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4

Namgok Lee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Namgok Lee | Facebook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를 읽고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낼 것 같다.

불교의 여러 이론들이 생경하긴 해도, 읽으면서 내 나름의 생각도 떠오른다.
우선 차분히 읽어볼 겸, 페친 님들에게 이 책 소개도 할 겸, 두 분의 견해 차이가 비교적 잘 드러나는 부분을 내 생각은 빼고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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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정; 다시 부처님 재세 시로 돌아가보자. 어떤 식으로 불교를 대하든 부처님처럼 불교의 가장 큰 목적은 자기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 스님처럼 사회적 실천 테제를 이 앞에 두고 불교를 상정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욕망의 불길을 끄는 것을 열반, 즉 ‘니르바나’라고 썼다. 그리고 이후에는 해탈을 뜻하는 ‘목샤’라는 단어도 자이나교에서 빌려 왔다. 나는 ‘니르바나’나 ‘목샤’라는 말의 그물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말의 그물에 묶여 있는 삶의 직접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고⸳ 고통⸳ 괴로움’이라는 나의 불편함을 먼저 보고 그것을 없애려 할 뿐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구체적으로 문제가 드러나지만 무언가 있어 뵈는 불교의 단어를 쓰는 순간 추상적인 것만 생각하게 된다.

도법; 나도 그 말을 하는 것이다.

담정; 그런데 왜 불교를 사회참여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는가?

내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이 바로 공이다. 될 수 있으면 불법도 직접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주로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추상적인 언어를 쓰는 순간, 추상적인 반응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이든 그 사용 빈도수가 많아지면 개개인의 견해가 반영된다.
유명인일수록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처럼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 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만큼 오해의 여지도 생겨난다. 

‘중도’라는 말도 ‘나의’ 중도와 ‘스님’의 중도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이 중도라는 ‘말’을 대하는 우리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극도의 추상적인 논쟁을 끌어오는 것이다.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세계는 다루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경우로 가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져 논쟁하기 어렵지만, 추상적인 개념⸳여래⸳열반 등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말의 그물이 보인다. 이 분석지로 불교적 개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의 직접성이 드러난다.

내 괴로움의 실체, 부처님의 말씀도 실체가 없는데 내 괴로움이 어찌 실체가 있겠는가? 고(苦)도 실체가 없는데, 나는 왜 고(苦)라 부르고, 그것은 또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렇게 하나 하나 뜯어보면 궁극적인 삶의 자세가 변하게 된다.

도법;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사회참여’ 관점에서 불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은 동의하지 않는다. 삶이란 도심에 있든 산중에 있든 매우 사실적이다. 나는 매우 직접적이고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삶 자체와 연결해 불교를 다뤄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중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돌고 돌지 말고, 생물학적으로 앞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비유한 장님의 코끼리 이야기를 보자. 장님들이 각자 자신이 알고 믿는 코끼리만 진짜 코끼리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이 생겼다. 다툼은 고통과 불행의 다른 이름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 붓다는 중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파악한 ‘중도’는 단도직입적으로 코끼리의 실물에 직면하는 것이다.
실물에 대면하는 순간 자기 정보만으로 판단했던 주장을 멈추게 된다.
실물에 대면하는 것이 중도이고, 중도에 의해 떨어져 나간 주장이 바로 양극단이다.
 
담정; 나는 그 비유가 중도를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코끼리의 실체를 알고 있는 ‘제3의 관찰자’로서 장님을 보기 때문이다.
===


이 ‘장님의 코끼리’는 우리의 직접지나 경험지, 즉 감각기관에 포착된 세속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코끼리가 무언지 모르는 장님은 자신이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장님은 자신이 만져보고 인식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출세간의 꿈을 꾸지 않은 채 언어를 통해 세상을 분석하고 알려는 자세를 비판하는 비유일 뿐, 중도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아니다.
제 3의 관찰자, 즉 코끼리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자는 일체지자, 즉 부처님이다. ‘일체지자가 보기에는 무명에 빠진 우리가 모두 장님이다’라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스님처럼 ‘나는 전체를 보는 자’라는 견해를 세우고 중도를 실천한다고 주장하면, 불법을 오해한 아상만 생긴다.
적절할 때 적절한 비유를 해야지 중도를 주장하면서 이 비유를 가지고 오는 것은 옳지 않다
.

더 많이 옮기고 싶지만, 오늘은 체력이 여기까지. ㅎㅎ


Namgok Lee
89768phoillnh5fmuordm ·



카톡으로 온 벗님의 성탄과 새해 축하 인사에 답장을 쓰면서, 문득 성탄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사랑'이다.

옛부터 일가친척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금기처럼 되어 있던 것이 정치와 종교 이야기였다.
사이좋음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라기로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도 서로 다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의식과 문화의 성숙이지만, 요근래 몇년은 특히 정치 이야기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 역행하는 듯 하다.

한번 심하게 겪어서 반전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가까이 사귄 오랜 벗들이 서로 멀어지고 심지어는 미워하는 상황을 만나면서 내가 웃으개 소리로 하는 말이 생겼다.
'대선은 짧고, 우리는 길다'

언젠가 웃으면서 옛 이야기로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국은 그런 나라가 될 것이다.
'사랑'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것이다.
사랑과 관용과 기쁨이 흐르는 성탄절을 보내기를 축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71박정미, 崔明淑 and 69 others


S
나단청

'대선은 짧고 우리는 길다' 명언이십니다!!

1
Namgok Lee

나단청 가끔 개그 감각이. ㅎㅎ


최영훈

인생도 짧고, 예술은 길다.
예술도 짧고, 타오는 길ㄷ


Namgok Lee

이제 동지(冬至)가 지났으니, 낮이 길어질 것이다.
동지의 지(至)는 끝에 이른다는 말이다.
끝에 이르러 바뀐다.
세상을 보며, ‘갈 데까지 가서 바뀐다.’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요즘 인공지능과 기후위기의 동시적 존재를 보면서, 그 괴리와 모순 때문에 ‘바뀌기 전에 망(亡)’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돌아보면 나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꽤 과격한 실험들을 인생을 걸고 해 온 셈이다.
젊어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중년에는 무소유 사회 실험을 했다.

인간의 진화에 대한 신념과 이상을 가지고 해온 실험들이지만, 과격하다고 하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확증편향들을 검토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 왔다고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나 가족에게 피해가 간 부분은 평생의 빚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감각과 판단 그리고 경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요즘 대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대의를 존중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신념’이나 ‘대의’나 ‘필요성’을 넘어 그 주체와 동력 그리고 방법에 대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실태는 ‘생산협동조합’조차 제대로 된 모델을 만들지 못하고 있고,
이른바 ‘마을’의 실태도 구체적으로 그 일을 해 본 사람이면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고 사변적 논쟁을 할 생각은 없다.

대변혁이나 대전환은 나에게는 평생의 화두다.
내가 보기에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주장이더라도, 진심으로 평화적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존중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해보기도 전에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을 가지고 단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부분은 기다려보면 된다.
실제로 성공적인 모델들이 만들어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 것이다.
사실 나는 투 트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결사(結社)가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다.
국가와 시장이라는 주류(主流)를 변화시키는 노력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창출하는 틈새를 확장하는 노력을 결합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총참모부를 그려보는 것이다.
무슨 신흥 종교나 과거와 같은 일사분란한 집중적인 조직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견인하는 ‘무조직(無組織)의 조직’ 같은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보살(菩薩)을 종교나 정파를 떠난 일반 명사로 쓴다면, 그 결사는 진성(眞性) 보살(菩薩)의 결사일 것이다.
한국에서 50만 정도라면 한국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것이다.
아직도 이런 망상을 꾸고 있느냐. 어디선가 ‘할喝’ 소리가 들린다.
박정미, 崔明淑 and 7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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