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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조명희·소세키의 인생작품이 현대사회 미래 그려”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조명희·소세키의 인생작품이 현대사회 미래 그려”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조명희·소세키의 인생작품이 현대사회 미래 그려”
기자명 박장미 기자
입력 2017.10.23 

김태창 주간 삿포로 특별강연
민중 속으로 뛰어든 이들의 공통점
탈식민지화, 탈영토화 위해 온몸바쳐
일본제국주의 '천황 따르라'주입교육
폭력 아닌 '정답'논리로 인민들 지배


지난 16일 오후 일본 로이톤에서 열린 주 삿포로 대한민국 초영사관 초청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의 특별강연에는 훗카이도 지방정부인사, 학계, 기업관계자, 재일동포 등 300여명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동양일보) 주 삿포로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지난 16일 오후 일본 로이톤 삿포로 3층 로이톤홀에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을 초청, 일본의 나츠메 소세키와 한국의 포석 조명희를 소재로 한 특별강연을 개최했다. 이날 강연 내용을 야규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가 정리해 보내왔다. <편집자>

10월 16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호텔 로이톤삿포로(ロイトン札幌)에서 주 삿포로 대한민국총영사관 주최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의 특별강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조명희(趙明熙)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가를 통해 한·일 관계를 다시 생각하다’가 개최되었다. 바깥에서는 한반도나 일본의 혼슈(本州)보다 먼저 첫겨울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강연 장소인 300명을 수용하는 대형 홀이 곽 찼고, 청중들의 뜨거운 열기가 충만하고 있었다. 시작하기 전 홀에는 5살 때 고아원에서 도망치고 10여 년 동안 혼자서 살다가 세계적 가수가 된 최성봉 소년이 부른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 그리고 존 레논의 ‘이메이진(Imagine)’, 고바야시 사치코(小林幸子)의 ‘꿈의 끝(夢の涯て)’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모두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고 계속 꿈을 가지는 것의 중요함을 부른 노래들이다.
또 2시간의 강연을 마친 후에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하려고 하는 참가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김 주간은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주최자 쪽에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김 주간, 영사관 관계자와 미래공창신문 야마모토(山本恭司) 교시 편집인과 필자만이 경식을 취하면서 야심한 시각까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상아탑을 떠나서 ‘민중 속으로’
이 강연에 즈음하여 김 주간은 지금 왜 오늘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라는 한일의 대표적인 작가를 이야기하느냐에 대해 밝혔다. 포석 조명희(抱石趙明熙)는 잘 알다시피 1894년 마침 동학혁명,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난 한반도 역사가 대전환된 해 충북 진천(鎭川)에서 태어났다.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3.1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석방 후 그는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로 유학하면서 재학 중에 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1920년에는 희곡 ‘김영일(金英一)의 사(死)’로 창작극작가로 데뷔했다. 다음해 고국에 돌아온 그는 1920년대에 대표작인 ‘낙동강(洛東江)’을 비롯하여 많은 시, 희곡, 소설 등을 발표하면서, 독립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식민지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러시아의 한인촌에 가서 고려인 문학과 교육에 힘을 기울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하에서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하고 말았다.
소세키도 역시 어린 시절은 불우하고 여러 번 입양되다가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젊은 소세키는 한시문(漢詩文)을 즐겼으나 문명개화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제국대학(帝國大學·뒤의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에히메(愛媛)와 구마모토(熊本)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문부성(文部省)의 명을 받아서 영국 런던에 국비유학생으로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신경쇠약을 앓고 귀국명령을 받게 되고, 귀국 후에는 도쿄대학 교수와 제일고등학교 강사를 했지만 결국 교직을 그만두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의 신분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김 주간은 그들의 삶이 30대에 한국을 떠나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하고 또 50대에서 대학총장의 지위도 다 놓아두고 단신 일본에 가서 도쿄대학에서 공공철학 운동을 시작한 자기 인생과 겹친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보다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소세키와 조명희가 조금 스스로를 굽히기만 하면 상아탑 안에서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과 신분 보장, 그리고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문학자로써 민중 속으로 뛰어들고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위해 활명연대(活命連帶)하려 했다는 점이다.
젊은 소세키는 영어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일본인으로서 무엇 때문에 영문학을 공부하는가? 문명개화(文明開化)니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니 하기 위해 영문학자의 설을 일본에 수입하고 짝퉁 영국인이나 되자는 것인가?”라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게다가 실제로 대영제국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살아보니까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대제국을 건설해본들 거기에 사는 영국인들은 별로 행복한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당시의 제국 일본의 밝지 않는 미래를 미리 들여다보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산시로’에서 주인공 산시로(三四?)가 도쿄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콧수염을 기른 (소세키의 분신과 같은) 남자와 같은 자리에 앉으면서 러일전쟁 후 “앞으로는 일본도 점차 발전하겠지요?” 라고 말하자 그 남자가 “망할 거야”라고 딱 잘라버리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말로를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엘리트 교원의 자리를 내던지고 소설가가 되었으며, 근대주의·자본주의·제국주의에 분주하면서 내면이 ‘식민지화’된 지식층의 모습을 비판적 또는 풍자적으로 많이 그렸다.
한편 조명희의 경우는 보다 직접적·구체적으로 한반도 땅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있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비참한 모습을 소설에 많이 묘사하고 ‘낙동강’에서는 제국주의 권력에 의한 고문으로 빈사상태로 석방되는 독립운동·사회운동 지도자를 등장시켰다. 그 작품에는 경찰 측 인물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비록 놓인 상황은 다르지만 조명희도 소세키도 식민지화·영토화된 영혼들을 구해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뛰어든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정답 없는 물음’을 계속 물어야
강연 중 김태창 주간은 김선우 화가가 소세키 작품을 읽고 그림으로 표현한 ‘행인’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리고 조명희의 작품세계를 그려낸 ‘아무르 강의 생명수’, ‘낙동강’을 소개하고, 김영미 시인의 시 ‘낙동강이 흐른다’(일본어 번역: 오구라 기조 교수)를 낭독했다. 또 나츠메 소세키, 조명희, 그리고 중국을 대표하는 루쉰(魯迅)의 세 사람에 대해 김태창 주간이 직접 지은 시 ‘정답 없는 물음’도 소개했다.
그런데 이 ‘정답 없는 물음’과 관련해서 김 주간은 일찍이 어느 고등학교 교장 연수회에서 강연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떤 교장선생이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와 대학은 어디가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다. 김 주간은 “고등학교까지는 정답이 있는 교육을 합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것은 정답이 없는 것을 가르치는 곳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삿포로의 청중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강연 후의 만찬회 때 한 여자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나는 정답을 찾기 위해 대학교로 들어갔는데 정답이 없는 곳이 대학이라면 그 정답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뒤에 영사관 직원들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을 때에도 어느 직원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답’이야말로, 달리 말하면 재빨리 정답을 얻고자 하는 심리야말로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로 이어지는 무서운 함정이다. 서구제국주의는 막강한 군사력만 가지고 세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은 ‘서양화가 정답이다’라는 논리로 세계를 농락했고, 일본제국주의는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들고, 천황의 정부의 법을 따르고, 천황의 백성인 일본인과 같이 돼라.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논리로 식민지(본국도)를 지배했다. 히틀러의 나치스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답이었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정답이었고, 중국에서는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정답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정답이다.
이처럼 모든 제국주의·전체주의는 폭력·통제·감시보다 오히려 ‘정답’을 가지고 인민들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시민이 자유로움을 잃지 않으려면 먼저 계속 생각하는 백성(思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에의 뜻을 굳게 지키는 백성(志民)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계속 생각하고 뜻을 지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배 권력이 내놓는 가짜 정답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뜻과 생각으로 옳고 그름, 밝음과 어두음을 가리고 항상 밝음(哲)을 선호하는 백성(哲民)이 되어야 한다고 김태창 주간은 강조했다.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는 모두 뛰어난 지성을 가지면서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안정된 지위와 생활을 내던지고, 여러 가지 병이나 관헌의 탄압과 싸우고, 시민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통해 사민(思民)·지민(志民)·철민(哲民)이 되고자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 주간은 영혼의 식민지화, 영토화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기계에 의한 식민지화라고 경계한다. 사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대치되고 장래 없어지는 직업이 거론되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회사 골드만삭스(The Goldman Sachs Group)는 이미 서기 2000년 당시 600명 있었던 금융투자가를 현재 2명까지 줄었다고 한다. 또 2016년 3월에는 이세돌 기사(棋士)와 AI의 알파고(AlphaGO)가 대전하고 4패 1승한 일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인공지능의 승리라는 문맥에서 거론될 경우가 많지만 김 주간은 오히려 이세돌이 거둔 1승에 주목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정보처리·분석능력이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인공지능이라도 감히 생각해낼 수 없는 묘수(妙手)를 인간은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유를 잃지 않으려면 생각하고 뜻을 세우고 철학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힘들더라도 정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 물을 줄 알아야 된다. 하지만 혼자서 그 험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벗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의 인생과 작품을 통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미래의 모습을 보여줬다. <야규마코토(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1,2) 김태창, 야마모토 쿄시, 카마다 토지 |2018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1) 김태창 | 동아포럼·카마다 토지 | 교토대학

정리 : 조성환

by소걸음Jan 24. 2018

개벽신문 제67호, 2017.9


[편집자주] 이 글은 동양포럼의 김태창 선생과 교토대학의 카마다 토지 교수가 2015년에 ‘영성’을 주제로 나눈 대화로, [미래공창신문] 영성특집호(제24호. 2015년 6월)에 실린 글을 조성환 박사가 번역하고 각주를 단 것이다. 분량상 2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1)
할 수 있었다. 김태창 선생과 야마모토 쿄시 편집장에게 심심한 경의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2.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 : 일본적 영성과 한적 영성의 만남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편집장) : 카마다 토지 선생님의 [강좌...댓글0Jan 24. 2018by소걸음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2)

의 개신(開新)을 통해서 신천신지신인(新天新地新人)의 상관연동적 혁신을 실천하는 영도(靈道)·영통(靈通)·영변(靈變...시각에서 보면 ‘분열상태’로 보일지 모르지만, 한적 영성의 측면에서 보면 견고한 일원 통합지배가 아닌 고차기능적인 유연한...댓글0Jan 28. 2018by소걸음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共創) 2018 김태창, 야마모토 쿄시, 후카오 요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共創)

by소걸음,  Jan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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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번역 | 야규 마코토·박장미 | 개벽신문 제65호(2017.7)

[편집실 주 : 이 글은 2017년 8월 14~16일에 동양포럼 주최로 열린 한·중·일 철학·문학 대화를 위한 사전의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그해 3월 1일 오후 일본 오사카의 타카츠키시(高槻市)에 있는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선생의 자택에서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의 사회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후카오 선생이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이라는 주제로 나눈 대화 내용을 미래공창신문 재외기자 겸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소 연구원 야규 마코토(柳生眞) 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겸 편집
  • 김태창 : 동양포럼 주간
  •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 오사카대학 준교수

시간 : 2017년 3월 1일

장소 : 오사카의 타카츠키시(高槻市)

2023/07/18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 동양일보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9.02.24 


(왼쪽부터) 오강남 캐나라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포럼운영위원회는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대화를 펼치고 있다. 지난 12월 7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김용환 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도마복음과 도덕경, 장자가 노년철학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도마복음은 지금 성경에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복음서적이 여러 개 있었는데 기독교는 그 중에서 4개만 뽑고 나머지는 폐기처분 시켰습니다. 그 폐기된 복음서들은 대부분 깨우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마복음입니다. 4세기 이집트 나카마디라는 수도원은 폐기된 복음서적은 항아리에 모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다가 잊어버려서 1945년 어떤 농부가 거름을 채취하다가 땅에서 발견했다고 해요. 도마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것이 자유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받아야 잘산다는 것이 기본인데 도마복음은 속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자유를 준다는 내용입니다. 도마복음 내용 중에서 노인과 아이에 대한 내용을 뽑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오직 어록 114개만 있습니다. 도마복음 4절에는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칠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된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남자아이의 경우 8일째에 할례를 하는데 여기에서 7일은 아직 성별이 갈라지지 않은 때입니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직 안된 상태 즉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죠. 나이든 사람도 초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아이처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순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런 것을 깨달으면 어린아이고, 깨닫지 못하면 깨달은 사람에게 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길 잃은 양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이 불쌍한 존재ㅈ만 도마복음에서 길 잃은 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훌륭한 양이에요. 인습적인 세상에 머물 수 없는 특출난 존재로 자신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99마리의 양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통속적인 사고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인데 도마복음은 보통사람처럼 삶을 살지 말고 특출한 사람이 되어라.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아이한테 배우라는 것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사상의 음양도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입니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깨치면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마지막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참모습을 믿지 않고, AD4세기에 로마가 세계 종교학에 많은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노년 사회에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신 자식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고,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사람을 천사라고 칭송했고, 마지막 남은 집도 교회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님을 모시려니까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교회에 가서 기부한 것을 조금 돌려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교회는 거부를 했다고 해요. 왜 그분이 그런 결정을 했느냐 생각해보면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노인을 위해서, 너무 천국에 집착을 하고 있으니 도마복음을 통해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다시 찾고, 그를 통해 인간의 상식수준이 회복되어야 온전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 교수 “도마복음에는 천당이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우쳐서 자유로움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절에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다른 차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처음엔 당황, 혼란, 더 궁구해보면 ‘아 그럴수도 있나’하는 놀라움을 갖게 되고 마지막으로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절대적인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즘 신학자 중에는 마르크스 볼브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가 지금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 즉 인습적인 기독교,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로 나누고 인습적인 기독교는 천당, 지옥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특징 지었습니다. 새로운 기독교는 변화의 기독교 즉 의식의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의식의 변화를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본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새롭게 눈을 뜨자는 것을 추구합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오늘 주제와 관련해 말씀드리면 노인상은 전통적인 것과 변혁적 노인상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점은 믿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와 깨달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 일본에 쿠우카이(空海)라고 하는 불교 지도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신자가 이것 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진리를 요약을 했으니 그것을 믿고 날마다 암송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이초(最澄)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믿음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을 노인상과 연결짓는다면 전통적인 노인상이라는 것은 ‘노인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영어로 하면 Transformational 노인상인데 지금 정해져 있는 노인상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과거지향적이고, 고정되고, 비관적이고, 모든 면에서 비건설적인 노인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노인은 지혜가 있고, 경험이 풍부하고, 어느 세대보다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남성 청장년 중심사회라는 것입니다. 여성이나 아이, 노인은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사회였다고 느꼈습니다. 어린아이와 늙은이는 청장년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애를 낳아서 키우는 것을 다 끝내면 가치가 없느냐, 아니에요. 생물학적인 생산성은 없지만 문화적인 생산성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손자를 통해 개체생명과 우주생명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는데 그 손을 잡을 때마다 제 개체생명을 넘어서는 역동하는 생명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도마복음에서 오늘 인용해주시는 말을 보고 진정한 혼과 혼이 통하는 관계가 맺어지면 우리는 어린아이로부터 우주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미래를 여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오 교수 “서양에서는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라는 말도 나왔는데 에이지즘이 너무 보편적입니다. 사실 동양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좋았어요. 우리 속담에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이의 단순성, 진실성과도 관계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속설로는 아이가 누구에게 의지하듯 노인도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인데 깊이 들어간다면 기존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아이처럼 초이분법적 상태로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일본에 옹동론(翁童論)이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라는 노인과 아이고 중장년은 불안정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아동과 노인의 힘이 상생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깨달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주생명과 연결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때 어린아이와의 마주침 속에서 노인이 그것을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405060세대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시기에요. 하는 일에 힘을 전부 쏟기 때문에 현세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이 다 끝나서 708090세대가 되면 우선 직장에서 나오고,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이 드물게 되니까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합니다. 노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노인상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사회에서도 숨어서 기여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일본 사회가 굉장히 청결한데 사람들이 다니기 이전에 노인들이 눈에 뜨이지 않게 청소를 합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데 계속 이렇게 한다면 혐노 의식만 커지고 세대 간 관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노인을 철저하게 싫어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노년층을 ‘노인충’이라고 부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해주신 말씀들이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 “제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1절에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노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뜻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오 교수 “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인 것, 심적인 것, 영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해석이 있는데 보통 1~2층에서 끝납니다. 3~4층까지 가면 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희랍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두가지가 있어요. 비오스와 조에인데 비오스는 생물학적인 생명력, 조에는 의미있는 삶, 깨어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몸은 죽은 것이에요. 몸은 죽지만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의미 있는 삶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의 생각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이에요. 비오스는 도시국가 안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생명력이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조에와 똑같이 개체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생명이면서 동시에 우주생명과 연결되는 것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호흡이라고도 하는데 우주의 기를 들여 마시고 자기 속에 있었던 오염된 공기를 뿜어내면서 순환을 하는 과정에서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비오스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학적 생명인데 개체생명을 구성하는 요인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우주생명은 영성, 영혼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하는 것은 생물학적이고 정치사회학적인 생명은 죽지만 우주생명과 연결이 됐을 때는 죽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 교수 “도덕경의 기본 가르침은 도. 도를 우주의 기본 원리, 실제로 여기고 그것에 따라 살면 덕을 본다고 합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에요. 도를 말로 제약하면 그것은 더이상 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습니다. 56장에 보면 지자불언 언자불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말이 있는데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신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안다고 떠드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도마복음 어디나 똑같습니다. 도덕경은 ‘무위’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동, 억지로 하는 행동, 이기적인 행동을 다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무위는 노년이 되어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이 되면 무위자연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공로를 인정하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 일방적인 사고, 고정관념, 선입견을 하루하루 없애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노년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저도 노년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동양의 전해 내려온 문헌을 하나 찾아서 거기서 여러 가지 발상의 근거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도덕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무’를 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하다’라는 동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장년에는 유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큰데 노년이 되어서는 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무나 공을 이해하는 단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년기에서 중장년기에 열심히 배운 뒤 노년기에 가서 배운 것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벗어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기를 이렇게 받아들어야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장년기처럼 앎을 추구하면 안되고 거기서 벗어나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해야 합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자연스러워야하고 젊음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연령차별이 굉장히 심각한 사회입니다. 생각을 바꿔서 우선 연령차별을 바꾸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 오늘 요약을 해주신 것이 노년기 철학적 마음가짐에 기본이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공감을 합니다.”



▷오 교수 “장자에 붕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해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나중에 새가 되면 붕(鵬)이라고 합니다. 크기도 무척 커서 날개를 피면 하늘 구름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남해(南海)로 날아간다고 해요. 9만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붕새를 비웃습니다. 자기들은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나무 위에 올라가는데 뭐하러 9만리나 날아서 남쪽으로 가냐는 겁니다. 저는 붕처럼 되지는 못해도 붕을 비웃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물 안 개구리’도 장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제약을 벗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는 더 깊은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변화되고, 그만큼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한쪽 면만 보는 사람은 융통성을 가질 수 없어요. 양쪽을 다 봐야 합니다.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장자에서 말하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장자 2편에는 남곽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니까 옆에 있던 시종이 “오늘은 예전 모습과 달라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남곽자는 자신이 오상아(吾喪我)를 했다고 대답했어요. 오상아는 내가 나를 여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특수 인식을 활성화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특수인식을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사람으로 포정이 나옵니다. 포정이 소를 춤추듯이 잡으니까 왕이 기술이 좋다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포정은 이것은 기술이 아니고 도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다가 기술 경지를 넘어서면 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 오상아를 해서 인식이 변화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유교에서도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의식의 변화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좌망(坐忘)이 있습니다. 안회는 공자에게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룬 것 같다고 보고했어요. 공자가 자기는 인이니 의니, 예니, 악을 다 잊었다고 했고 결국에는 좌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서 큰 트임(大通)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심재(心齋)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마음을 굶긴다는 것입니다. 공자와 안회가 등장하는데 위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니 안회가 가서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안된다고 했어요. 마음을 굶어야 한다고 했지요. 지금 마음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장자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눈을 뜨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식이 변화한다는 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입니다. 장자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는데 북을 치면서 춤을 췄다고 합니다. 자기도 감정적으로는 슬펐지만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와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봐야 공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실재를 직관함으로써 죽음과 삶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면이라는 것을 알고 슬픔을 극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오른 것이죠. 죽음을 슬퍼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노인상과 연관 지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노자, 장자를 그대로 따라할 수 없지만 이정표로 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년이 됐을 때 이러한 경지에 오르면 살기 편해지지 않을까요.”



▷김 교수 “장자가 노년철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러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절대화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특정 교리에 얽매여서 굴복되고 왜곡되어선 안된다는 모습을 자세하게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세가지 키워드 오상아, 좌망, 심재. 인상 깊었고 오늘 노인철학에 주는 메시지는 깨달음의 밝은 빛을 통해 노인의 어두움을 벗어버리면 노년이 황혼기라는 착오에서 벗어나 황금기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 주간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 이후를 생활하는 것이 오상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무장화된 자기 자신을 말하는데 70세 정도 넘으면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은 장사를 지낸다는 것인데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는 과정이 바로 노년기의 인생입니다. 오상아를 하지 못하는 노인은 젊은 세대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는 다섯 개의 구멍을 말하는데 첫째가 귀. 귀로 들을 소리를 듣고,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는 듣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눈인데 안봐도 되는 것은 보지 말고 봐야 될 것만 보라는 의미. 세 번째는 입이고 네 번째는 코입니다. 우주 생명을 순환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항문입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대장, 소장, 직장, 항문을 연구한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은 오래살려면 장이 건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목구비까지는 신경을 쓰는데 항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먹어서 속에 넣는 것만 생각하지 내놓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순환을 코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문도 똑같은 비중으로 순환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가지의 구멍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을 ‘오’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지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로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고 온전한 자신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오상아’라고 합니다. 제가 노년기의 삶은 바로 오상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상아는 과정일 뿐입니다. 오상아를 하면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타자와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A, 죽어서 가는 세상을 B라고 할 때 A에서 죽으면 B에서 어린아이로 태어나 살게되고, 또 거기서 죽으면 다시 A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탈바꿈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굉장히 좋은 점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오 교수님께서 노자와 장자를 통해 어떻게 노년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소스를 발견,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박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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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미 pjm8929@dynews.co.kr

동양포럼 1주년...인문학적 사고 통해 삶을 성찰하다 - 동양일보 2017

동양포럼 1주년...인문학적 사고 통해 삶을 성찰하다 < 사회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1주년...인문학적 사고 통해 삶을 성찰하다
기자명 조아라 기자
입력 2017.03.27

동양일보 창사 25주년 기념으로 지난해 10월 1~3일에 열린 ‘동양포럼-한·중·일 회의 Ⅱ’ 토론 모습. <사진·최지현>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 동양일보가 창사 25주년을 맞아 ‘철학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해 온 동양포럼이 28일 1주년을 맞았다.

동양일보는 지난해 3월부터 현대인들이 인문학적 사고를 통해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철학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일환으로 충북도교육감, 주성대(현 충북보건과학대) 학장 등을 역임해 온 충북 교육의 거목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과 ‘교토포럼’을 주재하며 전 세계에서 철학 담론을 펼쳐온 공공철학의 석학 김태창 박사(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모임 대표)가 뜻을 함께 한 동양포럼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유성종 전 총장을 운영위원장으로, 김태창 박사를 주간으로 발족한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지난해 3월 28일 이들의 대담을 동양일보 지면에 게재하며 동양포럼의 시작을 알렸다.

동양포럼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천착하고 사상과 문화의 탐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아보고자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좌담, 대담, 토론, 특강, 콜로퀴엄, 기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돼 왔으며 그 결과물은 매주 둘째·넷째 주 월요일 마다 동양일보 지면에 특집으로 연재됐다.

지난 1년 간 특강 7회, 대담 3회, 콜로키움 2회, 학술회의 3회, 좌담 5회, 인터뷰 4회 등이 진행됐으며 이 결과물과 한·중·일 석학들의 기고문이 동양일보 지면에 38회에 걸쳐 게재됐다.

지난해에는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두 차례의 매머드급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며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지난해 5월 3일에는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석학 16명이 참석한 ‘한·일 회의’가, 10월 1~3일에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연다-동아시아 활명연대(活命連帶) 제안’을 주제로 한국, 일본, 중국의 전문가 34명이 참석한 ‘한·중·일 회의’가 열렸다. ‘한·중·일 회의’는 3일 간 10명이 10개의 발제를 한 뒤 각각의 발제에 대한 토론과 종합토론, 전체토론, 발전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 회의는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세미나나 토론회와 달리 참석자 전원이 둘러 앉아 전 일정을 함께 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돼 눈길을 모았다. 김태창 주간이 운영했던 교토포럼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었다.

올해는 오는 8월 14,15,16일 3일 동안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주제로 한국의 조명희,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을 비교 분석하는 ‘한·중·일 문학-철학대화모임’이 개최될 예정이다.

2023/04/26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6.07 21:08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24 20:1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1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10 19:4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26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9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12 20:1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8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3.22 19:28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1.12 20:07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6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22 19:2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5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08 20:3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24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10 21:12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0.27 20:12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1.12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8월 12일 월요일

잠견자박(蠶絹自縛:누에가 자기가 만든 고치안에 갇혀서 밖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말이 생각난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 최초의 나라인 북위(北魏)의 고승 담란(曇鸞, 476-542)의 ‘논주(論註)’라는 책 속에 나오는 말인데 자기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 갇혀서 외부세계의 들어야 할 말을 들을 수 없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무이인(無耳人:귀가 없는 사람)이 되고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거나 보려 하지 않는 무안인(無眼人:눈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변태인간의 경우를 지칭한다.

사인(私人)의 경우에는 사정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오로지 자기 소신에 따라 자기만의 세계안에 칩거하여 곁눈질을 하지 않는 고고(孤高)한 삶을 견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인(公人), 그것도 한 국가의 최고위 공직자의 경우에는 용납될 수 없다. 다양한 가치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자유로운 국민의 삶을 각자의 자주성, 독립성, 차이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것을 국가 전체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과 행복추구를 가능케하는 종합예술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위 공직자와 그를 보좌하는 핵심공인들에게는 잠견자박은 본인의 정치윤리적 책무이행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위탁된 국민전체의 주권을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전체를 자기들이 빠져있는 누에고치안에 가두려는 처사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매우 심하거나 매우 나쁘거나 하여 어이가 없어 말로써 나타낼수가 없는 일)이다.

국민을 반일애국이라는 틀에다 묶으려는 것은 반시대적 잠견자박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8월 13일 화요일

어떤 한국인 여성학자의 학문적인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되도록 널리 알리고 싶어서 조그마한 국제회의에 모시고 의견을 피력하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했었다.

20여명의 국내외학자들이 노년철학에 관해서 자유롭고 활발한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런데 마침 내가 사회를 보던 세션에서 그분이 나에게 노년기의 사고와 인식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몇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질문은 가짜뉴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과 어긋나는 뉴스라고 대답했다. 평범한 상식인의 입장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분은 “주로 누가 가짜뉴스를 퍼뜨린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다시 질문했다. 나는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이야기하자면 여당도 야당도 그리고 심지어 청와대도 각자의 이해타산으로 가짜 뉴스를 열심히 생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시후 둘째 질문을 했다. Me Too 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지나치게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들이 여러모로 고생이 심했고 억울한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진정으로 여남평등이 실현되는 쪽으로 사회발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겪어야할 발달과제로써 필요하고 중요한 뜻이 있다고. 그러나 작금의 사태진전을 주의 깊게 보아오면서 과장과 왜곡과 날조의 위험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나의 솔직한 감회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질문은 “촛불집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라고 던졌다.

나는 학자사이의 진지한 의견교환이라는 입장에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많은 사람들–특히 젊은 남녀들–이 촛불을 들고 정치적 소신을 공개적으로 표시, 주장, 관철하려는 집단행위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의 발동이기 때문에 그 뜻을 소중하게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태극기집회도 열리고 촛불집회와는 다른 정치적 소신을 표출, 주장, 관철하겠다는 집단행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참가자수가 더 많으냐라는 측면을 고려하면서도 똑같은 기본권의 발동이라는 점에서 차별해서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와 같은 질(質)의 응답형식의 대화가 있고 나서 얼마후에 어느 지방신문에 게재된 그분의 글 가운데 이날 함께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요약해놨다.

그리고 나에 대해 몇 마디가 적혀있었다. 그 내용은 내가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 한국인식이 잘 되어 있지 않고 한국을 폄하하는 보수적이 노인이고 자기는 언제까지나 보수화되지 않고 늘 진보적이 인식과 입장을 지니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글쎄, 나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80대의 중반을 살아가는 나로써는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이고 보수와 진보의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게 살아오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리고 학문적인 입장에서 했던 이야기를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이 참 유감이었다.



8월 14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타케나카 히데토시(竹中英俊 전도쿄대학출판회 상무이사, 편집국장)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쿄토포럼이 내가 자진해서 그만둔 후 4년 동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말부터 도쿄대학의 나까지마다카히로(中島隆博 중국철학과 프랑스철학을 아우르는 비교철학분야의 제1인자)교수를 내 후임으로 영입해서 세계철학대화를 본격시동하게 되었고 지난달에 그 첫째모임을 가졌었다는 최신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해 네 번정도 소인수로 수준높은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고 나중에 그 성과를 정리해서 책으로 엮어서 출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우선 쿄토포럼이 제대로 방향설정을 하게 되어 안심할 수 있고 더구나 내 다음 쿄토포럼의 학술활동을 주관할 사람이 다름 아닌 나까지마다카히로교수라면 그의 인간적 품성이나 학문적 능력을 잘 알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크고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뜻도 전해달라고 말했다.

나 자신은 국가와 개인, 시민사회와 기업, 지역간, 남녀간, 문화간, 종교간 등등 소위 일국내 공공성(Intranational Publicness)을 중요과제로 삼았었고 거기서 생겨나는 갈등구조의 해소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사이를 넘어서는–between&beyond-공공(公共)의 지평을 열어가는데 심열을 기울였다.

일본에서 여러나라 사람들과 함께 시민주도의 철학대화운동을 통하여 성취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여러가지 이유와 조건과 사정 때문에 전 세계적인 스케일의 공공철학을 구상할 수 있는데 까지는 가지 못했었는데 이제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기반이 만들어졌으니 전 세계적인 스케일의 공공철학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단계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걸맞은 유능한 사람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며 쿄토포럼의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이루지 못했던 과제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이 세대간의 공공성의 문제다. 나까지마교수가 공공성의 새로운 차원을 공간적확충–국가에서 세계로–에서 찾으려는데 대비해서 나 자신은 한국을 중심으로 청소년세대와 중장년 세대와 노숙년 세대의 상화(相和), 상생(相生), 공복(共福)을 공동구축하는 철학을 새롭게 엶으로써 공공성의 세대계승생생 (generativity)에 재도전해보려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까지마 교수가 그리고 한국에서 내가 언제나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발전하는 공공(하는)철학을 한층 더 심화, 고양, 확충 할 수 있게되어 기쁘다.

한일간 관계가 정치적 차원에서는 전후최악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일본에도 많이 있지만 연구하는 시민, 철학하는 시민, 대화하는 시민이 주축이되어 보다나은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의 이런 심경을 타케나카히데토시 씨에게 토로했고 뜻을 같이하는 철학대화의 벗들에게도 꼭 전해달라는 말로 반가운 전화한담을 아쉽게 끝냈다.



8월 15일 목요일

오늘은 74번째로 맞이하는 광복절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정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 곧 8월 15일이라는 것이 광복절의 국어사전적의미이다. 그리고 광복은 과거에 잃었던 국권을 도로 찾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동아새국어사전 제1판 두산동아).

일본어 사전에는 어떻게 뜻풀이하고 있을까? 대표적인 일본어 사전인 정성판일본국어대사전에는 우선 광복을 1.부흥하는 것,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 2.일본의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지칭한다.로 뜻매김 되어 있고 광복절에 대해서는 (조선어 Kwangbokchol) 대한민국의 축일의 하나,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된 것을 경축하는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기념일이라고 해설되어있다.

한일양국간의 광복적인식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서 거행된 74회 광복절 기념 행사에 즈음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를 주의 깊게 듣고 나서 느끼는 솔직한 소감은 문재인 대통령의 사고와 인식과 입장이 아직도 해방 전의 독립운동적 발상에 머물고 있고 너무나 과거에 얽매여 있어서 한국과 일본과 세계의 미래구축에 한국적 기여를 구상하고 그것을 관계당사국과 더불어 전향적으로 협력해나간다는 포부와 도량이 전혀 들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거에만 매달리고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현재로부터는, 미래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21세기의 한국이 대웅, 대결, 대처해야 할 발달 과제가 너무나 많은 이 때에 우리나라의 최고위 공직자의 역사인식과 미래전망이 너무나 빈약하고 비현실적이어서 한사람의 관심있는 시민으로써 자못 걱정스런 염려를 금할수 없다.

정치적으로 해방되고 법적으로 자주독립국가로써의 기틀을 갖추었고 경제적으로도 기적적인 성장발전을 이루어 낸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영혼이 아직도 충분히 탈식민지화, 탈영토화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서 그의 국정운영이 자못 불안하다.



8월 16일 금요일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하는데 1945년의 시점에서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일제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자유회복기념일이다.

그러나 해방되고 자유를 찾았다고는 해도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내기억으로는 감격과 불안이 혼재하는 혼돈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의 시점에 이르러 되찾은 국권이 정돈되고 나라의 기틀–국민, 영토, 주권+국제적 승인–을 제대로 갖춘 반공자유민주주의헌법에 기반을 둔 국가건설을 국내외에 선포하게 됨으로서 건국기념일이라는 뜻이 보태어졌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자유를 되찾고 나라가 세워지고 가꾸어지는 가운데도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측면에서 서서히 주권국가의 구성원으로써의 긍지와 명예와 책임의 성장, 성숙이 정치발전과 경제성장과 문화창달을 균형잡고 조화롭게 꽃피워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의식을 2016년 8월 15일의 시점에서 영혼의 탈식민지화, 탈영토화를 자성, 자인, 자각하는 계기로 삼자는 뜻을 담고 한일양국의 관심공유자들 사이의 진솔한 대화의 광장을 마련했었다.

동양일보가 기획하고 동양포럼이 주관하는 국내외회의를 몇 차례 개최했고 거기서 나누어진 대화내용을 여러번에 걸쳐서 동양일보에 게재함으로써 널리 일반시민들에게 공개한 바가 있다.

나는 사람이나 나라나 나이 드는 존재–시간적 존재(時存)–라고 생각한다. 나이듦이란 기본적으로 나이에 따른 의식과 무의식과 전의식의 변화, 성장, 성숙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8월 15일의 의미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이 새로워지고 그렇게 새로워진 뜻이 새로운 인간과 국가와 세계의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데 적극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도량과 포부를 길러 갈 수 있는 계기로서 뚜렷하게 뜻매김 할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2019년 8월 15일 뜻풀이는 한일노년철학 대화를 통해서 생명개벽을 상호자각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활명연대성(活命連帶性=Global Web of Mutual Enlivening and Conviviality)을 함께 진솔하게 심사숙고해보고 필요한 실천활동을 시작해 보는 계기로 삼는데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일본 쿄토에서 제5회 한일노년철학포럼을 일본의 미래공창신문사주최, 동양포럼협찬으로 개최(8월 26~28일)하게 된 것이다. 활명연대라는 개념은 2015년부터 다양한 장소와 기회에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새시대의 새로운 한일관계의 발전방향으로 설정하고 한일양국의 관심공유자들과 논의 해 왔던 핵심과제의 하나였으나 2019년 8월 15일을 시점으로 보다 깊은 의미탐구와 시민주도의 연대활동으로 이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8월 17일 토요일

8월 15일에는 적어도 광복절과 건국절이라는 두개의 뜻풀이가 필요한데 문재인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집권 엘리트들은 한사코 건국절이라는 뜻을 거부, 부정, 말살하려 한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관한 반출생주의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될수있는대로 빨리 철저하게 존재의 흔적을 없애고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국가–반(反)대한민국적인 국가상–를 세우려고 역사와 체제와 이념을 완전히 바꾸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과 거기에 속하는 대한민국의 반출생주의자들에게 항거하고 그들이 기획하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거부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친출생주의 라는 입장을 준수한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민족의 위대한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동안의 곤란(困難)극복과 성장발전을 예찬한다. 그래서 광복절이라는 의미이상으로 건국절이라는 의의를 기리고 값지게 기억하려한다.

이것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그리고 한국인을 철저하게 이분화시키고 타협불가능한 극한 대립, 갈등, 분열을 촉발시키고 있다. 특히 세대간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국가의 출생자체가 민족불행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Hell Korea가 당연한 현실인식일 수밖에 없겠지. 해방 후의 혼돈기를 몸으로 체험했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나같은 노년기의 인간에게는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탄생은 커다란 기쁨이고 희망이고 긍지였는데….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3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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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1.10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7월 4일 오전 10시 18분

생사(生死)라는 말이 있다. 1. 삶과 죽음 2.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동아새국어사전 제4판).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견해로, 생사(生死)는 태어남(=탄생, 출생)과 죽음으로 보고 삶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기간 - 생명, 생존, 수명 - 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태어남(탄생, 출생)은 삶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보는 것이 철학적 사고를 해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태어남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어떻게 뜻매김 할 수 있을까? 내개인적인 소견으로 ‘삶’은 살다+알다 의 합성어로 보고 ‘삶의 뜻을 앎’-자각된 생명, 생존, 수명-이라고 뜻매김 한다.

그렇다면 삶의 뜻을 안다고 할 때 삶의 뜻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역시 나 자신이 85세가 되기까지 살아오면서 체감, 체험, 체득한 바를 표백하자면 삶이란 첫째로 살(나이)을 더해온 - 나이를 먹어온 - 나이가 들어온 과정이고 둘째로는 태어날 때 하늘과 땅과 어버이로부터 받은 목숨=근원적 개체생명력(의 불꽃)을 고스란히 사르는 과정이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함께 생명력의 불꽃을 사르느냐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진솔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생긴다. 첫째로 삶을 시작부터 끝으로 향해서 볼 것이냐 끝으로부터 시작으로 향해서 볼 것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이 세워질 수 있다. 앞의 관점은 생사관이 될 것이고 뒤의 관점은 사생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관점은 어떻게 다른가? 삶의 시작에 중점을 놓고 보는 입장에서는 삶의 전 과정이 무한히 열려진 가능성의 지평 위에 항상 새로운 시도와 모험이 이루어지겠지만 불안을 안고 가는 것이 되겠고 끝에 중점을 두고 보는 입장에서는 뚜렷하게 정해진 확실성=죽음을 향한 삶이 펼쳐지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있으나 불안은 없을 것이다. 결국 잘 살 수 있기 위해 잘 죽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잘 죽을 수 있기 위해서 잘 살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7월 4일 오후 11시 53분

나는 젊었을 때도 그렇고 나이든 지금도 그러한데, 끝맺음보다는 새로운 시작에 더 힘을 기울이는 삶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따라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었던 남들이 하지 않은 일 또는 아직까지 없었던 일을 새로 시작해 보는 데서 흥도 나고 신도 나고 열도 생겼다. 많은 기억들 가운데서 한두 가지만 들어본다. 내가 충북대학교에서 젊은 학생들과 학문을 함께하게 되었을 때(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젊은 패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자유선택 교양과목으로 ‘인류문화와 지구사회’라는 강좌를 개설하고 당시의 충북지역사회는 물론 한국전체사회에서도 엄두내기 어려웠던 모험을 시도했다.

선배 교수들의 질책과 압력을 많이 받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2년째 되던 때부터는 매 학기의 수강생이 3백 명에서 5백 명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가장 많을 때는 8백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혼자 감당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시간강사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했으며 나중에는 신임후배교수에게 물려주고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대학교양과정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후에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입이 불거(立而不居 = 일단 이루어 남에게 물려주었으면 거기에 머물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다)의 입장을 견지했다.

50대 초반에 한국의 대학에서의 학문하기에 더 이상의 열의를 내기가 어렵다는 깊은 폐쇄감과 좌절감을 부등겨안고 고뇌의 나날을 보내다가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과 함께 아주 새로운 학문하기를 시도해보기로 결심하고 도쿄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절을 두고 자주 독립적 철학대화활동을 일본국내외에서 전개했고 나중에는 뜻있는 기업들의 재정적지원도 받게 되어 그때까지 제대로 틀이 잡힌 전례가 어디에도 없었던 공공하는 철학대화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국내외에 걸쳐서 커다란 관심을 일으켰고 학문적이면서 현실적인 영향도 다양하게 끼치게 되어 지금은 젊은 학자, 언론인, 기타 여러 분야에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계속 발전, 진화되고 있다.

3년 전부터 나는 일단 주관하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지금은 아주 새로운 ‘나이 들어 철학하기’를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새로운 모험에 도전 하고 있다.



7월 5일 오후 6시 39분

나는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다’라는 독일속담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있지만 ‘시작이 반이다’라는 한국 속담의 참뜻을 더 소중히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의 끝으로 보는 죽음도 나는 새로운 시작으로 뜻매김 한다. 나는 인간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죽음으로의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세계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확실한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확고한 목표가 정해진 행정(行程)을 직선으로 감으로써 도중의 일탈과 미달과 착오를 최소화하고 마침내 깔끔하게 끝막음을 하게 되는 교과서와 같은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솔직히 그런 삶을 선호할 수 없다. 그것은 개신(開新 -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는 것)을 개체생명의 일회성 안에 가두어 버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란 처음의 시작=태어남, 출생, 탄생으로부터 죽음=끝, 사망, 사멸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새밝, 새엶, 새앎의 체화(體化), 심화(心化), 영화(零化)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죽음도 모든 것이 끝나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개체생명의 차원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훨씬 크고 넓은 생명=우주생명으로 돌아가서 아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으로 뜻매김 한다.

새밝, 새엶, 새앎은 근원적 우주생명력의 작동원리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개인의 개체생명 안에 폐쇄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기 보다는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나의 몸과 마음과 일의 형태를 입고 나타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젊을 때는 온전히 내가 내 삶을 산다는 생각이 강했다.

가끔 심한 병고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내 삶이 내 뜻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더 큰 것이 나를 살려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다음 순간 또다시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70대에 들어서면서 내가 온전히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이 뜨기 시작했다.

새로운 생명차원에의 개안(開眼)이요 각성이요 ‘깨달아 얻음’이다. 개체생명의 여정을 끝내고 나면 이르건 늦건 간에 생명의 본향으로 되돌아가서 또 다른 생명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는 기대와 희망에 가슴이 설렌다.



7월 6일 오후 7시 11분

성공적 노화, 고령화 또는 나이듦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써 삶의 마지막을 꽃피우는 것으로 뜻풀이하고 있다. 또 노년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성공적으로 늙어가야 한다는 말도 있다.

성공적인 노화를 적극적으로 선양하는 것은 긍정적 노년상을 진작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 노인상이 강조되면 될수록 실패의 노인상이 연상되고 성공기준에 미흡한 수많은 노년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세상사와 인간사를 성공이라는 척도로 가늠하게 되면 오늘의 한국에서 해마다 늘어나는 노년인구의 몇 퍼센트 정도가 성공적 노화를 기준대로 이룰 수 있을까?

아주 소박하게 생각하면 성공이란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실패란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뜻이라는 것이 아주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출세나 양명 또는 돈벌이가 압도적인 선호 추세인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중장년 세대의 성취 지향적 가치관에 편향된 판단 기준으로 바람직한 노년상을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노년세대에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냐 라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80대 중반(명실공히 노년기)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개인적 체감이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노년기의 삶은 출세나 양명이나 축재라는 기준에서 볼 때 성공적이라 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하늘과 땅과 어버이로부터 부여받은 귀중한 목숨(=살아있기 위한 힘의 바탕이 되는 것, 동아새국어사전 제4판)의 불꽃을 온전히 사르는 데서 보람을 느껴왔다.

내 삶의 전성기는 60세에서 75세 (어느 유명교수의 말)가 아니라 80세로부터이고 여기까지 나이 들어온 것이 삶의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인생의 절정기(다시 유명 교수의 말)가 아니라 목숨의 불꽃을 다음세대의 보다 나은 새로운 지평, 차원, 세계를 함께 엶으로써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고장과 나라와 누리를 세우기 위해서 남김없이 사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삶이라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불꽃을 온전히 사르는 삶이기를 염원한다는 것이다.



7월 7일 오후 7시 21분

나는 한국인의 노인상을 앞서간 분들의 언행에서 찾는다면 성호 이익(조선후기 실학자, 1681~1764)의 부정적인 것과 다산 정약용(조선조 실학의 집대성자, 1762~1836)의 긍정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 두가지 관점이 지금도 대체로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호는 ‘노인의 열 가지 좌절’을 언급하면서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는 눈물이 없다가 웃을 때는 눈물이 나오며 30년전 일은 모두 기억하는데 눈앞의 일은 금방 잊어버리고,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없이 모두 이빨사이에 끼며 흰 얼굴은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진다’고 한탄했다.

다산은 71세때 지은 ‘늙은이의 통쾌한 일’이라는 시에서 노년의 유쾌한 일은 여섯 가지로 들고 있다.

“노인이 되어 대머리가 된 것, 이가 모두 빠진 것, 눈이 어두운 것, 귀가 먹은 것, 마음 내키는 대로 미친 듯 시를 쓰는 것, 때때로 벗들과 바둑을 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머리가 되어 머리를 감거나 빗질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이가 모두 빠져 치통이 사라졌고, 눈이 어두워 책을 보거나 학문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고, 귀먹어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성호적 노년관과 다산적 노년관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 구태어 거론하자면 명분론은 성호적인 것으로부터 다산적인 것으로의 대전환을 창조하고 있지만 심정론은 압도적으로 성호적인 것에 갇혀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노년층의 대우가 각광을 받고 있다. 신노년층 이라느니 액티브 시니어라느니 몇 가지 신조어가 난무한다.

요는 ‘젊은 노년층’이라는 이미지 조작을 완성한다. 그야말로 노년의 독자적 존재의미와 생명가치가 주로 중장년에 의해서 탈주체화 되어 가는 것이다. 나이듦의 깊은 뜻을 그것대로 살피고 알고 깨닫기 보다는 젊음의 상실과 삶의 퇴화라는 쪽으로 편향 이동시키고 그 틀 안에서 젊음의 유지나 회복을 바람직한 노인상의 판단기준으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젊은 노년이 아니라 노년다운 노년이 노년에 이르러 노년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자각이 되는 것이 청소년과 중장년과 함께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보다 나은 사회건설을 위한 공동주관적 기초가 되지 않을까? 청소년이나 중장년에 일방적으로 맞추는 삶이 아니라 서로의 삶의 질을 함께 높여가는 일이 필요하고도 중요하다.



7월 8일 오전 9시 33분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갑자기 논어 ‘위정편’에 있는 공자말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는 스스로 섰으며, 40세에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게 되었고, 50세에는 하늘의 명하심을 알았고, 60세에는 귀가 순해졌고, 70세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지금부터 약 2500년전 고대중국(춘추시대)의 공자에게 있어서 40세(나에게는 60세)은 중장년기를 끝내고 노년기로 접어드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50세부터 70세까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70대 80대 90대의 노숙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공자의 말씀을 나 나름으로 읽어내서 동아시아의 고전적 노인상의 실상을 그려보려 한다. 종래의 중국고전전문학자들의 독법이나 주석, 해설, 해석과는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점이 있을 테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의 바탕이 그들의 것과는 달라서 그렇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주기 바란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배우는 과정을 잘 수행하면 어느 시기(15~30세)에 가서 어느 정도 스스로 터득하고 나름대로 깨닫는 바가 확실하게 될 것이다.

어려서 열심히 배우면 젊어서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입장과 관점이 잘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는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50세부터는 노년이 처음으로 시작된다는 뜻에서 초로 또는 시로라고 부르고 거기에 이어지는 직전의 단계=전환기 또는 준비기간의 자각특성인 불혹(不惑)이라는 한 문자에 대한 뜻풀이를 한중일의 대다수 전문학자들이 ‘미혹하지 않는다=뚜렷한 자기소신이 확립된다’는데 중점을 두는 경향에 비해서 나는 스스로의 배움을 어느 틀 안에 가두어 고정시키지 않는다=영혼의 탈식민지화, 탈영토화를 통해서 명실공히 자유로운 자기형성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시기라고 뜻매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모처럼 스스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자기가 특정이념이나 사상의 테두리 안에 갇혀지고 그것이 굳어지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닫혀진 자기가 아니라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활짝 열린 자기가 될때만, 오직 그런 상태에서만, 나이듦의 다음단계 - 50세(내게는 70세)=초로-에 이르러 하늘의 명하심을 제대로 체감, 체험, 체득 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닫힌 얼과는 하늘의 뜻도 통할 수 없다. 하늘의 뜻과 잘 상통할 수 있게 되면 하늘, 땅, 사람의 온갖 소리를 잘 듣고 잘 가름할 수 있는 유연한 삶의 태도도 가지게 될 수 있겠다. 그렇게 해서 나이를 더해 가보면 년공(나이에 따라 깊어가는 내공 )이 무르익어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해도 사람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어서 장로(長老) 또 숙로(宿老=경험(經驗)이 많고 사물(事物)을 잘 헤아리는 노인(老人)) 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노인상이라고 본다.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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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老哲開闢 日記)/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2019.10.1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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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老哲開闢 日記)/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9.10.13


김태창(金泰昌, 동양포럼주간)



6月18日 9:33

일찍 일어나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운동부족이 쌓여갈 뿐이다. 오늘도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아주 나쁘니까 될수록 외출을 삼가라는 보도가 있다. 방안에만 갇혀 있으면서 장활동을 추진하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해보고 있지만 모두 새벽 걷기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 오래 살면서 겪게 되는 나만의 병고는 배변장애와 배뇨장애다. 한두 가지 탈나는 데가 없는 노년은 없다고들 하지만, 그리고 다른 데가 아픈 것도 괴롭겠지만, 배설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당해보지 않으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6月20日 9:55

나이 들면 무엇보다도 가족이나 친지 또는 남에게 노년의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씀이 절실하게 된다. 특히 몸이나 마음에 병이 생겨 여러모로 폐해를 끼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병들고 자기관리가 어렵게 되기 전에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기본조건인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건강을 잘 유지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우선 매일 삼식부터 신경 쓰게 된다.

지난 2년 동안 일본과 한국에서 보고 듣고 실험해본 결과 현재의 상태에서 가능한 식단을 정리해 본다. 아침은 대체로 오전 4시 전후에 기상하면 즉시 소금물로 양치하고 나서 바로 온수(+레몬즙) 한 컵은 천천히 마신다. 한 시간 후에 계피, 생강, 코코아, 레몬, 올리고당차 한 컵을 마신다. 그리고 30분 후에 유산균 한 알. 다시 30분 후에 잡곡식빵 반 개 + 치즈 + 생강꿀홍차 한잔. 여기까지는 장 기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일양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른 식단이다. 점심은 만나는 사람이나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좋아하는 것으로 식사하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주력한다. 과식과 편식을 극력 피한다. 저녁은 아주 가볍고 소화 잘 되는 음식을 오후 5시에서 5:30 사이에 마치고 위를 완전히 비우고 나서 8시에서 9시 사이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원칙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그리고 매 식사30분전과 식사 후 1시간에서 2시간 사이에 온수 한 컵을 마신다. 하루에 30분정도 걷기를 계속 해왔다. 이렇게 해오는 가운데 배변장애와 배뇨장애가 조금씩 천천히 개선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잘못된 식사와 운동부족으로 말미암은 신체적 적폐청산이 인내와 신중을 요하는 긴 과정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또 단단히 각오한 바이기 때문에 노년기의 인생공부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젊을 때 소홀히 겼던 삶의 깊은 뜻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귀한 체험을 겪게도 된 것을 감사하는 나날이다.



6月20日 18:29

일일 삼식을 간편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챙기는 일은 현명한 몸돌보기의 기본이다. 그러나 몸돌보기는 마음 닦기와 함께 꾸준히 이어질 때만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이 들고 나서야 뒤늦게 몸으로 체험하게 된 깨달음이다. 식사를 끝내고나서 걷는다. 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가 나쁘지 않는 날은 집밖에서, 그리고 공기의 질이 나쁘니까 외출을 삼가하라는 일기예보가 있을 때는 할 수 없이 집안에서 - 다행히 2층집이라 아랫층에서 윗층으로 그리고 윗층에서 아랫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 걷는다. 걸으면서 생각한다. 반성하고 판단하고 상상하고 계획한다. 30분에서 60분사이의 생각하는 걷기를 끝내고 나면 나이든 몸이라 노곤해서 잠시 동안 무념무상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하려 해서가 아니라 제절로 살며시 눈을 감고 앉은 채로 졸게 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10분에서 30분정도 지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상쾌해서 자연히 책을 읽고 싶게 된다. 삼시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일 오전 오후의 일정한 시간 - 평균 오전 2시간 오후3시간- 독서에 몰두한다. 잡념 없이 정신을 집중해서. 그러고 나서는 머리를 완전히 비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채우기만 하지 비우지 않으면 -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뼈져리게 체감했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계속 실행하고 있다. 이것은 열심히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섭취하되 그것에 구애, 구속,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 - 영혼의 탈식민지화, 탈영토화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경지 - 라 거기서만 가능한 삶의 지혜를 체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서는 정보나 지식을 획득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목적달성을 이루는 일 보다 수양과 양생을 통해서 건강하고 행복한 자기와 이웃과 나라와 누리열기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바람이요 보람이기 때문이다.



6月21日 22:33

젊어서는 채우는 맛이 더 없는 쾌락이었으나 나이 들어서는 비우는 맛이 더 없는 지락(至樂)인 것을 절감한다.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못하는 것은 아프고 괴롭고 아주 불편한 병고다.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배설장애라고도 하고 변비라고도 한다. 배뇨장애라고도 한다.

그런데 신체적 변비는 극심한 괴로움 때문에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서 완화, 치유, 회복하게 되지만 정신적 변비는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기 때문에 방치하기 쉽고 그래서 그것이 고질이 되어, 마침내 근원적 생명력을 고갈시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히 치명적이다.



젊어서는 눈을 부릅뜨고 밖의 빛을 찾아 헤매지만 나이 들어서는 눈을 지긋이 감고 안의 빛을 찾아 삶의 깊은 맛을 즐긴다. 밖으로부터의 빛이 밝혀주는 것은 밖으로 펼쳐진 세계이고 안으로부터의 빛이 밝혀주는 것은 내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밖의 세상을 알고 그것을 자기 뜻에 따라 바꾸어 보려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안의 세계를 깨닫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바라고 원한다. 태어난다는 것은 밖으로 나와서 그것을 자기에 맞게 바꾸어 나가는 젊은 시절을 살다가 나이 들어 마침내 죽게 될 때는 거기서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밖으로 나가는 것과 안으로 돌아오는 것의 반복이요 언젠가 안으로 돌아와서 다시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지게 되면 그것이 다름 아닌 죽음이다. 당사자가 아닌 남들이 보면 밖으로 나와서 늘 보고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기 때문에 그가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6月23日 10:01

여러 해 전에 내가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어느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옛 성인이신 공자께서 앎을 쌓은 사람은 물을 즐기는데 덕을 쌓은 사람은 산을 즐기고, 앎을 더해가는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덕을 더해가는 사람은 고요하고 평안한 곳에 머물며, 앎을 이룬 사람은 삶을 즐기는데 덕을 이룬 사람은 삶을 오래 누린다고 말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의 내 나이가 70대 후반이었다고 추정되는데, 공자가 70대에 이르면 자기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해도 결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된다고 말했는데 비슷한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끝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찾고 또 찾는 사람 - 知者 도 仁者도 아닌 探者- 이라고 여기고 물도 산도 아닌 바람을 즐기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그렇다고 고요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는 것도 아닌 자유로운 노닒 – 動도 아니고도 静도 아닌 遊 - 을 이어갈 뿐이며 그래서 주어진 삶을 즐기는 것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삶의 새로운 차원, 지평, 경계를 열어갈 따름이라고.

다른 학생이 질문을 계속했다. 찾고 또 찾는다는데 도대체 무엇을 찾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삶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정지 될 수 없는 새밝 - 개신 - 개벽의 나사선운동과정(Spiral Movement)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삶을, 보다 뜻있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찾고 또 찾는 것이다. 삶이란 살아있고 살아가는 동안 최종적인 결론이 없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늘 낯선 미지의 전개에 새롭게 대면, 대응, 대결하면서 때로는 불안과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경험하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체감, 체험,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이란 물음만 있고 정해진 정답이 없는 기한부과정이다. 그저 끝까지 나름대로의 잠정적인 가설적 관점과 입장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젊어서는 젊음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나들어서는 나이 듦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다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젊어서는 앎이 더해가는 과정이었다면 나이들어서는 깨달음이 깊어지는 나날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또 다른 학생이 물어왔다. 앎과 깨달음은 어떻게 다르냐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앎이란 나의 밖에 있으면서 내게 맞서 있는 것들 –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건이든 – 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정리하는 일이지만 깨달음이란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과 얼을 갈고 닦는 일이며 거기서 삶의 참뜻을 체감 – 체험 – 체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나 자신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에는 앎에 치중했는데 나이 들어서는 깨달음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었다고.



6月23日 22:06

젊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 들어 보니까 소위 노인이나 노년 또는 고령자에 관한 논의나 주장이나 정책이나 시책이 온통 중장년 - 40/50/60대 - 의 관점과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노년 - 70/80/90대 - 의 체감, 체험, 체인과 어긋나고 부딪히고 빗나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요, 거기에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중장년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일방적으로 노년에게 강요하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병리적 부적응현상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노숙년의 독자적인 삶의 뜻과 보람과 바램이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마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생기는 고통과 비애와 낙담과 실망에 대해서 무감각, 무관심, 무반응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죽게 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도 청소년기와 중장년기와 노년기를 겪게 된다. 어느 시기가 다른 시기보다 더 중요하지도 않고 어느 시기가 다른 시기에 비해서 그 가치와 의미가 덜하지도 않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백인 남성 중장년 세대 중심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다른 세대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20세기말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21세기의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인종 간, 남녀 간, 세대 간의 상호존중, 상호화해, 상호행복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발전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사회의 실상은 인종 간, 남녀 간 그리고 특히 세대 간의 갈등, 대립, 분열이 너무나 심해서 내부붕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6月24日 22:50

요즘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사회적 가치는 생산성과 효율성과 자립성이다. 그래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고 타자의존적 일 수밖에 없는 노년세대가 경시, 홀시, 무시당하게 된 것이다. 일부 노년층의 사람들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처럼 청소년세대나 중장년 세대가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다고 칼로 나무 자르듯이 단언할 수만은 없다. 근대화-산업화-공업화-합리화-경제중심화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의식이 편향되고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개개인의 의식이나 성향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협소해져서 그렇게 된 것뿐이다.

그런 사회적인 인식과 추세에 따라서 나이 들어도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사회심리적 압력이 아주 강하게 일상의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산성, 효율성, 자립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 - 사회경제적 약자들 - 에게는 잔인한 현대사회의 실상이다. 이것은 나이 들어 병약해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사회 (The good society) 가 반드시 생산성과 효율성과 자립성이 고도로 실현된 사회만일까? 그것은 젊고 건강하고 풍요가 갖추어진 사람들만이 삶을 즐길 수 있는 사회일 뿐이다. 다양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그런 상황에 이르지 못하고 거기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젊고 나이 들고를 막론하고 -미래가 없는 지옥일 뿐이다. 일부의 운 좋고 혜택을 누리는 소수에게는 천국일지 몰라도.

모두가 함께 고루 잘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그러나 그런 사회는 정부가 권력의 힘을 빌려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지시, 명령, 강제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간섭이나 억압 없이 펼쳐지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적정한 수준에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원이 베풀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갖추어져 있는 사회가 최소한의 기본조건이 아닐까? 쓸데없이 귀중한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력이 너무 간섭적, 개입적, 통제적이지 않아야 된다. 될수록 작은 정부가 좋다.

나이든 사람도 숨 쉬고 살자.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그들에게 희망이 실감될 수 있고 절망과 비관 속에서 매일을 억지로 살아가는 많은 나이든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치고 서로 돕고 잘 어울리는 가운데서 보다 좋은 사회 - 참으로 좋은 사회 - 를 만들어 는데 언제까지나 수동적으로만 대처하지 말고 우리 나이든 세대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이 죽게 될 날이 멀지 않다면 얼마 남지 않은, 그러나 귀중한 나날을 다음세대가 우리 세대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남은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것이 나의 노인철학의 출발점이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충북 청주 출생 △청주중·고 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 △연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전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 △공공철학공동연구소장 △교토포럼 주재 △저서 ‘공공철학(동경대 출판회)’

2022/01/05

알라딘: 다시개벽 2021.봄○ 다시개벽의 역사철학, 내재적 신성을 아는 방향: 백낙청과 김종철의 비판적 포월을 위하여 / 홍박승진

알라딘: 다시개벽 2021.봄


다시개벽 2021.봄 - 형상 없는 흔적, 흔적 없는 형상 
다시개벽 편집부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1-03-01


책소개

계간지『다시개벽』제2호로, 2021년 봄호이다.『다시개벽』은 백 년 전에 창간되었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종합잡지『개벽』을 복간한 계간지이다.『개벽』 잡지의 기본적인 태도는 이 시대가 문명사적인 대-전환기, 지구적 전환기라는 시대 인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인문학적인 인식 지평을 제시하는 것이다.


목차
● 권두언 PROLOGUE
○ 서학은 형상이 있으나 흔적이 없고 동학은 형상이 없는 듯하나 흔적이 있다 / 홍박승진

● 다시쓰다 RE: WRITE
○ 미래로서의 동양, 동양의 미래: 미국 사이언스픽션과 테크노-오리엔탈리즘 / 유상근
○ 개벽문학의 현황과 전망 / 유신지
○ 사회주의를 넘어선 평등의 상상력: 김남천 소설의 여성 인물 / 정우경
○ 한국의 신관을 찾아서: 신들의 전쟁-하늘님 신명神名 논쟁 / 이호재
○ 최제우의 ‘시천주’와 김소월의 ‘산유화’ / 임동확
○ 대중문화 이론도 개벽할 때-연재 (1) / 김동민

● 다시읽다 RE: READ


○ 한국 역사에 대한 신채호의 상상: 『독사신론』을 중심으로 / 이우진
○ 안상수의 조형과 담론: 오리엔탈리즘인가, 대안적 근대성인가 / 최범

● 다시말하다 RE: DIALOGUE
○ 창작은 죽어가는 것에 대한 살림의 감각으로부터 나온다 / 안상수

● 다시그리다 RE: IMAGINE
○ 차도하, 시 말더듬이 외 1편
○ 성다영, 시 블라인드 외 1편
○ 김승일, 시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외 1편

● 다시잇다 RE: CONNECT
○ 『지구전요』 / 최한기 (김봉곤 번역)
○ 외래 사상의 흡수와 소화력의 여하 / 이돈화 (김현숙 현대어 역)

접기
책속에서
P. 9 권두언

서구 제국주의 문명의 문제는 신 또는 하늘님이라는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가치를 마음과 생명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외부에서 찾고자 한다는 데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서학에 대한 수운의 진단이다. (중략) 최제우의 진단은 서구 제국주의 문명에서의 생활 방식이 의도적으로 하늘님을 위하지 않는다거나 공공연하게 자신만을 위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밖의 하늘님에게 조아리고 절을 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하늘님을 위하는 일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늘님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하늘님에 투사된 자신의 인격만을 위하는 일일 수 있다[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4  접기
P. 34 미래로서의 동양, 동양의 미래

결국 동양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동양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하는 재현-전쟁과 상상-전쟁의 문제에 있어 단순히 동양인이 등장하는 미래가 아닌, 동양인에 의한, 동양인을 위한 서사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동양의 미래를 오리엔탈리즘의 이데올로기에 맡기기보다, 이제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이 직접 상상한 미래와 그 미래를 재현하는 수백수천의 서사들이 등장해야 한다.  접기
P. 44~45 개벽문학의 현황과 전망

동학적 사유의 핵심이 되는 ‘시천주’ 사상, 즉 작품에서 다양하게 형상화되고 있는 ‘합일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문학 작품을 살피는 과정은 당대에 이루지 못했던 우리 전통시학의 독자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것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연속성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동학적 사유를 근간으로 한 근대문학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향후 문학사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접기
P. 80~81 최제우의 ‘시천주’와 김소월의 ‘산유화’

김소월은 1925년 첫 시집 『진달래꽃』을 펴낸 이래, 지금껏 민족적 서정의 ‘민요시인’ 또는 ‘정한(情恨)의 시인’ 등으로 불려오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김소월의 주요 발표무대였던 『개벽』지와 관계는 물론 그의 시 세계와 수운의 ‘시천주’에서 비롯된 동학사상의 연관성 및 영향관계가 철저히 망각되래 기화(氣化)작용으로 본질 현현한[外化] 하늘님과 각기 자신의 내면에 모신 본질 은현한[內有] ‘신령’의 상호작용 내지 그 사이의 신묘한 만남과 일치의 경지를 직감적으로 선취하고 있다. 마음의 근원에서 발원하는 ‘심령’과 스스로 피고 지는 한 송이 꽃의 우주적 마주침을 통해 대상과 주체가 격절되지 않는 ‘하늘님’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김소월의 ‘산유화’다.  접기
P. 105 다시개벽의 역사철학, 내재적 신성을 아는 방향: 백낙청과 김종철의 비판적 포월을 위하여

백낙청-김종철 논쟁은 직선적 역사철학과 순환적 역사철학 각각의 한계를 드러낸다. 양자를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발맞추어야 한다는 전자의 논리를 고수한다면, 이미 현실로 닥쳐오고 있는 기후위기를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면에 농경 문명으로 되돌아가자는 후자의 논리를 따른다면, 농경 문명이 해소하지 못하거나 강화하였던 여성 억압과 아동 착취 등의 구시대적 억압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때, 다시개벽의 사유는 우리 삶에 더 절실한 역사철학이기 위하여 직선과 순환을포월(包越)하는 역사철학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석될 근거가 충분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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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다시개벽 편집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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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다시개벽 2021.겨울>,<다시개벽 2021.가을>,<다시개벽 2021.여름>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 이 책은

계간지『다시개벽』제2호로, 2021년 봄호이다.『다시개벽』은 백 년 전에 창간되었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종합잡지『개벽』을 복간한 계간지이다.『개벽』 잡지의 기본적인 태도는 이 시대가 문명사적인 대-전환기, 지구적 전환기라는 시대 인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인문학적인 인식 지평을 제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구-인간-물질 중심의 근대문명의 폐해가 점증하는 데 대하여 동방-만물-영성 중심의 탈-근대문명, 개벽(동학)문명을 대안적인 문명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서구 지향, 영향’에 편향된 현대 한국사회의 담론장에 한국적, 자생적 사유의 방법론과 그것을 통한 인식지평(철학과 문학과 사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개벽』 제2호는 ‘한국예술론 특집’으로 이것을 수운의 표현인 “형상 없는 흔적, 흔적 없는 형상”으로 표어화하여 여러 필진의 담론들을 일관성 있게 배치하였다.

■ 책 소개

『다시개벽』은 “겨울 - 봄 - 여름 - 가을”의 계절별로 각각의 고유한 주제를 지향한다. 봄호는 “한국 자생적 사유의 발굴”을 핵심적인 과제로 삼는다. 겨울호는 ‘영혼의 탈식민지화’로서 서구 지향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고, 여름호는 ‘지구학’이라는 화두로,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 서열을 무너뜨리며 지구적 위기의 대안적인 삶의 지평을 모색한다. 가을호는 ‘신인간학’을 핵심어로 하여 여성·성소수자·유색인·아동·장애인·노동자 소수자,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한 변혁과 창조의 사유를 제시한다.

‘한국 자생적 사유의 발굴’은 ‘한국 전통적, 고유의 사유 체계와 문화 양식을 낡은 것으로 치부’했던 근대 이후의 한국사 전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즉 지난 100여 년 한국사회의 역사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우리는 어떻게 서구적 근대를 따라잡고, 완성하고, 오히려 서구를 추월하여 앞서갈 것인가?”라는 “잘못된 질문”에서 출발하여 진전되어 온 것을 바로잡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작업을 2021년 봄호에서는 ‘한국적, 자생적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로써,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새로운 답변”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한국적 문화예술 이해’의 근거로『다시개벽』제2호에서 주목한 것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水雲 崔濟愚 : 1824~1864)이 “서학은 형상이 있지만 흔적이 없다. 우리 도[東學]는 흔적이 없는 듯하지만 형상이 있다”고 한 말이다. 이러한 수운의 입장은 서학의 관점을 전복(개벽)할 뿐만 아니라, 동양 고유의 전통적 맥락도 전복하는 파격성이 있다. 이것을 통해『다시개벽』 제2호에서는 그동안 온전한 ‘형상’(담론화)을 갖추지 못하였던 한국적인 예술론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쓰다> 꼭지는 다음 여섯 가지 글로 구성된다. (1) 유상근은 여전히 서구적 시각에서 대상화, 주변부화되고 있는 동양-한국에 대한 사고방식들을 ‘테크노-오리엔탈리즘’을 중심으로 살피고, “동양인 자신의 미래로 상상하기”를 요청한다. (2) 유신지는 “한국 현대문학을 ‘동학’과 같은 한국 고유의 자생사상으로 해석하는 연구들”이 활발해지는 현황 소개함으로써 ‘개벽문학’이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연구 흐름을 형성할 것임을 예고한다. (3) 정우경은 한국 근대 ‘사회주의 작가’ 김남천 소설에서 ‘자생적 평등주의’의 지향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문학을 그동안 (외래적) 사회주의적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 경향으로부터 탈피하고 새로운 지평을 연다. (4) 이호재는 ‘한국 고유 사상’의 ‘신관’이 서구 전통의 종교와 혼재되고 나아가 그들에 의해 전용되며 압살되는 사태를 실피며, ‘한국 자생 종교 특유의 신관’을 오롯이 재건해 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5) 임동확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에서 발현된 ‘고유성’을 독특한 시각 - 동학적 기반에서 바라본다. (6) 김동민은 ‘대중문화 이론’에서의 ‘개벽 선언’을 지향하며,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학제 간 통섭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다시읽다>에서 (1) 홍박승진은 ‘다시개벽의 역사 철학이 내재적 신성에의 앎’을 척도로 한다는 점에서 백낙청의 직선적 역사 철학이나 김종철의 순환적 역사철학을 포월한다고 주장한다. (2) 이우진은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 연구가 한국의 토착적 정신문화를 주체적으로 재발견하는 개벽의 상상이었다는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3) 최범은 한국의 디자이너 안상수의 작업이 한국 현대디자인에서 거의 유일하게 담론을 갖춘 조형이자 원본성(독창성)을 갖춘 조형이라는 비평적 접근을 시도한다.

<다시말하다>에서는 스스로 ‘개벽파’라고 자처하는 안상수를 만나 그의 디자인 철학을 들어보았다. 한국의 디자이너로서의 안상수의 진면목에 십분 접근하고 있다.

<다시그리다>는 이번호부터 시작하는 문학란으로 차도하, 성다영, 김승일 등 세 사람의 시인의 작품 각 2편을 수록하였다. 이로써, 종합잡지『개벽』의 복원에 한 걸음 더 다가가면서 독자와 한층 다양한 경로로 소통하는 길을 만들어 나간다.

<다시잇다>는 창간호에 이어『개벽』 수록 원고의 현재적 재음미를 계속해 나가면서, 이번호부터는 혜강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함께 수록한다. 이로써, 현대 ‘한국철학’과 ‘사상’의 연원과 연속성을 풍부하게 해 나간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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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개벽>을 읽어야 하는 이유 새창으로 보기
"다시개벽"이라는 말은 '다시'와 '개벽'이라는 말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개벽'은 일반적으로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증산 계열의 신종교의 용어가 아니라, 본래[그보다 앞서서] 동학을 창도(1860)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가장 먼저 '철학적/사상적/역사적/문명적' 차원에서 쓴 말입니다.[물론 '개벽'이라는 말 자체는 그 이전부터 널리 쓰여 왔습니다만.]

수운 역시 '개벽'을 본래의[전통적인/오래된] 의미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 의미는 '천지개벽'의 뜻으로 오늘날의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빅뱅'의 순간이나 '지구와 대기가 처음 형성되는 것'쯤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벽'이라는 말의 '전통적인 의미'이지요. 그러나 이런 의미의 '개벽'을 수운이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수운의 동학에서 '개벽'이 본격적으로/창의적으로/동학적으로 쓰일 때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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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다시개벽'의 뜻입니다. 이때 다시의 의미는 이 시대가 마치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생길 때처럼, 다시 말해 무에서 유로, 혼돈에서 질서로, 불모에서 (생명)가능성의 세계로 전환하던 때처럼 근본적이고, 막대하고, 막강한 대전환의 시기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것이 다시개벽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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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인문개벽'의 뜻입니다. 즉 수운의 동학의 개벽의 본격적인 의미의 두 번째는 선천개벽이 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 하늘과 땅이 생성되거나 그 기능을 발휘하는 때라는 의미와 대비해서, 다시개벽은 '인문개벽' 다시 말해서 인류의 사회적/역사적/문화적 삶의 방식,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전환되는 시기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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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정신개벽/인심개벽'의 뜻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던 근대 시기[19세기 중엽] 전후의 시기까지 인류 역사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통찰하여 설파한바 있듯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토대/존재의 조건이 정신적/문화적/심리적/사상적인 양상을 결정하였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의 제 양상을 섭렵하고 망라한 결과로 이러한 통찰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수운은 이러한 선천의 역사, 즉 물질적/생산관계적 토대가 인간의 삶과 운명을 결정적으로 결정하는 시대로부터 '개벽'적인 '변곡'이 일어나고 있음을 통찰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상과 정신과 심리와 문화 같은 상부구조가 도리어 하부구조[물질적/존재론족] 조건에 영향을 끼치며, 그 역전관계가 점점 더 심화/확장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들어 현실 세계에서는 '물질적 측면의 영향력과 발전 정도가 점점 왕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대로 지난 1.5세기 혹은 3세기 정도의 시기에 인간이 달성한 물질적 발전(?)의 성취는 가히 가공스러울 정도로 전면적이고, 급진적이고, 압도적으로 진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정신적/문화적/심리적/사상적인 측면의 개벽 즉 정신/인심 개벽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대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를 '인심개벽/정신개벽'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물질의 기운이 극단적으로 왕성해지는 데에 대응하여 인심/정신의 기운이 '극단적'/'도약적'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개벽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명제로서 제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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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곧 닥쳐올 '기후위기'(로 우리가 알고 있는)의 전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어느 정도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코로나19팬데믹"이나 "기후위기" 또 그에 따른/병행하는/그 일부로서의 생물대멸종이나 대재난의 빈발은 바로 이 시대가 "다시개벽"의 시대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혹은 바로 그러한 현상을 일컬어 '다시개벽의 양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는 단지 최근 몇 십년 사이에 진전된 시대가 아니라, 이미 수 세기 전에 이미 접어든 '변곡구간'의 일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변곡 구간을 지나가는 시기와 그 지나감'을 일컬어 다시개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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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다시개벽>은 이러한 우리 시대의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갈고 다듬는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오늘 각자의 삶의 행태를 돌이켜보고, 우리가 더불어 사는 이 사회의 삶의 양식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맞이해야 할/맞이하고 싶은 미래 세계 - 우리의 노후,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세계를 고난과 재난과 재앙이 없는 / 최소화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제안하고, 토론하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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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새로운 생명의 의미와 더불어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의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공은 새로운 존재[새싹 = 새 사람]입니다. '나'를 '다시개벽'하는 새 봄이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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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 2021-03-0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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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3

서구근대 백여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 홍승진 / 다시개벽 편집장

서구근대 백여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 홍승진 / <다시개벽> 편집장


편집실 주] 이 글은 [다시개벽] 창간호(2020년 겨울호)의 '권두언'으로서, 편집장 홍승진의 글이다.


근 한국의 지식 담론 장에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서구에서 한참 전에 논의되었던 것을 이제 와서 새로운 유행인 줄로 알고 뒤늦게 따라가는 꼴이다. 서구 이론의 역사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구조주의가 풍미하였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포스트구조주의가 성행하였다. 그 뒤를 이어 2000년대에 서구 학계의 화제를 모은 담론이 신유물론이다. 한국에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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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지식 담론 장에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서구에서 한참 전에 논의되었던 것을 이제 와서 새로운 유행인 줄로 알고 뒤늦게 따라가는 꼴이다. 서구 이론의 역사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구조주의가 풍미하였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포스트구조주의가 성행하였다. 그 뒤를 이어 2000년대에 서구 학계의 화제를 모은 담론이 신유물론이다. 한국에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매순간 동시적으로 움직이는 오늘날에 20여 년의 격차를 둔 이론의 수입과 유행이 여전하다는 것은 깊은 반성을 요하는 문제다. 한국에서 새로운 정치(촛불혁명과 박근혜 탄핵)와 새로운 문화(오스카가 ‘로컬’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 봉준호의 <기생충>)를 제시하며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때에, 유독 사상의 측면에서는 ‘서구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의 일방적 답습을 면치 못한다. 신유물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서구 이론과 한국 지식 담론 장 사이에 견고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성찰하자는 것이다. 개항 이후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거의 모든 지식 담론이 그러한 방식으로 수입되었다. 한국의 지식인은 이론을 수입하는 보따리장수 노릇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시개벽] 창간호는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도모하는 겨울호의 출발점으로서, ‘서구근대 백여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라는 주제를 마련하였다. 수운 최제우는 [용담유사]<교훈가>에서 “유도 불도(儒道 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역시 다했던가”라고 말했다. 아시아 문명에서 유교와 불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와 같은 고대부터 조선 시대와 같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사대주의라는 문화 권력의 위계질서를 지탱하는 이념적 토대였다. 수운은 그때까지 지배-피지배 구조를 떠받치고 있던 이념이 그 운을 다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동학 천도교가 말하는 운(運)이란, ‘끝없이 가고 돌아온다[無往不復]’는 순환 원리를 뜻한다. 최제우는 '교훈가'에서 그 예시로서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의 갈마듦을 언급하였고, 손병희는 '명리전'에서 그것을 지배와 피지배 간의 고정적인 위계질서가 변동하는 원리로 설명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서구에서는 니체가 영원회귀를 운명으로 맞이할 때에 비로소 삶 전체를 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전에 헤겔의 역사철학은 인류 정신이 태양과 같이 동양에서 시작하여 서양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과 그 이후에 지속된 서구 근대 문명의 전파로 인하여, 세계인 대부분의 무의식 속에는 서구적 사유와 서구적 삶에의 욕망이 주입되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지구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태양은 서쪽에서 저문 뒤에 동쪽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발상에서 창간호를 기획했다.
개벽 창간1주년 기념호(13호) 표지

[다시개벽] 창간호는 <다시읽다>, <다시듣다>, <다시쓰다>, <다시열다>, <다시잇다>의 다섯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다시읽다>는 각 호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이전의 담론과 사상가를 검토하는 부분이다.

창간호 조성환의 글은 서구 중심적 사유의 한계를 본격적으로 성찰하였던 100년 전 잡지 [개벽] 창간호를 검토함으로써 [개벽]지의 방향과 얼개를 소개한다. 이와 같이 앞으로 1년 동안 [다시개벽]은 [개벽]에 담긴 독창적 비전을 재조명한다.


김정은의 글은 한국 학문의 식민성을 비판한 해방 이후의 대표 사례로서 조한혜정의 저작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에 관하여 리뷰한다. 이 리뷰와 관련하여 <다시듣다>는 조한혜정의 내밀한 목소리를 직접 들음으로써, 삶과 앎의 분열을 극복할 때에만 재미난 삶이 가능함을 재확인한다.




<다시쓰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같은 모든 종류의 모방적·관습적 학문 풍토를 벗어나, 자생적 학문의 깊이에 근거하여 창조적인 사유를 실험하는 자리다.

홍승진의 글은 서구 이론 중심주의가 현실의 고통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의지로부터 비롯하였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 의지는 서구 이론 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방민호의 글은 서구에서 제시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식민주의와 마찬가지로 서구 중심적 모델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지적하며, 일제 식민 지배에 맞선 한국 특유의 언어적·문학적 고투를 토대로 ‘포스트 포스트콜로니얼리즘’ 개념을 정초한다. 마지막으로 차은정의 글은 서구 근대의 우주론에 가려져 있던 인류의 다양한 우주론에 주목하여,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영성(靈性)의 세계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우주론의 발굴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다시열다>는 낡은 규범과 제도에 파열을 일으킬 만큼 생기 넘치는 미래의 씨앗이다.

성민교의 글은 서구 중심주의와 관련하여 중심이라는 문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특정한 중심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이야말로 그 속에 담긴 무한대의 힘을 표출하는 길임을 밝힌다. 또한 김춘규의 글은 사랑을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서구적 지식에의 무비판적 추종은 권력과 페티시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엄중하게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다시잇다>는 [다시개벽]의 전신인 백 년 전 [개벽]을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되살리는 작업이다. 이번 호에서는 [개벽]지 창간호 권두언 <세계를 알라>를 현대어로 풀이하였다. 이 글은 불평등의 과거를 평등의 미래로 개벽하는 흐름 속에서 하나의 국가 또는 하나의 민족과 전 세계가 동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서구중심주의 극복의 방향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통찰을 던지고 있다.




제2호(봄호) 주제는 ‘한국 자생적 사유의 발굴’이다. 한국 고유의 사상을 처음 천명한 신라 시대의 최치원 이래로 한살림 선언, 윤노빈, 김상일, 박동환, 조동일 등에 이르는 자생적·창조적 사유의 흔적과 흐름을 폭넓게 짚어보고자 한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독자들의 자유로운 투고를 기다린다. 형식의 제한은 없다. 1만 자 내외의 간결한 글을 권장한다.

그 밖에 창간호에서 문예 분야(<다시그리다>)를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시와 소설, 문학평론과 영화평론, 에세이 등을 기다린다. 창조적 사유의 길에 첫걸음을 내딛었으니, 더불어 걷고자 하는 벗들이 하나둘 피어나면 곧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꽃밭을 이룰 것이다.


1920년 창간 이후로 한국의 사상과 문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종합지 [개벽]이 그로부터 100년 뒤에 계간 [다시개벽] 으로 또 한 번 태어난다. 이전까지는 [개벽신문]이 2011년 4월 창간호부터 2020년 6월 종간호(95호)까지 개벽의 이름을 잇고 개벽의 흐름을 북돋았다. 서구적인 문화와 지식이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시대에서도, 한국 고유의 관점으로 ‘아름다운 세상-행복한 사람-정의로운 연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 그렇게 [개벽신문]이 오늘의 [다시개벽]을 낳았으니, [개벽신문]의 생명력은 [다시개벽]에서 한층 더 개벽을 향해 꽃필 것이다.


"다시개벽" 선언문

계간 '다시개벽' 창간사 | [필자주] 1920년 6월 25일자로 창간된 <<개벽>>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것을 계승하는 잡지 계간(季刊) <<다시개벽>>이 2020년 겨울호로 창간되었다. 1920년 7월호(6.25)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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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




개벽신문
서구근대 댓글
소걸음편집장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 개벽신문 주간, 개벽하는사람들 사무국장

2019/03/25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다 – 다른백년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다 – 다른백년







개화학에서 개벽학으로
2019년 3월 6일 수요일 아침. 서울 부암동의 산꼭대기에 위치한 여시재 대화당(大化堂)에서 개벽학당 출범식이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하자센터 출신을 비롯한 여러 벽청(개벽하는 청년)들과 그들을 이끄는 이병한 선장. 사공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선장의 출항사를 지켜보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제가 보고 들은 올해의 3.1운동 행사 중에서 가장 빛나는 축제였습니다.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삼일독립선언서」의 마지막 문장을 빌리면, “아아!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개화의 시대가 거(去)하고 개벽의 시대가 래(來)하도다.”에 다름 아닙니다.
개벽학당 개강식
이날 행사에 초대받은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 대표님은 “큰일을 하셨다”고 이병한 선생님을 격려하였습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5년 전을 돌아보았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생활을 막 시작한 1994년, 지금의 개벽학당 청년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입니다. 저는 대학로에서 막 개원한 도올서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때의 그 모습이 재현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자리만 뒤바뀌었을 뿐입니다. 도올서원 학생에서 개벽학당 선생으로-.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의식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서원과 학당을 오가고 있을 것입니다.
도올서원은 굳이 말하자면 동양학, 중국학의 범주였습니다. ‘서원’이라는 말에서부터 유학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이에 반해 개벽학당은 한국학(K-Studies), 개벽학의 산실입니다. 동양학에서 한국학으로, 중국학에서 개벽학으로의 전환. 지난 25년 동안의 변화이자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벽학당 당장 로샤(이병한)

개벽은 나이순이 아니다
제가 개벽학당의 출항을 3.1운동 100주년의 가장 빛나는 사건이라고 선정한 것은 ‘기념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재양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기념행사에는 청년들이 없지만 개벽학당에는 청년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행사는 일회성으로 끝나지만 양성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출범식에서 보여준 학동들의 몸짓은 젊고 발랄했습니다. 신명이 넘쳐났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사는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의 한국사회는 이들을 받아줄 마당이 없습니다. 어른들의 나라이자 기성세대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낼 젊은이들을 길러낼 ‘뜻’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네들이 다 ‘해 쳐먹고’ 있는 느낌입니다. 개벽은커녕 개혁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정신세계가 20세기의 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절망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북관계보다 훨씬 비관적입니다. 남북관계는 기대라도 하게 만들지만, 한국사회는,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인문학계는 활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통유학과 개화우파와 개화좌파의 삼각구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한국철학사 서술에서는 여전히 100년 전의 실학담론과 주리주기론의 틀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삼일독립선언서」에 두 차례나 나오는 ‘독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개벽정신이 만개한 한국근대사상은 주류 학계에서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고, 최근에는 ‘개벽’이라는 말을 쓰면 특정 종교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한심한 수준입니다. 총체적인 문제로는 한국사상 연구가 분야별로, 인물별로, 종교별로, 학문별로 쪼개져 있어서 ‘한국학’이라는 큰 틀을 고민하는 학자가 없습니다. 산적한 문제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개벽학당 모시는선생님 새별(조성환)

동아시아담론의 허구
동양포럼에서 어느 중국인 학자가 지적했듯이, 전 세계에서 개화의 독을 가장 심하게 먹은 나라가 한중일 삼국이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중독이 심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문학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이 우리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처럼 식민지를 당한 경험도 없고 분단의 현실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개화학에 더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동아시아론에서 벗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적어도 1860년 동학 창시 이후부터는 한중일 삼국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 선언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차이’를 직시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유교’나 ‘동아시아’라는 범주로 한중일의 근대를 논하거나 동아시아의 미래를 모색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19세기 후반부터는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인도나 아프리카와 같은 이른바 ‘제3세계’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존의 동아시아담론은 유학 아니면 개화학 중심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는 개벽학이 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도 이성적 근대가 아닌 영성적 근대였습니다. 동학에서 ‘하늘’을 불러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삼일운동에서 기독교가 참여한 것도 “새 하늘 새 땅”을 건설하고자 하는 개벽정신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동서합작’인 셈입니다. 과연 동시대의 중국이나 일본에 이런 합작품이 또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이것이 개벽의 길이자 개벽 정신입니다.
개벽학당 운영위원장 아띠(황지은)

청년들의 눈물, 어른들의 나라
개벽학당 첫날, 오후에 있었던 세미나 시간에서 몇몇 벽청들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북받쳐서 말문을 잇지 못했습니다. 대안학교 출신으로, ‘자발적 고졸’로 살아가는 서러움 때문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당연히 대학생인 줄 아는 한국사회에서 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늘 대학에서 생활하는 저로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대학총장에서 시작해서 대학교수, 대학박사, 대학원생, 대학생 등등, 온통 ‘대학인’들만 접해 온 저로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유교경전에 대학이 있어서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되었나.”
그리고 이틀 뒤에 참석한 협동조합연찬 모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50대 이상이었는데, 유일하게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울음을 터트린 것입니다. 자기랑 같이 활동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쏟아낸 눈물이었습니다. 그나마 자기는 이런 자리에 올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기성세대로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또 하나의 과제가 생긴 셈입니다. 이전부터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인 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기성세대의 독재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삼일독립선언서」에서 자부한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동엽의 _금강_을 읽고 있는 벽청 하야티(김지현)

동학혁명에서 삼일혁명으로
최근에 있었던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멋지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과연 창비와 세교연구소에서 다년간 쌓아온 내공이구나 싶었습니다. 저 역시 만북울림행사와 선언문에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은 행사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선언문의 내용도 지적하신 대로 ‘개벽선언문’에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개벽’이라는 말이 모두 9차례나 사용되고 있을 정도니까요. 만약에 종교단체의 선언문이었다고 한다면 ‘개벽’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정 종교를 옹호한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개벽’이나 ‘손병희’가 빠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북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100년>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동학혁명과 삼일혁명을 나란히 병기하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삼일독립운동을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런 역사관이 사회 전반에 퍼졌을 때, 대통령의 연설문에도 개벽이나 손병희의 이름이 들어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도삼장>의 첫머리에서 “새로운 시대의 철학을 확립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점도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개벽학이 요청되고 있다는 신호에 다름 아니니까요.
수양하자 시간, 하와이의 영성 댄스인 훌라 수업

동학을 품은 서학
종교단체가 기획한 3.1운동 100주년 행사 중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강원도 원주에서 발행하는 농촌과 목회의 <3.1운동 특집기획>이었습니다. 올 봄에 나온 최신호에서 <3.1운동, 동학,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기독교를 비롯해서 동학, 천도교, 장일순에 관한 총 6편의 글을 싣고 있습니다. 3.1운동을 둘러싸고 자기 교단의 활동을 강조하기 쉬운데, 오히려 다른 교단인 천도교와 그것의 모태인 동학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태도가 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머리에 나오는 한경호 편집위원장님(횡성영락교회 목사)의 권두언 <농(農), 동학사상, 주체사상>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저도 일부만 떼어 오기가 아까워서 통으로 가져와 봅니다.
나는 동학(천도교)에 대하여 잘 모르면서 자랐다. 춘천에서의 어린 시절 사창고개 넘어가는 곳 어디에 천도교 교당(모임장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주위에 천도교 관련자가 아무도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통해 겨우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조선후기 농민들의 피폐상, 조선왕조의 몰락, 크고 작은 농민들의 봉기들,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얼어난 동학혁명, 이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됐다는 사실 정도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청년시절에는 동학혁명이 농민혁명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게 되었다. 동학보다는 농민전쟁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수운과 해월의 말씀과 행적도 농민봉기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학은 이제는 시대적 사명을 다한 사상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 12월초, 첫 목회지로 원주 호저면의 호저교회에 부임하였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89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날은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교회 앞 찻길로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고산리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장일순 선생이 중심이 되어 원주의 고미술동호회 회원들이 해월 최시형 선생이 잡혀가신 호저면 고산리에 그를 기리는 비(碑)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후 생명운동을 하면서 장일순이 해월 사상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들을 보게 되었다. 장일순은 한국 생명운동을 처음으로 주창하고 한살림운동을 촉발시킨 생명사상가인데 해월의 사상을 많이 언급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의 사상을 장일순을 통해 새롭게 접하게 되었고 크게 공감하였다. 그러고 보니 장일순은 해월을 현대 한국사회 생명운동의 사상적 원조로 불러내어 부활시킨 분이다. 부임한 호저면이 해월 선생이 은거하며 포교하다가 잡혀간 곳이고, 원주가 장일순 선생이 살고 계신 곳이라는 사실은 부임하고서야 알았다. 생명운동을 중심적인 선교과제로 삼고 실천하고 있는 나에게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요,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는 것은 3.1운동 100주년과 동학, 그리고 기독교의 관계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학은 그 세가 왜소해졌고, 반면 기독교는 강성해졌지만 민족 자주적인 관점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그 해결을 내생적, 자주적으로 풀지 못하고 외생적, 비자주적으로 해결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불교문화가 쇄락하자 유교문화를 수용‧대체하였고, 유교문화가 쇠퇴하자 서양 기독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왔다. 반면, 동학은 유‧불‧선 3교와 기독교까지 아우르는 독자적인 사상을 제시하면서 구한말 당시의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삶에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후 천도교가 대중종교로 발전해가지 못한 점은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앞으로 우리 민족이 평화통일의 새로운 길을 열어 가는데 있어서 기독교권이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하나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족의 전통사상 특히 동학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고난의 한국근대사 속에서 민족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몸부림친 내생적 사상운동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전 지구가 생명의 시대를 살고 있기에 동학의 생명사상은 더욱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생명을 농본주의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다.
3.1운동에 기독교가 기여한 것도 많지만, 천도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상황에서는 천도교의 교세가 기독교보다 훨씬 강했고, 재정적인 능력도 컸으며, 보다 주체적이고 계획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최근 기독교의 장로 몇 분이 동학(천도교)으로 옮겨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자주적 영성, 영혼의 탈식민지화이다.
우리는 그동안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신학적 작업에 소홀하였다.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서 상대방과의 대화에 소홀하였고, 그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지 못했다. 유명한 신학자인 폴 니터는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너’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나’를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기독교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농(農)의 시각으로 성경을 새롭게 보고, 동학사상과 주체사상을 아우르는 신학적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글입니다. <선언문>이라기보다는 <고백록>에 가깝습니다. 젊었을 시절, 개벽학으로서의 동학보다는 개화좌파로서의 농민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고백, 아니 개벽학 자체를 몰랐다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기독교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전망한 글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기독교와 천도교의 관계를 “붓다 없이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는 폴 니터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있고, 남한학과 북한학을 아우르는 한국 신학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동학이 서학을 품었다면 지금의 서학은 동학을 품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개벽포럼>에도 한 번 모셔다가 말씀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세기의 삼전(三戰)
마지막으로 손병희 선생의 「삼전론」과 선생님의 「서신」에 힘입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삼전(三戰)을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역시 도전(道戰)입니다. <만북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100년>의 선언문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철학을 확립한다”고 설파했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철학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강성원 교무님의 언어를 빌려서, ‘개벽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전(人戰)입니다. 개벽시대를 개척할 젊은 인재들을 길러내는 작업이 시급합니다. 개벽학당과 같은 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은 심전(心戰)입니다. 한경호 목사님도 언급하신 영혼의 탈식민지화입니다. 중화(中華)와 개화(開化)의 포로와 노예에서 벗어나고, 공자(孔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술이창작(述而創作)의 마인드로 전환시켜서, 「삼일독립선언서」에서 표방한 ‘독창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 삼전의 내공이 쌓이면 한반도에 새로운 하늘이 열리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개벽학당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큰 걸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