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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이은선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1) 이은선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3.1운동백주년이... | Facebook


이은선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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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한국 ‘생물(生物)’여성주의의 시각에서>

3.1운동백주년이 다가오면서 한일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자주 올라온다. 그 중에서도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가 종종 인용되고 그에 대한 평가들이 눈에 뜨인다. 나는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가로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 이해가 많은 것을 밝혀주고 시사해주지만 큰 맹점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래의 글은 1년전 대학을 떠나면서 묶어냈던 <세월호와 힌국여성신학>의 서문으로도 썼고, 이후 4월의 한나아렌트학회 월례회에서도 한 번 읽었던 것을 약간 축약한 것이다. 한국적 '생물'(生物, 만물을 낳고 살리는)여성영성의 시각에서 오구라 교수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그가 한국의 고유한 '한국혼'을 놓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오구라교수의 책이 다시 계속 회자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나의 입장을 다시 밝히고자 한다.

1.
 
일본의 귀한 한국학 연구가 오구라 기조 교수의『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오구라 교수는 지난 1980-90년대 한국에 유학 와서 8여 년 동안 한국 철학을 공부한 뛰어난 지한파이고, 최근에는 한국의 ‘영성’에 대한 관심까지 폭을 넓혀서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바른 상을 세우려고 분투하는 소중한 한국학 학자이다. 이 책의 글들은 원래 오구라 교수가 199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한류 붐이 막 일어나는 시점에 일본의 한 잡지사 독자들을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들을 모아서 낸 문고판의 후기를 보면 저자는 한 때 한국에 살 때 “한국인이 되자”는 결심까지 하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싶다”라고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는 일본에서의 한국 인식이 너무도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한 거기에 더해서 한국인들조차도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인식이 매우 조악하고 허위에 찬 것임을 보고서 자신이 발견한 한국을 ‘놀람’과 ‘찬탄’,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한 마디로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한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그것도 특히 유교, 그중에서도 뼛속까지 유교 주자학의 '리(理)'로 체화된 나라로서 그것은 한국이 이웃 일본 등과는 달리 항상 하나의 '도덕'을 지향하는 “도덕 지향성 국가”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거기서 도덕 지향성이란 삶에서 그렇게 도덕과 명분(理)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을 통해서 현실적 삶에서의 성공과 번영(氣)까지도 함께 얻으려는 한국 사회의 “상승을 향한 열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한국 사회를 계속 역동적이게 하고, 지치지 않게 하는 젊음과 패기, 뛰어난 천재의 나라로 만들지만 거기에 바로 한국인들의 깊은 피로(恨)와 외부지향성, 극심한 경쟁 사회의 각축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이 그처럼 리와 도덕지향의 나라인 것을 드러내는 좋은 일례로 한국에서는 운동선수들조차도 도덕성을 갖추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을 지적하는데,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들에 대한 소개와 칭찬에도 여지없이 그들의 좋은 인성과 도덕성이 수없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
 
지난 여름 안동 도산서원 퇴계학회에서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던 오구라 교수의 이 지적과 성찰을 읽고 탁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과 학문도 바로 이러한 측면이 많이 있고, 어쩌면 남들보다 먼저 교수직에서 떠나려 하는 것도 그들보다 더 ‘먼저’, 또는 더 ‘많이’ 다시 한 번 ‘도덕성’(理)을 성취하려는 상승열망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서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오구라 교수는 한국인의 이 理 지향성을 단지 지향성 그 자체에서만 평가하면서 거기서의 지향의 내용이나 방향성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국에서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이완용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을 들어서 그러한 일은 한국에서 민족주의적 ‘리’가 여전히 승하기 때문이고, 언젠가는 그들(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오구라 교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추구(理)했다는 것 자체이지 거기서의 내용(氣)이나 방향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관점은 나에게는 오히려 한국 사상(유교)이 끊임없이 넘어서고자 했던 ‘리’(理) 또는 ‘기’(氣) 일원론에 머문 것이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그가 참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한국적인 특성, ‘리기불이’(理氣不二) 또는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3.
 
나는 그렇게 된 이유가 오구라 교수가 한국 사상 또는 유교 사상에서의 ‘종교적(영적)’이고 ‘여성적’인 특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고 하면서 그 철학을 특히 ‘유교’ 철학, 주자학적 ‘도덕’(리)지향성으로 보면서, 그러나 거기서의 도덕은 그 “최고 형태”를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로 여겨지고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21쪽). 다시 말하면 오구라 교수는 한국 유교를 철저히 하나의 “현세주의적인” ‘도덕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한국 유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현세적 도덕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말하는 ‘도덕․권력․부’의 삼위일체를 넘어 그것이 깨지더라도 그 모순과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며 삶을 지속하려는 정신의 노력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을 말한다. 나는 한국 유교에서의 이와 같은 특성-어떻게든 삶과 존재에서 ‘리기 불이성’(理氣 不二性)과 그 통합성을 함께 담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그 ‘종교성’(religiosity)내지는 ‘영성’( spirituality)으로 이름 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일본인 오구라 교수뿐 아니라 사실 한국 사상가들도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영성적 특성을 특히 조선 유교여성들의 지난했던 삶에서 관찰하고, 그것을 오늘 한국적 여성신학과 영성의 구성을 위한 의미로 잘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19세기 조선 여성선비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 )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에 대한 연구가 그 한 예이고, 오늘의 상황에서도 곳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특성에 대한 연구를 나는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수행하였다.
오구라 교수의 한국 사상 이해에서는 ‘상승’이나 ‘지향’, ‘열망’ 등의 성공의 이야기만 있지 ‘자기희생’이나 ‘비움’(謙虛), ‘겸비’(孝)나 ‘인내’ 등의 이야기는 드물다. 그렇게 그의 이해는 ‘철학’과 ‘도덕’, ‘자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나는 한국적 유교가 하나의 ‘영성’으로서 단순히 어떤 성취의 상승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고(捨己從人), 스스로가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을 통한 이룸(求仁成聖)의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명제보다는 이미 우리가 함석헌 선생 등에게서 들었던 ‘한국은 하나의 뜻이다’라는 명제가 한국적 삶의 특성을 훨씬 더 적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
 
2천 년대 와서 나의 이러한 유교적 여성신학 언어가 다시 서구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 1906-1975)의 것과 많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이나 『정치의 약속』, 『인간의 조건』등에서 나타나는 궁극과 현실의 연결, 전통과 현재의 새로운 관계, 전통과 과거에 대해서 참으로 급진적이고 전복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견실한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 사고의 불이성(不二性)이 내가 유교 영성과 종교성의 핵심으로 바로 여기․이곳의 적나라한 관계의 현실 속에서 그 궁극성(聖․性․誠)을 실현하려는 노력(聖學之道, to become a sage)이라고 본 관점과 매우 잘 상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적실하다는 것을 최근에 다시 한 하이데거 전기 연구에서 발견했는데, 그 전기 연구가(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아렌트가 나중에 서양철학의 집대성이라고 하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사상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전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죽음으로 달려감”의 ‘사멸성’(死)을 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탄생성’(生)으로 응답했으며, 하이데거가 이 세계에서 지향하는 개방성을 “각자의 본래성”이라고 본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타자와 함께 하는 행위 능력”(acting in concert)의 ‘다원성’과 ‘공공성’을 강조했고,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세인(Man)의 세계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는 것에 반해서 아렌트는 “세계사랑”(amor mundi)을 제시했다고 밝히는 것이다(『하이데거』,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243쪽).
 
여기서 서술된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에서 드러난 대로 나는 하이데거를 서구 철학 또는 기독교적 사고의 종말로 보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아렌트에게서 보여지고, 그 아렌트적 사고가 한국 전통 여성들의 ‘천지생물生物지심’(천지의 낳고 살리는 마음)의 영성과 잘 연결되며, 인간의 관계와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다원성’과 ‘공공성’에 대한 강조(仁), 그리고 바로 이 낮은 세계에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는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과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한국적 유교 영성의 추구가 아렌트의 ‘세계사랑’과 잘 연결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탐색은 그리하여 그 이후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여성性․정치性의 한몸짜기(2011)>나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관계 속에서(2013)> 등으로 묶여졌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2016)>의 탐색 등으로 지속되었다.
 
5.
 
이번 저서(『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18』는 이상과 같은 생각에 있던 내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를 맞아서 어떻게 그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물음들 속에서 그 시간들을 지나왔는가를 보여주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사를 겪은 후 이명박 대통령의 시간을 지내고 박근혜 대통령을 맞아서 일어난 참사 속에서 온 국민은 너무나 엄청나고 끔찍한 일이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고, 특히 당시 그 참사 앞에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유족들과 한국 사회에 보여준 행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 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 아렌트의 시각들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세계 제1,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제국주의와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를 겪었고, 그러한 끔찍한 재앙들이 어떻게 인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서구 유럽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과 통찰을 통해서 밝혔기 때문에 그러한 통찰들이 21세기 신제국주의 시대,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과 철저히 사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에 일어난 우리의 일들을 파악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한국 교회와 신학이 그러한 종말적 상황과 비극 앞에서 보여준 비신앙적 행태와 무기력, 무능력은 우리가 신앙을 계속해서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세상의 삶과 정치와 경제가 저세상의 삶과 교회와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의 물음을 묻게 해서 앞에서 언급했던 아시아 유교전통과 대화하면서 나온 ‘聖․性․誠의 여성신학’과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이 어떻게 대안을 제안할 수 있는지를 더욱 고민하도록 했다.
 
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한 달 만에 쓰인 맨 처음의 글을 시작으로 해서 이번 참사에서 제일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월호)의 사실적 진실과 정치의 충돌 이야기는 바로 아렌트가 나치 전체주의와 유대인 학살이라는 대참사에 직면해서 어떻게 정치와 권력에 의해서 사실이 왜곡되고, 은폐․조작되며, 폐기되면서 인간 함께함의 삶이 불가능해지는가의 과정을 살핀 논리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인간 상식과 모든 인간 공동 삶의 생명줄과 토대가 되는 사실과 말이 부패하고 왜곡되었을 때 다시 그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거기서 종교와 정치, 교육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우리 시대의 한 평범한 여성의 삶을 통해서 조명해보기도 하였다. 이런 우리의 질문들은 근본적으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과 죽음과 부활, 용서와 약속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다음에 이어지는 질문들은 바로 한국 기독교와 교회, 신학이 전통의 화석화된 신이야기와 부활 이야기 등에 사로잡혀서 이런 대참사의 시기에 오히려 유족들을 교회와 신앙 밖으로 내몰고 여전히 자신들이 견고하게 쌓은 아성 속에서 남아서 자기 것을 지키려는 시도들을 근본에서 흔드는 물음들을 제기한 것이다. 에티 힐레줌이라는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어간 여성의 신앙과 인간적 삶의 모습을 살피면서 세월호 이후의 한국 교회와 유족들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할 까를 물었고, 또 이렇게 어린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제일 직면하게 된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물은 것이 세월호 1주기 이후의 글들이다. 2주기를 맞아서도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오히려 유족들이 억압받고 조롱받고 정말 코너에 몰려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가야할지를 몰라서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부활의 물음을 더욱 급진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7.
 
세월호 2주기가 지나면서 떠났던 산티아고 기행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삶의 질문을 인터뷰 형식으로 고백한 글이 있고, 결국 세월호 유족들의 삶도 포함해서 이런 모든 신앙과 정치와 의식의 물음들은 이 세상에서의 신앙을 지키는 ‘소수자’(pariah)의 물음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상상'(imagination)과 연관되는 것을 말하는데,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즉 너희들의 잘못된 상상을 금하라는 이야기와 그러나 동시에 다시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너희 상상으로 언어와 내러티브에 그려진 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믿고 신뢰하며 살라는 두 차원의 ‘믿음’과 ‘상상’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제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바로 ‘믿음’과 ‘신뢰’(信)의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우리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싶었다. 즉 오늘 세월호와 같은 것을 겪고 난 사회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것인지, 우리 사이에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이 다시 가능한 것인지, 무슨 방식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우리 공동 삶의 토대가 되는 말과 사실이 왜곡되고 거짓과 폭력과 고립만이 난무한 세상에서 다시 서로를 관계시키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이제 하나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지, 우리 공동 삶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용서하고 약속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지, 이러한 ‘믿음’(信)과 관계되는 것들을 물어가고 탐구하는 것이 나는 세월호 이후의 신학, 특히 한국 여성신학이 몰두해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8.

한나 아렌트는 이 세상이 새로워지는 두 가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에 따르면 이 세상의 새로워짐은 이 세상에 ‘늦게 도착한’(belated) 새로운 세대의 새 탄생과 창조에 의해서인데, 그러한 ‘늦게 온 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 늦게 온 자들에게 기성세대의 대변인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안내해주고, 늦게 온 세대가 이 세상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성세대의 ‘세계에 대한 사랑’(amor mundi)을 말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참으로 염려하고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세계를 계속 새롭게 하고 책임져나갈 늦게 온 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기성세대의 세계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미투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고, 한국 여성신학이 일찍이 시작하고 탄생시켰던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의 성폭력문제와 성평등의 물음을 어떻게 더 전개시켜나가야 할지의 과제 앞에 다시 섰다. 오늘 교회와 신학이 한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맛 잃고 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던져짐을 당하는 현실에서, 그리고 오늘 매일, 매 순간에 절박하고 긴급하게 만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난제 앞에서 한국 여성신학이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의 물음 앞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고, 그것을 체화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희생’이나 ‘비움’, ‘겸비’(謙虛)와 ‘용기’, ‘인내’ 등의 이야기가 우리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덕과 철학과 과학의 길옆에서 그들과 함께, 아니면 앞서서 신앙과 믿음과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 한국 여성신학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모여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나눌 때 그 무게와 짐이 감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안다. 그것을 아는 믿음 속에서 함께 그 길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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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un-joo Lee

"늦게 온 세대에 대한 사랑"이 곧 우리 기성세대가 행하여야 할 '세계사랑'이라~ 가슴을 울립니다.

이은선

Myun-joo Lee 고맙습니다.


2023/10/16

알라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 이은선 2016

알라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 한국적 페미니즘, 한국적 포스트모던 영성 
이은선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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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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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적 여성신학자, 기독교적 유교인'을 자임하는 저자가 페미니즘을 매개로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를 시도하고, 타자의 거울로 자아를 재조명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독교, 다른 유교를 탐색한다. 이로써 기독교는 다시 한 번 개혁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주체성을 함양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며, 유교는 자기의 종교성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다시 깊어지고 사람들의 영성과 창조성을 배양하는 데 이바지하게 되기를 지향하는 책이다.

저자는 궁극적인 초월에 관한 질문인 종교-형이상학적인 물음, 젠더 정치도 포함해서 우리 공동체 삶의 치리의 문제인 정치와 경제사회의 물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물음들이 도달하게 되는 문화와 교육, 사람의 성숙에 대한 물음을 모두 함께 어울러서 통합적으로 살펴본다. '유교적 굴레'에 구속되었다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유교 여성들의 실제 삶과 생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목차


제1부 | 다른 유교
1장 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
2장 한류와 유교 전통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살림영성
3장 21세기 여성 주체성과 유교 전통
4장 21세기 포스트모던 영성과 큰 배움(大學), 큰 공동체(大同社會)
5장 내가 믿는 이것, 한국 생물(生物) 여성정치와 교육의 근거


제2부 | 다른 기독교
1장 한국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
2장 인(仁)의 사도 함석헌의 삶과 사상
3장 왕양명의 양지(良知)와 함석헌의 씨알, 생물권 정치학 시대를 위한 존재 사건
4장 포스트휴먼 시대에서의 인간의 조건
5장 한국 교회와 여성, 그리고 인류 문명의 미래


책속에서


P. 51 유교 전통은 인간성(仁)이 가장 기초적으로 길러지는 곳을 가정이라고 보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형제자매 사이의 관계를 핵심으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유교의 가족 중시 사상은 현실 속에서 많이 타락하였고,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성품과 특징이 바로 이러한 친밀한 가족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시대의 변화와 함께 가족의 외적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기본 정신을 보유하는 일은 여전히 긴요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유교 전통의 입후제도를 가부장주의 전통의 나쁜 악습으로 규정한다. 사실 최근까지 남성 혈통 중심의 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남아 선호 사고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나 오늘날 호주제도도 폐지되고, 여아에 대한 차별이 거의 옛이야기가 된 상황에서 과거 입후제도의 시행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접기
P. 96 유교의 길은 일상의 삶에서 초월을 실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불교나 도교, 또는 서구의 기독교처럼 일상과 속(俗)의 세계와 급진적으로 구분되는 성직자 그룹을 따로 두지 않는다. 또한 삶의 모든 일 속에서 도를 실천하려는 구도였으므로 배움(學)이 곧 종교적 추구가 되고, 정치의 일이 곧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길이다. 나는 유교영성이 이처럼 ‘학(學, 공부 또는 교육)’이나 ‘정치(사회생활 또는 직업)’ 등의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common) 일을 초월의 일로 보면서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도 그 안에 풍성한 영적인 추구와 실천적 수행의 차원을 담고 있기 때문에(minimal religion) 그것이 오늘날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도 세속화와 다시 탈세속화 시대에 새로운 대안으로 찾고 있는 포스트모던적(postmodern) 영성, 세속주의적 종교(secular religion), 아니면 탈세속적 종교성(post-secular religiosity)과 크게 부합한다고 보았다. 접기
P. 144 나는 오늘날 인간에 대한 실천력 있는 신뢰(信)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긴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의 신뢰의 근거는 ‘탄생했다’는 참으로 보편적인 ‘존재의 사실(sui generis)’에 기초해 있으므로 모두를 포괄할 수 있고, 실천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그렇게 다시 그러한 존재의 원리에 근거해서 인간의 성성(聖性)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고 긴요하다. 만물을 싹틔우는 생명의 원리(仁)가 인간 자체이고(仁者人也, 仁也者人也),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측은지심과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과 인간성이 어떤 종교나 정치의 구호를 넘어서 마지막 보루이며, 그래서 그것은 인간 마음의 네 가지 덕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고 만물의 생명원리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접기
P. 201 한국인의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맹자는 고대 성인왕(聖人王) 순 임금의 인격을 한마디로 ‘사기종인(舍己從人, 나를 버리고 타자와 함께 한다)’의 인격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선을 남과 함께하여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취하여서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셨다(『맹자』 「공손추 上」, 8)”고 한다.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은 그의 『성학집요(聖學輯要)』 「위정편(爲政篇)」에서 이러한 맹자의 선여인동(善與人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람에게서 남이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없다고 한 것을 계속 언급하면서 인간 삶에서의 공적 영역과 공을 세우는 일의 중요성, 그 일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점과 그 버리는 일의 위대함을 밝혔다. 나는 이러한 유교 전통의 공적 자아의 일이 한국 여성들의 살림살이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들의 모성과 가족을 위한 희생과 염려가 결코 공적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근본적인 공적 안녕의 토대가 됨을 말하고자 한다. 접기
P. 304 일반적으로 유교 전통의 입후 제도는 유교 가부장주의의 가장 나쁜 악습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유교 여성들이 이렇게 비록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입양해서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극진하게 모자관계를 이루어 냈다는 것은 그녀들의 극기복례의 예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드러내주는 스토리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오늘 우리 시대에는 그것을 새롭게 의미화할 수 있다고 보는데, 즉 오늘의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이제 누가 낳았는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지속적으로 인간적인 돌봄과 배려의 관계가 이루어졌는가에 따라서 부모--자식과 가족관계가 이루어지는 상황이 되었다면(모성의 탈본질화), 유교 여성들에 의해서 행해졌던 이 실행을 새롭게 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해외 입양을 보내고 미혼모나 가정을 잃은 많은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은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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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통합학문(Korean Feminist Integral Studies for Faith) 연구가이다.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대화를 통해서 인류세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한국적 신학(信學)과 인학(仁學)의 구성을 위해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라는 모토와 함께 종교와 정치(性), 교육 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글쓰기를 한다. 한국여성신학회와 아렌트학회 회장을 엮임했고, 한국양명학회, 유교학회, 종교교육학회, 교육철학학회 등에서 활동했다. 현재 세종대 명예교수이고, 한국信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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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 총 28종 (모두보기)


알라딘: 한국사회 정의 바로 세우기 2015 김일수,문병호,양명수,이한구,홍승용,이은선

알라딘: 한국사회 정의 바로 세우기


한국사회 정의 바로 세우기 
김일수,문병호,양명수,이한구,홍승용,이은선,주형일,김형기,김종엽,홍찬숙,홍준기,김진수 (지은이)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201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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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2,500원 
책소개
각 분야의 석학 12명이 정의하는 한국사회의 정의. 정치적 편향성을 가급적 자제하면서 한국적 현실에 맞는 정의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한국형 정의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정의에 대한 진지한 담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법정의, 경제정의, 사회정의, 교육정의, 언론정의 등을 논하고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정의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면서 한국사회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논의해 나간다.


알라딘: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이은선2023

알라딘: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이은선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3-08-31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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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쪽

알라딘: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이은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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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이은선 (지은이)
모시는사람들
2022-08-20 




종이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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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전자책정가
8,4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216쪽

2023/10/01

알라딘: 종교 윤리와 정산 사상 김용환 2009 + 교보 ebook

알라딘: 종교 윤리와 정산 사상


종교 윤리와 정산 사상 
김용환 (지은이)개신2009-08-15





정가
26,000원
목차


제1장 종교윤리와 화현사상
제2장 성현현상과 애국사상
제3장 정서존중과 음양합덕사상
제4장 신인조화와 태극진리사상
제5장 보화성역과 해원상생사상
제6장 보화감천과 안심안신사상
제7장 조화정부와 경천수도사상
제8장 진법공부와 도통진경사상
제9장 화천과 삼세인과사상
제10장 상제상통과 횡단매개사상

간추린 정산연보



2023/09/12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에로 전환을 촉구한 세속인들의 사도 - 에큐메니안

종교에서 영성에로 전환을 촉구한 세속인들의 사도 - 에큐메니안


종교에서 영성에로 전환을 촉구한 세속인들의 사도가신이 길희성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 
승인 2023.09.11 



▲ 고 길희성 교수 ⓒ화면 갈무리


고(故) 길희성 교수는 길잃은 21세기 세속인들을 위한 구원의 사도

노학자 부부가 70대 이후 노년기에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를 팔아 
강화도에 심도학사(尋道學舍)라고 이름 붙인 ‘공부와 명상의 집’을 짓고, 
영성신학을 이끄시던 
종교신학계의 석학 길희성 교수가 9월 8일 새벽 80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필자는 그 분의 학자로서 일생과 종교인으로서의 헌신적인 실천적 삶을 우러러보면서 한국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는 깊은 관심과 조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가신이 길희성 교수는 철학, 종교학, 신학을 두루 통섭한 우리 시대에 드문 대학자이셨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길희성 교수는 일찍이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신 후,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서학문의 세계를 깊고 넓게 섭렵하셨다. 종교신학 전공학자로서 그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된 이유이다. 생애 대부분을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교수와 은퇴 후 명예교수로서 봉직하면서 22권의 역작들을 생산하여 한국 사회에 쏟아내셨다.

길희성 교수는 인도철학, 불교사상, 가톨릭의 영성신학,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현대 개신교 신학에 정통하신 제1급의 학자이셨다. 그의 학문적 넓이와 깊이가 크고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주체적이고 창조적이어서 역설 같지만 한국 개신교 신학계는 그분의 학문적 열정과 열매를 도외시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폴 틸리히를 20세기 ‘지성인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에 비유하여 필자는 길희성 교수를 삶의 의미를 잃고 헤매는 ‘21세기 세속인들의 사도’라고 말하고 싶다.

현대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전환 시대”: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신학》과 《영적 휴머니즘》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22권의 자작물 중에서 2권을 추천하라면 필자는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과 《영적 휴머니즘》을 주저 없이 들고 싶다. 길희성 교수가 후반기에 특히 강조하는 점은, 현대는 전통적 종교가 큰 위력을 발휘하던 시대가 지났고 이제 영성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 종교에서 영성에로!>가 그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종교학자가 종교시대의 종언을 말한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 자가당착 아닌가?

물론 당분간 전통 기독교를 포함하여 기존의 세계적 종교들은 존속할 것이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제도적 종교들은 마치 금은 보석상자를 창고에 넣고 보존·관리하면서 현대인들에게 기념품을 팔거나 나누어주는 ‘종교 진리 박물관’이나 극단적으로 말하면 ‘종교기업체’같이 굳어졌다고 본다. 거기엔 샘솟는 듯한 생기와 역동성이 없다. 거룩한 경전, 교리 신조, 성직 질서, 교권과 정통 신학 체계가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점차로 종교 인구는 감소하고 다시 복원을 꿈꾸는 대형 집회 호시절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이유가 코로나 팬데믹 같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겠지만,
길희성은 시대정신 자체가 종교를 넘어 영성에 관심이 있을 뿐이고 종교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대담한 시대감각을 갖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권의 대표적 책 중에서 앞의 책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사상》은 13세기 성 프란시스와 동시대 살았던 중세 후기 가톨릭 신학자요, 영성지도자요, 신비가이며 교회개혁자였던 엑카르트를 연구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중요시한 이유는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계는 물론이요, 현대사조 자체가 ‘신앙과 이성’의 분리 또는 갈등을 겪으며 각각 제 갈 길을 걷기 때문에, 세계관과 인간 이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특히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세계는 신을 잃었고 신은 세계를 잃었다. 새로운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 이성의 성숙함에 따라, 기존의 자연/초자연의 이중구조 세계관과 초월적 유신론 신관이 신뢰를 잃어간 것은 당연하지만, 무신론자가 되고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갖는 것이 무슨 큰 지식인들의 ‘전리품’이나 되는 양 착각하고 교만해진 결과는 오늘날 심각한 지구생명계의 종말 위협으로까지 곁길로 빠졌다고 길희성은 본다.

길희성 교수는 로마서 11장 31절 구절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1)는 성구를 기본 세계관 기초로 삼는다. 그것을 중세신비가 마이스터 엑하르는 “세계 만물이 신성(Gottheit)의 깊이로부터 출원(出願)하고 거기로 환원(還元)하며 창조주와 인간의 영성사이에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 일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 창조론을 13세기 중세기 때에 이미 주장했던 것이다.

엑카르트 영성신학이 ‘돈과 권력’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주는 치유 처방전은 철저한 초탈, 초연, 자기비움의 영성이다. 소유의 욕망, 지식의 욕망, 의지의 욕망, 그리고 마침내 자기자신이 자기의 존재론적 주체라고 착각하는 존재의 욕망마저도 초탈하여야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현대복음서 연구가들이 소위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고 강조하기 600년 전에, 이미 ‘역사적 예수’인 참사람 예수의 영성 알짬이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람-참 하나님이시다“는 양성교리의 근거라고 갈파했다.

말씀의 성육신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한번만 일어난 특별 계시사건이 아니라, 우리들 모든 인간 안에서 만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보편적 성육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어 일치를 이루시며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 같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자녀들이요 독생자들이라는 것이다.



▲ 김경재 명예교수는 22권에 이르는 길희성 교수의 책들 중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신학》과 《영적 휴머니즘》을 그의 역작으로 꼽았다.


《영적 휴머니즘》은 현대 세속적 문명비판서요 정통종교와 신학의 난재극복

위에서 필자가 추천한 길희성 교수 역작 중 둘째번 책은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마지막 저술작품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 책 안에서 우리는 길희성 교수의 모든 철학과 신학과 종교학의 결정체를 본다. 저자 길희성 교수는 이책을 저술하느라고 그야말로 온힘을 다해 집필하였기에 기력이 탈진되고 건강이 급속도로 약해져서 타계하신 것 아닐까라고 생각이 든다. 정신노동도 육체노동 만큼 인간의 기력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이 책 《영적 휴머니즘》은 21세기 이후 통과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새로운 인간과, 세계관, 신관을 제시하는 상당히 혁명적 저술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임마누엘 칸트가 계몽주의 시대 이성주의자들이 이성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것의 재판관인양 우쭐되던 것에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인식불가능하다고 제한했던 신에 관한 물음과 인간의 영혼과 영성에 관해서 다시 깊이 성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표현으로 하면 ‘형이상학적 진리’를 근대 이후 인간들은 포기하고, 인간의 수학적 이성에만 몰두하는 유물론적-생물학적 인간관에 갇혀버렸고, 자연은 ‘우연과 필연’으로 운동하는 기계같이 생각하였다. 보수신앙계 안에서는 이성, 진화론, 역사현실비판을 말하면 신앙의 탈선으로 간주하고, 과학과 종교 혹은 이성과 신앙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고 말았다. 맹목적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길희성 교수는 자신이 평생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과 종교적 영성가들을 연구한 결과,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표현이야 다양하지만, 
시림은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형이상학적 진리’ 곧 생명과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의 뿌리인 
‘신 혹은 궁극적 실재’는 
존재론의 핵심이라는 것을 재발견하고 그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참 사람다운 삶, 영성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 삶을 살고간 예수 그리스도, 임재선사, 마이스터 엑카르트, 해월 최시형등을 대표적 사례로 들면서 그들을 눈여겨 보라고 현대인을 독려한다.

길희성 교수는 말한다:
영적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참 나는 가혹할 만큼 자기완성을 요구한다. … 세속적 휴머니즘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하기 어려운 높은 성인(聖人)의 경지를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추모글을 쓰는 필자는 길희성 교수가 종교간 대화신학에 공헌한 학문적 공헌보다도 그 점이 더 중요한 주장이라고 느낀다. 이른바 라인홀드 니버 표현으로 말하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원죄론과 구원교리’에 안주하면서, 타락 할 때로 타락해 있는줄도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비본래적 존재의 평범성’에 경종을 울린다. 
길희성 교수가 주고가는 마지막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루가 11:35)는 말씀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이라고 본다.

 그가 평생 믿은 그대로 길희성 교수는
  •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다가, 
  •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으니

모든 근심걱정 내려놓으시고 ‘영원한 빛과 사랑의 세계’ 곧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시기를 빈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soombat1940@hanmail.net
===

이은선
4 h  · 
<한국信연구소 오늘, 23.09.12 화>
-길희성의 영적 휴매니즘과 한국 信學-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길희성 교수님이 추구하셨던 영적 휴매니즘의 의식에 
  • 현대 여성주의 의식이 포괄되고, 
  • 불교 신비주의보다 더욱 철저히 여기 지금의 일상과 살림의 영성을 추구하는 한국 신유교 전통의 개벽의식이 포괄되면 
어떤 모습의 새 인류세를 위한 믿음과 영성이 가능해질까요? 
'神學에서 信學으로'의 추구가 찾아나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