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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4

알라딘: 의식과 본질 이즈쓰 도시히코

알라딘: 의식과 본질

의식과 본질 
이즈쓰 도시히코 (지은이),박석 (옮긴이)
위즈덤하우스2013-04-08
원제 : 意識と本質
Sales Point : 160 
 9.3 100자평(1)리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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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쪽

책소개

인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등 나와 내 주변을 둘러싼 존재에 대한 논제를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이 질문을 가장 심도 깊게 연구한 학문이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철학은, 그토록 오랫동안 인류의 가장 직접적인 질문을 연구한 학문임에도 아직 전체적인 흐름도, 통일성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워낙 동양철학의 뿌리가 깊고 방대한 탓에 감히 하나로 엮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동양철학에 체계적인 흐름이 없다는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동양철학을 삶의 뿌리로 두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존재론적 위기’가 될 수 있다.

<의식과 본질>의 저자인 이즈쓰 도시히코는 불교·선불교·노장사상·공맹사상·신유학·힌두교·탄트라·이슬람·카발라 등 동양철학에 속해 있는 갖가지 종교와 민족의 수많은 사상의식을 ‘본질’이라는 서양철학의 키워드를 빌려 동양철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제시한다. 이 책은 동양의 수많은 사상과 깨달음을 학문적으로 재배치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인류의 다양한 사상적·학문적 연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동양철학을 주체적·실존적으로 이해하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목차
옮긴이의 말

제1장 본질에 대한 동서양의 다양한 관점
제2장 개체적·구체적 실존, 보편적·추상적 본질
제3장 본질과 존재, 일반화와 개체성
제4장 말라르메와 송대 신유학의 본질론
제5장 신을 위해 본질론을 부정한 이슬람의 원자론
제6장 신이 없어도 본질을 부정한 선종
제7장 선은 고요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다이내믹하다?187
제8장 본질론으로 보는 샤먼과 신비가의 이마주
제9장 《주역》의 원형 이마주, 무의식의 구조
제10장 불교의 만다라와 유대교의 세피로트
제11장 신의 내부에서 펼쳐지는 세피로트 만다라
제12장 이데아론·정명론·보편 본질 실재론

책을 마치며

P. 52
본질이 실재하지 않아도, 본질이라는 존재응고점이 없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는 또 그것 나름대로의 실재성이 있다. 본질은 없지만 사물은 있는 것이다. 본질의 실재성을 철두철미하게 부정하면서, 경험 세계에 대해서는 이른바 허무주의가 아니라 분절된 존재에 꿈이나 환상 같은 것으로는 결론 내릴 수 없는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은 동양철학 여기저기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매우 특징적인 사유경향이다. 

P. 67
개념적 본질의 세계는 곧 죽음의 세계다. 싱싱하게 살아서 약동하는 생명은 거기에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 앞에 있는 사물은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자신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 살아 있는 사물을 살아 있는 그대로 잡을 수 있으려면 자연스럽고 소박한 실존적 감동을 통해 ‘깊게 마음에서 느끼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P. 103
꽃이라는 이름은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꽃의 본질을 망상적으로 불러일으킨다. 허공에 불러일으킨 그 허구의 본질을 부정론자, 예를 들어 불교사상가는 외적 실재에 근거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여겨 즉시 떨쳐버린다. 반대로 긍정론자, 예를 들어 니야야, 바이세시카 학파에게 꽃이라는 말은 실재하는 꽃의 실재하는 본질을 지시하는 것이다.

P. 126
정좌靜坐와 달리 궁리窮理는 현저하게 존재론적인 것을 제1의 특징으로 삼는다. 모든 존재자의 깊은 곳에는 본질이 숨어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없다면 궁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유교가 선종과 전혀 다른 점이다.

P. 378
동양철학에서 인식이란 의식과 존재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뒤얽힘이다. 그리고 의식과 존재의 이 뒤얽힘의 구조를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본질의 실재성의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실재성을 긍정하든지 부정하든지 간에.


저자 및 역자소개
이즈쓰 도시히코 (井筒俊彦) (지은이) 
191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대학에서 니시와키 준자부로를 사사했고, 언어학자로서 출발해 그리스 신비사상사, 러시아 문학 등을 강의하는 한편, 『아라비아 사상사』, 『신비철학』, 『아라비아어 입문』 등 초기 대표작을 간행했다. 1949년부터 시작된 연속 강의 「언어학 개론」을 바탕으로 1956년 『언어와 주술』(영문 저작)을 발표했고, 이 책 덕분에 로만 야콥슨의 추천을 받아 록펠러재단 펠로로서 1959년부터 중근동, 구미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다. 1959년 코란의 윤리적 용어 구조를 밝힌 『의미의 구조』(영문)를 발행했다. ... 더보기
최근작 : <이슬람 문화>,<의식과 본질>,<이슬람> … 총 49종 (모두보기)


박석 (옮긴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상명대학교 글로벌인문학부대학 중국어권지역학전공 교수
저서: <두보 초기시 역해>(솔출판사, 공저), <동양사상과 명상>(제이앤씨), <대교약졸,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들녘),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문학을 어떻게 보았는가>(역락), <불가능한 누드>(들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들녁),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한산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최근작 : <참선 잘하그래이>,<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하루 5분의 멈춤> … 총 2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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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의식과 본질》은 이즈쓰 도시히코의 대표작으로, 일본에서 30년간 꾸준히 읽히고 있는 베스트셀러이며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자의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방대한 학문적 관심과 지식을 바탕으로 수십 년 동안 동서양 사상계를 분석, 한 권에 통합·정리·집약한 작품이다. 그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동양철학의 범주는 불교·선불교·노장사상·공맹사상·신유학·힌두교·탄트라·이슬람·카발라 등으로,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고금의 사상과 인물을 한 권 안에 모두 담아냈다.

‘본질’이라는 이름 아래 만난 수많은 사상적 거인들

저자는 ‘본질’을 키워드로 동양사상을 한눈에 훑고 있지만, 사실 본질은 중세 기독교 스콜라 철학에서 나온 개념으로 동양철학에서 익숙한 키워드는 아니다. 독자들은 서양철학 특유의 개념을 가져다 동양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나열하는 그의 글을 보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게다가 곳곳에 등장하는 서양철학자들과 그들의 문제의식이 동양철학과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낯선 시도가 처음에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저자의 치밀한 의도 아래 철저하게 비교·분석한 결과다.

예를 들어 저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데아가 사물의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운을 떼다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한다”는 공자와 맹자의 정명론正名論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곧 바이세시카의 명실론名實論이 주장한 “이름은 그저 개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이데아론·정명론·명실론이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은 달라도 같은 사상체계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본질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중국의 노자의 유명有名과 무명無名 논리를 끌어와 거론하고, 또 공통적으로 본질의 허망함을 인정한 대승불교의 공空사상, 샹카라 베단타 철학의 불이론不二論이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 비교·분석한다. 

이슬람 철학과 중국의 성리학·선종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하고, 주역의 팔괘와 티베트 밀교의 만다라,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에 나오는 생명나무 세피로트가 상징하는 유사성을 설명한다. 

그의 이런 시공간을 넘어선 통합적 사고가 철학에서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와 독일의 시인 릴케의 시세계가 어떠한 관점에서 본질을 이야기했는지를 설명하고, 중국 초나라의 애국시인이자 샤먼인 굴원의 무속적 정신세계와 장자의 철학적 우화의 세계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분석한다. 

또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정신세계와 중국 송나라의 주자학자들이 주장했던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세계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까지 이 한 권 안에 집약해놓았다.

이 밖에도 기독교 스콜라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 에도 시대 일본의 사상가 노리나가,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가 이사크 루리아, 신화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질베르 뒤랑, 이슬람 사상가 이븐 알 아라비, 원자론의 집대성자 무하마드 가잘리,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가인 아베로에스, 그와 비교되는 이슬람 사상가 스후라와르디, 주돈이·정이천·주자 등 다양한 학자들이 사상적으로 연계되어 나오고 있다.

전 세계의 사상·종교·철학의 깨달음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사상체계를 정립하는 학문적 업적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독자들은 《의식과 본질》 한 권만으로 동양사상을 포함한 인류의 정신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사상적 거인들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과연 진짜일까?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단순히 동양의 종교·사상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닌,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음과 명상에 관한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곳곳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책은 철학서인 동시에 명상서라 할 수 있다. 저자 이즈쓰 도시히코는 학자인 동시에 선수행자였으며, 그의 선불교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단순한 이론이 아닌 실제적 체험이 통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천에서 나온 깨달음을 담고 있기에, 이 책에 담긴 글이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독자들은 저자 이즈쓰 도시히코의 실천적 깨달음을 통해, 지금껏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사물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질은 없지만 우리 눈에 비칠 뿐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사물과 현상을 보는 인식이 바뀌어 가치관과 인생관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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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있는 그대로 보기‘( 실상, 진리,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분석적 고찰. 앵무새 흉내를 내는 여타 대부분의 책들과는 비교되지않는 군계일학적 저술! 실험 데이터적 근거가 없는 점이 아쉬우나, 아직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듯.  구매
그냥 2016-08-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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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의식과 본질

이 책에서 말하는 의식과 본질에 대한 접근은 너무 어렵다. 오랜 세월 인류는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많은 철학을 발전시켰다. 어쩌면 인간 본연에 관해 파고들었기에 인류가 지금껏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과 본질은 눈으로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정신과 육체의 이어짐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 충분한 고민이 없는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물론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한다면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충분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보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문장을 읽으면서도 알 듯 말듯하게 감은 오는데 명확하게 한번에 이해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저자가 의식과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온 세상의 모든 철학적 개념들을 더불어 설명한다. 중국, 이슬람, 서양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사람들이 말하는 철학적 개념들이 등장한다.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에 관한 개념 역시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또한 문화에 따라 본질을 이해하는 틀이 달라진다는 저자의 말은 더욱 나를 복잡하게 만든다.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일까? 하나로 확고부동하지 않고 주관적인 흐름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이 개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오롯이 알기란 좀 더 내공을 쌓아야 할듯하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다각적인 방법과 접근으로 의식과 본질을 설명하는 저자의 생각의 끝이 궁금해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보니까 점점 더 조바심이 생긴다.  앞으로 이 책을 여러 번 읽는다면 그 의미의 일부를 깨우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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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식님 2013-04-3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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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 [意識と本質 : 精神的東洋を索めて(1983)] - 이즈쓰 도시히코 

1. TV 프로그램들. 특히, 프로야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 화면에 등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저 모습이 프로가 낼 수 있는 베스트가 아닐까?' 라고 말이다. 즉, TV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화면은 엄청난 내공이 쌓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과 본질>을 읽으면서 TV의 결과물조차도 책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의식과 본질>은 뭐랄까... 시각적 외. 모든 감각의 내공. 특히, 내면의 고뇌가 누적된 결과물이랄까? 

동양과 서양의 종교와 철학의 개념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책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본질의 3가지 분류에 따라서 하나의 범주로 묶어내거나 해체하는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음...앞으로 이어나갈 글이 옳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적어보기로 한다. 

2. 아무리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불가능을 배제하고도 남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 

- 트위터 탐정 설록수, 189p-

토실여왕님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이 문장은 <의식과 본질>에 따르면 세 번째 본질긍정론에 해당함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불가능함을 제거하고 남은 것이 진실이라는 의미는 곧,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불가능을 제거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같은 맥락이고, 그것이 바로 본질이 표층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세 번째 본질론에 해당했다.   

3. 나는 항상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생각했다. 책의 개념에 따르면 나는 마히야(보편적 본질의 세계, 플라톤의 이데아)를 버리고 후위야(즉물적이며 경험적인 리얼리티를 표방)로 간 릴케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 릴케처럼 이 세상의 본질의 유무에는 상관없이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어쩌면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고자 하는 실존조차도. 실존 자체가 하나의 본질로서 작용함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결국, 내가 실존의 영역에서 보려 했던 것은. 즉, 무의식적인 문화적 학습을 통하여 얻어진 관점이라는 큰 틀로 봤을 때, 첫번째 본질긍정론을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의식과 본질>의 첫 번째 본질론은 표층의식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심층의식에서 깊게 사물을 보는 것인데, 그러한 바라봄에 있어서 모든 것을 무로 만드는 단계가 선행하고, 그 뒤에 순간적인 번뜩임이 등장하여 존재가 분절화하여 등장한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번뜩임이 존재하는 문학이 대체적으로 시 문학에 많이 분포한다. 그래서 시에 등장하는 언어는 언어 그 자체가 사실적이지 않고 상징적인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이한 관점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4. 참고로 두 번째 본질긍정론은 첫번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심층의식에서 본질을 찾는 것인데, 여기서는 샤머니즘처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원형의 본질이 있고, 그러한 본질은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가운데에 있는 M의 영역에서 이마주(상징적 이미지화)된 것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말한다.  

이래의 글은 갈림길을 읽고 적은 '사실'과 '진실'에 관한 생각이다.

소설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결과에 의하면 '사실'은 인간이 느끼는 개인적인 관념이다. 헌데 그것은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아주 커다란 개념이다. <갈림길>에 의하면 '진실'이란 신이 만들어놓은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 그에 비하면 '사실'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룬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을 '진실'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존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여기서 '사실'이란 표층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판단이고, '진실'이란 아마도 두 번째 본질긍정론의 본질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가깝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은 본질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한 모습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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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예 2013-04-2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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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찬문화연구소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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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찬과생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남곡추천 
13.05.18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필부지용 - 나무위키
11 Jan 2022 —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함부로 부리는 소인의 용기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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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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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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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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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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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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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인문운동가에겐 고전(古典)이야말로 중요한 인문운동의 도구다.
고전 가운데 가장 신뢰할만한 것은 고등종교의 가르침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을 보며, 민주주의의 생활화나 새로운 시민운동 그리고 협동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운동들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생각한다.
원자화된 차가운 개인주의를 지양(止揚)하는 것이 결코 과거의 공동체가 서 있던 집단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실제로 실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낀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과거의 집단주의에서는 ‘나’라는 개인이 집단 속에 묻혀 있다.
이 개인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 개인이 해방되기 시작한다.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 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개인의 자유’에 환호하지만, 얼마 안가 서로 부딪치는 차가운 이기주의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관계가 보인다.
이것이 일체성(一體性)의 자각이다.
이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적 사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자각을 통과해서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돌아오는데,
이 단계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을 뭐라고 부를까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공인주의(公人主義)라고 부르는게 어떨까 생각한다.
공인(公人)이란 일체성(一體性)을 자각한 개인을 말한다.
사실은 자각하던 안하던 모든 사람은 공인(公人)이지만,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에 임하는 현실적 태도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예컨대 공인의 자각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하면, 저항성을 넘어 책임성과 관용 그리고 공공성과 세계성을 가지게 된다.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이다.
협동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운동, 실제적인 민주적 운영의 능력 등이 바로 이 공인(公人)의 자각이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공인주의로 발전하는 것이 지금의 역사 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전에 썼던 글이다.
<<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에서 발췌>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 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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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30

Namgok Lee 박석 교수의 뇌중심 명상

(2) Facebook:

박 석 교수의 명상을 나름대로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5월에는 뇌중심편을 하려고 하는데, 그 설명을 들으면서 아마 가장 어려운 코스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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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뇌의 각 부분과 기능에 대해서, 그 위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할 것 같다.
뇌과학의 최신 성과를 명상과 관련시킨 박 교수의 천재성이 놀랍다.
그리고 평소 생각하던 내용들이 이렇게 만나지는구나 하는 기쁨도 있지만, 실제로 이 편의 명상은 우선 사전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몇 문장을 소개한다.

‘뇌 과학자들은 우리가 눈을 통해 바라보는 대상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뇌가 구성한 틀에 비추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참으로 맞는 이야기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인간의 뇌의 틀에 비쳐서 나타난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우리와는 다르게 사물을 바라보고 개미나 잠자리는 더욱 다르게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의식 수준에 맞추어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도 각각의 수준에 맞게끔 세상을 바라본다.
여기서 사물들이 제대로 보인다는 말은 사물의 궁극적인 실제 모습을 보자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불필요한 긴장이나 고정 관념으로 시각을 왜곡시키지 말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자는 뜻이다. 평소에 바로 보이는 사물들도 불필요한 긴장으로 인해 마음이 잔뜩 긴장되어 있거나 편견이나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에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명상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바라보기 명상을 수련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폐단을 벗어던지고 사물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런 수련법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들 수련법은 자아를 느끼는 뇌 영역들을 비활성화시켜서 무아와 무한을 체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자아 정체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지만, 평소 우리가 잘 자각하지 못하는 그 영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자아를 좀 더 확실하게 자각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정체를 모르는 대상은 통제할 수도 조절할 수도 없지만, 그 정체를 알게 되면 점차 통제와 조절의 길이 열린다. 예컨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정체를 모르면 그것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면 아름답게 꽃피울 수도 있고 제대로 버릴 수도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감정은 조절하기가 힘들지만, 그 출처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감정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 자아도 그렇다. 그 정체를 제대로 알 때 잘 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확장할 수 있다.’
바라보기 명상에서는 무념무상을 강조하지 않는다.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명상만으로는 되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사고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사고력과 판단력을 담당하는 영역은 이마앞엽이다. 이 부분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 부분이 지나치게 비활성화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개념 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볼 때 정말 기본적인 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마엽의 본래 기능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유가 아니라 운동이다. 물론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운동과 어떤 실천적인 행동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후자는 훨씬 더 강한 의지의 힘을 요구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생각을 아무리 깊게 넓게 해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과 말은 빠르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과 말이 많은 사람보다는 행동으로 잘 옮기는 사람이 더욱 성숙한 인간이다. 공자는 항상 제자들에게 말보다는 행동을 우선시하라고 가르쳤고, 말은 어눌해도 행동이 민첩한 제자를 칭찬했다. 지금의 시대는 생각과 말이 실천적 행동보다 너무 앞서고 있다. 우리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은 결국 실천적 행동을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새겨야 한다.’
다음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뇌는 우리 마음을 만들어내는 기관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기관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崔明淑, 박길수 and 1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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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호
    잘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어찌 되나요? 꼭 좀 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