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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9

Namgok Lee -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는 방식으로는 퇴행을 막기 어렵다.

Namgok Lee - 극단(極端)을 다른 극단(極端)으로 두들기는 방식이 때로는 거칠지만 과오(過誤)를 바로잡고... | Facebook


Namgok Lee

극단(極端)을 다른 극단(極端)으로 두들기는 방식이 때로는 거칠지만  과오(過誤)를 바로잡고 역사를 전진시키는 경우가 있다.
긴 시간을 경과하고서 전체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역사의 퇴행(退行)으로 이어져 어떤 소(小) 단위의 주체 즉 특정 국가나 종족 집단이 공망(共亡)하는 경우 또한 많았다.
지금 내가 우려하는 현실적 위험이다.

그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는 방식으로는 퇴행을 막기 어렵다.

먼저 자신의 환부(患部)를 스스로 도려내는 노력이 퇴행을 막고 거친 부딪침 속에서도 역사를 한단계 도약시키는 동력으로 될 것이다.
이 자기 혁신의 주도성(主導性)을 놓고 서로 경쟁하게 될 때라야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다.
갈등과 싸움도 패망이 아니라 전진의 거름으로 될 수 있다.

기득권을 가진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세력들이 적대적 공생이라는 기이한 독점 속에서 ‘담론과 도덕이 함께 붕괴’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정치 세력과 정치 문화의 교체와 전환’에 대한 요구를 높이고 있다.
새로운 정당들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려면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창조적인 연합정치의 담론과 함께 명실상부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치문화(정치도덕)를 가져야 한다.

내년의 총선이 한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는 일대(一大) 회전(會戰)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중심적인 백가쟁명으로는 이런 시대적 욕구를 외면하고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면 서로 ‘양보’하고 싶어지는 경쟁이 대전환을 견인할 것이다.
‘내가 서고 싶은 곳에 동지(同志)를 먼저 세우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시대의 정치에 나타날 수 있을까?
그것이 새로운 정치의 성공을 담보하는 핵심인데. 
요즘 신당 논의가 활발한 것을 반기면서도 그냥 즐거워 할 수만 없는 심정이다.


5 comments
Lee Myeon Woo
진영과 이념을 벗어나야 한다면서 창당한 자들이 연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며 비난을 쏟아내는 것 자체가 벌써 그들만의 진영에 갇혀있는 듯 합니다.
진보와 보수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대안과 대책을 먼저 내놓고, 실천부터 하는것이 우선이 아닐까요?
새로 창당한 정당의 주류들이 고차원적인 철학과 과학을 운운하며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주장을 페이스북에 버젓이 올리는 작태가 가면을 쓴 또다른 친일 보수라는 생각도 듭니다. 선생님.
Reply1 h
Namgok Lee
이면우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긴박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토론과 합의문화가 새로운 정치나 정당의 정체성의 중요한 하나가 되어야 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로 마주 보고 '누가 옳은가?'를 다투고 힘(다수결)으로 결정하는 문화에서, 같은 방향에 서서 '이 싯점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토론하는 문화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정치를 지향한다면, 먼저 자기 당 안에서 이런 정치문화를 발전시키고, 그것이 전체 정치문화를 견인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저는 이런 토론과 합의 문화를 '연찬'이라 부르고 있고, 제가 인문운동으로 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입니다.
오랜 습관 때문에 참으로 어렵습니다만, 반드시 진전시켜야할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자에게서 배우는 것도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Sns공간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연찬'하기에는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지리산 정치학교는 바로 이런 '연찬'을 연습하는 것을 그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하고 있습니다.
Reply49 m
Lee Myeon Woo
이남곡 지리산정치학교에서ㅇ배움을 갖고 싶습니다 선생님.
Reply39 m
Namgok Lee
이면우 한시적으로 하고 있고, 지금은 주로 청년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미정이지만, 좋은 기회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2023/06/23

Namgok Lee - ’논어를 연찬하다‘라는 옛 글을 다시 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Namgok Lee - ’논어를 연찬하다‘라는 옛 글을 다시 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뒷편으로 갈수록 무게감(?)이... | Facebook

’논어를 연찬하다‘라는 옛 글을 다시 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뒷편으로 갈수록 무게감(?)이 떨어지는 면도 있습니다. 전(前)에 한 작업이 14편까지는 원문 전체를 옮겨 적었는데 15편부터는 몇 장(章)만 옮겨 적어놔서 다시 전체를 옮기는 작업부터 해봅니다. 그냥 읽는 것보다는 집중이 되어서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독수리 타법에다가 한자 바꾸기까지 하다 보니까, 어제는 계씨 편 1장을 옮기는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관심 있는 분들에게 나눌 겸 올려봅니다.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 공자의 제자 염유와 자로가 복무했는데, 그 염유와 공자의 대화입니다.
당시의 시대와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는 대화이어서 지금과는 많이 다른 면도 있지만, 큰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는 지금 공자의 정치나 경제나 문화주의를 잘 보여주는 ’오래된 대화‘가 새로운 정치나 경제 그리고 문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靈感)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글이지만 음미하면서 읽어보시면 그렇게 아까운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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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씨가 전유를 침략하려고 했다. 염유와 계로가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계씨가 장차 전유에서 일을 벌리려 합니다.”
“구야,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겠느냐? 전유는 지난날 선왕께서 동몽산의 제주(祭主)로 삼으시고, 노나라 역내에 있으므로 사직의 신하인데 어찌 침략할 수 있단 말이냐?”
“계씨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 우리 둘 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구야, 주임이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맡은바 직책을 다하다가 감당할 수 없거든 물러난다’고 하였다. 계씨가 위태로운데도 잡아주지 않고 넘어지려는데 붙들어주지 않는다면 장차 너희는 무엇을 도우려는거냐?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나와 도망가고 거북 껍질과 옥이 상자 속에서 부셔진다면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지금 전유는 견고한데다가 비 땅에 가까우니 지금 정벌하지 않으면 후세에 반드시 자손들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구야, 군자는 겉으로 탐내지 않는척 하고 말로 꾸미는 것을 미워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나라나 집을 가진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함을 걱정한다. 무릇 고르면 가난이 없고, 화목하면 부족하지 않고 편안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먼 데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 스스로 오게 하고, 오면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구와 유 너희 둘은 계씨를 돕는 자리에 있으면서 먼 데 사람이 심복하여 오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가 무너지고 인심이 이반하는데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 안에서 싸움을 일으키기를 꾀하고 있구나. 나는 계씨의 근심이 전유에 있지 아니하고 제 집 안에 있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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季氏 將伐顓臾 冉有季路 見於孔子曰 季氏 將有事於顓臾 孔子曰 求 無乃爾是過與 夫顓臾 昔者 先王以爲東蒙主 且在邦域之中矣 是社稷之臣也 何以伐爲 冉有曰 夫子欲之 吾二臣者皆不欲也 孔子曰 求 周任有言曰 陳力就列 不能者 止 危而不持 顚而不扶 則將焉用彼相矣 且爾言 過矣 虎兕出於柙 龜玉毁於櫝中 是誰之過與 冉有曰 今夫顓臾 固而近於費 今不取 後世 必爲子孫憂 孔子曰 求 君子 疾夫舍曰欲之而必爲之辭 丘也 聞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夫如是故 遠人不服則修文德以來之 旣來之則安之 今由與求也 相夫子 遠人不服而不能來也 邦分崩離析而不能守也 而謨動干戈於邦內 吾恐 季孫之憂 不在顓臾而蕭牆之內也>

2023/06/18

박정미 | Facebook 인생

박정미 | Facebook 인생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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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담론에 맞선 상식의 목소리, 조던 피터슨

얼마 전에 중3 딸아이와 대판 붙은 적이 있다.
오밤중에 거의 헐벗다시피 으슥한 골목길을 혼자 가던 여자애가 길거리 미친놈에게 강간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구제된 사례를 두고 일어난 말싸움이었다.

딸아이는 그 사건에 대한 어떤 정치인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분개했다. “세상에 그 아저씨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잖아. 밤길을 혼자 그런 옷차림으로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야. 진짜 웃기지 않아?”

웃기지 않았다. 나도 그 정치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걸 보면 그 양반도 참 정치적감각이 영 아니네. 하지만 그 말도 일리가 있지 않냐? 피해자도 한번 당할 뻔했으니 다음번에는 또 그렇게 차리고 다니진 않겠지.”
그러자 엄마를 닮은 딸아이는 부르르 급흥분하더니, “아니! 그럼 엄마는 피해자의 잘못으로 강간을 당할 뻔했다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여자가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자유야. 강간당할 수 있으니 꾸미지도 말란 말이야? 그렇게 하면 남자가 강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이에 부르르 급흥분의 원조인 엄마의 목소리도 함께 높아졌다.

“이게 그 강간범을 옹호하는 것으로 들리니? 강간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기여도, 죄책을 논하는게 아니잖아. 지금 내 딸이 밤중에 헐벗고 혼자 싸돌아다닌다고 해봐. 일단은 강간을 당하지 않아야 하는게 제일 중요한 거 아냐? 그럼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니? 정치적으로 뭐가 옳고 뭐가 용인되고 따지는 것은 안전한 데서 나중에 해도 돼. 하지만 엄마라면 그 잘난 담론에 앞서 내 딸을 지키는 게 가장 우선이지. “

딸아이와의 논쟁은 이 테두리 내에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며 격렬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딸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담론적 정합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딸과 나는 팽팽하게 맞서다 딸아이의 눈물을 끝으로 어색하게 마무리했다.

오늘 딸아이와의 설전이 떠오른 건 우연히 조던피터슨과 슬라보예지젝의 2019년 공개논쟁 기사를 읽어서이다.

한겨레신문은 “당신이 말하는 포스트모던 네오마르크시스트가 누구냐”는 지젝의 질문에 피터슨은 대답하지 못했다고 아주 고소해하며 소식을 전했다. 이를 근거로 한겨레는 조던을 깨죽으로 만든 지젝을 참지성인으로, 조던을 입만 산 셀럽으로 결론짓더라.

논쟁을 통해 참지성인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정말 한겨레스러웠다.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를 변증법으로 읽는 것을 근본기획으로 삼는 지젝(나무위키 표현)’과 맑시즘에 대해서 논쟁하면 세상 누구라도 깨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던피터슨은 임상심리학자이고 자신의 생활경험과 임상심리학적 경험을 통해 알아낸 세상과 인생의 진실을 글로 썼다. 맑시즘 대가의 스파링파트너로 뛸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논쟁에서는 지젝이 이겼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실전에서는 단연 조던피터슨이 우위에 있다.

피터슨의 글은 전세계에 범람하는 PC주의와 입진보들의 횡포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2030젊은이들, 특히 남성들에게 큰 힘을 주고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반면에 슬라보예지젝을 읽고 말빨과 지적자부심이 늘어났다는 사람은 있어도 그 책을 통해 인생에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는 것이 힘을 주지 못하는 지적체계라면 조금 미심쩍지 않은가.

Namgok Lee 지금은 난세(亂世)다.- 관념계의 ‘자유’가 이제 인류의 보편적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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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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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난세(亂世)다.

그러나 과거 난세(亂世)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 위험 수준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도 있지만, 그 주된 원인이 다르다.
과거의 난세(亂世)가 주로 물질적 결핍과 제도의 결함을 둘러싼 것이었다면, 
지금의 난세는 관념에 내재하는 탐진치(貪瞋癡)가 주된 원인이다.

물론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아직 물질과 제도가 주된 원인인 사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선이 긴 인류의 앞 선 부분들에서는 그 주된 원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축(軸)의 시대 인류의 선각자들이 깨달았던 관념계의 ‘자유’가 이제 인류의 보편적 테마가 되었다.
물질과 제도 면에서 이룬 피어린 성과들이 이제 이런 테마 앞에 인류를 보편적으로 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와 함께 진행되고 있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지 못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인류의 진화를 나타내고 있다.
물질과 제도를 바꾸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전망보다는 인간이 지닌 근본 테마를 보편화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문제를 풀어가는 중심고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관념을 정상화 (탐진치에서 벗어남)하는 것이 
물질과 제도의 모순을 풀어가는 고리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앞 선 사회, 앞 선 나라가 되었다.
그 압축적 변화와 문화지체 때문에 중층적이고 복잡한 갈등을 겪고 있지만, 
그 중심고리가 이행한 것은 나에게는 분명해 보인다.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정치의 혼돈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 없이는 나라를 퇴행으로부터 전진시킬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념을 정상화하는 주된 전장(戰場)이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이나 세력은 ‘연합정치’를 선명한 목표로 해야 한다.
‘연합’의 범위를 최대한 넓힐 수 있는 ‘관념의 정상화(정치문화)’가 그 실행을 담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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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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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와 우리 문명에는 깊은 쉼, 깊은 명상이 절실합니다.
특히 이 나라는 더 절실합니다.
⓵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②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③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쉼과 명상은 ②의 세계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모든 전선(戰線)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투쟁 동력이 바뀔 것입니다. 

이 나라의 그 많은 사찰(寺刹)과 교회(敎會)가 이런 쉼터와 명상의 집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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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6

Namgok Lee - 공자가 인(仁)의 실천으로 일이관지한 충서(忠恕)에 대해서

(2) Namgok Lee - 공자가 인(仁)의 실천으로 일이관지한 충서(忠恕)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 Facebook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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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인(仁)의 실천으로 일이관지한 충서(忠恕)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여기 세 사람이 동업을 하는 옛 날 식으로 운영하는 카페가 있습니다.
각각 바리스타, 홀서빙, 설거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서로 빤히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홀서빙하는 사람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화가 납니다. 설거지에 집중이 안됩니다. 화가 나니까 손이 거칠어집니다. 그릇이 제대로 닦이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릇에 이가 빠지기도 합니다. 바리스타가 이런 그릇을 받게 됩니다. 바리스타도 기분이 나빠집니다. 자연히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카페는 어떻게 될까요?
망(亡)합니다.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홀서빙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일어나는 악순환입니다. 동업은 망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 헤어집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설거지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홀서빙하는 사람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잘하고 하고 싶은 설거지에 기쁘게 전념합니다. 그릇들이 빛이 납니다. 이 그릇을 받아든 바리스타의 마음도 환해집니다.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평판이 좋아져 손님들이 많아집니다. 홀서빙하는 사람도 신이 나서 손님들의 요구에 더 친절하고 마음을 다해서 다가갑니다. 세 사람의 사이도 좋아집니다. 이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가 잘 들립니다. 
받아들임이 서(恕)이고, 기쁘게 전념하는 것이 충(忠)입니다.
이 서(恕)와 충(忠)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에 ‘자유로운 협동’이 비로소 빛나게 실현됩니다.
세 사람 모두의 생명력이 잘 살려집니다.
==
충서(忠恕)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6%A9%EC%84%9C(%E5%BF%A0%E6%81%95)
주요 정보
대표표제 충서
한글표제 충서
한자표제 忠恕
관련어 논어(論語), 증자(曾子), 중용(中庸)
분야 문화/인문학/유학
유형 개념용어
집필자 이형성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충서(忠恕)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성종실록』 13년 12월 15일, 『성종실록』 16년 3월 25일, 『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 『영조실록』 7년 7월 12일, 『정조실록』 4년 5월 16일, 『철종실록』 2년 9월 9일

충실한 마음과 배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아울러 일컫는 말.

목차
1 개설
2 내용 및 특징
3 변천
4 참고문헌
5 관계망
개설
공자는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고 하였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도를 실천하는데 그 원리를 충(忠)과 서(恕)로 개괄하였다. 증자의 충서(忠恕)는 공자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져, 동양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공자가 주장한 인(仁) 사상을 실천하려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공자는 증자를 불러 나의 도(道)는 하나로 관통하였다 하였다. 증자는 그것을 바로 수긍하고 충서(忠恕)로 이해하였다. 『중용』에서는 충서가 도로 나가는 것이 멀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몸에 베풀어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충과 서의 성리학적 의미는 자기의 순수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이고, 그 순수한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나가는 것이 ‘서’이다. 즉 ‘충’은 내적인 것이고 ‘서’는 외적인 것이므로, 충서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학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학자들은 충서를 통해 공자의 도와 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변천
조선 성종대에 손순효(孫舜孝)는 충서 두 글자에 유념하기를 바랐다. 성종이 충서의 도(道)를 논하라고 하자, 손순효는 "속마음[中心]이 충이 되고 마음과 같음[如心]이 서(恕)가 됩니다."라고 하면서, 왕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기를 책망하면 충서의 도가 극진할 것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13년 12월 15일). 손순효는 녹봉이 없는 양계 지역 만호의 어려움을 상소하면서, 편안한 사람은 위태한 사람의 걱정을 생각하고 배부른 사람은 굶주린 사람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충서의 도리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6년 3월 25일). 중종대 성균관 대사성유숭조(柳崇祖)가 『강목십잠(綱目十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를 바치면서 충서의 마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효유할 수 없다고 하여 왕이 충서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였다. ‘충’은 수기(修己)를 위한 것이고 ‘서’는 치인(治人)을 위한 큰 덕목이기 때문이다.

숙종대 헌납(獻納)이윤문(李允文)의 상소에 의하면, 말세의 인심은 사납고 악독하므로 아무리 관후(寬厚)하고 충서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그 행정(行政)을 위임하더라도 원망이 없도록 하는 것은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였다(『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 말세에는 충서한 사람도 인의 정치를 실현하기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영조대 김상익(金尙翼)은 영조의 능 거둥 정지를 요청하는 신하들을 왕이 엄책한 것과 관련해 상소를 올려, "왕이 거절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엄중하게 꾸짖기를 너무 심히 하시고 조금만 거스린 점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시니 ‘충서’ 두 글자가 어디서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여 신료(臣僚)들에 대한 능멸을 멈출 것을 권유하였다(『영조실록』 7년 7월 12일).

정조는 좌의정서명선에게 조정에 빨리 나올 것을 회유하며, "여러 관원을 감독하고 경계하여 모든 직무에 힘쓰게 하며 충서의 도리로 미루어 나가고 광필(匡弼)의 의리로 돕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것이 하나가 되어 법도에 들어맞으면 세상이 다스려지 않고 풍속이 바로잡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충서의 도리를 언급하였다(『정조실록』 4년 5월 16일).

철종대에 송능상(宋能相)과 권돈인(權敦仁)을 탄핵하는 충청도·전라도 유생 박춘흠(朴春欽) 등의 상소를 접한 철종은 두 현인의 부당한 단락을 모아 말을 만드니 이는 충서의 도가 아니라고 하면서 물러가도록 명하였다(『철종실록』 2년 9월 9일).

참고문헌
『논어(論語)』
『중용장구(中庸章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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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개념어
충서(忠恕)
프로필
채자왈
2009. 5. 11. 11:08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sylogos&logNo=60067354935


충서는 공자 사상의 중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그 제자 증자(曾子)가 스승 공자의 사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바 있다. 공자가 자신의 도(道)가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一以貫之)고 하자 증자는 그것을 바로 충서라고 해석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다. 충서란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仁)이라는 추상적 덕목을 실현하는 구체적 지침의 역할을 한다.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서(恕)란 용서를 뜻한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혹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을 때(忠)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진다. 진정한 용서는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서(恕)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다. 충서란 곧 ‘정성과 공감’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충을 서(恕)와 짝을 지어 말하지 않고 성(誠)과 짝을 지어 충성(忠誠, loyalty)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충성에서 성(誠)이란 본래 충(忠)의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충성이 곧 충이다. 충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충은 오히려 국가적 권위나 외부의 명령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확고한 믿음을 강조한다. 국가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때 과감히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충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충성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충이란 대상이 필요 없이 자기 홀로 실천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스스로 마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정성도 가능하다. 충의 결과를 충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고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을 의미했던 충서 개념은 이후 주희(朱熹)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강화된다. 주희에 의하면 충은 단순히 실천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까지 보장받는 인간의 본성(性)이 된다. 증자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고 윤리적 측면에서 충을 강조했다면 주희는 ‘모든 인간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하늘에 의해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충을 규정함으로써 존재론적 측면에서 강조했다.

 

충(忠)하지 못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지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희는 그런 사람을 존재론적 층위에서 우주의 법칙에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배척해 버린다. 윤리적 비난에는 인간적 끈끈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배척에는 그러한 여지가 원천 봉쇄된다. 단죄는 엄하되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힘은 미약하다.

 

주희는 충서를 형이상학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각박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충서(忠恕)스럽지 못한 결과를 빚는다. 주희의 문집과 어록에서는 실제로 충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논어(論語)󰡕에는 정연한 이론들이 많이 담겨 있지 않다. 대신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주희의 문집과 어록에는 치밀한 이론이 가득한 대신 충서를 실천하는 인간적 스승의 모습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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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 소통의 기본 윤리, 충서
https://draft.blogger.com/blog/post/edit/933322945938724907/1934083200815632555

서원 ·향교의 이해를 위한 유학 개괄 > 유학의 기본 사상
인간 사회 소통의 기본 윤리, 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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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제자 증자에게 "나의 도는 하나로 꿰었다"고 하자, 증자가 그 도가 바로 "충서"라고 해석했다. 충서란 글자의 모양 그대로 마음의 속(忠)과 같은 마음(恕)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마음 작용의 기본 원리이다. 대학에서는 충서를 혈구지도라고 했다. 즉, 내가 싫어하면 그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혈구지도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기본 윤리이다. 그러므로 충서는 유학에서 인간 상호관계의 핵심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공자(孔子)의 도(道)를 전했다고 하는 증자(曾子)에게 어느 날 공자가 말씀하였다.

“삼(參)아! 나의 도(道)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吾道一以貫之) 증자가 답한다. “예!” 

이렇게 이루어진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을 듣고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 중 하나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증자가 대답했다.  “충서忠恕이다.”

증자가 제시한 충(忠)은 단순히 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에서 보이듯이 마음(心)의 속(中)으로, 사람 마음의 깊숙한 뿌리다. 서(恕)는 같은(如) 마음(心)으로, 사람 간의 마음이 같아져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사람의 본심과 그 본심이 발현되는 마음작용의 원리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一)은 한자 자전의 맨 처음 글자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일이관지(一以貫之)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貫) 다르지 않은(一) 인간사회의 원리(道)이고 증자는 그것을 사람마음의 본체와 작용의 도리인 '충서'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상호소통은 ‘타인이 나에게 이렇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나도 타인에게 하지 말아야한다는 보편적 감정을 인정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대학』에서는 충서를 혈구지도로 표현하고 있다. “위에서 받은 싫은 방식으로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받은 싫은 방식으로 위를 섬기지 말며, 선배로부터 받은 싫은 방식으로 후배를 선도하지 말며, 후배로부터 받은 싫은 방식으로 선배를 추종하지 말며, 좌측의 사람한테 받은 싫은 방식으로 우측의 사람과 교제하지 말며, 우측의 사람에게 받은 싫은 방식으로 좌측의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혈구지도(絜矩之道)이다.” 『대학』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혈구지도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기본 윤리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라고 새길 수도 있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혈구지도’와 같은 도덕률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중대해진다. 그러므로 유학에서 충서는 인간 상호관계의 핵심적 윤리이다.

부가정보
혈구지도(絜矩之道)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적인 길  

참고자료단행본유교대사전편찬위원회. 儒敎大事典. 서울: 성균관, 2007.단행본임종욱. 중국역대 인명사전. 서울: 이회문화사, 2010.단행본오석원. 유교와 한국유학.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4.웹페이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수정, 2018년 8월 1일 접속웹페이지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n.d. 수정, 2018년 8월 1일 접속 집필자최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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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충서(忠恕)는 진정한 일관지도(一貫之道)가 될 수 있는가?- 서양의 황금률 논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Can Zhong-Shu in the Analects Be the “One Thread” That Really Penetrates All Things? In Comparison with the Golden Rule Debates in the West
유교사상문화연구

2020, vol., no.82, 통권 82호 pp. 325-356 (32 pages)

DOI : 10.23012/tsctc..82.202012.325

발행기관 : 한국유교학회

연구분야 : 인문학 > 유교학
김명석 /Myeong-seok Kim 1
1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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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도(道)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는 공자의 말을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라고 해석하였고, 공자는 자공에게 자신은 많이 배워 기억하는 자가 아니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자라고 말했으며, 또 일생동안 실천할 만한 한 가지 원칙으로 서(恕)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공자의 ‘하나’가 서인지 충서인지, 또 충과 서는 무엇이며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에 대해 예부터 수많은 해석이 있어 왔다. 이 글에서는 『논어』의 충 개념에 대한 동서양의 주요 해석들을 황금률 개념과 연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논어』의 충 개념은 ‘남들과의 관계에 있어 그들의 행복이나 성공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행위나 마음의 태도’를 뜻하며, 서 개념은 황금률의 긍정적 형식뿐만 아니라 부정적 형식까지도 아우른다는 점을 밝힌다. 나아가 서양에서의 황금률 논쟁을 참고하여, 황금률로서의 서가 어떻게 다른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황금률에 대해 제기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임으로써, 서가 일정 정도의 자족성을 지닌 도덕원리라는 점을 주장한다. 본론의 종결부에서는 서의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공자 도덕철학의 주요 요소들을 모두 서 또는 충서의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 또는 충서는 ‘공자의 일관지도’일 수는 있어도 모든 덕목과 원리들을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일관지도가 되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 후, 끝으로 이 주장의 철학적 함축을 논의한다.


Zengzi (曾子) interpreted Confucius’ saying that his Way is penetrated by one thread to mean that his teacher’s Way consists in nothing but zhong (忠) and shu (恕). To Zigong (子貢), another of his advanced disciples, Confucius said that he was not a person who learns a lot and memorizes them all, but one who runs a thread through them all, and also recommended shu as the single principle worth practicing for one’s whole life. Regarding these remarks, there have been numerous interpretations from the antiquity about what Confucius meant by the “one thread,” whether it referred to shu or zhong-shu, what zhong and shu respectively mean, and how they are related theoretically. In this article, I critically review important interpretations by previous scholars of the concept of zhong in the Analects in terms of the Western scholarship on the Golden Rule, and argue that zhong in the Analects refers to one’s sincere attitude or efforts to bring about success or happiness of other people, and that shu encompasses both positive and negative forms of the Golden Rule. Next, I briefly discuss the problems raised by Western scholars against the Golden Rule and argue that shu, as a Confucian version of the Golden Rule, has theoretical resources to solve those problems without relying on other principles, thereby showing that shu possesses a certain degree of self-sufficiency. Nevertheless, in the last part of the main body of the text I argue that all the important elements of Confucian moral philosophy cannot be reduced to the one principle of shu or zhong-shu, and therefore shu or zhong-shu, pace Confucius, seems to fall short of being the “one thread” that really penetrates al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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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忠), 서(恕), 황금률, 공자, 일이관지(一以貫之)
Zhong (忠), shu (恕), golden rule, Confucius, “the one thread” that penetrates al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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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충서(忠恕), 내 마음을 조율하는 공부-
백민정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2022년 01월 04일(화) 광주일보
http://m.kwangju.co.kr/article.php?aid=1641236400731624067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이 같은 발언은 유교적 황금률로 잘 알려져 있다. 공자는 ‘타인이 자신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나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않아야 한다’(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고 말했다. 공자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로 제시한 행위 준칙은 그의 제자들에게 ‘충서’(忠恕)의 가르침으로 전해졌다.


충서란 무엇인가? 동아시아 사유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주희(朱熹,1130∼1200)의 해석 탓에 ‘충’(忠)은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盡己)으로, ‘서’(恕)는 자신을 타인에게 미루어 적용하는 것(推己及人)으로 이해되었다. 주희가 생각한 충서란 내 마음의 진실성에 근거해서 타인을 대우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서’는 내가 아니라 타인을 다루는 방법을 의미했다. 이것은 나에게 선함이 있으면 타인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나에게 악함이 없으면 타인에게 그 악함을 없애도록 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주희는 ‘서’의 방법이 상대에게 선할 것을 요구하고 상대에게 불선을 책망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진실한 마음(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그가 ‘서’를 타인을 교정하고 훈육하는 행위로 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충서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말한 충서란 ‘진실한 서’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때 ‘서’는 남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훈련하고 닦는 공부를 뜻한다. 말하자면 다산은 타인에게 미루어 적용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조율하는 공부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서(恕)라는 것이 본래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自治)인데 이것을 거꾸로 잘못 말하면 간혹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治人)에 가깝게 된다”고 우려한다. 다산은 옛 성현이 말하는 ‘서’는 우리가 남에게 선함을 요구할 때 자신에게 먼저 그것이 있도록 노력하고, 남의 잘못을 비판할 때 자신에게서 먼저 그것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태도라고 이해했다.


이 점에서 다산은 주희가 제시한 충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충서란 순수하게 자신을 닦는 내 마음의 공부인데 주희가 이것으로 남을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더구나 다산은 남을 교정하고 가르친다는 의미의 치인(治人)도,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것으로 내가 그 사람을 섬기는 행위(事人)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남을 섬기려고 할 때 내가 남에게서 바라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지 못하면, 오히려 나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요컨대 핵심은 ‘서’의 의미가 나 자신을 수련하고 조율하는 데 있지, 내가 타인에게 선을 요구하고 불선을 책망하도록 강제하는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서(恕)의 행위 준칙은 유교의 윤리학과 도덕철학의 핵심을 밝히는 매력적인 주제로 부각되었다. 충서의 논리는 특수한 도덕률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관계에서 보편적인 행동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간 유교의 충서론은 동서양의 보편적 황금률로 해석되거나 혹은 칸트(Kant, Immanuel,1724∼1804) 도덕철학의 정언명법과 함께 평가되었고,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정치철학과 비교되기도 했다. 충서를 타자에 대한 상호 존중과 배려, 공감과 관용으로 풀이하는 현대적 해석들도 등장했다. 물론 유교적 문맥에서 ‘서’는 차이나 다름에 대한 용인과는 구별된다.

유학자 다산은 왜 ‘충서’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이라고 보았을까? 그는 타인에 대한 대처나 인간관계의 기본은 우선 자신에게 열쇠가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타인 관계는 내 자신을 돌보고 나를 수련하고 변화시키는 중요한 디딤돌이 된다. 다산은 인륜 관계에서 상대에게 ‘서’를 실천하는 것이 자수(自修), 즉 자기 연마와 수양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타인 관계가 내 자신과의 관계, 즉 내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비추는 거울임을 의미한다.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나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바라고 희구하는가? 나는 자신과 어떻게 화해하기를 원하는가? 타인 관계란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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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충서(忠恕)
https://contents.premium.naver.com/kimyoungk/knowledge/contents/211116132836508Ew
철학적 사유는 논증적 사유이다. 즉 철학은 어떤 문제나 주제에 대해서 논증을 제시하고, 그 논증이 정당한지에 대해
서 따져보는 지적 활동이다. 가령 신의 문제에서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신의 존재를 우리는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시된 논증이 정당한지, 혹은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 바로 철학적 활동이다.
논증적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자의 [논어]는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논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
작되고 있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벗이 멀리서 찾아주면 그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의 이런 말씀이 모두 소중하고 맞는 이야기처럼 보
인다. 배우고 때맞추어 익혀라. 멀리 있는 벗을 찾아가라.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말라. 이런 공자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우리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공자의 말씀이 참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무슨 이유 때문에 공자의 이런 말씀에 감명을
받는 것인가? 공자의 [논어]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하기를 제안하고 권유한다.
공자의 [논어]는 논증적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논증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미흡하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논어]를 읽다가 그냥 뻔한 이야기만 반복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논어] 읽기를 포기해 버
리곤 했다. 그렇지만 [논어]의 어떤 주장에 대해서 내가 공감하고 감동한다면, 그 공감과 감동의 이유를 성찰해 보아
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논어]를 읽으면서 하나의 논증을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가령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즐거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적어도 내 발전이나 성숙함을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논증을 구성할 수
있다.
철학은 우리가 공감하는 주장에 스스로 그 논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점 때문에 철학은 가만히 수동적으로 경
청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이 아니다. 다양한 일상적 일들에도 골치가 아픈데, 철학은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
로 생각하면서 논증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나아가 그것이 설득력이 있고 정당한지 스스로 따져 보는 골치 아픈 일
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공자가 말하는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21.11.16. 오후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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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풍경 로그인
나는 [논어]에서 가장 핵심 개념의 하나가 충서(忠恕)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말한다. “내 도(道)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그러자 공자의 제자들이 증자에게 묻는다. 하나로 관통되어 있는 그 도가 무엇인가? 증자는
그것이 충서(忠恕)라고 말한다. 그런데 글자적 의미에서 “충성”과 “용서”를 의미하는 충서(忠恕)라는 것이 무엇인
가?
“평생토록 실행할 만한 것이 있느냐”는 자공(子貢)의 물음에 공자는 서(恕)라고 답변한다. 그런데 그 서(恕)가 무엇
인가? 공자는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 베
풀지 마라”, 혹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것,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닌
것, 혹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마땅히 남에게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공자가 서(恕)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만, 충서(忠恕)의 개념은 증자를 통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전문
학자들 사이에 충서와 서가 과연 같은 것인지, 충서 개념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충(忠)의 개념이 무엇인지 논의
가 된다.
풍우란은 그의 [중국철학사]에서 “자기 욕망을 확인하고 이윽고 타인의 욕망을 인정함”은 곧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 주는 것”이 충(忠)이라고 주장한다. 풍우란이 지적하는 충서(忠恕)
는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을 두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충(忠)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
하는 적극적 방식을 지적하고 있으며, 서(恕)는 그 소극적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은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기 좋은 것이라는 주장
과 논리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반면에 풍우란은 충(忠)을 “남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기독
교의 황금률과 동일한 형식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황금률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충서가 주장하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이 도덕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
서 공자의 충서(忠恕)는 하나로 관통하는 도덕적 원리로서 미흡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렇지만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명령을 “인간적,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仁), 즉 ‘진정한 인간다움’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논
어]의 맥락에서 내가 하기 싫은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이 사소한 개인적 취향에 해당되는 것
이거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충서(忠恕)를 수정하여 이해하면, 충서(忠恕)는 칸트가 도덕의 원리로 주장하는 “모든 인간을 단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정언 명령과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공자나 칸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우리 인간
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면서 인격체로 대우하는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다. 인간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 예수가 말한다. 모든 인간을 형제로 대우하라. 이웃 사
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마르크스가 말한다. 많이 소유하는 대신에 존재하라.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인간으로 대
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맥락에서 공자가 말한다. 네가 하기 원하지 않는 것을 타
인에게 하지 말라. 네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라.
그런데 왜 내가 하기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하면 안 되는가? 내가 하기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해야 하지 않
아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는가? 즉 평생 동안 실행해야 할 서(恕)의 원리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음 시간
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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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Namgok Lee - ‘성인(聖人)의 길을 막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3) Namgok Lee - 논어 14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어찌... | Facebook

Namgok Lee
38 m  · 
논어 14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어찌 선생님을 알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저 하늘일 것이다.”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 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논어 첫 장의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를 이야기한 공자를 생각하면 좀 의외의 대화다.
만일 이 대화가 실제로 있었다면, 공자의 심경이 짐작이 간다.
숱한 비아냥과 왜곡 그리고 몰이해 속에서도  그가 일이관지하려한 ‘인간의 길’에 대한 긍지와 한 편의 ‘외로움’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를 가슴에 품는가에 따라 그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나는 젊은 시절 잘 알려진 ‘혁명가’들을 가슴에 품었다.
 나이들어 ‘성인(聖人)’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석가 예수 공자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인생의 모델이다.
자기의 성향에 맞는 분을 모델로 삼으면 된다.
우리나라는 그래서 좋다.
나에게 60이 넘어 만난 공자는 내 여생(餘生)의 모델이다.
자신의 근기와 능력이 태부족임을 느끼는 하루 하루지만, 마음 속에 뭔가 장애나 부자유나 스트레스가 있을 때 ‘공자라면’ 하는 생각으로 논어를 읽는다.
그것이 나의 명상이다.
‘성인(聖人)의 길을 막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2023/05/24

Namgok Lee | ‘협동 사회운동이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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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2 h  · 

오후에는 ‘익산 시민으로서 나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시민들과 강의 형식으로 대화를 했다.
익산이 ‘도농복합의 행복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고 있다. ‘개인의 해방’과 ‘경쟁 사회’는 서로 맞물려 있다.
‘경쟁 사회’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권리 신장에 기여했고, 지금도 여전히 또 상당 기간 지배적 형태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만족을 모르는 극심한 소비주의와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기주의 문화  때문에 행복도(幸福度)가 오히려 낮아지고, 양극화가 심해져 합법적 불공정이 커지면(흙수저 금수저 등)  ‘갈등 사회’로 되고, 성장과 소비 위주의 문명이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는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쟁 사회’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협동 사회’를 키우고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를 위한 시민운동, 정치운동, 교육 운동 등이 ‘행복 도시’를 위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런데 참가한 한 청년이 ‘협동 사회운동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아마도 ‘협동’이라는 말 속에서 어떤 ‘부자유’ 즉 집단이나 전체 또는 도덕이나 윤리 등에 의한 ‘개인의 억압’을 느끼는 듯 했다.
짧은 시간이라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나는 우리의 청년 세대가 ‘경쟁 사회’ 이외의 다른 사회 특히 ‘자유로운 협동 사회’에  대한 상상 자체가 어렵지 않나 하는, 뭔가  벽을 만나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의 해방, 프라이버시의 존중, 자유로운 경쟁을 통과하여 그것을 포월하는 협동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경쟁’과 ‘협동’은 좋고 나쁨의 선택이 아니다. 어차피 공존하면서 사회의 건강과 행복을 높여가야하는 쌍두(雙頭)마차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협동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다.
어제 좀 착잡했지만, 협동 운동을 비롯한 문명 전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청년들과의 대화나 교육환경의 개선에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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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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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서 썼던 글인데, 요즘 이수태의 공자의 발견을 읽고 그 내용을 덧붙힌다.
 “군자는 화(和)하되 동(同)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동(同)하되 화(和)하지 아니한다.” 
子曰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13/23)
 “군자는 섬기기는 쉬어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도로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자는 사람을 부릴 때 그릇에 맞게 쓴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우나 기쁘게 하기는 쉽다. 이를 기쁘게 하는 데는 비록 도로써 하지 않아도 된다. 소인은 사람을 부리는데 모든 것을 다 갖추기를 바란다.” 

子曰 君子 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 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13/25)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말 중에 대표적인 말이라고 생각된다. 군자는 사람의 본성에 조응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아집에 바탕을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지능 , 취향, 환경 등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기중심적으로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실상에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에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이다. 
이런 소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취향에 맞추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에 부자유나 허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소인은 섬기기가 어렵다고 한 것 같다. 항상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관계는 얼마나 힘든 것인가? 
군자는 사람의 다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입장이나 적성, 기량에서 대한다. 그래서 섬기기가 쉽다. 그러나 군자를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군자의 기쁨은 그 행위가 진리에 부합할 때이기 때문이다. 소인이 군자를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부동(不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막상 그런 경우를 당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머리로라도 이해하는 것은 좀 나은 편이다. 머리로라도 이해하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소인으로부터 군자로의 이행이 조금씩이라도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아 생각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소인으로부터 군자로 이행하게 하는 나침반인 것이다. 
이 부동(不同)을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화(和)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사이좋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和)와 부동(不同)은 동전의 안팎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脫朱子 論語學으로 스스로를 밝힌 이수태의 ‘공자의 발견’에서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지지 받고 있는 해석은 “군자는 융화하되 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뇌동할 뿐 융화하지 못한다.”이다.
 주자는 동(同)을 아비(阿比;아첨하고 빌붙는다)는 뜻으로 보았고, 정약용은 ‘춘추좌씨전’의 화동(和同)의 논리를 극찬하였다.
이 문장을 신영복은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배하려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자본주의를 들고 극좌와 극우도 모두 그런 논리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문제는 공자의 진의眞意인데, 나는 “군자는 서로 융화하나 같지는 않고, 소인은 같으면서도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가 맞다고 본다.
이 해석은 주자의 論語集註보다 1000년전에 나온 정현 마융 등 한 대와 삼국 시대 학자들의 해석을 모아 놓은  <논어 집해集解>의 주석과 같다.
‘군자는 마음이 화목하나 그들이 보는 견해는 각각 다른 고로 같지 않다고 하였다. 소인은 즐기고 좋아하는 바가 같으나 제가끔의 이익을 다투는 고로 화목하지 못하다.’
주자朱子는 좌전의 특수성에 근거하여 공자의 보편성 있는 발언을 해석한 것이 무리이고(동을 뇌동으로),
신영복은 동同의 의미를 관념적으로 확장(同을 획일화로)한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후반이 다양성과 획일성이 문제가 되는 시대였겠는가?
다양성과 획일성, 공존과 지배는 춘추후반의 문제를 인식하는 프레임으로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신 영복의 해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고 음미할만한 주제지만, 그것이 공자의 발언 의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공자는 단지 세속적 가치에 얽매인 ‘한 통속’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소인들의 모습과 그런 잇속을 떠나 생각은 다르지만 예를 잃지 않고 화목하는 군자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언급했을 뿐이 아닐까.>
참고로 말하면 나는 신영복 선생을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만나 ‘감옥에서의 교류’를 했던 인연으로 출옥 후에 일정한 교류가 있었다. 탁월한 사상적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내가 가졌던 선생에 대한 기억은 졸저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극좌나 극우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마르크스의 잔영殘影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의 사상적 천재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로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2023/05/19

Namgok Lee -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Namgok Lee - 바우만의 책 제목으로 하고 있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바우만이 두 번째 쓴 편지의... | Facebook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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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의 책 제목으로 하고 있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바우만이 두 번째 쓴 편지의 제목이다.
그 내용 가운데 일부다.

“미국 <<고등교육 신문>>의 웹사이트에 한 10대에 관한 글이 올라왔다.  그는 문자 메시지를 한 달에 3000건 씩 쓴다는 데, 하루 평균 100건의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다. 
미국 10대 청소년의 최대 75%는 시간이 날 때마다 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 같은 웹사이트에 접속하는데, 뭘 그렇게들 하는지 보면... 수다를 떤다. 지금의 10대는 온라인 채팅이라는 강력한 새 약물에 빠져 있다는 게 치머만 교수의 이야기다.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모든 약물 중독자는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을 겪는다. 혹시 어떤 바이러스(또는 부모나 교사)로 인해 인터넷이 끊기거나 휴대전화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거기에 중독된 청소년이 어떤 고통을 겪을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워크맨의 밀봉된 소음에 의존할수록, 점점 비어가는 곁자리의 공허는 더 깊어지기만 했다. 게다가 공허에 잠겨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기 자신의 근육이나 상상력 등 첨단 기술이 도래하기 전의 수단을 동원하여 공허에서 빠져 나오는 능력은 점점 쇠했다. 그러다 마침내 도래한 인터넷은 공허를 잊거나 덮게 해주었고, 그로써 공허의 독성을 해독했다.  외로움의 고문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던 이들은 이 새로운 공존 형식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손에 손을 맞잡던 옛날 방식보다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제 더는 두 번 다시 혼자일 필요가 없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멀리 있지 않고 그 누구든 언제든 재까닥 불러낼 수 있다. 대화가 탐탁치 않은 방향으로 틀어질 징후가 하나라도 보이면 그대로 ‘접촉’을 끊으면 된다. 그러니 위험할 것도 변명하거나 사과하거나 거짓말할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것에는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선뜻 지불할 수 없을만큼 비싼 대가일지 모른다.  ‘상시 접속’ 중인 사람은 결코 온전하게 충분히 혼자일 수 없기에 그렇다. 또한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세계를 상상하기가 어렵’기에 그렇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사람이 생각을 ‘그러모아’ 숙고하고 반성하고 창조하는 능력, 그 마지막 단계에서 타인과의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한번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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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나 인터넷이 끊기는 상태, 카카오톡이 불통이 될 때를 생각해 보면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들도 상당히 깊숙이 ‘중독’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하철의 풍경도 떠오른다. 누구도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낄 틈이 없다. 휴대폰 화면을 통해 ‘접속 중’이다.
고독을 피하려고 끼리끼리 만난다. 특히 퇴행적인 편가름과 팬덤 현상을 일으키는 집단적 확증편향을  인터넷의 알고리즘이 촉진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온갖 사이비 종교나 저급한 정치 선동들이 이 공간을 잠식한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온라인 상에서도 넓혀갈 수 있다.
면 대 면의 만남과 적절히 조화한다면 이런 기술의 발달은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숭고성’을 확대하고 보편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아마 코로나로 인한 단절의 시대에 이런 노력들이 충분히 실험되고 진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인터넷을 비롯한 인공지능 등을 어떤 방향으로 이용할 것인가 하는 ‘인류의 지혜’가 시대의 과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장태원 선생님의 ‘노자 강의’를 매일 페북에 올려서 자연스럽게 온라인 공간에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중에 직접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떠오른다.

고독으로부터 ‘상시 접속’으로 도망쳐서 생각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잃어갈 것인가? 
인간의 ‘숭고지향성’을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넓히고 깊게 하는 도구로  활용할 것인가?


*번역이 좀 읽기에 편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번역도 창조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든다.

2023/05/10

Namgok Lee -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 되는 것

Namgok Lee - 인(仁)에 대한 대표적인 문답이다.

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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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에 대한 대표적인 문답이다.

장수에서 처음으로 논어 함께 읽기를 할 때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눈 대화를 소개해 본다.

2023/05/04

Namgok Lee -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Namgok Lee - 장수에서 처음으로 논어 읽기를 하면서 나누었던 대화들이군요.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 Facebook

장수에서 처음으로 논어 읽기를 하면서 나누었던 대화들이군요.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季路 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논어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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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神)을 섬기는 일에 앞서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다가오네요.
- 신(神)은 미지의 영역이지만 사람은 바로 같이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미지의 신에 대해서는 지극정성으로 섬기면서 바로 이웃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냉담하다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지요.
-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신을 섬기는 바탕을 보면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 같아요. 보통 신앙이 이기적 기복(祈福)으로 흐르는 경향이 많잖아요.
-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지요.

- 신이 영감의 원천으로 되는 것도 큰 것 같아요. 신을 섬기는 것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자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 참된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네요.
- 신에게 맡기면 편해지잖아요. 아집이 많은 우리들이 신에게 의탁(依託)함으로서 그 아집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요.

- 편리할 때만 신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온전하게 다 맡기지 못하는 거죠.
- 신을 섬기는 것과 인간을 , 그것도 추상적인 인류라던가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자각이 종교인들에게는 절실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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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두려움은 죽음 아닐까요.
- 그렇지요. 그런데 무엇이 그 두려움의 원인일까요.
-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요.
- 생명 일반이 가지는 속성 아닐까요.
- 살려고 하는 것은 생명체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살고 있으면서 죽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닐까요.

- 인간의 관념이 갖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삶이 두려운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 삶이 주는 고통으로부터의 단절이 더 절박한 것이지요.
- 그러나 보통의 경우는 죽음의 두려움이 더 크지요. 저는 그것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천으로 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요. 조금만 힘들어도 편한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 죽음은 생명 일반의 자연인데, 이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는 관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결국 자연(自然)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관념 아닐까요.
- ‘결국 죽지 않는다’가 목표가 될 수 없고, ‘잘 죽는다’가 목표가 되어야겠네요.
- 그렇지요. 그것이 정상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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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의 결과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지요. 결국 자신의 아집은 임종의 순간에 고통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되고 말지요.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해요. 가까운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게 되요.
- 결국 아집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 알기는 알겠는데, 마음속의 두려움은 잘 없어지지 않네요.
- 그것이 우리들의 실태가 아닐까요.
- 소극적으로 말하면 아집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삶이지만, 그 말 자체가 자기중심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것 같아요.
-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아(無我)를 이야기하는 바탕도 자기중심적이 되기 쉬운 경향이 있어요.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는 결코 진정한 자유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 자비의 실천 같은 것이 훨씬 중요하게 생각되네요.
- 공자님의 인의 실천도 같은 뜻이 아니겠어요.
- 그런 의미에서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다가오네요.

- 개인적인 깨달음이나 삶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한 사회나 문화로 넓혀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런 점에서 보면 ‘나’ 중심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는 사회는 ‘삶과 죽음’을 옳게 바라보는 문화를 만들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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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사람들의 욕망 수준에는 자본주의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의 궁극적 자유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언젠가는 보다 자유로운 사회로 넘어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아니지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사회 구성과 운영의 바탕으로 되는 사회라고 생각되는데요. 뭐라 이름붙여질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애주의(社會愛主義) 같은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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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Namgok Lee | 크릴의 공자 마지막 장 ‘공자와 中華民國’

(4) Namgok Lee | Facebook

Namgok Lee
19 April at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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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릴의 공자 마지막 장 ‘공자와 中華民國’을 읽었다.

쑨원孫文의 제5權(西歐의 삼권분립 이외에 감찰원과 고시원을 두어 5권분립을 주장)의 기초가 되는 고시제도는 공자가 제안한 것이 아니지만, 공자가 그 기초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공자는 ‘올바른 사람을 승진시키고 덕망있고 유능한 사람의 손에 정치를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또 적절한 교육을 통하여 행정책임을 맡을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을 관료로 선발하는데 있어서는 인격과 능력 이외의 어떤 요건도 고려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는데 고시제도는 이 원칙을 실천에 옮기려는 시도였다.
쑨원은 유럽과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민주주의 성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하다고 확신하였으며 그것은 주로 잘못된 인간평등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공자나 제퍼슨(미국 독립선언 기안자, 대통령 역임)과 마찬가지로 세습적인 귀족정치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공자나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인간은 본래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실현될 수 있는 평등이란 기회균등 뿐이다. 
“개인 간의 지능과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절대평등을 고집하기 위하여 뛰어난 사람을 억눌러 버린다면 인류는 진보는커녕 퇴보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평등을 논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진보를 원할 때는 그 평등이란 자연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것이지만,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평등이란 정치적 지위의 평등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쑨원은 모든 사람이 보통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동등한 힘을 가져야 하지만, 반면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공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자격을 갖출 수 있는 동등한 기회는 부여되어야 하지만, 그 자격은 고시제도를 통하여 시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쑨원은 “모든 관리 지망생은 –그 관직이 선거에 의한 것이건 임명에 의한 것이건 간에, 또 지방관이건 중앙관이건 간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확인받기 위하여 먼저 중앙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그런 제도에는 정치적 조작이 개재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쑨원은 시험의 관장권을 독립된 정부 기관 즉 고시원에 부여함으로써 이 위험성을 극소화하려고 생각하였다.
이런  쑨원의 구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정치나 행정이 구체적인 사람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하나의 항상(恒常)적 테마임에는 분명하다.

여러 테마들이 있다.

지금의 우리를 생각하게 된다.
1. 교육을 통한 자질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균등이 지금의 체제 안에서 가능한가? 신분세습제도는 사라졌다지만, ’합법적 불공정‘이 지배하는 현상을 어찌할 것인가?  
2. 지적 능력은 공정한 고시제도로 시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덕성은 어떻게 시험할 수 있는가?
3. 고시원 같은 독립된 기관이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나 문화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선거로 뽑는 경우 주권자인 선거인단의 높은 선별력이 전제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2023/04/24

Namgok Lee - 사회적 대합의를 이루고 연합정치를

 
어제 신뢰하는 후배가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다.
통화하는 중에 ‘패배(敗北)주의가 심하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낡은 것들의 상쇄(相殺)과정이 새로운 것들의 발흥(發興)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감들을 표현하는 말로 알아들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정치,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나 세력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하며 새로운 구심을 형성하지 못한채 의미 있는 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하는데서,
낡은 것들의 상쇄 과정이 그대로 사회나 국가의 쇠퇴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패배(敗北)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떤 역사에서도 낡은 것에서 새 것으로 그렇게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패배주의 대신에 실사구시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백가쟁명은 좋은 것이다. 다만 그 깊이가 있기를 바란다.
그 깊이는 실사구시하는 과학과 철학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려는 도덕적 성찰이다.

‘소아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사회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것이다.
지금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시대다. 아직 공(公)이 제대로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선구적 입장이라면 스스로 먼저 공(公)을 열어가야 한다.
이 공(公)을 열어가는 사람이라면 패배주의와는 인연이 없다.
소아를 넘어선 곳에 새로운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3) Namgok Lee - ‘우리는 거칠게나마 앞으로 항진(航進) 중입니다.’ 패배의식이나 절망감을 호소하는 분들에게... | Facebook

Namgok Lee
  · 
‘우리는 거칠게나마 앞으로 항진(航進) 중입니다.’
패배의식이나 절망감을 호소하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양(兩) 극단(極端)을 거칠게 두들겨가며 
시대(時代)의 중(中)을 찾아 국내외의 험한 파도를 헤쳐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운명의 짐을 지고 이만큼 건너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좀 더 나아가면 됩니다.
과거는 과거의 담론이 있고, 현재는 현재의 담론이 있습니다.
이것을 뒤섞지 않고 볼 수 있는 집단 지성이 성숙하는 과정입니다.
포퓰리즘과 팬덤 정치의 미로(迷路) 속에서도 성숙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스스로 망하는 자를 돕는 일은 없습니다.

국격(國格)이 무시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그 원인은 내정(內政)의 퇴행(退行)에 있습니다.
스스로가 존엄할 때, 누구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제 퇴행적 편가름과 낡은 담론과 도덕적 해이를 일신(一新)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대합의를 이루고 연합정치를 뿌리내려야 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은 결정적인 기로에 서 있습니다.
새로운 담론과 도덕과 전략을 갖춘 새 정당이 역사적 과업 성취의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내년 총선이 그 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각자가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패배의식이나 절망감 대신에 나부터 우리부터 사소취대(捨小取大)하는 정신을 가지면 됩니다.
소아(小我)를 내려놓고 대아(大我)를 선택하면 됩니다.
서로 내가 아니라 동지(同志)를 세우려고 하면 됩니다.
그것이 내가 서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