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5

예수는 없다 | 오강남 | 2001

예수는 없다 | 오강남 | 알라딘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은이)현암사2001-05-30










책소개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인가,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신인가, 기독교의 교리는 완전 무결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지은이의 대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이런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다수의 기독교신자가 있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며 본국(本國)에도 없는 종교적 유아기, 정신적 식민지성을 탈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성경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으로, 그 신화적 어구 하나하나를 신의 음성으로 생각하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중세적 거짓 종교관에 매어 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뒷받침으로 지은이는 이해가 쉽도록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이를테면 어린시절 '우리 아빠가 최고야' 라는 사고를 하던 시기에서 청년기와 성년기, 장년기를 거치며 변화되는 사고의 과정을 기독교인들의 종교관의 변화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또한 지은이는 라틴어 판 성경과 고대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비교하고 그 어원과 번역의 정확성 여부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신구약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여 창조주 신과 태초 인간의 본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무조건적인 신앙심, 타인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 등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적 자세는 비단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종교가 유일하게 옳다고 믿는 배타적 종교관을 가진 모든 종교인들에게 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목차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
.들어가면서/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

1."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 아빠 최고"-자라나는 믿음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 패러다임의 천이
.벌거벗은 임금님과 당나귀 귀 임금님-정직한 믿음과 무오설의 무요
.허스키와 진돗개-내 종교만 종교인가?
.세 부류의 사람
.신앙의 여섯 단계
.두 가지 사유방식

2.성경대로 믿는다?
.김목사의 성경관-"성경대로" 믿는다?
.흥부전과 성경-성경을 "믿는다"?
.창조이야기의 딜레마와 교훈
.아담의 갈빗대?
.선악과-이분법적 의식의 출현
.노아 홍수를 따져보면
.경상도 시리즈와 성경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책인가?
.단군신화와 기독교
.베들레헴과 백두산 기슭
.성경이 사람을 죽이는 몇가지 경우
.에수님의 성경 읽기-"환기식 독법"
.싼타 할아버지는 언제 오시는가?-두 가지 문자주의

3.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
.하나님은 남자인가?
.실제적 다신론
.실제적 무신론
.부족신관
.조건부 신관-이기적 신앙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람들
.하나님과 생태계 문제
.신은 존재냐 비존재냐?
.어느 신학자의 신관

4.예수는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예수님의 성생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이야기
.탄생이야기에 얽힌 몇가지 의문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배경
.청년 예수
.싸움꾼 예수
.싸움 말리는 예수
.예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성불하신 예수님
."자비"-어머니의 태처럼
.다석 류영모 선생의 예수님
.함석헌 선생님과 간디 옹과 틱낫한 스님의 예수님
.참다운 길벗

5."지금 여기"에서의 mission
.철수의 어린 시절
.어느 신학자의 선교관
.교회는 강아지 훈련소가 아니다
.하룻 강아지 진리 무서운 줄 모른다
.김칫국-누가 천당에 갈 수 있는가?
.땅 끝까지?
.선한 사마리아인과 유마거사
."지금.여기"에서의 mission-하나님 나라의 건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김진홍 목사의 경우
.메타노이아
.그들도 우리처럼

부록
1.현각 스님의 책을 읽고 눈물 흘린 까닭은?
2.예수 숭배-"아직도 교회에 다닙니까?(김희성)
3."오강남 칼럼을 읽고-반박에 대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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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오강남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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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비교종교학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세계 각 종교를 섭렵하고 종교의 참된 의미를 찾는 일에 천착해온 비교종교학계의 석학.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10년 동안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학을 공부했고,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에 캐나다로 건너가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 더보기

최근작 : <종교, 다시 깨달음이다>,<종교란 무엇인가>,<오강남의 시선> … 총 79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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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읽고 읽고 말하다>,<2026 변리사 시험용법전>,<무한 그 너머로>등 총 472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5위 (브랜드 지수 140,981점), 음악이야기 8위 (브랜드 지수 20,843점), 불교 12위 (브랜드 지수 49,54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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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그리스도교계 학교에서는 채플이라는 시간이 있다. 서울의 모 학교 학생회장이 재판까지 하면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아직도 이런게 있다. 사실 희망하는 학생들만 뽑아서 그리스도교 교리(정확히는 이것도 아니겠지만)를 가르친다고 해도 나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도대체 머리가 영글지도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목이라는 사람이 '너는 원숭이가 네 조상이라고 생각하니?' 따위의 질문이나 하고있는 현실을 이 나라는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해도 되는가?

내가 사는 곳은 평준화 지역이라서 내 아들은 100% 이 학교를 원해 들어간 것이 아니다. 희망학교를 선택할 때 이놈에 학교를 1순위로 선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학의 거리와 교통의 편리성, 무엇보다도 미술학원을 가기위해서는 야간자율학습을 빠져야 하는문제 등을 고려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 아들이 강제로 말도안되는 헛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그 교목(아이 말로는 정식 목사도 아니라는데 확인은 못했다)이라는 사람에세 이 책을 강제로 읽히고 시험을 보게 하고 싶다.

언제나 정통성 없는 조직이 규율이 엄하고 교리 해석의 자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집단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흥분해서 다른 이야기만 했는데, 내가 이 책을 읽은 직후에 이런일이 발생하였기에 이 책을 지은 오강남 교수님이 더 크게 보인다.


이장님 2009-04-08 공감 (11) 댓글 (0)



역시 신학자보다는 종교학자가 한수 위
이장님 2009-04-08 공감 (3) 댓글 (0)





어느 순간, '한국인'의 민족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한큐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구원받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 절대적인 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수십년 동안, 종교를 연구한, 기독교의 섭리에 대해서 인정하고 믿는 종교학자가 낸 결론이다. 그가 본 한국의 '기독교'의 신앙은 간단하다.

어린아이가 말하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라는 식의 유아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듣는 엄마는 "맞아,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라고 대답해 줄테지만, 그 아이가 20살이 되어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유아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성장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문제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가 기실 "우리 아빠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활에서 밀접하게 발견하고도, 우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다니면 이 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제까지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다른 아빠들도 그들 나름에게는 최고 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내가 자라서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 지, 어떤 엄마가 되어야할 지도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이 많지만, 그것이 예화로 쉽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다가가기 쉬운, 우리의 예수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한번 깨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편견을 깨려는 이들에게 '빨갱이', 혹은 '신신학'의 굴레를 씌우고 있지만, 기실 이런 배타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만 절대적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큰 경향이 아닌 '근본주의적 이해'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유일신'이라 생각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말하지만, 기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허구이다. 왜냐면, 김경재 목사등도 비판하고 있지만, 진정 유일신을 믿는다면, 다른 이신과 대적하는 신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도 하나님의 '속성'임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갖는 다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놓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를 기독교 인이 읽어야 함도 당연하다는 결론을 저자는 도출한다.

또 하나 그의 공박이 강한 부분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축자무오설' 하도 많이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 쓰여진 기록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그 영감대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예수의 계보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다르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며, 또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구현해 보려는 데에서도 불가능 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실 성서는 그 당대의 '고백적' 언어였거나, 당시의 민족의 세계관의 투영이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대로 따르려면, 우리는 우선 노예제도를 살려내야 하고, 다시금 이민족을 정벌해야하며, 여성들을 강단에서 내려야 하고, '처녀'가 아닌 여자를 그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게 된다.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그 해석.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책은, '종교'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환기시키고,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들은 개인에게 있어서의 영성의 의미와, 종교가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자꾸 그것들에 대해서는 피해가고, 교조적인 신앙들이 '신학'없이 논의 없이 우리들에게 흘러가고 있기에 '기독교' 자체가 황폐해지는 것이다.

많은 참고문헌들과 읽을 꺼리들을 던져주는 점이 유익하고, 생각할 바를 남겨준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나아가 천도교나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까지 합심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 속에 이런 근본적 '의식 변화'가 일어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이런 대화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 하늘 아래에서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p.291).



하지만 몇 가지 부분은 모호한데,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그는 규정하기를 피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것에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예수를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리고 '역사적 예수' 논의들을 볼 때, 예수는 단순한 보편자로서의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은 자들'로 분명히 그 범주를 축소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벗어난 다면, '예수'에 대한 논의는 다시금 구름위로 떠오르고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의 종교는 맑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 밖에 안된다. 처절한 환경에서의 위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민족주의적 입장들이라는 것들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쉽게 쓰인다는 점이다. 차라리 정교하게 '민족'과 '겨레'에 대해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준다면 모를까, 그냥 통상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랑합니다'하듯, 사용된다는 점은 엄밀성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게 하며, 김진홍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 시점에는 다시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먹물들의' 이야기를 떠나서도, 이 책은 기존의 근본주의적인 '철부지' 기독교를 극복하는 데 해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책이다.
헨드릭스 2008-01-22 공감 (8) 댓글 (4)















예전에 꽤 흥미롭게 읽었던 <예수는 신화다>에 관한 글을 읽었다. <당대비평>의 편집주간인 김진호 목사의 글.http://saegil.or.kr/quaterly/sg03s/08church.html

전체적으로『예수는 신화다』의 주장에 대한 기독교 측의 가장 진지한 태도는 역사적인 접근을 하는 예수 연구자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역사의 예수’ 연구가 거둔 근대의 성과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그 책은 19세기 예수 연구의 일부분이 범한 잘못을 답습한 데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즉 예수 이야기가 신화라는 주장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이미 극복된 것이라는 얘기다.



『예수는 신화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퍽 취약한 책이다. 왜냐하면, 신비주의 연구자라는 저자들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은 비약과 아마추어적 논변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기독교계에 던져주는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이미 배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일련의 신비주의 텍스트들을 예수 담론에서 대거 복원시키려 한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은 독자라면 아래 책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여행자 2007-02-25 공감 (0) 댓글 (0)





오강남 선생님은 글을 알기쉽게 잘 쓰신다. 전에 [장자]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 기독교 책을 읽는다. 제목이 꽤 도발적이지만 원래 영어제목이 더 와 닿는다.[No Such Jesus : Reading Christiannity Inside Out]! 감히 번역을 해 본다면 [그런 예수는 없다 : 기독교 신앙을 속이 드러나도록 까뒤집어본다] 이다. 책의 그림 도안이 예수님이 거꾸로 되어있고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고 박혀있는 것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까 뒤집는다는 것은 거꾸로 매달고 비꼬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바닥부터 고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Reading Christiannity straight from Jesus' Heart]=' 예수의 심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본다' 정도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맨 앞에서 적으셨듯이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뜻은 다음과 같다. 최근에 영국 BBS방송국에서는 실제 예수의 모습을 법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조금 당혹스럽게 되었다. 예수는 우리들 집에 걸려있는 푸른눈의 창백한 서양인이 아니라 곱슬머리의 못생기고 건강한 농사꾼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예수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관성적으로 노르웨이 사람 같은 예수를 머리 속에 그려왔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림 뿐일까? 우리의 신앙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관성적인 신앙인거 아닐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즉, 우리는 당연하게 우리 머리 속의 예수가 참으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영혼 속에 스민 우상타파! 그런 비판적 신앙을 통한 기독교의 재발견, 새 만남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쓰라린 대목이 많은데, 특히 이런 대목은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런 근본주의자의 숫자가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전체 기독교인의 20 내지 40 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90퍼센트 내지 95퍼센트 절대다수의 개신교 기독교인이 여기에 속한다 보아도 된다. "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네 신자들은 "그래, 이제 하나님의 참 뜻을 가장 잘 섬기는 나라가 우리야. 이제 타락한 미국이나 유럽의 영혼을 우리가 구해야 돼. 선교사를 파송해야겠어."라고 생각하신다는 걸 난 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야말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에 딱 맞는 분들이 아닐까? 서양인들은 타락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2000년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역사적 실험과 실존적 결단을 기독교와 함께 했고 현재의 모습은 그런 고뇌에 찬 여정이 이루어놓은 결과인 것이다. 이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80쪽에 그려진 유태인 대량학살 쇼아를 겪었던 엘리 위젤의 말을 들어보라고 외치고 싶다.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유럽의 기독교 신앙이 왜 구태의연한 답습만으로 20세기를 버틸수 없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씀드리겠다. 사람이 사춘기를 겪고 성년이 되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오줌 똥은 가린다. 다시 퇴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인은 우리만 멀쩡하고 서양인들이 모두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오줌 똥을 못가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년전쯤 우연히 읽게 된 지그 지글러의 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날 지그는 아내가 쏘세지 덩어리의 양쪽 끝을 잘라서 버리고 중간만 요리에 쓴다는 걸 알게 된다. "여보, 우리 어머니는 다 쓰는데 당신은 왠일이오?" 그의 아내가 "사실 전 잘 몰라요.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요리하시고 저도 따라 하는 거예요." 지그는 그의 장모님께 그걸 묻게 되는데, 백발의 장모는 호호 웃으시면서 글쎄 이랬다는 거다. " 그땐 냄비가 적어서 쏘세지를 한꺼번에 요리 할 수가 없었네. 끄트머리를 내가 버렸다고? 아니라네.잘라낸 끄트머리도 따로 담아놨다가 다 썼다네." 어쩌면 오강남 선생님이 누누이 호소하시는 말씀이 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의미한 오래된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는 거다. 왜 이 개명한 21세기에도 기원전의 부족신관으로 사느냐는 거다.

이 책은 무척 다양한 신학적 논쟁을 알기쉽게 찬찬히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요약하기 버거움을 느낀다. 책 자체가 '이렇다 저렇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런 이유때문이다.'가 중요시 되기때문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찬찬한 논리전개가 아니고서야 또 다시 끝없는 감정싸움, 다람쥐 쳇바퀴도는 신앙논쟁 밖에 더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자기와 다른 사람은 사탄이요 불신자로 모는 근본주의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예수는 신화다] 꼴로 스러지고 말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선생님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신다. 정말 상식에 호소하고 보편적인 논리에 호소하신다.

그럼, 난 137쪽의 [잔인하신 하나님-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인용하여 여러분께 오강남 선생님의 빼어난 글쓰기와 진정어린 고민을 전하려 한다. 다음은 책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약간의 팁을 드린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교리와는 달리 무척 호전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잔인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을, 성서의 [출애굽기]의 사건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찬찬히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걸 본다면 오강남 선생님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현재 느끼는 모순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의미를 찾아보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강남 선생님이 추구하는 기독교를 뒤집어본다는 의미라고 본다. 즉, 도대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모순이 던져주는 실존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이렇게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은 일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시내 광야에서 40년간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게 된다. 이 정복 과정에서 이 땅은 젖과 꿀이 아니라 피가 넘쳐흐르는땅이 된다.

정복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주신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다.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요단강 너머 여리고 성이 정복의 첫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을 돌아 그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안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죽여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고 결국은 그 성마저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아이 성을 칠 차례였다. 여리고 성을 치고난 후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음에도, 아간이라는 자가 외투 한 벌과 얼마간의 은과 금을 착복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한다. 특별한 방법으로 아간을 찾아내서 아간은 물론 "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이제 화가 풀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일러준다. 이스라엘 군대 중 일부는 성 뒤에 매복하고 일부는 성 앞으로 가서 아이 성 사람을 성밖으로 유인해 낸 후 성 뒤에 숨었던 군대가 진입해서 불을 지른 다음 양면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작전이 성공해서 성 밖으로 나왔던 아이 성 사람을 모두 전멸시키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성에 있던 사람까지 완전히 진멸시키니 그 날에 죽은 사람이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고 했다.

......(한단락 생략)

도대체 이보다 더 잔인한 전쟁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인간이 하는 전쟁이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겟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진두지휘하셨다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현대전에서처럼 폭탄이나 총에 맞을 경우 금방 죽어버리지만, 이와는 달리 창이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은 며칠씩 고통 속을 헤매다가 죽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이 이기기만 하면 이런 참혹한 꼴을 보고도 좋아하신 하나님이라니 이런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욕하고 깍아 내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주 아주 중요한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면, 이렇게 한 민족만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맹활약하시는 잔인하고 옹졸한 하나님 이상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간단락 생략,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생략하는게 안타깝다. 생략의 이유는 인간적으로 베끼는 게 너무 피곤해서이다.이해해 주시길!)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다시 한번 강조한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일을 직접 일기처럼 적어놓으셨다가 나중 선지자에게 불러주시고 그것을 받아적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을 도왔다고 믿은 바를 적어 놓은 신앙고백 기록이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 그 신관에 비친 하나님일 뿐이다.

몇 천년전 당시 부족사회에서는 어느 부족이든 그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 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을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은 무엇보다 전쟁에 능한 신, "만군의 주", 전투 사령관 이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신이 자기들 편이라 생각하고 그 신에게서 용기와 확신을 얻고 거기에 힘입어 이웃 부족을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신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나라는 무조건 다 미워하는 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이 자기들만의 신이라고 보는 신관을 "부족신"의 신관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던 이런 부족신관을 그대로 채받아 거기에 목줄을 매고 살 필요가 있겠는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보편적 사랑이나 정의하고는 사돈의 팔촌도 안되는 이런 신을 받들며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구를 판판한 것으로 보던 그들의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듯, 신을 이렇게 자기들만의 신으로 보던 그들의 부족신관도 우리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런 부족신관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 자체 내에서마저 바빌론 포로와 함께 의미 없는 신관으로 취급되어 대부분 방기된 신관이다. 제 2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런 한 민족만을 위한 전투적이고 무자비한 신은 사라지고 만국을 통치하는 보편 신의 생각이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은 '무찌르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미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부족신관을 거부하고 자비의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런 부족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이런 부족신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부족신의 망령이다. (이상137-142쪽,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하늘연못 2006-04-19 공감 (4) 댓글 (2)





추석같은 저녁바람에 향긋한 아까시 꽃향기가 묻어난다.. 해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은 어찌 된 일인지, 한번도 실증이 나지 않고 언제나 가슴을 떨리게 만든다. 사랑에 빠져 달뜬 처녀의 얼굴처럼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저 초록의 산들을 보며 자연스레 '신', '절대자'에 대해 생각한다. 변함없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 자연의 조화는 아무래도 대단한, 어떤 무엇의 힘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이러하다. 세상의 하찮은 무엇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 한없이 크고 넓은 사랑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다.

'메타노이아(metanoia)', 이것은 예수가 대중을 상대로 첫 전도사업을 시작하면서 외친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에서 ‘회개’로 번역된 희랍어 원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메타노이아'는 한국어의 ‘회개(悔改)’나 영어의 ‘리펜턴스(repentance)’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뜻보다 훨씬 더 깊은 뜻, 곧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 세례까지 받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성경'을 읽어 본 적 없고, 늘 주변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날라리 신자'의 의혹, 더 이상 나의 믿음이 자라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카톨릭 신자인 고모를 통해 초등학교 6학년 즈음, '하느님'과 '예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호기심으로 '성당'에도 두어번 나가 보았다. 하지만 고모를 제외하고는 불교적 색채가 더 강한 집안 분위기 탓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사춘기, 둘 곳 없는 마음이 너무나 버거워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았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기도도 열심히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결국 진리의 말씀이 가득하다는 성경 때문에 난 '날라리'가 되고 말았다. 마음잡고 앉아 성경을 펼쳐들면, 창세기부터 까막눈이 되어 하나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소심했던 나는 적극적으로 나의 의구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두쪽 눈을 다 감은 채로 나의 복만을 구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한 교수님의 소개로 개신교에도 나가 보았지만, 근본적인 나의 질문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저 모두 믿음만을 강요하는(믿고 나면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분위기와 적어도 신도보다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성직자가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자식만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적인 호기심으로라도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끝이 났다. 결국 세례를 받기 위해 공부했던 성경지식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다. 불행히도 지금은 그것마저도 대부분 잊었지만... 만일 그 당시에 오강남교수와 같은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나의 종교생활은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더 많은 성경지식과 예수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나의 성경에 대한 몰이해는 나의 아둔함과 게으름의 산물이었지만, 어쨌든 오교수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의 기독교적인 모습들은(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구교와 신교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다 ) 문자를 넘어 그 참된 의미를 찾기 보다는 문자주의적으로, 율법적으로, 하늘나라 보다는 교회가 더 중요한, 혹은 자신과 가족만의 하늘나라 입성을 위한 이기적인 구복적 신앙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류사에서도 그릇된 믿음에 의해 비롯된 불행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믿는 이들도 믿지 않는 이들도 다같이 공평한 시선을 위해 공부하며, 더욱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교적 제국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타인의 신앙을 배척하고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 책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나의 모습을 돌아 보았다. 혈기 왕성한 20대에 '나이듦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었다. 한살 한살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 얼굴에 주름살은 늘어가지만 삶의 지혜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 더 많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참 근사한 일일진대, 생각보다 근사하게 성장한 어른도, 멋진 노년을 보내는 사람도 쉽게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깊이 패인 주름만큼 옹고집스럽게 자신과 다른 것들, 새로운 것들은 배척하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은 죽자사자 뺏기지 않으려는 어른들, 난 그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나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모습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못난 고집쟁이의 모습으로 빈티나는 짓을 수없이 저질러 왔던 것이다. 신앙이 있든, 없든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지, 내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의식의 변화를 통한 반성 '메타노이아', 참 깨달음 뿐이란 생각이 든다. 아울러, 신앙인이라면 유치한, 이기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타인의 종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길 바란다. 결국 우리가 믿는 모든 절대자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기독교를 뒤집어 읽다가 나를 뒤집어 본 의미있는 독서였다.




분홍달 2005-05-17 공감 (16)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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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신학자보다는 종교학자가 한수 위
이장님 2009-04-08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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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명저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을 통해 예수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신앙적인 혼란과 회의를 바르게 잡아준 책이다.
파란해골 2014-03-2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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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는 되야 하는거 아닌가 한다
컴온타스 2014-06-2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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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현재 모습에 대한 반성적 성찰~
못동 2012-07-1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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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있다 -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없다˝가 저작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듯..... 좀 더 많은 기독교인의 이성적인(또는 균형감 있는) 저작을 기대한다. 흔치 않은 책이라 필독하시길 권함!!!
독서꽝 2014-07-1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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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원래 제목을 '그런 예수는 없다' 라고 정했었다가 출판사측의 제안으로 그냥 예수는 없다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예수는 없다.....제목에서 느껴지는 흥미가 확실히 다르다는것을 알수있다.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들은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낄수 있지만 기독교나 그밖의 종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볼만하다. 특히 나처럼 교회를 나가볼까 하는중이거나이제 막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호기심으로 교회를 따라나서게 된 초심자들에겐 기독교에 대한 좋은 참고서적이 될수 있을것이다.

이밖에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관점을 얘기한 다른 서적과 함께 읽어둔다면 나름대로 기독교란 종교의 윤곽을 잡을수 있을것이다.사실 교회에서 하는 얘기만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기란 부족함이 적지 않은게 사실이다.(무조건 믿어라 믿어라...인간에게 이같이 재미없는 강요란 없다.) 다양한 해석과 정보를 통해 스스로의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책몇권으로 종교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냐고? 신학공부를 따로이 하지않고 대충이라도 감을 잡을려면 그나마 책몇권이라도 읽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맹탕으로 교회에 가서 목사님 설교만을 끄덕이며 듣는것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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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엄마 2003-04-07 공감(3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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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같은 교리의 책

예수는 없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기독교의 존재여부를 명석히 보여줄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에서 구입하게 되었다.허나...실망 실망 실망 뿐이였다.제대로 믿자고 제시한 이책의 제시어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에 불가하다.이건 제대로 자가 아니라 말도안되는 또다른 종교를 하나 만들어 보이는 처사밖으로는 생각이 안된다.하나님을 믿는건 머리로 믿는게 아니다 라는 생각뿐이다.지 아무리 잘나보았자 우린 인간일뿐...어찌 감히 신을 우리머리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믿을수 있단 말인가?진짜 믿음 이란 무엇인가?

탈무드의 이야기를 하나 인용하려한다.랍비여...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그러자 스승이 제자를 이끌고 산 벼랑 끝에 이르렀다.그곳에 나뭇가지가 하나 있었는데...그 나뭇가지를 잡으라 했다.제자여...손을 놓으시오.하지만 그 제자는 가지를 더 잡으려고만 했다.믿음이란 그렇게 놓지 않는게 믿음이라네..이책에서 제시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모든 종교를 통합하자는 내용이다.성숙이란 모든것을 다 받아들이고 이해해준다는 혼자 잘났다는 내용밖으로는 해석이 안된다.결국 기독교인들이 하나님만이 신이며 나의 아버지시라는 배타주의적인 종교로 해석하지만....결국 이 책의 저자 오강남씨도 그런 기독교를 배타적으로 보고 있을뿐이다.

하나하나 자신의 해석으로만 따져서 쓴 말도 안되는 책이라는 느낌 밖엔 안들었다.믿음이란 머리로 믿는게 아니다.보고 믿는거 누군 못믿으리?2+3=5이다 라고 하는 수학공식을 다들 믿는다.보고 증명된 사실 그정도 믿는건 누구나 믿을수 있는 거다.믿음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그 무엇 하나를 끝까지 굳은 결심으로 잡는 것이다.하지만 신은 분명 존재한다.하늘을 보라.자연이 존재하는한 누군가가 분명 이 모든것을 창조했음은 알수 있다. 신은 존재하고 신은 단 한분이시다.신이 여럿존재한다는 결론 밖엔 안되는 책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껀 신은 있고 선택을 잘 해야한다는 것이다.


저자도 연구해보았자 자신의 연구일뿐이다.박사가 지 아무리 잘나보았자...자연을 우주를 창조할수 있는 능력 절대 없다.똑똑한 능력 주시는 이도 신이시기에...의리로 믿는것은 믿음이 아니다.마음으로 믿는게 믿음이라 생각한다.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증명 할수가 없다.그 어떤 신도..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는다.왜냐면 사랑과 마음으로 느낌으로 하나님을 느낄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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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 2003-02-09 공감(21)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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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노이아(metanoia)', 성장하는 믿음을 기대하며...



추석같은 저녁바람에 향긋한 아까시 꽃향기가 묻어난다.. 해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은 어찌 된 일인지, 한번도 실증이 나지 않고 언제나 가슴을 떨리게 만든다. 사랑에 빠져 달뜬 처녀의 얼굴처럼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저 초록의 산들을 보며 자연스레 '신', '절대자'에 대해 생각한다. 변함없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 자연의 조화는 아무래도 대단한, 어떤 무엇의 힘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이러하다. 세상의 하찮은 무엇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 한없이 크고 넓은 사랑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다.

'메타노이아(metanoia)', 이것은 예수가 대중을 상대로 첫 전도사업을 시작하면서 외친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에서 ‘회개’로 번역된 희랍어 원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메타노이아'는 한국어의 ‘회개(悔改)’나 영어의 ‘리펜턴스(repentance)’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뜻보다 훨씬 더 깊은 뜻, 곧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 세례까지 받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성경'을 읽어 본 적 없고, 늘 주변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날라리 신자'의 의혹, 더 이상 나의 믿음이 자라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카톨릭 신자인 고모를 통해 초등학교 6학년 즈음, '하느님'과 '예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호기심으로 '성당'에도 두어번 나가 보았다. 하지만 고모를 제외하고는 불교적 색채가 더 강한 집안 분위기 탓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사춘기, 둘 곳 없는 마음이 너무나 버거워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았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기도도 열심히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결국 진리의 말씀이 가득하다는 성경 때문에 난 '날라리'가 되고 말았다. 마음잡고 앉아 성경을 펼쳐들면, 창세기부터 까막눈이 되어 하나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소심했던 나는 적극적으로 나의 의구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두쪽 눈을 다 감은 채로 나의 복만을 구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한 교수님의 소개로 개신교에도 나가 보았지만, 근본적인 나의 질문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저 모두 믿음만을 강요하는(믿고 나면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분위기와 적어도 신도보다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성직자가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자식만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적인 호기심으로라도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끝이 났다. 결국 세례를 받기 위해 공부했던 성경지식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다. 불행히도 지금은 그것마저도 대부분 잊었지만... 만일 그 당시에 오강남교수와 같은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나의 종교생활은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더 많은 성경지식과 예수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나의 성경에 대한 몰이해는 나의 아둔함과 게으름의 산물이었지만, 어쨌든 오교수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의 기독교적인 모습들은(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구교와 신교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다 ) 문자를 넘어 그 참된 의미를 찾기 보다는 문자주의적으로, 율법적으로, 하늘나라 보다는 교회가 더 중요한, 혹은 자신과 가족만의 하늘나라 입성을 위한 이기적인 구복적 신앙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류사에서도 그릇된 믿음에 의해 비롯된 불행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믿는 이들도 믿지 않는 이들도 다같이 공평한 시선을 위해 공부하며, 더욱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교적 제국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타인의 신앙을 배척하고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 책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나의 모습을 돌아 보았다. 혈기 왕성한 20대에 '나이듦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었다. 한살 한살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 얼굴에 주름살은 늘어가지만 삶의 지혜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 더 많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참 근사한 일일진대, 생각보다 근사하게 성장한 어른도, 멋진 노년을 보내는 사람도 쉽게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깊이 패인 주름만큼 옹고집스럽게 자신과 다른 것들, 새로운 것들은 배척하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은 죽자사자 뺏기지 않으려는 어른들, 난 그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나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모습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못난 고집쟁이의 모습으로 빈티나는 짓을 수없이 저질러 왔던 것이다. 신앙이 있든, 없든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지, 내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의식의 변화를 통한 반성 '메타노이아', 참 깨달음 뿐이란 생각이 든다. 아울러, 신앙인이라면 유치한, 이기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타인의 종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길 바란다. 결국 우리가 믿는 모든 절대자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기독교를 뒤집어 읽다가 나를 뒤집어 본 의미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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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5-17 공감(16) 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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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나는 무교이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신은 있다고 생각하며, 느낀적은 없지만 아마도 있을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그 신의 형태가 예수나 하나님, 부처님, 알라 등등의 형태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신의 경지라 함은 인간의 사고체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더구나 그 신의 형태가 너무도 인간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 가끔은 소나 다른 형태의 신을 믿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땅을 떠나 본 적이없다. 다만 TV를 통해서 그리고 가 봤다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미국이, 일본이, 영국이, 아프카니스탄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내가 우주를 봤을리는 만무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나는 달에 가 본적도 없다. 그러한 나의 사고는 몹시 편협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 넓은 우주에서 마치 나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생각하는양 살고 있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이 넓은 우주에서 사고가 가능한 존재가 오직 인간이라면 그 얼마나 공간 낭비겠는가.

외계인도 있을 수 있고 신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 단지 있다고 생각할 뿐 만난적도 없고 뭔가 신세를 지고픈 생각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을 혹은 인류를 구원해주고 뭔가 해결해줄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만났을때 내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왜 그들은 믿지 않는 나보다도 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있으니까 믿는다'고. 하지만 무엇을 왜 믿을까? 과연 예수나 하나님이 뭔가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를테면 천당)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를 믿으며 따르고 사랑할까?

이 책은 내가 예전부터 늘 생각했던 문제들을 다시한번 짚어준다.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이란 너무도 인간적이다. 그들은 질투를 하며 믿고 사랑하라고 하면서 대신 천당과 내세를 보장해준다. 이것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나 인간적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신이 그렇게 인간의 사고에서 이해할 만한 무언가는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그 신이 바라는 것이 너무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이상하기 짝이 없다. 신이 그렇게 인간적이라면, 또는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 가능한 무언가라면 우리가 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건 아닐까?

책은 성경에 적힌것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을 한다.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성경의 해석은 너무나도 그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성경 조차도 신의 말씀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면 그 성경은 인간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간이 외국어로 쓴 것도 번역을 하면 그 뜻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신의 말을 사람이 옮겼을때 전혀 실수가 없었을까? 또한 성경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쓴 것을 모은것이고, 그 중에서도 누락된 것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질문을 했을때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성경은 사람이 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이 임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실수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오랜 세월동안 베껴쓰고 또 베껴쓰면서 늘 성령이 임해서 단 한치의 실수도 없었을까? 아니 그보다 왜 신이 직접 쓴게 아닌 인간이 그걸 써야만 했을까? 모세의 십계명을 보자면 돌판에 신이 직접 쓰질 않았는가. 성경은 길어서 다 못썼다는 변명은 말도 안된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이 쓴 것이며 그 해석에 따라 혹은 원본 자체가 틀린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인들은 내 얘기를 들으면 언제나 사탄과 마귀 얘기를 했다. 나는 내가 사탄도 마귀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너무나 확고한 믿음 앞에서는 무서워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신이 말하는 기쁨과 신이 말하는 고통역시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라 신도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만큼 내게는 이상한 것이지만. 그들은 이미 눈을 닫고 귀를 막고 믿으므로 그 눈을 뜨고 귀를 열게 할 힘이 없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은 너무나 나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믿음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믿고 있는 형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을 가한다. 다만 책은 예를 들때 조금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게 누굴 바보로 보나?' 하는 마음을 가질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한번이라도 그들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정말로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계기는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민과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기독교인들이 읽었을때는 상당히 기분이 나쁠수도 있겠지만. 신은 있다고 믿되 그 신의 형태도 모르겠고 바라는것도 없는 내 경우에는 흥미롭게 잘 읽었다.

끝으로 하나 묻고 싶은게 있는데 하나님은 맨날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질투가 많은걸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하고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 바로 불지옥행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말하는 자비라는 것이 오직 자신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어야만 발휘되는 조건부 자비라면 그게 정말로 자비이고 사랑일까? 설사 인간은 그런다 하더라도 신이 그렇다는 것은 너무 매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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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5-05-29 공감(12) 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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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수업 두번 듣고온 아들이 혼란스러워한다. 걱정이다.



대한민국 그리스도교계 학교에서는 채플이라는 시간이 있다. 서울의 모 학교 학생회장이 재판까지 하면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아직도 이런게 있다. 사실 희망하는 학생들만 뽑아서 그리스도교 교리(정확히는 이것도 아니겠지만)를 가르친다고 해도 나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도대체 머리가 영글지도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목이라는 사람이 '너는 원숭이가 네 조상이라고 생각하니?' 따위의 질문이나 하고있는 현실을 이 나라는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해도 되는가?

내가 사는 곳은 평준화 지역이라서 내 아들은 100% 이 학교를 원해 들어간 것이 아니다. 희망학교를 선택할 때 이놈에 학교를 1순위로 선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학의 거리와 교통의 편리성, 무엇보다도 미술학원을 가기위해서는 야간자율학습을 빠져야 하는문제 등을 고려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 아들이 강제로 말도안되는 헛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그 교목(아이 말로는 정식 목사도 아니라는데 확인은 못했다)이라는 사람에세 이 책을 강제로 읽히고 시험을 보게 하고 싶다.

언제나 정통성 없는 조직이 규율이 엄하고 교리 해석의 자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집단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흥분해서 다른 이야기만 했는데, 내가 이 책을 읽은 직후에 이런일이 발생하였기에 이 책을 지은 오강남 교수님이 더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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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 2009-04-08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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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한국인'의 민족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한큐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구원받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 절대적인 신이 되어버린 예수, 그런 예수는 세상에 없다.

수십년 동안, 종교를 연구한, 기독교의 섭리에 대해서 인정하고 믿는 종교학자가 낸 결론이다. 그가 본 한국의 '기독교'의 신앙은 간단하다.

어린아이가 말하는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라는 식의 유아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듣는 엄마는 "맞아,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라고 대답해 줄테지만, 그 아이가 20살이 되어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유아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성장이 되지 않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문제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가 기실 "우리 아빠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활에서 밀접하게 발견하고도, 우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다니면 이 것은 곧바로 사회적 문제까지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다른 아빠들도 그들 나름에게는 최고 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고, 내가 자라서 어떤 아빠가 되어야할 지, 어떤 엄마가 되어야할 지도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비유적 표현이 많지만, 그것이 예화로 쉽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다가가기 쉬운, 우리의 예수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한번 깨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편견을 깨려는 이들에게 '빨갱이', 혹은 '신신학'의 굴레를 씌우고 있지만, 기실 이런 배타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만 절대적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큰 경향이 아닌 '근본주의적 이해'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유일신'이라 생각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말하지만, 기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허구이다. 왜냐면, 김경재 목사등도 비판하고 있지만, 진정 유일신을 믿는다면, 다른 이신과 대적하는 신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도 하나님의 '속성'임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갖는 다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놓고'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이단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를 기독교 인이 읽어야 함도 당연하다는 결론을 저자는 도출한다.

또 하나 그의 공박이 강한 부분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축자무오설' 하도 많이 쓰는 말이지만, 성경에 쓰여진 기록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그 영감대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예수의 계보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다르다는 이야기도 가능하며, 또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구현해 보려는 데에서도 불가능 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실 성서는 그 당대의 '고백적' 언어였거나, 당시의 민족의 세계관의 투영이다.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읽고, 그대로 따르려면, 우리는 우선 노예제도를 살려내야 하고, 다시금 이민족을 정벌해야하며, 여성들을 강단에서 내려야 하고, '처녀'가 아닌 여자를 그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게 된다. 결국,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그 해석.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책은, '종교'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환기시키고,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들은 개인에게 있어서의 영성의 의미와, 종교가 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자꾸 그것들에 대해서는 피해가고, 교조적인 신앙들이 '신학'없이 논의 없이 우리들에게 흘러가고 있기에 '기독교' 자체가 황폐해지는 것이다.

많은 참고문헌들과 읽을 꺼리들을 던져주는 점이 유익하고, 생각할 바를 남겨준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나아가 천도교나 원불교 등 이른바 민족종교까지 합심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 속에 이런 근본적 '의식 변화'가 일어나게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이런 대화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 하늘 아래에서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p.291).



하지만 몇 가지 부분은 모호한데,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그는 규정하기를 피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것에 좀 문제가 있다. 그는 예수를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졌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리고 '역사적 예수' 논의들을 볼 때, 예수는 단순한 보편자로서의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은 자들'로 분명히 그 범주를 축소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벗어난 다면, '예수'에 대한 논의는 다시금 구름위로 떠오르고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의 종교는 맑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 밖에 안된다. 처절한 환경에서의 위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민족주의적 입장들이라는 것들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쉽게 쓰인다는 점이다. 차라리 정교하게 '민족'과 '겨레'에 대해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준다면 모를까, 그냥 통상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랑합니다'하듯, 사용된다는 점은 엄밀성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게 하며, 김진홍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 시점에는 다시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먹물들의' 이야기를 떠나서도, 이 책은 기존의 근본주의적인 '철부지' 기독교를 극복하는 데 해독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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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스 2008-01-22 공감(8)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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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수'는 없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

예수는 없다? 다소 상업주의 냄새를 풍기는 선정적 제목이 거슬렸지만, 이런 책이라면 백 번이라도 용서가 된다. 선정적 제목 때문에 더 많은 독자가 생긴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잘못 읽고 있는 모든 독자들이여, '그런 예수는 없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기독교 뒤집어 읽기'는 사실상 '기독교 바로 읽기'나 '기독교 제대로 읽기'이다. 어느 문명비평가가 지적했다는 '무슨 증거, 무슨 논리, 무슨 개인적 체험, 그 어떤 것을 들이대어도 '계시된 진리'에 대한 근본주의자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47쪽)는 인용은 꽉 막혀 있는 한국 기독교계의 어둠에 자신의 저서가 얼마나 빛이 되어줄 수 있을지 하는 의심과 회의의 표현이다. 하지만, 논문식 글쓰기에 익숙할 그가 쉬운 말로 진실을 담아 쓰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 알게 된다. (더 찾아보고 싶은 독자를 위해서 꼼꼼하게 참고도서목록과 원문의 출처를 제시하는 친절한 저자!)

폐쇄적·독단적이며 근본주의, 율법주의, 문자주의적 성경해석 등의 온갖 난감한 늪에 빠진 한국 교회의 문제 제공의 1차적 원인은 한국에 기독교를 소개한 선교사들에 돌려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우물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교회 체제를 무반성적으로 유지, 확대시키려는 목회자 및 일반 신자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많은 외국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필수 조건으로 대략 1) 교리의 절대화, 2) 획일적인 행동강령, 3) 무조건적인 복종, 4) 철통같은 소속감과 헌신, 5) 전도열 등을 꼽는다'(268쪽)라는데, 이런 것은 부정적인 한국 교회를 분석해낸 결과에서 얻어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들어맞는다. 웃을 수밖에 없고, 웃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고 고백했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순수하고 강하지만 의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산타 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아이는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산타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집에 굴뚝을 뚫는 불혹이 넘은 아이 아닌 아이를 우리는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김진호 목사의 말처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우리는 경계해야만 한다.

…기형도의 어느 시에서 나오는 '우리 동네 목사님'은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과 웃는 얼굴로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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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1-2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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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독신앙을 모색하는 원로 종교학자의 찬찬한 설명!



오강남 선생님은 글을 알기쉽게 잘 쓰신다. 전에 [장자]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 기독교 책을 읽는다. 제목이 꽤 도발적이지만 원래 영어제목이 더 와 닿는다.[No Such Jesus : Reading Christiannity Inside Out]! 감히 번역을 해 본다면 [그런 예수는 없다 : 기독교 신앙을 속이 드러나도록 까뒤집어본다] 이다. 책의 그림 도안이 예수님이 거꾸로 되어있고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고 박혀있는 것은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까 뒤집는다는 것은 거꾸로 매달고 비꼬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털어놓고 바닥부터 고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Reading Christiannity straight from Jesus' Heart]=' 예수의 심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본다' 정도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맨 앞에서 적으셨듯이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뜻은 다음과 같다. 최근에 영국 BBS방송국에서는 실제 예수의 모습을 법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조금 당혹스럽게 되었다. 예수는 우리들 집에 걸려있는 푸른눈의 창백한 서양인이 아니라 곱슬머리의 못생기고 건강한 농사꾼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예수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관성적으로 노르웨이 사람 같은 예수를 머리 속에 그려왔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림 뿐일까? 우리의 신앙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관성적인 신앙인거 아닐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즉, 우리는 당연하게 우리 머리 속의 예수가 참으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영혼 속에 스민 우상타파! 그런 비판적 신앙을 통한 기독교의 재발견, 새 만남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쓰라린 대목이 많은데, 특히 이런 대목은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다.

"... 이런 '근본적인 것들'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런 근본주의자의 숫자가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전체 기독교인의 20 내지 40 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에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90퍼센트 내지 95퍼센트 절대다수의 개신교 기독교인이 여기에 속한다 보아도 된다. "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네 신자들은 "그래, 이제 하나님의 참 뜻을 가장 잘 섬기는 나라가 우리야. 이제 타락한 미국이나 유럽의 영혼을 우리가 구해야 돼. 선교사를 파송해야겠어."라고 생각하신다는 걸 난 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야말로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에 딱 맞는 분들이 아닐까? 서양인들은 타락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2000년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역사적 실험과 실존적 결단을 기독교와 함께 했고 현재의 모습은 그런 고뇌에 찬 여정이 이루어놓은 결과인 것이다. 이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80쪽에 그려진 유태인 대량학살 쇼아를 겪었던 엘리 위젤의 말을 들어보라고 외치고 싶다.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그의 이야기는 유럽의 기독교 신앙이 왜 구태의연한 답습만으로 20세기를 버틸수 없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씀드리겠다. 사람이 사춘기를 겪고 성년이 되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오줌 똥은 가린다. 다시 퇴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인은 우리만 멀쩡하고 서양인들이 모두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오줌 똥을 못가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년전쯤 우연히 읽게 된 지그 지글러의 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느날 지그는 아내가 쏘세지 덩어리의 양쪽 끝을 잘라서 버리고 중간만 요리에 쓴다는 걸 알게 된다. "여보, 우리 어머니는 다 쓰는데 당신은 왠일이오?" 그의 아내가 "사실 전 잘 몰라요.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요리하시고 저도 따라 하는 거예요." 지그는 그의 장모님께 그걸 묻게 되는데, 백발의 장모는 호호 웃으시면서 글쎄 이랬다는 거다. " 그땐 냄비가 적어서 쏘세지를 한꺼번에 요리 할 수가 없었네. 끄트머리를 내가 버렸다고? 아니라네.잘라낸 끄트머리도 따로 담아놨다가 다 썼다네." 어쩌면 오강남 선생님이 누누이 호소하시는 말씀이 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의미한 오래된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는 거다. 왜 이 개명한 21세기에도 기원전의 부족신관으로 사느냐는 거다.

이 책은 무척 다양한 신학적 논쟁을 알기쉽게 찬찬히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요약하기 버거움을 느낀다. 책 자체가 '이렇다 저렇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런 이유때문이다.'가 중요시 되기때문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찬찬한 논리전개가 아니고서야 또 다시 끝없는 감정싸움, 다람쥐 쳇바퀴도는 신앙논쟁 밖에 더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자기와 다른 사람은 사탄이요 불신자로 모는 근본주의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예수는 신화다] 꼴로 스러지고 말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선생님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신다. 정말 상식에 호소하고 보편적인 논리에 호소하신다.

그럼, 난 137쪽의 [잔인하신 하나님-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인용하여 여러분께 오강남 선생님의 빼어난 글쓰기와 진정어린 고민을 전하려 한다. 다음은 책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약간의 팁을 드린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교리와는 달리 무척 호전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잔인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을, 성서의 [출애굽기]의 사건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찬찬히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걸 본다면 오강남 선생님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분이 아니라, 현재 느끼는 모순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의미를 찾아보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강남 선생님이 추구하는 기독교를 뒤집어본다는 의미라고 본다. 즉, 도대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모순이 던져주는 실존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이렇게 모세의 지도 아래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은 일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시내 광야에서 40년간 헤매다가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게 된다. 이 정복 과정에서 이 땅은 젖과 꿀이 아니라 피가 넘쳐흐르는땅이 된다.

정복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주신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다.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 요단강 너머 여리고 성이 정복의 첫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리고 성을 돌아 그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안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죽여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고 결국은 그 성마저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아이 성을 칠 차례였다. 여리고 성을 치고난 후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음에도, 아간이라는 자가 외투 한 벌과 얼마간의 은과 금을 착복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한다. 특별한 방법으로 아간을 찾아내서 아간은 물론 "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이제 화가 풀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일러준다. 이스라엘 군대 중 일부는 성 뒤에 매복하고 일부는 성 앞으로 가서 아이 성 사람을 성밖으로 유인해 낸 후 성 뒤에 숨었던 군대가 진입해서 불을 지른 다음 양면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작전이 성공해서 성 밖으로 나왔던 아이 성 사람을 모두 전멸시키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 성에 있던 사람까지 완전히 진멸시키니 그 날에 죽은 사람이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고 했다.

......(한단락 생략)

도대체 이보다 더 잔인한 전쟁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인간이 하는 전쟁이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겟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진두지휘하셨다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현대전에서처럼 폭탄이나 총에 맞을 경우 금방 죽어버리지만, 이와는 달리 창이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은 며칠씩 고통 속을 헤매다가 죽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이 이기기만 하면 이런 참혹한 꼴을 보고도 좋아하신 하나님이라니 이런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욕하고 깍아 내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주 아주 중요한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면, 이렇게 한 민족만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맹활약하시는 잔인하고 옹졸한 하나님 이상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간단락 생략,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생략하는게 안타깝다. 생략의 이유는 인간적으로 베끼는 게 너무 피곤해서이다.이해해 주시길!)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다시 한번 강조한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일을 직접 일기처럼 적어놓으셨다가 나중 선지자에게 불러주시고 그것을 받아적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을 도왔다고 믿은 바를 적어 놓은 신앙고백 기록이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 그 신관에 비친 하나님일 뿐이다.

몇 천년전 당시 부족사회에서는 어느 부족이든 그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 신을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을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은 무엇보다 전쟁에 능한 신, "만군의 주", 전투 사령관 이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신이 자기들 편이라 생각하고 그 신에게서 용기와 확신을 얻고 거기에 힘입어 이웃 부족을 무찌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신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나라는 무조건 다 미워하는 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이 자기들만의 신이라고 보는 신관을 "부족신"의 신관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던 이런 부족신관을 그대로 채받아 거기에 목줄을 매고 살 필요가 있겠는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보편적 사랑이나 정의하고는 사돈의 팔촌도 안되는 이런 신을 받들며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구를 판판한 것으로 보던 그들의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듯, 신을 이렇게 자기들만의 신으로 보던 그들의 부족신관도 우리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런 부족신관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 자체 내에서마저 바빌론 포로와 함께 의미 없는 신관으로 취급되어 대부분 방기된 신관이다. 제 2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런 한 민족만을 위한 전투적이고 무자비한 신은 사라지고 만국을 통치하는 보편 신의 생각이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은 '무찌르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과 함께 고통을 당하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미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부족신관을 거부하고 자비의 하나님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런 부족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만에 하나 기독교에 이런 부족신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부족신의 망령이다. (이상137-142쪽,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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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연못 2006-04-19 공감(4)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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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종교에 던지는 진지한 종교적 질문들

얼마전 영국 BBS 방송국에서는 예루살렘 부근에서 발견된 팔레스타인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예수의 모습을 복원한 적이 있었다. 뭉툭한 코와 거무튀튀한 얼굴은 여지없이 시청자들의 기대를 져버렸을 것이다. 파란 눈에 금발의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는 것이『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의 주장이다. 다소 선정적인 책제목이 거슬린다 해서 이 책을 놓쳐선 안 된다. 이 책의 제목에 목소리를 높여 주위의 이목을 끌어보겠다는 명민한 상략(商略)이 작용했다는 것은 지레짐작이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요란한 책 제목은 부실한 내용으로 이어진다는 선입견을 이 책은 깨끗하게 불식시킨다. 논의는 진지하고, 진지한 만큼 깊이가 있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금발인 예수가 실제의 예수가 아니라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그것은 서구인에 의해 '해석된 예수'일 뿐, 실제의 예수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다석 류영모. 함석헌, 그리고 민중신학자 안병무 이래로 꾸준히 성장한 토착신학의 성과에 일정하게 빚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배적인 서구의 그리스도론이란 성서를 해석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 로마적인 세계에서 일반적이었던 신격화된 구원자 상을 예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라는 것이 안병무의 주장이었다. 안병무는 불교가 중국에 가서 그 문화에 섞이면서 선불교를 탄생시켰듯이, 예수교가 만일 서구의 그리스 로마 문명권 대신 중국 등 동북아 문화에 먼저 유입됐더라면 어찌됐을까 하는 점을 평소에 환기시켰었다. 모든 텍스트에 대한 읽기는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의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읽는 자'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면 이런 저자의 주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어느 종교를 갖게 되는 것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내가 만약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독일에서 났으면 개신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에서 났으면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인도에서 났으면 힌두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가 거기 태어나서 그 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 종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백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백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미국 남부지방 KKK 단원들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차별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 성경도 역사적,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역사적 과학적 정확성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나름대로 깨달음을 주기 위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 책은 먼저 성경을 비유와 은유로 구성된 하나의 철학적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기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피를 취하지 말라는 구절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받은 벌이 해산의 고통이기 때문에 산모의 고통을 덜기 위한 어떤 조치도 해서는 안된다는 교파 등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씌여진 축자적(逐字的) 의미만으로 성경의 의미를 고정시킬 때, 성경은 신비화․절대화되고 신학은 토론과 대화를 거부하는 닫힌 체계가 된다.

이 책은 시종일관 주류(主流)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과 배타주의적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성경은 한 점 한 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성경 무오류설, 타종교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종교 다원주의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하는 근본주의, 이런 신앙관을 가진 국가는 지구촌에 한국 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서구만 해도 옛시대의 독선적인 `종교적 제국주의` 를 내던진 지 오래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가난한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런 배타적 신앙관을 벗어던진 지 오래인데도, 95%내지 90%에 해당하는 국내 기독교 신자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 탓이며, 이런 신자들은 서구에서 들려오는 신(新)신학의 소식을 사탄의 음모라고 규정하는 `대단한 영적 오만과 신학적 무지` 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잘못된 신관보다 차라리 무신론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비교종교학자이자 신자이기도 한 필자의 선언이다. 그러한 선언에는 배타적 신앙관을 가진 신자들의 신앙적 성숙과 성장을 바라는 필자의 간곡한 충정이 담겨져 있다.

올해로 회갑을 맞은 저자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이 같은 책을 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97년 캐나다 최대 개신교 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가 기자회견을 통해 “예수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밝힌 것에 대해, 한인교회 목사들이 이를 비난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 유아기’와 ‘정신적 식민지성’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왕의 신학이론서들이 어렵고 딱딱하여 대중들을 외면하고 있다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쉽게 읽히면서도 선명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 어렵고 딱딱한 문제를 우화와 비유를 적절히 들어가며 풀어간 저자의 글솜씨가 글을 읽는 속도감을 누그러 뜨리지 않는다. 중간중간 나오는 관련서적 소개와 뒤에 실린 참고문헌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한껏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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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2004-11-2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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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하려거든 똑바로 하라..

애증이 느껴진다. 한국 교회의 철없는 믿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지적들이 제발 허공에 맴돌다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그의 학문적 방법과 내용을 본다면 철저하기는커녕 상업적 냄새 때문에 코를 다 막아야 할 판이다.

두 달여 동안 이 책을 읽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짜 예수는 없더나? 하는 핀잔도 들어가며 읽어 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받았던 느낌은 단순했다. 이 책 역시 우리 교회의 현실을 꼬집고, 한국 교회 현실에 예수는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오덕호 교수의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류의 한국 교회 비판서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예수는 없다'는 분명하게 종교 다원주의 입장에 서있다. 예수만이 참된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 역시 구원과 진리에 이르는 다른 길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의 배타적이고 비상식적인 신앙과 신학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한국 교회가 귀 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라면, 시대가 변화하는만큼 신앙의 내용과 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강남 박사는 글로즈토드랜크 목사가 쓴 『기독교의 변혁』에서 변해야 할 10가지 패러다임을 소개한다.

1)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2) 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3) 저 위에 계신 하나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4)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5) 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6) 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7) 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8)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9) 분열에서 연합으로
10)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그 뒤의 성경관과 신관, 예수에 대한 생각들에 있어서는 차라리 『기독교의 변혁』이라는 책을 번역만 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만을 소개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오강남 박사가 지적한 성경관은 19-20세기의 서구 사회에서 성경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성경이 환경과 문화 속에서 고백되어진 신앙고백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부족신관은 그 당시의 문화를 포함한다. 지금의 눈으로 읽는다면 부족신은 그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눈으로 본다면 옳다. 우리가 얻을 것은 부족신관 자체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이 그 당시에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어떤 의미인지를 찾는 일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종교비교학자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은 구시대적인 생각들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책 제목으로 내세운 '예수는 없다'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4장 예수는 없다에는 항간의 떠도는 유언비어만이 적시되어 있었다.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배경을 찾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었지만,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는 성령에 의한 잉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역시 그는 침묵한다.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해서는 그는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7-80여쪽 분량에 예수님의 성생활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만을 담아 놓고 버젓이 예수는 없다는 표제를 붙인 것은 대단한 상업주의이다.

애증..답답한 한국교회의 현실과 신앙을 꼬집고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할 많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나 이 책처럼은 아니길 바란다. 좀더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그려줄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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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願 2001-10-15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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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서 읽어본 책의 느낌.

나는 기독교인이다. 거기에 골때리는 보수 교회를 다니고 있고, 그 가르침을 진리로 믿어오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렇다고 꼴통처럼 귀를 막고 있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다른 종교, 다른 사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하려 하고 있으며,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한계를 분명히 느낀다. 나 자신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문자적 가르침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교가 준 두려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수도 없다.

나는 오강남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면에서 동감하면서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우선 오교수와 같은 다원론자들의 주장의 이면에는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사고가 많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들은 종교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의 체계, 평화, 사랑, 공존 등의 가치를 더 높이 두고 있다. 아니 그들에게은 현실 종교는 거부하지만, 다른 이상과 가치의 종교를 창시하고, 그것을 섬기며, 그것을 위해 현실 종교를 벗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상에는 그들이 원하는 그 이상과 가치는 비록 성숙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헌신,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헌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종교라는 것을 단순한 나 자신의 의지와 기호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나 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비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비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체나 이성적 사고라는 것도 사실 헛된 몽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성과 비이성, 주체와 비주체라는 것의 구분선도 얼마나 모호하고 어려운 것인가? 누가 충분히 주체적일 수 있으며 누가 충분히 이성적인가? 도리어 종교가 제시하는 진리를 나의 진리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주체적이지 않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기독교에 귀의한 나는 나의 기호와 멋짐을 위해 기독교를 재단할 마음은 없다. 그냥 기독교의 종교적 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믿음의 저변에는 이 종교가 우리의 경험상 선하고 좋으며,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 증거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믿어서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니 그렇다는 것을 자꾸만 확인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오강남 교수의 지적이 잘못된 것 만은 아니다. 그의 생각은 적어도 기독교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 비록 그것이 다원주의적 사고만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지만, 적어도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아름다움을 잃은 모습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정당하다고 본다. 그것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여기느냐, 여기지 않느냐의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싸울 일은 아니다. 적어도 예수가 하나님이든, 단지 인간일 뿐이든간에, 둘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마음, 사역, 사랑, 존중에 대해서는 손을 잡고 전파하며,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실 교회와, 한국의 개기독교인의 대다수들, 그리고 나 자신은 이러한 것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으며, 회개해야할 뿐임을 알고 있다. 오강남 교수의 그 지적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이 책을 통해 자성의 마음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교수의 마음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열정이 결단코 누구보다 적은 것이 아님도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믿음을 공고히 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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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투원 2003-05-17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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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밖의예수,내안의하느님

마음을 두근거리면 신의가면 을 읽던 생각이 났다.
순진하게도 지은이가 신의 비밀을 밝혀 줄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오강남은 인격적인 신은 없다고 한다. 즉, 자연과 우주에 신이 있고,
사람 안에 신이 있다.
불교에서는 친숙한 이런 사고방식. 이러한 생각은 지은이의 주관이 아니라
구미 신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한다. 거기까지는
켐벨이 도달했던 지점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이 서로 진지한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더욱 신 앞에 가까와 질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땀 한 방울이라도
흘릴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예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는 구미 신학이 아니라, 오강남 자신의 목소리를 기대한다.
캠벨을 넘어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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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정백 2006-05-0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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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 :23)

기독교와 나의 첫 만남은 사탕과 웨하스의 유혹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름성경학교에 쫓아가면 과자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전도사님의 감언은 동네꼬마들로써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큰 도화지에 써있는대로 '밀과 보리가 자라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등 찬송가를 율동과 함께 큰소리로 따라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생활은 중3때 멈추게 되었다. 수백명이 참석한 예배였던걸로 기억한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기원하기 시작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기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숭고함... 신성함. 솔직히 이런 감정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세련된 현대식 건물에 모더니티한 십자가상, 그 일사분란함과 하나로 모여진 군중의 힘은 나로 하여금 전체주의의 선입견을 주었다. 또 마음 한구석에서 '만약 이게 허상이라면..?'이라는 질문이 들었다.

그이후 보충수업은 종교논쟁의 장이 되었다. 교회다디던 친구들은'악마가 널 유혹한거다' '하나님이 널 시험에 드시게 한거다.'라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해댔다. 물론 어느 순간 더 이상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다. 모든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니 무슨 논리와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찌 인간이 알랴? 라고 답을 하는데 더 이상 논쟁은 소모적이었다.(그리고 지금도 주변의 기독교인과의 종교에 대한 논쟁은 대개 그렇게 끝이 난다.) 대학을 다니며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현실의 문제,세계의 인식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며 당연히 소모적 종교논쟁은 기억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예수는 없다>는 더 인상적이다.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종교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책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보수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기독교 상업주의에 대해 질책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세계 기독교를 믿는다는 나라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종교양식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선 성경에 대한 절대적 신봉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성경에 모든 진리의 말씀이 있다는 종교인들을 자주 만난다. 저자는 이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있음으로 생기는 성경무오류설에 대해 비판한다. 이어서 4복음서에 대한 인식오류. 복음서는 초기 교회의 윤리적 이상, 신앙고백이 실현된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이 덧붙여지고 또 유력한 권력들이 합리화시키며 신성화한것으로 파악한다.

저자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일원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현재 우리 기독교에서 보자면 이는 당혹스런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신학적 연구성과를소개하며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베들레헴 출생, 동정녀, 병자들에 대한 기적, 부활등 기독교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절대가치로 믿고 있는 일들을 하나 하나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기독교가 가치 없는 거짓 종교임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진정한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한다. 즉 민중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기신 예수, 율법과 사이비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예수, 상식과 편견을 뒤집어 엎고 혜안을 여는 예수...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교회의 가르침, 교회의 권력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말하고 실천했던 그 길을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복락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거시적 전복보다 현재의 계급적 모순들을 그대로 좌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아야할 것이다. 기독교의 비극은 '예수 자체의 가름침보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굳게 믿게 만든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 줄곧 이 책은 기독교인들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왜냐면 <예수는 없다>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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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1-07-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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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경솔하지 않은가 싶다. 깊이 깨닫고 공감한 부분이 있는 반면에 너무 억지다 싶은 부분이 있다. 다만 너무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 분야에 대한 나의 지식이 너무 짧아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을 충분히 표현 못하겠다는 것이다.(그것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동조이든, 반박이든 두가지 모두다...)

어떤 것이든지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는 섣불리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대되는 의견도 충분히 생각해보아야 할것이고, 동조하는 다른 의견도 충분히 들어봐야 할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아쉽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기존의 기독교가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독단과 독선을 자신의 생각에서 그대로 다시 재현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상대편에 대한 무지의 생태에서 오직 내 생각과 다르다고해서 배척하고, 반대하는 것 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 없다. 서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통해서 반성하고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변화가 없는 생각은 죽은 생각이다.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그 속에서 새로움을 탄생할 수가 있다.

저자는 예수가 없음을 주장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예수가 있다는 것을 역으로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길 권유한다. 재독, 삼독 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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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logue 2003-06-2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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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예수는 없다.

한국교회에서 예수와 교회라는 말이 곧 한국 교회를 대변한다구 해도 틀린말이 아닐것이다. 근본주의에 물든 현 신도들에게 이 책은 거의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니, 이런 젠장할 책이 출판되는걸 막아야 돼 라면서 출판사앞을 점거할 지도..ㅡ,.ㅡ; 다른 종교에 비해 유일신을 믿는 게다가 성경의 무오진리설을 믿는 한국에서 성경에 대한 리버럴한 해석과 그리고 주일 성경공부를 뒤집는 말을 과연 받아 들일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진정 올바른 진리란 변하는 않는 모습 가운데 유동성을 가지고 임해야 되는게 진정 올바른 진리일것이다. 오강남씨의 이 책은 막혔던 둑을 뚫듯이 우리 맘에 죽은 예수를 섬기는 맘의 구멍을 내구 그 안에 십자가에서 죽은 피가 흐르는 예수를 살리는 좋은 책이 될것이라 생각한다. 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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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통 2003-04-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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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책!!!!

참으로 먹진 책이다. 참 기독교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길을 보여 준다. 한국적(미국 제국주의적)근본주의 기독교에 물들어 있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mynam10 2010-01-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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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혼란스럽습니다



올해 개봉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나서 다시 4복음서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번갈아 보며 읽었지만 아무리 그냥 믿어보려 해도 의문이 드는 나의 신앙을 보며 풀이 죽어 있던 차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모태신앙은 아니어도 20년을 훌쩍 넘기고 개척교회에서 6년간을 성가대로 교사로 청년부로 시간과 젊음을 불태워가며 신앙생활을 했지만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의문들과 회의감에 나는 의심많은 나의 성격을 탓하기만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아이때문에 닥친 어려움속에서 난 내가 줄곧 배우고 아는 신앙대로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실줄만 알았다 홀연히 임하셔서 신속한 치료를 해주실줄 알았다

그게 아님을 느끼면서 나는 더 많은 회의감에 빠져야 했다

교회는 다녔지만 그냥 다녔을뿐 전과 같은 열심과 열의는 없었고 그렇게 4년이 흐르면서 나는 교회에 다니는 주위 성도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전에는 열심을 내는 성도의 한 사람이였기 때문에 그런 시각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기회는 나에게 다른 각도의 신의 개념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했고 역사적 고증이니 하는 지식도 없고 성경이 하늘에서 떨어진것으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이게 다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었고 이것은 나에게 속박처럼 여겨졌던 대속의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둥 구약을 읽으며 잔인하고 이기적이기까지 율법의 하나님에 대해서 벗어나 신에 대해 다른 눈을 뜨게 했고 이러한 신이면 나는 정말 믿고 싶다라는 진지한 이끌림이 생겼다

나의 의식에 변화가 조금씩 생겨난 때에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접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의 나였다면 이 책은 아마 제목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약간의 변화가 생간 나에게 이 책은...나를 슬프게도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슬프다는 것은 ... 그래도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초능력을 가진 신이기를 바랬고 내가 억울하고 원통할때 대신 갚아주셔야 하는 분이고 믿기만 하면 천국으로 갈 수있는 아주 쉬운 길을 열어주신 분이였는데 이것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까지 고수했던 신앙과 열심이 다 헛되다는 것이고

혼란스럽다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 성경의 말씀이 이전과는 달리 들릴 것이 분명한데 이제 나는 나의 신앙의 대상과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불교처럼 명상하고 혼자 찾아야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믿었던 신앙은 비록 장님같았어도 그냥 따라가기만 다해주신다는것이 편했는데 이제 나는 어디에 마음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막막해진다

책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시간을 길게두고 다시 깊게 고민해 봐야할 것 같다

지금은 집을 잃은 아이처럼 마음이 불안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또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다시금 나에게 샘물같은 깨달음이 생기리라 기대하면서 용기를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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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swjmsw 2004-07-08 공감(3)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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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예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먼저 `보지 않고 믿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믿는 경우가 많다.그렇지만, 부모자식간에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 가족간에 마음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성경에 대한 `축자적 해석`보다 `이면의 진리`를 설명한 의미있는 책이다
겨울호랑이 2016-04-0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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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요새 기독교서적들을 읽고픈 마음에 책을 찾았는데...표지 해설을 보면 기독교신앙을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진정한 예수를 만난다는 그런 내용의 책인 것 같았다. 이 책의 의도였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반종교적인 서적이더만. = = 예수도, 부처도, 또 다른 이교의 신들에게도 같은 정도의 존엄을 부여해야 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편협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냥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리딩포인트 : 수십년을 종교학과 기독교를 공부하고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깊이 읽었을 작가가 내리고 있는, 가고 있는 결론을 보면 결국 믿음이란 노력없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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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le 2006-01-2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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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수는 없던 것이였다.



'예수는 없다' 그 옛날 유럽 중세시대였다면 오강남 교수는 돌에 맞어 시신 위로 돌무덤이 생겼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가 아직 개발도상국이라는 닉네임이 항상 따라 다니던 70~80년대 개신교 부흥기 때 였더라도 복날의 개처럼 잡혀 질질 끌려다닐 정도의 파격적인 책 제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유연한 신앙심이 부족한 시대에 원로 비교종교학자는 우리게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했을까? 여기에는 어쩌면 '예수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은 잘못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답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 부는 맹목적인 신앙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국인들의 사회심리학적 기질 중에 하나로 지적되는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 입장론을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에서 감성은 성화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에 걸쳐 진일보한 이성의 기능은 우리를 더이상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에 대한 믿음 방식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는 분명히 이성의 잣대로 제단되어져야 한다.



2 부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에 대한 경계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감화되어 오탈자 없이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축자영감설'은 특히 외국어 번역가들에게는 아주 어처구니 없는 맹신 중에 맹신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바벨탑 파괴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언어 단일성의 파괴는 오늘까지도 무수히 많은 언어로 퍼지고 있다. 국가와 민족간의 지적 교류에 하나인 번역 과정을 들어다 보자.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빠질 수 밖에 없는 번역상의 오류를 늘 존재한다. 성경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성경에 대한 옳바른 이해는 결코 오탈자가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을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진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부는 우리가 은연중에 믿고 있는 잘못된 신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실제적 다신론, 실제적 무신론, 부족신관, 율법주의적 신관, 조건부 신관 등 각 개인의 주관성이 녹아 있는 신념에 따라서 얼마나 변질된 신관을 갖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 라고 기도 중에 많이 부르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성을 결정 지을 수 없는 신에게 과연 걸맞는 호칭인지 분명히 따져보고 넘어갈 문제다. 개인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해서 한 때 '불가지론'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었다. 개념이 가지는 초월성을 생각한다면 신은 분명 언어로 표현되어질 존재도 아니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 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깊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은 증명 되어져야만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것은 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4 부는 이 책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을 하나 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원래는 다른 진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종교는 오랜 시간을 걸쳐 오는 동안 그 시대의 가치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를 겪어 온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가 해당 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로 종교가 갖는 원형의 가치가 손상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독학으로 공부해서 믿고 싶은 종교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도제교육처럼 선경험자가 얘기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기독교의 목사나 사제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는 이야기는 신자들에게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 회의적 자세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제나 의심하고 그 의심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설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 5 부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떤 종교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심리적, 사회적 기능이 작용하고 있다. 종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충족시키면서도 사회적 윤리에 역행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가장 큰 미덕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믿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풀어 준다는 점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기도 하는데, 구원이 너무 내세지향적이면 현실적 가치를 너무 쉽게 평가절하할 수 있고, 반대로 구원이 아주 현세지향적이면 기복적 신앙관에 빠져버릴 위험이 커져버린다. 더블어 종교적 제국주의자의 자세도 분명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전도에만 신경을 쓴다는 의도는 좋지만 지하철에서 '예수불신지옥'이라고 쓴 빨간띠를 두른 열혈신자때문에 최소한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수작임에는 분명하다. 내용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도발성도 적당하니 말이다. 의식있는 신앙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별다르게 발칙한 내용이 없는 교양 수준으로 알고 넘어가야할 기독교론이라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님은 성경만 주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 좌표를 점검케 도와주는 책도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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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리스 2004-09-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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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교수가 지난달 18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정교-진보운동-사회주의'라는 주제의 초청강연을 가졌다(이날 강연에는 학생들과 시민 17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 녹취록이 있기에 옮겨온다. 많은 분들이 일독해 보시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이다(종교에 관한 우리의 '상식'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녹취록은 '푸하'님의 서재에서, 그리고 강연회 사진은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갖고 온 것이다. 군데군데 굵은 글씨로 표시한 강조와 간혹 덧붙여진 군말은 나의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일종의 변명 같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민중 신학과 가까운 한 기독교 계통의 잡지로부터 현대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죄송합니다. 못쓰겠습니다'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제 학술 분야가 원래 기독교보다 고대사였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좀더 많이 한 부분도 있었고, 또 신자가 아닌 신분으로 비판하기에는 뭔가가 쉽게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사실 그때 제가 거절의 말씀을 드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이건 굳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결국 불교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만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기업 활동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얼핏 보면 신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은 신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현존하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발언입니다.(*종교사회학에서는 상식적인 얘기이다.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자리' 곧 '좋은 목'이라는 사실을 목사님들의 상식이듯이. 이미지는 김종서 교수의 <종교사회학>(서울대출판부, 2005)을 가져왔는데, 내가 오래전에 종교학 과목을 수강하며 읽었던 책은 오경환의 <종교사회학>(서광사, 1990)이다.) 그리고 사실은 외국의 사회인류학이라든가 사회학 같은 부문에서는, 특히 종교사회학에서는 요즘 '종교 시장'이라는 용어를 거의 별 거부감 없이 쓰다 보니까 저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의 경우 사찰이든 교회든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일종의 기업 활동으로 보이는 신앙 활동의 형태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이념적 입장에서 비판하기가 왠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활동이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소위 기복 장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를 찾을 때는 마음 속에 일종의 거래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컨대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겠지" 하고 생각할 때 여기서 신의 축복이란 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기도를 잘 하면, 대학교 입학뿐 아니라 예컨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해져서 안 짤리겠죠. 그러니까, 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결국에는 여유있는 생활하고 잘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 신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거래할 수 있다"는 조직에 가입해서, 헌금이라는 이름이든 성금이란 이름이든 불전이란 이름이든, 어떤 명목으로 거기에다 일종의 물질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신에 상당히 현실적인 성격의 축복을 돌려 받는, 성격의 신앙 생활이 우리한테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기복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복 신앙은 꼭 구체적으로 '자녀 입학하게 해 달라',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 하는 것뿐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현실 생활이 원만하고, '현실적인 잣대'로 봤을 때 행복한 생활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 돌려받으려는 것이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든 교회든 수많은 종교단체에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기복을 제공함으로써 상당한 대가를 받고, 또 그 대가로 사찰의 경우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 불상을 짓고, 교회 같으면 단일 교회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말하자면 기복 장사를 잘 한다는 것을 건물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거래나 장사에 대해서 이념적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기복 장사, 종교를 신통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 거래하는 곳으로 이해한다는 것, 또는 종교의 대상으로 신이나 초자연적 힘, 또는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제그제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이차돈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신라 법흥왕 때의 순교자 이차돈을 잘 기억하시겠지만, 왕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시킨 거죠. 대신들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이차돈을 죽였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대가 무로 돌아가고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삼국유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동기가 됐는데, 이차돈이 참수당하기 직전에 '만약 부처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부처님에게 기적을 일으킬 권세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참수당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 대신에 하얀 물, 그러니까 우유와 같은 색깔의 하얀 물이 갑자기 목에서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부처가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무서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감복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이고, 불교를 믿는 수행자의 목을 칠 때 하얀색의 액체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서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설화로서는 유래가 깊은 설화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신라에서 생긴 설화도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라 사람들한테 초기의 붓다, 초기의 부처가 바로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그런 신통한 존재였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 승려나 순교자 이차돈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킬 만한 신통력의 소유자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다는 것을 상당한 민족적 긍지로 삼는데, 만약 일본서기 , 일본의 공식 역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수했을 때, '부처를 믿으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이고 붓다가 나라를 지켜줄 수 있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붓다라는 신이 힘이 세고 무서운 신통력을 갖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초자연적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종교에다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고,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섭고도 신비한 도사로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깊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기가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기복과 오늘날의 기복은 상당히 다릅니다. 기복은 복을 빈다는 이야기인데, 복을 누구를 위해서 비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녀가 수능시험을 볼 때 어머님이 사찰에 가서 대입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입 기도라는 게 결국 내 옆에서 기도를 하는 다른 아줌마의 아들보다 내 아들을 먼저 입학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청중 웃음), 기도는 같이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상당한 경쟁 관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대의 기복은 완전히 장삿속이 되기도 하지만, 아주 원자화된 개인, 말하자면 옆의 아줌마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만을 입학시켜 달라는, 개인·개체 위주의 장사인데, 전통적인 기복이 이것보다는 약간 차원이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때 미륵상이나 아미타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어떤 명을 새겼는가 하면, 나의 부모를 비롯한 칠세(七世) 친척들을 극락왕생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국토가 태평하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끔 하소서 하는 명을 새겼습니다. 결국 나뿐만 아니고 국가 전체가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뭔가를 받도록 비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이미 문화 속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때는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참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 삼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복 장사에는 사찰이나 교회라는 공급자가 있는가 하면, 그 장사를 제발 해 달라고 하는 수요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들이 갑자기 없어지고 수요만 그대로 남는다면, 예를 들어 무당이나 점쟁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요자로 하여금 이런 기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급자나 수요자만을 인격적으로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삼을 순 없다 하더라도 소위 '상도덕'은 문제삼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상도덕' 아시죠? 장사할 때 그래도 어기면 안 되는 일종의 '상도'가 있는데, 기복 장사하는 과정에선 이것이 너무도 많이 어겨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 재벌들끼리 장사를 해도, 만약 LG 휴대폰 쪽에서 '삼성 휴대폰이 곧 고장날 것이니 삼성 휴대폰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행복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악성 흑색 광고를 낸다면 이것은 아마 당장 재판을 받아 상당한 돈을 물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불신지옥'이라고 외친다면 이건 사실 LG 휴대폰만이 진리고 삼성 휴대폰이 거짓이라는 말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그걸 또 '불신지옥'이라고 외칠 때에는 꼭 '불신(佛信)지옥', 그러니까 '불교를 믿는다면 지옥이다' 라고 들리기 때문에... (청중 웃음) 이것은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도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청중 웃음)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는 고용자를 막 다루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해서 삼성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성말고 무노조 경영하는 곳이 '종교 재벌'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혹시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에서 노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죠?(청중 웃음)

-사실은, 삼성보다 대형 교회에서 주인이 아닌 '밑에 사람'으로 일하기가 훨씬 불안합니다. 대형 교회의 부목이나 전도사, 운전사 정도면 뭐 월급이 박한 건 그렇다 치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죠. 주목의 마음에 안 들고 노선을 달리 하면 자르는 데 별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드는 시도를 2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아직 대다수 대형 교회들에 노조가 없습니다. 고용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대형 교회도 그렇지만 최근 부산의 삼광사라는 대형 사찰에서 노조 탄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정규직 사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다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매일노동뉴스>에서 알게 됐습니다. 결국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사를 해서는 무노조 삼성보다 더 못된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아무리 장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업체가 정치에 부당하게 압박을 주면 안 된다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FTA 투자 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실제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혜택을 볼 기업체가 어느 기업체인지 뻔하거든요. 삼성입니다. 삼성에서는 아마도 FTA가 맺어지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겠지만, 만약에 삼성이 이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히 노골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미군을 찬양한다든가 'We Love America!'를 부른다면 이것도 결국엔 일종의 기업체의 정치적 압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도 있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정치를 한 집단 위주로 하려고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올 때 드는 생각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주류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 중 하나, 즉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로마제국'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면서 사람들한테 라틴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동 문화를 만들어 주고 문명의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것은 미 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 제국을 옹호하는 입장의 골자 중 하나인데, 그러면 미 제국의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이 되는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아닙니까?(청중 웃음)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 관계까지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로마제국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무한의 힘의 상징인 성조기를 숭배하는 것인지 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체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 삼는 부분이 '탈세'인데, 종교단체 같은 경우엔 탈세도 아니고 '무세'입니다. 세금을 아예 안 냅니다(청중 웃음). 만약, 주요 종교단체들의 수익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예컨대 대형 교회에서 세금을 내서 그 세금 전액이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의 실천에 쓰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선에 쓰인다든가 이런 조건을 내세워 세금을 낸다면 이것은 교리에 반대되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탈세도 아닌 '무세'라니 이건 참 '상도덕'상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청중웃음).



-또, 제가 늘 한국 종교에 관해 문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상품 강매'입니다. 일반 회사가 그렇게 하면 당장 걸리겠지만, 예를 들어 종교 재단이 세운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예배시키는 것은 결국 '상품 강매'와 다른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들이 신앙 시장에서 본인들의 상품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추진하는 것까진 좋은데, 본인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한테까지 그 상품을 사게끔 강제한다면 이건 헌법상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주류 종교를 얘기할 때, 이것은 단순히 기복 장사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인 사회에 왜 하필이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가 물어보면 그것은 신앙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교회가 일종의 네트워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 사회나 유럽의 한인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돼 있습니다. 교회들이 일부러 왕따 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것이 좀더 극명하게 나타날 뿐이지만, 한국 안에서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교연, 즉 교회와 교맥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흔히 '관계 자본'이라고 말하는 3연, 즉 학연·혈연·지연말고도 '교연'을 분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사찰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나 기존 질서에 뭔가 신성한 듯한 외피를 덮어 주고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는 데 신의 도움을 받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 평생 살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공인(public figure)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일찍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주의적인 주입을 받아 국가를 대단한 숭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국가를 존경하기가 좀 힘들어요.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다들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추상적인 국가'를 숭배해도 '구체적인 국가'를 존경하기란 좀 힘듭니다. 존경하고 싶어도 곧잘 무슨 최연희 의원의 성파문이든 무슨 파문이든 (청중 웃음)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추상적으로 운동 경기에서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든가 태극기로 상징되는 추상적인 대한민국이 숭배 대상이 돼도 구체적인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관료들이 존경 대상이 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 의식이라든가 어떤 공적인 의식에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아마 참석자들이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노무현 씨라는 한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대통령직에 추상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대통령도 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계 서열에서는 대단히 높은 사람이 온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노사모 빼고는 인격적으로 노무현 씨를 아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청중 웃음)

-그러니까, '추상적인 권위 인정'과 '구체적인 인격적 존경,' 이 두 가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제도적으로도 존경하게끔 돼 있지만, 좀 신비한 옷을 입고 신비한 말씀을 하고 뭔가 신성한 듯한 아우라(청중 웃음), [즉] 후광을 갖고 나타날 추기경님이나 큰스님이다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제도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까지도 하게 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이 이 체제가 나쁘다든가, 이 체제를 우리가 빨리 바꿔야 한다든가, 이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말씀을 잘 안 하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청중 웃음), 사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도 잘하시기 때문에, 이 분들의 존재 자체는 체제를 상당 부분 합리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으신 스님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에 인터뷰하시고 법문다운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어차피 그 말씀 상당 부분이 당나라 후기나 송나라 때 선사들의 책에서 다 베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말씀이라 별 문제는 없는데 주류 언론에다가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는 대한민국 제도권의 권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이 체제가 인간이 살 만하고 이 체제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라는 환상을 피지배자들한테 상당히 효과적으로 덮어씌우는 면이 있는 건데 이것은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피임을 종교적 죄악으로 본 겁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특히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에이즈가 지금 대단히 치성(熾盛)을 부리고 있어서 예컨대 잠비아나 나미비아의 경우에는 에이즈에 전염된 사람이 이미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입니다. 이미 나라가 멸종으로 치닫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보호 없는 섹스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대단히 위협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교시에 피임하지 않을 경우 곧잘 에이즈가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의 말씀을 듣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과연 몇 만 명이 되는지 대단히 궁금할 따름입니다.

-낙태 수술에 대한 교황의 입장도 아주 단호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차피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가는 결국 사회적 살인처럼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종교 입장을 따라서 많은 여인들이 결국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렸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적에 한국 언론들도 그렇지만 외국 언론에서도 그것을 언급하는 언론이 몇 군데밖에 안 됐고, 대다수는 요한 바오로를 거의 새로운 성인으로 모시고 그랬습니다. 요한 바오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여러 언론 중에서도 한두 군데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세계 지배계급에게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하다 싶은 지도자로 상징되는 종교가 원자화·개체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여러분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나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불행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언제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신과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거래하면 일단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죠.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예수님이나 부처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이자 노동자들한테 모든 사회적 문제를 인격이나 수양 문제로 돌리기를 원하는 게 아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복 장사하는 기업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업체의 정체는 체제 전체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하고 아주 당연할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하다 싶은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맑스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제일 유명해졌는데, 그 문장에서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맑스가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그런 면에서 맑스는 신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맑스는 종교가 단순히 위에서 강요하는 '아편'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람들이 바꾸지 않는 한은 결국 민중이 저절로 찾게 돼 있는 불가피한 것, 또는 일부분이나마 민중의 현실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종교 이단들이 바로 민중의 반항 의지, 저항 의지를 대변했고, 말 그대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담았다는 것이 맑스의 종교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의 한국 현실을 중심으로 본다면 종교는 과연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에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민중을 위한 아편'에 더 가깝습니까? 둘 다 종교의 기능을 묘사하는 얘기인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보다 그 신음 소리를 진통시켜 주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처가 아프지 않게 진통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에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주 아플 때 마취제를 먹게 돼 있지만, 마취제·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당분간 아프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종교가 기존 체제를 옹립하고 합리화하고 체제로 인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적인, 상당히 자기 기만적인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들의 원래 모습이 과연 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가 정말 민중을 위한 아편 정도라면 하필이면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기만이라면 상당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실제로는 신음하는 소리, 짓밟힌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담지 않은 종교는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게 오래 안 가요.

-예컨대, 최근에 만들어진 소위 신흥종교들 중에는 상당히 빨리 쇠퇴하는 종교들이 꽤 있는데, 통일교만 해도 1960∼70년대에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교세 확장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실제로 교세가 상당히 쇠미해졌습니다. 기존의 신자도 많이 탈락하고 새로운 신자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실제 통일교 교리에서는 이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를 거의 들어볼 수 없다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선명한테 카리스마가 있지만 문선명이 미국의 지도층·지배층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래도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 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신흥종교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대개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를 담아 주지 않는 종교는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이 때까지 장수해 온 비밀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분명히 민중 편에 섰던 것이고, 민중의 그 신음 소리를 많이 담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쪽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나 붓다, 무하마드의 카리스마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용하려면 일단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붓다나 예수님, 무하마드에게 그 카리스마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도 종교 속에 담겨 있는, 그러니까 초기 불교나 초기 기독교, 초기 이슬람에 담겨 있는 상당히 강력한 평등 정신이나 저항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저항 정신이란 말이 아마 지금의 불교를 보면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제도 불교는 저항과 전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데, 실제로 붓다라는 사람 - 원래 상류계급에 속했다가 진리를 찾겠다고 혼자 뛰쳐나와 6년 동안 고생해 결국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붓다 - 은 그 깨달은 것이 공(空)과 연기(緣起)라는 진리였는데, 이 진리대로라면 당시 인도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나 남녀차별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경을 통해서는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대다수 불경들이 붓다가 죽은 뒤 4∼5백 년 뒤에 만들어진 글들입니다. 거기에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고 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관계 없습니다. 실제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들 중에서도 붓다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마 <숫타니파타> 라든가 그 정도 경전 몇 개이고요, <니카야>, <아함경(阿含經)> 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기 경전도 붓다가 죽은 지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실제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마 숫타니파타 를 보면 대충 알 수가 있겠지만 윤색된 부분도 있고 가미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붓다는 처음에 깨닫고 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평등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진정한 바라문이 무엇이냐? 바라문은 인도의 성직자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계급 질서 맨 위에 있었다는 성직자 계급인데, 이 바라문에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사람 귀하다는 것이 결국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절대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내 종이다, 내 종이 아니다. 동류다, 이류다' 이렇게 서로 차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다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이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결과의 순환이다" 이런 것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영구한 계급 차별이라는 부분이 개입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만든 것입니다.

-붓다는 만인 평등을 외치기도 하고, 동물 죽여서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원칙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또, 붓다의 생활 방식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탁발 아니었습니까? 탁발이라 하면 동냥을 구하는 것인데, 실제 붓다가 탁발하면서 뭘 했었냐면 요즘 말로 아마 심리정신과의 상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밥을 줄 때는 뭘 물어보지 않습니까? 붓다가 그 대답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생활 문제 풀어 주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 주고, 말하자면 상담을 해 주고 식량을 받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중과 아주 가까운 생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붓다는 기적을 절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통력이나 기적이라는 부분은 붓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한 여자한테 붓다는 '그래요? 한 번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에서 친척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 주면 제가 당신 아들도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신통력, 초자연적 힘, 신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붓다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민중한테 붓다는 존경받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한 가지 좀 아쉬운 점은, 붓다는 일종의 초기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제자, 수행자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살기로 한 것인데요. 그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저항의 태도, 아주 소극적인 저항의 태도에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붓다는 자기 부인 야쇼타라와 아들 라후라를 내버려두어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훨씬 더 부담이 큽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대개 수행 생활을 해도 되는 상당한 재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붓다가 죽자마자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편한 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노예 출신들도 있었는데, 붓다가 죽고 나서는 노비는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계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노비나 왕의 고용자한테는 스님이 되는 기회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했는지 아니면 그 제자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초기 불교의 주류 승단에서 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여성이 승려가 되는 데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팔경법'[尼八敬戒]이라는 건데, 여덟 가지로 여승이 남자 승려를 공경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여자 스님이 먼저 꼭 절해야 한다든가 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붓다에게 가탁(假託)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불교는 상당 부분 아주 초기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는데, 인도를 통일했다는 아쇼카왕 때는 불교가 왕의 국교가 돼서 거의 원래 정신을 이미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는 이미 절대평등주의적이고 남녀평등주의적인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계 없다 싶은, 이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붓다라는 스승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후기의 승단, 후기의 승려들이 그것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바로 그런 붓다의 카리스마는 불교가 그래도 죽지 않고 계속 민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한 묘사는 기독교에 대한 묘사와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복음서를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특히 누가복음에는 계급투쟁적이라 할까요. 상류 계급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이 담겨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리라' 하고 돼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그렇지만 그런 체제 반대적인 발언들이 가장 많은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술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로마제국이 망할 것이고, 로마제국에 협력했던 부자들이 결국 벌을 받을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최종 편집되는 것은 180년대라고들 추정하고 있습니다. 180년대에 이미 기독교는 거의 체제에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체제에 협력하고 있던 교단 지도자들이 '부자들이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예수의 카리스마가 그 사람들한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부자들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2세기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화됐는데, 그래도 예수의 원래 정신은 상징적으로라도 복음서에 담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수의 정신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짓밟힌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편집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4복음서 -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 - 에는 재미있게도 노예의 존재나 노예제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겁니다. 예수가 살았다고 믿어지는 1세기 초반에는 노예제가 경제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단히 많았고, 예수가 부자 보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다면 분명히 노예 문제에 대해 발언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노예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 그러니까 기독교 보수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 하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대로 신약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 편집 과정에서는 말하자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는 미끼 밥을 남겨 두기는 했는데, 상당 부분은 바울 사도와 그 제자들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메워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또 아주 재미있는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라는 사람은 메카라는 상업 도시에서 '거지가 왜 이렇게 많은가. 왜 부자들은 이렇게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왜 이렇게 못사는가' 이런 불만이 출발점이 돼서 새로운 종교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그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망명중이었을 때, 당시에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무하마드의 집뿐이었는데, 그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봤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가 죽고 나서 무하마드의 계승자 우마르가 거의 맨 먼저 개악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는 예배를 따로 봐야 한다'는 법률을 정한 겁니다. 무하마드의 원래 육성을 담은 코란의 기록을 보면 여성의 권리를 상당 부분 주장했습니다. 이혼권이나 피임권리나 유산상속권이나, 여자와 남자는 원래 알라신에 의해서 평등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등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중의 이슬람 율법을 보면 이게 상당 부분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슬람권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상당 부분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도 영감을 받지만, '무하마드의 진짜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을 페미니즘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보든, 기독교를 보든, 불교를 보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계급 사회에서 고등 종교의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제가 뭔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기존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 그것을 결론 삼아 끝내겠습니다.











-결국 지금 성직자 집단이 대표하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 종교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실, 옛날에 한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약 붓다의 가르침이 맞다면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해야 하는가. 나 자신에게 절해도 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또는 "명부전에 가서 부모님들이나 내 자신이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재판관한테 뇌물 주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냐. 결국에는 내가 죄가 없으면 왕생할 거고 죄가 있다면 아무리 빌어도 안 될 텐데, 뇌물 주듯이 비는 게 다 뭐냐"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기존 종교가 분명히 그 원래 정신과 다른 부분을 당연히 비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맑스주의자가 된다 하더라도 속류 맑시스트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 그 정체는 무용지물이다. 마약이다' 하고 버리기보다는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진짜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많은 민중이 모였는지, 왜 그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한테 이렇게 귀중한 이름들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들의 집에 딱 두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차베스 대통령이죠. 그러니까 양쪽을 상당히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튼 왜 하필이면 수많은 빈민들한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영감을 주는지, 우리가 진정한 맑시스트라면 스탈린주의 식으로 종교를 무조건 팽개치기보다는 종교를 비판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원래 종교의 모습에 대해 나름으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이 문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에게도 고전적인 문제였다. '건신론(God-building)'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고리키의 <어머니>나 <고백> 같은 작품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많이 반영돼 있다. '오래된 미래'는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의 문제에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삶으로부터 진보운동의 영감을 얻고자 하는 김규항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06. 0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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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4-21 공감 (106)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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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오강남-한병철



친숙한 이름들로 '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새로운 저자들은 '이주의 발견'에서 다루다 보니 '이주의 저자'에서는 좀더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읽어본 저자들을 주로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주에는 읽어본 책의 저자들이다.









먼저 다작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 강준만 교수의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인물과사상사, 2017)이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한나래, 1994)이라고 먼저 나왔던 게 13년 전이니까 충분히 업데이트될 만하다. 한나래판이 264쪽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번 개정판은 492쪽으로 200쪽 이상 증면되었다. 다만 초판과 마찬가지로 10명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는데, 그간에 주목할 만한 커뮤니케이션 사상가가 더 등장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올해 나온 책으로는 <손석희 현상>이 예상대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사상가들>은 올해의 두번째 강준만 책이다.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로 유명한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그 <예수는 없다>(2017) 개정판을 펴냈다. 16년만에 나온 개정판이다. 저자가 새로 붙인 머리말을 보니 출간시 화제의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의 제목은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가 될 뻔했다. 저자가 내세운 제목이었는데, 출판사 쪽에서는 수필집 같은 제목이어서 다른 제목을 원했다고 하고 저자가 제시한 후보군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예수는 없다'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고. 덜컥 겁이 난 저자가 절충안으로 '그런 예수는 없다'를 제시하지만 "그러면 김이 빠져 못 쓴다"는 게 출판사의 답변이었다. 대신 저자는 '그런 예수는 없다'를 서문의 제목으로 삼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신도들을 탄핵기각 태극기 집회에 동원한 대형교회들의 행태만 보더라도 저자의 일갈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예수는 없다!'









매년 한두 권씩 번역돼 나오고 있는 한병철 교수의 신간도 추가되었다. <타자의 추방>(문학과지성사, 2017). 3월에 첫 책이 나온 걸로 보아 올해는 두 권이 나오는 해일 듯(지난해에는 <아름다움의 구원>이 출간되었고, <권력이란 무엇인가>가 재간되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의 신작 <타자의 추방>이 출간되었다. 전작 <피로사회>가 ‘나는 할 수 있다’는 명령 아래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에로스의 종말>이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런 상황을 불러온 근본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했던 ‘타자의 소멸’ 현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한병철 교수의 모든 책을 읽고 강의에서 다룬 바 있기에 그의 책들은 '식구' 같다는 느낌도 준다. <타자의 추방>이라는 타이틀만 하더라도 새롭지는 않다(타자의 부정, 배제, 소멸 등은 저자가 거의 모든 책에서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테마다). 하지만 또 읽어본다. 식구들끼리는 원래 그렇다...




17.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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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7-03-05 공감 (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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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죽었는가



크리스마스용 책을 따로 구입하거나 읽는 편이 아니지만, 올해는 그렇게 할 만한 책이 생겼다. 빌 오라일리와 마틴 두가드가 공저한 <예수는 왜 죽었는가>(문학동네, 2014). '신화가 아닌 역사'가 부제.







폭스 뉴스의 시사 토크쇼 '오라일리 팩터'를 진행하는 빌 오라일리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유명 언론인이라는 것과 '꼴보수'라는 것인데, 모르던 사실은 십여 권의 책을 쓴 저자라는 점. 그런데 마틴 두가드와 공저로 쓴 책들은 모두 '죽이기(killing)' 시리즈다. <예수는 왜 죽었는가>도 원제는 <예수 죽이기>이고, 이미 <킬링 링컨><킬링 케네디><킬링 패튼> 등의 베스트셀러를 합작한 바 있다.







책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어떻게 써야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살펴보는 것도 독서 포인트(오라일리의 책으론 '오릴리'란 저자명으로 <좋은 미국, 나쁜 미국, 멍청한 미국>(서울문화사, 2001)아 출간됐었다). 소개는 이렇다.


아마존 역사 분야 1위, 60주 연속 베스트셀러. 이미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종교화된 예수를 그리지 않는다. 저자들은 성서의 기록에 충실하면서도, 예수 당대의 역사를 섬세하게 복원해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고대 유대의 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유대 사회의 갈등과 모순만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역사도 함께 그려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장편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책은,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고 읽는다면, 통쾌한 역설이 된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두 저자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이들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의 헌신과 저항, 그리고 그 이름이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지게 된 경위를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뜨겁게 밝히고 있다.





아마도 '역사적 예수'를 다룬 책으로 분류될 수 있을 듯한데, 이 분야의 책으론 <역사적 예수 논쟁>(새물결플러스, 2014)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한국기독교연구소, 2012)와 영화감독 폴 버호벤의 <역사적 예수의 초상>(영림카디널, 2012) 등은 예전에 구입해놓은 책들이지만, 이사를 하면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크리스마스 전에 한번 찾아봐야겠다).







국내서로는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의 저자 오강남 교수의 <그리스도교 이야기>(현암사, 2013)와 <유대인 이야기>(행성B잎새, 2013)의 저자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행성B잎새, 2014)도 참고할 만하다. 그래, 크리스마스용 독서라는 걸 올해는 해보기로 하자...



14. 12. 14.







P.S. 당연한 일이지만 책장을 둘러보니 예수 관련서는 한참 더 꼽을 수 있다. 조철수의 <예수 평전>(김영사, 2010)과 올해 나온 책으로 조반니 파피니의 <예수 이야기>(메디치, 2014), 그리고 레자 아슬란의 <젤롯>(와이즈베리, 2014)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다시 손에 들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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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4-12-14 공감 (3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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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16)



지난 주말에 여행을 다녀왔다(*이 글은 2003년 7월초에 씌어졌다). 4박 5일 동안 (부)자유로웠는데, 핸드폰과 인터넷, 그리고 시계와 책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른 짐들 때문에, 박상륭의 <산해기>나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학Ethics of the Real>을 들고 가려던 계획을 접었고, 덕분에 온전히 바다와 햇살 하고만 지냈다(다른 거 다 제쳐놓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헤어져 보면 안다. 우리가 길들이거나 우리를 길들인 이들이 얼마나 그립고 애틋한가를. 책이 얼마나 그립고 어쩌고, 젠장...



출판계가 유례없는 불황에 허덕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지만(인터넷 서점의 할인폭이 커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책값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건지, 오기인지 잘 모르겠다. 황석영의 <삼국지>(창작과비평사)가 20일새 20만부가 나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소식도 있는 거 보면, 활로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참에 황석영은 노후대책을 확실히 마련한 것 같고, 창비는 제2의 '동의보감'을 발판삼아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 반응이 미지근한 <서유기>는 안타깝게도 문지 살림에 아직은 큰 도움이 못되는 거 같다(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이런 즈음에 나온 책들 가운데 압권은 역시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남) 완역본이다. 정가 38,000원에 867쪽. 내가 알기로는 아직 영어 완역본도 없는 형편이니(기존의 <광기의 역사>는 영어 축약본의 번역이다), 생각보다 빨리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 것만은 틀림없다. 알다시피 책은 푸코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출세작이다. 같은 급에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것도 번역중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2004년에 출간됐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이것도 축약본이 번역돼 있다) 등이다. 푸코를 읽은 지가 오래됐지만, 신간은 다시금 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조금 제한적인데, 데리다와 벌인 논쟁에 국한된다. 기존의 <광기의 역사>에는 논쟁의 빌미가 됐던 텍스트가 빠져 있었다. 이 논쟁만을 다룬 책이 로이 보인의 <데리다와 푸코>(인간사랑)이다. 그리고 김현 교수의 푸코 연구서인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도 한 장을 이 논쟁에 할애하고 있다. 또 그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 3>(동문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단, 김웅권이 옮긴 <구조주의의 역사> 시리즈는 웬만큼 눈이 밝지 않고서야 내용을 짚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참고로, 데리다는 푸코 이외에 리쾨르, 가다머와도 논쟁을 벌인 바 있지만, 그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남들 논쟁에 왜 관심이 많으냐 싶을 테지만, 논쟁이란 각기 다른 사상가들의 사유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보다 효과적으로(예전에 많이 쓰던 표현으로 '쌈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 책은 얼마 전 세상을 뜬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사회평론)이다. 600쪽이 넘는 신간의 원저는 1981년에 초판이, 그리고 199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저자는 다윈 이후에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로 불리던 저명한 고생물학자/진화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이다.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 그의 책들에는 <다윈 이후>(범양사), <새로운 천년에 대한 질문>(생각의나무), <판다의 엄지>(세종서적), <풀하우스>(사이언스북스)가 있고, 몇 권의 공저도 번역돼 있다. 나는 <다윈 이후>를 읽고 적어도 그의 단독 저작들은 다 모으고 있는데(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많다),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은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몸과마음, 2002)이다. 책의 원제는 '도킨스 대 굴드'인데, 진화생물학계의 두 간판스타가 벌이는 한판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할 수 있다.

















세번째 책은 빌헬름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신>(동문선)이다. 가까운 시일내 내가 이 책을 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는 책의 두께이다. 정가 34,000원에 711쪽짜리. 아마도 철학적 신학 계통에서 가장 두꺼운 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바이셰델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철학의 뒷계단>(분도출판사)이란 책 덕분이다. 철학의 '정문'이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아주 요긴한 '뒷구멍'을 일러준 책인데, 나중에 <철학의 뒤안길>(서광사)이란 제목으로 다시 번역돼 나오기도 했다(둘다 절판됐지만. *이후에 나온 <철학의 에스프레소>(아이콘C, 2004)는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에 같은 책이다). 저자가 편집한 책으로 <별이 총총한 하늘아래 약동하는 자유>(이학사, 2002)가 있다. 부제가 '칸트와 함께 철학을 읽는다'인 칸트 철학 발췌서이다. 바이셰델은 실제로 칸트 전집을 편집하기도 했다고.

















네번째 책은 <증언으로서의 문학사>(깊은샘)이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문학사/문단사에 대한 11명의 원로 작가/비평가들의 대담/증언을 싣고 있다(*전체적인 문단약사는 김병익의 <한국문단사>가 유익하다). 최근에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책들이 여러 권 나오고 있는데(강준만 등), 신간 또한 유익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1,2>(한겨레신문사)도 근래에 나온 필독서이다. 나는 이런 책들은 고등학생들이 좀 많이 읽었으면 싶다.















우리 문학 얘기를 좀 덧붙이면, '컬트 작가'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 다시 쓰기'로,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문학동네)가 나왔다. 책은 '(속)산해기'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뒤늦게 <산해기>까지 구입한 것인데, 사실 나는 박상륭 마니아가 아니다(문단에는 생색내는 마니아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이 아닌 '잡설'을 쓰므로(잡설가라 해야 할까). 서양의 경우라면, 쿤데라도 포함되는 에세이 소설 양식이라는 걸 들 수 있을 텐데, 그의 잡설이 그러한 에세이에 견줄만한 것인지 나는 확신이 없다. 그는 후기 조이스에 견줄 만한 대단한 작가이거나 아니면 변칙/트릭의 작가이다.











다섯번째 책은 여이연(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낸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여이연이론5). 여이연의 정신분석세미나팀에서 낸 자료집이자 정신분석 주제사전이다(*그 후속작이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2005)이다). 열두가지 개념을 정리하고 있고, 실제비평 5편과 번역 3편을 싣고 있다. 대표필자인 임옥희의 표현에 따르면, '다락방의 미친년들'이 2년 넘게 공부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물론 책으로까지 낸 데에는 약간의 자부심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353쪽의 버틀러 번역에서 철자가 틀린 단어가 3개나 나오는 걸 보면, 잘 정제된 자부심은 아닌 듯하다.

5권이 나온 여이연 이론서 가운데, <여사서>를 빼고, 가장 중요한 책은 4권으로 나온 가야트리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이다. 인도 출신의 이 인텔리 이론가는 흔히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와 함께 탈식민주의 3인방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들 각각을 대표하는 책들이 <오리엔탈리즘>, <문화의 위치>,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이다. <문화의 위치>(소명출판)의 우리말 번역이 좀 부실한 데 비해서, 다행스럽게도 <다른 세상에서>는 최적임자가 번역을 맡은 책이라 그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잡다한 책들. 김근의 <욕망하는 천자문>(삼인)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독자들의 호응도 좋은 편이지만, 내가 당장 읽을 책은 아니어서 여기서는 제외했다.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한길사)도 유용한 지식인 사전이지만, 이 책까지 사는 건 재정적인 '모험'이다.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굿모닝미디어)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한문화)는 매트릭스 현상에 대한 철학자/과학자들의 개입이 얼마나 유효/무효한지는 보여주는 책들이고, 프란체스카 리고티의 <부엌의 철학>(향식)은 간식으로 딱 좋은 책이다.













굴드의 책이 아니었다면, 더 주목을 받았을 책이 니콜라스 험프리의 <감정의 도서관>(이제이북스)인데, 원제는 '내면의 눈'이고 부제는 '사회적 지능의 진화'이다. <유혹하는 본능>(참솔)이나 <호모 에로티쿠스>(청어람미디어)도 <비열한 유전자>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이다.











끝으로, 김수영 전집이 다시 나온 소식. 민음사에서 품절된 전집이 이번에 하드카바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는데,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듯이 이런 책들도 웬지 사(주)고 싶어진다. 1권(시), 2권(산문)만이 우선 나왔는데, 별권으로 묶였던 김수영론은 좀더 두툼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세기 단 한명의 한국시인으로 고종석은 백석을 꼽았는데, 나는 백석과 김수영 중 아직 결정을 보지 못했다...










참,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도 나왔다. 이쯤되면, 김훈의 지겨움이라 할 만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보는 수밖에. 그의 지겨움에, 그의 비애에 동참하는 수밖에. 얼마전에 나온 <아, 입이 없는 것들>의 이성복과 함께 그는 '비애적 세계관'을 대표한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왜, 어떻게, 어쩌다, 어쩌자고,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쏟아지는 책들을 어쩔 수가 없다...















덧붙임: 인터넷서점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앤드루 샌더즈의 <옥스퍼드 영문학사>(도서출판 동인)가 번역돼 나왔다. 정가 38,000원에 968쪽짜리이다. 두껍기로는 <철학자들의 신>이나 <광기의 역사>를 능가한다. 책의 모양새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서평으로 보아 번역된 영문학사로는 가장 방대하며 가장 풍부하다. 번역의 질도 양호하다고 하나, 고유명사들을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한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도록 한다). 같은 출판사에서 <현대문학이론 용어사전>도 나왔다. 사전이야 많을수록 좋다는 건 상식이다. 778쪽이고, 정가는 역시 38,000원. 바야흐로 3만원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김홍경의 <노자>(들녘)도 거기에 속하는데, 880쪽에 정가 32,000원이다.















잡다한 책에서 빠뜨렸지만, 오강남의 <세계종교 둘러보기>(현암사)도 필히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한 책이다. 그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과 함께. 지각있는 기독교인들의 필독서이다. 종교학 관련으로 아주 따끈따끈한 신간은 존 D. 카푸토의 <종교에 대하여>(동문선)이다. 기독교철학쪽 전문가이자 하이데거와 데리다 전문가이기도 한 저자의 책으론 <마르틴 하이데거와 토마스 아퀴나스>(시간과공간사, 1993)가 번역돼 있다(절판됐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데리다와 함께 편집한 <호두껍질 속의 해체론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유익한 데리다 입문서이다.

문제는 역자.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의 번역자이기도 한데(이것도 종교와 관계가 있다고 번역을 맡은/맡긴 것일까?), 우리말 <믿음의 대하여>는 처음 인상만큼 읽을 만하지가 못하다(그래서 이전에 '읽을 만하다'고 한 발언은 취소한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고,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대상 a'가 뭔지도 모르는 것은 아주 당연하겠고. 그런 역자가 열성적으로 번역에 나서고 있다. 좀 걱정스럽다(*<믿음에 대하여>에 대해서는 이후에 이 같은 내용의 리뷰를 올렸다).

2003.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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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5-16 공감 (3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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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파 먹는 종교인, 영혼을 살리는 종교



한 달이 넘도록 충격에 휩싸여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무언가를 털어놓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어 "털어놓기와 건강"이란 책을 집어들고 읽었는데...



얼마 전에는 국민을 미개하다고 한 사람이 나타나질 않나(국민들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나라인데, 그렇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민이 미개하다면, 그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하게 한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미개보다 못한 수준은?),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나 참으로 한심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의 말.



부끄러워서 실명을 거론하기조차 싫은 그런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목회자란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람이 진정 종교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인이라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나?



종교인이라면 사람들의 영혼을 파 먹는 것이 아니라, 황폐화된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차게, 기쁨으로 가득차게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행복한 사회를 꾸리는 모습을 상상했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고, 모든 종교인이 꿈꾸는 세상 아니던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것도 종교인에게서. 이렇게 종교인이 사람들의 영혼을 파먹어도 되는 것인지... 답답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과 행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종교인 아니던가. 오강남의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책이 생각나는 나날들이다.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없다. 그들은 예수가 가장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예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으로 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에게 과연 예수가 있을까? 하여 오강남이 쓴 또 다른 책이 생각난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진정한 종교인이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종교란 어떤 것일지...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종교 아니던가. 하느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 모두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종교인들이 많고, 종교도 많다. 이들이 굳이 언론이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세상에는 훌륭한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가 많다.



이제는 이들도 좀 드러났으면 좋겠다.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매번 이렇게 내 영혼을 갉아먹는 소리를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