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법륜.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법륜. Show all posts

2020/10/16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YES24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YES24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미리보기 공유하기

소득공제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15가지 불교적 성찰

곽철환 저 | 불광출판사 | 2014년 05월 30일

리뷰 총점8.6 정보 더 보기/감추기 회원리뷰(7건) | 판매지수 252 판매지수란?

베스트 종교 top100 5주

정가 12,500원

판매가 11,250원 (10% 할인)

YES포인트

620원 (5% 적립)

5만원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적립 5만원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적립 안내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카드/간편결제 혜택 보기/감추기

eBook

8,750원이동

이 상품을 팔기

매입가 700원

더보기/감추기

예스24 단독 판매

[예스리커버]

마음산책 20주년

기념 특별판

[예스리커버]

정확한 사랑의 실험



[예스리커버]

창 닫기

판매중



수량

1

수량감소수량증가

배송비 : 무료 배송비 안내

카트에 넣기

바로구매

주문시 3일 이내 출고 예정 출고예상일과 상품수령 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일신빌딩) 지역변경

해외배송 가능

최저가 보상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리스트에 넣기

10월, 얼리리더 주목 신간

2/2AD

���ޱ������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함께 산 책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많이 산 책

만들어진 신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저/이한음 역 | 김영사



평점 7점 149건



22,500원 (10% 할인)



대성당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김연수 역 | 문학동네



평점 8점 55건



12,150원 (10% 할인)



배움을 돈으로 바꾸는 기술

배움을 돈으로 바꾸는 기술



이노우에 히로유키 저/박연정 역 | 예문



평점 8점 59건



12,150원 (10% 할인)



지금 여기 깨어있기

지금 여기 깨어있기



법륜 저 | 정토출판



평점 8점 38건



10,800원 (10% 할인)



오리엔트 특급살인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저/유명우 역 | 해문출판사



평점 8점 23건



9,000원 (10% 할인)



심연으로부터

심연으로부터



오스카 와일드 저 / 박명숙 역 | 문학동네



평점 8점 12건



13,500원 (10% 할인)



2/4

도서정보리뷰/한줄평 (7/0)배송/반품/교환

11,250원 카트에 넣기 바로구매

이 분야 베스트셀러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



잭 콘필드,폴 브라이터 편/김윤 역



11,700원 (10% 할인)





지장경 한글 사경



김현준 역



4,500원 (10% 할인)





인생수업



법륜 저/유근택 그림



11,700원 (10% 할인)





법륜 스님의 행복 (양장본 특별 에디션)



법륜 저/최승미,김정숙 그림



18,900원 (10% 할인)





만다라 컬러링 100



편집부 편저



11,520원 (10% 할인)



더보기이동

이 분야 신상품



부처님의 감정수업



김정호,서광,전현수 저



13,320원 (10% 할인)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본 반야심경 역해



김사철,황경환 저



14,220원 (10% 할인)





불교의 자녀사랑 기도법



김현준 저



4,500원 (10% 할인)





법화경 약찬게 사경



편집부 편



5,000원





광명진언 범어 실담자 사경



법헌 저



8,000원



더보기이동

품목정보

출간일 2014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89쪽 | 280g | 200*141*20mm

ISBN13 9788974790615

ISBN10 8974790610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국내도서 > 종교 > 불교 > 불교 명상/수행

책소개

불교 길라잡이,

시공 불교사전의 저자 곽철환이 원고지 500매로 압축한 붓다의 가르침!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함을 흔히 8만 4천 가지 경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만 해도 그 양이 엄청나다. 거기에 남방에서 보존해온 초기경전과 다양한 논서까지 더하면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그 대의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일까? 그 핵심이 무엇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불교 관련 서적이 많지 않던 때에 가뭄에 단비와 같았던 불교 길라잡이(1995년)를 필두로 오랫동안 불서를 기획, 집필해온 저자 곽철환 선생이 평생 마음에 품어온 의문이 그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머리글



왜 고(苦)인가?

생각과 에고의 그림자

고에서 열반으로 가는 4제(諦)

고가 일어나고 소멸하는 열두 과정, 12연기(緣起)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무상(無常)

에고와 경계가 소멸된 무아(無我)

온갖 분별이 끊어진 공(空)

열반으로 가는 세 가지 수행, 3학(學)

네 가지 알아차리기의 확립, 4염처(念處)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팟사나(vipassan?)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된 열반(涅槃)

선(禪)

중생을 위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 자비희사(慈悲喜捨)

지금 이 순간

마음



찾아보기

접어보기

저자 소개 (1명)

저 : 곽철환 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문자로 대중에게 소개한 지 20여 년, 지금은 북한산 자락에 터를 잡고서 책 읽고 글 쓰고 산에 오르며 생의 후반기를 다듬고 있다. 지은 책에 『불교 길라잡이』, 『시공 불교사전』, 『불교공부사전』, 『불교의 모든 것』,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고전』이 있고, 옮긴 책에 『핵심 아함경』, 『금강경』이 있다.

작가의 다른 상품

불교의 모든 것 (큰글씨책)

불교의 모든 것 (큰글씨책)



32,000원





초기불교 이야기

초기불교 이야기



4,320원 (10% 할인)





인생과 싸우지 않는 지혜

인생과 싸우지 않는 지혜



11,700원 (10% 할인)



만든 이 코멘트

저자, 역자, 편집자를 위한 공간입니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남겨주세요.

코멘트 쓰기

접수된 글은 확인을 거쳐 이 곳에 게재됩니다.

독자 분들의 리뷰는 리뷰 쓰기를, 책에 대한 문의는 1:1 문의를 이용해 주세요.

책 속으로

‘부족감’은 에고(ego)의 속성이어서 결코 만족을 모른다. 채우면 채울수록 모자라고 채우는 순간 결핍이 나타난다. 삶이 늘 갈등에 휘둘리는 이유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생각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끝없이 긴장하고, 불안하고, 계속 움직인다. 중생의 욕망이 끝없는 건 아무리 많이 가지더라도 그것으로 생존의 불안감과 괴로움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이젠 됐다.’ 하고 느긋해진다 해도 그 다음에 더 큰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 왜 고인가?



중생의 마음은 ‘좋다/싫다’, ‘즐겁다/괴롭다’, ‘아름답다/추하다’ 등, 그 2분의 한쪽에 집착하고 다른 한쪽을 회피하며 마치 시계의 추처럼 끊임없이 왕복한다. 집착과 회피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 운동의 진폭이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집착한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회피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 집착한다거나 회피한다는 건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불안정하고, 얽매이고, 불안하다. 이러한 마음 상태가 곧 고(苦)이다.

따라서 일체행고(一切行苦)이다.

이게 바로 고타마 붓다가 간파한 근원적 통찰이다.

- 왜 고인가?



생각을 정리하려거나 줄이려면 생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관조(觀照)해서 그 감정의 2분법에 둔해져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을 대하더라도 너무 민감하게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거다. 이게 단순하고 편하게 사는 길이다.

따라서 복잡한 불교 교리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할 줄만 알면 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생존의 유지와 안전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일어나는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몸-마음’에 집착하고 애착하면 할수록 그 생각과 감정이 자주 찾아온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내용은 대부분 저항이다. 저항이 곧 분노이고 스트레스다.

--- 생각과 에고의 그림자 중에서

접어보기

출판사 리뷰

불교 길라잡이, 시공 불교사전의 저자 곽철환이

원고지 500매로 압축한 붓다의 가르침!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함을 흔히 8만 4천 가지 경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만 해도 그 양이 엄청나다. 거기에 남방에서 보존해온 초기경전과 다양한 논서까지 더하면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그 대의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일까? 그 핵심이 무엇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불교 관련 서적이 많지 않던 때에 가뭄에 단비와 같았던 불교 길라잡이(1995년)를 필두로 오랫동안 불서를 기획, 집필해온 저자 곽철환 선생이 평생 마음에 품어온 의문이 그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일까?”



한 구절 한 구절을 모아 단락을 만들고, 단락과 단락을 모아 한 편의 글이 되기까지 쓰고 읽고 다시 쓰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당신이 배우고 익히며 실천해온 부처님 가르침의 고갱이를 정리했다. 그렇게 원고지 500매로 압축되어 나온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해 저자가 세상에 내놓은 답변이다. 저자는 말한다. 불교는 자연과학처럼 바깥 대상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내관(內觀)으로, 고(苦)에서 열반(涅槃)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마음에서 떠오르는 지각, 생각, 영상(映像, image), 감정 등이 어떻게 고(苦)를 일으키는지를 통찰하여 평온한 열반(涅槃)을 얻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불교이다.



우리는 바깥 대상을 지각할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온갖 생각과 감정, 선입관 등으로 덕지덕지 채색하여 지각한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의 일로 갖가지 상상을 떠올려 얽매이고 집착한다. 에고(ego)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마음은 ‘나 / 나 아닌 것’으로 갈라지고, 생존에 ‘유리하다 / 불리하다’로 갈라지고, ‘기분 좋다 / 기분 나쁘다’로 갈라지면서 둘로 나뉜 온갖 생각과 감정이 잇달아 일어나 그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므로 온갖 불안과 갈등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불교는 무엇을 ‘아는’ 공부가 아니라 무엇이 ‘되는’ 공부

부질없는 마음의 소음을 버리고 청소하면 될 뿐!



우리가 궁극에 도달해야 하는 열반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된 상태이다. 중생의 탐욕이 끝없는 건, 에고의 속성이 ‘부족감’이어서 결코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분노는 ‘저항’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저항이고, 오고 가는 인연을 거스르는 저항이고, 허망한 에고에 상처를 받아서 치솟는 저항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매사에 얼마나 잘 분노하는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반으로 가는 길에 복잡한 교리 따위는 필요 없다. 에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은 자연히 사라진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온갖 헛된 생각과 불안이 엄습해온다. 모두 에고에 대한 집착이 불러일으키는 망상일 뿐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마음은 결코 내 뜻대로 쉬이 평안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마음의 재잘거림은 불교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잦아드는 게 아니다. ‘앎’이 곧 ‘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앎’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마음 가득한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할 줄 알면 될 뿐이다.



‘이 책은 어떻게 마음을 청소할 것인가에 대한 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를 배우는 목적은 단지 이런저런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작용을 파헤치는 복잡한 교리에 몰두하기보다 고(苦)의 원인을 바로 살펴서 고(苦)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실천하여 안심(安心)을 자주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아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에고(ego)’가 어떻게 고통을 일으키는지, 먼저 고(苦)의 정체를 바로 알면 고에서 벗어나는 길도 보이는 법이다. 불교는 결코 삶에서 유리된 것이 아니다. 고통을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의 뭇 존재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접어보기

회원리뷰 (7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상품권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쓰기

7명의 YES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리뷰 총점8.6/ 10.0

내용 내용 점수 편집/디자인 편집/디자인 점수 정보 더 보기/감추기

별점별로 리뷰를 확인해 보세요.

평점 9.0 ~ 10점

86%

평점 7.0 ~ 8.0점

0%

평점 5.0 ~ 6.0점

0%

평점 3.0 ~ 4.0점

0%

평점 0.0 ~ 2.0점

14%

전체 리뷰 (7)

포토 리뷰 (0)

스타블로거 리뷰 (3)

처음 이전 1 다음 끝

 구매리뷰 최근순 | 추천순 | 별점순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곽철환, 불광출판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life7joy | 2014-07-0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36978



어설픈 나의 지식으로, 불교는 어떤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방대한 불교의 경문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제대로 배워, 부질없는 마음과 감정을 청소하고 싶었다.







저자 곽철한은 “불교는 고(苦)에서 시작해서 열반(涅槃, nirvana)으로 마친다”(p. 6)고 말한다. 나/나 아닌 것, 좋다/싫다, 등과 같이 이분법적 생각과 마음의 상태가 고(苦)이고, 따라서 일체행고(一切行苦)인 것이다. 따라서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할 줄 알면 열반(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에 이른다. 수행의 시작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추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사마타(samatha, 고요함)와 위팟사나(vipassana, 꿰뚫어보는 통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결국 이 두 수행법은 모두 사티(sati,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여 지켜보는 것)를 바탕으로 한다. 결국, 마음 수행이 부처의 길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쉬운 말로 마음 수행을 설명한다. “불교는 손을 움켜쥠이 아니라 폄이다. … 불교는 패션쇼가 아니라 스트립쇼이고, 덧셈이아니라 뺄셈이고, 상승이 아니라 하강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의 회귀이다.”(p. 60).







불교 용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에게 이 책은 불교 용어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고에서 열반으로 가는 4제(고제, 집제, 멸제, 도제), 고가 일어나고 소멸되는 열두 과정인 12연기(緣起), 열반으로 가는 세 가지 수행인 3학(學), 네 가지 알아차리기의 확립인 4염처(念處),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한 7각지(覺支,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등등. 저자는 불교적 용어를 아주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 책 제목처럼, ‘불교의 핵심’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불교의 용어들을 이해하고 정리하면서, 내 마음에 드는 의문은 스님들처럼 출가(出家)하지 않고 일상의 삶을 살면서 이런 마음수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부처는 이미 네 가지 마음,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설파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慈),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悲),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捨)을 닦는 것이다. 이를 위해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며,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만나는 사람과 지금 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온갖 감정을 떠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과 감정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듯하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 현재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 혹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불교식 마음수행은 불교의 핵심을 이해했다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은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불자(佛子)는 아니지만, 마음공부에 관해서만큼은 불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1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1 댓글 0접어보기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라리루

내용 평점1점   편집/디자인 평점1점 |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lalilu | 2014-07-0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35752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 라리루











대한민국의 3대 종교를 언급하면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명상과 수행이다. 명상을 통해서는 우리 안에 부정적인 마음들을 흘러가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상태로 끊임없이 명상하는 것과 수행을 통해서도 잡념을 제거하고 무념무상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독 인기를 끌었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욕심을 버리고 있는 것에 자족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스트레스가 많고 과잉 경쟁으로 심신이 지친 이들로부터 힐링을 얻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시벌을 함으로 몸과 마음이 무거운 짐에 눌려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강박적인 정신적인 고통이 겹겹이 쌓여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자아와 서로 무엇이 진정으로 참된 것이고 바른 것인지 찾고 구하는 것이 불교의 또 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불교는 우리 안에 욕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흘려보냄으로 때로는 태워버림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종교요 삶의 종교인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 또한 없을 것이다. 무엇을 원할수록 우리의 마음의 번민은 점점 더 커져간다. 그러므로 원함이 없이 이루어진 것에 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해탈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우리가 사는 수많은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족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능성이 커져가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과정 해탈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개인의 경험이고 판단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우리 내부에 있기 보다는 외부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0 댓글 0접어보기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뜨거운커피우유 | 2014-07-01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28858



    절에 다니신 분들도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간혹 있다.



따로 공부를 하지않으면 불교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이다.

불교신자인 나역시 불교에 입문한지는 한참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불교에 대해 공부한지는 불과 몇 년이다.

알수록 어렵다고 느껴지는 면도 있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불교인 것도 같다.

불교의 교리 기초 수업도 듣고 불교 tv를 보고 법문도 자주 듣지만 불교를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동국역경원에서 10년동안 일하셨다는 경력 때문인지 잘 정리되어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간결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뽑아서 저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단순히 핵심전달에 그치지 않고 불교의 이해를 넘어서 행동 추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태워버리는 수행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준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불교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해탈이 아니겠는가.

'생각과 에고의 그림자'에서 생각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불안 걱정 두려움 등의 덧씌워서 더욱 복잡한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콕 짚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이걸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굳이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유심히 읽어봤으면 싶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생각은 파도와 같아서 시도 때도 없이 오고 가기 때문에 생각이 떠오르면 그냥 사라지게 내버려두고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게 생각을 돌보는 수행이다.과거와 미래에 집착해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기 때문에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어진다. (p.17)

생각이 요동치는 순간에 제대로 알아차릴 수만 있어도 한 순간에 마음을 돌릴 수만 있어도 큰 일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 생각 속에 빠져들지 않는가.

저자는 복잡한 불교교리를 잘 아는 것보다 부질없는 생각과 감정을 청소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특히 공감이 간다. 우선 나부터도 실천은 잘 안되는 일이지만 내마음 잘 단속하는 일을 수행삼아 해 나감은 어떨까.

깨닫고자 하면 점점 멀어지고

편안하려 하면 더욱 불안해지니

편안을 잊어야 편안하고

깨달음을 잊어야 깨닫게 되나니

이 도리는 원래 복잡하지 않네.

-원감국사가송

이 책에 인용되어 있는 이 글이 특히 내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삶이 무언가를 너무도 추구하고 갈망하고

갖지 못하면 힘들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을 놓아버린 삶의 모습

위 시는 그런 느낌이어서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닌가 반성해보게 된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괴로움의 발생은 부정적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한 '집착' 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놓치고 있던 이야기들을 저자는 콕콕 짚어준다.

사실 이 책은 학문적인 부분을 넘어서서 전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며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압축시킨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생에 대한 많은 의문들과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불교신자 뿐 아니라 정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을 추구해야할지 마음공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좋겠고 요즘들어 이렇게 불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깊이있게 다룬 책은 처음이란 생각에 이 책을 읽은 내가 괜히 뿌듯했다.

책의 내용을 단박에 이해한 사람은 평소에 이런 문제를 많이 고민하거나 불교를 깊이있게 공부한 사람일테고

이 책은 난이도가 있는 편이다.

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2 댓글 2

2020/10/15

붓다는 현대과학 문제 어찌 풀까 : 뉴스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모바일

붓다는 현대과학 문제 어찌 풀까 : 뉴스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모바일

불교의 핵심 진리인 중도(中道)를 통해 현대 과학문명이 야기한 문제점들을 극복할 가치를 모색하는 포럼이 열린다

조현 기자

등록 2019-10-08



불교의 핵심 진리인 중도(中道)를 통해 현대 과학문명이 야기한 문제점들을 극복할 가치를 모색하는 포럼이 열린다.



 (사)고요한소리(공동대표·하주락,변영섭)가 오는 12일 오후1시30분부터 오후6시까지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중도와 과학-이 시대의 가치’를 주제로 한 ‘중도포럼’이다.



 이 포럼을 여는 <고요한 소리>는 회주 활성 스님이 1987년 창립해 근본불교를 중심으로 불교철학, 심리학, 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간행물을 꾸준히 내 불교계에 소리 없이 큰 파문을 확산시킨 불법 홍포의 주역이다. 중도포럼은 <고요한 소리> 간행 30돌을 맞은 2017년부터 매년 한차례씩 열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는 활성 스님이 ‘과학과 불법(佛法)의 융합’을 주제로 발제법문을 하고, 상도선원장 미산 스님을 좌장으로 해 세 전문가의 발표와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고요한 소리>에서 30년간 봉사를 해온 공동대표인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은

 “오늘날 현실과 가상이 융합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변혁기를 맞아 “‘인공지능’(AI)와 로봇이 일상화하고, 유전자 편집 기술로 생명체를 개조할 수 있는 미래는 기대와 함께 우려를 낳고 있다”면서 

“과연 21세기에 과학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인류가 진정 사람다운 사람살이를 할 수 있도록 향상하는 길은 무엇인지, 인류가 새롭고 큰 눈을 뜰 수는 없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보는 계기를 주는 포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는 ‘불교의 중도 개념과 현대과학 사상’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중도 개념을 현대과학의 공간 개념 발전과정과 연관해 논의하고,

다시 일체개공의 의미를 현대과학의 물질 개념과 연관해 살펴본 뒤 불교의 무아개념을 현대과학의 온생명 이론을 바탕으로 재해석한다.



 또 이경민 경북대 의대교수는 ‘뇌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기억이나 감정 등 뇌 기능을 제어하는 기술까지도 개발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가치,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뇌 과학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과학자의 입장에서 살펴본다.



이와 함께 미산 스님은 ‘중도, 실천이 먼저다:팔정도와 명상과학을 통한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해 발표한다. 미산 스님은 팔정도의 중도 실천이 어떻게 인공지능 시대에 적합한 사회적 가치 실현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지를 명상과학의 입장에서 고찰하게 된다.



 초전법륜경은 중도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여래가 깨달은 ‘중(中)의 걸음(中道)’, 눈을 밝히고 앎을 밝히는 것, 고요로, 수승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그 치우침 없는 걸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가지 요소의 길’(聖八正道)이다.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well/news/940923.html#csidx418e5335444b377a21bb5a610ab125c

2020/10/14

자비명상 개발해 상처 난 마음 찾아가는 ‘힐링멘토’ 마가 스님:매일종교신문

자비명상 개발해 상처 난 마음 찾아가는 ‘힐링멘토’ 마가 스님:매일종교신문


자비명상 개발해 상처 난 마음 찾아가는 ‘힐링멘토’ 마가 스님
오늘 내가 뿌린 씨앗이 미래의 열매…자비명상은 ‘善業 쌓는 법’ 깨닫는 수행”

기사입력: 2020/02/06

문윤홍 대기자

오늘 내가 뿌린 씨앗이 미래의 열매…자비명상은 ‘善業 쌓는 법’ 깨닫는 수행”

스무 살의 청년은 1년간 모은 수면제를 열 알, 스무 알씩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대산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이 가물가물해지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자살하면 아버지가 평생 후회하면서 살겠지’하고 아버지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기 위해 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죽어가는 청년을 발견해 월정사로 옮긴 한 스님이 3일 만에 깨어난 그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는 부처님 가피로 다시 태어났으니, 여생은 부처님에게 바치게나.”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고단한 삶에 지친 대중이 그를 찾는다. 그가 쓴 『알고 보면 괜찮은』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가 중앙대에서 강의한 ‘내 마음 바로보기’(3학점)는 ‘1초 마감’으로도 유명하다. 수강 신청 시작과 함께 곧바로 마감되기 때문이다. 그가 설파하는 ‘자비 명상’은 미움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나의 힐링(healing) 창구로 자리매김했다. 마가 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국민 힐링멘토’로 통하는 마가 스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모니 부처님의 첫 설법의 말씀대로 우리는 각자 존귀한 존재이다. 그 존귀한 각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을 안고 육도를 건너야 하는 고단한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 고단한 삶 속에 살고 있다. 그나마 우리에겐 부처님이 일러주신 ‘길’이 있어 ‘지금 이 순간’을 또 맞이한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을 짓는 것으로, 마음 하나하나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 연기(緣起)에 일찍이 눈뜨고 대중의 마음을 살펴온 이가 있다.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린, 아니 이제는 화두라고 할 것도 아닌 ‘힐링’을 일찍이 부처님의 글자로 시작한 사람이다. ‘자비명상’이라는 수행법으로 대중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고, 그 마음에 불법(佛法)을 심고 있는 (사)자비명상 대표 마가 스님이다. 마가 스님은 혜민·법륜 스님 등과 함께 이 시대의 힐링멘토로 꼽힌다.


‘자비명상’의 탄생



2005년 7월1일, 장맛비가 내리는 충남 공주 마곡사에 28명의 대중이 모였다.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픈 이들이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았다. 그들을 맞은 이는 당시 마곡사 포교국장 마가 스님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 마가 스님에게 달렸다.



연화당에 모여 앉은 참가자들에게 마가 스님은 각자의 이름을 새로 지어보라고 했다. ‘물망초’, ‘무념무상’, ‘허공’ 등 참가자들은 새로 지은 이름으로 이름표를 고쳐 달았다. 그 이름 속에는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스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고, 이름 하나로 그들은 새롭게 태어났다.



저녁 예불을 마친 뒤에 스님은 법당에 마주 앉은 참가자들을 두 줄로 눕힌 후 ‘김밥말기’를 제안한다. 적막이 흐른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몸 위를 구르는 것이다. 스님의 재촉에 참가자들은 서로의 몸 위를 구르기 시작한다. ‘상처 없는’ 상처를 안고 온 이들, 서로의 상처 위를 구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가자들의 눈빛은 분명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자 스님은 참가자들을 절 밖으로 내보낸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절 근처를 걷게 했다.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상대방의 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마가 스님의 ‘이심(以心)’은 무엇이고, 길을 걷는 참가자들의 ‘전심(傳心)’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 짤막한 길이 결코 짧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지난날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 1초 1초가 가볍지 않은 일이다. 산책을 끝으로 첫째 날의 일정인 ‘마음 열기’가 마무리됐다.



새벽 3시, 새벽예불이다. 그리고 108배(拜)를 한다. 참가자들은 잠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예불을 올리고, 집전하는 스님의 죽비에 맞춰 절을 시작했다. 누구를 위한 절이며 무엇을 위한 절인가.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1배 또 1배, 문 밖 어둠처럼 1배, 1배는 그저 어둠일 뿐이다. 하지만 잠시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쁜 숨과 숨 사이에 ‘나’가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한다. 상처와 관련된 시간들이 거친 호흡을 타고 들락거린다. 이제 절은 각자의 몫이다. 참회의 시간, 용서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다. 미움, 원망, 그리움, 안타까움 등 번뇌들이 몰려온다.



아침 식사 후 ‘가족 긍정 명상’이 이어진다. 가족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역시 시간이 흐르자 참가자들은 많은 감정들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움과 용서, 원망과 사랑이 교차한다. 마침내 눈물이 터져 나온다. 참가자들은 맨발로 젖은 산길을 걷는다. 상처가 각자의 몫이듯 길은 각자의 것이다. 치유를 향해 걷고 있다.



저녁 공양 후 참가자들은 노래에 맞춰 온갖 몸짓으로 망가진다. 마음껏 망가진 ‘나’를 통해 ‘상처’는 또 한 번 출렁인다. 그 출렁임으로 각자는 어딘가에 가 닿고 있는 듯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후 이제 ‘유서’를 쓰는 시간이다. 20분 후에 죽는다는 가정 아래 참가자들은 유서를 써야 한다. 그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상처’는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던가. 하지만 죽음 앞에서 마주한 그 상처들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유서를 써내려가던 참가자들은 하나 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눈물 속엔 용서와 화해, 믿음과 사랑, 참회와 새로운 서원이 들어있었다. ‘물망초’ ‘무념무상’ ‘허공’ 그들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셋째 날 일정은 ‘다시 일상으로’이다. 지금의 생(生)은 지나온 생의 인과(因果)에서 온 것이며, 다음 생 역시 지금의 인과에서 비롯될 것이다. 어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참가자들은 지난 생을 기억할 수 있고, 지난 생을 기억할 수 있는 덕택에 새로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보게 된 참가자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존재인 ‘나’를 깨닫는다. 각자는 존귀하고, 내가 존귀한 만큼 모두가 존귀함을 깨닫는다. 이제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은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3배를 올린다. 그리고 존경과 자비의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준다. 2005년 마곡사에서 진행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 템플스테이’ 장면들이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출가, 그리고 願力…마곡사 인연으로 ‘자비명상’ 시작


---
마가 스님은 스무 살 때 평창 월정사로 출가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 뿌리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었다. 스님은 일찍부터 아버지와 멀었다. 힘겹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 청년은 삶보다는 죽음 쪽으로 기울었다. 스님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제일 먼 곳이라고 생각한 강원도 오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버렸다. 하지만 청년은 삶을 떠나지 못했다. 약을 먹고 쓰러져 있는 청년을 월정사 노(老)스님이 발견해 살렸다. 청년은 바로 그 자리에서 출가했다.



청년은 월정사를 나와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를 거쳐 서울 도선사에 바랑을 풀었다. 그리고 현성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군복무를 마치고 도선사로 돌아와 계(戒)를 받은 마가 스님은 속리산 복천암을 시작으로 문경 봉암사, 부산 해운정사, 예산 수덕사, 정혜사 등에서 다섯 철을 난다. 하지만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선방생활에 지친 스님은 도반들과 함께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출가한 지 10년째였다. 성지순례는 원만하지 못했다. 서로 뜻이 맞지 않은 도반들은 각자 순례의 길을 나서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마가 스님은 일주일 동안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님은 일주일 동안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나’를 보았다. 그 순간 환해지더라”고 했다. 스님은 다섯 철 안거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공부를 일주일 동안 인도의 게스트하우스 작은 방에서 경험했다. 작은 ‘소식’이었을까. 가슴이 뛰었다. 출가자로서 처음으로 무언가와 만난 스님은 점검과 지도를 위해 스승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국한 스님은 제방의 어른스님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곡성 태안사에서 청화 스님(1924~2003, 이 시대 대표적 수행승)을 만났다. “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



그 순간 스님은 숨이 탁 막혔다. 큰스님의 물음에는 큰 가르침이 들어있었다. 스님은 큰스님의 질문을 받자마자 출가전의 삶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 안에는 다시 ‘아버지’가 있었다. 이름과 옷만 바뀌었지 아직도 지난날을 끝내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고맙습니다. 청화 스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가슴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일주일을 울었다.



스님이 청화 스님 곁에서 머문 지 한 달 반이 지났을 때였다. 스님은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걷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청화 스님은 “이제 자네는 됐네. 그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서 원 없이 보살행을 하게”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마가 스님은 세상에서 대중과 나눌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못난 놈을 부처님이 받아주시고, 많은 시주은혜들이 있어 이 자리까지 왔다. 그 은혜 다 갚지 못하고 간다면 큰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생에 밥값 다하고 가겠다”고 발원했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본인의 삶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아픔과 그 아픔에서 벗어난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은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의 응어리를 푸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사)자비명상 대표 마가 스님





자비명상’의 태동… 중앙대 교양과목으로 채택


2002년 마가 스님은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찾는다. 노모는 불편한 몸으로 머리를 깎고 찾아온 아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밥상을 받은 아들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른다. 스님은 출가하고 난 후 처음으로 ‘주지’에 대한 생각을 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곡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소임 대중이 필요했던 마곡사가 구인(求人)공고를 냈다. 2년 동안 소임을 맡아주면 사찰을 주겠다는 조건도 있었다. 스님은 마곡사로 달려갔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스님이 마곡사 대중이 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일과가 너무 무료했다. 그래서 법공양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마곡사를 찾은 대중에게 법구경(法句經)의 한 구절씩을 적어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자비명상의 시작은 바로 그 법구경에서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법구경 한 구절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마곡사를 찾았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오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은 ‘무리’가 되었고, ‘자리’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처음엔 차(茶)자리를 만들어 함께 했고 새벽예불체험, 범종타종체험 등 작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다. 자비명상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님은 모여드는 사람들을 모아서 템플스테이를 시작했다. 찾아오고 머물다보니 템플스테이가 된 것이다. 스님은 그때부터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대중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이혼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실직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60대를 위한 템플스테이’ 등 마가 스님의 템플스테이는 하루하루 진화했다. 바로 그때였다. 2004년 마가 스님의 이름이 산문(山門) 밖으로 알려지게 됐다. 중앙대학교 관계자가 마가 스님의 템플스테이를 보고 교양 선택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종립대학도 아닌 일반대학에서 3학점짜리 정규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교과제목은 ‘내 마음 바로 보기’이다. 자비명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자비명상으로 하고 싶었지만 학교 측에서 종교적이라는 의견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다. 만약 학교 측에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자비명상의 탄생은 좀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정원 150명의 수강신청이 10분 만에 마감됐다. 지원자가 많아 야간 강좌까지 개설됐다. 정원 150명으로 시작된 강의는 9년 후에 1500명으로 늘어났다. 스님 7명이 투입됐다. 9년 째 강의를 마지막으로 강의는 종료됐다. 그동안 스님의 강의를 들은 학생은 약 2만 명에 달한다.



쉼 없는 프로그램 개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자신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에게 자비심을 확장시켜 이타적이고 평온한 마음에 이르게 한다. 또 명상과 상담의 장점을 살려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개발한 명상법이다. 삶과 어우러지며 소중한 나를 찾아가는 마음치유 명상이다. 마음을 열고, 알고, 나누는 명상으로, 화와 불안을 다스리고 건강하게 터트리는 방법과 자기 안에 깊숙이 내재된 긍정심과 자신을 사랑하는 법,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을 기르는 법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자비명상은 이 순간 선업공덕(善業功德)을 짓고 있는지, 불선업을 짓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역할과 인과법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인과를 모르고 살기 때문에 세상이 복잡해진다. 부처님의 인과법을 안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연기법의 핵심은 계를 잘 지키는 것, 그리고 수행은 지금 이 순간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했다.


마가 스님은 언제부턴가 이 시대의 ‘힐링 멘토’로 불리우고 있다. 2013년부터 매일 아침 인연지인들에게 ‘오늘의 명상’을 발송하고 있고, 2015년부터는 ‘53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선재동자의 명상여행’을 이끌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문화관광부가 인증한 ‘청소년을 위한 EGG 깨뜨림’, 2018년부터는 ‘나를 바꾸는 100일’ 수행 법회를 현성정사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2018년 1월 상처입고 지친 청춘들에게 직접 다가가기 위해 서울 노량진에서 고시와 공무원 시험을 등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쉽터 ‘마음충전소’를 열었다.



취업난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공간이다. 단 하나뿐인 자신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방법, 자신을 아껴주는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베푸는 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그렇게 쉼 없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마가 스님은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마음카드’다. 49장의 그림 카드로 구성된 ‘마음 카드’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중간 역할로서 자신의 내면 통찰에 대한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이다. 더불어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의 조화로운 관계 형성을 위해 지혜를 주는 수단으로 제작되었다. 스님은 그밖에도 다수의 방송프로그램과 저서를 통해 힐링 멘토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 마가 스님의 베스트셀러 저서 『알고보면 괜찮은』
●내 마음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라…참으면 병이 되고, 터트리면 죄가 된다



마가 스님에게 가장 큰 아픔은 가족이었다. 스님의 아버지는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와 바람이 나서 도회지에서 살림을 차렸다. 아들 없이 며느리와 살아야 했던 그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남편에게 버림받아 괴로우면서도 4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스님의 형제들은 우울한 집안 분위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나고 자란 전남 고흥은 동네 초등학교 소풍날이 되면 온 가족이 따라 나섰던 곳이다. 스님은 소풍날,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도시락을 준비해 놓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다. 주워든 소나무 가지를 들고 쭈그려 앉아 땅바닥을 헤집으며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자라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전이됐고, 그는 어린 시절에 아무런 이유 없이 종종 친구들을 때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 도회지에서 교육을 시키고자, 그를 광주광역시에 사는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그의 방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에, 어머니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새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말썽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노란 브리지 머리를 한 누나의 뒤를 쫓아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였다. 마가 스님은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고, 아버지가 이에 반대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겠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승려가 되어서 과거 자신의 모습과 같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힐링 멘토가 되었다. 스님은 포교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자기 내면의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인은 체면을 중시하고 인내하고 사는지라, 무언가를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둔다. 썩고 곪은 것이 한계에 다다라서 아플 때가 되어서야 그 마음을 보게 된다. 토해내야 하는데 제대로 토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이에게 불똥이 튀어 ‘묻지마 범죄’가 생긴다. 참으면 병이 되고, 터트리면 죄가 된다. 이런 모든 것을 알고 나면 사라진다. 대체로 막힌 가슴을 뚫기는커녕, 무엇이 가슴을 막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괴롭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에도 아버지를 증오했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정체 모를 화 때문에 수행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만 잘라냈지 마음속의 화를 자르지 못한 것이다. 가슴을 옥죄는 정체인 ‘아버지’를 인정하고, 토해낸 다음에야 자비로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지금 내가 있고, 내 마음속에는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나를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고 ‘누구는 틀리다, 누구는 맞다’고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제3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명상이다. 내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한편으로는 재미있다. 나는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그 마음이라는 녀석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혼자서 난리가 난다. 그런 내 마음을 한참 바라보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채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예를 들면, 김연아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서면 아나운서가 중계를 한다. “김연아 선수, 노란색 옷을 입고요. 첫 번째 점프를 성공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나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말을 하네”, “화를 내고 있네”, “걷고 있네”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인지,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보인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가 스님의 화법은 여느 스님과 많이 다르다. 어려운 불경의 구절을 인용하지도, 선문답(禪問答)을 하지도 않는다. 머리를 깎지 않고 회색 법복을 두르지 않았다면, 그저 인생살이 선배와의 대화쯤으로 여겼을 터다. 그가 젊은이들의 ‘힐링멘토’가 된 것은 격식 없음이 한몫했을 것 같다. 마가 스님의 ‘마음속 응어리 풀기’를 진심으로 느끼려면 잠시 그의 인생을 엿봐야 한다. 스님은 “내가 겪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람들 마음속의 응어리를 잘 안다”고 했다.



▲ 마가 스님은 불교계의 최고 인기 힐링강사 중 하나다. 사진은 2013년 11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인도 쿠쉬나가르에서 불교성지순례자들을 명상으로 이끄는 마가 스님.





증오했던 아버지 용서하면서 세상이 자비롭게 보여





마가 스님의 명상은 ‘자비명상’이다. 마음의 상흔(傷痕)을 바로 보고, 이를 풀고, 그리고 타인에게 이를 베푸는 명상이다. 그런데 마가 스님은 승려가 된 뒤 10여 년 가까이 내면의 나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아버지를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시켜달라고 명상한 어느 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석양이 물든 경내에서 스님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스님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말을 내뱉고 나니 그간 스님을 억누르고 있던 앙금이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시야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상이 한없이 자비롭게 보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는 선지식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진실로 행복했다. 이는 “큰 스님(청화 스님)이 제게 보내준 따뜻한 자비의 마음 덕분이었다. 산에서 불경만 욀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알려주고 줘버리고 가자는 생각에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고백한다. 마가 스님의 믿음 중 하나는 내 안에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면 그 사랑이 넘쳐 상대에게 흘려간다는 것이다.



마가 스님이 개발한 자비명상은 템플스테이가 태동하기 전인 지난 2002년 공주 마곡사에서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스님이 개발한 자비명상은 청문회, 유서 쓰기, 걷기 명상 등 여러 가지로 행해진다. 청문회는 일종의 역할극인데, 참가자들이 서로 궁금한 것들을 묻고 답하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요소들과 화해를 한다. 참가자들에게 유서를 쓰게 하는 이유는 죽음이 바로 자기 곁에 있다는 사실, 또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걷기 명상은 맨발로 하는데,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 깨어있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스님은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팔짱을 끼고 사찰을 내려가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볼 때 가슴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이 우리 사회에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중앙대에서 ‘내 마음 바로 보기’ 강의를 요청했다. 지난 2003년 첫해에 150여 명이었던 수강생이 지난 2011년에는 1500명까지 늘어 스님 다섯 명이 수업을 나눠서 진행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수업 중에 강조한 것은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생은 예비 직장인이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청정한 자아(自我)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임제 스님의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했다.



●명상을 통해 흩어진 마음 다잡아야



그러면 구체적으로 명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은 명상하는 자세 등에 관해 자세히 알려준다. 먼저 힘을 빼고 목과 어깨, 팔다리를 가볍게 흔들어준다. 온몸의 힘을 빼고 자리에 앉아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편다. 편하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쉰다. 두 번째 숨을 쉴 때에는 눈을 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느껴본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애들이 떠들면 칠판을 두드리면서 ‘주목~’이라고 말하지 않나. 그렇게 내 마음에 ‘주목~’을 외쳐보라. 숨을 마시고 내쉴 때마다 외국에 가고, 100년 후의 미래로 향하던 마음을 붙잡아보라. 돌아다니는 그 다심(多心)을 일심(一心)으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요체다. 그렇게 명상을 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라. 아나운서가 경기를 중계하듯이, 이 순간 내가 깨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를 보는 것이고, 생각의 노예에서 나를 벗어나게 한다. 명상을 통해 내재돼 있는 DNA가 드러난다. 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내 안의 응어리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밥을 먹는 순간 밥을 먹음에 깨어 있고, 공부하는 순간 공부하는 것에 깨어 있으면 삶이 달라진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참된 나임을 느낄 수 있다. 명상을 통해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봤다면, 이제는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정말 내 인생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도 마가 스님은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한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불교에서는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중시한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 말, 생각이 과연 행복을 추구하는 목표와 맞닿아 있는가를 살펴보라. 행복한 결과를 원한다면, 그 결과만 추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의 근간이 되는 행동과 말, 생각을 바꾸고 이를 따를 때 결과가 바뀐다”고 말했다.



부처님 말씀에 과거에 뿌린 씨앗은 현재의 나이고, 오늘 내가 뿌린 씨앗은 미래의 열매가 된다고 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바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막연히 미래에 행복하고 싶다는 것은 안 된다. 그래서 스님은 “불교는 삼업을 닦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저도 그것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편해졌다”고 했다.



●종교 때문에 힘들다면 그 종교를 내려놓아야



마가 스님의 법명은 다소 생소하다.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미얀마 선원에서 받은 산스크리트어 법명 마가(Magga)는 ‘걸림 없이 길을 가는 자’라는 뜻이다. 거침없는 그의 성격과 꼭 닮았다. 스님은 “이름을 말하면 기독교 신자들이 ‘마가복음’이 연상된다며 좋아한다”고 했다. 불가와 인연을 맺기 전에는 기독교 목회자를 꿈꾸었다고 하니, 그는 종교인으로 살 운명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를 다녔다.



스님은 요즘도 교회에서 배웠던 노래를 법회에 응용하고 있다. 교회에 음악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불교도 하루 빨리 기독교의 음악을 벤치마킹해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노래를 같이 부르고, 손뼉을 치는 과정에서 속에 맺힌 응어리가 많이 풀어진다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공생(共生)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는 종교 때문에 갈등하거나, 힘든 이들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스님은 “어떤 사람이 여행 중 힘든 상황에서 큰 강을 만났다. 그 강을 혼자 건너려고 하는데 마침 뗏목이 보인다. 그 뗏목에 의지해 무사히 강을 건넜다. 지혜로운 사람은 뗏목을 강가에 내려놓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갈 길을 간다. 그러나 우매한 사람은 뗏목이 정말 고마웠기 때문에 지고 간다. 어깨에 지고 가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은 잊게 된다. 종교는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한다. 종교를 가져서 힘들다면 종교를 갖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종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믿는다. 종교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마가 스님의 말에 따르면 종교에 심취한 광신도들을 보면 그중 90%는 자기 안의 갈등, 집안에 불만스러운 경우가 많다. 본인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종교를 통해서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불만스런 자신의 처지에서 탈출하고자 종교에 몰입하고, 그걸 통해서 힐링을 하려고 한다. 그래선 안된다. 이런 걸 보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꼭 맞는 말이다. 그릇된 인간 행동의 원인을 찾아가면 거기엔 온전치 못한 가정이 있다. 부자로 살고 싶으면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 그래서 스님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원만히 하고 싶으면 어머니와의 관계를 풀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배우자와의 관계를 먼저 풀어라. 상처를 마음속에 단단히 가두면 응어리를 풀 수가 없다. 제가 광신도 얘기를 언급했으니 본인이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화가 치밀 것이다. 제게 따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꼭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제게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화가 나는 본질이 무엇인지 쳐다보라”고 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진리다



마가 스님은 가족 간의 관계, 특히 아버지와의 오랜 불화로 극단적 선택까지 했다. 하지만 그걸 승화해서 이제 불제자로서 중생 구제에 힘쓰면서 상처 난 많은 사람들의 힐링멘토가 됐다. 그는 결국 가족 간의 화목. 즉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야말로 진리라고 역설한다.



스님은 이런 비유도 했다. 개 중에도 간이 작은 치와와는 바람만 불어도 짖는다. 그러나 불도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정 불안하면 물어버리면 되니까. 내면의 힘은 그런 것이다. 껍질이 두꺼운 나무일수록 속살이 부드럽다. 적의 침투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껍질로 에워싼 것이다. 어떤 일에서 떠드는 사람은 실제로 약하기 때문에 강한 척하는 것이다. 혹시 주변에서 권위주의에 뒤덮여서, 무작정 자기 목소리 내기에 열을 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하라. ‘저 사람 안에 부드러운 내면이 있을 것이다’라고. 그러면 그 사람과 소통이 될 것이다. 항상 현재 내 주변의 관계를 먼저 편하게 풀도록 하라. 증오로 30여 년을 살았던 스님이 홀가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의 관계를 풀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면 가족 간에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가 스님은 아버지와 화해하는 과정에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가 크고 깊음을 설명하는 불교경전)의 구절을 가슴 깊이 담았다.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메고 히말라야를 백 번, 천 번 돌아 살갗이 터지고 뼈가 부서진다 할지라도 부모의 은혜에는 미칠 수 없다’는 구절이다. 결국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스님 자신이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집중하지 말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가까운, 내 가족과의 관계를 제대로 바로 세우는 것이다. 『숫타니파타』(불교의 경전집)는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고 했다. 마가 스님은 “제 어머니는 ‘스님’이라고 저를 부르면서도 마치 초등학생 아기를 보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세상에 자비를 베풀면 된다. 결국 어머니는 부처님”라고 말했다.



그러면 마가 스님은 정말 화가 안 나고 행복할까. 그는 “한없이 행복하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매일 매일이 보너스”라고 강조했다.



▲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매일 매일이 보너스라고 말하는 마가 스님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마가 스님 마가 스님은 기독교계 신학대학인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를 공부했다. 길희성(吉熙星) 서강대 명예교수와 얘기를 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결정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길 교수는 평생 대학 강단에서 불교를 가르쳤다.



어느 날 문득 길희성 교수가 “목사들은 불교 공부를 많이 하는데 왜 스님들은 기독교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서양 2000년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가 아닌가. ‘왜 스님들이 동양에만 심취해 있어야 하나’ 싶어서 신학교 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에게 쉽사리 문을 열어주는 신학대는 없었다. 세례 교인에 한해 신학과에 입학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다. 결국 스님은 문턱이 없는 한신대 종교문화과에서 공부했다. 마가 스님은 “신학 공부하기를 참 잘한 것 같다. 내 말년을 아름답게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고 말했다.



스님은 오래전부터 친교를 맺어온 최일도 목사, 김영택 신부 등 이웃 종교 성직자들과 만나 함께 교도소와 고아원 등 불우시설을 방문하는 일도 이어오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이들과 함께 KTV에 출연해 ‘멘토링 토크쇼 시대공감 Q’를 진행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서로 틀리다고 하면 싸움밖에 일어날 것이 없고, 다른 점을 인정하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힐링 멘토도 아프다



‘국민 힐링멘토’로 불리는 마가 스님이지만 스님 역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스님도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부처님 전에 무릎 꿇고 앉는다. 그리고 “부처님,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묻는다고 한다. 스님은 “그렇게 묻는 것이 저의 위로이다. 출가자로서의 힐링은 그것뿐이다. 부처님께 묻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마가 스님의 힐링멘토는 부처님이다. 결국 부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가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이미 부처님이 주신 것들이다. 종교가 양적인 팽창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수행이 철저해야 다른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진리”라고 말했다.



스님은 자기 수행을 ‘너무나 쉬운 진리’라고 강조했다. 일주일 동안 눈물을 쏟아내고 난 후 가슴 속의 모든 것을 비워낸 힘겨운 시간이 있었기에 마가 스님은 대중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점점 마음을 쓸 수 없는 세상이다. 함께 사는 길이 내가 사는 길이다.



마가 스님이 전하는 화를 풀어주는 1분 명상법



1. 명상에 들어가기 전 2~3분 동안 선 자세로 힘을 빼고 목과 어깨, 팔다리를 가볍게 흔들어준다.

2. 온몸의 힘을 빼고 자리에 앉는다. 허리를 곧게 펴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로 바닥에 앉거나, 등받이에서 등을 살짝 떼고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는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3.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낀다. 숨이 쉬어지는 대로 가만 두고서 그저 느끼기만 한다.

4. 마음이 방황하더라도 자기를 비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숨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돌린다.

5. 가슴 한가운데에 마음을 둔다. 마침내 마음이 조용한 연못처럼 고요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초조해하지 말고 숨에 조용히 마음을 모은다.

6. 1분이 지나면 눈을 뜨고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틈틈이 혹은 삶의 문턱을 만났을 때 이렇게 1분을 보낸다. 이 1분이 흔들리는 삶을 잡아주는 닻이 되어줄 것이다.



마가 스님은

196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광주 금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석사를 마쳤고, 중앙승가대학교 실천승가학 박사과정도 마쳤다. 1981년 월정사에서 출가했으며, 1982년 현성 스님을 은사로 도선사에서 정진했다. 법주사 복천암 등에서 5안거를 성만했다.

2002~2005년 마곡사 포교국장 재임 시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를 개발·운영했으며, 이를 현대자동차, 삼성, 우미건설, 신한은행 등에서도 진행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중앙대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2013~2015 동국대 정각원 교법사를 지냈다. BBS불교라디오 ‘마가 스님과 함께하는 자비명상’을 비롯한 다수의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알고 보면 괜찮은』, 『내 마음 바로보기』, 『내 안에서 찾는 붓다』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2020/10/01

Chang-Seong Hong 선禪의 합리적 이해

(1) Facebook



Chang-Seong Hong  1

f0th SrSmeoppdtodrnhrehmsltSsobreoerft 2dr018 



아직 시일이 많이 남았지만 월간불광 11월호에 낼 에세이 초고를 미리 완성했다. 올 12월까지만 이 연재를 계속하고, 미국대학의 2주 남짓한 짧은 겨울방학을 이용해 추가로 12회 분량을 더 써서 모두 24개의 짧은 에세이들을 모아 작은 책자로 만들까 생각중이다. 그러나 그 전에 두 챕터도 채 남겨놓지 않은 내 Buddhism for Thinkers를 완성하려 한다.



밑의 글은 2016년 초 깨달음 논쟁 당시 내가 사용했던 논리를 좀 더 업그레이드시킨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한국불교계가 어떤 곳인지 전혀 숙맥이었던 나는 내 글들에 쏟아진 최소 수백 개의 격렬한 악플들에 어리둥절했었다, 요즘은 알 것 좀 꽤 알아서 피식거릴 때가 더 많지만. 어쨌든 페북에는 욕설이나 저주 조롱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좋다.

밑의 글은 비교적 짧고 읽기도 쉽다. 철학자연하며 난해하게 쓰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사진은 2016년 초 깨달음 논쟁 당시 주역이었던 수불스님과 현응스님이다.

+++++++++++++++++++

불교철학강의실 357호 11

<선禪의 합리적 이해>



선禪은 합리적合理的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분들이 많다. 문자로는 서지 못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禪에는 합리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이유다. 선禪이 처음부터 이해理解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을 통한 이룸 또는 체험의 과정이라고 보는 분들께 ‘선禪의 합리적 이해’라는 이 글의 제목부터 앞뒤가 안 맞는다. 이러한 선禪의 전통을 고려하면 강의실에서 한정된 수업시간 동안 합리적인 미국대학생들에게 강의와 토론을 통해 선禪의 정신을 이해시켜 전수하는 일은 분명 불가능하다. 이번 호에서는 내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은 어떻게 시도해 왔는가를 소개한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입만 벙긋하면 그르친다’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은 우리가 입을 열어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진리를 왜곡한다는 말이다. (주석: 이 문장은 진리는 말로 표현해서는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신비한 체험을 통해 깨쳐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밑에서 이와 관련된 논의를 계속하겠다.) 선가禪家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념즉괴動念卽乖라며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어그러진다’는 구절도 있다. 도불가설道不可說 즉 ‘도道는 말할 수 없다’와 같이 도교道敎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런 문장들로 선가에서는 도道 또는 진리에 대한 언어 및 개념적 접근을 금기시한다. 선가에서 말하는 도道가 힌두교의 브라만과 닮아 조심스럽지만, 진리에 대한 개념적 접근이 무용無用하다는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한국식 선문답禪問答을 소개하며 미국학생들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통을 소개한다.



학인學人: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禪師: “개똥이다!”



마치 부처가 개똥이라는 듯한 선사의 엉뚱한 답변에 학생들은 그 큰 눈들을 더 크게 뜬다. 그러면서 부처가 왜 개똥인지 끙끙거린다. 개똥화두話頭를 든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똥은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쇠똥(bullshit)으로 헛소리 또는 넌센스라는 뜻으로 쓰였다. 점잖게 답하려면 “무無!”라고 외쳐도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넌센스라는 말인가?

 화두를 물고 참선해서 깨치라는 소리는 미국대학 강의실에서는 유효 기간이 몇 분도 안 된다. 첨단과학문명시대를 살며 실용주의가 상식인 대학생들에게 신비주의가 통할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선문禪門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서 그 정신을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다음과 같이 강의한다.

연기緣起

 부처는 삶에 대해서 무아無我를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연기緣起를 깨달아 성도成道했다. 연기란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부처의 통찰이다. 아무 것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어서 독립적 존재가 불가능하니 스스로의 본질 즉 자성自性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공空하다. 연기의 진리를 개개인에 적용하면 무아의 진리도 쉽게 보인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어서 개인의 본체 또는 본질 즉 아뜨만도 없기 때문이다.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모습이 존재세계의 실제 모습이다. 남전불교에서는 연기를 단지 인과因果관계만으로 보지만 선禪이 소속한 대승에서는 연기를 비인과적 관계로도 확대해 이해한다. 정보통신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상식인데, 화엄華嚴에서는 예로부터 삼라만상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왔다. 시베리아 순록 한 마리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으면 미국에 있는 나는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이 순록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예를 들어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관계를 잃게 된다. 다른 은하계 어느 행성 산기슭에서 돌 하나가 굴러도 내가 그것과 연결된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선禪은 이와 같이 세상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조건으로 연기한다는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선호한다.

 그런데 이런 연기실상緣起實相 즉 연기하는 세상의 실제 모습을 언어로 직접 기술記述할 방법은 없다. 어떤 말이나 개념도 차별(差別 differentiation)을 야기하고 이 분별은 아무 걸림 없이 연기緣起하는 세상의 모습을 왜곡해 진리로부터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사슴”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사슴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거나 말을 하는 순간 우리는 두 오류를 범한다. (1) 마치 사슴이라고 불리는 짐승들이 공통으로 고유한 본질 즉 자성自性을 갖고 있다고 보게 하며, 또 (2) 이 세상을 사슴들과 사슴 아닌 것들로 양분하며 분별해버려(differentiate) 우리로 하여금 이 두 집단이 연기로 중중무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만다.

 어떤 말이나 개념도 걸림 없이 유연하게 연기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차별하고 단절시켜서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부터 차단한다. 불교에서는 진정으로 개구즉착開口卽錯과 동념즉괴動念卽乖가 옳다. 이것이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도道나 브라만 또는 아뜨만에 대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걸림 없이 연기하는 세계의 멋진 모습을 불완전한 도구인 말이나 개념으로 왜곡해 보아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옳다. 연기실상에 대해 우리는 기껏해야 “그러그러(如如)하다”는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제 위에서 소개한 선문답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자. 불가에서는 “부처”가 종종 진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학인의 질문은 연기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의 참모습 즉 진리를 언어로 답하라는 요구가 된다. 그래서 선사가 “넌센스!”라고 한 것이다. 선禪의 기원이라는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된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석가모니는 말로 답하지 않고 단지 꽃을 들어 보였고, 가섭이 그 의미를 이해하고 미소 지었다는 설화이다. 이때 석가모니는 “차나 한잔 들게,” “하늘빛이 좋네,” 또는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이 답할 수도 있었다. 질문이 넌센스인 경우에는 엉뚱한 소리로 반응해 주는 것이 재치 있기 때문이다.

 미국학생들은 내 설명에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 관련 글을 읽은 동료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합리적 이해방식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위의 선문답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깨달음을 위해 중요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내 생각이다.



체험을 통해 이루는 깨침으로서의 선禪이 가진 문제



 선禪의 합리적 이해에 대한 비판은 천여 년 이상 계속되어 왔으니, 이제는 선禪에 대한 체험적 접근에 대해서도 비판적 작업을 수행해야 균형이 좀 잡히겠다. 선종사에서는 후기로 올수록 언어를 통한 알음알이로는 결코 깨칠 수 없다는 주장이 강해져 왔다. 참선으로 신비한 체험을 거쳐야만 깨치게 된다며 체험 내지 체득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었다. 깨침은 마치 단맛이나 짠맛의 경험과 같아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직접 맛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선禪에 대한 이런 체험적 접근법은 논리적으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내 미국학생들에게 다음의 딜레마를 제시하며 한번 선禪의 입장에서 이 딜레마를 깨보라고 권유한다.



(1)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짠맛의 경험과 같은 것이 깨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깨침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이 되어 공空에 어긋난다.

(2) 이 짠맛과 같은 체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이 모든 다른 맛을 동일한 깨침의 기준으로 삼는 근거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즉 어떤 기준이나 근거 없이 이 다양한 체험을 모두 깨달음이라고 보아줄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답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한편 만약 그런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 (1)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성을 가진다는 셈이 되어 공에 어긋난다.

그래서 이런 체험에 공통점이 있으면 공에 어긋나서 안 되고, 없으면 이것이 깨달음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겨 딜레마에 빠진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특정한 경험, 체험, 또는 체득을 통해 얻은 깨침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직 이 딜레마를 해결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 다른 문제는 선문禪門에서 종종 이렇게 깨침을 완성하는 신비한 경험이 실체로서의 아뜨만이나 그와 유사한 불성佛性과 하나가 되는 체험으로 여겨왔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실체론적 경향이 강한 도교의 영향아래 성장한 선禪에서 이런 신비한 실체와 합일合一되는 경험을 깨침이라고 보곤 했는데, 실체론을 거부하는 불교에서 이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들이 참선이나 염불하다가 자못 묘한 기분이 들면 그것이 깨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omments

이재형

아주 명료하군요. 선적 체험을 강조하거나 인정하시는 분들 중에서 저 딜레마를 깨실 분이 과연 계실까 싶네요.

 · 2 y

Junho Jang

ㅎㅎㅎ 미소가 떠오르는 좋은 글.

 · 2 y

김근중

공의 교리에 대한 글이 다소 난해합니다.

짠 맛이라는 (육근의 혀와 대상인 육경의 맛이 묶여서 조건화된) 일체법에서 "나이다."라는 '색'을 닦아서 결박을 내려놓는 것이 곧 "공"이라고하는 "무아"이며

무아를 먼저 설명하지않으시면,

선생님 글은 격의 불교 늪.공사상.에서 매일반 입니다.()

 · 2 y · Edited

강석두

사람의 정신활동의 90프로 이상이 무의식의 활동이라고 합니다. 말과 자전거 배우기를 어떻게 배웠냐고 물으면, 어떻게 말하고 타느냐고 하면, 설명할 길이 없읍니다. (사랑도 그렇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고도, 잘하는 사랑을

말로 하는 순간 사랑은 휘발성 액체처럼 증발해 날라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의식적인 설명은 내면에 일어난 일을 잘못 설명하기도 합니다. 선을 통해서 일어나는 내적 변용에도 이런 면이 있을 수 있읍니다.

말을 하는 순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깊은 풍미와 미묘한 풍미를 잃어버릴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진짜로 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표정 손짓 몸짓 행동 삶이 다 말입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참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짧은 윗글에서 쓰지는 않았지만 깨달음 논쟁 당시 발표한 글에서 '이언견언(以言遣言)'을 언급하며 말이 실제 모습을 왜곡시킨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이유는 말로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필요없다는 이유도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예, 그렇다고 진짜로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실생활을 위해서는 말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2 y

Junho Jang

오늘의 한 말씀.

 · 2 y

Sun Kyeong Yu

주관적인 체험(What It Is Like)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주관적인 체험이 깨달음이라는 주장은 딜레마에 빠지며, 부처님의 연기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 2 y

Bruce W. Park

話頭를 선문답으로만 이해하여 話는 선사와 제자의 대화를 말하고 頭는 어조사로 의미를 두지않고 해석하곤 한다. 대개의 불교사전이나 심지어 불교학계에서 쓰는 불교전문사전도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화두의 頭는 머리두로서 앞선 자리, 으뜸자리, 우두머리, 맨 앞이라는 뜻도 있지만 끝 가장자리, 모서리, 뾰족한 부분의 뜻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부분을 의미한다. 혀끝을 설두라고 말하고, 생각의 끝을 염두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頭라는 한자는 머리라는 의미와 꼬리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한마디로 끝부분 또는 끄트머리라는 의미가 화두라는 단어에서는 적합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화두에는 대개 3가지 정도로 분류하는데 그 중 첫번째가 바로 화두라는 말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달마조사께서 동토 중국에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스승은 "뜰 앞의 전나무"라고 답한다. 여기서 대화의 머리는 제자의 질문이고 대화의 끄트머리는 스승의 답변이다. 무엇이 화두인가? 물론 대화의 끄트머리인 '뜰 앞의 전나무'다. 그래서 나는 화두를 대화의 끄트머리라고 해석한다. 그 대화는 상식을 기반한 대화가 아닌 깨침을 전제로 한 대화였다. 대화의 의미가 소통인데 제자가 스승의 뜻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실패한 소통이 된다.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거다. 제자는 이때부터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강렬한 의심이 요구된다. 그런데 제자는 자문자답하는 내면의 대화를 하면 안된다. 단순히 '무'하고 의정만을 일으켜야 한다. 무자에 대한 의정, 즉 집중된 마음 (선정)이 오롯해지면 반야와 동등해지는 때에 이르러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즉 스승의 마음을 간파하여 스승의 마음과 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승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 화두타파이다. 이것을 혜능선사는 선정과 지혜가 동등한 경지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조주선사가 답한 '무'가 대화의 끝으로 화두이다. 이 무에 대한 의심은 제자에게 마음속 대화의 머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이 던진 무를 들 때마다 생각이전의 마음에 집중하여 의심을 깨뜨리려 한다. 어째서 조주선사는 '무'라고 했는가하고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간파한다면서 자문자답하며 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화두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화두를 던진 순간에 있었던 스승의 마음을 간파해야 한다. 대화는 이미 끝났다. 자문자답은 무기에 빠지는 길이고 의정을 크고 뜨겁게 하는 것은 스승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 길이 된다.

 · 2 y

이경순

개념을 짓는 언어는 속성을 전제하고 분별을 토대로 하기에 왜곡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통함으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생에게 있어서 이보다 값진 선물이 있겠습니까.

약간의 한계가 있다고 이 훌륭한 인간의 발명품을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언어도단 불립문자 염화미소의 선불교가 결국 신비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언어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지 않고 그냥 놓아버렸기 때문 아닐까요.

여여한 세상을 개체의 정념과 주관으로 왜곡했다 해서 그림과 시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왜곡된 인식작용 또한 지금 여기의 연기 속에서 이뤄진 최선의 결과일 것입니다.^^

 · 2 y

Bruce W. Park

언어를 경시하고 또한 버리기까지한 선문답은 언어무용론에 이르러 지식사회와의 고리를 잃고 맙니다. 본래 지식에서 비롯된 병통을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간화선이 등장했는데 당시에는 성공적이엇습니다. 지식병을 치유한 환자는 과연 건강한 지식인가하는 점입니다. 어떤 지식이 문제엿는가가 아니라 지식자체를 질병의 원인으로 잘못본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지식병자를 치료하시위해 지식을 제거하는 우를 범해 무지한 자가 되었습니다.

 · 2 y

이경순

Bruce W. Park 병을 잡겠다고 사람을 잡은 꼴이군요. 쉬운 비유 감사합니다.^^

 · 2 y

Bruce W. Park

제 한글이 어물하고 뜻은 제대로 전달되어 다행입니다.

 · 2 y

김태균

<<딜레마 풀기>>

ㅡ우연히 왔다. 좋은글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종종 인용하겠습니다. 딜레마 문제가 흥미로워 불쑥 서툴게 맥락없이 적어봅니다.

ㅇ붓다는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하는 군요.

ㅡ“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초전법륜경)

ㅇ붓다의 첫 다섯 제자의 깨달음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군요.

ㅡ“부처님께서 이와같이 인내와 자비로서 그들에게 최초의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시어 최초로 곤다냐가 법안을 갖추고 수다원과를 증득하며, 차례로 네 수행도도 모두 법안을 갖춘 다음 마지막으로 무아의 특성이라 하는 안앋따나락카나경의 설법을 듣고 다섯 수행인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는 오직 여섯 아라한들이 존재한다.’ 라고 선언하시어 부처님과 다섯 수행인의 깨달음이 조금도 틀림없음을 증명하시고 선포하신 것이다.”(거해스님 저작에서)

ㅇ여기서 ‘깨달음’, ‘어떤 기준과 근거’, ‘공통적으로 존재’의 개념이 다 들어와 있네요. 초전법륜경의 일부 내용을 딜레마없이 설명한다면, 샘이 낸 문제는 풀릴 듯 하군요.

ㅡ문제의 핵심은 깨달음이 1)여러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경험이라면 자성을 갖는 무엇이 되고, 2)여러 사람들에게 각각의 경험이라면 어떤 기준과 근거도 없는 어떤 것이 된다.

ㅇ일단, 이 딜레마와 연관성있는 불성/여래장 등에 대한 해법은 이미 교수님께서 푼 바 있군요. 요약한다면..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이해하기. 같은 방법으로 해보면서 초점을 맞추어가지요.

ㅡ‘깨달음’을 ‘아라한도과를 증득할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 과정으로 이해하기’를 상정할 수 있어요. 이렇게 해결된다면요.

ㅡ불성은 깨달을수 있는 가능성이고, 깨달음은 아라한도과에 이르는 가능성이고, 아라한도과의 증득은 붓다의깨침에 이르는 가능성이고..(순서의 의미는 없음. 최고의 깨달음만 주목)

ㅡㅡ문제는 깨달음이든 그 어떤 것이든 ‘최종적으로는’ 공통적인 경험과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성 혹은 본성을 상정하거나 절대적인 기준과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지요.

ㅡㅡ왜냐하면, 불성과 여래장에 대한 2차 지시어적인 해석은 최상위로 붓다의 ‘깨달음’을 상정하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ㅡ이는 결국 신에 대한 논증 혹은 비판과 같은 괘를 같이 하는 바여서, 이 딜레마의 해법의 초점은 다른데 있음을 발견해요.

ㅡㅡ반대로 살펴봐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실재를 피하려 한다면, 데이비슨의 사건이란 개별자도 나아가 붓다의 오온덩어리(색 포함)도 상정하기 어렵네요. 순수한 의미의 유명론 밖에는 가능해보이지 않지요.

ㅇ제가 아는 해법은 이래요. 이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법칙과 루만의 체계이론에 기초한 것이지요. 핵심적 키워드는 재진입(re-entry)과 자기준거(타자준거 포함)입니다.

ㅡ붓다가 최초로 경험한 깨달음은 나중에 그걸 아라한도과라 말하든 해탈이라 말하든, 어떤 본성이나 자성일 수 없고, 붓다의 체험이자 붓다가 선언한 어떤 것이네요.

ㅡ그 깨달음의 기준이나 근거는 붓다 스스로의 성찰(자기준거)로 이루어 졌지만, 그때까지 전해오는 전통과 유사 수행 경험과의 구별과 그 차이를 인식하면서 분명해 졌네요.(타자준거를 통해)

ㅡ그후, 그 깨달음의 경험은 붓다의 설법과 수행지도에 의해 인도된 다섯 수행자와 공유되었는데, 이들의 체험은 모두 붓다에 의해 아라한(도과)의 증명되고 선포되었습니다.

ㅡ깨달음은 붓다와 다섯 수행자가 공유한 경험이지만, 어떤 고정적인 기준과 근거를 전제할 이유는 없어요.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기초로 다섯 수행자의 경험을 인지하여, 이를 자신의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증명하고 선포한 것이니까요.(소통을 통한 개념의 공유과정)

ㅡ나아가, 다섯 수행자들 역시 다른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수행을 가르치며 다른 불자들의 깨달음을 도왔고, 그들 중 일부가 깨달음에 이르렀겠지요. 아마 그러한 전승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차이!)가 포함되어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대한 것이 이어져 내려왔지요.

ㅡ결국 붓다의 다섯 제자는 자신의 경험(자기준거)을 붓다가 자기준거에 의해 깨달음으로 증명하고 선포한 것에 기초해(타자준거) 그 차이를 인식합니다. 이를 통해 다섯 제자들은 붓다처럼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그들의 제자들의 경험과의 차이를 인식하여, 경우에 따라 아라한 증득을 증명하고 선포하여 이어지지요.

ㅡ즉 붓다의깨달음과 자신의깨달음의 차이를 인식한 붓다의제자들은 붓다의제자의제자들의 깨달음을 자신의 깨달음과의 차이를 통해 그 깨달음 여부를 증명하고 선포해 가는 것이지요.

ㅡ깨달음은 요체는 고정된 것도 공통된 것도 아닌 셈이네요.

ㅇ세가지의 질문이 요약되었다.

ㅡ붓다의 제자의 제자의 깨달음의 증명과 선포가 붓다의 제자에 의해 행해졌는데, 깨달음은 공통적인 존재로서 자성을 갖는 것 아닌가?

ㅡ붓다의 제자의 제자의 깨달음의 증명과 선포가 붓다의 제자에 의해 행해졌는데, 고정된 어떤 기준과 근거에 의한 것 아닌가?

ㅡ깨달음이 공통적인 어떤 것이라면 자성을 갖는 것이고, 어떤 기준과 근거가 있다해도 그것 역시 의심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는 어떤가?

ㅇ(1) 깨달음은 공통적인 존재나 자성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다. 2차 지시어처럼 혹은 의자처럼 깨달음은 공유된 어떤 개념과 체험이다.

ㅇ(2) 깨달음의 증명과 선포는 고정적인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 깨달음의 기준과 근거는 붓다의 깨달음, 깨달음의 전승을 통해 (타자준거적) 자기준거적으로 성찰된 어떤 것이다.

ㅇ(3) 깨달음은 어떤 전승되어 전해지는 공유된 경험과 체화된 혹은 발현된 어떤 것이므로(보통은 삼법인), 자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기준과 근거와 전승자 혹은 전승에 입각한 개념으로 고정된 어떤 것은 아니다.

ㅇ잘 알지 못해서, 충분히 이해되도록 적었는지 의문이 들어요.

ㅡ좀더 정확한 관점과 논리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의 법칙(G SPENCER BROWN, Law of form)이나 루만의 사회적 체계들(Niklas Luhmann)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 1 y

Chang-Seong Hong

김태균 새벽에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다가 훌륭한 댓글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탑승이어서 일단 간단히 답합니다. 2차지시어는, 아무리 유명론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그 적용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비한 체험'을 모두 같은 지시어의 지시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기준을 제시할 방법이 있을까요? 깨달음이 ' 이해의 문제'라면 가능하겠지만, '신비한 경험'의 문제라면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최소한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스펜서, 브라운이나 루만은 제게는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 1 y

김태균

Yumaa Hill ㅇ깨달음의 체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정도지, 그 경험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바가 희귀하거나 중구난방은 아니지요. 물론 그걸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몫입니다.

ㅇ기준은 전해내려오며 모아져 있는데, 공개된 일부분 외에는 전승에 따르지요. 그것 역시 각자의 몫이지요.

ㅇ유명론의 명 역시 개념 공유에 있어 비슷하지 않나요? 짠맛에도 기준이 있고 공유하는 체험도 있으며 말로도 어느 정도 표현되지요.

ㅇ타자의 경험을 어떤 준거로서 받아들이는 예는 수없이 많을 겁니다. 우리의 일상 모든 소통과 의식이 그러한 타자준거와 자기준거로 이루어져 가있니까요.

ㅇ스펜서-브라운은 러셀에게 배웠고 그의 책 서문을 러셀이 쓴 바 있지요. 영국 수학자라 하면 되겠어요.

ㅡ니클라스 루만은 독일 사회학자이지요. 그의 체계이론은 사회과학은 물론 심리학, 인지생물학을 포괄할 정도의 골격을 가지고 있네요.

고타마의 연기와 스브의 형식의법칙과 루만의 체계이론은 상당부분 통한다 여기고 있네요.

루만은 검색해 보면 아시겠지만, 널리 펼쳐져 있고, 스펜서-브라운의 저작은 관심을 표시하시면 보내드리지요.

아니면 페북에 개설되어 있는 루만방에 놀러와 보시지요.

ㅇ제가 보기에 그 딜레마는 어느정도 해법 방향은 제시된 듯 합니다만, 어떠 신지요?

ㅡ답글 고맙습니다.

 · 1 y

김근중

김태균 네.. 그렇지요.

초전법륜경에서의 쾌락과 고통이라는 양극단 마저도 개념적인 표상이기에 따라가지말고 여의라고 하시거늘,

범부는 표상적인 개념의 언어 유희로서 희론한답니다. 철학의 이름으로 붓다의 각성을 가늠한다는 모순을 하고들있지요!

불교는 "와서보라!" 고 하신 자등명 법등명을 놓치면 그 카드라고 말하는 관념적인 종교가 됩니다

 · 1 y · Edited

Chang-Seong Hong

김태균 환승 비행편에 올라 시간이 좀 있어 몇 자 더합니다. 말로 표현이 안되지만 공통된 무엇과 기준이 있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공에 어긋난다고 제가 윗글에서 논의한 것입니다. 한편 유명론의 명은 그냥 이름, 소리, 그림자 정도로 처음부터 실체가 없음을 말하고있으니 공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의사소통을 위해 쓰는 허깨비 수단일 뿐 자성도 실체도 없다는 의미에서 쓰고 있을 뿐입니다. 언급하신 수학자들과 사회학자의 견해는 김선생님께서 쉽고 짧게 정리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보내주십시오.

 · 1 y

김태균

Yumaa Hill 그 딜레마가 러셀이 씨름했던 역설과 달라 보이지 않아 몇가지 말씀드렸는데, 그게 파훼되는게 홍선생님에게 좋은일이 아닌지요?

 · 1 y

Chang-Seong Hong

김태균 그 딜레마가 깨지면 깨지는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깨지지 않을 뿐, 그것에 제게 좋거나 나쁠 것은 없겠습니다. 바닷물이 짜면 짜고 달면 달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러셀의 역설은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모순을 포함하는 개념을 다루면서 생기는 것이지만, 제가 말하는 체험으로서의 깨침이 내포하는 (역설이 아니라) 딜레마는 그 자체로는 논리적 모순이 없지만 불교의 중요한 원리인 공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객관적 기준의 부재라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가 아니라 다른 원리들과 상충합니다. 그래서 둘은 각각 다른 경우에 해당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선양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해석뿐 아니라 재정립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코멘트와 질문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 1 y

김태균

Yumaa Hill ㅇ그렇군요 ㅡ 그럼 본격적으로 함께 풀어보시지요 ㅡ

기존 지식은 보잘것 없지만, 풀고자 하는 마음은 적다 않으니 ㅡ

ㅇ딜레마의 차이를 그리 볼 수 있겠어요 ㅡ

ㅡ다만, 제가 다르지 않다 본 이유는, 언어나 논리적 사고의 모순일 뿐이고, 사람이 사는 현실은 역설을 포용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 주요한 해법이지요.

ㅇ제가 선학의 도움으로 내놓 해법과 기존의 샘이 거론하는 해법에 가장 큰 차이는,

ㅡ붓다와 붓다의 제자, 그제자, 모든 범부들이 함께 구성되어 있는 것을 드러낸 것(재진입과 준거성)에 있는데,그 차이를 크게 보진 않는 듯 하군요.

ㅡ또하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 논점은 실재론에만 있진 않을겝니다.

ㅡ공이란 어떤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공통이란 개념처럼) 우리의 논의는 체바퀴 돌들 하겠지요. 차이와 과정/운동을 수용할 필요가 있어요.

ㅇ앞으로 논의한다면 그 점을 부각시키고 싶군요.

ㅡ우리가 깨달음을 이러저러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남긴 지혜의 그릇과 방편이라 대개의 사람들이 여긴다면...

ㅇ의기투합할 대목이 있어요, 저는 고타마의 지혜와 그 형식을 사회와 마음, 생명세계에까지 그 설명력을 넓히고 싶어요

ㅡ보다 많은 사람이 그 지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요. 그게 현대화일 수도요.

ㅡ제겐, 특히 최근엔 스펜서 브라운과 루만과 마투라나 등이 든든한 선학이지요.

 · 1 y

김태균

제가 샘의 논지를 세심하게 보진 않았군요. 공의 가르침과 객관적 기준의 상충을 논리적 모순과는 다른 원리로 보고 계시네요.

ㅡ공을 연기나 삼법인으로 쓸쩍 바꾸어선 딜레마가 그대로 일까요?

ㅡ깨달음의 내용을 자성이 없는 공이고, 깨달음의 기준은 객관이어야 하고,

ㅡ제가 봐서는 차이가 없진 않겠지만 해법은 같아 보이네요. 좀더 생각하고 이야기 나눔 풀릴듯 하네요. ^^

 · 1 y

허만항

인명학으로 돌아가야할듯

 · 1 y

김태균

불교논리학 말하는지요? 끝판왕이긴 한데 어렵다던데..

 · 1 y · Edited

김태균

ㅇ원래 딜레마는 딜레마를 낳는 법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딜레마를 구성했을때, 스스로 가지고 있는 딜레마가 드러나기도 해요.

<딜레마 골격>

1)ㅡ깨달음은 공을 알고 받아들임을 말한다.

ㅡㅡ공은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깨달음은 자성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됨)

2)ㅡ깨달음은 전승되거나 누구나 얻을 수 있다. 전제는 깨달음의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ㅡ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있다 함은 자성이 있음을 말한다.

3)ㅡ깨달음의 내용이 공이라면, 깨달음이 전승되거나 누구나 얻는다 말할 수 없다.

ㅇ딜레마의 소재.

ㅡ평이하게 말하면, 깨달음의 내용이 공이고, 그 공은 아공/법공 즉 실재와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깨달음을 누구나 얻을 수 있다면,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는 곧 자성이 있음을 말하는데, 우린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ㅡ딜레마 풀기에서 핵심은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실재하며 자성이 있냐를 논하는데 있다. 거꾸로 깨달음의 전승과 누구나 깨닫기 위해 어떤 실재와 자성이 필요한가?를 논할 수도 있다.

ㅇ약간 극단으로 몰고 가보자.

ㅡ깨달음을 공으로 설명하든 사성제로 설명하든 삼법인으로 설명하든 자성의 부재로 설명하든 붓다의 깨달음을 지시하고 있다(붓다의깨달음에도 자성이 없다). 달리 말하면, 붓다의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 공/사정제/삼법인/자성의부재/연기 등일게다. 우린 깨달음과 방편이 (차이가 있으나) 같은 의미를 갖는다 라고 여길 것이다.

ㅡ이렇게 전제하고 나면, 여기에서 깨달음의 전승을 증명(증거)하고 선포할 수 있는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이 필요하다고 도출할 수도 있다. 뒤짚어본다면, 불제자들이 공/사정제/삼법인/자성의부재/연기를 깨달을 수 있다면, 깨달음과 그 내용은 전승되거나 공통적으로 알고 받아들여진 셈이다.(이 과정에서 어떤 자성이 필요하다, 고정불변한 어떤 내용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다.)

ㅡ여기서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는 불제자들이 공/사정제/삼법인/자성의부재/연기를 깨달았느냐로 바뀐다. 나아가 그 '객관적 기준과 근거가 무엇이냐'로 발전된다.

ㅡ이를 더 밀고 나가면, 붓다의 깨달음과 그 제자의 깨달음, 또다른 누구의 깨달음은 서로 각각 다르다 로 결론내게 된다.

ㅡ즉, 사람들간의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를 부정한다면(자성이 없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 논리 그대로 가면 유아론(자기 자신의 그 의식만이 있을 뿐이라는)으로 빠진다. 붓다의 깨달음이기도 한 연기는 말 그대로 그러하진 않다.

ㅇ이러한 딜레마를 파훼하는 한가지 방법은 나가르주나가 공을 설명할 때 쓴 귀류법인데, 선학의 자유자재로움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ㅇ우린, 가장 먼저 홍샘에 딜레마의 파훼를 설득하려한다. 딜레마를 만들기도 했고 이것이 딜레마임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홍샘은 불일불이묘유 란 글을 풀이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한, 언어의 용법의 차이와 전하려는 의미의 차원(?)이 서로 다름을 드러내어 설명하려는 취지로 이해한다.

ㅡ이를 활용한다.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나 공, 자성이 없음에 대한 논의와 이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과 근거는 언어상 용법의 차이와 전하려는 의미의 차원(?)이 서로 다르다.

ㅡ'공통적인 기준과 근거'는 자성이 아니다. 기준과 근거는 (어떤) 누구나가 소통을 통해 공유/공감한 어떤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라 표현을 바꾼다해도 용어의 개념(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아닌 맥락적 의미(후기 비트겐슈타인)를 보아서 그렇다.

ㅡ이를 테면 '공통'이나 '기준'/'근거', 나아가 '객관'이란 표현을 써도 우리는 그 언어들이 자성의 여부를 포함한 개념으로 쓰고 있지 않다. 만약 그러한 뜻으로 쓰였다면 '공통'과 (나중에 바꾼) '객관' 이든 소통하는 사람들간에 공유되지 않은, 홍샘이 생각하고 활용하는 용법이 된다.

ㅡ깨달음의 전승의 기준과 근거는 자성 여부이기 보다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연기와 공)을 체험으로 이해로 증득했느냐에 있다.(심해탈, 혜해탈) 기준과 근거는 자연스레 불가의 전통 혹은 불가 구성원의 공유된 어떤 것(구성적)이고 이를 자성(고정불변의 본질)이라 여길 이유는 없다.

ㅡ다시말하면, 우리는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에 자성이 있다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소통의 과정에서 사용된 언어와 그 용법이기 때문이다.

ㅡ해서, '객관'을 철학적 용어로 말한다 해도(이를테면 실증주의적 맥락의), 주/객관을 벗어나있는 불가의 인식을 공유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ㅡ그렇다면, 결국 불가의 인식(개념 사용)을 유아론/실증주의적 인식(개념 사용)으로 꿰어 맞추어 논 딜레마, 조작적 딜레마에 불과하다.

ㅡ다른 측면에서 이 딜레마를 구성한 딜레마의 뿌리가 우리 인식속에 있는 불가적 인식(연기와 공)과 형이상학인 혹은 실증주의적 인식 등이 섞여 있는데 있지 않을까 성찰한다.

ㅇ홍샘 답글을 보며 좀더 전개해 봤어요. 중언부언이 된 셈인데, 일단 '공통적인 기준과 근거'가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로 바뀐 점을 지적하고 싶고, 그렇다 하더라도 샘이 제기한 딜레마는 현실에서 포용될 수 있다 여겼어요.

ㅡ비트겐슈타인은 페이지만 넘기듯 살펴봤는데, 초기(논고)보다 후기(탐구)가 제겐 설득력이 있더군요. 그가 분석철학의 효시라 이야기하더군요.

ㅡ좀더 논의가 전개되면, 혹은 더 필요하다면, 스펜서 브라운과 루만을 통해 깨달음과 그 전승, 기준과 근거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지요.

ㅡ기본적인 발상과 골격은 앞서 댓글을 통해 보여드렸어요. 주체/객체(주관/객관)의 소거 혹은 대체(체계/환경와 자기준거성), 차이이론(사물을 본질보다는 차이로 구별하여 인식), 작동적 구성주의 등의 시각이 포함되어 있지요.

 · 1 y

Chang-Seong Hong

허만항 선생님께서 인명학을 언급하셨는데, 인명학(불교논리학)이 주는 통찰과 논리를 적용하면 논의가 더 매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공空이 아니라 깨달음은 공(空)에 대한 이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空)이란 어떤 내용이 없다는 즉 ‘자성(自性)이 없다’는 부정적(negative) 개념이지 어떤 내용이 있다는 긍정적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오해를 부를 여지를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깨달음에 어떤 공통된 내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소가 아니다’라는 표현에 적합한 것은 이 우주에 소를 제외한 그 모든 것이 해당되는데, 이 모든 것은 오직 ‘소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부정적으로만 공통이지 아무런 실재하는 긍정적 내용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 인명학이 보여주는 통찰입니다). 그리고 공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의 기준이라고 해도 공 자체가 아무 긍정적인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기준의 존재가 자성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역시 인명학의 통찰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 제가 사용하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라는 뜻이지 실증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발표한 다른 에세이에서 밝힌 적인 있습니다. 그래서 제 글에서는 ‘공통적인’이 ‘객관적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제 에세이들을 꼼꼼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1 y

김태균

ㅇ지금은 기억에만 의존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타자의 배제’라는 개념이 소개된 홍샘의 에세이를 읽었어요. 그게 인명학에서의 논의군요.

ㅡ예전 일본 작가의 글에서 중관학이 중론에서 보듯 논리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유식이 좀더 논리를 심층적으로 다룬다며 신기하다는 듯 표현하던데, 유식쪽에서 불교논리학을 정립했던 모양이군요. 전 중론에서 그러한 형식의 논의를 본 적이 있어요.

ㅡ고타마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발전하는데 있어 논쟁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이해는 되요.

ㅇ어째건, 저는 홍샘이 제시한 딜레마(진퇴양난으로 이해)를 풀어가고 싶군요. 왜냐하면, 자세히 보니 아래 인용한 대목이 좀더 눈에 띄는군요. 불제자(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를 자임한다면, 또한 아래의 언급이 적지 않은 이에게 딜레마로 작용한다면 함께 풀어갈 이유는 있을거예요.

ㅡ홍샘,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특정한 경험, 체험, 또는 체득을 통해 얻은 깨침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ㅡ선문禪門에서 종종 이렇게 깨침을 완성하는 신비한 경험이 실체로서의 아뜨만이나 그와 유사한 불성佛性과 하나가 되는 체험으로 여겨왔다”

ㅇ불제자라도 워낙 다양한 이해와 경험을 가지고 있고, 붓다(고타마)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나 해석, 경험에 있어서도 다양해서 뭐가 옳으니 그르니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애매해요.

ㅡ그렇지만,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준거’로 그 가르침을 어떻게 알며 이해하고 경험하며 따르는지를 드러낸다면 불제자간의 진지한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다 여겨요.

ㅡ제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어요. 그 하나는 풀렸지요.(홍샘은 이 딜레마의 해결 여부에 부정적이지 않다는 결론) 그러한 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가지 전제하거나 이해를 구하고자 해요.

ㅡ불가에서 쓰는 깨달음의 연원은 ‘고타마의 깨달음’입니다. 당시에 여러 붓다가 있었고 수준과 내용은 다르지만 여러 깨달음도 있다 봐야지요. 불가에서(세계적으로도) 붓다의 대표성은 고타마가 갖지요. 즉,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에서 연원된 전승되어 공유되고 있는 깨달음을 설해진 것을 보면, 무상이나 무아에서 보듯 ‘자성(실체)’가 없지요. 좀더 나아가 ‘붓다의 깨달음’ 역시 ‘자성(실체)’이 없다 봐야지요.

ㅡ붓다의 깨달음은 해석에 따라 부파시대의 ‘아공법유’나 대승의 ‘아공법공’으로 설명되기도 하지요.(대승적 표현이겠지만) 붓다의깨달음을 부파시대의 인식이나 대승의 인식과 말 그대로 ‘동일’하다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받아들여도 될 듯 해요.(고타마는 독화살 비유에서처럼 법의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했다 보기어렵지요. 제 이해에 기초)

ㅇ길게 전개하며 제 이해를 드러내는 이유는, 홍샘이 답글에서 쓰신 “깨달음은 공에 대한 이해”라 표현하는데 상당부분 반대하기 때문이네요. 더구나,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그리 표현해야 한다면 더더욱이지요.

ㅡ홍샘, “공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깨달음에 어떤 공통된 내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ㅡ제 이해임을 드러내듯 좀더 명료히 하고 싶은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논의하는 깨달음은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입니다. 이는 가르침과 함께 전승되고 있지요. 고타마의 깨달음을 어떤 개념상의 깨달음으로 돌려놓고, 어떤 공통된 내용으로 규정되거나 규정되어서는 안된다는 논의는 모두 별의미가 없다고 봐요.(고타마에 근거를 둘 뿐)

ㅡ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따라서 ‘공에 대한 이해’라 여길 수는 있지만(나가르주나), 동일하다는 전제로 논지를 전개시키면 홍샘이 인식하는 딜레마를 빠져나올 수 없다 보아요.

ㅡ고타마 붓다 역시 공이란 용어를 쓰긴 했지만, 나가르주나식의 용법은 아니었던 것으로 들었네요. 제 반테지는 나가르주나의 공의 개념이 후세에 어떤 오해를 일으킨 부분도 있다고도 언급한 적이 있지요.

ㅇ왜 반대하느냐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은 여러가지로 설해졌는데, 이를 ‘공에 대한 이해’로 규정할 경우 필요한 수준이지만 충분한 수준은 아니지요(집합론). 연기나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 등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소통하기 전에 이를 퉁쳐 ‘공’으로 묶어둘 이유는 크지 않다 봐요.

ㅡ또 하나의 측면도 중요하다 여기는데, 홍샘은 ‘이해’와 ‘경험’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쓰시더군요. 그 점 때문에 제 이해수준이 얕지만 굳이 말씀드립니다.

ㅡ고타마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와 보라’, ‘수행해 보라’, ‘누구도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설하지요. 그 깨달음은 ‘이해’일까요? 체험 등 ‘증득‘일까요?

ㅡ깨달음을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과 그 전승으로 전제할 경우, 깨달음을 ‘공의 이해’로 표현할 경우 단순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데, 깨달음의 경지를 해탈(아래 용어정리 참고)이라고 할 때, 제가 알기론 심해탈, 혜해탈, 견해탈의 세가지로 가르쳐 지고 있지요.

ㅡ수행과의 직접적인 연결은 없는 견해탈을 포함해서 해탈은 ‘이해’의 수준이 전혀(!) 아니라 증득이라 표현되며, 수행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 체득(!)을 말하지요. 사실은 단순히 경험이나 체험이라고 표현해서는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지요. 증득(證得)이 불제자들이 공유하는 표현이네요. ‘이해’는 더더욱 아니지요.

ㅡ홍샘은 에세이 어느 곳에서 이해와 경험을 쓰임새에 있어 차이를 두던데, 깨달음과 해탈, 공에 대한 증득을 ‘이해’로만 표현하려는 시도는 수행을 (암암리에) 인식수준의 어떤 것으로 보아 증득이라는 경지와 수준, 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아지지요.

ㅡ더구나 전승되는 수행방법과 수행의 경지, 해탈로 이르는 도과에 대해 설해지고 가르쳐지는 내용을 ‘신비로운 체험’(수준)으로 보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 듯 해요.

ㅡ참고할 만한 수행서가 없지는 않지만, 오래된 전승을 고수하려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어떤 상호주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발견하긴 어렵지 않아요. 제가 본 수행서는 붇다빠라 반테지가 쓰신 것이지요.

ㅡ현재에도 테라와다 불가에서는 아라한 증득이 인정되어 전승되고 있더군요. 대승은 대승 나름대로 선 전통이 있으니 다른 방식으로 보살행을 하고 있다 여겨요.(전 테라와다 불가의 가르침에 익숙한 편)

 · 1 y

김태균

ㅇ제가 이해하는 한 홍샘은 제가 딜레마가 없다 혹은 딜레마 파훼에 동의하시지는 않는 듯 해요. 최근 답글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관련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해요.

ㅡ일단 깨달음을 공에 대한 이해으로 등치하여 설명하면, 뒤에 따르는 것이 공을 ‘자성이 없다’는 부정적 개념이라는 중론의 논의를 기초로 하게 되고, 말씀하신 인명학으로 뻗어 나가는 듯 해요. 허나 잘 살펴보면,

ㅡ전제된 딜레마는 깨달음에 관한 것이지, 애초부터 공의 이해… See more

 · 1 y

김태균

ㅇ반테지(스님)께 유마힐님을 말씀드렸더니, “그 분이 수행하면 좋을텐데..”라 표현하시는 군요.

ㅡ“다 좋던데, 유명론쪽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랬지요.

ㅡ모두 제 스스로의 준거에 의한 생각입니다.

ㅇ예전에 루만을 잘 아시는 분과 이야기 나눌 때, ‘의식과 소통의 차이’와 ‘소통과 의식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쓰는 저를 지적하시더군요. 그 지적으로 전 크게 앎의 진전이 있었지요. 아마 유마힐님이 열반과 해탈을 별로 구별하여 쓰지 않는 저를 보고 지적하는 바를 보며 새롭게 배움이 있습니다. 그냥 해탈은 깨달음의 과정을, 열반은 깨달음의 상태 정도로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ㅡ오늘 온 것은 유마힐님에게 책 하나를 소개하면 좋겠다 싶어 왔습니다. 읽었다면 헛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또하나의 수행꺼리로 도움이 될 듯해 소개합니다.

ㅡ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 –초기불교의 언어.종교철학’ 이네요.

ㅡ사실은 유마힐님이랑 이야기 나누다. 제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고른 책인데, 요즈음에 읽고 있답니다. 언어쪽 분석철학에 대한 초기불교쪽의 인식일 수 있겠네요. 힌두교와의 차이도 많이 드러내기에 공감할 바도 있겠습니다.

ㅇ저 개인적으로는 유마힐님의 에세이들이 이 시대 불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겠다 여기고 있네요. 그러기에 저에게는 힘이 되지요. 몇가지 갸우뚱할 게 생기면 이렇게 댓글 달고 이야기 나누면 될 일이구요.

ㅡ당신이 정체가 뭐냐라 물으신다면, 딱히 답할 바가 없는데, 그냥 저 역시 번뇌를 내려놓고 좀더 자유와 행복하기 위해 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른다. 정도 답할 수 있겠네요. 좀더 나아가 봐야, 그리하여 그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바를 주변 분들과 나누는 정도..

ㅡ많이 나가봐야, 현대의 사람들에게 고타마의 가르침을 좀더 업그레이드해서 설명해 줄 방도도 챙겨보자 정도..

ㅡ책 소개하려 보니, 유마힐님이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란 책을 쓰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눈에 띄이네요.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반테지가 금방 짚어내시는구나 싶었지요.^^

ㅇ다행히 제 주변에 싸띠(sati)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반테지와 수행자들을 뵐 수 있어서, 제 몫은 아니지만 비교적 가까이에서 수행과 지혜를 함께 보고 경험할 수 있어 좋지요.

ㅡ어째든, 그간 이야기한 것이 논리나 언어쪽에 연관된 부분이 많아, 다른 주제의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못 했지만, 기회가 닿으면 그런 주제를 가지고도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군요.

ㅡ아무래도 현대적인 지식과 학문을 통해 불가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서이기도 해요.

ㅡ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연기’는 고의 생멸에 대한 조건과 인과적 설명이기도 하고, ‘열반’은 탐진치 번뇌로 오염된 마음을 깨달음을 통해 끊어낸 변화라 볼 수 있겠어요, 그것.

ㅡ이제는 유마힐님이 깨달음을 ‘공에 대한 이해’로 새기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만, 또 쉬 놓을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지혜와 수행이 같다는 취지로 사족을 달아봅니다.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 1 y

김근중

그렇죠. 초선정 요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또한 출리의 정사유처럼 사유입니다.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안을 감지하지않고서 중론의 인식으로 불교나라를 가늠한다는게...

그 중송의 귀경게 마저도 내외입처에서 사유를 수행하는 의미의 중도 방편이거늘...

사띠의 정념을 체험 해보시고서 인식체계를 관하시길...

Image may contain: 1 person, outdoor

 · 1 y

김근중

인식에 대한 중송과 가전연경 요지입니다.

그아래에는

"영혼과 육체는 표현만 다르고 같다"는 안목을 열어보이신 경전입니다.

용수보살 스님의 원래 '근본 중송'은

니까야 가르침속의 "중(majjhe)에 의해 법을 설한다."를 잘 체득하신 기쁨의 게송이라고 봅니다.

<중론> '귀경게' 에서의 팔불 그 자체를 '중도' 가르침으로 풀어 보면요,

"일체(sabba, 내외입처)는 '있다'의 '유' 와 '없다'의 '무' 이라는 두 극단을 따라가지않고,

두 극단의 범주 속성을 알아 더이상

다가가지않는 가운데 연기한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닌 바를 갖추게 됨에 의해서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을 설한다."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소위 '유'와 '무'의 두 극단이 내외입처(육근과 육경, 12처)의 '근.경.식(감각접촉)'에서의 '표상'들임을 잘 알아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님"의 지혜를 가진 가운데(중, majjhe)의 안목을 <가전연경>의 '법안'으로서 잘 전승을 하셨습니다.

S12:35

<무명을 조건으로의 경>에서는,

"영혼과 육체의 몸이 서로 같다 혹은 같지가 않다. " 라고 말한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르다.(즉, 개념 /표상이다)

비구여, 두 극단(이 묶이는 속성을 알아)을 다가가지 않는 가운데(중간, majjhe) 법을 설한다. 즉,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죽음이 있다.라고...

제 현상의

기준점이 내외입처 일체에서의 (근.경.식) 감각접촉(색신)이고, 감각접촉에서 유래한 정신작용의 "영혼은 육체의 (근.경.식의 감각 기능)몸을 떠날수 없다" 라는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 1 y

김태균

ㅇ좀더 붓다의 지혜와 수행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같은 세대의 눈으로 본 가르침이 필요할 듯해요. 저는 아래의 책과 수행이 도움이 많이 되었네요.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 1 y

김근중

김태균 반테스님이 김해 사띠 아르마 방장이군요()

 · 1 y

허만항

와우

 · 1 y

김태균

ㅁ도움 되시길..

ㅇ"붓다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즉 사성제나 연기법이나 삼법인과 같은 진리의 성격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것들이 앞서 언급한 세가지 지식의 원천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성제와 집성제는 경험적 사실이며 경험적으로 알려진다.

ㅡ이러한 두 가지 진리가 자신과 관계될 때, 이들 진리는 내적 성찰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 고통의 완전한 소멸로서의 열반은 고통의 존재로부터 추론될 수 있으며,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타당한 방법은 추론과 경험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ㅡ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연기법이 원칙적으로 작용하는 한, 그것은 내적 성찰에 의해 알려질 수 있으며, 본질적인 작용원리로써 연기법은 경험에 의해 알려질 수있다. 삼법인도 또한 경험과 내적 성찰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

ㅡ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진리를 알기 위해 왜 길고 힘겨운 수행을 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알기 위해 번뇌를 제거해야만 하는가?"(열반 그리고 표현불가능성, 6장 148쪽)

 · 1 y

2020/09/30

홍창성 불성佛性에 대한 새로운 이해

Facebook



Chang-Seong Hong is in Mendota Heights, Minnesota.

mtS9nps toAuugfunshnthre 2s0u1ooo8red  ·

지난 토요일 이 페북에 올린 글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페친님들의 코멘트에 힘입어 그 내용을 다듬어 월간불교문화 편집인께 보냈다. 특히 Bruce Park님과 조기현님께 감사드린다. 물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유선경교수가 가장 많은 코멘트로 도와 주었다.

개학까지 그래도 보름이 남아 있어 연재하고 있는 에세이를 한 편 더 완성했다. 내게 주어진 분량은 원고지 20매인데, 지금까지 한번도 20매 안에서 글을 맺지 못하고 편집장님 속을 썩여 왔어서, 이번에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23매까지 줄였다.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인데, 내 한 호흡의 길이는 40매이고, 좀 편하게 숨쉬려면 120매는 되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원고지를 사용하지 않는 미국에서 내가 글쓰기에 편하다고 느껴 온 분량은 영어로 최소 6,000단어 이상인데, 그것을 한글 원고지로 환산하면 120매 분량이다. 그래서 결국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 글쓰기 호흡의 길이를 한글 원고지로는 가늠 못하며 헤맸던 꼴이었다.

새로 쓴 에세이 <불성의 현대적 이해>는 바로 밑에 PDF 파일로 원고를 연결해 보았고, 또 밑에 전문을 붙이기도 했다. 짧은 글에 중요한 논증을 새로 도입하느라고 글이 좀 지나치게 응축되고 (constrict) 상세한 설명을 더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논증을 앞으로 계속 사용하며 더 세련되게 다듬고 또 이 논증 자체를 분석하는 글도 따로 쓸 계획이다. 관심 있으신 페친들께 코멘트를 부탁드린다.

아, 밑에 있는 사진은 우리 미네소타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Welcome Table'인데, 밑둥을 보면 파인애플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하와이에서 환영한다는 표시로 파인애플을 선사한다고 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https://www.dropbox.com/.../%EB%B6%88%EC%84%B1%EC%97%90...



++++++++++++++++++++

불교철학강의실 357호 09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홍창성

불성佛性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는 학생들과 매시간 5분 정도 입정入定한 다음에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면 학기 중반을 넘어설 무렵 학생 몇몇이 명상의 교리적 근거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5분의 참선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도 종종 참선을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 깨달음과 열반에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마음이 한없이 맑아지면 깨닫게 되나요? 아니면 명상과 관련된 다른 근거가 있어서 깨닫는가요?"

구체적인 예로 문제에 접근하기 좋아하는 영미권英美圈 학생들을 위해 나는 선禪에서의 수행방법을 소개한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선사들을 통해 소개되어 서구에서 인기 있는 묵조선黙照禪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잡념이 모두 떨어져 나가게 해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비추어 보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불성佛性을 깨치면 깨닫는다고 한다. (주석: 선문禪門에서는 돈오頓悟로서의 깨침과 증오證悟로서의 깨달음을 구별하기도 하지만, 미국대학 학부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본고에서는 이 둘 사이의 엄밀한 구분 없이 논의를 전개하겠다.) 한편 한국 불교의 간화선看話禪은 화두花頭를 잡아 그것을 마치 마음을 청소하는 세제처럼 사용해 마음속 모든 상념을 씻어 내어 어느 순간 웅크리고 있던 불성을 깨치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투철하게 이해하려는 미국학생들은 또 반대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불성은 깨끗한 영혼 같은 것 같습니다. 참선수행을 통해 원래의 순수한 영혼을 되찾으면 기독교에서 구원받듯이 불교적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아도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불성이 영혼이나 아뜨만과 어떻게 다릅니까?"

이것은 선문禪門의 불성에 관한 견해가 붓다의 무아론無我論과 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똑똑한 학생들이 제기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주지하듯이 불성 여래장 사상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선禪이야말로 이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의 형태이다. 그래서 선禪이 현대적으로 해석되어 계속 진화하기를 희망하는 나는 그 목표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일단 불성 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한다.

 불성 사상이란 모든 유정물有情物이 (혹자는 모든 무정물無情物까지도) 이미 근본적으로 깨쳐 있어서 (本覺) 원래부터 붓다라는 주장이다. 이 사상에는 모든 유정물이 깨달아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으로부터 이미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성불成佛한다는 강한 주장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해석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된 주장은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한 본성本性으로서의 불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성사상이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만들어 주는 아뜨만atman 또는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과는 과연 양립가능한가(compatible)? 그럴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조건에 의해서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붓다의 연기에 관한 가르침이 불교 교리의 근본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붓다의 연기론을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다음과 같은 내 철학적 논증으로 불성(과 아뜨만 그리고 자성)의 존재가 반박된다고 생각한다.

불성이 존재한다면 불성은 조건의 의해 생멸生滅하거나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다.

(1)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한다면 불성의 존재는 조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無常한) 조건들에 의지하는 한 불성은 사물의 고정불변한 본성(本性 intrinsic nature)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 불성은 스스로부터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의 자기기원self-origination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성은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2-1) 불성이 자기기원 당시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다시 솟아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2-2) 불성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지 않았으면서 자기기원 당시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므로 불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1)과 (2)에 의해 고정불변하며 상주(常住)하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의 논증에서 ‘불성’ 대신 ‘아뜨만’이나 ‘자성’을 대입하면 그것은 바로 아뜨만이나 자성의 존재를 반박하는 논증이 된다. 내 불교철학강의를 들은 미국 학생 가운데 아직 아무도 위의 논증에 이의를 제기한 녀석은 없다. 오히려 강력한 논증이라며 논증의 매력을 즐기는 녀석들이 여럿 있었다, 가끔 자기들이 믿는 영혼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같은 구조의 논증을 적용해 보면서.

 그런데 실은 나는 ‘불성’이라는 대단히 편리한 개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일상 언어에는 우리가 흔히 쓰기 때문에 마치 그 말의 대상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어휘가 많다. 책상, 펜, 엔진, 날개 등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function)에 의해 정의定義되는 사물들이 모두 그렇다. 예를 들어 엔진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켜 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라고 정의된다. 자동차 엔진은 휘발유를 연소시켜 나오는 화학에너지를 이용해 바퀴를 돌리는 운동에너지를 생산한다. 엔진의 모양은 다양하며, 그 재질이 반드시 금속일 필요 없이 원칙적으로 세라믹이나 돌 또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로도 엔진을 만들 수 있다. 어떤 물체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변환시키기만 한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재질, 모양, 색깔, 크기 등에 상관없이 모두 엔진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책상, 펜, 날개 등에도 모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 내 눈 앞에 주차해 있는 이 자동차의 엔진, 한강위에 떠 있는 저기 저 작은 보트의 선박용 엔진, 그리고 하늘을 나는 저 은빛 비행기의 엔진을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또 원칙적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엔진 그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어떤 구체적인 엔진이면 엔진이지 어떤 황당한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이 말할 법한) 엔진의 형상形相 같은 것을 존재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펜, 날개, 선풍기, 냉장고 등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은 이 내 손안의 볼펜, 하늘을 나는 저 새의 날개,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도는 옆방의 선풍기,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 같이 구체적인 물체들이다.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의 펜 그 자체, 날개 그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선풍기의 형상, 냉장고의 본성 그 자체와 같은 추상적인 대상들은 우리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펜’이라는 개념, ‘날개’라는 표현, ‘선풍기’라는 지시어, 그리고 ‘냉장고’라는 편리한 말에 불과할 뿐, 그것들이 가리키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대상들이 우리 세계에 존재한다고 보아 줄 이유가 없다.

 불성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불성도 이 세계 안에 형이상학적 존재인 추상적 대상으로 내재內在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비록 추상적인 엔진이나 날개는 존재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개개의 엔진 장치나 각각의 날개들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듯이, 만약 우리가 ‘불성’을 ‘어떤 한 유정물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의 특정한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구체적인 존재자로서의 불성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그 근기根機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는데 적합한 심신心身의 상태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에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절한 심신의 상태가 상이하게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다양한 심신의 상태에 공통된 어떤 필연적 속성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각각의 경우 주어진 유정물에 있어서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합한 구체적인 심신의 상태를 그때그때마다의 불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그 다양한 펜들을 경우마다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펜’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듯이, 나는 우리가 각 유정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깨달음과 열반을 위한 최적의 심신 상태를 그때그때 지시하기 위해 ‘불성’이라는 말과 개념을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불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내가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고 각 유정물마다 다르고 또 한 유정물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찰나마다 다른 심신의 최적화된 상태를 말할 뿐이지만.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교수와 함께 현응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를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omments

Jae Kwon Kim

"불성은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거나,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거나이다." A exclusive or B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하다. A and B

 · 2 y

한시우

 · 2 y

Chang-Seong Hong

재미있는 댓글 잘 읽었습니다. 논리학자들은 앞 문장을 “Av~A (A or not-A)”라고 표기하고, 뒷 문장을 “B&~B (B and not-B)”라고 표기합니다. 앞 문장은 그것이 exclusive or 이든 inclusive or 이든 상관없이 그 논리적 형식에 의해 언제나 참인 문장입니다. 언제나 참이기에 별로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뒷 문장은 그 형식이 논리적으로 모순이어서 언제나 거짓입니다. 언제나 거짓이기에 우리가 피해야 할 주장입니다.

그런데 뒷 문장을 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루뭉술한 해석을 가져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형식논리학 (수리논리학 또는 기호논리학)은 이런 방법에 관심이 없습니다만, 헤겔류의 변증론자들만 해도 (마이클 조단은 키가 작다) & (마이클 조단은 키가 작지 않다) 라는 문장이 참이라고 보아도 좋답니다. 정(正)은 반(反)을 정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첫 부분이 조단이 3살 때 말해졌고 뒷 부분이 20살 때 말해졌다면 둘 다 옳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또 앞부분이 평균키 7피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고 뒷 부분은 평균키 5피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으니, 이 두 그룹을 요령있게 배치하면 앞뒤부분 모두 옳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건’을 어느 범위까지 확대해서 해석하느냐입니다. 남방불교식으로 어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어떤 물리량, 어떤 물리적 사건, 어떤 의식상태와 같이 ‘실질적인(real)’ 존재자들까지만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북방 대승불교에서처럼 조건을 연기의 두 항에 들어갈 수 있는 그 다른 모든 것들까지 (예를 들어 언어적 개념, 수, 논리적 관계, 공간적 관계, 사회적 관계, 관점, 배경 이론, 배경 가치관, 배경 종교, 등등) 포함하느냐입니다. 제가 앞으로 월간불교문화에서 10월부터 시작해서 3회에 걸쳐 차례로 논의하겠습니다만, 저는 대승불교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조건’이라는 것이 모든 관점이나 배경이 되는 물리학 이론까지 포함시켜도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앞 부분의 ‘조건’과 뒷 부분의 ‘조건’이 같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다른 조건입니까? 마찬가지로, 앞 부분의 ‘에너지’와 뒷 부분의 ‘에너지’가 같은 에너지입니까 다른 에너지입니까? 이 문장의 의미를 좀더 더 분명히 해 주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한편, 불교에서도 사물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고들 해 왔지요. 어떤 사물도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 상주하며 존재하지는 않지만,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이 공空한) 가상(假相, 幻)으로는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문장이 그럴듯한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을 섞어 놓아 ‘존재’라는 동일한 단어를 ‘상주하는 실체’와 ‘가상’이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논리적 오류(the fallacy of equivocation)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같은 단어는 같은 관점에서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논리학의 법칙을 따라야 논의가 헛돌지 않게 됩니다. 아, 물론 선생님의 문장이 그런 문제가 있다는 말씀은 전혀 아닙니다.

 · 2 y · Edited

Chang-Seong Hong

아, 위에서 "Bv~B (B or not-B)"가 아니라 "B&~B (B and not-B)"여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방금 고쳤습니다.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상세하고 유익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비판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든 느낌을 아주 간략하게 표현해본 것이 었습니다.

제가 인용한 A exclusive or B 에서 불성 대신에 아트만 등을 대입해도 또 "그것" 이라는 존재자를 대입해도 논의가 성립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명백히, A and B 가 성립하는 것이 있다면, "고정 불변하여 상주하는 <불성,그것>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문제가 있는 것이 되는데, 그 "그것"의 예로 에너지를 들었을 뿐 입니다.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에너지는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기도 하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지 않기도 한다면, 에너지는 상주하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 2 y

Jae Kwon Kim

에너지는 그것의 총합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조건에 무관하게 상주하는 무엇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개체의 에너지는 조건에 따라서 변화지만, 총계는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총계의 의미 속에있는 어떤 본성은 불변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제가 스마트폰이 아직도 서툴러서 쓴 것이 거의 지워졌습니다. 다시 쓰지요.

만약 신이나 영혼, 아뜨만이나 브라만처럼 상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생멸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그 정의definition에 의하면 불변합니다. 예를 들어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것이 멸할 수 있으려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불변한다면 결코 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변하면 불멸이고, 불멸이면 영원합니…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그리고 제가 예상한대로 원래 쓰신 문장에서 생멸하는 에너지는 개개 경우의 에너지이고 생멸하지 않는 에너지는 에너지의 총량으로서 불변하는 것으로 쓰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도 흔히 이렇게 같은 단어를 한 문장에서 다른 뜻으로 쓰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21세기이니 불교도 좀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표현을 다듬을 때가 되었습니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습니다). 우리 불교가 논리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예를 여전히 가르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한편, 저는 전체로서의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것도 뉴튼 이래 주어진 우리 물리학의 전제로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 이것은 객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우리의 물리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기본 가설 또는 공리 같은 것에 해당할 뿐입니다. 그리고 (2) 불변하는 에너지의 총량이라는 것은 오직 우리의 물리학을 배경 이론으로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연기론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물리학'이라는 조건에 의해서만…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제가 한정된 물리학의 지식으로 답변드려 보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역시 물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뉴톤 역학의 체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리고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더 추상적인 그러면서 a priori 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에 바탕하고요...

잠깐 비켜나서 … See more

 · 2 y

조기현

약간 다른 얘기긴 하지만, 특수상대성이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에너지보존과 질량보존은 따로 취급되었습니다. 핵합성 등에서 질량결손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의 프레임 안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에너지보존과 질량보존이라는 별개의 원칙이 생각 밖의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에너지-질량보존으로 확장(expand)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에너지보존이라는 자명해보이는 원리도 뉴턴물리학이냐 상대성이론이냐 하는 (쿤의 … See more

 · 2 y

조기현

이런 것이 연기의 일부로도 생각될 수 있겠고요.

 · 2 y

Chang-Seong Hong

조기현 예, 넓은 의미에서의 연기로 포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고맙습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댓글 감사합니다. 님의 댓글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이지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상대성 이론에 기인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총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이론적 근거는 time homogeneity, 즉, 물리법칙이 시간의 원점을 잡는 것과 무관하게 성립한다고 하는, 일종의 연속 대칭성에 바탕한 것입니다. 그기에 따른 Noether's theorem 이죠.

 · 2 y

Jae Kwon Kim

물론 모든 이론은 근거에 바탕하므로 그것까지 연기이다라고 말할수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far-fetching 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앞에도 언급했지만, 이것의 근거는 너무나 a priori 한 일반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부정되어야 할 어떤 모순도 찾아진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고 그것에서부터 모든 물질들이 생겼났지만, 그 것의 총합은 불변하다.

 · 2 y

Jae Kwon Kim

연기론을 거의 절대적 진리"로 모실려고 하는 그 근거까지도 여러가지 잡다한 논증과 현실에 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면, 그 연기론까지 조건에 의존하는 (연기) 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의 결론조차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지요. 연기론의 절대성에 필요한 논증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필요한 시간의 동질성 중에서 어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선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살펴 보십시요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너무 나가는 것 같은 소리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에너지'라는 개념도 물리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누군가 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어떤 물리학 이론에 따라 창조했을 겁니다.

그리고 에너지는 에너지 아닌 것에 대비해서만 에너지입니다 - 즉, 에너지는 에너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이기 때문에, 에너지는 에너지가 아닌 것과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See more

 · 2 y

Jae Kwon Kim

Yumaa Hill 제가 거의 결론적으로 쓴 댓글이 지금 글의 바로 위에 있습니다. 저는 철학적 논증을 즐기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편이지만, 그리고 연기론이 대체적으로 매력있는 견해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의 절대성에 대한 논증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의 근거보다 더 확실해 보이지 않음은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수식과 같은 더 정확한 언어 그리고 확립된 근거에 바탕하지 않는 논증들이 가질 수 있는 허점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히 이해한다고 믿기 때문입니… See more

 · 2 y

Chang-Seong Hong

Jae Kwon Kim 연기론 자체도 절대성을 지닐 수 없다는 고찰은 연기의 대승적 해석인 공에 대한 오래전부터의 고찰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을 결여해 공한데, 이런 공조차도 자성을 가질 수 없어 공하고 (공공), 공공조차도 공하고 (공공공), 이런 과정은 무한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자는 이런 무한 부정의 과정이 (그래서 모든 개념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보기까지 합니다. … See more

 · 2 y · Edited

Jae Kwon Kim

"연기에도 절대성이 없다" 는 좋은 결론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 y · Edited

Jae Kwon Kim

논의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일부 사람들의 가능한 흥미를 위해서 여기에 댓글들을 일부 포스팅해도 될까요? 물론 최대한 논리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

 · 2 y

조기현

기인한다는게 아니라 유효하기 위해서 의존한다는 겁니다. 뇌써의 정리는 결국 수학적인 형식이며, 그 안의 물리적인 내용물은 라그랑지안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너지보존법칙이 실험에서 유효하려면 적절한 라그랑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적절한 라그랑지안을 세우려면, 물리적인 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See more

 · 2 y

조기현

에너지보존법칙은 결국 어떠한 이론적 맥락에서 의논되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며, (에너지와 질량을 예로 들어 누차 설명했습니다) 이를 맥락의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교수님은 에너지보존법칙의 작업가설성과 배경의존성을 말씀하셨는데, 이중 배경의존성을 맥락의존성이란 형태로 partially 지지합니다. 배경의존성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파악되지가 않아서...

 · 2 y

Jae Kwon Kim

조기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통찰은 최소작용의 원리와 시간의 동질성인데, 이 둘은 패러다임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죠... 그리고 모든 논의 또는 논리-- 연기론이니 무아, 불행 등등 포함-- 은 어떤 이론적 또는 관찰적 근거에 입각하므로, 이러한 논의 또한 절대적 일 수 없음으로 이미 결론 내렸습니다.

 · 2 y

조기현

저는 과학사적인 입장에서 에너지보존법칙을 논했는데, 물리이론의 입장에서 논박하시는군요. 물리이론 입장에서 이 문제는 상당히 delicate해서, 어렵습니다. 용어는 보다 엄밀히 정의되어야 하며,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고전물리에서, 운동량(mv)보존법칙은 뉴턴의 작용반작용(Fxy=-Fyx)에 기인하지요. 이는 측정대상이 명확히 정의된 (질량과 속도) 운동량의 보존여부를 실험적으로 잘 테스트할 수 있으므로, 실험적으로 좋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 See more

 · 2 y

조기현

이러한 미꾸라지 진리는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면, 놓친 조각(missing piece)를 찾는데 유용한 guidance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패러다임 쉬프트(고전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 등)가 일어나는 현상에서는, 놓친 조각(missing piece)을 찾기는 커녕 엉터리 조각으로 생각을 자꾸 유도하겠지요.… See more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물리 또는 물리철학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견해의 일치가 있어 보이지 않네요...

고전 역학에 관한한-- 물론 상대성 이론 포함--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같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실험에 의존할 것이 없고, 실험에 비추어 볼 것도 없지요. (Chaos 는 논외)… See more

 · 2 y · Edited

조기현

Jae Kwon Kim 죄송합니다만, 최소작용의 원칙은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의 결정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local U(1) gauge symmetry 또한 양자역학적인 파동함수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군이므로, "고전"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 결정 (F*F+jA)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여기서 서술한 것은, Landau series 의 volume 1 (고전 역학) & volume 2 (classical fields) 에 이미 다 나와 있는 것입니다.

 · 2 y · Edited

Jae Kwon Kim

양자 전자기학은 고전 역학의 라그랑지언 자체를 구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것을 quantization 시키는 이슈에 관한 것입니다.

 · 2 y

조기현

이해가 안 되네요. local U(1) transformation은 양자역학적인 파동함수의 국소적 위상 변환인데, 그게 위상을 갖는 파동함수로 기술되지 않는 고전적인 물체와 전자기학의 라그랑지안을 어떻게 얘기합니까?

 · 2 y

조기현

양자전자기학은 여기에 second quantization을 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old term이지만요...)

 · 2 y

조기현

연역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싶으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은 연역적 체계 외에 실험을 통한 입증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 2 y

Jae Kwon Kim

나의 전공이 양자 장론과 임계 현상입니다. 그리고 해당 논문이 20여편 이상 있으며, PRL 의 referee 까지 했습니다. 란다우 series 를 읽어 보십시요. 양자장론은 주어진 local gauge symmetry 의 양자화, 재규격화 등에 관한 이론이며, 그것의 classic Lagrangian form 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성 원리와 local gauge symmetry 입니다. 다시말해서 대칭성이 주어지면 라그란지언 (좀더 엄밀하게 … See more

 · 2 y · Edited

조기현

Jae Kwon Kim 뭐, 디락스피너장을 "고전적인 장"으로도 간주하고 그것으로 "고전적인 라그랑지안 밀도"를 만드신다면야 할 말은 없습니다만, 스핀 1/2장을 고전적인 장으로도 간주할 수 있을까요?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디락장은 전자에 대한 것이지 전자기장에 대한 것이 아니죠. 장과 전하를 띤 입자 사이에 작용을 결정하는 것은 이미 고전 역학에서 결정된 것이지요.

 · 2 y

조기현

Jae Kwon Kim 그러니까 제 말이 local U(1) symmetry는 (양자장론의 경우) 디락장 또는 (학부양자역학의 경우) 슈뢰딩거파동함수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술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전적인 물체와 전자기장 사이의 상호작용에는 국소적 U(1) 대칭성이 등장할데는 없다는거죠...

 · 2 y

Jae Kwon Kim

지금 논의되어 온 것은 고전적 전자기학(전자와 장의 작용하지 포함) 한 것이었는데, 디락장을 도입해서 논의가 흐려지는 면이 있네요.

디락장의 장론적 도출은 group theory 에서 보는 것이 가장 간명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좌표 변환 SL(2,c) 에 대응하는 전자의 상태 함수의 변환은 su(2)× su(2) 인 것으로 기억...… See more

 · 2 y

조기현

Jae Kwon Kim 예 감사합니다. 제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서로 논점이 안 맞았던 것 같네요.

말씀하신대로 주어진 대칭성에 대해 라그랑지안이 유일하게 결정됩니다.… See more

 · 2 y

조기현

페체이퀸 대칭성 등도 새로운 대칭성을 더해가는, 좋은 예가 된다고 봅니다.

 · 2 y

Jae Kwon Kim

조기현 네 감사

 · 2 y

Jae Kwon Kim

조기현 한가지만 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라그랑지언의 form 과 무관합니다. Noether theorem 을 참고해 보십시요

 · 2 y

조기현

Jae Kwon Kim 예. 김재권님이 말씀하시는 에너지보존법칙과 제가 얘기한 에너지보존법칙이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실험적으로 측정할게 명확하고, 실험적으로 성립여부를 테스트 가능한 에너지보존식(법칙과의 혼동을 피해...)으로, 구체적인 라그랑지안에 따라 형태가 다릅니다. … See more

 · 2 y

Bruce W. Park

저까지 언급해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불성에 대한 정의와 해석을 쉽게 서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작업가설적 (operational definition) 정의로 읽히게 됩니다. 불성에 대한 고찰에 앞서 만물이 갖는 영원성, 청정성, 완전성을 담보한 법성에 대한 고찰이 후기대승에서 언급을 많이 하였다고 봅니다. 제법실상을 논구하는 측면서 법성의 공함까지 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불성은 붓다의 깨달음보다도 붓다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성은 누구든지 붓다처럼 되고 싶은 소망에서 성불의 근거를 추적해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대승불교는 두 가지로 정리햇던 듯 합니다. 불성사상과 보살사상이지요. 성불의 근원은 불성이 있기 때문이고 보살의 행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성은 극히 신앙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엇고 그 기능과 효력이 지대했다고 봅니다. 교수님의 해석은 무기력한 논쟁을 물리치고 건설적이고 역동적인 불자의 삶을 이끌어주게 합니다. 교수님의 설명을 보니 불성은 서양종교의 성령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뚜렷해집니다. 기독교의 신이 자아를 지녀 심판하는 전능자라고 하지만 불성은 어떤 자성도 지니지 않는 개념적 언어로 공성 (연기성)의 총체를 표현한 것으로도 읽힙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2 y

Chang-Seong Hong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반쯤을 미리 해 주셨네요.^^ 저는 공을 단순히 논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이어서 그것에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시도에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기 대승의 견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실은 저는 불교계에서 공을 언급할 때 '공성'이라는 표현을 쓰며 마치 공에 무슨 본질적인 성품이 존재하는 듯하게 표현하는 것조차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서양불교학자들은 그 옛날 불교승려들이 힌두교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신도들을 더 확보하고자 당시 인도의 보통사람들이 더 편하게 받아들일 아뜨만과 비슷한 불성의 개념을 도입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 2 y

허만항

“이 법계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연기), 이 법계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법성)(無不從此法界流, 無不還歸此法界).

 · 2 y

Chang-Seong Hong

허만항 감사합니다. 물론 옳고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만, 저는 또다시 '법성'이라는 단어가 불편합니다. 그냥 '법의 모습,' '존재의 모습,'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될 것을 '법성'이라고 하여 마치 무슨 고정불변의 속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여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론 '성'을 여유있게 해석하면 별 문제 없다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 2 y

허만항

“법성은 제법의 진실체성真實體性, 또한 우주간의 일체현상에 갖추고 있는 진실불변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진여법성으로 진여의 다른 명칭이다. 법성은 만법의 본질이다. 《대지도론》 33권에서는 일체법의 총상과 별상은 다 같이 법성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제법은 각자의 차별상과 실상이 있다. 말하자면 각자 차별상은 예를들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문득 이전의 상을 읽어 그 고정된 것이 없는 까닭에 이를 분별하여 구하면 얻을 수 없다, 불가득不可得인 까닭에 공(무자성)인 즉 공은 제법의 실상이라 말한다. 일체차별상에 대해 말하면 그 자성이 공한 까닭에 모두 동일하여 이를 여如라 한다. 일체상은 다같이 공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공을 법성이라 한다. 또한 황색돌에 금의 성질을 갖추고 있듯이 일체세간법에는 모두 열반의 법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제법본연의 실성을 법성이라 한다. 이는 《원각경》의 이른바 「중생과 국토는 동일한 법성」라는 경문과 같은 뜻이다.”

《유식명사백화唯識名詞白話》

 · 2 y

Chang-Seong Hong

허만항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교계에서 언제 중관과 유식을 서로 너무 조화롭게만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시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논쟁도 한번 진지하게 해 보았으면 신나겠습니다.^^

 · 2 y

허만항

감사합니다 저는 대승기신의 입장에서 믿음과 행을 중시합니다

 · 2 y

이감천

불성이라는 개념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없고 후대에 개발되어 쓰여진 단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를 가지고 논쟁해봐야 불교를 왜곡할 뿐 도움이 않된다고 봅니다.

언어의 희론 밖에 안된다고 봅니다.

 · 2 y

Chang-Seong Hong

저는 후대에 이루어진 불교 교리도 초기경전에서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성 참나 참마음도 논리적으로 문젯거리가 있다고 해서 쉽게 옆으로 치워버리기보다는, 그 동안 이 개념들이 수행해 온 긍정적인 역할도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초기경전의 가르침과 일관성 있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끌어 안으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시도가 반드시 설득력이 강하거나 성공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 2 y · Edited

김근중

본불은 중국 황벽승려가 만든 허구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가르친 불성은 괴로움(고성제)을 아는 것이고,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깨닫는 것이랍니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 두 극단이 묶여 결박된 가운데 연기한 '괴로움 소멸'의 중간을 닦는 것의 도성제(팔정도)이랍니다.

그래서 꼰단냐 존자의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한 생멸에 대한 '중도' 깨달음을 감흥어로 기뻐하신거랍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초전법륜경을 읽어보시고요.

뭍 사람들이 가진 내외입처의 일체를 벗어나 일체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철학을 논하시길...

 · 2 y

Chang-Seong Hong

댓글 감사합니다. "뭍 사람들이 가진 내외입처의 일체를 벗어나 일체를 거론하지 않는 불교 철학을 논하시길..."고 하셨는데, 제 글의 문장문장이나 에세이 하나하나로는 그렇게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전체적인 철학적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결국 선생님께서 바라보시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 2 y

서근하

대단하신 분들의 대화를 들으니..참 힘이 됩니다

 · 2 y

강석두

'시간과 장소에 따라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읍니다.

 · 2 y

Chang-Seong Hong

예, 수학적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 2 y

Chang-Seong Hong

강교수님께서 우려하신 문제를 고려해 문장의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원래 제가 영어로 써 놓은 에세이들에서는 그냥 'optim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수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한글로 쓰다보니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Optimal이란 말 앞에는 most 같은 말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그래서 한국어로 '적절한' '적합한' 정도로 바꾸어 썼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 2 y

Chae Soon Kim

Image may contain: plant and outdoor

 · 2 y

Why Moon

글을 읽으며 전통 불교학자분들의 의견이 몹시 궁금해지는군요.제가 일단 불교학자가 아니라서요. 더더욱 이쪽 견해로도 의견을 듣기를 바래봅니다.패북에 고수님들 많아 보이던대요.

 · 2 y

Chang-Seong Hong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에는 이렇다고 하더라, 저 경에는 저렇다고 하더라는 식의 의견에는 별로 재미를 못 느낍니다. 제가 그런 내용들을 대충 다 알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내용들이 왜 옳은가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우리 시대의 상식에 맞도록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전개하며 논쟁에 임하시는 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스님께서 좀 많이 이쪽으로 초대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2 y

Why Moon

저랑 생각이 좀 다르군요. 저는 경을 의지해서 해석하는 것을 흥미있어해서요.알겠습니다.

 · 2 y

Why Moon

다시 생각해 보니 경보다는 논장에 의거해서 토론 하는 것이 현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접근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생각을 돌려보니 공부거리가 풍부해지네요)

 · 2 y

Chang Su Hee Elena

교수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도 주석이 있고 또 해석학이 있을펜데 어떻게 저희들이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 2 y

Chang Su Hee Elena

경에 대한 논쟁이 해석학문야겟죠

 · 2 y

Chang-Seong Hong

Chang Su Hee Elena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의 권위를 100% 받아들이고 학문하면 불교학자이겠고, 철학자 나름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은 이 세상 어느 권위도 일단 도전해 보고 나서 그것에 동의하고 난 후에야 그 권위를 겨우 인정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친구하기 별로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 2 y

Sung Soon Kim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심신의 상태’로 정의하면 배제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을 것 같네요. 불성론을 제기한 대승논사들이 초기 교리와 충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제기했던 이유는 ‘평등’과 ‘보편’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에 배치될 수 있는 거죠.

 · 2 y

Chang-Seong Hong

저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불성론의 방편으로서의 효용에 대해서 찬성한다는 입장을 실은 이미 (3년전에 쓰고 작년에 영어로 써서 발표했지만)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습니다. 동의합니다. 단지 원고지 20여매에 그 내용까지 담지 못했을 뿐입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 2 y

Chang-Seong Hong

다만, 그렇게 적합한 심신의 상태가 지구상 수십억의 인구 모두에 똑같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 개개인에 따라 또 한 개인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2 y

Chang-Seong Hong

우려하신 내용을 제 최종 원고에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불성의 보편적 존재가 제법무아와 공의 가르침과 충둘하기 때문에, 비록 불성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가진 방편으로서의 효용은 인정하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내용으로 볼 수는 없어서 제 원래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2 y

김광현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남방 상좌부 불교를 수승하게 생각하시는 많은 분들이 ‘무아’의 관점에서 대승의 여래장이나 불성론이 힌두교나 다름없다고 비판하는데, 남방 아비달마에서 ‘열반’을 무위법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또 어떻게 봐야 하나 뭐 이런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 2 y

Chang-Seong Hong

좋은 질문 고맙습니다. 저는 실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을 전공하는 서양철학자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주로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이 저를 '재미 불교학자'라고들 하시는데, 저는 감히 불교학자축에는 못 끼고 불교를 철학으로 연구하는 서양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대해서도 그것을 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월간불광에 짧게 줄여서 발표하기도 했었는데, 원래 더 상세하고 덜 점잖게 쓰여진 글… See more

 · 2 y · Edited

마성

홍창성 교수님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을 페북에 올려 주셔서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성(佛性, Buddha-nature)을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의 동의어로, 불변하는 아뜨만(ātman)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교수님께서 “모든 유정물에 고정불변하다는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신선해 보입니다. 특히 이 글에서 불성도 조건에 의해 생성되고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논증은 크게 돋보입니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나는 불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홍 교수님께서 말하는 “불성은 모든 유정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을 가진 아뜨만과 같은 실체가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불교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진짜로 불성은 존재하는구나!’라고 오해할 염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후반부의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비약적인 것 같습니다. 한정된 지면 관계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 y

Chang-Seong Hong

고맙습니다. 예, 후반부는 지면 관계로 제대로 논증을 전개하지 못했습니다. 이 논증은 제가 20년전 완성한 박사학위논문에서부터 갈고 닦아서 자신이 있는 부분인데, 원고지 불과 몇 매에 정리하자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희집 유선경 교수도 제가 '불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오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물론 스님은 그렇지 않으시지만요), 제가 고집해서 그냥 놔두었습니다. 아무래도 표현을 더 다듬어야겠습니다. 2년 전 깨달음 논쟁 당시 제가 미디어붓다에 발표했던 다음의 논문에 더 자세한 논증이 있습니다.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8330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MEDIABUDDHA.NET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미디어붓다:“‘참나’ ‘참마음’은 ‘2차 지시어’”

 · 2 y

마성

답변 감사합니다. 홍 교수님의 지난 글들을 찾아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 2 y

Chang-Seong Hong

마성 스님의 지적에 도움받아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발표될 글에서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 2 y

Why Moon

Jun Bark

 · 2 y

Lee Minji

😊 공유부터 하고^^

차분히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