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 2

번역물 2 페이지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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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51 조회1,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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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간디는 그것을 늘 끊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마다「기타」를 읽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공부할 때 이것을 외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 붙여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글이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 나는 젊어서 서양 사람의 책을 읽노라면 그 속에「기타」소리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뭔지 내용은 모르지만 흔히 그것을 소개하기를 “기독교의 신약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글인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것은 나의 독서 범위가 좁고 열심이 적었던 때문이지만 또 어디서 곧 찾아볼 수 있으리만큼 소개해준 사람이 없던 탓도 있습니다. 불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몇 천 년 불교신앙의 역사를 가지면서 왜 그것을 몰랐는지, 알고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만 숨겨두었던가? 확실히 그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 소리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던들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그를 찾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항상 더럽힘을 당해서 하나님입니다. 더럽혀도 더럽혀도, 수정에 흙물을 끼얹은 듯,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데 하나님의 하나 된 점이 있습니다.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천하고 못나고 악한 것도 부르고 들어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진리 아니겠습니까?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바가바드기타」가 한 권 끼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 꼴 이냐? 하고 책망하겠지만 그런 줄 스스로도 알면서 나는 이것을 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성자만 전도하란 법 없습니다, 망나니도 해야지. 그래서 바울이 한숨 쉬며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참으로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더 괴롭히기 위해 하지만 어쨌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니 좋다고 그랬습니다. 꿀은 옥단지에 담아도 꿀이요 깨진 바가지 쪽에 담아서 더럽고 다 흘러빠져도, 그래서 단 한 방울이 남아도 꿀이 꿀인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둔하고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진리의 말씀을 완전히 변질 말살 왜곡 은폐할이만큼 타락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경험해봤으니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툰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잘한 이의 것을 비는 것이 옳을 듯해 스와미 프라바바난다(Swami Prabhavananda)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공동 번역에 실린「기타와 마하바라타」 「기타의 우주론」두 장을 우선 실어서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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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작성자 바보새 14-05-27 12:17 조회1,9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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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기타」와「마하바라타」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라고 한다. 그 맨 첨의 원형대로는 2만 4천 절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갈수록 차차 늘어서 나중에는 10만 절에 이르게 됐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단일한 작품이 아니고 여러 개의 이야기가 모여서 된 것이다. 그 중심 되는 제목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인도 옛날의 바라타 대왕족의 이야기다. 마하(maha)란 크다는 뜻이다.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판두(Pandu) 왕이 죽은 다음 그 자리를 그 동생 되는 드리타라슈트라(Dhritarashtra)가 이어 들어서서 판두의 다섯 왕자, 즉 판다바스(Pandavas)들을 거두어 자기의 일백 왕자들과 함께 양육하게 됐다. 그들이 차차 자라 어른이 되자 판다바스들은 그 경건심과 영웅적인 인격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됐다. 그러자 드리타라슈트라의 맏아들 두료다나(Duryodhana)는 샘을 일으켜 그들을 죽일 계획을 하게 됐다.
무료다나는 계책을 꾸며서 한 멀리 있는 성에 궁궐을 짓고는 판다바스들을 초청해서 어떤 종교적 명절 동안을 그 안에서 지내게 했다. 그 궁궐은 아주 불붙기 쉬운 자료로 지어졌으므로 두료다나의 부하들은 손쉽게 거기 불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궁궐은 다 타 재가 됐지만 판다바스들과 그들의 어머니 쿤티(Kunti) 왕비는 마침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 히 도망할 수가 있었다. 두료다나는 그들이 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에서 브라만(Brahman)족처럼 변장을 하고 지내는 동안 가지가지의 고난을 겪었고 모험을 했다. 어떤 날 그 근처의 국왕이 자기 딸을 위해 사위를 고르는 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 뽑히려면 굉장히 강한 활을 당기어 밟아서 아주 조그만 과녁을 맞혀야 한다고 했다. 판다바스들은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변장한 모습으로 그 성에 갔다.
지망자가 전인도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두료다나도 그 속에 있었다. 그 시험에 모든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다 떨어져나가고 맨 나중에 판다바스의 셋째인 아르쥬나(Arjuna)가 일어나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그 활을 꾸부려 밟아가지고 그 과녁을 맞혔다. 공주 드라우파디(Draupadi) 는 그에게 승리의 화관을 씌웠다. 그러나 거기 모였던 왕자들은 겉보기 에 미천하고 무사답지 못한 브라만 사람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크리슈나(Krishna)가 두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하고 아르쥬나가 신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득을 시키지 않았던들, 마치 율리시즈 이야기 모양으로 큰 싸움이 일어날 형세였다. 크리슈나는 판다바스의 사촌이면서도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은 아닌 사람이었다.
5형제는 드라우파디를 데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는 쿤티게로 나가서 큰 목소리로 “어머니, 우린 아주 놀라운 보배를 얻어왔어요” 했다. 쿤티는 “얘들아, 부디 똑같이 나눠가져야 해”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한 처녀가 아닌가. 그래 어쩔 줄을 모르며 부르짖었다. “아이구머니나, 내가 무슨 소리를 했지!”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어머니의 말은 그 아들들에게는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라우파디는 그 다섯 형제들과 다 같이 결혼을 하게 됐다.
 
드리타라슈트라와 그의 아들들은 이제 판다바스들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강한 임금과 결탁을 하게 된 것을 알았다. 두료다나는 그 국토를 다 차지하려고 했지만 드리타라슈트라가 어질게도 그 숙부 비슈마(Bhishma)의 조언을 들어 그 5형제를 오라 청하여 왕국의 절반을 갈라주기로 했다. 그리해서 왕국을 둘로 갈랐는데 판다바스들은 쟈무나(Jamuna) 강 유역에 있는 가장 나쁜 황무지를 가지게 됐다. 그들은 그것을 개척하여 훌륭한 도시를 건설하고 맏형 유디슈트라(Yudhishtra)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제 5형제는 승리와 영광의 시대를 맞게 되는 반면 두료다나는 그들을 점점 더 미워하게 됐다. 그는 샘 끝에 또 다른 흉계를 꾸며 그들을 해하려 했다. 경건하고 점쟎은 유디슈트라 왕이지만 한 가지 위험한 약점이 있었는데, 노름을 좋아했다. 그래 두료다나는 그를 보고 아주 꾀많고 사기꾼인 사쿠니(Sakuni)와 같이 골패를 치자고 도전을 했다. 그러면 왕은 체면에 걸려 승낙 아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패를 쳤는데 사쿠니가 협잡을 했기 때문에 왕은 매번 져서, 전재산을 대다가, 왕국을 대다가. 나중엔 자기의 모든 형제, 드라우파디, 자기 자신까지 대서 다 졌다. 마침내 그들은 다 무료다나의 노예가 되어 원수 갚음으로 하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게 됐다. 나중에 드리타라슈트라가 견디다 못해 나서서 중재를 해서 비로소 그들은 자유를 얻고 왕국을 돌려받게 됐다.
그렇지만 무료다나는 끝내 그 아버지에게 졸라서 또다시 골패를 한번 치는 허락을 얻었다. 지는 사람은 제 왕국을 내놓고 산림 속에 은거하여 12년을 지내야하고 그 다음 1년은 성내에서 살되 들키지 않아야 한다. 만일 들키면 그 유배의 기간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유디슈트라는 이번 내기에도 졌다. 그래서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그 불행을 복으로 살려 그동안에 정신적으로 수련을 하며 많은 영웅적 행동을 쌓았다.
 
한번은 그들이 방랑을 해서 다니는 동안 목이 말라 죽게 되는 지경을 당했다. 막내동생 나클라(Nakula)를 시켜 물을 찾아보라 했다. 그는 찾다가 호수를 하나 발견했는데 맑기가 수정 같았다. 엎드려 마시려 하자 소리가 하나 들려오는데 “가만있어,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대답을 해. 그런 다음 마셔라” 했다. 그러나 나쿨라는 너무 목이 타 죽을 지경이므로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곧 죽어버렸다. 그 손위 형 사하데바(Sahadeva)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가 역시 그 호수를 발견하고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모양으로 해서 4형제가 다 죽었다.
맨 나중 유디슈트라 차례가 왔다. 그는 그 시체들을 보고 울기 시작했는데 그때에 그 목소리가 말하기를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그러면 내가 네 슬픔과 목마름을 다 고쳐줄 것이다” 했다. 그가 얼굴을 돌이켰을 때 그는 의무와 덕의 화신인 다르마(Dharma)가 한 마리 학의 형상으로 자기 옆에 선 것을 보았다.
그 학은 물었다.
“천당에 올라가는 길은 무엇이냐?”
“진실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
“올바른 행실로입니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무엇을 정복해야 하느냐?”
“자기 마음입니다."
“사람은 언제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
“허영심이 없을 때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모든 것 중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자기 둘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한 사람도 제 죽을 것을 믿는 사람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참 종교에 이를 수 있느냐?
“토론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경전에 의해서도, 교리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유익이 없습니다. 종교에 이르는 길은 성인들이 밟아간 그 길입니다.”
 
다르마는 흐뭇이 여겨 자신을 유디슈트라에게 나타낸 다음 4형제를 살려주었다.
유배의 기한이 다 된 다음 유디슈트라는 그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두료다나는 거절했다. 유디슈트라는 자기를 위해서 다만 한 부락과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각각 한 부락씩이면 만족하겠다고 했지만 탐욕에 정신이 빠진 두료다나는 그것조차도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왕실의 장로들이 중재에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인근의 왕국들도 그 싸움에 말려들기 시작해 나중에는 전인도에 미치게 되었다. 양쪽이 다 크리슈나의 도움을 원했지만 크리슈나는 양쪽에 대해 꼭 같은 조건을 내놓고 택하라고 했다. “내 친족 브리슈니스(Vrishnis) 사람들 모두의 도움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 하나만이든지. 그러나 나는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두료다나는 브리슈니스를 택했고 아르쥬나는 크리슈나 자신을 자기의 차부로 택했다.
싸움을 하게 된 곳은 유명한 순례지인 쿠루크쉐트라(Kuru-kshetra) 들이었다.「바가바드기타」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는 여기서 바로 전쟁이 맞붙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은 18일 동안 계속됐고, 두료다나가 전사하고 승리가 온전히 판다바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후 유디슈트라는 인도의 완전한 통치자가 되어 36년간을 다스렸다.
 
이 얘기는 드라우파디와 판다바스가 하나님이 계신 히말라야에 순례를 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 도중에서 왕비와 네 형제가 다 죽는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가진 채 천당에 올라가기에 넉넉하리만큼 온전히 순결치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자 왕인 유디슈트라만이 자기의 충성스런 개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이 천당에 다다랐을 때 모든 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는 그를 보고 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유디슈트라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자기도 천당 밖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자기를 믿어주었고 즐겨 자기를 보호해주었던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을 거친 들에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끈질긴 토론 끝에 마침내 개와 임금이 다 허락되어 함께 들어갔다. 그러자 그 개가 바로 다르마로 나타났다. 이것이 유디슈트라의 정신적 위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 다음 하나 더 있다. 왕이 사방을 돌아보니 하늘에는 그의 죽은 대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과 동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인드라는 그를 데리고 한 음산하고 끔찍한 곳으로 갔다. 바로 지옥구덩이다. 유디슈트라는 “저도 여기 있을랍니다. 제게는 그들이 있는 여기가 곧 천당입니다” 했다. 그때에 그 암흑과 끔찍한 것은 사라졌다. 유디슈트라와 다른 판다바스들은 그 나타나 뵈는 지옥과 천당을 지나 참 하나님의 사심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곧 영생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힌두 종교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다. 말하자면 인도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긴 세월을 두고 인도의 정신적 문화적 지적 정치적 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주어왔고 지금도 주고 있다. 인도의 사상가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기타」의 연대는 보통 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놓여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의 의견은 이것이 본래는「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이것이 편집 된 것이 그 서사시보다 후라는 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이것은 독립적으로 있었던 듯하다.「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쟈야(Sanjaya), 아르쥬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성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쉐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쟈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크리슈나소(Krishna)님은 인도의 그리스도라 부름받는다. 사실「바가바드 기타」와 그 밖에 관계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생애와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의 사이에는 놀랄이만큼 비슷한 점이 있다. 양쪽이 다 전설과 사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는「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을 맛보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적 진리를 찾기 위해「기타」나 산상수훈을 읽는 독자에게 역사적인 크리슈나나 역사적인 예수가 정말 존재했든지 말았든지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기타」의 주된 문제는 크리슈나 개인에게는 있지 않다. 그러나 브라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구경(究竟)의 실재 그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말할 때 어떤 때는 하나의 개인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신 자신으로서 말을 한다.
 
나는 브라만이다.
이 몸 안에 있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니
꺼질 날이 없느니라.
나는 진리요
영원한 즐거움이다.
 
아르쥬나도 크리슈나에 대하는 그의 자세에 있어서 두 가지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택해서 섬기는 비슈누(Vishnu)의 거룩한 화신이다. 아르쥬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자비로운 무지에 의해 그것을 잊어버린다. 사실 그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한 것은 크리슈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계속 하나님과 같이 있는 그 긴장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거룩한 환상을 본 다음 아르쥬나는 우주의 주를 자기가 “친구요 죽을 수밖에 없는 같은 동류로” 대접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한다. 그는 크리슈나에게 엎디어 용서를 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곧 가셔버린다. 다시 그는 잊어버린다. 우리는 예수의 변화의 환상을 보고 난 다음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도 같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오직 한번 말할 뿐이다. 사실로「기타」전편의 이야기는 다 그의 시작하는 한 마디 질문에 대한 산쟈야의 대답이다.
 
「기타」의 우주론
다른 모든 힌두교의 문헌과 마찬가지로「기타」도 분명하게 짜인 체계적인 우주론 위에 서 있다. 이 우주론의 홀로 하나인 중심적인 참 것을 브라만(Brahman)이라 부른다. 곧 실재자이다. 브라만은 총체적인 신성(神性)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우파니샤드」(Upanishad)는 브라만을 존재요 지식이요 지극한 즐거움(existence, knowledge, bliss)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속성(屬性)은 아니다. 브라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브라만은 존재 그 자체다. 브라만은 어진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절대적인 지식이요 절대적인 즐거움이다. 아마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표현방법은 “브라만은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 해서 나중에 현상적인 우주 전체가 다 없어지고 오직 브라만이 홀로 남게 되는 일일 것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체, 모든 물체 속에 다 있다. 신성은 사람 속에도, 쥐 속에도, 돌 속, 번개 속에도 나타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의 브라만은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다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조금도 어떤 다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또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그는 모든 거룩한 성격 곧 사랑, 자비, 정결, 정의, 지식, 참을 가지고 있다.
 
브라만은 절대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브라만이 창조했다거나 파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우주를 창조하고 지지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이슈바라, 곧 브라만이 자기의 능력과 하나가 된 분이다. 이렇게 말함은 반드시 이원론(二元論)은 아니다. 브라만의 능력을 브라만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은 마치 불의 열을 불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과 한가지다. 그러나 철학적 분석이 우리를 그 놀라운 신비 속에 더 들어가게 하지는 못한다. 이슈바라란 생각은 인간의 지능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브라만은 성자들에 의해 도달된 초의식적인 지경에서 체험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지경을 사마디(samadhi) 혹은 신과의 합일(合ᅳ)이라고 한다.「바가바드기타」안에는 이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식별(識別), 정신적 훈련, 명상에 의해서 바깥 세계와의 감관(感官)의 접촉이 온전히 끊어질 때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거기 아트만, 곧 속에 와 계시는 신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모든 신비로운 수양의 하는 방법이요 이날까지 모든 진실한 종교에 의해 가르쳐져온 것이다.
힌두교는 더 나가서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Vishnu)와 시바(Shiva)라 부른다. 브라마는 거룩한 창조의 능력을 표시하고 비슈누는 지지(支持)를, 시바는 분해(分解)를 표시 한다. 시바를 흔히는 파괴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 우주가 파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브라만의 영원한 능력 밑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 영원한 과정은 가능성과 나타남의 두 시대를 번갈아 되풀이하고 있다. 그 돌아가는 바퀴의 끝, 혹은 칼파(Kalpa)가 오면 우주는 분해되어 풀어져 가능성의 시대, 곧 씨의 상태로 들어가서 다음 창조를 기다리게 된다.「기 타」8장에는 이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이 나타남의 시대를 ‘브라마의 낮’이라 부르고 가능성의 시대를 ‘브라마의 밤’이라 불렀다. 이 세계에 살면서 이 바퀴에 속해 있는 모든 산 물건들은 다음에 오는 우주 낮, 우주 밤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나고 또다시 풀어진다. 그러나 이 풀어짐을 결코 신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 산 물건은 다만 자기를 내보냈던 브라만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타나는 때가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그 명칭은 서로 왔다갔다한다.「기 타」에 의하면 이슈바라는 언제나 그가 인간 속에 나고 싶을 때는 프라크리티에서 자기를 위한 몸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으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프라크리티의 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신의 화신이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이다. 사람도 프라크리티와 연합한 아트만이다. 그러나 사람은 프라크리티에 눌려서 미혹(迷惑)되어가지고 자기는 아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트만과 연합한다는 것은 그 미혹을 벗어버리는 일이며 살고 죽음의 길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해탈한 사람은 다시 날 수가 없다. 그는 벌써 프라크리티의 세력 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화신은 절대 그 세력에 속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유자재로 우주에 들고 난다.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나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거룩한 자를 건지기 위해
죄인의 죄를 멸하기 위해
정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 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그때에 성들은 가지가지로 서로 다른 마음과 물체에 따라 이루 헬 수 없는 종류의 배합을 이루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성격은 심령적 물질적 세계에 나오는 그들의 소산물에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성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가령 예 든다면 선성은 햇빛 속에서 우세하고 동성은 폭발하는 화산 속에서, 암성은 화강암덩이 속에서 우세하다.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어떤 때는 이 성이, 어떤 때는 저 성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과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낼 수가 있다. 우리는 동성을 배양함에 따라 암성을 이겨낼 수 있고, 선성을 배양함에 따라 동성을 이겨 낼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지만 구경의 지경은, 선성까지도 초월해서, 성의 위로 성의 저쪽인 아트만에 이르는 일이다.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①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②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③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 대 (五大)라는 지 (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그 체계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표와 같다.
 
                                           프라크리티
 
                                              마하트
 
                                              부디
 
                                            아함카라
 
1.마나스                          2.감각의 5관,행동의 5기                          3. 5탄마트라-5대
 
우리는 물론 현대의 서양 과학의 가설을 인도의 세계 그림에다 억지로 맞추려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그 둘 사이에 어떤 서로 합하는 점이 있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될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물론 절대적인 실재의 관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것은 브라만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또 신비주의자들의 초의식에 대한 주장을 확인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 하는 말은 결국 이런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종류의 체험을 조사해볼 만한 기술을 가진 것이 없다. 당신들이 브라만을 아노라고 할 때는 당신들은 과학 세계 밖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프라크리티와 성을 생각해본다면 과학과 베단타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도 역시 일원론적인 우주를 분명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화학적인 원소들의 각각 다른 결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원소들은 같은 단원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시종일관 이 세계와 하나요 가장 먼 별과도 하나다.
 
과학은 마음과 물질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서나 가능성이 있다. 과학자는 아직은 돌 속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는 그것은 아직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진화의 어느 섬에서 생명이 들어갔다는, 어느 점에서 인격이 갑자기 태아나 유아 속에 생기게 됐다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게 말하기를 진화는 완전히 영속적인 것이요 또 일반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이상이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요 끊임없이 변천해 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방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의 진화적 사명은, 마치 콜룸부스가 알 수 없는 서쪽을 향해 항해를 했듯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가는 일이다. 과학적 견지에서 한다면 인간의 사명은 환경과 자기의 관계에 대한 보다 더 큰 지식을 얻어서 그것을 점점 더 잘 통제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실 그 환경이란 자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쥬나와 과학자는 둘 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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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바가바드 기타」역주서 연구(반양장) | 나혜숙 | 소명출판 - 교보문고

함석헌의「바가바드 기타」역주서 연구(반양장) | 나혜숙 | 소명출판 - 교보문고

함석헌의「바가바드 기타」역주서 연구
반양장
나혜숙 지음 | 소명출판 | 2021년 04월 30일 출간




쪽수 304쪽
크기 140 * 211 * 24 mm /402g 판형알림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종교 > 그외종교 > 힌두교
귀중한 연구 자산 「기타 역주서」 탐구


한국의 철학자이자 종교가 함석헌은 힌두교의 대표적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 역주서를 썼다. 이 책은 그가 쓴 「바가바드 기타」 역주서(이하 「기타 역주서」)를 연구한 책이다. 「기타 역주서」는 ‘인도철학 연구’와 ‘함석헌 연구’ 양쪽에서 소외되어 있었지만 사실 양쪽 모두의 귀중한 연구 자산이다. 먼저, 「기타 역주서」는 「바가바드 기타」에 대해 한국인이 쓴 첫 주석서고, 한국의 기독교인이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역주한 첫 사례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에서 인도의 철학과 종교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사료(史料)에 속한다. 또한 「기타 역주서」에는 한국에는 비교적 낯선 인도철학 및 힌두교 개념들에 관한 함석헌의 생각, 그리고 힌두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종교 다원주의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에 적절한 문헌이다.

저자소개

저자 : 나혜숙
羅惠淑, Ra Haesook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석사), 하버드대학교 산스크리트어와 인도학과(현재 남아시아학과, 박사)에서 수학하였다. 『비교신학 - 종교 간 경계를 넘어 깊이 배... 더보기


목차
들어가는 말
1. 「바가바드 기타」 역주서 2. 「기타」
3. 연구 판본 4. 연구 현황
5. 연구 필요성 6. 밝혀 둘 점
1장 일차문헌
1. 오류와 개선 방안
1) 주석 출처 오류 2) 편집 오류
2. 문제점과 개선 방안
1) 주석 출처의 강조 2) 주석 흐름의 방해
3) 혼란을 줄 수 있는 편집
3. 15쇄의 문제
4. 비평본의 필요성
5. 맺음말
2장 「기타」의 번역
1. 들어가며 2. 여러 번역을 참고
3. 어려운 번역 4. 순우리말 번역
5. 다른 종교ㆍ철학의 언어로 번역 6. 맺음말
3장 「기타」 주석의 인용
1. 인용된 「기타」 주석의 출전
2. 인용된 「기타」 주석의 횟수와 분량
1) 계산 기준 2) 인용 횟수와 분량
3. 주석자 소개
1) 라다크리슈난 2) 간디
3) 데사이 4) 마헤슈
5) 틸라크 6) 프라부파다
7) 힐, 다카쿠스, 바넷, 쯔지
4. 질문들
1) 라다크리슈난과 데사이의 주석
2) 어려운 질문
5. 맺음말
4장 자주自註
1. 글 방식 자주
1) 함석헌이 쓴 주석
2) 함석헌이 썼다고 추정되는 주석
2. 인용 방식 자주
3. 자주의 횟수와 분량
1) 자주의 순위 2) 자주의 횟수와 분량
4. 글 방식 자주의 유형
1) 유형 2) 의견을 피력한 자주
5. 맺음말
5장 하나 됨과 종교 다원주의
1. 종교 다원주의
2. 신관
1) 하나 됨 2) 믿음
3) 믿음은 하나 됨을 하는 일
3. 우주발생관
4. 7.12 주석과 7.21 주석의 구조
5. 질문들
1) 7장 주석에서 두 종교의 하나 됨을 논하는 배경
2) 「기타」와 함석헌 해석의 비교
6. 맺음말
6장 지식의 요가, 행위의 요가, 믿음의 요가
1. 지식의 요가
1) 「기타」 2) 함석헌의 해석
2. 행위의 요가
1) 「기타」 2) 함석헌의 해석
3. 믿음의 요가
1) 「기타」 2) 함석헌의 해석
4. 「기타」와 함석헌 해석의 비교
1) 지식의 요가 2) 행위의 요가
3) 믿음의 요가
5. 함석헌이 각 요가에 부여한 중요성
1) 지식의 요가 2) 행위의 요가
3) 믿음의 요가
6. 맺음말
7장 명상의 요가
1. 마음의 정화 2. 이성적 태도
3. 믿음 4. 맺음말
나가는 말

부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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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귀중한 연구 자산 「기타 역주서」 탐구

한국의 철학자이자 종교가 함석헌은 힌두교의 대표적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 역주서를 썼다. 이 책은 그가 쓴 「바가바드 기타」 역주서(이하 「기타 역주서」)를 연구한 책이다. 「기타 역주서」는 ‘인도철학 연구’와 ‘함석헌 연구’ 양쪽에서 소외되어 있었지만 사실 양쪽 모두의 귀중한 연구 자산이다. 먼저, 「기타 역주서」는 「바가바드 기타」에 대해 한국인이 쓴 첫 주석서고, 한국의 기독교인이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역주한 첫 사례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에서 인도의 철학과 종교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사료(史料)에 속한다. 또한 「기타 역주서」에는 한국에는 비교적 낯선 인도철학 및 힌두교 개념들에 관한 함석헌의 생각, 그리고 힌두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종교 다원주의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에 적절한 문헌이다.

「기타 역주서」의 장점 세 가지

「기타 역주서」를 연구한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장점들이 있다. 첫째, 독자가 「기타 역주서」에 관해 바른 정보를 갖추는 데 도움을 준다. 일차문헌에서 주석 출처가 잘못 표기된 곳, 편집 오류, 편집상 문제점을 제기하고 각각에 대한 개선 방안을 제안한다.
둘째, 함석헌은 자신이 인용한 「바가바드 기타」 주석서들의 출처를 일체 밝히지 않았다. 이 책은 인용된 주석서들의 서지정보를 모두 밝히고, 주석서들 중 무료 전자 텍스트가 있는 문헌은 URL을 소개한다. 그래서 「기타 역주서」에 관심 있는 독자가 맨 처음부터 서지정보를 각자 일일이 알아보는 수고와 시간을 덜어 준다.
셋째, 이 책은 구조와 주제 면에서 「기타 역주서」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구조 면으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이 문헌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안내 역할을 할 수 있다. 주제 면으로는, 힌두 사상과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함석헌의 해석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함석헌 사상을 그 자체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힌두 경전과 사상에 빗대어 사유하는 방식을 통해, 함석헌의 사상을 새롭고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1장은 일차문헌 점검, 2~4장은 구조 연구, 5~7장은 주제 연구다. 주제 연구를 관통하는 함석헌 주석의 요지는 ‘주체적 믿음’이다. 함석헌은 구원의 방법으로 믿음을 말했지만, 그 믿음은 나 밖에 있는 초월적 신에게 열심히 기도만 하면 복을 받고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는 행위가 아니다. 그는 당시 한국 기독교에 만연했던, 초월적 신에 대한 무조건적 신앙을 반대했다. 그 대신, 신이 나 밖에 초월적으로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 내재하는 것을 알고, 나의 노력으로 내 안에 있는 신의 모습을 실현해 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 안의 신을 실현해 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인간의 ‘주체적 믿음’을 강조했다. 함석헌이 주장하는 주체적 믿음에는 ‘신의 내재성’이라는 신학적 측면과 ‘인간의 수행’이라는 실천적 측면이 모두 담겨 있어, 주체적 믿음은 「기타 역주서」의 함석헌 주석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적 믿음’이라는 함석헌의 사상만 놓고 본다면, 「기타 역주서」에서 함석헌의 다른 글들에 보이지 않는 새롭고 독특한 사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타 역주서」가 흥미로운 것은, 그가 주체적 믿음을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주석하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며 주체적 믿음을 이야기하는지, 어떻게 힌두 경전에서 배우는지, 어떻게 힌두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읽는지 하는 구체적 작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은 「기타 역주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동안 「기타 역주서」를 다룬 연구들은 논문 형식이나 책의 한 장(章) 형식이어서 이 문헌을 단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인 함석헌이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주석하며 이 경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모습을 구체적이고 긴 호흡으로 보여 준다. 닫기

알라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2019

알라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지은이)분도출판사2019-04-05





9.6 100자평(2)리뷰(3)
이 책 어때요?

312쪽

목차

1 엑카르트와 현대
 2 엑카르트 해석의 중심 문제들 
3 엑카르트의 시대와 삶 
4 신과 세계: 하나, 존재 
5 신과 영혼: 지성 
6 초탈과 돌파 
7 하느님 아들의 탄생 
8 하느님 아들의 삶


===
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더보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9.6


대신비가의 신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르토 2013-01-20 공감 (2) 댓글 (0)


오랫동안 "찜" 해 두었던 명저 드디어 구매... 만지기만 해도 뿌듯~
밭고랑 2012-07-02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정말 놀라운 책...


마에스터 엑카르트는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놀라운 책이다.

서유럽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내재된 인간의 본성중 신의 영역에 해당되는 지성을 찾기위해서 돌파를 통해서 그 근저까지 내려가서 신을 만나는 체험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마치 불교의 사상과도 흡사해서 마치 빨려들듯 읽어나갔다.

초반부의 개념이해가 어려워서 좀 진도가 안나가는걸 빼고는 뒷부분은 정말 정신없이 빠져들듯이 읽어서 정말 좋은 책인거 같다.

이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신과의 만남,체험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가 신비주의 사상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신비주의중에서는 나와의 개인적 경험과의 접점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저자처럼 '신의 계시'수준은 아니었지만 깊은 성찰을 통한 수련으로 한평생을 산 영적인 거인이 수천년을 건너 시공을 초월해서 오늘날의 나에게 깊은 영감을 준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가르침가운데에서

칭의의 구원만을 강조하면서 어린 신앙의 양산만을 그래서 대형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교회의 모습에 싫증이 나신 분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도 중요하며 구원에는 성화의 구원과 승영의 구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접기
도사 2010-02-2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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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크하르트 입문서


"단언컨대" 최고의 에크하르트 입문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영성 분야가 각광받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반드시 주목해야 할 영성가라고 생각된다. 원서만 읽었을 때 솔직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한글로된 입문서가 출간된지 뒤늦게 알았다. 비교사상상적 관점에서 에크하르트의 사상, 삶, 핵심 주제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해 두었다. 출간된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오랫만에 참 좋은 책을 구입하게 되어 기쁘다.
박사 2013-08-2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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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엑카르트의 초월
Thanks to
러브굿 2010-12-10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언어에 대하여



서양철학사 관련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칸트를 필두로 한 독일관념론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에서 정립된 철학용어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철학사의 흐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이 근대화되던 시기에 독일관념론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한 용어들이 현재 우리나라 언어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는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할 때 독일관념론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그 번역용어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가령, “관념”, “객관”, “인식”, “본질”, “오성”, “이성”, “지성”, “현상”, “경험”, “감각”, “감관”, “의미”, “근거”, “인과” 등등의 낱말들은 길게 역사를 추적하면, 일본 번역어를 거슬러올라가 독일관념론,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그 용어들을 입에 올릴 때 우리의 개념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우리의 개념은 그 체계와 분리된 의미를 띠기 어렵다. 다름아닌 일본 번역어가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에 맞게 번역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이 칸트라는 저수지로 흘러든 뒤 이후의 철학사를 향해 흘렀다는 칸트주의자들의 평가는 과장된 면이 있겠으나, 적어도 그 용어들의 흐름을 고려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성싶다. 그만큼 우리는 그 용어들을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의 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틀은 엄밀히 말해 한 시대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 용어들의 역사성을 밝혀내면서 개념틀을 뿌리채 흔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라이프니츠-볼프 이래의 개념체계, 즉 몇 세기에 걸쳐 서양철학사를 주조했던 개념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현대독일어 문법에 허용되지 않는 희한한 독일어를 남발하는 것은 독일철학 용어로 편입된 언어들을 옛 시대의 의미로 복원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에크하르트는 라이프니츠-볼프보다 약 400년 앞선 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논고에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독일어가 등장하지만,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개념틀 내지 독일관념론의 개념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 때문이다. 바꿔 말해, 에크하르트의 글에 등장하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낱말들은 강단철학에서 협소한 개념체계로 굳어지기 이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다 그의 중세고지독일어(Mittelhochdeutsch)는 현대독일어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언어에 접근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령, “ein lebende wesende istige vernünftigkeit”(이부현은 “살아 있고 본질적이고 존재하는 이성”으로 옮겼다)에서 “wesend istig”(본질적이고 존재하는)라는 낱말들은 현대독일어에서 이미 사어가 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형으로부터 “Wesen”(본질)이라는 명사의 동사가 있었으며, “Sein”(존재)이라는 명사 내지 동사의 형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본질하다”로?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법상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이라는 번역어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협소한 개념에만 적합할 뿐, 그 이전의 언어세계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경우 현대독일어에 남아 있는 “abwesend”(결석하다), “anwesend”(참석하다)라는 분사형을 함께 거론하며 “Wesen”이 원래 동사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본질” 대신에 “임재하다”, “임하다”, “출석하다” 등의 의미로 개념을 복원시킨다. 이렇듯 언어들이 본래의 의미로 회귀하게 되면, 독일관념론같은 개념체계는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체계는 한갓 협소한 시대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독일어의 본래 의미와 함께 움직인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 이래 형성된 개념틀을 깡그리 잊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거의 모두 잊고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따라서 본래적인 이해로 보면 신은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지성이거나 인식이므로, 그러니까 다른 어떤 존재도 섞이지 않은 순수 인식이므로, 그 유일무이한 신이 자신의 인식을 통하여 사물들을 존재 속으로 호출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니라 신 안에서만 존재는 인식이므로. . .

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신의 온 존재는 인식 자체이므로 신은 순수 지성이라는 점이다.

Es ergibt sich also offentlich, daß Gott im eigentlichen Verstande einzig ist. Und da er Intellekt oder Erkennen ist, und zwar reines Erkennen ohne Beimischung irgendeines andern Seins, so ruft dieser einzige Gott durch sein Erkennen die Dinge ins Sein, eben weil in ihm allein das Sein Erkennen ist . . . Er wollte und lehren, daß Gott reiner Intellkt sei, dessen ganzes Sein das Erkennen selbst ist.

— Josef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24면

위 인용문에서 “신은 지성”, “신은 인식”, “신은 순수 인식”, “신의 존재는 인식 자체”, “신은 순수 지성” 등의 표현을 현대적인 개념틀로 파악한다면 십중팔구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중층적 몰이해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중층적인 몰이해를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의 독자들을 위해서, 물론 그런 독자들은 소수이겠지만, 그래도 각 용어들에 대하여 엄밀히 번역해야 한다. 가령 우리말의 자연스런 가독성을 위해 “Intellekt”, “Vernunft” 등을 일괄적으로 “이성”으로 번역한다거나, “Vernunft”의 번역어로 “지성”이나 “이성”을 번갈아 채택한다거나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부현의 번역은 이런 착오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착오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의 일관되지 못한 번역어 채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나중에 이부현의 번역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개념들, 즉 “순수 인식”, “인식 자체”, “순수 지성”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그 개념들의 변천사를 면밀히 검토한다하여 그 의미가 포착될 리는 만무하고, 우선은 자신이 그 개념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미를 모두 털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에크하르트의 직접 경험을 시사하는 암시의 언어일 뿐, 사상 체계를 확립하거나 분석하는 치밀한 논리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역시 경험이다. 성실한 책읽기와 분석을 요구하는 언어가 있는 반면, 고도의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언어도 있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바로 후자의 언어이다. 남녀의 감정놀음인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판에,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사태를 가리키는 언어를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신비가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언어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혀 사용한다. 그는 당대의 언어는 물론 당대의 사상적 체계조차도 자신의 경험 뒤에 따라오는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가벼운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흔들린다는 의미에서 그 언어는 극한에 이른다. 바로 이 의미에서, 니체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나 비유가 어느 사상체계나 어느 감각세계 내에서 그 구조에 맞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신비가의 경험에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수법들, 모든 표현들, 모든 사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구조 자체가 이미지요 비유가 된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영원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그런 형이상학적 언어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의 심리를 폭로하는 실마리, 즉 일종의 비유나 이미지 같은 것, 심리학적 언어가 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현실은 (혹은 현실이라고 믿는 그 무엇은, 혹은 철학자들이 몸담은 사상체계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또 다른 그림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와 실제, 비유와 사실 간의 복합적 관계가 혁신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가의 언어라는 언어는 모두 이미지나 비유나 상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면에 가깝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이미지나 심리의 연상을 따라가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은 그림자 놀이이므로), 사상서들을 읽을 때는 추론이나 논변, 논리를 따라가면 그 귀결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 역시 그림자 놀이이므로), 신비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면 필연적으로 그림자에 속아넘어가 좌초하게 될 것이다(그것은 그림자 놀이가 아니라 그림자 바로 그것일 뿐이므로).

가면은 가면 뒤에 얼굴이 있다는 것만 알릴 뿐, 얼굴을 묘파하지 않는다. 가면과 얼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 이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 한,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폐되지 않은 진리, 즉 신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도래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설교 32

그의 강론, 그의 언어는 그림자와 그림자가 긴밀히 연계되는 그림자 놀이가 아니다. 그의 언어는 찰나찰나 흔들리는 그림자, 찰나찰나 명멸하는 그림자, 순수한 그림자다. 진리를 가장 덜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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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 2009-07-15 공감 (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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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신비 신학자요 수도자였던 에크하르트. 기도만 할줄 알았는데 그의 관한 책이 적지 않다. 안셀무스가 논리적 신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면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그의 관한 책을 일단 찾아 놓고 조금씩 정리해 나가자.


에크하르트의 책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아직 영어로는 많이 번역되었지만 한글로는 몇 권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서적이 더 많다. 일단 독일어 논고와 설교1이 보이고, 선집이 한 권보인다. 이 세권부터 사는 것이 우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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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7-12-13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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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1

알라딘: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 | SNUP 동서양의 고전 13 길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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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  | SNUP 동서양의 고전 13  
길희성 (옮긴이)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3-06-20
원제 : Bhagavadg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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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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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바가바드기타>는 독립적인 책으로 읽히지만 실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서, 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 스리 크리슈나의 경전이다. 
도합 18장 700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절은 범어 32절로 짜여 있다. 
<기타>의 핵심 사상은 요가에 있으며, 그 내용은 크리슈나가 전쟁을 앞둔 주인공 아르주나의 고뇌에 응답하는 설교로 구성된다.


목차

Ⅰ. 아르주나의 낙심 arjunavi?ada-yoga
Ⅱ. 이론의 요가 s??khya-yoga
Ⅲ. 행위의 요가 karma-yoga
Ⅳ. 지혜의 요가 jn?na-yoga
Ⅴ. 행위의 포기 요가 karmasa?ny?sa-yoga
Ⅵ. 명상의 요가 dhy?na-yoga
Ⅶ. 지혜와 통찰의 요가 jn?navijn?na-yoga
Ⅷ. 불멸의 브라만 요가 ak?arabrahma-yoga
Ⅸ. 으뜸 지식과 으뜸 비밀 요가 r?javidy?r?jaguhya-yoga
Ⅹ. 현현의 요가 vibh?ti-yoga
?. 만유의 형상을 알현하는 요가 vi?var?padar?ana-yoga
?. 신애의 요가 bhakti-yoga
ⅩⅢ. 밭과 밭을 아는 자를 구별하는 요가 k?etrak?etrajnavibh?ga-yoga
ⅩⅠⅤ. 세 요소를 구별하는 요가 gu?atrayavibh?ga-yoga
ⅩⅤ. 지고의 인격 요가 puru?ottama-yoga
ⅩⅤⅠ. 신적 운명과 악귀적 운명을 구별하는 요가 daiv?surasa?padvibh?ga-yoga
ⅩⅤⅡ. 세 가지 믿음을 구별하는 요가 ?raddh?trayavibh?ga-yoga
ⅩⅤⅢ. 해탈을 위한 포기의 요가 mok?asa?ny?sa-yoga

추천글
인도의 지혜 - 헤르만 헤세 (소설가, 시인) 


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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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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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도의 ‘위대한 영혼(mah?tma)’ 간디는 영국 유학 시절 에드윈 아놀드 경의 『바가바드기타』의 영문 번역서(The Song Celestial)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고전을 평생 자기 삶의 확고한 지침서로 삼았다. “『기타』는 나의 행동의 틀림없는 안내자가 되었으며, 모르는 영어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듯이 나는 나의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해결하기 위해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아보았다.”고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다. …… 현대 힌두교를 만든 것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힌두교 개혁가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전통에 자긍심을 불어넣고 그들의 정신적 정체성 형성에 주춧돌로 작용한 책, 그리하여 힌두교의 바이블처럼 숭앙받는 책이 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 힘입어 『기타』는 현대 인도인뿐 아니라 전 세계 지식인과 종교인의 사랑을 받는 고전이 되었다." - ‘해설’중에서 발췌

『바가바드기타』는 독립적인 책으로 읽히지만 실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서, 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avatara) 스리 크리슈나의 경전이다. 도합 18장 700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절은 범어 32절로 짜여 있다. 『기타』의 핵심 사상은 요가에 있으며, 그 내용은 크리슈나가 전쟁을 앞둔 주인공 아르주나의 고뇌에 응답하는 설교로 구성된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