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환단고기.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환단고기. Show all posts

2023/08/23

잃어버린 ‘선’을 찾아 : ‘한국선도의 정체’ 2008

잃어버린 ‘선’을 찾아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잃어버린 ‘선’을 찾아
등록 2008-10-28

31일 제2회 국제선도콘퍼런스
한국 고유 심신 수련법 재조명

예부터 도(道)를 닦는 사람, 혹은 군자로 불렀던 고대 한민족은 신선이 되는 자기 수련을 했다. 중국 사대주의와 근대 서양문물의 급류에 휩쓸려 잃어버린 우리 고유의 심신수련법을 되찾으려는 국제선도콘퍼런스가 31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역사박물관(경희궁터)에서 열린다. 국제선도문화연구소(소장·김현문 한서대 건강증진대학원 선도전공 주임교수) 주최로 열리는 2회 콘퍼런스의 주제는 ‘한국선도의 정체’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윤이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한국 고유 자기수련 전통의 정체성’이란 제언에서 세 번의 문화충격을 거친 한국 문화를 

무술을 중심으로 한 신체의 수련과 마음의 수련을 같이하는 전인적이고 적극적인 심신수련을 하던 1기 
△한문을 수용하면서 중화편중주의가 장악한 2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과정에서 동양의 사회질서가 와해되고 서양문화가 들어오던 3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중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4기로 나눴다. 

윤 교수는 “이제부터는 1기의 우리 고유의 전통을 되살려 적극적이고 전인적인 선(仙)을 되살려 우리 사회와 세계에 보급해야 할 단계”라고 밝혔다.

이어 남서울대 그레시아 델 로사리오 교수가 ‘단전호흡과 스트레스 관리’를, 
심우경 고려대 교수(조경학과)가 ‘한국전통문화 속에 내재된 신선사상’을, 
김선풍 중앙대 교수(민속학과)가 ‘이광수 작 원효대사의 민속학적 고찰’을, 
김성환 군산대 동양철학과 교수가 ‘서우 전병훈의 정신철학’을, 
김흡영 강남대 신학과 교수가 ‘다석 유영모의 영성수련’을 발표한다.

====
ejin Pak
ptsondSoreta1
h
2l0f06g
1
1
42g1ti1m0h076im3i8f9ifhgcat81812f9l2t
  · 
Shared with Public

신선사상(神仙思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선사상(神仙思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선사상 (神仙思想)


==

규원사화 / 서문 및 조판기

도교
개념

속세를 떠나 선계에 살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도교교리. 도교사상.

정의
속세를 떠나 선계에 살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도교교리. 도교사상.

연원


사람은 본래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게 마련이나, 그런 숙명에서 벗어나 젊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확대되어 불로장생을 갈구하는 신선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사상은 지역·인종·시대 등에 따라 그 개념이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주로 제왕이나 제후 등 현세적인 권력과 쾌락의 영속을 바라는 계층에서 적극적으로 신선을 갈구하여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조식(調息)·복이(服餌)·도인(導引)·방중(房中) 따위의 신체단련 내지 생리조절의 방법을 개발하고 불사약을 구하거나 금단(金丹)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방사(方士)가 생겨나 술수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상고시대 민족 형성 내지 국가 창건의 단계에서 신선사상이 형성되었으면서도 천계와의 관련을 중요시하여,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민족 발전의 방향을 조정하며 개인생활의 품위를 높이는 목표를 찾아내는 등 공동체의 향상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의 신선사상

한국 신선설의 시원

한국 신선사상은 단군의 건국과 연결되는 신관(神觀)에서 전개된다. 이 신관에는 두 계열이 있다. 다 유일신을 숭봉하기는 하나,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을 유일신으로 받든다. 이것을 환인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다른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 또는 仁)도 태고의 군장인 감군(監群)으로 다루고 신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따로 있는 것으로 받든다. 이것을 사백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이 두 계열에서는 사상 전개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환인 계열에서는 환인의 4차례의 명령을 받들어 환웅(桓雄)이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수수십만 년에 걸쳐 천지부판(天地剖判)을 비롯하여 일월성신과 동식만물에 인류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들고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여 그 군장이 되었다.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한 환웅은 환인이 하늘에 임어(臨御)하는 신향(神鄕)으로 올라간다.

이것이 한국 신선설의 요점 가운데 하나인 공완조천(功完朝天), 곧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는 하늘로 올라간 실례로 꼽힐 수 있는 일이다.

그 뒤를 이어 초대 단군 왕검이 군장으로 추대되어 조선을 창업하고 신시의 법도를 계승하여 국가의 규모를 갖추고 천제를 올리고는 <대고 大誥>를 반포하여 사람이 지킬 도리를 일러준다. 이 단군의 <대고>는, 사백 계열에서는 ≪삼일신고 三一神誥≫로 조정하게 되어, 결국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 부분을 이룬다.

단군조선은 왕검 한 사람이 1,500년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47대의 단군이 계승하였고, 또 반드시 부자상전하지만은 않았다. 사백 계열에서는 최고일신(最古一神)이니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니 하여 유일신을 따로 내세운다.

환인은 그 아래에서 한 감군으로 환국(桓國)을 창건하여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7대를, 제7대 환인 때 서자부의 환웅이 태백으로 파견되어 신시를 세우고 그 군장이 되어 18대를 이어 내려오고, 그 뒤를 이어 단군 왕검이 조선을 창업하여 47대를 계승한 후 부여-고구려-대진(大震:渤海)으로 정통이 이어진 것으로 하였다.

한국 신선사상의 엄격한 기원은 탐색해 낼 문헌자료가 부실하나, 그러한 사상은 한민족의 기원을 추구하는 데서 나와 유일신을 받드는 신앙에서 추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인 계열의 사상이 순박한 원초성을 띠고 있고 사백 계열은 환인 계열의 사상을 수정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환인 계열의 신관

≪규원사화 揆園史話≫의 <조판기 肇判記>에는, 암흑 혼돈한 태고 시절을 말하고 그와는 별도로 원래부터 존재해 있는 환인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을 부각시켰다.

“상계(上界)에는 따로 일대주신이 있어 그를 환인이라고 하는데, 전세계를 통치하는 한량없는 지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고 그의 거처는 수만 리이고 항시 광명을 크게 드러내고 휘하에는 또 무수한 작은 신들이 있다. 환이라는 것은 광명이고 그 체모를 형상한 것이며, 인이라는 것은 본원으로 만물이 그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동서 <단군기 檀君記>에는 단군 왕검이 반포했다는 <대고>의 서단인 앞부분에 유황일신(惟皇一神)이 최상일위에 임어함이 강조되고, 하늘의 궁전에 거처함과 만선만덕의 근원임이 밝혀지며, 그 권능과 섭리가 언급되고, 신향(神鄕) 곧 유황일신이 임어하는 고장이 대길상(大吉祥) 대광명한 곳으로 제시된다.

이 신향은 한국 신선가의 궁극적인 지향으로, 성통공완(性通功完)하면 조천(朝天:입궐하는 것)하여 신향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확정지어져 있다. 성통이라고 함은 사람이 타고난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이르는데, 유황일신과 불가분의 관련이 내포되어 있다. 공완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받은 사명을 완수함을 이른다.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이 표명되어 있는 기술이다.

천신에 대한 외경과 순수하고 성실한 노력을 통해 천상에 있는 신향의 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신선가 뿐 아니라 한민족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던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사백 계열의 신관

한민족의 태고시대의 한 국체로 환국(桓國)을 제시하고 최고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음과 그 일신의 성격 내지 상황을 설명하고 환인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일신을 독화지신(獨化之神), 곧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절대자인 신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마치 공행(功行)이 차서 득도 승천한 신선같이 느껴지게 한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三聖記全上>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환이 나라를 세움에, 최고의 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는데 독화하는 신이다. 그 광명은 우주를 비추며, 변통자재한 변화는 만물을 생성하고, 죽지 않고 오래 살며, 항상 쾌락해질 수 있고, 지극한 기운을 타고 놀며, 자연과 묘하게 합치하고, 작위함 없이 일하며, 말없이 행하고, 매일 동녀 동남 8백을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보낸다. 이에 환인 역시 감군으로 천계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내어 처음으로 익혀 먹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환국이라 하고, 그를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 하며, 안파견(安巴堅)이라 칭하기도 한다. 7대를 지내 내려왔으니 그 연대는 알아볼 수 없다.”

사백력은 시베리아(Siberia)를 연상하게 하고 안파견은 ‘아바지’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 흑수와 백산은 흑룡강과 장백산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다. 백산은 천산(天山)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인다.

사백 계열에서는 유일신을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라 하여 일신이면서 3가지 공능을 발휘한다는 신관을 견지하는데, 그 공능은 다시 5가지로 확대되어 오제설(五帝說)로 이어진다.

삼신의 작용을 ① 천일:조화, ② 지일:교화, ③ 태일:치화로 나누고, 이것이 다시 오제로 분화되어 동서남북 중의 사명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이 분화되나 신이 복수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백 계열에서 내세우는 인류의 시조 이름은 나반(那般), 그 배필은 아만(阿曼)이고, 환족은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다. 환국의 초대 군장 환인은 본래 천산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득도장생

사백 계열에서는 초대 환인이 “득도장생하여 온몸에 병이 없다.”고 하였으나 자신의 불로장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서 교화를 일으키고 무기 없이 평화롭게 살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근면하게 일하고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득도장생의 공용성이 강조되었다. 환국이 7대 3301년 또는 6만3182년이라고 하였으니 역대의 환인은 대단한 장수를 누린 것이 된다.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은 사람들에게 묵묵히 생각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호흡을 조절해서 정기를 보존하여 장생구시(長生久視)하는 술법을 가르쳐 신선술을 실천하도록 하였다.

신시씨(神市氏)가 본성에 통달하여 참됨을 이룩하는 것을 지향해서 전(佺)으로 수행 재계하게 하고, 청구씨(靑丘氏)가 천명을 알고 선(仙)을 넓힘을 지향하여 선(仙)으로 법을 세웠고, 조선씨가 정기를 보존하여 수명을 연장함을 지향하여 종(倧)으로 왕업을 세웠다고 하는 것들도 다 신선술을 시행한 예이다.

환웅시대의 선인 발귀리(發貴理)는 천신을 제사하는 뜻을 밝힌 송축문(頌祝文)을 지어 삼신즉일상제의 체용과 권능을 설명하였다. 중국 전설의 복희(伏羲)가 그었다는 희역(羲易)은, 발귀리와 동문수학한 복희가 환족의 우사(雨師)가 전하는 환역(桓易)을 본받아 그어 낸 것이라고 한다. 환과 희는 같은 뜻이고, 복희는 한족의 인물이었다.

자부(紫府) 선생은 발귀리의 후예로 득도하여 천계로 날아올라간 신선으로, 칠성력(七星曆)의 시초인 <칠정운천도 七政運天圖>를 제작해 냈다. 이러한 칠성력의 원리와 오행치수법은 신시의 ≪황부중경 黃部中經≫에서 나왔고, 중국 신선가의 <황제내문 黃帝內文>·<음부경 陰符經> 등을 포함한 ≪황제중경≫도 신시씨 이래의 전승이며, 단군 왕검의 태자 부루(夫婁)가 오행치수법을 우(禹)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중국 문화의 연원을 한족에서 구하는 한국 신선가의 논법이다.

단군신화와 환인

신선사상은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한 예로, ≪장자 莊子≫의 <재유편 在宥篇>을 보면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장생의 도리를 배우는 대목도 공동산(崆峒山)이라는 산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산악으로 뒤덮인 우리 땅에서 퍽 일찍부터 신선사상이 싹텄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능화(李能和)는 공동산이 우리 나라인 청구(靑丘)의 땅에 있었다고 보고, 중국 도교의 조종 격인 장량(張良)도 우리 나라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봄으로써 중국의 신선설 내지 도교의 연원이 우리 땅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에 나오는 단군에 관한 기사는 이러한 산악신앙과 신선사상이 얽혀 있는 예로 들 수 있다.

환인(桓因)은 제석(帝釋) 또는 상제(上帝)로 주석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또 제석은 천주(天主)라고도 하여 천상계의 통치자로 이해되어 왔다.

천상의 통치자인 환인은 우리 먼 조상들에 의해 매우 친근해질 수 있는 인간성을 갖춘 존재로 인식되었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홍익인간’으로 표현되듯이 그 권능을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행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환인 내지 하느님의 관념은 우리 겨레의 가슴 깊이 자리잡고 내려오면서 그 공통된 경외심이 외래 종교의 최고신 또는 유일신을 받아들여 합치시키는 경지까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세의 선가(仙家)는 ‘환’은 광명으로 ‘인’은 본원으로 풀이하여, 환인을 일대주신(一大主神)으로 한량없는 권능을 가지고 전세계를 통치하지만,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규원사화≫의 <조판기>에 따르면, 사람은 불멸하는 영명한 영혼이 있어서 선을 돕고 악을 멸함으로써 본성에 통달하여 공업(功業)을 완성하면 하늘에 올라 일대주신, 곧 환인의 고장인 신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환웅의 사업

환인의 서자인 환웅(桓雄)은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3,000도중을 거느린 채 천상으로부터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다. 환웅은 신웅(神雄)이라고도 하고, 그가 건설한 도성을 신시(神市)라 하며, 그곳의 나무를 신단수(神壇樹)라고 부르는 등 ‘신’ 자를 붙인 것은 그것들을 신성시하는 뜻 외에 환웅과 그가 거느린 도중이 지상의 인간들과 달리 장생불사하는 신선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군의 기사에는 환웅이 강림하여 신시를 건설하고 단군을 탄생시킨 일만 쓰여 있고 다른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의 선가들은, 환웅이 이 밖에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무위자연의 도리에 따라 다스려 만대의 기틀을 잡아 놓고 신선이 되어 천상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하였다.

환웅은 환인의 명을 받들어 하늘과 땅을 갈라 놓고 신시를 건설하여 설교치세(設敎治世)하다가 단군에게 계승시키기까지 수십만 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이 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대라고 하면, 그 이전의 궐천세는 중국 전설상의 시대보다 오히려 오래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한족(漢族)이나 그 밖의 민족과는 별도로 독립된, 그리고 장구한 문화의 연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단군의 기사는 극히 간략하지만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환웅의 사업을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은 이 땅의 선파들에 의해서 예로부터 전승해 온 것이지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천행사

강화 마리산(摩利山)의 참성단(塹星壇)은 제천을 위한 제단이었다. 단군 왕검 초기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의 옛 이름)가 남이(南夷)의 관경(管境)이었고, 남이가 반란하자 아들 부여(夫餘)를 파견하여 평정하고 축성까지 했는데, 단군 왕검이 남순길에 마리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 단군 왕검의 세 아들(夫餘, 夫蘇, 夫虞)을 시켜 축조했다 하여 그 성을 삼랑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제천행사는 고려시대 이후는 도교의 재초(齋醮)의식으로 거행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참성단의 상방하원(上方下圓:상부는 네모나고 하부는 둥금.)의 형모에 대한 의미 부여도 시도되었다.

마리산의 마리는 ‘머리’의 취음으로 보고 마니산(摩尼山)으로도 불리는데, ‘니(尼)’는 후에 고쳐진 것이다. ‘塹星壇’은 본래 삼랑성 안에 개토(開土)하여 만든 제단이라는 뜻의 ‘참성단(塹城壇)’이었고, ‘星’은 후에 도교의 영향을 받아 고쳐진 것이라 여겨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국왕이 마리산에서 제천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환단고기 桓檀古記≫에 들어 있는 이맥(李陌)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조에서 마리산에 당도하여 참성단에 올라가 삼신을 제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구려에서 단군 왕검이 시작한 제천행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 한국 신선가의 전승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18년(408) 8월에 왕이 남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강화도보다 훨씬 남쪽인 광양만 근처까지였으므로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제천할 수는 있었다. 이맥의 기술에 따르면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삼신을 제사할 때 천악(天樂)이라는 음악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천하는 일은 국왕의 권한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 복희(伏羲)도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제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복희는 후에 서토(西土, 지금의 중국 중부)로 진출하여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영양왕(590∼617 재위) 때 침입한 수나라의 대군을 격멸한 명장인데, 경건한 마음이 있어 입산수도 끝에 꿈에 천신이 현몽하여 대오 각성하기에 이르렀고, 매년 3월 16일에는 마리산에 달려가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였으며,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는 것이다.

단군과 선파의 도맥

단군 왕검은 태백산정의 신시에서 내려와 정식으로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었다. 왕검은 현실적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아사달(阿斯達)로 천도하였고, 1500년 뒤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아사달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은 거기서 산신이 되었고, 무려 1,908세의 수명을 누린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일설에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도 한다. 단군 47대설이 있기는 하나 단군이 2,000세에 가까운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선설을 연상시키기에 족한 일이어서 이 땅의 선파에서 환인·환웅과 함께 단군을 도맥의 조종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킨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다.

≪청학집 靑鶴集≫에 따르면,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된 뒤에 문박씨(文朴氏)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살면서 단군의 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또 ≪백악총설 白岳叢說≫에 인용된 영랑(永郎:向彌山人)과 남랑(南郎:南石行)의 말에 따르면, 문박씨는 환인의 도의 원류를 터득하고 결청지학(潔淸之學:깨끗하고 맑게 사는 가르침.)을 전하였고, 환인은 본래 대왕씨(大往氏)를 시켜서 ≪시서 始書≫를 저술하게 하고 자기는 ≪종서 終書≫ 1권을 지었다고 하였다.

≪시서≫는 풍우·오곡·음식 및 연양(練養)의 도를 주관하고 무엇보다도 성신(誠信)과 불투불음(不偸不淫)을 인간의 선한 일로 쳤다는 것이고, ≪종서≫는 일월·성신·천지·산천의 이치, 성명(性命)의 본원 및 신도(神道)와 묘덕(妙德)의 교훈을 주관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대왕씨를 시켜 중외의 선관(仙官)들에게 ≪종서≫를 반포하게 하였고, 대왕씨는 그 도중들과 함께 환인을 문조씨(文祖氏)로 불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환인의 도는 그 책들과 함께 문박씨에게 전해지고, 다시 을밀(乙密)·영랑·안류(晏留)·보덕(普德) 등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것이다. ≪백악총설≫의 저자는 그 책들을 태백산인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다.

이렇듯 환인과 환웅을 계승한 단군은 신선이 되었고, 그 교훈은 결청지학으로 요약되어 문박씨를 거쳐 신라 사선(四仙)의 인물에게로 전해 내려간 것으로 되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이 땅의 모든 군장들이 누구의 후예인가 하면 그들의 세계는 역시 단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의 신선사상

해모수와 동명왕

고구려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그 건국에 얽힌 신이한 사적이 적지 않다. 고구려는 동맹(東盟)이라는 풍습이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하늘을 경외하고 신을 숭상하는 기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조 동명왕 고주몽(高朱蒙)은 천제(天帝)의 손자로 되어 있고,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漱)는 천제의 태자로 기원전 59년에 천제에 의하여 부여왕의 고도(古都)로 파견된다.

해모수가 천상에서 강림할 때 오룡(五龍)의 수레를 탔고, 흰 따오기를 탄 수행인원이 100여 인이나 되었다. 하늘에는 채색구름이 떠 있고 그 구름 속에서 음악이 울려 나왔다.

이 경우에도 웅심산(熊心山)이라는 산악에 강림하여 10여 일이 지나서야 지상에 내려와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물녘에는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 해모수는 유화(柳花)의 몸에 주몽을 잉태시키고는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천제의 손자인 주몽은 많은 이적(異蹟)을 행하였는데, 그 자신 개사수(蓋斯水)에서 어별교(魚鼈橋)를 얻을 때와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천제의 손자임을 내세웠다.

그는 고구려를 창건하여 18년 동안 재위하다가 40세 되던 해 가을에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였던 유리(類利:瑠璃)는 부왕 주몽이 남기고 간 옥편(玉鞭)을 용산(龍山)에 묻어 장례를 지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해모수와 주몽의 신이성(神異性)은 단군에 관련된 그것과 얼마쯤 유사한 점이 있다. 천제 내지 상제의 자손을 칭하면서 국가의 시조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이적에 대한 순박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겨레가 하늘을 숭경하고 천제와의 혈연을 믿어 긍지를 지니고 산 일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모수가 천상에서 많은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하강하는 상황은 마치 도교에서 신선의 거동을 형용하는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동명왕 주몽은 단군 왕검같이 지상에서 장수하지는 못하였으나 하늘로 올라갔다. 이렇듯 고구려의 건국신화도, 단군신화와는 별도로 신선사상과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의 한 지파가 세운 백제도 해모수와 주몽의 고사(故事)를 전승하였다고 하겠다.

신라 사선과 선풍

신라시대에는 선풍(仙風)이 성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군에 의해 전해진 환인 이래의 도를 문박씨로부터 계승했다는 영랑(永郎)은 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등과 함께 신라 사선으로 불린다. 이들은 영남인 혹은 영동인이라고 하여 종잡을 수 없고, 일설에는 신라 이전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결청지학이라는 이 땅 고유의 선풍을 계승한 영랑은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다니는데, 90세가 되어서도 신색이 어린아이 같고 행색이 기괴했다고 한다.

사선의 유적은 장연(長淵)의 아랑포(阿郎浦), 지리산의 영랑호(永郎岵) 등에도 있으나 고성(高城)의 삼일포·사선정·단혈(丹穴), 통천의 사선봉, 개성의 선유담·영랑호, 금강산의 영랑봉, 강릉의 한송정 등 주로 영동에 몰려 있다. 한송정에는 신선이 선단을 연조하던 돌아궁이와 돌절구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이들 사선은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고 한다.

선단 연조나 백일승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세속적인 일에 상관하지 않고 호방불기하게 산수간을 오유(娛遊)하는 것이 결국은 사선의 행태라고 하겠는데, 속세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들 사선은 추종자가 많아 도중 3,000인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이 3,000의 도중은 환웅이 강림할 때 거느린 도중의 수와 같다. 이들 도중 역시 속세로부터 초탈하여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겼을 것이고, 수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청지학으로 요약된 선도체득(仙道體得)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화랑도와 신선사상

사선이 일으킨 선풍은 신라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굳건한 전통을 이루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 鸞郎碑序> 첫머리에,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어 그것을 풍류라 하고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 仙史≫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풍류도가 있었고, 그 기원이 선가의 역사를 다룬 책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풍류도는 결국 신라 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내지 기본 사상이었다. 신라의 ≪선사≫가 전해지지 않아 풍류도의 내용을 적확하게 알아보기는 힘드나 풍류라는 말뜻만을 가지고 본다면, 세속적인 일에서 초탈하여 고상하게 산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풍류도는 그러한 정신을 내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도는 결청지학과도 의미상으로 합치되고, 신라 사선의 행태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어쩌면 한국의 멋의 연원도 이 신라의 풍류도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576년(진흥왕 37)에 시작된 화랑제도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고 거기에 유·불·도의 덕목들을 보충하여 인재 양성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선·지선·선랑 등의 별칭이 있는 화랑은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원근의 산수에 노닐면서 도의도 연마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으니 사선의 행태와 매우 방불하다. 그래서 후세에는 사선까지도 신라의 화랑으로 여기는 사례가 생겼다.

신선사상이 화랑의 단계에 와서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의 제도에 수렴되어 이전의 소극적인 의의를 지양하고 신체의 단련, 무예의 연마, 대의의 각성, 관용과 희생을 앞세운 기개의 함양 등 적극적인 방향으로 그 수련내용이 확대되었다.

선풍과 선속

공완조천의 관념을 생각해 본다면, 인재의 선발이나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이와 연결하여 신라의 화랑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 13대 단군 흘달(屹達) 무술 20년조에 미혼 자제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고 그들의 행색을 두고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다만 진흥왕(眞興王, 539∼576 재위) 때 화랑도가 비로소 제도화되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동떨어진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 고구려의 고국천왕 13년(191) 을파소(乙巴素, ?∼203)가 국상(國相)으로 선인도랑(仙人徒郞)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한 사례가 있어 화랑제도의 선성이 되었다는 것이 사백 계열의 견해이다. 을파소의 선인도랑제도는 교화[文]를 다루는 참전(參佺)과 무예[武]를 다루는 조의(皁衣)로 2분되어 있다. 정사에도 고구려의 선인 관직이 나온다.

을지문덕(乙支文德)도 신선가 계통의 인물로, 도로 천신을 섬기고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아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도리를 터득함.)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을 말한 바 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여 이렇게 조정된 신라의 선풍은 고려시대에까지도 이어져 내려갔다. 예종은 1116년 5월 경진일에 내린 제서(制書)에서 신라 사선의 유적을 영광되게 받들 것과 국선, 즉 화랑의 일을 대관의 자손을 시켜 행할 것을 명하였다. 의종도 1168년 3월 무자일에 신령(新令)을 반포하고, 그 제5조에서 선풍을 숭상하도록 명하였다.

신라 선가의 특색

이곡(李穀)의 <동유기 東遊記>에 신라 사선이 오유한 강릉 경포대에서는 달밤이면 사선이 즐기는 생소(笙簫)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사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여전히 악기를 연주하고 명승지를 소요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선의 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 그 도중과 함께 노래와 음악을 즐겼다. 이렇듯 신라의 선가는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선의 중심 인물인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는 여류선가 보덕(寶德)은 거문고[琴]를 안고 다니며 그것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보덕은 선녀로도 불렸는데, 용모가 물에 뜬 연꽃 같았고 바람을 타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가락국왕에게 자연의 순리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감시선인(旵始仙人)은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七點仙人)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한옥(寒玉) 같은 용모를 지닌 그는 역시 거문고를 안고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내해왕(재위 196∼230) 때의 공신 물계자(勿稽子)도 나중에 속세를 버리고, 거문고를 안고 사체산(師彘山)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효공왕 때 도선(道詵)이 금강산에서 그를 만났는데,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눈같은 살결을 하고 물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 나이를 알아보았더니 800세에 가까웠다고 하였다.

거문고[玄琴]의 창제자인 옥보고(玉寶高)는 경덕왕(재위 742∼764) 때 사찬(沙粲) 공홍(恭汞)의 아들로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워 선도를 터득하였는데, 학금선인(學琴仙人)·옥부선인(玉府仙人) 등의 별칭이 있다.

가야금의 명수인 우륵(于勒) 또한 신선으로 지목된다. 이 밖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일로 향가(鄕歌)와 그 신통력으로 알려진 월명사(月明師)와 융천사(融天師)의 작가고사(作歌故事)가 있다.

<도솔가 兜率歌>로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난 괴변을 소멸시켰다든지, <혜성가 彗星歌>로 성괴(星怪)를 양제하고 침범해 온 왜병을 제 발로 돌아가게 했다든지 하는 고사는, 신라 사람들의 음악관 내지 가요관의 독특한 면을 나타낸 사례이다.

신라시대의 음악이 드러내는 이러한 예술적 신비성과 선도가 지닌 초월적 오묘성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기풍은 허황된 방술의 미망(迷妄)을 초극하여 세련된 새로운 의식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우리 겨레의 예술인에 대한 순직한 경애심을 함양하는 힘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이 밖에 신라의 왕손이었던 대세(大世)는 신라가 좁다고 생각하여 중국의 오월(吳越) 땅으로 건너가 환골탈태하고 신선이 되는 길을 배우기 위하여, 586년(진평왕 8)에 그의 벗인 구칠(仇柒)과 함께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버렸다. 이들도 선가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접기/펼치기신선사상의 변천

수련적인 도교와의 습합


대세·구칠이 신선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을 향해 떠난 것은 이미 중국 도교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교는 본래 신선설을 골간으로 하여 형성된 종교이므로 한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습합하기가 쉬웠다.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와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따라 중국 도교와 접촉이 깊어지면서 도교의 내단(內丹:丹學) 수련법도 도입되었다.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 등의 기록을 보면, 신라 말에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 그리고 승려 현준(玄俊)·자혜(慈惠) 등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중국의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에 도입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수련도교가 우리 고유의 선풍과 혼합되면서도 선파의 맥락은 그대로 유지된 사실이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다. 그는 고려시대의 선파 인물로 이명(李茗)·곽여(郭輿)·최당(崔讜)·한유한(韓惟漢)·한식(韓湜) 등을 비롯하여 혜륵(惠勒)·아도(阿道)·흑호(黑胡)·혹산(翯山)·정호(丁皓) 등 승려까지 합하여 여럿을 꼽고 있다.

다만, 강감찬(姜邯贊) 같은 경우는 거란 토벌이라는 큰 공도 있고 하여, 문곡성(文曲星)의 현신이라느니, 호환(虎患)을 물리치는 방술을 지녔느니, 또 선도를 터득하여 대낮에 등선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84세의 장수를 누린 그가 어느 정도의 선도 수련을 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도서(道書)를 애독하여 그 계통의 양생법과 의학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런 계층과는 달리 몰락한 선비나 비천한 지식인들이 도술의 수련을 빙자하여 산수간을 오유하면서 시를 읊는 등 세속에서 초연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의 낙방거사 조여적(趙汝籍)도 그런 부류의 하나인데, 그가 편술한 ≪청학집 靑鶴集≫에는 위한조(魏漢祚)를 중심으로 10여 인이 모여 지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선파(仙派)들은 도술도 뛰어나 수련도교를 신봉한 듯한 일면이 있으나, 환인을 동방선파의 조종으로 받들고 환웅과 단군을 높이며, 단군의 후예가 박(朴)·백(白)의 성을 쓰기도 하므로 신라의 박혁거세도 그 후예일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여 수련도교의 도맥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선파의 역사관

조선시대의 선파들은 당시 유가 계통의 지식인들과는 판이한 역사관이나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륙과 일본 각지를 편력하여 대국(大局)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명나라의 멸망과 만주족의 발흥을 예견하였고, 한족(漢族)에 대하여 뚜렷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것을 통박하고, 한문화를 숭상하는 해독을 역설하였다. 그들은 당시 임진·병자의 두 큰 난리를 겪어 국력이 쇠진한 데다가 한문화에 기대어 성리의 공론에만 매달려 지도력을 상실한 상층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구세의 이념을 선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천운이 동북에 있었으나 장차 그것이 백두산 이남으로 옮겨지면 우리 나라가 일본을 병탄하고 중국을 제압하여 천하를 평정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공허한 글에 빠져 쇠약함에 익숙해지고, 자기의 도는 버리고 송유(宋儒)의 여타(餘唾)를 씹으며 자기의 임금을 깎아 내려 외국의 신복(臣僕)에 견주고 있다.”고 당시 지도층의 사대주의적인 패배의식을 비판하였다.

조선 후기에 실학이 대두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일으킨 것도 이러한 선파의 사고방식을 계승, 발전시킨 데서 얻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영·정조시대의 사학자 이종휘(李種徽)는 사대적인 패배의식을 탈피하여 자주적인 사관을 확립하려고 노력한 점에서 선파의 역사관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수산집 修山集≫ 가운데 <단군본기>·<신사지 神事志> 등에서 단군의 사적을 속설까지 수합하고 마니산 제천을 곁들여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이를 국사의 발단으로 삼아 고유 문화의 긍지를 보였고, 단군 이래의 구강(舊疆) 내지 고구려·발해의 판도 회복에 대한 의욕이 없음을 개탄하는 한편, 역대 사가들의 사대적 근성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패배의식을 배격하고 주체성을 고양하려는 선파의 사관은 한말의 사가들에게도 받아들여졌으니, 박은식·신채호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접기/펼치기중국의 신선설

신선설의 발생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후기(기원전 403∼221)부터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초사 楚辭≫, ≪한비자 韓非子≫ 등에 불사도 불사약 연년불사 무사 등의 말이 나온다. 중국 신선설은 일반적으로 북방인 연·제(燕齊) 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보나 신선설은 당시 중국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다.

이러한 신선설은 중국의 원초 신앙형태인 무술, 자연숭배 등 다소간 초능력적인 요소들과 혼합되어 불사약을 연조하고 죽은 혼령을 불러내고 하는 등의 방술과 그것을 행사하는 방사가 당시 중국 상하에 두루 알려졌다.

선(僊)과 선(仙)의 의미


송무기(宋毋忌)·정백교(正伯僑)·충상(充尙)·선문고(羨門高) 등 방선도(方僊道)를 따르는 신선가들은 다 연 출신이었으나 제에도 방선도를 따르는 신선가들이 많았다.

한편, 신선설은 산악신앙과 관계가 깊다. 산악은 상제가 임어하는 천계와 가깝다는 관념에서 산악신앙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僊人’의 ‘僊’은 가볍게 들려 올라간다는 뜻으로, 천상을 유행함을 이르는 말이고, ‘仙人’의 ‘仙’은 ‘屳’으로도 쓰는데 산의 정상에 있는 사람으로 천계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신선과 천상이 연결되는 것은, 죽음과 노쇠와 곤고를 부정하는, 피안사상이 희박한, 현세적인 이익의 영속을 지향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사후생활로의 전이와 연결된다.

불사약

신선은 본래부터 따로 있는, 선천적인 특이한 존재로 여겨서 그들에게는 복용하면 장생불사하는 영약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삼신산의 전설이 있다. 삼신산은 산동 연안에 연결된 발해 가운데 있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라는 3개의 산으로 된 바다섬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삼신산은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이고 불로초나 불사약이 있다고 하여 진시황은 처음에는 방사 서불(徐巿, 또는 徐福)을 시켰다가 다시 방사 노생(盧生)을 시켜 각각 다수의 수종인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한다.

삼신산이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같이 알려진 것은 산동 연안에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고 상상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물론 ≪산해경 山海經≫ 같은 선진시대의 환상적인 지리서에는 곤륜허(崑崙墟)의 신선 서왕모(西王母)와 불사약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가까운 발해에 있다는 삼신산이 주의를 더 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도 역시 방사를 시켜 바다에 들어가 봉래산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무제는 건장궁(建章宮)에다 20여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세워, 무위로 끝났으나, 방사들로 하여금 신선의 강림을 기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진시황과 한무제는 다 봉선(封禪)이라는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 신선이 되기를 기원했다.

불사약의 수탐과 아울러 방사들은 불사약인 선단의 연조를 계속 시도하였다. 선단의 연조방법은 후한 때 좌자(左慈)로부터 갈현(葛玄)과 정은(鄭隱)을 거쳐 진(晉)의 갈홍(葛洪)에게까지 전승되었다.

또 후한 때 오지방 사람 위백양(魏伯陽)은 선단을 연조하여 그 선단을 먹고 진인(眞人)이 되어 제자와 애견과 함께 선계에 올라갔고, 그 방법을 기술한 ≪주역참동계 周易參同契≫는 도교경전의 하나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당나라 때도, 실효는 거두지 못했으나 도사들에 의해 선단이 연조되기는 하였다.

유하(流霞)는 신선술로, 한 잔만 마셔도 기갈이 없어진다고 한다. 항만도(項曼都)는 신선을 만나 유하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기갈을 느끼지 않고 10년 만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했다.

천주(天酒)라고도 하는 감로(甘露)는 하늘에서 내리는 맛이 단 이슬로, 마시면 하고 싶은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감로를 받으려고 금속 선인장을 설치하였다.

선도(仙桃)는 곤륜허에 수천 리를 덮고 도사려 있는 복숭아나무에서 3천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는, 반도(蟠桃)라고도 하는 복숭아로, 7월 7일이면 서왕모가 선도를 따다가 잔치를 베푸는데 주목왕(周穆王)이 그 잔치에 나가 선도 4개를 먹었다고 한다. 한무제의 방사 이소군(李少君)은 선인 안기생(安期生)이 선과(仙果)인 참외만한 대추를 먹더라고 했다.

불로장생을 위한 수행과 방기

불사약을 먹고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것은 외물에 의한 방법이다. 외물의 힘이 아닌,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얻는 방도가 강구되었다. 노자의 ≪도덕경≫ 제59장의 장생구시지도(長生久視之道)는 낭비하지 않는 뜻인 색(嗇)의 수행으로 불로장생을 얻는 방법이다.

기력이나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왕성한 활기를 쉽게 되찾는다는 것으로, 뿌리를 깊이 밖고 열매꼭지를 단단하게 하여 무한한 저력을 가꾸어 불로장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장자≫ <재유>편의, 광성자(廣成子)가 황제에게 장생의 지극한 도리를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수일처화(守一處和)로, 한결같은 자연의 도를 지켜 만사에 조화롭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광성자는, “1천2백 년 동안 몸을 닦았는데도 내 몸은 전연 노쇠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자력을 통한 추구여서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준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끝없이 오래 산다는 일은 실현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욕구는 단념하기 어렵다.

신선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고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려고 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약칭:漢志)≫의 마지막 <방기략 方技略>에는 신선가에 앞서 의경(醫經)·경방(經方)·방중(房中)이라는 3가지 방기가 나온다.

의경은 의학의 이론이고, 경방은 대증을 치료하는 방법이고, 방중은 성생활을 조절하는 방법인데, 다 무병장수를 이룩하는 방편이다. 신선가도 방기인데, 앞의 의경 등 3가지까지 포괄할 수 있다.

≪한지≫의 신선가에 대한 해설은, “신선이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서 그 밖의 여기저기서 무엇인가를 찾는 방법이다. 잠시 그것으로 생각과 마음을 가라앉혀 죽음과 삶의 경지를 같게 하여서 가슴속에서 두려움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주안점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

≪한지≫ 신선가의 책이름에는 ≪황제잡자보인 黃帝雜子步引≫·≪황제잡자지균 黃帝雜子芝菌≫·≪신농잡자기도 神農雜子技道≫·≪태일잡자황야 泰壹雜子黃冶≫ 등이 나온다.

‘步引’은 ‘步捨游引’의 준말로 혼백이 육신에서 걸어 나가 천상 선계를 유행하다가 시신 등 남겨 두었던 것을 끌어가서 신선이 된다는 시해(尸解)와 유사한 방법이다. 기도는 글자 그대로 기예의 방법이다. 황야는 단사를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다.

≪한서≫ <교사지 郊祀志>에 따르면, 제지방 출신들인 이소옹(李少翁)·공손경(公孫卿)·난대(欒大) 등은 다 한무제의 방사로 황야를 향했다. 갈홍은 선단 연조의 재료를 준비할 재력이 없어서 연조에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불로장생이나 무병장수에도 재력이 필요하므로 황야의 방술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밖에 또 ≪황제기백안마 黃帝岐伯按摩≫가 있는데 안마는 몸을 누르고 문지르고 하여 적절한 자극을 주어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는 기예이다. 남이 해주는 안마와는 달리 자신이 하는 운동으로는 도인(導引)이 있는데, 몸을 여러 가지로 굽혀 가며 호흡을 하는 도수체조 같은 것이다.

신선가들이 행하던 주요한 기예 중에는 또 태식(胎息)과 벽곡(辟穀)이 있다.

태식은 태아가 모태 안에서 탯줄을 통해 배로 숨쉬는 것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뱃속에 가두어 오래 참아내는 폐기법(閉氣法)으로, 건강에만 좋을 뿐 아니라 잘하면 불로장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벽곡은 곡식을 먹지 않고 음수 식기(食氣)를 위주로 하고 백출(白朮)·산약(山藥:마)·황정(黃精)·거승(巨勝:흑임자)·복령(茯苓)·영지(靈芝) 등의 보조약품을 복용한다.

≪황제잡자지균≫의 지균은 몸에 좋은 버섯을 가려서 먹는 방법으로, 고래로 영지 자지(紫芝) 같은 것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가능케 한다는 버섯이 있다. 이 밖에 두꺼비·박쥐·거북·제비 같은 동물 가운데서도 가려서 먹으면 장수하게 된다 하여 그런 것을 육지(肉芝)라고 부른다. 도교 성립 후에도 이러한 방기가 받아들여졌다.

선화

신선이 된다는 것은 황당하기는 하나, 인간은 크게는 불로장생을 작게는 무병장수를 바라는 생각을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선 이야기에 관심을 모아 왔다. 서왕모는 천상에서 금령(金靈)의 기를 주관하고 서방을 다스리는 천선으로, 황제에게 병부(兵符)와 도책(圖策)을 주어 치우(蚩尤)를 이기게 해 주었고, 신궁(神弓)인 예(羿)에게 준 불사약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먹고 달로 달아났다는 등등의 설화가 전해진다.

황제는 도인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끝에 득도하여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에서 보정(寶鼎)을 만든 다음, 거기에다 선단을 연조하여 그것을 먹고 신선이 되어, 선계에서 정호(鼎湖) 가로 내려보낸 용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올라타고 선계로 올라갔다.

노자는 ≪사기≫ 본전에 따르면 춘추 말기 주실(周室)의 주하사(柱下史, 국립도서관장 격)로 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주실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을 나가 서쪽 땅으로 가 버렸다. 신선가들은 노자를 태초부터의 신선이라 하고 노자 ≪도덕경≫ 81장에 준하여 노자의 변화를 말하기까지 하였다.

노자호화설(老子胡化說)은,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노자는 선계의 높은 지위에 있던 신선으로 살고 있었다. 황제와 노자는 신선가들 사이에서 황로사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신선들을 다룬 유향(劉向)의 ≪열선전 列仙傳≫, 간보(干寶)의 ≪수신기 搜神記≫, 갈홍의 ≪신선전≫, 심분(沈汾)의 ≪속선전≫ 등이 나왔고, ≪도장≫의 ≪역세진선체도통감 歷世眞仙體道通鑑≫과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 雲笈七籤≫에도 선화가 많이 들어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청학집(靑鶴集)』
『수산집(修山集)』
『홍만종전집(洪萬宗全集)』더보기

2023/08/21

증산도 - 나무위키

증산도 - 나무위키

증산도

최근 수정 시각: 
Semi protect3  이 문서를 편집한 기록이 있어야 편집 가능한 문서입니다. 
[ 펼치기 · 접기 ]
삼태극
종교표지 원불교 검정색
종교표지 선교 검정색
종교표지 천도교 흰색
종교표지 천도교 검정색
종교표지 수운교 검정색
종교표지 증산교 검정색
종교표지 성덕도 검정색
종교표지 대종교 검정색
종교표지 갱정유도 검정색
음양
종교표지 유교 검정색
종교표지 일관도 검정색
external/upload....
external/opencli...
류큐 왕국 국장
종교표지 천리교 검정색
종교표지 창가학회 검정색
316717
증산도
甑山道
external/static....
로고
external/www.jsd...
설립년도
분류
증산계통 종교
신앙 대상
창교주
안세찬
교주[1]
안세찬 [2][3] · 안중건[4]
본부[5]
위치
대전광역시 대덕구 한밭대로 1133
증산도교육문화회관
신자 수
약 5,000명 [6]
공식 홈페이지
유튜브
SNS
페이스북 아이콘 | 인스타그램 아이콘 | 트위터 아이콘

1. 개요2. 역사
2.1강일순과 고판례2.2. 강일순 사망 및 분열2.3. 일제 강점기와 차경석의 보천교2.4. 해방 후 증산교 대법사의 성립과 안세찬의 등장2.5. 안세찬의 재등장과 증산도의 성립2.6. 증산도의 성장과 후계구도 확립2.7. 안세찬의 사망과 형제의 난2.8. 환단고기 콘서트와 근래의 증산도
3. 주요 교리
3.1. 종지(宗指)3.2. 팔관법3.3. 천지일월 사체론·삼극제론3.4. 마패 도수
4. 경전과 도서
4.1. 증산도 도전
4.1.1. 증산도 도전 비판
4.2환단고기4.3. 증산도의 진리4.4. 월간개벽4.5. 우주변화의 원리4.6. 이것이 개벽이다上4.7. 개벽실제상황4.8. 기타
5. 신앙문화
5.1. 정기치성과 대치성5.2. 청수 문화5.3. 사배심고5.4. 증산도 대학교5.5. 율려 1집
6. 포교 및 활동
6.1. 개척포교·패널포교6.2. 인터넷 포교6.3. 책 무료대여 포교6.4. 대학생 포교부6.5. 기타 활동
7. 주요 교단 목록 및 관계8. 비판 및 사건사고
8.1홍성렬 교수 피살사건8.2. 35억 상속세 및 법인문제8.3. 교주일가 신격화와 계급문화8.4. 시한부 개벽설8.5. 자민족 중심주의8.6. 타종교 및 문화와의 관계8.7. 일제강점기에 대한 해석8.8. 주술성 및 오컬트 Ad Hoc8.9. 증산종교 내부에서의 정통성
9. 증산도 관련 유명인10. 참고사항11. 관련용어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74년 봄, 안세찬이 대전[9]에서 처음 창시한 민족주의성향의 증산계 종교

증산 강일순(姜一淳)을 세상의 주재자인 옥황상제(玉皇上帝)라고 믿으며[10] 또한 동양우주론의 삼극설을 차용해 강증산을 무극제(無極帝)[11]라, 창교주 안세찬을 태극제(太極帝)[12] 2대 교주 안중건을 황극제(皇極帝)라 칭한다.

교단 내에서는 강일순의 셋째 부인인 고판례가 1911년에 개창한 선도(교)가 기원이며[13] 종통이 고판례를 거쳐 증산도로 전달되었다고 주장한다.[14] 강일순과 고판례의 언행을 수록한 증산도 도전(道典)과 환단고기를 주요 경전으로 삼고, 태을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문수행을 하며, 치성(천주교의 미사, 개신교의 예배)을 종교행사로 치른다.
증산도의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증산도 종도사 겸 재단법인 증산도유지재단 이사장 안중건을 정점으로 하여, 전국을 52개 광역으로 나누어 각 구역의 책임자인 수호사가, 수호사 밑에는 도장 책임자인 포정이, 포정 밑에는 구역 책임자인 포감이 있다. 일반 신도들은 '도생' 혹은 '성도'라 호칭한다. 해외도장은 미국 LA, 뉴욕, 아틀란타에 있으며, 캐나다 토론토, 일본 동경, 오사카, 홍콩, 대만에 도장이 있다 홈페이지 참조
부속 조직: STB상생방송,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상생출판사가 있다.
증산도가 관리하는 사이트: 홈페이지STB상생방송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월간개벽환단고기 등이 있다.

2. 역사[편집]

2.1. 강일순과 고판례[편집]

교조 증산 강일순은 1871년 태어나 각지를 방랑하며 수행하던 중 1901년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대도통을 하고 이후 1909년까지 천지공사라 하여 우주와 천지의 질서를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많은 기행(奇行)과 이적을 행하였다고 하며, 혹자는 미치광이로 취급하기도 하고 혹자는 도인이나 미륵으로 떠받들었다. 강일순은 이후 "판을 짠다." 하면서 '천지공사'라고 칭하며 주술적인 행위를 하였다. 천지공사를 통해 미래에 올 후천개벽을 설계(?)했다고 하며, 제자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도수(度數)'라는 것을 받기도 했다. 증산계 종교들의 이해에 따르면, 도수는 말하자면 '운명지어짐'이다. 강일순이 누군가에게 어떤 도수를 붙이면, 강일순이 정한 그 도수대로 그 사람의 운명이 흘러간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난법 도수를 붙이면 그 사람은 난법자(이단자)가 된다는 식.
강증산은 부인이 3명이었다. 먼저 1891년에 혼인한 정치순(鄭治順)은 강일순이 수행할 때 시종을 들었으나, 이후 이른바 대도통 이후에 시부모와의 불화로 부친이 내치라고 하면서 이혼하였다.[15] 다음으로 1904년(당시 34세)에 수석제자였던 김형렬에게 처음으로 수부를 세우기로 종용하자 셋째 딸이던 김말순을 추천하였고, 김형렬은 이후 장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말순이 15세로 강일순과 나이 차이가 컸고, 형렬의 아내가 크게 반대하므로 결혼식을 미루기만 하였다. 결국 1907년 강일순이 제자인 차경석에게 다시 수부를 세우기를 명하였으므로, 이종누이인 고판례가 사별 이후 5개월째이므로 예식을 올린 뒤 이른바 고 수부가 되었다. 수부란 '으뜸가는 부인네'라는 뜻이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가 수부가 됨이 매우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2.2. 강일순 사망 및 분열[편집]

1909년, 경술국치 1년 전에[16] 강일순은 천지공사의 종료를 선언하고 39세 나이로[17] 사망했다.[18] 이로 인해 당시 강일순이 이야기한 개벽이 도래하리라 믿었던 제자들은 충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판례는 강일순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강일순이 영적으로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영적인 혼례식을 거행했다. 1911년에 차경석에게 강일순 탄신 기념 치성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깨어난 뒤 강일순의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판례가 강일순으로부터 도통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다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고판례는 자신이 강일순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전라남도 정읍군(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종교성이 매우 강한 집단을 이루었다. 교단명은 공식적으로 정한 바 없으나 내부에서는 선도교(仙道敎)라는 말을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고판례의 이종사촌인 차경석과 고판례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차경석은 이미 동학운동에 깊게 참여했던 명망 있는 사람이었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또한 막강했다. 차경석은 교단 운영에 있어 고판례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고판례는 차경석을 떠나 조종리에서 두 번째 교단을 꾸렸다. 이후 이상호가 보천교에서 분열해 나와 동화교를 차릴 때 고판례를 받들었으나 이상호 또한 교단 운영에서 고수부를 배제하였다. 이에 고수부는 다시 동화교를 나와 오성산에서 은거하다 1935년 사망한다.

2.3. 일제 강점기와 차경석의 보천교[편집]

이후 차경석의 보천교는 교세가 한때 600만 신도라고 자체적으로 주장할 정도로 흥성했으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차경석 사망 이후 붕괴된다. 증산도 관련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집요하게 탄압[19]하여 일제시대의 증산 신앙인들은 모두 지하활동으로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독립운동'이라는 게, '보천교를 믿다 보면 일제가 몰락하고 교주 차경석이 조선의 임금이 된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차경석 본인이 직접 천자를 칭한 적은 없으나 제를 올리면서 제문에 "나라 이름은 대시국(大時國)"이라고 밝히는 등 나라를 세울 것처럼 말하였다. 아마 직접 말은 안 했어도 자기가 도통한 뒤 군주가 되리라 믿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말이 나왔는데, 사실 차경석은 강일순의 제자들 중에서도 굉장히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더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쓴다며 모은 거액의 돈 중 '실제 독립운동' 계열로 흘러들어간 것 중 상당수의 자금은 앞의 '독립운동', 즉 차경석이 천자가 된다는 허상을 부풀리는 데 쓰였다. 보천교 내부에서는 일제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차천자의 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경석은 처음에는 강일순을 신앙함으로써 정말로 도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날이 실제로 보천교까지 세우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실천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것과 같은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차경석은 날이 갈수록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다가, 결국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 정도로 판단하기에 이른다. 차경석은 보천교의 신앙체계를 강일순으로부터 벗어나 유교에 가깝게 바꾸려고 했고,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모아 성리학+종교 정도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보천교 신자 전체는 차경석이 바꾼 신앙을 따르는 신파와 예전대로 강일순을 신앙하는 구파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차경석은 전라도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컸다.[20] 십일전을 세우며 차경석은 큰 교세를 기울였다. 원래 그 안에는 강일순을 봉안했지만, 차경석이 강일순을 따르지 않기로 한 다음에는 차경석의 부인이 환상을 봤다면서, 강일순은 사슬에 묶여 있고 차경석의 영위가 상제로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민중들의 충성심도 강했지만, 일제의 탄압도 집요했고, 민중과 별개로 다른 종교와도 사이가 나빴으며[21] 조선인 지식인 사이에서도 구시대적인 가치를 들먹이며 재산을 헌납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판이 많았다.
한편 충청도 서산지역의 부호로 안병욱이라는 보천교 신자가 있었다. 안세찬은 안병욱의 장남으로 태어나 강증산을 신앙하는 가풍 속에서 자랐다. 안세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2세 때 '홀연히 영성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고 자신이 강증산의 뜻을 잇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22] 일제치하였던 당시 안세찬은 징용을 피해 집을 나와 중국 및 만주 등지를 유람하며 견문을 쌓았다.

2.4. 해방 후 증산교 대법사의 성립과 안세찬의 등장[편집]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는 자금 및 일제와의 관계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924년 차경석에게 파문당했다. 이후 1928년, 전북 김제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종교단체를 세웠다. 1931년에는 김제에 있던 고판례를 끌어들여 증산계 종교 중에서는 나름 세력이 커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은 후 일제의 유사종교해체령에 따라 보천교 및 기타 종교들이 해산당할 때 동화교 역시 해산당했다.[23]
광복을 맞은 1945년, 이상호는 최위석, 자기 동생인 이정립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법사(大法社)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다시 종교조직을 세웠다. 1947년에는 중요인물이었던 최위석과 갈라져 교단명을 '증산교'라고 하였다. 증산도에서는 당시 안세찬이 증산교의 실질적 대표로 활약했다고 주장한다. 보천교에 몸담았었고 증산천사공사기, 대순전경을 집필해 범증산교단에서 이름이 높았던 이상호에 비해 안세찬은 나이도 경력도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1. 20대 중반에 불과하던 그가 증산교의 목화토금수 5主 중 水主 직책을 맡았다는 점,
2. 아산 등지에서 상당한 포교 실적을 올렸다는 점,
3. 당시 이상호는 시력을 거의 잃어 지도자로서 제대로 행세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볼 때
어느 정도 진실이 섞인 과장으로 추측되며, 적어도 안세찬 본인은 자신이 증산교의 대표였다고 믿었으리라 생각된다.[24]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25] 안세찬은 "의통인패를 만들자. 청음(이상호의 호)이 만드는데 우리도 못 만들 이유가 없다." 하며 독자적으로 의통인패를 제작했다. 그런데 증산교 본부에서는 의통인패를 병겁에 대비한 신물이라 하여 교주인 이상호만 만들던 상황이었다. 안세찬이 독자적으로 이를 만들자 교단 본부측에서는 크게 놀라 안세찬을 경계하였다.
그 뒤 안세찬은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을 맡으면서 호신호부(護身護符)와 인물 배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구성하여 다시 한번 다른 간부들과 크게 다투었고 1951년, 증산교로부터 출교처분을 받았다. 증산교는 안세찬이 떠난 이후인 1967년에 '증산교 본부'라는 현재의 교명을 확정했다. 이후 안세찬은 옷감을 만들거나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면서 1975년까지 종교와 크게 관계 없이 살았다. 현재 증산도 교단은 이 또한 강일순이 '도수'로 안배한 바라고 주장하며 '20년 대휴게기'라고 부른다.

2.5. 안세찬의 재등장과 증산도의 성립[편집]

약 20여년이 지난 1975년, 증산교 본부의 창교주인 이상호, 동생이자 2대 교주인 이정립이 모두 사망하자 안세찬은 20여 년 만에 증산교 대법사에 나타났다. 안세찬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라고 요구했다.
1. 1951년 출교처분을 받았을 때 자기(안세찬)는 다른 간부들에게 "내가 또 오리다. 교단 잘 지키소"라고 했으며,
2. 증산교 본부의 간부들은 모두 사표를 내고, 예전 안세찬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새로 조직해야 하고,
3. 자기(안세찬)는 강일순의 직제자 중 한 명인 이치복의 연원을 이었으며, 이상호(증산교 대법사 창교주)와는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증산교 대법사 교단 신자들 대다수가 이 주장을 따르지 않고 반박했다.
1. 출교처분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간부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2. 출교처분을 받고 20년간 교단을 떠난 사람이 이제 와서 이런 주장을 함은 교단 내 규정이 인정치 않고,
3. 이상호도 아니고 이치복의 연원을 주장하면서 20년간 떠나놓은 사람이 교단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증산교 본부에서는 안세찬이 이상호와 동지적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도 부정한다.
1975년에 안세찬은 아들 안중건과 함께 몇 차례 증산교 본부를 찾아가 자기 주장을 펄쳤는데, 이때 안중건이 정역에 입각한 새로운 주장을 하자 증산교 대법사 측 사람들이 이를 제지했다. 그래서 증산교 본부측 사람을 두고 무례하다고 하여 폭언이 오가다가 싸움이 붙기도 하였다.
아무 소득이 없자 1978년, 셋째 아들 안중건과 함께 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대법사 증산교'라는 이름으로 창교하였다. 그런데 대법사든 증산교든 모두 증산교 본부가 사용했었던(대법사) 이름이거나 사용하는 중인(증산교) 이름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이상호 증산교와 안세찬 증산교를 혼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전 증산교, 증산교 등으로 교명을 바꾸다가 1984년에 비로소 현재 사용하는 '증산도'라는 교명을 채택하였다.

2.6. 증산도의 성장과 후계구도 확립[편집]

안세찬이 20여 년 침묵을 깨고 70년대 중반에 다시 종교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에게는 장성한 자식들이 여럿 있었다. 안세찬은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는데 특히 3남 안중건, 4남 안병섭, 5남 안정주가 아버지를 도와 교단 발전에 힘썼다. 안중건은 교리 기본서 ≪증산교의 진리≫'[26]와 ≪이것이 개벽이다≫를 집필해 증산도 교리 및 사상을 정립했다. 한양대학교 학생이던 4남 안병섭은 대학가에서 개척포교에 주력했다.

1984년에 소설 ≪≫이 출판되어 세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88년에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종식되었다. 80년대의 이런 사회상 속에서 민족주의와 동양의 전통을 찾는 분위기가 강해져서, 이에 힘입어 대학생들이 증산도에 입교하였다. 참고 특히 동양철학과 밀접한 증산도의 교리 특성상[27] 상당수 한의대생[28]들이 입교했는데, 이들이 증산도의 토대를 놓았고 현재도 증산도의 주축으로 남았다.[29]

1992년에는 신앙대상인 강일순과 고판례의 행적을 모아 ≪도전≫이란 이름으로 책을 엮어 출판하였다.
증산도가 성장한 또다른 계기가 1998년 정주영의 소떼 방북 사건이었다. 강일순은 “천하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애기판이 지나고 또 총각판이 지난 후에 상씨름[30]이 붙나니 씨름판에 소가 나가면 판을 걷게 되느니라.”[31] 하고 말했다. 잘 알려진 해석에 따르면 애기판과 총각판이 각각 1차, 2차 세계대전이고, 6.25 전쟁이 휴전되고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은 씨름선수가 서로 샅바를 잡고 버티는 형국이며, 마지막 대전쟁이 상씨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씨름판에 소가 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던 차에 문자 그대로 소가 나가는 사건이 벌어진 것. 증산도 교단 내에서는 이때 개벽이 목전에 닥친 줄 알고 또 한번 포교붐이 일었다.
증산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른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1990년대 초반부터 '신천지'[32]라는 이름으로 전산망을 갖추고 PC통신을 운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위성방송시스템을 갖추어 안세찬, 안중건이 진행하는 교육영상을 전국으로 송출하는 등 당시로서는 고급기술을 활용했다. 위에 링크한 동영상의 여기서 약 10초 가량, 여기서 10초 가량 참조.
뉴밀레니엄이 다가올 즈음 안병섭과 안정주는 조직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안중건이 아버지와 함께 실질적인 교주이자 지도자로서 자리잡았다. 안세찬-안중건 부자의 2인 체제 하에서 증산도는 2002년 교단 본부 건물인 태을궁(증산도 교육문화회관)을 완공했고 2003년에는 ≪도전≫ 개정판을 출간했으며, 2007년에는 STB상생방송을 개국하는 등 최대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갔는데도 개벽의 전조라 강조했던 소떼 방북 이후 개벽이 오지 않아 성장세가 꺾였다.

2.7. 안세찬의 사망과 형제의 난[편집]

창교주 안세찬은 2011년 공식석상에서 전국 증산도 신도들에게 뒷일을 종정 안중건에게 맡긴다고 선언하고, 이듬해(2012) 2월 24일에 만 89세[33] 일기로 사망했다. 기사 안세찬은 일가를 이룬 종교인이기에 장지가 어디가 될지도 관심대상이었는데, 십승지중 하나인 충남 공주시 유구읍에 안장되었다. 안중건은 종정에서 종도사로 입극立極[34]하고 아버지를 '태상종도사'로 추존했다.
개벽이 오기는커녕 창교주 안세찬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증산도 신도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35]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한때 교단의 실무를 맡았던 안병섭, 안정주 형제가 아버지 유언을 거스르고 형 안중건에게 반란을 일으켜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여기에 STB상생방송의 메인 강사이자 증산도의 최고간부를 역임했던 노상균이 가세했다. 노상균은 안정주에게도 실망해 따로 증산참신앙이라는 교단을 세워 안중건을 대상으로 대규모 민형사고소를 추진했다. 이런 분란 때문에 교주 안중건이 경찰청, 검찰청에 출석하고 신도들이 상당수 이탈하는 등 교세에 크게 타격을 받았으나, 민형사고소가 모두 기각되어 어느 정도 내부단속이 되었다. 형제의 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내용은 증산참신앙 참조.

2.8. 환단고기 콘서트와 근래의 증산도[편집]

현재 증산도는 개벽 이야기에서 선회해 주로 환단고기 홍보 및 역사찾기 운동으로 방향성을 돌렸다. 안중건은 2013년부터 전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환단고기 강연을 하고 있다. (오바마도 존경한다는) 하버드대 명예교수 이홍범[36]이 환단고기를 극찬하며 증산도교육문화회관에도 찾아와서 수차례 강연을 하기도 했다. 유튜브에 ‘‘안경전’을 검색해보면 개벽보다는 환단고기 및 고대사 관련 영상이 나온다.
2대 교주 안중건은 대외행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나 2015년 11월에는 남북한 종교모임에 다녀왔다. 기사
2016년 말에는 대전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안중건의 자택 옆에 의통신권제작창이란 건물을 신축해 인류구원의 신물, 의통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고 한다.

증산도는 2018년 무술년을 진법도운 원년이라 하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도기(道紀)라는 연호[37] 대신 봉정(奉正)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발표했다. 또한 6차[38]로 개사한 강일순 어진을 고판례 성탄절에 발표했다. #

2020년, 67세의 안경전 종도사는 약 40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다. 도둑놈

2021년 4월, 교단 자체 온라인 대학교인 삼랑대학을 출범했다. 삼랑대학삼랑대학 출범 선언문

2022년 4월, 증산도는 계룡건설에 1697억원 규모의 증산도 상생역사문화교육원 신축공사를 맡겼다. #

3. 주요 교리[편집]

3.1. 종지(宗指)[편집]

후천개벽(後天開闢), 원시반본(原始返本), 보은(報恩), 해원(解寃), 상생(相生)이다. 특히 상생은 강증산이 생전에 강조했던 것으로서 요즘 쓰는 의미와는 달리 새로 구축되는 우주의 질서라고 강조한다.

3.2. 팔관법[편집]

증산도는 강증산의 가르침을 8개로 나누어 ‘팔관법’이라고 한다.
  • 1법 상제관
    후천개벽의 대겁액을 맞이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의 주재자인 옥황상제가 지상에 직접 내려왔으며, 그 인물이 강일순이라는 것이다. 옥황상제가 곧 기독교의 하느님, 불교의 미륵불이라는 것이며 상제야말로 이러한 하느님의 참된 호칭이라 한다.
  • 2법 우주관
    증산도의 우주관은 시간적으로 우주에도 1년이 존재하며, 그 주기는 129,600년이고, 우주가 공전한다고? 만약 공전한다고 해도 그 주기가 저것처럼 형편없이 짧지는 않을것이다 4계절로 나누어진다고 본다. 그리하여 봄, 여름의 선천(先天)과 가을, 겨울의 후천(後天)으로 나눠지며, 겨울에 약 3만 년의 빙하기가 온다고 본다. 현재 시점은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夏秋交易期)에 있다고 본다. [39]
  • 개벽관
    우주관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겨울에서 봄이 되면서 선천이 열리는 사건을 선천개벽, 여름에서 가을이 되면서 후천이 열리는 사건을 후천개벽이라 한다. 선천개벽은 낳아 기르는(生長)의 원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른바 인류의 황금시대이다. 그러나 후천개벽은 거두고 휴식하는(斂藏) 원리로 이루어 져서 지축변동과 함께 열매와 같은 인간들만 남고 나머지는 전멸하는 대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증산도에서는 입도 대상자에게 이 부분을 노스트라다무스남사고에드가 케이시 등의 예언과 함께 설명한다.
  • 3법 인간관
    인간은 천지의 대행자로서 하느님과 동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선천의 상극 기운에 의해 이러한 가능성이 꺾이고 무너져 모든 고통을 당한다고 하며, 후천 개벽에는 이러한 상극의 질서가 상생의 질서로 바뀌기 때문에 참된 인간으로 도통할 수 있다고 한다.
  • 4법 신관, 수행관
    일원적다신론관(一元的多神論觀)으로서 우주의 주재자, 통치자인 옥황상제 밑에 모든 신적 존재가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만유가 신이라는 입장이다. 고조선의 삼신관에 기초하여 조화, 치화, 교화의 삼신이 만물을 낳고 기른다고 본다. 산, 돌, 강 등 자연물에 깃든 신은 인격이 없는 원신(元神)이라 하고 각각의 생물도 모두 신이 있고, 특별히 인간은 삼신의 기운을 온전히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인간은 신명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고 죽으면 다시 신이 된다고 한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신명이고 신명은 육신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증산도의 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조상과 부모가 곧 그 사람의 하느님이라고 설명한다. 천지가 인간을 낳고 부모가 자식을 낳기 때문에 부모는 곧 자녀의 천지라고 한다. 조상 제사는 이러한 은덕에 보은하는 것이며 이로써 후손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본다.
    • 척신(隻神)
    척신은 원한을 맺고 죽은 신명이다. 조선시대 재판의 원고가 되는 것을 척(隻)이라 한 데서 척진다는 표현이 나왔고 척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상 중에 남에게 원한을 품게 한 사람이 있으면 당한 사람이 죽어 척신이 되어 그 자손을 해친다고 한다. 증산도에서는 이러한 척신의 원한을 풀어 주거나(解寃) 척신으로 부터 몸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척신은 무조건적인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대상이다.
    • 복마(伏魔)
    척신은 이유가 있는데 비해 이유 없이 사람에게 해코지 하는 신명이며 선천 상극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마(魔)라 한다. 진리로써 무찔러야 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 5법 천지공사
    후천개벽을 맞이하여 기존의 상극질서를 상생의 질서로 바꾸고 하늘도 땅도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연 작업이 천지공사이다. 천지공사를 통해 20세기 이후 모든 역사의 행로가 정해졌다고 한다. 천지공사는 강일순이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했으며 그 때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천지공사의 내용이라고 한다. 천지공사는 도운道運과 세운世運으로 분류되는데 도운은 종교판의 역사이자 증산도의 역사를 말하며 세운은 현실역사를 말한다. 개벽기에 증산도가 구원의 법방을 가지고 현실역사에 등장할 것을 ‘교운과 세운이 하나된다’라는 표현을 쓴다.
  • 6법 구원관
    후천개벽을 맞이하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게 되는데 이를 무형의 신권인 태을주 수행과 더불어 유형의 신권인 의통인패로 이겨 내고 새 세상을 연다는 것이 증산도 구원관의 핵심이다. 후천개벽의 시기는 증산도 신도뿐만 아니라 강증산에 대해 안다면 한번쯤은 생각했을 주제인데, 특히 증산도는 개벽을 강조한 나머지 시한부 개벽설로 인한 성금편취사기죄로 고소까지 당한적이 있다.
  • 7법 종통관, 수부관
    고판례를 강증산의 도를 이어 받은 태모(太母)이자 수부(首婦)로 받든다. 수부는 남성인 증산상제와 동격으로 천지(天地)와 같이 음양 짝으로서 똑같이 천지공사를 수행하고 인류구원의 도통맥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이의 근거로 ≪도전≫에 나오는 "수부의 치마폭을 벗어나면 죽으리라." 하는 강증산의 말이라든가 고판례가 '일등방문공사'등의 주요 공사에 참여한 사실 등을 든다. 또한 강증산과 고판례의 법통이 안세찬과 안중건에게 이어져 4인이 천지일월天地日月 4진주眞主라는 것이 증산도 종통관의 핵심이다.
  • 8법 일꾼관
    특히 6법 구원관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가져야할 증산도 일꾼으로서의 몸가짐, 행동거지, 생활 수칙등을 말한다.

3.3. 천지일월 사체론·삼극제론[편집]

천지일월 사체론은 7법 종통관의 핵심이며, 증산도의 핵심 교리다. 천지일월 사체론이 아니면 반드시 증산도를 믿어야 된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수많은 증산종단 중에 증산도가 정법임을 주장하는 내용을 도전 및 증산도 지도자의 어록을 통해 살펴보자.
1 일꾼은 천명(天命)을 받아 천지사업에 종신하여 광구천하의 대업을 실현하는 자니라.
2 모사재천(謀事在天)하고 성사재인(成事在人)하는 후천 인존(人尊)시대를 맞이하여
3 천지부모이신 증산 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께서 인간과 신명이 하나되어 나아갈 새 역사를 천지에 질정(質定)하시고
일월(日月)의 대사부(大師父)께서 천지도수에 맞추어 이를 인사(人事)로 집행하시니
5 일꾼은 천지일월(天地日月) 사체(四體)의 도맥과 정신을 이어받아 천지대업을 개척하여 후천 선경세계를 건설하는 자이니라.

천지일월 사체(四體) 공사

6 이 날 황새머리에 사는 송원도(宋元道)가 함께 참석하니라.
7 으스름한 황혼 무렵에 공신을 비롯한 성도들이 방 안에서 태을주를 읽고 있는데
8 상제님께서 공신을 데리고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가시더니 잠시 후에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거늘
9 방문 가에 앉아 있던 송원도가 호기심이 나서 손끝으로 창호지를 뚫고 내다보니
10 상제님과 세 사람이 서 있는데 발은 땅을 딛고 있으되 머리는 구름을 뚫고 하늘까지 닿아 있더라.
11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송원도는 죽는 날까지 "하느님이 넷이다."라고 이르니라.

증산도 도전에 따르면 강일순, 고판례의 도맥을 이은 일월의 대사부 2인이 있으며, 단순한 스승, 선생이 아니라 강일순, 고판례과 함께 하느님의 반열에 든다고 한다. 2인이란 증산도의 초대 교주인 안세찬과 현 교주인 안중건이 되겠다.

증산도는 강일순의 도맥이 고판례를 이어 안세찬·안중건에게 이어지는 부분을 천지일월 사체론이자 삼극제론으로 설명한다. 여기에는 우주원리에 입각한 심오한 이치가 담겨 있다.
1 천지의 이치는 삼원(三元)이니 곧 무극(無極)과 태극(太極)과 황극(皇極)이라.
2 무극은 도의 본원(本源)이니 십토(十土)요, 태극은 도의 본체로 일수(一水)니라.
3 황극은 만물을 낳아 기르는 생장(生長) 운동의 본체니 오토(五土)를 체(體)로 삼고 칠화(七火)를 용(用)으로 삼느니라.
4 우주는 일태극수(一太極水)가 동(動)하여 오황극(五皇極)의 생장 운동을 거쳐 십무극(十無極)에서 가을개벽의 성숙운을 맞이하니라.
5 상제님께서 “나는 천지일월(天地日月)이니라.” 하시고 건곤감리 사체(四體)를 바탕으로 도체(道體)를 바로잡으시니
건곤(乾坤:天地)은 도의 체로 무극이요, 감리(坎離:日月)는 도의 용이 되매 태극(水)을 체로 하고 황극(火)을 용으로 삼나니 이로써 삼원이 합일하니라.
7 그러므로 도통(道統)은 삼원합일(三元合一)의 이치에 따라 인사화(人事化)되니라.

이를 십간과 십이지의 변화로 나타내면 십간(오운)에서 양의 분열운동은 '갑토甲土에서 시작하여 무토戊土까지' 이뤄지고, 음과 양을 조화調和시켜 분열을 통일로 전화시켜주는 중의 조화造化운동은 '기토己土에서 시작하여 신금辛金까지' 이뤄지며, 음의 통일운동은 '임수壬水에서 시작하여 계수癸水에서'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십이지지(육기)에서 양의 분열운동은 '축토丑土에서 시작하여 오화午火까지' 이뤄지고, 중의 조화운동은 '미토未土에서 시작하여 유금酉金까지' 이뤄지며, 음의 통일운동은 '술토戌土에서 시작하여 자수子水에서' 마치게 됩니다.

이를 삼극으로 표현하면 양의 분열운동은 황극, 중의 조화운동은 무극, 음의 통일운동은 태극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간과 십이지지를 함께 보면 황극은 '갑~무:축~오', 무극은 '기~신:미~유', 태극은 '임~계:술~자'가 됩니다. 태극은 일점으로 통일되어 있고 무극과 황극은 변화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육십갑자로 보면 태극은 천간과 지지가 일치하는 '임술壬戌'이 됩니다. 무극은 '신'을 체로 하고 '미'를 용으로 하여 '신미辛未'가 됩니다. 황극은 '갑'을 체로 하고 '오'를 용으로 하여 '갑오甲午'가 됩니다.

무극제이신 상제님께서 신미辛未생으로 강세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태모 고수부님은 경진庚辰생으로 오셨는데 경은 무극, 진은 황극이자 태극(진술태양한수)에 해당합니다. 상제님께서는 당신님의 신원을 무극신으로 밝혀주셨습니다. (도전 5편 355장)

월간개벽 2013년 5월호 139p
위 내용을 정리하자면, 천지의 삼원, 무극·태극·황극이 인간으로 강세하는데 무극은 신미辛未생 강일순이요, 무극·태극·황극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는 경진庚辰생인 고판례가 무극·태극·황극을 매개해준다고 한다. 태극이 任戌생으로, 황극은 갑오甲午생으로 강세하는데 안세찬이 任戌생, 안중건이 갑오甲午생이다.
무극, 태극, 황극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를 이룸을 알 수 있다. 태극은 무극의 질서화요 황극은 태극의 용(用)으로서 근본은 하나다. 증산 상제는 세 경계로 존재하는 무극의 자리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주재자다. 그래서 증산 상제는 무극신, 무극제, 무극상제가 된다. 또한 이런 삼극과 제의 관계는 인사에 새겨져 현실 역사에서 태극과 황극의 대행자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태극신, 태극제와 황극신, 황극제가 무극신 증산 상제와 하나를 이루며 도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마치 천지가 음양 짝을 이루는 방식으로 일월에 의해 대행되듯이 말이다.

상생문화연구소, 링크
무극의 도의 근원자리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 무극제(無極帝)로 오신다. 또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제님의 정신 그대로 성사재인하는 도의 주인, 진주(眞主)가 태극으로 오신다. 태극제(太極帝)가 오시는 것이다. 또한 그 태극제의 정신과 심법을 그대로 가지고 도정을 집행하는 황극제(皇極帝)가 있다. 태극의 체, 이것을 용하는 게 황극이다. 낳아서 기르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문명을 내가지고 상제님 진리를 전해주는 것이.

증산도 종도사 안중건, 월간개벽 2004년 9월호 100p
무극, 태극, 황극이 인사화되어 현실역사에서 무극제, 태극제, 황극제의 칭호를 가지게 되며, 위 어록에 안중건은 황극제가 자기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무극은 우주의 본체 - 미륵불이자 옥황상제인 강일순. (무극제)
* 무극·태극·황극을 매개 - 강일순의 3째 부인인 고판례
* 태극은 무극의 실현자 - 증산도를 창교한 초대교주 안세찬. (태극제)
* 황극은 만물의 생장운동을 주관 - 증산도 2대 교주로서 실제 인간역사를 다스리는 안중건. (황극제)
천지공사를 마치셨음을 종도들에게 성명하시니 경학이 여쭈어 가로되 공사를 마치셨으면 나서시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이 가라사대 사람둘이 없으므로 나서지 못하노라.

대순전경 2~5판
이 뒤에 사람 둘이 더 나온다

1 상제님께서 형렬이 새로 지어 올린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마쳤음을 성도들에게 선포하시니
2 김경학(金京學)이 여쭈기를 "공사를 마치셨으면 나서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는지라
3 말씀하시기를 "사람 둘이 없으므로 나서지 못하노라." 하시거늘
4 경학이 재촉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겠습니다." 하니
5 상제님께서 "그렇게 되지 못하느니라." 하시니라.

교조 강일순은 위 인용과 같이 훗날 두 사람이 출현할것을 예고했고, 이 두 사람이 일월의 대사부이자 무극제·황극제인 안세찬·안중건 부자란 것이 증산도의 종통관의 결론. 여기까지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증산도 천지일월 사체론
성명
강일순姜一淳
고판례高判禮
안세찬安世燦
안중건安重建
도호
증산甑山
법륜法輪
운산雲山
경전耕田
사진
강증산(증산도6차)
고법륜(jsd)
안세찬
안중건
삼극
무극
무극·태극·황극
태극
황극
위격
무극제
-
태극제
황극제
경전
무극대전(증산도 도전)
태극대전
황극대전
호칭
상제님
태모(고수부)님
태사부님
사부님
보직
-
-
종도사 ▶ 태상종도사
종정 ▶ 종도사
출생년
1871신미辛未년
1880경진庚辰년
1922임술壬戌년
1954갑오甲午년
팔괘
건乾
곤坤
이離
감坎
상징
천天
지地
월月
일日
위상
천지부모
일월부모
일월의 대사부
사명
모사재천
성사재인
도수
9년 천지공사
10년 천지공사
두 사람 도수
개 도수, 문왕 도수
말 도수, 사마소 도수
증산도 천지일월 교리
모사재천謀事在天
성사재인成事在人
증산 상제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
태모 고수부님
안경전
종도사님
건곤합덕乾坤合德
천지부모天地父母
수화일체水火一體
일월부모日月父母

2012년 안세찬의 사망으로 인해 '두사람 도수'는 폐기되었다.
사람 둘. 만물을 낳고 기르는 근본 틀인 천지일월의 운행원리와 자연법에 바탕을 두고, 천지를 대행하여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일월(日月)의 덕성을 가지고 지상에 오는 추수일꾼 '두 사람'을 말한다. 이상호, 이성영 형제는 이 '사람 둘'에 대한 말씀을 자신들로 착각하여『대순전경』 2판에서 5판까지 빠짐없이 수록하나 이상호가 1960년에 와병하여 회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1965년에 나온 대순전경 6판에서 이성영이 '사람 둘'을 '사람들'로 비틀어 기록함으로써 종통맥의 근거를 왜곡하였다.

위 도전 측각주대로, 강일순에 관한 대표적인 초기경전인 대순전경의 저자 이상호·이정립 형제는 이 두사람이 자신들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대순전경은 초기에는 형 이상호가 집필했고 나중에는 동생 이정립이 개정판을 집필했는데 이상호가 병환으로 쓰러지자 이정립은 '사람둘'을 '사람들'이라고 변경해 6판을 재출간했다. 증산도에서는 위 왜곡에 대해 전 인류의 생명줄인 종통맥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불의라고 표현하는 정도. 자신들이 강일순·고판례의 법통을 이엇다는 증산도의 강렬한 확신을 알 수있다.

그러나 안세찬이 2012년 사망하자 안세찬·안중건 부자 역시 강일순이 말한 '사람 둘'이 아니라는 교리적 오류에 봉착하게 되었다. 안세찬·안중건 부자 역시 이상호·이정립 형제와 똑같은 착각을 한 것이다.

3.4. 마패 도수[편집]

증산도는 교조 강일순이 종통의 상징으로 직접 안중건에게 전수했다는 마패도수를 주장한다.
제3변 추수도운의 마지막 절정의 역사순간이 갑오년(2014)에 상제님이 직접 전수해 주신 마패도수가 인사로 실현되었습니다. 마패 공사는 김형렬 성도, 김자현 성도, 김갑칠 성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너희들이 믿음을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8:39)라고 하신 믿음의 증표가 바로 마패입니다. 안동 김씨문중의 답사증언에 의하면 상제님의 마패는 의통을 집행하는 신패로서, 상제님께서 마패를 주시며, "이것이 나의 신표니라. 이것이 없으면 원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이후에는 만인이 이를 보고서 찾아와 다 우러러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마패를 전수받은 일꾼들이 상제님의 의통 조화권을 전수받는 일꾼 신앙을 하는 사람이며, 상제님의 올바른 신앙인임을 증명하는 상징입니다.

증산도의 진리 2014년 개정판 728p
진혜원메달1
진혜원메달2
진혜원眞慧院
조화정造化定
남방객南方客
정正 세世
도道 존尊
광光 영永
명明 세歲
생生 불佛
그러나 진혜원 교단에서는 이 마패를 자신들의 담양도관이라고 주장한다. 진혜원증산참신앙 문서 참고.

4. 경전과 도서[편집]

증산도에서는 수많은 책을 펴냈다. 그 중 ≪도전≫ㆍ≪환단고기≫ㆍ≪증산도의 진리≫ㆍ≪우주변화의 원리≫ 4개 도서가 핵심 교리서라 할 수 있다. 또한 ≪월간개벽≫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한다.

4.1. 증산도 도전[편집]

강일순과 3째 부인 고판례의 언행을 모두 통합하여 편찬했다고 하는 ≪도전道典≫을 경전으로 한다. 도전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증산천사공사기≫ㆍ≪대순전경≫ㆍ≪천지개벽경≫ㆍ≪선화진경≫ 등 초기경전들을 기초자료로 하고 따로 답사하고 고증하여 1992년 초판을, 2003년에는 개정판을 출판했다. 도전 편찬과정에서 참조한 서적에 대해서는 강일순 항목 참조

증산도는 도전을 '도의 원전原典'이라 하여 한민족사에서는 ≪천부경≫ㆍ≪참전계경≫ㆍ≪삼일신고≫를 잇는 경전이자, 세계사로는 그리스도교의 성경, 이슬람의 꾸란에 이어 후천 오만년 문명을 여는 진리의 교과서라고 주장한다. 번역작업에도 박차를 가해 영어를 비롯하여 일어ㆍ불어ㆍ독일어ㆍ스페인어ㆍ러시아어 번역본도 있다.

도전이 강일순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증산도만의 입장이며, 타 증산 계통 종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로 씌여진 초기경전들을 실제 강일순이 말했음직한 언어로 풀어 읽기 쉽게 펴냈다는 장점이 있다.

4.1.1. 증산도 도전 비판[편집]

강일순 관련 초기경전 및 증언이 의도적인 왜곡 또는 첨삭되어 증산도 도전에 수록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부분을 정리해 본다.

2편 31장 - 황제vs치우
나는 정세를 맡았노라

1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
2 난을 지은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

그런데 대순전경에는 아래와 같이 황제가 치우를 이겼다고 기록되어있다.
치우(蚩尤)가 작란(作亂)하여 큰 안개를 지으므로 황제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정(定)하였나니
작란하는 자도 조화요 정란(靖亂)하는 자도 조화라.

대순전경 5장 개벽(開闢)과 선경(仙境) 中
증산도에서는 이 부분을 이상호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순전경은 강일순의 수석제자 김형렬의 증언을 채록해서 저술된 책이다. 이상호가 교조의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 경전을 만들었을 확률은 낮다.

8편 106장 - 구도자의 길 이야기의 원본
구도자의 길

1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어떤 사람이 선술(仙術)을 배우기 위하여 스승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더니
2 어떤 사람이 선술 가르쳐 주기를 허락하며 '십 년 동안의 성의를 보이라.' 하므로
3 그 사람이 머슴살이로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그 집 농사에 힘썼느니라.
4 10년이 찬 뒤에 주인이 그 성의를 칭찬하며 '선술을 가르쳐 주리라.' 하고
5 그 부근에 있는 연못에 데리고 가서 이르기를 '물 위로 뻗은 버들가지에 올라가서 물로 뛰어내리면 선술을 통하게 되리라.' 하거늘
6 머슴이 그 말을 믿고 나뭇가지에 올라가 물로 뛰어내리니
7 미처 떨어지기 전에 뜻밖에도 오색 구름이 모여들고 선악 소리가 들리며, 찬란한 보련(寶輦)이 나타나서 그 몸을 태우고 천상으로 올라갔다 하였나니
8 이것이 그 주인의 도술로 인함이랴, 학인(學人)의 성의로 인함이랴.
9 이 일을 잘 해석하여 보라." 하시니라.

보천교에서 발행한 잡지 '보광'에 위 이야기의 원본으로 짐작되는 내용이 실려있다. #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
가짜스승이 10년간 제자를 부려먹고 끝내 죽이려다가 벌을 받은 원본 이야기가 완전히 거꾸로 왜곡되어 도전에 실렸다.

9편 65장 - 강일순의 딸 강순임이 허령들렸다고 서술
하루는 상제님께서 고부 본댁에 가시어 성모님과 정씨 부인, 딸 이순(二順)을 가마에 태우시고 태인 동진강 징검다리를 건너시니라. 상제님과 성모님의 가마가 먼저 건너고 이어 정씨 부인과 이순이 탄 가마가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가마 멘 사람이 실수하여 정씨 부인과 이순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니 그 모양이 우습게 된지라. 상제님께서 보시고 "에잇, 저 ○○○○!" 하시며 길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것들 보라! 저기 ○○○○ 지나간다." 하고 소리치시니라.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에 정씨 부인과 이순은 허령이 들리니라.

강일순의 딸 강순임은 훗날 증산법종교를 창교하여 아버지의 체백을 모셨고 현재까지도 건재한 교단인데 창교자를 허령이 들렸다고[40] 서술한것은 문제가 있다.

10편 142장 - 강일순의 유골의 행방
차경석의 신로 변경과 알 수 없는 성골의 행방

8 천지가 경악할 철제의 불의와 패륜적인 만행으로 우주의 주재자이신 상제님의 성골이 온갖 수난을 당하더니 마침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니라.

강일순의 유골이 행방불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친딸 강순임이 1948년에 아버지 강일순의 유해를 수습하여 1952년에 영대(靈臺)를 짓고 그 안에 안치하여, 지금까지도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에 있다. 증산법종교 참조.

11편 424장 - 고판례의 성골의 행방
태모님 성골의 도난

2 신축(辛丑 : 道紀 91, 1961)년 7월 25, 6일경에 이르러 뜻하지 않게 태모님의 성묘를 도굴당하여 성골을 잃어버린지라
...
11 민환 일행이 그 죄상을 추궁하고 소행을 질책한 뒤 즉시 앞세우고 성골이 암장된 곳으로 달려가니
12 그곳은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 제비창골에 있는 서백일의 교단 용화사(龍華寺) 근처이거늘

서백일의 교단 용화사 근처에 고판례의 유골이 암장되어 있다는 언급까지만 나와있고,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에 안장되었는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고판례 문서 참조.

4.2. 환단고기[편집]

환단고기는 갑작스레 증산도의 교리로 편입된 것이 아니다. 증산도는 도전 편찬과 별개로 80년대부터 환단고기에도 공을 들여 2000년대 후반에 번역을 완료했다. 지금도 전국 대형 서점에 크고 아름다운 두께로 증산도 번역 완역본이 있다. 특히 안세찬 사망 이후로는 환단고기가 강증산의 언행을 수록한 도전에 준하는 경전으로 격상되었으며 천부경과 염표문 등도 암송을 권한다.

4.3. 증산도의 진리[편집]

1981년 첫 출간 당시 제목은 ≪증산교의 진리≫. 교명을 증산도로 바꾼 뒤 책 제목도 그에 맞춰 ≪증산도의 진리≫라고 바꾸었다. 증산도의 내부 가르침에 따르면, 출간 당시 안세찬의 처가 중병에 걸렸다고 한다. 이 책을 출간할 금액이면 안세찬의 처를 치료할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치료를 포기하고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책의 별칭 겸 부제가 '도모[41]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라고. 안중건이 이 문구를 책 제목 옆에 써 놓았다고 여러 번 말한 바 있으며, 신앙심 깊은 증산도 신도는 안중건을 따라서 똑같이 적어 놓는다.

4.4. 월간개벽[편집]

1996년에 ≪증산도 문화소식≫이라는 이름으로 최초 발간했다. ≪월간개벽≫으로 제목을 바꾼 뒤 현재까지 발행하는 증산도의 월간 소식지.

4.5. 우주변화의 원리[편집]

동양철학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한동석이 1966년에 출판한 책으로 한의대생의 필독서이다. 원래 행림출판사에서 냈으나 증산도 산하 대원출판사에서 판권을 인수했다. 지축이동에 관한 부분이 증산도 측 해설과 함께 약간 추가되었다. 증산도의 중급 교리를 하나 소개하자면, 아래 구절이 증산도 창교주 안세찬을 암시한다고 한다.[42]
반면으로 술토가 위한 곳을 살펴보면 서북의 유위에 깊숙이 유폐되어 있으므로 세상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또한 감위(坎位)에 있으므로 그 위가 지하지천(至下至賤)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변화의 기간이며 또한 생명과 정신의 요람인즉 그 누가 이것을 경시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인간사회에 만일 술토와 같이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 만물의 생장수장의 만사의 합천도만을 위하는 성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술토의 덕을 그냥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즉 주역의 지산겸괘는 이 상을 그린 것이요 불교정신의 정수인 空도 바로 이와 같은 空을 말하는 것이다.

- 우주변화의 원리 中 -

4.6. 이것이 개벽이다上[편집]


1983년에 안중건이 집필해 본격적으로 증산도를 세상에 알린 책이다. 개벽, 종말 등 동서양의 예언들을 집대성했다. 증산도 교리를 제외하면 예언에 대해서는 정리를 아주 잘 했다. 증산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용을 들여 홍보한 책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도심지 광고판과 고속도로 광고판 비용에 100억 원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에 새마을호에서도 ≪이것이 개벽이다≫ 광고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영상

≪이것이 개벽이다 下≫는 거의 증산도 교리서에 가깝다. ≪이것이개벽이다上≫에서 비슷하게 증산도 교리만 걸러낸 ≪충격대예언≫(1995)이라는 책이 있다.

4.7. 개벽실제상황[편집]


Play: Video
이 책은 지난 20여 년 전에 출간되어 100만권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이것이 개벽이다(상,하)의 완결판으로서 자연의 재탄생과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전하는 개벽소식의 전모를 체계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필자는 본서에서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하여 이 세계가 개벽을 극복하고 살기 좋은 꿈의 신문명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하고자 한다. 인간은 대 자연 속에서 왜 태어나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지금 어느 때 살고 있느냐? 인생의 근본문제와 우주와 인간 창조의 제1법칙과 성큼 다가선 후천개벽과 연관된 주제(병겁, 전쟁, 지축정립)들을 정리하고 개벽실제상황으로 들어서는 시간대의 비밀을 풀고자 한다. 또한 닥쳐오는 가을 개벽기에는 왜 내 생명이 뿌리로 돌아가고 진리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왜 진리의 궁극을 깨달아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또한 동방의 한반도가 왜 개벽의 중심 땅인지를 들여다보고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철저히 조작 왜곡된 동방의 시원문화와 뿌리 역사(환국-배달-고조선)를 밝히고, 동서양 성자들의 가르침의 총 결론인 대자연의 재탄생과 인간의 새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본서는 동서양 종교와 철학, 한민족의 시원역사와 과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가을개벽 문화 도서의 완결본으로서 21세기 인류 신문명의 고전이 될 것이다. 또한 오늘날 인류가 나아갈 삶의 방향을 가장 명쾌하게 제시한 대도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출판사 서평 -
위 서평대로 증산도 도전ㆍ환단고기ㆍ우주변화의 원리ㆍ예언 등을 한권에 녹인 책이다. 출간 당시 이 책을 마지막으로 안중건이 더 이상 책을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 후로도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초판에는 전쟁과 관련해 개벽시간대를 암시하는 듯한 부분이 있었으나 개정판에는 그 부분을 수정해서 출간했다.

4.8. 기타[편집]

  • 동이비전 (19??, 김한국) - 東夷vision. 안세찬의 첫번째 사위였던 김한국이 지었던 책. 그가 증산도를 떠나면서 이 책은 증산도 내에서 금서가 되었다.
  • 코리아 웅비의 증산도, (1988, 노상균), 새희망 증산도 (1989, 노상균) - 증산도의 수석수호사를 역임했으며 상생방송의 메인 강사였던 노상균의 저서. 훗날 그가 탈 증산도 선언을 하고 증산참신앙을 세우면서 그의 강의 및 저서는 모두 수거되었다. 증산도 내에서 안중건과 안병섭을 제외하고 교리서를 쓴 이는 극히 드물다.
  • 동양학 이렇게 한다 (1989, 안원전) - 이 책을 내기 전 도올 김용옥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책을 내었는데 거기에 답하는 듯한 제목으로 잠시 화제가 되었다.
  • 통곡하는 민족혼 (1989, 안원전)
  • 대순진리회 정체 (1990, 증산도전국청년연합회)
  • 증산도 왜곡의 실상 (1991, 증산도전국대학생포교회) - 대순진리회원불교통일교가 강일순의 사상을 어떻게 왜곡했는지 서술한 책. 증산도의 입장에서 썼지만 증산사상에 관심있다면 볼만한 책이다.
  • 증산도의 세계 1,2 (1994, 안원전)
  • 상제님, 증산 상제님 (1998, 안경전)
  • 대순진리회의 비극 (2000, 증산도 전국청년신도연합회) - 박한경 사후 분열하는 대순진리회의 실상을 담은 책이다. 또한 대순진리회에서 주장하는 하늘상제(강증산), 땅상제(조철제), 인간상제(박한경) 교리 및 시루와 솥 논리의 헛점에 대해 짚었다. 그러나 증산도 역시 삼극설로써 태극제(안세찬), 황극제(안중건)라는 논리를 만들어 냈으며 증산도 창교주 안세찬 역시 사망하고 말았다.
  • 한한한의 사명 (이상학) - 베트남 영사였던 증산도 신도 이상학이 쓴 책이다.
  • 그날이오면 - 증산도에서 주장하는 개벽 순서인 시두(천연두) 창궐 → 남북전쟁 → 대병겁 창궐의 시나리오를 소설화했다.
  • 관통증산도 - 이 책도 아주 중요한 교리서 중의 하나다. 여러번 중보되어 나왔다.
  • 새시대 새진리 1~4 - 안세찬의 어록.
  • 이제는 개벽이다 1~4 - 안중건의 어록.
  • 대도문답1,2
  • 강증산과 후천개벽
  • 쉽게읽는 개벽 (2003, 안경전)
  • 개벽의 땅 한반도 (2003, 안경전)
  • 상생의 문화를 여는 길 (2004, 안운산)
  • 천지의 도 춘생추살 - 증산도 초대 교주 안세찬이 마지막으로 펴낸 책.
  • 천지성공 (안경전)
  • 생존의 비밀 (안경전)
  • 가을개벽과 병란 (2009, 안경전)
  • 질병대란과 살아남기 (2009, 안경전)

이외에도 증산도 산하의 증산도사상연구소에서 펴내는 연구서적 및 논문집 등 많은 서적들이 있다.

5. 신앙문화[편집]

사실 기초사실 외에 신앙문화라고 쓸 만한 것이 적다. 한때는 개벽설 때문에 교단 내부에 결혼금지령이 떨어진 적도 있을 정도로 삭막했다. 시한부개벽설 유포로 고소당해 2014~2016년에 홍역을 치른 이후 깨달은 것이 있는지, 현재는 생활신앙을 하는 행복한 가족신앙인의 인터뷰를 상생방송유튜브 등을 통해 방영하는 등 교단 차원에서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한다.

5.1. 정기치성과 대치성[편집]

증산도는 매주 수요일, 일요일에 각 지역도장에서 치성을 올리며, 대전의 증산도교육문화회관에서 봉행하는 대치성은 다음과 같다.
증산도 대치성
정삼시무치성
태상종도사님
어천절[43]
태모고수부님
성탄절
증산상제님
어천절
증산상제님
성탄절
태모고수부님
선화절[44]
동지대치성
음력 1.3
음력 2.3
음력 3.26
음력 6.24
음력 9.19
음력 10.6
매년 동지

5.2. 청수 문화[편집]

동학의 최제우가 청수(淸水)라 하여 물 떠놓고 기도하던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 청수라는 용어조차도 원래는 천도교에서 나왔다. 증산도 교단에서는 우리네 옛 정화수 문화를 잇는다고 설명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성은 최제우 쪽이 더 가깝다. 물론 최제우도 당시 조선에서 정화수 떠놓고 빌던 문화를 자연스럽게 골랐을 테지만. 각 도장 및 증산도 신도들의 가정은 반드시 청수 담는 그릇을 비치한다.

5.3. 사배심고[편집]

증산교 관련 기록에는 4배에 관한 기록이 여러군데 나온다. 증산도에 따르면 대우주 통치자 하느님에게는 4배를 한다고 한다. 그냥 절 하는 게 아니라 하늘기운과 땅기운을 잡아당기는 반천무지(攀天撫地) 절법으로 4번 절한다. 다만, 각 교단마다 사배심고의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5.4. 증산도 대학교[편집]

매달 한번씩 증산도 신도를 대상으로 1박 2일 일정으로 실시하는 집체교육이다. 초대교주 안세찬이 사망하기 전부터 현 교주 안중건이 증산도 대학교의 이사장, 총장, 교수(?)를 겸임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매달 한 번씩 소집교육을 실시했으나, 현재는 2~3달에 한 번씩 시행한다고 한다.

5.5. 율려 1집[편집]

증산도는 ‘율려팀’이라는 성가대가 있고 앨범도 하나 냈다. 나름 잘 만들었다. 들어보자. 가사가 약간 달라진 곡도 있다. 목록에 없는 09번은 ‘제세핵랑군 진군가’다. 개벽설이 극심하던 2002년에 나온 곡이라 현재로서는 공개를 꺼리는듯하다.

6. 포교 및 활동[편집]

6.1. 개척포교·패널포교[편집]

증산도의 오프라인 포교법은 항상 책을 중심으로 한다. 번화가 및 대학캠퍼스에 패널을 펴 놓고 책을 판매하거나 대여해 주면서 연락처를 받는것이 증산도의 가장 고전적인 포교법이다. 증산도에서 쓰는 패널 이외에도 상제문화, 우주관, 수행관 등의 증산도 팔관법에 환단고기, 아시아 이상주의, 한민족 역사 등을 설명하는 다양한 패널이 있다.
홍보용 책으로는 90년대에는 ≪이것이개벽이다上≫의 요약본인 ≪다이제스트 개벽≫이 많이 쓰였고, 2000년대 이후에는 안세찬, 안중건의 어록 및 상생의 문화를 여는길, 천지성공, 생존의 비밀, 팔관법을 요약한 소책자 등 다양한 책들을 쓰고 있다.
그 유명한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은 증산도와는 무관하며 대순진리회 신도다. 대순진리회가 자신들의 이미지가 나쁜 것을 알고 증산도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6.2. 인터넷 포교[편집]

2000년대 초 이후 다음카페를 활용한 포교법이다. 충격대예언이라는 서적의 인터넷 버전이라고 볼수있는, 예언 관련 카페를 개설했는데, 대표적으로 충격대예언미래대예언불가사의에 답이 있다 등을 증산도에서 만들었다. 다음, 네이버를 막론하고 바이블 코드와 같은 부류를 다루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파생 예언 카페, 혹은 라엘리안같은 기타 외계 컬트 관련이 아닌 예언 카페는 십중팔구 증산도 관련 카페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언관련 카페만 있는것이 아니다. 한창 한류가 유행하던 2000년대 중반에 유명했던 다음카페 한류열풍사랑의 운영자가 증산도 본부 소속 내지는 유관 카페다. 구글에서 관련글을 검색해보면, 한류열풍사랑 카페의 운영자가 증산도 신도임을 눈치챈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
카페 개설 후 주로 다음 3가지 방법을 많이 썼는데, 스마트폰이 없던 당시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1. 설문지 폼 양식을 통해 관심사 및 연락처를 파악해 관련 책을 보내주고 친분을 쌓아가며 포교하는 방법. 양식 샘플
2. 특정 주제로 정모를 한 다음 증산도 포감 또는 교리에 밝은 이가 동석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파악해 친분을 쌓고 포교하는 방법.
3. 다음카페 좌하단에 표시된 현재 접속자와 1:1 채팅을 해서 관심사를 묻고 만남을 유도해 포교하는 방법.
그러나 예언 대부분이 빗나갔고 증산도에서 주장하는 예언들이 1980년대에 출판된 이것이개벽이다上의 재탕임을 누구보다 증산도인들이 잘 아는 데다 창교주 안세찬까지 사망한 현재는 다음, 네이버의 증산도 관련 카페 대부분이 휴면상태다.

6.3. 책 무료대여 포교[편집]

특히 증산도 본부가 위치한 대전권에서 쓰이는 방법이다. 버스 정류장 및 표지판의 튼튼한 금속에 책 거치대를 자물쇠로 시건해놓고 증산도 도서를 비치해서 자유롭게 대여해 가도록 한다. 방명록에 대여한 책 및 대여자 연락처를 적도록 해 놓았는데 자신의 실제 연락처를 기재할 사람이 있을까 싶다.
대전에 거주한다면 버스 정류장에 자물쇠로 고정된 책 거치대가 있는지 살펴보자. 있다면 분명 증산도에서 설치한 것이다. 거치대들이 시간이 지나 녹슬거나 찌그러져 흉물스럽게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6.4. 대학생 포교부[편집]

위 역사에서 언급한대로 증산도 성장의 주역 상당수가 4남 안병섭의 대학가 포교를 통해 입교했다. 증산도의 대학생 포교부는 종교적 신념으로 뭉친 강력한 조직이었고, 90년대에는 상당수 전국 대학교에 증산도 동아리방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증산도의 교세가 약화된데다 대학생들 상당수가 종교에 관심이 없어 동아리방들이 전국적으로 폐쇄되는 중이다. 현재도 활동중인 대학교는 대략 다음과같다.
실제 증산도 신도가 재학중인 대학교 학생회관에서는 태을주 소리를 들을수도 있다!
증산도랑郞이라는 공식블로그도 운영한다.

6.5. 기타 활동[편집]

attachment/증산도/j...
2007년 상생방송 개국 초기에는 페이스북 광고도 했었지만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00년 초반에 증산도사상연구소를 만들었다가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로 개칭했다. 도전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하는데 꽤 오래되었다. 외국어 도전이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7. 주요 교단 목록 및 관계[편집]

증산 계열 교단은 약 70여개에 이르는데 그 중 강일순을 직접 따랐던 문도들(김형렬, 박공우, 문공신, 차경석 등등)이 세웠던 교단과는 비교적 친밀한 관계에 있다. 경전인 도전 편찬과정에서 대부분 문도들의 자손인 이러한 교단 신도들의 증언이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대부분의 증산계열 교단은 몰락한 상태이다. 상당수의 교단이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은데다 신앙인들의 거의 다 고령이고 가족끼리 믿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지는 교단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증산법종교 : 증산과 첫째 부인인 정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친혈육 강순임 여사[45]가 중심이 된 교파. [46] 아무튼 강일순의 유일한 친혈육이 강순임 여사기에 여사 생전에 증산법종교의 신앙대상이자 자기 아버지기도 한 강일순의 유해를 증산법종교 내부로 옮겨왔다.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지만, 딸이 아버지 묘소를 이장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증산법종교는 교세는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증산종교 중에서는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종파기도 하다.
  • 증산교 본부: 안세찬이 젊은시절 몸담았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교단이 안세찬이 떠난 이후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이다. 현재 교세는 미미한 상태. 증산도 신도가 증산교 종령이었던 홍성렬을 살해한 사실이 밝혀진 현재, 서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대순진리회보다 더한 원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 대순진리회 계통: 대순진리회와는 완전히 원수지간.' 다른 많은 교단들은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는 수준이지만 대순진리회는 기본교리 자체를 왜곡하고 반사회적인 활동을 하는데다 일반인들이 증산도와 대순진리회를 혼동한다는 이유다. 강일순을 신앙하는 교단들은 대순진리회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증산도 교인들도 이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개신교인들이 몰몬교통일교 보는 수준으로 보는 셈이다.

8. 비판 및 사건사고[편집]

8.1. 홍성렬 교수 피살사건[편집]

증산도와 같은 뿌리인 증산교 본부의 종령을 역임한 홍성렬과 그의 부인이 증산도 신도에게 살해당한 엄청난 사건이 있다. 교단의 중견 간부[47]가 사주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항목 참조.

8.2. 35억 상속세 및 법인문제[편집]

안세찬은 생전에 별도의 법인을 만들지 않고 사업자등록증만 발급받아 교단을 운영했기에 증산도는 법적으로는 실체가 없었다. 때문에 증산도 신도들이 낸 성금은 종교단체에 기부한 헌금이 아니라 안세찬의 개인 재산과 다름없었다. 실제로 등기부를 검색해보면 상생방송[48]이 재단법인 증산도유지재단보다 먼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안세찬 사후 유족 9명은 아버지의 유산과 관련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안세찬의 유산은 전부 개인 재산으로 파악되어 35억 가량 상속세가 부과되었다. 교주 안중건 및 안중건에게 우호적인 형제들이 상속재산을 출연해 뒤늦게 재단법인 증산도유지재단을 만들었지만, 추진과정에서 교단 발전에 공이 큰 안병섭, 안정주를 배제했기에 형제의 난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8.3. 교주일가 신격화와 계급문화[편집]

증산도는 고판례의 사진 오른쪽에 안세찬의 아내 김정남의 사진을 걸고 ‘도모道母’라고 호칭한다. 안세찬 사망 이후 증산도교육문화회관 태을궁 및 전국 증산도 도장 성전에는 태극제 안세찬의 영정이 추가되었다.
안세찬은 슬하에 13명의 자식을 두었고 4명은 어린시절에 죽어 현재 7남 2녀가 있다. 아들에게는 왕자 혹은 대군과 같은 의미로 ‘종원宗元’이라는 호칭을, 딸에게는 공주와 같은 의미로 ‘선○사’라는 호칭을 붙여 일반 신도와 교주일가가 다름을 분명히 했다. 이들의 교단에서의 위상은 통일교 문선명일가를 생각하면 정확하다. 참조 1남 안중선과 6남 안○○은 증산도 신도가 아니기에 따로 호칭이 없다.
증산도 교주일가
서열
1남
2남
1녀
3남
4남
2녀
5남
6남
7남
성명
안중선[49]
안택원[50]
안○○
안중건
안병섭[51]
안○○
안정주
안○○[52]
안상준[53]
호칭
-
자선종원
선정사
종정
부종정
선화사
진성종원
-
인성종원
강일순은 개벽이후 살아남은 인류의 계급에 대해 "후천에는 계급이 많지 아니하나 두 계급이 있으리라. 그러나 식록은 고르리니 만일 급이 낮고 먹기까지 고르지 못하면 원통치 아니하랴"[54] 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증산도는 교주일가 신격화는 물론 증산도 신도들의 포교 성과 또는 성금헌성액수에 따라‘덕德점’을 부여해 계급문화를 만들었다. 가장 낮은 교무사감부터 시작해 도군자까지 일정이상의 덕점을 획득해야 다음 품계로 올라갈 수 있다.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교무’는 공무원직급의 ‘보’나 조선시대 품계 정,종의 차이와 같은 의미다.
증산도 품계
교무
사감
사감
교무
도감
도감
교무
종감
종감
교무
녹사장
녹사장
교무
도군자
도군자
품계가 한번 정해지면 개벽 이후 오만년동안 자손에게도 품계가 고정된다고 한다. 이건 카스트 제도보다 더하다. 현재 증산도에는 도군자가 단 한명[55] 있다고 한다. 도군자보다 더 높은 공,후,백,자,남,대의성사라는 넘사벽의 품계가 있는데, 설사 대의성사가 되더라도 안세찬의 아들딸인 ○○종원,선○사의 벽을 넘을 수는 없다. 씹넘사벽

8.4. 시한부 개벽설[편집]

강일순은 구체적인 개벽시기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단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가령 태극도에서는 지금이 개벽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증산도는 지금은 '개벽이 임박한 때'이지 '개벽 중'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마치 기독교 종말론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극적인 천재지변/기타 재앙 등과 함께 영화처럼 개벽이 닥친다고 주장한다. 마치 금방이라도 개벽이 올듯, 내년 내후년에 개벽이 올 듯이 분위기를 유도하지만 몇 년 몇월 며칠이라고 날짜를 확장하여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단지 '몇 년 이내로' 혹은 'XXXX년쯤에'라는 정도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증산참신앙에서 증산도의 개벽설 유포와 관련해 교주 안중건을 금전편취사기죄로 고소한바 있다. 경찰에서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으나 검찰은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불기소 처분서에 무고죄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것으로 보아 검찰도 종교적 주장으로서의 시한부 개벽설은 인정한 모양이다.
1988년 올림픽, 1999년 세기말, 2002년 월드컵 등이 증산도가 개벽의 때라고 말했던 연도다. 2002년은 60갑자로 임오년(壬午年)이었는데, 사오미(巳午未) 개명 도수라는 이론으로 왜 2002년이 개벽의 해인지 설명하였으며, 월드컵 분위기와 맞추어 개벽을 기다리는 열기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2001~03년(신사-계미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자 언제 이야기했나는듯 잠잠해졌다가, 2013년 계사년이 되자 2대 교주 안중건 종도사는 다시 한 번 사오미 개벽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범유행전염병이 돌 때면 이를 개벽의 증거라며 말하고 다니며, 증산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유행병에서 살아남아 상제님과 함께 후천세계를 건설한다고 한다. 자신이 포교한 신자 6명 한 조로 '육임'이란 팀이 되어 후천세계 건설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 천재지변으로 인해 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호한다고 한다.
2003년 교단 내부에서 (사오미 개벽론에 따른) 종말론이 크게 일었을 때는 천연두를 지목했었다. 사실 강일순 본인이 개벽 전에 천연두[56]가 대발한다고 얘기했었다. 사스도 그랬고, 이정도로는 끝나지 않고 몇해 뒤에 더 큰 병이 올 것이다는 말을 했다. 물론 6년정도 지난 후에 신종플루가 돌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도 이 후에 더 큰게 온다고 하고 있지 않을까?
도전 간행 후에는 많은 증산도인들이 개벽의 시기를 계산했다. 2003년 도전 개정판에는 기존 문헌에는 나오지 않았던 구체적인 개벽양상(병, 지각변동 등)이 많이 나왔다. 도전에 따르면 강일순 자신이 개벽 시기를 계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협박에 가까운 경고[57]를 하기도 했고, 교단 내부에서도 엄하게 단속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만 쉬쉬하는 중. 하지만 2003년 여름, 개벽이 온다는 주장이 교단 안에서부터 떠돌아서 후폭풍이 크게 있었으며,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8.5. 자민족 중심주의[편집]

교리적 특징으로는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를 진실된 사서라고 주장하는 등. 딴에는 환단고기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환단고기에 일부 가필이 되어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일부 가필론'의 맹점은 위서 문서 참조.
환빠들은 물론 아무 역사적 고증 없이 유사역사학이나 유사과학을 교리에 도움이 된다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 대단히 많아졌다. 가령 물이 좋은 말을 들으면 좋은 결정을 이룬다는 유사과학을 받아들여, 자기들이 사용하는 태을주를 들려주었을 때의 결정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 그 때문에 환빠들도 증산도를 싫어한다. 그런데 사실 증산도가 환단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긴 하다. 도전에 보면 2편 31장에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흠좀무. 더욱이 10편 91장 측주에 보면 일경들이 증산의 제자들의 상투를 자르려 하자 단군의 거시기를 받은 머리라며 거부하는 구절이 나온다. 흠많무. 뭐? 거시기?

환빠들은 물론 아무 역사적 고증 없이 유사역사학이나 유사과학을 교리에 도움이 된다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 대단히 많아졌다. 가령 물이 좋은 말을 들으면 좋은 결정을 이룬다는 유사과학을 받아들여, 자기들이 사용하는 태을주를 들려주었을 때의 결정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식. 그 때문에 환빠들도 증산도를 싫어한다. 그런데 사실 증산도가 환단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긴 하다. 도전에 보면 2편 31장에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더욱이 10편 91장 측주에 보면 일경들이 증산의 제자들의 상투를 자르려 하자 단군의 거시기를 받은 머리라며 거부하는 구절이 나온다. 흠많무.뭐? 거시기?
극도의 민족주의 때문에 당연한 귀결로 극도의 선민사상에 빠져 다른 민족과 문화를 사실상 열등하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 또한 다른 종교의 예언 등이 '모두 증산도를 가리킨다는 가정'하에 억지해석을 일삼는다. 물론 자기네 해석이 틀렸음이 확실해지면 아예 그 부분은 말하지 않는다. 첫 책인 '증산교의 진리'로부터 '개벽실제상황'과 같은 최근 책을 시대별로 분류해보면, 창교주 안세찬이 아직 살아있던 때에 나온 책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이전까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신나게 인용하며 동양식 풀이법으로 풀어야 그 참 본의를 알 수 있다고 하고 있지만, 현재는 아예 노스트라다무스를 인용하지 않는다. 다만 1999년 이전까지는 노스트라다무스를 인용하며 '곧 개벽이 올 것 같다는' 분위기만 잡았을 뿐, 정확히 모년 모월 모일에 일어날 거라고 확정하여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주의 질서를 4계절에 비유하여 현재는 여름의 말기에 해당하고, 곧 가을로 변하는 대변혁이 일어나는데 이를 개벽이라 하며 개벽의 때에 죽는 사람들을 살리자는 주장을 핵심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국이 개벽 이후 세계에서 정신문명의 최선진국이 된다고 주장하며, 개벽 이후 오는 우주의 가을, 즉 후천세계에서는 5만 년간 풍요를 누린다고 말한다.
도전 5편 11장에 "우리나라 문명을 세계에서 배워 가리라"라는 구절이 있지만, 같은 도전 5편 332장 내용인
"앞세상에는 족속에 따라 나라를 세우리라." 하시고 다시 여쭈기를 "저희들이 성도(成道)하는 날에는 만국언어에 능통하게 됩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어찌 능통하지 못하겠느냐." 하시니라.
...를 들어 꼭 민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증산도인도 있다.
하지만 저 구절은 탈민족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도통의 효력'을 말한 것이다.

8.6. 타종교 및 문화와의 관계[편집]

이들의 교리 의의는 쉽게말해 불교, 기독교 등 기존 종교에 대해서는 그들은 그 시대적 역할을 다 하였고, 이젠 증산도가 그들 교리의 정수를 거둬서 새시대의 참 진리를 내놓았다는 입장이다. 더하자면 당신들 종교가 미개한건 아니지만 우리 종교야말로 인류를 진보시킬 단하나의 진리이고 정의이며 이건 하늘의 민족인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야된다는 의미라는 말도안되는 가치관으로 은근슬쩍 깎아내리며 공개적으로 기존 종교를 비판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상에서 증산도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기존 종교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특히, 선천의 성자들도 상제인 증산강일순이 내려보냈고, 그들의 가르침이 기존 종교들이기에 기존 종교들과 그 종교들의 성자들의 기적이나 구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종교의 근거가 되는 성자를 증산도에서 내려보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당연하며, 불교 등도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하다. 애초에 증산도의 교리에 따르면 기존 종교는 역할을 다했다고 하는데 증산도가 말하는 "기존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심기를 건드리냐 마냐를 떠나 대놓고 싸움을 거는거나 마찬가지.

불교의 경우 미륵불 개념을 끌어다 쓰지만 표면상 적대하진 않는데,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및 기독교 전반에 대해서는 사실상 반기독교성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58]
그들은 '증산도가 킹왕짱이란 것이지 다른 민족과 문화가 열등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 다만 한민족이 세계 문화의 시원민족이고 전세계에서 각기 발전한 모든 문화를 증산도가 모조리 흡수통일한다는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생각 자체가 다른 민족과 문화가 한민족보다 열등하다는 말과 같은 소리며, 환빠들의 사상이기도 하다.
민족주의가 발현할 시기인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에 이렇게 되었다는 변명도 있지만 바로 아래 문단에 나오듯 증산도는 일제 강점기가 증산 강일순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아예 도전에 명시돼 있다.
근본적으로 혈통에 따른 민족주의를 주장한다. 즉 후손으로서 자기 조상의 영혼과 자기 민족신을 제사를 지내어 받들고 위하지 않으면 환부역조(換父逆祖: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름)이며, 조상신과 민족신이 이러한 패륜 때문에 노하여 자손을 돕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왜 다른나라의 종교를 믿으며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냐는 말인데 되려 이런 작자들의 포부는 전세계인들을 우리 문화에 동화하게만들며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한국인들이 세계를 리더하고 이끌어야 하며 이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8.7. 일제강점기에 대한 해석[59][편집]

증산도 도전에 "조선 국운을 일본에게 맡기려면 명치(明治)를 불러와야 하리니 이제 명치의 혼을 부르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신이 계시는데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을 설명하려 한 거겠지만 사실 증산의 명령이었다.
"일본 사람이 천지의 일꾼이 되어 조선에 와서 남의 집을 사는데 부지런히 일을 하고는 필경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주먹으로 돌아가리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은 신도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라고 증산이 말했다는 자기네 경전 도전을 인용해 해명한다. 증산 신앙인들 대부분은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었거나 일제가 반드시 몰락한다고 자손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 증산도의 입장. 일본 통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보다는 차악이라는 것.
하지만 이런 해명을 받아들인다면, 상제라는 강증산이 직접 내려와서 천지공사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꾸지 못하여 일제의 지배를 허용했다는 말이 된다. 혹은 더 일찍 내려오거나, 혹은 다른 사명자들을 내려보내서 그렇게 되지 않게 안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강증산은 그리 하지 않고 뒷북을 쳤을까?

8.8. 주술성 및 오컬트 Ad Hoc[편집]

민족주의 감정과 함께 주술력을 대단히 강조한다. 태을주와 운장주는 증산종교에서 두루 쓰는 주문이지만, 증산도인들이 이 두 주문을 대대적으로 알려서 한국 오컬트 관련 홈페이지에 자료로 올랐을 정도이다. 두 주문의 주술력을 강조하지만, 그에 반대하여 오컬트에 관심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두 주문의 힘이 정말 신통한지 회의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증산도인들은 저 두 주문의 힘이 전세계 모든 종교에서 사용하는 어떤 주문이나 만트라, 기 수련이나 요가 등보다도 바르고 순정하며 강력하고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상술했듯 예언(특히 시한부 종말론에 포커스로), 미스테리, 외계문명기원설 같은것은 개벽론을 설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체리피킹하는 일면도 보인다. 예언은 다른나라 유수의 예언가들도 언급되지만 보통은 격암유록(이에 대해서는 남사고천부교 문서 참조)이나 강일순의 사상같은 국산(?)예언서 위주로 끌어다 쓴다.

8.9. 증산종교 내부에서의 정통성[편집]

강일순은 자기 후계자를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종교가 백가쟁명이다. 구태여 법적인 의미에서 정통성을 따진다면, 강일순의 무남독녀 딸자식인 강순임 여사가 세운 '증산법종교'를 가장 정통으로 봐야 한다. 강일순의 직계제자가 세운 종교들 또한 정통성 순위가 높다. 이렇게 따지면 증산도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 서열이 한참 뒤로 밀린다.
'대순전경' 6판 4장 66절에[60], 그리고 대순전경보다 후에 나온 도전에 둘째 부인 고판례가 "나를 일등(一等)으로 정(定)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 하고 고판례를 후계자로 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고판례를 강일순의 후계로 인정하는 종파는 이상호의 증산교가 시조이며, 대순전경은 이상호 형제가 발행했다. 이렇게 중대한 내용이 왜 6판부터 실렸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호 계열이 아닌 증산종교들은 대부분 고판례를 정통성의 보증으로 보지 않는다. (증산법종교는 도통맥으로 보진 않아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증산의 최고참 제자였던 김형렬은 고판례가 증산 사후에 그 혼령을 보았다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자, 증산의 첫째 부인이며 강순임의 생모인 정씨 부인을 주문을 외우며 수도케 하면서 역시 증산의 혼령을 만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김형렬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증산의 최고참 제자가 '고 부인이 생전에 증산에게 후계자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 사후에 증산의 혼령과 만났기 때문에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인터넷의 어느 증산도 고발 포럼에서 증산도 탈퇴자 내지 경쟁교단으로 추정되는 이가 증산도의 안씨일가에 대해 삼국지 장각의 환생이라고 디스하기도 한다.

9. 증산도 관련 유명인[편집]

  • 윤창열: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 박광우: 영화 회초리(2011) 감독.
  • 한때 연예인 최민용허영란휘성[61]이 증산도 신도였다. 현재는 3명 모두 증산도를 하지 않는다. 손절한 사람 제발 괴롭히지 말자

10. 참고사항[편집]

  • STB 상생방송 - 자체 방송국인 STB 상생방송을 만들어 운영한다. 방송내용은 역사특강과 교양 다큐멘터리, 증산도 소개강좌, 신앙체험수기 및 수행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돼 있다. 증산도의 대외적 본부인 증산도교육문화회관
  • 몇몇 우파성향 정치 커뮤니티에는 증산도가 김대중 정권 당시 정부의 지령을 받고 공작활동을 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이들에 주장에 의하면 STB도 DJ정권의 특혜를 받아서 개설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여튼 그런 거 없다. 그저 지역감정(전라도 경상도) 운운하는 글이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이 증산도교육문화회관에 방문한 적이 있으며, 환단고기 콘서트에도 여러번 참석했다. #

11. 관련용어[편집]

이 문서의 r3~7 버전에 위키백과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저작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포함된 버전으로 문서를 되돌리거나 링크하는 행위는 금지됩니다. 만일 되돌리거나 링크할 경우 저작권 침해로 간주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CC-white
이 문서의 내용은 리그베다 위키의 증산도 문서를 포크한 것이며, 이 문서의 저작자 목록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 관련 문서[편집]

[1] 교단의 성격상 대표보다는 교주라는 표현이 정확하다[2] 安世燦. 1922.08.08 ~ 2012.02.24. (날짜 표기는 양력). 호는 운산(雲山).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출생으로, 그의 호는 자신의 출생지 지명을 딴 것이다. 증산도에서는 양력 대신 음력 날짜에 맞추어 기념한다. 1974년 무렵부터 독자적인 종교적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74년에 창교했다고 밝힌 자료도 있으나, 공식적인 창교는 1978년에 했다.[3] 증산도 내부에서는 안세찬을 두고 '태사부님'이라고 호칭한다.[4] 安重建, 1954년생.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교) 중퇴. 호는 경전(耕田). 증산도 2대 교주. 호를 이름처럼 써서 본명이 경전인 줄 아는 사례가 적지 않다. 2015년부터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한 역사찾기 운동으로 국내외를 순회하며 환단고기에서 따온 환산(桓山)이란 호를 쓴다고도 한다.[5] 증산도의 본부는 대외적으로는 증산도교육문화회관이며, 내부에서는 대전 중구 선화동의 안중건 자택 및 대전 서구 괴정동의 본부성전이다.[6] 자체 추산으로는 10~100만 명.(...)[증산도채널][STB상생방송][9] 안세찬은 본래 충청남도 서산시 출신이지만 6.25전쟁 이후 대전으로 이주하였기에 창교도 대전에서 했다. 이 때문에 증산도에서는 대전을 성지로 여기는데 사실상 본교의 유관언론인 상생방송 사옥 역시 대전에 위치하고 있다. 태전(太田)이 대전의 본래 지명이라고 주장하며 "일본놈들에게 빼앗긴 이름 태전을 되찾자"는 서명운동을 한때 전개하기도 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자교 내의 문서 및 대외 선전물 등에서 공식적으로 대전 대신 태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명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1861년 기존 지도들을 집대성하고 보완하여 간행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대전천이라는 하천 이름이 등장하고 있고 대전 지역에 태전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시대 말기 이후, 그것도 일개 '리'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무엇보다도 태전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대전과 혼용되고 있다. 더욱이 太田이라는 리 명칭이 대전뿐 아니라 경기도 광주, 경북 칠곡(현재 대구에 편입) 등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대전만의 고유 이름이라고 보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음양오행학에서 한자의 태(太)자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 주장은 일제강점기 때 소멸된 옛 지명을 되찾자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창교지를 성역화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012년 1대교주 안세찬이 사망한 이후부터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과거와 같이 태전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대전 구도심 중앙시장 인근에 태전마트라는 백화점 규모의 로컬마트가 있는데, 본 종교와의 연관성은 불명.[10] 강일순은 살아생전 자신을 옥황상제, 미륵불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강일순의 외동딸이 세운 교단인 증산법종교에서는 강일순을 미륵불로 받들며, 수석제자 김형렬이 세운 교단의 교명도 미륵불교다. 강일순의 주요 제자인 차경석은 보천교를 세우면서 무라야마 지준과의 대담에서 강증산이 옥황상제라고 말했다. 천사라고도 했으며, 그외에도 상제라고 부르는 종파도 있는 등 호칭이 각양각색이다.[11] 증산도의 대치성 행사시 낭독하는 축문에는 강증산을 일러 강성증산무극상제姜姓甑山無極上帝라고 호칭한다. 참고로, 무극대도(無極大道)라는 용어는 무극제라는 호칭과는 별개로, 수운가사와 이중성 천지개벽경에 먼저 나오는 용어다.[12] 2012년 3월 1일에 열린 안세찬의 영결식 당시 사진을 보라. 붉은색 천으로 太極帝安雲山宗道師(태극제안운산종도사)라고 써 놓았다. 따라서 '태극제'가 증산도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호칭임을 알 수 있다.[13] 강증산의 종통이 고판례에게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교단은 이상호가 세운 종교인 증산교나 거기에서 갈라진 증산도 정도이며, 상당수 증산계열 교단이 고판례를 정통 계승자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14] 고판례와 안세찬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증산도에는 이에 관해서 태극(안세찬)이 무극(강증산, 고판례)의 정신을 실현하려면 서로의 만남이 없이 태극(안세찬)이 독자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우주원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관통 증산도'를 참고하라.[15] 다만 이후에도 교류나 교단 내에서 함께 있었던 바도 있었다. 슬하에 딸 이순(二順)이 있었는데, 나중에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개창하면서 이름을 순임(舜任)으로 바꾸었다.[16]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해이며, 순종황제 융희 3년이기도 하다. 사망년도가 1909년이므로 강일순은 일제시대를 겪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강일순이 일제시대까지 살았다고 착각하곤 한다.[17] 만으로는 37세[18] 증산계 종교에서는 어천(御天)하였다, 즉 천지공사를 마치고 천상 보좌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19] 실제로 보천교는 상해 임시정부 설립자금을 대기도 했고, 보천교가 일제에 노출되게 된 것도 독립자금을 수금하다 발각되어서 였다.[20] 차경석이 죽은 이후 일제는 바로 십일전을 경매에 부쳤고, 조계종단이 십일전 건물을 샀다. 십일전을 조각조각 나누어 기차에 실어 서울까지 싣고 올라와 다시 조립했다. 이 건물이 오늘날 서울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다. 십일전 시절과 비교하면 건물을 조금 손보고 장식이나 벽화를 불교풍으로 바꾼 점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 그대로이다.[21] 특히 천도교쪽에서 보천교를 많이 적대시했다. 무명의 천도교 인사가 차경석을 만나 대담한 뒤 천도교 잡지에 실은 기록도 있다.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천도교 인사가 평한 바로는 "옛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영웅호걸이 되었을 법한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긴 한데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경의와 비아냥을 동시에 담은 평.[22] http://www.jsd.or.kr/c/jsd/intro/341/396/342[23] 이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 또한 함께 해산됐다.[24] 이때 증산교의 입교서류에 안세찬이 총사수總師首로 기재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25] 한국전쟁 당시 증산교의 교명은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였다.[26] 교명을 바꾼 뒤 책 이름도 증산'도'의 진리로 바꿨다.[27] 증산도에서도 한의학의 필수인 음양오행설을 가르친다. 또한 강일순은 염제신농씨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러 번 언급했는데, 한의학과 중국 의학에서도 염제신농씨를 의약의 시조로 본다.[28] 당시 한의대생의 위상은 의대생 못지 않았다.[29] 80년대의 이런 민족주의와 동양/우리나라의 종교적 전통을 찾는 분위기에 증산도만 덕을 보지는 않았다. 무술계도 전통무술 드립을 쳤고, 자칭 '민족종교'들도 덕을 보았다.[30] 이 상씨름론은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강대국의 각축장이라는 소리다.[31] 웹에서 이 문구를 검색하면 대부분 증산도 ≪도전≫이 나오지만, 최초출처는 ≪용화전경≫이다. 도전은 용화전경의 이 부분을 거의 그대로 실었다.[32] 물론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과는 무관[33] 한국식 나이로 91세. 그런데 이상하게 언론에서는 만 나이도, 한국식 나이도 아닌 90세 일기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기자들 중 누구도 정확한 나이 확인을 하지 않고, 단순히 2012-1922=90이라는 수식만 보고 90세라고 보도한 듯하다.[34] 황극제의 자리에 섰다는 뜻. 기사[35] 안세찬은 강증산과 고판례의 대행자로서 개벽기의 대환란에 인류를 구원할 ‘태극제’라는 것이 증산도의 교리였다. 자기 입으로 수백 살을 산다고 공언했던 안세찬이 죽음은 증산도 교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세찬 사후 증산도는 교리서적을 수정해 재출판했다.[36] 경상남도 남해 출생, 2017년 사망 부고추모 사이트[37] 강일순이 태어난 1871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2018년은 도기 148년이다.[38] 증산도에서는 8차 개사라고 주장하지만, 오성산 교단의 역사를 빼고 순수한 증산도 교단 역사에서 헤아리면 6차다.[39] 대순진리회에서는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시기라고 본다.[40] 현대의학적으로 말하면 정신병 또는 미쳤다는 뜻[41] 안세찬은 자신의 처가 죽자 도모道母로 추존했다.[42] 안세찬은 임생인데, 증산교에 몸을 담고 있다가 6.25 전쟁 이후 약 20년간 은둔한 적이 있다.[43] 안세찬 사망 이후 새로 추가되었다. 하느님이 되셨다.[44] 강증산 성탄절 직후라서 크게 강조하지 않는 대치성이다. 증산도에서는 강일순은 어천하셨다고 말하고, 고판례는 선화하셨다고 말한다[45] 본명은 강이순이지만 혼례 후 남편이 새로 강순임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46] 그러나 강일순은 생전에 첫째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나중에 강일순이 수제자 김형렬에게 박처함을 알리고 오라 하나, 김형렬은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강일순은 정씨부인에게 생전 내내 냉정하게 대한다.[47] 증산도 본부가 위치한 대전에서 근무했으며 증산도의 월간지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48] 처음에는 증산도방송이었다가 나중에 상생방송으로 변경했다.[49] 증산계통 종교도 아닌 또 다른 소수종교 '구통도가'의 창시자다.참고[50] 서울대 정치학과 졸, 前 한국학중앙연구원(정신문화연구원) 원장[51] 안중건처럼 본명인 ‘병섭’보다 호인 원전(原田)으로 잘 알려져있다. 부종정이자 증산도 서적의 대다수를 출판했던 대원출판사 사장[52] 아버지가 증산도 교주인데 이 사람은 개신교 목사라고 한다.[53] 월간개벽 사장[54] 대순전경 기록. 그런데 증산도 도전에서는 식록이 고르다는 말만 넣고 계급이 두개밖에 없을것이라는 기록은 넣지 않았다![55] 성금을 수십억 내셨다.[56] 도전에는 시두라고 말한다.[57] 도전에 따르면, "손가락 꼽작거리고 있는 놈들은 다 죽으리라."[58] <충격대예언>과 유사한 책으로 1996~1997년경 출간된 <한반도 UFO 프로젝트>라는 괴서가 있는데 여기서도 증산계열 종교에서 보이는 자민족중심 위주의 서술이 보이고 심지어 강일부도 언급된걸 보면 이 책 역시 증산교 혹은 증산 계통의 종교단체가 펴낸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서 기독교에 대한 서술은 성경/논란을 근거로 타 종교보다 뒤떨어지고 야만적인 종교라고 비하하는 서술이 많다. 예외라면 예수 그리스도만큼은 '잘못된 야훼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을 계몽하려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힌 착한 외계성자'라면서 비교적 긍정적으로 서술하지만...[59] 일제강점기에 대한 증산도의 해석에 대한 비판은 엄밀히 말하면 증산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강일순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야 할 사항이다.[60] 대순전경은 여러 번 증보하여 발간했다. 그래서 판수를 구분하여 말해야 한다.[61] 청중들에게 한민족사가 9000년이라고 말한 영상도 있다. 링크 두고두고 흑역사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