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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5

경건주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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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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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주의(敬虔主義, 독일어Pietismus 피에티스무스[*]영어Pietism 파이어티즘[*])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에 형성되었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극복을 위해 17세기 유럽 서방교회 개신교회의 독일 교회에서 형성되기 시작되어 유럽 전역에 기독교인다운 경건 생활과 실천 중심의 종교 운동이다. 서방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개신교 내부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적 개념보다 기독교인의 생활과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이자 종교 운동이다. 독일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과 미대륙까지 퍼진 기독교 활동이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평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유럽 계몽주의 운동의 배경으로 상호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고, 유럽 철학사상과 정치적 사상에도 그 영향을 남겼다.[1]

경건주의 용어[편집]

경건주의는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책자에서 등장하였고, 경건주의자에 대한 개념도 경건주의 계열의 책자를 통해서 나타났다. 


경건주의는 경건에 대하여 이론을 연구하는 개념적 활동이 아니라 개신교도의 경건한 생활을 형성하고,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생활 운동이자 사회적인 기독교 운동이었다. 경건주의의 개념은 매우 넓은 개념으로 경건주의 사고, 독서와 실천, 상업 활동, 사회 개화, 종교적 경험, 학교 설립까지 광범위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영향을 주었고, 계몽주의 발전의 기독교적 배경을 마련하였다.[2]

경건주의는 기독교인의 경건하고 올바른 생활과 가치관에 대한 운동이었고, 실제적인 생활을 개선하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기독교인의 생활과 가치관, 이성, 경험을 경건하도록 실천하는 과정이 따르는 종교이자 사회 운동이었다. 따라서 기존 유럽의 잘못된 관습, 특히 반이성적 활동과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데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 등에 대한 반성 및 개선을 강조하고 실천으로 옮겼다. 이 실천과정과 가치관은 유럽의 계몽주의 운동의 동시대적 배경이며, 기독교 운동으로 계몽주의의 실천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교회를 통한 경건주의는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 운동과 활동이 발생하도록 하였다.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과 활동은 개신교 경건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로 경건주의 사회적 발전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3]

경건주의 발생 시대 배경[편집]

16세기에 서방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찬성파인 개신교회와 반대파인 천주교회로 나뉘어 국가별 또는 지역별로 구분되었다. 유럽의 중심사상과 사회 기본이었던 서방교회의 분리는 유럽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에서도 개신교도와 천주교도의 대립으로 완전히 나뉘었다. 16세기가 지나고 17세기를 거치며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 천주교회와 개혁 찬성파 개신교회는 완전히 교파로 분리되어 각자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형국으로 변화하였다.

서방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서방교회의 양분 이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이했다.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회는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으로 서방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개혁 반대파인 천주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치며 서방교회는 분리되고 두 교파가 서방교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호 대립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 사회에서 교리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회생활과 실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부의 성향에 따라 개신교도의 상인협회와 천주교도의 상인협회가 따로 설립되었고, 교파 차이로 인한 동일 지역내에서도 사회적 교류 단절이 나타나기도 했다. 서방교회는 종교개혁의 찬성과 반대 입장에서 점차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대립하였고, 그 교리가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분리, 연합하는 기준이 되었다.[4]

개신교회 내부에서도 교회의 정통성, 즉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적 강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개신교회의 설교와 선교도 기독교인의 태도와 실천보다는 교리의 인정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점차 개신교회는 정통을 강조하는 교리 중심이 되어갔다. 개신교의 제도 중심화, 교리 중심화가 신앙의 실천, 변화의 경험을 막는 것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고, 이 반성은 독일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내부에서 경건주의로 발생하여 점차 전 유럽 전역과 영국과 미주의 개신교회들로 퍼져갔다.

비판[편집]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저서 기독교 선언에서 경건주의가 플라톤적 영성 즉, 세계를 영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이등분하는 데에 비판하였다. 즉, 인간 존재의 총제적인 측면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지성적인 면을 간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 개인적인 삶과 전체 문화에 비극을 가져왔다고 주장하였다.[5]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경건주의". 《맑스사전》, [1]
  2.  정인모. 〈계몽과 경건의 변증법: 18세기 독일 사상의 지형도〉. 《신앙과 학문》. 2018. Vol. 23(3). 243-261.
  3.  카터 린드버그. 《경건주의 신학과 신학자들》. 이은재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4.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종교개혁의 역사》. 이은재, 조상원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
  5.  Schaeffer, Francis A. (Francis August) (1981). 《A Christian manifesto》.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8-19쪽. ISBN 0-89107-233-0.

2021/10/04

05 | 인권이 만난 사람∷평화학자 박성준 선생 | 인권┃ 2005.02 04

2006.02.통권30호.pdf

05 | 인권이 만난 사람∷평화학자 박성준 선생 | 인권┃ 2005.02 04
거룩한 듣기, 만남과 소통을 위한 진리 실험 __평화학자 박성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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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울 앞을 지나가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여기 살고 있는 사람과 만났고나 자신과도 만났습니다.”

박성준 66 선생은‘찾는 자’이다. 진리를 찾는 자는 현실에
서 물러나지만 언제나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삶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한다. 찾는 자는 현실 너머를 지향하지만 그 지
향이 겨냥하는 곳 또한 현실이다. 진리는 현실 너머의 것이
면서 동시에 현실의 것이기에, 찾는 자도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를 찾는다.

근래 몇몇 세인의 입에 박성준 선생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것은 그 자신의 일 때문이었기보다는 안사람이자 바깥
사람인 한명숙 의원 때문이었다. 여성부와 환경부의 장관
이었던 한 의원이 당권 주자로 나섰을 때, 일간지의 어느
정치부 기자는‘남편 13년 옥살이 중 나눈 러브스토리
유명하다’고 적었다. 세상의 표면적인 관심이란 언제나 그
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 안찬수사진 | 김윤섭

아주 오래된 길찾기

박성준·한명숙 부부의 삶의 역정은 그대로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다. 지난해 10월 24일, 한명숙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미니 자서전’이라는 글을 올렸다. 한명숙 의원은 이 글에서 자신이 사회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은 대학 시절 기독교 학생운동 단체인‘경제복지회’에서 만난‘나의 키다리 아저씨, 나의 동지이자 내 사랑의 총합’인 박성준 선생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 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명숙 의원을 처음 만나던 청년기부터 박 선생은‘진리의 길’이 무엇인지 찾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길찾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어찌 보면,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13년 반 동안의 옥살이, 출옥 후 안병무 선생이 이끌던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으로 지내던 일, 한국신학대 졸업, 한백교회를 개척해 8년여 동안 목회자로서 활동했던 일, 일본 도미사카 그리스도교 센터의‘동아시아의 선교와 신학’연구 그룹 책임자,
일본 릿쿄오대 신학박사, 그리고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교 유학, 펜들 힐에서의 체험 등등의 이력이란 모두 이런 길찾기의 궤적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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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생이 옥살이를 한 기간은 1968년 7월부터 198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까지 13년여의 세월이다. 말하자면 1970년대를 꼬박 저 차가운 감방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박 선생은 릿쿄오대 문학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한국현대사의‘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70년대’의 역사적·창조적 소산이며‘70년대 한국사회’를‘장’으로 한‘현장신학’이다.”“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해석학적 열쇠다”라고. 박 선생은 민중신학을 통해 삶의 현장으로서의 1970년대 한국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던 것이리라. ‘민중의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 민중을 통한 성서의 재발견과 성서를 통한 민중의 재발견이 1970년대 한국민중의 수난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민중신학 형성과 전개에 대한 이러한이해는 그것 자체로 역사 속의 한국민중을 온전히 껴안고 하나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침묵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지금 그의 이름 밑에는
‘비폭력 평화의 물결’상임공동대표, 
‘아름다운 가게’공동대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겸임교수 평화학, 신학 ,
 ‘움직이는 학교’대표 등이 씌어져 있다. 

이것들은 서로 호응하면서 오늘 박 선생이 다다른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박성준 선생이 지금까지 찾아낸 진리는 어떤 것이며, 오늘 찾아 나선 희망은 무엇인가.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도종환, ‘처음 가는 길’에서 과연 박성준 선생이가 닿은‘낯설고 절박한 세계’는 어디일까. 선생을 만나 뵈러 길을 나섰다.


1월의 네 번째 일요일. 찾아간 곳은 서울 신촌동의‘종교친우회 퀘이커 서울모임’집이었다. 
오전의 예배모임이 끝난뒤 이어지는 퀘이커리즘 공부모임에 참석한 뒤에 말씀을 여쭙기로 했다. 공부모임은 조촐했지만 한마디 말조차 새로워지는 분위기였다. 방 안으로는 겨울 빛이 따사롭게 비춰 들었다. 그 방의 한쪽 벽에는 함석헌 선생과 함께한 퀘이커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반대쪽 출입구 쪽의 책꽂이에는 웨슬리 전집, 우치무라 간조의 한국어판 전집, 김교신
전집, 함석헌 전집, 그리고 퀘이커와 관련된 묵은 영어책들이 꽂혀 있었다. 공부모임의 텍스트는 하워드 H. 브린튼의「퀘이커 300년사」1952년 초판, 우리말로는 함석헌 번역본이 있다 와 같은 지은이의「퀘이커 350년사」의 영어본. 
이 두 권의 책에 각기 붙어 있는 질문서 queries 였다. 그것은 50년이 지나는 동안 질문서가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비교 연구, 말하자면 역사적 탐구의 한 과정이었다. 박 선생은 이 공부모임의‘돕는 이 facilitator ’였다.

“남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데 시간을 전혀 쓸 수 없다든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신앙반성 질문서는 신앙인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가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공부모임 중에는 중간중간 이방인을 위해 퀘이커의 역사라든지, 그 예배모임과 사무모임의 특징, 그리고 퀘이커들이생각하는 시민적 책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지곤 했다.

공부모임은 1분 정도의 침묵명상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되었다. 이 묵상과 고요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묵상은 말하자면, 온갖 의식과 예배 절차와 직업 목사를 다 없애 버린 뒤에 남겨 놓은, 퀘이커의 형식 아닌 형식이다. 이 날 읽었던신앙반성 질문서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살아 있는 침묵 living silence 이 있습니까? 그 살아 있는 침묵 속에서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여러분들이 함께 뭉쳐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까?”
그침묵은‘알곡이가득찬침묵’이다. 이침묵과고요를회복하려는것은어찌보면현대문명에대한크나큰싸움이다.
“알곡이 가득 찬 침묵의 경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현대의 큰 문제입니다. 맨송맨송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있단 말입니까?”
공부모임을 정리하기 전에 박 선생은 작은 피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마이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누구나 말할 자격과 말할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은 마이크와 인연이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나는 마이크를 잡을 자격이 없다’고 자기를 비하하여 말합니다. 어떤이의 말이 크고 또 어떤 이의 말이 작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말이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자기 속의 마이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말은‘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는 퀘이커의 믿음이기도 하다. 모임에 참석한 이들도‘자기 속의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마이크를 상징하는 작은 피리는 말하자면 서로‘속의 빛’을 비추는 도구인 셈이다.
삶으로 말하고 거룩하게 듣자공부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돌아가고 박 선생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차마 무엇을 여쭙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박 선생은 말씀을 아꼈다.

“삶으로 말하라 Let your life speak 는 말이 있잖습니까? 저는 가능하면 저의 삶을 드러내는 것을 피해 왔습니다.”

삶의 굽이굽이를 여쭈어 본다는 것은 구차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만 박 선생이 써 놓은, 많지 않은 글 가운데 생각나는단어가‘귀향’이어서 그 귀향에 대해서 여쭈었다.

“소월은‘불귀 불귀 다시 불귀’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느 글에선가 귀향을 말씀하셨습니다.”
“20대 때에는 물에도 빠지고 불에도 빠지는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20대 후반에 투옥돼서 40대에 나와 보니 한국사회가 너무나도 변화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인권, 생태, 환경 등 다양한 문제가 여러 형태로 제기되지만, 그때에는 정신적으로 외로웠습니다. 과연 내가 나왔나 하는 느낌이 들었죠. 한마디로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19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뒤 일본에 이어서 미국까지 건너가서 공부하던 중 펜들 힐에서 2년간 공부하며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거울 앞을 지나가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2000년 7월 박 선생은 기쁜 마음으로‘귀향’했다.
“그때서야 나는 여기 살고 있는 사람과 만났고 나 자신과도 만났습니다.”
그 귀향을 가능케 했던 것은 하나의 체험 때문이었다.
“케이커들 중에는 감옥을 경험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저의 이야기를 듣는데, 남의 이야기를 그렇게 경청하는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아, 남의 말을 이렇게도 들을 수 있구나 하는 체험이었죠. 그것이 퀘이커를 공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지금은 그분이 누구든지 오로지 그분 이야기를 그분의 이야기로 듣게 됩니다.”
환갑의 나이에 귀향하면서 박 선생은 작은 선물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그 선물꾸러미에는‘거룩한 듣기’라는 것과‘움직이는 학교’라는 새로운 꿈이 들어 있었다.

“겸허하게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여 듣는 것.”박 선생은 이것을‘경청 敬聽 ,mindful listening ’혹은‘거룩한 듣기’라고 부른다. 이‘거룩한 듣기’는 선생이 지난 5년간 해온 만남과 소통을 위해 펼쳐온 진리실험인‘움직이는 학교’의 중심 원리다. ‘거룩한 듣기’는 박 선생의 깊디깊은 체험과 반성과 성찰과 길찾기의 고갱이다.
거룩한 듣기라는 원리로 볼 때, 기독교나 민중신학도 반성의 대상이다. “기독교는 말하는 종교지 듣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입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에는 이 경청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 보니 민중, 씨?에게 귀 기울여 듣는마음의 여백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거룩한 듣기는 새로운 교육에 대한 비전도 포함하고 있다. ‘움직이는 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 사이의 이분법적인 분리가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 학생이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아니라 선생이 학생을 찾아간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거룩한 듣기는 사회운동 내부의 변화를 요구하며,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을 촉구한다. “세상의 변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교회와 사찰이 수없이 많은데도 왜 세상은 이토록 변하지 않을까? 그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의 소통이 막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면서도 진정으로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와 자식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직장 동료가, 이웃과 이웃이 마치 처음인 듯 다시 만날 수 없을까. 그래서 관계를 새롭게, 깊게 할 수는 없을까.”

어떤 사람이 말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고,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배려하는 것. ‘돕는 이’로서 박성준 선생은 계기마다 ‘마중물’을 조금 부어가며 마음 깊은 곳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진실의 샘물이 솟구치게 도와준다.

박 선생은 현재의 삶의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 새 삶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는 이, 오늘의 학교나 교회,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이, 뭔가 대안이 될 새로운 모임과 공동체, 새로운 사회, 새 세상을 갈망하는 이들이 작은 모임을 꾸려 움직이는 학교를 만들고 거룩한 듣기를 실천하기를 권하고 있다. “따뜻하게 깨어 있는 마음으로 서로 내면의 빛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고.

박 선생이 마음속의 디아스포라 흩어져 사는 사람들 를 끝내고 귀향한 뒤 펼친 일들 가운데에는‘비폭력 평화의 물결’과‘아름다운가게’도 있다.

‘비폭력평화부대 Shanti Sena’는 본디 간디가 구상한 것이었다. 1999년 5월 헤이그에서 1907년에 이어 두 번째로 평화회의가 열렸을 때, 평화운동가, 학생, 학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은“평화는 인권이다”“이제야말로 전쟁을 끝내야 할 때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평화부대에 대한 개념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2002년 12월 2일 무장하지 않은 다국적 시민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분쟁 지역으로 들어가서, 학살과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억제하는 활동을 펼침으로써, 세계 평화를 이루는 데 공헌하고자 하는‘비폭력평화부대 NP, Nonviolence Peaceforce ’가 발족했다. 박 선생이 이끄는‘비폭력 평화의 물결’은 이 국제NP의 한국지역모임이다. 하지만 박 선생이 구상하고 펼치는 평화운동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문턱이 낮은, 부담이 없는, 아주 대중적인 평화운동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비폭력 평화의 물결은 결코 투사들의 모임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과 아주 평화롭게 이야기하고 삶의 경험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가게’도 그렇지만 이 모임도 녹색보다 더 부드러운 연
둣빛으로 상징된다.

박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작은 꾸러미에 담아온 선물은, 그러니까 자기 성찰과 내적 쇄신, 관계의 변화와 세상의 변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다. ‘움직이는 학교’라는 꿈의 꽃씨는 지금 민들레꽃씨가 들녘으로 퍼지듯, 풋풋한 생명력으로 조금씩 새로운 생활운동, 새로운 신앙운동, 새로운 교육운동으로 퍼져가고 있다. ‘비폭력 평화의 물결’이나‘아름다운 가게’는 그 꿈의 꽃씨가 어떻게 꽃을 피우는가, 꽃피울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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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3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장영호 2021 논평자 이수호 김말순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0930

장 영 호(전 씨알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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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의 신앙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리라.1)

함석헌의 시 <대선언>의 일부 입니다. 젊은 날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함석 헌 선생님이 기독교를 떠났나보다 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과 독서의 시간이 얼마 간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기 시작 했습니다. 풍류신학자 유동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 유교, 기독교 세 종교가 들 어왔는데, 각 그 종교에서 나왔으나 경계를 넘어선 이가 원효, 율곡, 함석헌이라 하였 습니다. ‘넘어서다’라는 우리말은 참 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시 연구서,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에서 명쾌한 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주의 또는 교파주의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 봄직 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애독해온 불후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고침 글인데, ‘대선언’의 전후 시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보입 니다.

고향 평북 용천에서 어린 시절 장로교회를 다닌 함석헌은 13살까지는 순박한 기독교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2)

삼일만세운동 사건을 뼈아프게 겪은 이후,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함석헌은 생 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과 동서양의 명품서적 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교회에 점점 비판적이 되어 멀어져 갔으리라 보입니다.3)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김교신의 소개로 그는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 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고 한 우치무라의 신앙 을 세상에서는 무교회주의라 불렀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형태로 성경과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관이 특색입니다.4) 그러나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도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에 집착하여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모습에 함석헌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1) 대선언, <<수평선 너머>>, 일우사(1961), 170~171

2) <씨의소리> 1970년 4월호. 함석헌전집4.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207~8.

3) 위 책, 214.

4) 위 책,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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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 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5)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제 제자가 선생과 같 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그를 스승으 로 대접하는 도리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을 두고 말 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고귀하다. 그러나 진리 는 더욱 고귀하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로 몰려 죽음의 순간을 겪었던 함석헌은 동료와 제자들의 도 움으로 1947년 극적으로 월남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현동완 선생이 주도하는 목요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퀘 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놀라움 속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무교회에서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6) 시련과 고독 속에서 맞은 1960년은 함석헌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준 한 해 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 았다. 누가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망은 아니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 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7)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힘써 번역한 <<예언자>>, <<사람의 아 들 예수>>가 함석헌에게 신생의 빛을 비춰 주었다면, 1961년 겨울, 한국의 첫 퀘이커 이윤구님의 권유로 퀘이커 서울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또 하나의 출구였습니 다. 훗날 영국과 미국 퀘이커 친우봉사회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 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함석헌의 평화운동이 세월을 딛고 끝내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위 책, 219~220

6) <<퀘이커 300년>>, 함석헌전집15, 352

7) <<예언자>>, 함석헌전집16. 213


2. 퀘이커(Quaker)신앙과 함석헌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 는 외침은, 2천 년 전 예언자 요한이 빈 들에서 외친 소리의 데자뷰로 들려옵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만해질 대로 살찐 초대형교회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 고 있지 않습니까?

“퀘이커는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 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1983년 봄, 함선생님이 어느 잡지기자와 인터뷰에서 하신 말 씀입니다. 저는 1979년 매주 함석헌의 <노자 모임>을 다닌 인연으로 퀘이커 모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 기간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퀘이커 모임’에서 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시간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고요예배(silence)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늘 꼿꼿 이 앉은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계십니다. 함께하던 이들 모두 고요 속으로 흐를 무렵,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감화(vocal ministry)를 하셨 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관해 일러주신 도움말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면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하니, 그럴 땐 넘어가는 해를 연상하면 도움 이 될 거요.” 선생님은 예배를 마치면 당시 어지러웠던 시국에 관련해서 성경말씀 풀 이를 해주심으로써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퀘이커 신앙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보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영국에 머물렀던 기간(172728)에 작성한 서신 가운데에, 퀘이커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지 무려 네 차례나 퀘이커에 관한 편지(On the Quakers)를 모국의 지 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퀘이커 같은 특수한 집단의 교리와 역사는 생각 있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내게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다. 나는 우선 가톨릭 신자들이 신교도들에게 늘 해온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그 퀘이커 는 말했다.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 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 요.”

나는 이 불경한 말에 화가 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퀘이커교도는 온화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요한 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8) 이미 여러분들이 보았겠지만, 퀘이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에 의하면 첫 퀘이커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종교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부패하 기 시작하여 천 육백 년 동안 타락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소수의 퀘이 커들이 은거하면서 신성한 불꽃을 보존해오다가, 마침내 1642년 영국으로 이 빛이 퍼져나갔다 는 것이다.9)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낡은 제도에 붙들려버린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함선생님과도 인연이 깊은 미국의 퀘이커 신학자 하워드 브린튼(H. Brinton)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의미 깊은 주장을 펼칩니다. ‘내적 체험에 근 거를 둔 신앙 신비주의’와 ‘교리와 상징으로 신앙을 표방하는 신학자’ 간의 싸움이라 는 것입니다. 그는 <<퀘이커 3백년>>에서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그래도 퀘 이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 Fox, 1624-1691)를 선두로 퀘이커 신앙이 싹틀 무렵 신비주의는 초미의 관심사였습 니다.

처음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이듯이 오순절 성령과 더불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퀘 이커 신앙이 단지 신비주의에만 머물렀다면 ‘기독교 제3의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처럼 세상 사람들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새 힘과 빛을 얻는 신비체험을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체험이 개인에게만 머물러 버 린다면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리라 봅니다.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래 서 퀘이커 신앙은 개인 신비주의를 넘어 단체 신비주의(group mysticism)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는 말합니다. “참 신앙이란 각 개인의 체험이자 모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영과 만나는 일입니다.”

사실 퀘이커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것’ 이란 주장처럼 반대를 받아 온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의 예정설 과는 서로 상치됩니다. 퀘이커 반대자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 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고 하면서 반박했지만, 18세기 가장 탁월한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R.Barclay)는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때에는 ‘깨달음’의 복음인 <도마복음>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8) Voltaire, Philosophical Letters, (New York : The Liberal Arts Press,1961), 3~4 9) 위 책, 11

우리는 빛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단순히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 다. 몸은 동물적이고, 마음은 이성적이나, 속에 있는 빛은 신(神)적 입니다. 진리의 빛 은 그 이성을 지도해야 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 야 한다는 것이 초기 퀘이커 신앙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속 빛’(light within, inner light)은 화해와 일치의 근원입니다. 이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이 빛에 가까이 이를수록 사람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입니다. 조지 폭스의 이상은 평화와 조용함(quietness) 이었습니다. 퀘이커 평화사상 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요한 14:27). 퀘이커들은 두 길을 통해서 평화주의의 입장에 도달했는데, 하나는 우리 양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며,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힘 가운데 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힘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원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보편 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적인 추상론도 띠지 않은 단순성에 있습니다. 이 단 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최근 서양 또는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이들(가톨릭 퀘이커, 불교인 퀘이커)이 함께 평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조지 폭스 시대의 퀘이커 운동이 탈자적(ecstatic), 신비적 운동으로서 시대를 가로지른 급진적인(radical)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10)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년 전 저는 한국 기독교회에 관한 우울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가나안 기독교인’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서 지명의 ‘가나안’이 아니라 ‘안 나가’를 거꾸로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조가 놀랍게도 함석헌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 나가’의 현상 유지로 타락해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로지면 안 나가가 되지 않나?11)

10)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315

11)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전집3. 33~34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 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 성이 필요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12)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것이지 민중의 종교 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 다.13)

이런 연유로 선생님은 종교도 늘 거듭나야 한다며, 새 종교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끝으로, 새겨둘 만한 퀘이커 일화 한 토막을 올리며 마칩니다. 미국 초창기 펜실베이 니아 지역을 거룩한 실험(HolyExperiment)으로 이끌었던 장군 윌리엄 펜(W. Penn) 이 어느 날 퀘이커 집회를 마치자 조지 폭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답니다. "내가 칼 을 차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보기에 어떻습니까?" 폭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 불편하다고 느낄 때까지만 차십시오.”

12)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전집3. 35~36 13) 위 책,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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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열린강좌 제6강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9.30.(목) 논평자 이수호

“퀘이커를 기다립니다.”

오늘 훌륭한 강의를 해 주신 장영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 단히 드리면,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지난 2015~2016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에 연수파견을 갔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름 교 회와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 는 갈증과 의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함석헌의 글은 몇십년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백이자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함석헌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무교회와 퀘이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 와 도봉구 함석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앞서 퀘이커를 경험하신 정지석 목사님, 김조년 교수님 등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대전에 몇 번, 신촌에 한 번 정도 밖에 참석해 보지 않았으나, 기회가 된다면 퀘이커를 집중 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 핵심을 잘 소개해 주신 장영호님 의 강의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함석헌이 민주화 투쟁에 직접 나섰던 인생 후반기의 기간이 퀘이커를 만나 도움을 받고 교제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입니다. 김성수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09.)”라는 논문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 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 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함석헌이 당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무 나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미국 펜 들힐과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 해 주었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는 등 아무도 함석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위상을 높여준 것이 영미 퀘이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이미 성숙기에 이르렀던 함석헌의 씨사상과 300년 전통의 퀘이커 신앙이 서로 깊이 공감하고 공명하였다는 차원을 넘어서, 씨사상과 전체론의 깊이가 완성되는 데 서구 퀘이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함석헌을 만든 것은 사실상 퀘이커였다고 하 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둘째, 함석헌 사후 한국 퀘이커의 현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보수교회에서 도 중고생과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어 10여 년 후에는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 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퀘이커도 새로운 회원들이 증가하기보다는 기존 회원들 이 고령화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신앙 유산을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함석헌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부 부유한 퀘이커 회원만의 노력이 아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보통 회원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도움 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 지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최소한의 조직은 갖추 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 에 퀘이커를 찾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해외 퀘이커의 현황은 어떠한지 최근의 기록과 통계를 알 수 있을까요?

셋째, 누가 퀘이커인가, 퀘이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퀘이 커모임을 후원했다거나 펜들힐에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을 수 있으나, 내가 퀘이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퀘이커 회원이지만 지금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이 퀘이커라는 정체성을 굳이 외부에 드러내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퀘이커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퀘이커 신앙에는 공통적인 신조나 교리가 없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만큼에서만 퀘이커를 설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퀘이커주의에 공감하고 혼자서도 나름대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퀘이커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요? 세계의 다른 퀘이커들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가나안 성도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 찬가지일까요? 씨사상에 공감하면 함석헌을 기리고 계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던 소소한 생각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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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에 대한 논평 -

김말순


먼저 논평을 맡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원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그냥 모태신앙으로 초대 교회 신앙인 창조의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죄사함에 대해 성경을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강의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촌 퀘이 커모임집에 살게 되면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퀘이커에 대한 공부 를 하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회에 나오게 된 것도 선생님을 좀 배워서 알아야겠다는 욕심으로 2016년부터 모임이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누구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서울종교친우회(퀘이커) 회원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읽으면서 논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에 대해 많은 서적들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고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 내용에도 잘 설명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진면목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누구인가?” 하고 인터넷에 물어봤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을 알려 줬습니다.

“취래원 농사꾼 황보윤식 농부(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의 “함석 헌 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 9. 1)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 함석헌의 사상은 무지개 사상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 보-로 색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색의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게 무지개의 본질이다. 함석헌은 무지개처럼 뚜렷한 한 가지 사상 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분명 우리 시대에 “사상의 무지 개”를 놓고 간 분이다. 다양해져 가는 열린 시대에 필요한 융합철학의 무지개를 놓고 간 사상가다. 

▷서양의 그리스도 사상(퀘이커) 을 기본으로 동양의 불교사상, 공맹사상, 노자사상, 양명사상 그리 고 다시 서양의 실존주의 사상과 아나키즘까지 융합하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지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함석헌의 무지개 사상은 문화 의 다양성 강조와 하나의 인류를 지향해 가는 곧 미래사회의 세계 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의 귀감을 보이면서 세계 주의를 실천해갔다. 

세계주의는 곧 평화주의 사상이다. 세계평화는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가능하다 전쟁종식을 위하여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을 반대해야 한다. 곧 국가(정부)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를 검색했을 때 위의 글을 읽고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아!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을 좀 더 깊이, 많이 알고 논평 을 맡은 입장에서 답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엮으신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를 읽었고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빼놓고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 논 평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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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 9~12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 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을 주셨다

※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 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종교친우회=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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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을 옮긴이의 말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 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 때 사람 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 마다 활발 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 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 병령을 반대하고 나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 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 주는 법령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 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 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 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찌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 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 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애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가 있었는 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 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기는 하지만 그 영상은 아직 태평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형상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서울에서 그들 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무슨 팔자로 그랬는지 은혜로 그랬는지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태어났 으면서도 이날 껏 전쟁을 몸으로 당해 보지는 못했는데 6・25전쟁이 터 져 3년 동안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지며 그 악독하고 끔찍한 맛을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니 내 한 말이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전쟁 전 YMCA 큰 강당에서 주일마다 말을 했는데 언젠가 똑똑한 내 정신을 가지고 “이놈의 서울이 남대문서 동대문까지 환히 내다뵈도록 확 타버렸음 좋겠다.” 한 일이 있 었습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정말 그대로 된 꼴을 보니 부 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말이 꼭 그대로 들어맞을 만한 무 슨 힘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터럭만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말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정수리에 칼이 박히듯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는 김명선 박사의 고마운 뜻으로 지금은 없어진 세브란스의 에비슨관을 빌려서 주일 모임을 계속했는데 그 어느 날 거기 퀘이커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아더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퀘이커를 본 처음입니다. 그는 그 때 우리 모임에 나오던 이윤구 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미국 퀘이커 봉사회에 서 전쟁 후의 한국을 돕기 위해 30명 가량으로 된 구호대를 보내어 군 산 도립병원의 복구 사업을 맡아서 했는데 그 때에 이윤구 님은 그들을 만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퀘이커가 되었고 자기 생각에 나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해서 내게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레지 날드 프라이스, 플로이드 슈모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제 나는 평화주의나 양심적 거부만이 아니라, 퀘이커라는 사람들을 ‘친구(friend) 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때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몇 번 나간 일이 있었고 아주 나가게 된 것은 1960년 나의 주일 모임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매우 좋다 생각했지만 나는 나의 생각하는 바를 고쳐야 할 어떤 필요도 아직 느끼지 않았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하게 됐으므로 마침 기회가 좋다 해서 필라 델피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퀘이커 수양기관인 펜들힐에 요청해서 공식 여행을 마친 후 6월 부터 연말까지 일곱달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했 습니다. 그리고는 밝는 해 1월부터 석 달을 또 영국 버밍햄에 있는 같은 성질의 학교인 우드브룩대학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의 대 체의 모습을 좀 짐작하게 되었고 흥미를 더욱 느껴 돌아올 때는 책도 더 러 구임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퀘이커가 되자는 생각은 역시 없었습 니다. 나는 어느 기성교파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퀘이커의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노드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퀘이커대회 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태평양 연회모임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 그런 변동의 동기는 본래 말로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떠냐?” “그렇다. 퀘이커가 됐담 된 것이고 안됐담 안된 것이다.” 합니다마는 그 중의 중요한 점을 말한 다면 나는 그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 정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 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 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 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 됐습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합니다.

퀘이커라는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넓으면서도 회원이라 할 때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절대로 회원 되는 것을 권하는 일 없습니다. 퀘이커 는 전도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그 점은 다른 종교와 참 다릅니다. 그것 은 그들의 직접적임과 체험과 자유를 극단으로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입 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회원이 되는 데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강권하지 않으니만큼, 차별 하지 않으니만큼, 도리어 더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나도 후에는 그 생 각이 옳다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 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 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 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또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하여간 나도 그들의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시비를 들을 각오를 하고 퀘이커의 회원이 됐습니다. 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 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 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 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 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나니 퀘이커를 더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연회 초청여행으로 태평양 연안 산디에이 고에서 포틀런드에 이르는 여러 퀘이커 모임과 가정방문을 마친 다음에 다시 5년 전에 일곱 달 동안을 이날까지의 내 생애에 가장 행복스런 대 목이라고 하면서 지났던 그 자유와 평화의 동산을 다시 봤을 때의 감격 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누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 의사를 충분히 발표도 못하 면서도 아무 부자유도 불안도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조용히 맘대로 생각 하고 거닐었던 것입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도서실의 책이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고 강당 구석에 있던 어항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갔던 아들이 어머니 품 으로 돌아온 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머물러 있던 방에 가니 바로 어제 있었던 듯했습니다. 5년 전 내가 그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창 밖 능 금나무 가지에 철새란 놈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서 손으로 만질 거리 에 있어서 날마다 대화를 했었는데 그 새둥지가 비바람에 부서는 졌지만 그대로 옛 모습을 짐작할 만큼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갔던 새끼인 듯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갔던 새끼가 돌아온다면 자라서 올 것인데 나도 자랐을까? 가지가지 생각이 풀려나는 내 가슴속에서는 용천 옛 집에서 어머님이 넘어가는 저녁볕 밑에서 잣던 물레에서마냥 평화의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러한 속에 있으면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한 것이 이 책 읽기와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이 책을 저자인 선생님 손 에서 받았고 때마침 그 일본말의 번역자인 다까하시 여사도 있어서 그 일본말 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도 선생님을 존경아니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의 사상・지식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 알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습 니다. 그 인격과 믿음도 여러 십년을 미국, 독일, 일본에서 가르치고 봉 사하고 한 경력을 살펴보면 자연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도 이미 여든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아주 건강해 깊고 조리 있는 강의를 했고 아침 예배시간이면 그 허연 머리털과 길다랗게 뻗친 흰 눈썹 밑에 광채를 쏘는 눈을 빛내며 앉은 모습이 성자다왔고 이따금은 뜻 깊은 감 화를 주곤 했었습니다. 5년 후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와서 각별한 결심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됐습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것은 꼭 내 이야기같이 생각됐습니다. 어쨌든 내 생각의 역사를 다 알기나 하는 듯해서 어떻게 내 소리를 썼을까 싶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선생님을 뜰에서 만나면 “선생님, 그거 제 이야기 같습니다”했습니다. 나만 그렇겠습니까? 남도 그런 사람이 많 을 것입니다. 그만큼 참입니다.

그래서 첨에는 내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서울 있 는 모임의 벗들에게 이것을 읽도록 해야겠다, 그뿐 아니라 일반 다름 사 람에게도 읽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퀘이커주 의만 아니라 일반 신앙의 참고로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퀘이커는 본래 식학이 없지만, 이 책도 신학 토론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실지로 신앙 살림을 해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community)에 관한 이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 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 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 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 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 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담 또 한 가지는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 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 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장 오랜 모임집에 가보았는데 모일 때마다 기록한 회록이 300년 전 시작하던 맨 첨에서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체제에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변해가는 세상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제 자신을 가누어가기에 미처 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들 얼마 아니 되는 퀘이커만이 수세가 아니라 공세입니다.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자 선생님 말씀대로 미래의 종교가 반 드시 퀘이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를 건져가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은 퀘이커 같은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하는 종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 됩니다.

펜들 힐에 있을 때 이미 거의 절반이 옮겨졌었는데 그 후 나라에 돌아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제 와서야 겨우 인쇄에 부치게 돼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해에 부인을 앞서 보내셨고, 건강도 한때는 퍽 걱정들 을 했는데 요새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이 와서 기쁩니다. 다만 진심으 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말씀은 한국판이 나오기를 위해서 내가 감히 말씀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자진 노력하시어서 출판자금을 얻어 주셨는데 이날까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늦게 만들었고, 더구나 한마디 편 지도 직접 못 드려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자유로 쓸 줄 알았다면 벌써 몇 십 장도 편질 드렸겠습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제 마음을 그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옮겨놓은 글도 의심하실는지 모르나 읽기와 쓰기는 다릅니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가지고 했으 니 안심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본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 지 않았나 해서 두려운 마음 많습니다. 있거든 알려지는 대로 고치겠습니다.

이 책이 보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미래 역사의 설계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점이 있으 시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970년 5월 9일 함 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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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알라딘: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지은이),김진 (엮은이)

알라딘: 너 자신을 혁명하라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지은이),김진 (엮은이)
오늘의책2003-03-10




7.0 100자평(1)리뷰(6)
품절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248쪽

책소개
함석헌은 한국 근대사를 서술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역사, 언론, 종교, 정치와 사회운동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장기려 박사,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 원경순 선생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함석헌이 남겼던 말과 글들을 모아 놓은 '명상집'이다. 학문으로서 그의 사상을 파고드는게 아닌, 그의 글 속에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명상과 실천'의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5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 책은 참된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글, 생명과 전체에 대한 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 의식에 관한 글, 편견과 자만에 빠지지 않은 참된 종교와 믿음에 관한 글,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서문

1. 참 찾아 나선 혼
2. 생명의 우주와 하나되어
3. 이 역사에 씨알로 서서
4. 미완성의 하나님
5. 아름다워라, 우리의 삶이여


책속에서



네 맘을 좀더 가라앉혀라. 좀더 속을 들여다보아라, 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숨을 좀더 죽이고 생각을 좀더 고요히 해 보아라.
새벽 밝기 전에 명상의 낚시로 잡은 산 고기가 있는 사람은 종일 피곤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고 독수리처럼 영원을 향해 올라간다. 그 사람은 낚는 줄도 모르게 많은 영혼을 낚을 것이다. -42쪽 - 이누아
이제 기도해라, 새로 내는 네 맘의 뿌리가 지구의 중심을 뚫도록까지 기도를 끊지 마라, 맘 박기를 쉬지 마라. 네 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라. 네 가슴 속에서 빛이 환하게 날 때까지 열도를 내리지 마라. 맑아져서 새벽 이슬 같을 때까지. 향기로워서 향기로워서 아침 연못의 연꽃 같을 때까지, 동짓달 밤하늘의 별보다 더 거룩하도록, 그래, 거룩해야 한다. -57쪽 접기 - 이누아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이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것은 내 몸이다. -85쪽 - 이누아
진리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체험은 몸으로 앎이다. 몸으로 하기 전엔 참이 아니다. 마음이 옹근(통일) 것이 함(행동)이요, 함이 맺힌 것이 몸이다.-196쪽 - 이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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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함석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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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접기


최근작 :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큰글씨책] 함석헌 수필선집 >,<함석헌 수필선집> … 총 59종 (모두보기)

김진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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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때 성경말씀 읽기에 빠져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길을 가고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대학 재학 중, 예수전도단(YWAM) DTS를 마치고 대학부 간사를 했다. 신앙 수도공동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 이십 대 중반에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에서 생활하며 공부했다.
총신대학, 한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프랑크프트 대학 신학부에서 신학과 종교학의 경계학문인 종교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독일 유학 중, 인도 푸나에 있는 “드 나빌리 칼리지”에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성과 수련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여러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강의했고, <크리스챤 아키데미>에서 근무한 후, 인도선교사로 생활했다. 한국 최초의 도심 속 기독교명상 센터 <예수도원>을 개원했고, 40대 초반 인도를 오가면서 10년을 생활하며 “씨알아쉬람”을 개원했으며, 실롱(Silong)에 있는 마틴 루터 대학에서 연구 방문교수로 생활했다.

(재)밀알복지재단 사목으로 사역했고, 생활수도 공동체인 <예수나무공동체> 꿈꾸고 있다. 현재에는 북한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주로하는 (사)글로벌블레싱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면서 동시에 예수향남교회 협동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신부와 스님과 함께하는 <삼인삼색> 토크쇼로 KBS <아침마당>, <여유만만> 출연했으며, 현재 SBS 라디오 <시사특공대>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진의 영성시리즈>, <나의 질긴 외로움을 만지시는 이>, <하나님과 내통하라>, <간디와 대화>, <예수공부법> 등 20 여권의 책이 있다,
E-mail : kimsanjin1@naver.com 접기


최근작 :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예수공부법>,<간디와의 대화 어떻게 살 것인가> … 총 3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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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단편적인 글 모음으로 보여주기는 무리인듯.
madwife 2015-10-3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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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너 자신을 혁명하라


씨알 함석헌 명상집.

책 제목만 보면 흔히 유행하는 자기계발서 같지만, 내용적으로 깊이가 일반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다. (책 내용 중 `몸은 언제나 꼿꼿이 가지자`, `늘 하늘을 우러러보자`, `닭 울기에 일어나 하루 살림 준비를 하자`, `날마다 글 읽기를 잊지 말자`, `먹고 입음을 간단히 하자`, `내 몸 거둠을 내가 하자`, `때때로 산과 바다에 가자`, `술, 담배를 마시지 말자`, `산 물건을 죽이지 말자`, `하루 한번 땀을 흘리자`, `시골을 지키자`, `빚을 지지 말자`라는 삶에 대한 조언도 있기에, 자기계발서의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혁명(革命)은 개인의 혁명이 아니라, 민중(民衆) 전체의 혁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변화를 말하는 자기계발서와 큰 차이가 있다. 마치,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중에서 일반 서적은 `修身` 측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이 책은 `平天下`까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책의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지만, 동양 고전, 성경, 불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책 곳곳에 고전에 대한 인용과 설명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 나 같은 초보자들은 초반에 질려 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초반부에 나오는 한 단락이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요, 영원 무한하다. 그러나 사람은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하자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가 가운데(中)를 말했고, 고르게 함(和)를 말했다. 가운데란 여기나 저기가 아니다. 여기면서 저기요 저기면서 여기인 곳이다. 고르게 함이란 함이나 아니 함이 아니라, 하면서 아니 하고 아니 하면서 하는 지경이다.
그래서, 노자가 비임(虛)을 말했고 됨(化)을 말했다. 비임이란 있음이나 없음이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음이다. 됨이란 달라짐이나 그대로 있음이 아니다. 달라지면서 그대로 있고 그대로 있으면서 달라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를 졌고 새로남을 보여 주었다. 십자가란 죽음이나 삶이 아니다. 죽음으로 살고 삶으로 죽음이다. 새로남이란 육이나 영이 아니다. 육이면서 영이요 영이면서 육이다.
그래서, 석가가 반야(知慧)를 말했고 해탈(解脫)을 말했다. 지혜란 안다 모른다가 아니다. 앎으로 모르고 모름으로 아는 자리다. 해탈이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면서 저 세상이요 저 세상이면서 이 세상인 삶이다. (p39)˝

˝사람에게 있어서 자아라, 영혼이라, 아트만이라, 인격이라 하는 것이요, 전체에 있어서는 하늘이라, 하나님이라, 브라만이라, 생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둘이면서 하나요, 아버지면서 아들이요, 절대면서 상대다. 거기 생명의 정신의 한 큰 운동이 있다. (P43)˝

이 책의 장점은 내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동안 새로움 깨달음을 접한다는 감동을 주기에,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끝까지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라 생각된다.
또한, 많은 인용이 있음에도, 그러한 인용이 저자의 `지식 자랑`이 아닌, 우리에게 `一以貫之(하나로써 꿰뚫음)`하는 친절함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단편적인 명상집이지만, 큰 주제별로 묶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사람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의 뜻(天命)`을 알게 된다.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 스승이 바로 `씨알`이다.
우리는 `씨알(생각함)`을 통해 하늘의 얼을 우리 속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이러한 `씨알`을 각자의 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씨알이 있다.
씨알을 찾는 것은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찾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구체적인 실천 사항은 서두에 정리한 내용임)

하늘의 전체는 `하나님`이지만, 역사의 전체는 `씨알`이다. 생각을 통해 깨닫게 되면, `나`와 `너`가 다름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씨알`이 `하나`되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天心은 民心으로 나타나며, 민심의 표현은 `악에 대한 반항`, `폭력을 쓰지 않는 싸움`, `조직적인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민심의 표현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와 싸워 나가야 한다.

책에 있는 대강의 내용을 정리했는데,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 대한 이해도 많이 부족했기에, 놓치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 많이 아쉽다. 이러한 부분은 시간을 두고 더 깊은 공부를 통해서만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자신의 선택한 하나의 길을 통해 전체를 보려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던 기쁜 시간이었다.

˝<中庸>에서는 중(中)은 천하지정리(天下之定理)라 했지만 이(理)가 이(理)대로만 있다면 죽은 이(理)다. 중(中)은 필연적으로 발(發)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하고야 만다. 그러면 벌써 만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곧 사람에게 있어서 빛이지만, 빛이라 할 때 벌써 거기 어두움이 있었다. 싸움은 거기서부터 벌어진다. 힘씀이 필요하다.(P47)˝

˝나는 물론 불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불교에 대해 무엇을 아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안다.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안다. 그것은, 부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예수를 통해서 안다. 영원하신 이는 마치 소금과 같은 것이다. (P81)˝

ps. `인(仁)`에는 한자로 `씨(核)`의 의미도 있는데, 이러한 공자의 `인(仁)`사상과 `씨알사상`도 아마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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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6-14 공감(3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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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사상과 자기 혁명....


이 책은 함석헌 사상을 그가 남긴 글을 따라 재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전기가 아니다.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편향적인 시각없이 오로지 그의 생각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사상의 주요내용을 담은 글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와 삶의 변화를 위한 책이라고 엮은이가 말한다.

'너 자신을 혁명하라'라는 제목의 말은 함석헌 옹의 씨알사상으로 드러난다. 씨알은 민의 역동적인 생명력이며 그것은 늘 변화한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보다 널리 퍼지며, 자신을 버림으로써 더욱 크게 산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영원한 존재와의 만남도 현실의 삶에서의 민중의 처지와의 만남도 이루어낸다.

늘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세계와 밖으로 나가는 세계와는 불연속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어울릴것 같지 않은 두 세계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위대한 삶들을 만날 때면 늘 그 불연속면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하였다. 그들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연속면....

하지만 그 두 삶을 동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서도 꺽이지 않고 좌절되지 않는 내면의 밝은 빛이 있었고, 그 빛은 사회적 현실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꺼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만 했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처럼....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놓아두고, 그가 가진 생명의식과 씨알 사상은 나의 개인사적 관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관심의 한가운데를 뚫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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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3-10-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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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로 노력한다



이누아 2009-08-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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