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0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 심귀연 - 교보문고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 심귀연 - 교보문고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

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의 생각

종이책15,120원
eBook10,530원
sameBook
심귀연 저자(글)
· 2024년 04월 20일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국내도서 > 인문 > 철학 > 청소년철학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철학/심리



수상내역/미디어추천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문화일보 > 2024년 4월 3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 2024년 4월 3주 선정
“핸드폰, 탁자도 살아 있다고?”
‘공생’을 위한 실천, 신유물론 입문서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몇 년간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 세계가 휘둘리면서는 충격을 넘어 공포심마저 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전에 겪은 적 없는 폭염, 홍수, 추위 등 이상기후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다. 인류는 이러다 정말 종말이 오는 것 아니냐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대안적 삶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급부상한 사상이 신유물론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심귀연
인물정보
철학자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오이코스 인문연구소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생태인문학과 철학적 문제들을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쓴 책으로 《신체와 자유》 《철학의 문》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취향》 《내 머리맡의 사유》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있고, 《인류세와 에코바디》 《인류세 윤리》 《신유물론⨉페미니즘》 등을 함께 썼다.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그 무엇에도 군림하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세상을 바라, 이 책을 썼다. 그것이 공멸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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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페미니즘

서양의 환경생태철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모리스 메를로퐁티(큰글자책)

내 머리맡의 사유

취향(큰글자도서)

취향: 만들어진 끌림

신체와 자유(큰글자책)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철학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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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1장. 물질에 대한 새로운 사유
유물론과 신유물론
무엇이 실재일까
인식론이 보지 못한 것
의인화는 왜 위험한가
생동하는 물질
기후위기가 말해 준 것

2장. 신유물론자들
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

3장. 왜 지금일까
임박한 종말
자연을 지배할 수 없다
이분법의 문제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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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신유물론은 사소하고 사소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제시합니다. -6쪽

데카르트의 영향력은 근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정신을 가진 인간은 능동적인 주체이고, 물질은 수동적인 객체 혹은 죽은 것들이라는 이분법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22쪽

보통 물질 하면 떠올리는, 수동적이고 죽어 있는 것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 이후부터 형성되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물질관에 영향을 받은 유물론을 ‘생기 잃은 물질’에 관한 이론, 즉 구유물론이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반면에 신유물론은 ‘활력 있는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유물론을 ‘신물질주의’라고도 하는 이유입니다. -24쪽

신유물론자들은 인간이 자신들이 의식해 포착한 물질만을 인정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의식에 포착되지 않은 무수한 물질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질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체로 활력을 가지고 있다고 신유물론자들은 주장합니다. -27쪽

바위와 인간은 서로 다른 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물성은 확장되고 변화하기도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합니다. 바위와 인간인 나는 모두 물질이지만,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습니다. -31쪽

라투르도 근대를 비판합니다. 인간 중심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인간은 순수하게 정신적일 수 없으며, 자연과 분리된 문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사유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에 담겨 있습니다. -42쪽

근대인은 문명과 질서라는 이름 아래, 이것과 저것을 나눈 후 제거하고 정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라투르에 따르면 단 한번도 근대인이 꿈꾼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라투르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47쪽

라투르에게는 행위자들의 연결망만 있을 뿐입니다. 연결망은 “행위자들이 연합한 효과이지 행위자들이 연합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 라투르의 주장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여행 가방과 기차와 지도 등이 연합한 ‘효과’입니다. -50쪽

이제 배제되었던 존재들, 예를 들어 돼지, 병아리, 강 등은 수단이 아닌 행위자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비인간 존재들의 목소리를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행위 능력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62쪽


브라이도티는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라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하고 이들 간의 상호 작용 혹은 연결성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인간과 남성의 존엄성과 책임을 보통 강조하는데, 비인간과 여성의 존엄성과 책임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66, 67쪽

브라이도티는 보편적 주체를 거부하는 대신에 유목하는 주체를 받아들입니다. 주체는 더는 확고하게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신하는 주체로 인해 나와 너,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다시 말해 유목하는 주체는 보편적인 본질을 품는 변하지 않는 무엇이 아니라, ‘동물-되기’, ‘타자-되기’, ‘벌레-되기’ 등,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하는 존재입니다. -69쪽

불변하는 본질이 없다는 것은 재현을 위한 원본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원본이 없으니 재현이 불가능합니다. 브라이도티는 원본이 없어 재현할 수 없는 상태를 ‘반-재현주의’라고 말합니다. -80쪽

브라이도티는 여성이 그간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이것이 브라이도티의 신유물론이 페미니즘과 맞닿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83쪽

브라이도티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목적과 수단으로 보지 않을 뿐입니다. 즉 인간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기술은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모습을 지닌 존재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87쪽

베넷은 이 지점에서 문제 제기를 합니다. 도구를 생산 수단으로만 삼는 태도는 인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베넷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일원론의 입장에서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이해하는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을 주장합니다. -95쪽

인간이 버린 쓰레기는 매립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기 넘치는 화학 물질과 휘발성 강한 메탄 등을 생성합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물질은 스스로 영향력을 미치는 힘을 만들어 냅니다. 베넷이 말하는 생기란 이런 물질의 활력에 관한 것입니다. 전기력도 한 예입니다. 전기의 활력인 것이니까요. -101쪽

사이보그는 인공두뇌를 가진 생명체로, 기계와 유기체가 얽힌 혼종체hybrid입니다. 마치 허구적인 존재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라고 해러웨이는 말합니다. 안경을 쓴 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 마이크를 들고 강의하는 교수 등을 떠올려 보세요.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이보그를 만납니다. -117쪽

러므로 우리는 ‘반려종’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 그리고 사람은 이제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를 나눕니다. 서로를 응시하며 관심의 대상자로 식탁에 앉게 됩니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서로에게 감염되는 행위입니다. 이때 개나 고양이는 더는 가축이 아니고,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들도 아닙니다. -121쪽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무기체인 기계,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부단히 횡단합니다. 〈사이보그 선언〉과《반려종 선언》의 공통점이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인데, 신유물론의 ‘새로운 가능성’은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열립니다. 즉 새로운 가능성이란 물질의 활력을 인정하는 것뿐 아니라 물질들 간에 무언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124쪽

실뜨기는 상대가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고 변형됩니다. 이것이 함께 되기, 공동생성의 존재론적 안무이지요. 해러웨이에게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실뜨기의 얽힘과 그 효과입니다. -127쪽

퇴비가 된다는 것은 공동생성을 위한 과정입니다. 퇴비가 되어 다른 싹을 틔우기 때문입니다. 싹은 자라서 줄기와 잎, 열매를 맺고 이윽고 다시 퇴비가 되는 순환 과정을 겪습니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생명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닌 ‘지속’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진화의 결과물이지, 인간이기 위해 진화를 거쳐 온 것은 아닙니다. -131쪽

인간과 인간의 소통도 어려운데, 인간과 개의 소통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요. 소통한다는 것은 훈련의 과정을 거쳐 서로를 변화시키는 행위입니다. 해러웨이는 이렇게 변경된 형태를 ‘이형변이metaplasm’라고 합니다. 변경 목적이 뚜렷하든 아니든 변경된 모든 경우를 이릅니다. -136쪽

바라드는 자신의 철학을 ‘행위적 실재론’이라고 규정합니다. 행위적 실재론은 간단히 말하면, 행위자는 행위함으로써 실재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행위적 실재론은 ‘실재’, 즉 존재의 ‘행위’와 ‘생성 능력’을 강조합니다. 특히 물질의 능동적인 행위성과, 물질이 의식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강조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위성이란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물질은 고정된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141쪽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물이 끓고 있습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른 이 물은 곧 커피잔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물이 보글거리는 것을 얽힘, 끓어오르는 것을 내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라드에겐 현상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단위인 것입니다. 내부-작용을 하는 행위 요소들의 존재론적 분리 불가능성과 얽힘 자체가 바로 현상이지요. -145쪽

바라드는 이론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과학 연구자입니다. 이런 이력이 다른 신유물론자와 다른 점을 만들어 냅니다. 양자물리학의 주요 개념으로 신유물론을 설명하는
것에서 알 수 있지요. 특히 바라드는 물질과 의미의 얽힘을 행위적 실재론으로 제안합니다. -154쪽

회절적 방법론은 작은 차이들에 주목합니다. 특히 ‘얽힘’ 속에 있는 행위성들의 미세한 움직임과 변화를 살펴보고, 윤리적 절단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바라드가 회절적 방법론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는 이유는,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이 배제되고 제거되는지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런 행위에 책임을 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156쪽

바라드에 따르면 타자에게 응답하는 것은 윤리적 문제입니다. 응답한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타자는 자아에 대립해서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나입니다. 바라드는 자기 몸을 만짐으로써 타자를 경험합니다. 몸은 나와 타자들,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거-현재-미래가 얽힌 행위적 실재이며, 윤리와 정치의 근원이 됩니다. 자기-만짐은 응답의 문제입니다. -159쪽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커 인류세라는 말까지 나오는 이 시대에, 신유물론은 자연을 비롯한 물질과 비인간 존재들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사회, 문화, 정치 영역으로 확장되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 대한 일련의 반성과 비인간 존재의 능동성을 인지하게 된 효과라고 하겠습니다. -172쪽

이분법은 주체들끼리 갈등하고 투쟁하게 합니다. 누구나 타자 혹은 객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이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신유물론은 이런 이분법을 해체하고, 물질의 능동성을 발견함으로써 연대와 협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174쪽

지금 전 세계를 고민에 빠뜨린 기후위기는 우리가 타자임을 부정해 나타난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이고, 물질이고, 타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아주 오랫동안 자연, 물질,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유물론은 페미니즘이 확장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174쪽

오랫동안 철학은 이성의 역할과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갈등과 위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신유물론은 이런 철학의 근원적인 문제를 재어쩌면 그것은 존재에 대해 다시 묻는 행위일지 모르겠습니다. -177쪽

신유물론자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신유물론자들은 첫 번째, 세계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 실체 개념을 거부합니다. 실체란 변하지 않으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체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 물질은 실체가 아닌 ‘얽힘’의 관계로 생성된다고 봅니다. -179,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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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사물도 살아 있다

이 책은 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베넷, 도나 해러웨이, 카렌 바라드 등 대표적인 신유물론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신유물론이 무엇인지 쉽게 안내하는 입문서다.
신유물론은 ‘물질’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는 철학이다. 구유물론에서는 인간 말고는 다 ‘물질’이었다. 여기서 물질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죽어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자연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여성이고 말이다.
신유물론은 이렇게 물질로 폄하되었던 것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물질들 안에서 능동성과 생기, 활력 등을 찾아낸다. 모든 물질은 스스로를 변화해 갈 힘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최근의 이상기후 현상은 자연이, 지구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항변하는 목소리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이 신유물론이 페미니즘과 밀접한 이유이다.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자연, 물질,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다.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만이 아니라 배제되어 왔던 다른 한 축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인 동시에, 주체라고 여기던 것들이 환상임을 일깨워 주었다. 즉 페미니즘은 배제되었던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신유물론을 페미니즘이 확장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

공멸이 아닌 공생을 위하여

신유물론 관점에 따르면,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이 이분법이다. 그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구에서 군림해 왔다. 세상을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들로 이분화하고 맨 위 자리를 고수했다. 기존에 폄하했던 물질이 인간처럼 생기를 갖고 있다면, 이제 인간과 물질은 대등해졌다. 이분법을 해체해야 하는 것이다.
신유물론은 이분법 해체 후 인간은 물질로서 다른 물질과 동등한 관계를 맺으며 얽히고설켜 살아가라고 한다. 그것이 공멸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물질과 물질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려면 이분법만큼 꼭 깨져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오랜 시간 서양 철학을 지탱해 온 ‘실체’라는 개념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변하지 않겠다면, 다른 것과 관계를 맺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가. 신유물론자들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단 한번도 같은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유물론은 실체란 개념 역시 폐기해야 한다고 본다.
이분법 해체, 실체 폐기, 동등한 관계 맺음을 통해 신유물론이 이르고자 하는 지점은 ‘공생’이다. 지금처럼 자연 등을 짓밟고 올라선 삶은 결국 그 당사자도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신유물론은 공멸이 아닌 공생을 위한 하나의 실천인 것이다.

5인의 철학자로 만나는
신유물론 입문서

이 책은 대표적인 신유물론자 5인의 사상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신유물론에 입문시킨다. 특히 각 철학자의 핵심 개념을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 로지 브라이도티의 유목하는 주체ㆍ반재현주의ㆍ비판적 포스트휴먼, 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ㆍ사물-권력, 도나 해러웨이의 자연문화ㆍ반려종ㆍ사이보그ㆍ퇴비, 카렌 바라드의 행위적 실체론ㆍ내부-작용ㆍ행위적 절단ㆍ물질-담론적 실천ㆍ회절적 방법론 등이다. 어렵고 낯선 개념들이지만, 이 개념들이 지향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내용들이다. 인간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것들, 하다못해 핸드폰 같은 사물도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품고 있다는 것, 인간은 물질로서 다른 물질과 동등한 관계를 맺으며 새롭게 변화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것이 공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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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 9791168102538
발행(출시)일자 2024년 04월 20일
쪽수 184쪽
크기
130 * 190 * 18 mm / 315 g판형알림
총권수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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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구매자so*******|2024.07.07|신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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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은 형이상학적 잠재성과 유물변증법을 두 축으로 삼기 때문에, (비)물질 세계의 인지 가능성뿐 아니라 인지 불가능 영역을 전제에 포함하여 세계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비판적 실재론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즉 변증법적, 경험적 과학과 형이상학적, 초월론적 비과학이 혼재하면서 연결과 통합을 이끄는 사유틀입니다. 책은 이런 신유물론의 속성을 기본 개념, 성립 배경부터 단계적으로 소개하고, 다차원적으로 진화하면서 비판적 실재론과의 교차점에서 등장하는 그레이엄 하먼, 브뤼노 라투르, 로이 바스카 등의 사상을 친절히 해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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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메로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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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에 관한 책이 여러권 나와 있지만 가장 친절하고 명료하게 잘 정리한게 이 책의 미덕이다. 입문서로선 아주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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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sh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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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이 궁금했지만 철학적 지식이 없어 시도해보지 못했는데요! 이 책은 입문서로 좋을 것 같습니다.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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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JK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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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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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벽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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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으로 제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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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아   202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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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인간 유일의 영혼을 주장하는 문장이 출현한 이래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 식물, 사물(물질) 등 비인간 존재는 위계질서에 의해 객체의 자리로 밀려났다.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렇게 지구 생태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 인간과 사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는 이들 비인간 존재는 수동적이고 억압당하는 대상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홀로 주체의 자리를 누리던 인간은 객체라고 억압되고 이용되기만 기다리던 비인간존재의 활력을 어렴풋 깨닫기 시작했다. 물질인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폭염과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등 지구온난화라는 초객체(hyper-objects)로서 행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활력도 능동성도 없다고 여겼던 비인간존재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를 지배해 온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적 이분법은 이제 자신들이 부여한 오만한 주체의 자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 이후 500년에 이르는 ‘정신과 물질’, 이분법에 의한 위계질서는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 ‘신유물론(新唯物論)’은 이러한 새로운 사고들에 대한 주요 사유들을 통해 인간 인식 우선에 의해 배제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물의 궁극적 실재는 물질이며, 정신적 관념적인 것 모두 물질로 환원 설명했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유물론에 대해 “물질을 바라보는 태도가 새롭다”는 의미에서 ‘新(New)’ 유물론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는 이론이다. 물질의 활력과 능동성을 인정하고 그 고유성을 발견하는 노력인 것이다. 20세기 후반기부터 이러한 전환적 사유가 발아하기 시작해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객체지향이론, 사변 실재론, 유물론적 페미니즘, 행위자 연결망 이론, 비판적 포스트 휴먼, 비판적 생기론, 급진적 관계주의 지향 이론들이 신유물론적 토대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적 사고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 통제해야 될 대상으로 바라보는 자연관은 더 이상 지구 생태계의 위계적 관점이 될 수 없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의심케 한다.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모든 인간, 비인간 존재는 현실 존재로서 무수히 다양한 행위자로 기능을 하고 있다. 인간은 위기와 두려움을 느끼며 자연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세상은 무수한 행위자들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겨루는 곳이며, 인간, 비인간 존재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진 행위자가 되어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인간의 정신은 비인간 존재의 부름에 응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어쭙잖은 이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 존재의 능동성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 무관심과 무시, 폄하에 반발한 비인간 존재는 생태계 연결망의 한 행위자로서 본래의 불안정성과 변화 동력으로 인간의 오만한 환상을 깨워대고 있다. 이성적인 것만이 합리적이라 생각게 했던 근대의 사고는 인간 자신의 몸이 물질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동물이고 자연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림의 파괴와 동물과 식물의 멸종, 즉 자연의 멸종은 곧 인간의 종말임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식을 바꿔야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 비인간의 행위 능력과 존재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스스로 존재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교만의 지위에서 내려와 이분법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인간, 비인간 모두 행위자이며 행위자들은 모두 연결망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며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주장했던 ‘브뤼노 라투르’를 출발점으로 하여 미셸 세르, 화이트 헤드의 과정 철학을 경유하여,‘뤼스 이리가레’의 영향을 받아 권력과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고 공생방법을 제시했던 유목하는 주체로서 경계를 넘나드는 변신하는 존재를 말했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 ‘로지 브라이도티’의‘~되기’의 철학을 검토한다.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로 여긴 오랜 근대적 이분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유목자의 떠돌아다님의 자유로운 연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의 변신을 받아들이는 계급, 연령, 젠더, 인종을 초월한 활기찬 연대의 철학을 소개한다.데카르트식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여성을 타자로 배제함으로써 멸시해왔다. 개체화되고 대상화된 존재, 즉 물질적이고 기계적이며 수동적인 존재라는 여성 담론을 해체하고 신유물론을 통해 페미니즘을 윤리적 문제로 전위(transposition)시킨 것이다.

 

책은 이처럼 신유물론이 인간 삶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사고로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주요 영향력있는 석학들의 실천적 이론을 안내하고 있다. 사실 유물론 하면 ‘마르크스의 사적(史的)유물론’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사회구조와 역사발전의 원인을 물질에 근거해 파악하여 물적 토대가 곧 사회발전의 근원이라 본 유물론이다. 그런데 이 또한 정치철학자인 ‘제인 베넷’의 지적처럼 인간의 노동과 그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사고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 이론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가구를 만드는 데는 목재와 망치, 못, 톱, 인간의 노동이 각기 그 자체의 활력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파급력을 품게 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생명에 대해 여전히 합의된 정의가 없듯,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논리는 수상쩍은 것이다. 물질이나 기계는 수동적이고 죽은 존재라는 기계론적 관점을 벗어나면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에 깃들어있는 자연관에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다못해 인간이 버린 쓰레기조차 매립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활기 넘치는 화학물질로 휘발성 강한 메탄을 생성하며 스스로 변화한다. 물질은 스스로 영향을 미치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생기란 이러한 물질의 활력에 관한 것이다. 제인 베넷의 비판적 생기론은 이처럼 신유물론적 사고에 기반을 둔 사유이다. 그녀는 또한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위계 권력을 배제하기 위해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아 ‘행위소’라는 스스로 자신이고자 하는 능동적 힘으로서 물질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이분법적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자연과 문화, 인간과 기계,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없애고자했던 사상가들은‘도나 해러웨이’,‘카렌 바라드’에서‘그레이엄 하먼’,‘티모시 머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석학들이 등장했으며, 오늘 인류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려종, 사이보그 등 “얽혀 연결된 존재로서 서로 감염시키는 관계에 집중”하여 “개체성이란 관계망에서 생성되는 것이며. 독립적 개체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해러웨이의 ‘공동생성의 존재론’이나, 양자역학에 터 잡아 얽혀있으되 분리되지 않은 유동적 상태가 현상이며 이 안의 행위 요소들의 움직임인 내부-작용을 통해 비로소 개체가 출현하는 것이라는 물질을 과정에 있는 현상으로 이해한 카렌 바라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비인간을 실재하는 행위자로서 고려케 한다.

 

이제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를 판단하는 주체의 자리가 가당치 않은 것임을 직시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주체가 있음으로 인해 객체라는 대상화된 존재가 있어 억압당하고 불평등을 강요당하며 무시되고 배제된다. 이러한 데카르트식 이분법적 사고로는 더는 이 세계에 팽만한 문제들에 접근 할 수가 없다. 물질이고 자연이고 타자라며 자신 역시 하나의 타자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타자의 목소리를 무시한 결과 온갖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하고 기후온난화와 같은 재앙이 일상화 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신유물론은 이러한 구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인간 사물이라는 차별의 경계를 해체하고 세계는 더는 수직적이지 않으며 여러 갈래의 복잡한 연결망임을 인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시급한 시대이다. 이 책 신유물론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나 사조인 것만이 아니다. 바로 현재하는 인류인 우리들의 일상적 행위를 돌아보아야 할 이유의 직시이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위한 첫 번째 문으로 보다 심화된 사유 속으로 이행하는 안내서로 삼기에 적절할 만큼 친절하고 수월한 문장으로 씌어 있다. 늦었다고 여길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른 때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에 노정된 무수한 불평등과 재앙적 위기를 생각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거대하게 변화하는 사고의 조류에 동승할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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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9

난독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난독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난독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독서 장애
Dyslexia
OpenDyslexic 글꼴의 예. 난독증의 일반적인 읽기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 사용된다.[1]
진료과신경심리학소아청소년과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난독증(難讀症, dyslexia) 또는 독서 장애(讀書障礙)는 문자를 읽고 철자를 구분하거나 내용을 이해하는 정확성이나 유연성에 장애가 있는 학습 장애를 가리킨다.[2]

난독증 환자들은 시각이 정상이고 다른 학업영역에서는 적절한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기를 하지 못한다. 난독증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원인과 양상도 다양하다. 모든 사례의 난독증과 관련된 단일한 비정상적 특징보다는 여러 가지의 비정상성이 다양한 사례에서 관찰된다. 다른 언어 장애와 마찬가지로, 난독증이 여러 원인과 양상을 보인다는 점은 언어와 읽기 능력이 여러 원인에 의해 결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난독증 환자의 경우,근본적인 문제들 중 일부는 지각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한 번에 한 글자씩 읽을 수 있지만 여러 글자를 결합하여 인식하지는 못한다. 어떤 한 글자를 결합하여 인식하지는 못한다. 어떤 한 글자를 의미가 없는 x로 둘러싸기만 해도 가운데에 있는 글자를 식별하기 어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구어의 음절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 예를 들어 da라는 소리가 들리면 레버를 누르고 ga, pa또는 ta라는 소리가 들리면 레버를 누르지 않는 과제를 잘 수행하지 못한다.[3]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난독증 환자들의 경우, 그 시각체계에서 대세포 경로가 비교적 반응성이 낮다. 많은 난독증 환자들은 단어 뿐 아니라 시각 운동 패턴을 지각하는 데도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효과는 개인에 따라 많이 다르고 대세포 경로만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부위는 아니다.

난독증이 언어에 대한 불완전한 반구전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례들도 있다. 한 광범위한 문헌 연구에 의하면, 난독증 환자들에게서는 두뇌반구의 대뇌피질이 대칭적일 가능성이 더 높은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측두평면을 비롯한 어떤 뇌영역들이 좌반구에서 더 크다. 어떤 난독증 환자들의 경우에는 언어와 관련된 특정 뇌영역들이 사실상 우반구에서 더 크다. 이런 경과는 기능의 비정상적인 편재화를 난독증이나 기타 문제들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Geschwind와 Galaburda의 이론을 지지한다.

난독증에 관한 또 다른 설명에서는 이 현상을 주의집중 또는 방략의 차이와 관련짓는다.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아동에게 문자 조합들(clid와 cdil과 같은)을 쌍으로 보여주고, 둘 중 어느 것이 영어 단어가 "될 수 있는 것인지"말하게 하였다. 난독증 아동들은 batmotbeam과 monglustamer 같은 가짜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는 못했지만, 정상적인 읽기 능력을 가진 아동들보다 이 과제를 사실상 더 잘 하였다. 이 결과는 난독증 아동들이 단어의 시각적 특징에 주의를 두어 단어가 될 수 있는 문자 조합과 될 수 없는 문자 조합을 인식할 수 있었지만, 생소한 단어를 말 소리로 변환시키는 능력이 부족함을 잘 보여준다.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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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전략, 치료 및 교육 지원을 통하여, 난독증 환자는 쓰고 읽는 것을 배울 수 있다.[4] 장애의 통증을 관리하거나 숨기는데 유용한 기술과 기술적 도움이 있다.[5] 스트레스와 불안 감소로 문자 이해력이 향상될 수도 있다.[6] 알파벳 쓰기 체계에 대한 난독증 개입(dyslexia intervention)에 있어, 근본적인 목적은 아이의 자소(grapheme)(문자)와 음소(phoneme)(음성) 간의 일치를 알게 해주는 것, 그리고 음성이 단어에 섞이는 방식을 가르침으로써 읽기와 철자를 문자-음성 일치와 관련시키는 것이다. 병행하는 강화 훈련은 읽고 철자 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구강 음성 훈련만 하는 것보다 더 오래갈 수 있다.[7] 초기 개입은 난독증 감소에 효과적이다.[8]

연구는 특별하게 간소화된 폰트(Dyslexie와 OpenDyslexic)는 읽기에 도움 된다는 것을 제시하지 않았다.[9] 난독증 아이는 타임스 뉴 로만(Times New Roman)과 에어리얼(Arial)과 같은 표준 폰트의 텍스트를 빨리 읽으며, 아이들은 이런 표준 폰트를 더 선호한다.[9] 일부 연구는 자간(letter-spacing) 늘리기가 효과를 본다고 지적하였다.[9]

음악 치료가 청소년 난독증 환자에게 효과 있다는 증거는 없다.[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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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7

에큐메니안 레페스 포럼 - 적대의 계보학 2024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기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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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敵意)를 접어두고

이혜숙(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2024-08-16



적대의 정치와 자본의 권력

최형묵 소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2024-07-31



적의 기원과 다시 얽힘의 원리

이정철 교수(국민대 교양대학)2024-07-17



적과 나의 경계를 넘어서: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는 적과 나

이명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인드라망연구소)2024-07-03



약자의 적대화와 부종부횡의 윤리

박연주(동국대 다르마칼리지 대우교수)2024-06-19



비폭력 인격주의, 적을 품다

이형규(한국외국어대학교 연구교수)2024-06-05



적대의 감정 정치

김엘리(성공회대 젠더연구소 연구교수)2024-05-22



복음주의의 가련한 적들 (2)

이충범(협성대학교)2024-05-16



복음주의의 가련한 적들 (1)

이충범(협성대학교)2024-05-08



평화의 적, 무관심

차승주(강원대 통일강원연구원 객원연구원)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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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학술레페스 포럼
적정 적대의식은 가능한가: 북한 인식의 경우

기사승인 2024.02.28

- 적의 계보학 ②


▲ 서보혁 연구위원


훗날 통일을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2024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2024년을 통일의 분기점으로 볼까, 아니면 분단의 새로운 기점으로 평가할까?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의 김정은 총서기는 2023-24년 언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시이자 한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여느 국가와 같은 국제관계, 그것도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 규정하였다.

김정은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받아 북한 정권은 관련 법제도와 기구를 폐지하고 시설을 철거해나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의 이런 조치들의 배경을 두고 전문가들은 뒤로는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앞으로는 김정은 정권의 독자적인 국가발전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향후 전망도 남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위와 같은 김정은 정권의 통일전략은 수정될 수 있다거나, 그 반대로 더 이상 북한은 통일전략을 복원하지 않고 북중러 협력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지속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보통의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김정은 정권의 태도에 한국의 정부는 물론 대북 교류협력을 전개해온 민간단체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비판하고 통일정책을 지속한다는 입장이다. 민간단체들은 통일된 입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그간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준비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인데 비해, 다른 소수의 단체는 북한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다. 북한의 통일 포기 선언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중요하게 고려할 바가 국민들의 북한·통일 여론이다. 이를 소개하며 국내 대북 인식의 현 주소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은 한국인들의 통일의식을 가장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조사해오고 있다.(1) 2023년 조사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가장 악화되었다. 이전 해에 비해 대북 적대의식이 13.6%→18.6%로 높아지고, 경계의식이 17.7%→24.0%로 높아진 반면, 협력의식은 47.9%→37.7%로 10.2%p 낮아졌다. 그 결과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대북 부정적 인식이 42.6%로, 이 조사가 실시된 200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연구원은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은 상황에서 북한의 적대적 행보가 한국인의 대북 인식에 다분히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응답자의 69.0%는 북한정권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응답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또 국민들의 78.1%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인의 다수는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북한정권이 통일을 원한다’는 인식이 2018년과 2019년에 40%로 반짝 상승하였고, 2020년에 24.6%로 하락한 이후 23.7%→21.5%→22.0%로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은 87.6%로 나타났는데,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의 92.5%에 비해 소폭 하락하였으나 여전히 높은 편이다.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에 대한 위기와 불안은 64.8%로 이전 해(60.9%)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 이상 나타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대북 인식은 부정적임을 알 수 있고 그 양상은 2018년 짧은 평화 분위기 이후부터 나타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은 한국민들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에서 어떤 함의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까? 우선 국민들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적대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김정은 정권이 핵능력을 고도화시키고 이를 위해 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우선 투자하는 대신 주민들의 인권 개선에 나서지 않고, 북한식 통일전략에 호응하지 않는 남한과 적대관계를 천명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 등 여러 가지이다. 이런 적대의식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하여 필자는 이를 ‘적정 적대의식’이라 이름 붙여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해야 할까, 또 남북대화는 불필요할까? 나아가 이제 통일은 물 건너간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국민 여론을 보면 그 합리성을 읽을 수 있다.

▲ 서로간의 적대의식이 높아가는 가운데 통일을 향한 걸음이 정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연구원이 2023년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2)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남북대화가 별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66.25%로 나타났다. 또 경제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은 72.9%로 더 크게 나타났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비핵화 유도 방안에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통일연구원측은 북한의 잦은 미사일 도발과 핵위협에 대한 피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집요한 핵개발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체념의식과 그런 북한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겠다는 국민들의 실리적 태도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통일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위 2023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통일의 필요성에 43.8%가 찬성한 반면, 반대는 29.8%였다. 참고로 2007년에는 통일 찬성 63.8%, 반대 15.1%였다. 통일 찬성 여론이 20% 줄어들어 들었다. 그런 전제 하에서 통일이 필요한 이유로는 ‘남북 간 전쟁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가 38.9%로 나타났는데, 기존에 일순위로 나온 응답인 ‘같은 민족이니까’는 30.6%로 나왔다.

통일에 대한 찬성 여론이 줄어든 가운데 그 이유로 민족 동질성보다는 평화정착이 앞선 것이다. 여기서 통일에 반대하는 이유로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33.9%), 통일 이후 생겨날 사회적 문제(28.7%), 남북 간 정치체제의 차이(20.0%)가 나왔다. 또 통일로 기대할 이익이 남한에 이익이 된다(53.6%)와 자신에 이익이 된다(27.9%) 간에 격차가 큰 점도 인상적이다. 대북정책에서 시급한 문제로는 북한 비핵화, 북한의 인권개선, 군사적 긴장해소 등이 80% 가깝게 나왔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적대의식과 경계의식을 합한 것인데, 그것이 협력 및 지원 대상으로서의 긍정적 대북 인식을 압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정권의 권력 세습, 북한의 평화 위협, 인권 침해 등 국민들은 물론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이유 있는 것들이다. 다만, 북한의 부정적인 행태는 북한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남북관계, 북한과 미국의 관계, 국제정세 등 다차원적인 분석을 할 때 그 평가는 물론 대안 마련에도 합리성을 높여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통일에 대한 유보적인 여론 증가를 동반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평화조성을 전제로 한 통일, 점진적인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통일 자체가 무용함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평화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론은 규범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지 선평화, 후통일의 의미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및 민족 포기 선언이 단기적으로 남북 간 대화 및 통일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은 사실이다. 김정은 정권의 통일 논의 포기는 북한체제의 통일 역량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남한체제 주도의 통일로 간단히 환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북한 주민들의 자결권, 북한 정권의 무장력, 그리고 기후위기 등 글로벌 위기의 실존적 위협 등을 고려할 때, 통일은 기존의 체제·민족·이념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공감·공존·공영과 같은 ‘열린 통일’, ‘다함께 통일’을 요청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럴 때 이유 있는 대북 적대의식은 보다 이유 있는 통일의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주
(1)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2007년부터 한국갤럽에 의뢰해 매년 ‘통일의식조사’를 해오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1대1 개별 면접조사를 하고 있는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 포인트이다.
(2) ‘통일연구원(KINU) 통일의식 조사 2023’은 전국 거주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총 1,001명을 대면 면접조사로 진행했는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이다.


서보혁(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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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레페스 포럼
내가 나에게 적이 되었다: ‘적대의 계보학’의 종착지

기사승인 2024.02.14


- 적의 계보학 ①


적의 계보학
나에게 ‘적’(敵)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너희와 갈등하는가. 전쟁을 비롯한 모든 폭력적 사건의 근저에는 자기중심성이 있고, 갈등은 자기중심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적대시하면서 생긴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 배경 연구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에서는 나와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적대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적대성은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다각도로 성찰하며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자기중심성의 근간을 돌아보고, 적과의 관계를 조화로 역전시키기 위한, 종교적으로는 ‘사랑과 자비’의 윤리의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과정의 근간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정기적으로 ‘적의 계보와 현상’을 두루 정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특히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는 직접적 폭력에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거나,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하곤 한다. 서로가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우선 변호하는 과정에 폭력적 분위기는 계속된다. 서로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서로를 더 적대시하게 된다. 같은 세력끼리 ‘동지’를 맺으며 투쟁을 이어간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현상을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바 있다. 칼 슈미트는 ‘적’을 이질적 타자로 보고, ‘적과 동지의 구별’을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상호 적대시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셈이다.

▲ 이찬수 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안과 밖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정치적’ 행위는 고대 유대교의 계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십계명의 여섯째는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때의 살인 금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 윤리가 아니다. 그 계명을 지켜야 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내집단’이다. 다른 신을 믿는 외집단에는 이 계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집단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장려하기까지 한 사례가 더 많다. 외집단은 잠재적 위협이자 제거의 대상이며, 그런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런 계명은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전제한, 내집단 중심의 ‘정치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시대는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적과 투쟁하면서 나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 세력에 대한 방어력을 키워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폭력의 양상은 적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장 보드리야르가 규정한 ‘적(敵)의 계보학’이 이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의 계보학’의 첫 단계는 적이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늑대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외부의 적의 비유로서, 사람들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바리케이트를 친다. 둘째는 적의 몸집이 쥐처럼 작아지는 단계이다. 쥐는 지하에서 활동하기에 벽이나 철책으로는 당해내지 못한다. 새로운 위생 장비를 갖춰 쥐가 퍼뜨리는 위험을 예방하려 한다. 셋째는 적이 바퀴벌레 같은 벌레의 형태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벌레는 삼차원의 틈새에서 공격해온다. 이 역시 각종 방역 장비로 막아야 할 대상이다. 넷째는 적이 미세한 ‘바이러스’ 형태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바이러스와 같은 기생충은 몸 밖이 아닌 몸 안을 공격하며, 시스템의 심장부 안으로 들어온다. 안에 있기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러면서 미세한 적은 마치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산되고, 혈관을 타고 퍼지듯 도처에 스며든다. 이 적은 시스템 안에 둥지를 틀었다가 어느 순간 활성화되면서 적대적 활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내부 속의 외부’를 형성하며 내부 시스템을 공격한다. 이 공격은 시스템 외부에서 막아내기 힘들다. 그것이 바이러스 같은 적의 특징이다.

이 계보학에 의하면, 적의 크기는 계속 작아져 왔지만, 위험은 더 커져 왔다. 늑대에서 쥐로, 쥐에서 바퀴벌레로, 다시 바이러스로... 바이러스라는 적은 내 몸을 숙주 삼아 나의 일부처럼 행동한다. 이 폭력은 미세하고 은밀해서 적대의 지점, 폭력의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폭력’이 그렇듯이, 자·타가 구별되고 적대적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구도는 비슷하다.

문제는 이런 ‘적의 계보학’을 새로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 적이 바이러스보다 더 작아지다가 급기야 나와 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이 나의 DNA가 된, 즉 내가 나에게 적이 된 것이다. 내가 나의 경쟁 상대이자 극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나에게 폭력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늑대의 폭력에서 바이러스의 폭력까지 중첩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실종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 끊임없이 적을 재생산해야 유지되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Getty Images


슬라보예 지젝이 ‘체계적 폭력’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폭력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혹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면, 체계적 폭력은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는 합리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사회와 문명의 정점에서 벌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 폭력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무후무한 폭력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사회의 작품이다. 사회의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자 결과인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는 모순적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크게 보면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온 결과이다. 자연법칙에서 기술을 발견하고, 그 기술로 자연법칙을 통제하면서 문명을 일으키고, 찬란한 문명이 요구하는 대로 문명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온 결과이다. 자본의 축적을 찬양하고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에 환호하고 종교마저 더 많이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온 결과이다. 그 자본주의적, 성과 지향적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며, 그 구조 속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온 탓이다. 문명의 체계에 맞추어 스스로를 종속시킨 탓에 문명의 힘은 더 장대해지고, 그에 반비례해 문명을 일으켰다는 주체는 사실상 실종되었다. 인간을 극도의 피로와 자기소외로 몰아가는 힘은 한편에서는 거대한 문명 자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과를 낳으려 자발적으로 투신했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폭력은 더 교묘하게 구조화되었지만, 그럴수록 그 원인은 특정하기도 힘들고 따라서 제거하기도 어려워졌다.

사회의 요구와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다 보니 자연스러움의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그 폭력은 끝없이 성과를 산출하라고 스스로를 닦달하는 데서 오는 피로함, 자기 소외 결국은 자기 파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폭력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어제의 나를 넘어서 내일의 더 낳은 나를 꿈꾸며, 끝없이 자신을 닦달해온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을 최고의 승리로 여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어제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과 끝없이 경쟁한다. 그렇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자기 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구조화하고 적이 나의 모습으로 내면화되어버렸다.

‘적의 계보학’의 마지막 단계라고나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한 문제를 천착해온 한병철은 최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내가 나를 넘어서는 데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발견하는, 역설적인 의미의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연재에서 하나씩 생각해봐야 할 물음들이다.

이찬수(아시아종교평화학회 부회장, 종교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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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한국교회의 현실

기사승인 2024.08.14 03: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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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신명기 32:1-7)


▲ 1943년 일본 나라(奈良) 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CBS-TV


남원시 기독교연합회 8.15 광복절 기념예배에 참석하신 목사님들과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인도하심이 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교파, 다른 교단의 교회들이 한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합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속한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며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교리와 전통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에는 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에는 상호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적극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8.15 광복절을 기념하며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원시 기독교연합회가 어느 지역의 기독교연합회보다 모범적이고 선도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는 8.15 광복절을 기념한다고 여기 남원제일교회에 모였지만, 우리 민족이 진정 광복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광복’이란 빛을 다시 찾았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1946년 이후 8월 15일이 되면 매년 광복절을 기념하고 있지만, 우리가 광복절을 별생각 없이 기념하면, 우리 민족의 실제 현실을 스스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광복을 왜곡한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1910년 한일병탄 이래로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속국으로 살았습니다. 억압과 착취, 차별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우리 선조들은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강제징병자와 강제징용자로, 위안부 성 노예자로 끌려가 개 돼지처럼 취급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험한 시절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 항복했을 때, 우리 민족은 피해당한 피식민지 국가로서 당연히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주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전에 전쟁을 선포한 소련이 그들과 국경을 접한 한반도 전체로 밀고 들어오면, 전쟁을 종전시키는 데 실제로 기여한 미국이 자신들의 실리를 찾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던 미국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을 견제하고, 한반도의 정치적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분할 점령을 급하게 제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육군 대령 딘 러스크(Dean Rusk)와 육군 대위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이 그 실무자였습니다. 소련의 입장으로 볼 때, 그들은 손해를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보다 분단의 슬픔을 맛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해방군으로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승리자로서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점령군으로 들어왔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일장기가 펄럭이던 자리에 성조기와 소련기가 대신 펄럭였습니다. 1945년 8월 9일, 북쪽에 먼저 들어온 소련 군인들 중에는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자기 나라에 필요한 공장 기계들을 해체해서 반출하기까지 했습니다.

1945년 9월 8일, 소련군보다 한 달 늦게 한반도 남쪽에 들어온 미국 군인들은 군정을 실시하며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행정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나름은 공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자신의 이익과 자본주의 진영 확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국가로서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단을 계획한 미국과 그에 응한 소련은 한반도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각축장(角逐場)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반도는 세계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남쪽에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안보 이데올로기,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는 소련의 해체와 함께 이데올로기의 냉전이 사라졌지만,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여전히 냉전적인 사고와 적대적인 행동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여차하면 친북 좌빨이라고 비난하고, 여차하면 빨갱이라고 규정합니다. 여차하면 북쪽 김정은의 명령을 받았다고 가짜뉴스를 남발합니다. 지금도 극우주의자들은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북쪽의 고정간첩들이 책동한 것이라고 왜곡하고, 2022년 할로윈 축제 당시 안전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아서 발생했던 10.29 이태원 참사를 좌파 언론들이 의도적으로 부추긴 결과였다며 음모론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가 분단된 것도 억울한 데, 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남북 간 긴장과 갈등 가운데 서로 대립하고 원수처럼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남쪽 내부의 남남갈등까지 강화하고 있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남쪽 사회에서는 수시로 불필요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에 쓸 수 있는 국가 재정을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미국의 값비싼 신형무기를 구매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대는 자신들의 동북아전략에 따라서 한반도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군사기지를 건설해 주고, 그들의 주둔에 필요한 비용마저 상당 부분을 부담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주체적인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주권은 유보된 상태에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명실상부한 광복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분단의 현실과 관련한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앞의 무거운 이야기를 전제로 해서 한국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했을 때,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자행했던 과오를 청산해야 했습니다. 과거의 과오를 청산해야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단 상황에서, 미군정 아래서 한국교회는 과거를 제대로 돌아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과오를 은폐하거나, 자기변명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강성오 작가가 저술한 《한국 기독교 흑역사, 열두 가지 주제로 보는 한국개신교 스캔들》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과오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교회가 어떤 질병 가운데 지속적으로 처해 있는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제하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제적인 요구가 있었지만, 공교회가 교파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순수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과 이후의 삶이 확실히 달랐습니다. 1895년 콜레라가 조선 백성의 생명을 위협할 때는,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환자 치료와 시신 처리에 사랑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렇게 선한 영향력이 전파되면서 기독교인들의 수가 늘기 시작하자 장로교회는 1907년에 최초의 독노회를 조직했고,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를 조직했습니다. 감리교회는 미국 남북감리교 선교회들이 1910년 전후 각각의 연회를 조직했고, 1930년에는 합동해서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공교회의 조직이란 언제나 제도화로 변질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교회가 공교회로 조직이 되자, 교회의 본래적인 목적을 성취하기보다는 조직을 존속하는 것 자체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사참배의 결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강압과 함께 감리교회는 1936년 6월 양주삼 총리사가 감리회보를 통해서, 감리교 전체는 1938년 4월 회의를 통해서, 그리고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통해서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닌 애국적인 국가 의식이라며 각각 수용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한상동 목사 등을 비롯한 목회자들과 최인규 권사를 비롯한 성도들은 일제로부터 탄압받거나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원칙과 신앙적 순수성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교파 분열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를 가결한 교계 지도자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변명했지만,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며 교회와 성도들만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는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하 한국교회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 앞장서서 지원한 과오가 있습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통해 한국인들을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그치지 않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는 것을 받아들여 일본 제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기독교 교육기관에서는 일본 제국의 교육방침을 따라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고, 한국교회는 예배와 기독교 교육기관에서조차 일본어 사용을 장려했습니다. 일제가 주최하는 국가적인 기념식이나 제례에도 기꺼이 참석했습니다. 한편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서 전시 동원체제를 가동하며 강제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을 탄약, 연료, 병기와 같은 군용물자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과 병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국방헌금을 모금하고, 유기그릇을 헌납하며, 조선 사람들을 전시체제로 내모는 일에 한몫했습니다. 교회의 종을 떼어 헌납했고, 종이 너무 커서 떼기 어려웠던 교회에서는 종을 깨뜨려 헌납하는 충성까지 보였습니다. 기독교의 유명 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사들이 친일 행위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백낙준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협력했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전파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그는 글과 강연을 통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지를 약화시켰다고 합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였던 김활란 박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여성 부문 지도자로 활동했고, 여학생들에게는 종군 위안부로 나갈 것을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행했고, 신사참배를 권장했으며, 글과 강연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구약의 가르침 대신에 “누가 오른쪽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누가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도 벗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라도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폭력을 담은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초대 교회의 신도들은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미 군인인 신도들은 전쟁에 종사하거나 적을 살상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일제하의 한국교회는 전쟁물자를 지원하는 일에 앞장섰고,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한국교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일제하 한국교회를 거론할 때는 신사참배만으로 주로 한정해 왔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과오를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과 관련한 한국교회의 과오 역시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드디어 일제로부터 자유로워진 한국교회는 미군정 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에 일제하에서 범한 과오를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반 신도들의 소극적인 참여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교계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사회의 기독교인 명망가들에 대해서는 상징적으로라도 징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스스로 거치지 못한 한국교회에 대해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반민특위’는 교계의 친일파 인사들, 장로교회의 김길창, 김창준, 전필순, 정인과 목사 등과 감리교회의 양주삼, 이동욱, 정춘수, 한석원 목사 등을 검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검거된 기독교 인사들의 친일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유형이었습니다. 비행기 헌납 운동이나 교회종 헌납 운동을 통해 침략전쟁에 매우 협력한 유형, 언론매체나 출판물을 통해 징병제와 위안부 제도를 찬성하고 적극 선전한 유형, 전쟁협력기구인 조선임전보국단이나 조선전시종교보국회의의 간부로 활동한 유형, 신사참배를 반대하거나 반일적인 설교를 한 목사나 교인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유형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당시 여당이었던 한민당의 방해 공작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강제적으로라도 징계를 받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일제하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승만 독재정권과 야합하는 또 다른 과오를 범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격려와 영락교회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가 제주 4.3 사건을 촉발시켰고, 그들은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 도민들을 학살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창출을 도왔습니다. 드디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집권을 연장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주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자발적인 부정선거를 도모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했고, 그의 종신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를 기획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을 노골적으로 지원했고, 장면 부통령을 탈락시키고자 천주교를 형편없는 종교로 폄하(貶下)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력자들 측근에서 그들을 지지하며 협력하는 유사한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로서 지지표를 얻고자 했을 때, 대통령이 된 후 궁지에 몰렸을 때, 교회를 먼저 찾았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찾았고,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때는 성북 영암교회를 찾았으며, 22대 국회의원 총선 때는 명성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한국교회와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그를 환대하고 축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천공과 건진법사 등 무속신앙인들과 연계해서 정치를 하고 있는데도, 사이비 이단인 신천지나 통일교와 정치적으로 밀착되어 있는데도, 개의치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광훈이 주도하는 극우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서는 특정인을 지지하고, 특정인을 배제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분의 뜻이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개인 또는 집단이 저지른 죄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시절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해서 징계를 받았던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징계의 사실을 기억할 때, 선조들의 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할 때,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의 회당과 상점, 주택을 파괴했던 ‘정화의 밤’(Kristalnacht)을 기념하는 행사를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나지움(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날의 “폭력을 잊으면 다시 반복된다”는 표어 아래 눈물로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기를 원했고, 진지하게 사과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주역이 된 시대에는 할아버지 세대가 자행한 폭력과 과오를 결단코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후 광복절 7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한국교회도 일제하 한국교회의 과오를 기억하고, 선배 성도들이 간과했던 참회를 이제라도 대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한국교회도 선배 성도들이 범한 유사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고난의 여정 속에서 베풀어진 공의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집트 군대가 쫓아올 때, 홍해를 건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군했지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만 하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습니다. 동족 간에 무시무시한 전쟁을 치렀고, 매년 봄이 오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이제는 가난한 국가들을 지원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어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끄셨고,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설사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소망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공의로우시고 바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우리에게서 온전히 기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악에 대해서는 모양이라도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그분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고 사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을 거부해야 합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한반도의 긴장과 갈등, 대립을 해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이자 희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남원시 기독교연합회에 속했다는 이유 하나로 광복절 기념예배에 참석하신 존경하는 목사님과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일제하 한국교회의 과오를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지켜나갑시다. 그동안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우리의 지역 남원시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나누고 사는 진실한 이웃이 됩시다. 오늘 광복절 기념예배에 참석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한반도와 남원시 지역사회에서 희망차게 전개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종훈 교수(연세대)

적의 계보학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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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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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들통문24-17] 새책, 출판기념회 겸 다음책 발간과 연계된 학술세미나 안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