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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최현민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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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2010-03-23 1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2009년 5월 크리스찬아카데미 김지하 발표문에 대한 논평문--

최현민 (서강대)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넘나들며 섭렵한 김지하 시인의 글을 접하면서 그의 사유와 고뇌의 흔적을 본다. 시공의 역사 안으로 녹아들어 현실의 문제를 풀어갈 해법을 제시함을 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으로서 현실을 깊이 통찰치 못한 채 살아온 나 자신을 만난다. 김지하 시인의 사유를 다 따라가지 못한 체, 그저 공감된 부분을 중심으로 나의 성찰과 함께 토론해 볼 점들을 나누고자 한다.

1. 일상 안에서의 ‘모심’을 향한 회심

김지하 시인은 ‘모심’의 문화혁명에 대해 말한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화두, 이 복잡한 현실문제를 풀어갈 해법은 ‘모심’ 한마디에 있다는 것이다. ‘화엄개벽의 모심’에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묘수(妙修)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 사회문제의 해법으로 김지하 시인이 제시한 ‘화엄개벽의 모심’에 대해 몇 가지 나누고자 한다.
김지하 시인은 ‘모심(侍)’을 동학본주문의 첫 글자, 곧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이진각지불이자야(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로 풀어 말한다. 그는 여기서 내유외유(內有外有)를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우주진화 내면에 의식의 증대와 외면의 복잡화’로, 각지불이(各知不移)를 ‘현생인류가 화엄세계(不移)을 각자 제 나름으로 깨달아 실현함’으로 풀이한다.
이를 떼이야르 사상과 비교해보면 떼이야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출현이 지닌 가장 큰 의미를 ‘반성의 능력’으로 본다. 우주는 반성이전의 단계를 몇 십 억 번 시도한 후 인간 곧 반성력을 출현케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됨의 정체성이 반성의 능력 곧 ‘회개’할 줄 아는 능력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 곧 자각해야 하는가?
김지하 시인의 사유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각지불이(各知不移)’ 곧 각자 제 나름으로 화엄세계를 깨달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겠다. 그 세계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 속에서 회개와 하느님 나라가 지닌 불가분의 관계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한다. 그 징표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바로 그 섬김의 세계, 모심(侍)의 세계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심(侍)이나 섬김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섬김(모심)을 현실 문제를 풀어갈 해법으로 제시하려면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섬김(모심)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삼보일배, 촛불, 오체투지의 대외적 모심이 현실 안에서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 마음자리,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섬김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정과 직장,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와 사회 안에서의 섬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엄개벽의 모심’이란 허울 좋은 슬로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모심이 어려운 까닭은?



2. 섬김의 주체로서의 ‘여성성’ 회복

김지하 시인은 개벽을 실천할 모심의 참 주체로서 ‘여성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성을 1만 9천 년 전 파미르고원 마고성의 창조신인 여신, 그 잉태의 힘에서 찾고 있다. 마고라는 여신의 표상이야말로 여성성으로 드러난 비로자나의 화엄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 여신 모성의 전통을 상실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되기 전 고대역사 안에 엄존해온 모권제의 사상적 근원에 있는 여성성인 모성을 김지하 시인은 모심의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을 모심과 살림의 참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남성을 여성에 의존하도록 길들이는 것도 아니며, 남성과 여성의 자리를 바꿈으로서 이루어지는 개벽세상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남성은 자신 안의 여성성을, 여성은 자신 안의 남성성을 재발견하여 균형있는 참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심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은 남녀로 이분화된 한 쪽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상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성적 원리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性을 넘어 존재 안에 드리운 바로 그 여성성을 회복해감이 중요하리라 본다. 섬김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은 온전한 인간성 회복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가정, 직장, 사회공동체에서 우리 모두가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장애되는 요인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3. 영성적 차원과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

앞서 필자는 ‘모심’을 구체화함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모심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말함에 있어 장애요인이 무엇인지 숙고해볼 것을 제안했다. 두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영성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이다.

1) 영성적 차원

영성적 차원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왜 내 삶의 자리에서 ‘모심’이 어려운지 그리고 모심의 주체로서 여성성을 실현해감에서 무엇이 장애가 되는지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결국 ‘모심’이 어려운 것은 내 자존심을 버리기 싫기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자존심의 실체는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나인지, 나의 정체성인지, 아니면 나의 허상인 거짓자아에 불과한 것인지를....
내가 참된 주체로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모심’의 삶에 있다. 모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참된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이 말한 ‘모심’은 회개를 첫 가르침으로 삼은 예수의 언표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회개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함은 예수의 가르침의 정점인 ‘섬김(모심)’을 사는데 있기 때문이다.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道元, 1200-1253)은 “불도(佛道)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正法眼藏』「現成公案」)라고 한다. 도겐의 표현대로 자기를 잊는 것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면, 그 길이 곧 모심의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

앞서 말한 영성적 차원이 개인적인 면에서 성찰한 것이라면,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이란 그 영성이 현실 안에 구체화되기 위해 영성의 지속적인 연대성을 유지해감에 필요하다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은 ‘촛불’을 지도자도 조직도 강제도 없이 그때 그때의 합의에 의해 도달한 ‘집단지성’이라고 본다.1)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그들 마음마다에 드리운 ‘천지공심의 씨앗들’이라고 풀이한다. 김지하 시인이 말했듯이 촛불이 ‘영을 동반한 생명사건’이라면 그 생명력은 지금도 계속 피어오르고 있는가? 또한 그 촛불의 힘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아무리 생태문제 등 일련의 현실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도, 영성이 부재한 정부 정책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거대한 정책과 맞서기 위해선 우리의 영성을 공유하고 나누며 표출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자신이 속한 소공동체(가정, 교회, 사찰, 직장, 서클, 지역)가 그런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성찰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를 방해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았으면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례전(예배, 미사, 예불 등)에 우리의 변형된 의식을 수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우리의 가정이 영성적 통합의 장이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요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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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2일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이하여 촛불집회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낸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촛불집회는 시민의 재발견이었다,” “거대한 정치 교육장이었다,” “10대 촛불소녀들을 통해 몸에 체화된 민주주의의 결실이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 "자신의 계층과 가까울수록 촛불은 좀 더 빛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촛불은 어둡다"고 촛불집회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아무리 주장이 옳아도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민주주의의 기능은 국가 기본 법질서의 메커니즘을 보완할 수 있을 뿐 대체할 수는 없다. 스스로의 한계와 분수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천지의 약육강식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피력하기 위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부정의 소리들도 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평가 이외에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 목소리로 외쳐댔건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지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어떤 운동의 성패를 가늠하기에 1년이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 양은용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 네이버 블로그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治癒)
양은용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차례

Ⅰ. 서언
Ⅱ. 소태산 종교관의 구조
Ⅲ. 원불교 교리상의 마음공부
Ⅳ. 마음공부와 치유
Ⅴ. 결어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최현민 수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우교수, 사랑의 씨튼수녀회)

차례

Ⅰ.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Ⅱ. ⾃他⼒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Ⅲ.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Ⅰ. 서언
질병 ․ 빈곤 ․ 전쟁의 3대 사회악이 종교를 낳게 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의 본령이 사회구원에
있으므로, 질병과 빈곤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고통이 심화될 때, 성자의 구세이념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불교의 원점에서 파악된 고(苦)와 이에 대한 자비(慈悲),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와 사랑이
강조된 것은 이러한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구세이념은 새로운 이념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다. 성립사적으로 보면, 기존종교의
가르침이 변화된 사회상황 아래서 기능하지 못할 때 사회에서는 새로운 구세이념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대응하는 것이 새 종교운동이다.
바라문교의 가르침 아래서 불교가 성립하고, 유대교 아래서 그리스도교가 성립한 것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교는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포월(包越)하는 가르침을 제시하려 한다. 당시
사회가 그 이념을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하면 새 종교운동의 구세이념이 목적을 달성할 때 그것은
사회적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러지 못할 때는 소멸하고 만다.
그렇다면 사회의 존재형태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근현대에 와서 종교이념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근대 인류는 격변하는 사조(思潮)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구세이념을 갈구하게 되었다. 서세동
점(西勢東漸)의 정치사회사조 아래 혼란과 전쟁을 경험하였고 새로운 체제와 이념을 터득해 온
것이다.
물질문명의 이기에 탐닉하면서 정신문화의 축을 다시 세워야하는 과제를 안고, 교통 ․ 통신의
발달과 함께 공동체적 운명을 가꾸어 왔다. 근대 이후 인류가 경험해온 전쟁, 인구증가와 자원고갈,
환경오염, 도덕적 타락 등의 현상은 지구촌사회를 이대로 두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이러한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구세이념에서 볼 때 가장 두드러진
흐름을 신종교(新宗敎)운동과 신영성(新靈性)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먼저 신종교운동은 19세기를 전후로 사회구제를 외치며 일어난 사회운동이다.㉮ 지구촌이라
불릴 만큼 변화된 사회 환경 아래서 새로운 구세이념을 모색함으로써 그것은 민족과 지역을 넘어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성립하였다.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비판하고 또 새롭게 해석하면서 기존종교의 근대적 변모를 자극하였다.
한국 신종교의 사상적 특징을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 ․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 ․ 민족주체(民族主
體)사상 ․ 인간존중(人間尊重)사상 ․ 사회개혁(社會改革)사상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 姜敦求,「新宗敎硏究序說」(서울대 종교학연구회 편,『宗敎學硏究』6, 1987, 191쪽); ⾦洪喆,『韓國新
宗敎思想의 연구』, 집문당, 1989, 25쪽 참조.
㉯ 졸고,「韓國新宗敎運動과 그 사상」(『東洋宗敎學』11, 원광대 동양종교학과, 2001, 9쪽 이하) 참조.
이를 盧吉明,『韓國新興宗敎硏究』(경세원, 1996) 40쪽 이하에서는 ⼈尊사상과 民衆사상․開闢사상
과 地上天國신앙․救世主신앙과 選民사상․調和사상과 統⼀사상․解寃사상과 傳統⽂化繼承사상으로 정
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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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운동에는 시대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지역이나 민족국가에 따라 문화기반이나 사회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제도이념의 구성 체계 등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문명에 대응한
정신문명, 곧 영성의 혁명을 강조함으로써 인류정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영성운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신종교운동이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형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 신영성운동도
그러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는 미국 등지에서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으로㉰ 일본에서는
신영성운동 외에 정신세계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교나 과학과 같은 과거의
문화현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성을 찾으려고 한다. 영성으로 불리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나감으
로써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변용(自己變容)이나 치유(治癒)의 의미가 강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운동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종교사상의 흐름에서 보면 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대응은 전통종교나 신종교운동 모두가 전 세대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고,㉲ 신영성운동에
서도 그 근저에 종교적 흐름이 깔려 있다.
생명 중시의 기철학(氣哲學)적 세계관이 강조되고 건강문제가 사회적 화두(話頭)로 부각된 가운데
전개되는 이들 운동은 인류의 새로운 정신차원을 모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회구원의 문제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지구촌 사회가 된 오늘날에 그것은 밖으로 환경과 생태계로 연결되고, 안으로는 영성 내지 정신세계
와 관련되어 있다. 사회가 복잡하고 이념이 다양해진 만큼 극절한 치유를 통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환경회복과 인간회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인간 삶의 새로운 활로를 말해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근현대사회의 변혁사조 아래 소태산(少太山 朴重彬, 1891-1943)에 의해 1916
년 성립한 원불교의 교리체계를 통해 그 구세원리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만유로 벌여
있는 세상을 은(恩)으로 파악하며 이에 따라 감사생활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의 구세이념을
특히 마음공부와 관련하여 치유적 성격을 밝히려는 것이다.
㉰ 존슨 로버트 L,『반문화운동과 종교』, 이장식 역, 현대사상사, 1976; 全明秀,「뉴에이지운동의 전개
와 변모-대체종교에서 대중문화로의 방향전환에 관한 시고」(『圓佛敎思想과 宗敎⽂化』34,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6) 등 참조.
㉱ 島薗進,『精神世界のゆくえー現代世界と新霊性運動ー』, 東京堂出版, 1996; 島薗進,「新靈性⽂化と宗
敎」(원광대학교 편,『미래사회와 종교』, 원광대출판국, 2000) 등 참조.
㉲ 신종교의 개념에 근대의 변화된 사회상황 아래 변용된 종교활동의 대부분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근래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면서 종교단체와 수련단체의 경계가 모호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 소태산은 우주와 세계, 인간관계를 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은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
명적 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네 가지 범주로 규정한 것이 사은이며, 사은의 실천이념이 감사생활
로 요약된다. 원불교 은사상에 대해서는 李鉉澤,「원불교의 은사상」(원불교사상연구원 편,『원불교신
앙론 연구』, 원불교출판국, 1996, 185쪽 이하); ⾦洛必,「恩思想의 ⽣哲學적 조명」(같은 책, 284
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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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Ⅱ. 소태산 종교관의 구조
원불교의 교리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립과정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기존종교의 역할이나 구세이념에 대한 평가가 따르고, 그 영향 등이 드러나기 때문인데 소태산의
종교관과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에 대한 수용과 공존의 태도이다. 새로운 종교는 기존종교나 그 구세이념
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기 마련인데 원불교에서는 그 역할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소태산은,
<1> 천하 사람이 다 행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큰 도요, 적은 수만 행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도라 이르나니, 그러므로 우리의 일원종지(一圓宗旨)와 사은사요(四恩: 天地
恩․父母恩․同胞恩․法律恩, 四要: 自力養成․智者本位․他子女敎育․公道者崇拜) 삼학팔조(三
學: 精神修養․事理硏究․作業取捨, 八條: 信․忿․疑․誠․不信․貪慾․懶․愚)는 온 천하 사람이
다 알아야 하고 다 실행할 수 있으므로 천하의 큰 도가 되나니라.㉴
<2> 참다운 도덕은 개인 ․ 가정으로부터 국가 ․ 세계까지 다 잘 살게 하는 큰 법이
니, 세계를 맡긴들 못할 것이 무엇이리요.㉵라 하여,
그 교법을 천하의 큰 도라고 자신한다. 세계를 맡겨도 능히 지도해나갈 수 있는 가르침이라
고 본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법위(法位)를 갖추어감에 있어서 불퇴전(不退轉)에 이르는 출가위
(出家位)의 승급조항에「현재 모든 종교의 교리를 정통하며」㉶라 하고,「모든 종교의 교지도 이
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는 것이니라.」㉷ 라고 하여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 모든 교회의 서로 달라진 내역과, 그 근원은 원래 하나인 내역도 또한 이와 같
으므로, 인지가 훨씬 개명되고 도덕의 빛이 고루 비치는 날에는 모든 교회가 한 집안
을 이루어 서로 융통하고 화합하게 되나니라.㉸
<4>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
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
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
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 나
의 제자 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 『⼤宗經』교의품 2.(『圓佛敎全書』, 원불교출판사, 1977, 112쪽)
㉵ 같은 책, 실시품 14.(같은 책, 333쪽)
㉶ 『正典』수행편 법위등급.(같은 책, 91쪽)
㉷ 같은 책, 총서편, 교법의 총설.(같은 책, 22쪽)
㉸ 『대종경』전망품 13.(같은 책, 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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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이러한 소태산의 종교관을 구세이념에서 보면 자신이 조직한 교리제도가 너른 세계의 많은
생령(生靈)을 건지는데 가장 적실한 가르침이며 구세 사업에는 모든 종교와 만나고 협력해나가야
한다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법통을 이어 2대 종법사(宗法師)에 오른 정산(鼎山 宋奎, 1900-1962)이 삼동윤리(三同倫理:
同源道理․同氣連契․同拓事業)를㉻ 밝히고 3대 종법사인 대산(大山 金大擧, 1914-1998)이「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 밝힌 것이 이러한
성격을 증명한다.
둘째, 불교에 연원(淵源)하여 만 종교 만 사상을 아우르는 태도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태산은
구도(求道)에서 대각(大覺)에 이르도록 까지 고향에서 생활인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구도과정에
서는 깊은 선(禪)적 경지에 들고「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하는㉯ 화두로 일관하기도 하였다.
1916년 4월 28일 대각을 이룬 후, 그는 모든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는데 그 가운데 『금강경(金剛經)』
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밝힌다.
<5> 서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道를 얻
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 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 장차 회상(會上)을 열 때
에도 불법(佛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당시 불교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불교관은 불법(佛法)과
불교(佛敎)를 크게 대별하여 전자를 계승 선양할 가르침으로, 후자를 제도적으로 개선할 대상으로
보는 특징이 있다.㉲
<6> 그가 보는 불법은 천하의 큰 도(道)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
㉹ 같은 책, 전망품 14.(같은 책, 388쪽)
㉺ 졸고,「원불교에서 본 종교 간의 대회원리」(『한국종교연구』4, 서강대 종교문제연구소, 2002, 46
쪽) 참조.
㉻ 1961년 4월에 발표한 涅槃 偈頌으로, 그 내용은『⿍⼭宗師法語』 도운편 34-37(같은 책,
988-991쪽)에 밝혀 있다.
㉮ 『⼤⼭宗師法語』 구세편 15.(자문판, 대산종사법어편수위원회, 2006, 584쪽) 1971년 원불교반백
년기념대회 표어이며, 1989년 2월의「민족평화를 위한 종교인 회의」에 메시지로 보내고, 열반에
이르러 게송으로 삼았다.
㉯ 『圓佛敎敎史』제1편 2장, 대종사의 입정.(『원불교전서』1036-1038쪽)
㉰ 『대종경』서품 2.(같은 책, 95쪽)
㉱ 소태산은「불교가 이 나라에서 여러 백년 동안 천대를 받아 온 끝이라 누구를 막론하고 불교의 명
칭을 가진 데에는 존경하는 뜻이 적게 된지라」(같은 책, 서품 15, 같은 책, 102쪽) 하여, 실상을
파악하고 있다. 그가 1920년에 초안, 출판한『조선불교혁신론』(불법연구회, 1935)은 이러한 그의
불교에 관한 관점을 집약한 것이다.
㉲ 한종만,「원불교의 불교관」(수위단사무처 편,『원불교사상시론』I, 원불교출판사, 1982, 74쪽) 참조.
불법과 불교를 혼용한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교법은 계승하고 제도는 개혁한다는 관점이 드러난
다.

5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 고 하여,
만 종교에서 뛰어난 가르침으로 평가한다. 물론 미래의 불법은 과거의 불법과는 달라야 하며,
그 달라진 불법은 장차 세계의 주교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것이 소태산이 말하는 불
교의 시대화․대중화․생활화이다.
<7> 그는 과거에는 유․ 불․ 선(儒佛仙) 삼교가 각각 그 분야만의 교화를 주로 하
여 왔지마는 앞으로는 그 일부만 가지고는 널리 세상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므로 우
리는 이 모든 교리를 통합하여 수양 ․ 연구 ․ 취사의 일원화(一圓化)와 또는 영육쌍
전(靈肉雙全) ․ 이사병행(理事竝行) 등 방법으로 모든 과정을 정하였나니, 누구든지
이대로 잘 공부한다면 다만 삼교의 종지를 일관할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의 교
리며 천하의 모든 법이 다 한 마음에 돌아와서 능히 사통오달의 큰 도를 얻게 되리
라. 고㉵ 본다.
앞으로의 가르침은 불교에서 비롯하여 유․불․도 삼교사상의 종지를 통하고 만 종교 만 사
상과 원융회통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본 한국 신종교의 개벽사관의 수용 태도이다. 그것은 1960년 수운(水
雲 崔濟愚, 1824-1864)의 동학(東學) 창도로 비롯된 신종교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선언한 시대변화
사조를 계승하는 성격을 지닌다.
개벽이란 암흑과 혼돈에서 천지가 열린다는 뜻으로, 선천세계가 끝나고 대명천지가 도래한다는
뜻에서 후천개벽이라고도 한다. 후천개벽이란 인간중심의 문화개벽으로 새로운 문명세계를 가져오게
되며 한국 신종교에서는 이를 천운의 회복으로 본다.
수운과 함께 연담(蓮潭 李雲圭, 1804-1861-?)에게 배웠다고 하는 일부(一夫 金恒, 1826-1898)는
1881년 『정역(正易)』을 완성함으로써 선후천 교역(先後天交易)을 맞이했다고 술하고 있다.㉶
수운은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윤회(輪廻)같이 둘린 운수 내가
어찌 받았으며/ 척조창생(億兆蒼生) 많은 사람 내가 어찌 높았으며/ 이 세상 없는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라㉷ 하여 삼교의 교화력이 쇠멸했음을 분명히 한다. 개벽의 원리에서 보면 삼교는
선천시대의 구세이념이요, 그러한 시대가 지나 운(運)이 다했다는 논리이다.㉸
㉳ 『대종경』서품 3.(『원불교전서』95쪽)
㉴ 같은 책, 서품 15(같은 책, 103쪽) 참조.
㉵ 『대종경』교의품 1.(같은 책, 111-112쪽)
㉶ 李正浩 저,『正易硏究』(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6),
200쪽에서는 수운 ․ 일부 ․ 광화(光華 ⾦致寅, 1855-1895)의
3인을 연담의 동학제자로 소개하고 있다. 연담은 기존종교인
유․불․선 삼 교 가운데 수운에게는 선, 일부에게는 유, 광화에
게는 불을 전수했다고 한다.
㉷ 『⿓潭遺詞』敎訓歌.

6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수운은 결국 하느님을 직접 모실 수 있다는 자신을 갖는다. 수운은 교화력을
잃은 유교와 불교에 대하여 당시 세력을 확대하던 서학(西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운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유 ․ 불 ․ 도 삼교의 문화풍토를 수용하면서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추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선천은 억압과 폭력으로 불평등과 부조리가 가득 차서 어둡고 괴로운 시대이며, 후천은 협력과
조화에 의해 평등과 평화가 가득 차서 밝고 서로 잘 사는 시대이다. 묵은 세상이 가고 새 세상이
오는 것은 민중의 바램이다.
이 후천개벽시대가 오는 과정에 있어서 수운은 괴질(怪疾)이 존재한다고 보고, 증산(甑山 姜一淳,
1871-1909)은 병겁(病劫)을 말하고 있는데, 소태산은 이를 정신개벽으로 주장한다.㉺ 수운에서
비롯되어 한국 신종교운동에 있어서 공유되었던 개벽사관을 소태산은 정신개벽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신개벽은 소태산의 개교, 즉 원불교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대각을 이룬 그의 시대사회를 바라보는 코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8> 대종사(소태산) 당시의 시국을 살펴 보시사 그 지도강령을 표어로 정하시기를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시니라.㉻
<9>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
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
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이 가운데 정신과 물질을 아울러 나가는 도학과학병진론(道學科學竝進論)이나 신앙과 수행(훈련)
이라는 자타력병진론(自他力竝進論) 등 그의 다양한 관점의 단초를 열고 있다. 정신개벽이란 달라진
시대환경 아래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므로 개인에게는 물론 사회에 있어서의 치유에까지
전개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태산의 도학과학병진론을 치병과 관련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0> 이운외(李雲外)의 병이 위중하매 그의 집안사람이 급히 달려와 대종사께 방책
을 문의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곧 의사를 청하여 치료하라. 하시고, 얼마 후에 병이

㉸ 李世權편저, 東學思想(경인문화사, 1987) 82쪽 참조.
㉹ 崔東熙, 水雲 (金用天·崔東熙저 天道敎, 1973,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57쪽) 참조.
㉺ 김홍철, 「근세 한국종교사상에 있어서의 病觀 연구」(동저, 圓佛敎思想論考, 원광대학교출
판국, 1980, 307쪽 이하) 참조.
㉻ 『대종경』서품 4.(『원불교전서』 95-96쪽)
㉮ 『정전』총서편, 개교의 동기.(같은 책, 21쪽)

7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평복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전에 운외가 병이 중하매 나에게 먼저 방침을 물은
것은 그 길이 약간 어긋난 일이니라. 나는 원래 도덕을 알아서 그대들의 마음병을 치
료해주는 선생이요, 육신 병의 치료는 각각 거기에 전문하는 의사가 있나니, 이 앞으
로는 마음병 치료는 나에게 문의할지라도, 육신병 치료는 의사에게 문의하라. 그것이
그 길을 옳게 아는 것이니라.㉯
그는 병을 육신병과 마음병으로 구분하고 육신병 담당은 의사이므로 병원을 찾고, 자신은 마음병
치료인이므로 그에 관해 문의하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현대 의학을 인정 수용하는 태도가
분명해진다. 그의 개벽사관은 물질문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용할 인간의 자주력이
필요하며, 그것을 정신개벽이라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태산의 종교관은 개벽사관을 통한 시대인식과 불법에 연원한 교법으로 기존종교의
구세이념과 융통조화하는 원리이다.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이웃종교와 공존하면서 공동선(共同善)을
구축하는 종교협력의 관점이 그의 종교관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원불교 교리상의 마음공부
소태산의 구세이념은『정전(正典)』에 그 대체가 담겨 있다. 초기교서인『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
要論)』(1927)과『육대요령(六大要領)』(1931)을 거쳐 그의 열반을 앞둔 일제말기에『불교정전(佛
敎正典)』(1943)으로 발간했던 것을, 1962년에 현재의 체제로 결집하였다.㉰ 원불교 교리체계는『정
전』의 머리에 수록된 「교리도(敎理圖)」㉱를 통해 그 구성체계가 드러나며, 마음공부 원리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리도」는 중앙 상단의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 〇)을 정점으로 3등분하고 있다. 중앙은
법신불 원리를 설명하고, 오른 쪽은 수행문, 왼쪽은 신앙문을 배치하고 있다. 수행문에는 삼학과
팔조 그리고 아래에 수행의 강령인「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을 배치하고 있는데 「무시선
무처선」은 「언제나 선, 어디서나 선」으로 번역한다.
신앙문에는 사은과 사요 그리고 아래 신앙의 강령인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을
배치하고 있는데,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으로 번역한다. 아울러
이들을 둘러싼 네모서리 밖에 사대강령(四大綱領)인 정각정행(正覺正行) ․ 지은보은(知恩報恩) ․
㉯ 『대종경』실시품 31.(같은 책, 339-340쪽)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일생 포
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
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대종경』 부촉품

㉰ 『불교정전』을 편수하고 소태산은「

3, 같은 책, 400쪽)고 한 것처럼 당시에 골격이 갖추어졌다. 그 가운데 일제시대의 제약을 털어
내는 등의 작업을 거친 것이『정전』이다.『정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時湧,「원불교 교리성립사
연구-『정전』결집을 중심으로」(원광대 박사논문, 2004) 를 참조.
㉱ 『정전』모두 소수.「교리도」는『육대요령』(1931)에 처음 등장하며, 현재의 그것은 1943년 1월에 제
정되었다.(『대종경』부촉품 7장)

8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각각 배치하여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교리도」에 나타나는 일원상은 소태산의 대각에 의해 체현된 근원적 진리의 상징으로, 「일원(一
圓)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요,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다.」㉲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일원이란 일원상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진리당체로, 일원즉사은(一圓卽四恩)이며, 일원을
양성(養性) ․ 견성(見性) ․ 솔성(率性)의 세 가지 속성으로 배대한 것이 삼학이다.㉳ 신앙문인 사은사요를
통해서는 복족(福足), 수행문인 삼학팔조를 통해서는 혜족(慧足)으로, 복혜양족(福慧兩足)하면 부처
가 된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교리의 강령이「일상수행의 요법」9조로, 각 조는 다음과 같다.
<11>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
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
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
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6.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이들 각조를 교리에 배대하면 1-3조는 삼학, 4조는 팔조, 5조는 사은, 6-9조는 사요에 해당한다.
9조의 실천강령 속에 주요 교리를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음공부의 요체로 간주된다.
마음공부는 오늘날 원불교 신앙․수행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공부에 관련하여 소태산은 말한다.
<12> 지금 세상은 물질문명의 발전을 따라 사․농․공․상에 대한 학식과 기술이 많이
진보되었으며, 생활 기구도 많이 화려하여졌으므로 이 화려한 물질에 눈과 마음이 황
홀하여지고 그 반면에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은 극도로 쇠약하여 주인된 정신이 도리
어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크게 근심될 현상이라.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물질이라도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물질이 도리
어 악용되고 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재주와 박람박식(博覽博識)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재주와 박람박식이 도리어 공중에 해독을 주게 되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그 사용하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환경이 도리어 죄업을
돕지 아니하는가.
㉲ 같은 책.
㉳ 韓鍾萬,「⼀圓相眞理의 相卽性」(원불교사상연구원 편,『일원상진리의 제연구』상(원광대출판국, 1989,
327쪽 이하) 참조.
㉴ 『정전』수행편, 일상수행의 요법.(『원불교전서』 54쪽)

9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그러므로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마음을 바르게 사용하
면 모든 문명이 다 낙원을 건설하는 데 보조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요, 마음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모든 문명이 도리어 도둑에게 무기를 주는 것과 같이 되나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은 새로이 각성하여 이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用心法)을 부
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이타(自利利他)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
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양면으로 한 가지
참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
<13> 모든 학술을 공부하되 쓰는 데에 들어가서는 끊임이 있으나, 마음 작용하는
공부를 하여 놓으면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되나니,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되나니라.㉶
그는 구세이념의 본질이 용심법에 있고, 이를 수행과 학습을 아우른 개념으로 마음공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산 역시 같은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14> 송죽(松竹)의 가치를 상설(霜雪)이 드러내듯이 공부인의 가치는 순역경계가 드
러내나니, 각자에 난관이 있는 때나 교중에 난관이 있는 때에 그 신앙의 가치가 더 드
러나고 그 공부의 가치가 더 드러나나니라. 국가에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은 유사시에
쓰자는 것이요 도인이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경계를 당하여 마음 실력을 활용하자는
것이니라.㉷
<15> 학인이 묻기를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공부가 제일 근본되는 공부가 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마음공부가 제일 근본되는 공부가 되나니라.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를
총섭하나니, 마음공부가 없으면 모든 공부가 다 바른 활용을 얻지 못하나니라.” 또 묻
기를 “이 세상에서 어떠한 기술이 제일 근본되는 기술이 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인
화하는 기술이 제일 근본되는 기술이 되나니라. 사람 잘 화하는 기술은 모든 기술을
총섭하나니 인화하는 기술이 없으면 모든 기술이 다 활용되지 못하나니라.”㉸
<16> 과수를 기르는 데에도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그 과수가 잘 자라고 훌륭한 결
실을 보게 되는 것 같이, 사람의 뿌리는 마음이라 무엇 보다 먼저 마음공부에 힘써야
훌륭한 인격을 이루나니, 이 마음공부를 여의고 어찌 혜복의 결실을 바라리요.㉹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마음공부 개념을 정리하여 1977년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래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들에는 마음공부의 개념 작업에서부터 마음이 무엇이며, 마음공부의
㉵ 『대종경』교의품 30.(같은 책, 130-131쪽)
㉶ 같은 책, 요훈품 1.(같은 책, 315쪽)
㉷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31.(같은 책, 878쪽)
㉸ 같은 책, 무본편 6.(같은 책, 907쪽)
㉹ 같은 책, 무본편 9.(같은 책, 908쪽)

10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대상과 방법, 그리고 공부가 이루어지는 이른바 경계와 마음의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내창은 이러한 선행 연구에 바탕하여 원불교의 마음공부를 「1) 경계에 접하여, 2) 이 경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마음(객체적 자아)을, 3) 또 다른 마음(주체적 자아)이 지켜보면서, 4) 즉각적인
반응을 일단 멈추고(경계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5) 성품(자성)에 비추어, 6) 반응하는 마음이 적절한지
대조해, 7) 경계를 원불교적 가르침에 맞게 활용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Ⅳ. 마음공부와 치유
그런데 마음공부를 모든 공부의 총섭 원리로 본다면 정신개벽과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개벽은 물질문명의 이기에 빠져 주체성을 상실한 현대사회에 대한 병맥진단이라는 점에서
치유를 전제한다.
은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감사생활로, 삼학수행에서 본다면「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정신수양에서부터
「천만 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이 생기게 하는 사리연구, 그리고「모
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게
하는 작업취사공부이다.㉮
이를 요약하면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는 공부가 된다.
그러면 이러한 수행의 방법이 어떻게 치유적인 성격을 지니는가? 소태산은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염불(念佛)과 좌선(坐禪)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7> 염불이라 함은 천만 가지로 흩어진 정신을 일념으로 만들기 위한 공부법이요, 순역(順逆)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법으로서 … 염불하는 사람이 먼저 이 이치를 알아서
생멸이 없는 각자의 마음에 근본하고 거래가 없는 한 생각에 대중하여, 천만 가지로 흩어지는
정신을 오직 미타일념(彌陀一念)에 그치며 순역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을 무위안락의 지경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참다운 염불의 공부니라.㉰
㉺ 김도공,「마음공부 방법론에 대한 모색-교단 내 마음공부의 현상과 원리 비판을 중심으로-」(『원불
교사상』 24,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0, 365쪽 이하); 유명원,「단계별 마음공부 방법론에
대한 고찰-법위등급 6단계를 중심으로-」(『원불교학』 7, 한국원불교학회, 2001, 244쪽 이하); 백
준흠, 「원불교 마음공부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28,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4, 109쪽 이하); 김성장,「원불교 마음공부 개념에 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2005, 117쪽 이하); 고시용,「원불교 설교에 나타난 마음공부-『월간교화』를 중심으로-」(같은 책,
30, 2005, 159쪽 이하); 유정엽,「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 해석의 문제」(『원불교사상연구원 원
보』 58,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09, 203쪽 이하) 등.
㉻ 한내창,「원불교 ‘마음공부’ 정의의 한 시도」(『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9, 176쪽).
㉮ 『정전』교의편, 삼학.(『원불교전서』 46-50쪽)
㉯ 같은 책, 수행편, 상시훈련법.(같은 책, 57쪽)

11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18> 좌선이라 함은 마음에 있어 망념이 쉬고 진성을 나타내는 공부이며, 몸에 있
어 화기(火氣)를 내리게 하고 수기(水氣)를 오르게 하는 방법이니, 망념이 쉰즉 수기가
오르고 수기가 오른즉 망념이 쉬어서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의 기운이 상쾌하
리라. … 오래오래 계속하면 필경 물아(物我)의 구분을 잊고 시간과 처소를 잊고 오직
원적무별한 진경에 그쳐서 다시없는 심락을 누리게 되리라.㉱
염불은 마음을 무위안락에 돌아오게 하고 좌선은 몸과 마음이 한결 같으며 정신의 기운이 상쾌해지
는 공부라는 것이다. 물론 수양의 구경은 군인이 전쟁에서 마음을 단련하여 부동심이 되는 기질수양(氣
質修養)과 수도인이 오욕의 경계 중에서 마군을 항복받아 순역경계에 부동심이 되는 심성수양(心性修
養)을 같이 얻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실지의 경계에서 단련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태산은 이처럼 마음공부를 직업생활
속에서 적극적인 실천이념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19> 한 가정의 흥망이 호주의 정신 여하에도 달려 있나니, 한 가정이 흥하기로 하
면 첫째는 호주의 정신이 근실하여야 할 것이요, 둘째는 집안사람들이 서로 화합하여
모든 일에 힘을 모을 것이요, 세째는 무슨 실업이든지 먼저 지견과 경험을 얻은 뒤에
착수할 것이요, 네째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준칙으로 순서 있게 사업을 키워 나갈
것이요, 다섯째는 폐물 이용의 법을 잘 이용할 것이요, 여섯째는 원업(元業)과 부업(副
業)을 적당하게 하며 생산 부분을 서로 연락 있게 할 것이요, 일곱째는 그 생산이 예
정한 목표에 이르기 전에는 그 자금을 다른 곳에 함부로 유용하지 말 것이요, 여덟째
는 목표에 달한 뒤에라도 무리한 폭리는 꾀하지 말고 매양 근거 있고 믿음 있는 곳에
자본을 심을 것이요, 아홉째는 수지를 항상 살펴서 정당한 지출은 아끼지 말고 무용한
낭비는 단단히 방지하여, 이와 같은 치가에 전력하면 그대들의 살림이 자연 불어나고
그에 따라 마음공부 하는 데에도 또한 서로 도움이 되리라.㉳
<20> 사람이 평생에 비록 많은 전곡을 벌어 놓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
도 가져가지 못하나니,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어찌 영원한 내 것이라 하리
요. 영원히 나의 소유를 만들기로 하면, 생전에 어느 방면으로든지 남을 위하여 노
력과 보시를 많이 하되 상(相)에 주함이 없는 보시로써 무루(無漏)의 복덕을 쌓아야
할 것이요,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이니, 서원과 마음공부에 끊임없는 공을 쌓아야 한없는 세상에 혜복의 주인공이
되나니라.㉴
예컨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근실한 가운데 살림을 잘 이루면 마음공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 같은 책, 수행편, 염불법.(같은 책, 60쪽)
㉱ 같은 책, 수행편, 좌선법.(같은 책, 63-66쪽)
㉲ 『대종경』수행품 16.(같은 책, 151쪽) 참조.
㉳ 『대종경』 인도품 41.(같은 책, 206-207쪽)
㉴ 같은 책, 천도품 17.(같은 책, 293-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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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것이다. 치유에서 본다면 일탈에 의한 방법이 아니라 건전하고 적극적인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혜복의 주인공이란 신앙과 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인물을 가리킨다.
마음공부에 있어서 직업을 중시하는 것은 정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태산은 사회도 사람처럼 병이 들며, 치유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밝힌 사회병의 진단과 처방은 다음과 같다.
<21> 지금 세상은 밖으로 문명의 도수(度數)가 한층 나아갈수록 안으로 병맥(病脈)
의 근원이 깊어져서 이것을 이대로 놓아두다가는 장차 구하지 못할 위경에 빠지게 될
지라, 세도(世道)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근심을 금하지 못하게 하는 바
이니라. 그러면, 지금 세상은 어떠한 병이 들었는가. 첫째는 돈의 병, 둘째는 원망의
병, 셋째는 의뢰의 병, … 네째는 배울 줄 모르는 병, … 다섯째는 가르칠 줄 모르는
병, … 여섯째는 공익심이 없는 병이니 … 이것이 곧 큰 병이니라.㉶
<22> 그런즉 이 병들을 고치기로 할진대 무엇보다 먼저 도학(道學)을 장려하여 분
수에 편안하는 도와, 근본적으로 은혜를 발견하는 도와, 자력생활 하는 도와, 배우는
도와, 가르치는 도와, 공익 생활하는 도를 가르쳐서 사람 사람으로 하여금 안으로 자
기를 반성하여 각자의 병든 마음을 치료하게 하는 동시에, 선병자의(先病者醫)라는 말
과 같이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병든 세상을 치료하는 데에 함께 노력하여야 할지니,
지금 세상의 이 큰 병을 치료하는 큰 방문은 곧 우리 인생의 요도인 사은사요와 공부
의 요도인 삼학팔조라, 이 법이 널리 세상에 보급된다면 세상은 자연 결함 없는 세계
가 될 것이요, 사람들은 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하게 되리라.㉷
그가 밝힌 사회의 병은 돈의 병, 원망의 병, 의뢰의 병, 배울 줄 모르는 병, 가르칠 줄 모르는
병, 공익심 없는 병의 여섯 가지이다. 사람의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같이 사회의 병도 그대로 두면 사회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도학을 장려함으로써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는 분수에 편안하는 도,
은혜를 발견하는 도, 자력 생활하는 도, 배우는 도, 가르치는 도, 공익 생활하는 도를 가르쳐 안으로
병든 마음을 다스리고 밖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치료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려할 도학은 구세이념인 교리강령이라고 그는 본다. 아울러 치유된 세상은「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치유된 삶이란
불보살과 천국, 곧 주체와 환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 정산은「신․분․의․성을 마음공부에 들이대면 삼학공부에 성공하고 사․농․공․상에 들이대면 직업
에 성공하나니라.」(같은 책, 권도편 32)
㉶ 『대종경』교의품 34.(같은 책, 134-135쪽)
㉷ 같은 책, 교의품 35.(같은 책, 135-136쪽)

13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Ⅴ. 결어
이상에서 원불교의 교리구조에 유의하면서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소태산은 물질문명이 범람하던 시기(1916)에 대각을 이루고 원불교를 창립하였다. 교통․통신이
발달하여 지구촌사회를 이룬 가운데 동서의 종교가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전개된 그의
종교관은 기존종교의 구세이념에 대해 수용․조화하면서 이를 포월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불교와 만나 불법에 연원을 정하고 유․불․도 삼교를 비롯하여 만 종교 만
사상과의 원융회통을 구하며, 한국 신종교운동에 있어서 기축이 된 개벽사관을 수용하여 정신개벽을
제창하고 있다. 원불교 교리에 나타난 영육쌍전 ․ 이사병행 ․ 도학과학병진 등의 병진이념이 이러한
소태산의 구세이념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원불교 교리는「교리도」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종지인 법신불일원상을 수행문과 신앙문
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수행문에 삼학팔조, 신앙문에
사은사요를 배치하여 전자를 통해 혜(慧), 후자를 통해 복(福)을 원만하게 갖추도록 한다. 따라서
일원상에 바탕한 삼학팔조, 사은사요는 원불교 교리의 기본강령이며, 원불교의 마음공부도 이것이
주체가 되어 있다. 이를 몰록 드러낸 것이「일상수행의 요법」이다.
마음공부는 여러 가지 개념화가 이루어져 있지만『정전』의 용어를 빌린다면「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계에 물들지 않는 조촐한 한 마음을 간직하는 노력은
종교인의 신앙 ․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사를 잘 영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소태산은 보고 있다.
세상사를 잘 하면 마음공부가 잘 되고, 마음공부가 잘 되면 세상사가 잘 영위되도록 하는 원리이다.
그리고 마음공부로 치유된 세상은「불보살과 천국」의 표현처럼, 인간과 환경이 함께 거듭난 이상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弓山達也는 최근의 뉴에이지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990년대 이후「치유」가 강조되는 사회경향
에 주목하고, 특히 젊은이 문화를 분석하면서 그것을 사람의 몸과 마음을 둘러싼 환경 ․ 우주를
포함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의 종교나 신비 주술에의 불신감․무관심의 결과이며, 정신성이나 마음에의 관심층이
종교 ․ 신비 주술로부터 심리학 등의 다른 섹터로 이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뉴에이지가 베트남
전쟁 ․ 환경파괴 ․ 인간소외라고 하는 현대사회의 병소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부터 일어난 것에
비해 일본은 그러한 강인함이나 사회성은 볼 수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도 신영성운동이 전개된 만큼 탈종교적 경향 등 이와 유사한 사조가 존재할 것이다.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도 이러한 사회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용어에서부터 원불교라는 종교적 이미지를 벗어나 생활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담없이 만날 수
㉸ ⼸⼭達也,「젊은이 ⽂化에 있어서 治癒」(『한국종교』 28,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2004, 297쪽 이
하) 참조.

14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008년에 들어 원불교에서는「마음공부연구소」㉹를
발족하였다. 병든 인간, 병든 사회에서 치유주체 보다는 치유자체가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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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공부연구소는 2008년 12월 11일에 개원하였다.「종교색에 거부감을 갖는 불특정 다수를 위
한 교화방안으로 마련한 것」(『원불교신문』 2008. 12. 19)이라 발족 의의를 밝히고 있다.

15

원불교 마음공부와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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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최현민 수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대우교수, 사랑의 씨튼수녀회)

1.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양 교수님은 논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을 같은 맥락 안에서 해석
하고 있다. 신종교는 물리적 시설과 신자공동체, 교계제도, 집단적인 예배의식 등을 고루 갖
춘 ‘보이는 종교’인데 반해 신영성운동은 그런 것을 갖추지 않은 ‘보이지 않는 종교’ 형태로
되어 있다.
기공, 단전, 초월명상 등은 건강운동을 표방하지만 분명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기에
신영성운동이라 불리 운다. 서구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뉴에이지운동이나 일본의
정신세계도 여기에 속한다.
21세기는 영성 시대라고 할 만큼 ‘영성’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대영성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정신수련을 통해
피폐해진 영육을 치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명상이
나 정신수련 뒤에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자율적 개인의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
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영성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현대인들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영
성운동이 개인에 중점을 두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인간
이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환생을 강조하면
서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神)중심에서 우주
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본령은 자기의 본래성-그리스도교에선 하느님의 모상, 불교에선 불성(佛性), 유교에
선 천성(天性)이라 함-을 회복함에 있다. 이러한 자기 본래성의 궁극적인 완성은 이웃과 세
상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인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삼라만상과 깊은 존재적 연대감을 지닌 ‘관계적 존재’ 곧 ‘공동체적 존
재’임을 자각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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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이 논문에서 신영성운동과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정신적 치유’라
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원불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마음
공부’가 신영성운동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2.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마음공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원불교를 포함한 신종교를 어떤 시각으
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한다. 사회학자인 노길명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
한바 있다.
“신종교는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체제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고 그러한 모순과
부조리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성종교의 기능적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따라서 신종교는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성
종교는 자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신종교에 대해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 이
단이라고 하여 그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대립과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상호인식은 다종교문화를 지닌 한국 땅에서 살아가
는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최준
식 교수는 “종교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척도,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 곧 성숙을
목표로 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신종교를 접할 때 이런 척도가 필요하며, 모험적일지라도 서로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원불교는 1916년 창립된 신종교이면서도 한국 내 350여개의 신종교 교단 중 현재 3대 기
성종교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 다음으로 많은 신도수를 지닌 종단으로 성장해 왔다.㉮ 그 이
유 중 하나로 원불교가 지닌 건전한 종교성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공
부는 원불교 교리와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기에 원불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공부에 관해 몇 가지 여쭤보고자 한다.
1) 본 논문에서는 마음공부를 원불교의 교리도에 배치된 ‘신앙문과 수행문’ 양쪽을 아우르
는 마음수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앙문은 사은(四恩)과 사요(四要)를 통해, 수행문은 삼학
(三學)과 팔조(八條)를 통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신앙문과 수행문을 통한 실천은 궁극적으
로 ‘恩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恩사상이 원불교의 중심이 된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셨으
면 한다.
2) 본 논문의 결어에서 양 교수님은 마음공부는 신앙문, 수행문 양쪽을 함께 병행해서 닦
㉺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2쪽.
㉻ 같은 책, 50쪽.
㉮ 1998년 원불교 종교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른 것인데 어떤 경우는 교단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
을 파악하기 어려워 300에서 400개 정도라고 막연히 보기도 한다.(같은 책, 1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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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에 대한 논평

는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신앙문이 타력문이라면, 수행문은
자력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수행실천에서는 신앙문보다는 수행문
이 더 강화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마음공부가 정신개벽을 지향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기에 자력수행이 더 강조된 것인가? 아니면 신앙문을 강조하다보면 타력신앙에 떨어지
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인가?
3) 양문(兩門)의 수행방법이 지닌 치유적 성격으로 ‘염불과 좌선’을 드셨는데 이는 불교에
서 행해지는 수행과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또한 마음공부에 대
한 이웃종교인들의 호응도나 참여도는 어느 정도인가?

3.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궁극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본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나와 우주의 합일체험’이라 할 수 있다. 모
든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일체중생의 본성은 그것과 하나이며, 같은 근원으로
비롯된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원불교 신앙강령인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대할 때마다 불공을 드리라’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도 이런 관점에
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양 교수님은 이러한 법신불 일원상을 종교의 궁극적 체험으로 보면서, 불교의 佛, 유교의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 도교의 무위자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이러한 절대적 경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차원은 같다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선생님은 하
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느님은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존재 그 자
체’, 불교의 공(空)과 만날 수 있는 경지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 실재는 비인격성과 인격성의 이원론적 사유까지도 넘어서야 하기에
이를 다 포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강조하는 측면
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고, 불교는 비인격적인 면을 강조한다.
공(空), 연기(緣起), 법신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의 법신불은 어느 면에 더 강조
점을 두고 있는가?
원불교에서 매일 아침, 저녁 드리는 기도문이나 참회정진 기도문, 그리고 천도의식 기도문에는
“법신불 사은이시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에서 볼 수
있었던 원불교 천도재에서 의식을 집전하신 교무님께서 “법신불 사은이시여”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도문에서 부르는 법신불 사은은 인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나 마
음공부를 통해 깨닫고자 하는 법신불 일원상은 비인격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법신불이 지닌 인격성과 비인격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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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연구실 > 기타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2009년

최현민 연구실 > 기타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2009년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2009년
2010-03-23 
===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치유」를 읽고…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개최 심포지움, 양은용 원광대교수논문의 논평문--

최현민 (서강대
)


1.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의 관계


양교수님은 논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신종교와 신영성운동을 같은 맥락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신종교는 물리적 시설과 신자공동체, 교계제도, 집단적인 예배의식 등을 고루 갖춘 ‘보이는 종교’인데 반해 신영성운동은 그런 것을 갖추지 않은 ‘보이지 않는 종교’ 형태로 되어 있다. 기공, 단전, 초월명상 등은 건강운동을 표방하지만 분명 종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기에 신영성운동이라 불리운다. 서구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뉴에이지운동이나 일본의 정신세계도 여기에 속한다.
 
21세기는 영성 시대라고 할 만큼 ‘영성’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대영성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정신수련을 통해 피폐해진 영육을 치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명상이나 정신수련 뒤에 개인주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자율적 개인의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영성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현대인들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신영성운동이 개인에 중점을 두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인간이 환생을 거듭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환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중심에서 우주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본령은 자기의 본래성-그리스도교에선 하느님의 모상, 불교에선 불성(佛性), 유교에선 천성(天性)이라 함-을 회복함에 있다. 이러한 자기 본래성의 궁극적인 완성은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인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삼라만상과 깊은 존재적 연대감을 지닌 ‘관계적 존재’ 곧 ‘공동체적 존재’임을 자각함에 있다.
이 논문에서 신영성운동과 1970년대 말부터 전개된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정신적 치유’라는 측면에서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원불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마음공부’가 신영성운동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2.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 길로서의 마음공부

마음공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원불교를 포함한 신종교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자 한다. 사회학자인 노길명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신종교는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체제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고 그러한 모순과 부조리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기성종교의 기능적 한계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따라서 신종교는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성종교는 자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신종교에 대해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 이단이라고 하여 그 존재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이다.”1)
이러한 대립과 비판에 바탕한 상호인식은 다종교문화를 지닌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최준식 교수는 “종교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척도,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영혼 곧 성숙을 목표로 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2) 신종교를 접할 때 이런 척도가 필요하며, 모험적일지라도 서로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원불교는 1916년 창립된 신종교이면서도 한국 내 350여개의 신종교 교단 중 현재 3대 기성종교인 불교 개신교 가톨릭 다음으로 많은 신도수를 지닌 종단으로 성장해 왔다.3) 그 이유 중 하나로 원불교가 지닌 건전한 종교성을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마음공부는 원불교 교리와 수행의 핵심을 담고 있기에 원불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공부에 관해 몇 가지 여쭤보고자 한다.

1) 본 논문에서는 마음공부를 원불교의 교리도에 배치된 ‘신앙문과 수행문’ 양쪽을 아우르는 마음수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앙문은 사은(四恩)과 사요(四要)를 통해, 수행문은 삼학(三學)과 팔조(八條)를 통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신앙문과 수행문을 통한 실천은 궁극적으로 ‘恩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恩사상이 원불교의 중심이 된 연유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2) 본 논문의 결어에서 양교수님은 마음공부는 신앙문, 수행문 양쪽을 함께 병행해서 닦는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신앙문이 타력문이라면, 수행문은 자력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수행실천에서는 신앙문보다는 수행문이 더 강화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마음공부가 정신개벽을 지향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기에 자력수행이 더 강조된 것인가? 아니면 신앙문을 강조하다보면 타력신앙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인가?
3) 양문(兩門)의 수행방법이 지닌 치유적 성격으로 ‘염불과 좌선’을 드셨는데 이는 불교에서 행해지는 수행과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또한 마음공부에 대한 이웃종교인들의 호응도나 참여도는 어느 정도인가?


3. 법신불 일원상의 인격성과 비인격성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궁극적 진리,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본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나와 우주의 합일체험’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일체중생의 본성은 그것과 하나이며, 같은 근원으로 비롯된 모든 만물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원불교 신앙강령인 ‘모든 것이 부처아닌 것이 없으니 대할 때마다 불공을 드리라’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양교수님은 이러한 법신불 일원상을 종교의 궁극적 체험으로 보면서, 불교의 佛, 유교의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 도교의 무위자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4) 즉 이러한 절대적 경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차원은 같다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선생님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느님은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존재 그 자체’, 불교의 공(空)과 만날 수 있는 경지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 실재는 비인격성과 인격성의 이원론적 사유까지도 넘어서야 하기에 이를 다 포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강조하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고, 불교는 비인격적인 면을 강조한다. 공(空), 연기(緣起), 법신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서의 법신불은 어느 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가?
원불교에서 매일 아침, 저녁 드리는 기도문이나 참회정진 기도문, 그리고 천도의식 기도문에는 “법신불 사은이시여”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故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에서 볼 수 있었던 원불교 천도재에서 의식을 집전하신 교무님께서 “법신불 사은이시여”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도문에서 부르는 법신불 사은은 인격적인 측면을 보여주나, 마음공부를 통해 깨닫고자 하는 법신불 일원상은 비인격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법신불이 지닌 인격성과 비인격성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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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2쪽.
2) 같은 책, 50쪽.
3) 1998년 원불교 종교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른 것인데 어떤 경우는 교단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을 파악하기 어려워 300에서 400개 정도라고 막연히 보기도 한다.(같은 책, 17쪽 참조)
4)김승혜 외,「한국신종교와 그리스도교」, 바오로딸, 2002,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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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종교를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최현민 2020

 일본 종교를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최현민 저 | 자유문고 | 2020년 03월 13일
일본 종교를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출간일 2020년 03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620g | 153*224*30mm

책소개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일본인의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해온 일본 종교를 아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인)을 이해하는 가장 주요한 키워드를 ‘종교’로 보고, 일본 주요 종교의 역사와 전개, 특성, 그리고 그것들이 일본인의 삶과 문화 속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등을 폭넓게 조망하고 있다. 특히 일본 특유의 민속종교인 신도, 외래종교(불교, 기독교, 유교)들의 전래와 전개, 천황제의 발생과 신도와의 관계, 신흥종교들의 태동 등을 살펴보는 일은 일본에 대한 이해를 폭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하다.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목차
머리말·5

제1장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특성·13

1. 집단주의 13
2. 일본 종교문화의 중층성과 상대성 20
3. 일본의 기리(義理)와 기무(義務) 23

제2장 일본인의 무종교성·27

1. 생활종교 28
2. 장의불교 31
3. 현세주의와 우키요(浮世)적 삶의 태도 33
4. 평범 지향과 일상주의 36
5. 결론 38

제3장 신도神道·41

1. 신도의 정의 42
2. 가미 신앙 45
3. 신도의례-마츠리 50
4. 신사 61
5. 기키 신화로서의 신도-신화냐 역사냐 68
6. 결론 81

제4장 신불습합·85

1. 일본의 신불습합 88
2. 신불습합 과정 110
3. 본지수적本地垂迹 118
4. 반본지수적설 126
5. 결론 142

제5장 불교의 일본화·145

1. 시대적 배경 145
2. 호넨의 정토종 155
3. 신란의 정토진종 161
4. 잇펜의 시종時宗 170
5. 에이사이의 일본 임제종 180
6. 도겐의 조동종 184
7. 니치렌의 니치렌종 203
8. 결론 210

제6장 근세 불교·215

1. 근세 불교의 역사적 배경 215
2. 무로마치 불교 222
3. 에도 불교 228

제7장 근대 일본 천황제와 그리스도교·239

1. 천황제와 국가 신도 241
2. 신불분리(폐불훼석) 245
3. 국체 249
4. 「교육칙어」 254
5. 일본 그리스도교 256
6. 결론 285

제8장 유교는 일본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가?·287

1. 에도 시대의 주자학 288
2. 고학古學 297
3. 일본 주자학과 근대화의 관계 306
4. 실학과 조선의 근대화 311
5. 조선의 근대화와 유학의 상관관계 315
6. 국학 320
7. 결론 325

제9장 일본 그리스도교·329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332

제10장 일본 신종교와 신신종교·379

1. 일본 신종교 379
2. 일본 신신新新종교 397

마치면서·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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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 : 최현민 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
가톨릭 수도자(사랑의 씨튼 수녀회 소속)이다. 수녀회에 입회하기 전에는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 과학도의 길을 걷다가(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생물과 생화학 전공), 과학으로는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종교의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수녀회에 들어와 종교학을 공부하면서(서강대 대학원 종교학 석사 및 박사), 특히 깊은 수행전통을 지닌 불교에 마음이 끌려 불교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종교대화 씨튼연구원 원장으로서 오랫동안 종교 간 대화 일을 해오고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일본종교를 가르치면서, 「영성생활」 편집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불성론 연구』,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가 있으며, 공저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생태영성』, 『생태문제에 종교가 답하다』, 『참여와 명상, 그 하나됨을 위한 여정』이 있다.


출판사 리뷰


1.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일본! 이해하기 힘든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대체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런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최근 일본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한·중·일 삼국은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삼국의 평화적 공존이 절대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책은 일본 ‘종교’를 통해 일본인과 일본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심층을 다루기에 그 종교가 숨 쉬고 있는 문화의 중심적 가치와 결코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신도神道라는 토착신앙에서 기인한 독특한 종교문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뿐 아니라 정치, 문화 등 많은 방면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정서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양 민족이 지닌 종교적 양상에서 오는 차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2.

이 책의 요지와 특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먼저 일본 문화와 일본 종교의 특성으로 집단주의, 종교의 중층성, 무종교성, 상대주의에 대해 살펴보는데, 그 근저에는 현세주의적이고 우키요(浮世)적인 삶의 태도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일본의 민속종교인 신도에 대해 살펴보는데, 일본에 유입된 많은 외래종교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신도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신도가 종교라기보다 일본인의 생활관습이고 국민정신으로서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일본 종교의 특징인 신불습합神佛習合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데, 정책상의 신불분리에도 불구하고 신불神佛의식이 일본인의 정신과 일상 속에서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살펴본다. 다음으로 외래종교인 불교의 일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것은 가마쿠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말법사상이 성행하면서 염불사상이 크게 성행하였다. 여기엔 호넨의 정토종을 비롯하여 신란의 정토진종, 잇펜의 시종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에이사이의 임제종과 도겐에 의해 본각사상에 의거한 조동종이 일어나 현세적인 일본 선종을 형성했으며, 니치렌은 법화사상을 일본식으로 변용하여 니치렌종을 일으킨다. 이들 종파는 모두 일본적인 문화풍토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일본에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오다 노부나가 때까지만 해도 교세를 넓혀갔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 치하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고 숨어 지내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전래되어 성장했다가 잦아드는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어서 일본 근대가 시작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한 천황제와 일본 종교의 관계를 다룬다. 특히 일본의 전통 속에 이어져온 신도를 국가 차원에서 천황제와 결합한 국가 신도의 형성, 그 과정에서 나타난 신불분리 정책과 국체 개념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조선으로부터 전해진 주자학이 일본 신도와 결합하여 일본 특유의 국학國學과 고학古學으로 변용되는 과정, 그리고 일본 주자학의 해체와 근대화와의 관계를 다루며, 아울러 조선의 실학과 근대화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따로 한 장을 마련하여 일본 그리스도교가 왜 일본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박해받았는가를 엔도 슈사쿠의 작품들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종교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인 신(흥)종교의 발생 배경과 전개 양상, 그리고 문제점들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하고 있으며, 아울러 한국 신종교와도 비교하고 있다.

3.

이처럼 이 책은 일본 종교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우리에게 낯선, 일본인의 독특한 심성과 문화를 이해하고자 했다. 동아시아라는 지역공동체 속에서 일본인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일본 종교를 통해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업은 단순히 그들을 이해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일 간의 평화 정착과 동아시아의 평화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며, 더 나아가 우리 자신과 한국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도 깊이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매우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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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0년 일본종교 연구 수업계획서 관리자 10-25 633

2 2009_불교강독수업계획서 관리자 10-25 496

1 2009.2.동아시아종교 수업계획서 관리자 10-25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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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창]  / 최현민 수녀
발행일 : 2015-01-04 [제2926호, 23면]
 

최근 들어 행복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삶의 여유가 더 생기면서 행복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일까?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개인의 행복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데, 국가별로 행복을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면도 있지만, 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7위라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음이 드러났다.(2013년기준)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지수는 그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왜일까?
한국인의 낮은 행복감은 우리의 욕구 변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신세계는 혈연중심의 친족주의와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주의와 배상주의가 상호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면이나 배상주의는 좀 새로운 개념인 듯 싶다. 이는 현대와 같이 과열경쟁 사회에서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난에 대해 대가를 되돌려 받기를 갈망하는 심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주의나 현세기복주의,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지복의식이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명절인사에서의 ‘복’이 의미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염원하는 복은 재산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운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 행복의 가치는 한국사회와 같이 과열된 경쟁사회, 악성 서열주의 문화 속에서는 점점 더 채워지기 어렵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행복감이 낮다고 드러난 게 아닐까?

우리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지니는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행복관이 기복적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자칫 우리는 삶에 드리운 고통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놓치기가 쉽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고통을 ‘신비’라 표현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리라.사실 불행이나 고통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삶에 드리운 어려움과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그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지 싶다.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음을….이렇듯 행복과 불행이 씨줄 날줄로 엮어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기에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던가. 좋은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어떤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로 새해를 열고 싶다.

코헬렛이 말하듯 우리에게 다가올 그 모든 다양한 ‘때’를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으로 이 한해를 시작하고 싶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어진 것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그 순간들에 충실한,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보며 2015년 을미년을 맞이한다.
최현민 수녀(씨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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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산다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구름들,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어드는 눈부신 햇살. 감나무에 달린 익어가는 감들, 오늘 아침에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우리는 가끔 자연에서 태초의 그 무엇을 힐끗 보고 느낄 때가 있다.

숲은 가로누워 쉬고 있고 개울물은 급히 흐른다.
바위는 묵묵히 그렇게 서있고 비가 촉촉이 내린다.
들녘의 논밭은 기다리고
샘물이  솟는다.
바람은 잔잔히 불고
축복이 은은하게 가득하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노래한 시다.
보통 서양 철학에서는 기분이나 감정은 세계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방해가 된다고들 말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은 늘 어떤 기분 속에 살아가지 기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위 시에서처럼 읊을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자신의 감정 때문이리라.
성녀 힐데가르트는 자연은 우리에게 녹색생명력을 준다고 했는데 자연속에 머물다보면 이 말이 참임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자연을 통해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을 받곤 한다.
가끔씩 감성이 예민해지면 우리 주위에 자명하게 존재해온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나?
 이런 경이의 기분이 들 때  종전에 보지 못했던 광채를 느끼기도 하는데 아마 이게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빛’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서 존재의 신비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존재의 신비를 접하는 것은 내가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게 되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존재의 실상이 지닌 경이로움에 눈뜨게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이런 경이로움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우울이나 허무감에서, 고독감이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는 이미 허무나 고독, 무력감을 극복할 잠재적 능력이 깃들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이 잠들어 있을뿐. 그 잠들어 있는 존재의 빛이 드러나도록 내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빛이 나와 너를 비추게 된다.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를 사는 자를 ‘현존재’라 했다. 불가에서는 이를 깨달은 자 곧 각자(覺者)라고 하고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그렇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 눈뜨고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들에서 자유로와져 여기에 마음을 다해 살 때 우리는 존재의 경이로움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자는 사도바울이 말한 “늘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