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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3

일본퀘이커 전국 온라인 모임 사진가 모모이 스라이드 쇼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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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걸어 체감하는 지구 안전보장













 




































[일본퀘이커] 일본퀘이커 온라인 모임에 처음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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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이때에 모여 강연회같은 것을 하는데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하게되어, 오히려 나같이 호주에서도 참석하게 되었다.
- 강연 객은 퀘이커는 아니나 개신교도인 것 같은 사진가  모모이 카즈마 씨. 검색해보니 (1962 년 생, 사진 작가, 논픽션 작가, 恵泉 Keisen여학원 대학 특임 교수, 지금까지 세계 140 개국을 취재하고, "분쟁" "지구 환경", "종교"등을 기축으로 문명론을 펼친다.)고 되어있다. 
- 이번 강연의 제목은 <세계를 걸어 체감한 지구안전보장>이다. 이야기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티아고 이야기는 이제까지 너무 많이 듣고 읽어서, 그런 이야기 또 다시 들을 가치있을까 하며 듣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고개를 조금 갸우뚱 거리면서 들었는데, 나중에는 들을 가치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며 끝냈다. 
- 내가 이 온라인 모임에 참석하려는 이유는 강연을 듣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었다. 일본의 퀘이커를 몇년 전에 방문하고 난 후로 접촉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온라인이라도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줌미팅에는 내 영상 이름 옆에 호주라고 써 놓아서 그걸 보고 기억할 것이라고는 생각했는데, 강연이 끝나고, 몇명에게 소감을 이야기하라고 하는 중에 나를 포함시켜 놀랐다. 일어로 말을 할 기회가 몇년에 한번 정도로 드믈어서, 나의 일어가 제대로 나올까 걱정이었으나 몇마디라고 하게 되어서, 여러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게 생겼다.
- 모모이 상의 강연의 <들을 가치>에 대하여 기록해 놓는다. 강연은 사진 중심의 슬라이드쇼로 진행되었는데, 대학 학생들과 여러번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를 해 왔다는 것 부터 시작한다. 
- 2010년 부터 5회. 제1회에는 150키로를 걷고, 제 2회, 제 3회에는 2개월에 900(?)키로를 걷다. 제 4회였던 2021년에는 2월에 코로나 때문에 걷기 여행이 스페인까지 가서 취소되어 돌아왔다. 
- 산티아고의 순례길은 9세기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성 야고브의 유해가 발견된데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곳에 중세에 대 성당이 생겼다. 모모이 상은 사진가처럼 공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스페인에서는 성서는 오래동안 금지되었는데 (?), 성당이 중요했다고 한다. 성당의 의미는 (종교적) 체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 건물의 디자인이 중요하다. 창뭉의 위치도 중요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이욯하도록 디자인 되어있다. 그저 어둡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광선을 의식에 체험하도록 만들어저있다고 한다. 성당 안에서 빛의 광선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교회안의 먼지나 촛불의 연기등이라고 한다. 
- 그 다음 이야기는 학생들이 너무 걸어서 발에 물집이 생기고, 뒷꿈치가 까지고 하는 이야기와 순례길의 경제적인 숙소, 순례길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로컬 볼룬티이어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 3 에피소드 이야기를 할 때 나의 조금 졸린 눈이 퍼덕 깨었다. 사진 3에 나오는 학생은 일본에서 태어난 필리핀인 학생인데 이 순례길 방문이 이미 세번 째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걷는 동안 걷는 운동화의 창이 떨어저 버렸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는 스페인 볼룬티어가 그 학생을 불러 구두 가게에 대려가 운동화를 사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사진의 왼쪽 중년 남자). 또 한가지 경험은 한 학생이 스마폰을 이디에서인가 떨어트렸다고 한다. 그걸 로컬 볼룬티어에게 이야기 했더니 일주일 후에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사진 4의 남자).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모모이 상이 어느 볼룬티어를 보았을 때 이미 여러번 보았으니 인사를 했는데, 몇년도 몇월에 보았지 했더니, 그 달이 아니고 다른 달이라고 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기는 휴가 대 볼룬티어 일을 하니까, 자기가 휴가가 아닌 달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휴가 때 자기를 위해 쉴려고 하지 않고, 순례길에서 볼룬티어 일을 한다니 인상깊다는 모모이 상의 관찰이다. 
- 산티아고 순례에서 사람들과 이런 만남을 가지니, 그러니 우리가 스페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인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 방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하고 생각하게된다.) 모모이 상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이렇게 이런 사람들을 만남이 군대를 가지는 것보다 <안전보장>을 가저온다는 이야기 이다. 스페인의 순례길은 현재로는 방문객이 일년에 30만인데, 그것이 이런 로컬 볼룬티어들의 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로컬 정부와 세금들으로의 인프라 정비는 필요하겠지만. 
- 일본 퀘이커를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라서 그런지, 중간에 일본퀘이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니토베 이나조 이야기가 나온다. 잘은 못들었는데. 1930년대의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비행기에 의한 게르니까 도시 공습이 있었는데, (아마 프랑코 파시스트 정부에 의한?), 당시 국제연맹에서의 중요 인물이었던 니토베가 뭔가 평화를 가저오는 역할을 했다는 것 같다. (이건 나중에 더 찾아보기로).
- 또 하나의 이야기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 되어있는네, 일본의 시코쿠의 순례길에서도 세계유산에 등록하려고 운동을 하고 있지만, 시코쿠의 그런 움직임의 내막을 드려다 보면 돈을 벌려는 생각이 우선이라는 비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정신이 업다는 이야기이다. 
- 하여간 강연이 끝날 무렵에는 모모이 상에 대한 나의 평가가 상당히 올라가게 되었다. 




























































2021/09/04

[[알라딘: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알라딘: 영원의 철학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은이),조옥경 (옮긴이),오강남 (해제)
김영사 2014-07-14
원제 : The Perennial Philosophy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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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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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제_ ‘영원의 철학’으로 세계 종교의 심층을 보다

들어가며

01 그대가 그것이다
여기에 그분 말고 누가 있겠나

02 근본바탕의 성질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생겼다

03 성격, 거룩함, 신성한 화신
동일시를 통해, 은총을 통해

04 세상 속의 신
그러나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리라

05 최고의 사랑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긴다

06 고행, 비집착, 올바른 생계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용하기

07 진리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두루마리가 진짜 경전이다

08 종교와 기질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09 자기이해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긴다

10 은총과 자유의지
그대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

11 선과 악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의 자아를 보라

12 시간과 영원
어떻게 시간적 상태가 비시간적 상태와 공존할 수 있을까

13 구원, 해방, 깨달음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어야 한다

14 불멸과 존속
어디로도 가지 않고,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 자

15 침묵
갈망과 혐오의 목소리를 고요하게 잠재우는 일

16 기도
제 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기도하소서

17 고통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18 믿음
믿음은 극락으로 이끌지만, 다르마는 니르바나로 이끈다

19 신은 조롱받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20 종교로 인해 짓는 죄
가장 근본적인 속박의 원인은 잘못된 믿음과 무지

21 우상숭배
진리와 정의가 새로운 우상이 될 때

22 감정에 호소하기
정서와 느낌의 우상숭배는 대가를 치른다

23 기적
영혼과 신 사이에 드리워진 방해물

24 의식, 상징, 성찬식
영원으로 통하는 문인가, 속박의 도구인가

25 영적 훈련
새로운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약의 사용법

26 끈기와 규칙성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27 묵상, 행위, 사회적 유용성
무엇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가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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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3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P. 76 근본바탕에 대한 직접적인 앎은 합일union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으며, 합일은 오직 ‘그것’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있는 장벽인 이기적인 에고를 소멸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P. 136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P. 140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 드 코사드

이것은 《신심명》에서 간택함을 꺼리고 망령된 견해를 쉬며, 꿈이 사라지고 진리가 스스로 명백하도록 눈을 뜨면서, 지극한 도道를 따르는 것과 똑같다.  접기

P. 150 사랑은 확실하다.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 윌리엄 로

P. 244 그대의 영리함을 팔아서 당혹감을 사들여라.
영리함은 의견일 뿐이지만, 당혹감은 통찰이다. - 잘랄루딘 루미

P. 44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선을 인식하고, 우리의 영원한 근본바탕으로 돌아가서 비록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항상 존재했던 곳에 머물러있음으로써, 구원받고 해방되며 깨달음을 얻게 된다. - 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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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40년 가까이 애장하며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고 인용하는 책이다. 캐나다에서 대학 상급반 교과서와 주요 참고도서로 활용할 정도다.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종교의 심층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이번에 김영사를 통해서 한국어로 나오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신학적 제국주의를 충격적으로 일깨워준 책. 올더스 헉슬리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 오강남 (종교학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 

봉우리는 하나뿐이되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으리라. 루미,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자가 남긴 침묵의 언어가 한데 모여 있다. 종교에 대해서 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삶과 예술과 진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 즉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과 한없는 겸손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쏘시개로 자아를 불태우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원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그 불씨를 나눠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 김연수 (소설가) 


“세상에 꼭 필요한 책, 마스터피스!”
- 뉴욕 타임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그 신비주의 사상가들로부터 헉슬리가 이끌어낸 종교 사상의 핵심적 통합.”
- 워싱턴 포스트 
“이 책은 문화·종교·영성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출발점이 어디이건 진리를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 가디언 

“이 책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위대한 디딤돌이자 개별 탐구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제시한다. 매우 포괄적인 추천 도서 목록을 포함한다.” - 아마존 리뷰 

“이 책을 사라. 읽고 또 읽으라.
장담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홉 번째 읽고 있지만 여전히 이 책을 사랑한다.” - 아마존 리뷰 
“시간을 초월한 고전.” - 허핑턴 포스트 


 - 조선일보 북스 2014년 8월 2일자 '책 속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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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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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그는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의 밸리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더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1년에는 『크롬 옐로(Crome Yellow)』를 발표해서 당대의 가장 재치 있고 이지적인 작가라는 평을 들으며 위치를 굳혔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6년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1958년에는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미래 문명사회 비판론인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그는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불멸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 『루덩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섬(Island)』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멋진 신세계>,<멋진 신세계>,<소담 고전 명작 시리즈 세트 - 전5권> … 총 86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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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경 (옮긴이)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도 뿌나대학교에서 요가심리학을 수학했다. 인도 아엥가센터와 미국 히말라야연구소에서 요가 수련을 했고,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심신통합치유학과 교수이자 한국요가학회 회장이다. 역서로 《통합심리학》(학지사, 2008) 《마음챙김을 위한 요가》(학지사, 2009, 공역) 《웰니스를 위한 비니요가》(학지사, 2011) 《영원의 철학》(김영사, 2014) 《요가를 통한 심리치료》(학지사, 2015, 공역) 《켄 윌버의 신》(김영사, 2016, 공역) 등이 있다. 의식의 변용과 확장을 위해 요가 수행을 기반으로 한 몸-마음-영성의 통합적 건강 및 성장 패러다임을 연구하고, 지도하며, 임상적으로 적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요가심신테라피>,<불교와 심리>,<바디워크 테라피> … 총 2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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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해제)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종교 너머, 아하!”(공저)가 있으며,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아하! 오강남 교수가 속담에서 건진 작은 깨달음”,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최근 “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을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예수의 기도”, “마지막 강의”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코로나 이후 예배 설교 미래 리포트>,<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나를 찾아가는 십우도 여행> … 총 64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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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가 이끌어낸
모든 위대한 종교의 공통 핵심!”
시대를 초월한 영성의 고전,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념비적 저서가 부활하다!

봉우리는 하나뿐이되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으리라. 루미,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자가 남긴 침묵의 언어가 한데 모여 있다. 종교에 대해서 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삶과 예술과 진리를 하나의 봉우리로 이끄는 단 하나의 방법, 즉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과 한없는 겸손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불쏘시개로 자아를 불태우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원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그 불씨를 나눠준다는 데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_김연수 (소설가)

‘영원의 철학’이란 ‘모든 위대한 종교의 본질적이고 공통된 핵심 진리’로서, 세계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인간관·윤리관을 말한다. 고도로 발달된 종교 및 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라는 표현 자체는 16세기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Agostino Steuco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19세기 초월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와서 올더스 헉슬리의 이 책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에 의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드디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올더스 헉슬리는 엄청난 양의 종교적 가르침들을 낱낱이 검토하고, 문학·역사·철학·심리학·과학·예술 등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유산에서 진리의 조각들을 모아, 그 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된 핵심을 발견하여 빛나는 모자이크를 보여주었다. 바로 그 올더스 헉슬리의 혁명적 영성 고전 《영원의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이 국내 최초로 김영사에서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변치 않는 불멸의 가치를 찾는 이들에게 전설처럼 언급되어왔다.
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1945년 출간 이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인용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동서양의 종교와 심리학을 독창적으로 통합시킨 유명한 사상가 켄 윌버Ken Wilber가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승·철학자·사색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이를 즐겨 언급하고 통합사상의 기본 전제로 삼으면서 21세기에도 그 깊이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안목은 27개 주제 속에 배치한 멋진 인용문들을 통해 절묘하게 드러나며, 해설에서 묻어나는 사유와 체험의 깊이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다.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이기도 하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기도 하는 귀중한 ‘지혜의 가르침’들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과 통찰을 던져주어, 출간된 지 70년이 다 된 이 책이 왜 여전히 아마존닷컴의 장기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감성적이고 가벼운 힐링 서적이 아니라 진정 변치 않는 무언가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을 넘어 영성을 추구한 20세기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헉슬리는 1894년 영국에서 태어나 1963년 미국에서 사망한 작가·시인·사상가이다. 그는 과학·의학·예술·문학 분야에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등재된 유명한 ‘헉슬리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풍성한 지적 자극과 창의적 재능의 격려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다윈의 자연도태설을 옹호하고 종교적 전통에 강하게 반발하며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주장한 저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그의 조부였고, 명문 차터하우스학교 부교장이자 전기 작가인 레너드 헉슬리가 그의 아버지였으며,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으로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현대 진화론의 대가 줄리언 헉슬리는 그의 형,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앤드루 헉슬리는 그의 동생이었다. 외가 쪽은 문학 및 종교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 교육개혁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종교인인 토머스 아놀드가 그의 외증조부였고, 어머니는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저명한 명상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그의 외삼촌, 사회와 종교문제를 대담한 소설로 그려낸 험프리 워드 부인은 그의 이모였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 평가되는 헉슬리는 시·희극·소설·수필·비평 등 문학의 여러 장르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철학자, 신비가, 사회현상에 대한 예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초기 작품들 속에서 그는 날카로운 지성과 비평을 통해 사회비평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만, 후기에는 철학적 신비주의와 초심리학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종교적이고 영적인 주제에 몰입하게 된다. 동서양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1937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더욱 깊어져, 말년에는 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스와미 프라바바난다 등 쟁쟁한 영성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전쟁·정치·경제·윤리·교육·종교·기술 등의 현실적 문제를 궁극의 실재와 조화시키려 애썼다. 평화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도 궁극적 의식체험을 위해 명상과 요가 외에 스스로 환각제까지 투여했던 탐구의 내용은 《인식의 문》《천국과 지옥》으로 발표되어 화제를 낳는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와 통합적인 삶의 예술, 서양의 과학기술과 합리적인 방법론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현대문명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역설했다.

동서양 위대한 종교의 공통적인 핵심을 밝힌다!

이 책은 헉슬리 스스로도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영원의 철학 선집(대표적 작품을 뽑아 엮은 책)’이다.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스스로 거듭나고 깨달음으로써 ‘궁극의 실재Reality’를 직접 통찰하여 자질을 갖춘, 진실로 ‘성인 같은 남녀들’이 여러 시대와 장소에 걸쳐 토로한 구절들에 헉슬리의 해설을 덧붙인 지혜의 모음집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인 신성한 실재는, 사고와 언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한 ‘직접적인 영적 앎’의 영역이다. 

헉슬리는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불교·힌두교·도교와 그리스도교·이슬람교 신비주의 등의 여러 경전을 면밀하게 탐구한 후,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들을 비교·분석하면서 본질적인 공통점을 찾아 종합했다. 인용문으로 가려 뽑은 글들만 42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가톨릭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윌리엄 로의 글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 잘랄루딘 루미, 성 프랑수와 드 살도 자주 인용하였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뎅크와 프랑크, 퀘이커교를 창시한 조지 폭스의 글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톨스토이·워즈워스 같은 문학 대가들의 글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동양의 현자 중에서는 장자와 노자의 글을 자주 인용하였고, 인도의 유명한 경전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도 인용 횟수가 적지 않다. 다양한 불교 경전도 인용하고 있는데, 달마가 혜가에게 전했다는 《능가경》이 가장 많고, 그밖에 《육조단경》《전심법요》《신심명》 등 선禪의 정수를 보여주는 내용들과 함께 《대승기신론》《청정도론》《능엄경》《법구경》《금강경》 등 웬만큼 불교를 안다고 하는 동양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승과 소승, 교종과 선종의 핵심을 골고루 아우르고 있다.

이런 인용문들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희귀한 자료도 많을 뿐 아니라 그 폭과 깊이, 자료 선정의 안목, 해당 주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복합적 구성 등을 통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지적·영적으로 의외의 놀라움을 계속 안겨준다. 이처럼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종다양한 목소리를 총결집시킨 헉슬리의 방대한 독서량과 사유의 지평, 그리고 해설에서 묻어나오는 체험의 깊이는 그의 천재성이 주는 경이감과 함께 의식이 고양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떻게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 서로 다른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

신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초월적인 바깥에서 구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마음속을 살피며, 어떤 이는 곧장 자신이 바로 절대자이고 진리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오랜 탐구와 모험 끝에 내미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결론을 헉슬리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곧장 제시하며 시작한다.

“그대가 그것이다” “모든 것에서 하나만을 보라” 신은 우리 안에도 저 밖에도 계신다. 영혼 속에도, 영혼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재Reality로 가는 길이 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서도 절대적 실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이들 중 어느 한 길을 따름으로써만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p.111)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아니, 대관절 이게 타당하기나 한 사실일까? 그 까닭과 논리, 전후과정과 방법론들이 이 책의 다른 페이지들을 다채롭게 채우고 있다. 사랑과 진리의 관계,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 자유의지와 은총, 자아, 선과 악, 시간과 영원, 구원과 해방, 믿음과 지식, 침묵과 기도, 우상숭배, 영적 훈련과 기적의 가치 등 묵직한 주제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내용들이 현대의 심리학이나 과학?정치적 현실과 만나는 지점 등 세부 주제를 통해 ‘신성한 실재’의 특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들여다본다. 
수많은 인용문과 함께 제시되는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대한 체계를 모자이크처럼 아름답게 구성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이런 탐구와 인용들이 단순히 ‘좋은 말’에 그치거나 일반 명상서적들이 전하는 피상적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장의 제목이자 그리스도교?불교?힌두교의 성인들이 모두 언급한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유명한 표현 하나만 보더라도, 헉슬리는 그러한 통찰이나 진리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우상’이 될 때 빚어지는 위험성과 그 다음 단계, 그것의 사회적 파급효과까지 언제나 몇 발짝 더 들어감으로써 우리 인식의 지평을 다각도로 넓혀준다.

니르바나(열반)와 삼사라(윤회)가 하나라는 것은 우주의 본성에 관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성이 매우 진보한 영혼만이 이 사실을 충분히 깨닫거나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평범하고 친절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진리를 풍문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반율법주의의 온갖 어두운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모든 것은 신이고 신은 모든 것이라는, 순전히 지적이면서 깨달음이 없는 이론을 실제로 적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p.131~132)

사람에 따라 저마다 그 길이 다른 까닭은?
: 행위의 길, 앎의 길, 헌신의 길을 통해 이르는 곳

본성이 본성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길을 잃고 있는 셈이다. (p.267)

왜 어떤 이는 믿음을 우선시하고, 어떤 이는 분석적인 설명을 좋아하며, 다른 이는 윤리적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일까?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여기며 서로를 설득하고 강요하려 애쓴다. 다시 불거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뿐만 아니라 대규모 인종 학살, 여성 학대, 전쟁과 살인, 폭력의 배후에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고 또 그 속의 ‘같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과학적 연구와 종교적 지혜라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공통된 이유를 흥미롭게 짚어낸다. 내배엽-중배엽-외배엽이라는 각자의 생리적 기질(체질)이 어떻게 다르며 삶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고대 종교가 발견한 헌신의 길, 행위의 길, 앎의 길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에서는 불완전한 종교들 중 어느 것인가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을 그 자체로 훌륭하고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오류는 때로 끔찍한 영향을 끼쳤다. (중략) 쉘던이 지적했듯이 격렬한 개종은 대개 중배엽의 정도가 높은 성격의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현상이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향적이어서 마음의 낮은 수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이 자신의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면, 그 결과로 생기는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생소함과 낯섦으로 인해 계시의 힘과 질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회개metanoia, 혹은 마음의 변화는 갑작스러우면서도 감동으로 넘친다. (중략) 이런 종류의 정서적 격변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사람에게 구원을 개종에 의존하게 만드는 교리는 만족감을 주지만, 영적 성장에는 매우 치명적이다. (p.266~267)

종교적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이는 결국 자기 수행과 진리탐구의 방법론으로 이어지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까지 종합하여 짚어내는 설명은 체질론의 옮고 그름을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고통과 욕망으로 넘치는 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 돌아오라,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삶은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하게 된다. 위대한 성인들은 저 멀리 천국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신이 계시고, 세상 자체가 바로 신이라고까지 하건만,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일까?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원죄’와 ‘타락’을 이야기했는데,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을 통해 밝히는 그 본질은 ‘개체화된 존재에 대한 열망’이다.

신성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함과 통합unity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창조의 목적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는 현혹적인 분리에로의 충동과 분리감에서 벗어나, 결합하는 앎unitive knowledge을 통해 영원한 실재의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p.383)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그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p.23)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무언가를 다시 믿어야 하나? 금욕? 기도? 봉사? 무심? 열정? 아니면 또 다른 배움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삶이 그러하듯 이 책 속에서도 늘 의외의 인물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제시된다. 동서양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시/소설/희곡/아포리즘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노래하고 있다.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지금 그대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파하라. 이 모든 것을 신성하게 행하라. 그대의 가슴hearts 이외에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질서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데에 신성함이 있다. _드 코사드 (p.122)

"자아가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파나fana(선禪의 무심無心)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이는 허물이다. 최고의 상태는 소멸도 사라진 것이다." 아트만-브라흐만이라는 내적 정점에는 황홀경이라는 ‘소멸로부터의 소멸’이 있다. 더 포괄적인 소멸로부터의 또 다른 소멸은 내적 정점에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세상을 통해, 신에 대한 충만하면서도 깨어있는 일상의 앎 속에 존재한다. (p.136~137)

종교란 본래 당대 최고의 지적 성찰과 고민을 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일러 '으뜸가는 가르침宗敎'이라고 했던가. 이 책은 그러한 종교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공통 원리를 언급하면서도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과 ‘여기’의 내 삶으로 행복하게 돌아오는 방법, 그 가장 오래된 지혜를 깊이 있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깨달음과 영적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줄 책!

1945년에 영어로 출판된 책이 약 70년 만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데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아, 이성과 합리성이 시대정신을 주도하던 근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을 억압하는 형식적 합리성의 지배를 피하려는 탈근대적 시도를 넘어 새로운 통합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객관적·이성적 사유를 기반으로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산업의 발전을 향유하고 있는 밝은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삶의 상품화, 질적 차이의 평준화, 생명세계의 파편화, 천박한 유물론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경험한 인류는 지성을 넘어 영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향한 갈망이 점차 커져가고 있다. 그동안 종교의 영역으로 치부해왔던 ‘영성’이라는 주제는 2000년대에 들어와 의료계를 통해 정신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꾸준히 보고되면서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최근 대중들 사이에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도덕적·윤리적 욕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우리 모두가 근본에서 하나임을 보여주는 ‘영성’이라는 궁극의 도덕과 직접 관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할 때, 동서양 영적 천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종합하여 고대부터 내려오는 인류 보편의 진리가 존재함을 보여준 《영원의 철학》은 오히려 21세기에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는 기본서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지구촌’으로서의 세계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 동서양의 통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동서고금의 수준 높은 지혜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보다 높은 의식의 지평을 여는 단초가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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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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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철학의 중요한 요점들을 잘 정리했다.  구매
도사림 2014-12-16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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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깊은 영성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구매
장미꽃이슬 2014-12-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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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책!!!
머리속의 지식이 아닌 영혼을 살찌게하는 책!!!
아무나 읽을 수 없는.....  구매
불가사리 2014-12-0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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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 420여개의 보석 같은 인용문을 통해 영원의 철학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는 인용문만 따로 골라 읽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운 인문학적 보고이자 탁월한 종교,명상서.  구매
다비치 2014-08-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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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드디어 만나보는 올더스 헉슬리의 후기 대표작...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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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로이 2014-08-07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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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

모든 종교는 비슷한 진리를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종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엮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 평생을 종교 하나만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동서양의 종교를 망라하는 작업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 그런데 이미 몇십년 전에 이 일을 해낸 사람이 있다. '멋진 신세계'로 잘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가 바로 그 인물이다. 모든 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뽑아낸 뒤에 각 종교마다 해당 이념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종합해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비교적 쉽게 쓰여있다고는 하나,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원래 개념도 어려울뿐더러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쓰여있는 단어들도 상당히 까다롭다. 종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에게는 조금 벅찬 책이다.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읽다보면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해서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지지할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 종교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힌다. 그런데 평화를 위한 종교가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에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분명 각 종교의 지도자는 사랑과 이해를 가르쳤을텐데,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킨다. 이 사람들에게 서로가 다르다고 등돌리기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이념이 다른 것이 아니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약간 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여러 종교를 통합적으로 보면 각 종교가 가진 한계도 보이고 장점도 보인다. 그럼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다.

종교를 깊이 탐구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된다. 외부 환경을 보고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쉽지만, 정작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비교적 쉽게 번역을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 대해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찾기보다 결국은 나를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 하나의 종교에만 치우치지 말고 좀 더 다양하게 믿음의 폭을 넓혀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종교적 갈등을 보며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신의 왜곡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나면 종교에 대한 편협된 생각이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종교의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 적극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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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2014-08-03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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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이야기 2014-164

『영원의 철학』 올더스 헉슬리 / 김영사

1. "아. 이 멋진 인간들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들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이 《멋진 신세계》이다. 흔히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함께 거론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2. 많은 이야기 중 책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웰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공포와 기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3. 책에 대한 관점만 보면 올더스 헉슬리가 이겼다. 최근 인터넷에 오른 글들 중에 머니투데이의 [新대한민국 리포트] '책 안 읽는 사회'를 보면 올더스 헉슬리가 백번 옳다. "문학소녀? 찌질하잖아요. 쌤도 문제 하나 더 풀라던데요". "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무식한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간 중간 눈에 띄는 이러한 문구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아이들이 이 나라를 과연 어떻게 운전해갈지 큰 걱정이다.

4. 책의 제목인 ‘영원의 철학’에 무게감이 실려 있다. 영원히 풀어가야 할 철학이냐? 영원을 향한 철학이냐?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 근대 독일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자 뉴턴과 별개로 무한소 미적분을 창시한 독일 근세 철학의 원조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5. 그러나 옮긴이 조옥경 교수는 ‘영원의 철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가 자신의 저서 《Deperenni philosophia》(1540)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라이프니츠가 이 용어를 ‘역사를 초월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6.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기독교 · 불교 · 유교 · 도교 · 이슬람교 · 유대교 · 힌두교 등 세계의 종교는 영원의 철학이 제안하는 보편적인 진리가 각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된 결과로 나타난 모습니다. 이 보편적인 진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7. 첫째, 물질 · 생명 · 정신권의 근본바탕에는 신성한 실재가 존재하며, 모든 현상은 그러한 실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신성한 실재는 분석적 사고를 통해서는 포착할 수 없으며, 더 높은 차원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셋째, 인간은 현상적 자아와 영원한 참자아라는 이중성을 지니며, 참자아는 신성한 실재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넷째,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실재와 경험적으로 합일하는 데 있다.

8. 헉슬리는 ‘그대가 그것이다’, ‘세상 속의 신’, ‘최고의 사랑’, ‘진리’, ‘종교와 기질’, ‘선과 악’, ‘시간과 영원’, ‘침묵’, ‘기도’, ‘믿음’, ‘우상숭배’, ‘기적’, ‘영적 훈련’ 등을 포함한 27개의 화두를 갖고 생각을 풀어나가고 있다. 400여 인용문엔 각 종교의 경전 외에 노자, 장자,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카뮈, 사르트르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9. 다소 종교적인 면에 치중된 감이 크지만, 요즈음처럼 신앙인은 없고 종교인만 있는 현실을 직시해볼 때 종교를 갖고 있건 아니건 읽어볼 만한 책이다. 간혹 종교에 대한 불신감만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안 믿고, 부처님도 안 믿고 ‘나는 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럼 그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종교는 우선 믿고 알아가는 방법도 있다. 그 후에 맛을 보는 경우도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단지 그 맛에만 길들여져서 다른 맛은 모두 배척하는 지나침은 자제해야 할 일이다. 아울러 ‘나’를 제대로 알고 ‘나’를 믿는 계기도 되리라 믿는다. 그 ‘나’를 제대로 알고 나면 ‘나’를 믿게 될지 어떨지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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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4-08-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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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 읽어보고 싶다 와 읽을 수 있다는 다르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지적 허영이라고 해야 할까? 김영사 서포터즈 선택 도서 중 하나였던 영원의 철학. 책에 대한 소개를 읽고 덜컥 신청하였다. 쉽지 않아 보였으나 그래도 읽을만 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사실 ‘철학’ 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괜히 읽어보고 마음이 생기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 기대와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이 책은 내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아직 내가 이 책을 읽을 정도의 넓이와 깊이가 갖춰지지 않은 것이겠지. 따라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서평’이라 말하기에는 매우 부끄럽고 단순한 ‘후감’ 아라 할 수 있겠다.

영원의 철학.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지는 70년이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완역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 김영사 같은 국내의 큰 출판사였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영원의 철학이 당장 불타나게 팔릴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제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영원의 철학의 번역본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출판사에서 낸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 그런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매년 꾸준한 수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대학수업의 부교재로 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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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철학은 세계 종교의 ‘공통적 요소’ 27가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없다. 내가 그 수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과 저자의 주장이 있으니 적어보고자 한다. 가장 마음에 와 닿고 배움에도 아래와 같은 자세가 매우 필요하다. 특히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더 아래의 가르침을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자기 종파의 영광을 높일 목적으로 자신의 종파에 전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종파만을 공경하고 다른 종파를 비방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런 행위로 인해 자신의 종파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경건함의 법칙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훌륭하다. - 아소카의 칙령

신의 아이들은 매우 사랑스럽고 매우 별나고, 매우 친절하지만 매우 편협하다. - 사두 선다 싱

백 년 전에는 산스크리티어‧팔리어‧중국어가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유럽 학자들의 무지가 그들의 편협주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정도 적절한 번역이 풍성해진 오늘날에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변명의 여지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굴하구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 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교와 기질 : 체질과 기질에 따라 그 길은 다를 수 있다> 이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도 사람들의 차이에 따라 각자 맞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며 종교에서도 가르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우리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한 가지 길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에게도 한 방법만을 강요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것은 이미 예로부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철학’은 옛 방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 머리에 꽉 차 들어가게끔 말이다. 그래야 여기의 글들이 마음을 통해 울려지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사람보다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줄 수 있을 책이라 생각된다.

쉽게 읽고 끝낼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곰곰이 씹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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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gperson 2014-08-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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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영원의 철학

한마디로 미추어버릴 것 같은 책. 올더스 헉슬리의 이름을 여러 번 되내이면서 정말 헉소리가 나는 책이었다. 페북스터디로 <개념 뿌리들>을 하고 있는데 그 책만큼이나 어려운 책이었다. 그래서 난 서평을 못하겠다!!! 헉슬리의 생각을 간파할 수도 없고, 헉슬리의 이야기를 요약하기도 어렵다. 그저 난 이제 한 번 이 책을 읽었을 뿐이다. 감히 어찌 이 책을 논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하자면, 몇 몇 chapter를 소개하는 정도이지 싶다.

헉슬리는 최고의 사랑이란 chpater에서 사랑을 love가 아닌 charity라고 했다. Charity는 자비나 관용, 자애,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즉, charity는 더 이상 최고이자 가장 신성한 형태의 사랑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왜 love와 charity를 굳이 구분하나 싶기도 할 것 같다. 영적 삶을 사는 스승들은 낮은 형태의 사랑일 때 love를 사용했으며, 최고의 사랑일 때 charity를 사용했다고 한다. 용어에 정확히 구분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볼펜 가져와 했는데 붓 가져가면 쓰겠나?

최고의 사랑은 사심이 없고,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그 선함에 대해 어떤 악을 돌려받아도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최고의 사랑이 있을까 싶지만) 또한 낮은 형태의 사랑과는 달리 정서(emotion)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지의 행위로 시작해서 순수하게 영적인 자각, 그 대상의 본질과 결합하는 사랑-앎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아마 낮은 형태의 사랑은 이끌림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남녀간의 사랑은 앎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최고의 사랑은 사심 없음, 고요함 그리고 겸손이다. 그러면서 현대는 냉혹함(lovenessless)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대자연에 대한 자비가 부족하여 자연을 파괴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보면 lovenessless라고 했다. 낮은 단계의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사랑은 높은 단계의 사랑 charity로 가는 과정인데 현대 사회는 love가 없다는 것이 헉슬리의 생각이라고 추론했다.

헉슬리는 사유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는 편은 아니라는 생각을 받았다. 사유하면 집착이 되기에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또 해본다.

여기까지가 최고의 사랑 charity라는 한 chapter의 내용을 나만의 방식으로 요약해 본 것이다. 27개의 chapter 중 겨우 하나의 chapter를 요약하는데 이 정도 걸렸으니 아마도 이 책은 올해까지 읽으면 다행이다 싶을 것 같다.

종교의 이야기를 떠나 헉슬리의 책은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분석하지 않고 나만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나를 한 단계 올려줄 “입맛 까칠한” 책임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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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2014-08-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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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420개 나침반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420개 나침반
서정보기자  2014-08-02 

◇영원의 철학/올더스 헉슬리 지음·조옥경 옮김 /528쪽/김영사 (2014)

올더스 헉슬리(1894∼1963·사진)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 ‘멋진 신세계’의 작가로만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뜻밖으로 여겨진다. 1944년 출간된 책이 70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로 완역돼 선보인다는 것 역시 뜻밖이다.

이 책은 사회비평가였던 그가 1937년 미국에 건너온 뒤 크리슈나무르티, 프라바바난다 등 유명한 영성가들과 교류를 나누며 궁극의 실재와 영성을 탐구한 결과다.

영원의 철학은 ‘모든 종교의 본질적이고 공통된 핵심 진리’를 뜻한다. 헉슬리는 이를 신과 결합하는 삶이고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지칭한다. 알쏭달쏭한 이 결론에 대해 독자가 동의하는지는 별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영성과 관련한 27개의 주제를 정하고 기독교는 물론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수많은 종교의 주요 저작에서 420개의 인용문을 뽑은 점이다. 적어도 ‘영성’과 관련해 인류 역사 속에서 축적돼온 방대한 가르침의 진수를 한 권에 축약 정리한 것만 해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다루는 궁극의 실재, 신, 영혼(soul) 영(spirit) 자아(self) 등의 개념에 대해 한마디로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고 정의를 내리긴 쉽지 않다.

그러나 헉슬리는 난조를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명확히했다. 신이 준 것에 대한 한없는 겸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 탐구의 길은 오직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철학 '과는 반대로, 시간 속에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시간의 철학 '은 종교와 이념의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과 배척의 원인이라는 점도 분명히했다. 

책을 추리 소설을 읽는 것 처럼 단번에 읽지 않는다는 것을 희망한다. 조금씩 음미 다시 씹어 습기 찬다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성을 기르도록 읽고 진행 좋겠다. 27의 주제를 1 일 1 개씩 읽으면 딱 속도이다. 그리고 영혼이 갈증을 기억할 때마다 꺼내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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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jp/article/all/20140802/425610/1/%E7%9C%9F%E3%81%AE%E6%82%9F%E3%82%8A%E3%81%AE%E3%81%9F%E3%82%81%E3%81%AE%EF%BC%94%EF%BC%92%EF%BC%90%E3%81%AE%E7%BE%85%E9%87%9D%E7%9B%A4

2021/09/01

Kang-nam Oh 김하태 박사님과 변선환 박사님의 편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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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태 박사님과 변선환 박사님의 편지(1)
오늘 서류 정리를 하다가 김하태 박사님과 변선환 박사님의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을 잘 아시는 분들을 위해 그 편지들을 여기 옮겨 보겠습니다. 이제 제가 썼던 페이퍼나 메모지, 편지들을 없애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런 편지들은 그대로 없애기가 아까워 여기라도 기록에 남기고 싶습니다. 정대위 박사님, 김재준 박사님, 유기천 박사님 등에게서 온 편지들도 있는데,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견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발견되면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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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단 김하태 박사님 편지를 먼저 옮깁니다.
제가 1990년 11월 17-20일 미국 New Orleans 북미 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에서 “The Encounter of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in Korea: Past and Future”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한 copy를 김하태 박사님께 전해드렸는데, 그 논문을 꼼꼼히 살피시고 답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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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91
오강남 교수께,
전번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meeting 때문에 南加州에 오박사가 오셨을 때는 매우 반가히 뵈었습니다. 그리고 New Orleans 會議 때에는 제가 가지 못하여 유감됩니다.
실은 Dr. Andrew Park을 만났을 때 말이 오박사로부터 내게 보내는 편지와 article을 받아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못 전한다고 했었는데, 그것을 찾아서 제가 보내 주어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기 전에 L.A.에서 나오는 The Christian Herald 紙에 한국말로 發表된 것을 읽었고 또 보내주신 English article도 읽었습니다.
우선 儒敎에 關心을 가지시고 硏究하심을 고맙게 여기오며 그 article은 comprehensive하고 잘 조직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Sagehood and Metamoia의 비교는 좋은 着想이라고 보는데, 그 article의 性質로 보아서 그 点을 더 展開시키지 않은 줄 알지만, 이 두 개념의 關係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갔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곧 이 두 개념을 表示하는 共通分母를 制定하고 그것에 대한 유교적 表現과 기독교적 表現의 特異性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제 생각은 이 둘 관계 뿐 아니라 佛敎의 깨달음도 亦是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끊임없는 건투와 進展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南加州 金夏泰 拜
1360 Arbolita Dr.
La Habra, CA 90631
U.S.A.
오박사 article에 교정할 것이 있습니다.
1) p. 11. footnote #3에 유동식, 한국의 종교와 기독교 (Seoul: The Confucian Literature Society, 1965)라 했는데, The Confucian이 아니라 Christian이 아닐까요?
2) p. 19. first line에 C. Thinking Together라고 했는데, 여기에 “C”가 아니라 “D”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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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를 보니 꼭 30년 전에 쓰신 편지이군요. 제가 전에도 어디에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宗敎와 基督敎>(1959)인가 <現代人과 宗敎>(1961)인가 하는 책에서 종교의 궁극 정점은 신비주의라는 말씀이 제 학문적 여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최초로 김박사님을 뵌 것은 1971년 미국 미주리 주 Saint Louis에 있은 ‘북미기독학자회의’에서 였습니다. 그 모임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식사 기도 부탁을 받으시고, 퀘이커 대학인 Whittier College에서 배우셨다고 하면서 말로 하는 기도 대신 잠시 같이 명상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 모임에서 제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주시고 좋은 평을 주셨습니다. 그 이후 자주는 아니지만 학회나 제가 L.A. 가게 되면 뵙기도 했습니다.
특히 <김하태 박사 나심 아흔돌을 기리는 글모음, 궁극의 실재를 찾아서, 2005>를 준비하는 분의하면 김박사님이 저의 글도 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면서 기고를 부탁했습니다. 주로 그의 제자들의 글이 실린 그 글모음에 직접 제자도 아닌 저에게 특별히 부탁하셨다고 하여, ‘신비주의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63~76)이란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졸저 <불교, 이웃종교로 읽는다>의 부록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 무엇으로 다시 만날까? - 김하태 박사님의 90회 생신에 붙여” 실려 있습니다.
제자 가르치던 학교네 Peroy라는 심리학 교수가 있었는데, 그 교수는 자기가 Whittier College에서 공부할 때 김하태 박사님에게서 배웠는데, 자기 알고 있는 철학, 특히 동양철학은 모두 김 박사님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하고, 김 박사님을 존경하여 자기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김 박사님은 실로 세계적인 학자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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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06년도에 펴낸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를 출판사에 부탁하여 보내드리도록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읽으시고 용기주는 답을 해주셨습니다. 그 편지는 못 찾겠고 제가 김 박사님께 보내드린 답신이 컴퓨터에 있어어 덧붙입니다.
1360 Arbolita Drive
La Habra, CA 90631
김하태 박사님께
5월13일자로 보내주신 귀한 편지 감사하게 잘 받았습니다. 제가 방학이라 학교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제 집 주소로 우송해 준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느라고 시간이 걸려 이렇게 답신이 늦은 것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책이 현암사로부터 박사님 앞으로 직접 우송되었고, 더욱이 받으시고 그 두꺼운 책을 완독하셨다니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 긴 책을 읽으시느라 수고를 끼쳐드린 것을 생각하여서입니다.
아무튼 읽으시고 격려의 말씀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욱 힘써서 잘 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불교와 기독교의 사상적 비교"를 통하여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는 기회가 더욱 많아지게 되길 빌어봅니다.
아무쪼록 박사님, 건강하시고 후학들에게 계속 지혜와 용기의 원천이 되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저도 내년 봄이면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됩니다. L.A. 가는 길이 있으면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2006년 7월 14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오강남 드림



2021/08/12

Kang-nam Oh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1-3]

 Kang-nam Oh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신학책이나 종교학 책을 보면 서문에 저자의 자전적 고백을 싣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신학은 자전적이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Paul Knitter라는 신학자는 책을 쓸 때마다 자기가 어떻게 그런 신학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자기의 삶을 반추하면서 풀어준다.

나도 나이가 들어 뒤를 돌아보면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신적 눈뜸의 순간들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순간들이 있다.  그 중 열 개를 적어 자전적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풀어 본다.  (지금 대선과 올림픽 열기가 대단한데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가 망설이다가 용기를 낸다.  양해 있으시길...)

1.  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호적등본에 의하면 나는 일본 동경(東京都 品川區 北品川 3町目 282番地)에서 8남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의 공습 때문에 피란을 가야했는데, 우리 식구들은 한국인들이 많이 살던 히로시마(廣島)로 갈까 하다가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 때 원폭 세례를 받은 히로시마로 갔으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내가 네 살 때 식구들과 한국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산에 정착하려고 집까지 샀는데, 부산에도 미국의 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인 안동으로 와서 정착했다. 안동읍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동네. 이름은 ’머물‘이고 한문으로는 원호동(遠湖洞).  지금은 원호리라 바뀌어 있다. 나는 초등학교를 우리 동네에 있는 일직(一直)국민학교에 다녔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북쪽으로 작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우리 동네는 백성촌이라고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 중에는 부자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 가난했다.  우리 집은 그래도 동네에서 유일하게 펌푸가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난리 통에 어떻게 가지고 올 수 있었던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망원경, 자전거, 커다란 둥근 밥상, 오동 장롱, 아코디온, 유성기 등이 있어서 꽤 잘 사는 집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그 덕택으로 큰 형님은 의성군 단촌에 있던 고운사(孤雲寺) 주지의 미녀 맏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동네가 거의 가난했지만 특히 육이오 이후는 가난이 극심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산골로 들어가 송기(松肌)라고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와 물에 담궜다가 부드러워지면 송기떡이든 송기죽이든 해 먹었다.  그러나 보리고개를 맞으면 부황(浮黃)인가 하는 것으로 굶어 죽는 이도 있었다.  요즘 많이 부르는 유행가 '보리고개‘, “아이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하는 것을 실감하면서 산 셈이다.

거의 모든 집이 아침에는 보리밥을 먹고 점심은 아침에 해 놓은 보리밥을 물에 말아 마늘이나 마늘쫑이나 고추를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서 먹고 저녁에는 보리죽을 먹으며 연명했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놀다가 저녁 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발로 고무신을 공중으로 올려보내고 떨어질 때 엎어지면 저녁으로 밥을 먹고 똑바로 자빠지면 죽을 먹는다고 일종의 점을 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고무신이 엎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똑바로 자빠지기 마련이었다. 우리 집은 그래도 보리죽 대신에 수제비 국을 자주 먹기도 했는데, 그 때 먹은 것에 질렸는지 지금도 나는 수제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때 먹은 고추 부각이나 호박잎, 피마자잎은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초등학교 4학년 쯤이라 생각된다. 우리 집은 신작로 옆이기 때문에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고무신을 하늘로 올려 보낸 다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 중에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가?  왜 다 같이 사람인데 이렇게 달라야 하나?  우리 동네 옆으로 중들(주들이라 불렀다)이라고 하는 꽤 큰 평야가 있었는데, 우리 집은 거기 논과 밭 몇 마지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땅을 고르게 나누어주면 안 될까? 지금도 그 때 해질녁 남쪽에서 북쪽으로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에 골똘하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이 때 이런 생각이 씨앗이 되었는가. 캐나다에 와서도 선거 때마다, 한국 사람이 입후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캐나다 무상 의료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신민당(New Democratic Party, NDP) 후보에게 언제나 표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투표권은 없지만 미국 대선에서도 언제나 민주당(Democratic Party)이 이기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지난 두 번의 미국 대선에도 민주당의 Bernie Sanders가 당선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2.  성경은 문자적으로 읽을 것이 못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어머님의 손을 잡고 안동읍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걸어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가시니 동행한다는 의미로 따라 간 셈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교회 학교를 다니던 형님이 방학 때 내려와서 아담, 하와니 엘리야, 엘리사 하면서 성경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나도 중학교 갈 때 그 교회 학교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당시 두꺼운 <전과자도서>를 몽땅 다 외운 것 같다. “태정태세문단세...”, “빨주노초파남보, 보남파초노주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사라가바나마”까지 입에서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다사라가...는 악보에서 올림표(sharp)나 내림표(flat)가 없을 때는 다장조, 올림표가 하나 있으면 사장조, 두 개면 라장조, 세 개면 가장조, 내림표도 하나면 바단조, 둘이면 나단조, 세개면 마단조 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 안동사범 병설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이것은 일직초등학교의 체면을 위한 것일 뿐, 처음부터 서울 교회학교로 가기로 한 것이어서 미련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교회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일년 동안은 모르던 성경 이야기, 특히 예수님의 생애를 배우면서 신이 났다.  그러나 조금 지나서 성경의 이야기들이 문자적으로 맞을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성경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하느님이 세상을 6일만에 지으시고 7일째는 쉬셨다고 했는데, 하느님도 쉬어야 할 정도로 피곤하실 수가 있는가?  선악과를 두고 아담 하와를 시험해 보셨다고 하는데, 전지전능, 무엇이나 다 아시는데, 구태여 시험해 보실 필요가 뭔가?  선악과를 먹고 숨어있는 아담 하와에게 오시면서 너희가 어디 있느냐 물어보셨다는데, 다 아시는 분이 물어보시다니?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큰 벌을?  그러면 먹으려 했다는 것으로 시험 결과를 이미 아셨다면 이제 먹지 못하도록 말리셨어야지.  세상 아버지도 아이가 낭떨어지에 떨어지려 하면 가서 붙잡는데...  이런 식으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었다.  성경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도 많이 하니까 성경 선생님이 오강남은 믿음이 없으니 비록 성적으로 수석이지만 우등상을 줄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의 주장으로 우등상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James Fowler 교수가 말하는 신앙의 6단계 중 사춘기에 이르는 제3단계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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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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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 (2)

여기서부터는 약간 추상적이라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3.  온 세상이 함께 합창하다
고등학교 때 3년간 약 10km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통학 길에서 학교 부근에 가면 그 당시에는 오른 쪽으로 논이 있었다.  보통 친구 몇이서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지만, 어느 가을 날, 그날 따라 혼자서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고 가면서 내 삶의 진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던 벼이삭들이 춤추며 합창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치 천사들이 나를 위해, 그리고 나의 미래를 위해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합창하는 듯하였다.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하며 계속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중국 고전 <장자> 제2편 첫머리에서 말하는 ‘땅이 부는 퉁소 소리(地籟)’인가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天籟)’인가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무튼 그 웅장한 합창 소리로 하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생각이 내 속에 자리잡게 되고 이것은 내 영적 여정을 꼴지우는데 하나의 큰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는 일이다.  마치 화엄(華嚴)사상에서 말하는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있다는 상즉(相卽) 상입(相入),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세계를 미리 맛본 것인가?

4. 성서와 신화적 세계관
나의 이종사촌 형이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다녔는데, 그 형의 집이 대전이라 서울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은 방을 쓰며 학교에 다녔다.  나보다 한 학년이 빨라 그는 대학생이지만 나는 아직 고3이었다.  그런데 그 형의 책꽂이에 재미나는 신학 책이 많았다.  김하태 박사의 책도, 폴 틸리히 책도 처음 접했다.  김하태 박사님의 책에 "종교의 정점(pinnacle)은 신비주의"라는 말은 내 일생을 따라다니는 말이되었다.  김박사님과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뵙고, 비록 내가 연세대 출신이 아니지만 나를 특별히 생각하셔서 90회 기념 논총에 특별히 내 글을 싣도록 하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영어로 된 폴 틸리히 책애서는 하얀 것은 종이이고 까만 것은 글자라는 것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 틸리히는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 중 한명이 되었다.  
아무튼 그 책꽂이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쓴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얇은 책이 있었다.  60년도 전 일이지만 지금도 그 책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노란 뚜껑에 비닐이 씌어져 있고, 옮긴이는 유동식 교수. (지금은 새로운 번역판이 나와 있다.) 그 책을 읽고 중학교 때부터 그때까지도 성경을 문자대로 읽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성경을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혹은 틸리히 용어대로 ‘탈문자화(deliteralization)’해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실존주의의 렌즈를 통해 찾아낼 수 있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내가 2001년 연세대학교 교회에 강연하러 갔을 때 유동식 교수를 만나 교수님이 번역해주신 그 책 때문에 제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고 말씀드리고 감사함을 표했다.)
그 때 이후 해석학(hermeneutics)이 중요함을 확신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도 결국 기독교 성경과 교리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인 셈이고, 그 후 쓴 <또 다른 예수>라는 <도마복음> 해설서에서도 제1절에 “이 말씀들을 올바로 풀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구절을 풀이하며,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해석hermenutics’을 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라는 주를 달았다. 
  
5.  신은 존재할 수 없다
교회학교를 다니고 주위와 가정 환경 등의 덕택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같은 교회 다니던 형 중에 서울대 국문과에 다니던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을 통해 서울대학에 종교학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성직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그런 내 입장에 종교학이 적격일 것 같아 종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1학년에서는 주로 교양과목과 라틴어 공부에 열중하였다.  2학년 때부터 전공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쯤 어느 분의 병 문안을 위해 그 당시 위생병원이라 불리던 병원 시멘트로 포장된 오르막 길을 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절대적이란 말은 아무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존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 안에 있고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기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중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를 알게 되면서 틸리히도 결국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틸리히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전이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틸리히는 신이 ‘하나의 존재(a being)’일 수 없고 ‘존재의 근원(Ground of Being)’이라고 했다.  또 신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무엇, the Unconditioned)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말하는 신이란 ‘신의 상징(symbol of God)’으로 우리는 이런 상징으로서의 ‘신 너머의 신(God beyond God)’을 체득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틸리히의 이런 생각은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신을 Ungrund라고 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이런 생각은 나중 <도덕경> 제 1장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도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범주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신이 완전히 없다고 해도 곤란하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든가 신이 내 마음 속에 있다고 하는 것도 신이 완전히 없다고 하면 성립되기 곤란한 말이다.  인간의 제한된 논리로 보면 신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있기도하고 없기도 하다.  이런 어려움을 류영모 선생은 신을 “없이 계신 이”라고 표현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맥을 같이 한다.  서양 철학에서는 신이 절대적으로 초월(超越)이지만 동시에 내 마음 속을 비롯 만물 속에도 내재(內在)한다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을 주장하는 사상가들도 많은데 이것도 “없이 계심”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나온 신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그야말로 신비(mystery)다.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말 그대로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이다.’

(계속)
47 comments
Il-y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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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
넘 재미있고,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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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욱
고3 때 좋은 자극을 만나신거네요.
부럽습니다. ^^a…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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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섭
저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기독교의 하나님이 5차원적 존재라면, 그보다 높은 6차원의 신이 있을 겁니다. 이럴 경우, 5차원의 신은 6차원의 신이 보기엔 죄인일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우주와 인간을 만들어서 이렇게 인간이 괴롭게 되도록 했으니까요. 6차원의 신이 보기엔 인간을 만든 것 자체가 큰 죄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보기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신도 우리처럼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5차원의 한계에 갇혀 있으니까요.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6차원의 신에게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일 수 있는 것이죠. 6차원의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6차원에 갇혀 있죠.
그리고 우리가 2차원과 1차원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존재의 존재를 알 수 없고, 안다고 하더라도 소통할 수 없듯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우리는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인간끼리도 완벽한 소통이 안 되고, 같은 시공간에서 사는 영장류와도 안 되는데, 어떻게 차원이 다른 존재와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소통이 안 되는데 무슨 죄가 있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뛰어나다고 하면 할수록 그 신과 우리는 소통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면 그 하나님도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신은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지론입니다. 인간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 하는 순간, 말씀하신 대로 신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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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환
오교수님이 실재에 전문가이시니'드릴말씀은 없읍니다.다만 절대적 진리는' 해석을 포함한 생각의 차원 너머에 있읍니다. 주객미분전이죠. 무아로 멸진정에 들어야합니다. 굳이표현한다면' 다석선생님의'없이 있는 이'가 근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불비례. 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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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고준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해석'이란 절대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말에 대해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는 말씀하신대로 언어도단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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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환
오교수님.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을 잘수용해주셨읍니다. 언어도단' 심행처멸' 불가사의. 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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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Kyung Koh
ㅋㅋㅋ 다양한 생각들을...좋아요
bravo, GIF may contain Simon Cowell, Two Thumbs Up, Bravo, Nice, Happy, Smile, Good Job, Thumbs Up, Americas Got Talent and 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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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 Tae Kwon
불트만 ,틸리히 이렇게 해서 교양의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성경의 부 교재를 정리하게 됩니다.저도 이런 책을 정리해서 전문성이 아닌 얇은 책 으로 어떻게 성경을 읽을까 ? 어떻게 기도 할까 ? 라는 고차원이 아닌 쉬운 책을 하나 낼까 합니다.
비전문성 기독교입문자들을 위해서요.
본류는 교수님이 하시고 지천을 하는 사람들도 더 있고 하면 이 분야도 재미 있는 곳이 될것 같은데요.지금은 활성화가 덜 되서 심심 하거나 아직은 외롭고 한산하게 보여서 통행량을 늘리는 의미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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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I love this 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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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락
3. 온 세상이 함께 합창하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느낌에 따라 신비나 환상에 빠져 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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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 Suh Giulio Park
대학교 4학년때 건강상의 이유로 재수강해야했던 교육철학 시간에 이기론의 "理"와 불교의 "空", 도교의 "道"의 개념적 유사성을 정리한 페이퍼를 작성하며 그때까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being으로서의 神의 존재를 ground of being으로 확장해나갔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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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박준서 대학 4년 때라도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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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nae Kim
신의 상징으로서 신 너머의 신을 체득해야한다. 공감합니다. 오늘 우물에서 건진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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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Jung
각 개인의 삶이 잘 쓰면 모두 역사책이라 오교수님 글을 읽으니 종교학자로 살아간 삶이 새로운 신선한 역사책을 읽는 기분입니다. 저가 무지한 종교에 대해 많이 배웁니다.
저가 남미를 여행하며 모두 일할 시간인데 성당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신기했습니다. 삶이 참 힘든가보다. 이들에게 하느님은 고통을 감해주는 마취제 같은 역할, 종교의 순기능을 생각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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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Daniel Jung 종교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같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종교인이 종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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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식
아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재목이 될 나무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군요. 예수는 없다 등등 오박사님의 우물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늘 고마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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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 Lee
'종교의 정점(pinnacle)은 신비주의' 저도 참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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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Dean Lee 김박사님이 쓰신 영어 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the state of mystical consciousness, the pinnacle of all religious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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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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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Lee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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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렬
신에 대한 해석이네요. 수많은 신이 있어요. 보편전쟁과 특수성 전쟁과도 같은, 신이 있고 없음에 대한 논쟁인데, 있고 없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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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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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야기 -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자전적(自傳的) 고백(告白)

나의 독백에 공감하신다는 분들, 더욱이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는 페친분들이 계서서 감사합니다.  특히 박충구 교수님은 조금 전 “심오한 것에 대하여 편하고 쉽게 써주셔서 재미가 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고 하셔서 이 글을 올릴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약간 “깔때기”성 발언이 있더라도 널리 이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혹시 ‘깔때기’라는 신조어를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 하여 말씀드리면, ‘자화자찬’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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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양종교 사상에 눈뜨다

한국에서 종교학과를 다니면서 주로 서양의 종교 사상을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주 관심은 기독교 사상이었다.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를 수강하고 성경을 원문으로 읽기도 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라틴어로 읽었다. 아우구스티누를 1년에 걸쳐 공부하는가 하면 기독교 사상사, 칸트 독어 강독, 하이데거 강의 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류승국 교수로부터 유교도 배우고, 대학원 때 홍제동 이기영 교수님 댁에 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을 같이 읽었지만 그 때만 해도 유교나 불교에 심취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1년 초 캐나다 토론토 옆 해밀턴에 있는 맥매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 종교학과로 유학을 갔다.  대학원 학생만 80명으로 캐나다 최대의 종교학과가 있는 대학이었다. 그 때 서양에서는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대학원 박사과정이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서양종교를 부전공으로 하고, 서양종교를 전공으로 하면 동양종교를 부전공으로 하도록 했다.  나는 서양종교는 한국에서 열심히 했기에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하고 서양 종교사회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대학원 과정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강좌는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관론(中觀論, Mādhyamika system)의 세계적인 권위 T.V. R. Murti교수에게서 1년에 걸쳐 배운 불교 중관론 강좌였다.  인도 Banaras에 있는 Hindu University 교수인 그가 마침 방문 교수로 와서 그가 직접 쓴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를 교재로 하고, 강의 중 산스크리트 원문을 줄줄 외우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간 그의 강의도 훌륭했지만 특히 그의 책은 눈을 확 뜨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절대적인 것은 공(空, śūnyatā)이다. 절대적인 것에는 인간의 사견(邪見, dŗṣṭi)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텅빈 상태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에 갖다 붙이는 온갖 범주, 온갖 교설, 온갖 이론에서 해방되어 직관과 통찰, 프라즈나파라미타(般若波羅蜜多)로 직접 꿰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집에서 소파에 앉아 그의 책을 읽다가 크게 소리를 지를 번 했다.  공 사상이 이렇게 심오할 줄이야!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렇게까지 생각했을 수 있을까. 골수를 깨고 들어오는 듯한 지적 희열을 느꼈는데, 그 순간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외에 인도 베단타 철학, 도가 사상, 선불교 사상, 산스크리트 등을 이 분야의 전문가 교수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또 다른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깨침’이었다.  “깨침(悟)이 없는 선(禪)은 빛과 열이 없는 태양과 같다.”고 한 스즈키(D. T. Suzuki)나, 자명종 시계는 그것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시계를 해부해서 그 기계적 구조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등의 지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종교의 핵심은 깨침이라는 것, 모든 종교적 교설이나 의식(儀式) 등은 깨침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 손가락을 보지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는 표월지(標月指),  깨침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 등이 내 마음에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공부를 통해 그 문제의 책 <예수는 없다> 서문에서도 “아, 종교라는 것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구나!”하고 외치게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확신에서 학생들에게 러시아의 무명 저자가 쓴 󰡔예수기도󰡕를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과제도 내고, 내 자신도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번역 서문에 “종교라는 것이 결국 교리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체험과 깨달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동양종교를 전공으로 택하고 동양종교 중 하나로 한국의 동학(東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고 선언하고, 그 하느님과 내가 하나다.  내가 곧 하느님이다(人乃天). 나만 하느님이 아니라 내 이웃도 하느님이니 이웃 섬기기를 하느님 섬기듯 하라(事人如天)라는 기본 가르침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보다 윤리적으로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그날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 종교사에서 본 동학의 위대한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로도 썼다.
학위논문 재료 수집차 일본 동경대학으로 가는 길에 한국에 들려 수운회관을 방문했다.  교령님을 만나 내가 본 동학, 그 놀라운 가르침, 21세기 대안 종교로서의 훌륭한 자격 등을 말씀드렸다.  (은퇴하고 한국 가서 천도교로 초청되어 여러 번 강연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책이나 강연을 통해 동학을 널리 알렸는데 그것이 공헌이라고 수운 선생 기일인가의 큰 모임에서 상패와 금일봉도 받았다.^^)  
(계속)

47 comments
이흥복
종교를 진정 알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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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상
동학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지금 유튜브에서 도올선생이 자신의 저서「동경대전」강의를 하시면서 그간의 해석들이 "개똥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외람되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 대한 평론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후학을 위해 늘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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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덕상 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잘 풀이하였으리라 믿습니다. 개똥도 약으로 쓰일 때가 있으니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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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배
May be an image of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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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광배 제 책을 읽으셨군요. 제가 여기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던 세계종교 과목을 우리 말로 정리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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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배
쉽고 재미있게 잘 설명해 주셔서 잘 보고있습니다! 좋은 글도 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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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 Kim
더덕을 까면서 찐득이는 손으로 읽느라 덕분에 천천히 읽으며 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살짝 제가 늦게 태어났지만 같은 세대거든요. 감사하면서 다음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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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Hum Kim 읽어주시고 다음을 기다려 주신다니 고맙고 박수와 두 개의 느낌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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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기독교 종교적 이해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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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경일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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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구
교수님
좋은 글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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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이화구 잘 보셨다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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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
외국에서 동양종교를 공부하신 여정에 놀랍습니다. 귀한 책 기도: '예수의 기도'를 주기도문으로 흔히 알고 있기에 '예수기도'로 구별되지 않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후속 편 '계속'이 기다려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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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안광덕 맞아요! 예수기도로 해야겠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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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sub Choi
비판적 사고를 강조했던 제게는 殺佛殺祖가 깊이 꽂이네요.
덕분에 무더위를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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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Hyunsub Choi 세상에 제 글을 읽고 무더위를 이기시는 분이 계시다니 가히 불가사의입니다만 그렇다고 해 주시니 아무튼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제나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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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락
6. 동양종교 사상에 눈뜨다.
종교를 배운다는 말이 낯설게 들립니다.
종교는 삶이고 과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스스로 더 큰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주의 광대함에서 인간의 존재를 본다면
인간은 인간일 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적도 없습니다
눈 속임이나 거짓일 것입니다
인간은 한 없이 연약하고 미개합니다.
그리고 무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부처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의지하고 추종하는 것이 종교가 되선 안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만이 자기를 위할 수 있습니다.
목사 신부 승려가 기도해 준다고
부모가 정성을 드린다고
천국에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자기 생각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를 깨닫고 대자연 앞에 겸손해야 생명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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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최형락 좋은 생각, 좋은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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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 Cheol Lee
저는 선생님이 번역과 주해를 하신 도덕경과 장자를 늘 곁에 두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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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이걸 책으로 발전시키시면 너무나 좋을듯 합니다. 우리에게도 카렌 암스트롱 못지않은 세계적 종교학자가 계시다는 자랑스러움이 넘칩니다!
 · Reply · 2 w · Edited
Kang-nam Oh
김민웅 아이고 황공무지로소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만 새겨 듣겠습니다. 우선 에큐메니안에서 옮겨 싣겠다고 하네요. 고맙습니다. 저도 김 교수님이 꿈꾸는 대한민국이 되길 언제나 기원하고 있습니다.
 · Reply · 2 w
김민웅
Kang-nam Oh 감사해요!!!
 · Reply · 2 w

양재성
교수님.
소중한 고백 감사드립니다..
 · Reply · 2 w
전병렬
용수의 중관사상을 본격으로 공부하셨네요. 종교가 교리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과 깨달음이라는 통찰에 공감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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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감사합니다. 지넌 중관학을 몇 년째 공부하는 '척'만 하고 있답니다. ㅎ
 · Reply · 2 w
김창부
제 경우도 나름의 신적체험과 깨달음/각성으로 인해서....
차츰차츰 교리적 준수나 심지어 이단타파(?)애도 큰 관심이 없고...
특히 교리+수행(결국 고행)마져도 타자들을 향한 보여주기/의인시하려는에서 넘어서니 그야말로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의 축복누림으로 지금여기에서 작은 천국을 고백하며 또한 지극히 미력하지만 자원하여 만들어가며 그러니까 이생후 영생/저천국은 아예 언제부턴가 다 맡껴버리고 지금여기 오늘을 담대하게 한걸음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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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부
 · Reply · 2 w
김 종희
교수님의 글 많이 배웠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서경보 스님 생각이 났습니다. 경동교회에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강원용 목사님과 경동교회 직원 모임이었고 외부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서경보스님께서 한 시간 선 강의를 하시고 이어서 단전호흡 강의 실습을 하셨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성경도 불경 등 경전이 필요없고 명상을통한 직관으로 진리에 이르고 경전은 진리를 가르키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시면서 견월망지 손가락을 보지말고 손가락이 가르키는 달을 보라. 연못에 비친 달을 보지말고 하늘에 뜬 달을 보라는 강의를 듣고 신선한 깨우침을 얻었던 기억입니다.
칼 발트의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 선포된 말씀 과 같은 맥낙임을 어렴프시 느꼈습니다. 오 교수님의 예수는 없다도 그런 글이 아닌가요.샬롬
 · Reply · 2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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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30 tsasJulery Sapdtofuansrdt onrm0e6:0dl7uo ·



막간을 이용하여
<내 생애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 - 자전적 고백 (4)>를 이어가기 전에 막간을 이용하여 웃기는 이야기 하나 올립니다.
------
학위를 받고 1977년 초 미국 오하이오주 옥스퍼드(Oxford)라는 아담한 도시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Miami University) 종교학과에 나 혼자 가서 한 학기 가르친 일이 있었다. 이 학교는 Oxford라는 도시 이름과 Miami라는 학교 이름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Florida에 있는 Miami 대학은 University of Miami라는 이름으로 구별된다. Miami University는 한 때 배우 겸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이낙훈(李樂薰)씨의 출신학교이기도 하다.
그 때 그 대학 종교학과 비서의 친정집에서 하숙을 했다.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그 넓고 조용한 집에 친절한 노부부와 고3 딸만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한 방을 얻어 혼자서 열심히 명상을 했다. 아침 저녁으로 냉수마찰도 해가면서....
그 집 Hatton이라는 노부부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으로 남편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여러 공장들에 기술 상담을 하는 분이었다. 부인은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하는 뜻으로 "Not that I know of"라는 말을 자주 하여 나도 그 말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인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라는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 신문에 보니 매일 시(詩)한 편씩이 실려 있었다. 나도 재미삼아 시를 하나 써서 그 신문에 기고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시가 그 신문에 나왔다. 원고료도 그 당시 돈으로 30불인가를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얼마전 서류 정리를 하다가 그 신문 조각이 나왔다. 1977년 6월 24일자 29면 하단에 나와 있었다. 약간 부끄럽지만 이왕 찾은 김에 한 번 옮겨본다.

The Root
To the Eternal Root,
I now return my heart,
Quietly
Sitting.
My heart,
Filled with mysterious heat,
Bursts into tranquility.
O! New Life in the Root.
A fresh New Life, cleansed with
Tears of Joy!
-----------
지금 우리말로 옮겨 보면
---
뿌리
영원한 뿌리를 향해
이제 내 마음 그리로 되돌린다
조용히
앉아서
내 마음 알지 못할 뜨거움으로 가득차
터질 듯 평온 속으로 잦아든다.
아, 뿌리에서 찾는 새로운 삶
기쁨의 눈물로 씻어진
신선한 삶이여

----
지금 보니, 그 당시 의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줍잖게 일종의 오도송(悟道頌) 흉내를 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짧은 시에도 도덕경, 장자, 참선, 정좌, 파스칼 등의 요소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결코 내가 도통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30세 전후 crucial age에서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 Richard Maurice Bucke의 주장이나, 30대 초반에 ‘개인화 과정(Individuation Process)’이 시작된다고 한 Carl G. Jung의 이론에 따르면 나도 그 당시 35세 청년으로 뭔가 특별히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학위를 끝내고 논문 쓰는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상태에서 마음 가는대로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며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이런 시가 나온 것 아닌가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인생에서 하나의 전기(轉機) 비슷한 것이 마련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한 번 웃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May be an image of text that says "The Root To the Eternal Root, I now return my heart, Quietly Sitting. My heart, Filled with mysteriousheat, Burst into tranquillity."
Woo Fa, 이찬수 and 30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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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ophyeon Min
    ㅎㅎ웃음이 아니라 진지하게 음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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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t1Sapg AugeusoSotn saohrote s0u9fhcfl:3fhsdd0  · 
다시 막간을 이용하여
<자전적 고백> 시리즈을 올리는데 어느 신문사가 자기들의 신문에 그 글을 싣도록 해달라고 하고, 덧붙여 자기들 신문에 글이 나온 다음에 페북에 올려 주면 좋겠다 하여 지금 일단 멈추고 있습니다.  그 동안 막간을 이용하여 다른 종류의 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
함석헌 선생님의 선생님인 다석 류영모 선생을 두고 “기독교 종교혁명가로 볼 것인가 기독교를 벗어난 사상가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어느 단톡방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 솔직히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 거들라고 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물론 그가 기독교로 시작했으니 그를 기독교인이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는 20대에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정통 기독교의 울타리를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혁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보다 기독교가 주는 전통적 신앙관을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라 봅니다.  그의 사상의 지평이 그 울타리를 넘어서 확대된 것이지요.  하느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요3:16을 하느님이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그의 씨앗을 심으신 것이라고 한 그의 풀이만 보아도 그것이 기독교 성경절을 인용했지만 정통적 기독교 생각에서 벗어난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간직했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만은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대신 그 너머의 ‘속내’를 보려고 했습니다.  사람(l)이 땅(ㅡ)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십자가라는 해석, 올라간 예수를 내려오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라갈 생각을 해야 된다는 재림 해석,  대신 죄를 속해준다는 대속 대신에 스스로 죄를 없애야 한다는 자속 신앙 등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도덕경도 읽고 불경도 읽고 톨스토이도 읽었습니다.  무엇을 읽던 그는 그의 사유를 통과해서 얻은 결론을 나름대로 우리말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그를 기독교인으로 혹은 기독교를 혁명하려 한 기독교인이라 한정해서 규정하는 것은 어딘지 어패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제가 북미 학생들에게 세계종교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저보고 저의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너희들은 내 종교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어보면 불교를 가르칠 때는 불교인 같고, 노장을 가르칠 때는 도교인 같고, 기독교를 가르칠 때는 기독교인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잘 보았다.  “나는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지만 지금 나의 종교는 일종의 ‘메타 종교적(meta-religious)’이다”하는 식으로 농담반진담반으로 대답합니다.  꿀벌이 어느 한 종류의 꽃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기 주위의 꽃들에서 꿀을 따듯 한다고 할까요. (꿀에도 유채꿀, 아까시아꿀 하는 것을 보면 벌들이 어느 한 종류의 꽃에서만 꿀을 따는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이 비유은 out입니다.^^)
저는 어쩌다가 특정 기독교 교파에 속한 집에서 자라 그 교인이 되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일찌감치 그 교파는 물론 기독교도 떠났고, 학위를 받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는 그 교파나 기독교가 설정한 가르침의 울타리 안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진해서 교적 탈퇴를 시청해서 지금은 아무 종교에도 정식으로 속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저는 캐나다에서 퀘이커 모임에 자주 참석하고 밴쿠버 한인 캐나다연합교회에도 출석하여 그 교회 교인명부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LA 형님 댁을 방문하면 형님 따라 옛날 그 교파 교회에 가서 옛친구들도 만납니다. 연세대, 감신대, 한신대, 서울신대, 장신대 같은 신학교에 가서 강연도 하고, 불교 사찰에도 참석하고 거기서 설법도 하고 강연도 하고 참선도 하고 백팔배도 합니다. 천도교에 가서 여러 번 강연도 하고 같이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도 외우고 원불교 원음방송국에 가서 2년간 매주 방송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남녀 평등을 강조하고 복비는 것을 미신이라 하여 거부하는 성덕도라고 하는 이색적인 한국 종교 모임에 가서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 그 종교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를 저 자신도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아마 믿음이 좋다는 기독교인들은 제가 기독교인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이 믿는 식의 신을 믿지 않는다고 ‘무신론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불려도 저는 상관할 것 없습니다.  (최근 캐나다 연합교회 Gretta Vosper라는 어느 여목사님은 스스로 자기를 ‘무신론자’라 공표했지만 교단에서는 이와 관계 없이 목회를 계속하게 허용했습니다.)
제가 <예수는 없다>를 써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믿는 ‘그런 예수는 없다’고 하면서 제가 새롭게 이해한 대로의 기독교를 전하려 한 것이었는데, 물론 의외의 환영을 받기도 했지만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에게서는 기독교인이 쓴 글이라 볼 수 없다고 배척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정통 근본주의 기독교의 신관, 기독론, 성서해석방법, 선교론 등을 모두 “애정을 가지고” 뒤집어엎으려 했습니다. 부제가 “기독교 뒤집어 읽기”이고 영어로 Reading Christianity Inside Out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꿈에도 혁명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자전적 고백’ 시리즈에 자세히 언급됩니다.)
이와 같은 저의 정체성을 이 토론방에 계시는 분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규정하실지 궁금합니다.  꼭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저를 어떻게 규정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자신은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죽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어느 교회 목사님이 장례 주례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있는 ‘아하! 모임’ 사람들이 농담삼아 자기들이 맡아 하겠다고 했지만, 캐나다에서 죽으면 그건 불가능하겠지요. 물론 캐나다에도 ‘길벗모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저를 종교적 무국적자나 다국적자 혹은 경계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감히 다석 선생님과 저를 대조하다니.  그러나 다석 선생님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저의 입장과 비슷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 세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든 산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가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In the depth of every living religion there is a point at which 
         the religion itself loses its importance.)
                                                                   - Paul Til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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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comments
Jong-hun Kim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See more
 · Reply · 1 w
임원
자유인 혹은 경계인 !!!
 · Reply · 1 w
Charlie Lee
一以贯之하시고 밝고 높고 깊으시네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 Reply · 1 w
김영
신앙과 사상을 어느 하나의 잣대로 규정하려는 것은 매우 무모합니다.
오교수님께선 오직 진리의 자유로움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단은 진리의 반대입니다.
 · Reply · 1 w
김인범
종교와 탈종교의 긴장이 신앙이기도 하고, 그것이 왜 그런지 그 내용이 복음이라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이해합니다.
 · Reply · 1 w
이흥복
좋은 글 감사합니다.
 · Reply · 1 w
Panim Kim
다석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기독교에서 어긋났고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다"고 한다고 그분이 잘못되는 것 아닌데..
한국적 기독교니 어쩌니 하면서 약간의 비평도 허용치 않고 그를 우상화하려는 사람들. 특히 감리교에 많이 있어서 우려의 마음이었습니다
 · Reply · 1 w
Kang-nam Oh
Panim Kim 그런가요? 저는 몰랐는데요. 감사합니다.
 · Reply · 1 w

이건주
김수영 시인의 다원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수영의 1950-60년대 시에서 예수나 부처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함석헌, 유영모 선생의 영향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교수님의 종교적 다원주의에 공감하고 지지합니다.
 · Reply · 1 w
Kang-nam Oh
이건주 김수영 시인에게 그런 면이 있었군요. 저는 김수영 시인을 잘 모르는데, 어느 분이 제 글이 김 시인의 글과 닮았다고 하더군요.^^
 · Reply · 1 w

김현호
네 고맙게 읽었습니다.
달리 평할수 없습니다.
 · Reply · 1 w
고준환
제가 보기에는' 부처는 부디스트가 아니고'예수는 그리스도이지'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다석선생님은 기독교로부터 시작했으나' 한국이 낳은 그리스도가 되셨읍니다. 기독교도 가운데' 훌륭한 크리스찬도 많으나' 말로는 근본적'정통적' 전통 예수교를 주장하나' 실제는 적그리스도인 경우가 흔합니다. 오교수님은 좋은길을 걸어오셨읍니다. 앞으로는 학설차원을 넘어' 절대적 대각이나' 중생체험을 하시기바랍니다. 다
 · Reply · 1 w
Kang-nam Oh
고준환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일차적으로 종교학자이지 수행자는 아닙니다. 너무 큰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Reply · 1 w
고준환
Kang-nam Oh 오교수님.미안합니다. 제가 부담을 드린것 같아서요.오교수님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십수년전 심재룡교수와 함께 오교수님을 만나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읍니다. 저는 또'성경엔없다' 라는 책도 썼읍니다. 저는 종종 오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배우고' 오교수님이 종교학자이시나' 그한계를넘어' 자유자재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외람된 글을 썼읍니다.다시는그런일 없을것이고'미안합니다.또 감사합니다.늘 건강하소서.
 · Reply · 1 w

고준환
사.
 · Reply · 1 w
태영최
유교전공자께서 아직도 ㅡ예수는 없다 ㅡ하시네요
예법에 따르면 ㅡ예수님은 안계신다 ㅡ하셔야.
 · Reply · 1 w
안광덕
제도종교에 갇히지 않고 참 영성종교를 보여 주신 선생니이십니다. 한참 제가 신학공부 할때 서울 하늘 아래 계시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 Reply · 1 w
Kang-nam Oh
안광덕 아쉽군요. 이렇게 페친이라도 된 것이 기쁨입니다.
 · Reply · 1 w

Joon Suh Giulio Park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라 하였습니다.ㅎㅎㅎ 뭐라 부를 이름이 없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 Reply · 1 w · Edited
Kang-nam Oh
박준서 재미있네요. 한세대 계속 가르치게 된 것 축하합니다. 그곳에서 도덕경 같은 것 들먹이면 위험한 것 아닌가요?^^
 · Reply · 1 w
Joon Suh Giulio Park
Kang-nam Oh 감사합니다!!!
다행히 개인적인 신앙의 색채에 대해선 제재가 있지는 않아 도교적 삶을 지향하는 천주교인으로서 재직해도 큰 문제는 없답니다.ㅎㅎ
 · Reply · 1 w
Kang-nam Oh
박준서 아, 그런가요. 금시초문인데 다행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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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 Suh Giulio Park
Kang-nam Oh 딱히 기성교단에서 이단으로 찍은 데만 아니면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저야 오피셜로 천주교인이지만 도교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라 뭐 측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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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ltSd4nd ddSAugupost ttuatuenSsoongr 1em8:4d6u  ·
 
또 다시 막간 - 종교와 세속화의 문제
제 <자전적 고백> 시리즈 4를 올리기 전 또 다시 막간을 이용한 글 하나 올립니다.  한국의 <플라톤 아카데미>라는 곳에서 8월11일 Zoom으로 강연하라고 해서 그 때 할 이야기들을 대략 적어보았습니다.  질문자로 제 후배이자 제자인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가 등장하는데, 질문 중 하나가 현대의 세속화가 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 페친들에게도 관심사가 아닐까 하여 여기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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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런데 전통 종교의 의미 없는 교설이나 예식 등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전통 종교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통 “세속화”라 합니다.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불어닥치는 탈종교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을 6일만에 창조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면 그걸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현대 교육을 받은 현대인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이런 전통적인 종교들이 설득력 있는 대안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처럼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을 궁극관심으로 여기는 결과, 정신적인 가치를 등한시하는 경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세속화”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오늘날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세속화가 급진적으로 퍼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적 용어로 하면 이런 세속적인 가치를 신(神)인 것처럼 떠받드는 우상숭배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세속화는 참된 의미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화(secularization) 혹은 세속주의(secularism)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람직한 세속화"입니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등을 저술한 이스라엘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그의 최근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2018)에 세속주의의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적 종교에서 강조하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증거(observation and evidence)에 기초하여 진리를 추구한다. 
--어느 단체나 인물이나 책만이 진리를 독점한 수호자인 것처럼 그런 것들을 신성시하지 않고 진리가 고대 화석화된 뼈들이나 저 멀리 은하계나 통계자료나 다양한 인간들의 전승 기록 등 어디에서 발견되든 그 진리를 그대로 인정한다.
--이런 저런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세상에 편만한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자비(compassion) 때문에 윤리적인 삶을 살아간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하는 것은 신의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살해하는 것이 생명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간이 비윤리적인 것은 그것이 신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을까를 알기 위해서 과학적 진리(scientific truth)를 중요시한다. 과학적 연구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자비는 맹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자유(Freedom)가 보장되어야 하므로 자유를 중요시한다.
--세속적 교육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증거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의견을 의심해보고 우리 스스로를 재점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역사는 무지를 인정하고 어려운 질문을 제기할 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모든 사람이 아무런 질문도 없이 한 가지 대답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보다 더욱 융성할 뿐만 아니라 더욱 평화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들이 가진 진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보다 더욱 폭력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보통은 여러분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질문을 제기할 수 없는 대답들보다 훨씬 훌륭하다.”(People afraid of losing their truth tend to be more violent than people who are used to looking at the world from several different viewpoints.  Questions you cannot answer are usually far better for you than answers you cannot question.) (제 생각: 현 교황은 근본주의는 그 자체가 폭력적이다고 했습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태도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뜻이겠지요.)
--세속주의자들은 책임(responsibility)을 중요시한다.  신이 이 세상에 관여하여 착한 사람은 상주고 악한 사람은 벌준다든가 우리를 굶주림과 역병과 전쟁에서 보호해준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에 불행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역병을 관리하고 기아를 물리치고 평화를 유지하는 등 현대 사회가 이룩한 성취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것이 신의 보호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들의 지식과 자비를 계발한 덕택이다.  물론 범죄나 종족말살이나 생태 파괴 등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도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라 받아들여야 한다. 기적을 바라며 기도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물어보아야 한다.(제가 항상 주장하는 바입니다.  "관여하는 신"을 상정하면 가난한 사람을 보아도 신이 가난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따라서 신을 열심히 믿는 사회는 복지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문판 209-215)
만일 이런 것이 세속화라면 우리는 이런 세속화는 종교의 본래 의도와 부합하는 것으로 환영해야 하고 나아가 이런 세속화를 촉진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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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comments
Gokin Moo-Young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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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1tSpn5oomnusohredi  · 
계속 막간 이용!
자전적 고백을 올릴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계속 막간을 이용합니다.
오늘 플라톤 아카데미의 부탁에 따라 <인생교과서, 함께 찾는 삶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와의 대담 녹화를 끝냈습니다.  같이 한 얘기는 거의 다 이곳 페이스북에 올렸던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초입부분에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여기 올린 적이 없는 것 같아, 그 부분만 여기 옮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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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종교가 무엇인가요?  종교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요.
답: 종교가 무엇인가 대답하기 전에 왜 종교를 연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국의 Oxford의 인류학자 R. R. Marret에 의하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를 라틴말로 “homo religiosus”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를 다 돌아본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무슨 형태로든지 종교가 없는 부족이나 족속은 없고, 그에 비해 종교적인 낌새를 보이는 동물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동물과 비교해서 homo sapiens, 지적인 인간, homo faber, 공작하는 인간,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등으로 부르면서 이런 것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비교하는데, Marret에 의하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의 유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종교를 모르고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학, 심리학, 철학, 문학, 사회학, 경제학 등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인데 종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인식 하에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심리학, 사회학 등과 함께 “종교학”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종교학을 독일어로 Religionswissenschaft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종교과학, science of religion입니다.  제가 캐나다 유학 갔을 때만해도 종교학과의 영어명이 Department of Science of Religion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영어권에서는 science라는 말이 주로 자연과학을 의미하기 때문에, 시카고 대학 같은 곳에서는 종교의 역사적인 면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History of Religion(종교사학)이라 부르고, 영국에서는 비교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Comparative Religions(비교종교학)이라 불렀는데, 요즘은 Department of Religious Studies 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에 대한 정의는 그야말로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독일의 종교사상가 루도르프 오토의 라틴어 정의,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 “엄청나고 매혹적인 신비”라는 것이고, 독일계 미국 신학자  폴 틸리히의 “ultimate concern” “궁극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추상적인 정의를 설명할 시간은 없고, 제가 그동안 생각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참된 의미의 종교란 우물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것.  우물안에서 볼 수 있는 것만 전부인 줄 알고 있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고 아하! 하고 놀라는 것, 이런 것이 종교가 가져다 주는 경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좀더 이야기를 확장하면 이 개구리가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 밑에서는 그 주위에 있던 화단이나 집들을 보다가 좀 더 올라가면 저 멀리 호수도 보이고 다른 동네도 보입니다. 다시 하아!를 외칩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저 멀리 바다도 보이고,  다시 아하!  또 더 높이 올라가면 바다 건너에 있는 섬들도 보이고 다시 크게 아하!  이제 이 개구리는 우물 속에 있던 개구리가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개구리입니다.  이처럼 종교는 아하 체험의 연속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무엇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되어 자유스러워지는 삶을 살도록 해주고, 사물을 더욱 높고 넓은 시각에서 보고 우리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능하게 해 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를 좀 어려운 말로 고치면 사물의 실상, 혹은 실재(Reality)의 보이지 않던 다른 면, 혹은 다른 차원을 발견하여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이 결과 옛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특수 인식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실상의 더 깊은 차원에 눈뜨므로 삶이 그만큼 자유롭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종교학자 프레드릭 스트렝이 말하는 종교의 정의가 “a means to ultimate transformation(궁극 변화를 위한 수단)”인데, 제가 생각하는 종교 정의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transformation, 변화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시험 문제로 꼭 내는 것은 transformation과 information을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경전이나 교설이나 예식은 일차적으로 transformation을 위한 것이지 information(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불경에서 과학적이나 역사적 정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제공하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피카소가 눈이나 코가 이상스럽게 그려진 그림을 그린 것은 생물학적인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슨 변화를 주려는 것이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 중 한 분이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2015)도 종래까지의 “인습적 기독교”(conventional Christianity)가 “천당/지옥(Heaven/Hell)”을 강조하는 종교였다면 이제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newly emerging Christianity)는 “변화(transformation)”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책 중 많은 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기독교의 심장>이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쓰다보니 대담했던 것하고 좀 달라졌습니다만 별 상관 없겠지요.^^
14 comments
Hyunsub Choi
교수님의 팻북 종교 강좌가 너무 재미 있어요.
무료 강좌니 더욱 더요. ㅎㅎ
다음 강좌가 기다려지기는 처음 같네요.
감사합니다.
 · Reply · 13 h
Kang-nam Oh
Hyunsub Choi 아이고 감사합니다. "무료 강좌"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 Reply · 4 h

윤종모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가 됩니다.😍👌👌
 · Reply · 13 h
김재성
세계에 종교학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혹시 아시는지요? 오강남 종교학자님?
 · Reply · 12 h
Kang-nam Oh
김재성 세계에 종교학자가 몇명인지는 모르지만 매년 미국과 캐나다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열리는 미국 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AAR)에 제가 캐나다로 유학온 이래 은퇴할 때까지 거의 매년 참석했는데, 그 때 보면 참석하는 학자들 수가 대략 8천명 내외였습니다.
국제종교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the History of Religions, IAHR)는 매 5년마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는데, 제가 참석할 때 보면 AAR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 같았습니다.
 · Reply · 4 h

Bill Park
공감
 · Reply · 10 h
Youngluck Sheen
교육의 목적(purpose of education)과 흡사한 부분이 많군요.
 · Reply · 10 h
Kang-nam Oh
Youngluck Sheen 그런가요? 구체적으로 어느 면에서 그런지가 궁금하네요.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면에선가요?
 · Reply · 4 h

Kang-nam Oh
어제 대담 끝나고 올리느라 피곤했던지 오늘 보니 오타가 몇 개 있네요. 공유하신 분들은 오늘 수정한 버전으로 바꾸시면 좋겠습니다. 예기->얘기, 영여->영어, 그의 중->그의 책 중.
한 가지 덧붙이면 종교학을 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종교 전통에 정통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종교학의 창시자라 여겨지는 Max Müller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종교학의 또 한 가지 조건은 "신앙고백적(confessional)"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하는 식의 접근은 종교학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몇 가지 다른 전제조건이 있지만 이정도에서 그칩니다.
 · Reply · 5 h ·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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