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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 * Hugo Enomiya-Lassalle - Wikipedia 에노미야 라쌀 フーゴ・ラッサール - 선과 기독교 신비 사상

Hugo Enomiya-Lassalle - Wikipedia

Hugo Enomiya-Lassalle
11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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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Hugo Enomiya-Lassalle

Hugo Makibi Enomiya-Lassalle (11 November 1898[1] in Gut Externbrock near Nieheim, Westphalia – 7 July 1990[1] in Münster, Westphalia) was 
a German Jesuit priest and 
one of the foremost teachers to embrace 
both Roman Catholic Christianity and Zen Buddhism.[1]


Biography[edit]

Hugo Lassalle passed his school days from 1911 to 1916 at the Gymnasium Petrinum in Brilon in 1917. Because of an injury in the First World War, Hugo Lassalle was admitted to the military hospital of Brilon in 1917. 
Enomiya-Lassalle joined the Society of Jesus on 25 April 1919. At the end of the usual Jesuit spiritual and academic training he was ordained priest on 28 August 1927.

He travelled to Japan as a missionary in 1929 and became interested in that country's Buddhist practices. In 1940, he became the vicar of Hiroshima, and on 6 August 1945 he was critically wounded by the nuclear blast in that city, which is depicted in John Hersey's book Hiroshima.[2] 

Shortly thereafter, he returned to Germany.

In September 1946, he had an audience with Pope Pius XII, in which he revealed his plan to build in Hiroshima a cathedral dedicated to the idea of world peace. Designed by Japanese architect Togo Murano, construction on the cathedral began in 1950 and on 6 August 1954, the Memorial Cathedral for World Peaceja)was dedicated.[3]

In 1956, Enomiya-Lassalle began studying Zen with Harada Daiun Sogaku.[1][4] In 1958, he published Zen: A Way to Enlightenment.[4]

Following Harada's death in 1961, Enomiya-Lassalle became an apprentice of one of Harada's students, Yamada Kōun. Yamada was enthusiastic about the possibilities of Zen as a Christian practice, believing that "Zen would become an important stream in the Catholic Church one day".[5] With Enomiya-Lassalle's active assistance, he attracted a number of Catholic priests and nuns as students. In the late 1960s, Enomiya-Lasalle was certified as a teacher in Yamada's Sanbo Kyodan sect and given the title roshi (Zen master), while professing his continued belief in Christianity. After 1968, Enomiya-Lassalle spent much of his time in Europe leading Zen retreats and encouraging Zen practice among Christians. His books influenced symphony conductor Herbert von Karajan to study Zen and incorporate a Zen mindset into his conducting.

Memorial Cathedral for World Peace, at Naka-ku Hiroshima, Japan, design by Togo Murano in 1954.


Bibliography[edit]

  1. Zen: Way to Enlightenment (1964)
  2. Zen Meditation for Christians (1974)
  3. Living the New Consciousness (1984)
  4. The Practice of Zen Meditation, (1987, Thorsons).


See also[edit]



References[edit]

^ Jump up to:a b c d Akinade, Akintunde E. (2010). A New Day: Essays on World Christianity in Honor of Lamin Sanneh. Peter Lang. p. 242. ISBN 9781433104565.
^ John Hersey: Hiroshima; Vintage Books, New York 1989, p 11 etc
^ "【平和の使徒】 世界平和記念聖堂 (Memorial Cathedral for World Peace) – カトリック広島司教区平和の使徒推進本部".
^ Jump up to:a b Oldmeadow, Harry (2004). Journeys East: 20th Century Western Encounters with Eastern Religious Traditions. World Wisdom, Inc. pp. 429–430. ISBN 9780941532570.
^ Terebess Asia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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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 - 깨달음에로의 길  | 분도소책 21
에노미야 라쌀 (지은이)분도출판사1974-03-01

목차
1. 깨달음
2. 깨달음의 활용
3. 선과 동양문화
4. 선과 신 신앙
5. 그리스도교의 수덕과 신비주의에의 기여
6. 좌선을 위한 실제적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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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고 라사르 [일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후고 라사르 아미야
마비
Hugo Makibi Enomiya-Lassalle
예수회 사제
마키비 에노미야-라살(1898-1990).jpg
푸고 마키비 에노미야 라사르
교회가톨릭 교회
개인정보
실명푸고 마키비 에노미야 라사르
별명아미야 마비
태어나다1898년 11월 11일
주사위1990년 7월 7일 (향년 91세)
국적일본의 국기 일본
템플릿 보기

푸고 마키비 에노미야 라사르 ( Hugo Makibi Enomiya-Lassalle , 1898년 11월 11일 - 1990년 7월 7일 )는 독일 출생의 예수 회원 으로 가톨릭 교회 사제 , 선교사 . 일본어 표기에서는 성과 이름이 각각, 푸고도 라 사르 도, 혹은 드물게 라살 이라고도 표기된다. 1948년 (  와 23년)에 일본으로 귀화하고 있어, 일본명은 아미야 마비 (에미야 마키비). 영어판 위키피디아 “Hugo Enomiya-Lassalle” 에 있는 영어 표기 Aiun-ken 는, 라사르의 선불교상에서의 자칭 애운처의 음역 .

기독교 성직자 로서 처음으로 좌선을 종교 생활 속에 실천적으로 도입했다 1945년 (쇼와 20년) 8월 6일 에 히로시마  의 야마치 천주 공교회(야 마치 교회 )에서 원자 폭탄 의 투하를 만나 직접 피폭 한 것으로, 희생자에게의 위령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한 기념장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히로시마 의 땅에 세계평화기념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 히로시마의 문화 복지의 발전에 널리 공헌한 공적이 인정되어, 1968년 ( 쇼와 43년) 4월 히로시마시의 명예 시민 으로서 현창되고 있다 [1] [주1] .

귀화명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일본 문화 에 대한 조예가 깊고, 특히 일본인 의 영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선종에 깊은 흥미를 안고, 스스로 참선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관계자에게도 적극적 에 좌선을 권했다. 일본 국외에서는 오히려 그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가톨릭 선」[2]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편집 ]

생생한 편집 ]

1898년 ( 메이지 31년) 11월 11일 독일 제국 베스트팔렌 지방(현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 니 하임 익 스텐블록(Externbrock)에서 탄생. 조상은 아마 프랑스 에서 망명한 유그 노라고 생각되고 있다 [3] . 초등학교 4학년부터 김나듐 으로 진행한 뒤 그 8년차(Unterprima)에 징병되어 제1차 세계대전 중서부 전선 으로 보내졌다. 부상과 관절 류마티스를 위해 여러 번 입원했지만, 1919년 ( 다이쇼 8년)에 고등상등병(Obergefreiter)으로 제대. 2급 철 십자 훈장 수장 [4] .

수업 시대 편집 ]

1919년(다이쇼 8년) 4월 25일 에 예수회 에 입회. 당시 독일의 예수회 서관구에 소속된 수련원은 , 국경에서 접하는 네덜란드 의 셰렌베르프 네덜란드어 판 ) 에 있으며, 거기서 2년간의 수련기를 보낸 후, 네덜란드의 남홀란트주 팔켄 부르 프 네덜란드 어판 ) 성 이그나치오 대학에서 배운다. 또 영국 의 스토니허스트 칼리지 영어판 ) 나 헤이스롭 칼리지 영어판 ) 등에서 도 철학 을 3년간, 신학을 4년간 배우고, 철학 박사 학위 취득. 1927년 (쇼와 2년) 신학 과정의 3년째 종료시에, 팔켄부르프에서 사제에 서층되었다 [ 4 ] .

프랑스의 아미 안에서 받은 제3수련 영어판 ) 기간 중에 신비사상 에 관심을 갖고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 의 세인트 테레사 의 저작을 열심히 읽는다. 이 경험이 뒤에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선 체험이라고 호응해 양자가 연결되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가게 되었다 [4] .

미션 편집 ]

로마 교황청 으로부터 당시 독일의 예수회 서관구에 주어진 미션 에 일본이 있어, 거기서의 주요한 사업 내용은 상지대학에서의 교육 이었기 때문에 [주 2] , 라사르는 1929년 (쇼와 4년) 에 상지대학에 파견되게 되었다. 그러나 라살은 당초 아프리카 의 한센 병원 에 파견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고, 대학에서 학생 상대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이치의 사람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사회 사업 을 행하는 것을 취향 [4] , 관동대지진 의 피해자가 많이 살고 있고, 1931년 (쇼와 6년) 당시 도쿄시 최대의 곤궁지대였던 아라카와구 미카와 지마  , 학생들과 활동하기 위한 거점이 된다 가미치 세츠루멘토」를 설립했다 [5] [주3] .

1935년 (쇼와 10년) 독일 본국의 예수회관구장 클라인 신부가, 37세의 젊음으로 라사르를 예수회 일본관구의 상장으로 임명하면, 입장에 살아 익숙한 시모마치로부터 상지대학에 부속 되는 SJ 하우스 [주 4] 로 옮겨야 했다. 거기서 라사르는 일계를 안고, 상장의 권한으로 예수회의 일본관구(미션)의 본부 자체를 히로시마에 옮겨 버린다[4 ] . 그때까지 파리 외국 선교회 에 위탁 된 오사카 교구 중 히로시마 · 오카야마 · 야마구치 · 시마네 · 돗토리 의 중국 지방 5 현을 포함한 서쪽 지역이 1923 년 (다이쇼 12 년)에 정식으로 분할되어 히로시마 대목구로서의 포교활동이 예수회 독일 서관구에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6] . 라사르가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재해 버리는 것도 이러한 경위에 따른다.

당시 히로시마의 야마쵸 에 있던 야마치 천주 공교회 는 낡은 목조 의 일본식(일본 양식)의 평야건축 의 건물로, 실내도 다다미 깔린 작은 교회였다 [4] [주5] . 일본관 구장으로서 수명의 부하를 수반한 집무를 취하기 위해, 1936년(쇼와 11년) 사무소 겸 주거로서 새롭게 사제관을 건설해, 오카야마에 있던 교구장관 자체도 히로시마  옮겨져 교구장도 거기에 옮겨 살게 되었다 [4] . 사제관은 서양풍 의 오두막 3층 건물의 확고한 건물이며, 일본의 지진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던 설계자 의 글 로퍼 수도사 7] 는 「근처의 어떤 건물보다 8배는 강하다」 라고 자랑했다. 실제로, 폭심지 로부터 1.2 km의 거리 [주 6] 에 있어서 성당을 비롯한 주위의 건물이 굉장히 도괴한 가운데, 실내는 손해했지만 몸은 폭풍에도 견디고, 그 후 유소했다고는 해도 사제 관 속에 있던 라사르들 5명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2] [주7] .

원폭 피폭 편집 ]

라살이 피폭해 버리는 것도, 당시 일본과 동맹 관계에 있던 추축국 측의 독일 출신이며, 1941년 (쇼와 16년) 12월 8일 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도 일본 국외 퇴거를 면했기 때문에 이다 [8] .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의 그 때, 자실의 창가에 서 있던 라사르는, 등에 폭풍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받게 되어 버렸다[9 ] .

다음은 그때의 모습의 라자르 자신에 의한 직접 증언이다.

딱 아침의 미사 갓 하고 나서, 조금 서었을 때, 갑자기 뭔가의 빛이 밖이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뭔가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약)하지만 그 때, 원폭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어요. 어쩐지 말하면, 소리는 역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동안 천장도 아무것도 엄청 어려워지고, 떨어지고, 이것으로 이미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
도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까지 강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약) 그냥
그때 주변의 학교 학생이 폭심지 근처에 일하러 와서, 상당히 학생들은 죽고, 클래스의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을 정도로 전멸에 가까웠습니다. 나도 함께 죽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 그래도,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해 가야 되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역시 하나의 기도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아미야 진비 강연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의 건축을 둘러싸고 - 강연과 대화'(건축가 무라 노토고 씨와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을 말하는 회편 / 1959년 3월 30일간)에서 발췌 [10 ]

중상을 입은 라살은, 히로시마시 교외의 기온 장속에 있던 예수회 수련원 까지 담가 로 옮겨진 뒤 [2] , 거기서 원조 수도회 영어판 ) (연옥 원조 자매회)의 간호를 받으면서 몇 주 동안 바닥에 붙어야 했다 [11] .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는 석문과 석담만이 태워 남아 있는 야마치교회의 부지에 우선 2평 정도의 버락을 세우고, 거기를 도구 오두막 겸 주거로 옮겨 간다 . 이듬해 1946년 (쇼와 21년) 1월에는 주택영단 에서 매입한 조립식 주택을 2동 없이 12조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 우선 성당과 전도집회소의 형태가 갖추어 졌다 . 3월에는 또 1동분을 연결해 주임 사제의 주거로 해, 4월에는 성모 유치원도 재개 . 그리고 삶도 밀려오는 12월이 되어 드디어, 태워 남아 있던 기초 위에 이전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사제관이 재건 된 것이다 [12] .

세계평화기념성당 편집 ]

2006년 히로시마 피스 센터 와 함께 전후 건축물로서 처음으로 국가의 중요문화재 로 지정되었다

건축 경기 설계 편집 ]

단 하나의 폭탄 에 의해 하나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는 20만 이상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상하고 게다가 방사능에 의한 파괴력은 오랫동안 피해자를 괴롭혔을  아니라 , 세대를 넘어 영향도 걱정되었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이 새로운 근대무기 의 악을 극복할 정도의 희망을 주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건설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축이 그 마이너스의 힘에 길항하는 것만의 플러스 힘이 있어야 했다 [13] .

그러므로 그 건축이 가져야 할 성격은, 이념에서 말해도 규모의 면에서 말해도, 히로시마의 원폭의 희생자에게의 위령뿐만 아니라, 전쟁에 의한 모든 희생자에게의 기도가 마음 있는 사람들 을 끌어당겨 진정한 세계평화를 쌓아가기 위한 운동의 기점이 되는 것이어야 하며, 민족도 종교도 국가도 넘은 모든 전쟁 희생자 위에 세워진 새로운 정신 문명 의 기초가 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라사르는 생각한 것이다 [14] .

원자폭탄이 인간에 미치는 파괴력을 직접 경험한 라사르의 이 직관에 기초한 장대한 비전은 반드시 처음부터 사람들의 적극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15 ] , 어쨌든 그러한 대성당 으로 발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교회 의 신자들을 위해 몸에 맞는 교회당 건설을 하고 주위는 원했지만, 이것에 관해서는 라사르는 힘들었다[16 ] .

1946년 (쇼와 21년) 3월, 라사르는 예수회의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 에 여행을 떠난다. 같은 해 9월에는, 시의 교황 피오 12 에 개인 속견한 기회를 파악해 스스로의 구상을 피역하고, 우선 로마 교황청의 먹이 첨부를 붙인 후, 자신은 유럽 , 북미 및 남미를 둘러싸고 세계에 히로시마의 참상을 보고하면서 세계평화기념성당 건설을 향한 협력을 부탁한 것이다 [15] . 이 여행은 라사르에게 1년 여유가 길게 되었다 [12] .

1947년 (쇼와 22년)도 후반이 되어 귀국하면 [주 8] , 성당 건설을 단순히 히로시마 교구의 문제로서는 아니고, 제2차 세계 대전 의 패전 후에 새롭게 평화 국가로서 재출발한 일본 전체의 이를 위해 [15] , 이 건설 계획 자체를 아사히 신문사 의 후원을 얻어 「평화 기념 히로시마 가톨릭 성당 건축 경기 설계」[주 9] 로 해, 1948년 (쇼와 23 년) 부활제의 날을 기하여 아사히 신문지에 발표했다. 전년에 열린 센다이시 공회당 공모와 함께 일본 건축계에서는 전후 건축사의 개막을 알리는 당시 최대급의 공모 였다 . 게다가 라사르가 내건 고편한 이념에 의해, 일본 ​​근대 건축 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눈을 의식한 콤페가 되었다 [8] . 대회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확하게 내세운다.

본 계획에 있어서는 뛰어난 일본적 성격을 발휘하는 것과 동시에 전후 일본의 새로운 시대에 응하는 제안을 바라고 있다.
이의 주지에 근거해 하기의 요항을 내건다.
1. 성당의 작풍은 일본적 성격을 존중하고 가장 건전한 의미에서의 모던 스타일인 것, 따라서 일본 및 해외의 순수한 고전 양식은 피해야 한다.
2. 성당의 외관급 내부는 모두 반드시 종교적 인상을 주어야 한다.
3. 성당은 기념 건축으로서의 장엄성을 가져야 한다. 이상의 모던, 일본적, 종교적, 기념적이라는 요구를 조화시키는 것이 이번 경기 설계의 주안이다.
— 평화기념 히로시마 가톨릭 성당 건축 경기 설계도집(히로시마 가톨릭 교회편 / 홍양사·1949년)에서 인용 [17]

자신이 체험하게 된 테크놀로지 의 진보에 의한 미증유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우선 명확하게 모더니즘 양식인 것이 주장되고 있는 것은, 라사르가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반드시 부정하지 않고 , 그것은 인류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18] 오히려 기술의 진보를 인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 . 그러나 세계가 평화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이 평화여야 하며, 따라서 과학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자체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인간이 아니라 우선  ( Geist)에 의해 지배된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 .

물자 부족에 휩쓸린 태평양 전쟁의 전시중을 빠져나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의 곤궁한 시대에 행해진 제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큰 대회이며, 상금이 고액이었던 것 도 도와 177명의 응모가 있었지만, 요항에 내거진 고도의 조건을 완전하게 채우는 것이 없고, 1등 당선은 해당자 없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성당의 설계 자체는 결국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표현파의 실력자 무라노 후고가 스스로 행하게 되어, 이것은 건축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지만 , 무라노  고는 설계료의 수령을 거절하고 [주 10] , 나중에 무라노는 1980년 (쇼와 55년) 8월 3일 , 스스로 설계한 니시노미야 트라피스티누 수도원 에서 증손 과 함께 라사르로부터 카톨릭의 세례를 받고 있다 [ 20] [21] .

일본으로의 귀화 편집 ]

세계평화기념성당의 건설이 점차 구체화되어 가는 가운데, 라사르는 1948년 (쇼와 23년) 10월 25일 , 국적을 일본으로 옮기고 있다 [22] . 귀화명에 있는 아미야 진비의 '진비'라는 이름은 견당사로서 일본에 당나라 의 선진 적인 문화를 가져와 또 조토 다이지 장관으로서 나라 도다이지 의 건설  종사한 나라 시대 의 대학자 요시비 진비 ( 695년 - 775년 )에 의한 것이다. 성의 ‘아미야’ 쪽은, 일본 서기 속에서 진무 천황이 동정 때 행재소  아기 국 아키쿠니 )의 ‘먼지(에노미야)’(현재의 히로시마시 교외 아키 군 후추 마을 )에 놓았다는 기술을 근거로, 그 고지를 소리로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말 그대로 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되고 있다[23 ] . 길비국의 태생이었던 길비 진비의 성명이 '길비의 출의 진비'라는 자칭인 것에 따르면, '아미야' 즉 사랑의 신인 그리스도를 모시는 궁(교회)에 사는 ' (그리스도교회 출신의) 진비'라는 의미라고도 생각된다.

길비 진비라고 하면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마비 초가 유명하지만,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마비초 쇼다에 있는 길비 공산 유노우물 에는,  사르가 지은 현창비가 있어, 라틴어와 일본어로 각각 다음 의 같은 칭찬을 받고있다.

불멸의 유덕을 앙암 이 비석은

이 땅에 삶을 얻은 문학자로서, 또 정치가로서 많은 공적을 낳은 선현길비 진비공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바라면, 이 위인의 굉장한 이상과 귀덕이, 조국 일본의 청소년 영원의 모범이 되어, 불멸의 지표가 되는 것을.

쇼와 38년 10월 2일
아미야 마비
— 오카야마 요시비 진비 공원·요시비 진비 현창 비문

기념성당 건설 편집 ]

북서에서의 부감에 의한 준공 당시의 전경

1948년 (쇼와 23년)에 귀화한 것으로 명실상부 히로시마 시민이 된 라사르는, 다음 1949년(쇼와 24년)에는 스스로 야마치 교회의 주임 사제가 되어 대성당 건설을 향해 진두 지휘 에 닿게 되었다 [12] . 그러나, 삼각주 위에 발전해 온 히로시마시의 지반이 연약하고 기초 공사가 난항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 (쇼와 25년) 공사와기를 똑같이 하도록 해 시작된 조선 전쟁 의 영향으로 건설자재가 몇 배나 치솟는 등 당초부터 건설은 어려움을 겪었다. 건설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라살은 건설 자금의 수당에 분주해야 했던 것이다. 거기서 다음 1951년 (쇼와 26년) 1월에는 「세계 평화 기념 성당 후원회」의 명칭을 「히로시마 평화 기념 성당 건설 후원회」라고 바꾼 다음 [주 9], 새롭게 명예 총재에 다카마쓰 노미야 선인 친왕을 대, 총재에는 요시다 시게루 내각 총리 대신을 맞아, 히로시마현 출신의 이케다 용인 대장 대신이 실질적인 정리역인 회장 발기인이 되어, 국내에서의 모금 활동을 지지하게 되었다.

‘위령을 위한 성당’에서 보다 이념적인 ‘평화를 희구하는 성당’으로 라사르가 내건 건축 이념은 1949년(1949년) 8월 6일에 시행된 히로시마 평화 기념 도시 건설법 의 이념과도 공명하게 되어, 1952년 (쇼와 27년)에는 「히로시마 평화 기념 성당 건설에 대한 감사 결의문」이 히로시마시 의회보다 만장 일치로 보내지고 있다 [ 24 ] . 성당 건설은 단순히 가톨릭 교회만의 것이 아니라 점차 종파나 종교를 넘어 넓게 히로시마 시민의 것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로 인해 독일 쾰른시 보다 파이프 오르간이 , 보훔시 에서는 강철  종이, 독일 본시 에서는 성교 가 , 벨기에 에서는 대리석 제단 등이, 히로시마시에 기증되는 형태로 건설 현장에 전달 되었다. 또한 일본 국내외의 헌금은 물론 미국 뉴욕 의 사업가 토마스 A. 브래들리로부터의 다액의 자금 원조에 의해 내진 상부 의 가 수당되는 등 [25] [주 11] , 전세계로부터의 선의에 의해 성당으로서의 형태가 갖추어져, 1954년(쇼와 29 년) 8월 6일의 히로시마의 원폭 위령일에 헌당식이 실시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당식 당일에는 성당 내진  모자이크 화도 없었고, 창문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가 아니고 무색 투명 유리가 끼워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8년 후의 1962년 (쇼와 37년)이 되어 드디어, 히로시마 교구의 사목이 예수회에서 교구 사제에게 맡겨지는 것과 시간을 같이 하도록(듯이), 전달된 마지막 스테인드 글라스가 성당 최상부의 창문에 끼워져 성당은 진정한 완성을 본 것이다 [26] . 그리고 성당 건설에 심혈을 기울인 라사르도 그것을 보는 것처럼 히로시마의 땅을 떠나게 되었다. 히로시마의 강 모래를 사용하여 콘크리트 를 만들고 쌓아 올린 콘크리트 벽돌의 수는 [주 12] 원폭으로 잃어버린 희생자의 수와 필적한다고도 말한다. 세계평화기념성당은 2007년 ( 헤세이 19년)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단 시타 켄조 의 히로시마 피스센터 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건축물로서 처음으로 일본국의 중요문화재 (건조물)로 선정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