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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5

[도올김용옥] [중용 24장] 지성여신, 과학과 종교 - 일본의 죄악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됩니다[??]



[도올김용옥] [중용 24장]중용 59강 - 지성여신, 과학과 종교 - 일본의 죄악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됩니다[??]

(중용 24장) 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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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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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24장)

至誠之道可以前知。
國家將興,必有禎祥;
國家將亡,必有妖孽。
見乎蓍龜,動乎四體。
禍福將至,善必先知之
不善,必先知之。故至誠如神。

지성지도가이전지
국가장흥 필유정상 
국가즉망 필유요얼 
현호시귀 동호사체
화복장지 선필선지지 
불선 필선지지 고지성여신

<직역>
지극한(至) 정성(誠)의(之) 도(道)는 미리(前) 알(知) 수 있다(可以)
국가(國家)가 장차(將) 흥(興)하면 반드시(必) 상서로운 조짐(禎祥)이 있다(有)
국가(國家)가 장차 망하려면(將亡) 반드시(必) 괴이한 재앙(妖孽)이 있다(有)
시초점(蓍)이나 거북점(龜)에서(乎) 나타난다(見)  사지(四體)에서(乎) 움직인다(動)
화(禍)나 복(福)이 장차(將) 다다르게 되면(至) 선함(善) 반드시(必) 먼저(先) 그것을 안다(知之)
선하지 않음(不善) 반드시(必) 반드시(先) 그것을 안다(知之) 그러므로(故) 지극한 정성(至誠)은 신과 같다(如神)

<번역>
지극한 정성의 도는 미리 아는 예지를 준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할 때 반드시 괴이한 재앙이 나타난다.
시초점이나 거북점에서도 나타나며 해당자의 사지의 움직임에서도 나타난다.
화나 복이 오려고 하면 반드시 선함을 미리 알고, 
반드시 선하지 않음도 미리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


<해설>
정성이 지극하면 앞날을 다 알 수 있다는 약간 미신처럼 보이는 자사의 주장이다. 그러나 합리적으로도 이 예지력은 설명이 가능하다. 

주자는 정성이 지극하고 사사로움과 거짓이 없다면 그 기미를 눈치 챌 수 있다고 한다. 거짓과 욕심이 없어 자신의 눈을 가리지 않을때 우리는 보다 정확히 사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은 확실하다. 사기꾼의 사기행각은 노력없이 이익을 보려는 사람에게만 성공한다.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사기꾼이 도대체 왜 이러며, 앞으로 어떤 짓을 할 것인지 뻔히 보이지 않는가? 여기에 지극한 정성이 있다면 주자의 말처럼 미래를 눈치 챌 수 있을 법도 하다. 

'善必先知之'의 해석이 어렵다. 목적어가 앞으로 나간 자리에 대목적어로 之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해석은 매우 쉬워진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생략되고 없다. 앞에서 나온 '지극한 성의 도를 가진 사람'이 주어이다. 善은 목적어다. 본래 문장은 '必先知善'(반드시 그 선함을 먼저 안다)이다. 그런데 목적어 善이 앞으로 나갔다(목적어 강조를 위해). 그러자 목적어가 없어지게 되자 그 자리에 대 목적어 '之'(그것)이 들어온 것이다.  

사체(四體)의 해석은 두가지다. 하나는 거북점을 칠때 거북의 네 다리의 움직임을 말한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집권자의 거동이 미묘하게 달라짐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거북의 네 다리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매끄럽다. 그러나 거북점은 보통 거북 등껍질을 불에 태워 그어지는 금으로 점을 치므로 거북의 네다리의 움직임이 들어올 여지는 적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는 집권자의 거동의 미묘한 변화로 해석하고 있다.

2021/07/30

‘한국信연구소’ 를 세상에 알리다! 이은선.이정배 부부교수!

당당뉴스:




‘한국信연구소’ 를 세상에 알리다! 이은선.이정배 부부교수!
지난 7월13일 오후,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2020년 07월 16일 (목) 13:16:11 이필완 leewaon3@chol.com

얼마 전 은퇴한 세종대 명예교수 이은선 교수가, 몇 년 전 감신대에서 자원은퇴 했던 이정배 교수와 함께, [한국信연구소]의 출발을 널리 알리면서, 동시에 3권의 출판기념회가, 7월13일 오후4시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열렸다.

이은선 교수는 일찍이 신학을 전공했으나, 그동안 세종대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며 여성신학자로 틈틈이 활동하다가 은퇴 후, 본격적인 여성신학자로 자리매김 하는 모임 자리에,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여성신학회, 생명평화마당,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보인회, 해천우회, 3,1종교개혁연대 등 후원단체들 회원들과 지인들 150여명이 모여 축하했다.

이날 개소식은 단해교회 하태혁목사의 사회로 '찬송 393장 오신실하신 주'를 부르고, 한국여신협 실행위원 신선 교수가 기도하고, 보인회 회원들이 “經 앞에 바로서기-믿음(信)에 관한 증언들”을 낭독하였고 함께 묵상했다.

이어 한국信연구소 소장 이은선 교수가 ‘한국信연구소’를 설립하게된 동기와 취지, 과제를 발표하였고(*기사 하단 전문 참조) 전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최만자교수와 YMCA전국연맹 김흥수 이사장이 축사를 했다.




거문고 병창(거문고 박소연, 장구 고성진) “출강”의 축하공연 후, 이 날 같이 출판된 3권의 책 중, 이은선 쓴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은 한국전통문화대 이선경 교수가 서평하고, 이은선 쓴 '동북아 평화와 聖 性 誠의 여성신학'(동연)은 감신대 김정숙교수기 서평했으며, 이정배 쓴 '유영모의 歸一신학'(신앙과지성사 밀알북스)는 한국예종 임종수 교수가 각각 서평했다.

그리고 작은이의벗친구교회 이학산 목사의 인도로 “담쟁이” 노래를 함께 불렀고, 현장아카데미 원장 이정배 교수가 개소식 이후의 이정배.이은선 부부가 함께 하는 '한국信연구소 개소식 그 이후' 미래 계획을 밝히면서 인사한(* 기사 하단 인사말 전문 참조) 후 ‘함께하는 축복기도’로 마쳤다.
‘하늘 부모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한국信연구소가 탄생했습니다. 그 뜻을 잘 받들어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이 곳에 모인 모두가 함께 기도합니다. 같이 할 친구와 동지들을 보내주시고, 이로써 한반도와 온 세계의 삶이 더욱 편안해지고 사랑과 은혜로 넘쳐 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사진은 서산갈산교회 안인철목사가 찍었다. 현재 유튜브 위한 풀동영상을 편집 중!)









2020.7.13. 한국信연구소 개소식 및 출판기념회


<한국信연구소를 열며>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leeus@sejong.ac.kr)



1. 왜 한국信연구소를 시작하려 하는가?






이렇게 어려울 때 함께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뜻을 모아주시니 우선 송구한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저희 생각을 나눌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많이 망설였습니다. 2년여 전 세종대학교를 떠나면서 “이제 온전히 신학자로 살겠다”라는 선언과 함께 그동안 ‘한국信연구소’라는 이름 아래서 지내왔는데, 오늘 이를 다시 공적으로 공표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늘과 같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때에 무슨 유용이 있으며, 제가 이 이름 아래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에 또다시 읽은 책이 있습니다. 제가 1980년대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만난 독일 인지학자(人智學) 루돌프 슈타이너의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 가 그것입니다. 이 책의 마무리에는 우리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경계(문지방)를 지키는 두 수호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만나는 첫 번째 수호령과 문지방은 한 커다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기서의 수호령이란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되는 우리 삶에서 행한 온갖 거짓과 잘못, 죄과가 누적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문지방을 넘고 첫 번째 수호령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끔찍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와 만난다는 것이고, 그 앞에 적나라하게 서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문지방을 넘는 일은 그런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넘어서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말합니다. 오늘 한국信연구소를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어쩌면 저에게는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문지방을 넘는 일은 우리가 이후 더 높은 세계를 향한 인식의 길에서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초감각과 초자아의 참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만나는 수호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제 너의 감각적 자아를 구성하던 사고(thinking)와 감정(filling), 의지(willing)의 상호 연결이 분리되면서 초감각과 초자아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그러나 그러한 너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어찌하려는가? 네가 해방을 위해서 얻은 모든 지식과 좋은 것이 바로 그들 덕분인데, 그들을 그냥 두고서 이 문지방을 넘어서려는가? 한국信연구소를 여는 일이 이렇게 초자아의 해방의 길로 가는 것을 놓아두고서라도 다시 나누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지, 또는 내가 여전히 자아로 남아있으면서도 밝히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인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2. ‘한국적’(Korean)이라는 것



한국信연구소의 이름을 영어로 ‘Institute of Korean Feminist Integral Studies for Faith’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을 구성하는 한 자 한 자가 바로 저의 그러한 소망과 의지가 여전히 가닿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먼저 ‘한국적’(Korean)이라는 것과 관련해서입니다. 이번 세계적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들은 많은 말 중에서도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이 한국이 이번 사태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훌륭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병에 걸리는 것보다 자신으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더 못 견디어서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매우 기뻤고, 바로 이처럼 한국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고 언술 되지 못한 고유한 자질이 한 외국인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저의 학적 물음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든 ‘한국적’이라는 민족적 물음을 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의 가계의 오랜 정신적 선험성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이신 목사님의 기독교 ‘환원 운동’을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우리가 비록 기독교를 서구로부터 늦게 받았지만, 거기서 기독교의 현실은 온갖 교리적 분파와 분열로 얼룩져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본래의 원형적 모습을 한국 사람의 손으로, 한국인들의 의식으로 다시 찾기를 원했습니다. 여러 시각과 시도로 기독교의 ‘근본’을 찾기를 원했고, 그런 가운데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1974년)’을 단행하기도 했으며, 그러한 일을 위해서 길지 않은 생에서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이렇게 한반도 주변에는 새로운 문명과의 만남에서 항상 그 ‘원형’과 ‘근본’과 거기서의 ‘토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라의 원효가 그랬고, 고려에서 ‘단군고기’(檀君古記)를 간직해서 전해주고자 했던 목은 이색의 스승 행촌 이암(杏村 李岩, 1297-1364) 선생이 있었으며, 조선 유교에서도 비록 ‘소중화’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끊임없이 ‘원형’과 ‘근본’, ‘참’에 대한 추구가 있었음을 보면서 오늘 한국信연구소도 그러한 사상의 젖줄에 기대어서 참 한국적인 신앙과 믿음의 본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 21세기 한반도 현실의 삶에서 강하게 야기되는 남북통일과 동북아 평화의 물음도 저희에게는 그러한 맥락에서 성찰되는 일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것



어떤 대상이나 일에서 감각적인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원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몰두하는 삶의 중앙에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중앙의 기득권과 불화하고, 그로부터 멀리 떠나 변방으로 가기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런 변방인과 이방인(pariah)들이 있지 않고서는 현실은 개조되지 않고, 개혁되지 않으며, 생명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도 이러한 생명의 예민한 내적 원리를 간파하셨고, 그것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로 의미화하셨으며, 저는 그 원리를 다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페미니스트 여성신학자로서 세계 문명사의 맥락에서 증거 하고 싶습니다. 한국信연구소 영문 이름의 두 번째 형용사가 되는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이해합니다. 주지하듯이 오늘 페미니즘의 시대에는 자기희생과 헌신, 자기 비움과 이름 없음이 그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름 아래서 지금까지 여성들이 어떤 고통과 아픔을 겪어왔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의 두 번째 수호령의 이야기에서도 들어보았고,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종교적 성찰은 한결같이 바로 그러한 길이 궁극의 구원의 길이라고 지시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진실과 페미니즘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상극인가를 저는 묻습니다. 그러면서 이 둘 다 놓칠 수 없는 진실의 길을 어떻게든 서로 연결시키고,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나를 찾으면서 저의 미약한 삶에서, 논리에서, 믿음의 일에서 고투합니다. 이것을 저는 지금까지 서구 페미니즘을 넘어서 그와 다른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을 가져오는 일이라고도 했고, 그런 맥락에서 이른 시기부터 ‘공감’을 강조하며 ‘사기종인’(捨己從人)의 여성 리더십을 말하고, ‘모성’의 서구 페미니즘적 탈신화화를 넘어서 일종의 재신화화를 통해서 다시 그 본래를 강조하면서 초기 사회이론 중심적 페미니스트들과 갈등하기도 했습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오늘 ‘집사람’을 강조하면서 ‘사유하는 집사람’을 말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생명 창조와 지속하는 문명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토대가 된다고 주창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또한 대한민국의 민낯이 n번방 사태와 손정우 아동포르노 사태, 최숙현 철인 3종 팀 선수 폭행 사건 등으로 끔찍하고도 비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서구 근대 페미니즘 운동 덕분으로 우리 몸이 해방되었고, 성(sex)이 해방되었으며, 감각의 세계가 한껏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태가 보여주듯이 거기서 생명의 또 다른 차원인 몸의 거룩성이 모두 탈각됨으로써 우리 몸과 섹스와 이생의 삶은 그저 무생명의 물질과 쾌락의 도구가 되었고, 무차별한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비참과 불의가 저는 단지 서구 페미니즘적 법적 정의의 회복만으로 치유되거나 해소될 수 없다고 봅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세계관적인 전이가 요청되는데, 여기서 뜻밖에도 동아시아의 오랜 신유교의 性 이해에서 그 한 가능성을 봅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간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조선 신유교에서의 性 이해는 우리 시대에서와는 달리 그 性이라는 언어로 오히려 우리 안의 깊은 내재적 초월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을 지시하면서 우리 몸과 감정, 성적 관계 등의 신체적 차원이 끊임없는 중용과 섬김, 삼감의 禮로 함께 보살펴지는 일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보살핌(禮)의 실행 주체가 주로 남성이었고 당시 계급사회에서의 양반이기는 했지만, 오늘 그러한 역사적인 차별의 장애가 많이 가신 상황에서는 우리 모두 한가지로 우리 몸과 性에 대한 존숭과 禮의 일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의 깊은 병폐인 몸과 性의 철저한 물화에 맞서서 다시 그 내재적 거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데, 그것을 오늘 한국의 보수 교회에서처럼 세상 밖의 외재적 구원자에 기대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오래된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性과 몸 이해로 가능해지도록 하는 일을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더욱 더 진정한 주체와 자유의 길이라고 여기고, 이 길을 더욱 밝히는데 애를 씁니다. 이 일은 앞에서 밝힌 대로 ‘한국적’(Korean)이라는 표제어 아래서 먼저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가 독점해온 神과 거룩을 동아시아의 더욱더 보편적인 초월의 이름인 ‘聖’으로 해방시키고, 여기서는 또 다른 동아시아의 이름인 ‘性’을 가져와서 우리 몸과 성(sex), 가족적 삶과 모성 등의 사적 삶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모두 제가 다른 말로 많이 이야기해 온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 ‘믿음의 통합학’(intergral Studies for Faith)라는 것



일찍이 20세기 서구 기독교 문명이 낳은 전체주의적 타락인 나치즘에 맞선 본회퍼는 “우리는 바라보면서 살지 않고, 믿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역사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삶의 ‘지속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우리 삶과 역사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결코 사실성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사실성 너머에 있는, 또는 근저에 있는 초월성에 대해 믿음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성과 초월성, 세계와 하나님, 氣와 理, 身과 心(性), 과학과 종교 등의 두 영역과 측면이 어떻게든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 그 함께 어우르고 연결되도록 하는 일, 이것을 한국信연구소는 계속해서 추구하고, 수행하고, 이루려고 합니다. 이를 우리 존재와 삶의 온 영역에서 밝히고 드러나도록 하는 일을 ‘불이성’(不二性)과 ‘지속성’이라는 의미의 한국신연구소의 세 번째 형용사 ‘Integral Studies’(통합학문) 라는 말로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바로 ‘현장’(顯藏) 이라는 말, ‘나타나고 또 감추어진’이라는 표현이 동아시아의 오랜 생명 표현인 ‘道’나 ‘易’의 본래를 지시하는 귀중한 언어라는 것을 알고 얻어와서 그러한 저희 뜻을 표현하는 언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우주, 만물, 아무리 하찮은 ‘물건’ 하나, 한 가지 ‘일’에서라도 이 두 차원이 없지 않고 함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에 대한 진심 어린 존숭과 겸손(敬)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21세기 인류 문명의 다원화 시대에서는 이 불이성, 또는 간단히 표현하면 우주와 만물의 초월성을 이제 어떠한 언어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많이 열려졌고, 심지어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론적 보수성도 많이 금이 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이름의 다양성이 불러오는 갈등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도 포함해서 도무지 이러한 초월의 차원을 인정하는 일, 존재의 불이성을 드러내는 거룩성의 차원(敬)을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시대의 핵심 관건은 더이상 神 이야기(God-talk)가 아니라 信, 믿음과 신뢰, 용기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실성과 더불어 초월성, 그 둘의 불이성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할까의 문제라는 것이며, 한국신연구소는 그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합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지, 왜 우리 사이에서 신뢰와 믿음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믿음을 위한 통합학문”(Integral Studies for Faith)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길은 예전 좁은 의미의 종교나 신학의 물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많은 영역의 일이 포괄되는 것을 말하며, 특히 제가 거룩의 ‘聖’ 자(字), 우리 몸의 ‘性’와 더불어 세 번째로 불러오고자 하는 ‘誠’의 언어로 강조하고자 하는 교육의 차원이 중시되면서 ‘한국적 聖·性·誠의 믿음의 통합학’을 말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앞에서 함께 읽은 ‘經 앞에 바로 서기’에서의 믿음에 관한 여러 문장은 주로 지금까지 써온 글에서 모아봤습니다. 이제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겠다는 예수의 선언을 21세기 오늘 한국 땅에서 다시 한번 정직하고 진실되게 사실화해보자는 의지, 그 예수보다 거의 4백여 년 전에 동아시아의 맹자는 먼저 초월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善이며, 그 믿음은 바로 나에게서 나오고 내 몸에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초감각적인 것이 먼저이고, 모든 형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감각의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통과해야 하므로 이 감각의 기반이 참으로 긴요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친밀한 가족이 필요하고, 거기서 누구나 자신의 몸과 감정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경험을 요청하고, 누구든지 이 지구라는 집에 태어났으면 모두가 평등한 주인이므로, 이곳의 선한 것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의 ‘기본 소득’을 말하고, 또한 누구든지 살던 집을 떠나갈 때 함께 했던 가까운 사람들의 배웅을 따뜻하게 받을 수 있도록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다시 깊이 껴안는 사회적 孝의 일 등, 이런 모든 것이 한국信연구소, 현장아카데미가 깊게 관심하는 일입니다.



5.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박원순 시장의 죽음의 시대에



박원순 시장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박원순 서울시장의 서거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다시 몸과 정신, 이 세상과 저세상, 사실성과 초월성, 법과 부끄러움, 명성과 내재, 사적 개인과 공적 사회 등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어쩌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어떻게 더 높은 세계를 인식하는가?』 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 거기서의 첫 번째 수호령, 자신의 끔찍한 과거와 이미 자신이 사실로 만든 형상 앞에서 좌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견디고 넘어서 두 번째 수호령도 만나고, 거기서 다시 우리 시대의 불행에 대한 큰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이곳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까지 인내의 일을 지속할 수 없었고, 우리 사회적 삶의 환경도 그것이 좀 더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함께 마련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시대가 여전히 그 현현을 고대하고 바라는 진정한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시장을 참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고, 그의 남겨진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이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든 모두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지속성(誠), 믿음과 신뢰(信), 그것을 ‘하늘의 도’(天之道) 라고 했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인간의 길’(人之道) 라 했으며, 한국信연구소가 우리 사이에서 누구든 이 길을 가는 일이 그렇게 홀로 외롭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恕), 용서하고,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따뜻한 힘의 기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일이 가능해지도록 우리 인간의 말을 들어서 그런 인간의 이야기에 봉사하며(執言奉辭) 길을 가겠습니다. ‘사실’은 인간적인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고 이루어지는 것(成)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진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현실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16세기 퇴계 선생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 소원은 진정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그러면서 저의 유가에서의 첫사랑 같은 16세기 양명 선생의 언어로 저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저는 제 속의 착한 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어서 이제부터는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어떤 작은 것도 감추려 들지 않으면서 ‘광자’(狂者)와 같은 심경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저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더라도 꿋꿋하게 이 일을 지속해 보겠습니다.” 함께 해주실 것을 간청하고,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 7.13일 이은선 드림




한국 연구소 개소식, 그 이후

이정배교수(현장아카데미)






이제 한국 신연구소 개소식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귀한 발걸음 해주신 분들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며 특히 최만자, 김흥수 선생님의 축사를 비롯하여 서평(이선경, 김정숙, 임종수 박사), 기도(신선) 그리고 축주(가)로 자리를 빛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김경재 교수님, 정숙자, 박득훈 이면주 목사님을 비롯한 기독교계의 중요 분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중조, 조영훈, 주대범 장로님께도 감사말씀 드립니다. 물론 불교와 유교의 선생님들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동준 교수님, 연세대 명예교수 이광호 교수님, 불교 재가자 대표 서강대 명예교수 박광수 교수님 고맙습니다. 이 분들 모두로부터 말씀을 청해 들어야 옳겠으나 시간이 허락 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지하듯 우리는 유수한 역사를 지닌 신학관련 잡지, 연구공간들이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 하고 있습니다. 진보성을 띨수록 사라지는 속도가 빠른듯하여 그 안타까움이 매우 큽니다. 신학자들의 경우 통합적 사유를 놓친 채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자기 분야에 함목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쇠자 분 아니라 생존이 힘든 목회자들 역시 저신들 삶의 뼈대가 되는 신학을 뒷전에 처박아 둔 채 신학의 무용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파를 막론한 교계는 더욱 보수, 근본 화되어 타자 혐오적 모습(방식)으로 세상에 현존합니다. 코로나 정국 속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은 사라졌고 자기 생존을 위한 이기적 집단으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니 그 미래가 걱정입니다. 코로나 이후 기독교의 몰락을 예견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음을 믿고 추세를 거스르는 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독교와 만났던 초기 신앙 선배들을 소환하고 싶습니다. 이들 중에 기독교 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토착화 그룹(최병헌,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민족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에 관대했던 지도자(손정도, 김창준, 전덕기, 장기천)들, 교파적 기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향했던 환원운동가들(이용도, 동석기, 김윤석, 이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엮어 그들 에토스가 목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계승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들을 기억하여 소생시킬 때 자본화된 종교적(사적) 집단으로 축소, 변질되는 오늘 추세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신연구소는 이런 과제를 떠맡아 종교개혁 500년 이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분명 코로나 사태는 다른 기독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상 속에서 달리 믿고 다르게 살기를 명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코로나 이후 기독교의 생명(역동) 성을 위해 우리들 믿음, 상상력의 부패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이 소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저희들의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희부터 많이 달라지고자 애쓸 것입니다. 하늘 주시는 힘으로 동료, 후학들과 힘을 합쳐 연구공간을 재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학 담론을 힘껏 제시하겠습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배워 알기를 원하는 이들과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이후’ 교회의 길을 토론하겠습니다.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문명, 통일한국을 생각하는 값진 연구서도 출판해 낼 것입니다. 젊은 신학도들, 새로움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에게 작은 의지 처,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고 싶습니다. 저희들만의 힘으로는 벅찰 것이며 길게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핮;만 저희가 기꺼이 마중물 이 될 것입니다. 탈진리(Post-Truth) 시대에 이른 지금 6개혁이란 것이 종교개혁 당대보다 훨씬 더 어렵겠으나 가야할 길이라 믿습니다. 이 도상에서 마음과 뜻이 합해지는 은총의 사건이 생길 것을 믿으며 이 여정에 감히 첫발을 내 닫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은선 교수와 저는 2016년 이후 시차를 두고 명예퇴직을 했으며 현장아카데미를 일궈 왔습니다. 사실 이 일은 횡성에 거처를 마련한 2000년 가을부터 꿈꿔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살아보자’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연구(독서)와 영성(예배) 그리고 노동(생산)이 아우러지는 공간이 되길 꿈꿨던 것이지요. 오늘 공식화된 ‘한국 신연구소’가 첫 영역, 연구 분야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 것입니다. 여성적인 적인 것이 세상을 구할 것이란 말을 믿으며 한국 신연구소의 앞날을 진인사재천명의 심정으로 하늘에 맡겨드립니다. 기념해야 할 뭇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는 2020년, 그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에 한국 신연구소를 공식화하게 된 것이 참으로 뜻깊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것을 기쁨과 영광이라 여기며 저희들 말()이 이뤄지는() 세상을 선배, 동료, 제자 및 뭇 지인과 함께 믿고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모임을 위해 애써 주신 여러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환희당 모임의 벗, 실상사 법인 스님이 한국 신연구소를 위해 보낸 <대승기신론>의 짧은 글 한 편을 가슴에 새기며 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믿음도 타락할 수 있음을 늘 상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을 성취하는 일은 수행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과제인바, 믿음이 성숙치 못하면 연()을 만나는 순간 곧 퇴진하고 말 것입니다” (필자 변형)

  
   
  
 

2021/04/19

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 - 성(誠)과 성실(誠實)을 중심으로-

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 - 성(誠)과 성실(誠實)을 중심으로-




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 - 성(誠)과 성실(誠實)을 중심으로-
关于儒学“天人合一”思想的现代诠释: 以“诚”和“诚实”为中心


한글판<유교문화연구>

2011, vol.1, no.18, pp. 37-62 (26 pages)

UCI : G704-SER000000346.2011.1.18.003


발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연구분야 :
인문학 >
유교학윤사순 /Youn, Sa-Soon 1


1고려대학교



초록


천인합일사상은 안신입명(安身立命)을 지향하는 ‘유학의 궁극적 이상’임과 아울러 유학 사상을 사실상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유학의 한 대표적 특징’이다. 그런 만큼 이 사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유학의 현대적 실용성을 탐색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유학 가운데서도 천인합일을 가장 구체적으로 논한 서적은 『중용』인데, 거기서는 그 실현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만 그 성(性)을 다 할 수 있고, ....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병립(參)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더해, “성(誠者)은 천도(天之道)이고. 성하려는 것(誠之者)은 인도(人之道)”라고도 한다. 

이로 보면, 천인합일의 성취방법은 두 가지로, 
  • ‘성(誠)에 기초한 진성(盡性)’의 방법과 
  • 인도를 천도에 합치시키는 ‘원리(原理)차원’의 방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의 구사로 천인합 일을 구현하려 할 때, 그 구현을 불가능한 듯이 보이게 하는 사유가 발견된다. 
  • 그 하나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이질적 성(性)이므로, 그것들의 일원화(一元化)를 전제한 천인합일은 구현될 수 없지 않느냐는 사유이다. 
  • 또 하나는 도(道)로서의 ‘리(理)’개념의 의미 가운데는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이 드는데, 이것들 또한 동일하지 않은 의미이므로, 인도와 천도의 원리적 합일에 난관으로 인지된다.

 이것들의 극복이 천인합일의 성취에 있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먼저 알아야 할 점으로, 이 두 가지 사유는 특히 사회의 대인차원에서 선악(善惡)의 야기를 감안하여 ‘본성’과 ‘기질성’을 이분화한 관점에서 고려되는 사유이지, 자연에 대한 대물차원에서 고려하는 사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이 천인합일 논의는 물성인 기질성이 가치중립(價値中立)임을 전제 하고, 본성과 기질성의 원천인 생명(生命)자체의 ‘생성현상(生成現象)의 특성’만을 논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두 문제의 해결은 다 형식논리를 벗어나 ‘생성논리’를 적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 첫째 본성을 대표하는 인(仁)이 그 본래의 애인(愛人)의 의미를 간직하면서도, 그것을 대물차원에로 확대하여 애물(愛物)과 생의(生意)와 생물(生物), 및 산물(産物) 의미로 운용해야 한다. 이는 본성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기질성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작업이다. 
  • 둘째 우주 생명체관에 입각하면, 그 생명체(有機體)에서 소이연과 소당연이 ‘하나의 일치된 상태’로 생성함을 본다. 

생명체의 생성은 각 부분으로는 일종의 기계론적•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마치 목적론적•당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논자가 생성논리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론을 가리킨다. 천인합일을 성취시키는 기본요건인 ‘성(誠)’의 개념에 대한 해석도 성찰할 부분이다. 일찍이 주희는 성(誠)의 의미를 ‘진실무망(眞實而無妄)’으로 해석했다. 
이는 적합한 해석이지만, ‘정성’의 의미로 미루면, 사실적 ‘진실’ 의미와 함께 티(瑕疵) 없는 ‘순수(純粹)’ 의미를 더해야만 그 의미가 더 충실해진다고 논자는 판단한다. 
이렇게 해석해야 성(誠)의 진실이라는 객체적 성격과 함께 그 주체적 의지적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誠)을 구현하려는 태도는 곧 성실(誠實)이다. 

성실할 때 인의(仁義) 같은 선한 본성이 발현된다. 성실은 본성 발현의 근본조건이다, 이는 성(性)이 성(誠)의 조리에 해당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성실이 그 조리인 성(性)을 드러내는 사실은 성(誠) 자체와 아울러 성실(誠實)을 원리화 할 수 있도록 하는 현상이다. 성(誠)자체는 ‘진실과 순수함’의 가능태로서 보편성과 객관성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현인 성실은 ‘진실함과 순수함’의 현실태로서 당위적(요청적)으로 주체화된 보편성 객관성(곧 조리)을 띠는 점에서 인도라 할 수 있다. 성(誠者)이 천도이고 성실의 태도가 인도라는 규정은 이런 사유에서 나왔다고 해야 한다. 성(誠) 또는 성실(誠實)을 천인합일 성취를 위한 기본원리로 규정하는 사유는 성실이 천인합일 성취의 ‘핵심적 열쇠(키워드)’임을 가리킨다. 성실의 이런 위상은 붇다(佛陀)의 경지를 초래하는 선(禪)에 견줄만하고, 노장사상의 자연 상태를 가능케 하는 무위(無爲)에 견줄만하다. 이렇게 이해하면, 천인합일 경지에서 이루는 안심입명의 내용이 불교나 노장사상의 것과 다르다. 성실로 뒷받침되는 안심(安心)은 일단 불안해소를 이룬 점에서 ‘행복(幸福)의 상태’임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불교의 무심, 노장사상의 망아나 무아와 달리, 이 상태의 행복은 소아적 이기심으로 인한 방황을 끝내고 대아적 이타가 가능해진 ‘여유로운 심리상태’이다. 이는 성실이 주는 활력(活力)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상태임을 시사한다. 입명(立命) 또한 운명에 순종하는 순명(順命)을 넘어, 운명의 충실화를 도모하는 무명(務命)과, 운명을 끊임없이 개척하는 개명(開命)에 든 내용이다. 이런 점은 유학이 지닌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제적인 특징의 바람직한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지에 든 ‘성인상(聖人像)’도 노장과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과 다를 수밖에 없다. 노자의 무위로 이룬 진인(眞人), 불교의 고통과 고뇌에서 해탈한 불타와 변별되는 인간이 이 경지의 성인이다. 그는 이미 ‘생명의 광장’에 들어선 까닭에, 일생 동안 생성적인 자강불식을 하면서, 사회와 자연에 대해 스스로 ‘무한책임 의식’을 지니고, 항상 ‘공인(公人)의 태도’로 살아가는 성숙한 인격자이다. 이런 인간상이 오늘날 요청되는 인간상임은 물론이다. 성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품을 고양하고, 화해로운 사회를 이루면서, 우주 자연의 균형 있는 생성을 저해하지 않고, 그 자연과도 조화로운 생활을 기하려는 ‘천인합일사상’이야말로 현대사상으로서 이용해야 할 실학적인 실용성을 충분히 지닌 사상이다. 현대의 실상을 정시할 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为了探索儒学在现代的可用性,笔者试图用现代的理念诠释儒学的终极理想“天人合一”思想。之所以考察此思想是因为笔者认为“天人合一”思想是儒学思想的代表性特征。自古以来,儒学者们把“天人合一”视为理想的原因在于认定此境界使“安身立命”成为可能,并且已经在现实里实现之。《中庸》提示了实现天人合一的方法论,即“唯天下之至诚,为能尽其性。能尽其性,则能尽人之性。能尽人之性,则能尽物之性。能尽物之性,则可以赞天地之化育。可以赞天地之化育,则可以与天地参矣。”进而言之,“诚者天之道,诚之者人之道也。”由此看来,天人合一的成就方法有二:以“诚”为基础的“尽性”之方法和将“人道”与“天道”合而为一的原理层面上的方法。通过实践躬行,可以使“天人合一”变为可能,这就是《中庸》所蕴含的思想。当用上述两种方法来实现“天人合一”时,就会发现如下困难:一,由于人性和物性相区别,二者又具有异质性,而此异质性是阻碍其一元化的因素;二,由于“理”这一概念所蕴含的“所以然”与“所当然”之涵义的不同,因此“人道”和“天道”的原理性合一也难以实现。以上两种因素成为“天人合一”所需解决的课题。这里需要正确理解的是,无论是人性和物性的异质性还是“所以然”和“所当然”的区别,都属于社会对人的层面的因素,而不是自然界里对物层面的因素。以上均源自将“本然之性”和“气质之性”视为异质、二分化的思维。而“天人合一”应该在作为物性的“气质之性”价值中立的基础上,只探讨“本然之性”和“气质之性”的源泉-生命本身“生成现象的特点”即可。因此,只要脱离“形式讨论”而进行“生成讨论”,那么以上两种问题的解决就成为可能。进行“生成讨论”时“本然之性”和“气质之性”的二分化思维问题才得以解决。首先,将代表本然之性的“仁”理解成“爱人”,同时把“仁”扩展到对物层面上,运用在“爱物”、“生意”、“生物”以及“产物”里。这既保存了本然之性,又使之等同于气质之性。其次,根据宇宙生命体观,从生命体(有机体)里可观察到“所以然”与“所当然”同一化的现象。虽然生命体的生成呈现出机械的、必然的生成过程,但是整体上看仍属于有目的的、当为的现象。笔者所指的生成探讨就是指此理论。使“天人合一”成为可能的基本因素“诚”之概念也成问题。朱熹则将“诚”解释为“真实无妄”。这种解释算很恰当。笔者则在此基础上添加事实的“真实”涵义与无瑕疵的“纯粹”涵义,认为只有这样,“诚”之概念才能变得更加充实。这是因为只有这样,“诚”之“真实”这一客体性格和其本来的主体意志性格才得以体现。此时仍需准确把握“诚和性的关系”。“性”即是指“诚”的体现-“诚实”之“法则性条理”。“诚实”实现其条理的“性”的过程就是“诚”与“诚实”原理化的过程。“诚者天之道,诚之者人之道也”,也出自此思维。将“诚”和“诚实”视作是成就“天人合一”之原理的思维,已将“诚实”看作成就“天人合一”的关键所在。“诚实的地位”也在于此。这时的诚实可与使佛教的理想境界“佛陀”成为可能的“禅”相匹敌,也可与使老庄思想的理想境界“自然”成为可能的“无为”相媲美。只有这样,才能重新解读以诚实为基础的“天人合一”之境界。此境界无疑与“安身立命”即“安心立命”有关,但是此时的“安心立命”有别于佛教和老庄思想的“安心立命”。以诚实为基础的安心可消除不安的状态,使个人达到“幸福的状态”。这有别于佛教的无心和老庄思想的忘我和无我。儒学的此状态下的幸福结束了因小我的利己心而彷徨的状态,使之进入“大我的利他”的“充裕的心理状态”里。这表明“诚实”所带来的“活力”开启了人生新的生活。“立命”则超越了服从于命运的“顺命”,包含使生命更加充实的“务命”和不断开拓命运的“开命”之内涵。以上皆是儒学所蕴含的现实的、实用的、实际的特点最理想化的实现状态。此境界里的“圣人像”也区别于老庄和佛教的圣人。与老子的无为的“真人”和佛教的超脱了痛苦和烦恼的“佛陀”相区别的人就是儒学里所讲的圣人。他由于已进入“生命的广场”,一生都自强不息,对社会和自然怀有“无限的责任意识”,以“公人的态度”生存下去的成熟的人格体。此形象无非是现今社会所需的。以诚实为基础、提高自身的人品、构建和谐的社会、顺应宇宙自然的均衡状态、与自然协调发展的“天人合一思想”才是当今社会所需的实学的、实用性的思想所在。面对现代的状况,我们不得不承认此思想。


키워드

천인합일(天人合一),
진성(盡性),
성실(誠實),
천도(天道),
인도(人道)

天人合一, 盡性, 誠實, 天道, 人道

참고문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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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유교개념용어

 유학에서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학설.   유교교리.

 정의
유학에서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학설.유교교리.

내용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인 성(性)을 천명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성이라는 글자의 모양이 ‘忄(心)’와 ‘生’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살려는 마음’·‘살려는 의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살려는 의지’는 인간의 지각(知覺)이나 의식(意識)을 초월한 본질적인 것으로서 깊은 잠에 들었을 때도 심장을 움직이고 호흡을 하게 하는 근원자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의 성은 한 개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동일한 것이며, 또한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생(生)의 본질과도 동일한 것이다. 말하자면, 개체의 본질이 바로 전체의 본질인 것이다.

다만 개체의 본질을 가리켜 말할 때는 성이라 하고 만물 전체의 본질을 가리켜 말할 때는 하늘의 작용이라는 의미로서 천명이라고 한 것이지, 성과 천명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체적 존재이면서 본질적으로는 전체적 존재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하늘과 사람은 합일체라는 것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감각 기관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 감각 기관은 육체를 중심으로 하여 남과 나를 구별하는 쪽으로 작용하여 점차 인간은 전체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전체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란 바로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대인자 불실기적자지심자(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라 하여 그가 이상적 인간으로 설정한 대인은 갓 태어난 아기 때의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자라고 설명하였다. 이 때의 대인은 천인합일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이미 전체적 존재로서의 본질인 천명의 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과제로서 학문을 설정하고, 학문의 길은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또 ‘진기심자 지기성야 지기성 즉 지천의(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라 하여 전체적 본질로서의 성을 다시 구하는 과정으로서 학문의 길을 진심(盡心)·지성(知性)·지천(知天)의 세 단계로 세분하였다.

『중용』에서는 성을 다시 구하여 천인합일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성(誠)의 실천을 제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자기의 성을 다하니 자기의 성을 다하면 남의 성을 다하고 남의 성을 다하면 물(物)의 성을 다하며 물의 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그 작용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心)을 다하여 성(誠)을 실천하고 천명의 성(性)을 다시 구하여 천인합일이 되면 인간은 개체적 존재를 극복하여 전체적 존재를 실천하게 되는데, 그러한 때의 인간 행위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맹자는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라 하였다.

『주역』에서는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日月)과 그 밝음[明]을 합하고 사시(四時)와 그 차례[序]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하여 천지와 혼연일체가 되어 같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하였다”라고 한 공자의 실천 세계도 또한 천인합일의 세계로 이해할 수 있다.

천인합일사상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존재하는 자로 봄으로써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도출하게 되는데, 전국 시대 말기에 태어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려던 순자(荀子)는 성선설이나 천인합일사상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투쟁의 직접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투쟁하게 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성악설을 제창하고 아울러 천인분리사상을 주창하여 인간은 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 인간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고 그 원리로서 예(禮)를 강조하였다.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는 “하늘도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천인합일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당말(唐末)의 이고(李翺)는 천인합일의 방법론으로서 복성론(復性論)을 제창하고 다시 복성의 방법으로서 성(誠)의 실천과 멸정(滅情)을 제시하였는데, 주돈이(周敦頤)에 이르러 이는 성(誠)의 실천과 무욕(無欲)으로 계승되고 또 복성의 객관적인 방법으로서 우주론이 전개되었다.
주돈이의 사상은 다시 장재(張載)·정이(程頤) 등을 거쳐 주희(朱熹)에 이르러 성리학으로 완성되는데, 주희는 성의 실천과 무욕을 거경(居敬), 우주론을 궁리(窮理)로 집약하여 복성의 방법을 거경과 궁리로 정리하였다.
한국 유학에서는 천인합일사상보다 더욱 밀도가 높은 천인무간사상(天人無間思想)이 발달하였다. 천인합일이 천과 인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일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천인무간은 천과 인이 애당초 간격이 없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천인무간사상에서 나타나는 한국적 특징으로는 궁리보다도 복성의 직접적인 방법인 거경을 중심으로 하는 고도의 수양철학(修養哲學)과 지치주의운동(至治主義運動)과 같은 강렬한 정치적 실천 의욕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천인무간의 사상은 인간의 감정까지도 긍정하게 되어 천의 의지를 인간이 따른다는 천 중심의 천인합일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천이 따른다는 인간 중심의 천인합일사상으로서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 발달하게 된다.



 집필자
집필 (1996년)
이기동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

2021/03/26

Namgok Lee '적정하고 정당한 분노 조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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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하고 정당한 분노'

'분노'에 대해 더 연구를 집중해 보시겠다는 고려대 조성택 교수가 던진 일종의 화두.
분노(화)라는 같은 말을 써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8년간 생활했던 무소유사회(야마기시즘) 특강의 목표 첫번째가 '어떤 경우에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였다.
나도 진행을 해 보았지만, 가장 중심적인 테마고, 가장 오래하는 테마고, 어려운 테마였다.
가장 많이 걸리는 부분이 '어떤 경우에도'였다.
그 가운데도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가장 많았다.
조 교수의 연구에 기대가 많이 된다.
나도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다만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분노가 불의한 사회를 무너뜨리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만,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는데는 동력으로 되지 못한다는 것에 유념하고 싶다.
한가지만 더 말한다면,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은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를 참으면 '화병'에 걸리기 쉽다.
그 보다는 '적정'하게 화를 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일시적 '분노'가 아니라, 지속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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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가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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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저는 요즘 바로 그 적정성이 화두입니다. 적정성이란 무엇인가. 역동적 균형, 중용이라는 것, 군자이시중이란 것, 적정시민, 적정기업, 적정사회란 어떻게 가능한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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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핍으로서 투쟁과 충만으로서 투쟁의 차이, 열등감으로서 분노와 자존감으로서 분노의 차이 등등을 바탕에 둔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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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건준
       부당한 걸 보고 분노(화)가 일어난 마음의 상태와 불의나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는 마음의 상태는 같은가? 다른가?
      분노와 정의감은 같은가, 다른가?
      분노와 사랑은 함께 할 수 있는가?
      자녀가 잘 못할 때, 화를 내는 것과 심하게 나무라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등등 검토해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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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남곡
       그렇군요. 저두 노동현장을 뛰면서 오래 고민했던 건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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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화)의 적정성 ᆢ화는 나쁜 감정인가. 화도 중요한 감정자산의 하나인가?
    화는 참아야 하는가? 화를 적절히 부려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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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요하고 일상적인 큰 테마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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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걷잡을 수 없음'이라는 의미를 다분히 담고 있는 말이라서...
    '분노'라는 '감정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이 이후에 벌어지는 '스스로도 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흐름과 그로인한 판단의 error 발생'..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정하고 정당한 분노'는 이미 '분노'라고 정의하기에는 좀 적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표출방법의 적정성(제어가능)과 사회윤리적 정당성'이...
    담보 된 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아무 문제가 없지않나 싶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저..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의사표시 정도인 셈이죠..
    대상이나 내용에 따라서
    '분노'라는 감정이 적정하거나 정당성을 담보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분노'일뿐이죠..
    제가 조성택 교수님의 문제의식이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표현방식의 성숙성이 목표달성의 합법칙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사회윤리적양심과
    역사적 합법칙성(시대정신?)에 맞다고 하더라도 '분노'라는 감정은.. 정당화..되거나..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씀드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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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충근
       생각나는대로 솔직하게 쓰다보니 글이 좀 거칠고 두서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우는 것도 실례인 듯 하구요....ㅠㅜ
      꺼내놓고 싶었던 말은...
      적정하다거나...
      정당하다고...
      이야기 될 수 있는 '분노 또는 분노의 결말(?)'이라는 것이
      있기는 어렵겠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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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그저 화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태는 좀 깊이있게 서로 통해가기란 쉽지않은 상태라고 느껴져서.
    그저 그 본질적인것
    언제 어느것 누구에라도 들어맞는 것을 찿아갈 수있는 상태란? 하고 생각해봤을때.
    화가 나는 또는 화가
    날 수 상태에서는
    정상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전개해 갈 수없지않을까요?
    촛불혁명에서 확인했듯이 유리창하나 깨지않고도 나라의 정치의 건강을 회복하려고 해 봤듯이요
    스위스에서 살때 유럽인들은 크게
    받아들이던군요
    세계에 수출할 수있는
    큰 보물이 될듯해요
    나의 앞사람이 여럿을
    해치는걸보고 조금도
    화가나지않은상태에서
    그피해가 않되도록
    스톱시키거나 쳐부수거나했을때 그당사자가 전혀 화가나지않은 상태에서도 두려움없이
    할수있겠다는 심경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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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 분노 그렇지만 그에 집착하지 않음.. 이론상 그렇다고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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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하라 스테판에셀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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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스스로 화 나고 싶을 때 화를 내고, 거두고 싶을 때 거둘 수 있는 것도 좋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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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용에
    희로애락지미발을 中이라하고
    발이개중절을 和라고 하였습니다.
    분노가 일기전 고요함에서 경계를 당하면 분노가 일 때 온전함을 잃지않고 정황을 잘 생각하여 분노를 그 상황에 맞게 행하는 것을 중도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말이 아니라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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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황에 따라 참을수도 있고 버럭 화를 내서 대의를 세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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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어려운 부분이네요.
    어제도 버럭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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