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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기종 | rkchg@hanmail.net
2010년 06월 20일 (일) 16:42:46 [조회수 : 3801]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과정사상과 영성적 관점에 본-
이 글은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와 상호이해에 크게 기여한 사상가들의 중심사상을 고찰해 봄으로써 두 종교 간의 사상적 연대성과 협력방안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불교와 기독교를 지구상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된 합리적 지적 체계를 지닌 종교라고 보았는데, 그러나 두 종교가 서로 문을 닫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으므로 해서 현재 쇠퇴의 과정에 들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한편 역사가 Arnold Toynbee는 20세기에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의 닫힌 문을 열고 대화를 시작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오늘에 와서는 동서의 많은 철학자/종교가 및 신학자들이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문제를 중요 이슈로 다루고 있는 실정에 있다.
한국사회의 종교적 사항과 특수성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유불선 3대 종교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가 양대 종교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종교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녔으면서도 전혀 대화의 챈널을 찾지 못한 체 기름과 물처럼 높은 담이 그어져 있다.
1. 로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물고를 터준 사람은 독일의 신학자며 종교철학자인 옷토이다. 그는 1910-11년의 2년에 걸쳐서 북아프리카, 이짚트, 팔레스타인을 거처 서 인도와 중국과 일본까지를 방문하여 동양의 종교와 사상들을 접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1917년에 <성스러움/Das Heilige-영역 the Idea of the Holy>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경험과 직관의 공통적 요소를 언급하였다.
1). 옷토는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방법과 경험(mysticism) 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고했다..
옷토에 따르면, 신비체험은 거룩함/신/전적타자/초월적 실재(numen)에에 대한 체험/인식으로서 (1)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tremendum majestorum)과
(2)심히 매혹적인 황홀한 경험(tremendum fasinosum) 을 동반한다.
2). 동양 종교(불교)의 공(空/Sunyata) 체험과 서양종교(기독교)의 신神 체험은 공히 절대타자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계 혹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경험(혹은 깨달음)의 표현들이다. 이로써 옷토는 신비주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2.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화이트헤드는 런던대학에서 은퇴하고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로 옮겨온 그 다음해인 1926년에 과정사상의 종교이해의 기초가 되는 책 <종교의 형성/Religion in the Making>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종교란 처음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의식(우주관)의 고양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도의 지적/합리적인 종교로 발전해 왔는데, 그 과정에는 여리 지역의 문화(종교, 철학, 윤리체계)들의 교합작용(mutual assimilation)을 통해서 발전해왔으며, 지금도 그 작용은 진행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 기독교와 불교는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발전/진화된 최고의 합리적 종교이다.
2) 불교는 종교의 기능/역할을 하는 형이상학 즉 철학적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종교이다(불교는 응용된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례이다)
3) 불타와 그리스도는 둘 다 깊은 영성체험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교는 악의 문제를 형이상 학적 원리로 해결하려 하는데 반해서 기독교는 선한 행위로 악을 극복하려 한다. .
4) 두 종교는 현재 쇠퇴의 과정에 들어있는데, 그 이유는 두 종교가 각기 상대방에게서 더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만족/자만과 자신의 사유의 틀 속에 안주하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사상 중 불교의 사상과 유사한 개념들은 다음 셋으로 요약된다:
1)신의 존재를 무한한 잠재성(absolute wealth of unlimited potentialities)의 세계로 보아 불교의 공사상과 유비되는 점(그 본질은 언어나 개념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2)모든 현상들이 잠정으로 발생했다 살아지는 계기적 존재들로서, 또한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의 자료와 원인이 되는 점(인과관계)을 들어, 사물의 비실체성(non-substance)을 말함으로써 불교의 연기설과 비자성성(제행무상/제법무아)과 유비되는 점을 들 수 있다.
3)신(제일 본성)과 우주(제이 본성)는 한 실재의 양면의 관계이다(색즉시공/공즉시색)
3. 다이세츠 스즈키(D.T. Suzuki, 1870-1966)
일본의 경도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다로(1870-1947)의 친구이자 선불교의 대가인 스즈키는 대승불교 특히 일본의 선불교를 서방세계에 알린 인물이며, 또한 동서의 철학/종교 사상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1957년에 발표한 <기독교와 불교의 신비주의/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m> 라는 책을 통해서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접근성과 상호교류의 가능성을 피력하였다. 스즈키는 기독교의 많은 영성가/신비가들 중에서 특히 14세기의 독일의 신비가 Meister Eckhart의 사상에서 선불교의 방법과 너무도 일치하는 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에크할트는 神(God)과 神性(Godhead)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성”은 모든 언어적 표현과 어떠한 상대적인 개념으로도 설명 불가능하며, 또한 거기에는 어떠한 행위(action/motion)도 부재한 절대 태허의 세계를 지칭한다. 따라서 스즈키는 에크할트의 “신성”의 개념은 선불교의 “절대무”의 개념과 너무나 가까운 개념으로서, 그는 에크할트가 기독교인지 선불교인이지 분하기 곤란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신비가들이나 영성가들의 방법이 선불교와의 대화에 중요한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우린 사람은 폴 틸리히이다. 그는 기독교의 인격주의적 신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존재론적인 신관으로 바꾸었다. 그에 따르면 신은 모든 존재들 중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존재 가능케 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지칭한다. 그래서 그는 신을 "존재 자체"(Being-itself), "존재의 근거" (Ground of being), “존재의 심연”(Abyss of being) 등으로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체로서의 신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있다 없다” 란 어떠한 상대적인 존재론적 개념이나 언어로도 설명하기 블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최상급의 개념이나 언어로 표현해도 그것은 신의 절대성을 훼손하거나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신에 대한 모든 표현들은 상징에 불과하다.(예를 들면, 아버지, 왕, 심판자, 구원자 등등). 틸리히의 신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틸리히는 1960년에 8주간에 걸친 일본 방문을 통하여 스즈키 박사를 비롯하여 불교학자 및 선승들과 신토교의 지도자들과 교제면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60년에 <기독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이란 책을 저술했으며, 거기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문제를 심도있게 취급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의 특색 및 큰 차이점은 기독교의 인격주의적 성향과 불교의 비인격주의적 성향을 들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의 신비주의자들에서 초인격주의적 색체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하고, 동시에 기독교 역사 속에는 불교의 “절대무”를 지칭하거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개념들이 다분히 있음을 언급했다. 이로서 신비주의가 양 종교의 공통성/접촉점임을 알수있다.
5. 토마스 머턴(Thomas Merton, 1916-1968)
20세기 사막의 교부라 불리는 머턴은 1941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어렵게 얻은 뉴욕의 한 대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 켄터키 주에 있는 엄률수도원(Trappist Monastry)에 들어가 일생도안 명상과 수도생활을 하며,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한 많은 저술을 하는 한편, 전쟁과 폭력의 근절/평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종교간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선불교와의 대화와 상호교섭의 문제를 숙고했다. 머턴은 스즈키 박사와 틱낫한과의 교제를 두텁게 가지면서, 장자의 도사상과 선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기독교)신비가와 선의 대가들> 그리고 <장자의 도>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영성수행의 경험을 통하여 기독교 신비가들의 영적 수행의 방법과 선불교의 수행의 방법이 근본에 있어서 다른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선불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선불교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6세기)에 인도의 달마 대사에 의해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후에 중국의 도가 사상과 결합하여 동북아 지역의 토착불교로 발전하여, 중국, 한국,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선불교의 근본정신은 불입문자, 교외별 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로 요약된다. 중국의 선불교는 일대조 달마를 필두로 혜가, 승찬, 도신을 거쳐 5대조 홍인에 이르러, 6대조를 뽑는 과정에서 혜능의 선시가 신수의 것을 능가하여 혜능이 6대조로 피택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머턴은 선(Zen)은 추상적인 형이상학도, 신학/철학도, 이론적인 명제도 아니며, 의식과 앎의 굴레(속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행위로서 “구체적인 살아있는 존재론”라고 정의내렸으며, 이러한 방법은 기독교 영성가/신비가들이 추구하던 방법들과 매우 유사 내지 일치함을 발견했다. 머턴은 불교와의 접촉없이 기독교를 잘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불교의 조명 없이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잘 설명하기란 불가능할 것임을 피력하기도 했다. 머턴은 기독교 영성가로서 선불교에 매료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6. 류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多夕) 류영모는 한 평범한 과학도로 시작하여, 동서의 종교 사상들에 대한 부단한 연구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하여, 세계(인류)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불.선.기(기독교)의 상호 회통과 창조적 조화에 의한 웅대한 영성적 고봉을 이룩해 낸 특이한 인물이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16세의 소년시절에 기독교를 접한 후 신앙인의 삶을 견지하면서도 그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고, 한국의 전통종교들과 특히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는 구도자의 길/삶을 살았다. 그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을 맞게 되었으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했다. 거기서는 기독교의 성경만이 아니라, 동서의 고전들도 강의했는데, 1959년에는 <노자>를 강의 했고, 같은 해에 <반야심경>을 강의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 한시 형식으로 일기처럼 쓰여졌는데, 그의 제자들 중 하나로 연경반에 참여했던 박영호씨에 의하여 풀이되어 <다석전집>으로 출판되었다.
1) 공(空)과 하느님: 공(빔)과 하느님은 참(영적/궁극적/영원한) 실재를 지칭한다
류영모는 불교의 공(空)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한 내용으로 이해했다.그에 따르면 공(허공/빔/하늘)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공/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인간이 공/허공을 알고 마음에 품고 살 때 진실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이 내맘 안에, 내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하느님(아버지)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아버지) 안에 있음과 그 둘은 그 근본/본질에 있어 하나/같음을 깨달았다고 보았다. 이것을 깨달음이 참 깨침이다.
2)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다석은 인간의 고통/불행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성(동물성)인 탐진치 3독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불행/타락의 원인을 교만과 탐욕/이기심에 근거한 죄성에 의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 인간이해에 대비된다.
3) 제나(selfish Ego)와 얼나(spiritual/enlightened Ego)
제나는 공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탐진치 3독을 버리지 못한 옛 인간, 옛 자아, 이기적 자아를 물적/육적인 자아를 지칭힌다. 반면에 공과 무상/무아의 진리를 깨닫고 탐진치 3독에서 해방된 자아를 얼나, 즉 영적인 자아, 득도 해탈 즉 참 깨침에 이른 자아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종교적 수행의 최종 목표는 제나에서 얼나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은 존재가 되는 일이다.
4) 얼나의 현시자로서의 불타와 그리스도
류영모에 따르면 불타와 그리스도는 진정한/완전한 “얼나”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또한 얼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알려준 지고한 스승/현자들이며, 따라서 참 얼나의 현시자들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들의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통해서 “얼나”로 태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류염모에 있어서는 불타와 그리스도는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5) 요컨대 류영모는 동양종교 특히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를 통해서 동양의 종교들과 특히 불교를 이해한 특이한 모델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재 활동 중인 인물들: 아베 마사오, 한스 발덴펠스, 틱낫한, J. Hick, Marcus Borg 등.
결론: 불교와 기독교의 깊은 대화를 통한 두 종교의 접근과 제휴 및 융합의 가능성 모색
(1) 기독교와 불교를 친밀한 형제 종교로 만드는 일, 그래서 기독교적 불교도/불교적 기독교도(Christian Buddhist/Buddhist Christian)의 길을 가능케 함(류영모 모델),
(2) 여기에 유교와 도교 및 한국의 고유종교들을 융합하고 또한 유대교의 카발라, 이스람의 수피즘, 힌두교의 아드바이티즘(不二학파)도 포함시켜서 범세계영성종교(Universal Spiritual Religion)를 탄생시키는 일(한국의 고유철학인 한(韓)사상의 일즉다의 원리를 적용해서). 이것은 곧 종교간의 담을 헐고 전인류의 평화실현이란 큰 목표를 위해서 종교들이 긴밀히 협력/교류/ 연대함을 의미한다.
한국이란 나라에 일찍이 유불선이 들어왔고 근대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와 현재 불교와 기독교가 양대 종교로 자리하게 된 것은 이들의 영성을 융합하고 고양시켜서 범우주적인(전인류를 포괄하는) 영성적 종교를 탄생시키라는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사료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의 평화실현의 가장 중요하고 바람직한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몸(유기체/생명체)으로 보는 과정사상과 영성주의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곧 만유/만인을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빠 하나님 신앙과 사도 바울의 만유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신앙(롬11:36, 엡4:6)의 귀결이 아닐까 사료된다.
기독교의 사랑(agape)과 불교의 자비(karuna)의 비교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아가페 "사랑"과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한 이 두 개념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공통점이란 자기 사랑이 아닌 철저한 "이타성"과 사랑의 대상에 대한 "무조건성"( unconditionality)과 "무제한성"(unlimitedness), 그리고 그 힘의 "강렬함" (intensity)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마음에 근거하고, 불교의 자비는 불타의 마음과 깨달음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하나님 및 그리스도의 마음과 불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하시려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를 아낌없이 주는 자기 희생적 사랑의 마음이고, 불타의 마음은 색계(현상세계)와 공계(본질세계)의 동일성 즉 불이(non-difference)의 진리인 "연기의 법측"을 간파한 무한한 지혜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서, 만인을 무지와 고통으로부터 제도(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인 하나님(그리스도)의 마음과 불교의 자비인 불타의 마음은 다 같이 "만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란 외연적인 공통점/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