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으로 본 대순사상의 신관
허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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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사상논총 제25집下
대순사상학술원, 2015, pp.177~213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으로 본
대순사상의 신관
허훈
중앙대학교ㆍ강사
Ⅰ. 서론
Ⅱ. 신관의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
Ⅲ. 영원의 철학의 신관:포월적 유신론 Ⅳ. 대순의 상제관과 신명관:포월적 유신론
Ⅴ. 존재와 앎[신관]의 수준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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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우리는 사실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과 삶의 의미와 지혜를 대변 하는 ‘종교’라는 2가지 거대한 펜듈럼 속에서 살아간다. 현대의 과학 과 종교는 서로를 불신하고 있지만, 또한 공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이 이 둘의 대립과 갈등에 대해 망각하고 있거나, 깊게 생각하지 않는 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유의미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과학과 종 교는 결코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우리가 직면해야 할 커다란 과 제다. 그런데 과학과 종교는 서로 이질적인 내용(형이상, 형이하)을 담 고 있어서 그 둘의 조화나 융합은 쉽지 않아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 topher Eric Hitchens, 1949-2011),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 1942~), 샘 해리스(Sam Harris, 1967~) 등과 같은 과학자[과학철학 자]들 )은 최근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신론자들 인데, 이들은 자연과학에 근거한 유물론(唯物論)의 입장에 서서 신과 종 교의 절대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를 선언한다. 하지만 세계적인 종교학자이자 종교비평가인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1944~)은, 이들 모두 오로지 근본주의가 만들어낸 신관(神觀)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현재 세계종교를 대표하는 기독교의(혹은 이슬 람교의) 신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저서가 대중의 폭 넓은 지지를 받으며 널리 읽힌다는 사실은, 그 이면(裏面)을 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신 개념에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 에 분개(憤慨)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신[신관]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의 일반 상식과는 크게 다르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신론(無神論)은 말 그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어느 특정 한 신 개념을 부정하는 입장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도와 무슬림도 초창기에는 다른 종교인들에게 무 신론자로 불렸다” )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초기 기독교도와 무슬림들이 “신의 실재(實在)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 개념이 너무 이질적이라서 신성 모독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3)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믿고 있는 신[신의 개념]은, 3,000년 신
의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온 수많은 신 개념 중 하나에 불과 )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면서도 우리는 과거에도 언제나 지금 우 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신에 관해 생각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신에 관해 말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구에서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물론이고 다른 주요 종교 전통들도 신(신성)에 관해 신중하게 말을 아꼈다 )고 한다. 실제로 고 래의 ‘영원의 철학’에서는 “궁극의 실재(實在)는 몇 마디 교리로 정리 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완전히 초월적인 실재” )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영원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세계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 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ㆍ인간관ㆍ윤리관’으로서, 이들 모든 종교 적 지식이나 원리들이 전제하고 있는 유일하면서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한다.” ) 즉 영원의 철학은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승, 철학자, 사색 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세계관ㆍ종교관이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용
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이다. 실제로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는 자신 의 저서 The Perennial Philosophy )에서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 이라는 말을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
1716)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10) 하지만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 중세 때부터 이탈
리아 구약성경학자 아고스티노 스테우코(Agostino Steuco)가 자신의 저서 De perenni philosophia(1540)에서-표제에도 나와 있듯이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이후 라이프니츠가 영원의 철학을 ‘역사를 초월 해서 전승되는 형이상학적 근본진리’라는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하면 서 회자(膾炙)되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와서는 헉슬리에 의해 영어권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통합심리학자이자 세계철학자 켄 월버(Ken Wilber, 1949~)가 ‘세계의 위대한 영적 스 승, 철학자, 사색가들이 채택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언급하고 ), 자 신의 통합사상이 이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또 다시 전(全)세계 학계와 일반 대중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
이러한 “영원의 철학의 원리는 세계 모든 지역의 원시 종족들이 갖고
있는 전승된 지혜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완전히 발달된 형태가 되면 모 든 고등 종교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고 한다. 소위 ‘성자(聖者)’나 ‘예언자(豫言者)’, 혹은 ‘현자(賢者)’나 ‘깨달은 자[覺者]’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직접적으로 ‘영원의 철학’을 해명해 놓은 사람들이다.14)
따라서 그 골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그 영원의 철학의 신관(神觀)이 대순사 상의 상제관[신명관]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적시(摘示)하고자 한다. 먼 저, 영원의 철학과 대순사상의 신관이 기존 전통신학의 신관과 비교했 을 때 어떤 장점을 갖는가를 밝힌다. 또한 신관을 중심으로 영원의 철 학에서 철학자(성인, 현자)들이 정립한 주요 개념들을 살펴보고, 이를 중심으로 대순의 그것에 대비시킴으로써 대순사상의 범인류적 보편성, 초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대순의 상제관[신명관]은 기존의 수 많은 신관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온 인류의 영적 스승들이나 성인ㆍ현 자, 과학자ㆍ사상가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해 왔던 신관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대순사상이 기존 전통신학[신관]이 갖고 있던 딜레마를 해결 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신관의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
세계 고등종교들이 갖고 있는 여러 형태의 신론(神論) 중에서 그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대체로 ‘일신론(一神論, Monotheism)’ )과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그리고 ‘범재신론(汎在神論)’을 들 수 있 다. 여기서 초자연적 신관과 범신론적 신관, 즉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 관과 내재성을 강조하는 신관이 대립각(對立角)을 세워왔다. 초월신을 옹호하면 내재신을 포기하게 되고, 범신론적 내재신을 옹호하면 초월 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至難)한 장고(長考) 끝에 최근 많은 신학자들은 제3의 길인 ‘범재신론(汎在神論)’을 내세운다. 범재신론(Pa nentheism)이란 문자 그대로 “모든 것(汎)이 하느님(theos) 안에(en) 있다(在)” )는 관념으로, 인간이 신 안에 있고, 신 역시 인간 안에 있 다는 신관이다.
여타의 입장은 모두 ‘초월(超越)’과 ‘내재(內在)’ 중에서 양자택일(兩者擇一)할 수밖에 없는 일방성을 갖기 때문에 범재신론은 초월과 내 재를 동시에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범재신론은 범신 론과 유사해 보이지만, 범신론과 범재신론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또한 종래의 초월신관과는 엄연히 다르다. 범신론에서는 모든 것이 신이며, 신은 어디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그대로 곧 신이라 고 한다. 그러나 범재신론은 범신론과 달리 인간과 신, 혹은 세상과 신을 분간하며, 또 분간은 하지만 유일신(唯一神)이나 유신론(有神論, Theism)처럼 신과 인간, 혹은 신과 세상이 동떨어진 개별적 존재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신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를 합한 것이 신은 아니며, 신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범신론은 모든 것이 신(All is God)’이라는 입장이지만, 범 재신론은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All is in God)’고 한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의 신’은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이었지만, 오
늘날의 신학적 경향은 ‘철학자들의 다른 신’, 즉 범재신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17) 이것이 범재신론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의 초월성을 견지하면서도 세계 안에 내재해 있는 신성을 가장 잘 알맞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18)
이런 신학적 이론상의 범재신론이 실제적으로도 가능할까? ‘초월’과 ‘내재’의 동시성은 관념적, 당위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 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초월은 내재의 부정이며, 내재는 초월의 부정이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재신론은 신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며, 우리가 신에 대하여 느끼는 심리적 감수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것
17)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칼빈신학교 교수 존 쿠퍼(Cooper, John W.)는 그의 저서 철
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from Plato to the Present)에서 범재신론의 유구한 역사를 개관하고,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인 고 전적 유신론과 그것을 비교하고 있다. 이 책이 범재신론의 연원과 전개를 본격적으 로 다룬 최초의 영문서적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알프레드 노스 화 이트헤드와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필립 클레이튼, 존 폴킹혼 등과 같은 여러 현대 사상가들의 범재신론을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은 범재신론의 유구한 역사를 다룸으로써 그것이 영원의 철학의 전통에 부합하는 하나의 신관이 될 수 있 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서 범재신론 은 기독교 신플라톤주의 전통 가운데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 및 비 서구 종교 사상가들에게서도 발견된다.…이 다양성에 담긴 큰 의미는 범재신론이 세 계 종교들의 다원주의 가운데서 공통의 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류 지성 집단에서, 범재신론은 계몽주의에서 이신론이 획득했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국제 회의에 서 사용되는 영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범재신론은 세계 종교들 간의 대화상 주요 공용어가 되었다.”(존 쿠퍼,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김재영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pp.349-350) 비록 쿠퍼는 고전적 초월적 유신론의 입장에 서 서 범재신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신정론(Theodicy)에 대해서는 만족스러 운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쿠퍼는 범재신론의 다섯 가지 특징들을 확인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명시적 범재신론(explicit panentheism)과 암묵적 범재신론(implicit panentheism)의 구분, 인격적 범재신론(personnal panentheism)과 비인격적 혹은 존재의 근거 범재신론 (nonpersonnal or Ground-of-being panentheism)의 구분, 부분-전체의 범재신론 (part-whole panentheism)과 관계적 범재신론(relational panentheism), 의지적 범재 신론(voluntary panentheism)과 본성적 범재신론(natural panentheism, 자연적 범재
신론)의 구분, 그리고 고전적 (신적 결정론) 범재신론과 현대적 (협동적) 범재신론의 구분이다. 이처럼 범재신론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관을 하나의 수미일관한 체계로 정립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8) R.멜러트,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신학, 김상일 옮김 (서울: 지식산업사, 1989), pp. 64-65. “전통신학은 항상 이점에서 애매모호하였다. 신은 초월적이고, 자존적이고, 타계적이었다.…전통신학은 신이 제 자신으로 있는 존재라고 할 때에는 초월적이라 고 했다가, 신의 은총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내재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입장이 애매 모호했다. 초월적 신이 내재적이 되기 위해 어떻게 그 자리를 놓을 것이며, 왜 은총 이 어떤 사건에는 미치고 다른 사건에는 미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모 호하게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은 인간 스스로 신의 초월과 임재(臨在)를 동시에 체험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 그래서 “신의 심리적 초월(psychological transcendence) 및 인식론적 초월(epistemological transcendence)을 존재론적 초월 (ontological transcendence)로 오해하면 안 되는 것” )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한 영원의 철학의 입장은 무엇일까? 영원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신(神)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나[我]는 누구인가?”라는 질 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성인, 현자, 영적 스승, 과학자들의 답 이 영원의 철학이다. 그런데 신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곧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에 신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이렇듯 영원의 철학은 ‘신’과 ‘나’라는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중세의 신학자 “아우구스티
누스(Augustinus, 354~430)는 그의 고백록의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한 구절을 통해 자연세계를 연구해도 신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음 을 분명히 한다.” ) 또한 방대한 신학대전을 쓴 중세 후기의 신학자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는 “계시조차 신에 관해 말해줄 수 없었다. 사실 계시의 목적은 신의 불가지성(不可知性)을 깨 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인간의 최고의 지식은 우리가 신을 알지 못한 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이런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해, 영원의 철학은 “세상 속에 신이
계시다는 (가르침은) 중요하고 현실적이며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24) 했으며 신(신성)이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 존재 )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영원의 철학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양립한다는 범재신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신은 외재적ㆍ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로 상정 (想定)되지만, 동양에서 말하는 불성(佛性), 도(道)와 같은 존재는 내재 적이며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러나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26) 의 입장에서 보면, 궁극적 실재(實在)의 의미는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 않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인 신은 도 )나 불성(佛性), 혹 은 천(天)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28) 예컨대 “유교[맹자]의 천은 영지주 의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의미이다. 맹자가 ‘인성을 알면 천을 안다’고 말한 것처럼 영지주의에서도 ‘나를 알면 신을 아는 것’”29)이라고 하였다.
Ⅲ. 영원의 철학의 신관 : 포월적 유신론
영원의 철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 정신에 내재한 심층(深層) 구 조’30)로, 인간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신(神)을 만나고 이를 통해 보 편적인 진리와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영원의 철학은 영혼의 내부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외재하고 세상과 영혼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다른 것’, 즉 ‘하늘 나라’에 존재하는 사물의 영적인 뿌리를 아는 것이 필요”31)하다고 한다. 요컨대 “영원의 철학은 사물과 생명 과 영혼이 공존하는 다면적인 세계의 본질적인 신성한 실체(實體)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32)
영원철학에 따르면 세계의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종교들은 영원의
철학이 제안하는 보편적인 진리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
하나님이시라(처음에 도(道)가 이스되 도(道)가 하느님과 함게니 도(道)는 곳 하느 님이라.)”고 나와 있다. 이렇게 보면 서양 기독교의 신의 개념도 본래는 그리 간단치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도가의 도의 개념과 서양의 신 개념 사이에 간극 이 훨씬 작았을지도 모른다.
28) 티모시 프리크ㆍ피더 갠디, 앞의 책, p.4.
29) 같은 책, pp.4-5.
30) 이제 ‘심층(深層)을 보려는 경향’은 과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넓은 의미의 경험주 의란 일반적 의미에서의 [감각적ㆍ이지적ㆍ정신적] 체험을 뜻하지만, 반면에 좁은 의 미의 경험주의에서는 감각적 체험을 뜻한다.” “본질적으로 과학 그 자체 또는 과학적 방법은 올바른 앎의 세 요건[전범(典範), 체험, 반증 가능성]으로 구성되는데, 좁은 의 미의 과학에서는 감각적 체험에만 이 세 요건의 사용을 국한시키는데 비해, 넓은 의 미의 과학에서는 직접적인 체험, 증거, 자료이면 어느 것이나 모두 앎의 세 요건을 적 용한다.” 이 넓은 의미의 과학을 ‘심층과학’이라 부른다. 졸저, 앞의 책, p.153.
31) A. Huxley, op. cit., p.viii. 32) 같은 책, p.ix.
되고 적용된 결과로 나타난 모습이다. ) 이 영원의 철학(불멸의 철학) 의 핵심에는 네 가지 기본적인 가르침이 있다.
첫째, 물질과 개인화된 의식의 현상 세계-물건과 동물과 사
람과 신들까지 포함한 세계-는 거룩한 밑바닥(Divine Ground, 신성)의 나타남이다. 모든 부분적인 실재는 그 안에서 그 존재 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사람은 미루어 생각함으로 단순히 그 거룩한 밑바닥에 관 해서 알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또한 종잡을 수 없는 이성 보다는 높은 직접적인 직감으로 그 실존을 깨달을 수 있
다. 이 직접적인 지식이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을 연합한다. 셋째, 사람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진다. 현상적인 자기(ego)와 영원한 자아(Self), 그 자아는 속사람이요, 영이요, 혼속에 있는 신성의 불꽃이다. 사람은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그 영과 하나임을 알 수 있고,따라서 그 거룩한 밑바닥은 영과 같은 성질의 것이
다. ) 넷째, 사람의 땅 위의 살림은 오직 하나의 소원과 목적이 있을 뿐이다. 곧 자신이 자기의 자아와 하나님을 알아서 거룩한 밑바닥과 하나임을 아는 지식에 가는 것이다.35)
요컨대 ‘영원의 철학’의 사상적 기
저에는 근대 이전의 오랜 세월동안 서구 형이상학의 바탕이 된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 )이 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존재의 사다 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한 광 물계로부터 식물, 동물, 인간, 천사, 그리고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신(神) 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이 우주 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이한 차원의
<그림 1> 존재의 대사슬
하이어라키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림 1> ) 참조) 그래서 우주 만물은 근원적으로는 평등하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상대적인 차이ㆍ계층적 질서가 있다. 비교 종교학을 전공한 하버드대의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 교수는 그 의 저서 잃어버린 진리(Forgotten Truth)에서 세계의 주요 종교들 을 ‘존재와 앎의 계층(존재의 대사슬)’이라고 한 구절로 요약한다. 즉 ‘존재의 대사슬’은 위대한 전승 지혜(종교)들의 공통된 세계관이다. 존 재의 대사슬은 여러 개의 동심원과 비슷하게,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 원을 감싸고 포섭하는 ‘존재의 대둥지(존재의 대원환, Great Nest of Being)’라고 할 수 있다. 영원의 철학자들은 지난 3천여 년 동안 하이 어라키의 일반적 수준에 관해서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범문화적 일치를 보인다.
이러한 존재의 대둥지라는 존재론적 도식을 수용한다면, 더 이상 물 리학과 신학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하위 영역 의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상위 영역의 학문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위 영역의 학문[신학]을 하려면 하위 영역의 학문[물리학]은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신학은 하위 영역의 심리학, 생물학, 물리학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학과 물리학의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뜻이 된다. 그 러나 현실은 어떤가. 신학자들은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어떤 신학자들 은 활자 근본주의적(=성경 근본주의) 관점에서 검증된 과학에 대해 배 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 또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생물학자들은 그 러한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교인들을 비판하면서 역(逆)으로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영역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39)
하지만 <그림 1>에서 보듯이 상위영역의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
cism)’는 하위영역의 신학이나 심리학, 생물학, 물리학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한다.(혹은 초월하면서도 포함한다.) 그래서 윌버가 말하는 ‘엔벨러
프먼트(envelopment[transcend and include])’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포월(包越)’이라고도 번역하는데 ), “모든 발달적 진화가 하위를 감싸 면서 상위로 전개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언급했듯이 “신은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 재를 합한 것이 신은 아니며, 신은 그 이상”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 식과 앎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범재신론이 신에 대한 하나의 상징 이며, 우리가 신에 대하여 느끼는 심리적 감수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초월적’이라는 용어와 ‘내재적’이라는 용 어는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양립(兩立)이 어렵다고 하였다. 하지만 ‘포월(包越)’이라는 낱말은 “초월(越)하면서도 포함(包)한다”는 뜻을 갖기에, ‘내재적’이라는 용어와도 양립 가능하다.41) 이 점이 매 우 중요하다. 하지만 ‘포월’이 ‘초월’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하위를 감싼다”는 의미를 갖고는 있지만, 신이 만유(萬有)에 내재(內在)한다는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 따라서 영원의 철학의 신관은 우선 그 두드러진 특징을 강조해서 ‘포월적 유신론(包越的 有神論)’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지만, ‘내재신론(內在神論)’의 측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기존의 ‘유신론(有神論)’ 개념은 말 그대로 신의 존재성 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신과 세상, 신과 인간을 동떨어진 개별적 존 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41) 이러한 인식상의 어려움 때문에 실제 신의 존재 양태(신은 내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가 어떠한가를 떠나 일반적으로 ‘초월적 내재신(超越的 內在神)’ 혹은 ‘초월적 범신론(超越的 汎神論)’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의 철학에 따르면 신은 ‘초월적’이라기보다는 ‘포월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천주를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초월적 존재며 동시에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 안에 내재되어 살고 있는 존재로 이해”하여 동학의 천주관을 ‘초월적 내재론(超越的 內在論)’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문환, 「천주관: 영성과 창조성」, 동학의 정치철학, 모 시는사람들, 2003, p.17. 김영철, 「언어 표현 방식에서 본 초월성과 그 내재성의 원 리: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수운의 신관을 중심으로」, 동학학보 27 (2013), p.21에 서 재인용.
Ⅳ. 대순의 상제관과 신명관 : 포월적 유신론
(&포월적 내재신ㆍ이신론)
동양사상은 전반적으로 인격신(人格神)을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었
고, 반대로 서양사상의 전반적인 기류는 무(無)와 도(道), 리(理) 같은 개념은 비(非)인격적인 것으로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었다.44) 그런데 근대의 동학(東學)사상에서는 인격신과 비인격적인 ‘기(氣)’를 양립 (兩立)시킨다. 즉 인격신을 '천주(天主)’라 불렀으며, 비인격적인 기는 ‘지기(至氣)’라고 하여 천주와 함께 거론함으로써 범재신론적인 입장 을 보이고 있다.
천도에서 ‘천주’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전체전량을 현현하고
총섭하는 일체지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말로 ‘한울 님’이라고 부르게 된다.45) 그러므로 천도에서 천주라고 하는 것 은 우주만물에 내재하여 작용하며 총섭하는 ‘일체지신’이기 때 문에 우주만물은 ‘천주’ 자체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서도에서 말하는 천주는 이와는 달리 인격적인 유일신을 말하는 것으로 서 우리나라의 말로 ‘하나님’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서도에 서 천주라고 하는 것은 우주만물의 밖에 독존하여서 우주만물 을 자유자재로 창조하고 상벌을 능사로 하는 절대유일의 인격 적인 신을 말하는 것이다.46)
44) 김상일, 앞의 책, p.17.
45) “천도교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신의 명칭 ‘한울님’은 1920년부터 사용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1959년까지는 ‘하느님’으로도 사용했는데, 그 뒤 천도교에서는 ‘한울 님’으로 통일, 지금까지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같은 책, p.66.) 그런 데 위와 같은 이해를 동학에서 최종적으로 정립한 신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상 일은 그의 저작 수운과 화이트헤드 제2장 「경운동 주변의 신관논쟁」(pp.59-88)에 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1998년부터 있었던 천도교의 ‘인내천’ 교리와 ‘한울님’이라는 단어에 대한 동학 측의 반발과 이에 대한 천도교 측의 반론 등을 구 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위의 천도교경전요해를 신관에 대한 동학(천도교)의 최종적 인 입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46) 김월해, 천도교경전요해(天道敎經典要解): 논학문편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1982), p.76.
즉 천도교와 서학에서 말하는 ‘천주’의 차이는 그 개념에서 크게 다 르다. ) 위에 따르면 천도교의 ‘천주’는 한울님 자체가 진화 발전한 것 이고, 서학의 천주는 우주의 주인으로서 인격적인 신이 우주만물을 창 조했다는 창조설이다. 따라서 ‘천주(天主)’의 ‘주’ 자를 서학에서는 ‘주인 (主人)’의 ‘주’자로 해석하지만, 천도에서는 존칭하는 말로서 우리말로 ‘님’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 천도교에서 천주를 우주의 전체량이라 한 것이라든지 일체지신이라고 한 것은 ‘범재신론’ 과 먼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천도교는 ‘한울님’을 서양의 범신론보다 는 많이 인격화해 놓고 있다. 이것은 인격적 존칭어 ‘님’을 사용하고 있 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수운의 이러한 신관은 서양의 기독교에서도, 그 리고 동양의 유교나 불교 그리고 도가사상에서도 모두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전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비인격적이고, 후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너무 인격적이기 때문이다.49) 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리(理)는 통합적으로 태극(太極)이라고 부
르며, 이 태극이 정신적 실재임을 말할 때 ‘상제(上帝)’라고 한다.
우주를 형성하는 생성 원리로서의 태극이 자기자각성 내지
자기지각을 가지는 정신적 실재임을 뜻할 때, 이를 ‘상제(上帝)’
라고 부른다. 즉 태극은 우주적 근원의 능동성과 활동성의 측면 을 칭하는 것이고, 상제는 그 근원의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자 각성 )과 주재성의 측면을 칭하는 것이다.…이는 결국 고대에 상제로 칭하던 바로 그 존재를 신유교에서 리(理)나 태극으로 칭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 …(또한) 인간 안에 내재된 본성인 태극이 단지 우주 발생 근거로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개체 안에서 그 자신의 허령불매한 자기자각성을 발휘하면, 그 것이 바로 각자의 마음[心]이다. 따라서 태극의 발현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곧 우주 원리를 자각하는 허령불매한 상제와 근 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
전경에서도 “아무리 높은 이치도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의 표현 으로 나온다. 일용사물(日用事物)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라고 하여 무극과 태극에서 우주 이치의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세상만물 존 재의 근원과 속성을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무극은 만물을 초월하는 근원적 측면으로써 파악되고 ), 태극은 만물에 내재 하는 원리적 측면으로서, 양자(兩者)는 서로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이에 따라 박재현은 “대순사상에서의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상제 역 시 태극과 무극의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55)이 라고 하면서, “현상계를 초월(超越)해 있으면서도 현상계에 태극의 원 리를 직접 쓰셔서 천지공사를 통해 개입(介入)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56)고 하였다. 이어서 “초월자(超越者), 절대자(絶對者), 일자(一者)의 논리로 파악되는 무극(無極)과 내재자(內在者), 상대 자(相對者), 다자(多者)의 논리로 파악되는 태극(太極)은 둘 다 모두 궁극적 이치 또는 존재가 가지는 속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며 이 양쪽 속성이 동시에 긍정57)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양쪽 속성 이 어떠한 원리로 인해 동시에 긍정될 수 있는가? 이는 매우 어려운 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식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 영원 히 알 수 없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한다.
56) 같은 글, p.465. “이는 최수운이 하느님을 감각적, 이성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기연 (其然)을 통해서도, 초감각적, 초이성적 사유의 영역인 불연(不然)을 통해서도 파악될 수 있다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57) 주지하듯이 “漢儒의 경우 太極을 天, 元氣 등 實在(實物)의 뜻으로 해석하였었고, 그 후 王弼이 太極을 無稱之稱의 의미로 해석하여 太極을 道家의 無 개념 즉 空靈處로 해 석하였었다. 그런데 周濂溪는 無極而太極이라고 함으로써…無極이 單純 無가 아님을 또 有가 單純 實在의 개념이 아님을 암시”한다.(류인희, 주자철학과 종교철학, 서울: 범학사, 1980, p.92) 그리고 주자는 “無極而太極에 있어서 自無極而爲太極이라고 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며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무형이유리(無形而有理)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류승국은 “儒學思想的 입장에서 볼 때에, 有生於無하는 生成發展論을 취하지 않으므로 無極과 太極을 둘로 보지 않고 동일한 자의 양면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 다”고 하였다. 류승국, 동양철학 연구 (서울: 동방학술연구원, 1988), pp.188-189.
이에 대한 대순 사상의 견해는 어떠한가? 우선, 전경(典經)에 나타 난 신적(神的) 존재(存在)는 크게 ① 신(神), ② 신명(神明), ③ 신장
(神將) ④ 정령(精靈)적인 존재들이다. ) 첫째, ‘신(神)’에는 문명신(文明神) ), 도통신(道通神) ), 황천신(黃泉
神) ), 중천신(中天神) ), 선령신(先靈
神) ), 지방신(地方神)65), 황극신(皇極
神)66), 아표신(餓莩神) ) 등이 있다.
둘째, ‘신명(神明)’은 ‘신(神)’과 뚜
렷이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그 용례는 “범위상의 차이로써, 신명은 일반적이 고 포괄적 개념인데 비하여 신은 기 능적, 세부적, 구체적으로” ) 쓰인다. 따라서 황천신이나 중천신, 선령신처 럼 사람이 죽으면 직접 그 신(神)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하지만 신명은 그 역할이나 임무가 공적(公的), 집단적인 성향을 띄기 때문에 앞의 문명신, 도통신, 황극신 등은 오히려 신명적(神明的) 성격이 훨씬 강하 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신명을 ‘천지신명(天地神明)’이라고 부르는데,
“천(天)과 지(地) 사이의 모든 신적(神的) 존재(存在:spiritual benig)를 신명으로 인정하는 것” )이다. 즉 신명이라는 용어는 ‘인간’과 대칭적 으로 사용되는 총체적인 개념으로서 다분히 인격화(人格化)된 것으로 보인다. 전경에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의 감 동에 인함이나…” )와 같이 신명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간 의 심정을 헤아려 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을 소유했기 때문이다.71)
셋째, 신명 외에 신장이 있다. 신장도 신명과 같이 사람의 성질을 지 니지만, 맡은 바 직능(職能)이 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 장은 크게 우내(宇內)의 신장, 이십팔수의 신장과 주(宙)의 신장, 이십 사절의 신장으로 나눠진다.72) 이렇듯 신(神), 신명(神明), 신장(神將)이 인격성을 띠는 까닭은 무엇
인가? 언급했듯이 신(神)의 전단계가 바로 인간(人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순의 신명관(神明觀) 자체가 다분히 인격적(人格的)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신, 신명, 신장 등이 모두 ‘인격성(人格性)’을 전 제로 한다. ) 전경에서는 “사람에게 혼과 백이 있나니 사람이 죽으 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어 후손들의 제사를 받다가 사대를 넘 긴 후로 영도 되고 선도 되니라. 백은 땅으로 돌아가서 사대를 지나면 귀가 되니라.” )고 한다.(<그림 2> 참조)
그리고 우(宇ㆍ자연)안에는 정(精)이 있다. 이는 자연물이나 자연현 상과 결합한 정령(精靈)적인 존재들이다. 신이나 신명, 신장이 인격적 (人格的)인데 비해, 이 정(精)은 어떤 존재의 본질을 가리킨다. 보통 ‘정기(精氣)’라고 말할 때의 ‘기(氣)’와 같은 것이다. 주지하듯이 정기 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정기가 모여서 뭉치 면 모든 사사만물[事事物物]이 생성(生成)되고 흩어지면 소멸된다. 하 지만 대순사상에서는 그 생성소멸의 조화가 정기자체에 의하지 않고 구천상제에 따른다고 본다.75) 이상의 상제와 신(신명), 신장, 정(精) 등의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그림 3> 참조)
이처럼 대순에서 말하는 신명들은 타(他) 종교에서 믿고 있는 신들 이나 하나님과 같이 인간이나 사물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존재가 아 니다. 그리고 상제의 주관아래에 있는 신명들은 천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대순의 신명은 어느 곳에도 있기에 범재적(汎在的)이고, 어 떤 것 속에도 있기에 내재적(內在的)이다.76)
또한 윤용복은 “대순사상에서는 다양한 신명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의 중추(中樞), 드나드는 문,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라고 하면서, “말을 바꾸면 인 간은 심적(心的)존재로서 ‘신(神)’과 상통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요컨대 두 구절은 사람의 본수(本隨)를 심으로 보고 그 심이 신에 의해서 존립함으로써 인간과 신은 ‘상통’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일약하면 인간은 신적(神的) 존재”이며, “이 단정의 역(逆)은 전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일호, 앞의 글, pp.27-28.
75) 장병길, 앞의 책, pp.82-83. 장병길은 상제와 신(신명), 신장, 정(精) 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전경에 보이는 신명들은 초자연적이고 독립된 개체적 존재 이어서 일반적인 사람과는 뚜렷하게 다르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 고 있다는 점에서 인격적이며, 강력한 힘과 자유로운 의지를 소유한다. 요컨대 모습 을 갖추어 신체나 마음에서 매우 사람을 닮고, 특히 고유명사를 가진 초인간적인 존 재가 된다. 그러하나 신명들은 이상의 세 가지 특징을 지니면서도 격위(格位)에서 상제의 그것보다는 얕다. 그리고 또 신명보다 한층 더 얕은 신장(神將)들도 있고, 자 연물이나 자연현상과 결합한 정령(精靈)적인 존재들이 있다.” 같은 책, p.76.
76) 장병길, 대순진리의 강화Ⅱ(서울: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89), pp.160-161. “상제 의 주관아래 있으면서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하나의 신명은 다른 신명의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능력을 가지는 독존적(獨存的)인 존재이다. …이 사실은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이 모든 역할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그 리고 설사 상제의 주관 아래에 있다고 하더라도 상제는 인간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내 리려면, 상제께서 직접 그것을 내리지 않고, 문명신을 통하게 되는 것이다.…또 지난 날에는 지방의 신명들이 자기 지방에만 머물고, 그곳에서 활동하던 것을 상제에 의해 서 자기 지방을 떠나서 다른 지방과 교류하게 되었다.” 같은 책, p.161.
있지만 그 이외에 또 다른 우주적 규범도 인식하고 있는 것” )으로 본다. 그런데 우주적 규범을 인식하면서 도 신의 존재를 동시에 믿고 있는 종교 들의 경우에 신들은 대부분 그 규범에 예속되어 있는데 반하여, 기독교를 비롯 한 유일신 종교들의 경우에는 그러한 우 주적 규범보다는 유일신에 의해 모든 것 이 결정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
<그림 3> 포월적ㆍ내재적 관계
다. 그러나 “대순사상에서 상제는 그러 한 우주적 규범[도수]도 초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으며, ) 상제께서 삼계의 대권을 쥐고 있는 지고적(至高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 할 아래 있는 신명에게도 예를 다한다(갖춘다)고 하는 특징도 있다.”79) 고 지적한다.
이렇듯 대순사상의 신 관념에는 궁극적 실재의 인격적 요소가 비인 격적 요소보다 우위에 있다.80) 그러면서도 비인격적 실재로서의 천지 의 도수를 인정한다. 다만, 상제는 상제의 권능으로 천지도수를 재배 치한다는 특이성을 지닌다. 이런 점은 지금까지의 여느 다른 종교에서 는 찾아 볼 수 없는 대순 신관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시 말해 ‘천지공사(天地公事)’와 ‘운수(運數)’가 함께 언급된다.
신원일이 개벽공사를 빨리 행하시기를 상제께 간청하니라. 상
제께서 “인사는 기회가 있으며 천시는 때가 있으니 그 기회와 때를 기다릴 것이니 이제 기회와 천시를 억지로 쓰면 그것은 천 하에 재화를 끼치게 될 뿐이며 억조의 생명을 억지로 앗아가는 일이 되리라. 어찌 차마 행할 바이냐”고 말씀하셨으되 원일이 “방금 천하가 무도하여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우니 속히 이를 잔 멸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주시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말하면서 간청하니 상제께서 심히 괴로워 하셨도다. )
이와 같은 상황은 기존의 초월적 유신론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 려운 것이다. 이 경우에 상제는 초월적 존재인가? 아니면 내재적 존재 인가? 엄밀히 말하면 ‘초월적(超越的)’이면서도 ‘내재적(內在的)’이고, 또 한 ‘이신론적(理神論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신론(理神論, deism)이란 신이 “천지창조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창조행위 후에는 인 간세계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중지하고 ), 자연에 내재하는 합리적 법 에 의해서만 우주를 통치하는 것” )으로서의 신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 는 용어다. 그 이전의-인간의 공과(功過)를 따지며 상벌(賞罰)을 주고 널리 만물의 섭리를 지배한다는-인격신(人格神)에 대한 신앙에 반(反) 하는 것이다.
물론 상제께서는 천지 화생(化生) 후(後) 일체의 개입[천지공정을 수 행(遂行)]을 중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순의 신관은 이신론적이 면서도 초월적인 것이다. 초월적인 신[상제]의 인세(人世)에의 강세(降
世)와 천시(天時)에 따른 천지공사(개벽공사)의 수행은 일찍이 그 어떤 종교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 바로 이런 점에서 대순 의 신관[상제관]은 그 이전의 어떤 신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이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영원의 철학의 신관을 ‘포월적 유신론’으로 규정지었지만, 대순의 신관은 기존의 유신론이나 초월신론이 포괄할 수 없는 ‘이신론(理神論, included deism)’적 측면 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 이로써 대순의 신관은 초월적ㆍ인격적이 며 동시에 내재적ㆍ범신적이고, 또 범재적, 이신론적이라고 할 수 있기 에, 기존의 대표적인 신관을 모두 아우른다는 특징을 갖는다.
Ⅴ. 존재와 앎[신관]의 수준
고대의 모든 종교들은 영원의 철학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영원
의 철학은 “모든 인간, 물건, 경험 하나하나가 이 세계보다 오래가는 신성한 실재(實在)를 복제한 것” )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신성한 실재를 복제한 인간과 사물, 경험은 무엇이 어떻게 서로 다른 것일까? 윌버에 따르면 “전승 지혜 )에서의 영원의 철학적 핵심은 인식론적 다원주의의 존재의 대사슬과 그 사슬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확신 에 있다.(모든 실재는 등급화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실재에 대한 인 지(認知)도 그렇다.) 즉, 존재와 앎 모두에 수준이 있다는 것” )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미 1백여 년 전 그의 저작 종교적 체 험의 다양성에서 우리의 일상 의식이라는 것이 아주 특별한 의식 상 태라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의식과는 다른 의 식상태를 변성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는 종교인들은 때때로 특별한 방 식으로 진리를 보며, 신비적 정신상태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 고 깨닫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종교인들은 한결같지는 않지만 때때로 특별한 방식으로 진리
를 본다고 주장해왔다. 그 방식은 신비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 내가 어떤 정신상태를 신비적인 것으로 분류할 때 사용하는 표시 중 가장 편리한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이 정신상태의 주 체는 즉각적으로 그러한 신비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 경험에 대한 타당한 보고가 말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 한다. 이것은 신비적 정신상태의 특징이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기인한다.…어느 누구도 이러한 신비적 상태의 특질이나 가치 속에 있는 그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명확하게 깨닫게 할 수는 없다.90) 영원의 철학 또는 위대한 전승 지혜의 전체적인 요점을 추려 본다
면, ‘마음의 눈(심안)’을 넘어서는 영의 눈(영안)에 의해 드러나는 발 달의 더 높은 양태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합리성’ 을 넘어서는 ‘정관[명상]’에 의해 드러나는 발달의 더 높은 양태가 있 다는 것이다. ) 합리성을 넘어서는 정관[명상]에 의해 드러나는 신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상의 위대한 성인과 현자들에 따르면, 신은 시공(時空)과
물질 영역을 초월한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일정한 시간이나 공간, 가 시적인 물질 영역에서 찾지 않는다. 신을 발견하려면, 심오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가능한데, 과학에서조차 아직 탐구하지 못한 마음속 깊은 곳을 탐색해야 한다. ) “신과 결합하는 앎은 ‘망령된 견해를 쉬는’ 사 람에게만 가능” )하기 때문이다. 즉 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접근법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해 나가고 신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 나가려면 최소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혹은 자신이 믿는 신과의 대화)를 다양하게 시도해야만 한다. ) 신ㆍ천국ㆍ 지옥ㆍ악마ㆍ육체도 그 자체의 존재와 그대 내면에서의 나타남이 아니 라면, 그대 안에서나 그대에 의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 화이트 헤드의 용어로, “사실체(actual entities)는 사실체가 느끼는 바로 그것 이다.(An actual entity is what it feels)” ) 때문에 “실재의 본질은 분명한 영적 지각을 통해서 알려져야” ) 한다. 학식이 높은 사람을 통 해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영적 지각에 의해 실재의 본질이 인식된다는 점에서 보면, “의식 수준에 따라서 어떤 영적인(명상적인, 변형된) 의식의 상태를 해 석할 것”98)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윌버는 이 의식의 수준을 무 지개 색깔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고 한다. 또 이것은 여러 전통적인 지혜들에 있어서 공통으로 경험하는 사실99)임을 강조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얗게 밝게 빛나는 구름을 보는 절정 체험을 했다고 하자. 그 구름이 어떤 때는 사람 모습처럼 또는 빛으로 된 존재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자기가 그 빛 속으로 들 어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무한한 사랑과 끝없는 환희를 느 꼈다고 해 보자. 그런데 그 사람이 개신교인(改新敎人)이라면 … 그는 분명히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서 이 체험을 설명할 것 이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색깔의) 레드 높이에 있다면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빵과 물고기의 숫자를 늘렸던 마법적인 예수를 볼 것이다. 엠버 높이에 있다면 영원한 법을 주는 자, 신화와 교리를 믿고 선택한 백성들에게 내린 율법과 계명과 언약을 따르는 사람 그리고 단 하나의 진 실한 책(성경)을 믿는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는 자로서의 예수를 볼 것이다. 오렌지 높이에 있다면 이 사람은 보편적인 박애주의 자, 그러면서도 신적인 존재, 세계중심적인 사랑과 도덕을 가르 치는 자,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번 생애에 어느 정도 구원을 가져다주는 자로서의 예수를 볼 것이다. 그린 높이 에 있다면 이 사람이 보게 될 예수의 모습은 많은 이들 중에 하나, 똑 같이 타당한 여러 영적인 스승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 다. … 만약에 이 사람이 터콰이즈(청록색) 높이로 올라가면 예 수를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동일한 그리스도-의식의 한 현시(顯示)로 볼 것이다. … 바이올
다.” (같은 책, p.128.) 따라서 “영원의 철학자가 말하듯이 “신이 스스로 나타나고 그대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라, 어떤 외적 증거를 통해 신을 찾거나 알고자 한다면, 지금이든 나중이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같은 책, p.130)
98) Ken Wilber, The Integral Vis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to the Revolutionary Integral Approach to Life, God, the Universe, and Everything (Boston: Shambhala, 2007), p.142.
99) 같은 책, p.114.
렛(보랏빛)과 울트라바이올렛(자외선) 높이에서는 그리스도-의 식을 초월적이고 무한한 것의 상징, 자아 없는 참자아의 상징, 예수와 당신과 내 안에 있는[범신론적, 내재적-필자 註] 신적인 의식의 상징,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하는 빛과 사랑의 상징, 시 간의 흐름과 스스로 축소된 사랑 없는 에고의 죽음을 넘어 부 활한 생명의 상징, 죽음과 고통과 공간과 시간과 눈물과 두려움 을 넘어가는 운명이 있음을 드러낸 존재의 상징으로 볼 것이
다. )(<그림 4> 참조)
요컨대 ‘하나님 왕국에 도달한다’는 말의 실제적인 뜻 울트라 바이올렛
은 ‘더 높은 의식 수준에 오른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영 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의식이 변 화하면 거기에 따라 하나님[神觀]도 변하기 때문이
다. ) 이를 테면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보통 그린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는 인류 역사상 등
오렌지 장했던 많은 빛의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이다. 다만 그는 신과 하나됨의 길로 안내하는 안내자였을 뿐이다. ) 그 엠버
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거듭남을 체험했다’고 하는 근본
레드
주의자(원리주의)들과 복음주의자들의 경우 자기중심적이
거나 자기 종족(種族) 중심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상태 앎[신관]의 수준(<그림 4> 의식과)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오직 예수만이 하나의 참된 길이다. 더 욱 더 나쁜 것은 그들에게는 확실한 사랑의 상태 체험이라는 것이 실제 적으로는 자신들의 자기 종족 중심적인 성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103)
이처럼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체험에 바탕을 두어야” ) 하지
만, 의식 수준에 따라서 그 체험을 설명하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원의 철학은 “이론에서 실제로, 유일 한 신에 대한 추론적인 지식에서 직접적인 친밀함으로 나아간다면, 일
신교(一神敎)란 독단적인 마음(singleness of heart)에만 존재할 수 있다” )고 한다. 즉 “앎이란 아는 자 안에서 아는 자의 형식(mode) 에 따라 존재한다. 인식자의 정신이 다중적(多重的)이면 직접적인 경 험을 통해 그가 알게 되는 우주는 다신적(多神的)” )이라고 한다. 앎이란 인식자의 정신적 수준에 따라 그 습득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사실상 체험에는 감각적 체험, 이지적 체험(심적, 정신적 체험), 영적 체험이 있다. 바꿔 말하면 미세한 사물에서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 지, 그리고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적 영성에 이르는 영역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세 가지의 눈이 있다. 그 세 가지 눈이란 육체적인 감각이나 과학기술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는 ‘감각의 눈’, 이성과 논리로 대상을 인식하는 ‘이성의 눈’, 수행이나 명상으로 종교적인 영역을 체험하는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눈(육안)에 의해 알려진 증거 가 있고, 마음의 눈(심안)에 의해 알려진 증거가 있고, 관조의 눈(영 안)에 의해 알게 된 증거가 있는 것이다.107)
물론, 하나의 대상을 알기 위해서 세 가지 다른 눈은 적절하게 균
형을 이뤄야 한다. ) 그러나 우리에게 심층적(深層的)인 깨달음을 던지는 공안(公案)은 분명 (특히 현대인들이 굳게 닫고 있는) 관조의 눈에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데 있어서는 관조 의 눈이 절대적이며 수련이나 수도, 명상 등으로 종교적인 영역을 체 험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다시 말해 영원의 철학의 일차적인 관심은 세계의 본질적인 하나의
신성한 실체(實體)에 있지만, 이 실체는 “일정한 조건들, 즉 사랑을 행 하고 마음을 순후하게 하고 정신을 고요하게 침묵시키기로 스스로 선 택한 사람들[=수련(discipline)]에 의해서만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포착”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신이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며 오직 헌신적(獻身的)인 실천(實踐)을 통해서 만 신을 알 수 있다” )고 믿었다. 하지만 수련(discipline)이나 수도 (修道)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많은 현대인들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신성한 실재(實在)와 합일(合一)할 수 있는 중 요한 경험의 기회를 잃고 있다.
Ⅵ. 결론
세계의 고등종교들이 갖고 있는 대표적인 신관으로는 유일신론과
범신론, 그리고 범재신론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초월신관을 옹호하 면 내재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내재신을 옹호하면 초월신 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전통신학은 대체로 초월적 유신론의 입장에서 신(신성)을 설명하려 했으나, ‘신의 은총[내 재적]’에 관해서는 마땅한 해명을 하지 못하고 항상 애매모호한 입장 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근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초월’과 ‘내재’ 를 동시에 끌어안는 범재신론의 입장을 지지한다. 언급했듯이, 범재신 론은 “인간이 신 안에 있고, 신 역시 인간 안에 있다”는 신관으로서 신의 초월과 내재의 동시성을 가장 잘 알맞게 설명할 수 있다는 특징 과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초월은 곧 내재의 부정이며, 내재는 곧 초 월의 부정이기 때문에 범재신론은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실제적(實際的)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범재신론은 “신에 대한 하나 의 상징”일 뿐이며, “우리가 신에 대하여 느끼는 심리적 감수성을 표 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영원의 철학에서는 ‘엔벨러프먼트(envelopment, 우리말로 ‘포월 (包越)’이라고도 번역)’라는 개념을 통해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양립 가 능하다고 본다. 즉 ‘포월(包越)’이라는 낱말은 “초월(越)하면서도 포함(包) 한다”는 뜻을 갖기에, ‘초월성’과 ‘내재성’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월’ 개념은 영원의 철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존재의 대둥지(존재의 대사슬)’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알려진 바대로 영원의 철학자들은 지난 3천여 년 동안 대둥지의(여러 차원의 하이어라키의) 일반적 수준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대순사상 역시 이러한 존재의 대둥지와 일치하는 세계관을 보이고 있으므로 대순사상의 신 관(상제관, 신명관)은 영원의 철학의 그것과 일치함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영원의 철학의 신관은 그 두드러진 특징을 함축한다면 ‘포월적 유신론(包越的 有神論)’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대순의 신관 역시 ‘포월적 유신론’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요컨대, 영원의 철 학의 견지(見地)에서 대순의 ‘상제(관)’는 ‘포월신(관)’이다. 하지만 대 순의 신관에는 (특정 개념의 규정이 갖는 한계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 는) 내재신론(內在神論)이나 이신론적(理神論的) 측면 또한 강하게 나 타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로 영원의 철학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불교, 도교를
망라하는 세계의 위대한 전승(傳承) 지혜의 핵심이며, 여러 위대한 사 상가, 철학자, 과학자들의 사고(思考)의 중핵(中核)을 차지한다. 따라 서 영원의 철학은 성인ㆍ현자들이 이미 검증했던 공통된 세계관인 까 닭에 해체될 수 없는 진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따라서 영원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은 인류가 수천년 동안 축적해 온 지적(知的) 자산(資産) 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원의 철학의 결론은 세상 속에 신(신성)이 계시기에 내재적이지만 동시에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표, 그의 존재의 목적은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신성을 사랑하고 알며 그것과 결합하는 것” )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수련(修鍊)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타(他)종교와 달리 실천수행을 필수(必修)로 하는 대순사상은 현 시대 에 절대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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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View of the God in Daesoon Thoughts viewed from
Perennial Philosophy
Hoon Heo
Chungang University
We live in two giant pendulum in called ‘science’ and ‘religion’. But science and religion are contained in disparate information with each other, Those two is not easy to achieve convergence. But if you accept the ontological scheme of Great Chain of Being(存在의 大連鎖) in the Perennial philosophy(永遠의 哲學), Debate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is meaningless
‘Great Nest of Being(存在의 대둥지, Great Chain of Being)’ is similar to the multiple concentric circles, there are different dimension that the each top level to subsume surrounding the lower level. For example, upper zone ‘Mysticism(神秘主義)’ includes but transcends(or transcends but includes.) the sub-region theology, psychology, biology and physics.
The Perennial philosophy is the great spiritual teachers of the world, philosophers and thinkers have adopted a common worldview, a religious views. Philosophers of the perennial philosophy seem to match the cross-cultural almost unanimous about the general level of the 'Great Nest of Being' for the past 3,000 years.
The perennial philosophy made the conclusion that God exists in the world. Several types of view of God existing religions in the world have ‘Monotheism(一神論)’, ‘Pantheism(汎神論)’ and ‘Panentheism (汎在神論)’. Although traditionally the God of the philosophers is the classical Theism, theological trends of today it is moving in the direction of Panentheism. Panentheism see that god is immanent and transcendent. also Daesoon Thoughts is the position of the Panentheism. so this paper points out the fact that the view of God of the perennial philosophy is precisely consistent with the view of God of Daesoon Thoughts.
Wilber says ‘envelopment [transcend and include]’. The word translates as ‘powol(包越)’ in Korean. ‘Powol(包越)’ means that all the developmental evolution is to surround the sub-region developed into the higher realms.
View of the God in the perennial philosophy is ‘powol theism(包越的 有神論)’. but ‘powol immanent God(包越的 內在神論)’ rather than building regulations as ‘powol theism(包越的 有神論)’. It would have to be a more accurate representation of it. Because in the existing ‘theism(有神論)’ the god and humans are thought to exist apart.
However, Daesoon Thoughts are deemed to also recognize another universal laws. also Sangje(上帝, the Supreme God) is recognized as a cosmic existence that transcends the laws. This point, as the characteristics of the Daesoon Thoughts, In other religions can not be found.
Therefore, More specifically represent(More accurately represent),
Sangje of the Daesoon Thoughts can be described as ‘powol theism’ or ‘transcendental and included deism(包越的 理神論)’. Importantly, The idea of God can be captured directly by the discipline. In this sense, In terms of the other religions have no discipline law, the practice [discipline] of the Daesoon Thoughts required in the present age. It has the absoluteness.
Key words : View of God(神觀), Theism(有神論), Pantheism(汎神論), Panentheism(汎在神論), powol theism(包越的 有神論), transcendental and included deism(包越的 理神論)
◎ 투 고 일 : 2015년 5월 31일
◎ 심 사 기 간 : 2015년 7월 24일~8월 5일
◎ 게 재 확 정 일 : 2015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