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포누유 & 장 = 바티스트 프레소스
청도사 2018
Bonneuil Ando Jean Christophe-Baptiste Fressoz
L' Evenement Anthropocene - La Terre, L' Histoire Et Nous 2013, 2016
[번역] Shiori
Nosaka 편집: Atsushi Oshikawa 협력: Tsukahara Higashiware-Zaijo Masumi 기타
Sotei: Hisashi Takenaka
올해도 살고 있으나 코로나 판데믹은 한층 더 맞을 것 같지 않고 전세계 감염자는 8000만명을 돌파했고 죽은 사람은 170만명을 넘고 있다. 아직 느껴질 것이다. 1주일 전에는 남극 대륙의 캠프에도 감염이 있었고, 지구상의 6대륙이 모두 침식되었다. COVID19의 돌연변이도 두드러졌다. 아프리카 돌연변이 종은 또한 전염병 경로를 패시지합니다.
일반적으로 왠지 구미가 심하다. 여러 번 도시의 락 다운을 시도했지만, 공을 연주하지 않는다.
백신은 급피치로 개발되고 있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내춘 이후일 것이다. 치료제는 아직 없고, 면역형성의 실태조사도 늦어져 병원이나 간호사의 피폐가 심하다. 코로나형 RNA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감염증의 세계사」( 1655 밤 )도 언급하고 있듯이, 아마 몇 년이 걸린다.
그래도 힘든 일이었다. 감염자의 수가 감쇠하지 않는 한 학교도 일반 점포도 열 수 없다. 공원에도 이자카야에도 툭할 수 없고, 스포츠 대회는 배웅되고, 극장은 의자석을 2개 둔다. 이대로 바이러스 변이가 계속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가 무엇인가를 가만을 하고 있다. 그 뭔가 모르겠어요.
그런 가운데 일본은 무책에 가깝다. 아베도 가수도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우선주의와 포퓰리즘이기 때문에 PCR 검사나 의료 대책은 어색하고, 그 대신 아베노마스크·지원금·보조금을 뿌려, GOTO 캠페인이나 식사 할인 등으로 환심을 사, 계속 차를 탁해 왔다. 알기 쉬운 브로셔 하나, 만들지 않는다. ICT 시대의 최초의 바이러스·판데믹(일본에서는 에피데믹)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소프트나 앱도 개발되지 않는다. 차는 탁할 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기보다는 세계의 막힘을 상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세계의 코로나 감염자수(2020년 12월 24일 시점)
코로나 감염자 수 확대에 따라 Go To가 전국에서 정지 된
텔레비전 동 뉴스
프레드릭 제임슨
예엘 대학에서 아우에르바흐의 가오루를 받은 프랑스 문학 연구자. 저서 『미래의 고고학』에서는 고금 동서의 SF소설을 분석해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역할을 제기했다.
코로나 아키라가 세계 동시적인 공세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숙주(지구의 호스트)인 인간사회 쪽이 그러한 사태 악화를 촉진시킬 여지를 주고 있기 때문에, COVID19 자체의 행동이나 변이는, 21세기 의 호스트 세계사회의 행동의 반영 그 자체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 세상의 가치관이나 사회관이나 생활관에 결정적인 금이 들어간다.
어떤 금이냐는 것은 조제스크-레겐의 열역학적 경제분석 등이 그 상흔을 나타내고 있다. 수많은 지구 환경 위기의 데이터는 우주 쓰레기에서 해중 플라스틱 파편의 양에 이르기까지 거의 데이터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참상이 어떠한 것인지는 수치라도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런데도, 미체험한 유사 사태가 장기화해 온 것에 의해, 내일의 사회의 변경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느낄 것이다 부터, 어울려서 「뉴노멀」이란 바보 같은 것을 생각한다. 눈앞의 내일의 날들만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평시는 유사를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2021년이 되어, 바이러스 화에 의한 판데믹(혹은 지역적인 에피데믹)이 수개월 후에 수렴(종식)해도(도쿄 올림픽이 개최되려 중단되려고), 이러한 미체험한 신체적인 위험 일어나는 사태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사회의 존재를 순식간에 변모시키는 것이라는 것, 그러한 것이 반년도 1년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을 체험해 보면, 이 후의 세계나 사회 는 이전의 채로 좋은 것인지, 그런 회사의 나날에 돌아가 버려도 좋은 것인지, 지금까지는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도 되어 왔다. '평시 유사병'이라고도 하고 싶어지는 터무니없는 트라우마(PTSD)의 발생이다.
원래처럼 돌아가면 좋을까 하면, 좋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제1차 문명전쟁이라 불려야 할 걸프전쟁이나 그 후의 리먼 쇼크가 일어났을 때에, 무엇이 문제인지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전부터 말하자면 레이가노믹스나 새챠리즘의 진전이 일어나, 일본에서 말하면 일미 협의가 스스무나, 이것을 고이즈미 준이치로나 다케나카 평장이 추종했을 때, 「이것으로 좋을 리 없다」 라는 사태가 심하게 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보케했다. 아니면 시라를 오고 있었다. EU를 결속시킬지 분단시킬지에 가득 찬 몇 년 망치거나, 트럼프의 출현에 우왕좌왕하거나, 모리카케 문제로 차를 탁해 보거나, 그런 일 뿐이었다.
거기에 1년 이상에 걸친 감염 전선의 실황이다. 모두 소와 소셜 디스턴스를 취해, 텔레워크나 리모트 워크를 시작했다. 그중, 이것은 분명 일하는 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실감하기 시작해, 신축 주택이나 맨션 판매의 회사가 3DWK라고 하는 것처럼 리모트 워크 스페이스를 위한 「W」를 피처한 배치를 팔았다.
불안이 이런 정도로는 곤란하다. 지구 자체가 이상해지고 있는 것이며, 직장이 변경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지구'라는 거대한 샐러드볼이 위험한 것이다. 존 켈리는 기후변화와 감염증과 테러리즘을 대량파괴무기로 간주했지만 겨우 2014년이었다(켈리는 바이덴 정권의 브레인이 되었다). 너무 늦었다. '인신세'는 벌써 왔던 것이다.
조제스크-레겐
루마니아의 경제학자. 런던에서 수리 통계학의 창시자 칼 피어슨에게 사사.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고 수리경제학의 선구자로서 실적을 올렸다.
존 케리
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대통령 특사를 맡은 기후 문제로 지명됐다.
인신세(진신세이)는 새로운 개념이다. 2000년 2월 멕시코의 지구환경을 둘러싼 국제회의에서 파울 크루첸이 내놓은 지질연대를 위한 새로운 용어다.
크루첸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로 오존홀 연구 등으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지구 온난화와 온실 가스의 문제에 대한 많은 토론의 오피니언 리더입니다. '기후변화'(일본경제신문 출판) 등 베스트셀러도 있다.
그 크루첸이 21세기를 앞두고, 오늘 현재의 우리는 완신세(Holocen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신세」(Anthropocene=안트로포센 혹은 안트로포신)에 돌입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이 계기로, 어쨌든 「인신세」라는 견해가 화제가 되어 왔다.
기존의 지질연대학의 공식 견해에서는 현재 지구는 1만1500년 전에 시작된 신생대 4기의 '완신세'에 속한다. 우리 인류도 거기에 언제나 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크루첸은 완신세는 이미 마침표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업혁명 이후 지구는 새로운 지질연대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확실히 말하자면 1784년에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을 때부터 신생대 4기인 '인신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파울 크루첸
프론가스에 의한 오존층 파괴 연구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화학자.
생명의 역사는 38억년을 넘어왔다. 46억년의 지구사 중 해저에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당을 계기로, 생명은 그 후에 개전해 나가는 870만종을 향해 걸음을 시작해, 지질 연대에서 말하면 고생대(캠브리아기~데본 기~벨름기), 중세대(삼조기~쥬라기~백아기)를 걸고, 6500만년 전부터 신생대에 돌입해 오늘에 이르렀다.
신생대(Cenozoic era)는 전반의 제3기와 후반의 제4기로 나뉘어, 그 제4기가 260만년 정도 전부터 시작되어 인간을 출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4기는 계속 빙하 시대이지만, 전반의 갱신세와 후반=현재의 완신세(Holocene)는 한랭한 빙기와 약간 온난한 간빙기가 천천히 돌아오고 지금은 제4간 빙기가 계속된다 있다. 이전에는 오키세키라는 식으로도 불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제4기 완신세(제4간 빙기)에 있지만, 크루첸 등은 아니, 우리는 지금 제4기인 신세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질연대는 태양의 활동이나 거대운석의 낙하나 지구온도의 변화나 해양사정 등 지구의 안팎에 일어난 자연조건에 의해 스테이징되어 왔지만 '인신세' 라고 하는 제안에 의해, 우리는 유사 사상 처음으로 「문명이나 인위의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지질 연대」에 있다고 된다.
기온상승, 인플루엔자 유행, 오존홀 문제, 온실효과 가스 만연, 에이즈의 대유행, SARS, MARS, 코로나의 유행은 그러한 4기 마지막 지질연대의 헐떡임이 된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고도로 숙숙한 것 같은데 기아나 빈곤이 없어지지 않는 것도, 이 수십년의 인신세가 신자유주의, 금융공학의 유행, 머드머니의 광란, 넷 자본주의의 만연 등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질 시대를 나선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
미국 조사단이 작성.
10만년 단위의 기온과 인류사
완신세 사이, 기후가 현저하게 안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루첸의 경고 포함 제안은 반드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지질학자 안토니오 스토파니는 이미 1873년에 "인류는 새로운 지질학 변화를 띤 사람"(인류의 지질 시대)로 정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블라디미르 베네나츠키("생물 권'개념의 제창자)가 지구를 '생물지협화학(고오지미 케민르)의 순환계'로 본 것은 1920년대였다. 그 후에도 지구 환경의 변화를 우려하는 견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위적 지질연대에 이르렀다는 것, 그 증거는 더 이상 반증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고한 체계적 설명에 의해 논의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안트로포센」(인신세 )라고 불리는 것임을 선명하게 한 것은 크뤼젠이었다.
바로 브루노 라투르가 “인신세라는 개념은 근대와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대신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서도 철학적, 인류학적, 정치적 개념으로서 지금까지 없을 정도로 결의적 이다”라고 반응했다. 라투르는 인류사회를 '변화하는 작용점'이 만드는 액터 네트워크로 설명하려는 사회인류학자다.
사실, 인신세는 옛날부터 시작되었고, 다양한 인간 활동의 소산과 흔적이 지구 시스템의 기능에 장애를 줄 정도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그렇다면, 인신세는 유럽인이 미국 대륙을 정복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지질학자 시몬 루이스와 마크 마스리안은 미국 인디언의 인구 붕괴 조사를 토대로 제창했다. , 얀 자라셰비치는 인신세는 그러한 일이 여러 번 지구에 손상을 입힌 '층위적 구조'가 되어 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마 그랬던 것이다. 이하, 인신세보다 안트로포센이라고 말하는 쪽이 확실히 오기 때문에, 그렇게 쓰기로 하지만, 안트로포센은 매우 층위적(스트라티그래픽)에 지구를 침식해 온 것이다.
블라디미르 베네나츠키
광물학을 발단으로 지구화학, 생물지구화학, 방사선지질학, 수문지질학 등 모든 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출생.
브루노 라투르
과학과 기술의 고찰에서 출발하여 문화 인류학, 철학, 사회학, 지리학, 현대 미술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프랑스의 철학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는 논모더니즘의 사고를 제시하고 있다.
얀 자라셰비치
국제층서 위원회, 지질학자 그룹의 상위. "안트로포센"을 지구의 역사를 분리하는 대략 150의 시대 세그먼트의 한에 추가할지 어떨지의 면담의 중심에 있다.
본 책은 안트로포센의 제안을 전제로 하여 CNRS(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크리스토프 포누유와 장바티스트 프레소스가 안트로포센이라는 새로운 틀의 등장으로 인류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 혹은 그것에는 종래의 사고방식의 무엇을 변경해야 할 것인지, 그 것을 정중하게, 한편 래디컬 히스토리 같게 총 준것이다.
두 사람의 검증에 따르면 안트로포센 층위화의 제1단계는 산업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난다. 이 기간에 석탄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소비량은 40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은 50배로, 인구는 6배로, 이용토지면적은 약 3배가 되었다. 이윽고 육로에도 해로에도 증기기관화와 속도화가 일어나 인류는 어떠한 자동 엔진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많은 숲이 각지에서 잃어버리고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277ppm에서 상승하기 시작했다(20세기 중반에 311ppm에 달했다).
제2단계는 대전 후인 1945년부터, 여기서 석유의 대량 소비에 의해 이산화탄소나 메탄의 대기중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여 지구의 질소와 인의 순환 농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거기에 전후의 자유무역주의에 의한 국제경제시스템의 가속이 딱 겹쳐져, 예를 들어 수력발전소의 증가수, 자동차 생산수, 맥도날드 햄버거의 점포수가 질소와 인의 대기 순환 지수와 동기해 갔다 . 바다가 오염되어 농약이나 약제가 인체에 스며들어갔다. 「대가속」(그레이트·가속)이라고 불린다.
제3단계는 2000년부터로 사태는 점점 심각해질 뿐이다. 전자결제시스템이 글로벌화되어 인터넷사회가 만연해간 것, 그 무렵 중국이 이산화탄소 배출국에서 미국을 몰아 세계 제1위가 된 것은 그 상징적인 동기 현상이었다.
특히 유전자 조작에 의한 농산물과 의약품의 양산과 금융공학에 의한 탐욕스러운 머니게임이 새로운 글로벌 스탠다드를 획득한 것은, 주민의 한사람 한사람이 「지각」이나 「피부」나 「근린」에 의해 겨우 지켜왔다 리얼한 경계를 어지럽혀 갔다. SARS나 MARS나 COVID는 그러한 '쓰루쓰루스베스베의 사회환경' 속에서 쉬울 것으로 늘어나간 것이다.
이러한 큰 3단계의 층위적 침습을 통해 기술의 비계획적인 확장이 지구사회환경을 이상하게 만들고 지구사회환경은 사람들로부터 위기의 실감을 빼앗아 갔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야합니까? '뉴노멀' 등이라는 타박상 손으로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구공학 테크놀로지에 착용한 지구 시스템 가게들은, 「지-권력」을 거래하는 통치에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본서는 그렇게 된 책임의 일단이 각국과 국제기관을 차지하는 지오크라트(지구관료)와 사회생태계의 복합성을 무시한 에코파시즘에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덕분에 안트로포센은 다른 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저자 크리스토프 포누유와 장 바티스트 프레소스
인신세의 외관도
인구의 증가나 종이의 소비량, 오존층의 파괴율, 종의 멸종수 등, 1945년 이후에 「대가속」(그레이트·가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가 지구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을 그린 일러스트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연료에 의존해 왔
공장에서 나오는 대량의 배기 가스
자연 회복력을 능가하는 속도로 삼림 벌채
버려진 어구에 얽힌 바다
거북 바다 거북의 사인의 70%가 인간활동과 관련되어 그 중 25%가 얽혀 사고.
중동 쿠웨이트에서 버려진 자동차 타이어의 더미
노란 모래를 가면으로 걷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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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폐기물로 덮인 시아크 강(인도네시아)
지구가 벌써 망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헐떡이면서도 아직 활성이다. 지구가 아니라 '사람-지구계'가 완전히 이상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심각하다.
이 책은 그 심각한 재미를 여러 신세상으로 강조하고 있다. 가라앉는 열신세, 식신세, 사신세, 혹은 가라앉는 욕망(탐식·소비) 신세, 무지신세, 현려신세, 또 찢는 영신세, 자본신세, 논쟁신세, 군신세.
일일이 안내하지 않지만, 대략의 전망은 붙을 것이다. 그 중에서 영신세는 근대 이후 영국이 겪은 틀림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람 신세 전체에의 옥근을 말한다. 나는 한때 '세계와 일본의 틀림'(춘추사. 나중에 '국가와 '나'의 행방'으로 개제 증보)에서 이런 '영국의 틀림'을 3장 혀의 영국으로 특필한 것이다.
당연히 미국 신세도 있다. 미국 신세다. 이는 자본제 계약주의와 포르티컬 콜렉트 컴플라이언스에 의한 안트로포센의 과잉 배포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모든 자원(자원)이 계약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차이나 신세, 중동 신세가 부상할 것이다.
무지신세라는 것은 산업계나 기술상이나 정치가나 지구 관료가 '자연을 외부화'하는 편이 좋다고 말한 것을 말한다. 이제 조금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의 외부화」와 「세계의 경제화」를 동일시한 것이 무지의 안트로포센을 확장해 버린 것이다. 칼 폴란니( 151밤 )가 “상업화 사회에 있어서의 기계제 생산은 사회의 자연적 인간적 실체의 상품으로의 전화 의외의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현명한 신세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하나는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덴스가 유의한 "재귀성"이라는 것이 제대로 논의할 수 없었던 것, 또 하나는 포스트 모던 사상 등에 의해 "큰 이야기 '가 버려진 것이 컸다. 말하자면 현명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안트로포센의 본질이 파악 이해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 논의가 재귀 사이클이나 경제 리비도 회로에 끌려 버린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명에 대한 비판에 근거한다.
이런 식으로 된 배경에 논쟁 신세가 라디칼에 작동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이 논쟁의 부비란, 박물관의 시대부터 다윈의 진화론이 확립해 가기까지의 시기, 지구와 인류에 관한 철학이나 사상이 확실히 논쟁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뷔폰, 헤이튼, 라마르크( 548밤 ), 라이엘, 다윈, 헤켈 등의 가설이 담백하게 다윈주의에 통합되어 밀, 푸리에(838밤), 오웬, 크로포토킨 등의 논의가 결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랏다이트 운동도 뉴하모니도 시골 도시 구상도, 일소에 붙은 것이었다.
원저『인신세란 무엇인가』
『인신세란 무엇인가』 커버 전체
황량한 대지에 폐기된 비행기의 잔해.
칼 폴란니
비엔나 출신의 경제학자.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위기 시대에 대치. 사람과 자연의 상호작용 과정이 “경제”라고 했다. 「암묵지」의 마이클 폴란니는 동생.
앤서니 기덴스와 울릭 벡
모더니티 분석의 틀로서 '재귀성' 개념의 확립의 필요성을 설명한 2명의 사상가.
이런 식으로 안트로포센의 무정한 수진을 설명해 보면, 연구자나 사상자가 주수 방관해 온 것처럼 비칠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다. 꽤 다양한 지적도 가설도 사색도 있었다. 이 책은 그것을 쫓는데도 곳곳에서 페이지를 찔러 놓고 좀처럼 굉장한 한 권으로 되어 있다.
왜 완신세가 없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크루첸뿐만 아니라 윌 스테판과 클로드 롤리우스들도 "완신세의 숨을 뿌린 흉기는 대기 속에 있다"고 몇번 도 발언했다. 메탄, 아산화질소, 이산화탄소 등의 흉기적 변화다. 이에 냉장고나 에어컨이 배출하는 프론이 몰래 손을 빌려줬다.
환경 위기에 대한 지적은 60 년대 레이첼 카슨 ( 593 밤 )의 "침묵의 봄"(신시오 사)과 제임스 러블록 ( 584 밤 )의 "가이아의 과학"(공작사)에서도 발신되어 , 사람-지구계가 어떤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전혀 모르는 계에 싸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경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다가갔다. 이사벨 스탠제르는 이 시스템에 미지의 피드백 루프가 관여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것이 과도한 자원 소비에 의해 본래의 생태계를 왜곡시키고 있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로마클럽은 '성장 한계'를 호소했고 언론은 '복합오염'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드루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프스'는 사람-지구계가 자본주의가 만든 피드백 루프에 의해서 몇중에 다시 함입되어 신경증에 걸려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이것을 조제스크-레겐은 열역학적 피드백 루프가 일으키는 수치를 들고 검증했다.
레이첼 카슨
환경 문제의 고전 '침묵의 봄'에서 지구의 비명을 전한 해양 생물학자.
클로드 롤리우스
40년 이상 지구 관측 프로젝트에 참가해 남극의 얼음에 갇힌 공기로부터 과거 대기의 모습을 조사해 기후변화를 밝혔다.
환경위기는 생태계의 이상을 나타내는 다양한 풋프린트(생태학적 흔적)에 의해 드디어 눈에 보이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지리학자 아르 엘리스는 지금까지의 「인간이 흐트러진 자연의 생태계」라는 견해로는 안 되고, 더 대담하게 변경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자신들의 회에 자연의 생태계를 잡은 인간계”라는 견해를 해야 하고, 연구되어야 하거나 공격받아야 하는 것도 이 인간계임을 강조했다.
사태는 새로운 문명론의 양상을 취하게 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 거시적인 견해를 제공하는 사람은 적었다. 과연 '불편한 진실'은 잇달아 열거되지만, 그들을 문명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안트로포센에 무지신세가 혼입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일단 뷔폰이 '자연의 여러 시기'로, 라이엘이 '지질학 원리'로, 미슐레( 78밤 )가 '보편사'로 , 부르크하르트가 '세계사적 고찰'에서 포섭한 것 같은 시점을 지금 환경문명사적으로 크게 계승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포섭적으로 말해야 하는가. 이미 미슐레가 이렇게 썼다. "세계가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즉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정신의 물질에 대한 자유의 운명에 대한 싸움이다."
아마도 사회가 환경에서 너무 분리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루소( 663야 )나 콘트나 웨버나 듀르켐이, 사회라는 실상의 의미를 너무 강조한 것이다. 또 심리가 환경에서 너무 찢어진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 ( 895 밤)의 책임도 있다. 로만 로랑의 '대양적 감정'을 프로이트는 유아기에 보이는 융합적 환각에 불과하다고 단절했지만 오히려 로맨 로랑의 환경심리학이 새롭게 등장해야 할 것이다.
로만 로랑
노벨 문학상 작가. 전쟁의 비인간성을 강하게 비난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반전·평화를 주장했다.
안트로포센은 새로운 환경적 문명학과 환경적 인문학을 기다렸다. 그래서 예를 들어 피크렛 버크스와 칼 폭크 등은 '사회 생태 시스템'이라는 틀을 1998년에 제창했다. 물질과 에너지의 유동분석을 사회생태계의 대사구조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자연변화를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고 있었다. 응답이나 반응의 현상학으로서의 문명학이나 인문학은 지루하다.
폴리티컬 생태도 사태 돌파를 시도했다. 「자연이 들어간 사회」와 「사회가 들어간 자연」을 이중으로 취급하는 이론적인 틀(이중의 내재성)을 마련했지만, 잘못되었다. 이런 견해는 상황의 비틀림에 민감하게 주목하지만, 그 어쨌든 결국은 비틀림을 되돌리는 "탄력"(복원력)을 안이하게 기대해 버리는 것이다. 정말로, 축하합니다. 탄력이란, 마음대로 일어날 리가 없다.
아마도 최근의 사회학자는 자연이 원래 말이 아니고 계속 2차적·다차적임을 경시하고, 직립 2족 보행한 인간 원숭이가 원래 반자연으로서의 스타트를 끊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 너무 많을 것이다.
환경적 문명학이나 환경적 인문학이 태동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시간축을 가져야 한다. 역사관을 지지하는 시간축이다.
그런데 이것이 페르난 브로델 이후, 다음과 같은 3개의 시간할당이 되어 왔다. a 「자연과 기후의 거의 부동으로 인간 활동에 좌우되지 않는 시간」, b 「경제와 사회의 사건에 관한 완만한 시간」, c 「전쟁이나 외교나 정치의 페이스에 아울러 급속하게 변동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3 이다. 아나르파는 이 재봉대 위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a가 틀리기 때문에 달게됩니다.
한편, 역사주의의 함정을 면하게 하기 위해, 에마뉘엘 라듀리의 『새로운 역사』(신평론, 후지와라 서점) 등이 「인간을 넣지 않는 역사」에 근거하는 시간할인을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이쪽에도 무리가 있다. 예방선이 너무 늘었다.
따라서 '자연주의 메트로폴리스'의 윌리엄 크로논이 자본주의 활동이 형성하는 요인을 배려한 '2차적 자연', 에드문트 뤼셀의 인간과 생물의 상호작용을 밑바탕으로 한 '진화적 역사 시간' 티모시 미첼의 자연이 사회에 꽂는 분광성에 주목한 '에너지 프리즘'이라는 아이디어가 잇달아 나왔는데, 모두 이것도 이마이치였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개념을 21세기의 복잡계 속에서 잘 작동시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원래는 1850년대에 영어나 프랑스어로 “environs”라는 말은 부근이나 근교라는 의미로 잡혀 있었고, 이것을 지구규모나 생물규모에 맞는 ‘환경’으로 넓혀서 사용한 것은 허버트 스펜서였다. 했다.
스펜서는 라틴어 「키르쿠무후사」(Circumfusa)가 가지는 뉘앙스(위생에서 말하는 서컴 스탠스)를 포함해 다윈주의처럼 환경 개념을 시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쩐지 모호한 것으로, 당시에는 이들과 유사하게 뷔폰이나 디드로( 180밤 )나 라마르크나 카바니스 등이 자연환경 개념 '밀리우'(milieu)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야말로 논쟁이나 논의가 깊어지고 있으면 좋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거기가 논쟁 신세로 집중하지 않았던 추악이 터진 곳이다. 이 때가 '환경의 최중요성'을 제시하는 최초로 최대의 기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폰 유쿠스큐르( 735밤 )가 '생물에서 본 세계'(사색사·이와나미 문고) 등에서 제시한 '환세계'(Umwelt)와 와쓰지 테츠로의 '풍토' 등의 시점이 주류 환경 논의에서 시작된 채로 되었다. 나가 오규스탄 베르크( 77밤 )와 잡담했던 무렵은, 이것이야말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길버트 화이트의 '세르본의 박물관지'가 “자연의 이코노미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존재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일과 식물학자 베르나르단 드 생피에르의 "지구의 조화는 최소한의 식물종을 없애는 것만으로 그 일부 또는 전부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장 바티스트 로비네의 「인간이나 대형 동물은, 우리가 지구라고 부르는 이보다 큰 동물의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관점이,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만약 논쟁 신세가 작동하고 있으면, 약간 놀라운 이야기가 되지만, 일본에서 말하자면 나는 아라마타 히로시( 982야 )나 나카자와 신이치( 979야 )가 80년대에 좋아 마음대로 방언하고 있었다 일 등도, 남방 쿠마쿠스( 1624 밤 )나 러블록의 환경 인문학과 함께, 또 화이트 헤드의 유기체의 철학과 함께, 최신의 안트로포센한 논의에 짜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최근이라면 사쿠라 통( 358야 )의 견해 등이 이들을 맡고 있다.
하버드 스펜서
다윈의 진화론을 전용하고 사회 진화론을 제창. 모든 분야의 학문을 통일하고 종합체계화한 철학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폰 유쿠스큐르(왼쪽 위), 길버트 화이트(오른쪽 위), 베르날단 드 생피에르(왼쪽 하단), 장 바티스트 로비네(오른쪽 하단)
생물별 「환세계」를 설명하는 일러스트레이션
유쿠스큐르 「생물에서 본 세계」에서
환경 논의가 잘 통합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농업 화학이 간과되어 버린 적이 있다. 지금까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근본적으로 일으킨 것은 에너지와 물질의 교환에 의한 것이다.
라보아제가 '연소'에 주목한 것은 산소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 환경에서의 '대사의 비밀'을 고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생명과 문명 사이를 잇는 화학이 부상했다.
그렇다면 안트로포센은 토양과 공기를 둘러싼 화학을 좀 더 신사상의 중심으로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중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이 분야에도 '재귀성'이 보이기 어려운 구조가 활발히 있었을 것인데, 사회학이나 환경 이론은 거기를 흘렸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미 아서 영은 1770년의 '전원경제'에 목장과 농장을 얽히는 물질 순환의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해 “균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자연 연쇄의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는 관점에서 도시, 농촌, 목장에 숨어있는 피드백 루프를 모색했다.
리비히의 '최소율'도 토양 재활용의 필연성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리비히는 토양에 숨어있는 소량의 질소, 인, 칼륨, 마그네슘, 황, 철 등의 화학 원소가 토양의 비옥의 비밀을 잡고 있음을 포기하고 만약 도시의 문화가 이것을 경시하면 사회 그는 자사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당시 영국이 과노 (해조 배설물, 인 비료)와 무기 비료에 큰 돈을 움직여 수입하려고하는 모습을 뱀파이어에 갇아, "영국은 다른 나라가 자신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것을 빼앗고 있다”고 썼다.
실제로 농업화학에 의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실험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피에르 루루가 프랑스 크루즈 지방 부삭에 만든 '킬 크루즈'(순환·환환)는 배설물의 재활용에 의해 마을락 집합체를 등식초율시키는 실험이었다 . 농업 화학 분야는 아니지만, 크로포토킨의 상호부조론에 공감한 건축가의 레베레히트 미게가 '모두로 자급'에서 제안한 자급시속 공동체의 계획은 그린 매니페스트를 내걸고 처음으로 '그린'이라는 용어 을 환경론에 적용하였다.
これらは1920年代のウラジミール・ベルナドスキーの「生物地球化学」に、40年代のジョージ・ハッチンソンの「システム生態学」に、そして60年代のラブロックとリン・マーギュリス(414夜)の「大気圏生物化学」 에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발전해 갔다. 둘 다 흥미로운 발상이었는데, 이것 또한 종합적인 안트로포센 이론에 조성되어 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천야 천권의 포코 스키( 1622 밤 )의 「미생물이 지구를 만들었다」(청토사), 마루야마 시게토쿠·이소자키 유키오( 1615 밤))의 '생명과 지구의 역사'(이와나미 신서), 워드와 카슈빙( 1637밤 )의 '생물은 왜 탄생했는가'(가와데 서방 신사) 등을 보고 싶다.
라보아제의 다이아몬드 연소 실험
에도의 학자, 우다가와 유스케에 의해 그려진 라보아지에의 수소 연소 실험도
왼쪽 상단에서 아서 영 (왼쪽 위), 유스투스 리비히 (오른쪽 위), 피에르 루루 (왼쪽 하단), 레베레흐트 미게 (오른쪽 하단)
그런데 앞으로의 환경 철학이 진심으로 잡아야 하는 최대의 상대는 아마 엔트로피의 문제일 것이다. 지구는, 과잉의 에너지나 모이는 정보를 어딘가에 잘 버리지 않는 한은 생명계를 유지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부의 엔트로피」를 활용할 수 있었던 구조와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다.
그렇다고 하면, 찢어진 「사람-지구」계가 안트로포센에 걸려 온 와중에서 전갈처럼 모여 와 버린 엔트로피를, 무엇에 의해 배출하는지, 아니면 무언가로 변환하는지, 거기에 질문된다 이다.
여기를 다이나믹한 독서로 하기 위해서는, 하나는, 볼츠만이나 프리고진( 909밤 )의 열역학 가설을 어떻게 취하는가 하는 것이다. 열역학은 우주론에도 관련되기 때문에, 상당히 큰 스코프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하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자연 내부의 에너지 비축과 인류의 이익을 위한 가치 부여'나 에른스트 마하( 157밤 )의 '열학의 여러 원리'에 나오는 '사유의 경제' 이론을 어떻게 읽을지, 에드발트 자하의 '사회 역학의 설립', 패트릭 게데스의 '존 러스킨 이코노미', 프레드릭 소디의 '데카르트 경제학' 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즉 경제학과 엔트로피를 환경학으로서 어떻게 브리지시킬까라는 읽음근을 기동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금 혀가 부족했지만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소디가 “금리란 우연으로 이루어진 인간끼리의 합의일 뿐, 자본이 종속하는 엔트로피의 원칙에 오랫동안 모순된 채로 있다. 는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등을 어떻게 해석해 나갈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엔트로피 처리를 다루려고 할 때, 제임스 줄과 윌리엄 톰슨의 자연 신학의 전통에 따라 너무 멀어지거나 그 반대를 마주하는 마르크스 ( 789 밤 )의 자본론과 노동론 에 너무 가담하게 된다. 최근, 상배된지 얼마 안된 사이토 유키히라군의 『인신세의 ‘자본론’(슈에이샤 신서)은 매우 재기환발한 저서였지만(그러니까 나도 띠에 추천문을 전했지만), 자본의 문제 에 말한 만큼, 각종 엔트로피의 배출에는 닿지 않고, 안트로포센론으로서도 꽤 치우치고 있었다.
지구 시스템에 대한 인간 활동의 표준 모델
루트비히 볼츠만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물리학자, 철학자. 통계역학의 단서를 연 공적과 함께 전자기학, 열역학, 수학 연구로 알려져 있다. 원자를 실재의 대상으로 생각한 최초의 과학자.
패트릭 게데스
현대 도시 계획, 시정학, 환경 교육의 아버지. 도시 조사에 근거한 도시·지역 계획 이론의 진전에 큰 영향을 주어, 시민 참가의 마을 만들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저것 이것 안내해 보았지만, 본서에는 보다 풍부한 컨텐츠가 소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성장 신화로부터의 탈출」이 빗나가고 있는 사상이나 데이터가 집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지 가능한 지구 관리와 가이아와의 화해의 수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어쨌든 안트로포센한 논의는 지금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미 안내해 온 것처럼 18세기 중반부터 몇번이나 논의되어 온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俎 위에 올라오지 않는 논의도 아직 남아 있다. 나의 견해로는, 특히 뉴사이버네틱스인 생각, 혼돈과 복잡계를 둘러싼 견해, 자기 조직화의 이론의 가능성과 한계, 비선형 수학의 가능성, 사이보그나 로봇 사회의 문제, 넷 사회나 AI의 역할 등 등의 검토가, 본서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유발 노아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와데 서방 신사), 마르크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고단샤), 바이런리스의 "인류의 역사와 AI 미래」(디스커버 21) 등보다는, 본서에 몰두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덧붙여서 최근에는 「인신세」를 씌운 책이 솟아나고 있지만, 크리건 리드의 「사피엔스 이변」(아스카 신사), 시노하라 마사부의 「인신세의 철학」(코단샤 선서 메티에) 등, 둘 다 띠에는 짧았고 뒤에는 길었다. 천야 천권의 독자는 역시 본서에 잡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드디어 100세를 맞이한 제임스 러블록이 안트로포센보다 더 앞서서 '노바센(Novacene)'(NHK 출판)이라는 책을 마무리해 오치아이 요이치군을 기뻐했다. 편하게 말하고 있는 책이지만, 우아한 맛이 있다. 안트로포센 이후의 시대는 마침내 전자적 지성이 관여할 것이라는 예언이 되고 있다. 코로나 사무라이 설날에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임스 러블록과 『노바센』의 원저
「가이아 이론」의 제창자. 지구에서 인간의 역할은 높은 지능을 가진 <초지능>의 진화를 촉진하고 가이아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전환한다고 예언한다. 2020년에 101세를 맞았다.
오늘 밤이 2020년 마지막 천야천권이다. 올해는 장 미셸 모르보와 ( 1730 밤 )의 "보이지 않는 것을 모으는 꿀벌"(사조 사)에서 시작하여 다와다 하코 ( 1736 밤 )를 쓴 곳에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본 상륙 뉴스를 만나 컬 짐머의 '바이러스 플래닛'(아스카 신사)과 프레드릭 케크의 '유감 세계'(수성사)와 니시야마 켄이치의 '면역 네트워크 시대'(NHK 출판) 등을 급히 소개했다.
한편, 카도카와 소피아 문고 「천야 천권 에디션」의 구성과 가필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와 소립자」나 「방법 문학」이나 「서브 칼즈」를 위한 천야를 삽입하는 나날도 계속된다 했다. 나에게 있어서의 천야천권은 더 이상 회봉행에 가까운 것이 있지만, 실제로는 장작을 끓는 목욕에 가까워, 그 밤에 목욕에 들어가는 저자를, 미리 준비한 다양한 형태의 목욕통에서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가마솥 밖의 모닥불에서 짓밟고 있는 몸이다.
뭐, 그런 것은 어쨌든, 새해 전날의 천야 천권을 안트로포센인 1권으로 할 수 있고, 조금 안심하고 있다. 저자 2명과 함께 목욕을 할 생각으로 철자한 것이다. 「새해 전날 정해지지 않는 세상의 사다메야」(니시츠루), 또 「노래 반고를 모르는 제야의 화통일까」(자규). 그럼 내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올해도 연말까지 천야 천권을 계속 썼다.
(도판 구성:데라히라 켄지·니시무라 슌카츠)
⊕『인신세란 무엇인가〈지구와 인류의 시대〉의 사상사』⊕
∈ 著者:クリストフ・ポヌイユ
ジャン=バティスト・フレソズ
∈ 訳者:野坂 しおり
∈ 発行者:清水 一人
∈ 発行所:青土社
∈ 装丁:竹中 尚史
∈ 印刷・製本:双文社印刷
∈ 発行:2018年3月20 일
⊕ 목차 정보 ⊕
∈∈ 엽서∈∈
서언
∈ 제일부 그 명칭은 인신 세로 한다
∈ 제1장 인위 기원의 지질혁명
∈ 제2장 가이아와 함께 생각한다: 환경학적 인문학
∈ 제2부 지구를 위해 말하고 인류를 인도한다: 인신세의 지구 관료적인 큰 이야기를 저지한다
∈ 제3장 클리오, 지구,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자
∈ 제4장 신세 또는 과두 정치 신세
∈ 제3부 인신세를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 제5장 열신세: 이산화탄소의 정치사
∈ 제6장 사신세: 힘과 환경파괴
∈ 제7장 을 소비한다
∈ 제8장 현려신세:환경학적 재귀성의 문법
∈ 제9장 무지신세:자연의 외부화와 세계의 경제화
∈ 제10장 자본신세:지구시스템과 세계시스템의結合した歴史
∈ 第一一章 論争新世:人新世的な活動に対する一七五〇年以来の抗議運動
∈ ∈ 결론
인류세 에서 살아남고 살기
∈ ∈ 참고 ∈ ∈ 번역가의 추간
∈ ∈ 개인 이름 색인
⊕ 저자 약력 ⊕
크리스토프 보누유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 연구원. 전문은 과학기술사·환경사. 프랑스의 과학기술사 연구를 견인하는 알렉산드르 코일레 센터에 소속.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2013년부터 수유사의 '인신세' 컬렉션을 주재. 편저에 「또 하나의 「30년의 영광」의 역사」 「과학과 지식의 역사 제3권:테크노사이언스의 세기(1914년~)」등이 있다.
장 ⁼ 바티스트 프레소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원을 거쳐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 연구원. 전문은 과학기술사·환경사. 알렉산드르 코일레 센터에 소속.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주저는 과학기술이 가지는 리스크에 관련된 논쟁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논한 『기쁨의 묵시록』. 편저에 「환경사 입문」등.
⊕ 역자 약력 ⊕
노자카 시오리(노사카・시오리)
고베대학 국제문화학부 졸업.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원·석사과정 수료. 현재는 이 박사과정에 재적. 전문은 과학기술사・생물학사. 논문 발표에 "소비되는 유산균, 상상/창조되는 건강: 대일본 제국에서의 유산균 요법의 도입과 형성에 대해"("제국 일본의 지식 네트워크에 관한 과학사 연구"수록)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