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33] 예학의 성립과 당쟁의 심화 - 목포시민신문
[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33] 예학의 성립과 당쟁의 심화
목포시민신문
승인 2021.11.07
사대부 송시열 중심으로 예(禮) 빌미 허구헌 날 정쟁 일삼아
사계(沙溪) 김장생과 한강(寒岡) 정구 의해 조선조 예학 성립
예송(禮訟) 윤휴·허목과 송시열·송준길 사이 복재 대립 발단
[목포시민신문] 조선조 성리학의 융성기를 16세기 전후로 본다면 ‘예학시대(禮學時代)’는 17세기 전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조선조 예학(禮學)의 성립기를 성리학 융성기의 후반으로 보고 예학자(禮學者)의 생졸 연대로 예학시대를 추정해 본다면 임진왜란 이후부터 실학(實學)이 대두되기 이전 백여 년을 조선조의 예학기(禮學期)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의 흐름에서 오로지 이 시기를 가리켜 예학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이 시대 성리학자들 가운데 예학자가 배출되어 예(禮)를 왕성히 연구하고 정리하며 학파를 수립하였고, 예서(禮書)의 간행이 두드러졌으며, 예를 ‘붕당의 집권도구’로까지 이용한 데 있다. 도덕의식과 연결된 당시 사대부들의 예 의식이, 특히 정치 분야로 확산된 것 또한 이 예학시대의 독특한 현상이었다. 또한, 예를 바탕으로 한 사대부들의 정치 현안이 붕당 차원에서 예 문제로 논쟁을 하던 것이 예송(禮訟)이었다.
예학(禮學)의 출현은 조선조 유학의 한 특색이다. 근세유학의 변천과정을 보면 중국에서는 성리학, 심학(心學ㅡ양명학), 실학의 순서로 변천해온 데 대하여, 조선조는 성리학, 예학, 실학의 순서로 발달했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조에서는 양명학을 일반적으로 이단시하여 심학의 발달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조에서는 예학, 실학이 발달해가는 과정 그 안에서도 학문의 주된 흐름은 물론 성리학이었다.
조선조에 예학이 발달하고 나아가 예학시대를 설정할 수 있을 만큼 예학이 성행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성리학의 심화과정에서 예(禮)의 의식적·자율적인 준행(遵行)을 강조하는 추세로 나타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 기존의 사회질서는 물론 가치와 윤리의식이 혼란에 빠져 강상(綱常)의 재건이 필요해진 데에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과 한강(寒岡) 정구에 의해 조선조 예학이 성립된 이후 종전 경사(經史)에 포함되어 있던 예는 분리되어 예학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예학이 형성된 후 여러 학자가 계속하여 예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예학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예송(禮訟)은 바로 한강(寒岡) 계열의 윤휴·허목과 사계(沙溪) 계통의 송시열·송준길 사이의 복재(服制) 문제에 대한 대립에서 발단되었다. 유교의 예(禮) 가운데에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는 큰 비중을 지니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조에서는 상·제례(喪祭禮)를 특별히 중시하였는데, 예송은 이 상례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시작된 논쟁이다.
예학은 본래 성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리학에 대한 견해는 직접적으로 예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치었고, 예송 또한 예에 대한 견해의 차이와 당론(黨論)이 결합되어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 예학의 학통은 당론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예설(禮說)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으나 점차 당쟁적 감정으로 중상(中傷)을 주로 하니 조정은 갑자기 정권쟁탈의 싸움터로 변해갔다. 이로 말미암아 경신환국을 거쳐 노·소론이 분열하고, 송시열과 그 문인 윤증과의 반목으로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해지게 되었으며, 장희빈을 둘러싼 대립으로 기사환국과 갑술경화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경신환국 이후 서인들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었던 이이와 성혼은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자 문묘에서 출향되고,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등용되자 5년만에 복향되었다.
이처럼 좌전우전(左轉右轉)하던 정쟁의 여파로 우암 송시열과 백호 윤휴가 다 같이 참화를 당하였는데, 비록 화를 입은 직접 원인은 각각 다른 것이 있다 할지라도 상호 사이에 모함하는 감정의 소인은 다 같이 이 예송에서 움돋은 것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분쟁은 청의파와 훈척파의 반목에서 비롯하여, 박세채 등이 우암의 논의를 반대한 데서 뚜렷해지고 회니의 반목에서 격렬하게 되었다.
회니(懷尼)의 반목(反目)은 송시열과 그 문인 윤증과의 암투를 이르는 것이다. 즉 시열은 회덕(대덕군 회덕)에 살았고 증은 니산(논산군 노성)에 살았기 때문에 회니(懷尼)라 하는 것이다.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해지는 회니의 반목에 관한 시말은 이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윤선거의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 자는 길보(吉甫)이다. 대사간 윤황의 아들이며, 우계 성혼의 외손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거는 처자를 데리고 강화로 피난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구차하게 미복차림으로 탈출하였는데, 당시 선비들 사이에 미촌의 행동을 비난하는 자가 왕왕 있었다. 그래서 미촌은 이것을 일생의 괴한사(愧恨事)라 하여, 통렬히 자책하여 제수하는 관직을 일체 사절하고 오직 학문에 몰두하였었다.
서예가 남전(南田) 원중식 선생의 무신불립(無信不立) ㅡ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말.
선거는 일찍이 신독재 김집에게 배워 송시열·송준길과 더불어 친교가 깊었었다. 그런데 윤휴가 경전주해를 지어 학계에 문제를 일으키자, 그는 본래 윤휴와 친교가 깊고 또 그의 재학(才學)을 아껴, 윤휴를 변호하고 감싸며 도와주는 태도를 가졌다. 당시 학계나 사회의 정세로 보면 백호(白湖) 윤휴의 재명(才名)도 컸거니와, 미촌(美村) 윤선거의 명망과 세력은 실로 거대한 것이 있었다. 이때 만일 백호의 주장과 미촌의 원호(援護)를 이대로 방치하면 경전의 해석은 물론이요 배후의 정권 같은 것도 일변할 기세가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암은 분노하여 백호의 해독보다도 미촌의 해독이 크다며 비난 공격하였다. 우암은 미촌을 향해 백호와 절교할 것을 권하며, 동시에 사문난적(斯文亂賊)과 당여(黨與)가 되어 돕는다며 위협까지 가하였다. 그러나 미촌은 이 주해문제로는 백호와의 교제를 단절하지 않았다. 그 후 예송문제(禮訟問題)가 일어나자 미촌은 백호에게 글을 보내 심히 책망하였으나, 백호가 오연자시(傲然自是)하여 규계(規戒)를 듣지 않으므로 다시는 왕래도 하지 않았다. 후에 미촌이 죽자 백호가 제문을 지어 가지고 아들을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미촌의 아들 윤증은 이를 물리치지 않고 받았다.
윤증이 미촌의 연보를 편수하며, 일찍이 우암과 사제의 정의가 있으므로 박세채의 장문(狀文)을 얻어 가지고, 우암에게 미촌의 묘명(墓銘)을 청한 일이 있었다. 우암이 허락하고 그 묘명을 찬하였는데, 자신은 미촌의 학문이나 인격을 알 수 없고, 오직 박세채의 장문에 의거하여 찬술할 뿐,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태도를 보였으니, 대개 선거가 생전에 윤휴를 비호하고, 또 절교하지 않았다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지적하고 정면으로 그 그름을 말하는 것이 유명(幽明)의 정의(情義)에도 맞는 일이요, 또 그것이 군자의 마땅히 취할 바 태도이거늘, 40년 도의의 친우를 ‘나는 모르겠다’ ‘오직 박모의 말이 이와 같다’하는 것은 인정에 멀 뿐 아니라 또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윤증은 박세채와 여러 번 개찬을 청하였는데, 시열은 생색만 낼뿐, 개찬을 불허하였다. 이후부터 윤증이 밖으로는 사생(師生)의 예를 가지나, 안으로는 원수의 마음을 품어, 시열의 인격과 언행을 비난하고 헐뜯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유의서〉에서 시열이 회옹(晦翁ㅡ주자)의 도를 자임(自任)하나 주장이 너무 지나치고 자인(自引)이 너무 높아, 자기에 찬동하는 자는 좋아하나 자기에 반대하는 자는 배척하니 실덕(實德)이 부족하다는 것과, 시열이 퇴계를 강의준절처(剛毅峻截處)가 부족하다고 비평하나 자기는 너무 강준일변(剛峻一邊)에 치우친 것을 모르고, 또 자기의 강(剛)은 극기궁행(克己躬行)의 강이 아니요 이력복인(以力服人)의 강이어서 인애(仁愛)가 결여된 것을 자각치 못한다고 비난하고, 또다시 시열의 본원언행(本源言行)을 배척하되,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霸竝用)’이라 하였다.
윤증의 이 일은 처음에는 사서(私書) 왕복에서 나와, 사림의 논쟁이 되고 마지막에는 조정의 시비가 되어, 전국의 싸움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송시열을 옳게 여기는 자는 노론이 되고, 윤증을 옳게 여기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이후 노·소론의 당쟁이 날로 심하게 되어 조정은 편안할 날이 없고, 사습(士習)은 어그러져 그 폐단을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갑술경화’후의 노·소론의 충돌로는, 갑인 관유사건(館儒事件), 박세당 사변록 및 이경석 비문 문제, 나양좌와 김창협·창흡 형제의 논쟁, 최석정 예기류편 문제, 가례원류 사건, 병신처분 등이 있었다.
사대부 유자들이 민생을 보살피기 보다는 정권쟁탈에 눈이 어두워, 예(禮)를 빌미로 허구헌날 정쟁이 그치지 않은 그 한가운데 송시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4번째로, '반주자학적 학풍'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