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춤, 가무(歌舞)와 축제
“축제를 악마의 소산이요 이단이라고 여기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가치관을 압제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얼굴이 굉장히 두꺼운 자들임에 틀림없다. ... 그러나 이단으로 사는 것 자체가 이제 하나의 축제일 수밖에 없다”(프리드리히 니체)
19세기 경건주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미건조하고 힘들게 살아온 경험에 대한 비판적 분출일 것이다. 산업화 시절의 개신교는 카니발이나 사육제 같은 축제를 돈과 시간의 낭비라고 보았다. 진지함과 엄숙함, 경건한 분위기가 지배해야 한다. 예배는 안식의 시간이고 명상의 시간이기에,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하지 하느님을 ‘즐기거나’ 하느님과 ‘함께 노는 것’ 명랑하고 유쾌한 삶은 금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재미없어지고, 진지하게 살아야 하고, ‘즐기며 사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했다. 유모와 웃음과 노래와 춤과 축제는 어쩐지 경박하고 속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부 아타나시우는 일찍이 니체가 원하던 삶의 방식을 말했다. 토요일 열린 초신자들을 환영하는 집회에서 그는 이렇게 설교한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 전체를 축제로 만드신다.”
예수의 삶이 고난과 죽음으로 끝맺음 했지만, 그의 지상생활은 축제의 삶이었다.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와 “생명의 보증”일 뿐만 아니라 “신비적 가무의 첫 댄서”(교부 히폴리투스)로 받아들였다. 자기들은 “함께 춤추는 신부들”이라고 여겼다.
인도의 시바 신(Shiva Nataraja)은 우주를 춤추면서 만들었다가 다시 파괴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우주를 “별들의 행복한 가곡 춤”이라 했다.
필로는 “하늘의 가곡 춤, 그것이 신의 존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라고 한다.
지혜서에는 창조의 지혜가 하느님과 “놀기도”하였으며, 땅의 자녀들이 출생하면 하느님은 큰 기쁨을 누린다고 한다.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주의 댄서, 우주의 기쁨, 우주의 웃음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번에 조상 역가를 바치려 합니다
이 주당 아기씨 서낭 앞으로
백팔 염주 은바랑 옥바랑 다리놓아(빠른 무악)
이 간장 풀리고자 하니,
내일도 아니고 오늘, 다 풀며 놀고 가자!”
무교의 해원(解冤)과 해한(解恨)의 놀이는 부활의 축제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웃음과 해방된 자들의 춤과 생명을 노래하는 판타지가 어울리는 창조적 놀이에 해당한다. ‘부활의 웃음’(risus paschalis)은 단지 놀이가 아니라 지칠 줄 모르는 저항의 힘이 담긴 생명의 웃음이다. 웃음은 폭압자의 협박이 가져오는 불안에서 해방을 받게 하며, 동시에 적을 무력화한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 내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 2:4)
하느님의 웃음은 폭압자들에에 의해 억압을 당하는 억압자들의 웃음이다. 고난의 아픔을 기억하고 맛본다는 말은 사람의 생명의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부활절의 예배는 악에게 지지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도 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의 실현이다. 억울함을 당한 과거의 신비는 기억과 잊음과 미안함과 용서와 떠남의 과정 속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출발에서 문을 열고 치유와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악을 선으로, 원수사랑으로, 좋은 뜻으로 극복한다는 말은 연약함의 표징이 아니라, 마틴 루터 킹이나 넬슨 만델라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내걸었던 ‘12개조 군호’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하라
곤궁한 자는 구제하라
탐관은 추방하라
따르는 자는 공경, 복종하라
굶주린 자는 먹이라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것을 그치도록하라
도망가는 자는 쫒지 말라
가난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하라
거스르는 자는 잘 타이르라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
불효하는 자는 벌을 주라
“종교는 하나의 압제당하는 피조물들의 탄식을 대변하는 자요, 가슴이 없는 세계의 감성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종교는 스스로 이미 혼이 빠진 상태의 영”(칼 마르크스)이다.
주님의 영이 온 땅을 채울 때(지혜서 1:7), “하나님의 무한한 영이 만물 속에 계실 때”(지혜서 12:1), 하느님의 영광이 온 땅을 채우게 될 때(이사야 6:3) 만물이 하느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피조물의 “과시하는 존재가치”의 표현이다.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털의 색상이 화려하고, 유별난 목적이 없이 예술적인 표현을 만끽하며 발하는 몸짓 등은 바로 자유의 놀이이다.(아돌프 포르트만)
이 모든 것들이 부활절 우주의 예배에서 맛보게 되는 엄청난 아름다움이다. 거룩한 신비이며, 무한대의 풍성한 생명감각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송(Doxology)이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베푸시는 무한대의 풍성한 생명이 피조물의 삶 전체를 축제의 삶으로 변화시킨다. 기도와 감사, 탄원과 탄식과 노래와 춤은 신적인 생명의 광채가 인간의 삶 속으로 비쳐올 때 온 창조가 하느님 면전에서 부르는 無爲之爲인 영광송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