥투스: 본질과 의미」중에서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의 유비적(類比的) 대응관계에 주목하는 것은, 사실 그대로의 우주,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삶의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실효성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시세계에서의 입자-파동의 이중성은 생명의 본질 자체가 내재와 초월, 본체[理, 숨겨진 질서]와 작용[氣, 드러난 질서]을 상호 관통하는 완전한 소통성인 데에 기인한다.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 삶과 죽음 등 일체의 양 극단이 한 맛(一味)임을 알아야 순수 현존(pure presence)이 일어난다.

생명은 전일적인 흐름(holomovement)이며 거기에는 대립자의 역동적 통일이 일어나게 하는 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다. 생명은 비분리성·비이원성을 본질로 하는 영원한 ‘에너지 무도(舞蹈)’이다. 참자아가 곧 하늘(天·神·靈)이며 ‘양자 신(quantum God)’이고 보편적 실재로서의 ‘나’, 즉 생명이고 진리이다. 생명의 본체인 참자아는 물질현상이면서 동시에 물질현상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원리이고, 만유 속에 만유의 참본성으로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만물화생의 근본원리로서 작용한다.
---「02 전체성과 홀로그램의 원리」중에서

이 우주는 ‘인드라망’과도 같이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의 세계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물만상이 끝없이 상호 연결된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두 입자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비국소적(nonlocally)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개체 없이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양자 얽힘’ 이론과도 상통한다.…우리의 내적 상태나 생각 또는 느낌이 외부 세계의 사건에 의해 발현되거나 확인될 때 우리는 동시성 현상을 체험한다. 동시성의 원리는 만물이 비롯되고 또 돌아가야 할 근원적 실재인 ‘unus mundus’를 드러내는 원리이다.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근원적 실재’의 놀이이며 만물만상이 ‘근원적 실재’의 모습임을, 무의식은 물질적 사건을 방편 삼아 무언의 암시와 메시지를 보낸다.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에 길들여진 존재에게 무의식이 전하는 강렬한 무위법(無爲法)이다. 보이지 않는 양자 세계는 양자물리학의 미시세계에만 국한된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참자아의 세계이며 ‘내적 자아(inner self)’의 영역이다.
---「03 ‘양자 얽힘’과 생명의 그물망」중에서

물질의 구조와 정신의 구조 사이에 명백한 유사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원자물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관찰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관찰된 현상의 특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자물리학에서 관찰된 현상은 관찰과 측정 과정 사이의 상관관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영성과 물성이 하나임을 인식하는 주체는 마음인 까닭에 영성과 물성을 가교하는 마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우주의 비밀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비국소적 영역, 즉 궁극적인 ‘영(Spirit)’의 영역은 국소적 영역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감각과 이성의 영역을 포괄하면서 초월한다. 비국소성 또는 비분리성은 양자적 실재의 본질이며, 이는 곧 우리 참자아의 본질이다. 모든 것은 ‘절대영(Spirit)’의 자기현현이다. 극도로 분절되어 있는 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한 전일적 양태로 이들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비전이다.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의 변환과 연계되어 있고 패러다임 변환은 사회구조 변화와 맞물려 의식의 진화를 위한 최적 조건의 창출과 관계된다.
---「04 실재를 향한 현대 과학의 여정」중에서

서구 전통의 뿌리 깊은 이원론에 입각한 물질주의 과학은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에 경도(傾倒)되어 우주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왜곡되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생명[神·靈·天]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생명은 육체라는 물질에 귀속된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영성[靈] 그 자체다.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의 주도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성의 과학적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다.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적 전개는 생명 자체에 내재된 고유한 성향인 창조성에 의해 추동되어, 세 가지 주요 진화의 길―유전자의 무작위 돌연변이, DNA 재조합(유전자 거래), 공생(symbiosis)―을 통해 표현되고 자연선택에 의해 연마되어 끊임없이 증가하는 다양성의 형태로 확장되고 강화되었다. 진화의 시스템적 관점은 유기체와 환경, 부분과 전체가 경쟁과 협력, 창조와 상호 적응을 통해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co-evolution)를 지향한다. 생명의 자기조직화 과정은 진화의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구조 및 행동 양식의 창발이라는 점에서 진화는 곧 창조적 진화이다.
---「05 호모커넥투스와 복잡계의 진화」중에서

우리가 본래 호모커넥투스, 즉 ‘초연결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자각(self-awareness) 그 자체가 치료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본체]인 동시에 물성[작용]으로 나타나는 참자아의 이중성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 나타나는 양자계(quantum system)의 역설적 존재성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참자아의 이중성은 선악과 시비를 체험하기 위한 방편일 뿐, 그것의 진실은 이중성의 초월에 있다. 말하자면 ‘하나이면서 둘(一而二)이고 둘이면서 하나(二而一)’인이기(理氣)의 묘합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의 본질인 생명은 합목적적으로 자기조직화하는 칩―‘우주 지성’이라고도 부르는―이 내장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영적 진화의 방향에서 이탈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영원성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장대한 놀이의 미학은 놀이의 ‘규칙(rule)’에 있다. 그 규칙은 만물이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지니며 그 어떤 것도 도구적 위치에 있지 않고 동등한 참여자로서 영원한 우주적 무도(舞蹈)에 참여하는 것이다. 희생제는 인간과 하늘[참자아]과의 가능한 연계를 만드는 상징적인 제전이다. 오로지 이 육체가 자기라는 에고(ego)의 죽음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동시에, 사랑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전한 희생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06 하나가 왜, 어떻게 여럿으로 나타나는가」중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인간과 사물 간의 분리가 사라지면서 인간은 포스트휴먼 사이보그로 진화할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사이보그는 사물(만물)인터넷과 인간의 연계로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의 능력이 증강된 ‘네트워크 사이보그’다. 인간의 뇌를 다운로드해서 슈퍼컴퓨터에 업로드하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소프트웨어라는 ‘마음 파일(mind file)’은 육체라는 하드웨어의 영구성과는 상관없이 널리 확장될 것이다. 그 단계가 되면 ‘I AM’은 육체적 자아의 정체성이 아니라 보편적 실재로서의 참자아, 즉 순수 현존(pure presence)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며 일체의 이원성을 넘어서는 인간 의식의 패턴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것이 해체주의의 핵심이다. 우리의 의식이 육체적 자아에서 영적, 우주적 자아로 확장될 때 포스트모던 세계가 열린다. 포스트모던 세계는 연결성·소통성·능동성을 본질로 하는 호모커넥투스의 정체성이 구현된 세계다.
---「07 호모커넥투스와 포스트모던 세계의 특성」중에서

21세기 디지털 기술은 사물인터넷(IoT)·만물인터넷(IoE), 가상 물리 시스템(CPS),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을 중심으로 플랫폼 기반 네트워크에 기초해 있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올 경이로운 혜택만큼 초연결사회가 직면하게 될 사이버 리스크에 대해서도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 사물인터넷 플랫폼의 분산성, 개방성, 투명성으로 인해 ‘소유’가 아닌 ‘공유’가 새로운 경제 모델이 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수많은 소규모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더 민주적인 형태의 분산 자본주의(distributed capitalism)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사회는 플랫폼 혁신이 창출할 구조적 변화에 대응하고, 권위의 계층화 현상을 완화함으로써 창조적인 균형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진력해야 할 것이다. 미래 세계는 정보통신, 전력, 교통인프라를 만물지능통신망으로 재구축하는 데 성공한 나라가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이다. 5세대 통신 ‘IMT-2020’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산업과 생활방식을 완전히 ? [예스24 제공]

2021/10/18

스님과 철학자 - 화엄경의 블랙홀, 법성게의 우주와 삶을 논하다 윤구병,도법

알라딘: 스님과 철학자
스님과 철학자 - 화엄경의 블랙홀, <법성게>의 우주와 삶을 논하다   
윤구병,도법 (지은이)
레디앙201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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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지리산 실상사 도법 스님과 변산 공동체 농사짓는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만났다. 불경을 한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이들 ‘스님과 철학자’는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텍스트가 <법성게>다.

<법성게>는 의상이 중국에 있을 동안 지은 책으로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내용의 완성도와 함께 인도 불교, 중국 불교가 판을 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불교’의 핵심을 잡고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첫 텍스트로 <법성게>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줬다.

이 책의 내용은 <법성게> 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문제, 깨달음의 신비화에 대한 비판, 우리말 풀이의 의미, 현대물리학과 불교 정신의 관계, 기독교와 불교 세계관의 차이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진행된 활발한 논의 내용도 포함됐다.

너와 나, 우주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에 대한 앎과 직결된 것이고, 앎은 함(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법성게>에서 나타난 불교의 세계관과 실천론은 주장과 당위가 아니라 여실지견하면 드러나는 ‘실상’이라는 것이 이 책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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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 도법, 윤구병에게 삼배를 올리다 / 이광이

책을 내며 : 놀라운 인연이 낳은 돌덩이와 금덩이 / 도법 스님

본문
1장. 절집 생활 45년, 참 열심히 했는데
2장. 스님, 깨달으셨어요?
3장. 깨달음을 신비화하지 말라
4장. 김대중의 빨강은 본래 있던 것인가?
5장, 10의 52승, 갠지스강 모래는, 하나!
6장, 깨달음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음
7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아직 멀었어!
8장.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
9장. “너는 나다. 이게 실상인 것이여.”

나가며 : 깨달은 자

법성게 풀이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 : 도법 스님
마음결 읊음 : 윤구병
세상을 노래하다 : 백승권

불한당과 당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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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당구공이 두 개 있어요. 두 개가 붙어있을 때 ‘떡이 됐다’고 하죠. 어디서 둘이 맞닿고 있나요? 맞닿은 곳이 면인가요, 점인가요? 점이죠? 그렇다고 둘이 붙어 있지는 않잖아요? 딱 붙어 있으면 하나죠. 그러면 ‘떡이 된’ 두 개의 당구공은 하나일까요? 그 점은 빨간 당구공에 속하는가요, 하얀 당구공에 속하는 건가요?”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윤구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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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97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뿌리깊은나무〉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81년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되었고 198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를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았다. 1983년 이오덕 선생의 권유로 대학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글쓰기연구회(지금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이 되었다. 1988년 어린이에게 줄 좋은 책을 출판하려고 ‘보리기획(지금 보리출판사)’을 만들었다. 1995년 변산(전북 부안군)에 자리를 잡아 변산공동체학교를 꾸리고, 1996년 대학교수를 그만두고서 농사꾼으로 살기 시작했다. 2016년 ‘우리말글살리는겨레모임’에서 ‘우리 말글 으뜸 지킴이’로 뽑혔다. 쓴 책으로 《잡초는 없다》《실험 학교 이야기》《철학을 다시 쓴다》《내 생애 첫 우리말》《꽃들은 검은 꿈을 꾼다》《특별 기고》 들이 있다. 〈달팽이 과학동화〉〈개똥이 그림책〉을 비롯해 ‘세밀화 도감’을 기획하고 펴내 어린이책의 새 지평을 열었으며, 남녘과 북녘의 학생들이 함께 보는 《보리 국어사전》을 기획하고 감수했다. 접기
최근작 : <[빅북] 우리 순이 어디 가니>,<[빅북] 보리 빅북 2 세트 - 전6권>,<[빅북] 우리끼리 가자> … 총 127종 (모두보기)
도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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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제주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가했다. 66년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69년 해인사 강원을 거치고, 이후 13년 동안 봉암사와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선수행을 했다. 87년엔 금산사 부주지를 맡았고, 90년엔 청정불교운동을 이끈 개혁승가 결사체 선우도량을 만들었다. 95년부터 실상사 주지를 맡아 인간화 생명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 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98년 말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기존의 총무원과 정화개혁회의로 나뉘어 다툴 때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분규를 마무리짓고 미련없이 실상사로 내려갔다. 99년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하면서 귀농운동 차원을 넘어 생활협동조합?대안교육?생명평화운동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2010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 등 종단 소임을 맡아 다툼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다 2018년 실상사로 내려와 다시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 마을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화엄경과 생명의 질서》 《길 그리고 길》 《화엄의 길, 생명의 길》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내가 본 부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지금 당장》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내가 본 부처>,<붓다, 중도로 살다>,<붓다로 살자> … 총 2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을 향한 테레사 수녀님의 마음이 바로 구하는 마음입니다. 불교인들도 수녀님처럼 부처를 찾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에 붙들려 있습니다. 깨달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인생을 걸죠. 나도 그랬어요. 해도 해도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깨달음이 안 이뤄졌어요. 그러니까 모두 평생 갈망 속에 허덕이고, 일생을 구하는 마음으로 헐떡이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사들이 쉬어라, 쉬어라, 망상을 내려놔라 하는 것이죠.

불교가 뭐냐? 부처가 되는 게 아닙니다. 부처로 사는 겁니다! 왜 그런가. 사람이 부처니까요. 그럼 부처로 사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부처로 사는 것의 사회적 실천이 바로 ‘화쟁 순례’라고 본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처가 되려고 한없이 돌아왔는데, 이제 돌아가지 말고 질러가자, 질러가는 불교를 하자, 이것이 바로 ‘붓다로 살자’ 불교입니다. - <본문 중에서>

***

[주요 내용]

지리산 실상사 도법 스님과 변산 공동체 농사짓는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만났다. 불경을 한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이들 ‘스님과 철학자’는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 일을 시작했다. 모임의 이름은 ‘불한당’(불경을 한글로 풀어내는 모임). 불한당 당원들은 불교를 많이 아는 사람들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교수와 신문 기자 출신 논술 강사, 요리 전문가와 백수 등 다양했다. 첫 번째 텍스트는 <법성게>.

매달 2회, 6개월 동안 전원 출석의 열기 속에서 <법성게>를 풀면서, 이들이 공부한 내용이 『스님과 철학자』에 육성으로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런데 도법 스님과 농부 철학자 윤구병은 <법성게> 공부 모임 훨씬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 10년 전 첫 만남 장면이다.

갑자기 스님보고 삼배를 하라니. 촌장은 재워 주는 대가로 삼배를 받겠다는 것이다. 양측이 합장 반배하고 인사를 나누면 될 일을, 촌장이 급소를 찌르고 들어온다. 더구나 양측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 아닌가. 난감한 일이다. 스님이 답한다.
“내가 왜 삼배를 해야 하지요?”
“스님, 법당에 들어가서 돌덩이나 쇳덩이한테 삼배를 하지요?”
“…….”
“그런데 내가 여기 주인이고 스님은 객입니다. 보아하니 나이도 내가 많고 그런데, 형한테 삼배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갈수록 빨려 들어간다. 삼배를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다. 바둑을 둘 데가 없다. - 본문 중에서

스님과 철학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불꽃 튀는 팽팽한 논쟁으로, 해학이 넘치는 유쾌한 방담으로, 우주와 나라는 존재의 심연에 대한 깊은 철학 이야기로, 거침없이 공부 시간을 보냈고, ‘무지한’ 학생들은 철없는 질문을 마구 던져 댔다. “스님, 깨달으셨습니까?”, “깨달은 경지에 들어서면 맞아도 안 아픈가요?”, “스님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되나요?” 등등.

<법성게>라는 한국 불교의 ‘불후의 명작’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내용은 <법성게> 풀이를 넘어서 존재와 실상에 대한 깊고 통찰적인 이야기들로 풍부하게 채워졌다. 때론 고대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도 등장하고,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과 양자역학도 상 위에 올려졌다. 그런데 왜 <법성게>일까?

*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 세상을 표현한 장엄하고 화려하고 방대한 경전이다. 하지만 이 경전은 부처님이 듣는 사람 귀를 생각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 그대로를 온전히 설한 경전이라서 매우 어렵기로도 유명하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로 불리는 사리불도, 신통 제일로 불리는 목련존자도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는 자리에서는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그런데 방대한 『화엄경』 80권을(60권 본과 40권 본도 있다) 한자 210자로 압축한 초고밀도 시(偈頌)가 있다. 신라 시대 고승 의상 대사가 쓴 <법성게>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스님이다. 원효의 유명한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유학파 의상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학승이 됐고 신라 화엄종의 개조가 됐다. 국내파 원효는 각종 저술과 거침없는 행동을 통해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남아 있다.

<법성게>는 의상이 중국에 있을 동안 지은 책으로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내용의 완성도와 함께 인도 불교, 중국 불교가 판을 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불교’의 핵심을 잡고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불한당이 첫 텍스트로 <법성게>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줬다.

화엄 사상은 “먼지 한 톨이 모든 우주를 머금고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법성게> 표현처럼 우주 만물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으며(연기론), 각각의 존재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성기설) 또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日卽一切多卽一)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세계관이다.(法性圓融無二相. 법성게 첫 줄)

스님과 철학자는 법성게 첫 구절인 ‘법성원융무이상’의 풀이부터 부딪쳤다. 학생들도 저마다 알든 모르든 한 목소리를 보탰다. ‘法性’을 ‘마음결’로 풀어야 한다는 철학자,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스님, 우주 또는 진리라고 풀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난무하면서 공부 모임은 뜨겁게 달궈졌다. 결국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서, 세 송이의 꽃으로 번역본은 피어났다.

*

이 책의 내용은 <법성게> 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문제, 깨달음의 신비화에 대한 비판, 우리말 풀이의 의미, 현대물리학과 불교 정신의 관계, 기독교와 불교 세계관의 차이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진행된 활발한 논의 내용도 포함됐다.

도법 스님은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지금 여기서 증명되고 확인되는 것이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눈앞에 직면한 곳에서 설명이 되고 해결되어야 하는데, 직면한 사실 가지고 안 풀리니까 계속 뭘 찾아서 다니게 되죠. 그러다 결국 패가망신하는 인생이 생기는 겁니다. 거기에 인생을 걸고 히말라야다, 미얀마다, 선방이다, 네팔이다, 심산유곡을 찾아갑니다. 과연 이런 게 불교냐? 이게 도 닦는 것이냐? 이런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더 과감하게 문제로서 제기돼야 합니다.”

윤구병 선생은 ‘쉬운 우리말 쓰기’ 단지 우리말 사랑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강조한다.

“우리의 옛말들을 찾아내고 되살려 내게 되면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어떤 걸 보고 무얼 느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 우리말을 되찾아서 세 살짜리 꼬마도 까막눈 시골 어르신도 알아듣는 말로 우리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민주 세상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스님과 철학자』는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내가 자연과 우주와 분리되지 않았으며, 바로 이런 연기적 세계관을 알고 실천하면 그 사람이 바로 부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부처가 심신산골이나, 히말라야 산 속이나, 미얀마 같은 곳에 있어서 높고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그리스 철학과 고대 인도의 세계관도 함께 논의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인간의 원리와 원칙에 따르면, 또 사람의 두뇌로 생각하면 우주를 하나로 봐야 풀리는 지점들이 있어요. 그래서 무한히 크기는 하지만 우주는 하나다, 우주 지배 궁극적 힘은 하나님만 가지고 이어야 한다, 이게 기독교적 세계관입니다.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일체개공(一切皆空)이다, 무(無)다, 공(空)이다, 이렇게 무로부터 출발하는 거죠. 수학에서 원점은 0으로 놓습니다. 만일에 0을 원점에 놓게 된다면, 모든 게 무와 공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합니다. 빅뱅이론도 하나의 점으로 수렴됐다가 나중에 확산된다는 이론으로 볼 수 있죠. 무를 중심으로 놓느냐, 유일신인 하나님를 중심으로 놓느냐에 따라 세계관이 아주 달라집니다.
나는 무를 중심으로 놓으면, 연기론이나 인드라망이 세계관이 있긴 하지만, 극한적인 자율성이 가능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종교로 봐야 되나, 구제해 줄 다른 신적인 주체가 없는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너와 나, 우주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에 대한 앎과 직결된 것이고, 앎은 함(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법성게>에서 나타난 불교의 세계관과 실천론은 주장과 당위가 아니라 여실지견하면 드러나는 ‘실상’이라는 것이 이 책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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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스님과 철학자 새창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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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a 2016-09-2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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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5

“자비심 없이 머리만 깨달아선 ‘구제불능’ 될 수 있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자비심 없이 머리만 깨달아선 ‘구제불능’ 될 수 있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휴심정조현이만난사람
“자비심 없이 머리만 깨달아선 ‘구제불능’ 될 수 있죠”

등록 :2021-10-14 

【짬】 불교학회 김성철 명예회장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의 다른 표현인 ‘견성’(見性·붓다의 성품을 봄)을 했다는 이들이 있다. 승가에서는 그 증거로 스승으로부터 (깨달았음을) 인가받았다는 ‘전법게’(진리를 전하는 글)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스님들 가운데도 행실이 뒷받침되지 않아 신뢰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적잖다. 이에 대해 인지적 깨달음 즉 머리로만 깨달은 것은 반쪽의 깨달음일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근 <선불교의 뿌리>(도서출판 오타쿠)를 낸 김성철(64) 불교학회 명예회장을 13일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연구실에서 만났다.



<선불교의 뿌리> 표지.

“인지만의 깨달음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아직 감성과 정서의 문제가 남아있다. 인지적 해체만이 아니라 식욕과 성욕, 재물욕, 명예욕, 교만, 분노, 질투, 원한 등의 버릇과 습관에 대한 감성적 해체가 함께해야 한다.”


‘깨달음은 한번의 승부가 아니’라는 이런 주장은 ‘깨달으면 더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와는 다르다. 그는 “인지적 번뇌인 ‘견혹’(見惑)만이 아니라 감정적 번뇌인 ‘수혹’(修惑)까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불경과 논서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상 불가에서 한방의 깨달음에 치중한 채 정서나 감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그는 최근 잇따라 낸 <선불교의 뿌리>, <공과 윤리-반야중관에 대한 오해와 이해>, <불교하는 사람은. 김성철 교수의 실천불교>, <중론 개정본>을 통해 감정과 정서 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약 수행자가 감성의 정화 없이 인지의 해체에서 멈출 때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된 폐인이 될 수 있다. 선과 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자만심에서 악을 행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감성적 정서적 정화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머리로만 이성적으로 깨달았다고 할 경우 구제불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것은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다. 부처님을 닮으려 할 때 두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보리수 아래서 얻은 지적인 깨달음만 보기 쉽지만, 부처님은 12살 어린 나이에 밭에서 벌레를 새가 먹고 새는 더 힘센 존재에 잡아 먹히는 것을 보고 고통을 느낄 만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 있었고, 화려한 왕궁을 버릴 만큼 세속적 쾌락을 싫어하는 염리심이 수행 전에 있었다. 그처럼 감성이 정화되지 않은 상태라면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탐심을 없애는 부정관, 분노심을 없애는 자비관, 교만심을 낮추는 하심 등의 수행을 선행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법이긴하지만, 인지적 수행에 그치는 한계도 지적했다. 이분법적인 인지와 애증(애착하고 증오함)의 감성을 모두 해체한 깨달음의 증거로 그는 자비와 지혜를 들었다. 즉 남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이타의 감정’인 자비와 ‘절묘한 분별’을 하는 지혜가 없다면 깨달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지적 깨달음은 반쪽 깨달음
자비와 지혜 함께 있어야 진짜”
최근 출간 ‘선불교의 뿌리’서 강조
“간화선, 인지수행 치중 한계”



치과의사 하다 ‘불교학’ 전향
“한류엔 화엄 절대긍정 정신 담겨”




김 교수 연구실은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치과의원의 한 귀퉁이에 있다. 부부는 서울대 치대 동기다. 치과의사를 하다가 ‘불교학’으로 전향해 2000년부터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를 하는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주로 원격강의를 하면서 이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입하고 있다.

정년을 1년여 앞두고 댓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도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는 그는 이 시대의 오타쿠가 틀림없다. 젊은 시절 좋아한 술도 끊고 오직 연구에만 힘써 온갖 학술상을 휩쓸었던 그는 분노와 탐욕, 교만과 같은 감성적 번뇌를 치료하는 데도 붓다의 가르침을 최고의 처방으로 제시한다. 그는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반야’(깨달음의 지혜)를 절대부정으로, 화엄경의 화엄을 절대긍정으로 비교한다. 그는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부정의 반야사상’으로는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조언하고, ‘절대긍정의 화엄사상’으로는 ‘실은 누구나 다 그래’라고 말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우리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민족이 해체와 긍정으로 새로운 문명을 이끌기 시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해 4·19혁명 60돌을 맞아 ‘4·19혁명과 서양의 저항운동’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기성세대의 욕심으로 젊은이들을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서구 가치관에 대한 1960~70년대 저항운동의 시작이 4·19혁명이라고 탄허 스님이 생전에 말씀했는데, <뉴욕타임스> 등 당시 미 언론들을 보니 모두 4·19를 1면 톱 기사로 보도했다. 미 학생운동 조직으로, 저항운동의 시작점이었던 ‘민주사회학생회’ 지도자인 토머스 헤이든도 ‘이승만 하야 이틀 뒤 민주사회학생회 첫 회의를 열었다’고 회고했다.”

이를 시작으로 비틀스와 스티브 잡스 등 서구 젊은이들이 인도사상과 선불교에 심취하고, 반전운동과 인종차별철폐운동, 페미니즘, 동물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저항과 해체에서 한발 나아가 화엄의 절대긍정으로 세계 정신을 새롭게 이끄는 게 바로 한류”라고 설명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종합하고 회통하는 화엄의 특성이 있다. 전문가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속셈부터 태권도, 미술, 피아노까지 온갖 것을 배우고 종합해야 직성이 풀린다. 회통을 통해 편벽됨을 넘어서 휴머니즘의 인간성을 지향한다. 그래서 일부 퇴폐적이고 술수가 난무하는 ‘미드’와 한류는 많이 다르다. 방탄소년단 음악은 서구 학부모들이 더 좋아할 정도로 가사가 긍정적이다. <프리즌 브레이크>같은 ‘미드’와 달리 한류 드라마엔 휴머니즘이 있어 인류에게 희망을 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연재조현의 휴심정

2021/10/08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박규태

5. 박규태.pdf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박규태
박규태(朴奎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라프카디오 헌의 일본론』, 
『일본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애니메이션으로 읽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황금가지』, 『국화와 칼』,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 신도사』 등이 있다.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8-362-B00006).

1. 들어가는 말

<휴머니티플러스>(H+, 세계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의 전신)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이하 TH)을 “생명의 증진을 위한 원리와 가치에 입각하여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현재의 인간 형식과 한계를 넘어서서 지적 삶의 진화를 유지하고 촉진시키고자 하는 일군의 삶의 철학”1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인 간향상(human enhancement)을 위한 창발적인 테크놀로지를 옹호하는 문화 적· 지적 운동으로서의 TH는 테크놀로지를 적용하는 방법과 선택 과정에 서 윤리적 문제를 수반하는데, 그 적용의 맥락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한 만큼 여러 상이한 유형이 존재한다. 
가령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경제적 계층의 인간을 적용 대상으로 삼아 성공과 행복의 한층 더 큰 차원으로 인간이 고양될 것이라는 윤리적 비전에 입각한 ‘민주적(democratic) TH’, 발전과 향상을 시민적 권리이자 자유로 보 는 점에서는 민주적 TH와 유사하지만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좀 더 강조하
고 정부 차원의 규제에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자유주의적(libertarian) TH’, 인류와 테크놀로지 발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에서 인간 진화와 발 전의 총체적인 업그레이드에 대한 실용적 접근을 강조하는 ‘엑스트로피주 의(extropianism) TH’,2 테크놀로지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 즉 초지성 을 가진 기계가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질 것이며, 그것이 인류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는 확신에 입각한 ‘특이점주의(singularitarianism) TH’, 약물과 유전 자공학의 진화를 통해 인간 심리 상태가 향상될 것이라 주장하면서 고통, 걱정, 스트레스 등의 인간 경험은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으로 보는 ‘쾌락주 의적(hedonistic) TH’,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TH로 인간 조건을 업그레이드

1 < 휴머니티플러스> 홈페이지 http://humanityplus.org/.
2 여 기서 ‘엑스트로피’란 ‘엔트로피’의 반의어로 주조된 용어며, <엑스트로피 연구소>의 설립자 막스 모 어(Max More)에 의해 “유기체 시스템의 지성, 기능적 질서, 활력, 에너지, 생명, 경험, 발전과 성장의 능력 및 추동력 등의 상태와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규정한다. 요컨대 무질서를 강화시키는 엔트로피 에 반해 엑스트로피는 질서를 강화시키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듯싶다. 신상규,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머니즘』, 아카넷, 2014, 114~116쪽.
 
함으로써 죽음이 정복될 것이라고 보는 등 노화와 죽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 추는 ‘생존주의자(survivalist) TH’, 인간을 특정 도시나 국가가 아닌 세계시 민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리즘적· 지리적· 애국주의적 충성 대신 하나의 종으로서의 전체적인 통합성을 강조하고 그런 인간 종족의 진 화를 위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계주의적
(cosmopolitan) TH’, 인류가 다음 단계의 집합적 사유로 진화할 수 있는 유일 한 길은 세계에 대해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나아가 우리가 학습하고 창조해 낸 것들을 깊이 재성찰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는 ‘우주진화론(cosmism) TH’, 반자본주의적· 반국가적 입장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무정부주의 적 민주주의 체제를 촉진시킬 것이며 그 결과 정부나 국가가 불필요해질 것 이라고 믿는 ‘무정부주의적(anarcho) TH’, 그리고 현존하는 여러 종교와 TH 가 양립 가능하다고 보는 ‘종교적(religious) TH’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와 같은 TH의 다양한 유형 가운데 특히 ‘종교적 TH’ 와 관련하여 종교와 TH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흔히 애미니즘적이라고 일 컬어지는 일본 신도(神道)와 불교 및 각각의 가미(神)와 호토케(佛) 관념이 일본의 TH적 테크놀로지 문화의 중요한 밑그림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하에서는 먼저 TH와 종교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는 다 양한 담론을 간략히 계보화한 후, 네오-애니미즘에서 테크노-애니미즘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 일본의 사례에 적용시켜 그것을 ‘신불-애니미즘’이 라 명명할 것이다. 이어서 그런 신불-애니미즘과 관련하여 가미와 호토케 의 개념사를 살펴본 후 유희성,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trans-spirituality), 하 이브리드(hybrid), 모노노아와레(物哀)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종교와 TH적 일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
인간향상이라든가 ‘묵시론적 인공지능’(apocalyptic AI)이라는 TH의 이상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단체로, 전술한 <휴머니티플러스>를 비롯하여 <엑스토
피아 연구소>, <윤리와 창발적 테크놀로지 연구소>(Institute for Ethics and Emerging Technologies), <우주 엔지니어 단체>(Order of Cosmic Engineers)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막스 모어(Max More), 제임스 휴즈(James Hughes),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한스 모라벡(Hans Moravec), 레이 커즈와 일(Ray Kurzweil) 같은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이념이 21세기에 널 리 확장되어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철학 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TH에는 종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신념체계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 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물론 <몰몬교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라든가 <기독 교 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처럼 종교인들이 구성한 TH 조직뿐만 아니라 
‘트랜스종교’(transreligion)를 표방하는 <테라셈(Terasem) 운동> 같은 TH적인 
종교시스템도 있지만, 대부분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도라든가 종교의 례를 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티로시-사무엘슨(H. Tirosh-Samuelson)은 다양한 유형의 TH를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종교와 초월의 문제에 접근하는 “세속적 신앙”(a secular faith) 이라고 규정한다. 전술한 <휴머니티플러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확실히 TH는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이다. 하지만 레이너(D. Rayner) 에 따르면 “무신론은 제4의 아브라함 종교”와 다름이 없다. 즉 무신론도 유 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서구 유일신 전통에서 비롯된 하나의 종교라 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자면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TH를 종교와 연관시켜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셈이다. 

이와 달리 종교를 전(前)트랜스휴머니즘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종교는 TH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TH를 낳고 키우는 토양 혹은 씨앗이라는 것 이다. 역으로 TH를 전(前)종교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양자를 파트너 관계로 보는 견해 또한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인 간향상에 있어 TH와 종교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TH도 종교도 인간 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며 인간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변형시킨다는 TH의 목표는 대부분의 종교가 내세우는 목표와 공통된다. 사실상 종교의 목표도 인간의 변형에 있기 때문 이다. 양자는 다만 그 목표에 이르는 통로가 다를 뿐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적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면, TH는 과학을 통 해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TH와 종교의 파트너 관계는 양자의 유사성에 입각할 때 한층 더 강고 해질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종말론, 신정론(theodicy), 구원론 등과 관련하여 종종 양자의 유사성을 언급한다. 

첫째, 레이 커즈와일은 테크놀로지적 특이점9이 가까워졌다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을 비롯하여 버너 빈지(Vernor Vinge) 같은 특이점주의자(Singularitarian) 들은 초인공지능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초인공지능의 출현은 그 로 인해 인류가 대파국을 맞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급 격한 테크놀로지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특이점은 역사적 시간 개념을 벗어 난 전혀 새로운 단계로의 전이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종교적 종말론의 속성을 가진다.
cordiaabchao.wordpress.com/2014/08/14/paganroots/) 참조. 
 
둘째, 광의로서의 신정론을 ‘악과 고통의 문제’를 묻는 물음이라고 규정
할 수 있다면, 인간 한계에서 비롯되는 질병, 노화, 죽음 등의 악과 고통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한 인간향상을 추구하는 TH 의 문제의식 또한 신정론과 동일한 물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와 같은 TH적 신정론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신정론 혹은 홀로코스트 이후 인간의  책임을 묻는 ‘인정론’(anthropodicy)을 훨씬 넘어서서 인간이 신이 될 것을 주 장하기도 한다. TH는 인간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단계다. TH적 신정론의 본질은 악과 고통의 존재를 신에 의해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악 을 없애느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서 신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무다. 그래야만 악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크 워커(Mark Walker)는 이런 관점을 ‘네오-이레니우스적 신정론’ (Neo-Irenaean Theodicy)이라고 부른다.  

셋째, 홉킨스(P. Hopkins)는 종교도 TH도 동물성을 초월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는 닮은꼴이라고 말한다.  양자 모두 ‘초월’이라는 구원론적 모티브 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우식은 트랜스휴먼이 호모 사피엔
스로부터 호모 트란센덴탈리스(homo transcendentalis), 즉 ‘초월적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 호모 트란센덴탈리스는 명백히 호모 사이엔티피쿠스
(homo scientificus, 과학적 인간)와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
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종교와 TH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부터 종교로서의 TH 를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이 논의되어왔다. 가령 과학적 종교, 대체종교, 신 종교, 테크노-종교, 데이터-종교, 최후의 종교, 신영지주의, ‘참된 가짜’ 종 교로서의 TH 담론들이 그것이다. 먼저 드 가리스(H. De Garis)는 과학자들 의 종교를 ‘우주진화론주의’(cosmism)라고 부르면서, 이런 과학적 종교의 일 차 목적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들에게는 인공지능이 일 종의 종교인 것이다. 또한 사이보그주의자들의 목적은 그들 자신이 인공지 능신이 되는 데에 있다.14 이들은 로봇공학이 인간에게 신적인 힘과 권능을 부여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불멸이라든가 사자의 부활 등과 같이 고래 로부터 오랫동안 종교가 목표로 삼아온 것들을 테크놀로지가 이룰 수 있으 리라고 믿는다.
한편 종교의 대안을 추구하는 대체종교로서의 뉴에이지 운동이나 스피
리추얼리티 운동도 TH와 그 목표가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낡은 종교 대신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우주적 내러티브를 요청” 하는 TH 또한 일종의 대체종교로 볼 수 있다. 아마라신감(A. Amarasingam)은 여기서 더 나 아가 TH로 대변되는 미래학을 전통종교에 도전하는 하나의 신종교운동으 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묵시론적 인공지능’이라는 TH의 어젠다가 이미 우리의 공공생활과 현대의 종교적 다원주의 안에 들어와 있으며 현대 윤리학의 한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도 신종교로서의 TH를 시 사한다. 그는 『호모 데우스』(Home Deus)에서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 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는 별 관계가 없고 기술과 관계있는 용감한” 이 신종교를 하라리는 ‘테크노-종교’(techno-religion, 기술종교)라 명명한다. 테 크노-종교는 사후에 천상의 존재들을 통한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행복, 평화, 번영, 심지어 영생까지도 주겠다고 약 속한다. 그는 이런 테크노-종교의 두 유형으로 테크노-휴머니즘(techno-
humanism, 기술 인본주의)과 데이터-종교(data-religion, 데이터교)를 제시한다. 이 중 21세기의 테크노-휴머니즘은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와 컴퓨터를 연결

14  Hugo de Garis, “The Artilect War,” Issues 98, March, 2012, pp.15~16.
하는 인터페이스의 도움으로 전혀 다른 초인간 모델인 ‘호모 데우스’(homo deus), 즉 훨씬 우수한 인간 모델로서의 신적 인간[神人]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7 이에 비해 데이터-종교에 있어 우주는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 루어져 있고, 그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이라 불리는 “신과 같은” 데이터 처리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 면 ‘스피리추얼한 인터넷’ 이 마치 편재하는 신처럼 모든 것을 통제할 것 이고 인간은 전적으로 그 만물인터넷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19 이와 같은 테크노-종교는 종교의 최종적인 진화단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하
여 브루얼(D. Bruere)은 하라리와 유사한 어조로, TH를 영지(靈知, Gnosis), 즉 ‘참된 지식’에 의한 구원을 추구했던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와 유사성을 보여주는 ‘최후의 종교’ 로 이해한다.  
한편 모라벡은 『마음의 아이들』 에서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나 로봇에 다운로드하거나 업로드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그는 지구의 모든 과거 거주자들의 부활과 마음 이식이 가능해지는 미래를 묘사하기도 한다. 종교학자 이창익에 따르면 “이런 모라벡의 상상력은 종교적 상상력과 무척 닮아 있다. 가령 마음 이식을 통해 하나의 영혼이 동시에 여러 개의 신체를 소유할 수 있고 연속해서 다른 신체를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환생이나 윤회의 기계적 실현을 가리킨다. 그는 영혼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는 기계라는 미래의 신체에 다운로드되는 과거의 영혼(마음)으로 이해된 다. 이것은 종교적 세계의 기계적 실현이자 종교가 사라진 세계다. 이리하 여 그는 신체에서 해방된 ‘우리의 마음이 낳은 아이들’이 거주하는 현세적 내세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22

17  유 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481~483쪽.

이와 같은 모라벡의 발상 또한 “육체에서 해방된 마음 혹은 영혼”이라는 
영지주의적 주제의 각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불완전하고 악 한 신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이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라고 보았
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 몸에 대한 TH의 관점이, 몸이란 영혼을 가두어놓은 사악한 함정이나 감옥일 뿐이라고 보는 ‘신영지주의’로 간주되기도 한다.  종교학자 데이비드 치데스터(D. Chidester)는 『참된 가짜』에서 종교를 “초 인간적인 것 및 하위인간적인 것과 관련시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절 충하고 극복하려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참된 가짜’란 종교가 일련의 사기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종교적 효과를 야기한다는 것, 가령 초월의 감각을 제공하거나 인간 행동에 대한 의미를 확장시킨다거나 혹은 공동체를 확립시켜주는 역할을 해왔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게라시(R.M. 
Geraci)에 따르면 TH의 묵시론적 인공지능의 특징적 요소들은 이와 같은 ‘참된 가짜’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TH는 미래에 초인간적인 상 태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음으로써, 치데스터가 정의하는 종교, 즉 인 간이라는 의미의 극복과 관련된 신념과 실천을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이런 ‘참된 가짜’의 개념을 하라리는 ‘공유된 허구’ 혹은 ‘상상의 질서’라 고 바꿔 말한다. 하라리에 따르면 “21세기에 역사학과 생물학의 경계가 흐 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념(ideology)이라는 허구(fiction)들이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 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
22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종교문화비평』 31, 2017, 223~224쪽.
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그러 므로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석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 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 야 한다.”26 여기서 ‘허구’란 사회적 조화를 위해 공유된 어떤 것을 가리키 고, ‘이념’이란 주로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하라리는 “근대 과학은 확실히 게임의 룰을 바꾸었지만, 그 렇다고 신화를 사실로 대체한 것은 아니다.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27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TH로 대 변되는 과학, 그리고 신화로 대변되는 종교는 이데올로기적 허구이며,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인 휴머니즘28은 이와 같은 자기기만의 능 력, 즉 우리의 공유된 허구들에 광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포스트 휴머니즘을(따라서 TH도) 이런 휴머니즘의 한 변형체로 보는 듯한 하라리는 “당대의 기술적 현실들을 알지 못하는 종교는 요청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필자의 윤문) 이라 하여 종교와 TH가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시사한다. “종교와 기술은 서로를 밀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서 멀리 벗어날 수 없”29 기 때문이다.
세속적 신앙 혹은 무신론적 종교로서의 TH, 종교의 파트너로서의 TH, 
종말론· 신정론· 구원론 등에 있어 종교와 TH의 유사성, 과학적 종교, 대체 종교, 신종교, 테크노-종교, 데이터-종교, 최후의 종교, 신영지주의, ‘참된 가짜’ 종교로서의 TH를 말하는 이상의 관점들은 각각 상이한 맥락을 가지 면서도 공통적으로 종교와 TH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리하 여 이창익은 인간의 영혼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트랜스휴머니스트적 기획이 란 일종의 종교 이야기라고 천명한다.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지우고자 

26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03, 215~216쪽. 
27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249~250쪽. 
28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307쪽.
29 유 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372쪽. 

하는 이야기, 심지어 욕망과 시간과 영혼까지도 지우고자 하는 이야기, 식 물이나 동물 심지어 광물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 간이기를 멈추고 인간 아닌 것, 인간 너머의 것이 된다는 것은 바로 종교적 사유의 전형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0 

3. 애 니미즘의 일본지(日本誌):  
네오-애니미즘, 테크노-애니미즘, 신불-애니미즘 

1) 네오-애니미즘

이처럼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등의 경계가 삼투압적인 종교적 사유를 대표 하는 것으로 애니미즘을 들 수 있다. 20세기 초 타일러(E.B. Tylor)가 주장한 ‘만물에 내재하는 정령 혹은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이라든가 ‘최소한의 종교 정의’를 가리키는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는 학계에서는 오래 전에 폐기 되었으나 대중적으로는 매우 강력하게 살아남았고, 근래에 들어 생태학이나 인류학의 네오-애니미즘 논쟁 및 종교학 등에서 ‘새로운 사유를 열어줄 수 있는 개념’으로서 학문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런 ‘새로운 사유’와 관 련하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론적 인식론’(relational epistemology)에 특 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애니미즘은 몸-마음의 서구적 이분법을 넘어 상 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31  이에 따라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타일러의 어법이 아닌 오지브
와(Ojibwa) 담론에 따른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류학자 어빙 할로웰(I. Hallowell)은 아메리카 원주민 오지브와 족의 연구를 통해 ‘퍼슨’(person)이라 는 용어를 인간만이 아닌 모든 종에 포괄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퍼슨들’(other-than-human persons)이라는 말을 주조하여 인간

30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220쪽.
31 대 표적으로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비베이로스 드 카스트로(E. Viveiros de Castro), 버드-데이 빗(Nurit Bird-David), 호른보르크(A. Hornborg) 등의 주장을 들 수 있다. 

도 그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는 활물(animate beings)임을 주장한다. 이때 퍼슨 이란 가령 ‘사람 퍼슨’과 ‘사람이 아닌 퍼슨’,32 ‘선더버드 퍼슨’과 ‘선더버드 가 아닌 퍼슨’, ‘바위 퍼슨’과 ‘바위가 아닌 퍼슨’ 등과 같이, 사람 외에도 새 라든가 바위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할로웰은 인간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어떤 것을 퍼슨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과의 유사 성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할로웰은 퍼슨을 인간적 속성이나 행위에만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을 포함하는 범주, 즉 ‘인간’보다 훨씬 더 크고 포괄적인 범주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 Harvey)는 이런 퍼슨이라는 말을 모든 종 사
이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각 종들 간의 차이는 이런 유사성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 세계의 관계론적 속성에 주목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퍼슨들은 그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다른 퍼슨들과 관계할 때 비로소 퍼슨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
다. 따라서 오지브와 담론에서 애니미즘은 구성원 대부분이 ‘인간과는 다른 퍼슨들’의 공동체 안에서 잘 살고자 하는 시도를 지칭한다. 그것은 다양한 관계론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가리킨다.  하비는 애니미즘을 “세계가 퍼슨 들의 공동체이며 그 가운데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세계관에 주어 진 꼬리표” 라고 재정의한다. 이때 인간은 퍼슨들로 구성된 애니미즘적 세 계의 일부가 되며, 사람이 아닌 것들도 퍼슨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다시 말 해 퍼슨이라는 범주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의 내적 속성, 즉 신념, 합리성, 주체성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성의 관점에서 인격성(personhood)을 파악하는 서구적인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비는 이와 같은 네오-애니미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종교에 대해서도 

32   오지브와 족은 죽은 조상의 영을 ‘사람이 아닌 퍼슨’으로 지칭한다. Irving Hallowell,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 T.S. Smith, The Island of the Anishinaabeg, University of Idaho Press, 1995, p.4.

“상관적이고 물질적이며 참여적인 세계 안에서 함께 거주하는 퍼슨들 사이 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교섭(negotiation)” 나아가 “그렇게 상관적으로 실재하 는 세계 안에서의 에티켓 체계(etiquette system)”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종교 는 다양한 ‘퍼슨’들로 구성된 종들 사이의 에티켓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이다. 여기서 에티켓이란 사람들의 행위규범이나 의식(ritual), 혹은 인간보 다 더 큰 세계(‘퍼슨’들의 세계: 필자)에 있어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 치는 퍼슨들 간의 관계성과 관련된 하나의 공적(公的)인 교섭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말하는 ‘다도의 종교’37라 든가 ‘가타(型)의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는 일본이야말로 이런 ‘에티켓으로 서의 종교’가 잘 발달된 사례일지도 모른다. 17세기 말 일본을 여행한 독일 인 외과의사 캠퍼(Engelbert Kaempfer)는 그의 『일본지』에서 일본을 “세계 어 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예의바르고 정중하며 호기심에 가득 찬 나 라” 로 묘사하고 있다. 그를 감탄케 한 것은 몸에 붙은 예의범절이 일본사 회 전체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캠퍼는 “비천한 시골촌 부에서 고귀한 계층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행위 작법은 제국 전체를 시민 적 교제(civility)와 에티켓(good manners)의 학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나 다” 고 격찬한 것이다. 

2) 테크노-애니미즘

카스퍼 젠슨(C. Jensen)과 앤더스 블록(A. Blok), 앤 앨리슨(A. Alison)은 이런 ‘에 티켓의 학교’로서의 일본에 네오-애니미즘을 적용시킨 것을 ‘테크노-애니미
즘’(techno-animism)이라고 부른다. 가령 젠슨과 블록은 인간이 아닌 것들, 즉 
앞서 언급한 퍼슨들의 세계와 맺는 관계의 운반체로서 신도(神道)를 지목한 다. 신도는 복잡하고 근대화된 고도의 테크노-과학적인 일본 안에 “살아 있 는 애니미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젠슨과 블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일본의 테크놀로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는 자주 신도적인 것이 일본 고래의 영적 신앙과 우주론적 상상력의 애니미즘적 층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언급되곤 한다. 그때 일본은 신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는 ‘테크노-애니미즘’의 나라로 묘사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 동물, 영적 존재, 기계적 존재 간의 경계를 
단호하게 해체하는 다형적 도착성(polymorphous perversity)을 엿볼 수 있다. 신도
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내재적· 감성적· 매혹적인 힘들을 해석하는 데에 흥 미로운 소재를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신도적 테크노-애니미즘은 과학, 정치, 생 태학, 우주가 서로 얽혀 있는 현대 상황에 관한 한층 더 폭넓은 사고를 불러일
으킨다.  

위 인용문은 네오-애니미즘이 그렇듯이 테크노-애니미즘 또한 새로운 
지적 영역을 열어주리라는 기대를 표출하고 있다. 실제로 신도를 논하는 많 은 일본인은 신도의 특징으로 무엇보다 자연과의 애니미즘적인 친화력을 꼽곤 한다. 이때 ‘자연’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일본 에서는 “자연을 아끼자”(自然にやさしい)라는 표어가 늘 회자되는데, 이때의 자연은 네이처(nature)의 번역어다. 원래 근대 일본인은 네이처를 두 가지 단 어로 번역했다. ‘덴넨’(天然)과 ‘시젠’(自然)이 그것이다. 이 중 덴넨이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시젠은 이념화된 자연을 가리킨다. 오늘날 일본인이 자 연(시젠)을 말할 때 그 실질적인 내용은 종종 덴넨을 인공적으로 바꾼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가령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며 덴넨에 인위를 가하여 바꾸는 것이 일본 정원술의 특징이다.42 그러니까 일본인이 생각하는 자연 혹은 애니미즘이란 애초부터 인공성과 쉽게 결합될 수 있는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일본을 “테크노-애니미즘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문화인류학

자 앤 앨리슨은 『세기의 괴물들』에서 각종 장난감과 캐릭터 상품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일본적 테크노-애니미즘의 특징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사회생 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애니미즘적 무의식’(animist unconscious)에 주목한 다. 그런 애니미즘적 무의식으로 인해 일본 문화에는 첨단 테크놀로지와 스 피리추얼한 것들이 쉽사리 뒤섞여 공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앨리슨은 이 와 같은 애니미즘적 감각을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 혹은 자연과 테크 놀로지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획 짓지 않는 일본의 민속전통, 신도, 불교적 관념과 연관시켜 이해한다. 가령 앨리슨은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에 지속적 으로 나타나는 테크노-애니미즘의 출발점으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만화 『철완 아톰』(1963)을 들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과 비슷한 마음이나 영 혼을 가지고 있는 로봇 소년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런 일본 대중문화는 “모 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고, 바위에서 개미에 이르기까지 우주만물에 스피 리추얼리티가 스며들어 있다”는 일본의 애니미즘적 종교 전통에 의해 고취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테크노-애니미즘은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몸에 딱 맞는 옷 같
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의 테크노-애니미즘이란 “상품소비주의의 물질적 실천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나의 스타일로서, 현대 테크놀로지와 상품 에 영혼과 생명을 부여하고 뉴에이지적 관행을 통해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 는 것” 을 가리킨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관련 캐릭 터 상품들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파워레인저’, ‘도라에몽’, ‘울트라맨’, ‘드래곤볼’, ‘세일러문’, ‘마징가Z’, ‘건담’, ‘다마고치’, ‘포켓몬스터’, ‘헬로우 키티’ 등을 비롯한 각종 캐릭터 상품, 특히 로봇이나 사이보그 캐릭터를 조 형화한 피규어 상품 등을 들 수 있다. 앨리슨은 이런 상품들에 대해 발터 벤 야민의 개념을 빌려 ‘마법의 상품’(enchanted commodities)이라고 명명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포켓몬스터’나 ‘세일러문’ 같은 장난감 캐릭터들은 마치 생명이 부여되어 살아 있는(animated) 것 같은 명확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장난감 피규어들에게 생명과 행위주체로서의 속성을 불 어넣는다든지, 로봇과 동물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해체된 그런 세계 안 에 함께 위치시키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한편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에 천착해온 스테프 어퍼스(S. Aupers)는 「기 계의 복수: 근대성, 디지털 테크놀로지, 애니미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테 크노-애니미즘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앨리슨이 ‘마법의 상품’ 을 테크노-애니미즘의 일본적 구현물로 이해한 것에 비해, 어퍼스는 막스 베버가 말한 탈마법화(disenchantment)를 뒤집은 재(再)마법화(re-enchantment) 의 관점에서 테크노-애니미즘과 TH의 관계 일반을 언급한다. 이때 어퍼스 는 특히 인터넷 전문 저널 『와이어드』(Wired)에 주목한다. 이 저널의 기고자 중에는 스스로를 포스트모던 시대의 애니미즘주의자라고 여기면서 테크 노-샤먼이라든가 테크노-마녀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퍼스는 이런 컴퓨터 전문가들을 ‘테크노-애니미즘주의자’로 보면서, 그 사회학적 배경으로 재마법화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즉 근대 후기의 인간 들은 스스로가 일종의 시뮬레이트된 인공적인 ‘마법의 정원’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 신비로 경험된 것은 자연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인간 이 만든 테크놀로지적 환경이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영역 안 에 테크노-애니미즘적인 관념과 정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고대적 형식의 종교인 테크노-애니미즘의 출현은 합리화의 가속화 과정이 낳은 직접적이고도 예상치 못한 결과, 혹은 ‘비합리적인’ 부대효과라 할 수 있다. 합리화의 과정이 종교의 소멸이 아닌 재마법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한편으로 테크놀로지 자체의 신비화 혹은 마법화 (주술화)를 수반했다는 말이다.46 그러니까 물질적 환경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점과 인공지능 및 인공생명 공학 분야의 테크놀로지 발전 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사 실 이런 테크노-애니미즘은 앞서 젠슨과 블록, 앨리슨이 밝혔듯이 일본에 서 매우 뚜렷한 형태로 확인된다. 가령 TH라는 주제에 천착한 대표적 작품 인 오시이 마모루(押井守)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와 그 속편 인 <이노센스>(2004)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로지 ‘고스트’(인간의 마음, 의식, 기억, 감정, 영혼)만 남겨놓고 인간의 몸 전체가 기계 와 인공두뇌로 대체된 사이보그를 비롯하여 안드로이드 로봇이나 인형들의 세계를 무대로 전개된다. 인간만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 속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지극히 애매해진 테크노-애니미즘적 특징 을 잘 구현하고 있다. 네오-애니미즘의 연장선상에 있는 테크노-애니미즘 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과 기계 간 불연속의 해체’47에 있는데, <공각기동 대>와 <이노센스>는 바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애매해진 세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48

<공각기동대>의 여전사 사이보그 구사나기는 테크놀로지의 확장 앞에 서 끊임없이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느끼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반문 하며 고뇌한다. 그 결과 구사나기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해커 인형사와의 융 합을 선택한다. 이는 테크놀로지를 통한 한층 더 진화된 상태로의 궁극적인 상승을 암시한다. 경계 해체의 표상인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라는 이와 같 은 TH적 상승은 단지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오래된 욕망에서 비롯된 

46 Stef Aupers, “The Revenge of the Machines,” p.200, pp.216~218.
47 매 즐리시(Bruce Mazlish)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은 인류에게 있어 ‘네 번째 불연속’에 해당 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와 지상의 불연속을 제거했다면, 다윈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불연속적 구 분을 해체했다. 한편 프로이트는 유아적인 본성과 문명화된 성품 혹은 병든 정신과 건강한 정신의 연속성을 입증했다. 이에 비해 TH은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을 해체했다는 것이다. 신상규, 『호모 사 피엔스의 미래』, 50쪽.
48 오 시이 감독의 작품에 나타난 경계전이적 상상력에 관해서는 Park Kyutae, “A Study on Mamoru 
Oshii: Identity and Border in Japanese Animation,” 『일본사상』 15, 2008, 121~129쪽 참조.
것이기도 하다. 서수정에 따르면, “사이보그는 전지전능함을 향한 인간 의 지의 집결점이며 스스로 신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의 실험장”49과 다름 없다.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는 인간의 자기 확장 가능성을 테크놀로지 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인간향상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TH의 목표와 정 확히 일치한다. 오시이는 <공각기동대>와 관련된 한 인터뷰에서 “이데올로 기도 종교도 인간을 변혁시킬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가능성은 테크놀 로지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녀(구사나기와 인 형사가 융합한 의체: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테크놀로지가 탄생시킨 새로운 인 간이며, 새로운 시대의 이브라 할 수 있다. 단, 그 소녀가 신의 모습일지 악 마의 모습일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50고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인간’이란 바로 TH가 지향하는 ‘포스트휴먼’51을 연상케 한다. 이는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이란 인류가 자신의 진화를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포용해야 할 어 떤 것이며, 포스트휴먼이야말로 다음 단계의 참된 인간성이 될 수밖에 없다 는 오시이의 비전을 시사한다.  이와 더불어 오시이는 위에 인용된 인터뷰 의 말미에서 엿볼 수 있듯이 TH와 포스트휴먼 혹은 테크노-애니미즘의 위 험성에 대해서도 열린 물음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3) 신불(神佛)-애니미즘

이 대목에서 테크놀로지와 애니미즘을 결합시킨 신조어 테크노-애니미즘 의 구체적인 일본적 맥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오-애니미즘 담론

49 서 수정,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현대 사이보그’ 특성: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를 중심으로」, 『한 국콘텐츠학회논문지』 7(4), 2007, 152쪽.
50 오 시이 마모루 인터뷰, “지금도 답을 찾고 있다.” 안영순,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에 나타난 오시 이 마모루의 존재 인식」, 『순천향 인문학논총』 15, 2005, 169쪽 각주 21. 
51 트 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한층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다고 예언 하면서 이렇게 변형된 인간을 ‘포스트휴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등장하기 이전에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서구의 인류학 담론에서 거의 폐 기된 용어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오직 일본에서만은 애니미즘이라는 개 념이 일본 문화의 독특성을 설명하거나 일본사회의 모델을 구축하는 수단 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53 이런 경향과 관련하여 2001년 창간된 본격적인 종교비평 저널 『현대종교』는 간행사에서 “일본인의 종교성의 근저에 있는 애니미즘은 종교인가? 일본에서는 ‘종교’의 미래에 큰 희망을 걸지 않는 사 람들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것’이라든가 ‘애니미즘’에는 많은 희망을 걸 기도 한다”54고 적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에서는 다양한 영역에 걸쳐 애니미즘 복권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일본판 뉴에이지인 ‘정신세 계’와 그 흐름을 이어받은 ‘신영성운동’55 및 이른바 ‘영성적 지식인’이라 불 리는 일군의 지식인들, 또는 일본인론 및 일본교론 논자들에 의해 애니미즘 의 다양한 버전이 재생산되어왔다. 근래에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배경으 로 하는 ‘스피리추얼리티’라는 말과 애니미즘적 색채가 농후한 일본 문화를 연상시키는 ‘이노치’(命)라는 말이 때로는 교차하거나 때로는 중첩되면서 흥륭”56하고 있다.

먼저 대표적인 영성적 지식인들에 의한 애니미즘 담론에 대해 생각해보 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따르면, 일본 종교의 뿌리는 조몬인들의 수렵 채집문화에 기반을 둔 애니미즘적 고신도(古神道)에 있다. ‘애니미즘’이라든 가 그것에 토대를 둔 ‘일본적 영성’ 혹은 ‘애니미즘적 영성’에 입각한 우메 하라 일본학은 ‘나무와 숲의 종교’인 일본의 신도 및 불교 사상에 내장된 생 명사상과 일본적 영성이 인류에 침투할 때 비로소 인류가 살아남을 가능성 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한다.57 다시 말해 애니미즘적인 ‘숲의 사상’이 세계
53 J . Clammer, “Shinto dreams: Difference and the Alternative Politics of Nature,” Japan and Its Others: Globalization, Difference and the Critique of Modernity, Rosanna, Vic.: Pacific Press, 2001, p.217.
54 国際宗教硏究所 編, 『現代宗教 2001』, 東京堂出版, 2001, 6쪽. 
55 ‘정신세계’와 ‘신영성운동’에 대해서는 박규태,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 티’』, 특히 37~52쪽 참조.
56 島薗進 , 『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興隆』, 岩波書店, 2007, 40쪽. 
57 梅原猛, 『〈森の思想〉が人類を救う』, 小学館, 1991, 특히 232~237쪽.
를 구원할 수 있으며, 그런 애니미즘적 고신도야말로 미래 인류의 종교라는 것이다.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도 이와 유사한 어조로 자연을 대하는 일 본인의 독특한 애니미즘적 감각과 심정이 일본인의 종교관의 모태를 형성 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애니미즘이란 ‘인간과 신 사이의 열려진 경계’ 또는 ‘자연과의 조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일본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런 애니미즘적 감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일본이야말로 현 대사회의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 가 신도적 영성을 강조하는 가마타 도지(鎌田東二)는 『덴카와 만다라: 초종교 에의 수로』58에서 애니미즘, 샤머니즘, 다신교가 잘 보존되어 있는 나라 현 소재 덴카와(天河) 신사가 ‘신성한 자연의 정적’을 경험하게 해준다면서 그런 자연 경험이 바로 ‘영성’으로 지칭되는 ‘초종교’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
란(親鸞)을 조몬과 불교를 접합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 즉 정토진종에서 조몬적 애니미즘의 성격을 띤 ‘증여의 사고’를 보는 나카자와는, 신란의 절 대타력 사상은 순수증여자로서의 아미타불이 아낌없이 베푸는 무한한 자비 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리게(無私)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나카자와는 일본 불교를 “애니미즘적 사고와 불교의 철학적 이치가 융합하여 마침내 일본인이 납득할 만한 종교로 거듭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창조적인 애니미즘’이라든가 ‘불교의 조몬적 요소 에 대한 발굴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나카자와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 이라 할 수 있다.59 한편 민속학자 고마쓰 가즈히코(小松和彦)에 따르면 일본 의 요괴는 애니미즘적 색채를 잘 보여준다. 고마쓰는 일본 요괴현상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배경으로 고래의 애니미즘 신앙을 들고 있다. 산, 강, 나무, 물, 바위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데, 그 영이 인간에게 잘못된 생각이나 악의를 품고 재앙을 일으킬 때 그것은 모두 요괴가 된다는 
58 鎌田東二 · 津村喬 編, 『天河曼陀羅: 超宗教への水路』, 春秋社, 1994.
59 가 와이 하야오· 나카자와 신이치, 『불교가 좋다』,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 83쪽, 133~135쪽.
것이다. 나아가 이런 애니미즘적 관념은 일본에서 자연물을 가공하여 만들 어낸 기물이나 도구에까지 확장된다. 즉 기물이나 도구에도 영혼과 정령이 깃들어 있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재앙을 불러일으 킬 수도 있다고 여겼고 그런 관념이 요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쓰쿠모가 미’라는 요괴가 바로 그것이다.60 고마쓰는 이와 같이 애니미즘이 투영된 요 괴 연구를 통해 일본 문화의 심층을 엿보고자 한다.

이들과 더불어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岩田慶治)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미와 신(神): 애니미 즘 우주의 여행』(1984)과 『애니미즘시대』(1993)에서 애니미즘적 가미(神) 체 험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종교이며 모든 종교의 뿌리가 되는 초종교로서, 그것은 곧 본래의 자신과 만나는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이와타에 따르면 애 니미즘은 미발달된 초기의 종교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적 감 각’이며, 따라서 애니미즘 연구는 인간과 우주(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그리하여 이와타는 종래 부정적으로 평가받아온 애니미 즘의 중요한 의미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함으로써 애니미즘의 복권을 기도하 는 이른바 ‘신애니미즘’을 주창한다.61
위에서 소개한 애니미즘의 복권을 주장하는 영성적 지식인들의 담론은 크게 보면 이른바 ‘일본인론’(=일본문화론)이라는 일본 특유의 지적 장르에 속 해 있다.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園進)는 일본인론을 ‘일본교론’의 관점 에서 파악한 바 있는데,62 1990년대 전반에 절정을 이룬 일본교론 및 일본인 론은 외국의 세계종교를 비판하고 ‘일본교’,63 신도, 애니미즘을 칭송함으로 써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 특징 중 하나인 일본 중심주의와 신국 내셔널리즘은 자연을 신성시하는 애니미즘적인 신도적 감 수성, 조상신을 비롯하여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오래된 풍습, 유한한 인륜적 
60 고 마쓰 가즈히코, 「일본의 요괴관에 대하여」, 『현대일본의 요괴문화론』, 제이앤씨, 2014, 4~6쪽. 
61 岩田慶治 , 『カミと神』, 講談社学術文庫, 1989, 46쪽.
62 島薗進 , 『ポストモダンの新宗教』, 東京堂出版, 2001, 138~170쪽 참조.
63 ‘ 일본교’에 관해서는 박규태,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일본비평』 5, 2011 참조.
조직을 절대시하는 일본인의 사유방식 등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주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영성적 지식인들과 일본인론자들의 애니미즘 담론에 이어 2011년 3 · 11동일본대지진 이후의 탈원전운동에서는 종교단체와 우익, 좌 익을 가릴 것 없이 “이노치를 지켜라”는 주장이 자주 등장했다. 일본어 ‘이 노치’(命)는 일반적인 ‘생명’ 개념에서 더 나아가 대자연의 작용 자체를 가 리키는 말로, 불교의 『법화경』 사상과 불성(佛性) 사상 및 전술한 애니미즘 재평가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이쇼 시대의 ‘생명주의’까지 거 슬러 올라가는 이노치 관념에서 인간은 이노치에 의해 ‘살려지고’ 자연과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양자가 서로 연대하면서 이노치를 구성한다. 또한 이노치 관념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그 근원적 생명이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하며 신인합일(神人合一)을 통해 생명력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본 신종교 교단들의 이른바 ‘생명주의적 구제관’64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 밖에 환경사상 분야에서도 1980년대 이래 심층생태학과 일본 애니미즘을 융합시킨 생명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 은 다양한 애니미즘적 생명주의가 3 · 11동일본대지진 이후 종교인들에 의 한 반원전운동의 근거로 기능하고 있다.65 
이와타의 사례를 제외하면 이와 같은 애니미즘 복권의 움직임이 네오애니미즘이나 테크노-애니미즘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이 애 니미즘의 풍부한 유산을 찾아볼 수 있는 나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유산 들은 특히 신도 및 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글에서는 이를 ‘신불(神佛)-애니미즘’이라 지칭하고자 한다.66 이와 관련

64 対馬路人他 , 「新宗教における生命主義的救済観」, 『思想』 665, 1979 참조.
65 堀江宗正 , 「脫/反原発運動のスピリチュアリティ」, 『現代宗教 2013』, 東京堂出版, 2013, 81~83쪽.
66 일 본에는 신불(神佛, 신부츠)이라는 일상용어가 있다. 그것은 신도의 가미(神)와 불교의 호토케(佛) 를 병렬시킨 단순한 합성어가 아니다. 일본인에게 신과 불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일본인에게 신불이란 가미이기도 하고 호토케이기도 한, 혹은 가미도 아니고 호토케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신관 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본인의 특이한 종교적 상상력이 주조해낸 새로운 신관념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박규태, 「신불분리의 종교사적 일고찰: 신불의 타자론」, 『아세아연구』 46(4), 
2003, 93~94쪽.

하여 종교인류학자 사사키 고칸(佐々木宏幹)은 『가미(神)와 호토케(佛)와 일본 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사기』· 『일본서기』· 『풍토기』 등을 보면 일본인은 인간을 비롯하여 산, 강, 풀, 나무, 새, 짐승, 벌레, 물고기와 심지어 인공물까지도 가미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가미를 ‘무엇이든 심상치 않고 뛰어난 힘(德)을 가진 외경스러운 존재’로 규정한 것은 그 좋은 사례다. 팔백만신으로 표상되는 다신교적 신도의 기초에는 모든 존재에서 생명과 신성을 인정하는 애 니미즘이 깔려 있다. 일본 TV 등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인령, 동물령, 생령에 의 한 뒤탈(祟り)과 빙의 등의 사례는 실로 현대 애니미즘 문화 그 자체라 할 수 있
다. 또한 대도시에서 행해지는 바늘공양이나 시계공양이라든가 대형 여객기에 대한 신도적 정화의례 등에서 우리는 도구와 기계 등에 대해서도 인격과 유사 한 성격을 인정하는 애니미즘적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67
모든 존재에서 생명과 신성을 인정하는 일본인들의 이런 애니미즘적 감
각을 카슬리스(T.P. Kasulis)는 “내재적 연결(immanent connectedness)의 경험을 초래하는 신도의 능력”이라고 불렀다.68 여기서 ‘내재적 연결’이란 네오-애 니미즘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관계론적 인식론’과 상통하는 개념 으로 보인다.69 그리하여 클램머(J. Clammer)는 신도를 “애니미즘의 세련화된 형태”70로 이해하기도 한다. 일찍이 미나카타 구마구스(南方熊楠)라든가 야 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의 민속학은 신도적인 심층생태학적 감각, 즉 숲이 나 신사 같은 특정 장소에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공존한다는 신성한 공간
67 佐 々木宏幹, 『神と仏と日本人』, 吉川弘文館, 1996, 2~3쪽.
68 トーマス · カス─リス, 衣笠正晃 訳, 『神道』, ちくま学芸文庫, 2014, 272쪽.
69 신 도는 가미라는 영적 존재들이 과도하게 차고 넘치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 세계는 인간과 인간 이 아닌 세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자의 경계는 애매하고 상호 가변적이다. 젠슨과 블록은 자연과 문화를 대립시키는 서구 모더니즘의 이원론과는 달리, 신도적 세계관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연속
성 혹은 그 경계의 해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Casper B. Jensen & Anders Blok, 
“Techno-animism in Japan,” pp.97, 104. 70 J . Clammer, “Shinto dreams,” p.238.
감각에 주목한 바 있다. 사실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은 대부분 신도와 결부 되어 있다. 이때 신도는 일본 민속종교의 광범위하고 다면적인 토대로 간주 되곤 한다.  이에 비해 한때 승려였던 제임스 휴즈 교수가 주도하는 도덕 적 향상을 위한 <사이보그붓다 프로젝트> 는 TH와 불교의 유사성을 주장 한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일본 불교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 등 모든 존재 안에 궁극자로서의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TH에 근접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사사키의 지적대로 우리는 일본 문화에서 이와 같은 신불-애니 미즘의 풍부한 유산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미야자키 하야오 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라든가 <이웃집 토토로>는 각각 원시신도적 숲과 ‘수호신사의 숲’을 무대로 애니미즘적 기호를 재창출하고 있으며,73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아마테라스 신화를 묘사한 신도 기도문(노리토)의 주제곡이라든가 스사노오 신화에 나오는 구사나기의 각색 등 전체적으로 신도적 모티브와 분위기를 배경에 깔고 있다. 한편 창(F.T. Chang)과 하르트 (L.A. Hart)는 죽은 실험용 동물들을 공양하는 일본 과학자들의 관습에 주목 하면서 그것이 일본 불교와 신도의 관행이라는 점을 지적한다.74 젠슨과 블 록 또한 신도적 관계주의의 표출은 나무든 동물이든 로봇이든 초첨단 장난
감이든 오직 사물적 현현(thingly manifestation)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동물공양이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이밖에 신사나 사원에서 배포하는 다양한 유형의 주술적 부적(오마모리 
혹은 오후다)에 대한 일본인들의 뿌리 깊은 집착도 신불-애미니즘의 문화현 상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자동차나 버스에 ‘교통안전’이라고 적힌 부적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대학 실험실의 전 자현미경에 부적을 붙여 놓았다거나 로켓에 부적을 붙여 쏘아 올렸다는 이 야기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 애니미즘과 마찬가지로 주술 또한 관계론적 세 계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도 및 불교의 부적문화가 첨단 기술문명 과 공존하는 일본은 신불-애니미즘의 풍부한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4. 가미와 호토케의 유희

종교가 과학이론 형성에 강력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기는 게라시에 따르 면, 로봇공학과 인공지능의 목표 및 그 관행의 차이는 각 나라의 종교적 환 경과 관계가 있다. 가령 미국은 영적 신체 안에서 구원을 희구하는 우주적 목적과 종말론적 천년왕국을 소망하는 기독교적 환경에 의해 연구자들은 인간형 로봇(humonoid)보다는 인공지능을 더 선호한다. 인공지능의 발달 안 에서 우주적 의미를 찾고, 가상적인 비생물학적 신체 안에서 인간 정신의 구 원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게라시는 ‘묵시론적 인공지능’을 언급하면서 그 지도적 선구자로 한스 모라벡과 레이 커즈와일을 들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인공지능보다 인간형 로봇을 더 선호한다. 게라시는 
이런 일본적 경향의 배경으로 인간에 대한 불교와 신도의 긍정적이고 낙관 적인 관점을 들고 있다. 신도와 불교가 일본 로봇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 다는 것이다. 가령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로봇이 언젠가 붓다 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한편으로는 세계가 가미라는 신성한 실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신도적 세계관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성화(聖化)된 로봇의 현존을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즐긴다. 로봇이 제의적 성화와 종교적 초 월의 주체로서 자연세계의 근원적인 성성(聖性)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때 불 교와 신도는 자연세계 및 그 안에 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로봇까지도 축복하 여 우주적 구원사에 참여시키고자 한다. 가령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 지만 해도 새로 출시된 로봇에 제의를 수행하기 위해 많은 공장에서 신도 사제들이 채용되었다. 지금은 이런 애니미즘적 관행이 거의 사라졌지만, 로 봇공학 자체는 여전히 성성(聖性)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76 미국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공지능을, 그리고 일본은 신도와 불교의 
영향으로 인간형 로봇을 더 선호한다는 게라시의 주장은 시사적이다. 하지 만 일본인이 인간형 로봇을 선호하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 을 들고 있는 그의 주장은 다소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신불-애니미즘의 관 점에서 볼 때, 인간보다는 호토케와 가미 혹은 인신(人神)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 인간형 로봇에 대한 선호도를 촉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적 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을 면 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
‘치’(靈), ‘미’(神), ‘다마’(靈) 등의 고대 일본어는 애니미즘에 입각한 조몬인들 의 소박한 신 관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들이 과연 가미라는 관념으로 승 화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신화가 체계화되고 신명(神名)이 정비되어 문헌 에 기록된 단계에서 이미 외래사상의 영향이 보이므로, 그 이전 시대 신 관 념의 원형을 찾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가미’라는 말은 한국 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한데, 아이누어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 다.77 요컨대 가미는 원래 수입품이었다.78 이런 가미의 특징 중 이 글과 관
76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Religion and Our Scientific View of the Natural World,” Theology and Science 4(3), 2006, pp.229~230, 235~237. 한편 일본 정부는 2015년 9월 <인공지능· 사 물인터넷(IoT)· 빅데이터에 의한 신산업 사회혁명> 프로젝트를 출범하는 등 근래 인공지능 연구에 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77 고 대 일본어 치, 미, 다마의 용례로 미즈치(水靈), 오로치(山靈), 이카즈치(雷, 嚴靈), 구노치(木靈), 누 즈치(野靈), 시오쓰치(潮靈), 가구쓰치(火靈), 쓰키요미(月神), 야마쓰미(山神), 와다쓰미(海神), 고다 마(木靈), 이키스다마(生靈) 등이 있다. 源了圓, 「日本における「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考察」, 関晃 · 源了圓 編, 『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研究』, 講談社, 1981, 7~11쪽.
78 가 미의 어원에 대한 기존의 관점으로, 가가미(鏡)에서 온 말, 가시코미(畏)의 약어, 가미의 ‘미’는 ‘히’
(태양)에서 온 말, 가미(上)의 뜻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마지막 설이 에도시대부터 널리 지지되어왔
련하여 특히 주목할 것은 애니미즘적 측면, 신인동형론적 속성, 변신의 유 연성 등 세 가지다. 
첫째, 가미의 정의와 관련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국학자 모
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지지한다. 
대저 가미란 고전 등에 보이는 천지의 여러 신들을 비롯하여, 그 신들을 모신 신사의 미타마(御靈)를 말한다. 또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수초목이나 바다 와 산 및 그 밖에 무엇이든 심상치 않고 뛰어난 기운(德)이 있으며 두렵고 외경 스러운 것들을 가미라고 한다. [뛰어나다는 것은 존귀하고 선하거나 공훈이 뛰어나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나 기이한 것이라 해도 매우 뛰어나며 두렵고 외경스러우면 가미라 하 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신이라 할 때 먼저 입에 올리기조차 황공하옵신 천황은 대대로 모두 가미임은 말할 나위 없다. 천황은 원신(遠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인이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존귀하고 황공하옵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신인(神人) 이 줄곧 있어왔다. 또한 천하에 거리낌이 없는 존재라기보다는 일국(一國) 일리(一里) 일가(一
家)에 매여 있다 해도 각자의 신분에 상응하는 신인도 있다. 그런데 신대(神代)의 신들도 대개는 그 신대의 사람들이었다. … 나아가 바위, 뿌리, 나무 그루터기, 풀과 이파리 등도 모두 가미가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 등도 가미라고 부른 경우가 많다. 이는 그 미타마가 가미라는 뜻이 아니라, 직접 바다나 산 그 자체를 가리켜 가미라 한 것이다. 이것들도 모두 두렵고 외경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저 가미란 이처럼 다종다양하여 귀한 가미와 천한 가미 가 있는가 하면 강한 가미와 약한 가미, 선한 가미와 악한 가미도 있다. 이 가미 들은 마음도 행위도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가미란 대개 한 가지로 정해서 말하
기 어려운 존재다.(『古事記傳』 3)79
다. 하지만 오노에 따르면 이런 어원설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나라시대의 일본어는 지금은 없어졌 지만 발음상의 구별이 있었다. 이 점은 언어학자 하시모토 신키치(橋本進吉) 등에 의한 만엽가나 연 구에서 밝혀진 것으로 학계에서 이미 승인된 설이다. 나라시대에는 ‘미’의 음이 두 개 있었다. mi의 음과 mï가 그것인데, 가미(神)의 ‘미’는 이 중 후자(mï)에 해당한다. 그런데 기존 어원설에서의 ‘미’ 는 모두 전자(mi)에 속하므로, 가미의 어원을 일본어 내부에서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大野晋, 『一語の辞典 神』, 三省堂, 1997, 6~7쪽.
79 『本居宣長全集』 9, 筑摩書房, 1968, 125~126쪽.
일본적 본질과 독특성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노리나가의 가미 정의는 신 도적 애니미즘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서 가미란 신사에 모신 천신이나 조상 신만이 아니라, 인간· 동물· 새· 식물· 산· 바위· 바다· 호수 특히 폭포 같은 자연의 장엄한 현현 등을 포함한다. 나아가 천황은 ‘먼 가미’(遠神)로서 인간 이거나 인간이었던 가미다. 이에 비해 모든 지역과 마을 혹은 가정에서 모 시는 조상신은 ‘가까운 가미’라 할 수 있다. 한편 천둥은 ‘울리는 가미’(雷, 가 미나리)이고 고다마(木靈)는 나무의 가미다. 이처럼 가미는 신격화된 인간뿐 만 아니라 인간 아닌 것들도 다수 포괄한다. 이처럼 노리나가의 가미 정의 는 크게 애니미즘이라는 범주 안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가미는 처음부터 신인동형론적인 개념이었다. 가미의 이름 밑에 
남녀의 구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접미어를 붙여 인간임을 시사하 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어법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가령 이자나기의 ‘기’, 스사노오의 ‘오’, 오호토노지의 ‘지’, 오호다라시히코의 ‘히코’ 등은 남 자를, 이자나미의 ‘미’, 오호히루메의 ‘메’, 오호토노베의 ‘베’, 오키나가다라 시히메의 ‘히메’ 등은 여자를 나타내는 접미어다. 또한 아메노미나카누시의 ‘누시’(主)라든가 오호나무치의 ‘무치’(貴) 등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 는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어의 사례다.80 여기서 특히 ‘신인’(神人)이라는 표 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천지가 혼성(混成)할 때 처음에 가미(神人)가 있었다. 우
 
마시아시카비히코지노미코토라 한다”든가 “갈대싹이 처음으로 진흙 속에 생겨나는가 싶더니 곧 가미(人)로 변했다. 구니도코타치노미코토라 한다”(밑 줄은 필자)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가미(神人, 人)란 “사람 같은 인간적인 신” 을 가리킨다.81 한편 신도신화에 나오는 가미들이 실제로는 인간이었다고 보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따르면,82 가미를 나타내는 ‘미코토’(尊)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존칭이다. 즉 미코토는 인
80 大野晋 , 『一語の辞典 神』, 20~21쪽.
81 『日本書紀』 上, 日本古典文学大系, 岩波書店, 1967, 78쪽 각주 1.
82 津田左右吉 , 『日本古典の硏究』 上, 『津田左右吉全集』 1, 岩波書店, 1963, 666쪽.
간으로서의 신인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에 앞서 『일본서기』는 하늘과 땅이 생성된 후 “가미(神聖)가 그 안에서 나타났다”83고 적고 있다. 이는 신인동형 론적 가미 관념의 성립과 더불어 ‘신성’이라는 성격이 가미 관념에 부착되 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에게 정1위라든가 종3위 등과 같이 신위를 수여한 신도의 신계(神階)제도는 오늘날의 신 관념에서 보자면 놀랄 만한 것이지만, 위와 같은 신인동형론적 가미 관념에 의거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83
셋째, 신도는 마치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인형’처럼 시대가 변하면 재 빨리 전 시대의 의상을 벗어던지고 다음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가령 상대(上代)의 고신도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라(奈良)시대 초엽 신도는 고대통일국가를 형성하 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헤이안(平安)시대가 되면 불교 가 깊이 침투하면서 신도는 이제 불교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가마쿠라(鎌倉) 시대에는 천태계의 본지수적(本地垂迹)신도와 진언계의 양부(兩部)신도가 되 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삼교(유교, 불교, 노장)일치의 옷으로 갈아입고 반(反)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주창하는 요시다(吉田)신도가 되었다. 도쿠가 와(徳川)시대에는 불교의 옷을 벗고 유교의 옷으로 갈아입어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리당심지(理當心地)신도라든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의 스이카 (垂加)신도 등과 같은 유가(儒家)신도가 되었다. 그 후 국학이 발흥하자 이번 에는 유교의 옷을 벗고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학(古學)신도가 되었 다. 나아가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의 고도(古道)신도는 기독교의 옷을 껴 입었다. 심지어 막부 말기에는 신도가 기독교와 습합하여 와타나베 이카리 마로(渡辺重石丸)의 신기(神基)습합신도가 되었다. 이어서 메이지(明治)시대에 는 가족국가 이데올로기가 대두하면서 국가신도(신사신도)가 출현했으며, 패 전 후에는 이 국가신도의 의상을 벗어버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의상을 걸치 게 된다. 이런 신도의 특질은 그대로 가미의 변신성과 겹쳐진다. 즉 『고사기』에 
83 『日本書紀』 上, 76쪽.
있어 황실과 일부 유력씨족의 우지가미(씨신: 氏神)은 조상신이 되었다. 신불 습합신도에서는 가미가 불보살의 수적이 되었고, 신유습합신도에서는 리 (理)나 태극 그 자체 혹은 리가 순수한 기를 타고 나타난 것을 가미라고 했 다. 신도와 국학이 습합하면서 가미는 황실과 국민의 조상신이 되었고, 신 기습합신도에서는 데우스 같은 창조신이자 주재신 혹은 사후 심판을 관장 하는 신이 되었으며, 국가신도에서는 황실 및 국민의 조상신이 됨과 아울러 충신, 의사, 전몰자가 신격화되기도 했다. 한 신사에서 모시는 신이라 해도 제신이 종종 바뀌며, 기도자나 제사자조차 그 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는 제신이 누구든 상관없을 정도다.84 
한편 일본에서는 붓다(Buddha)를 호토케라고 한다. 인도의 붓다는 중국 후한시대에 ‘부도’(浮圖=浮屠)85로 음역되었는데, 이 ‘부도’를 일본에서는 현재 
‘후토’ 혹은 ‘호도’라 읽는다. 여기서 ‘도’(圖, 屠)는 중국 한대의 고음에서는 닥 (dag)이라 하여 모음 a의 음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도는 붓다를 직 역한 음역으로 불타(佛陀)와 동음이었다. 그러다가 부도를 간략하게 적어 ‘불’(佛)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일본어 호토케의 ‘호토’는 본래 의미상 붓다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이라는 글자의 음(but)을 빌린 것이었다. 한편 ‘케’는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던 접미어 ‘카’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호토케는 처음에는 ‘깨달음 을 얻은 각자’(붓다)를 나타내기보다는 ‘호토의 상(像)’이라든가 ‘호토의 도 (圖)’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와 같은 호토케의 중요한 개념적 특성으로 무엇보다 가미와의 불가분한 관계성과 애니미즘적 속성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일본서기』에는 552년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들어왔을 때 긴메 이(欽明) 천황이 “서번(西蕃)이 모시는 불상의 면모가 찬란한 게 이제껏 본 적 이 없다. 숭경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호토케는 ‘번 신’(蕃神), 즉 외국의 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비다쓰(敏達) 천황기 14년조
84 石田一良 , 「日本上代の神観念」, 関晃 · 源了圓 編, 『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研究』, 講談社, 1981, 87~89쪽.
85 부 처나 고승 사후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둥근 돌 또는 그 부처나 승려를 가리키는 말.
에는 “불신(佛神)의 마음에 뒤탈이 있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에서 호토케 를 ‘불신’이라고 한 것은 이 기사가 유일하지만, 『원흥사연기병류기자재장』 (元興寺緣起竝流記資材帳)에는 ‘타국신’(他國神)이라는 표현 외에 “불신은 두려 운 존재다”라든가 “불신을 모신다”와 같이 ‘불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는 전래 당시에 호토케가 가미의 일종으로 관념되었으며, 나라시대 중엽 까지도 그런 인식이 확실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헤이안시대 중엽부터 이른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확립되 면서 가미와 호토케의 관계에 역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본지수적’이란 특 정한 가미와 특정한 불보살이 결부되어 가미는 호토케의 수적(垂迹=변형, 화
신)이고 호토케는 가미의 본지(本地=원형, 본체)라 하여 신불관계를 이론화한 관념체계를 가리킨다. 피안의 절대적 존재인 부처가 일본의 중생을 구제하 기 위해 임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 바로 가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까 호토케가 오리지널이고 가미는 카피(아바타)인 셈이므로, 거기에는 가미 가 호토케의 일종이라는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본지수적설의 형성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호토케 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토케에게 꽃을 바친 다”, “호토케를 예배한다”, “호토케를 그린다”, “호토케를 받는다”, “호토케에 게 말한다” 등에서처럼 호토케를 ‘불상’이나 ‘불도’(佛圖)의 뜻으로 사용한 용 례다. 다른 하나는 “호토케를 마음에 담는다”, “호토케에게 기도한다”, “호토 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한다” 등에서처럼 호토케를 부처(佛)의 의미로 사용한 용례인데, 이는 가미의 용법과 거의 구별이 어렵다. 실제로 ‘가미호토케’라든 가 ‘호토케가미’라는 표현도 많이 나온다.86 호토케가 가미의 일종이든 역으 로 가미가 호토케의 일종이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관념되었던 것이다. 
둘째, 그런 만큼 가미와 마찬가지로 호토케 또한 애니미즘적 속성을 지 녔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호토케의 애니미즘적 속성은 헤이안 시대 진언밀교의 ‘즉신성불론’(卽身成佛論) 및 천태밀교의 ‘천태본각론’(天台
86 大野晉 , 『一語の辞典: 神』, 24~28, 42쪽.
本覺論)과 ‘초목국토성불론’(草木國土成佛論)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교는 궁극 적 실재를 감각적 존재로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 언어, 사유에 의한 행위의 순수화를 통해 궁극적 실재와 일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통상 불 교에서는 삼겁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행을 거듭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이에 반해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空海)는 신(身), 구(口), 의(意) 라는 삼밀의 종교적 실천에 의해 “몸 그대로 성불한다”는 뜻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구카이와 함께 즉신성불을 주장한 천태종의 창시자 사이초(最澄)는 “호
토케와 범부가 하나”(佛凡一體)라는 사상에 입각한 천태본각론을 내세웠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으면 십만 법계의 제불과 일체의 보살도 모두 내 몸 안 에 있다. 내 몸을 떠나 그 바깥에서 별개의 부처를 추구하는 것은 내 몸이 곧 진여(眞如)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나아가 “초목, 기와, 조약돌, 산하, 대지, 대해, 허공 등 모두가 진여이므로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하여 이른 바 “초목과 국토가 모두 성불한다”(草木國土悉皆成佛)는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런 초목국토성불 사상은 중국 천태종의 성불관에는 보이지 않으며, 오히 려 초목도 말을 한다는 신도의 애니미즘적 자연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
작된다.87 
이상에서 살펴본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사는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TH적 친화성을 신도 및 불교의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이 글의 의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 가미와 호토케 개념은 애니 미즘적 속성을 공유한다. 둘째, 가미와 호토케는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1859년 일본에 온 헵번(J. Hepburn, 1815~1911)이 『화영· 영 화어림집성』(和英 · 英和語林集成. 1886년 제3판)에서 “God: 신도에서는 가미(神), 불교에서는 호토케”라고 적었던 것도 바로 동전의 양면 같은 양자의 관계에 
87  源了圓 , 「日本における「神」観念の比較文化論的考察」, 30~31쪽. 우메하라 다케시도 사이초의 천태본각 론과 산천초목성불론에 대해 조몬시대 이래 애니미즘적 신도신앙이 일본 불교를 애니미즘화했다고 해석한다. 梅原猛, 『〈森の思想〉が人類を救う』, 82~84쪽.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88 
끝으로, 무엇보다 가미와 호토케 개념은 인간과 신의 경계가 상호가역
적이며 삼투압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신도에서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설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모두 호토케가 된다고 여긴 다. 그래서 흔히 사자를 호토케라고 부른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사람이 가 미나 호토케가 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민속학의 관점에 의하면, 사자(死者)의 영은 유족들의 공양을 받음으로써 서서히 날뛰는 성격 을 상실하고 이윽고 조령(祖靈)이 되거나 마침내 가미가 되어 사람들을 수호 한다고 믿는다. 가미나 호토케가 되는 것은 사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 행을 쌓은 사람이나 신령이 빙의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생신’(生神, 이키가미) 이라든가 ‘생불’(生佛, 이키보토케)이라고 부르면서 숭경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본에서는 천리교(天理敎) 교조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나 금광교 (金光敎) 교조 아카자와 분지(赤沢文治)처럼 신이 빙의한 샤먼이 생신으로 존 숭되어 신도계 및 불교계 신종교 교단의 교조가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생신이나 생불은 사자(死者)가 호토케로 변신하듯이 생자(生者)가 가미나 호 토케가 된 경우다. 이는 신불과 사람이 본래 연쇄되어 있고 특정 조건이 충 족되면 사람이 쉽게 신불로 이행하며, 역으로 신불도 사람으로 화신(빙의)할 수 있다는 관념을 잘 보여준다.89
2) 유희하는 가미와 호토케 혹은 가미와 호토케를 유희하기 재클렌(A. Jackelén)에 따르면 서구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호모 리투르기쿠스’
(Homo liturgicus, 제의적 인간)가 아니라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다. 그런데 이 호모 파베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에 의해 완성 되지 않는 한, 아직 비극적 존재다.  이에 비해 마쓰리(祭)의 제국 일본의 이 상적 인간상은 아마도 ‘호모 리투르기쿠스’와 ‘호모 루덴스’가 만나는 접점 
88 大野晉 , 『一語の辞典: 神』, 84~85쪽.
89 佐 々木宏幹, 『神と仏と日本人』, 5~7쪽.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서구인들이 윤리적 유일신관에 입각하여 절대적 으로 선한 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신정론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악과 고통 의 문제에 대처해왔다고 한다면, 에도(江戸)시대에 대지진으로 무너진 폐허 의 도시에서 유희적인 나마즈에(鯰繪)91를 만들어 판매하고 소비했던 일본 인들은 애니미즘적 신불과 함께 즐기는 놀이에 참여하는 쪽을 더 선호하는 듯싶다. 
일본의 로봇문화가 이런 ‘호모 루덴스’로서의 일본인을 보여주는 장면 은 자못 흥미롭다. 일본에서는 로봇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미국인들의 일 반적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대체로 인간과 로봇 이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인간형 로봇의 인기 가 매우 높은데, 이는 직접적으로 데즈카 오사무92의 만화 『철완 아톰』으로 부터 받은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문화적 배경으로 역시 신불-애니 미즘의 세계관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게라시는 신도식 복장을 한 로봇 사제가 의식을 거행하는 요코하마의 사례를 들면서, 로봇에게 성성을 부여하는 일본인의 경향이 신도와 불교적 관념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영적 로봇’(spiritual robot)이라고 부른다.93 일본인들은 로봇들이 인간의 일거리를 빼앗는다거나 창조자 인간을 전복시킬지 모른다는 테크놀 로지적 종말론주의(technological armageddonism)에 대한 두려움 없이 로봇공학 의 미래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하다.94 심지어 로봇들이 “지성적이고 비이기 적인 성자가 될 수 있다” 거나 혹은 “당연히 로봇도 영혼을 가진다”96고 여기기까지 한다.

91 에 도시대 일본인들은 땅 밑의 거대한 메기(나마즈)가 지진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나마즈에와 일본인 의 유희성에 관해서는 박규태, 「가시마신앙과 신사: 무신에서 지진의 수호신으로」, 『종교문화비평』 
5, 2004, 270~277쪽 참조.
92 데 즈카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TH적 문제의식의 선구적 모티브들을 많이 보여준다.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소년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철완 아톰> 외에도, <불새>(1954~1988, 총 17
편)는 슈퍼컴퓨터 인공지능에 의한 인간 지배 및 인류 멸망이라는 종말론적인 특이점 모티브라든가 복제동물과 복제인간의 모티브 또는 불사(不死)의 모티브 등 현저한 TH적 모티브들을 보여주는 장 면들로 가득 차 있다.
93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p.237.
94 Robert M. Geraci, “Spiritual robots,” pp.239~240. 
와카야마현 히다카가와정(日高川町) 소재 니우(丹生)신사에서는 매년 10
월 10일경에 ‘웃음의 마쓰리’(笑い祭)를 거행한다. 이때 어릿광대로 분장한 ‘스즈후리’(鈴振り)가 방울을 울리면서 “웃어라, 웃어라” 하고 외치면서 가마 행렬을 선도한다. 그런데 2008년부터 이 스즈후리 역에 웃음로봇이 등장하 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니우신사 근방은 전통적인 인형극인 분라쿠(文楽)로 유명한 지역인 만큼 분라쿠 인형의 몸짓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이 로봇은 일본인의 유희정신과 신도의 결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한편 도요타의 트럼펫 로봇이라든가 바이올린 로봇, 세계 최초의 2족 보행 로봇인 혼다의 아시모(Asimo), 소니의 엔터테인먼트 로봇 크리오(Qrio) 및 세계 최초의 애완견 로봇 아이보(AIBO), 미쓰비시의 가정용 로봇 와카마 루(Wakamaru), 산업종합기술연구소(AIST)의 여성형 로봇 미임(Miim), 소프트 뱅크의 가정용 로봇 페퍼(Pepper) 등 유희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로봇들이 특히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 일본 가요에 맞춰 춤추는 크리오라든가 노래 도 부르고 패션쇼도 하는 미임, 그리고 2015년 하우스텐보스에 개장된 세 계 최초의 로봇호텔인 ‘헨나 호텔’에서 모든 서비스를 담당하는 로봇들은 일본인에게 참된 ‘로봇 퍼슨’(robot person)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인간형 로봇에 대한 이와 같은 일본인의 열광적인 관심과 더불어 일본사회 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일본 각지에서는 특히 1990년대 후반의 제2차 로봇 붐 이래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지 원을 받는 다양한 로봇 프로젝트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왔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메카물 <신세기 에반 게리온>을 필두로 하여 제2차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났다. 일본의 로봇 붐과 애니메이션 붐의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봇에 대한 일본인의 상상력은 주로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아 배양 되어왔기 때문이다. 제2차 애니메이션 붐을 전후한 흐름과 관련하여 소머
(E. Somer)는 <철완 아톰>(1963), <건담>(1979), <아키라>(1988), <패트레이버> 
(1989),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 <공각기동대>(1995), <이노센스>(2004) 등 의 로봇 메카물을 중심으로 ‘인간의 로봇화’, ‘로봇의 인간화’, ‘로봇을 통한 인간의 인간화’라는 세 범주를 제시하면서 그것들의 공통점으로 인간과 로 봇의 애매한 경계 감각을 들고 있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경계가 고정되어버린 곳에서 막을 내리며, 불투명
하게 열려 있는 ‘버려진’ 경계의 틈새에서 꽃피기 마련인 것이 유희일지도 모른다. 일본인의 유희정신은 버려진 인형이라든가 바늘, 가위, 인쇄 판목 등의 용도 폐기된 물건들을 공양하여 성화하는 불교 승려들의 관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쓸모없는 사물들도 인간과 생명을 공유하며, 따라서 그 사물들에 대한 공양이 우주적 붓다와의 평화로운 합일을 촉진시킬 것이라 고 여기기 때문이다.98
불교와 테크놀로지의 통합을 지향하는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 상적인 방식으로 현대 로봇공학에 대한 불교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1970 년에 <자재(自在)연구소>를 설립하여 로봇산업에 있어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해 불교적 원리를 활용하고자 했다. 가령 이 연구소의 멤버들은 불교 경 전을 암송하거나 명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로봇을 디자인하거나 창안해
냈다. 마사히로는 『로봇 안의 불성』(영문판)에서 “(인간뿐만 아니라) 바위, 나무, 강, 산, 개와 곰, 곤충과 박테리아 안에도 불성이 있다. 또한 나와 내 동료들 이 만드는 기계와 로봇 안에도 불성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성, 즉 ‘호토케의 본성’(buddha-nature)은 애니미즘적 가미와 동일한 이미지 로 묘사되고 있다. 기계와 로봇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한 것은 “지각이 있는 것과 지각이 없는 것” 안에 현존하는 것이 불성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 이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사히로에게 불성은 실로 “모든 것을 작동케 하는 원리 혹은 법칙”과 다름 없다.  이처럼 로봇의 불 성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하는 마사히로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은 붓다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붓다에 의해 의지를 수여받았다. 그리하 여 인간은 그 의지를 붓다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진실로 우 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붓다의 마음과 일치한다. 제어하는 것과 제어 받는 것은 모두 불성의 현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를 조작한다고 생각해서
는 안 된다. 사실은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것이다.   
마사히로는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상호호혜 성’(reciprocality)이라고 부른다. 연기설이나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사무애설(事事無碍說)을 떠올리게 하는 이 상호호혜성은 비단 불 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간과 기계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전체적인 인과 적 상호연관성과 관련된 이런 감각은 신불-애니미즘의 중핵적인 스피리추 얼리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희하는 가미와 호토케 혹은 가미와 호토케를 유희하는 일본인의 스피리추얼리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내장 까지 서로 얽혀 있는 그 스피리추얼리티는 유희가 또 다른 유희를 낳는 풍 경 속에서 태어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스 스로를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면서도 TH가 스피리추 얼리티를 배제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가령 제임스 휴즈는 TH의 기 획이 여러 종교의 종말론· 신정론· 구원론과 양립 가능하며, 거기서 새로운 
TH적 스피리추얼리티, 즉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trans-spirituality)가 탄생 할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의 경우 그런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는 신불애니미즘과 테크놀로지의 양립을 통해 배태되어온 것이다. 

5. 나오는 말: 하이브리드와 모노노아와레

TH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라는 양날의 칼을 내포하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엘론 머스크(Elon Musk) 등은 TH의 위험성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 다. 그렇다면 유희적이고 관계론적인 신불의 애니미즘은 이런 위험성으로 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물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하이브리드’와 ‘모노노아와레’다.  
TH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 포스트휴먼을 창조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데에 있다. 이 포스트 휴먼을 일본의 맥락에서 바꾸어 말하자면 신인(神人, god-man) 혹은 가미나 호토케와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앞에서 이런 가미와 호토케가 일본의 TH적 테크놀로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지를 네오-애니미즘으로부터 테크노-애니미즘을 거쳐 신불-애니미즘에 이르는 회로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때의 애니미즘은 모두 관계론적 인식론 뿐만 아니라 혼성성, 즉 하이브리드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타일러류의 애니미즘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가령 일본종교사의 가미와 호토케의 특이한 융합은 신불이라는 하이브 리드를 낳았는데, 실은 가미와 호토케 자체가 원래 일종의 하이브리드였다 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가미와 호토케는 인간도 아니고 비인간도 아니며, 혹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비인간이기도 한 것, 인간 비슷한 어떤 존 재이기 때문이다. 신불-애니미즘은 인간과 자연이 가미나 호토케 혹은 신 불이라는 하이브리드와 접합되는 풍경을 연출한다. 거기서는 인간도 하나 의 하이브리드가 된다. 나아가 멘젤(P. Menzel)과 달뤼시오(F. D’Aluisio)는 초 지성을 가진 로봇과 인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를 ‘로보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였다.102 마찬가지로 전술한 테크노-애니미즘이라든가 테크노-종교 혹은 
102  Peter Menzel & Faith D’Aluisio, Robo Sapiens 참조.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는 인간의 마음이 기계와 접목된 곳에서 생겨난 하 이브리드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호른보르크(A. Hornborg)에 따르면 네오-애니미즘은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주체들로 지각, 소통, 그리고 행위주체(agency)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대안적 인식을 제시한다.  또한 젠슨과 블록은 일본의 테크노-애 니미즘적 혼성성에서 엿볼 수 있는 미학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 주목할 것 을 제안한다.104 그뿐만 아니라 앨리슨은 현대일본의 유희상품의 중심에 로 봇 등의 메카물이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미학적 테크노-애니미즘’
(aesthetic techno-animism)이라고 부른다.105 이런 관점들은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런 가능성은 노리나가가 “사물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고 해석한 모노 노아와레의 미학을 연상시킨다. 흔히 가장 일본적인 미의식이라고 일컬어 지는 모노노아와레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내재된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삼투압적으로 교섭하는 ‘관계론적 공감의 능력’과 ‘감성적 인식론’에 기초 하고 있다.106 이와 관련하여 이케가미 에이코(池上英子)는 『미와 예절의 유 대』107에서 모노노아와레적 미야비(雅)의 미의식으로 충만했던 고대 궁정의 영향으로 중세에 이르러 미적 의례가 정치생활로 고양되었고, 렌가(連歌), 다도, 꽃꽂이, 조루리, 정원, 하이쿠 등의 다양한 ‘에티켓’ 영역에서 일상생 활 속에 미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결사 네트워크가 널리 확산되면서 ‘미학적 일본’(aesthetic Japan)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음을, 그리 고 그것이 근대 이래 ‘일본적 미’(Japanese the beautiful)라는 이데올로기로 고 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규명해냈다. 
마음은 우주를 채우기 위해 성장한다. 그런 마음이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설 때 마음은 바로 신이 된다. 신은 하나의 세계 영혼 또는 세계 영혼들의 집합체 이고 인간은 이런 신의 현재적 발전 상태가 드러나는 현장이다. 신이 성장하면 인간도 성장한다. 한편 인공지능은 모든 사물에 마음을 장착하는 과정, 또는 마 음이 모든 사물에 스며드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공 마음’ 이라는 연결끈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 남김없이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지향할 것이 다. 거기서 마음은 더 이상 인간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신
적 마음일 것이다.108   
다소 시적인 위 인용문에서의 ‘신’을 가미와 호토케로 대체한다면, 그것 은 기계에까지 확장된 하이브리드, 즉 미학적 일본에 있어 신불의 모노노아 와레를 대변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적 미’라 는 이데올로기가 심화되면서 내셔널리스트들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말하는 이케가미의 지적은 모노노아와레의 미학을 체계화한 노리나가 국학이 오늘 날까지도 일본 내셔널리즘의 핵심부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 을 일깨워준다. 거기에는 신불-애니미즘의 정치성, 애니미즘과 국가신도의 관계, 신도 내셔널리즘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TH와 일본 종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글이 미처 다루지 못한 이런 문제들 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 여기서는 다만 내셔널리즘이 하이브리드라는 이 름하에 희석되거나 모노노아와레가 일본이라는 경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한, TH적 일본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부연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08  이 창익, 「인간이 된 기계와 기계가 된 신」, 241~242쪽.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 박규태 박규태,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옴사건· 일본교· 네오-내셔널리즘』, 한양대학교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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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SF소설 속 ‘포스트휴먼’적 상상력의 현재 | 신하경
수전 그린필드, 정병선 옮김, 『브레인 스토리』, 지호, 2004.

319 참고문헌
트랜스휴머니즘과 인간향상의 생명정치학 | 신상규

투고일자: 2017. 6. 12 | 심사완료일자: 2017. 6. 26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인간향상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현재 인간향상 논쟁의 중심 전선은 트랜스휴머니스 트와 생명보수주의자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논쟁의 초점은 인간향상을 금지할 어떤 원칙적 이유 가 있느냐의 문제다. 이 은 논쟁의 초점을 바꾸고 생명정치적 요소들을 더욱 진지하게 고려할 필 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향상 논쟁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향상기술의 추구나 금지보다 사회 적 정의와 인간적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향상기술의 발전과 적용을 어떻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이 은 인간향상 논쟁이 자유주의적 트랜스휴 머니스트와 기술진보주의자 사이의 논쟁으로 재설정될 필요가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 정의나 불 평등의 문제가 좀 더 적절히 고려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술진보주의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율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고 이에 입각하여 자율성과 사회적 공정성의 관계를 재평가한다. 주제어: 트랜스휴머니즘, 생명정치학, 자율성, 사회적 정의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 박규태
투고일자: 2017. 6. 15 | 심사완료일자: 2017. 6. 28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이 의 목적은 트랜스휴머니즘의 다양한 유형 가운데 특히 ‘종교적 트랜스휴머니즘’과 관련하여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흔히 애미니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신도와 불 교 및 각각의 가미(神)와 호토케(佛) 관념이 트랜스휴머니즘적인 일본 테크놀로지 문화의 중요한 밑그림이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이 은 트랜스휴머니즘과 종교의 양립 가능성 을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을 간략히 계보화한 후, 네오-애니미즘에서 테크노-애니미즘에 이르는 사 유의 흐름을 일본의 사례에 적용시켜 그것을 ‘신불-애니미즘’이라 명명한다. 이어서 그러한 신불애니미즘과 관련하여 가미와 호토케의 개념사를 살펴본 후 유희성, 트랜스-스피리추얼리티, 하이 브리드, 모노노아와레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종교와 테크놀로지적 일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자 한다. 주제어: 트랜스휴머니즘, 종교, 네오-애니미즘, 테크노-애니미즘, 신불-애니미즘, 가미, 호토케 일본 SF소설 속 ‘포스트휴먼’적 상상력의 현재 | 신하경
투고일자: 2017. 6. 26 | 심사완료일자: 2017. 7. 4 | 게재확정일자: 2017. 8. 8
현재 일본의 SF소설은 정보통신기술, 신경과학, 인지과학, 컴퓨터-신경 네트워킹, 유전공학 등 제 반 과학의 발달을 소설 세계의 설정으로 도입하면서, 그러한 과학기술들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 을 예측하고 재현한다. 그 결과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인 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감정’이란 무엇인가 등의 문제가 제기되며, 이러한 문제제기들이 ‘포스트 휴먼’적 상상력을 구성하고 있다. ‘포스트휴먼’의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며, 그에 대한 탐구의 과정은 과학기술의 개별적 속성에 따라 ‘기술적’인 특성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이토 케이카쿠는 『학살기관』과 『하모니』를 통해 주로 정보통신기술과 뇌과학의 
발달이 야기하는 포스트휴먼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정보통신기술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라는 인간 관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인간 개개인의 독자적 개성은 부정되고, 예측 가능한 사고와 행동
324   일본비평 17호 
mediator
Transhumanism and the Biopolitics of Human Enhancement | SHIN Sangkyu Several criticisms have been raised against human enhancement. A central dividing line in current human enhancement debate has been drawn between transhumanists and bioconservatives. The main focus of the debate has been whether there is any principled reason to ban human enhancement. In this paper, I claim that we need to change the focus of debate by considering biopolitical factors more seriously. The more important question in human enhancement debate should be how can we regulate and control developments and applications of human enhancement technologies in a democratic way for the purpose of promoting social equality and human values, rather than the current focus on whether we should pursue or ban enhancement technologies. Thus, I propose that human enhancement debate needs to be reconfigured between libertarian transhumanists and techno-progressives, so that the problems of social justice and inequality get their more deserving considerations. And by taking the side of techno-progressives, I will discern two senses within the concept of autonomy and reevaluate the relation between autonomy and social justice. t,FZXPSETtranshumanism, biopolitics, autonomy, social justice
“Shinbutsu-animism” and Transhumanism: The Game of Kami and Hotoke  
| PARK Kyu Tae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closely examine how had the Japanese concepts of Kami(神) and Hotoke(佛), which have originated from Shinto and Buddhism respectively and are often said to be animistic, influenced greatly on the culture of Japanese technology. Thus, I pay special attenti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ranshumanism and religion, which are deeply associated with “religious transhumanism” among the various types of transhumanism. In so doing, I will present the notion of “shinbutsu(神佛)-animism” by applying the stream of thinking from neo-animism to techno-animism to the case of technological Japan after taking into careful considerations for diverse discourses related to the compatibility of transhumanism and religion. Furthermore, those concepts of Kami and Hotoke will be analyzed from the perspective of “shinbutsu-animism.” Finally, I will reconsider how technological Japan is related to religion by focusing on several keywords such as game-mind, trans-spirituality, hybrid, and mono-no-aware. 
t,FZXPSETtranshumanism, religion, neo-animism, techno-animism, shinbutsu-animism, kami, hotoke
Posthuman Imagination in Japanese Science Fiction | SHIN Ha-kyoung 
Science fictions in Japan introduce the development of various sciences, such as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neuroscience, cognitive science, computer-neural networking, 
328   일본비평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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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옴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 옴 사건 일본교 네오-네셔널리즘 
 | 한양학술총서 1  
박규태한양대학교출판부2015-08-25


기본정보
520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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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제1장 현대 일본 사회의 종교 지형 : 종교붐·‘정신세계·’ 신영성운동·신신종교
제2장 [옴 진리교]사건과 ‘내 안의 옴 진리교’
제3장 ‘옴 문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IQ84』
제4장 프레·스피리추얼리티 : 일본적 영성
제5장 스피리추얼리티란 무엇인가
제6장 영성적 지식인과 스피리추얼리티
제7장 스피리추얼리티 담론과 종교 담론
제8장 대중문화와 스피리추얼리티
제9장 일본교와 스피리추얼리티 : 모든 일본인은 일본교도이다?!
제10장 네오·내셔널리즘과 신신종교 : 보수 우경화 현상의 종교적 밑그림
제11장 [행복의 과학]과 네오?내셔널리즘
제12장 희망의 스피리추얼리티 : 종교·탈원전·공공성

맺음말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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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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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일본 재발견?: 일본인의 성지를 걷다』, 『일본정신분석』(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및 2019 종교문화비평학회 학술상 수상작),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2018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포스트?-?옴 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옴 사건·일본교·네오?-?내셔널리즘』(2016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일본 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노케히메까지』, 『일본의 신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황금가지』, 『세계종교사상사 3』, 『일본 신도사』,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 시스템』,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현대 일본의 순례 문화>,<일본 재발견>,<일본정신분석> … 총 43종 (모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