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1

샹카라 - 위키백과, シャンカラ

샹카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샹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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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카라

샹카라는 8세기 인도의 철학자이다. 그는 남부 인도에서 출생하여 베다를 학습하고 유행자(遊行者)로서 여러 지방을 편력하면서 다양한 기적을 행하였다. 또한 승원을 건설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저술하였고, 최후에 북부 인도에서 영면하였다고 한다.

그는 <브라흐마 수트라 주해(註解)>를 비롯한 책을 저술하였으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절대자 브라만은 여하한 한정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무차별의 실재이며, 최고아(最高我)라고 주장한다. 개아(個我)는 그 본체에 있어서는 최고아와 동일한 것이다. 누구든지 아트만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데 그 아트만은 브라만임에 틀림이 없다. 

  • 그러나 브라만이 현실의 경험 세계에서 개별적인 다수의 개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명(無明) 때문이다. 그것은 각 개아(個我)를 자기중심적인 행동주체로 성립시키고 있는 선천적 원리(先天的 原理)이다. 
  • 그것은 순수지(純粹知)를 현혹하여 혼미시키는 작용이 있으며 윤회의 원인이 되고 있다. 
  • 현상계의 다양상(多樣相)·차별상(差別相)도 무명(無明)에 의하여 성립하고 있는 것이요, 
  • 승의(勝義)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은 환상(마야)과 같은 것으로 거짓으로 나타나고 있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 세계창조는 주재신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지만, 주재신은 브라만이 무명(無明)의 제약을 받고 성립한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무명(無明)은 유(有)나 무(無)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브라만에 따라서 존립하고 있는 일종의 원리이다. 
  • 이 무명은 아트만의 본성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소멸한다. 개아(個我)가 사실은 최고아(最高我)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해탈 즉 일체의 고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된다.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있어서 개아는 브라만과 합일하여 그 개별적인 존재를 잃는다.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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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シャンカラ  샹카라

샹카라

초대 샹카라 (आदि शङ्कर , Ādi Śaṅkara , 700 년경 - 750 년경 )는 말라얄리인 의 8세기 에 활약한 중세 인도 의 사상가. 不二一元論 어드바이터 )을 제창했다.

개요 편집 ]

'하느님의 발족 교사'로 알려진 그는 어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곳의 브라프만 (梵)과 아트맨 (우리)은 동일하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1] . 스마트라의 전통에서 인도 신화 에서 샹카라는 시바 신의 별명이다.

샹카라는 강의와 다른 철학자와의 논의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인도 각지를 여행했다 [1] . 그는 포스트 불교 로서의 힌두교 와 어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포교 역사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4 개의 스님을 설립했다.

오늘날에도 모든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산스크리트 로 쓰여진 그의 저서는 어드바이터(비이원성)의 교리를 확립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300점을 넘는 저작이 샹카라에 의해 되돌려지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위작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1] 

주요 저작은 베단타 파의 근본 성전에 대한 현존 가장 오래된 주석 ' 브라흐마 수트라 주해'이다 [1] . 이 밖에 샹카라의 진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에는 『브리하드 아라냐야카』 등 고우파니샤드에 대한 주해가 있다 [1] . 샹카라는 가르침을 설교할 때 우파니샤드 와 다른 힌두교 경전의 광범위에서 인용을 했다. 독립된 저작물로 그의 진작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 우파데이샤 서허슬리 '가 있다. 이것은 잔키야 학파 나 불교에 가까운 입장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반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샹카라는 베단타 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지만, 그 사상은 불교와의 친근성이 높다고 한다 [2] .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불교 철학을 베단타 철학에 흡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요점 검증 ]


샹카라는 해설서에서 불교 의 많은 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직접적인 불교 비판은 '브라흐마 수트라' 2.2.32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요컨대, 바이너시파(불교도 ) 의 교리는, 그 신빙성을 검토할 때마다, 모래상의 누각과 같이 무너지고, 그러므로 신빙성이 없다. 석가 는 무상 , 세츠나 , 하늘 이라는 서로 모순 되는 세 가지 교리를 설교했다. 석가는 민중을 미워하고 있거나 민중을 속이기 위해 모순된 교리를 설교하고 혼란스러운 말을 내고 있는 것이다. 석가 의 교리는 해탈을 바라는 자에게는 존경할만한 가치가 없다 [3] .

샹카라는 힌두교에서는 " 아트맨 (영혼, 자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4] [5] [6] .

몇몇 학자들은 샹카라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은 수세기 후 특히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그 결과로서 인도  황폐 시대에 높아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7] [8] . 샹카라의 전기의 대부분은 14세기 이후에 집필·출판되고 있어 널리 인용되고 있는 비디야나의 「샹카라・비자야」등이 있다.

평생 편집 ]

슈링게리의 샹카라 총총산

전설 에서는 인도반도 남부의  랄라 주 칼라디 영어판 ) 의 땅에서 남부디리라는 바라몬 계급 의 아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전설에서는 「시바 신의 화신」으로서 그려져 있다 [9] . 어린 시절에 아버지 를 잃고, 5세 때 베다 성전 학습의 입문식을 받고, 7세 때에 스스로 학습을 마쳤다. 이 시점에서 이미 모든 사람의 상태에 도달했다고합니다 [9] . 결혼하지 않고 [9] 출가 하고 고빈다 에게 사사했다 [1] . 그 후, 상술한 바와 같이, 전 인도를 유행을 위해 여행하고 있어 그 가운데 파드마파다, 하스터 마라카, 토타카 찰리야, 발티카카라라는 4명의 제자를 얻었다.

샹카라는 정통적인 바라몬교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승원 을 건립한 인물이다. 샹카라는 동서남북에 4개의 승원을 창설해 4명의 고제를 각각 배치했다. 베단타파의 승원은 현재 인도 의 각지에 있는데, 총본산은 카르나타카주의 슈링게리 샤라다 피섬[요요한 모호함 회피]에 있으며, 그 외 동부의 풀리, 서부의 드 바라카 [ 주석 1 ] , 히말라야 산맥 지방  배들 리트 , 타밀 나두 의 칸치 에 주요 승원이 세워져 있다 [1] .

4개의 스님의 법주의 자리는 현재는 「샹카라 아처리야 의 자리」라고 불리며, 베단타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면 그 자리에 붙지 않기 때문에, 공좌가 되는 경우도 많다. 샹카라 아처리야(아처리야는 '선생님'의 뜻)는 직역하면 '샹카라(의)선생님'이 되며, 초대 샹카라를 나타낼 때에는 아디('초대'의 뜻)를 붙여 구별한다. 샹카라 아처리야는 우파니샤드 성전 의 진리를 체득한 성자로서 샹카라의 화신으로서 존경과 신앙을 모아 현재 인도에서도 큰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 [9] .

샹카라는 전설에서는 히말라야 지방의 케이더 르나타 땅에서 입멸 했다고 한다 [1] [주석 2] .

사상 

베단타 철학의  不二一元論 후지일 원론의 입장을 확립한 인도 최대의 철학자 샨카라는,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곳의 브라프만과 개인의 본체인 아트맨은 본래 동일하다고 주장 했다 [ 2 ] . 상술한 바와 같이, 불교 사상으로부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가면의 불교도」라고 불리는 일이 있다 [2] . 샹카라가 눈에 띈 것은 윤회 에서 의 해탈 이며, 그 수단은 바라몬교의 경전 『베다』의 주석서(오의서)인 『우파니샤드』가 전하는 우주  근본 원리인 브라프만(梵)과 개체 의 본질인 아트맨(아)과는 본래는 동일하다는 지식 이다 [1] . 현실의 일상 경험이 이 진리와 모순되는 것은, 이 지식 을 회득하지 않는 무지(무명)에 의하면, 육체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 세계는 무명에 의해 브라프만에 부탁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그리고, 본래 실재하지 않다고 설해 환영주의적인 일원론(불이일 원론)을 주창했다 [1] .不二一元論은 현대에 이르기도 인도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는 교설로 알려져 있다 [1]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 도바라카는 서사시 ' 마하버라타 '에 시슈파라 에 의해 회귀에 돌아온 마을로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향년은 32와 38이라고도 한다. 마에다(2004)

찾아보기 편집 ]

  1. l 마에다 (2004)
  2. ↑ a 말목 (1996) pp.12-13
  3. ↑ “ ब्रल्मसूत्र | Gita Supersite ”. 2016년 2월 15일에 확인함.
  4.  Edward Roer (Translator), to Brihad Aranyaka Upanishad . Shankara's Introduction - Google 도서
  5.  KN Jayatilleke (2010),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ISBN  978-81-208-0619-1 , p. 246–249, from note 385 onwards;
    Steven Collins (1994), Religion and Practical Reason , David Tracy), State Univ of New York Press, ISBN 978-0-7914-2217-5 , p. 64; Quote: "Central to Buddhist soteriology is the doctrine of not-self (Pali: anattā, Sanskrit: anātman, the opposed doctrine of Ātman is central to Brahmanical thought). Put very briefly, this is the [Buddhist] doctrine that human beings have no soul, no self, no unchanging essence."; Edward Roer (Translator) Shankara ' Katie Javanaud (2013), Is The Buddhist 'No-Self' Doctrine Compatible With Pursuing Nirvana? , Philosophy Now; John C. Plott et al. (2000), Global History of Philosophy: The Axial Age, Volume 1, Motilal Ban , ISBN 978-81-208-0158-5 , p. 63, Quote: "The Buddhist schools reject any Ātman concept. As we have already observed, this is the basic and ineradicable distinction between Hinduism and Buddhism" 


     
  6.  Edward Roer (Translator), Shankara's Introduction , p. 3, - Google 북 to Brihad Aranyaka Upanishad at p. 3, OCLC 19373677 
  7.  Paul Hacker, Philology and Confrontation: Paul Hacker on Traditional and Modern Vedanta (Editor: Wilhelm Halbfas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ISBN 978-0-7914-2582-4 , pp. 29–30 
  8.  R. Blake Michael (1992), The Origins of Vīraśaiva Sects, Motilal Banarsidass, ISBN 978-81-208-0776-1 , pp. 60–62 with notes 6, 7 and 8 
  9. d 시마이와 사카타 사다지 편 『성자들의 인도』 춘추사, 2000년

출처 편집 ]

  • 스에키 분미사「일본 불교사-사상사로서의 어프로치」신시오샤신시오 문고〉, 1996년 9월. ISBN 978-4-10-148911-7 . 
  • 마에다 전학 저 「샹카라」, 쇼가쿠칸 편 「일본 대백과 전서」 쇼가쿠칸〈슈퍼 니포니카 Professional Win판〉, 2004년 2월. ISBN 4099067459 . 
  • Fowler, Jeaneane D. (1997), Hinduism: Beliefs and Practices , Sussex Academic Press
  • Fowler, Jeaneane D. (2002), Perspectives of Reality: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Hinduism , Sussex Academic Press
  • Long, Jeffrey D. (2011), Historical Dictionary of Hinduism , Scarecrow Press

일본어 문헌 편집 ]

전문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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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0

호사카 유지 영화 ‘파묘’가 반일영화니

고대사연구 - 호사카 유지 교수님의 글… 그닥 관심이 없었는데 보고 싶어졌다. 이번 주말에 한번 도전해봐야겠다.... | Facebook

고대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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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교수님의 글…
그닥 관심이 없었는데 보고 싶어졌다.
이번 주말에 한번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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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가 반일영화니 좌파영화니 민족감정을 악용한다는 기이한 비판이 나왔지만 
관객수 600만을 넘었으니 나도 보러 갔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감독은 일본의 음양도를 제대로 공부한 훌륭한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당히 일본문화가 녹아 들어 있는 영화였다. 

우선 영화에는 악지에 묘지를 만든 키쓰네(=여우)라는 일본 스님이 언급되는데 그 키쓰네 스님은 음양사였다고 설명되었다. '파묘'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음양사'다

음양사란 일본역사에서 6세기쯤 백제로부터 전래된 음양오행설을 설파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일본 왕조에 들어가 국가기관을 만들어 점을 보기도 하고, 땅의 길흉(풍수)을 보고, 천체관측, 달력작성, 날의 길흉판단 등을 직무로 했다.     
이후 음양사들은 일본의 신도나 불교를 이용해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일본 왕조나 무사정권에서 중요한 역직을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역사에서 음양사, 음양도는 사무라이시대가 끝나 근대화된 일본이 시작된 후에도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일본중앙정부의 체계화된 역직이었다.

그런 일본의 음양사들(=여우들)이 범(=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고 영화는 주장한다. 이것은 음양사들이 조선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땅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의미다. 

쇠말뚝은 한반도의 명산 여러곳에서 발견되어 한때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쇠말뚝은 일제가 한반도의 기운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개발을 위해 박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영화 '파묘'는 그런 쇠말뚝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시켰다. 
예를 들어 북한산(삼각산)의 정상에는 26개나 쇠말뚝이 한곳에 박혀 있었다고 그것을 기억하는 강북구의 전 공무원이 증언한다.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나 헝겁 등에 쇠말뚝을 박아 저주하는 방법은 일본에서 음양사들이 자주 사용한 저주방법 중 하나였다. 

영화 '파묘'에서는 음양사는 스님의 모습을 빌려서 키쓰네(=여우)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일본에서 음양사들은 불교나 신도를 저주를 버풋기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불교의 경전 중 반야심경을 독경하면서 그 독경의 힘으로 상대를 저주하는 것이 음양사들의 유명한 수법이었다. 영화에서도 무사 귀신이 독경을 했는데 그것이 반야심경인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반야심경은 상대방의 저주를 막아내는 힘도 있기 때문에 김고은, 최민식, 유해진 등이 몸에 반야심경을 써서 무사 귀신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파묘'의 감독은 일본의 음양도와 불교(=밀교), 신도 등의 융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훌륭하게 영화 속에 녹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군부는 음양사들을 시켜 저주의 힘으로 미영 연합군이 불타서 전멸하도록 매일 열렬하게 저주를 올리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저주는 결국 잘못저주를 사용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성질이 있어 일본은 도쿄대공습,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상징되듯 반대로 비참하게 불에 타 버렸다. 음양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잘못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와 반대로 저주를 받는다는 일본 음양도의 역습을 스스로 체현한 것이 당시의 일제였다. 

즉 일제는 1945년 패전까지 음양사들을 국책에 동원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에 음양사들(=여우들)이 조선침략(1592-1599)과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1600)를 통해 만명을 베어 죽여 신이 된 일본 무사 귀신의 미라에 쇠말뚝을 넣어 한반도(=범)에 허리 부분에 그 귀신을 박아넣아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려고 했다는 게 '파묘'의 모티브 중 하나다. 

그리고 그런 일제의 저주를 풀어서 한반도의 진정한 해방을 성취해야 한다는 게 영화 '파묘'가 말하고 싶은 주제라고 나는 이해했다. 영화에서는 무사 귀신이 두 번 큰 불덩어리가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원래 일본의 유령은 불덩어리가 되어 주변을 날아다닌다. 그런 영혼의 모습을 '파묘'에서는 노여움으로 불탄 정령으로 표현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영화처럼 음양사들을 시켜 한반도에 주술적 공작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때 음양도는 일본의 국책이었으니 말이다. 
영화에서 귀신이 말했다. "자신은 남산의 조선신궁에 묻혔어야 했는데 음양사들이 나를 이런 것에 묻었다." 만명을 베어죽여 신이 된 자신은 당연히 조선신궁의 신이 되어 조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데 자신을 이상한 곳에 묻었다고 주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