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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 [1]
계간지 <불교평론>에서 이어가는 “불교로 읽는 고전” 시리즈의 하나로 ‘성경-불교의 입장에서 읽은 성경 이야기’를 쓰라는 원고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방금 나온 2021년 겨울호 248~265 쪽에 실렸네요.
1. 성경의 구성,
2.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3. 성경에 대한 태도,
4. 해석의 문제,
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로 구성되었는데,
5번을 여기 올려봅니다. 즐독 부탁합니다. (괄호 안은 각주들인데 페북에는 제대로 올려지지가 않네요.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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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불교를 연상시키는 진술이나 사건들 몇 가지를 예거해 본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제들일 수 있기 바란다.
1) 성경 첫째 권인 <창세기>에 보면 신이 6일 동안 세상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여라....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하였다. 서양 역사는 대체적으로 이 ‘정복’과 ‘다스리라’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땅을 마구잡이로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착취하고 살육하는 일을 계속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말은 자연을 함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각주: Jeremy Rifkin, The Emerging Order: God in the Age of Scarcity, (Ballantine Books, 1979)와 그의 최근 책,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와 동저자, 안진환 옮김, <글로벌 그린 뉴딜>(민음사, 2020) 참조.)
이런 새로운 이해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창조 이야기와 연관해서 야훼 신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조성하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그 중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른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며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과일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다. 둘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야훼 신은 이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순종·불순종의 입장에서 보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므로 쫓겨난 것이니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 된다는 식의 윤리적, 율법적 해석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의식의 발달사를 다룬 켄 윌버(Ken Wilber)는 이 이야기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도 모르던 동물적인 주객 미분의 의식(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주객 분리의 의식(subject/object consciousness)으로 넘어온 단계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윌버는 물론 의식 발달의 완성은 이런 이분법적 분별 의식을 초월하는 초주객 의식(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라 한다.
(각주: Ken Wilber, Up From Eden: A Transpersonal View of Human Evolution (Quest Books; Quest ed. edition, 2007) 참조.)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분별식(分別識)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를 넘어서서 분별식을 초극하는 단계로의 완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3) 성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기별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4:17)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개’라고 번역한 것은 본래의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메타(넘어서다)와 노이아(의식)의 합성어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메타노이아 체험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은 다 같이 ‘새로운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않을까?
4)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했다. 여기서 ‘내가’라는 것은 역사적 인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기보다는 ‘우주적 나(cosmic I)’,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우주적 생명력’, ‘본원적인 인간성,’ ‘나의 참 나’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여겨진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친 말이 연상된다. 여기서 ‘나(我)’란 누구인가? 역사적 고타마 싯다르타를 의미할까?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나, 참 나인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언과 부처님의 외침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 아니겠는가?
5) <마태복음>에 보면 최후 심판 장면이 나온다. 임금님이 의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25:35~36)고 한다. 의인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임금이 다시 입을 열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이런 것은 물론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고 결국은 하나라는 화엄 철학의 상즉(相卽) 상입(相入)의 원리나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사람과 임금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임금에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6) 다시 화엄 사상을 원용하면, 예수님이 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19:19)는 말씀도 쉽게 이해된다. 이웃과 내가 따로 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이웃만 하나가 아니라 나와 자연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8:12)고 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면 현재 자연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태학적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절박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학이 가르치는 삼경(三敬) 사상, 곧 경천(敬天), 경인(敬人)과 함께 경물(敬物)을 이야기하는데, 경물이야말로 환경 파괴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깊이 생각할 가르침이라 여겨진다.)
7) 일즉다(一卽多) 다중일(多卽一),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모든 것이 결국 하나 안에 있고 하나가 모든 것 안에 있어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은 <요한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7:21)라고 하였다. 사실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인류의 죄 값을 탕감하기 위해 피흘리셨으니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른바 대속론(代贖論)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비적 합일’ 사상이다. 그러기에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1931-2021) 신부는 <요한복음> 해설서의 제목을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Tales of a Jewish Mystic)”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번역에서는 제목을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이라고 했지만, 영어 원본에는 The Fourth Gospel: Tales of a Jewish Mystic(HarperCollins Publishes Ltd, 2013)으로 되어 있다. 신비주의란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더욱이 류영모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외우는 위의 성경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독생자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심어준 하느님의 씨앗, 신성(神性)이라고 하였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8. 위에서 잠깐 언급한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 속에 빛으로 있는 신성(神性), 나의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고 있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도마복음> 풀이 책 서문 마지막 문장으로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졸저, <또 다른 예수>(예담, 2009), 29쪽.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비불자들을 위한 불교 안내서로, 오강남,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참조할 수 있다.)
나가면서
성경을 필자의 어머니처럼 일 년에도 몇 번씩 읽는 이도 있고, 필자의 사촌 형처럼 국한문 성경을 완전히 필사하고 이제 다시 한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일반 불교 신도들이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같은 것은 외우지만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경을 직접 읽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은 자기들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성경이나 불경에서 나온 진리 그대로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과 ‘교리’를 성직자들이 전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제 그런 전통에 무비판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 문자 너머 심층에 있는 속내를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간취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그 깊이에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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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2)
며칠전 불교와 성경이라는 제목으로 "5. 불교와 관계에서 읽는 성경"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동감'해주셔서 이왕 쓴 것, 3번과 4번도 올려보자 하고 올립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아시는 분은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혹시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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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에 대한 태도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는 말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啓示)’의 책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1) 문자주의적 태도
이른바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근본주의적(Fundamental) 혹은 복음주의(Evangelical) 그리스도인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다. 심지어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縮字靈感說)’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든가, 여호수아가 해가 지기 전 쫒기는 적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께 태양이 멈추도록 해 달라고 하니 태양이 멈췄다든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 나왔다고 하는 등 구약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 등등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이런 문자주의를 받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참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우주를 엿새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경 처음에 나오는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이고, 복음서들도 그 이름대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 마가와 누가가 쓴 것이고, 바울의 편지서도 14권 모두 바울이 직접 쓰고, 일반 편지서도 그 이름을 가진 저자들이 손수 쓴 것이라 믿는다.
2) 문자주의의 거부
한편 18세기 계몽시대 이후 발달된 이른바 ‘역사 비평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은 창조나 출애굽이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느 한 때 정말로 있었던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지 않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진보적 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 끝부분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모세 자신이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모세 오경은 내용이나 문체나 용어 등에서 각각 특유한 몇 가지 종류의 문헌이 나중에 편집되어 이루진 것이지 모세라든가 어느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창세기』 1장1절에서 2장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와 2장4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각각 P문서와 J문서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문서였는데, 후대 창세기』 편집자가 이 두 문서를 적절히 짜깁기해서 붙여 놓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복음서들이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대에 가서 지금과 같이 저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썼다면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그 정도로 의존해서 거기서 그렇게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또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썼다면 그가 『요한복음』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는 말씀도 사실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verba ipsissima)’이라기보다 거의 다가 후대의 사상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연구한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낸 책으로 Robert W. Funk, 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HarperOne, 1996) 참조.)
심지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 나사로 같은 인물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나 신이 인간이 되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저자들의 상상에 의한 결과물이라 보기도 한다.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8) 참조.)
바울 서신 등도 바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사상이나 문체 면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 바울 자신이 쓴 것이라 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직접 쓴 것이 7편, 논쟁거리가 된 것이 3편,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이 3편, 따라서 바울이라고 하지만 “급진적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세 명의 바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커스 J. 보그, 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첫 번째 바울의 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참조.)
4, 해석의 문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신학자로는 20세기 최대 신학자 중 하나인 독일의 성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약 성서와 신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등의 저작을 통해 이른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를 주장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화적 서술이기 때문에 신화를 이해할 때 그것이 마치 우주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무엇인 것처럼 ‘우주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실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신학자로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비신화화’라고 하면 신화를 없애는 작업이라 오해하기 쉽고 성경에서 신화를 없애면 남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비신화화라는 말 대신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혹은 ‘신화의 껍질을 깨기(breaking myth)라는 말을 제안했다. 틸리히는 종교적 서술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징이 지적하고 있는 상징 너머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의 임무는 성경의 상징을 그 시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재신화화(remythologizing)’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역사비평적 접근이라든가 탈문자화라든가 신화적인 표현의 껍질깨기 방법 등이 불교의 텍스트를 읽는데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불교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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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89 13uNoveamcb40eor satm 253a9:15glt ·
오늘은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 몇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 반수연 지음, <통영>(출판사 강, 2021)
캐나다에서 한국에 들어와 2주간 격리 기간을 보내는 동안 폭빠져서 읽은 책이다. 7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통영」은 다섯 번째 나오는 단편의 제목이다. 첫째 이야기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나머지 단편들도 재외동포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상작이다. 1998년 캐나다로 이민한 작가가 캐나다 이민 생활에 얽힌 애환을 그리고 있다. 맛깔나고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밴쿠버 조선에 실려서 읽은 적이 있는데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경우 이야기들 자체도 감동이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가 분위기가 내가 살고있는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나에게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좋았다. 한겨레 신문에 서평이 크게 나왔다.
둘째, 김소윤 지음, <난주>(은행나무, 2018)
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이 소설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난주(Maria, 본명은 丁命連)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맏딸로 1801년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내였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그의 아내 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소설은 제주도로 간 난주의 파란만장한 삶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난주는 갖난 아기를 데리고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는데, 풍랑으로 배가 추자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 아기를 바닷가에 떼어놓고 떠났다. 함께 제주도로 가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할 것이기에 차라리 추자도에서 평민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제주도의 노비제도와 방언이 많이 나온다. 제6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셋째, 박정선 지음, <백 년 동안의 침묵>(푸른사상, 2011)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그 형제들의 삶을 중심으로 소설화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의 일부를 축약한 듯한 밀도 높은 이야기로 여러 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2012년 체육관광부 추천도서.
넷째, 한석훈 지음, <죽음과 친해지는 삶: 심층심리학습소설>(이분의일, 2021)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는 한석훈 교수가 죽음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소설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 교수는 서문에서 “이 책은 노화를 예감하거나 노화에 이미 접어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탐색해보도록 안내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길잡이용 성인학습소설입니다.”고 하고 이어서 “자신을 잘 알게 된 경우, 죽음을 경외의 마음으로 기다리며 이번 생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어 여생을보다 가치 있게 살 수 있으므로 스스로도 흡족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도 따뜻한 관계를 키울 수 있습니다. 깊이 사랑해야 잘 죽습니다. 내적 성숙에 대한 귀중한 배움의 내용을 지금껏 지상을 거쳐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남겨주었고, 그것을 저는 이야기 안에 담아내어 여러분 앞에 펼쳐보이겠습니다.” 죽음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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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민진의 파칭코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기에 여기서는 생략. 미국 Apple사가 8부작으로 제작하는 드라마는 내년 2월에 방영된다고 한다.
한 가지만 더: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2018)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에 속한다고 극찬. 나는 아직 3분의1 정도 읽다가 중단했는데, 다른 급한 일 끝내면 다시 시작할 예정.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