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30

박정미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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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 
역시 나는 우리집 문 앞에 눈을 쓸어야겠다

-박석,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을 읽고

 사실 좀 질리는 책이다. 

사놓고 반년을 넘겨서야 겨우 다 읽어냈다. 읽어놓고도 정리가 안되어 독후감을 쓸 엄두를 못냈다. 페친 이남곡 선생님이 이 책을 소개하며 지은이 박석교수를 ‘천재’라고 하시길래 호기심이 동했다가 경을 친 것이다. 박학이면 깊이를 좀 덜하든가, 깊이 파고들면 범위를 좁히든가 해야 하는데 박이심(博而深)의 경지라. 이건 반칙이다.
 글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술술 읽히게 너무나 정확한 논거를 대며 쉬운 말로 이론을 전개한다. 미학이라면 생경한 개념어가 난무하는 외국책, 그것도 설익은 번역본만 읽은 사람이라 이 쉬운 한국어문장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음악이론은 내 지능의 한계로 끝내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다만 논거를 제기하는 각도가 새롭고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무궁무진 일어나서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 수렁도 아닌 인식의 꽃넝쿨에 발목을 잡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빽빽한 인식의 숲을 겨우 헤쳐나와 다시 목차를 보며 전체를 조망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정말 크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기쁨이며, 우리 안의 동양과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통합된 인류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보는 방편을 얻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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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대로 몇 개의 키워드로 동서양의 문화사를 꿰뚫었다. 
저자는 중국에서 비롯되어 동아시아의 저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코드가 바로 화광동진, 대교약졸과 대성약범의 미학이요, 수렴의 미학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철학이 나오고 종교가 나오고 문학, 음악, 회화, 건축 등 예술이 나오고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화광동진

 화광동진과 대교약졸은 노자도덕경에 함께 나온다. 
도가적 사유의 원형으로서 모두 나선형적 발전과 감추기의 논리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진정한 의미는 화광과 동진의 두 단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감추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오는 화광이다. 또 하나는 성스러움과 범속함,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해서 새롭게 현실을 살아가는 동진이다.
보통사람들은 성스러움에 도취되면 깨어나기 힘들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감추는 화광은 대단한 경지이다. 그러나 한발짝 더 나가 진정한 동진을 구현하는 것은 더욱 심오한 경지를 필요로 한다.
화광에 급급한 표피적인 동진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세상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도’의 단계가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동진이 무르익은 경지가 있으니 그것은 ‘혁명가의 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개인적 인연의 구제에 그치지 않고 현실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수준의 화광동진이라는 것이다.
 화광동진은 노자가 말했지만 사실 화광동진의 경지를 끝까지 체현한 사람은 공자라고 박교수는 보고 있다.
노자는 화광동진의 경지를 알았을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결국 문명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화광동진을 종교계에서 변주한 것이 바로 동양적인 성스러움을 표현한 대성약범(大聖若凡)이다. 
이는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와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사이에서 철저하게 대비되어 드러난다.
공자는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며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실천의 통합을 강조했다. 공자는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버둥거리며 평생을 살았다. 공자야말로 대성약범의 대성인이다.

◇대교약졸

 낮은 수준에서는 기교가 밖으로 그냥 드러난다.
하지만 기교가 커져 무르익게 되면 기교는 안으로 감추어지고 겉으로는 다시 서툰 듯이 보인다는 것이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의미다. 
이 경우 졸은 단지 교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를 통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차원의 졸이다. 이렇게 졸에서 교로 나아갔다가 다시 졸로 돌아온다는 말 속에는 회귀의 개념이 들어있으나 이는 평면의 무한순환이 아닌 삼차원의 나선형발전을 의미하게 된다.
 대교약졸의 미학이 구체화되어 다섯가지 미적범주을 이룬다. 저자는 세련된 소박미와 심오한 단순미, 숙성된 평담미 그리고 분산된 통일미와 배경과의 조화미를 들고 있다.
인공적 기교를 통과하여 다시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한 소박미(素樸美),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내면으로 숨겨 안정감과 깊이를 주는 단순미(單純美), 
평범한 듯 담백하여 부담없이 편안한 평담미(平淡美), 뚜렷하게 가시적인 구심점이 보이지 않고 각 부분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 모호하게 기운이 통일되어있는 통일미, 
주체를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고 배경인 자연과 사회를 끌어안아 조화를 이루는 조화미가 그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감추기와 나선형회귀의 두 가지 속성을 다 가지고 있고 뒤의 두가지는 감추기와만 관계가 있다. 이들 다섯가지 아름다움 모두에 공통된 특징은 안으로 감추기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렴미라고 할 수 있다. 
수렴미란 발산미와 대비되는 말이다. 서양의 미학적 특성인 발산미가 자신의 아름다움의 빛을 밖으로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동아시아의 수렴미는 아름다움의 강한 빛을 속으로 감추는 것이다. 결국 화광동진과도 통하는 것이다.
대교약졸에 대립되는 서양의 아름다움은 기교를 중시하는 화려미, 다채로운 농염미, 시선이 하나로 고정된 초점투시의 집중된 통일미, 전경을 독자적으로 부각시키는 전경미를 들 수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양방향의 아름다움은 서양과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화적 코드이다.

◇동아시아와 서양 미의식 차이의 근원

 이러한 미의식의 차이는 대비되는 삶의방식과 문자체계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문화의  근원을 이루는것은 해양의 그리스문명이고 동아시아 문화의 근원은 대평원의 중국문명이다.
 에게해를 무대로 상공업으로 부를 일군 그리스정신은 개별자 중심으로 배를 타고 멀리 낯선 곳으로 가는 지적 오디세이를 이루었고, 일찍부터 황하강 유역에 자리잡고 사람들간 협력이 필수적인 쌀농사로 시작한 중국문명은 질서와 조화를 체화하는 문명을 일구었다.
거기에 굴절어인 그리스, 로마어와 고립어인 중국어의 차이에서도 사유방식과 철학의 체계, 그리고 미의식의 차이가 비롯된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여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체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양과 중국의 가장 큰 차이는 서양은 표음문자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은 상형에서 출발한 표의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설령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도 그것을 문자로 표시할 때는 구체적인 이미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의 경우 수많은 격변화의 규칙을 잘 지키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면 아무래도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가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한문어법은 융통성이 너무 많아 막연하고 모호한 측면이 있다. 대신 문장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면서 그 속에서 각 단어들의 역할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총체적 직관적 사유는 더 발달하게 된다.

 공자가 말한 인이나 노자가 말한 도 또한 마찬가지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을 수없이 언급하였지만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그것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적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인 실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 또한 논리적사유가 아닌 마음을 허정하게 한 가운데 바로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궁극의 실재가 이 현상계의 데이터에 따른 논의로는 증명될 수 없으며 직접 경험에 의해 체험되어야 한다. 철학이란 인생의 길이며 그것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생활에서의 실천이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 철학이란 반드시 인생의 길은 아니며 그것의 입증은 이성에 의해서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서양은 리얼한 것을 보기를 원하고, 동양은 리얼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

◇새로운 통합문명의 미래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와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동아시아문화라는 두 줄기 흐름은 근대의 산업혁명으로 승기를 잡은 서양문화의 완승으로 일단 종결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두차례 세계대전을 거치고 지역의 장벽이 무너지며 하나의 세계문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전혀 새로운 문화적 요구, 심미관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음악이나 영화, 티브이 등 지금의 대중문화는 자극적인 소재, 말초신경을 흥분시키는 표현 등 발산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노자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우리의 감각기관을 망가뜨리고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발산형문화의 폐단이다. 
이제 인류문명은 힘을 과시하고 발산미에 탐닉하는 것을 넘어 차분한 지혜와 수렴미가 필요한 중년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산의 아름다움을 성숙시켜서 다시 수렴으로 돌리는 대교약졸의 미학이 필요하다.

 지금의 고등종교 및 철학사상들은 대략 기원전 8~2세기, 소위 <축의 시대>에 등장했다. 당시는 문명의 대변혁기로 조그만 지역단위 도시국가들이 통합되면서 점차 강력한 고대제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원시적인 부족종교나 윤리로는 새로운 사회환경에 대응할 수 없어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요구되었으며 보다 넓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에 심원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근대 이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세계적 통합의 기운이 시작되면서 <제2의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과학적 합리적 사유능력의 발달로 신화적 초월적 성스러움이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개혁개방으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이 새로운 문명의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앞세워 역사학계의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을 꾀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영화에 기댄 대국주의의 발로로 볼 수 있는데 결국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이 박교수의 지적이다.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유우석은 “산의 명성은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 되는 것이고, 물의 명성은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용이 살아야 영험해진다.”라는 말을 하였다. 과거의 찬란했던 영화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계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문화의 깊이가 있어야 진정한 대국이라는 것이다.
 박석 교수는 동서양을 가로지르고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예술과 종교와 사상을 광폭으로 넘나든 사유의 끝을 다음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동아시아의 오랜 강자 중국, 19세기 후반에 부상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본, 그리고 20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 어느 나라에서 동서문화가 융합된 더 큰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문화가 나올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각자 선의의 경쟁을 하며 노력할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대체 마지막을 어떻게 끝낼까, 중국찬양으로 끝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역시 멀리보고 깊이 보는 인문학 천재다운 클로징이다. 박석교수의 다음 저작이 기대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서 우리집 문앞의 눈을 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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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230328
  · 
현관문 앞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날리면

 우리 빌라와 옆집 빌라사이 좁은 공터에 자란 벚나무는 영 볼 품이 없다. 햇볕을 찾아 가늘고 길게 몸피를 늘여서 솟아올라 멀대같이 키만 크다. 
하지만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높은 가지에 봄이면 솔찬히 꽃을 피워내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검은 아스팔트 인도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내려있다. 
 눈처럼 하얀 꽃잎을 보면 어디 싸리비라도 찾아 쓸고 싶어진다. 
송나라 휘종대 진적선사(眞寂禪師) 일화가 생각나 마음이 더욱 정갈해진다.

ㅡ법당을 열던 날, 어느 승려가 물었다.
"세존이 세상에 나왔을 때 땅에서는 금빛 연꽃이 솟아올랐는데 
스님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습니까?"

스승은 답하기를, "문 앞에 눈을 쓸었다.".ㅡ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에서 박석교수는 이 일화를 새롭게 해석한다.

법당을 열어 설법을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일화는 인도식 깨달음선종 깨달음미학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한다.

인도식 깨달음이 기이한 이적과 지극한 성스러움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선종의 깨달음은 평범하고 담백한 일상사 속에 숨겨져있다는 것이다.

박석교수는 선종은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아버지로, 중국의 도가사상을 어머니로 삼아 탄생했기 때문에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미학을 내면화했다고 본다.

화광동진은 선가에 와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는  진광불휘(眞光不輝)로 변주된다. 
여기서 진적선사는  
'깨달음의 성스러운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것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범속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 보통사람처럼' 문 앞에 눈을 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진정한 성스러움은 밥먹고 일하는 일상에 있다고 
현관문 앞에 내려앉은 하얀꽃잎은 말해준다.

도닦는게 별건가.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어린시절부터 이 노래를 부르면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항상 고요한 산사의 아침같은 마음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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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omments
이군희
저는 요즘 가슴 속의 빗물을 쓸어야 할 듯 싶네요..ㅜ.ㅜ
지인이 많이 아파서 흩어지는 마음을 어떻게 쓸어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Reply3 d
박정미
이군희 그 빗물을 저도 같이 쓸어드리고 싶어집니다. 그 비가 어서 그치기를 마음 보탭니다. 교장선생님. 힘 내시길요.
Reply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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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철
Reply3 d
Ilwon Yoon
"문 앞에 눈을 쓸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Reply3 d
박정미
윤일원 일화를 처음 읽는데 차고 맑고 푸른 기운이 찻물처럼 몸 속에 흘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Reply2 d


정금희
이렇게도 찬란하게 목련이 피었는데 의성은 긴 고난을 뚫고봉오리를 터트려 고고한 자태를 뽐내지도 못한 채 어제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모두 갈색이 되어 주렁주렁 달렸는데 가슴 한 켠에 뚝뚝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지....
Reply3 d
박정미
정금희 영하라니요. 이 좁장한 반도에서 무슨 변괴랍니까. 의성에 겨울요괴가 잠시 난동을 부렸나봅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하루이틀이겠죠. 이제 힘을 못 쓸겁니다.
찬란한 봄이 피어날겁니다. 목련도 그냥 지지만은 않을거구요!
Reply2 d


김두화
아예 1도를 하셨군요.
Reply2 d
박정미
김두화 일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런 기분이 확실히 듭니다. 
안보이면서 꽃잎을 보내주는 벚나무에게 감사하는 마음도요^^
Reply2 d


Jungeun Kim
맞아요 언니 매일 아침 청소하고 빵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면서 행복해요ㅎ 오늘도 행복하세요💕
Reply2 d
박정미
Jungeun Kim 네가 진정한 도인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하루하루 일상을 변함없이 지켜내는것, 그것이 도력 아닐까, 싶다.
화이팅!
Reply2 d
Jungeun Kim
박정미
Happy Tom And Jerry GIF
Reply2 d


이근식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행복한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웃는 일,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
Reply2 d
Rie Saito
私たちが友好的にお互いの国の文化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れば、フェイスブックを追加することができればもっといいですね。
ReplySee translation2 d
이병철
낙화인들 꽃이 아니라 쓸어 무삼하리요.
나는 떨어져 있는 꽃이나 눈을 보면 사람들이 쓸어버릴까 마음이 조려지네.
떨어져 있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까. 떨어진 꽃을 밟지 않으려고 길을 돌아가네.
Reply2 d
박정미
이병철 꽃잎을 쓸다가 빗질을 멈추고 잠시 푸른 하늘을 우러릅니다. 아! 빗질은 호사요, 흉내일뿐이지요. 저 하늘 가득 내리는 꽃눈을 보세요.
Reply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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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

최정철 2004.09.01 11:11 조회 수 : 375

NIKON D100 2004:08:28 16:03:481/90sF11.0+0.33 EV조리개 우선 모드스팟105mm430x644



콩과식물인 싸리나무입니다.
옛날에 줄기를 이용해서 빗자루나 사립문 같은 것을 만드는데 이용했었지요.
저 어렸을 때에는 '싸리비'라는 동요를 배웠는데 요새도 배울까요?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꽃잎과 빗물을 쓸던 이 싸리비.
이제는 낙옆을 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라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 I See Satan Fall Like Lightning

알라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은이),김진식 (옮긴이)문학과지성사2004-05-14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을 비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를 분석한다. 저자가 분석한 메커니즘은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의 폭력으로, 신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은 희생양을 유죄로 해석하지만, 기독교의 성서만이 희생양인 예수를 무죄로 본다. 이와 같은 신화와 성서의 비교를 통해, 새롭게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또한 성서와 신화 속의 폭력구조를 살펴봄으로써 사탄적인 인간 욕망 구조의 본질을 탐색한다. <누가복음>의 한 구절인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를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로 변용해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위기들, 현대 사회의 군중 심리와 폭력 구조를 꿰뚫어본다.


목차


머리말

1부 성서의 폭력이해
1. 스캔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2. 모방 폭력의 사이클
3. 사탄

2부 신화의 수수께끼
4. 아폴로니우스의 기적
5. 신화
6. 희생
7. 초석적 살해
8. 권능과 권세

3부 십자가의 승리
9. <구약성서>의 특징
10. 복음서의 특징
11. 십자가의 승리
12. 속죄양
13. 희생양에 대한 오늘날의 근심
14. 니체의 이중유산

맺음말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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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35 베드로가 하룻밤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원인을 찾으면서, 단순히 베드로의 기질이나 그의 심리학‘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이들은 이 장면에서 인간 베드로를 능가하는 그 무엇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 사도의 ‘초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베드로가 특별히 영향을 잘 받는 기질‘을 가졌다고단정하거나 아니면 같은 식의 다른 표현을 써가면서 이 사건의정말 중요한 의미를 해치거나 대폭 축소해버린다.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빠져 있던 모방에 베드로도 빠진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그의 이웃과 다르지 않다.
심리학적인 설명에 의지하는 것은 보이는 것만큼 결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모방적 해석을 거부하고서 베드로에게서 순전히개인적인 원인을 찾을 때 우리는,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우리라면 베드로와는 다르게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즉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을 것임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행동은 예수가 나무랐던 바리새인들의 행동과 같은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세워주고 있었다. 조상들이 죽인 희생자들에 대해 대단한 애도를표하는 의식은 이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을 경우가 많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우리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피를 흘리는 예언자들의 대열에는 가담하지 않았을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손들은 자신들이 조상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김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거짓 차이, 이것은 이미 오늘날 개인주의가 갖고 있는 모방적 환상이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모방적이고 반복적이라는 생각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다. 그런데 이 반복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이 저항이다. 접기 - wiegenlied



저자 및 역자소개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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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1923년 남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947년 파리 고문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인디애나대학 프랑스어 강사를 시작으로 듀크대학・존스 홉킨스대학・뉴욕주립대학・스탠퍼드대학 등에서 정교수・석좌교수 등을 지내며 프랑스의 역사・문화・문학・사상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저서 역시 미국에서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의 이론과 사상은 미국 대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1947년 제르보・샤르피에 등과 함께 아비뇽 교황청에서 ‘현대 회화전’을 개최해 브라크・샤갈・칸딘스키・클레・레제・마티스・몬드리안・피카소 등의 작품을 전시하는 등 많은 화가들과 작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1961년에는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비평언어와 인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바르트・데리다・골드만・이폴리트・라캉・풀레・토도로프・베르낭 등 많은 학자들이 참가했다.
지라르의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욕망하는가 하는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이 그의 첫 저서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인간의 욕망과 구조를 밝혀내려는 작업의 결실인 『폭력과 성스러움』(1972)은 1973년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밖에도 그는 『지하실의 비평』(1976),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온 것』(1978, 공저), 『이중규제』(1978), 『희생양』(1982), 『옛사람들이 걸어간 사악한 길』(1985),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떨어지는 사탄을 보았노라』(1999)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문학 작품 분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폭력과 구원에 관한 주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GB 100만 부 특별 리커버판)>,<지라르와 성서 읽기>,<희생양> … 총 71종 (모두보기)

김진식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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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학 프랑스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르네 지라르에 의지한 경제논리비판》(2005), 《알베르 카뮈와 통일성의 미학》(2005), 《르네 지라르》(2018), 《모방이론으로 본 시장경제》(2020)가 있다. 역서로 《폭력과 성스러움》(1993), 《희생양》(1998), 《알베르 카뮈: 부조리와 반항의 정신 1・2》(2000),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2004), 《문화의 기원》(2006),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2007), 《욕망의 탄생》(2018), 《유럽을 성찰하다》(2020)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프랑스철학과 정신분석>,<모방이론으로 본 시장경제>,<[큰글씨책] 르네 지라르 > … 총 20종 (모두보기)



평점분포 8.0








그리스 신화를 몰락시켜야 기독교가 산다는 궤변으로 일축된 노학자의 말령기의 발로
이강 2009-04-2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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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좀 마음에 걸리지만... 르네 지라르의 평생에 걸친 연구가 모방욕망, 희생양 이론 등에 거쳐 복음서와 신화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결론적으로 인류학적 기독교 변증서가 된 책.
꿈꾸는학생 2016-07-0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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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욕망과 희생양과의 관계



저는 지라르의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지라르 저작들의 결론과 같은 입장에 위치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들은 읽지 않았지만, 핵심 주장들을 먼저 요약을 한 후 이 책에 대해서도 진행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저서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로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향해서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자율적 욕망을 믿는 것은 ‘낭만적 거짓’이며, 타인이라는 모델(중개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타율적인 욕망, 즉 모방 욕망임을 인정하는 것이 ‘소설적 진실’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243 페이지).




첫 번째 저서에서 인간의 욕망이 모방욕망임을 밝혀낸 지라르는 두 번째 저서인 〈폭력과 성스러움〉- 이 책 제목을 패러디한 책이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이죠 - 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 욕망의 모방 대상인 모델이 가까운 동료(짝패)가 될 때, 이 동료들 사이에는 선망과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이 생겨나고 갈등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폭력의 씨앗이 된다고 합니다. 이 폭력은 상호 폭력으로 인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아주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무차별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이어지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발생하는데,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사회가 무차별적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사회의 상호적 폭력을 그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입니다. 모방적인 상호 폭력을 피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일종의 방책이 희생양 메커니즘인데, 세계 도처의 인류학적 자료와 신화, 민담 등을 통해 이 메커니즘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저서인 〈희생양〉에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규칙성을 밝혀내려고 하면서 인간 문화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근저에는 집단 구성원의 만장일치적 폭력인 박해와 살해가 있고, 이 집단 살해를 전해주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지라르는 ‘박해의 텍스트’라고 부르며, 역사적인 기록이나 민담, 신화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나타나는데 이런 기록들은 모두 그 집단 살해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집단살해에 성공한 살해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살해당한 자들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되어 진실을 왜곡하였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저서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이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환경과 과정을 여러 신화와 문헌 속에서 찾아내면서, 거기에 성경이라는 기독교의 텍스트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하나의 희생양의 죽음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지라르 책들의 요약입니다. 너무 길었죠? 본론은 더 길어 질 것 같은데, 일단 나가봅시다. 지라르의 네 번째 저서인 이 책에서는, 신화와 성경을 상세하게 상호 비교하면서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신화적 텍스트(아폴로니우스 신화)는 집단폭력의 희생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지어서 그 집단에 의해 살해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텍스트는 집단폭력의 희생자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고하게 살해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신화의 해석은 환상이고 거짓이며, 성경의 해석이 정확하고 진실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와 성경의 기록이 실제 일어난 일로 해석을 합니다.




신화적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그 사회 자체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신화의 기록자 자신이 신화적 폭력 뒤에 있는 군중 현상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이러한 신화적 사회는 폭력에 전염되어 과도하게 모방에 빠져들어 그들의 희생물이 죄가 있고,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들이 다시 화해한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화해로 인해 희생물은 최종적으로 찾아온 평화를 가져다준 존재로 떠받들어져서 신격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만이 이런 환상을 극복할 수 있는데, 성서를 쓴 사람들이 이러한 환상을 극복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처음에는 신화와 유사한 모방 전염에 빠져 다른 군중들처럼 정신을 못차리다가 나중에는 특이한 경험을 통해 모방 전염을 넘어서서 희생물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예로 구약에서는 요셉이 있고,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지라르의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사탄을 인간의 이러한 ‘모방욕망’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의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은 이러한 인간의 모방욕망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들은 날 때부터 이웃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 집단 가운데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고, 이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위기나 폭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주장하는 사탄의 실체를 인용해보겠습니다. “거기서 거짓을 끌어내오는 악마의 ‘정수’는 바로 실체가 하나도 없는 강렬한 모방일 뿐이다. 악마에게는 고정된 기초가 없으며 ‘존재’는 더더욱 없다. 자신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악마는 신의 피조물에 붙어서 기생해야 한다. 이렇듯 악마는 완전히 모방적인 존재라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61 페이지)




저자는, 신약으로 와서 예수 자신도 이러한 인간의 모방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기 보다는 대상을 바꾸어 모방하라고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항상 금지의 언어가 아닌 모방하는 모델의 언어로 자신을 모방하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모방 경쟁을 피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욕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삶이나 방식이나 습관을 모방하라는 뜻은 아니고, 금욕법칙도 아니며, 그것은 예수가 욕망하는 것, 즉 그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가능한 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는다는 목표로 그를 인도하는 정신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아버지를 모방하는데 온 힘을 바치고, 우리에게 그를 모방하라고 권하는 것은 결국 예수의 모방을 모방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략적으로 책에 대한 소개를 하였는데, 다른 중요한 내용들도 많이 있지만 이것으로 정리를 하고, 그러면 이 책에 대한 평을 간략하게 해보겠습니다. 장점 먼저 이야기하면, 지라르는 이 책에서뿐만 아니라 이전 책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모방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걸쳐 이에 대한 신화, 민담, 성경 등을 분석하면서 입증하려고 애를 썼는데, 아주 탁월하고도 정확하게 인간의 욕망의 구조를 밝혀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이 공감하고 있고, 이런 시각으로 사물을 보거나 현상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무고하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옹호하였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지만 당시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방욕망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을 당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의 모방을 모방하라는 충고는 깊이 새겨 들을만합니다. 현실 교회의 목사보다도 더 은혜적이기까지 하구요.




그러면, 지라르의 문제점은 없느냐? 제가 보기에 먼저 사탄을 실체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모방욕망이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인간의 배후에서 이러한 모방욕망을 충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기록도 사탄을 실체로 보고 있구요.




다른 문제점은 기독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고한 희생을 강조합니다만 이것을 신화의 해석과 비교하다보니, 너무 수동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희생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였고,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으로 걸어간 길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의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어 요한계시록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이 책은 번역이 잘 되어 있어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번역에 대한 애로사항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욕망에 관심있는 분이나, ‘희생양’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세요.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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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이름으로 2006-03-30 공감(43)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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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학자의 망발에 가까운 궤변

루카 10,18 :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 책의 제목은 성경에서 빌려온 것이다.
제목에 걸맞게도 이 책은 기독교 옹호론으로 가득 찬 도서이다.
그래서인지 블로그들을 살펴보니 이 책을 주로 언급한 사람은 기독교인들이다.
아쉽게도 난 기독교인이 아니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가르침은 부처의 가르침에 가깝지만
오해의 소지를 지우기 위해 몇 가지 말하겠다.

나는 불교계에서 범람하는 근거 없이 기적을 강조하는 호교론적 종교서와
현대 물리학등과 같은 과학적 지식으로 불교의 사상을 과학적으로 보이게
하는 책들 따위엔 반감을 가지고 있다.

제발 종교는 종교로 놓아두면 안되겠냐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란 것이 손댈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거나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쓸데없이 인문지식과 과학이론을 아전인수식으로 끌어와
불상에 번쩍거리는 개금을 하듯, 그렇게 순진한 일반독자들에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종교의 모습으로 호도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책의 평가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인류학적 측면에서 쓰였다는 뉘앙스를 취한
즉, 인문도서의 탈을 쓴 기독교에 대한 신앙고백서이다. 게다가 철저히 오만하다.
그는 신화와 성경을 구분한다.

신화는 거짓이고, 사탄이고, 모방경쟁관계가 불러온 희생제의로 정화된 일종의 사기이고
성경은 참되고 신의 말씀이고 모방경쟁관계를 해소하면서 신화의 거짓 정체를 폭로 하는

기준이 되는 텍스트란 주장이 주야장천 이루어진다.



만약 그가 목사이거나 신부라면 나는 그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거려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모방이론과 희생양제의라는 문학적, 인류학적 용어를 생산해 낸 그가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성실성을 저버리고 치매에 걸린 영감마냥



내뱉는 발설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가 끊임없이 성경의 구절과 비유하는 신화들의 태생은 그리스에서 온 것이고



(대체 이집트나 동양의 신화는 왜 비유의 대상이 안 될까? 공부를 하지 않아서일까,



세상이 헬레니즘 아니면 헤브라이즘, 딱 두 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논거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일까.

전자라면 학자적 불성실이요, 두 번째라면 서구 백인의 제국주의적 오만이오,

마지막이라면 학자적 양심에 어긋나는 셈이다)

그가 아주 적절하다는 듯 비유하며 신화와 성경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예로 삼은

그리스의 오이디프스 신화와 성경의 요셉의 일화는 눈 있는 사람이라면

"왜 하필 하고많은 신화 중에 저 둘을?" 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만든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들만 빌려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모든 저자들의

속성임을 감안하더라도, 르네 지라르는 이 책 내내 그 한도를 벗어난 인용을 구사한다.



심지어 복음서에 쓰여진 "헤로더와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으로) 그날 친구가 되었다."라는



누가 복음서의 구절마저 스스로 배신하며 해석하는 무모함.



저자에 의하면 이 부분은 성경의 신화적 측면을 밝혀주고 암시하고 있지만,



성경은 원래 고결하고 명민한 저술자들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그 오해의 소지를 성경의 저술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경은 거짓 신화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감 있게 집어넣었다는 부분을 읽으면



아무리 명망을 쌓은 대학자라도 이런 식의 궤변을 펼칠 수 있는가 난감할 뿐이다.






대체 그의 확고한 기반으로 보이는 성경무오류에서 근거해서 밝힐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이미 정답은 정해졌고, 그것을 기준으로 이교도들의 신화와 종교는

하나씩 제거해나가기만 하면 될 뿐, 어떤 심오한 고민과 번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내가 성서고고학을 고고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은 이미 성경이 옳다는 전제하에



모든 발굴을 시작하기 때문에 항상 오류와 거짓을 남발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창조신학회>의 얼빠진 과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



애석하게도 르네 지라르는 그간에 보여준 석학으로서의 명민함을

이 책 한권으로 먹칠을 해버린다






만약 그리스도교의 우위를, 십자가의 승리를, 모든 이교도의 신화와 잡설들에 관한



성경의 정복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꼭 읽기 바란다.



이 책은 당신들의 저급한 우월주의에는 큰 만족을 줄 테지만,



당신의 거의 없다시피 한 지성의 샘물은 싸그리 말려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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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2009-04-26 공감(2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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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적 제의로 만들어진 사회

'모방적 욕망', '견물생심'. 욕망은 스캔들을 일으킨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난 명품 가방인 '똥"을 욕망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똥"을 가진 이가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주변 엄마들 가방이 '똥' 천지였다. 나와 가까운 이들이 '똥'을 들고 다니니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저 이도하는데 나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똥'을 욕망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상(똥)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중개자나 모델을 통해서 대상을 욕망한다.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쓰는 이유이다. 연예인이 든 '똥"을 보게 하므로 '똥"을 욕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질투를 자극하여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욕망은 형이하학적인 단순함에서 오지 않는다. 형이상학 적이다.

지라르는 프랑스가 최고라고 지칭하는 '인류학자'이다. 그의 '기본적 인류학'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학자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많이들 시도하고 있다. "나는 사탄이~~~"에서는 지라르 사상을 과학적 논리로
전개하고 있다. 그는 근대 소설을 연구 분석하면서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욕망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혀 냈다. 모방은 상당히 경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라르는 욕망에서 오는 폭력을 신화와 성서를 비교 분석하여 욕망 이론을 영성 이론으로 설명한다. 기본적 인류학을 통하여 성서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
지라르는 신화를 희생양 메커니즘, 제의의 폭력으로 해석한다. 또한 문화와 문명도 희생과 피로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를 '초석적 폭력', '초석적 살해'라고 한다. 그는 문화의 기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낭만적이지 않으며 피의 살해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인류 문화 밑에는 희생 제물이 은폐되어 있다. 수많은 기원 이야기와 건국 신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전이나, 궁을 지을 때 아이를 제물로 받치는 것.(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에서 상량식 때 닭, 돼지를 잡는 이유이다.

원시사회 때부터 폭력은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폭력은 모방에서 오며, 모방은 욕망에서 온다. 이는 갈등이 모방적 경쟁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 모방적 범죄= 스캔들이다.
첫 번째 스캔들이 일어나는 순간 이 스캔들은 다른 스캔들을 일으킨다. '모방 위기'는 끊임없이 번져가면서 더 악화된다.
'모방 사이클'은 욕망과 그것의 경쟁 관계에서 시작하여 스캔들의 확산과 모방 위기를 통해 계속되다가 마지막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끝난다. 정치나, 기업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한 명을 대표로 내세워 희생양으로 쓰는 방법은 비일비재 하다.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구약 성서]나 특히 복음서를 살펴보면 욕망과 갈등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다.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와 이웃에 대한 폭력을 금하고 있는 십계명의 후반부,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앞의 것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행위를 금하기보다는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다. 네 이웃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인간들은 날 때부터 이웃의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거나 단순히 욕망하기에 인간 집단 가운데에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다. 이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공동체의 조화,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항상 위협할 것이다. 서로 상대방으로 인해 경쟁적 욕망이 커질수록 이 욕망은 위험해진다. 사람들은 욕망이 객관적이거나 아니면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은 사실 그 대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타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타인은 곧 가장 가까이 있는 제삼자 즉 이웃이다. 이웃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분명히 확인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의 재산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살인도, 간음도, 절도도 그리고 거짓 증언도 하지 않을 것이다. -p21-

현대 사회는 내적 중개 시대이다. 거리가 가까운 사이에서 갈등이 유발되는 시대. 그 대표적인 것이 sns이다. 페이스북, 인스타는 내적 중개가 유발되는 공간이다. 내적 중개는 폭력을 발생시키며, 희생적 메커니즘이다. 악플과 여론 몰이로 사람을 죽게 만든다.
오늘날은 대부분 물리적 폭력보다 '심리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더 감추기가 쉬우며, 모두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그 애는 욕먹을 짓을 했어, 당할만해, 당해도 싸~~~. 일명 현대판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언어학자들은 사회적 위기가 절정에 달하면 고대 사회 때부터 만장일치적으로 모방 폭력이 행해졌다고 한다. 폭력은 언제나 위기를 종식시키면서 하나의 희생물에 반대하는 사회를 다시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나 이 희생물은 폭력과 관련이 없는 유형의 희생물을 두며 이를 '희생양'이라 부른다. 그러나 꼭 모방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 모방 욕망이 없었다면, 사회도 문화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에" (요한복음 8장 42~44) 욕망은 악마나 하나님에 대한 모방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과 사탄(악마)의 두 개의 '원형 모델'이다. 이 둘의 차이는,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추종자들은 곧 악마와 같은 장애물로 변하고 만다. 사람들이 선택한 모델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갈등 없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 모델 때문에 폭력적인 무차별, 즉 희생양 메커니즘에 이르게 된다. 모방 욕망의 노리개가 된다. 우리의 모델은 우리의 살아 있는 장애물이 되고 우리는 또 그 모델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에 빠뜨린다. "

이 책은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을 비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와 양상을 분석했다. 지라르는 복음서의 모든 죽음/부활이 산화와의 흡사함과, 그 유사성을 인정하나 성경 텍스트와 신화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하여 입증한다. (고대 신화의 중심을 이루는 폭력 이야기는 성서의 많은 이야기,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다.)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모든 문화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 이야기는 세계 모든 신화를 전복, 해체, 비판하고 있다. 형식은 같으나 주제와 관점에 차이가 있다. 신화는 마녀사냥과 박해의 텍스트로, 제의적 집단 폭력성을 정당화한다. 반면 복음서의 핵심 주제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성을 드러내고, 제의적 집단 희생양을 무효화, 종식 시킨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대부분 선택된 조건의 희생양 들이다. 이 조건, 선택 기준은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인 결함을 가진 자들이다. 나병환자, 유대인, 이방인, 여자, 불구자와 같은 온갖 종류의 주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현상은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으로 이어진다. 그리스 신화는 그 당시 그리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희생 제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화이다. 그것이 중세를 거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혈의 희생 제의는 고대 사회의 내적 갈등을 없애고 표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책 내용 중 재미있는 부분은 우리 '문화적 제도'가 원래 제의적 행위에서 나왔다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고대의 희생 제의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제의적 행위는 많이 다듬어지고 약해지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종교적 의미가 사라졌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종교적인 성격이 사라진 의식은 제의에서 벗어나 제도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제의는 여러 번 되풀이될수록 관습으로 으레 변하였으며, 관습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종교적인 것에서 나왔다. 예로 교육 제도와 정치권력에서 제의적 기원을 볼 수 있는데. 교육 제도에서 소위 통과 의식이나 입문 의식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은 그 사회의 문화에 엄숙한 절차를 통해서 들어간다. '통과'로 불리는 이 의식들에는 '테스트'가 있다. 모든 의식들이 그러하듯이 통과 의식이나 입문 의식은 '희생'에 기반을 둔다, 지원자들 중의 한 사람이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해 살아남지 못할 때, 이런 경우 다른 지원자들은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이며, 이는 입문 의식에 들어 있는 희생의 효력으로 본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총명하고 우수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총받이로 내세우는 경우이다.
대입 시험 응시자 중 승자는 몇 안 된다. 나머지는 흔히 깔아준다, 불수능, 물수능은 상위 자들을 위한 희생양을 만든다. 수능의 희생양! 제도의 희생양! 비단 입시제도 에서만 그러겠는가 슬픈 것은 지금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해결해야 할 위기가 있는 곳에 희생 제의가 꼭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위기, 계절이 변하는 것도 위기고 기아가 발생하는 것도, 모든 종류의 재앙도 위기다, 불안에 떨게 하는 많은 것들이 모두 위기이다. 궁중은 희생 제의에 의지하여 이런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것, 나라에 큰 현안이 있을 때 인지도 높은 연예인의 스캔들이 터지는 것 등이 현대판 희생 제의,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현재 코로나로 인하여 여러 희생양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슬픈 모방적 폭력의 희생 제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라르는 선한 모델을 모방하라고 한다. 모방 모델에는 선한 모델과 악한 모델이 있다. 성경은 이를 구분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성경과 신화의 유사성과 급진적 불연속성>
* 가인과 아벨 vs 로물루스와 레무스
* 욥 vs 오이디푸스
* 아폴로니우스의 기적(거지 돌팔매 vs 음행 중에 잡힌 여자)
*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vs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

성서의 이야기는 언제나 폭력을 반대하고 약자의 편에서는 반면, 신화는 폭력을 정당화하며, 강자의 편에서, 승자의 편에서 승자를 신격화 시킨다.
지라르는 복음서는 신화의 해체이며, 복음서가 신화를 회복시킨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지라르가 기독교의 부활을 다시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지적 위상은 니체와 견줄만하다고 평가한다. 19세기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명명하며 100년의 시대를 열었다면, 20세기의 지라르는 니체는 죽었다로 새로운 100년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말에 속았다. (나도 속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모든 신화 이야기를 허구의 그저 낭만적 아름다움으로, 다정하고 쾌활하며, 동정심 많은 정의와 진리의 이야기로 포장했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 장애인들에 대한 비장애자들의 폭력, 비정상인에 대한 정상인들의 폭력, 떠돌이에 대한 토박이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사회가 퇴화하지 않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희생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진정한 박애라고 주장했다. (요즘은 니체에 대해 다시 조명하고 평가하고 있는 추세다.) 신화의 무시무시함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험한 책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쓰인 이야기)들로만 본다면 성경은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폭력을 폭로하고 드려낸 최초의 기록이다. 신화와 성경 이야기의 유사성과 차이점, 성경과 신화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풀어내는 점이 재미있다. 인간의 폭력성과 사회구조의 형성 과정,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가 어떤 초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지금 일어나는 사회회 현상들의 이유와 해결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희생양을 보지 못하는 신화를 찬양하면서 그 반대로 구약과 복음서가 도처에서 희생양을 보고 있다고 비난하다면 우리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재판부의 실수의 가능성을 거부한 그 사람들의 환상을 되풀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레퓌스 파는 요셉의 진실만큼이나 분명하고 단호한 진실을 신화적인 폭력 속에서 겨우 승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 p184

아무리 찬란한 문화와 경제의 대국을 이루었다 한들 무고한 사람의 피로 초석을 삼았다면 무너지리라, 많은 희생양을 제물로 삼아 이루어진 제국주의 일본은 자신들 속에 숨겨져있는 악의 모방적 욕망의 추악함을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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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syl 2019-07-2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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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읽으면 좋은 책을 소개합니다. 르네 지라르의《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는 프랑스인인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하고 스탠포드에서 교수를 했습니다.
고대 신화 연구와 인류학과 현대 사상사 연구에 탁월한 학자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 났지만 자유주의와 인문학에 심취하여 신앙을 떠나서 신화연구와 니체등을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신화를 연구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신화와 성경의 희생양 메카니즘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신화는 거짓이고 성경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심하여 기독교변증가가 됩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의 욕망의 구조와 사회적인 메카니즘을 연구한 결과 대부분
신화는 유죄한 희생 염소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희생양인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자로써 희생당했기에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1부 성서의 폭력 이해. 2부 신화의 수수께끼. 3부 십자가의 승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학자가 아닌 인문학자가 발견한 십자가 복음의 위대함을 변증해주는 귀한 책입니다.
고난주간에 읽으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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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ee Satan Fall Like Lightning 
2001
by Rene Girard (Author)
4.7 out of 5 stars 348 ratings


Audiobook
1 Credit

Paperback
$46.60
9 New from $46.60


Rene Girard holds up the gospels as mirrors that reveal our broken humanity, and shows that they also reflect a new reality that can make us whole. Like Simone Weil, Girard looks at the Bible as a map of human behavior, and sees Jesus Christ as the turning point leading to new life.

The title echoes Jesus' words: "I saw Satan falling like lightning from heaven". Girard persuades us that even as our world grows increasingly violent the power of the Christ-event is so great that the evils of scapegoating and sacrifice are being defeated even now. A new community, God's nonviolent kingdom, is being realized -- even now.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Orbis Books; First Edition (7 February 2001)
Language ‏ : ‎ English
Paperback ‏ : ‎ 199 pages

9 in Philosophy of Religion
16 in Inspirational Spirituality (Books)Customer Reviews:
4.7 out of 5 stars 348 ra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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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out of 5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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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Man
5.0 out of 5 stars Classic and sublime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8 Jul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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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book by Rene Girard explores passion and the devil. If ever passion made sense to the common people this is it. Girard's genius intuition of the dynamics of human groups and his interpretation of passion make more sense than anything I read or heard before and glorifies the divine in a brilliant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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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van wyk
5.0 out of 5 stars Not an easy read for those used to instant answer Western minds
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5 Sept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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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it's Rene Gerard! Not an easy read for those used to instant answer Western minds, but if you really want depth get on over your head and drown your traditions for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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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4.0 out of 5 stars Describing the victory of the cross in an way that makes sense to historyReviewed in Canada 🇨🇦 on 16 Ma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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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ee Satan Fall like lightning is first and foremost a anthropological study of biblical texts and Christian traditions. 

His goal is to show the unique role of the Gospel texts in exposing the parasite of satanic power on human order from the foundation of the first human society, through the persecution of the prophets, to finally the crucifixion of Jesus Christ. 

His method is to show the biblical tradition of exposing human violence in siding with, and telling of the story of the victim. 

In contrast, he shows that it is exactly the hidden story of the victim that otherwise produces mythology in the ancient world (there are a few examinations of myths). 

Girard finds in the Gospel narratives the secret hidden in mythology and human religious ritual - hidden violent social order resulting from rivalry between individuals and communities that periodically expels itself on a scapegoat victim. It is the revelation of violent social order inherent in the "principalities and powers" and the "prince of this world" found uniquely in the Gospel texts, that Girard uses to account for the modern disintegration of archaic religion and the modern concern for victims.



Andreas

5.0 out of 5 stars Eine wegweisende Entdeckung
Reviewed in Germany 🇩🇪 on 8 Decem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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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Buch stellt eine unerhörte These auf. Die These schneidet tief in unser Verständnis, woher wir kommen und wohin unsere Reise geht. Nach der Lektüre dieses Buches ist die Welt nicht mehr, wie sie war.


The book puts forward an outrageous thesis. The thesis cuts deep into our understanding of where we come from and where our journey is going. After reading this book, the world is no longer what it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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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l Chapman-Blench
5.0 out of 5 stars Five StarsReviewed in the United Kingdom 🇬🇧 on 26 Marc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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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ellent book. Good value. fast disp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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