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예향 초대석 - 40년 동학연구 한길,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2023년 12월 25일(월) 18:55가가
“대한민국 대전환, 동학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1983년부터 현장 찾아다니며
희귀 동학 1차 사료 최초로 찾아내
한·일 역사학자와 시민들
‘동학농민군 희생자 기리는 사죄비’
‘나주역사공원’에 건립
‘창비담론 아카데미’ 등 통해
박맹수 원광대 전 총장(원불교학과 명예교수)은 40년 동안 동학연구의 한길을 걸어오고 있다.
보성군 벌교 태생인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전 총장)는 1983년부터 40년째 동학연구의 한길을 걸어오고 있다. 철저하게 현장을 찾아 ‘발로 쓰는 현장공부’를 강조한다. 관리나 양반계급과 달리 농민군들은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두발로 동학 관련 현장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희귀한 동학 1차 사료들을 최초로 찾아내 ‘남·북접은 하나’ 등 기존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동학사를 정립할 수 있었다. 1895년 1월 5일, 서울에서 3개 가도(충주·청주·공주)를 따라 남하하며 동학농민군을 토벌해 온 일본군 후비(後備)보병 제19대대가 나주성에 입성한다. 한 병사는 일본군이 나주에 35일간 주둔하며 동학지도자 680여 명을 학살했다고 ‘종군일지’에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로부터 128년이 흐른 지난 10월 30일,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와 시민들에 의해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가 나주시 죽림동 ‘나주역사공원’에 세워졌다. 사죄비 건립의 실무를 맡아 결실을 맺은 박 교수를 익산에서 만나 40년 동학연구 이야기를 들었다.
◇순수 한·일 시민의 힘으로 세워진 동학 사죄비
나천수 시인: “동학과 관련해 진압군 일본 측은 가해자 측인데, 가해자 측에서 일본군이 살육했던 역사를 발굴하려 하는가?”
나카츠카 교수: “일본군이 가해했던 역사를 덮어 놓는다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위배된다.”
나천수: “가해 역사를 밝힌 후에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나카츠카: “조그마한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
나주 동학농민혁명 한일 국제 학술대회(2019년)
지난 2016년 10월, 고(故)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나라 여자대학 명예교수가 ‘제11차 한일동학기행’ 방문단을 이끌고 나주에 왔을 때 일이다. 만찬 자리에서 나주지역 동학유적지 안내를 맡았던 나주목 향토문화연구회 나천수 시인(문학박사)과 나카츠카 교수 간에 이러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3년 뒤 2019년 10월 30일, 나주시와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일본 측 동학기행단 대표 등 3자 간에 나주 동학농민혁명 재조명을 위한 MOU가 체결됐다. 2019~2021년 3년간 매년 나주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를 열고, 민간인 차원의 위령비를 건립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같은 날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홋카이도 대학 명예교수 교수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나주성에 입성한) 이후 벌어진 잔혹한 토벌전의 역사와 진상을 밝힐 책임을 다하지 않은 데 대해 일본인으로서 깊이 사과를 드린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발표했다. 이번 세워진 사죄비의 씨앗은 근대 한일관계와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해온 일본 역사학자의 ‘학자적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2022년부터 모금운동을 전개한 일본 측은 118만 엔을 모았고, 한국 측도 이에 호응해 3700여만 원을 모았다. 원광학원 그룹과 원광대 재경 동문회, 근대한국 개벽종교 답사단, 보성 ‘불이학당’ 동학공부모임, 공주 우금티기념사업회,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나주학회, 나주목 향토문화연구회 등에서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성금을 모았다. 나주시는 사죄비를 세울 부지를 현물 지원했다.
박맹수 교수는 나카츠카 교수와 함께 사죄비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아 사죄비 건립과 연관된 전반적인 업무를 맡아 4년 만에 완결 지을 수 있었다. 협의를 통해 문구를 작성하고, 모금을 책임지는 등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94세라는 고령과 폐암투병 중에도 사죄비 건립에 적극 나섰던 나카츠카 명예교수는 제막식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10월30일 나주역사공원에서 열린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 제막식.
-고(故) 나카츠카 교수가 “가해의 역사를 덮어 놓는 것은 학자의 양심에 위배되고, 나중에 작은 위령탑이라도 세우고 싶다”고 말씀하신 때를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직접적인 계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1995년 7월 일본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인류학교실 옛 표본고(標本庫)에서 전라남도 진도 출신 동학지도자 유골이 발견된 것이 사실은 출발이라고 봐야죠. 유골 발견을 계기로 피해국인 우리나라 연구자 저하고 가해국 일본의 이노우에 교수님이 공동 연구를 시작하잖아요. 그 소식을 나카츠카 교수님이 들으시고, 1997년 홋카이도 대학에 유학 갔을 때, 그해 가을에 교토에서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로 오셨어요. ‘피해국과 가해국 두 나라가 공동 연구하기 쉽지 않은데 너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후에 어떻게 일이 사죄비 건립까지 진척됐나요?
“2001년에 귀국하자마자 5월에 전주에서 동학 국제학술대회를 열면서 나카츠카·이노우에 교수님을 초청했죠. 그때 정읍에 있는 무명(無名) 동학농민군 위령탑 안내를 했어요. 여기서 나카츠카 교수님이 엄청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아요. 일본으로 돌아가셔서 2002년 8월에 시범적으로 ‘동학기행 답사단’을 모시고 와요. 그리고 2006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한일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답사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카츠카 교수님을 비롯한 일본 연구자들을 모시고 나주를 답사할 때 ‘(어두운 역사를 파헤치는 것은) 국가나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양심, 학자의 양심 문제다. 조그마한 위령비라도 세우면 좋겠다’ 말씀하신 게 씨앗이 됐죠. 그걸 나천수 선생님은 그냥 들으시지 않은 거죠. 그다음에 답사단이 오셨을 때 ‘저희가 이걸 추진하면 어떻습니까?’ 하신 거죠. 2019년 10월에 이노우에 교수님이 공식적으로 사죄문을 발표하죠. 그때 반향이 엄청났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처참하고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는지 3년 동안 학술대회를 하고, 그 성과에 바탕해서 한일 양국 시민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으자’ 한거죠.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 건립 의의와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가장 큰 의미라면 근대 한일관계는, 불로 비유하자면 100년 이상 불타고 있는 한일간의 갈등과 대립을 시민들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모델을 만들어냈다,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고 봅니다. 129년 전에 우리 광주·전남 전라도 땅에서, 그런 처참하고 가혹한 역사를 딛고 새로운 생명, 평화의 싹을 키워냈습니다. 이것을 일본의 정계와 재계, 언론계, 시민사회에 널리 전파한다면 정말 진정한 한일관계가 새롭게 구축될 겁니다. 나주시 왕곡면 국도 13호선 도로변에 일제강점기때 나주 궁삼면 토지분쟁을 변호한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됨)와 관련 있는 ‘나주 궁삼면 항일 농민운동 기념비’가 있습니다. 사죄비와 궁삼면 기념비는 시너지 효과가 날 것 같아요. 올해 5월에는 후지 국제여행사가 광주항쟁을 핵심 코스로 하는 프로그램을 하나 더 신설했어요.”
◇“동학 연구로 이끈 학문의 원동력은 5월 광주”
“제가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로 젊은 시절을 바쳤던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바로 1980년의 광주사건과 그 후의 야학운동이었습니다.” 박맹수 교수는 2014년 펴낸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또 하나의 청일전쟁’(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刊)에 실린 ‘동학농민혁명과 현대한국-내가 걸었던 도정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밝힌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졸업 후 ROTC 장교로 임관해 상부의 명령을 암호화해 하부의 연대와 대대에 전달하는 연락장교를 맡았던 그는 1980년 5·18을 충청도 지역사단사령부 지하벙커에서 접했다. 나중 5·18의 진상을 알고나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 등을 지켜야 하는 군대가 국민을 학살하는 사태’에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 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가 동학과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 선생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1995년 7월, 일제시대 식민학(植民學)의 근거지였던 홋카이도 대학에서 신문지에 싸인 채 발견된 진도출신 동학지도자 두개골은 그의 동학 연구와 학문인생에 커다란 방향 전환을 가져오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학술담당 간사를 맡고 있던 그는 ‘동학지도자 인골 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1년까지 홋카이도 대학 유학시절 이노우에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공부하며 ‘열린 민족주의’와 ‘동아시아’를 발견하는 의식전환을 했다.
박맹수 교수는 ‘창비담론 아카데미’와 ‘보성 불이학당’ 동학공부모임 등을 통해 동학 사상·정신을 널리 알리면서 미래지향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고자 한다. 왜 지금 시대에 129년 전 개벽을 꿈꾸는 민중들을 사로잡았던 동학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지금 다시 동학인가?’하면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의 대전환이 절실한 시대에 대전환을 이뤄갈 지혜가 동학에 있고,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 붐의 뿌리가 되는 사상과 철학이 바로 동학이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천지만물 막비시천주(天地萬物 莫非侍天主·모든 만물과 사람이 똑같이 존귀한 존재)라는 가르침이야말로 지구가 맞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