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0
역과 모퉁이의 신학 | 이정용 - 교보문고
역과 모퉁이의 신학 | 이정용 - 교보문고
역과 모퉁이의 신학
육성으로 듣는 이정용 박사의 삶과 신학 이야기
이정용 저자(글) · 임찬순 엮음
동연 · 2023년 03월 19일
10.0
(1개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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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개신교) > 신학/기독교사상 > 신학일반
“이 책을 통해 부활하는 이정용의 삶과 메시지는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신학과 영성의 빈곤 시대에 쉼과 평화를 주는 나무가 될 것이며,
그 아래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선사할 것이다.”
이 책에서 임찬순 박사가 묶어 낸 이정용 박사의 육성은 그의 학문적 공과 신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동양적 해석학을 다루면서도 한국적 신학과 영성의 숨 자리를 다양하게 접근해 온 이정용의 학문 여정은 더욱 정진하고 다듬어가야 할 우리의 신학적 과제를 제시한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때에 있다. 과연 누가 이정용처럼 동과 서, 신학과 목회, 정의와 평화, 하늘과 땅, 그리고 소외되고 밀려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그렇게 치열하게 해냈는가?
역사적인 애환과 갈등 한복판 이민자의 척박한 광야 길을 걸어간 이정용은 스스로 주변인을 자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소명으로 자기 개혁을 살아낸 선각자였기에, 지금 그 신학의 폭과 깊이의 공명이 더욱 웅장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책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이정용의 육성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신학하는 사명을 가진 목회자들과 교회에 주는 진정한 ‘살아내는 신학’(Doing & Living Theology)의 지침서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정용
인물정보
종교인
1935년 평안남도 출생으로, 한국동란 직후 도미하여 오하이오 핀들레이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후 개럿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보스턴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1964년 흑인 대학인 하워드대학의 전문사서로 근무하면서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한국농촌목회자 평생교육을 위한 재단’(Fund for Continuing Education for Korean Ministers)을 설립하여 농촌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1968년부터 오토바인대학, 노스다코타주립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독교 및 세계종교를 가르쳤다. 1989년 드루신학교 및 대학원 교수로 취임하여 1996년 소천까지 제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연합감리교회 목사로 오하이오와 노스다코타에서 목회하였으며, 풀브라이트 재단의 지원으로 이화여대 및 서울대 교환교수로 가르쳤고 감신대, 경희대에서 강의하였다. 미국 종교학회(AAR)에서도 한국신학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주요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Marginality를 필두로 Theology of Change, Embracing Change 등 20여 권의 명저를 남겼다. 이정용은 ‘역’(易)의 원리를 통해 신학을 재구성함으로써 서구의 전통신학을 동양적 시각으로 재해석, 해체 및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또한 민중, 이민자, 소수자 등의 억압을 하나님 고난의 신학으로 재해석하는 반면, ‘주변인(the marginals) 신학’을 통해 그들의 창조성을 드러냄으로써 흑인신학, 해방신학, 라틴아메리카신학, 여성신학 등과 비견되는 신학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20여 권의 저서 중 최근 출간된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까지 7-8편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
펼치기
역과 모퉁이의 신학(큰글자책)
그 길을 걸으라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
민중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
엮음 임찬순
인물정보
목회자/목사
서울대 철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벨기에 루뱅대 연수 후 미국 뉴저지 드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와 박사(Ph.D.)를 마쳤다. 현재는 텍사스 알링턴에 있는 언약감리교회(UMC of the Covenant)를 섬기고 있다. 재미 신학자 고 이정용 박사의 제자로 ‘정용리안’으로 불렸으며, 역서로는 줄리아 칭의 『유교와 기독교』, 이정용의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와 목회현장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성시집 『바람의 노래, 목자의 노래』가 있다.
접기
역과 모퉁이의 신학(큰글자책)
다시 곱씹어 보는 영성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
목차
추천의 글 _ 정진홍
머리말
1장 ╻ 삶과 신학적 사유의 고향: 해방과 6.25, 그 언저리 - 어린 시절부터 미국 유학 전까지 〈고향의 노래〉
2장 ╻소명과 화해, 목회와 학문의 길 - 미국행부터 공부하고, 가르치며, 목회하며
3장 ╻학문의 길, 가르침의 길 - 신학교에서 주립대까지, 신학에서 종교학까지, 다시 신학교로
4장 ╻목회의 길에서- 미국 교회 목회와 한인 교회 개척과 작은 공동체를 향한 열정 〈광야의 노래〉
5장 ╻ 이정용 박사학위 논문 이야기 - 신의 고통: 한국인이 발견한 하나님의 마음
6장 ╻ 『주역』과 신학 이야기: 신학적 사유의 새 패러다임 - 영원한 사유의 원형을 찾아서
7장 ╻삶과 죽음의 이야기: 영원한 종교적 테마, 죽음 - 동서양의 사생관을 넘어서
8장 ╻신학자가 들려주는 샤머니즘 이야기: 한국인의 사유와 종교의 원형인 샤머니즘 -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상생과 미래적 발전을 위하여
9장 ╻모퉁이 이야기, 중심 이야기: 모퉁이성, 다문화 신학의 열쇠 - 정의와 해방을 넘어서 사랑에 이르기를 〈민들레의 노래〉
10장 ╻이정용 박사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목회의 여정
부록 ╻장례식에서 읽은 조시 - 이정용(李正勇) 박사님 가시는 길에 부쳐
편집 후기
접기
추천사
정희성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정용 박사님의 글은 자유롭고 넉넉하고 맑은 증류수 같다. 서구적 사유가 신학을 압도하였던 시대였음에도, 한 그늘 · 한 어둠도 없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하신 이를 본받아, 자신도 “나는 나다”를 몸에 새기며 살아내신 때문이다. 그래서 박사님의 글은 대양처럼 어머니 품처럼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한다. 선생님의 글을 한 편의 시처럼 읽게 해 준 임찬순 박사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찬석 교수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정용 박사는 ‘뿌리’와 ‘경험’을 마중물로 미국 땅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역’과 ‘모퉁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아시아와 한국적 신학을 놀랍게 창출하였다. 그분이 키워내서 활짝 꽃피운 노란 민들레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과 아시아 교회에 희망과 사랑의 촛불이 될 것을 확신하기에 평신도들과 신학도들에게 일독을 권면한다. 그것도 힘주어서!
민들레 이정용 선생님의 구술들을 풀어 정리하느라 고생했다. 심이 뜻 깊은 책이 되었구나! 그 어떤 책보다 민들레 이정용의 삶과 신앙과 신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사랑스럽기만 하다. 수고했고 고맙다, 찬순아!
김흥규 목사 (인천 내리교회)
이정용 선생님은 한국인의 심혼과 동양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신학을 하신 분이다. 그의 제자 임찬순 목사는 오랫동안 기억의 창고에 유폐된 선생님이 살아온 내력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필체로 풀어내고 있다. 이것은 스승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한 제자의 눈물겨운 기억 투쟁이다.
홍기준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이정용은 동양적 사유체계인 「주역」을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사용해 동서 용합을 시도한 신학자였다. 1970년대 초반 경희대학교에 초빙되어 강의했고 설립자인 조영식의 「오토피아」(1975)의 영문 번역에 참여했다. 조영식과 이정용의 삶의 괘적은 목회자의 길에서 교육자로, 화학도에서 목회자의 길로 정반대였으나, 동양 사상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고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정용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하는 것에 중심을 둘 때, 새로운 신학이 발달할 수 있다. 죽어서 저세상에서의 구원이나 영혼의 구원보다, 이 땅 위에서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자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즉, 새로운 구원관, 전체론적 구원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정확하게 조영식의 사상과 일치한다. 조영식은 생전에 “값있고 보람있게 살자”라고 외쳤다. 「미래를 여는 창, 조영식 코드」(2022)의 저자로서 이 책의 출판이 무척 반갑다. 이 책은 이정용의 삶과 사상이 한국인들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최문형 교수/작가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예수는 낮은 데로 오셨다. 비천한 자들과 어울리고 가난하게 사셨다. 가장 참혹하고 치욕적인 형을 받아 돌아가셨다. 한국교회는 높고 웅장하고 거대하다. 구원이라는 울타리가 있고 이단이라는 금지된 문이 많다. 울타리와 문을 넘어 예수가 들어오실 수가 있을까? 창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두가 그의 솜씨다. 거기에는 중앙도 모퉁이도 없다. 이상한 것도 정상인 것도 없다. 여성도 남성도, 백인도 유색인도 없다. 생명만 있을 뿐,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그 비밀을 창조주께 받은 분이 있다. 이정용 박사이다. 그는 주님 곁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까? 제자인 우리는 예수와 이정용 박사의 발자취를 그저 따를 뿐이다.
서철 목사 (동대문교회)
“‘마음이 순례길에 오른 사람”(시 84:5). 임찬순 목사는 이정용 선생님이 주역의 눈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한 주옥같은 글들을 순례자의 마음으로 잘 엮었습니다. 이정용 선생님이 사용하신 신학의 열쇠 말은 정태적(static)이거나 과정(process)과는 다른 변화(change)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중심부가 아닌 모퉁이에서 일어나 중심부를 뒤집는 혁명적인 생명력입니다. 마치 순례길을 걷는 자는 땀을 흘리나 순례길을 만든 자는 피를 흘리듯이, 모퉁이가 머릿돌이 되어서 중심부를 뒤집는 일도 피를 흘리는 순례길의 길벗 같습니다. 스승 이정용 선생님과 제자 임찬순 목사도 순례길의 좋은 길벗입니다. 많은 사람이 두 순례자의 글을 읽고 함께 ‘순례길에 오르는 순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이동섭 목사 (천안 갈릴리교회)
이정용과 임찬순이 풀어가는(마 18:18) 신명난 잔치,
신과 심정이 통한 자들이 부르는 자유의 노래,
신을 품은 자들이 추는 환희의 춤, 덩실덩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이 열리길 비오!
도상원 목사 (대뉴저지 연회 라리탄 쇼어 Raritan Shore 지방 감리사)
이정용 교수가 이끌던 드루신학교의 한국신학연구원에는 박사 과정 한인 학생들이 북적였고, 신비롭고 말 못 할 활기가 있었다. 영어에 주눅 들어 있던 학생들에게 어눌한 영어로 말씀하셨다. “(우리가) 흑인들의 고유한 영어를 흉내내려고 합니다. 콩글리쉬에 주눅 들지 말고 모두가 알아들을 때까지 당당하게 말하십시오.”
이는 권위 있는 해방의 메시지였다. 이원론적 세계관이 바탕이 된 서구 신학의 치명적인 한계는 음양, 즉 주역의 세계관을 통해 새로운 신학을 구성함으로써 복음의 진가를 살려내야 한다는 그분의 돌발적 선언은 신학적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민들레는 푸른 잔디 속에서 수없이 목이 잘려 나가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온 들판에 퍼져간다. 미국 속 아시안들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그려낸 민들레 이야기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비전으로 심겨졌다. 그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제자들은 길을 잃고 흩어졌어도, 이정용의 정신세계는 다이아몬드처럼 압축되고 정화되어 부활한 예수처럼 나타나 지금도 그들의 삶을 이끌고 있다.
가신 지 26년이 지났지만, 충성스러운 제자 임찬순을 통해 이정용의 삶과 메시지는 마가복음처럼 문서화된다. 부활하는 이정용의 한국 신학(Korean Theology)은 겨자씨처럼 자라나 신학과 영성의 빈곤 시대에 쉼과 평화를 주는 나무가 되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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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역易과 모퉁이의 신학」이 책으로 나오는 것이 이정용의 신학과 목회와 삶이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신학적 여정의 마지막 여로에서 이 박사가 외친 대로 새로운 신앙 운동, 새로운 교회 운동, 새로운 신학 운동이 태동하고 일어나는 시간이 열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글을 세상으로 내놓는 필자에게는 더없는 영광과 은혜가 될 것이다. 이정용 박사는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영감과 감동을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부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머리말〉 중에서
하나님이 내게 준 선물은 지혜도, 학술도, 친구도 아니고, 부모도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내 체험’입니다. 그때의 그 체험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sacred)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성경보다 더 거룩한(sacred) 것은 내 체험입니다. 그 내 체험에 하나님이 같이 있었다면,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은 내가 혼자 갖고 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눠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체험은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준 것은 궁극적으로 내 체험, 그것밖에 없습니다. 죽어도 그것만은 갖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1장_ 삶과 신학적 사유의 고향: 해방과 6.25, 그 언저리〉 중에서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어쩌면 신학교 안 다니는 것이 목회를 하는 데 오히려 잘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회를 하다가 드루로 오면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다른 목회자를 아무리 구하려고 해도 없어서 결국에는 그 교회는 침례교로 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하고 결혼한 미국분들도 꽤나 있었는데, 그다음에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한인 교회에 대한 제 경험입니다.
〈2장_ 소명과 화해, 목회와 학문의 길〉 중에서
책을 한 권 읽어도 그 본질을 파악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빨리하고, 많이 한다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빨리 가서 1분을 아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공부도 즐기면서 해야 합니다. 공부할 때도 될 수 있으면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가르칠 때도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할 때도 정말 여유를 갖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장_ 학문의 길, 가르침의 길〉 중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근본주의적 생각(fundamentalist ideas)입니다. 근본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만 아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늘 자신을 개방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교수의 자세입니다.
〈4장_ 목회의 길에서〉 중에서
수난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로 다루었지만, 환경이나 세계까지 확대시켜서 생각할 수가 없는가 하는 질문을 지금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경향으로 본다면, 서구적 신학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였지, 그 이상은 생각하거나 적용해 보려고 시도도 안 하던 시절입니다.
〈5장_ 이정용 박사학위 논문 이야기〉 중에서
동양에서 동양 것을 찾고, 서양 것은 서양에서 찾아야 합니다. 서양에서 동양 것을 찾으면 핀트가 어긋납니다. 동양에서 동양을 찾아야 하는 법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서양에서 동양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칼 융은 이렇게 서양인들이 무턱대고 동양적인 것을 찾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6장_ 「주역」과 신학 이야기: 신학적 사유의 새 패러다임〉 중에서
몸과 의식, 영이 서로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동양적인 사고방식인데, 서양에서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중요하고, 신체적인 몸(physical body)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차적인(secondary) 것으로 봅니다. 그런 면에서는 좀 다릅니다. 융은 만달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한 원형에 대해서도 많이 쓰곤 했습니다.
〈7장_ 삶과 죽음의 이야기: 영원한 종교적 테마, 죽음〉 중에서
무속은 민속종교(folk religion)랑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다 감당하려고 하다가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내 책임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이것이 오히려 현대의 인간이 소외된 사회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8장_ 신학자가 들려주는 샤머니즘 이야기: 한국인의 사유와 종교의 원형인 샤머니즘〉 중에서
기독교인이 진정으로 정체성이 확정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가서는 술 먹고 할 일을 다 합니다. 한국 교인들이 이런 면에서 이중성이 가장 심합니다. 교회 와서는 울고불고 회개하면서 기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관계가 없이 세속적으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에 낀(in between) 관계입니다.
〈9장_ 모퉁이 이야기, 중심 이야기: 모퉁이성, 다문화 신학의 열쇠〉 중에서
그의 신학은 관계성을 존재보다 우위에 놓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자연까지도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섭리 속에 들어오는 통째로 보는(holistic approach) 우주론적 인간학을 지향하게 했다. 그것은 결국은 그가 자신을 이루어가는 내면적 변화 과정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원형(the archetype of the self)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10장_ 이정용 박사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목회의 여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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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과 모퉁이의 신학
육성으로 듣는 이정용 박사의 삶과 신학 이야기
이정용 저자(글) · 임찬순 엮음
동연 · 2023년 03월 19일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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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과 모퉁이의 신학 사이즈 비교152x223단위 : mm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개신교) > 신학/기독교사상 > 신학일반
“이 책을 통해 부활하는 이정용의 삶과 메시지는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신학과 영성의 빈곤 시대에 쉼과 평화를 주는 나무가 될 것이며,
그 아래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선사할 것이다.”
이 책에서 임찬순 박사가 묶어 낸 이정용 박사의 육성은 그의 학문적 공과 신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동양적 해석학을 다루면서도 한국적 신학과 영성의 숨 자리를 다양하게 접근해 온 이정용의 학문 여정은 더욱 정진하고 다듬어가야 할 우리의 신학적 과제를 제시한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지금 우리는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운 때에 있다. 과연 누가 이정용처럼 동과 서, 신학과 목회, 정의와 평화, 하늘과 땅, 그리고 소외되고 밀려난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그렇게 치열하게 해냈는가?
역사적인 애환과 갈등 한복판 이민자의 척박한 광야 길을 걸어간 이정용은 스스로 주변인을 자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소명으로 자기 개혁을 살아낸 선각자였기에, 지금 그 신학의 폭과 깊이의 공명이 더욱 웅장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책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이정용의 육성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신학하는 사명을 가진 목회자들과 교회에 주는 진정한 ‘살아내는 신학’(Doing & Living Theology)의 지침서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정용
인물정보
종교인
1935년 평안남도 출생으로, 한국동란 직후 도미하여 오하이오 핀들레이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후 개럿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보스턴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1964년 흑인 대학인 하워드대학의 전문사서로 근무하면서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했으며, ‘한국농촌목회자 평생교육을 위한 재단’(Fund for Continuing Education for Korean Ministers)을 설립하여 농촌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1968년부터 오토바인대학, 노스다코타주립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독교 및 세계종교를 가르쳤다. 1989년 드루신학교 및 대학원 교수로 취임하여 1996년 소천까지 제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연합감리교회 목사로 오하이오와 노스다코타에서 목회하였으며, 풀브라이트 재단의 지원으로 이화여대 및 서울대 교환교수로 가르쳤고 감신대, 경희대에서 강의하였다. 미국 종교학회(AAR)에서도 한국신학의 발전과 정착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주요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했던 Marginality를 필두로 Theology of Change, Embracing Change 등 20여 권의 명저를 남겼다. 이정용은 ‘역’(易)의 원리를 통해 신학을 재구성함으로써 서구의 전통신학을 동양적 시각으로 재해석, 해체 및 재구성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또한 민중, 이민자, 소수자 등의 억압을 하나님 고난의 신학으로 재해석하는 반면, ‘주변인(the marginals) 신학’을 통해 그들의 창조성을 드러냄으로써 흑인신학, 해방신학, 라틴아메리카신학, 여성신학 등과 비견되는 신학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20여 권의 저서 중 최근 출간된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까지 7-8편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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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
엮음 임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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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목사
서울대 철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벨기에 루뱅대 연수 후 미국 뉴저지 드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와 박사(Ph.D.)를 마쳤다. 현재는 텍사스 알링턴에 있는 언약감리교회(UMC of the Covenant)를 섬기고 있다. 재미 신학자 고 이정용 박사의 제자로 ‘정용리안’으로 불렸으며, 역서로는 줄리아 칭의 『유교와 기독교』, 이정용의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와 목회현장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성시집 『바람의 노래, 목자의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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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과 모퉁이의 신학(큰글자책)
다시 곱씹어 보는 영성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
목차
추천의 글 _ 정진홍
머리말
1장 ╻ 삶과 신학적 사유의 고향: 해방과 6.25, 그 언저리 - 어린 시절부터 미국 유학 전까지 〈고향의 노래〉
2장 ╻소명과 화해, 목회와 학문의 길 - 미국행부터 공부하고, 가르치며, 목회하며
3장 ╻학문의 길, 가르침의 길 - 신학교에서 주립대까지, 신학에서 종교학까지, 다시 신학교로
4장 ╻목회의 길에서- 미국 교회 목회와 한인 교회 개척과 작은 공동체를 향한 열정 〈광야의 노래〉
5장 ╻ 이정용 박사학위 논문 이야기 - 신의 고통: 한국인이 발견한 하나님의 마음
6장 ╻ 『주역』과 신학 이야기: 신학적 사유의 새 패러다임 - 영원한 사유의 원형을 찾아서
7장 ╻삶과 죽음의 이야기: 영원한 종교적 테마, 죽음 - 동서양의 사생관을 넘어서
8장 ╻신학자가 들려주는 샤머니즘 이야기: 한국인의 사유와 종교의 원형인 샤머니즘 -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상생과 미래적 발전을 위하여
9장 ╻모퉁이 이야기, 중심 이야기: 모퉁이성, 다문화 신학의 열쇠 - 정의와 해방을 넘어서 사랑에 이르기를 〈민들레의 노래〉
10장 ╻이정용 박사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목회의 여정
부록 ╻장례식에서 읽은 조시 - 이정용(李正勇) 박사님 가시는 길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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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정희성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정용 박사님의 글은 자유롭고 넉넉하고 맑은 증류수 같다. 서구적 사유가 신학을 압도하였던 시대였음에도, 한 그늘 · 한 어둠도 없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하신 이를 본받아, 자신도 “나는 나다”를 몸에 새기며 살아내신 때문이다. 그래서 박사님의 글은 대양처럼 어머니 품처럼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한다. 선생님의 글을 한 편의 시처럼 읽게 해 준 임찬순 박사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찬석 교수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정용 박사는 ‘뿌리’와 ‘경험’을 마중물로 미국 땅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역’과 ‘모퉁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아시아와 한국적 신학을 놀랍게 창출하였다. 그분이 키워내서 활짝 꽃피운 노란 민들레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과 아시아 교회에 희망과 사랑의 촛불이 될 것을 확신하기에 평신도들과 신학도들에게 일독을 권면한다. 그것도 힘주어서!
민들레 이정용 선생님의 구술들을 풀어 정리하느라 고생했다. 심이 뜻 깊은 책이 되었구나! 그 어떤 책보다 민들레 이정용의 삶과 신앙과 신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사랑스럽기만 하다. 수고했고 고맙다, 찬순아!
김흥규 목사 (인천 내리교회)
이정용 선생님은 한국인의 심혼과 동양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신학을 하신 분이다. 그의 제자 임찬순 목사는 오랫동안 기억의 창고에 유폐된 선생님이 살아온 내력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필체로 풀어내고 있다. 이것은 스승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한 제자의 눈물겨운 기억 투쟁이다.
홍기준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이정용은 동양적 사유체계인 「주역」을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사용해 동서 용합을 시도한 신학자였다. 1970년대 초반 경희대학교에 초빙되어 강의했고 설립자인 조영식의 「오토피아」(1975)의 영문 번역에 참여했다. 조영식과 이정용의 삶의 괘적은 목회자의 길에서 교육자로, 화학도에서 목회자의 길로 정반대였으나, 동양 사상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고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정용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하는 것에 중심을 둘 때, 새로운 신학이 발달할 수 있다. 죽어서 저세상에서의 구원이나 영혼의 구원보다, 이 땅 위에서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자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즉, 새로운 구원관, 전체론적 구원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정확하게 조영식의 사상과 일치한다. 조영식은 생전에 “값있고 보람있게 살자”라고 외쳤다. 「미래를 여는 창, 조영식 코드」(2022)의 저자로서 이 책의 출판이 무척 반갑다. 이 책은 이정용의 삶과 사상이 한국인들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최문형 교수/작가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예수는 낮은 데로 오셨다. 비천한 자들과 어울리고 가난하게 사셨다. 가장 참혹하고 치욕적인 형을 받아 돌아가셨다. 한국교회는 높고 웅장하고 거대하다. 구원이라는 울타리가 있고 이단이라는 금지된 문이 많다. 울타리와 문을 넘어 예수가 들어오실 수가 있을까? 창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두가 그의 솜씨다. 거기에는 중앙도 모퉁이도 없다. 이상한 것도 정상인 것도 없다. 여성도 남성도, 백인도 유색인도 없다. 생명만 있을 뿐,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그 비밀을 창조주께 받은 분이 있다. 이정용 박사이다. 그는 주님 곁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까? 제자인 우리는 예수와 이정용 박사의 발자취를 그저 따를 뿐이다.
서철 목사 (동대문교회)
“‘마음이 순례길에 오른 사람”(시 84:5). 임찬순 목사는 이정용 선생님이 주역의 눈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한 주옥같은 글들을 순례자의 마음으로 잘 엮었습니다. 이정용 선생님이 사용하신 신학의 열쇠 말은 정태적(static)이거나 과정(process)과는 다른 변화(change)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중심부가 아닌 모퉁이에서 일어나 중심부를 뒤집는 혁명적인 생명력입니다. 마치 순례길을 걷는 자는 땀을 흘리나 순례길을 만든 자는 피를 흘리듯이, 모퉁이가 머릿돌이 되어서 중심부를 뒤집는 일도 피를 흘리는 순례길의 길벗 같습니다. 스승 이정용 선생님과 제자 임찬순 목사도 순례길의 좋은 길벗입니다. 많은 사람이 두 순례자의 글을 읽고 함께 ‘순례길에 오르는 순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이동섭 목사 (천안 갈릴리교회)
이정용과 임찬순이 풀어가는(마 18:18) 신명난 잔치,
신과 심정이 통한 자들이 부르는 자유의 노래,
신을 품은 자들이 추는 환희의 춤, 덩실덩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이 열리길 비오!
도상원 목사 (대뉴저지 연회 라리탄 쇼어 Raritan Shore 지방 감리사)
이정용 교수가 이끌던 드루신학교의 한국신학연구원에는 박사 과정 한인 학생들이 북적였고, 신비롭고 말 못 할 활기가 있었다. 영어에 주눅 들어 있던 학생들에게 어눌한 영어로 말씀하셨다. “(우리가) 흑인들의 고유한 영어를 흉내내려고 합니다. 콩글리쉬에 주눅 들지 말고 모두가 알아들을 때까지 당당하게 말하십시오.”
이는 권위 있는 해방의 메시지였다. 이원론적 세계관이 바탕이 된 서구 신학의 치명적인 한계는 음양, 즉 주역의 세계관을 통해 새로운 신학을 구성함으로써 복음의 진가를 살려내야 한다는 그분의 돌발적 선언은 신학적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민들레는 푸른 잔디 속에서 수없이 목이 잘려 나가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온 들판에 퍼져간다. 미국 속 아시안들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그려낸 민들레 이야기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비전으로 심겨졌다. 그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제자들은 길을 잃고 흩어졌어도, 이정용의 정신세계는 다이아몬드처럼 압축되고 정화되어 부활한 예수처럼 나타나 지금도 그들의 삶을 이끌고 있다.
가신 지 26년이 지났지만, 충성스러운 제자 임찬순을 통해 이정용의 삶과 메시지는 마가복음처럼 문서화된다. 부활하는 이정용의 한국 신학(Korean Theology)은 겨자씨처럼 자라나 신학과 영성의 빈곤 시대에 쉼과 평화를 주는 나무가 되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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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역易과 모퉁이의 신학」이 책으로 나오는 것이 이정용의 신학과 목회와 삶이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신학적 여정의 마지막 여로에서 이 박사가 외친 대로 새로운 신앙 운동, 새로운 교회 운동, 새로운 신학 운동이 태동하고 일어나는 시간이 열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글을 세상으로 내놓는 필자에게는 더없는 영광과 은혜가 될 것이다. 이정용 박사는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영감과 감동을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부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머리말〉 중에서
하나님이 내게 준 선물은 지혜도, 학술도, 친구도 아니고, 부모도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내 체험’입니다. 그때의 그 체험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sacred)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성경보다 더 거룩한(sacred) 것은 내 체험입니다. 그 내 체험에 하나님이 같이 있었다면,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은 내가 혼자 갖고 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눠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체험은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준 것은 궁극적으로 내 체험, 그것밖에 없습니다. 죽어도 그것만은 갖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1장_ 삶과 신학적 사유의 고향: 해방과 6.25, 그 언저리〉 중에서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어쩌면 신학교 안 다니는 것이 목회를 하는 데 오히려 잘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회를 하다가 드루로 오면서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다른 목회자를 아무리 구하려고 해도 없어서 결국에는 그 교회는 침례교로 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하고 결혼한 미국분들도 꽤나 있었는데, 그다음에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한인 교회에 대한 제 경험입니다.
〈2장_ 소명과 화해, 목회와 학문의 길〉 중에서
책을 한 권 읽어도 그 본질을 파악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빨리하고, 많이 한다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빨리 가서 1분을 아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공부도 즐기면서 해야 합니다. 공부할 때도 될 수 있으면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가르칠 때도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할 때도 정말 여유를 갖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장_ 학문의 길, 가르침의 길〉 중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근본주의적 생각(fundamentalist ideas)입니다. 근본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만 아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늘 자신을 개방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교수의 자세입니다.
〈4장_ 목회의 길에서〉 중에서
수난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로 다루었지만, 환경이나 세계까지 확대시켜서 생각할 수가 없는가 하는 질문을 지금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경향으로 본다면, 서구적 신학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였지, 그 이상은 생각하거나 적용해 보려고 시도도 안 하던 시절입니다.
〈5장_ 이정용 박사학위 논문 이야기〉 중에서
동양에서 동양 것을 찾고, 서양 것은 서양에서 찾아야 합니다. 서양에서 동양 것을 찾으면 핀트가 어긋납니다. 동양에서 동양을 찾아야 하는 법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서양에서 동양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칼 융은 이렇게 서양인들이 무턱대고 동양적인 것을 찾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6장_ 「주역」과 신학 이야기: 신학적 사유의 새 패러다임〉 중에서
몸과 의식, 영이 서로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동양적인 사고방식인데, 서양에서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중요하고, 신체적인 몸(physical body)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차적인(secondary) 것으로 봅니다. 그런 면에서는 좀 다릅니다. 융은 만달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한 원형에 대해서도 많이 쓰곤 했습니다.
〈7장_ 삶과 죽음의 이야기: 영원한 종교적 테마, 죽음〉 중에서
무속은 민속종교(folk religion)랑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다 감당하려고 하다가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내 책임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이것이 오히려 현대의 인간이 소외된 사회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8장_ 신학자가 들려주는 샤머니즘 이야기: 한국인의 사유와 종교의 원형인 샤머니즘〉 중에서
기독교인이 진정으로 정체성이 확정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가서는 술 먹고 할 일을 다 합니다. 한국 교인들이 이런 면에서 이중성이 가장 심합니다. 교회 와서는 울고불고 회개하면서 기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관계가 없이 세속적으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에 낀(in between) 관계입니다.
〈9장_ 모퉁이 이야기, 중심 이야기: 모퉁이성, 다문화 신학의 열쇠〉 중에서
그의 신학은 관계성을 존재보다 우위에 놓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자연까지도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섭리 속에 들어오는 통째로 보는(holistic approach) 우주론적 인간학을 지향하게 했다. 그것은 결국은 그가 자신을 이루어가는 내면적 변화 과정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원형(the archetype of the self)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10장_ 이정용 박사의 생애와 신학 그리고 목회의 여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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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Kang-nam Oh - “탄핵정국이 끝날 때까지 매주 토요일 비상 기도회를”
Kang-nam Oh - “기도는 미신이니 미신을 타파하자” 이번 계엄사태로 야기된 비상시국을 타계하기 위해 여의도... | Facebook
Kang-nam Oh
·
“기도는 미신이니 미신을 타파하자”
이번 계엄사태로 야기된 비상시국을 타계하기 위해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탄핵정국이 끝날 때까지 매주 토요일 비상 기도회를” 계속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이런 사태가 생긴 이유도 바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 같이 열심히 ‘기도하자’고 합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1952년에 생겨난 성덕도라는 종교 경전 <자성반성 성덕명심도덕경> 24쪽에 보면 인간이 "천지지간 만물의 영장이니"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지 “허공에 명복과 소원성취를 비는 것은 사리사욕에 이끌리는 것"으로 미신이니 “미신을 타파합시다.”고 했습니다.
탄핵정국이 이영훈 목사를 비롯한 이른바 기독교 기도자들의 기도 덕택으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이번 사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는 것은 기도 때문이 아니라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2백만 “깨어 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부기: 저는 진심어린 기도 자체의 효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겠다는 일종의 서원(誓願)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성덕도 - 디지털의성문화대전
성덕도 - 디지털의성문화대전
성덕도
항목 ID | GC05201429 |
---|---|
한자 | 聖德道 |
이칭/별칭 | 성덕도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홍수 |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 종교.
성덕도는 김옥재가 1952년 5월 대구에서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인간의 천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창시되었으며, 천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성 반성’을 실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전통 사상인 유·불·선(儒佛仙)을 독립된 별개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로 파악하고, 이를 체득하기 위하여 정진함을 교리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1960년 성덕도 교화원으로 시작하여 1967년 성덕도로 개칭되었으며, 1992년에는 성덕 학원을 설립하여 성덕 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6월 본원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평천길 106-60번지로 옮겼다. 성덕도는 2013년 1월 현재 전국 12개 교구가 있으며 109개의 교화원과 자치원이 있다.
의성 지역에는 의성 교화원, 안평 교화원, 신평 교화원 세 곳이 있는데, 1954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 의성 최초의 교화원인 의성 교화원이 설립되었다. 도생들은 기운법을 통해 몸의 불편한 곳을 치료하고, 마음을 다친 사람은 마음을 치료하였는데, 그 명성이 자자해지자 의성 각지에서 도생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1970년 안평면에서 도생 김희원을 비롯한 여러 도생들이 현재 안평 교화원 근처에 공간을 얻어 공부를 하다가 도생들의 수가 더 늘어나자 1986년 의성군 안평면 창길리에 안평 교화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1986년 신평 교화원이 설립되었다.
제성일(齊誠日)인 일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자성 신앙 시간을 가지고, 평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양 시간을 가진다. 주로 『자성반성 성덕명심도덕경(自性反省 聖德明心道德經)』을 가지고 수양한다. 형편에 따라 신도들이 모여 산행을 하면서 마음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매년 음력 10월 3일 성도일(成道日)에는 도주 김옥재를 모시는 행사를 거행한다. 수시로 문경시에 위치한 본원에 가서 청소를 하거나 식당일을 하는 등의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
2013년 1월 현재 의성 교화원은 2012년 11월 25일에 부임한 최낙철 담임 교화사가 의성 교화원 및 신평 교화원 두 곳의 담임을 겸하고 있으며, 김태늠 회장과 조석자 총무가 시무하고 있다. 생도는 40여 명이 있다.
안평 교화원은 윤안의 회장과 양태연 총무가 시무하고 있으며 생도는 3명이 있다. 신평 교화원은 의성 교화원의 최낙철 담임 교화사가 담임을 맡고 있으며, 김유수 회장과 조외순 총무가 시무하고 있다. 생도는 30여 명이 있다.
- 『의성 읍지』(의성 읍지 편찬 위원회, 2009)
- 「성덕도(聖德道) 개관(槪觀)」(『신종교 연구』 13, 한국 신종교 학회, 2005)
- 성덕도(http://www.seongdeokdo.org/)
- 인터뷰(성덕도 의성 교화원 교화사, 최낙철, 2013. 1. 20.)
2024/12/15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 QuakerSpeak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 QuakerSpeak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March 18, 2021
==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QuakerSpeak
32.9K subscribers
6,636 views Mar 19, 2021
___
Become a Friends Journal subscriber for only $28
http://fdsj.nl/FJ-Subscribe
Filming and Editing by Rebecca Hamilton-Levi
Music: "Ghost Byzantine" by Blue Dot Sessions
___
Transcript:
Sometimes sitting in worship can be excruciatingly uncomfortable. The way I describe it (and this came to me many, many years ago sitting in worship): I feel like all the other Quaker’s minds are like old Irishsetter dogs; they come into worship, they circle in front of the fire for a couple of times, and they settle into the silence. And my brain is like a chihuahua with the mailman stepping onto the front porch — just yapping yapping yapping yapping yapping. I later learned about the monkey mind of Buddhism but just constant.. constant chatter, so it’s sometimes very, very challenging and also a gift.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I’m Mary Linda McKinney; I live in Nashville, Tennessee; and I’m a longtime member of Nashville Friends Meeting although for the last three years I’ve been on sojourn with a number of other faith communities.
So what does it mean to me to be a bad Quaker? And I actually think I have to step back from that and say what does it mean to be a good Quaker? So I think there are two answers to that: one is cultural and one is spiritual, and I’m bad at being a cultural Quaker. I think I’m good at being a spiritual Quaker.
A Distinction Between Culture and Spirit
I have severe ADD. I always march to my own drummer and my drummer doesn’t play the type of music that anybody around me ever wants to hear. I’m pretty much a misfit in any community that I’m around, and that includes Quakers. I don’t make small talk; I’m blunt but not in the good Quakerly kind of ways of being blunt. Culture is very uncomfortable for me sometimes. But spiritually to be a good Quaker is to seek the will of God as an individual and corporally with others, and from that perspective I feel like I’m a good Quaker because I do want to live my life letting God’s will flow through me and I want to do that in community with others.
Showing Up As You Are
I think God always meets us where we are, and over the decade that I have been a Friend I have been in so many different states of being and meeting for worship was both a comfort to me and a challenge for me but I was being as good a Friend as I knew how to be or was able to be, and being there as my authentic self was what I had to offer to God at the point. So I’ll say that I think when we show up that’s all God requires of us.
___
The views expressed in this video are of the speakers and do not necessarily reflect the views of Friends Journal or its collaborators.
==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March 18, 2021
“What does it mean to me to be a bad Quaker?” Mary Linda McKinney asks. Behind that, though, is another question: what does it mean to be a good Quaker? “I think there are two answers: one is cultural and one is spiritual, and I’m bad at being a cultural Quaker. I think I’m good at being a spiritual Quaker.”
“I always march to my own drummer and my drummer doesn’t play the type of music that anybody around me ever wants to hear,” Mary Linda admits. “I’m pretty much a misfit in any community that I’m around, and that includes Quakers… But spiritually to be a good Quaker is to seek the will of God as an individual and corporally with others, and from that perspective I feel like I’m a good Quaker because I do want to live my life letting God’s will flow through me and I want to do that in community with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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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QuakerSp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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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Ghost Byzantine" by Blue Dot S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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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Sometimes sitting in worship can be excruciatingly uncomfortable. The way I describe it (and this came to me many, many years ago sitting in worship): I feel like all the other Quaker’s minds are like old Irishsetter dogs; they come into worship, they circle in front of the fire for a couple of times, and they settle into the silence. And my brain is like a chihuahua with the mailman stepping onto the front porch — just yapping yapping yapping yapping yapping. I later learned about the monkey mind of Buddhism but just constant.. constant chatter, so it’s sometimes very, very challenging and also a gift.
Am I Good Enough to be a Quaker?
I’m Mary Linda McKinney; I live in Nashville, Tennessee; and I’m a longtime member of Nashville Friends Meeting although for the last three years I’ve been on sojourn with a number of other faith communities.
So what does it mean to me to be a bad Quaker? And I actually think I have to step back from that and say what does it mean to be a good Quaker? So I think there are two answers to that: one is cultural and one is spiritual, and I’m bad at being a cultural Quaker. I think I’m good at being a spiritual Quaker.
A Distinction Between Culture and Spirit
I have severe ADD. I always march to my own drummer and my drummer doesn’t play the type of music that anybody around me ever wants to hear. I’m pretty much a misfit in any community that I’m around, and that includes Quakers. I don’t make small talk; I’m blunt but not in the good Quakerly kind of ways of being blunt. Culture is very uncomfortable for me sometimes. But spiritually to be a good Quaker is to seek the will of God as an individual and corporally with others, and from that perspective I feel like I’m a good Quaker because I do want to live my life letting God’s will flow through me and I want to do that in community with others.
Showing Up As You Are
I think God always meets us where we are, and over the decade that I have been a Friend I have been in so many different states of being and meeting for worship was both a comfort to me and a challenge for me but I was being as good a Friend as I knew how to be or was able to be, and being there as my authentic self was what I had to offer to God at the point. So I’ll say that I think when we show up that’s all God requires of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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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ews expressed in this video are of the speakers and do not necessarily reflect the views of Friends Journal or its collabora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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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 - 에큐메니안
“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 - 에큐메니안
“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제4회 李信상 시상식” 함께 진행하고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에게 공동으로 수여
장성호 | 승인 2024.12.13 04:13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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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信연구소”가 송년 모임과 출판기념회,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을 진행하고, 특히 새로 출판된 이정배·이은선 교수의 책의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평가했다. ⓒ장성호
‘한국 信연구소’의 송년 모임과 출판기념회 및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이 13일(목) 오후 5시 30분부터 감신대 웨슬리채플 제1 세미나실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신학적 사유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저작들의 출판을 축하하고, 사회적 기여를 이룬 개인과 단체를 격려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1부 출판기념회는 안재학 목사(석천교회)의 대금 연주로 시작을 알렸다. 이후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감신대 명예교수)가 출판 경과를 보고하며 네 권의 신간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소개된 책은 이신 목사의 유작 시집 『李信 詩集 돌의 소리』(평사리, 2024 개정증보판)였다. 12년 만에 다시 출간된 이 시집은 초현실주의적 감각의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으며, 1970년대 시인 이신의 독특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 교수는 “이신 목사의 시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통찰로 우리를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바라보게 한다”고 평했다.
다음으로 이은선 교수(세종대 명예교수)의 『神學에서 信學으로: 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信學』(모시는사람들, 2024)이 소개되었다. 이 책은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접점을 탐구하며, 초월적 거룩함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이정배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여성 신학자로서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 학문 담론을 새롭게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 이정배 교수(사진 왼쪽)와 이은선 교수(사진 오른쪽)가 이번에 출간한 책들은 자신의 신학적 여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으며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 ⓒ장성호
서창원 교수(감신대 명예교수)는 이은선 교수의 책을 “기존 신학을 해체하고 믿음의 신학(信學)으로 재구성하는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이라고 극찬했다. 특히 유교와 기독교 경전 간의 비교 분석을 통해 비기독교 경전과 동양 신유학 경전을 비교 설명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과 아시아 여성 신학의 독창적인 계보를 잇는 서적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세 번째로는 이정배 교수 자신의 저서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 空, 公, 共』(신앙과지성사, 2024)이 소개되었다. 이 교수는 이 책을 “동학 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를 재해석해 개벽신학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서창원 교수는 이 교수의 개벽신학에 대해 “기독교 묵시와 동학 사상의 융합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신학적 상상력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이정배 교수의 또 다른 저서 『실패한 제자들, 그 이후』(명작, 2024)는 개인적 성찰을 담은 에세이적 저작으로, “시대와 사건에 대한 성찰을 모아 만든 선물 같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김언종 원장(한국고전번역원장)은 이정배·이은선 두 학자의 저작에 대해 “기독교의 배타성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호평하며, “큰 의심이 큰 진전을 만든다”는 유학자 진원장의 말을 인용해 두 학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하지만 저서에서 『천부경』과 『환단고기』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성이 담보되지 않는 문헌임을 지적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 신앙의 실천을 치하하는 “제4회 李信상 시상식”에서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전 공동대표)가 공동 수상하며 학문과 실천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자리가 되었다. ⓒ장성호
2부에서는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수상자로는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전 공동대표)가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의 홍경숙 상임이사는 “중증장애인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협동조합이 큰 도전에 직면했지만, 이번 수상이 또 한걸음 나아갈 동력이 되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진미리 박사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이상을 향해 느리지만 끊임없이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은선 교수는 “信學은 언어와 믿음의 작업이며, 과거의 지혜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며 이번 행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또한 “한강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 연구소가 책을 내고 여러분을 모신 것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더했다. 이 교수는 “신학적 사유와 역사적 성찰은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성장한다”는 메시지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한국 信연구소의 이번 송년 모임은 신학과 실천, 믿음과 역사, 학문과 사회적 책임을 잇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참석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장성호 webmaster@ecumenian.com
“한국 信연구소” 송년 및 출판기념회, 신학과 실천의 새 지평을 열다“제4회 李信상 시상식” 함께 진행하고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에게 공동으로 수여
장성호 | 승인 2024.12.13 04:13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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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信연구소”가 송년 모임과 출판기념회,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을 진행하고, 특히 새로 출판된 이정배·이은선 교수의 책의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평가했다. ⓒ장성호
‘한국 信연구소’의 송년 모임과 출판기념회 및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이 13일(목) 오후 5시 30분부터 감신대 웨슬리채플 제1 세미나실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신학적 사유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저작들의 출판을 축하하고, 사회적 기여를 이룬 개인과 단체를 격려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1부 출판기념회는 안재학 목사(석천교회)의 대금 연주로 시작을 알렸다. 이후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감신대 명예교수)가 출판 경과를 보고하며 네 권의 신간을 소개했다.
가장 먼저 소개된 책은 이신 목사의 유작 시집 『李信 詩集 돌의 소리』(평사리, 2024 개정증보판)였다. 12년 만에 다시 출간된 이 시집은 초현실주의적 감각의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으며, 1970년대 시인 이신의 독특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 교수는 “이신 목사의 시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통찰로 우리를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바라보게 한다”고 평했다.
다음으로 이은선 교수(세종대 명예교수)의 『神學에서 信學으로: 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信學』(모시는사람들, 2024)이 소개되었다. 이 책은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접점을 탐구하며, 초월적 거룩함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이정배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여성 신학자로서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 학문 담론을 새롭게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 이정배 교수(사진 왼쪽)와 이은선 교수(사진 오른쪽)가 이번에 출간한 책들은 자신의 신학적 여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으며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 ⓒ장성호
서창원 교수(감신대 명예교수)는 이은선 교수의 책을 “기존 신학을 해체하고 믿음의 신학(信學)으로 재구성하는 도전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이라고 극찬했다. 특히 유교와 기독교 경전 간의 비교 분석을 통해 비기독교 경전과 동양 신유학 경전을 비교 설명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과 아시아 여성 신학의 독창적인 계보를 잇는 서적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세 번째로는 이정배 교수 자신의 저서 『역사유비로서의 개벽신학 - 空, 公, 共』(신앙과지성사, 2024)이 소개되었다. 이 교수는 이 책을 “동학 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를 재해석해 개벽신학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서창원 교수는 이 교수의 개벽신학에 대해 “기독교 묵시와 동학 사상의 융합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신학적 상상력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이정배 교수의 또 다른 저서 『실패한 제자들, 그 이후』(명작, 2024)는 개인적 성찰을 담은 에세이적 저작으로, “시대와 사건에 대한 성찰을 모아 만든 선물 같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김언종 원장(한국고전번역원장)은 이정배·이은선 두 학자의 저작에 대해 “기독교의 배타성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호평하며, “큰 의심이 큰 진전을 만든다”는 유학자 진원장의 말을 인용해 두 학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하지만 저서에서 『천부경』과 『환단고기』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성이 담보되지 않는 문헌임을 지적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 신앙의 실천을 치하하는 “제4회 李信상 시상식”에서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전 공동대표)가 공동 수상하며 학문과 실천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자리가 되었다. ⓒ장성호
2부에서는 “제4회 李信상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수상자로는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과 ‘진미리’ 박사(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전 공동대표)가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열손가락 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의 홍경숙 상임이사는 “중증장애인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협동조합이 큰 도전에 직면했지만, 이번 수상이 또 한걸음 나아갈 동력이 되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진미리 박사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는 이상을 향해 느리지만 끊임없이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은선 교수는 “信學은 언어와 믿음의 작업이며, 과거의 지혜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며 이번 행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또한 “한강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 연구소가 책을 내고 여러분을 모신 것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더했다. 이 교수는 “신학적 사유와 역사적 성찰은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성장한다”는 메시지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한국 信연구소의 이번 송년 모임은 신학과 실천, 믿음과 역사, 학문과 사회적 책임을 잇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참석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장성호 webmaster@ecumenian.com
2024/12/14
Philo Kalia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 Facebook
(2) Philo Kalia - 『김지하를 다시 본다』 도서명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 Facebook
Philo Kalia
12 December at 19:31 ·
『김지하를 다시 본다』
도서명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임진택
글쓴이
1부 : 이부영 임진택 염무웅
임동확 서승희 김사인 이재복 홍용희 백현미
정지창 김봉준 채희완 이윤선 심광현 김수현
유홍준 홍성담
김정남 미야타마리에 히라이히사시
박맹수 김용휘 조현범 김선필 이기상 심광섭
주요섭 김소남
김용우 유정길 김영래 김영동 이병철
2부 : 김지하
기획・제작 : 이애주 문화재단,
한국작가회의 50주년 기념사업단
펴낸곳 : 개마서원
펴낸날 : 2024년 11월 18일
ISBN : 979-11-989453-1-0
사 양 : 신국판 152×224/1056쪽/양장제본
가 격 : 54,000원
문 의 : 개마서원(010 7532 6818) 윤혜경
ongoejisin@gmail.com
*시인 김지하 1주기 추모 학술 심포지엄에 이기상 교수의 발표에 토론자로 참여하는 바람에 이 방대한 책의 말석이라도 참여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방금 이 두꺼운 책(1,056쪽)을 받았다.
처음 시들을 통해 충격을 받았고, 동학에 관심을 가지다가 그의 사상기행을 따라 답사하면서 만났고, 한국 미학을 찾다가 김지하를 좀 더 깊이 만났고, 생명 사상에서 더 깊이 만났고, 개벽이라는 이름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다양한 사회적 관심 밑에 개벽 종교, 동학, 기독교, 불교를 종횡무진하며 길을 찾는 시인을 만났다. “흰그늘의 생명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전체 사상을 다시 다시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지하를 다시 본다』는 2023년 5월 6일~7일 김지하 추모 1주기에 열린 《김지하 추모 학술 심포지엄》 토론 자료를 정리하고, 다시 꼭 읽어야 할 김지하의 글을 모아 만든 105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1부에는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임진택, 임동확, 김사인, 홍용희, 정지창, 채희완, 심광현 등 30여 명이 「김지하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이라는 큰 주제 아래 〈김지하의 문학과 예술, 미학〉 〈김지하의 그림과 글씨〉 〈민주화운동과 김지하〉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으로 나누어 주제 발표와 토론을 한 후 정리한 내용과 종합토론을 한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2부에는 「김지하가 남긴 글과 생각-생명의 길・개벽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김지하가 남긴 수많은 글 중에서 꼭 다시 읽어봐야 할 글을 골라 실었다.
암울한 시대에 수많은 젊은이를 위로하고 힘주었던 글 「양심선언」, 「나는 무죄이다」. 로터스상 수상 연설인 「창조적 통일을 위하여」,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등 현시대의 문제점들을 수십 년 앞서서 말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개벽과 생명운동」, 김지하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 쓴 「깊이 잠든 이끼의 샘」, 김지하가 남긴 생명사상을 살필 수 있는 「생명평화선언」, 「화엄개벽의 모심」 등 진지하게 김지하를 다시 보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원고를 모았다.
김지하 시인은 50년 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이는 1974년 11월 18일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 투쟁 속에 연재된 글 ‘고행...1974’가 문제가 되어 다시 감옥에 갇혀야 했던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2022년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져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 중에도 그의 ‘훼절’에 대한 불쾌한 감정으로 그 이름을 기억에서 떨쳐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 이후 탁월한 문학적·예술적·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백척간두의 정치투쟁에 치열하게 임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앞서 생명운동을 주창한 생명사상가였다. 이런 김지하는 결코 폄훼되어서도 안 되고 잊혀서도 안 될 인물이라는 생각에 시인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와 후배들이 뜻을 모아 이 책 『김지하를 다시 본다』를 출판하게 되었다.
김지하 시인은 이미 40여 년 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반 상황들, 즉 생명 경시와 환경 파괴, 기후 위기와 전염병의 창궐, 핵전쟁 위기를 예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인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생명사상이란 화두를 높이 든 생명사상가이자 생명운동가였다. 이런 김지하가 누구였는지 세상에 다시 간곡히 알려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인의 생명 세계관에 입각한 문명 전환의 길에 나서게 하는 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김지하 金芝河(1941.2.4.~ 2022.5.8.)
시인,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이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했고, 1969년『시인』지에 「황톳길」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정치풍자 담시 「오적」을 발표하며 문단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가담해 첫 옥고를 치른 후, ‘오적 필화 사건’ ‘비어 필화 사건’ ‘민청학련 사건’ ‘고행…1974 필화 사건’ 등으로 8년 간의 투옥, 사형선고 등의 고초를 겪었다.
1980년대 이후 생명 사상을 제창하고 생명 운동을 추진했으며, 우리의 고대사상과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75년 제3세계 노벨상이라 불리는‘로터스 특별상’을, 19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사상기행』 회고록인 『흰 그늘의 길 1.2.3』 등이 있다.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투병 중 2022년 5월 8일 타계했다.
엮은이의 글 중에서
그는 횔덜린과 달리 정치투쟁의 일선에서 네 차례나 감옥을 경험하고
죽음의 위험을 통과한 뒤에야 영성과 생명이라는 결정적 화두에 이르렀다.
그 지난한 과정에는 오랜 시간의 가혹한 독방과 치열한 독서와
건곤일척의 사색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아니라 김지하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술회했다.
분단 한국에서 조선의 문화적·이념적 전통을 잇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투쟁을 벌인 김지하야말로 인류 보편적 문화·예술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
김지하는 결국 흰 그늘이 서린 모란꽃을 화사한 채색화로 그리다
세상을 떠났다. 묵란으로 시작하여 묵매로, 그리고 달마도로,
또 수묵산수화와 채색 모란도로 화제를 옮기며 생애 후반,
붓을 놓지 않은 김지하는 실로 위대한 현대 문인화가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단언하건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반 상황들, 생명 경시·환경 파괴·
기후 위기·전염병 창궐·핵전쟁 위기를 보면 김지하의 예언은 맞았다.
이에 대한 대안과 처방을 김지하는 40년 전부터 이미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했고, 모색했고, 제안했고, 실험했고, 행동했고,
그리하여 기진할 때까지 절규했다.
임진택 (창작판소리 명창, 마당극 연출가)
차례
Philo Kalia
12 December at 19:31 ·
『김지하를 다시 본다』
도서명 : 김지하를 다시 본다
엮은이 :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임진택
글쓴이
1부 : 이부영 임진택 염무웅
임동확 서승희 김사인 이재복 홍용희 백현미
정지창 김봉준 채희완 이윤선 심광현 김수현
유홍준 홍성담
김정남 미야타마리에 히라이히사시
박맹수 김용휘 조현범 김선필 이기상 심광섭
주요섭 김소남
김용우 유정길 김영래 김영동 이병철
2부 : 김지하
기획・제작 : 이애주 문화재단,
한국작가회의 50주년 기념사업단
펴낸곳 : 개마서원
펴낸날 : 2024년 11월 18일
ISBN : 979-11-989453-1-0
사 양 : 신국판 152×224/1056쪽/양장제본
가 격 : 54,000원
문 의 : 개마서원(010 7532 6818) 윤혜경
ongoejisin@gmail.com
*시인 김지하 1주기 추모 학술 심포지엄에 이기상 교수의 발표에 토론자로 참여하는 바람에 이 방대한 책의 말석이라도 참여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방금 이 두꺼운 책(1,056쪽)을 받았다.
처음 시들을 통해 충격을 받았고, 동학에 관심을 가지다가 그의 사상기행을 따라 답사하면서 만났고, 한국 미학을 찾다가 김지하를 좀 더 깊이 만났고, 생명 사상에서 더 깊이 만났고, 개벽이라는 이름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다양한 사회적 관심 밑에 개벽 종교, 동학, 기독교, 불교를 종횡무진하며 길을 찾는 시인을 만났다. “흰그늘의 생명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전체 사상을 다시 다시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지하를 다시 본다』는 2023년 5월 6일~7일 김지하 추모 1주기에 열린 《김지하 추모 학술 심포지엄》 토론 자료를 정리하고, 다시 꼭 읽어야 할 김지하의 글을 모아 만든 105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1부에는 염무웅, 이부영, 유홍준, 임진택, 임동확, 김사인, 홍용희, 정지창, 채희완, 심광현 등 30여 명이 「김지하의 문학・예술과 생명사상」이라는 큰 주제 아래 〈김지하의 문학과 예술, 미학〉 〈김지하의 그림과 글씨〉 〈민주화운동과 김지하〉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으로 나누어 주제 발표와 토론을 한 후 정리한 내용과 종합토론을 한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2부에는 「김지하가 남긴 글과 생각-생명의 길・개벽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김지하가 남긴 수많은 글 중에서 꼭 다시 읽어봐야 할 글을 골라 실었다.
암울한 시대에 수많은 젊은이를 위로하고 힘주었던 글 「양심선언」, 「나는 무죄이다」. 로터스상 수상 연설인 「창조적 통일을 위하여」,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등 현시대의 문제점들을 수십 년 앞서서 말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개벽과 생명운동」, 김지하가 자신의 문학에 대해 쓴 「깊이 잠든 이끼의 샘」, 김지하가 남긴 생명사상을 살필 수 있는 「생명평화선언」, 「화엄개벽의 모심」 등 진지하게 김지하를 다시 보고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원고를 모았다.
김지하 시인은 50년 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이는 1974년 11월 18일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 투쟁 속에 연재된 글 ‘고행...1974’가 문제가 되어 다시 감옥에 갇혀야 했던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2022년 김지하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져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 중에도 그의 ‘훼절’에 대한 불쾌한 감정으로 그 이름을 기억에서 떨쳐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 이후 탁월한 문학적·예술적·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백척간두의 정치투쟁에 치열하게 임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앞서 생명운동을 주창한 생명사상가였다. 이런 김지하는 결코 폄훼되어서도 안 되고 잊혀서도 안 될 인물이라는 생각에 시인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와 후배들이 뜻을 모아 이 책 『김지하를 다시 본다』를 출판하게 되었다.
김지하 시인은 이미 40여 년 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반 상황들, 즉 생명 경시와 환경 파괴, 기후 위기와 전염병의 창궐, 핵전쟁 위기를 예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인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생명사상이란 화두를 높이 든 생명사상가이자 생명운동가였다. 이런 김지하가 누구였는지 세상에 다시 간곡히 알려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인의 생명 세계관에 입각한 문명 전환의 길에 나서게 하는 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김지하 金芝河(1941.2.4.~ 2022.5.8.)
시인,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이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했고, 1969년『시인』지에 「황톳길」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정치풍자 담시 「오적」을 발표하며 문단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가담해 첫 옥고를 치른 후, ‘오적 필화 사건’ ‘비어 필화 사건’ ‘민청학련 사건’ ‘고행…1974 필화 사건’ 등으로 8년 간의 투옥, 사형선고 등의 고초를 겪었다.
1980년대 이후 생명 사상을 제창하고 생명 운동을 추진했으며, 우리의 고대사상과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75년 제3세계 노벨상이라 불리는‘로터스 특별상’을, 1981년 세계시인대회에서‘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사상기행』 회고록인 『흰 그늘의 길 1.2.3』 등이 있다.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투병 중 2022년 5월 8일 타계했다.
엮은이의 글 중에서
그는 횔덜린과 달리 정치투쟁의 일선에서 네 차례나 감옥을 경험하고
죽음의 위험을 통과한 뒤에야 영성과 생명이라는 결정적 화두에 이르렀다.
그 지난한 과정에는 오랜 시간의 가혹한 독방과 치열한 독서와
건곤일척의 사색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아니라 김지하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술회했다.
분단 한국에서 조선의 문화적·이념적 전통을 잇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투쟁을 벌인 김지하야말로 인류 보편적 문화·예술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
김지하는 결국 흰 그늘이 서린 모란꽃을 화사한 채색화로 그리다
세상을 떠났다. 묵란으로 시작하여 묵매로, 그리고 달마도로,
또 수묵산수화와 채색 모란도로 화제를 옮기며 생애 후반,
붓을 놓지 않은 김지하는 실로 위대한 현대 문인화가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단언하건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반 상황들, 생명 경시·환경 파괴·
기후 위기·전염병 창궐·핵전쟁 위기를 보면 김지하의 예언은 맞았다.
이에 대한 대안과 처방을 김지하는 40년 전부터 이미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했고, 모색했고, 제안했고, 실험했고, 행동했고,
그리하여 기진할 때까지 절규했다.
임진택 (창작판소리 명창, 마당극 연출가)
차례
2024/12/07
Healing Childhood Scars-Dawren
Childhood Scars-Daw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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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34 views Nov 5, 2024 #softwhiteunderbelly #marklaita #adversechildhoodexperiences
Soft White Underbelly interview and portrait of Dawren, a Placentia, California man who survived a difficult child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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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u #softwhiteunderbelly #marklaita #documentary #childhoodtrauma #adversechildhoodexperiences #survivorstory #challenges #familydynamics #mentalhealth
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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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all right Darren Darren uh
where'd you grow up where are you from originally
I'm from
Busan South Korea oh really mhm and
you came to the US when
um when I was 16
tell me about your family um my father was a
writer but he wasn't successful so our financial situation was difficult so we had to live with my
grandmother and my grandfather had a second family so he only showed up a few
times a year my father was abusive um mentally
verbally and physically he was mentally ill and he
drank a lot a cute beat us on even
Street and one time he ran down the street he jumped kicked my mom in the
stomach uh while everyone was watching including my younger brother and
I and on the top of that um my grandmother was very difficult to handle
she hated my mom she had to make every little thing about my
mom so my mom was very unhappy in the
family my parents always fought and I remember the
plates flying and smashing on the floor and I remember she yells at him
she was going to divorce him so but afterwards she came to me and
looked me in eyes she just say that to threaten my dad
and it was relief for me each time CU I trusted
her and one day my brother and I were watching TV
and I knew something was going on my mom was
packing and she walked out of the door and we knew she wouldn't come
back we just sat there pretending to watch
TV cuz we didn't know what was happening we didn't know what to
do then I was 10 and my brother was seven
but that Mor chased me hunted me like all all my
life why didn't you do anything why didn't you say anything I could could have grabbed her leg and begging not to
go each time I I blamed
myself somehow my old neighbor found out about the news I'm sure my grandmother
told everyone so when other people found me
on the street they just came to me with the questions why she live who's cooking now
is she ever going to come back I questions I cannot even
answer I felt like I was naked I also so embarrassed and
vulnerable so since then I try my best to hide my past and my
weaknesses so after my my mom left it was just my dad who had to take care of
us we moved to smaller house and my grandma got her own
apartment I was really angry I was really angry at my dad and my
grandmother for driving my mom away
and after 3 years my dad told me told us he was
going to Canada alone to make some money and real like okay just another
thing happening we didn't think it was like wrong or
um out of ordinary
he left us again just like my my
mom so after he was gone every day my brother and I had to
figure out what to eat every day in the beginning we had some money so we bought
what we want to eat like junk food but as our budget was getting low
we had to survive with instant noodle where were you living you weren't living
with your grandparents it was just us too we were just living we were just
trying to figure out just two of us the grand parents didn't come in to help you
no so I was 13 and my brother was
10 and I felt like just it was just raining on us and
we were just getting socked in the rain we didn't even know there was umbrella cuz no one really helped
us so we were eating instant noodle every day and we came down to the point that
we could only afford a pack one single pack of tofu so we ate
that nobody told us what to do but we still went to the school and
finished our homework I remember we didn't have hot
water so we had to boil water to wash ourselves wash
clothes but we often skipped was we lazy we were just
dirty but you had a house yeah we had a house um one of our ants um
helped us financially she helped us for rent but she couldn't do it forever so
we stayed there alone for 6 month then
we were moved to um another uncle's house and then to grandmother's and
another aunt's house and back to Uncle's house we're just shuffled around the
relative we didn't plant Our Roots and 3 years later um my father um
invited us to New York and he was Mo he moved there and he got remarried so that
was 16 year old for me and 13 for my brother so we
reunited but my dad hasn't changed much and I was still
angry but we moved away for college but then I learned that my brother was
struggling he he told me he was going to end his life and I was really
shocked and I was scared so I just I made him move to my
school so I could keep eye on him but I was strugling too at the time
so I withdrew from college because I I had severe anxiety
and panic attacks thankfully my brother and I got
married to wonderful people but for
me my pain my my trauma caused a lot of issue in our
relationship after years my wife just when we were fighting she she just casually told me there isn't anything
she can do anymore but for me I felt being
abandoned again just like my parents did so I fell into this deep
depression I couldn't I didn't talk to anyone I was just crying for days and
month I became
suicidal and around that time my father called me and he needed
help he said he has a cancer stage four can colon
cancer I was already miserable but I had to see him every day I have to take care
of him he was even a angrier than before cuz he has to deal with the pain and I
was angrier cuz I was raising a kid and when I look at
him it remind me like horrible things my dad did to me when I was
young and even he refused to have a surgery last minute so he pissed up
doctors but he couldn't control the pain so he asked me please get rescheduled
the surgery so I had to go talk to the doctor and I have to back
them even after or surgery a day after he escaped the hospital with the needle
on but it wasn't the first time so I had to chase him down I have to call the
hospital and like apologize to people
but at the end there was nothing we could do except for hospice
care it was quite relief for me cuz I was getting
help there was someone who helped my dad and I had a second child so my wife
and I were working together again so I was slowly getting better then my wife suggest asked
me I should go to Korea to spend time with my mom so I went Korea for two months to
spend time with my mom and my stepfather it was it was 20 27 years after she left
us but to me this trip was to heal and
confront my pain and my trauma so while I was there we traveled
we talked a lot and I read a lot of books I studied them
like on trauma PTSD relationship and
Grace so I learned like important
things one of them was that I found my younger
self the anger hatred impatience that I have felt were from my
younger self the boy who didn't get much love much
attention like throughout my life like random thoughts coming up like little
sad stories I had it like one time my
dad bought KFC for my cousin not me and
there was a time I went to a baseball game game with my friends we didn't have money but someone off offered the food
we're taking a bite but when it was my turn there was nothing so these are
silly memories but I still had it I mean like my younger self had it so I decided
to revisit like all the places so I I tracked down the same KFC
went there and I asked him like what do you do you want to eat and we ordered bunch of food we ate it I asked him if
you're feeling better I went to a baseball game
and I got the best possible suit and we ordered Bunch again and ate
it I I talked to him again and also um visited all all the
houses that gave me trauma so I went to the street where my
mom was kicked and I went to the house where my mom left
us so in my head I was like Imagining the same
moment and when the thing happened I hugged myself and my brother
and telling them I know you guys are scared
it's okay to cry but um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and um another thing I learned was
about Grace and the meaning of forgiveness in ancient Greek to forgive
was to release and to let go so
I decided to let go of my pain my past and I decided to keep good memories
for people who hurt me so I the very first person to forgive
was my grandmother in
Korea uh we bury people on the mountains so I took a bus to the base
and and I walked like hours high up on the mountain and she
was buried next to my grandfather and I S sat down talked to
them telling my grandfather you might have caused my
dad's instability because you had second family you didn't take care of of
him and telling my grandma about all the hurtful memories that I carried
I forgave them especially my grandma I was still sitt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I don't know how to describe the feeling but it was so incredible just to
let things go no I'm not exaggerating but the sky was also so beautiful and even like
walking down the mountain for hours was so happy so now when I think of my
grandmother I smile I also
forgave friends who bullied me I didn't meet them but truly in my
heart wish them better lives
and I had to forgive my mom there was a time I couldn't even
call her mom cuz she also had another family back then
but I know she carried the guilt her whole
life apologizing me every time we see each
other I couldn't talk to her face to face CU I I knew we will break it break
down into tears so on last day in Korea I left her
letter
last person I need to forgive was my that I didn't know how to cuz by then we
already moved to West Coast but anyway I came back to the
States and few days later I woke up in the middle of night I couldn't call back
to sleep I don't know why but I was feeling oh something is not right
and next day my brother called me he was rushed to hospital and he
didn't have much time so I booked a flight hoping that he
could make a little longer so I could go see him and talk to him forgive
him when I arrived at the hospital he was alive but he was like living corpse I I
could see he didn't have much my brother and I we prayed for him
we talked to him I forgave him and my brother and talked a
lot about our past and few days later somehow my father got a little
better he had better pulse and better blood pressure and I could see like he
could recognize Us in his eyes so I asked him that blink once for yes and
blink twice for no asked him do you remember anything we said before and he
blinked twice and I felt so blessed I felt like
it was a miracle that I could get to talk to him again forgive him
again so we my brother and I talk to him and I forgave him
again and that night we watched the baseball game on TV
just like our old days and three of us spent the last
night so I was thinking he would make longer so I decided to come back for my
family so I made final goodai I told him I'll this is the last
time I'll see you I'm keeping good memories with you
only and I love you that's first and last time I said
him I got back to LA it was suddenly
raining but my brother called me he passed away I was
outside I just lay down in the floor soaking in the
rain and I could remember the time when he was still in the hospital there's one Korean
nurse she came to me are you the son so
yeah oh and she told me like she's so sorry that she heard all the stories of
my dad and like she asked me if he ever apologized to me and then no but at the
point I didn't even want to hear that I didn't want him to say that cuz he's not like like
that but again like I'm laying down on the ground I feel like he's talking to
me somehow oh that saying sorry and I love you
too so I thought my life story came to close at that point cuz I
learned so much I regained my strength for my work and for my
family it wasn't over so I had this young
cousin the son of the aunt who financially helped us a lot when we were
kids he was coming to this country to study so like I to my
hand don't worry about him I got I got him you know don't worry about him he's
like a little brother to me so like when he came my wife and I took took him out
for dinner we talked and we could hear his
story that he didn't come here to study but to
escape because his sexual orientation was not appreciated in his family
and he had P painful story in the society so my wife and I
tried to provide provide him everything like we dropped off food and we invite him we have him over to our
house but he only called me when he needed something right and he was seeing
someone and he said he need he wanted
cosigner for his bigger apartment and I have to talk to my wife
it's about money and I told her about his mom
helped us a lot so I got to do it so we did it but soon
after they broke up and he was struggling so I had to make more efforts
to make him feel better and like you know make him come outside and to have dinner but he kept avoiding me maybe
next time like I'm not ready like I I'll call you next time around that time my uncle in Korea
called me and asked me to check on him so okay I couldn't reach
him so I called the apartment cuz I'm cosigner like give me the access but they only told me to call police
station I asked him why but they don't tell me anything I go called the police station
they couldn't find them and they also told me I'm not immediate family so they cannot tell me anything so I called
every possible way to get get in touch with
them no luck so I just went to the police station with his name written
down and the officer looked at me
with with um sorry face he's
deceased and I was frozen and I couldn't process in my head and I asked
him what like why how bunch of question but still I'm just his cousin he
couldn't tell me a thing so I I got the number of his investigator and like other people and
later I found out that he ended his own life
and uh people already talked to my aunt and it was the
process of like sending his body and his stuff back to
Korea so I blamed again blamed myself again because I was the only one who had
him here and I knew it even after my
and I I called her so many times to apologize her but she didn't pick up and
my another Uncle told me not to call her
anymore other family told me um it's not my fault but he's death
like waited so heavily on me
my life had to go on for my family but inside it it wasn't the
same my my life stopped so I I I I try to think of all
the thing happened in my life and I I could understand why still
things are happening to me why is it not
stopping and I again found myself thinking about
forgiveness I I have forgiven everyone except
myself maybe it's time to forgive myself for the
guilt for my mom's departure for not
taking care of my brother for causing to death and for the guilt I I put on
myself
I'm still on the journey to find a way to do
it but one day I hope my aunt wants to talk to me and forgive me
and maybe you could talk about how he was like here and what he was dealing with
but I know it will take time for so
long I HD my past my weaknesses but after all of
this I realized and I believe they are my greatest
asset my past my trauma my struggle how I
overcame became my strength to help
others I'm not a doctor but I want to help I want to say people in my own
way at least I don't want people to end their own
lives I I want people to [Music] find purpose and meaning of their
life everyone deserve the life they love
so I decided to use my asset and I decided
to be happy good for you yeah thank you
beautiful story thank you thank you Darren thank you thank you so much for having
me even though a soft white underbelly consists of a lot of videos It's really
still a photography project to me and if you appreciate the photography sometimes it's difficult to enjoy it
when it's scrolling down the screen which is the only option I had in this horizontal format on uh on YouTube so
last year we came out with the first soft white underbelly book which is a collection of the best portraits from the thousands of interviews I've done
each portrait in this book is accompanied by an interesting quote from the person's interview oh my
God there's more
wow these aren't as bad as I thought I look like a
witch I will not be reprinting this book when it sells out so once it's gone it's gone for good you can order yours at
softw underbelly dorg $125 $150 for a sign
copy thank you for wat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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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Linda – you speak for me – I thought I was reading my journal. Thank-you for this. Dana
Hi Dana,
When Rebecca, the QuakerSpeak video producer, looked at my website, she saw something in it that made her want to use this theme for the interview. I agreed in large part, because I know I’m not the only one who feels this way about how they are present with the Divine and among Friends. If you’d like to have a conversation about this, you’re welcome to email me at friendmarylinda at gmail.
Mary Linda
Mary Linda,
I found a Quaker soul mate in you. I thought I was the only one who didn’t fit into the good Quaker mold. After seven years I realize that despite anything, it’s the simplicity, the Quaker ideals, and values that continually draw me in.
I go to Meeting for Worship every week.
Hi Ray,
Misfits in good company! I’m glad that what we experience in worship make our square-peg/round-hole-ness in Quaker community worth it. Feel free to email me if you want to talk more about your experiences. friendmarylinda at gmail.
Mary Linda
This is a wonderful explanation. I am a birthright Quaker, but I identify with this. I have to say, however, that there have been very few times that I haven’t felt comfortable in meeting for worship and have “gotten much” out of it. Merely slowing down and opening one’s mind is therapeutic. I miss worship when I am unable to attend.
Oh Mary Linda, you are in such good company….of those marching to their own drum, being on the outside looking in.
Buddha, Baha u llah, Jesus, Mother Teresa, Mary Baker Eddy…they all “stepped to a different dance.”
Bravo Mary Linda, you’ve given this old duffer inspiration and hope!
As an isolated Quaker, I suspected that being a Quaker kept me from community. I find that is not true. I work harder to live and learn how to live my life with God. The pandemic has been great for me because so much is available on Zoom. I do miss the physical presence of Friends, the hugs, the physical presence!
Friend speaks my mind, exactly….and I am so grateful for your honesty. Our Meeting lost a member a few years ago because he told me he didn’t feel he was good enough to be a Quaker. In the past year, I have felt increasingly unable to connect and feel different and out of sync, impatient and I have been a member since 1992. I am prompted by your sharing to continue to reflect on the nature of my worship, connection to community and my spirit gui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