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무위당 장일순을 기리는 생명의 이야기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은이),장일순 녹색평론사 2004
















미리보기
책소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10주기를 즈음하여,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온 이들의 글과 대담을 묶었다. 1부는 김종철 교수, 작가 김성동, 현장에서 활동하는 젊은 일꾼들이 무위당을 기리며 쓴 글을 모았다 . 2부 '장일순을 이야기하다' 는 후학들의 대담으로, 리영희 교수, 시인 김지하 등과 나눈 대담과 인터뷰를 모았다.
평생 저서 한 권 남기지 않았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가르침을 기록하며 그 말씀에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을 만들었다. 단순한 말씀의 기록이기 보다는, 무위당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한데 모여 고백하는 '깨달음의 장' 과 같다.
목차
책머리에
나와 너는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입니다 _ 장일순
발문 1 무위당 선생님께 _ 이현주
발문 2 무위당과 공경의 사상 _ 김종철
Ⅰ. 생명과 평화의 미래
밥거지와 술거지 _ 원유일
우리 시대의 마지막 도덕정치가 _ 김성동
이 시대의 참 철학자, 무위당 _ 고제순
연대에 대하여 _ 변홍철
무위당의 사상과 협동운동 _ 이경국
무위당 생명평화운동의 구현 _ 이병철
내 영혼에 내린 영성의 비 _ 이반
나락 한알 속의 우주 _ 김종철
무위조차 없는 무위 _ 최종덕
한살림의 영원한 스승, 무위당 선생님 생각 _ 윤형근
이제 저에게도 스승님이 있습니다 _ 주요섭
그 순간 거기서 장일순 선생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_ 임재경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 _ 장일순
Ⅱ. 장일순을 이야기하다 ― 후학들의 대담 모음
대담 1 민주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장일순 선생님과의 이야기 _ 최준석
대담 2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던 분
리영희 선생에게서 듣는 무위당의 삶과 사상 _ 전표열
대담 3 무위당 선생의 주민사회운동
실천운동 현장에 계셨던 김영주 선생님의 회상기 _ 김용우 외
대담 4 내 삶의 어른, 무위당
이긍래 원주한살림 이사장과의 지난 이야기 _ 황도근
대담 5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박재일 선생님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_ 윤형근
대담 6 도덕과 정치
김지하 시인에게서 듣는 무위당 장일순의 사상 _ 최종덕
대담 7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무위당 난초와 이철수 배꽃의 만남 _ 황도근 외
가상대담 무위당에게 듣는 노자 이야기 _ 최종덕
접기
책속에서
사람의 마음의 작용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해괴한 생각과 행동들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이 경제지상주의의 시대에, 무위당 선생의 간곡하고 부드러운 말씀은 -비록 책을 통한 간접적인 음성일지라도- 내게 더 없이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 원천의 하나이다. 무위당 선생은 우리더러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거나, 무엇을 하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또 선생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당장 어떤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하게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선생은 다만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들과의 근원적인 공감과 대화를 통해서, 개인이 어떻게 참된 행복에 도달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차근차근 말할 뿐이다. ... 그 가르침은 세상에 대해 나 자신을 주장하기 전에 다른 존재들의 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여보라는 말씀일진대, 저마다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자기주장이 넘치고 넘쳐 세상이 온통 화탕지옥(火湯地獄)이 되어 있는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이보다 더 절실한 가르침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김종철, '발문'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최근작 : <[큰글자책]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총 2종 (모두보기)
장일순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40여년 간 원주를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운동가로 살아왔다. 원주대성학원을 설립하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한살림운동을 주창하였다.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최근작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나락 한알 속의 우주>,<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 총 9종 (모두보기)
마이리뷰
무위당을 생각하며..
며칠 전 비가 조금 내리던 날 아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이 찌푸둥해서 산행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며칠 전에 보면서 언제 금정산 산행 한번 가자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남문으로 올라가서 동문을 거쳐 북문으로 걸으면서 산아래에서 강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안개들이 우리의 온몸을 스쳐갔다. 범어사에 들러서 경내를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간단히 막걸리와 파전을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무위당 선생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서둘러 술잔을 비웠고 서점으로 갔다.
친구에게 '노자이야기'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함께 샀다. 장일순 선생님의 책인줄 알았으면 이미 사야했을테지만 이 책은 선생님의 육성보다는 사후 10년을 기리는 자리에서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묶여있는 것이어서 주저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뜻과 정신이 씨앗이 되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가 궁금했고, 무엇보다 장일순 선생님의 책을 본 것도 벌써 두 해가 다되어가서 다시 그 분의 책을 들고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을 대할 때 현실의 사람이든 역사적인 인물이든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나 업적이 무엇이었나를 보게 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정신은 무엇에 바탕했고 그가 가졌던 사상이나 삶의 기준이 무엇이었나에 더욱 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 선생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활동과 지위를 가지지 않으셨지만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관통해서 하나로 소통하는 깨달음에 뜻을 두셨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회적 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향잡으시고 인도하셨다.
신협, 생협운동과 한살림운동이 선생님에게서 비롯되었고, 독재시대의 반독재투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천하셨다. 그리고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동학사상을 재조명했던 점들은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뜻은 깊은 진리를 향한 길을 걷는 것에 있었지 자신의 명예나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지학순 주교님이나 리영희 선생님. 김지하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 이철수 씨, 이반 씨 등의 여러 사람들에게 그 사상과 철학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으리라.
선생님의 삶을 기리는 모임이 결성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살았던 외형의 흔적을 쫓는 것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소박하게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을 되살려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선생님이 살면서 도달하려했던 마음의 중지가 아닐까? 위무위라는 도덕경의 말처럼 하는일 없으면서 안하는일 없게 사는 것을 추구하셨던 분, 스스로 일속자라 하여 자신을 겸손하게 하면서도 그 작은 것 속에 온 우주를 담아내었던 삶, 그리하여 삶의 깊은 지혜 속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소요유의 자세가 난을 그리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논리적으로만 치밀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단순하면서도 보다 넓게 삶을 포용하는 자세와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나는 늘 부끄러움을 느낀다. 옛 성현들의 글이 항상 자신을 제대로 보고 내면적 성찰을 통해 성장하라는 격언을 선생님에게서 산 증인으로 배우게 된다. 선생님의 씨앗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해진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원래 대량화되다보면 그 깊은 뜻이 희석화되기 쉬운 법이다. 선생님과 인연되는 사람들이 소수일지라도 그 뜻을 최대한 살려내면서 사는 삶을 살 수 있는 몇 몇의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더욱 좋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표연란을 책을 넘겨가면서 마지막으로 들여다본다. 난의 기품이 서려있으면서도 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있다. 그 바람 속에서 난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난의 기운이 강하면 바람을 살릴 수 없고, 바람이 세면 난의 기운이 살지 못한다. 이 둘을 묘하게도 살려낸 선생님의 표연란에서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그의 삶과 정신을 가늠해본다.
- 접기
달팽이 2006-02-05 공감(82) 댓글(8)
Thanks to
공감
한그릇 밥의 의미
"우리가 평생 배워서 아는 것이 한그릇의 밥을 아느니만 못하느니라." 이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구절이었다. 사실 처음 부분은 읽어 나가다가 단지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후학들의 회고집이란 것을 알고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위당 장일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세상 일체가 하나의 관계"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을 만나기 위해 내가 이 책을 단지 제목만 보고 주문한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 현학적인 지식이나 지혜보다는 밥한그릇을 제대로 알기 위한 공부. 그것이 진짜 공부이겠지.
혜덕화 2004-07-31 공감(1) 댓글(0)
====
마이페이퍼
참 아름다운 사람
장일순의 방 한 쪽에 신문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전두환의 얼굴이 보이는 그 신문을 가르키며 장일순이 말했다.
"저이가 위험한 사람이야. 우리가 저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야 돼"
저이란 전두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전두환뿐이 아니었어. 박정희도 김일성도 늘 같이 대했어.
늘 말씀하셨지. 그 사람들 잘 되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고."
누군가 방황을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욕이나 비난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부디, 잘 되라고 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적이라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하는 것은 누굴 이기는 게 아니라 평화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혼자 뉴스를 보는 경우 아직까지 혼잣말로 촌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쳐다보지만,
가끔 아내와 함께 정치인에 대한 보도를 볼 적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 심한 말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곤 한다. 늙어가는 증세인가...
그러나 아름다운 사람 장일순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내 행동에 반성을 한다.
원주에는 1군 사령부가 있다. 1군사령관은 별이 넷인 4성 장군이다.
새로 부임해 온 1군 사령관이 인사를 하러 장일순의 집에 들렸다.
늘 있는 일이었다.
각 기관의 장은 새 부임지에 가면 그 지방의 유지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사령관이 장일순에게 나이를 물었다.
서로 나이를 주고받고 나서 장일순이 말했다.
"저보다 아래시군요. 제가 말을 놓아도 되겠습니까?"
소탈하면서도 서슴없는 제안에 장군은 거절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장일순은 이렇게 사람들이 단 계급장이나 쓰고 있는 모자 벗기기를 잘했다.
평신도이면서도 사석에서는 신부라도 나이가 아래면 그냥 아우님이라 불렀고, 위면 형님이었다.
지학순 주교도 사석에서는 형님이었다.
과연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가 생각해보니 선생과 달리
사람들이 걸친 위의에 맞추어 사람들을 대하며 살고 있었다. 단 한 차례의 예외도 없이
과연 사적으로 만날 경우가 있을 지 모르겠지만 있다손쳐도
나보다 나이어린 목사나 전도사에게 말을 놓을 껏 같지않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장일순에게 과연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집 주인은 내가 아니고 저 양반이야. 나야 건달이고 하숙생이지"
장일순에게 아내는 또한 선생님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렇다.
"해월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아이들 말이라도 옳으면 따라야 한다'고
남자는 원래 구녁이 많은데 그때마다 아내가 일침을 가하듯 딱딱 찔러준다네.
뭐냐하면 그런 점에서 아내는 선생님이시지."
목사 이현주가 처음 부인과 함께 선생을 찾아 뵈었을 때, 부인이 자리를 뜨자,
"저 사람이 보살일세. 잘 모시게"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념절이다.
예수님이란 과연 누구이신가.
나는 선생의 말씀을 빌어 말하고 싶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보살로 모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그리고 장일순 선생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 접기
니르바나 2006-04-16 공감 (6) 댓글 (22)
=====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요약 및 평론
1. 요약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는 1994년 선종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에서 엮어낸 추모 문집이자 사상 기록집이다. 이 책은 장일순이라는 한 인간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던 교유의 기록이자, 그의 삶에 감화된 이들이 적어 내려간 고백록이다. 김지하, 신영복, 이현주, 이철용 등 시대를 함께 고민했던 지식인과 운동가들부터 원주 지역의 평범한 이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글과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제목인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는 선생이 평소 삶과 만물을 대하던 겸손과 하심(下心)의 태도를 극명하게 상징한다. 선생은 대단한 사상가나 운동가의 위세를 부리지 않고, 길가의 풀 한 포기, 작은 벌레, 그리고 자신 찾아온 보잘것없는 사람 앞에서도 스스로 낮추어 배움을 얻고자 했다. 수록된 글들은 선생의 이러한 태도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적·도덕적 충격을 주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 문집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독재 시절과 사회 변혁기 속에서 수많은 청년과 운동가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원주의 거목'으로서의 장일순에 대한 기억이다. 둘째는 민주화 운동을 넘어 생명 사상과 한살림 운동으로 나아간 그의 사상적 깊이에 관한 증언이다. 셋째는 글씨와 그림(난초)을 통해 무위자연의 멋을 나누었던 예술가로서의 면모이다. 결국 이 책은 장일순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새롭게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이들의 고백서라 할 수 있다.
2. 평론: 부끄러움이라는 가장 강렬한 구원의 영성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는 일반적인 인물 추모집이나 기념 문집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상적 깊이를 지닌다. 대개의 추모집이 고인에 대한 칭송과 미화로 채워지기 쉬운 반면, 이 책은 수록된 글 하나하나가 필자들의 깊은 Self-examination과 성찰로 이어진다. 장일순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우상이 아니라, 자신의 오만함과 핑계를 비춰주는 맑은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윤리적·사상적 동력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현대 사회와 사회 운동권은 오랫동안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타자 비판)' 분노하는 힘으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장일순이 남긴 유산은 타인을 향한 손가락질이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는 깊은 부끄러움이다. 분노와 대립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운동가들이 장일순의 온화함과 하심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비로소 상대를 모시는 생명 운동으로 사상적 도약을 이뤄내는 과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은 20세기 한국 지성사에서 보기 드문 <인간 중심의 연대>를 증언한다. 이념과 세대, 종교의 벽을 넘어 수많은 이들이 원주로 찾아와 장일순이라는 품 안에서 쉬어가고 길을 찾았다. 기독교인, 불교인, 마르크스주의자, 예술가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특정 이론을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렁이처럼 낮아져 모든 이를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수많은 에피소드는 거대한 조직이나 권력 없이도 한 사람의 진실한 삶이 어떻게 하나의 시대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다만 문집이라는 특성상 각 글의 수준과 관점이 다채롭고, 중복되는 회고나 일화가 존재하여 체계적인 사상 해설서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서사가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선생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짙다 보니, 그가 남긴 생명 사상이나 협동조합 운동이 지닌 현실적 한계와 과제에 대한 냉철한 비판적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당위와 명분만 무성한 오늘날의 사회에 대단히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남을 가르치려 들고 자기를 자랑하기에 바쁜 현대인들에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라는 고백은,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도 고결한 삶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 문집은 무위당 장일순을 추모하는 기록을 넘어, 지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스스로를 낮추고 만물을 모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영적 자산이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무위당 장일순을 기리는 생명의 이야기> 요약 평론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는 무위당 장일순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2004년에 출간된 추모문집이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이 엮고 녹색평론사가 펴냈으며, 장일순을 직접 만났거나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쓴 글과 대담을 모았다. 229쪽 분량의 이 책은 장일순 자신의 체계적인 저술이라기보다,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삶과 사상을 복원한 집단적 증언록이다. 책에는 이현주의 추모 글, 김종철의 <무위당과 공경의 사상>, 그리고 리영희, 김영주, 이긍래, 박재일, 김지하, 이철수 등과 관련된 대담과 회고가 실려 있다.
책의 제목인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는 장일순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되었는지를 압축한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압도적인 지식이나 웅변보다,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인격적 힘을 느꼈다. 장일순은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교훈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의 욕심과 허영, 권력욕과 무관심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죄책감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다. 더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깨달음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윤리적 감각이다.
책의 첫머리에는 장일순의 “나와 너는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입니다”라는 글이 놓여 있다. 이 문장은 책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인간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자연과 이웃, 과거와 미래의 생명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나’와 ‘너’의 구분은 생활에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실재는 아니다. 내가 먹는 밥에는 농부와 흙, 물과 햇빛, 미생물과 계절의 운동이 들어 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무수한 타자의 희생과 돌봄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윤리는 내가 남에게 베푸는 선행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얼마나 많은 존재에게 빚지고 있는지를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
김종철은 장일순 사상의 중심을 ‘공경’에서 찾는다. 장일순은 특별한 위인이나 종교적 성자만 존중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농민과 노동자, 아이와 노인, 풀 한 포기와 벌레 한 마리까지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장일순에게 생명은 능력과 생산성,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존중의 근거다. 참여연대에 실린 이 책의 서평도 장일순이 교육·민주화·협동조합·유기농업·한살림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고 ‘좁쌀 한 알’이라는 호로 자신을 낮춘 점을 강조한다.
책의 제1부에 해당하는 여러 대담은 장일순의 삶을 다양한 위치에서 조명한다. <민주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는 장일순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 전환해 간 과정을 다룬다. 그는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지만, 정권을 교체하거나 권력을 빼앗는 것만으로 인간과 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억압받던 사람이 권력을 잡은 뒤 새로운 억압자가 될 수 있으며, 정의를 내세운 운동도 조직의 확대와 지도자의 권위를 위해 사람을 수단화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생활과 관계, 생산과 소비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생명운동으로 나아갔다.
리영희를 상대로 한 대담의 제목은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던 분>이다. 이 표현은 장일순의 독특한 위치를 잘 보여준다. 그는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심적 연결자였지만, 조직의 공식 지도자나 이론가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는 밖에 있는 듯했지만 중요한 결정과 만남의 배후에 있었고, 안에 있으면서도 조직의 권력과 명예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모아 세력을 만들기보다, 서로 만나고 협동하도록 연결한 뒤 자신은 물러났다.
이러한 태도는 노자의 무위와 관련된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사욕과 자기과시로 일을 억지로 만들지 않으며, 생명의 자발적인 힘이 드러나도록 돕는 행동이다. 장일순은 사람을 지도한다면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답을 주기보다 이야기를 들었고, 상대가 자기 문제의 답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기다렸다. 그래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명령받았다는 느낌보다 존중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영주와의 대담은 장일순의 주민사회운동을 다룬다. 원주 지역에서 전개된 신용협동조합과 재해대책사업, 농민운동과 생활협동조합운동은 외부의 엘리트가 주민을 구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이 자기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교육하는 운동이었다. 장일순은 주민을 무지한 계몽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 안에도 삶의 지혜와 협동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긍래와 박재일의 증언은 장일순의 사상이 한살림운동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살림은 단순히 친환경 농산물을 사고파는 소비자운동이 아니다.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가 서로의 생명을 책임지는 관계를 만드는 운동이다. 농민은 도시인의 밥과 건강을 살리고, 소비자는 농민의 생활과 농토를 살린다. 시장경제에서는 생산자가 비싸게 팔고 소비자는 싸게 사려 하므로 양자가 대립한다. 한살림은 이 관계를 경쟁에서 협동으로 바꾸려 했다.
장일순이 말하는 생명운동은 거대한 이론보다 밥상에서 시작한다. 밥 한 그릇을 먹는 행위는 자연과 인간이 맺은 수많은 관계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먹을거리를 값싼 상품으로만 보면 농민의 노동과 땅의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밥 속에서 햇빛과 흙, 물과 농부를 본다면 먹는 일은 감사와 책임의 행위가 된다. 장일순은 이러한 깨달음을 동학의 ‘이천식천’, 즉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가르침과 연결했다.
김지하와의 대담은 장일순 사상에서 도덕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다. 장일순은 정치가 도덕적 자기성찰과 분리될 때 결국 권력투쟁으로 타락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도덕은 개인에게 순종과 희생을 강요하는 보수적 규범이 아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로운 목적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희생시키는 수단으로 변하고 있지 않은지 살피는 태도다. 정치운동은 구조적 불의를 바꾸어야 하지만, 운동가 자신도 권력욕과 독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철수와 관련된 대담은 장일순의 서화와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장일순에게 글씨와 그림은 예술가의 개성을 과시하거나 시장에서 거래하기 위한 상품이 아니었다. 서화는 사람과 생명을 만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는 난초와 풀, 새와 곡식 같은 작은 생명을 그렸고, 작품에 생명과 공경의 뜻을 담았다. 작품값을 정해 명성을 높이기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글씨를 써주고, 작품을 통해 얻은 돈도 주변 사람과 운동을 위해 사용했다.
책에서 반복되는 장일순의 모습은 ‘낮아지는 사람’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스승이었지만 제자를 거느리지 않았고, 여러 운동의 정신적 중심이었지만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를 ‘무위당’, ‘일속자’, ‘서각’이라고 지었다. ‘일속자’는 좁쌀 한 알이고, ‘서각’은 쥐뿔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수사가 아니다. 자기를 크게 만들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다른 생명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철학적 실천이다.
장일순의 종교적 태도도 이 책의 중요한 주제다. 그는 천주교인이었지만 가톨릭 교리 안에 머물지 않고 동학, 불교, 노자와 장자, 유교의 가르침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러 종교의 교리를 절충하여 하나의 이론을 만들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자신을 비우고 생명을 섬기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종교가 자기 교단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면 오히려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
그에게 예수의 자기 비움, 노자의 무위, 불교의 무아, 동학의 모심은 서로 통한다. 진리를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자아가 사라질 때 비로소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보편주의는 각 종교 전통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노자의 도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불교의 공과 동학의 천주는 서로 완전히 같은 개념이 아니다. 장일순의 통합적 해석은 종교 간 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교리적·역사적 차이를 지나치게 평탄하게 만들 위험도 있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의 가장 큰 장점은 추상적인 사상보다 인격과 관계를 통해 장일순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를 읽으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의 사상이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경험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조직에서 어떻게 뒤로 물러났는지, 가난한 사람과 어떻게 술과 밥을 나누었는지가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장일순 사상의 설득력은 말과 삶이 크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데서 나온다. 그는 무위를 말하면서 지도자의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생명 존중을 말하면서 평범한 사람과 작은 생명을 귀하게 대했다. 협동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조직을 소유하지 않았고, 가난과 절제를 말하면서 실제로 검소하게 살았다. 그래서 그를 만난 사람들이 느낀 부끄러움은 논리적 논박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생활 사이의 거리를 발견한 데서 왔다.
그러나 추모문집으로서 한계도 분명하다. 거의 모든 글이 장일순을 존경하는 후학과 동료의 증언이기 때문에 비판적 거리가 부족하다. 장일순의 성격적 한계,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 운동 내부의 갈등과 실패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여러 증언이 장일순을 거의 성자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하면서, 구체적인 역사적 인간이 이상적인 도덕적 상징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특히 “그를 만나면 저절로 부끄러워졌다”는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독자에게도 도덕적 경외심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인에 대한 존경은 때때로 평범한 사람이 실천할 수 없는 높은 기준을 만들고, 결국 감탄만 남길 수 있다. 장일순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개인의 겸손과 도덕적 변화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한가 하는 질문도 남는다. 기후위기, 기업의 독점, 노동착취, 부동산 불평등, 국가폭력은 개인의 절제와 공경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법과 제도, 정치조직과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장일순의 무위와 생명사상이 정치적 갈등과 제도개혁을 회피하는 명분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장일순의 정치적 급진성을 단순한 온건주의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감옥에 갔으며,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을 지원했다. 그가 강조한 화해와 모심은 불의에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라, 불의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신이 새로운 억압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요구다. 적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지배의 논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의 제도와 함께 억압적 관계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오늘날 이 책을 읽는 의미는 장일순과 같은 인물을 그리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영향력과 성공을 팔로어 수, 직책, 재산과 가시적인 업적으로 평가한다. 시민운동과 종교조차 지도자의 명성과 조직의 확대를 성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장일순의 삶은 다른 지도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장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의존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설 수 있게 한 뒤 사라지는 사람이다.
책 제목의 ‘너’는 장일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이웃일 수도 있고, 농민과 노동자, 한 알의 곡식과 풀 한 포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거나 이용해 온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느낀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
결국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는 완전한 성인의 전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사건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장일순은 방대한 저술이나 거대한 조직보다 사람들의 삶 속에 흔적을 남겼다. 이 책의 여러 증언은 그의 사상이 개념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듣고 밥을 나누며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을 통해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장일순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내 앞의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내가 한 일을 내 공로로 독점하지 않으며, 생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정죄하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추모집을 넘어 오늘의 시민운동과 종교, 생태운동과 일상생활을 성찰하게 하는 윤리적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