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5

[한국의 파워라이터]‘평전 작가’ 김삼웅 - 경향신문



[한국의 파워라이터]‘평전 작가’ 김삼웅 - 경향신문




[한국의 파워라이터]‘평전 작가’ 김삼웅주영재 기자
입력 : 2012.05.04 21:10:03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ㆍ수십년 모은 자료와 증언, 포도주처럼 숙성시켜 집필




봄이 실종되고 바로 여름으로 직행한 듯한 지난달 24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 덕소에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69·사진)의 집을 찾았다. 그는 4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집은 작은 도서관이었다. 58평짜리 아파트는 부엌과 화장실을 빼고는 안방과 침실까지 책으로 가득했다. 신발장이 있어야 할 곳에도 책장이 들어차 있다. 책으로 장식된 서재에서 바퀴가 달린 서가를 밀면 또 다른 서가가 나오고 이게 끝이려니 했더니 또 서가가 놓여 있다.


답답하진 않다. 거실과 서재의 창밖으로 남한강이 한눈에 굽어보이고 그가 옛 정릉 집 주변에서 옮겨온 대나무 몇 그루가 시원함을 더한다. 그는 “중국 말에 선비는 집에 대나무를 못 키우면 수묵화라도 그려서 선비의 올곧음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의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다산의 생가가 있다. 다산의 혼을 이어받고 싶은 이유에서 그리고 조용하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주변의 추천에 옮겨왔는데 ‘예상외로 살기 좋다’고 했다.


김삼웅은 기자와 교수, 공직자 등 여러 이력을 가졌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평전 작가이기도 하다. 1996년 <박열 평전>(가람기획)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5권의 평전을 냈다. 신채호, 김구처럼 익히 알려진 인물만이 아니라 김원봉, 김상덕, 김창숙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다뤘다. 그가 펴낸 평전은 주로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의 삶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근현대사의 굴곡이 만든 역사의 빈칸을 메우려는 작업이다.


그가 평전에 관심을 두게 된 때는 30대 초반 유신체제에서 ‘민주전선’이라는 야당지의 편집장을 할 때였다. 정치계와 학계, 언론에서 친일 인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데 반해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묻혀져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그는 “약산 김원봉 선생 같은 경우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고 일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독립운동가인데도 월북했다는 이유로 인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잊혀진 인물들에 대한 관심에서 평전을 쓰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는 박열(1902~1974)이었다. 박열은 1923년 일본 왕자를 폭탄으로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22년2개월간 복역하다 해방을 맞아 석방된 인물이다. 그는 박열의 기개에 매료됐다. 박열은 일본 법정에서 ‘난 조선 대표로서 조선말로 할 테니 통역을 대라, 재판장은 일본의 대표고 나는 조선의 대표이니 피고석과 재판장석을 똑같이 해라, 죄인대우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김삼웅은 “1923년은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고 총독부가 극악스러울 때인데 그런 속에서 어떻게 저런 청년이 나올 수 있었는가. 감동스러웠다”고 말했다.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던 김상덕(1892~1956)의 평전을 쓸 땐 안타까움이 컸다. 김상덕은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1919)에 참여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열단, 민족혁명당 등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다. 그 와중에 생활고로 부인과 막내딸을 잃기도 했다. 김삼웅은 “반민특위를 이끌면서 이를 와해시키려 한 이승만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던 인물인데 한국전쟁 중 납북됐다는 이유로 후손들은 취업도 하지 못하고 막노동으로 어렵게 살거나 몸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김상덕 평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데 이런 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소홀할 수 있는 것인지, 논문 딱 두 편. 그것도 근래의 것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중국을 찾아 자료를 수집하고 후손의 증언을 들어 책을 썼다.


그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증언을 들을 수도 없는 경우 ‘빈 공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참 힘든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김구가 그랬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 군경에 쫓겨 피난생활을 하던 5년간의 기록이 거의 없다. 그는 이 공백을 김구와 그의 도피생활을 도운 중국여성 주아이바오(朱愛寶)와의 사랑을 다룬 중국 소설 <선월(船月)>을 인용해 메웠다. 물론 픽션임을 밝혔다.


평전은 자료와의 싸움이다. 그가 매주 한두 차례 고서점과 헌책방을 돌면서 책을 사모으는 것도 평전을 위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2011 모범 장서가’인 그가 책을 수집한 것은 10대 후반 ‘사상계’를 정기구독하면서부터이다. 평전을 쓰려면 인물이 살던 당시의 사상, 경제, 국제정치사를 알아야 한다. 자연히 그의 자료 수집 범위도 인문학 전체로 넓어졌다. 그렇게 모인 책이 현재 2만8000여권이나 된다.


그는 “낚시꾼이 만날 월척을 낚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다니면 의외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보자기 두 개를 풀어 고서 여러 권과 희귀 자료들을 보여줬다. 일본 도쿄의 헌책방에서 입수한 박열의 옥중 친필원고와 중국에서 구한 신채호의 <천고> 2집, 일본인 중개상에 넘어가려던 것을 때마침 구했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활판인쇄본, 신채호의 <을지문덕>, 박지원의 ‘도강록’ 등이다. 1975년쯤 한 출판사 주인이 “좋은 ‘산삼’이 있는데 구경 안 할 거냐”며 보여준 게 신채호의 <조선사론>이었는데 ‘진짜 심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15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하지만 돈이 더 없어 신채호의 또 다른 책들을 사지 못한 게 지금도 “참 통한스럽다”고 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저서는 <곡필로 본 해방 50년>(1995·한울)이다. 그는 “조선이나 동아에서 명사설 100선이니, 명논설집 100선이니 하면서 자기들이 어쩌다 쓴 자랑스러운 부분은 내세우고, 부끄러운 부분은 거의 발표를 하지 않는다”며 “시대상황이라고 하지만 차라리 펜을 꺾는 게 낫지 민족을 배반하고, 정의에 어긋나는 곡필을 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인의 곡필 문제를 다룬 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초보적이지만 연구를 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했다. 내년에는 이명박 정권 시대의 곡필사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이다.


이달 중순 노무현 평전의 출간을 앞둔 그는 이승만 평전과 민족주의 경제학자인 박현채의 평전도 올해 안에 출간할 계획이다. 다작의 비결에 대해 그는 “포도주를 생산하는 사람이 20~30년 묵혀서 때에 따라 몇 병씩 내는 것이지 그때 다 내는 건 아니다”라면서 “평전을 쓰기 위해 수십년 동안 모든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듣고 그렇게 숙성을 거쳐 한 권씩 공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산 정약용 평전을 마지막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 민족저항사의 근원지를 다산으로 보고 그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찾을 계획이다.




김삼웅의 대표저서




김삼웅은 지금까지 35권의 책을 냈다. 그는 주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정리하는 평전 작업을 진행했다. 독립운동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친일문제도 함께 다뤘다. 또 친일언론과 해방 이후 족벌언론들의 곡필사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평전 중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책은 <리영희 평전>(2010·책보세)이다. 주 2회씩 6개월에 걸쳐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해 ‘사상의 은사’로 불리는 리영희의 생애와 사상을 짚어냈다. 1만2000부가 팔렸다. <백범 김구 평전>(2004·시대의창)과 개정판 <단재 신채호 평전>(2011·시대의창)도 비슷한 부수로 꾸준히 나가고 있다. <김상덕 평전>(2011·책보세)은 그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이다. 이 밖에 김대중, 조봉암, 장준하, 전봉준, 송건호 등의 평전도 냈다. 지난달 나온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2012·철수와영희)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중저항의 사상과 역사를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킨 동서양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서술로 민중의 저항이 역사를 진보시켜 왔음을 보여준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주제를 담았다. 20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위서와 금서, 곡필사 연구도 깊이 했다.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2004·인물과사상사)는 문자의 탄생과 함께 시작한 위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2110035#csidx345d42fc99333be9c2d209dc7575a7a

다시 한번 말하는데, 좀 잘 알아보고 비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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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하는데, 좀 잘 알아보고 비판하세요

작 성 자 hooz11 등록날짜 2016-05-08 15:39



"인류의 역사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온 역사다. 지배한다는 뜻은 남자가 여자를 소유한다는 뜻이다. 남자가 여자를 소유케 만드는 가장 핵심적 개념이 정조라는 것이다. 정조라는 미덕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묶이게 된다. 정조라는 것처럼 남자가 보이지 않게 여자를 묶을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도 없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도덕의 핵심이다."

『앙코르와트 · 월남 가다 (下)』 45~46쪽



"『효경』이나 『삼강행실도』나 기타 유교경전을 보면 효의 대상이 모두 아버지로만 되어 있다. 모녀관계는 언급되지 않고 부자관계, 부녀관계, 부부관계만 언급되어 있다. …… 그러니깐 모든 것이 아버지 중심이요, 남성 중심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자연현상을 넘어서는 문명현상이요, 정치현상이다. 인간세의 문명은 전쟁과 더불어 시작하였고, 전쟁의 주도권을 남성이 장악하였다는 데 있다. 전쟁의 주도권과 함께 가정의 경제권을 아버지가 장악하였다는 데 부계의 우위가 확보된다. …… 아버지 중심의 효는 한마디로 불순한 측면이 있다."

『효경한글역주』 166~169쪽





자신의 두 딸에게조차 결혼이나 여성성을 강요하지 않고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며 살도록 현실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도올 선생인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죄악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라는 말 한마디를 꼬투리 잡아 "선생님의 태도가 여성의 현실에 더욱 안좋은 방향으로 보탠다고 봅니다"라는 비약에 도달하는 걸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인류문명 전반에 여성비하와 가부장적 강압이 깔려있다는 지적은 도올선생의 80년대 저서에도 다 나오는 말입니다.





"여자가 아담의 갈빗대 하나에 불과한 부수적 존재라는 사실은, 이 신화가 얼마나 철저하게 부계중심이며 막강한 가부장제적 권력구조를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나의 혹평이 필요없다."

『여자란 무엇인가』(1986년 초판) 106쪽



"이러한 「창세기」의 신화에 나타나는 여성관은 서구인을 수천년 지배했고 또 최근세에는 전세계로 확대되어 인류를 농락하고 있는 거짓말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 거짓말은 실상 중동문명권의 매우 특수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형성된 특수한 문화가치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후에 상술하겠지만 사도바울의 매우 혹독한 남성우위의 여성가치관에 잘 반영되어 있으며 또 오늘날 한국의 기술자들이 중동에 가서 체험하고 있는 검은 면포를 가린 여성의 실태, …… 터키의 명감독 일마즈 귀니의 "욜"에서 고발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여자란 무엇인가』(1986년 초판) 108쪽



혹시나 해서 미리 언급하는데, 제가 인용한 부분만 딸랑 읽고 반박한답시고 함부로 손가락을 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 전체를 인용할 시간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안 한 것이지, 이 내용 말고도 더 자세하고 다양한 내용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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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은 이러한 실태를 다 알고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죄악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일본이 저지른 죄악들 중에서 좀 아는 게 위안부 문제밖에 없으니까 그 문제가 일본의 죄악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도 남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문제들을 잘 모르니까. 전쟁 중 여성에게 조직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문제가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에도 집중해주기 바랍니다. http://ppss.kr/archives/65738 그리고 한스 페터 뒤르의 『음란과 폭력』이라는 책을 보면 전쟁 중에 얼마나 상상도 못할 성폭행과 만행이 일어나는지 그 사례를 하나하나 인용해 놓았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일본의 죄악은 단순히 대량학살이나 대량인신매매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문명과 역사를 전체적으로 부패시키고 왜곡시킨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러한 전체적인 병폐의 원류 속에서 나타나는 일부 지류일 뿐입니다. 원류의 썩은 물이 해결이 안 되니까 위안부라는 지류의 썩은물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인데, 위안부문제가 여성문제라고, 옳거니! 하면서, 이거 하나 붙잡고 "이 문제에 집중 안 하는 놈들은 여성의 현실을 나쁘게 만드는 여성 멸시의 시각을 가진 놈이다" 식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꼴 아닙니까?



이런 식의 편협한 시각으로 억지주장을 늘어놓으니까 아래에 있는 답글 중에도 "도올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위안부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면 문제가 좀 큰데요." 같은 반응이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직접 인터넷의 사례를 가지고 와서 "책에서 보니까 도올 김용옥은 둘 다 부족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식의 대화가 제멋대로 오가게 되면서 왜곡이 일어나는 과정까지 굳이 설명을 해놨는데, 그 밑의 답글에서 또 이런 비슷한 방식으로 왜곡이 일어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말하는데, 좀 잘 알아보고 비판하세요. 제가 이런 경우를 한두번 본 게 아닙니다. 도올 선생의 다른 책이나 강연에서 상세하게 다 언급되는 내용을 새삼스럽게 자기만 알고 있는 내용인냥 착각해서 "도올 선생의 이런 시각은 잘못된 것 같네요~" "도올 선생도 다 아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식으로 떠드는 사람을 정말 한두번 본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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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lastrada [ 2016-05-09 07:33:57 ]도올 선생님께서 여성주의 방면까지도 생각이 있으시고 공부와 이해가 있으신 분이라는 것은 님이 말 안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안부 관련 말씀은 잘못된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이 상상못할 수준의 만행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도 잘 알고 있었으나 님이 인용했듯이 전쟁이라는 것이 원래 무자비한것이고 한번 일어나면 여성은 더더욱 강간 상해와 같은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고 그런 희생을 전체 희생중 털끝만한 부분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성의 희생을 너무나 당연하고 가볍게 여긴것 아닌가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점 입니다. 도올 선생님이 <여성이란 무엇인가>등의 책에는 잘 써 놓으셨지만 여남이 평등할수는 없다고 발언하신 부분에 대해 동의를 못하겠고 또 책은 책이고, 여성의 희생을 가볍고 당연하게 여기며 우습게 보는 여성 멸시의 시류에 동참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 입니다.

lastrada [ 2016-05-09 07:41:18 ]지금 사회가 이정도 입니다. 교육계가 이런 수준이 되었습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4/26/0200000000AKR20160426084551064.HTML?input=feed_daum
은근히 여성을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가 용인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이 이렇게 버젓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가의 가르침도 이정도는 아니었으나 님이 말하는 대로 기독교의 유입과 서구화가 여성 멸시에 가속을 붙여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을 우습게 여기는 멸시의 태도를 견지하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잘못을 일깨워주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chance0680 [ 2016-05-09 19:35:34 ]lastrads님이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과 염려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도올선생에 대한 비판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문제될만한 실언도 아닌것 같은데.. 도올선생도 참 피곤하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진핑 상해 당서기 시절 일체의 애드립없이 신중하게 작성한 원고만 읽고 다니셨다는데, 도올선생님도 앞으로 그렇게 하셔야 할것 같습니다.

lastrada [ 2016-05-10 09:07:14 ]'여성 자신이라도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자' 입니다. 더이상 토론을 이어나갈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어짜피 수컷의 특징은 지적 우월을 다투어 이기든 근력으로 이기든 뭐가 되든 이기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공감이 불가능하지 않나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교육입니까? 민족의 기상을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이 아닙니다. 도올 선생님이 간과하지는 않더라도 가벼이 여기시는 기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교육계조차 그지경이라는 것을 도올 선생님도 좀 아시고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호소할 따름입니다.

도올이 ˝요한복음 강해˝를 할 수 없는 이유: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도올이 ˝요한복음 강해˝를 할 수 없는 이유: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도올이 "요한복음 강해"를 할 수 없는 이유
도올의 신학적 좌소와 기독교적 정체성은 어디에 있나
 
안형식 
▲ 도올 김용옥     © 뉴스파워
도올이 요한복음을 강해한 내용의 책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 이점은 반드시 짚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가 책으로 발표되고 난 후, 한기총을 비롯한 정통교단의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책의 내용을 문제 삼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단연구가로서 나름대로의 책임의식을 느끼며 관련기사와 문제의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살펴보는 중에 한겨레신문의 조연현 기자가 쓴 “도올이 ebs를 통해 요한복음 강해를 책으로”라는 제하의 기사가 눈에 뜨였습니다.

조 기자는 기독교집안 출신인 도올이 한 때 목사의 꿈을 가졌으나 접고 기독교 비판에 나서 기독교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다고 썼습니다. 원인은 2000년 kbs를 통해 “논어 이야기”를 특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이 꾸며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자유주의해석인 “역사적 예수”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도올은 자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한기총을 향하여 “19세기 이후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며 “죽어서 천당이나 가려고 믿는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라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기독교의 진면목을 보여 주겠다고 기염을 통했습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강의가 끝나면 한국 교회가 어느 수준인지 직접 교회들을 돌아가며 방문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도올은 요한복음 강의 내용을 담은 ”요한복음강해“를 펴낸데 이어 곧 “기독교성서 이해”도 출간할 예정입니다. (한겨레, 조연현 기자, 2007-02-16 오전 07:43:48)

그동안 도올이 출연하는 방송을 보면서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위의 기사내용은 물론하고 지금까지의 방송내용과 책의 내용을 보면 도올의 목적이 기독교를 비난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과시욕이 굉장한 도올이 목사가 되기 위해 한신에 입학했다가 중퇴를 하고 난 뒤에 스스로 자기변호를 위한 자가당착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어쨌든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 기독교를 적으로 삼고 있는 도올의 내면이 궁금하던 차에 요한복음 강해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기기묘묘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 대하여 먼저 원론적인 질문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도올이 무슨 자격으로 요한복음을 강해했느냐는 원론적 질문입니다. 학자적 관점에서 요한복음 강해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도올이 신학자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1. 첫 번째 이유-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 
도올 선생의 작품에 접근하기 전에 다음의 기본적인 상식에 준하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정통접근방식은 두 가지 입니다. 이것은 교회법의 양식에 따르는 것인데요, 교회법의 양식에 의하면 신학자와 목회자가 성경을 강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자격 외의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다면 이는 반드시 오류에 빠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일반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강해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의한 교회법의 양식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이 기본에 의하면 도올은 요한복음을 강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도올이 요한복음을 강해하지 말았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요한복음의 위치를 구약의 창세기서와 동등한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 창세기서가 구약을 열었다면 요한복음은 신약을 열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1절에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이 인간의 시작이라면, 요한복음 1장1절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세상의 시작이라면 요한복음1장 1절은 언약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인간의 출처를 밝힌다면, 요한복음 1장1절은 신의 출처를 밝혀 줍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창세기는 육체의 출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밝혀 주고 있고 요한복음은 영혼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는지를 밝혀 주고 성경입니다. 영혼의 출처를 밝혀 주는 성경이라는 뜻은 적어도 신의 영(성령)과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영(성령)과 접촉이 없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요한복음을 강해할 수 없다는 말로 귀착됩니다. 도올은 요한복음을 강해하기 전에 먼저 성령과 접촉되었는가의 여부부터 밝혔어야 했습니다.

신학의 출발은 실상 성령의 접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theophany(신의 현현, 신과의 만남)는 실제 신학의 출발입니다. 신과의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신학을 해서도 안 되고 더구나 요한복음을 강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을 왜곡하면 자신의 불행은 물론이요, 그 책을 통해 무신론으로 가는 영혼이 발생한다면 둘 다 파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올, 참 쉬운 사람입니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해치웁니다. 조금도 깊음이 없습니다. 그의 궤적은 점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학자로서 한 길을 전문했다면 귀한 업적을 많이 남겼을 사람이나 그의 점프로 인해 그의 학문적 가치는 항상 처음으로 되돌림되고 있습니다. 이는 피차에 불행한 일입니다.

도올은 1997년 sbs 명의 특강, “건강하십니까”, 1999년 ebs 알기 쉬운 동양고전 “노자와 21세기”, 2000년10월부터 2001년 5월까지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 2002년   ebs “도올, 인도를 만나다”,  2004년 1월 5일부터 6월 28까지  mbc “우리는 누구인가” 등에 출연하여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비판의 차원을 넘어 비난의 수준입니다.

방송에 출연하여 한 가지 주제로 오랜 시간을 특강할 수 있는 학자는 도올이 최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올이 노자에 대한 강의만 한 것이 아니고 노자의 강의 시간에 기독교와 교회를 공격하고 비난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노자와 기독교가 무슨 상관이 있어서 양쪽을 비교하며 기독교를 공격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노자와 예수그리스도를 한데 묶어 수평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몇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주목해 보았습니다.

과연 도올은 기독교와 유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노자를 수평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도올이 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며 철학을 대학 강단에서 교수하고 있는 교수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학자가 비평이나 비판을 하는 작업은 학문이며 학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비판을 하거나 비평을 할 때는 준용해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는 비판을 하는 비판자의 중심무게 추를 중앙에 맞춰야 합니다. 이어서 비판자의 시각은 수평을 맞춰야 합니다. 마치 목수가 탄탄한 집을 짓기 위해 기초의 틀을 잡는 작업을 할 때 수평기와 추를 들고 기둥을 세우는 작업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도올이 노자를 강의한다면 노자와 수평을 이룰 수 있는 학자를 비교해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노자를 도교의 시조로 본다면 도교와 비교될 수 있는 유교를 대비시켜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만약 공자(bc 552~bc 479)와 노자(공자보다 30년 연배로 추정)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사상과 서양철학사상을 비교한다면 소크라테스 (bc 469~bc 399)와 플라톤 (bc 428~bc 348)이 연대적으로 맞고 동서양을 각각 대표할 수 있음으로 양쪽을 비교해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서양철학을 대표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조금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려면 힘이 부치지요. 더구나 방송으로 진행되는 특강인데 서양철학을 잘 못 해석했다가는 뒷감당을 하기 어렵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쉽게 가기 위해 기독교를 비교하여 비판했는데요, 비판의 수준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비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비난을 통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둘째로는 파괴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얼마나 높은 대상을 표적으로 삼느냐에 따라 지명도와 대중적 인기도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도올은 기독교를 비난한 대가로 스타로 부상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를 비난하고 우뚝 선 사람이 꽤 많이 있습니다.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를 비롯하여 jms, 하나님의 교회인 안상홍 증인회, 영생교, 천부교 등은 단체까지 움켜쥐었습니다. 도올과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도 기독교를 쳐서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이들은 타부시하는 종교의 신성한 부분을 건드려 자신의 성공을 이끌어 낸 아주 독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올의 기독교 비난은 두 가지의 목적을 다 이뤘습니다.  

실제로 도올이 방송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고 난 이후, 2006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지난 10년간에 기독교인수는 십사만사천명이 감소되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2000년10월부터 2001년 5월까지 방송된 kbs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왜 중단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입니다. 도올은 자신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한기총의 시청료 거부 운동 등으로 인해 문제가 되자, 스스로 사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 내용이 대단합니다.

“도올의 논어이야기는 저 금남로를 피빛으로 물들였던 비극의 함성이 메아리친 그 날, 2001년 5월 18일, 제 64강으로 끝납니다. 저는 이제 저의 강의를 침묵으로써 다시 시작하려합니다. {주역}의 제 64괘는 未濟(끝나지 않음)로 끝납니다. 학문의 본령은 역시 자기의 앎의 나눔보다는 자신의 앎의 축적의 선행에 있으며, 연찬하는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 저는 이제 학자의 본무로 복귀하려 합니다. 그동안 이해와 사랑과 격려로서 저를 지켜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인류사에 유례가 없었던 파격을 감행하며 우리 사회에 어떤 진실을 전하려했던 한국방송공사의 눈물겨운 노력에 우리 국민모두가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저를 항상 겸손하게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한국의 언론제현께도 충심의 사의를 표합니다. 2001년 5월 21일 아침 무정재에서”

위의 도올의 사퇴 성명서의 내용을 보면 도올이 어떻게 해서 스타가 되었는지에 대한 답이 나와 있습니다. 도올은 자신의 사퇴 날과 5.18을 연결시킵니다. 도대체 논어이야기와 5.18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또 도올과 5.18이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5.18을 대비시켜 자신이 상당한 사람이며 민주주의 인사이며 kbs에 의해 핍박은 받고 물러서는 희생양으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자신을 마케팅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도올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학자라면 노자 이야기가 아닌 도올 이야기가 나와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남의 이야기를 가지고 논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가견을 이룬 학문,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는 학문을 세워 놓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올 정도의 학력과 경륜을 가진 학자가 아직도 노자를 팔고 기독교를 팔아서 치부해야 한다면 이는 빈곤한 것이지요. 

도올의 노자 강의는, 교회와 기독교를 정면 비판함으로 사회와 교회를 구분하고 있는 경계의 담을 허물어뜨리고 십사만사천명의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데 일정부분 혹은 상당한 부분 기여했습니다. 중국에서도 버린 노자, 장자, 공자의 논리를 마치 절대교훈이며 절대지식인 양 포장을 하며 기독교를 공박하는 원리로 사용한 도올의 한 이면에는 철학과 사상에 대한 빈곤이 엿보입니다. 그는 요한복음 강해라는 책 한권을 써내는데 무려 358권이나 되는 남의 책을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도올의 책 “요한복음 강해”가 죄다 남의 글을 편집한 것에 불과하다는 뜻임을 증명합니다. 

도올이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비하시키는 원인이 있습니다. 도올은 자신이 공부한 것만이 최고라는 우월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전공한 동양철학과 유교사상을 기독교보다 높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 반면, 도올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도올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는 하나 기독교인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동양철학을 공부한 것처럼 서양철학 중에 하나님을 공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특징은 “믿음”이라는 말과 “신앙”이라는 말이 도올에게서는 완전히 거부되고 있다는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도올은 기독교인이 믿는 믿음의 행위에 대해 맹신이라는 말로 비하시킵니다. 전혀 기독교인답지 못한 도올의 언행은 그가 기독교 문화권에는 접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 줍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도올에게는 신학이 생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성령의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학이 생성되지 못합니다.

도올에 대해 단적으로 평하라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도와 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열악한 수준이던지, 아니면 중국고대사상에 대한 숭배자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도올은 자신이 연구했다는 노자, 장자, 공자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그것을 설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국고대사상의 전도사입니다.

학자가 자신이 연구한 내용에 대하여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펼치는 행위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마는 특별히 철학과 신학의 부분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철학과 신학이란 사람의 가치를 정해 주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행복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철학은 그대로 실천했을 때에 실천되어진 과정이나 그 이후에 인간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입증을 필요로 합니다. 도올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티브이의 시청률로 단순평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올에 영향을 받은 청중들의 삶과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의 여부가 검증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란 인간의 이성으로 터득할 수 있는 지식체계나 혹은 깨달음을 말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이 깨달음의 대상이 됩니다. 이에 반하여 교란 인간의 지식체계나 눈으로 터득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를 일컬음이며 교에서만 신의 존재가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도와 교를 수평적으로 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올은 이미 어느 때인가부터 도와 교를 수평으로 놓고 자신의 독설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도와 교의 차원을 억지로 꿰어 맞추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도의 차원은 높이고 교의 차원은 떨어뜨려서 수평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올이 기독교를 폄하하는 독설은 바로 이런 이유에 기인되어 있습니다.

이런 도올이 ebs의 초청을 받아 요한복음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mbc에서 강의를 마친 도올은 얼마동안 브라운관에 서지 못했습니다. 얼마 동안이 지나고 나서 어느 날 뜬금없이 새만금 방조제 공사 반대시위의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일인 반대시위를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엄청나게 비난했습니다. 도올이 오랫동안 일인시위를 하며 노 대통령과 친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를 비난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ebs의 강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강연을 맡고 난 뒤에는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노 대통령을 다시 옹호하고 있습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2. 두 번째 이유- 도올의 이원론 사상 
도올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도올의 입에서 나온 말과 주장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입증해 줍니다. 과연 기독교단체들은 도올의 영양가 없는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도올의 사상적 정체는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도올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정통 기독교인이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도올은 이단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도올의 이단성은 도와 교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미 판정이 난 사항입니다. 이제 그의 사상과 그의 독특한 신학의 정체를 밝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올은 자신이 강해하고 있는 요한복음 강해에서 기독교의 사상을 분리합니다. 먼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합니다. 그래서 이원론입니다. 분리해 놓고 구약은 유대인의 경전일 뿐이라는 말로 구약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이어 기독교는 구약의 율법주의를 부정하고 탄생된 새로운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기독교가 구약을 강조한다면 이는 사기 행위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도올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주의적인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가셨고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으로 기독교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신약에서 역사상의 예수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예수 그리스도를 또 분리합니다. 전형적인 이원론자입니다. 육신의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성격을 규정하여 특성을 따로 분리해냅니다. 육신의 신분으로서 교훈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로서 교훈하신 말씀을 자신의 잣대로 분리해 냅니다. 그 모양이 제법 진지해 보입니다.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난자의 핵을 분리해내는 줄기세포를 만들어 내는 생명공학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도올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난자의 핵을 분리하는 것은 자신이 유추하여 내린 결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입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도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각각의 신분에서 교훈되어진 내용을 따로 분리해서 양자를 서로 다른 핵에 주입시켜 하나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정통교회가 주장해 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히 강조해 왔던 “믿음”이라는 핵을 빼고 도올이 주장하고 있는 “이해”라는 핵으로 치환시키기 위한 작업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철학으로 대체하는 작업이지요.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을 때에 주어지는 의인의 칭의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다른 말로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도올이 기독교의 본질인 믿음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라는 단어를 밀어 넣으니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죽은 생명체가 세포분열을 일으킵니다. 얼마 후 고사할 세포분열입니다. 테라토마 검증 바로 직전인 콜로이 상태까지는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으로 대단한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요한복음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도올은 신앙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에 치를 떱니다. 한국 기독교에서 믿음을 주장하는 원인은 교회를 크게 짓고자 하는 목사들의 탐욕일 뿐,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크게 지으라고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부수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도올선생이 정의하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답이 아니지요.

1) 기독교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간은 뭔가 죄를 범할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걸 하나님이라고 하든, 열반이라고 하든, 그런 초월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겸손을 배우게 된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열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독교는 로마 황제의 공인을 받은 이후 인류 역사에서 너무 많은 증오를 가르쳐 왔다. 수많은 전쟁이 종교로 인해 일어났다. 기독교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증오를 뿌려선 안 된다."

도올은 인간의 죽음이라는 절대한계에서 종교의 역할이 개입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든 하나님이든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고 말합니다. 겸손을 말하는 사람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이후에 기독교로 인하여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질문과는 전혀 안 맞는 답인데요. 이는 도올이 기독교에 대해 욕을 하고 싶어 한다는 평소의 심중이 튀어 나오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욕을 하지 않고는 성이 차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대놓고 욕은 못하겠고 하여 신학자 목회자에게 욕을 퍼붓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만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기독교를 욕하는 것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도올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어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이지,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울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2) 두 권의 기독교 저서를 통해 "성서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무슨 뜻인가. 
"기독교에 대해선 역사적으로 무수한 논쟁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를 빙자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등치는 사교(邪敎)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모든 기독교 논쟁의 기준이 성서여야 한다는 뜻이다. 성서중에서도 예수의 말씀이 중심이 된 신약의 복음서 위주여야 한다. 교회의 이권에 의해 생겨난 담론들을 마치 성서처럼 잘못 파악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도올 선생과 똑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투만입니다. 불트만은 신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합니다. 불트만은 신약 성경 내용 중에서 신화적인 요소와 비신화적인 요소, 묵시록적 요소, 비유적 요소가 혼재하며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취합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를 정확히 구분해 내는 작업이 현대 신학자들의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비과학적이며 신화적인 요소, 즉 상식에 어긋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일부 과장된 내용임으로 성경의 내용에서 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논리가 맞는다는 겁니다.

에밀 부른너는 기독교 철학, ‘참된 비판적 사고’에서 지적하기를, “기독교 철학은 기독자가 사고하기를 그칠 수 없고 그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며 필연적이다. 다만 기독교 철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성의 구조가 아니라 자기 영화성을 추구하는 이성주의의 오만이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도올은 飛躍(비약)을 중요 단어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대중의 종교가 되려면 맹종적인 믿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비약해야 한다는 겁니다. 도올이 비약을 통해 이해를 강조하면서 신약만을 성경으로 보고 있다는 발언에는 중대한 맹점과 모순이 있습니다. 이는 도올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신약은 대체적으로 이해정도는 할 수 있으나 구약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역으로 실토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가 구약을 유대교의 경전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중에 입맛대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고가 아닙니다. 두 가지가 하나의 뿌리로 이어져 있는데 한 가지만 취한다고 한다면 뿌리에서 이탈되고 마는 것이지요.

도올의 주장은 몇 개의 중대한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분석해 보면 도올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또 도올이 기독교 관련 책을 쓴 것은 기독교, 특히 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학자적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지 무슨 대단한 진리를 발견하고 쓴 책이 아닙니다.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 한권을 쓰는데 무려 358권의 참고서적을 참고 인용했다고 자랑이 늘어집니다. 역으로 보면 그만큼 자신의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권의 책에서 한 페이지씩만 가져다 써도 400페이지 분량의 책을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남의 책을 차용해서 자신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별칭이 따라 붙습니다 이른바 빨판이라는 별칭, 혹은 흡착포라는 별명입니다.

3. 세 번째 이유 (말씀에 대한 변개)

도올은 믿음을 맹신이라고 공격하며 “이해”를 신앙의 절대적 조건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구원의 수단으로 신앙의 절대조건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지요.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했고(요 1:12)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하셨으며(요 3:16),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하셨으며(요 5:24),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 6:28,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연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믿음이 없이는 등의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책망하셨습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고 열 두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믿음이 구원의 절대조건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에서 믿음이란 절대적인 것이며 생명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올은 이 믿음을 맹신으로 말하면서 은연중에 무식한 것으로 비하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이해”로 치환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도올의 공격과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변개시킨 것이지요. 믿음과 이해는 본질적으로 다른 용어입니다. 이 문제를 확실히 따져 봅시다. 

도올이 절대적 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이해”란 철학적 용어로 이성적인 납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인식입니다. 인식은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확실히 그렇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차이가 큽니다.

예수님께서 절대적 조건으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터득된 지식의 단계를 넘어서 그 다음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성으로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올의 차원은 단순한 이해를 통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차원을 절대적인 것으로 말했으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터득된 지식을 넘어선 다음 단계의 차원을 믿음으로 정의하시고 있습니다. 터득된 지식을 앎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야다(yada)입니다. 앎이란 구체적인 인식의 경험을 통해 지식된 지식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지식된 지식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못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유대인의 정서는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었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이해와 납득의 과정을 거쳐서는 도저히 믿음으로 연결조차 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은 가버나움(가나), 나사렛, 베다니(예루살렘에서 5리쯤), 예루살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이미 소경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문둥이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과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은 예루살렘까지도 파다하게 전파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기다렸던 것이지요. 예루살렘 입성 때에는 온 백성이 모여서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아 드리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이해와 납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와 이해와 믿음의 차이는 같이 갑니다.

여기에 더하여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적과 권능을 보았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70인의 전도단으로 파송되어 사역하는 동안에 귀신을 내쫓았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아들로 보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믿음이 생산되었고 초절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믿음에는 체험이라는, 경험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더욱 선명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강조한 “믿음”이란 성령의 체험을 근거로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확실히 말씀드리건 데, 만약에 도올선생이 앞으로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기독교에 관련되어 있는 글을 썼던 것을, 아주 완벽하고 철저하게 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래의 내용의 글을 보면, 도올 선생의 차원이 “이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고 믿음의 직전 단계인 앎의 단계까지도 들어가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이런 이유로 도올 선생은 기독교에 관한 비판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도올이 발표한 발제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종교는 더 이상 ‘이해 없는 신앙’강요 말라”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 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 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 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 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 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 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 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 하면 안 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 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 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 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 있는 신학자와 수준 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  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4. 네 번째 이유- 빨판 신학 
도올의 발제문에서는 윤성무와 같은 자유주의적(혹은 혼합주의적) 이단성향의 색채가 짙게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도올이 주장한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라는 대목입니다. 기독교를 샤먼인 토속무교와 한 라인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도올이 기독교인입니까? 유교가 종교입니까? 유교에는 신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가르침이지요. 가르침. 도올이 한 라인선상에 연결시키고 있는 유교, 불교, 토속무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상에게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금기로 강제하고 있는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행위가 오히려 도올에 의해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올이 기독교인입니까? 기독교의 아류인 이단까지도 못 갑니다. 이단은 성경을 살짝 왜곡하여 해석하고 그것을 진리로 반포하기 때문에 이단으로 판정이 되는 것인데요, 도올은 기독교 자체를 유교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무속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종교신념체계’를 논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유교의 신념이 삼강오륜이라고 하고 불교의 신념이 자비라고 할 때, 토속무교인 무속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귀신을 잘 모시면 복 받고 귀신을 거스리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이것이 무속신앙의 본질이며 전체입니다. 이것도 신념입니까? 그리고 이런 것도 신념체계로 부릅니까?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귀신 숭배는 미신행위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념이고 체계이고 간에 논리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원시신앙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에서는 주술 외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철학도 정신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념체계와 공존해야 한다니요. 나올 것이 없는데 뭐를 가지고 공존해야 합니까. 참으로 허무맹랑한 주장입니다.

도올은 그의 요한복음 강해에 동원된 참고서적이 총 358권임을 자랑스럽게 몇 페이지에 걸쳐 수록해 놓았습니다. 이를 분야별로 분류해 보면 사전류 50권, 성서류 32권, 주석류 22권, 지도류 5권, 의상류 4권, 희랍 로마의 역사철학류 43권, 희랍예술 기타 미술사류 23권, 한국기독교사 역사류 37권, 중국고전류 6권, 불전관련 9권, q자료 관련류 6권, 쿰란관련 13권, 도마복음서 관련 8권, 진리복음서관련 2권, 유다복음서관련 2권, 나그 함마디 관련 7권, 영지주의관련 5권, 교회사류 14권, 문헌비평류 7권, 카톨릭 신학류 4권, 기독론류 24권, 신학류 18권, 성서역사류 12권, 잡학류 5 권, 총 358권 입니다.

이 책들을 전부 열거하며 요한복음을 기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중 신학자는 물론하고 일반인도 안 보는 책들이 상당합니다. 물론 전통교회에서는 이단시하고 있는 책들도 상당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체 이런 책들을 통해 어떻게 건전한 신학연구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책은 자신의 논지가 실려 있기 마련이며 자신의 주장이 뼈대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목적을 가진 연구물이라고 해도 정도는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충분히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남의 책을 베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것과 자신의 것에 참고물을 통해 권위를 더해 주고 논거로 채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학자의 양심 문제입니다. 학자의 양심은 자신의 책이 아니거나 혹은 자신의 주장이 아닌 것을 차용하여 자신의 주장으로 만들어낼 때에는 학자적 양심의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남의 책이나 논문 등을 차용하는 차원인 아닌 것입니다. 대개의 뛰어난 학자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학문의 고유지번이 있습니다. 이는 과학자가 자신이 오랫동안 관찰하고 실험한 결과의 내용을 학문으로 전개하여 연구결과물을 내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자신이 이룬 실험적 결과를 학문으로 내어 놓을 때에 성취감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깊이 연구하고 결론까지 도달한 결과물을 내 놓는 것과 남의 책이나 논문을 줄줄이 열거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학자적 양심은 바로 이런 경우에 적용됩니다. 자신이 관찰하고 고민한 것은 없이 남의 책과 논문을 배껴 낸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독후감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연구한 결과물이 아닌 남의 책으로 자신의 책을 만들어냈다는 양심의 고통 정도는 있어야 학자라고 부를만하지요. 책 전체가 남의 책에서 빌려온 내용으로 채워졌다면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책입니까. 편집한 것이지요.

도올이 내 놓은 두 권의 신학관련 서적이 신학서적입니까? 신학이 그리 우스운 학문입니까? 신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한국의 정통신학자의 경우를 소개해 볼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b.a 학위를 취득 후에 신학대학원에서 3년 동안 m.div 과정을 거쳐 졸업하고 m.div 학위를 취득한 후에 th.m을 2년 동안 하고 th.m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 d.d 과정에 입학하여 논문을 완성하고 나서야 d.d 학위를 받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최소 7년에서 10년은 해야 신학박사 한 분이 탄생합니다.

학문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화 하여 체계화 하여 기술해 놓은 책 혹은 논문을 말합니다. 그 책 혹은 논문의 방향이 어디에 속했느냐에 따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과학 등으로 나눠지는 것이지요. 학자가 참고서적의 주장은 채용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막힐 때, 다른 사람은 뭐라고 말했는가? 이것을 살펴보고 반대 혹은 동의의 입장을 표명하고 자신의 주장을 풀어 나가면서 논거를 더해 줌으로 학문적 권위를 더해주기 위해 채용해야 합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논문을 쓰는 입장과 학문을 하기 위해 논문을 쓰는 입장은 천지차이입니다. bk21 사업의 일환으로 국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일정한 편수의 논문을 쓰기 위해 남의 책이나 논문을 차용하여 그것을 자신의 논리로 채용하는 것은 학문을 하는 학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논문 제조기이지요.

학문을 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논문 혹은 책을 펴내는 것은 자신의 연구에 학문적 가치가 있는 성과물이 나왔을 때 이를 발표하기 위해 출판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충분히 연구해 온 과정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도올은 신학서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책을 두 권 써놓고는 한국 교회의 신학자와 수준 높은 목회자가 배출 되어야 한국교회에 생명력이 생길 것이라고 오만을 떨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런 참고서적을 원용 혹은 인용 혹은 참고를 해서 책을 써내고, 앞에서 소개한대로 자신의 말이 신학의 원류이며,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국의 기독교가 살고, 교회가 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단의 차원도 훌쩍 벗어납니다.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5. 다섯 번째 이유- 오만과 교만
한겨레신문의 종교전문기자인 조연현 기자가 단독 인터뷰를 한 내용을 보면, 도올의 정체성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내용을 보겠습니다. 아래에서 사용하는 기호 ▶는 질문이며 ◀는 대답한 내용입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를 지난 13일 만났다. 그가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을 녹화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교육방송〉 녹화장에서였다. 도올은 100강 가운데 현재 10개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있다.

▶ 한국교회언론회가 ‘도올 강의가 드라마처럼 성경을 구성했다고 주장한다’며 성경을 제자들이 창안해 기록한 것으로 설명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복음서 기자들의 서술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목적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신문기사는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도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그런 요소가 없다면 사복음서의 내레이션이 왜 모두 다른지를 설명해 보라.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복음서)엔 예수의 사역이 일 년 밖에 안 되고, 예루살렘도 한번 밖에 안 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서엔 예루살렘에 수시로 가고, 3년간의 사역이 나오지 않는가.

▶ 그런 주장은 ‘성경엔 일자 일획의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류설’에 배치되지 않은가.
◀ 그렇게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한글 성경에서조차 틀린 데가 많다. 한자도 틀린 것이 적지 않고, 예수의 족보도 세어보라. 한대가 빠져 있다.

▶ 한국교회언론회는 ‘도올의 강의에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구질구질한 신화만으로 어떻게 기독교가 가진 세계적 권위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또 영지주의가 역사에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영지주의는 실체가 없었다. 그것이 ‘발전한 신학’에서 밝힌 바다. 그것은 헬레니즘이 발달한 당대 우주관이었을 뿐이다.

▶ 한국교회언론회는 ‘강의 곳곳에서 신학적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누가 과연 오류를 범하는가. 기독교인들은 남을 비방하면 안 된다. 자신들의 신념만 종교고, 나머지는 이단이라면 거꾸로 보면 자신이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내면의 결단이다. 도올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 얘기로 신앙이 깨진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얘기들로 벌벌 떠나. 보수교계가 대표자를 정한다면 누가 더 정통적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지 공개 토론을 할 용의가 있다.

▶ 기독교에 깽판을 놓는 게 아니라 북돋아 돕고 싶다고 했는데. 
◀ 나도 환갑이 다됐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봤지만 효과가 없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정도로 가게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기독교단체들은 나와 협조하는 게 좋다. 나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부흥시키는게 현명하다.

▶ 현재 기독교의 문제를 뭐로 보나. 

◀ 오직 성전건축에만 매달리는 거다. 건물엔 사람이 차야 은혜가 충만해진다. 사람보다 건물이 커서 썰렁하면 안 된다. 식당이 잘된다고 건물 크게 지은 식당 치고 안 망한 식당 별로 없다. 현재까지 교회 건물이 사람으로 꽉꽉 차는 곳은 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다. 한국 교회가 없었다면 세계 기독교 자체가 20세기에 별 볼일 없어질 뻔했다. 한국 기독교는 그만큼 위대하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깨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자신의 신앙만이 유일한 신앙이라는 독선에서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 민중들은 기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신앙을 바르게 갖도록 도와야할 사람들이다. 건전한 상식을 자리잡게 하는게 내 강의의 목적이기도 하다.

▶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단시일 내에 세계가 놀랄만큼 빠르게 정착했다고 보는가. 
◀ 우리나라는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기독교를 유입한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다. 유학이 가진 공백을 인간 평등으로 메우고, 양반부터 상민까지 뿌리박고 있던 샤머니즘을 기독교가 흡수했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은 위대하다. 또 우리 민족은 음주가무를 즐긴다. 노래방 봐라. 찬송가가 준 감동이 우리 민족을 기독교에 빨려들게 했다.

▶ 세계에서 대표적인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의 여러 종교를 직간접으로 섭렵한 도올이 권하는 한국 종교인의 자세는 무엇인가. 
◀ 자기 신앙은 내면에서 지키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선 관용하고, 모든 사물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 그런데 신학대 공부를 왜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는지 
◀ 잘못된 길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를 개인의 힘으로 전환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내가 신학대를 나와서 목사가 되면 나의 카리스마로 인해 엄청난 성도들이 몰리는 대형교회를 만들게 될 것 같아서 미리 그만두었다(웃음). 나는 신학대학을 들어가자마자 큰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인기가 높아 신도들이 많이 생겨났다. 나는 그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결정은 두고두고 후회스럽지 않다. 잘한 일이다. (한겨레,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지금 도올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슨 말일까요?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 봤는데 효과가 없었다는 말과 차라리 나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부흥시키는게 현명하다"는 말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기독단체들은 나와 협조하는게 좋다"라는 말은 위협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도올과 타협하지 않으면 도올에 의하여 기독교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일까요. 도올은 기독교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독교 단체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동양학자적 오만함이 뼈골에 사무친 광인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진리를 앞에 두고 저리 오만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것도 자신의 신학은 없고 죄다 남의 신학을 빨판으로 흡수해서 그것을 자신의 책으로 만들어낸 뿌리 없는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목사, 작가, 한국기독교목회자협회 대표, 한국학술재단 학술연구자, 정책비평가, 뉴스타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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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7/15 [10:54]  최종편집: ⓒ newspowe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도올신학에 대해서 권신희 08/07/15 [21:37]



10여년 전에 읽은 도울의 책 중에서 (제목은 잊었다) 자신이 어떻게 기독가정에서 동양 철학에 올인했는가 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체험을 주의 깊게 읽은 적이 있는데 설득력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20세 전후에 지독한 통증을 동반하는 류마티즘이 발병했는데 백약이 무효라. 아편 주사를 직접 통증 부위에 주입을 했어야 할 만큼 고통에 시달리다가 당대의 유명한 한의사 권도언씨의 침을 맞자 통증이 사라졌다다는 내용이었다. 젊은이에게 이보다 더 귀한 복음이 있었을까? 부친의 병원에서 몰래 아편 주사를 놓았다면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겠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고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귀한 단초가 나온다. 우리 기독인이 자신의 체험을 그것도 너무나 중대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겪은 체험이라면 밝히 보이는 진리의 말씀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진리를 혹 무시하지 않을까? 아마 그 고통이 진하면 진할 수록 그 체험은 깊을 것이고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진리에 깊어 질 수도 있고 또 도울과 같이 진리와 무관한 세계로 들어 설 수 있는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다. 많은 한국 기독인들은 오늘도 이러한 지독한 고통이라는 체험을 하기에 진리에 벗어나 타협하기도 하고 또 과감히 진리로 돌입하기도 한다. 만일 그 타협이 자신의 생업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은 물리치기 정말로 어렵다. 이것은 단지 도울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진실된 삶으로의 초대이이자 특권이다.





도올 궤시키 아무게 08/07/15 [23:14]



개 같은 넘 일고의 상대의 가치도 없는쉐키 그 영혼아 불쌍하도다 ㅉ ㅉ 미친넘





도올아 도올아 참새 08/07/16 [08:47]



도올아 너가 뭘 안다고 그러냐
제발 좀 가만히 있거라 잉
징말 생긴대로 노네






도돌신학에 일부 동의하는 바있으나... 독자의눈 08/07/16 [14:53]



도돌신학의 뿌리는 자유주의 본산지 유럽과 달리 뿌리가 일본신학에 두고있는 것 같다.구약폐기론에도 동의 한다. 한국교회가 너무 성경을 돈 중심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소리를 다하면서도 신사참배,
친일청산,독도, 종군 위안부 문제등..일본에 관해
침묵하는 이유가 뭔지 참..궁금하다. 도올역시 그런 언급을 그의 저서나
강의를 통해서도 ..다 들어 본것은 아니나 ../..별 접한적이 없는것 같다.

장사속으로 피하는거라면 동의 받지 못할꺼다,. ..
도올 선생은 그점을 명백히 해야 객관적이 평가를 받을 것이다.

신학 신앙문제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국가 정체성의 문제를 무시하면 안되기 때문..
독도는 누구땅인지 기독교신앙을 언급하는 누구에게도 들어 본적이 없어 하는 말이다.





이런 한심한... 예루살렘 08/07/17 [15:13]




" 교회법의 양식에 의하면 신학자와 목회자가 성경을 강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자격 외의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다면 이는 반드시 오류에 빠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일반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강해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의한 교회법의 양식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이 기본에 의하면 도올은 요한복음을 강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런 수준의 사람들때문에 욕을 먹는 거지요.. 쯧쯧...

신학교입학시험에 폭넓은 독서를 요하는 '논술' 같은 시험을 치든지 해야 목사들 수준이 좀 낳아 지려나요... 아님 상위 학교 몇개 빼고 다 없애든가.

이명박은 한국교회의 병폐가 화신처럼 나타난 겁니다.






도올 선생의 용기가 부럽다 예수교도 08/07/17 [16:22]



도올이 신학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었이 문제입니까?
차라리 도올의 일갈에 박수를 칠 용기가 없다면 침묵함이 어떠신지..
도올의 이야기 하는 신학은 한기총 테두리외에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한기총 그룹에 얽히기만하면 이단이요 신학도 아니요 등등 폄훼하는지 이해안됩니다.
적어도 신학박사라면 모든 신학에 대해서 박사입니까? 각자의 분야에서의 전문가 일 뿐입니다. 도올의 폭넓은 신학적 학문 넓이는 그 분야에서도 수준급이라 봅니다.
비지니스측면의 신학과는 격이 완전히 다른 성서학 분야에서 만큼은 인정합니다.
용기없는-밥그릇에 목메인-신학자들에 비해서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의 신학에는 다소 거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한국기독교의 위선과 무식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답지않게 정제된 느낌입니다.
어느 목회자라도 그와 일대일 신학적 공개 토론을 할 용기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한명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무식하니까요..





안타깝습니다. 토인나라 08/07/17 [19:11]



우선 안목사님의 용기가 부럽기도하군요. 허나 도울을 선전하는 것인지 대항하는 것인지 분명치 네요. 그정도의 논리나 문장력을 가지고는 도울의 논리에 흠집하나도 날것같지 않네요. 정말로 입맛이 쓰네요. 그냥 한데 더 맞고 잠잠하는 것이 날것같네요. ㅇ ! ㄷ ㄷ ㅎ ㄹ!!





내가 아는 분명한 진실..^^ 장동철 08/07/18 [01:32]



내가아는 분명한 진리...^^
도올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
도올은 먹어야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도올은 똥을 싸야 살수 있다는 것..
도올은 공기를 마셔야 살 수있다는 것..
도올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것..





도올이의 치아는?? 치과의사 08/07/18 [12:24]



하얀 저 이빨은 완전 틀이다
저 틀이를 빼버리면 안존 합죽이
틀이를 빼서 어디다 숨겨버려야 말을 안할려나...





예수 팔아 개인적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야옹 08/07/18 [13:43]



난 개인적으로 도올의 학습방식(??)을 신뢰하지도 선호하지도 않는다.
'bible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bible을 텍스트로 보겠다는 도올에게 딴지를 거는 건 위선적으로 보인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사는..'운운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신자들로 하여금 '당신들'을 통하지 않고 神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좀 주든가..






도올의 교만은 도를 넘었네요 사랑 08/07/19 [17:40]



얕은 학문으로 믿음과 이해도 구분 못하는 교만과 착각에 빠져있는 도올, 참으로 불쌍한 영혼입니다





도올은 과연 성경에 심취해 보았을까. 김선생 08/07/19 [18:30]



내용을 읽어도 보고 강의를 들어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하나도 그의 말로 내 마음의 흔들림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뭐라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자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매어놓은 것에서 풀림을 주기위한 것이어야하기 때문에 도올의 그 말하는 바를 나는 탓하고 싶지않다.
그도 말할수 있는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도올많큼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자가 도올에 대한 평을 할 수 있을까? 도올 많큼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은 사람이 도올의 평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그릇은 각자가 다 틀리다고 다투어 말하면서도 자기 밥그릇에 대하여 평을 했다면 맞는지 않맞는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할일이다.
밥 그릇이 드럽다고 말하면 말하는 사람이 부끄러운 세상이 아니라 밥 그릇 드러운 사람이 밥 그릇을 닦아야 하는것 아닌가? 우리는 복잡하고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성경에서 단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냐? 죄를 짓지 않느냐 하는것이다. 죄를 지면 기독교 인이 아니고 죄를 짓지 않으면 기독교 인이다.
너무나 간단 하지않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또는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챙기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 볼일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파는것은 아주 간단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기도하고 그 값으로 감사와 영광은 자기가 차지 하는것 그것이다.
말을 한다면 바다를 먹물 삼아 써도 다 못 쓰겠지만 그 런 싸움을 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일이다.
미워하는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읽으면서도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들이 대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 즉 하나님이 보시는 너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음에 다시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ilikebible 08/07/22 [12:10]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보고 그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런지요?





성경을 대하는 자세는 ilikebible 08/07/22 [14:12]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보고 그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런지요?





제 생각은 그런뜻이 아닌거 같은데요? 성민정 08/07/26 [01:50]



도올 선생님의 '사랑'이 엿보이는거 같읍니다.철학교수이시지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시는 분이신거 같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시는 믿음또한 꾸준히 신앙생활하는 우리보다 더 돈독한거 같네요.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궁금하고 연구하고 호기심많고 순수한 어린아이같이 느껴지는데...그리고 지금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고민하는 내용과 너무나 똑같구요.. 왜 기독교에선 비판하는상대방을 덜떨어진 사람으로 매도하는가요?





차라리 무조건 서로 사랑만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좋았을걸요 성민정 08/07/26 [02:22]



믿기만하면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이 오히려 내면에 이기심과 아집을 형성하는 종교되어가고 있어요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만심과 하나님자녀라는 교만함이 하늘을 찌릅니다.지도자들도 각성해야합니다.이러한 가르침이 심판받을때 구원받지못할 영혼들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지싱겁니까요?도올선생한테 구원못받는다고 함부로 말할 권한은 무엇인지요? 그것은 하나님의권한이죠.도올선생같은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많읍니다.알면서 모르는척하시고 무조건매도하는 태도에서사랑을 손톱만큼도 엿볼수가 없네요.얼마나 하나님이 알고싶으면385권의 책을 읽으셨겟어요?왜 저랑 받아들이는 시각이 다른지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면 하나님을 닯아가는 자라고 생각합니다.예수님을신격화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떠날사람없읍니다.하나님 말씀그자체로 보배롭습니다.더깊이 알고싶은사람들에게 교회는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읍니다. 비싼학비내고 꼭 신학교를 가는것은 옳지 않읍니다.하나님을 아는데에 교회에서 열린자세가 필요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라고 봅니다.





황당한 논리 과객 08/07/29 [00:10]



그런 논리라면 기독교인은 불교나 다른 종교에 대해 일체 언급도 말아야 하며 교회 밖의 어떤 학문도 언급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모순도 생각하기 바란다.
불교신도가 아니면 불교에 대해 말해서는 안된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학자로서 기독교의 문헌을 연구하여 학문과 역사로서 학설을 개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기독교는 교회안에서만 활동해야 하고 밖에 나와 아무 것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더구나 도올이 기독교인 보다는 비기독교인을 위주로 강의한 내용이라면 기독교는 더욱 간섭해서는 안된다.
도올은 기독교를 믿으라고 설교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상과 철학 역사로서의 성경을 강의한 것이다.
이런 글은 비기독교인은 물론 깨인 기독교인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임이 분명하다.





자넨 이미 주 하나님의 짐승 사탄이네. 이재영 08/08/01 [00:55]



쓰레기?글들중에... 딱!! 한말!! 자네가 사탄인 이유!!!
지난 10년간 십사만사천명





도올선생은어원학적 근거까지 따지면서 연구하는 대단하신 분이다. 도올제자 08/08/01 [03:51]



이 시대에 석학이라면 석학이신 도올선생, 외국 유학을 11년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냥 책을 쓰신 것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의 근거까지 어원학적으로 따져서
책을 쓰시더군요. 예전에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그분의 방대한 학문적 박식함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민들이 아무리 길고날아도 도올선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그 분은 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전세계적으로 종합해서 평생 배우시고 연구하신 분이십니다. 도올선생을 만만히 보시기보다는 그분의 도서를 많이 읽어보심이 좋을듯 합니다. 읽으시면서 이것저것 함께 연구해보시면 도올선생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실 겁니다. 우리들이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만큼의 지식이 받쳐주질 못해서 이해를 못할 뿐이라는 것 꼭 명심하세요. 공부를 하면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강의입니다.





이 시대에 한국에 사도 바울이 나타나도 똑같다> 무조건 반대 08/08/01 [08:11]



우선 SKY 대학 출신이 아니라, 안 끼워 줍니다. 그리고 한국목사는 세상적으로 왕손이 없어서 란 끼워 줍니다. 그리고 미국서 공부릉 안했으까 안 끼워 줍니다. 그 당ㅤㅁㅡㅇ에는 거주지 제한과 골프 화원건 수로 따지겠지요.전도서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도다는 없습니다.모든게 다 돈이 됩니다 입니다.나보다 잘난 놈은전혀 인정을 안하는게 한국사회 입니다.그리고 대부분이 가짜 미국박사가 무엇으,로 김교수와 붙어서 한판승을 겨룹니까? 아예 승산이 없으니까 , 똥개가 불독을 보고서 소리 크게 짖어냐 보지요.





도울 선생이 유명하기는 유명하네요, 기쁜진주 08/08/02 [14:54]



모두다 도울 선생에게 너무 관심있는것 아닌지...
사랑표현을 그렇게 까지 욕을 하면서 표현할것 있을까요?
이름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관심 있지는 않을텐데...
욕이던 칭찬이던 도울 선생은 기분이 좋으시겠네,
온국민의 관심이 한몸에라니,
예수님이 돌아가실때 예수님편에선 사람이 있었던가요?
어쨌던 부정적이고 불평과 비판은 좋은것은 아니지요,
왜냐면 어차피 그모든것은 각본데로 되어지니까요,
우리모두는 피조물주임을 잊고 사는것이 문제라니까요,
모든걸 믿고 맡겨 보시면 어떨런지...





딱 목사님다운 글이네요 목사님답네 08/08/20 [22:54]



장황하고 빙빙돌리고 니말에도 일리는 있으나 신의뜻을 어찌 인간이 알겠느냐.. 뭐이런식.. 정말 도올선성과 대면하여 대화하고 토론해보면 신의뜻이란말을 한시간동은 60번은 할껍니다. 강의도 듣고 책도읽어보고 욕할려면 해야지요 그래야 기독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동의를 얻는 글이 될듯합니다. 기독인들이 동의해주고 도올선생욕한다고 자기글이 논리적이고 옳은글이라는. 착각을 하지 마시길..





사랑이 08/10/21 [16:51]



우연히 이 글을 읽고 나니 도올선생님의 용기에 박수보내드리고 싶습니다. 한국기독교의 권위에 맞서 쓴소리하실분이 이 나라에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내 생각과 같지 않다고 해서 하나에서 열까지 무조건 비난하면서 이단이라 몰아부칠게 아니라 '그러한가' 하고 한번쯤은 생각해 보셔야 이 나라 기독교가 발전할 거라 생각합니다 도올선생님 말씀중에 이해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단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에를들어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내용들을 제자들에게 이해 시키셨기에 그리스도임을 확신하는 믿음이 생긴 것처럼 어떤일에 대한 이해가 되야 믿음과 화합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성령의 체험이 없으면 신학이 생성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목사님들은 성령이 함께하시니 성경의 뜻과 의미를 막힘없이 다 아시겠네요? 이제는 도올 선생님을 무조건 이단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 하기에 앞서 이런일들을 통해 기독교가 자성의 기회로 삼는게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왜냐하면 도올선생님이 막강한 기독교계로부터의 비난을 무릎쓰고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고, 100프로 잘못된 말씀만 하신게 아니거든요. 목사님이 쓰신 반증기사가 기독교계의 현실을 반영한것 같아 마음이 씁쓸합니다





귀가있으면 08/11/02 [13:14]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말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보면 언제나 목사들은 믿으라는 소리밖에 안한다.. 가장중요하다고 말한 사랑에 대한 실천에 대해선 양념쯤으로 어쩌다가 언급하고 마는 수준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에 사랑이 무엇인지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나?
왜 사람들이 개독교라고 침을 뱉는지 기독교인들은 뼈저리게 반성해야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도올의 말을 듣고도 느끼지 못하고 반성하지 못한다면,
약이 입에써서 못먹겠다고, 죽음의 길로가고 있는 환자의 꼴과 같다.






bn 09/01/05 [15:07]



도올은 어어령, 양주동과 함께 금세기 한국3대 이빨꾼으로 평가닫는 대단한 입심의 소유자다. 그런 도올과 말로 겨루는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서로만나
주먹으로 판가름하시길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영의 법 김바울 09/01/12 [11:34]



로마의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나라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반드 시 그 나라의 법으로 살게 되어있다.

인간이 사는 나라는 다음 세 가지의 법으로 살게 되는데, 죄의 법과 사망의 법과 생명 의 성령의 법이다. 어느 법을 지키느냐에 따라서 어느 나라 백성인지가 구별된다.

◇ 법(法)이란 삼수 갈거(去)의 합성어로서 물이 흘러감과 같은 순리, 원리, 법칙, 방법을 法이라 한다.

◇ 히브리어로 토라는 야라에서 만들어지는데 물이 흐르듯 “가르치다, 쏘다”는 의미 로 지적하며 가르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법은 나라 백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며, 법을 범하면 범죄자가 되는 것 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1. 법(뱀의 법); 세상의 백성(초등학문)

죄가 성립 되려면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을 범하게 될 때 죄인이 된다. 최초 인간이 아담은 하나님께서 각종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되 좋고 나쁨의 지식의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는 명령(법)을 받았는데, 하와가 뱀 의 유혹에 넘어가 좋고 나쁨의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으니 명령을 범한 범 죄가 된다.

이 죄는 어떤 죄였는가 간음죄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법을 가진 자를 남편이라 하는데 하와는 아담이란 남편을 두고 다른 남편인 뱀의 법을 받았으니 이것이 간음죄요, 간음한 아내가 갖다 준 지식을 먹은 아담도 간음한 자가 된다. 이 간음죄의 결과는 사 망에 이르게 되어 불 못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이 좋고 나쁨의 지식을 죄의 법이라 하는 것은 이 지식이 죄를 짓게 하는 방법이요 가 르침이며 이 법이 세상에 들어왔으니 세상의 초등학문 곧 죄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선 사망이 죄의 법으로 다스리고 있으니 세상 나라 백성은 반드시 사망 곧 불 못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가시어 영생의 방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사망의 법(율법); 광야와 가나안의 백성

율법(토라)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는데 주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백성 만들려는데 있었다. 율법이 주어진 곳을 광야교회(행 7:38)라 하였으니 결국 율법은 교회에 주어진 법이었다.

율법은 옳은 자를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 하였고(딤전 1:9),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롬 5:13~14) 하였으니 율법이 주어지는 것은 죄를 깨닫게 되며 그 결과는 사망인 줄도 알게 된다.

율법을 받게 되면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게 되니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도리어 나 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데,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계명으로 나를 죽였다 하였 으니 율법을 사망의 법이라 한다(롬 7:10~11).

그래서 율법에 근거하여 죄인을 붙잡아 옥에 가두게 되는데 거기서 해방시켜줄 분을 기다리게 된다. 율법은 죄가 아니며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 이 었으니 광야와 가나안 교회에 주어진 법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신 그리스도 예 수를 기다리라.


3. 생명의 성령의 법(부활의 법); 하나님 나라의 백성

율법에 의해 검거되어 정죄 받고 옥에 갇힌 상태를 죄와사망의 법이 싸운다고 하며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가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 이시다. 사망에 처한 자를 살려주시니 생명의 방법이요, 육의 몸에 심고 영적인 몸으로 살리시 니 영의 방법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을 자는 반드시 율법에 의하여 옥에 갇혀서 하나님이 정한 기한까지 종의 신분으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앞으로 하나님의 나 라를 상속받기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며 기한이 차면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리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새 언약인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옛 언약과 다르지 않으니, 돌판에 주셨던 옛 언약을 이 제는 영으로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시는 것인데, 내가 믿고 십자가에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을 때 기록되는 법으로서 반드시 부활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법이요, 죽은 자를 살리라고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이며 진리의 영으로 임재하시면 그리스도 하나님 의 형상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은 자는 사망에서 부활하여 산 자이며 천사와 동등하며 거 룩한 나라요 택하신 족속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나라 상속자로서 사도의 삶을 사는 자 입니다.


4. 당신은 지금 어느 나라 법으로 살고 계십니까?

죄의 법 아래서 사십니까?
속히 결단하시고 교회에 나가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시고 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 동안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앞으로 상속자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훈련과 교육을 받으십시오.

사망의 법 아래서 사십니까?
인내하며 기도 하세요. 내게 생명과 성령의 법을 가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아들은 부활하신 자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마지막 나팔을 부는 사도여야 합니다.

속히 후견인과 청지기가 지키는 옥에서 놓임을 받고 창세로부터 감춰진 천국의 비밀을 보고 들음으로 성취되는 기쁨의 날이 속히 오시길 기도 드립니다.

http://www.stauros.net






나이스 09/01/17 [16:34]



첫 번째 이유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 여기서 피식 웃을수 밖에 없네요





긴 글에서 느낀 한가지... 삼한사온 09/06/15 [13:45]



다른건 제가 논할 만한 지식이 없으니
옳은말 같기도 하고 미친것 같기도 하지만
긴 글에서 느낀거 하나...
도올선생의 종교관이
하나님 예수님을 믿지않고 살았던 때의 저의 생각과 흡사하군요.
지금도 저런 글을 접하다 보면 제가 헷갈리면서 뭐가 뭔지 혼란스럽네요.

목사님도 참 대단 하십니다.
돌선생과 맞짱 뜨시는걸 보니 살맛나네요.
제가 돌선생 강의 들을땐 어마어마한 지식이
머리속 어디에 다 들어가 있는지 참으로 신묘막측 이라 했습니다만...
모르면 그게 다 맞는 줄 알잖아요.
세상엔 연구대상도 가지가지 참 많군요.






우리나라 목사님들 수준이... 가느냐 마느냐 10/11/30 [01:12]



대부분 이 정도인가요? 앞으로 교회에 다닐까 하는데
이 정도면 집에서 예배 보는게 나을 것 같아요






도올,,,그리스도인일까? 네 맞습니다. 공상망상 12/01/16 [23:51]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면 그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요 교회를 머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도올을 그리스도인이라 하심 맞다고 본인은 말하겠지요. 그것도 공공연하게...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볼 때에 과연 그가 그리스도인일까요? 내가 그를 맞다 안맞다 기준을 잡고 판단하긴 곤란 하지만 적어도 그의 삶을 보면 아하...아니구나 하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내릴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너무도 인간적이기에 인간으로써 최대한 할 수 있는 길을 걷고 있을 뿐 그리스도인으로써의 길을 걷는다고는 전혀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를 인신공격하는 것은 아니고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아니라는 것이요, 그에게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는 그냥 한 인간에 불과 합니다. 제아무리 떠들고 소리지르고 고함질러 보아도 100미터만 떨어져 있으면 그 소리는 무용지물입니다. 제아무리 열강을 하여도 열강중에 흘러내리는 땀을 싱겁게 만들순 없습니다. 제 아무리 그리스도인인척 이야기 하고 다녀도 선악간에 행한 일들을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제일 정확하게 말합니다.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니? 라고 물어 보십시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결코 그를 수 없다는 것이 아이들의 표현이니까요.
문제는 이제부터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하고 다녔는데 하나님께 갔더니 너 누고?? 하면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있는가 집사님 14/09/12 [08:21]



나도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힉스 입자)에 근거하는 건가요? 그 사상은 연금술에 가깝네요 생각하는 사상은 자유이지만 역시 철학적이고 영적(미신.이단 교주)인 사상이네요.이단 사상인 판타지 개념이네요.특정 원소들에게 특정 방사선을 투사시키면 원자의 핵이 변형되면서 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알려 졌지만 그 비용이 금 보다 훨신 비싸기 때문에 위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연금술이 진짜 금을 만드는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계몽에 있듯이 납을 금으로 변화 시킨다는 것과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은유에 지나지 않습니다.금은 변화하는 (엔토로피)를 거부 하는 유일한 금속이듯 금의 영원 불변성에 끌리 뜻이 인간은 신에게 다가가게 되고 끌리게 됩니다 이러한 영역에 인간이 침범한다는 것은 뱀에 꾀에 빠진 아담과 이브의 생각과 뭐가 다른가요?.연금술은 몇 천년이 지나도 납을 금으로 바뀌지 못했 뜻이 인간이 신이 아니며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연금술의 오래 된 금언에는 "인간이 바로 신이다"구절이 있습니다.납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받아 드렸 뜻이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인간을 금 같은 존재로 승화시키려는(영적이든 지적이든) 고귀한 인간 혹은 신으로 승화시키려는 신성화 된 존재로 탈바꿈 하려는 사상에 불과한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영지주의적 발상인 "마니교"나 뭐가 다른가요? 인간도 정진하면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신이라는 존재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마니교의 교리와 뭐가 다릅니까? 그리고 인간이 교육을 통해 신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요셉 스미스"(몰몬교.말일 성도 성도예수 그리스도교회)와 뭐가 다릅니까?성경과 역사 철학 나아가 동서양을 아우르며 기독교를 이해하는 도올 선생의 사상적 폭을 두루 섭렵하신 줄 압니다.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마니교 사상에 심취하다 결국 떠나게 됩니다 그의 "고백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요한복음만 중요시하는 도울 선생님의 헬레니즘 시각으로 보는 편파성과 저와 같은 일개 신자들도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와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이기보다는 후대에 제자들이 가르친"예수에 관한"복음서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요한 복음 하나님만 아닙니다.도울의 종교 사상은 싱크리티즘(syncretism).혼합주의 사상에 물들어진 전형적인 인기 영합한 영지주의자에 불과 합니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침범하거나 범하면 반듯이 징벌을 받았 뜻이 우리 인간은 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면 복제화가 된 돌연변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가장 무서운 범죄는 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며 나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 어리석음 입니다..하나님의 진리도 중요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더 중요시 합니다

집사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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