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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2013 여름야유회+사진

한 결 [ E-mail ]
2013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여름야유회 다녀왔습니다...


궤이커 공동체 분들과 헤어지기 직전에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IMG_20130217_145003_1000s.jpg



고용균.곽봉수.곽분이.노명환. 
김미환.김안나.김요한.배현덕
신행숙.오철근.
이화선.이행우.한결




2013년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여름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1.일시:2013년 08월 24일
2.참석자:
고용균.곽봉수.곽분이.노명환.
김미환.김안나.김요한.배현덕. 
신행숙.오철근.
이화선.이행우.한결
(이상 13명)

3.일정:07시 강변역 집합,출발 - 10시 인제군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 13시 하산및 이동후 점심(질경이밥) - 16시 화천 최광선 친우님댁 - 17시30분 귀경 - 18시30분 경강역 인근 저녁식사 (경강막국수) - 20시30분 강변역도착후 해산

오전 7시, 이른 시간에 출발함에도 모든분들이 출발시간을 잘지켜주셨습니다.주말이라 경춘고속도로는 마석까지는 약간의 지체가 있었으나, 이후에는 뻥 뚫린 도로를 달려서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에도착후, 본격적인 힐링트레킹을 하였습니다. 산행후 주린배를 달래며 30여분을 달려서 인제의 특산물이라는 "질경이밥"의 환상적인 맛을 본후에 

화천의 최광선 친우님댁으로 이동하니 갓따온 옥수수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친우님의 농촌생활을 살펴본후 아쉬움을 뒤로한채 서울로 오는 도중에 경강역을 들러 100%메밀로 만든 막국수로 이번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이번 야유회는 여러모로 많은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오랜만의 친우들과의 여정은 그동안 못나누었던 각자의 삶을 나누는 힐링의 시간이었고,나아가 산해진미를 맛볼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아울러 차량을 제공하고 운전해주신 함인하 촬영감독님과 배현덕 친우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3-08-27 11:32:07


최광선님의 정보.
미국 휴스턴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퀘이커




최광선


Y


Former 농업마이스터 협회 이사 ,강원도 회장 at 농업

Studied 산림자원학과 at 강원대학교 대학원
Attended from 2015 to 2018

Lives in Hwacheon
From Hwacheon

Married
Since 7 June 1980



Phones
+82 33-442-0065


Address

강원도화천군 간동면간척리652-8번지
209 820


Social links
강원농업마이스터대학졸업(AIM)


Birthday
19 November 1950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05 박성용 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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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술용


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펌)



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http://ecopeace.pe.kr/index.php?pl=30

작성자 : 박성용(EcoPeace)
sungyongpk@yahoo.com
전직 - 유네스코/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시민사회실장, 사업조정자
현직 - 생명평화 훈련 교육기획 및 대안교육 운동가(자유직)

작성일 : 05/11/11 18:09

내가 퀘이커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님(현재 자주평화통일미주연합 고문)을 통해서이다. 자주연합활동을 하면서 이 선생님을 통해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활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해외봉사사무실(AFSC)에도 들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관심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이들을 퀘이커 학교(Friends School)에 보내면서 거기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교육, 아이들 인격존중과 평등에 대한 관점이 교사나 프로그램 속에 배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위가 끝나가는 마지막 해 2001년 나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선생님을 통해 필라델피아 남쪽, Wallingford에 소재한 퀘이커 교육기관이자 수련공동체인 Pendlehill (www.pendlehill.org)에 가을학기를 지내게 되면서 평화교육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내게 남겨진 인상적인 몇 가지 체험과 신학적 관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내가 펜들힐에 들어가고 나서 두 주 만에 9.11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 날은 논문 최종 본을 내는 날이어서 아침에 템플대 캠퍼스에 갔다가 학생들이 경악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TV를 지켜보고 계속 전화를 사방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각각 1시간에서 2시간 거리쯤의 위치에서 북으로는 뉴욕에, 서부 펜실베니아에 그리고 남쪽 워싱톤에 비행기가 각각 떨어지면서 가운데 위치한 필라델피아의 학생들에게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펜들힐에서는 지역사회에 매우 유명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일련의 공개강연회를 매 학기마다 해 오고 있었다. 이미 2년 전에 기획되고 1년 전에 주제와 강사가 섭외되는 이 공개강연회의 당시 주제는 “퀘이커와 돈”이었었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모니즘에 대항한 대안적 삶에 대한 것이어서 꽤나 기대가 큰 주제였다.

그러나 9.11사태가 터지자마자 펜들힐은 이 주제를 즉각적으로 취소하고 이슬람에 대한 주제로 바꾸면서 미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학자와 활동가, 이슬람권과 관계된 평화운동가 등으로 전면 교체하였고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가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대게 참석자들은 처음엔 퀘이커들이 많았으나 보통 100-200명이 모이던 숫자가 여러 지역사회의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넘치면서 그 장소를 옮겨 대대적인 모임과 더불어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인 이슬람권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더불어 미국의 헤게모니 정책에 대한 각종 반대운동의 결성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이념, 종교, 인종에 관계없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 것이다. 월남전중에 상선을 구입해서 구호물자를 베트남에 보내다가 미국함대가 이를 막고자 했던 사건이며, 20여 년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을 먼저 한 곳도 퀘이커 단체였다. 17세기 중엽이미 미국의 퀘이커들은 흑인노예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위원회를 두어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노예를 풀어줄 것을 권고하고 이것이 시행이 안 되자 연회에서 강제로 흑인노예주들에 대한 멤버쉽을 박탈시켜 퀘이커 숫자가 반으로 주는 일까지 감수하였다. 비록 전 세계에 30만 밖에 안 되는 숫자이면서도 갈등해결과 지역빈민구제활동, 비폭력저항운동, 인권을 위한 정책로비활동, 국제구호와 국제연대, 평화활동, 그린피스운동의 경우처럼 녹색활동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공헌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가 1656년 론세스톤(Launceston)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의 몇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Answering that of God in everyone"- 퀘이커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진동을 하는 자란 뜻이다. 퀘이커는 모든 인간은-남/여, 노/소, 정상인/장애우, 백인/흑인/황인, 신앙인/비신앙인을 막론하고 - 누구나 “하느님의 그것”이라 부르는 “신적인 빛,” “그리스도의 빛” “내적인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한 엘리트나 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직자가 없으며 모두가 친우(friends)로 불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심에 의한 종교 간의 대화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펜들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습자와 강사(instructor)간에 구별이 없으며, 강사의 경력이나 질로 보면 수십 년간을 그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독보적인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사로움이 두드러진 특성임을 느끼게 된다.
이는 무슨 결정을 할 때도 소수자의 신적인 빛을 이해하여 다수결로 정하는 법이 없다. Friends School의 교실에서는 아이가 장애우이어도 교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떠한 강제도 없으며, 어울림이 매우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예배처[교회]이자 모임장소인 Meeting House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평등의 원칙을 고려하여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한 팔각형내지 사각형의 의자 배치와 어떠한 성물-십자가, 촛대, 설교단, 성가대-도 없다. 이들 형식적인 것 모두가 신적인 빛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는 조용히 모여 침묵기도를 드리며 어느 누군가가 성령의 감흥을 받고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끼면 전체를 향해 말하게 된다.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은 말, 기도 혹은 노래 어떤 형식이든 가슴에서 울려 터져 나오는 그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며 함께 모두의 가슴이 울리는 듯한 반향을 일으켜 매우 감동적이곤 한다. 혹은 감흥이 없을 때는 기다리다가 침묵으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형태를 통해 각자는 개인의 내적 수행(individual practice)을 통해 신께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내적 감흥에 자신도 울림을 받으면서 공동체적 수련 (communal practice)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침묵명상기도는 성령, 신적인 빛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역사를 위해 나의 활동, 나의 에고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침묵의 시간을 갖을 때 이는 또한 ‘나의 말함’을 멈추고 미세할지라도 ‘타자의 음성 voices of Others'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적인 빛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허락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따라서 퀘이커에게 있어서 영성은 말하기 보다는 들음이 영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들음의 영성으로 인해 이들의 영혼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여리고 예민한지 느끼게 된다.

* “Be valiant for the Truth" -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이는 확신(convincement)과 관계된 것으로 도달하고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 (the way of life)이다. 위의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것에 응답함”이 신적 빛의 경험(experience)과 존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를 위해 용감해짐”이란 공개적으로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어떤 맹세니 징집문제에도 거부하고, 세상에 어떤 타협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퀘이커 신앙에는 신적 빛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 분리되지 않는다. 펜들힐에는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치유기도, 성서연구, 신학...)등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을 위한 프로그램 (폭력과 갈등대응, 지역빈민구호, 파트너쉽과 권한부여 empowerment ...)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화의 증언은 퀘이커 역사에 오래된 것이다. 장소, 혀, 펜 그 무엇이든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이나 자기희생이 따를 지라도 진리일 경우에는 목숨을 거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상업에 있어서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퀘이커라 할 때 그의 정직과 신용은 의심하지 않게 된다.

* “Be patterns, be examples" - 진리에 대한 경험은 모범을 만드는 실험(experimental)을 강화한다. 이들은 선교(mission)이란 말을 안 쓰고 봉사(service)란 말을 선호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을 높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누룩처럼 전위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 예가 감옥에서의 각종 자원 활동, 정신병동의 개선, 중재, 아동치유학교, 대안교육공동체운동, 평화활동이 그것이다.

또한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타자를 일에 함께 관여시키는 방식을 통해 소유권이나 멤버쉽의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펜들힐의 교육이 종교적 타자인 누구에게나 열어 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며, 수많은 퀘이커관련 봉사기관에 타 신앙인이 직원으로 와 있고 네트워크 활동에 과감히 이들 타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어느 특정한 공동체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향한다. 즉 봉사는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인류를 생명으로 모으는 (“spreading the truth abroad...gathering up into the life") 것이며,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함과 더불어 신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퀘이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마무리 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동안 따라온 허무주의와 내적인 고통이 정리되고 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실존적 교리로서 성육신 -let your life speak-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내 생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진리를 자기 삶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화교육운동을 하는 내게 있어서 근본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 2005. 11. 10. -


2016/12/11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2009년 12월 15일 김조년 드림

늙은 전사의 노래 권총이야기 |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12/20/일/15;00 - Daum 카페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12/20/일/15;00|퀘이커이야기
권술룡|조회 98|추천 0|
2009.12.31. 09:02
http://cafe.daum.net/kwonsay/H7Jy/18

<고백>

<대전 퀘이커 모임> 출범이야기 / 12/20/일/15;00


대전퀘이커 공부모임이 5주년이 되는 날,
이제 '공부'를 떼고 정식으로 <대전 퀘이커 모임>으로 출범 합니다,
그간 참여하셨거나 애정과 관심을 가지신 친우들...그리고 서울모임에서
그리고 대구의 시작모임에서도 와 주셔서 모두 40여명이나 모여
작은 잔치 자리에 함께 하였지요,

이중 몆분은 퀘이커로 살기로 하였고
350여년의 퀘이커 역사에 전세계에 겨우 40만의 소수의 무리들,
세계평화운동의 핵심에는 늘 한줌밖에 않되는 퀘이커가...
그리고 고난속에 있었지요,

이날 6,25전란 직후인 60전 한국에 첫 퀘이커를 시작하여 그후
함석헌선생님이 참여한 이행우(80여세)선생님이 카나다에서,
그리고 대전퀘이커 공부모임을 처음 열게 시작해준 박성준선생과
매월 서울서 와주신 오철근선생등,,
그리고 독일에서 퀘이커가 되어 돌아와 이끌어 온 김조년/이종희님1
모두가 한결같은 모습들이 였지요,
40명가까운 이들의 소중한 시간이 엿지요,

서울모임 60년...5년준비한 <대전모임> 그리고 시작된 <대구공부모임>으로 3개 모임으로
<년회>가 때가오면 앞으로 가능해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회운동의 직임들을 모두 내려놓고 서울 삼청동에서 <길담서원>을 어렵게 꾸려가시는

박성준선생은
'한반도 중심인 대전에서 5년이나 기다리며 준비한 이 모임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그리고
영성을 키우는 큰 역활을 할것이라!" 고 <대전퀘이커 모임>의 출범의 의미를 부여, 격려했다,

<세계기독교 고전 20선>중에 한권인 <퀘이커>창립자 <조지 폭스의 일기>를
함께 읽어가는 동안 옷깃을 여미며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의 생애내내 태산같은 파도와 맛서서 끊임없이 시대의 불의와 어둠, 열악한 감옥과
죽음의 위험, 테러와 고난에 찬 비 타협의 전도순레의 생애는 <퀘이커>이름 그대로 몸을 떨게 합니다,
사람의 영혼과 정신과 의기가 이렇게 높을수도 있구나! 하는 떨림이 였습니다,


소수의 작은 무리가 얼마나 높은 이상과 결기로 세상의 태풍의 눈으로 평화의 진군나팔수가 될수있기를! 소망하며 어떻게 키울것인가?!

어떻게 大鵬위 높고 깊은 뜻으로
세상을 다 가진것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움으로...
느림과 태풍같은 행동으로 태산같이... 깃털같음으로...
불의의 시대를 꿰뚫어 나갈수 있기를 !,
'너의 삶으로 이야기 하라!"고 할수있기를 !,

일시; 12/20/일/15;00부터
장소; 대전,동구 용전동 (한남대뒤) 한숲아파트 112동 1902호 <한숲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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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존경하는 친우님께,

우리가 2004년 12월 퀘이커 공부모임을 시작한 지 꼭 5년이 지났습니다. 모두가 다 이 짧지 않은 기간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때때로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만나면 좋았고 또 궁금하여 기다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해 말부터 정식 퀘이커모임으로 출발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 또 한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여러 친우님들에게 퀘이커모임으로 출발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부’라는 말을 떼고, ‘퀘이커모임’으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언제나 함께 했던 친우님께서 이 때 같이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다수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에 가입하는 절차를 통하여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본인이 직접 함께 퀘이커 신앙정신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을 표현하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내가 퀘이커로 살 수 있을까’, ‘그만큼 성숙되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정된 퀘이커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동의 신앙고백을 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과 삶은 자라는 것이기에 그렇게 살아보자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 믿습니다. 어린아이가 사람으로 갓 태어나서 성숙된 사람으로 자라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하면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약속이요 진리를 찾아나가는 공동의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조직과 이름 없이도 살고 일을 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최소한의 그러한 틀을 가지고 가는 것이 필요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틀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일단 함께 시작하겠다는 뜻을 저에게 주시면, 그날 같이 출발하는 사람들의 명단에 넣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미처 맘을 정하지 못한 친우님들이 부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부담 없이 전과 꼭같이 모이고 즐기고 감동하고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다만, 개미들이 이사할 대 앞에 가는 개미와 맨 뒤에 가는 개미도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다 한 개미군단에 속해서 한 길을 가는 무리들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잡아 보았습니다.

12월 20일 오후
15시: 고요예배
16시: 이러저러한 이야기 꽃
17시: 먹을거리 함께 나눔: 한밭레츠 두루부엌에 주문
18시: 우리끼리 하는 즐거운 마당; 음악, 춤, 기타

* 자기 악기를 하나 가지고 오셔서 연주하면 참 좋겠습니다.
언제나처럼 건강하시고 평화롭기를 빕니다.

2009년 12월 15일 김조년 드림

2016/12/06

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네트워크>한평consensus - [피스앤피플 15] 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피스앤피플 15] 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평화포럼
http://koreapeace.co.kr/xe/485212016.12.06 13:59:28 (*.109.143.21) 28
미국에서 남북을 잇다
-재미동포 평화운동가 이행우 선생-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작하면 돈은 따라옵니다. 남북이 화합하고 통일해서 평화로 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통일과 평화를 위한 활동가로 일생을 매진한 이행우 선생은 올해 8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목소리였다. 한반도의 중요한 고비마다 막후에서 미국과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던 이 선생은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살아있는 활동가였다.

이행우 선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퀘이커(Quaker)다. 이 선생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동료 교사의 소개로 퀘이커의 존재를 알게 됐다.

"고향인 전라북도 익산에서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 중이었어요.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영어 선생님이 퀘이커교를 믿고 있었어요. 익산에서 2년 있다가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그 영어 선생님도 비슷한 시기에 서울로 올라와서 저랑 같은 학교에 부임했어요. 그러더니 느닷없이 퀘이커 모임에 같이 가자고 하더라구요.

저는 처음에 '예수쟁이들 모이는 거 아니야? 안 갈래'라고 했는데 이 선생님이 다른 예수쟁이들이랑은 다르다면서(웃음) 살살 꼬시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가게 됐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좋더라구요. 목사가 없는 것도 특이했구요. 그리고 제가 원래 한 번 시작하면 좀 오래하는 편이라서 모임에 꾸준히 나갔어요. 그러다보니 한국 퀘이커 모임 창립 멤버까지 됐죠. 지금 창립 멤버 중에 남은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1960년 서울에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창립하는 데 함께했던 이 선생은 퀘이커가 한국전쟁 당시에도 다른 기독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호활동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퀘이커들이 첨예한 갈등을 보이는 두 진영의 중재 역할을 했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퀘이커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퀘이커는 양쪽이 갈등을 보일 때 중재 역할을 해왔어요. 전쟁 이후 구호활동을 벌이더라도 양쪽 모두에 들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죠. 실제 한국전쟁 때도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들어가려고 했어요. 북쪽에서 반대했기 때문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요.

구호활동 자체가 다른 종교나 기관이랑 좀 다르기도 합니다. 구호활동, 지원활동을 하겠다고 목사가 오면 큰 집을 차지하고 자기 집에 울타리를 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퀘이커는 일단 목사가 없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더라구요.

최대한 현지에 맞추려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랑 똑같이 살고 구공탄 떼서 밥 해먹고, 봉사활동하고 그러더라구요. 또 한국전쟁 당시에는 한국에 차가 별로 없어서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클랙숀을 누르면 놀라는 사람이 많았대요. 그래서 아예 클랙숀을 떼버리고 운행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는 것에 정말 놀랐죠.

이런 모습을 보고 퀘이커들이 한반도 문제에도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퀘이커들의 중재로 한반도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선생은 퀘이커 모임에 나가면서 사상가이자 인권운동가였던 함석헌 선생과 본격적인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함 선생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1년 동안 퀘이커의 역사를 공부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제가 원래 전공은 수학이에요. 한국에서 아이들도 가르쳤고. 그래서 미국에 가게 된 김에 퀘이커 역사 공부를 마친 뒤에 수학공부를 더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학비가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제가 당시 나이가 39이었어요. 장학금은 35세 이하한테만 주더라구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서 수학공부는 하기 힘들 것 같았고, 그래서 컴퓨터를 공부해서 취직을 하자는 생각을 했죠. 그때만 해도 컴퓨터 기술이 막 발전하기 시작할 때라서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렇게 미국에서 10년을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 한 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국을 떠나온 지 12년 만인 1980년, 그는 한국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목도한 한국은 '아름다운 조국'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5.18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무참한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현장에서 목격한 이행우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우선 갈라져 있던 동포 사회가 서로를 이해하고 만나는 장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동포 사회는 통일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두고 좌와 우로 갈라져 있었어요. 먼저 민주화를 한 뒤에 통일을 해야 한다는 '선민주 후통일'과 통일을 한 뒤에 민주화를 해야 한다는 '선통일 후민주'로 나뉘어져 있었죠. 의견이 갈라지면서 서로 잘 만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동포사회의 화합을 위해 1947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퀘이커 평화단체 '미국친우봉사회(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의 도움을 받았죠. 이 단체의 이름으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컨퍼런스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1981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첫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호응이 좋았어요. 이후 3년 동안 매년 컨퍼런스를 열면서 동포사회의 화합에 주력했죠"

이행우 선생의 노력에 진보와 보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남북의 평화 통일을 위해 동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이를 <코리아 리포트>로 묶어냈다. 또 1985년에는 미국의 한국 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두 개의 한국, 하나의 미래>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여전히 전두환 정권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포들만의 힘으로는 어려운 현실에서 그는 재미동포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선생은 동포들이 미국 의회와 정책 담당자들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를 통해 평화통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새로운 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재미동포들은 미국이 제대로 된 한반도 통일 정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94년 미 교회협의회(NCC) 회장 이승만 목사와 함께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를 창립했어요"

NAKA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운동을 비롯해 재미동포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는 등의 역할을 목표로 삼았다.

"NAKA를 만들고 난 뒤 미국 국무성과 의회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동안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서 아주 반가워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활동에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죠"

이후 이 선생은 2004년 남한과 북한, 미국 의원들이 모두 모이는 컨퍼런스를 열었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2004년 7월 20일 이행우 선생은 미 의회에서 '한반도 평화·안전 포럼'을 열었다. 남한·미국의 국회의원과 북한의 유엔 대사가 이 자리에서 만났는데, 남한과 북한, 미국 인사가 한 자리에 마주 앉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당시 열린우리당 장영달, 강혜숙, 김재윤, 선병렬 의원과 이창복 전의원 등이 참석했고 북한에서는 박길연 유엔주재 대사와 한성렬 부대사, 미국에서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던 조 바이든 상원의원이 등이 참석했다.

이행우 선생은 이 포럼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이자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을 움직여 공동주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레그와 만나서 한 말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의 첫 말이 요즘 퀘이커가 좋은 일들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고, 나의 답은 당신은 명문 윌리암스 대학을 나오고 CIA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으로서 좋은 일을 많이 하니 감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번 포럼이 당신의 아이디어냐, 바이든 의원의 아이디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디어인데 바이든이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레그가 자금이 있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돈은 없다고 했더니 '오케이, 같이합시다'라고 말하더라구요. 생각보다 별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가 끝났어요"

이 선생은 이전에 그레그 회장과 안면은 있었지만 한 번도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레그는 비교적 쉽게 이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레그의 협조로 포럼은 순조롭게 치러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중간에 실무적인 단계의 난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유엔 주재 북한 외교관들은 맨해튼 콜롬비아 스퀘어에서 25마일 밖으로 나가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당장 이 허가를 받아야 북한 인사들이 컨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전까지는 국무부 허가 사항이었는데 부시 정부에서는 백악관 전결사항으로 되어있어 허가를 받는데 더 많은 시일이 필요했지요.

백악관에서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 우선 국무부에서 결재가 나와야 하는데, 결재가 콜린 파월 국무장관한테까지 올라가지를 않는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중간에 결재가 막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결국 행사를 나흘 앞두고 국무장관 결재를 받았죠. 행사가 화요일에 있었는데, 그 전주 금요일 오후 5시 5분 전에 백악관 허가가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주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죠"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포럼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포럼 이후 그레그 회장은 북측 인사들의 태도가 아주 인상 깊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고 다른 미국 민주당 의원들도 ‘북한의 핵 폐기가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윈-윈' 게임이 될 것’이라며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대를 좁혀 나가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또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 포럼에서 이행우 선생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찾기는 어려웠다. 사실상 포럼을 기획하고 포럼 성사를 위해 뛰어다녔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은 셈이다. 이렇게까지 묵묵히 목표한 바를 위해서 열심히 움직인 이유를 묻자 이 선생은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면 됐지 내 이름이 나고 안 나고는 관심 밖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함께 했지 나 혼자 한 일도 아니고요"라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저는 일단 시작하는 사람이에요. 좀 미련하기도 하지만 안 되더라도 일단 합니다. 또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자금도 없이 포럼이나 컨퍼런스 등을 주최해왔는데 신기하게도 적자를 보거나 자금에 문제가 있던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 돈이 없다고 아무 것도 못하는 건 아니라고 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합니다"

그 포럼을 마치고 난 며칠 후 그레그 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그레그는 이 선생에게 "나는 처음에는 매우 회의적이었는데 당신이 밀어붙여 일이 성공했는데도 결국 내가 주목을 다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이 선생은 "이번은 다만 시작이고 나는 앞으로 매년 계속하려고 하는데 당신도 나와 함께 계속 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레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그레그 회장은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설득의 기술, 묵묵한 실천

이후 2009년 버락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뒤 이행우 선생은 한국의 시민 사회와 미국 의회 간의 만남을 주선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 이문숙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 등이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과 북핵 문제를 포함한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한국에서 참가하는 이들은 새로 출범한 오바마 정부가 북한과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야 북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2011년 독일의 에버트 재단을 알게 된 이 선생은 6자회담 참가국들과 통일의 경험이 있는 독일을 함께 묶으면 의미 있는 세미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2012년 3월 세미나를 준비했다.

"독일이 통일도 했고 유럽연합도 만드는 등 좋은 경험이 있는데,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 독일 당신들의 경험을 좀 나눠 주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한 달 후에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북한 참석자들이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되는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하려면 베이징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하더군요. 중국 쪽에서 그런 큰 국제회담은 뉴욕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뉴욕에서 하면 자기들도 꼭 참석하겠다고 해서 결국 미국에서 하는 것으로 밀어부쳤습니다"

이 세미나는 북미 간 2.29 합의를 이룬 직후였고 6자회담이 멈춘 지 햇수로 4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동북아를 비롯해 세계 주요 국가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당시 이 세미나에 미국 측에서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 제임스 레이니·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등 한반도 전문가들이 총출동했다. 북한에서도 리용호 외무성 부상과 최선희 부국장 등 6자회담과 관련한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문정인 연세대학교 교수, 손학규 의원과 함께 정부 인사로 임성남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조현동 평화외교기획단장 등도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러시아에서도 관련 인사들이 참석하는 등 6자회담 참여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여기에 독일과 유럽연합 관계자까지 참석하는 명실상부한 국제포럼이었다.

키신저 전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 존케리 상원위원장까지 미국 내 대표적인 인사들을 이 선생은 어떻게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을까? 그는 원래 이 인사들과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이런 분들은 자기 휘하에 각 분야 담당 보좌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담당 보좌관을 설득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직접 이야기한다고 해도 거의 대부분 본인의 보좌관에게 물어보지요. 결국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려면 이 사람이 어떤 문제를 누구한테 물어보는지를 파악하여 그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하면 사실상 반 이상은 설득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존 케리 외에도 키신저 전 장관이나 북한의 외무성 부상 등 6자회담 및 북핵 문제와 관련된 인사를 한 자리에 모이도록 섭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선생은 마치 그런 일에는 도가 튼 듯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일단 북한이 나와야 세미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엔 대표부에 갔죠. 세미나 참석여부 관해서 본국(평양) 의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열흘 만에 참석하겠다는 답변이 왔지요.

그 다음에는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에게 북한의 답을 알려주며 협조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케리 위원장은 북한에서 고위급이 올 경우 참석하겠다고 했고 결국 세미나에 함께 하기로 했죠. 이러다 보니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생각났습니다. 키신저가 참석하는 회의에서 북한 사람들은 그의 발언을 열심히 듣고 기록한다는 점에 착안, 키신저가 참석하면 북한에서 더 고위층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 키신저를 움직였고 참석 승낙을 받아냈지요.

그러다 보니 한국 내 국회의원이나 전직 관료, 그리고 외교부에 있는 현직 관료까지 참석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서 행사가 성황리에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북미 양국의 2.29 합의 직후로 날짜를 일부러 맞춘 것이냐는 질문에 이 선생은 "의도적으로 맞춘 건 아니었고, 키신저와 또 한 사람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한 푼도 없이 시작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좋은 프로그램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완전히 단절된 남북, 민간이 적극 움직여야

남한과 북한, 미국과 북한 간의 다리를 놓으며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던 이행우 선생에게 2016년 현재 북한의 핵 문제 해결과 동북아 정세 완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남한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 그리고 7월 남한 내 사드배치와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점점 더 엄혹해져 가고 있다.

"정부가 나서지 않을 때는 민간이 적극 다리를 놓고 만나는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번에 말레이시아에서도 북한의 한성렬 부상과 미국의 전직 관료들이 만났습니다. 로버트 갈루치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 낸 경험이 있고, 조지프 디트라니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나왔을 때 미국 측 차석대표로 참석한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것처럼 자꾸 만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과 베트남이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듯이 북한과 미국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도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베트남과 미국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단계별로 국교정상화까지 가는 것이었죠. 그렇다고 단계별로 시한을 정해둔 것은 아니었고,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단계에 따라 진행하는 건데, 이렇게 하면 훨씬 더 체계적인 관계 수립이 가능합니다.

북한과 미국도 이처럼 로드맵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끝났을 때 핵도 없어지고 평화협정을 맺고 양측이 국교 정상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북한과 미국 또는 남북한과 미국 또는 6자회담 참가국 등 관련한 국가들의 만남이 있다면 북미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통해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2016년, 남북한은 핵실험과 각자 억지력의 구축으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미국은 트럼프의 당선으로 어떤 대북정책을 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일본은 재무장의 날개를 달았고 러시아는 호시탐탐 동쪽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다.

이렇듯 동북아와 한반도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선생의 삶과 조언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국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사국 간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던 이행우 선생, 지금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의 삶이 제시하고 있다.

이재호(프레시안 기자)

2016/10/11

박성용(EcoPeace) 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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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http://ecopeace.pe.kr/index.php?pl=30

작성자 : 박성용(EcoPeace)
sungyongpk@yahoo.com
전직 - 유네스코/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시민사회실장, 사업조정자
현직 - 생명평화 훈련 교육기획 및 대안교육 운동가(자유직)

작성일 : 05/11/11 18:09





내가 퀘이커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님(현재 자주평화통일미주연합 고문)을 통해서이다. 자주연합활동을 하면서 이 선생님을 통해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활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해외봉사사무실(AFSC)에도 들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관심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이들을 퀘이커 학교(Friends School)에 보내면서 거기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교육, 아이들 인격존중과 평등에 대한 관점이 교사나 프로그램 속에 배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위가 끝나가는 마지막 해 2001년 나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선생님을 통해 필라델피아 남쪽, Wallingford에 소재한 퀘이커 교육기관이자 수련공동체인 Pendlehill(www.pendlehill.org)에 가을학기를 지내게 되면서 평화교육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내게 남겨진 인상적인 몇 가지 체험과 신학적 관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내가 펜들힐에 들어가고 나서 두 주 만에 9.11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 날은 논문 최종 본을 내는 날이어서 아침에 템플대 캠퍼스에 갔다가 학생들이 경악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TV를 지켜보고 계속 전화를 사방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각각 1시간에서 2시간 거리쯤의 위치에서 북으로는 뉴욕에, 서부 펜실베니아에 그리고 남쪽 워싱톤에 비행기가 각각 떨어지면서 가운데 위치한 필라델피아의 학생들에게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펜들힐에서는 지역사회에 매우 유명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일련의 공개강연회를 매 학기마다 해 오고 있었다. 이미 2년 전에 기획되고 1년 전에 주제와 강사가 섭외되는 이 공개강연회의 당시 주제는 “퀘이커와 돈”이었었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모니즘에 대항한 대안적 삶에 대한 것이어서 꽤나 기대가 큰 주제였다.

그러나 9.11사태가 터지자마자 펜들힐은 이 주제를 즉각적으로 취소하고 이슬람에 대한 주제로 바꾸면서 미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학자와 활동가, 이슬람권과 관계된 평화운동가 등으로 전면 교체하였고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가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대게 참석자들은 처음엔 퀘이커들이 많았으나 보통 100-200명이 모이던 숫자가 여러 지역사회의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넘치면서 그 장소를 옮겨 대대적인 모임과 더불어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인 이슬람권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더불어 미국의 헤게모니 정책에 대한 각종 반대운동의 결성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이념, 종교, 인종에 관계없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 것이다. 월남전중에 상선을 구입해서 구호물자를 베트남에 보내다가 미국함대가 이를 막고자 했던 사건이며, 20여 년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을 먼저 한 곳도 퀘이커 단체였다. 17세기 중엽이미 미국의 퀘이커들은 흑인노예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위원회를 두어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노예를 풀어줄 것을 권고하고 이것이 시행이 안 되자 연회에서 강제로 흑인노예주들에 대한 멤버쉽을 박탈시켜 퀘이커 숫자가 반으로 주는 일까지 감수하였다. 비록 전 세계에 30만 밖에 안 되는 숫자이면서도 갈등해결과 지역빈민구제활동, 비폭력저항운동, 인권을 위한 정책로비활동, 국제구호와 국제연대, 평화활동, 그린피스운동의 경우처럼 녹색활동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공헌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가 1656년 론세스톤(Launceston)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의 몇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Answering that of God in everyone"- 퀘이커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진동을 하는 자란 뜻이다. 퀘이커는 모든 인간은-남/여, 노/소, 정상인/장애우, 백인/흑인/황인, 신앙인/비신앙인을 막론하고 - 누구나 “하느님의 그것”이라 부르는 “신적인 빛,” “그리스도의 빛” “내적인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한 엘리트나 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직자가 없으며 모두가 친우(friends)로 불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심에 의한 종교 간의 대화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펜들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습자와 강사(instructor)간에 구별이 없으며, 강사의 경력이나 질로 보면 수십 년간을 그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독보적인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사로움이 두드러진 특성임을 느끼게 된다. 이는 무슨 결정을 할 때도 소수자의 신적인 빛을 이해하여 다수결로 정하는 법이 없다. Friends School의 교실에서는 아이가 장애우이어도 교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떠한 강제도 없으며, 어울림이 매우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예배처[교회]이자 모임장소인 Meeting House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평등의 원칙을 고려하여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한 팔각형내지 사각형의 의자 배치와 어떠한 성물-십자가, 촛대, 설교단, 성가대-도 없다. 이들 형식적인 것 모두가 신적인 빛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는 조용히 모여 침묵기도를 드리며 어느 누군가가 성령의 감흥을 받고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끼면 전체를 향해 말하게 된다.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은 말, 기도 혹은 노래 어떤 형식이든 가슴에서 울려 터져 나오는 그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며 함께 모두의 가슴이 울리는 듯한 반향을 일으켜 매우 감동적이곤 한다. 혹은 감흥이 없을 때는 기다리다가 침묵으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형태를 통해 각자는 개인의 내적 수행(individual practice)을 통해 신께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내적 감흥에 자신도 울림을 받으면서 공동체적 수련 (communal practice)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침묵명상기도는 성령, 신적인 빛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역사를 위해 나의 활동, 나의 에고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침묵의 시간을 갖을 때 이는 또한 ‘나의 말함’을 멈추고 미세할지라도 ‘타자의 음성 voices of Others'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적인 빛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허락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따라서 퀘이커에게 있어서 영성은 말하기 보다는 들음이 영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들음의 영성으로 인해 이들의 영혼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여리고 예민한지 느끼게 된다.

* “Be valiant for the Truth" -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이는 확신(convincement)과 관계된 것으로 도달하고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 (the way of life)이다. 위의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것에 응답함”이 신적 빛의 경험(experience)과 존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를 위해 용감해짐”이란 공개적으로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어떤 맹세니 징집문제에도 거부하고, 세상에 어떤 타협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퀘이커 신앙에는 신적 빛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 분리되지 않는다. 펜들힐에는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치유기도, 성서연구, 신학...)등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을 위한 프로그램 (폭력과 갈등대응, 지역빈민구호, 파트너쉽과 권한부여 empowerment ...)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화의 증언은 퀘이커 역사에 오래된 것이다. 장소, 혀, 펜 그 무엇이든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이나 자기희생이 따를 지라도 진리일 경우에는 목숨을 거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상업에 있어서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퀘이커라 할 때 그의 정직과 신용은 의심하지 않게 된다.

* “Be patterns, be examples" - 진리에 대한 경험은 모범을 만드는 실험(experimental)을 강화한다. 이들은 선교(mission)이란 말을 안 쓰고 봉사(service)란 말을 선호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을 높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누룩처럼 전위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 예가 감옥에서의 각종 자원 활동, 정신병동의 개선, 중재, 아동치유학교, 대안교육공동체운동, 평화활동이 그것이다.

또한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타자를 일에 함께 관여시키는 방식을 통해 소유권이나 멤버쉽의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펜들힐의 교육이 종교적 타자인 누구에게나 열어 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며, 수많은 퀘이커관련 봉사기관에 타 신앙인이 직원으로 와 있고 네트워크 활동에 과감히 이들 타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어느 특정한 공동체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향한다. 즉 봉사는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인류를 생명으로 모으는 (“spreading the truth abroad...gathering up into the life") 것이며,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함과 더불어 신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퀘이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마무리 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동안 따라온 허무주의와 내적인 고통이 정리되고 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실존적 교리로서 성육신 -let your life speak-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내 생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진리를 자기 삶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화교육운동을 하는 내게 있어서 근본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 2005. 11.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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