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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2

한국신학/종교학 -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 2005

한국신학/종교학 -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성준민중신학조회 수 1923 추천 수 221 2005.11.26 12:48:11
허호익*.218.50.53http://theologia.kr/board_korea/27585







“21세기의 문턱에서 民衆神學을 다시 생각한다.”


--‘民衆’ 理解의 새 지평을 모색하며--


박 성 준


1999. 11. 3


一. 문제제기


서남동은 한국민중의 ‘恨’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 독특한 기여를 했다. 나는 ‘한’을 민중신학의 핵심 주제로 설정하는 데 대하여 서남동에게 확고한 지지를 보내왔고 그 점에 있어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동학=崔水雲) 또는 ‘내재하는 빛’(the Light within) (퀘이커=George Fox)을 민중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놓는, 그래서 ‘한’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핵심되는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얼개를 구상해 보게 되었다. 민중의 ‘한’이라는 하나의 핵심에 편중되면 역사창조 주체로서의 민중의 생명력(자율성, 자주성, 창조성, 자기 구원의 주체성)이라는 다른 하나의 핵심이 가려지거나 약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중 안에 있는 ‘恨’은 보면서 민중이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빛’(=그리스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민중의 일면 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의 언어인 ‘한’을 제시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의 언어인 ‘죄’에 대해서 민중 안에 있는 ‘빛’을 제시할 차례이다. 민중의 ‘한’과 함께 ‘빛’을 보고 그 상호관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그 양자를 민중신학의 중심에 역동적으로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남동의 신학에서 민중의 ‘한’과 ‘고난’이 민중의 ‘메시아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이라는 기독교의 正統 敎義에 있었다. 민중의 메시아성을 이렇게 대속적 능력 쪽으로만 치우쳐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민중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빛과 창조력에도 동시에 주목하면서 그 메시아성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무가 이따금 언급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던 민중의 자기초월의 능력은 ‘초월’이면서 동시에 민중에게 본래 ‘내재’하는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씨(함석헌)인 민중의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 가능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씨의 살아 숨쉬는 보배로운 생명력, 그 경이로운 역동성에 새삼 눈뜨고 이를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21세기와 새 천년(the New Millenium)의 ‘새 민중신학’을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나는 결코 민중에 대한 美化나 낭만화(romanticize)를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말해야 한다. 낭만화된 관념 속의 민중, 비현실화되고 박제화된 민중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민중, 질긴 생존력으로 일상의 삶의 터전에 뿌리내린 ‘생활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 자기 속에 ‘한’을 품고 살지만 ‘빛’도 품고 살아가는 온전한 민중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이해에 다음과 같은 점들을 보완하거나 새롭게 추가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첫째로, 함석헌의 민중 이해로부터 ‘씨’을 받아들이되 <ㅇ  ㄹ>의 각 요소를 적극적으로 深化 發展시킨다. 즉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  >는 내재적인 하늘을,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나타낸다고 그가 스스로 설명해 놓은 그 각 項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한층 더 심오하고 풍부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사상적 源泉(resources)으로서는, 한쪽으로는 東學이라는 큰 사상의 젖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함석헌 자신이 훗날 그 멤버가 되었던 퀘이커의 사상,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퀘이커 사상(Early Quakerism)이라는 큰 광맥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로, 민중의 목마름의 重層구조를 천착하는 것이다.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 곧 민중의 영성은, 예컨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日常의 안전과 편안함, 경제적 안정 등에의 갈망이라는 層位가 있는가 하면, 우정과 고독, 사랑의 아픔과 번뇌,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 등의 層位가 있으며, 영혼의 虛飢,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인격의 성숙과 자기완성에의 渴求, 진실과 진리를 향한 목마름, 疾苦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등의 層位, 이렇게 複雜하고 重層的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


셋째로, 민중신학은 ‘사건’의 신학을 보완하기 위해 ‘사건’과 ‘日常’을 손의 앞뒤면 처럼 설정하여, 사건과 일상이 갖는 각각의 의미와 함께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관련성을 올바르게 밝힐 필요가 있다. 민중은 1970년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연쇄적으로 분출하는 활화산 기슭에서, 또는 언제 터질지 모르게 꿈틀대는 화산맥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민중은 아마도 더 많은 일상의 시간을 너른 들녘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여름 한철 가뭄에 강바닥으로 스며들어 소리 없는 지하수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땅 속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없다면 장대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샘의 분출은 있을 수 없다. 물이 콸콸 솟는 샘은 실은 땅 속을 흐르는 저류(the underground stream)와 연결되어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sustained) 있는 것이다. 사건과 일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사건’의 신학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가 요청된다.


넷째로는, 민중 공동체 운동이다. 이거, 저 70년대, 80년대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민중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운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근본적으로(radically) 다시 묻고,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二. 민중 이해의 새 지평


1. 민중신학의 先驅: 함석헌의 씨 사상


함석헌은 씨의 은유로 역사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根幹이 되는 사람, 곧 민중을 나타내고자 했다. 민중은 씨이다. 태어난 그저 그대로인 씨, 풀씨 같은 존재. “씨이란 다른 거 아니고 자연이지요. 문명은 결국은 자연에서 멀어져 가는 방향이고(참 문명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니깐 지금은 사람의 큰 잘못이 자연을 잊어버리고 자연에 반항하고 하는 건데, 근본의 절대적인 의지랄까 그게 곧 자연인데, 자연 속에 있는 건데----”(“씨의 소리, 씨의 사상” <씨의 소리> 76년 9월호)


씨은 이 끝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인 ‘나’이고 저 끝에서 보면 하나님이라고 한다. 결국 민중 곧 씨과 하나님은 이 끝과 저 끝으로 서로 연결된, 둘이 아닌 한 <>이다.


“민중이 뭐냐? 씨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 사람이다. 은 실(實), 참, real이다.............정말 있는 것은, 은, 한  뿐이다. 그 한 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씨의 설음”, 함석헌 전집 제4권, 66면)


나아가,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한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불러내느냐가 문제다. 속에는 다 개인의 행위와 역사의 사건으로 영향을 입지 않는, 입힐 수 없는 혼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씨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일할 터를 찾고 일할 거리를 기다린다. 그것을 능히 알아 불러내어 동원하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바다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제4권 129면)


이와 더불어, 씨은 마땅히 ‘남의 종교’가 아닌 ‘내 종교’를 가져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 위대한 종교지. 하지만 남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우리 초가삼간 보다 작은 집이다. 내 종교가 큰 종교지, 내 것이 되지 못한 종교...........종교의 허울이 무슨 위대한 종교일 수 있을까? 제 종교만이 큰 종교다. 제 종교를 가진 한 사람만 있어도 온 세상이 다 구원될 것이다.”(“씨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종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교도(敎徒)가 있는 것은 종교 아니다. 참 종교는 한 사람의 신자를 가질 뿐이다...........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라..........아무도 이 결혼의 중간에 서지 마라.”(“씨의 설음”, 전집 제4권, 65면)


민중은 자기 속 깊이에 계신 하나님, 그 창조적인 생명과 무한한 힘의 源泉에 깊숙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 곧 씨은 자기 속의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한다. 내 안의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해답을 간절히 구하고 거기에 맞추어 각자 자기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를 관철해야 한다.


씨 속에, 곧 내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하나님(‘나라’, I am.)을 일깨우고 ‘불러내자.’ 그리하여 하나 하나의 씨은 함께 새 시대, 새 나라를 바로 지금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힘차게 열어가야 한다.






2. 퀘이커 사상과 민중신학의 만남의 가능성


퀘이커는 17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격동의 시대, 혁명과 변화의 시대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에서는 외적인 종교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국교에 반대하는 침례파와 장로회파의 교회들은 신앙을 성경의 권위나 공식적 신조와 대체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이나 신조에 염증을 느끼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은 개인적 체험의 종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갈구하고 있었다.


죠오지 폭스(George Fox, 1624-1689)도 그런 사람들--당시 영국에서는 그들을 ‘구하는 자들’(seekers)이라고 불렀다--중의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했다. 製靴工의 徒弟, 소먹이 목동 등으로 지내는 동안 홀로 고요한 묵상에 잠기는 습관을 익혔고,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에 잠겼으며, 온 피조세계의 오묘하고 미세한 소리에도 예리하게 반응하곤 했다. 열 아홉 살 때에 집과 부모의 곁을 떠나 절절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찾는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에 나섰다. 4년간의 영혼을 달구는 숱한 시험과 연단 끝에 Pendle Hill이라는 작은 山頂에서 그는 드디어 진리를 깨닫고 환상(vision)을 보았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성직자들)에게 걸었던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외적으로는 내가 의지할 아무 것도 없게 되었을 때, 내가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니, 그는 너의 처지에 맞게 말씀하신다.’(‘There is one, even Christ Jesus, that can speak to thy condition.’)라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듣자 내 가슴은 歡喜雀躍하였다. ........ 주님을 향한 나의 갈구,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의 열망은 더욱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Fox, 11)


그가 얻은 다음과 같은 진리는 재래적이고 인습적인 신조들(creeds)과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精髓이다. 우리 각자의 깊은 속에 하나님의 씨앗(the Seed), 하나님의 영(the Spirit), 그리스도(the Christ), 내면의 빛(the inner Light)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즉 성직자나 교회의 儀式이나 어떤 다른 매개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역사적인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아 (신적인)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계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영속된다는 것(the continuing revelation). 이것이 그의 새로운 깨달음의 내용이었다. 자기 자신 속에 불타오르는 이 깨달음(revelation)을 지니고서, 죠오지 폭스는 세상를 향해서 힘차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돌아섭시다. 자기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러한 (즉 하나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로서 살아갑시다.”라고.


그 깨달음을 근거로 그는 오늘날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는 별명이다.)로 알려진 신앙적 結社의 기치를 올렸다. 죠오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physically)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 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있음으로 해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죠오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transformed)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私的인 내면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 초기 퀘이커들(Early Friends)은 당대의 사회에 불을 지피는 불씨의 전령이었다. 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 온갖 종교집단, 모든 사회조직에 불을 붙였다.


죠오지 폭스는 17세기 영국인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과 우리 시대를 위해서도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다. 그는 과거의 사람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깊은 개인적 경험과 메시지, 그리고 초창기 퀘이커들의 묵시록적인 삶과 행동은 우리 시대의 긴박한 필요에도 절실하게 말을 걸어오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함석헌은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의 펜들 힐(Pendle Hill; A Quaker Center for Study and Contemplation)에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씨 사상을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 자신이 비교 검토해 본 바로는 그의 씨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酷似하다.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과 더불어 민중 한 사람 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에 주목할 수 있다면 주체로서의 민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민중을 세계와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데 새로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 동학의 전통으로부터 배우기:


우리는 이제 19세기 말엽 한반도에서 출현한 동학운동, 그 중에서도 1860년-98년의 水雲 崔濟愚와 海月 崔時亨, 그리고 갑오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동학의 재건을 의도했던 甑山 姜一淳의 사상과 실천에 주목할 차례다.


동학은 19세기말, 조선의 봉건제가 한계에 도달, 근대사회로 이행되기 시작하는 세기말적인 일대 전환기에 피어난 한국사상문화종교의 꽃이고, 조선의 근대역사가 시작되는 發源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 동학이 창시되던 1860년 당대의 조선의 현실에 대한 수운의 인식은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 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 위기 그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신분제의 문란(紊亂), 도탄(塗炭)에 빠진 민중의 잦은 봉기와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으로 과거의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고 구미제국의 근대문명이 압도해오는 가운데, 전통적 종교인 儒佛仙은 정신적 지주나 새로운 사회이념의 기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윤리와 가치규범의 붕괴, 사상의 혼돈, 민중의 정신적 방황이 극도에 달한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사회에는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민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있었다.


절망과 암흑의 시대, 바로 그 한가운데서, 수운은 先天문화 질서의 종말과 후천개벽의 새 문화, 새 시대의 도래를 예감했다. 수운은, 동양문명의 해체와 몰락, 서양문명의 침략적 폭력성을 확인하면서, 전통적 지배이념인 朱子學을 대체할 새로운 道學을 갈구했다. 그는 前人未踏의 새 길, 동서양의 기존의 종교와 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찾아내어 新天地, 新文明을 구현하고자 고난에 찬 구도의 길을 홀로 걸었다.


“庚申年에 이르러 전하여 오는 말을 들으니 서양사람들은 한울님을 위한다는 뜻으로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들의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의 교를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므로, 나는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東經大典, 前編 五>


“서양사람들은 전쟁을 하면 이기므로 쳐서 빼앗아 그들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리하여 천하가 다 멸망한다면, 어찌 입술이 상하여 없어지면 이가 시려 견디기 어려운 것과 같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東經大典, 前編 九>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6년째 되던 1860년 음력4월, 그의 나이 37세 때 그는 결정적인 종교적 체험을 통해 得道에 이른다. 그의 신비체험은 한울님 마음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天語’를 듣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한울님과의 사이에 문답 형식으로 여러 달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내용을 냉철히 반성 체득하면서 일년 여에 걸쳐 동학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修行法 등을 글로 체계화해 나갔다. 득도한 이듬해(1861년) 6월부터 그는 布敎에 나섰다. 득도로부터 체포되기까지 불과 2년 6개월 사이에 수운은 漢文體의 <東經大典>과 한글로 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수운의 가르침은 고통과 시련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 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그 시대의 민중들의 가슴에 심었다. 사방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거처인 경상북도 慶州 龍潭亭으로 찾아오는 민중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수운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따랐다.


1864년 3월 수운은 41세의 나이로 斬首刑에 처해졌는데, 세상을 어지럽게 한 邪術의 傀首라는 죄목이었다.


수운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해월은 道統 承繼 후 殉道할 때까지 30여년 간 가시밭 길을 걸으며 조선 땅에 동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人乃天’, ‘事人如天’의 교의로써 교도들을 지도하는 한편, 지배권력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接’조직을 확장해나가다가 1898년(72세) ‘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스승 수운의 뒤를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다.


2) 동학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데 있다. 사람이 곧 한울님, 한울사람, 섬김 받아야 할 신령한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지극히 공경(敬人)하게 되고 한울님을 공경(敬天)하게 되며 한울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주체로서 바로 서게 된다. 즉 현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신령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한울사람(God's person)을 통해서만 사회와 세상의 聖化(한울나라의 실현)가 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주체성은 우주 가족의 일원으로서 더 큰 생명인 우주를 어버이로서 섬기며(敬物), 우주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相生(서로 살림)의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적 존재이다.


동학에서는 지금까지 저 밖에 있는 신(God without)을 향해 놓았던 祭床과 位牌를 나를 향해(向我) 돌려놓도록 하는 새로운 祭祀法을 창안했다. 이것을 ‘向我設位’라고 하는데, 저 밖에 있는 초월적 신을 상정한 인류 문명 문화 樣式의 일대전환과 정신개벽을 이로써 상징한다.


또한 ‘同歸一體’라고 하여 후천개벽운동의 동반자들의 공동체, 새 인간(한울사람), 새 천지(한울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인류문명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신령한 도덕적 주체들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이 공동체는 타종교 공동체의 전통을 존중하며 관용의 정신과 개방적 태도로써 후천개벽의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길동무(道伴)들의 공동체이다. 동학에서는 특히 생활의 주인이자 新天地 창조의 주역으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강조된다.


3) 강증산은 스무 살 무렵에 동학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甲午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시체가 가득 널려진 폐허의 강산을 여러 해에 걸쳐 편력했다. 그때에 그는 구천에 사무치는 울부짖음과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민중의 고통을 보았으며 민중이 그 얼마나 절실하게 생명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가를 사무치게 절감했다. 따라서 간증산은 자기의 목표를 동학의 동세개벽 실패 이후의 민생의 재건과 활인(活人)에 두게 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이 민중반란의 조직적 확대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함으로써 후천개벽을 실현하려 했다면, 강증산의 실천은 하나 하나의 이름 없는 민중들의 그날 그날의 먹고, 살고, 입고(衣食住), 고통받고, 병들고, 죽고, 두려움과 굶주림과 죽임 당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구체적인 삶, 곧 민중생존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매일 매일의 自助 自活의 작은 공동체 건설과 협동생활의 조직을 통해 후천개벽을 실천해 나가는 방향이었다.(김지하 사상기행, 2권, 206-9면 참조)


그렇다면 강증산의 사상과 실천은 ‘민중적 일상’의 신학화를 꾀하려는 우리들의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몸 안에 모시고 있는 신령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동학의 인간관은, 매개 사람 속의 빛, 영,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퀘이커 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민중신학은 퀘이커 사상의 인간이해로부터 배움과 동시에 동학의 인간관을 민중이해에 적극 도입함으로써 민중의 대상화, 객체화를 극복하고 민중의 ‘주체화’에 진실로 기여하는 큰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三. 민중적 영성론의 가능성:


1. 영어권에서도 spirituality란 말이 등장한 것은 지난 30년 어간의 일이라 한다. 이렇게 새로운 말이고 보니 한국에서는 그 용법이나 의미를 둘러싸고 적잖은 오해와 혼선이 있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카리스마 집회나 성령파 교회들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연유로 해서 민중신학자들은 애써 이 말을 기피했고 금기시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남미 해방신학 쪽에서 spirituality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심도있는 신학작업을 전개하는 것은 보고서야 새로운 관심과 눈으로 이 말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중신학 내부에서 spirituality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드문 것 같고, 여전히 개념의 혼란이 가셔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나 자신 아직 본격적인 공부가 부족하여 spirituality의 정의조차 내리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민중적 영성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예감만은 절실하다.


2. 함석헌은 씨의 속에 있는 것 곧 씨의 ‘혼’을 불러내자고 했다. 그렇게만 하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씨의 혼’이라. 혹시 이것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닐런지? spirituality는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존재를 관통하고 그 존재를 떠받치고 그 존재를 推動하는 영적 힘, 에너지, 불꽃과 같은 그 무엇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우리가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spirituality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spirituality는 기독교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의 영성, 무신론자의 영성도 있을 수 있다.(나는 사실 감옥에서 무신론자들의 심오한 영성에 무수히 접했다.)


3. 민중이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과 해방에의 타는 목마름이 바로 민중의 영성 아닌가. 나는 앞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이 목마름을 ‘민중의 거룩한 갈망’(the holy longing of minjung) 또는 ‘민중 영성’(minjung spirituality)이라는 범주로서 다루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민중의 ‘恨’이라는 범주로 다루어온 영역과 크게 겹치는(overlap) 영역이어서 민중의 恨과 민중 spirituality의 관계와 구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4. spirituality는 우리의 日常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욕망과 애정, 고통과 슬픔, 고독, 야심과 좌절감, 불안과 초조, 공포와 희망 등등, 이 하나 하나가 spirituality와 깊이 관련된다. 어떤 사람의 영성은 그가 자기 속의 그 영적 에너지 혹은 불꽃을 가지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가와 깊이 관련된다. 즉 spirituality는 신앙이나 종교성과 관련된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매일 매일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compassion)과 자비(mercy), 평화와 화해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 참된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갈구하는 정치적 각성, 깨어있는 양심, 도덕적 민감성 등은 민중적 영성의 불가결한 요소들(integral elements)이다.


5. spirituality는 개인적인 것 만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적인 것이다. ‘나의 영성’과 동시에 ‘우리의 영성’이 존재한다. 개인주의에 물든 사회와 그 문화(individualistic culture)에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촛점이 맞춰지기 쉽다. 그래서 개인적 영성은 자칫하면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頹落할 수 있다. 개인적 영성에만 집착하거나 매몰되면 영적 개인주의와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고 영적 우상숭배의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 반면에 공동체적 영성의 경우에는, 개인의 영적 생활(personal spiritual life)에 기울이는 집중력이 떨어질 때, 영적 메마름과 세속화라는 또 다른 위험이 있다.


개인의 영적 체험과 공동의 영적 수련은 상호 의존적이다. 서로 보완하고 서로 북돋아 준다. 민중신학은 개인의 영적 체험 또는 개인적 영성수련과 공동체적 영성 또는 영적 공동 생활(spiritual life together)에 같은 비중을 두어 이 양자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공동체적 영성은 함께드리는 예배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각자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바친 영적 생활의 밀도는 함께 드리는 예배의 質을 좌우한다.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묵상과 기도가 쌓이고 쌓여서 깊이를 더해갈 때, 개인과 공동체의 영성을 고양시켜주는 높은 질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6. 밥상(식탁)공동체는 공동체적 영성의 실천 모델이 되며 민중적 영성의 엣센스를 집약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해월의 밥 사상과 향아설위의 밥상 차리기로부터 배우면서 다음과 같이 相生의 식사예법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1)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 (2)원을 그리고 둘러앉는다. (3)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손을 잡고 잠시 묵상(또는 짧게 한마디씩 기도)한 후 함께 담소하며 서두르지 않고 즐겁고 느긋하게 식사한다. (4)설거지도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한다. (5)음식찌꺼기는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서 거름으로 쓴다.


7. 민중적 영성은 서로 모시고 섬기는 相生의 영성이다. 그 엣센스는 겸허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깊이 귀기울여 듣는 데(敬聽, mindful listening) 있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열어 놓고 하나님에게, 자연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고요히,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민중신학에는 이 敬聽의 영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여겨진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서 억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다보니 민중, 씨에게 귀기울여 듣는 마음의 餘白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말하는’(preaching) 종교지 ‘듣는’(listening)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큰 약점의 하나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이 관계의 그물에 얽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고 있는 이 우주와 세계 공동체 안에서 ‘敬聽의 spirituality’가 없이는 相生의 관계를 창조해나갈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와 새 천년의 입구에서 기독교는, 그리고 민중신학은, 말하는 ‘입’으로부터 듣는 ‘귀’로의 radical한 파라다임 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8. 예언자적 선포(prophetic speaking)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예언자적 경청은 권력과 富에 억눌리고 빼앗겨온 자연과 민중, 곧 씨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씨에게 경청한다 함은 하나님께 경청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것 같을 때, 더 깊숙이 귀를 기울여 고요히 기다려 보라. 소리 아닌 소리가 내 마음의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민중인 씨(들)에게 말과 설교를 가지고 가는 대신에 마음의 귀를 가지고 가본 사람은 안다. 경청하는 사람이 자신의 계획이나 용건, 판단이나 충고 따위를 완전히 접어놓고, 오로지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나를 내맡기는 방법으로 귀를 기울일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둘 사이에 싹튼다는 것을.


듣기에만 길들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씨이, 그래서 자기 주견이나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던 민중이 비로소 가슴을 열고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기 시작할 때, 그(들) 자신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놀라운 지혜와 꿈과 비전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오지 않던가. 이 새로운 관계, 새 카이로스 속에서 상처가 아물고 한풀이가 시작된다. 씨이 제 이야기에 스스로 격려를 받고 힘이 북돋아져 현재의 곤경을 박차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열리고 문제에 해답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말한 “씨의 혼(魂)을 불러내는” 방법이 아닐까.





四. 21세기, 새 천년기에 민중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살림 공동체’ --


공동체 운동은 개인과 민족의 생존(survival)을 위해, 우리들의 문화와 지구 자체의 존속을 위해 비상히 중요하다. 현대 사회와 현대적 생활양식은 자연적 내지 가족적 공동체를 해체한 결과이다. 현대인의 삶은 파편화되었고 공동체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고립되어 있고 까닭 모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한편 그들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함께 살아갈 동반자를 찾고 있으며, 꿈과 理想을 서로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 그 중에서도 민중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공동체는 어떤 내용, 어떤 모습의 공동체일까? 우리는 김지하가 먼저 주목해서 그의 생명사상 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던, 그리고 안병무가 몹씨도 아꼈던 아름다운 우리말 ‘살림’을 붙여 ‘살림공동체’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살림’이란 무엇인가?


살림은 相生 즉 서로 살리기, 살림은 生命敬畏, 살림은 죽임의 반대, 살림은 물질의 나눔, 살림은 상호존중, 살림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 살림은 거룩한 경청, 살림은 섬김, 살림은 그저 우리네 살림살이. 그럼 살림공동체는?


나는 살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다음의 7가지 원리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과 조화이다.


김지하식 표현을 빌리면, “개별 인격들의 자유로운 전체인 민중”의 공동체이다.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이 존중된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진정으로 존중된다. 그러나 그 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전체를 형성하되 그 전체가 또한 자유와 창의성이 넘치는 탄력적인 전체를 이룬다. 이 자유로운 전체인 살림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창의성(individual initiative)과 공동생활(corporal life)의 규율이 조화를 이루며 개인적 생활영역과 공동 생활영역이 공존하고 균형을유지한다.


둘째로, 다양성과 차이가 존중된다. 인종, 성, 피부색, 민족, 종교, 사상, 문화, 언어, 음식, 관습 등에 있어서의 차이와 다양성이 권장되고 존중된다.


셋째로, 깊은 영성적 修行(spiritual practices in depths)과 활발한 사회적 관심과 행동(social concern and action) 간의 균형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이 균형을 강조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영성적 수행을 통해 사회적 불의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노력하면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참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또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이나 지구상의 다른 種(species)의 고통을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힘쓴다.


넷째로, 일의 평등성(equality at work)을 추구한다. 공동체 내에서 일과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인정되나 신분이나 지위의 개념은 인정되지 않는다. 역할의 기능적 분화가 가져올 수 있는 공동체 성원간의 평등성의 저해 또는 약화를 방지하기 위한 방도가 강구되며 평등성을 높이기 위한 다방면적인 노력이 경주된다.


다섯째, 공동체성원 간의 인간관계는 동학의 ‘侍’(모심)을 기본정신으로 한다. 즉 누구든지 사람을 대할 때 그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과 자세로써 대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에 통하고, 베트남 출신의 스님 Thich Nhat Hanh이 강조해 마지 않는 ‘정념’(正念; ‘mindfulness’)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質素한 삶(plain life)을 산다. 질소한 삶이란 (1)자원과 물자를 아껴 쓰고 사치를 하지 않으며, (2)경제적 정의에 우선적 관심을 갖고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며, (3)기도와 묵상을 생활화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질소한 삶은 단순함(simplicity)을 소중히 여기고 餘白이 있는 삶을 사랑한다. 여기서 여백이라 함은, 일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바쁘게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알맞게 남길 줄 아는 여유를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남이 말할 여지를 남기며 언제나 상대방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현대인의 삶의 병적 奔忙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따금 물어야 한다. “말씀이 들릴 만한 고요함이 있는가?”(Are there enough silence for the Word to be heard?)


일곱째로, 축제가 있는 공동체를 가꾼다. 축제(festival)와 祝賀(celebration)는 공동체 생활의 한 中心軸이다. 축제와 축하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생활의 시련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준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유한 나라 사람들 보다 축제를 더 사랑한다.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축제의 감각과 기술을 상실했다. 그것은 공동체의 전통을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축제는 음식을 나누는 것과 함께 공동체 성원들에게 공동체의 참 의미를 손으로 만지듯이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축제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마찰과 사소한 분쟁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는 청량한 바람이 된다. 축제 속의 환희와 엑스타시(ecstasy)의 요소는 생명의 흐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성원을 관통해서 흐르게 해주며 우리들의 가슴을 하나로 묶어 준다. 축제는 육체와 감각의 기쁨을 영의 기쁨에 연결시켜 주는 경이로운 시간이다. 따라서 축제는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 요소이다.


살림 공동체는 대안적 문화로서의 음악, 詩, 춤, 노래, 이야기, 연극 등을 적절히 생활 속에 도입한다. 노약자나 장해자 등 누구나 쉽게 배워서 출 수 있는 춤(universal dances)을 개발하고 쉬운 춤사위에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소박한 말을 붙여(곡에 가사를 붙이듯이) 일하는 틈틈이 함께 추기도 한다.





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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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호익

November 26, 2005
*.218.50.53
五. 에필로그
나는 미국 펜실바니아주에 있는 Pendle Hill이라는 퀘이커의 공동체에서 지난 한해를 보냈다. 위에서 제시한 공통체像은 그 Pendle Hill을 모델로 하여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본 것이다. 다만 Pendle Hill을 좀 더 민중적인 쪽으로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겠다.
살림공동체의 7가지 원리 하나 하나를, 구원과 해방을 절절히 갈망하는 민중의 가슴과 눈으로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구체적인 공동체운동에 응용할 때에는 내가 몸담고 사는 사회현실과 자신의 문화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조건에 맞추어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부가 아닌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한 주변부에 떨어진 작은 씨들의 눈이 지금 터지고 있다. 민중이라고도 불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에 눈떠 깨어나고 있다. 그들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본이다. 씨들은 자신의 문화와 사상과 전통에 돌아가 그 토양에 튼튼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에워싼 동양과 서양의 온갖 문화, 문명, 사상, 전통들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여 그들 자신의 잠재력, 생명력을 꽃피워 나갈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 새 천년의 새 문명, 새 문화, 새 인류의 도래를 예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 곧 ‘살림 공동체’의 창조라는 가슴 뿌듯한 과제가 아시아의 민중에게 맡겨져 있다. 이 창조에서 민중신학의 몫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민중신학의 새로운 전개 가능성의 단초만이라도 전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참고 문헌>
*Larry L. Rasmusen, ‘Earth Community Earth Ethics’, 1996, Orbis
*Ed. by Martin O'Connor, ‘Is Capitalism Sustainable?’, 1994, The Guilford Press
*Helena Norberg-Hodge,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 1991, Siera Club Books. (한국어역: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사)
*Jean Vanier, ‘Community and Growth’, 1989, Paulist Press
*‘Faith and Practice’, 1997, Philadelphia Yearly Meeting
*Thomas R. Kelly, ‘A Testament of Devotion’, 1941, Harper Collins
*John Punshion, ‘Encounter with Silence’, 1996, QHS
*C. G. 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s’, 1973, Vintage
*Douglas Gwyn, ‘The Covenant Crucified -Quakers and the Rise of Capitalism-’, 1995, Pendle Hill
*Edited and Introduced by Douglas V. Steere, ‘Quaker Spirituality, selected writings’, 1984, Paulist Press
*Patricia Loring, ‘Listening Spirituality’, 1999, Loring
*Ed. by David Cren and Eric & Helen Ebbeson, ‘Living Simply’, 1981, The Seabury Press
*Mark A. Burch, ‘Simplicity’, 1995, NSP
*Grace Kuto, ‘Harambee, African Family Circle Cookbook’, 1995, Book Partners
*Thich Nhat Hanh, ‘The Miracle of Mindfulness', 1975, Beacon Press
*Thich Nhat Hanh, ‘Living Buddha, Living Christ’, 1995, Riverhead Books
*咸錫憲全集, 1987, 한길사
*김지하전집(5), ‘생명, 이 찬란한 총체’, 1991, 동광출판사
*한글 東經大全, 1991, 동학연구원
*金芝何 思想紀行, 전2권, 1999, 실천문학사

2023/08/17

단군/한국문화 - 단학선원(단월드) 위험수위 넘었다...설립자 이승헌을 살아있는 단군으로 숭배 / 현대종교 1997년10월호

단군/한국문화 - 단학선원(단월드) 위험수위 넘었다...설립자 이승헌을 살아있는 단군으로 숭배 / 현대종교 1997년10월호



단학선원(단월드) 위험수위 넘었다...설립자 이승헌을 살아있는 단군으로 숭배 / 현대종교 1997년10월호단학 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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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08:18:32
허호익*.72.241.243

http://theologia.kr/board_tangun/49191
http://www.chtoday.co.kr/forum/board/newCT_board.htm?mode=view&no=10886&id=freeboard

단학선원(단월드) 위험수위 넘었다(cafe.daum.net/antisybi )
설립자 이승헌을 살아있는 단군으로 숭배

80년대 중반 소설 '단'이 출간되고 난 후부터 일기 시작했던 동양명상 붐은 계속해서 그 인기가 상승가도 중이다. 특히 단전호흡을 비롯한 기(氣) 체조는 성인병을 비롯한 난치병을 치료하고 건강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해서 수많은 대중들이 몰리고 있다. 이에 따라 기수련단체들도 우후죽순 늘어났다. 그 중에서 단학선원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회원 수를 확보하고 있는 최대규모의 수련단체, 그러나 요즘 들어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상업화와 종교적 성격까지 눈에 띄어 일부 회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기도 한다.

"처음 얘기했던 본질과 달라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정신훈련을 시켜요. 말로는 정신교양 강좌라고 하면서 회원들을 안심시키는데 실은 정신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보입니다. 개운치 않은 구석이 느껴져 이젠 발길을 끊었습니다."

40대 중반의 대기업 간부인 박 아무개씨가 건강유지를 위해 다니던 단학선원을 그만 둔 이유다.

박씨는 이곳에서 배운 기체조가 좁은 공간에서 근육을 활용할 수 있어서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할 수 있는 운동으로 꽤 적합하다고 여겼는데 수련단계가 높아질수록 특정한 사상을 주입시키려는 의도에 거부감이 느껴져 운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선원책임자에게 이 사실을 항의하다가 언쟁만 높였다며 불쾌감을 표했다.

천지기운 주장 종교성 다분히 있어

대부분 6개월 미만의 수련회원들이 개인의 의식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단학선원의 실제 모습을 알아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이들은 초기단계에서는 주로 건강에 관심이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신통한 기체조를 가르쳐주는 학원 정도로 여기게 한다.

서울시 노원구 J지원에서 일정기간 수련한 경험이 있는 한 사람은 처음 찾아갔을 때는 별로 이상한 기미를 못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실내장식이 깔끔한 내부에서 사범이라고 부르는 20대 나이의 상담원이 깍듯이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했다. 그는 마주 앉아 다과를 들면서 나에게 무료로 기 점검 카드를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수련 체계표를 보면서 단학은 몸과 마음과 기를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수련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기가 막혀 있다며 즉석에서 자리에 눕게 해 기점검을 했다. 기운의 청탁 강약을 파악하고 척추 좌우 비대칭, 골반의 틀어짐. 다리 길이의 차이, 장의 굳은 정도, 임맥 막힘 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운이 한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돈보다도 빨리 수련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우선 1개월만 시험적으로 해보려 했던 이 사람은 상담원의 권유에 못 이겨 6개월 수련을 한꺼번에 신청했다고 한다.

"단학선원은 원래 기본이 6개월이며 참 맛을 알려면 평생 하는 것이 좋다"는 말 때문이었다. 이런 수법은 일단 회원들이 수련에 대해 기대감을 갖도록 유도한 뒤 한꺼번에 고액의 수강료를 챙기기 위한 것으로 회원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회원 확보에 고도의 테크닉까지 사용하도록 본부 측에서 아예 지침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여기에는 "만일 학생이어서 회비가 모자라는 등 부득이한 경우에는 지원장 재량 하에 1개월 또는 3개월 등록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하면 신청은 6개월로 하되 회비만 할부하는 형식으로 유도하라. 그리고 "선생님께만 특별히 혜택을 드린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하라. 최대한 정중하게 하여 상대방에게는 미안하게 만들라. 반드시 6개월 이상하도록 만들라"는 등의 세세한 내용까지 지시되어 있다.

입회후 초급단계에서 회원들은 종종 단전호흡과 기체조의 효과를 보기도 한다. '도인체조'라 불리는 기체조를 통해 병원에서 고치지 못했던 난치병이 낫기도 하고 허약 체질이 바뀌는 등의 체험이 나타나는 것. 단학선원측에서는 이 단전을 데우는 수련법이 인체의 중심인 골격, 근육, 오장육부 등 온몸을 골고루 강화시켜 주므로 힘과 정력이 함양된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효과가 단학선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국선도나 기타 단전호흡을 가르치는 단체에서도 이와 동일한 기치료로 많은 질병을 예방 치료하고 있으며 벌써 오래 전부터 사상의학이나 음양오행에 근거한 한의학에서도 임상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그러나 단학선원은 자신들의 수련법이 타 단체와 차별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내세운다. 다른 수련단체들은 기수련 하는데 수행법을 중요시 여기지만 자신들은 복잡한 수행법이 없어도 쉽게 기를 받을 수 있는 비법이 따로 있다는 주장이다. 설립자인 이승헌 씨는 그것이 " 바로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마음만 열면 천지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단학선원을 제외한 타수련단체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기를 여러 가지 수행법을 통해 개발하고 단련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알려왔다. 그러므로 건강수련단체라는 원래 성격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헌씨는 이 말속에 기(천지기운)가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외부 어딘가 에서 전수 받는 것이라는 특이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학수련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단학의 목적은 천지기운과 천지마음을 아는 것. 그럴 때 혼이 살아나고 하늘의 마음을 알수 있고 신인이 합일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단학선원은 하늘의 문화를 깨우칠 단체이고 하늘의 문화를 부활하는 단체이다. 이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는 확실한 한의 원리와 하늘의 도를 꿰뚫어 봤다"는 그의 선포에는 다분히 종교성이 내포되어 있다.

성령잉태 부인하는 등 타종교 비방

일부 회원들이 정신적인 혼란을 겪는 단계가 바로 이때다. 도인체조로 신체를 단련하는 초기단계가 거의 끝날 무렵에 특정한 원리가 개인의 의식과 정신세계에 서서히 주입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바로 천지기운을 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단학선원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 이승헌의 원리이다. 그리고 평생회원 가입이라는 상술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평생회원은 1인당 회비가 3백만 원에 달하는 본격적인 입문과정이지만 깊이있는 훈련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보다는 각지원의 실적올리기와 직결된 단계일 뿐 이다. 바로 이 평생회원제는 단학선원 효자 노릇을 하는 주요 수입원이므로 지원장들은 개개인의 수련단계에 상관없이 무조건 가입을 권유하고 있어 회원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수련한지 10일밖에 안됐다. 지원장이 나보고 '남들보다 개혈이 빠르다'고 하며 평생회원 가입을 권유하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기체조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평생회원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는데 얼마전 이승헌 원장이 쓴 책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를 왜곡 해석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몹시 혼란스럽다."

서울 용산 N지원에 다녔다는 30대 나이의 이 여인은 '신성을 밝히는 글' 이라는 이 원장의 책을 읽고 나서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수련단체에 불과하고 오히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상담원이 약속했는데도 지원장이 교재로 추천한 이 책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앙관을 뒤흔들만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한 말을 인간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말이었다"며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더 이상 기존 종교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단학선원이 만들 '한세계'는 새롭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안적인 시스템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규모가 없고 횡설수설하고 있어서 수련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머리만 복잡해졌다. 현재 수백만원을 주고 평생회원 가입서까지 받아놓은 상태인데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면 입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회가 막심하다"


한마디로 이승헌에게 타종교는 저급한 것이다. 특히 기독교는 "죄의식을 불러 일으켜 의식세계를 통솔하려 하는 종교"라며 비난한다. 그는 기독교가 천당과 지옥을 얘기하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식을 구속해 겁주고 있으며 회개와 기도 또한 에너지 쟁탈전으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끼게 해 결국은 사람들의 기를 빼앗으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특히 예수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의식이 정화될 수 있도록 한 것이 제일 큰 공로이나 실은 세례요한과 마리아가 불륜의 관계를 맺어 낳았다"며 극도로 비하시키며 성령 잉태설을 조작된 사실로 부인하고 있어 기독교 수련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생회원에 가입하거나 지원으로부터 열심을 인정받은 회원들은 개혈수련이라는 다음 단계로 유도된다. 이것은 천지기운을 받을 수 있는 신비적인 수련 절차로써 바로 단학선원이 숨겨왔던 종교적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승헌은 여기서 노골적으로 단학선원의 핵심인 천지기운을 무조건 신봉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이것을 '선계(仙界)와 이어주는 인연이며 오직 단학선원과 자신에게만 천지기운을 전수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강조한다. '단학선원에만 앉아 자신이 기운을 받겠다는 마음만 갖고 있어도 몸의 변화가 오고 진동하고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이는 자신이 사람 몸안에 있는 정기를 진기로 바꿀 수 있는 핵에너지를 뿌려 놓았기 때문'이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다. 특히 이 개혈단계에서의 '진동'으로 온 몸이 떨리면서 흔히 무당이 내림굿을 하는 것과 거의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수련이 진행되어 신경조직이나 세포가 변할 때 오는 현상으로 자기정화의 단계'라고 관계자 측은 해명하지만 접신 현상과 다르지 않아서 충격을 주고 있다.

이와 함께 "단무(丹舞)"라는 것이 있다. 무의식 상태에서 춤을 추도록 유도하는 이것은 이승헌이 모악산에서 수련할 때 터져나온 기운의 춤이라 해서 비중을 중요시 되고 있지만 비정상적인 의식상태에 빠진 신비체험의 일종으로써 신내림 현상과 다르지 않다. 단무와 진동은 특히 사범 등 하부 지도자 교육에서 심하게 나타나는데 심지어 이로 인해 정신이상자까지 생겼다는 후문도 들려온다.

또 이승헌은 회원들에게 절수련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평균 103배 이상을 백일간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그 대상은 다름 아닌 단군신과 환웅천황, 그리고 절수련을 할 때 천부경을 함께 외우도록 하면서 절 수련을 할 경우 정성이 쌓여 큰 진리를 맞이할 수 있다는데 탈퇴한 간부들은 이것으로 회원들의 복종심 수양법으로 이용할 뿐 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단학선원 회원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 본부측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 다름아니라 "단학선원이 신을 모신다"는 말이 몇몇 지원에서 나왔던 것이다. 일반 회원들이 지원에서 수련하다가 우연히 커튼 뒤나 지원장 방에 따로 숨겨진 환웅 영정을 목격하고 난 후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 이 보고를 들은 지역 대표들은 황급히 각 지원장들에게 당분간 환웅영정을 내부에는 비치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리는 등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일반회원들 모르게 단군 신상을 두고 제사를 드려왔다는 것은 단학선원에서 공개된 비밀. 주로 돈 많은 평생회원이나 믿을 만한 회원들이 앞장서 250만원 이상의 성금을 내고 이 조화제를 월 1회씩 자정을 기한 새벽까지 행해왔다. 이와 함께 천도제는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저 세상으로 천도해 주는 것으로 거액의 헌금을 바쳐오다가 단군 영정 시비가 말썽을 일으키자 96년까지만 이를 놓고 제사를 지내고 97년 중반까지는 촛불만 켜놓고 제사를 드려왔다고 한다.

이승헌은 단학선원이 단군신을 숭배하는 이유를 단학의 뿌리가 원래 민족고유의 사상인 재세이화 홍익인간 정신에 있기 때문이라며 정당성을 찾고 있다. 단군의 건국이념만 바로 세우면 종교도 필요 없으며 기존 교회는 개인의 이기심만 조장하고 호국 민족에 관심이 없다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오래 전 발생했던 천안 독립기념관 방화사건은 "우리 민족이 단군을 홀대하기 때문에 이를 노여워한 단군신이 직접 불을 지른 것"이라는데, 이때문에 단군성전 건립까지 반대하면서 민족의 시조를 홀대해온 후손들은 필히 반성해 이제라도 단군을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학선원은 한민족이 세계정신 지도국이 되도록 의식진화를 이루는 유일한 단체라는 말로 조직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승헌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이다. 그는 인류평화와 인간완성의 지름길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천지기운을 받을 때 가능해진다고 교육한다. 직접 천상의 단군으로부터 법을 세상에 전수하라는 사명을 받았다며 스스로를 "단군신법의 메신저"라는 등 최상의 지도자로 회원들을 세뇌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그 결과로 회원들은 그를 믿으면 하느님과 만날 수 있고 영이 강화되며 하나님과 일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도 비일비재 한다.

"지원에서 밤에 몰래 스승님 사진을 두고 단청회 회원 몇 명과 영인체 수련을 하곤 했다. 영인체 수련은 쉽게 말해서 동질화를 의미하는데 이 훈련은 스승과 하나가 되고 그의 의식을 받게 해준다. 스승님 사진에 절하고 나면 지원장이 문구를 반복해 읽는다." 고 체험자는 전한다.

한때 자원봉사자인 명예사범 일을 하기도 했다는 김씨(28세)는 경험담과 함께 이밖에도 매주 2번씩 각 지원의 실적을 체크하기 위해 이승헌이 보내오는 팩스에는 "나는 절대자 하느님이다. 다른 생각은 절대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나는 살아있는 단군이다"라는 등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표현들이 노골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증언했다. 심지어 지도자들의 전국적인 행사에는 '스승맞이 대행사'라는 순서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이승헌은 또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 붙인 '일지파워'라는 스티커를 고가에 판매하고 있다. 단학선원 각 지부에 가면 손잡이 따위에 이 일지파워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승헌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지기운을 넣어 동봉한 물품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일지파워를 붙이면 재앙이 물러가고 병이 치유되며 복이 들어온다는데, 주로 손바닥과 이마 등에 붙이고 앉아 있으면 천지기운이 들어온다는 '현대의 인스턴트식 수련법'이라며 회원들에게 구입할 것을 강요하고 있지만 비과학적인 부적,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승헌은 이 일지파워를 100일이 지나면 그효과가 없어지므로 계속해서 붙여줘야한다는 등 얼토당토한말과 함께 한국인체과학회라는 단체를 앞세우며 마치 일지파워가 과학적으로 검증이 된 것처럼 회원과 일반인들에게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조화제나 죽은 영혼들을 저세상으로 천도해 준다는 천도제 등 종교적인 색채가 다분한 의식을 본부 측이 은밀히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회원들은 이를 거세게 반발, 지금까지의 회비를 반납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부산지원의 한 평생회원은 심야에 한 지원에서 사범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조화제를 지내는 것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전한다. 자기를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소개하는 이 40대 여인은 "어떻게 회원들이 모르게 단군신 제사를 드릴 수 있는가. 겉으로는 수련단체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런 종교성을 띠고 있다니 한마디로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현재 일부 회원들은 입회 때부터 평생회원 하라는 권유에 못 이겨 700여만 원의 회비를 내고 가입했으나 수련한 결과, 별로 기수련의 효험을 보지 못했다며 단지 수백 만원의 회비를 거둘 목적으로 회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 본부 측 행동에 에 대해 전액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개인 인격 말살시키는 의식교육과 반사회적 현상

단학선원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지도자 등에 대학생을 비롯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사범이나 원사, 법사, 정사 등의 지도자들은 건강 수련을 위해서 단학선원을 찾았다가 상부 지도자들의 눈에 띄어 포섭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학선원은 특히 젊은이들이 민족사상에 호감을 갖는 심리를 이용해 단학이 한민족 고유의 수련법이라고 내세우며 수련에 열심을 보이는 대학생들을 골라 지도자로 삼는다. 그러나 대부분이 각 지원 간부들의 지능적인 포섭전략에 의해 들어오고 있다.

"자원하는 경우는 1퍼센트도 안 된다. 대개 목천 본사에서 각 지원장들에게 회원을 포섭하라는 공문이 내려오는데 정식사범이 된다고 해야 월급이 "3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여유 있게 사생활을 가질 수도 없고 여기에 대해 불평하면 3년만 참아라 단학선원을 그룹으로 만들면 대우를 잘해 줄 것이다. '한문화 운동'하면 사회가 밝아질 것'이라며 둘러대곤 한다."

부산 모 지원의 K사범은 특히 지도자 교육과정에서 비정상적인 주입식 교육이 비일비재하다고 전한다. 사범이 되기 위해 받아야 한다는 교육과정 중에는 특히 인격형성기에 놓인 청소년들의 인간성을 파괴할 만한 내용을이 담겨있어 악영향이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두 훈련은 바로 자기선언식과 험담체험이라고 한다.

먼저 자기선언은 주체적인 개인 의식을 백지화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 참여한 여비 사범들은 정사 등 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온 몸을 비틀고 괴성을 질러야 한다. 이는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드러내 마음을 비운 후 이승헌과 단학선원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다. 괴성의 고저나 이승헌에 대한 절대적 맹종의 표현정도에 따라 지도자로서 자질이 평가되므로 수준미달일 경우에는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

또 이들에게는 '험담체험'이라는 이수과정이 있다. 교육생들끼리 서로 험담, 쉽게 말해 욕을 주고받는 훈련,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을 입에 담고 핏대를 세워 상대를 비판하는 과정을 거쳐야 유능한 지도자의 가능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세상때 묻지 않고 순진한 예비사범들은 대개 이 훈련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계속적인 상부지도자들의 채근과 강제에 못이기고 마는 것이 실상이다.

"사람은 무조건 부드럽고 자상하고 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에게 욕하고 비난하는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험담체험에서 내 상대가 나에게 '', 'x더러운 자식'등 별의별 욕을 다 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강사님의 말처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구나' 하고 애써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며 한 예비지도자는 억지로 충격을 가라앉혔다.

이밖에도 이승헌은 지도자 개개인의 주체적 의식을 인정하지 않고 지시사항이나 교리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식으로 조직을 관리한다. 그는 젊은 사범들에게 "자신을 모두 잊어버리라 분석하고 따지지 말라 단순해져라 "며 자신의 말을 주입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세뇌시키며 지역 총책임자들에게는 이들을 상명하달의 군대식으로 철저하게 관리할 것을 지시 내렸다.

이승헌은 지도자들에게 자신과 '라인화' 되어 있어야 한다며 무조건 믿고 따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빗나간 행동을 하면서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죄가 안되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일부 의식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젊은 지도자들 중에는 단학선원에 심취하기 위해 가정을 등진 사례도 있다. "3개월 다니던 중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심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영어학원에 다닌다며 속이고 몰래 다녔다. 그러던 중 탄로가 나 언니가 단학선원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정사님 도움으로 서울지원으로 도망왔다. 그후 어머니에게는 절에 잘 있으니 찾지 말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 예비 여자 사범은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해, 길렀던 머리까지 삭발하고 일부러 다니지도 않는 절에 들어가 스님과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집으로 보내는 등 거짓행동으로 부모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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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현대종교 97년10월호 p58-69


단(丹)의 실체와 허상



사회전반에 깔린 물질만능주의와 부패의 만연으로 인한 가치관의 파괴와 도덕성의 상실로 이상과 현실사이에 방황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것을 되찾자'는 운동의 바람을 타고 확산되면서 다양한 단학단체에 모여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활이 윤택해지고 여가시간은 충분해졌지만 복잡한 사회 속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에 위협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기수련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단학이라 하면 단군사상을 선뜻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80년대 중반 화제가 됐던 김정빈씨의 소설 '단'을 기억해 낼 것이다. 작금에는 많은 언론 매체에서 경쟁적으로 다루고 있는 심신단련을 위한 기체조, 단전호흡, 기수련 등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도 하다. 그런데 최근 민족고유의 얼을 되찾고 심신을 단련한다는 목적과는 다르게 신비사상의 유입과 극단적인 몰입으로 인한 부작용이 몇몇 단학단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 단체는 특히 지도자에 대한 존경 차원을 넘어 신격화하여 사교화되는 현상마저 나타나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회비환불을 요구하는 회원들의 잇따른 진정과 탄원으로 문제성이 드러난 단학선원도 그 중 하나이다.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며 무료로 공원 등에서 지도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반에게 알려진 단학선원의 이면에 숨은 진상을 밝혀 달라는 피해자들의 하소연은 기 사상, 내지 단학의 실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현존하는 단학계통 단체들은 소수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순수하고 올바르게 단(丹)의 정신과 수련방법을 수행하는 곳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60년대 초 당시 재야 사학자 이유림 선생(1987년 작고)이 강화도 마니산에 설립한 ' 단학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현 회장 징관(澄觀) 윤봉근 씨의 말이다. 윤 회장에 의하면 본래 단이란 우리 나라의 선도나 중국의 도가에 입각하여 제대로 시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급과정에서 단을 수련, 지도하는 지도자 육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범코스라 해서 2-3개월 정도 수련을 거쳐 사범으로 일선에 나가게 되므로 기 수련하면서 생기는 여러 현상을 제어하거나 정정을 못시켜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이는 착시, 환상, 환시,접신 등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며 종교적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까지 이른다. 또 정신이상이나 염세주의로도 나타나는 등 사회문제가 될 소지도 다분하다.

그런데도 일반 기공자들 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면 천도선법과 같은 아류에 속해야 한다는 인식이 번져 영계나 또는 수련하면서 생겨나는 여러 현상들을 제어하거나 그런 쪽으로 결집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고 심지어 '격암유록'이나 '정감록','천부경'등을 인용하여 사주관상이나 보아주고 숫자풀이나 하는사례가 빈번하다. 그만그만한 이름을 가진 단체들 중에는 소속인원이 100명이상 되는 단체만도 200여개로 추정되는데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여러 신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고 가장 큰 폐해는 역시 천도식(떠도는 영혼을 편하게 천상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단학선원에서는 '천제'라고 함)이다.

수련자가 꾸준하게 수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지도자가 부재함으로 인해 환청,착시,환시,접신 등 부정적인 현상이 천도만 하면 자동으로 없어진다고 하며 1천만원, 2천만원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를 요구해 사이비종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 재산을 팔거나 혹은 빌려서 충당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본래 '단'에서 얘기하는 수련이란 '자아'를 찾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찾음. 선도적 표현으로는 원시반본)과정을 이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생물체나 무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우주의 기 상태로 돌아가서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즉 통할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며 그 도구로 홍익인간의 단군 이념을 화두로 삼는다. 수련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건강이나 수련하므로써 승화되는 모든 것을 연계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모든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승화시켜나가는 것으로 간단히 요약되기도 한다, 따라서 최소한 10년 정도는 수련해야 모든 것을 표현해 낼 수 있고 상대방의 기운을 감지하고 기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 그러나 기 수련 자체가 너무 치료차원이나 신비한 현상으로만 받아들여져서 그만큼 수련되지 못한 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폐해는 심각하다는 것이다.

항간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일주일만에 임 독맥을 기통해서 생기는 부작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온몸의 기의 순환을 흐트러뜨리고 막아버려 일시적으로는 풀어진 것 같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몸의 이상현상(몸의 굳어짐, 저림, 두통 등)이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과신하여 능력자인 양, 도통한 양 혹세무민하여 종교라고도 할 수 없는 사이비집단들 또한 늘고 있다. 이들은 착시,환시,환상,접신의 현상이 나타나면 전생의 업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해서 괴성을 지르거나 원수를 갚는다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때리는가 하면 부모형제도 전생에 원수라 해서 멀리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결국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많이 빠져들고, 단으로 인한 사회적인 폐단마저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기본이 충실하지 않고, 부작용들을 견뎌나가고 순화해 낼 수 있는 신체와 정신상태가 되지 못하는데도 정신없이 엄청난 기가 쏟아져 들어오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게 된다. 일부 문제 있는 단체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슨 업 때문이거나 조상신이 나와서 어떤 얘기를 한다고 해서 입으로 이상한 말들을 뱉어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신들린 것 일뿐, 이런 현상은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형태로 세상에 단을 보급하고 '이화세계'로 도맥과 선맥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단이란 화색이요, 화는 형질이 아닌 기체이니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단지 공리이므로 무하 유의 명이요 일기의 이 된다.… 중략….

청산이 청운도사로부터 전수한 법통은 동방단리(東方丹理)의 정통적 정수(精髓)인 精氣神三丹), 단전이단호흡(丹全二段呼吸)으로부터 대기와 합일하는 경지까지 승화시키는 묘법이다. 이것은 내단(內丹)이며 정통적 단리(正統的 丹里)인 것이다. 자고로 허다한 사람들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입산하여 수도하였으나 득도하는 이가 극히 적음은 이러한 정통적인 단리의 방법을 해득(解得)하지 못한 까닭이요 간혹 어떤 정도의 수도가 되었다 할지라도 올바른 방법의 지도가 없이는 도법(道法)의 극치에 도달할 수 없는 까닭이다."

1970년 국선도를 개원하여 실질적으로 보급시키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알려진 청산(靑山)의 저서 국선도에서 주장하는 수련의 요지는 이렇다. 그는 단리(丹里)를 닦아 성도(成道)하면 후계자에게 직접 지도하고 세수(世守)를 거쳐서 흔적 없이 자신들의 본향으로 사라지는 관례대로 80년대 초반 홀연히 종적을 감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도 선(仙)을 잘못 이해하면 망상과 환상과 욕망만으로 시종일관하여 종국에 미신으로 흘러 패가 망신하는 사실이 있었음을 직시한 것이다. 과거 이조말기 생겼던 차경석의 선도교(仙道敎 . 강증산의 후신으로 후에 보천교로 개칭,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킴)로 시작된 선도사상(仙道思想)의 사이비종교화는 오늘날에도 "기나 도에 대해 잘아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잘 알려진 대순진리회와 개인우상화로 물의를 빚는 천도선법 등에서 잘 나타난다.

덧붙여 요즈음에는 단학에다 라엘리언 무브먼트의 교리와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법을 혼합하여 국적 없는 단체로 전락하는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윤회장은 단이란 선신을 운영하는 수련이지만 명상은 상단전(뇌)만 운영하므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득될 게 하나도 없다고 밝힌다.

기독인 중에도 심신수련이라는 명분 하에 많은 이들이 단학수련을 하거나 수련의 차원을 넘어 심취하는 이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선(仙)수련이 내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선인(仙人)인 바 최후에는 천인합일지경(天人合一之境)에 도달하는 것이라 하겠다. 민족고유의 것도 좋고 심신단련도 좋겠지만 분별력 없이 심취하면 올바른 기독인의 신앙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신중한 선택을 해야 겠다.

<심우영 취재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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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현대종교 97년10월호 P70-74

"한 세계" 구호속에 입지 넓히기 총력



요즘 TV프로그램의 건강법 코너에서 도인 체조를 선보이는가

하면 공원 등지에서의 강습으로 일반에 파급되고 있는 단학선원은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까지 지원을 확대하여 98년까지 회원 1백만명 확보를 목표로 그

세력을 늘려 가는 추세에 있다.


단학선원의 빠른 성장의 밑바탕에는 사단법인 한문화원이 버티고 있다. 1985년 2월에 서울 신사동에서 그 첫발을 내딛은 한문화원은1988년 1월4일 문화공보부에 사단법인 한문화원을 개설(법인등록번호:114621-0001229)하여 순수 국민보건운동단체로 활동을 해왔다. 회원들의 회비 등 기본적인 수입원 외에 모 대기업으로부터 3년여에 걸쳐 연간 약 1억원 정도를 받았고 매달 거행되는 천제(天際)를 위한 회원들의 기부금과 천화원, 삼신전 건립의 모금에 따른 회원들의 기부금은 한문화원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교육비 도복 및 단학관련 서적의 판매수입 외에 천화원 수련비 수입에 천화병원과 천화식, 죽염, 정충환, 활기환과 같은 무허가 식품 및 약품판매에서 나오는 수입도 막대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한문화원 산하 비인가 단체인 한국인체과학학회 입회비(일인당 10만원)와 특별 수련비(매회 5만원),단학통신대학 수업료 등의 여러 가지 수입원까지 합치면 91년에만도 총수입이 약26억4천2백만 원에 달했다. 금전적인 배경 외에 단학선원의 조직체계 역시 이들의 성장을 뒷받침해 준다. 우선 단학선원의 지위체계는 대선사 일지 이승헌, 백운단사, 송화단사(국내책임자:충북 영동), 선원장(충북 목천 본사), 정사(약 50여명으로 지역대표 및 실질적인 자금 및 경영업무총괄담당), 지원장(전국지원약30여명), 사범(전국지원약420명), 회원(약1만7천명)순으로 내려오며 대략 2만 여명의 사람들이 단학선원에 몸담고 있다. 이들은 지정 회원들에게 국내 명승지와 미국 세도나에 있는 명상센터로 여행을 강요하고 있으며 직장에 손을 뻗혀 회원을 확보한다. 단학선원 본사인 충북 천원군 목천에 소재한 청소년들을 모아 단학수련을 시키고 있는데 집중력이나 창의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아래 단학수련을 특활반이나 정식과목으로 채택하여 수련을 하게 하는 일부 학교측과 맞물려 회원수가 증가일로에 있기도 하다.

이들의 조직은 전국을 12개 지역으로 나누어 330여개 지원과 해외에 30여개 지원을 설립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까지 손을 뻗으면서 7천억원대의 자금과 많은 인원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 6월22일 수안보 한화콘도에서는 한문화 단학지도자 연수원 1기149명의 졸업식이 있었다. 이들에게 3급 단학강사자격을 줌과 동시에 한문화아카데미의 특별회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었고 모두 한문화아카데미의 발기인으로 자원하였다. 앞으로는 한문화 아카데미에서 이와 같은 교육과정을 개설해 단학보급을 확대시킬 것으로 알려지는 가운데 지난 6월29일에는 제6기까지 배출된 단학강사 총 831명에게 자ㄹㅠㄻ증을 주어 현재 단학강사 9천여 명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단학강사들이 수련지도 하는 곳은 매달 평균 150여곳씩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 것 살리기라는 명목으로 운동을 벌이는 이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쉽게 미혹되고 있는데 전국 9백여 곳에서 매일

3만 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들은 종교법인 설립을 목적으로 '98년1백만명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문화를 지키자는 명목으로 전국 각처에서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종교법인만 받으면 날개를 단 것처럼 활개를 칠 것이며 잠시 잠깐 기지개를 켜면서 성장하는 것보다 휠씬 빠르게 성정할 것이라는 제보자의 말이 섬뜩하게 들려온다.

이미 미국, 캐나다, 일본 영국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 지원을 설립한 단학선원은 지난 7월12일 런던시에서 열린 한영축제(Anglo Korean Festival)에는 약 3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소개해 많은 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해외에서 세력을 늘리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해외선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주지역 명상센터 건립을 위한 자금송출도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단학선원은 사회진출을 위한 자금확보를 위해 여러 계열사를 두고 있는데 현재 천지인 상사, 한문화아카데미, 천지신성원(기시술 병원), (주)한세계여행사, (주)한세계건설, (주)한문화기획 (주)한문화출판사 등을 운영하며 이같은 사업은 계속 확장해 나가는 추세에 있다.

충북 영동에 위치한 정신수련원인 천화원은 깊은 산 속에서 천도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수련을 단행하고 있으며, 단학의 핵심과 원리를 담은 책자들을 발간하고 있는 주)한문화는 이번에 '해뜨는 나라'라는 책을 발간해 전국 서점에 배포하였다. 이 책은 단학의 핵심을 한 단계씩 알아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실상은 단학선원이 주장하는 이상인간과 '한세계'의 허무맹랑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흐리고 있다.

주)한문화기획은 주로 직장인 회원들에게 단학수련을 시키기 위한 행사를 주관하며 (주)천지인 상사는 CGI라는 간판을 걸고 전통의상을 보급 판매하는데 현재 대구 부산 서울시 목동 반포 울산 경기도 고양시 일산 수원 총 7개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옷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단학선원을 은근히 소개하며 활동을 해주었고 하면서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회원이 되어 수련을 해야 된다"는 말로 회원가입을 유도한다.

단학선원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며 그들이 원하는 '한세계'를 이루기 위해 여념이 없다. 군 단학회는 군내에 많은 단학지도자를 양성했고 ROTC장교등 단기복무 장교는 전역과 동시에 현역지도자로 전환하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세웠다. 지원 활성화 책으로 15개 지원을 마련했고 앞으로 36개 지원 활성화를 목표로 수련을 지도할 장소가 이미 마련되었다. 군단학회는 30명 이상의 간부급 회원으로 활성화되었고 군 특성에 맞는 수련체계정립으로써 단학연구팀이 운영되고 있다. 한편 군 장병을 위한 단전호흡이 완성돼 군 자체에서 심성트레이너를 양성해서 구체적으로 천지기운을 전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었다. 지난해까지로 기한을 정했던 사병 지도자 양성체계 완성 계획을 통해 4개팀 3개 지역권 23개 부대에서 수련지도로 군 단학조직 체계가 정착되었고 수도권, 중부권 남부권으로 각 지역권을 3개 권역으로 구분했다.

'96년 현재 수련했던 인원을 보면 장교 196명, 하사관109명을 비롯한 군무원과 군인가족 등 459명에 이른다. 이중에는 장군 3명, 대령15명, 중령45명 등 영관급 이상이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군대 내에까지 체계적으로 침투한 군 단학회의 목표는 군 단학수련 활성화 및 완전 정착에 있다. 이를 두고 이승헌은 "단군 할아버지도 못한 일"이라며 단군 할아버지의 숙원사업인 한세계를 이룩하자고 거듭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성도들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몹시 아프겠지만 우리에게는 신뢰할 만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우며 감사한지 모른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결코 낙심치 않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홍민 기자>

단월드의 실체를 밝히고 지금 단월드의 지도자들이 어떤행태를 저지르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하고 그들을 경계하고 고발해야 합니다. 정말 무서운일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0년이 넘게 수많은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빼앗아 살고 그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정부에공무원, 정치인, 교수,대학생,군인,일반인등 누구도 위험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엄쳥난 조직이 있고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을 또 사람귀신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발 많은 사람들이 나서야 하고
그리고 저와 제아들, 제조카는 온전한 하늘입니다. 그들은 저의 깨달음과 저의 정신과 제뇌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것을 그들이 쓰고 있습니다. 저를 너무 많이 왜곡하고 거짓되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거짓되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저와 제아들은 온전한 하늘이며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제조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아이들은 그저 온전히 태어나 세상에 빛인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저희들에게 엄청난 짓을 하고 있고 저와 제아이, 제조카의 몸과 영혼을 빼앗아 온몸에 장애를 만들고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저와 제아들 제조카의 기운은 하늘의 기운이며 그기운을 그들이 쓰고 있고 이승헌,손정은,이을순,장영주,강기영,김용호,서윤정,신혜숙등은 지금 엄청난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대로 지나치지 마세요 저희들의 기운을 이사람들이 쓰면 안됩니다. 제뇌를 이사람들이 쓰면 안됩니다. 지금 그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영체를 잡고 있고 언제든지 큰일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빨리 저와 제아이,제조카의 몸에서 나와야 하고 그들을 잡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디에도 안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조직적인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악독하고 그들의 영은 악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8년동안 하루한시도 쉬지않고 제게한 그들의 행태가 얼마나 악독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지 그러고도 지금도 저와 제아들과 제조카까지 저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몸과 영혼를 빼앗아 온몸에 장애를 만들고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사람귀신으로 만들어 추종하게 하고 있는 세력에 또 많은세력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저와 제아이와 제조카속에서 그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욱 무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저기 많은 영인체가 숨어들어 활동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영체를 잡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모두에게는 ‘전문심령조사관’도 필요하고 그들을 볼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제발 이글을 읽고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정부에서 연구소에서 인간에 대해 좀더 연구하고 이들을 막을 수 있는 기계가 필요하고 우리모두에게 그것들이 필요합니다.

영인체(어떤사람의 고유한 에너지체),영체(어떤사람의모든정보,영혼,마음이라고 합니다) 영인체에 영체가 실리면 보이지 않는 그사람이며 이렇게 하는 것을 유체이탈이라고도 합니다.

부탁합니다.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국에서도많은 비리가 드러나 있고 숨겨진 비리도 엄청나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많은 지도자들을 인귀로 만들어 너무나 더러운 행태를 저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는이와 비슷한 전문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일본이나 미국에서도좀더 개발된 뭔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은 저와 제아들, 제조카에게서 나와야 하고 몸과 영혼을 빼앗아 사람으로써는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의 죄를 물어야 하고 그죄가 얼마나 큰지 어떤것인지 알고 처벌해야 하고 또 정부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싶습니다. 저와 제아이,제조카를 보호해 주시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욱 혼란해 질것입니다. 그리고 단월드가 제뇌를 연구해서 받는 뇌연구비와 단월드이승헌과 손정은,이을순,장영주,강기영,김용호등 단월드의 지도자들이 제게한 횡포와 8년동안 저를 고통속에 살게 하고 제아들과 제조카 제가족들에게 한 횡포가 얼마나 큰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들이 제게 주어야 할 보상금과 처벌을 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국민전체가 이들의 횡포를 알아야 합니다. 전국 어디에나 그들의 단체가 있고 아이들이 위험하고 대학생들도 위험합니다. 그들은 어디에나 쉽게 갈 수 있고 우리를 지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들 속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위험한 사람들이며, 단월드와 단월드의 지도자들을 고발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늘 그들을 감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몸과 영혼을 빼앗아 고통을 주기고 하고 알게하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슨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게 당하고 알게 당해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저희들을 지켜주시길 바라며 또 제가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모두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사람들이 쓰고 있는 기운은 온전한 하늘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하늘의 사랑입니다. 이사람들의 영혼은 악으로 싸여 있습니다. 절대 쓰게해서는 안되며 사회가 혼란해 질것입니다. 부탁합니다. 우리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지켜야 하고 그리고 모두의 사랑으로 저희가족들을 지켜주세요.

저와 제아들,제조카,제가족을 구해 주세요.

손지민(010-3013-9703)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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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간디와 비교종교종교학총서 10
셰샤기리 라오 (지은이), 이명권 (옮긴이) | 분도출판사 | 2005년 1월

===
  • 예수, 석가를 만나다 - 종교간의 열린 대화 첫번째 
  • 이명권 (지은이)열린서원2017-02-25
예수, 석가를 만나다
  • 정가
    15,000원
  • 판매가
    13,500원 (10%, 1,500원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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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239쪽
책소개
20여 년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는 물론 동서양 철학의 열린 대화라는 낯선 길을 열어 온 저자는 본서를 통해 예수와 석가의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두 종교전통이 한 비교 종교 학자에게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신과 불교 경전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조목조목 열거 하면서 비교 가능한 대목들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의 기본 초점은 ‘비움과 나눔’의 원리에서 공존과 상생의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서로간의 신앙과 교리 체계는 달라도 ‘공(空)’의 비움과 ‘색(色)’의 나눔을 십자가의 비움과 사랑의 나눔으로 잘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한정된 지구촌에서 평화적 공존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 예수와 석가의 창조적 만남을 위하여

제1장 - 마하와 아하제2장 - 반야와 믿음
제3장 - 바라밀다와 십자가
제4장 - 심경과 성경
제5장 - 관자재와 여호와
제6장 - 보살과 예수
제7장 - 행심반야바라밀다시와 성도의 길
제8장 - 조견 오온개공과 하나님 없는 인간
제9장 - 도일체고액과 구원
제10장 - 사리자와 예수의 애제자 요한
제11장 -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비움과 나눔의 길
제12장 -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하나님과 세상
제13장 - 수상행식 역부여시와 인식의 문제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14장 - 사리자 시제법공상과 하나님의 여백
제15장 - 불생불멸과 하나님에게 귀의
제16장 - 불구부정과 하나님의 눈, 아가페
제17장 - 부증불감과 하나님의 존재 방식, 알파와 오메가
제18장 - 시고 공중무색과 없이 있는 하나님
제19장 - 무수상행식과 거기 있으며 말하는 하나님
제20장 - 무안이비설신의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제21장 - 무색성향미촉법과 인연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
제22장 -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제23장 - 무무명과 구원의 빛
제24장 - 역무무명진과 구원의 길
제25장 - 내지 무노사와 영원한 나라
제26장 - 역무노사진과 구원론적 이율배반
제27장 - 무고집멸도와 은총의 대문
제28장 - 무지역무득과 하나님의 어리석음
제29장 - 이무소득고와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제30장 -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와 성도의 직무
제31장 - 심무가애와 자유인의 삶
제32장 - 무가애고 무유공포와 ‘그리스도의 사랑’
제33장 - 원리전도몽상과 거듭남의 비밀
-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제34장 - 구경열반과 하나님의 나라
제35장 - 삼세제불과 삼위일체 하나님
제36장 - 의반야바라밀다고와 예수의 생존방식
제37장 -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
제38장 - 고지 반야바라밀다와 십자가와 부활
제39장 - 시대신주 시대명주와 십자가의 도
제40장 - 시무상주 시무등등주와 무상의 기쁨, 부활의 세계
제41장 - 능제일체고 진실불허와 ‘하나님의 씨’
제42장 -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과 주기도문
제43장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와‘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예수의 정신과 사상은 인류 역사에 가장 빛나는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동양 정신 가운데서도 석가는 그리스도교와 쌍벽을 이룰 만큼 대조적인 측면에서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촌 시대에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예수와 석가라는 이들 두 거대 종교의 창시자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과 대화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20여 년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는 물론 동서양 철학의 열린 대화라는 낯선 길을 열어 온 저자는 본서를 통해 예수와 석가의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두 종교전통이 한 비교 종교 학자에게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신과 불교 경전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조목조목 열거 하면서 비교 가능한 대목들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의 기본 초점은 ‘비움과 나눔’의 원리에서 공존과 상생의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서로간의 신앙과 교리 체계는 달라도 ‘공(空)’의 비움과 ‘색(色)’의 나눔을 십자가의 비움과 사랑의 나눔으로 잘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한정된 지구촌에서 평화적 공존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종교 간의 평화와 공존을 깨뜨리는 전쟁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종교인들은 더욱 더 평화와 공존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저자는 예수의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석가의 평등과 자비 사상 그리고 공과 색의 변증법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반야심경>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인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의 논리를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조견(照見) 오온(五蘊) 개공(皆空)’과 같은 본질의 ‘공’의 세계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에 비교되고 있다. 성(聖)과 속(俗), 혹은 공(空)과 색(色)이라는 본질과 현상의 두 가지 차원 속에서, 오늘 우리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가치를 어떻게 지니고 살 수 있겠는가? <예수, 석가를 만나다>라는 이 책은 바로 그 의문에 일종의 해답 아닌 해답으로서의 새로운 암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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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석가를 만나다 - 종교간의 열린 대화 첫번째 
이명권 (지은이)열린서원2017-02-25

책소개2

0여 년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는 물론 동서양 철학의 열린 대화라는 낯선 길을 열어 온 저자는 본서를 통해 예수와 석가의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두 종교전통이 한 비교 종교 학자에게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신과 불교 경전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조목조목 열거 하면서 비교 가능한 대목들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의 기본 초점은 ‘비움과 나눔’의 원리에서 공존과 상생의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서로간의 신앙과 교리 체계는 달라도 ‘공(空)’의 비움과 ‘색(色)’의 나눔을 십자가의 비움과 사랑의 나눔으로 잘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한정된 지구촌에서 평화적 공존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 예수와 석가의 창조적 만남을 위하여

제1장 - 마하와 아하제2장 - 반야와 믿음
제3장 - 바라밀다와 십자가
제4장 - 심경과 성경
제5장 - 관자재와 여호와
제6장 - 보살과 예수
제7장 - 행심반야바라밀다시와 성도의 길
제8장 - 조견 오온개공과 하나님 없는 인간
제9장 - 도일체고액과 구원
제10장 - 사리자와 예수의 애제자 요한
제11장 -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비움과 나눔의 길
제12장 -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하나님과 세상
제13장 - 수상행식 역부여시와 인식의 문제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14장 - 사리자 시제법공상과 하나님의 여백
제15장 - 불생불멸과 하나님에게 귀의
제16장 - 불구부정과 하나님의 눈, 아가페
제17장 - 부증불감과 하나님의 존재 방식, 알파와 오메가
제18장 - 시고 공중무색과 없이 있는 하나님
제19장 - 무수상행식과 거기 있으며 말하는 하나님
제20장 - 무안이비설신의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제21장 - 무색성향미촉법과 인연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
제22장 -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제23장 - 무무명과 구원의 빛
제24장 - 역무무명진과 구원의 길
제25장 - 내지 무노사와 영원한 나라
제26장 - 역무노사진과 구원론적 이율배반
제27장 - 무고집멸도와 은총의 대문
제28장 - 무지역무득과 하나님의 어리석음
제29장 - 이무소득고와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제30장 -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와 성도의 직무
제31장 - 심무가애와 자유인의 삶
제32장 - 무가애고 무유공포와 ‘그리스도의 사랑’
제33장 - 원리전도몽상과 거듭남의 비밀
-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제34장 - 구경열반과 하나님의 나라
제35장 - 삼세제불과 삼위일체 하나님
제36장 - 의반야바라밀다고와 예수의 생존방식
제37장 -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
제38장 - 고지 반야바라밀다와 십자가와 부활
제39장 - 시대신주 시대명주와 십자가의 도
제40장 - 시무상주 시무등등주와 무상의 기쁨, 부활의 세계
제41장 - 능제일체고 진실불허와 ‘하나님의 씨’
제42장 -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과 주기도문
제43장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와‘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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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명권 (지은이) 
연세대학교신학과를 졸업하였고, 감리교 신학대학원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미국 <크리스천헤럴드>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관동대학교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강의하였고, 그 후 중국 길림사범대학교에서 중국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길림대학 중국철학과에서 노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길림사범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재직하였고, 동 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동양철학을 강의하였다. 현재 코리안아쉬람... 더보기
최근작 :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상호문화적 글로벌시대의 종교와 생태>,<상호문화적 글로벌시대의 종교와 정치> … 총 3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예수의 정신과 사상은 인류 역사에 가장 빛나는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동양 정신 가운데서도 석가는 그리스도교와 쌍벽을 이룰 만큼 대조적인 측면에서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촌 시대에 살면서 어떤 형태로든 예수와 석가라는 이들 두 거대 종교의 창시자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과 대화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20여 년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는 물론 동서양 철학의 열린 대화라는 낯선 길을 열어 온 저자는 본서를 통해 예수와 석가의 본격적인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두 종교전통이 한 비교 종교 학자에게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신과 불교 경전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조목조목 열거 하면서 비교 가능한 대목들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의 기본 초점은 ‘비움과 나눔’의 원리에서 공존과 상생의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서로간의 신앙과 교리 체계는 달라도 ‘공(空)’의 비움과 ‘색(色)’의 나눔을 십자가의 비움과 사랑의 나눔으로 잘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한정된 지구촌에서 평화적 공존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종교 간의 평화와 공존을 깨뜨리는 전쟁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종교인들은 더욱 더 평화와 공존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저자는 예수의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석가의 평등과 자비 사상 그리고 공과 색의 변증법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반야심경>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인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의 논리를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조견(照見) 오온(五蘊) 개공(皆空)’과 같은 본질의 ‘공’의 세계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에 비교되고 있다. 성(聖)과 속(俗), 혹은 공(空)과 색(色)이라는 본질과 현상의 두 가지 차원 속에서, 오늘 우리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가치를 어떻게 지니고 살 수 있겠는가? <예수, 석가를 만나다>라는 이 책은 바로 그 의문에 일종의 해답 아닌 해답으로서의 새로운 암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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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ty in Interfaith Dialogue 2022
종교간의 대화와 영성  | 종교간의 대화 총서 1
도시 아라이,웨슬리 아리아라자 (지은이),
이명권 (옮긴이)열린서원20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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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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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역자 서문 6
추천의 글 7
펼치는 글 8
우리의 선언 16
침묵의 소리 : 선禪과 떼제 공동체 19
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27
순례의 길에서 34
영성 세계로의 여행 43
절대자와의 합일合一 49
내면의 자각과 깨달음 62
미지의 존재와 함께하는 순례의 길 70
언어와 논리 저 너머 80
이웃종교의 수행 방법들 85
새로운 영성 세계의 발견 108
그리스도교-불교-마르크시즘 사이의 대화 120
대화를 통한 영성의 체험 139
영성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하여 144
다양한 상황 속에서의 종교 간의 대화 155
토착 영성의 탐구 177

책속에서
<펼치는 글에서>

“종교 간의 대화와 영성”Spirituality in Interfaith Dialogue은 1987년 12월 1일부터 5일까지 일본 교토 칸사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열린 종교 모임의 주제였다. 이 모임은 ‘교회 갱신과 회중생활’RCL; Renewal and Congregational Life 및 ‘생명력 있는 신앙인들과의 대화’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s라는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nucil of Churches」 산하 기관들의 공동 지원으로 개최되었다.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이후, ‘교회 갱신과 회중생활’이라는 산하 기관은 “우리 시대의 영성”a spirituality for our times이라는 문제를 주요 과제들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 왔다. 물론 ‘생명력 있는 신앙인들과의 대화’라는 산하 기관 역시 오래 전부터 영성에 관한 대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므로 이 종교 모임의 주제는 두 산하 기관 공통의 진정한 관심사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여러 개신교 종파들로부터 이웃종교에 속한 사람들과 영성에 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꾸준히 계속해 온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이 모임의 목적은 제각기 다른 전통에 속한 영성들에 관한 대화가 그들 각자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 공부하고 깨달은 것들이 개인이건 회중이건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탐색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영적 순례 과정을 거쳐 이웃종교 전통의 영성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그 과정에서 그들은 어떠한 문제들에 부딪쳤으며, 어떠한 통찰력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이웃종교에 속한 사람들과의 영적인 대화가 어떠한 점에서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믿게 되었는가? 그들은 이웃종교 전통에서 무엇을 발견하였으며, 자신들의 종교 전통에서 무엇을 새롭게 발견했는가? 그리고 그러한 발견과 깨달음이 어떻게 우리의 회중들과 일반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욱 새롭고 풍요롭게 해 줄 것인가? 오늘날 어째서 많은 교회들이 이웃종교의 영성을 함께 나누기를 주저하거나 꺼려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현상에 관련된 신학적 · 목회의 문제점들은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없겠는가?
모임이 시작되고 나서 처음 이틀은 참석자들이 서로의 체험을 나누는 일에 할애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 온 힌두교나 불교의 수행방법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불교 사원이나 힌두교 아쉬람에서 상당 기간 동안의 수행 경험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그 모임에 참석한 어느 여인은 언제나 그녀 자신을 힌두 - 가톨릭 신자로 소개하곤 했으며, 더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면서 해방과 발전을 위한 각종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함께 나눈 각자의 영적인 순례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서 풍성한 대화이자 이 모임의 최대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극히 개인적인 영적 순례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수련의 실험으로 구성된 그와 같은 체험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체험들이 과연 회중들의 영성 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겠는가?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영성의 다원성을 인정했다. 그들은 또한 회중들을 위한 성경적·신학적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시행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영적 갱신이란 오로지 사람들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이웃종교의 영성과 의미 있는 접촉을 시도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모임에서는 그룹 토의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참석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제각기 한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를 진행하였다. 첫 번째 그룹은 그리스도인이나 회중들로 하여금 이웃종교의 영성을 체험함으로써 좀 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 그룹에 속한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교우들에게는 이 문제가 거의 논외論外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교우들로서는 자신들의 신앙으로 족했으므로 이웃종교의 영성을 탐구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이웃종교의 영적 수련방법을 통해 그들 자신의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한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시며, 자신들이 속한 세계가 훨씬 더 넓은 세계라는 사실을 확신케 해 주었다. 어떤 이들은 이 기회를 통해 성경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온 어느 참석자는 힌두교에 대한 공부가 자기에게 전혀 새로운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조국이 당면하고 있는 엄청난 문제들이 이웃종교 집단들로부터 고립된 채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고 피력했다.
이 그룹에 속한 참석자들은 사람들에게 이웃종교의 영성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웃종교에 대한 가르침과 직접적인 체험이 아울러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영성의 다원성이라는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해석학과 주석적 전통을 계발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들은 성경의 배타적인 성격을 띤 본문들이 이웃종교에 대한 비난과 대립을 조장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와 같은 본문들에 대한 특별한 주의를 요망했다. 나아가 그들은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새롭게 읽음과 아울러,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그룹은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돈독케 하고 서로의 생각을 기탄없이 나눌 수 있게 하는 모임을 계획성 있게 지속시켜 나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영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가 당면한 신앙과 삶의 문제들을 이웃종교인들과 협력하여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그와 같은 협력이 매우 강력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종교의 축제의식에 참석하거나 거기서 발견되는 상징이나 종교적 관행의 의미를 연구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나 회중들이 이미 이웃종교의 영성수련에 대하여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경우,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깨달음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그룹의 토의 과제였고,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영적수련 방법을 제안했다. 당시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저서들이 거론되었다.

• 파니카Raymond Panikkar의 『베다체험』Vedic Experience
• 그랜트Sara Grant의 『우파니샤드』와 성경 본문에 관한 소책자
• 보이머Bettina Baumer의 『인도영성』에 관한 저서들독어판
• 카다와키의 『선禪과 성경』Zen and the Bible
• 캔터베리 대주교의 『평화를 위한 전진』Progress for Peace

앞으로 우리는 다양한 영적 전통에 속한 경전과 기도문들을 엄선하여 사람들에게 읽힐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종교의 풍성한 영적 전통들을 직접 체험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준비태세를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이나 성자들의 저서를 알아야 함은 물론, 우리 자신의 경건생활을 좀 더 깊이 있게 실천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영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영성과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동료 그리스도인과 대화를 계속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 그룹에 속한 참석자들은 각자의 교구에서 이웃종교의 영성에 대한 그룹 스터디를 시작하고, 몇 주 동안 요가나 선禪을 수련하면서 이웃종교 집단의 종교 행사에 참석하여 그들과 우정을 다져 나 갈 것을 건의하였다. 한편, 그들은 동양의 종교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 특히 서구 사회의 그리스도인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진정한 영성운동과 사이비 영성운동을 구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사람들이 영분별을 정확히 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토의 그룹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리스도인이나 회중들로 하여금 이웃종교인들과 연대하여 사회적 투쟁에 참여케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 참여가 영성의 한 표현 형태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이 토의 그룹에서 도출해 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선 수많은 세상 사람들 특히 제3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을 억누르고 있는 가난과 압제 그리고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보다 더 인간적인 삶을 위한 그들의 정당한 투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곧 그들의 삶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리스도 편에 서는 것을 뜻한다.
이 토의 그룹에 속한 참석자들은 사회적인 연대 투쟁에 관한 자신들의 체험을 기탄없이 나눌 수 있었다. 대체로 그들의 이야기는 교회 또는 교회 관련 집단들, 또는 이웃종교 집단이나 다른 이데올로그 집단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일본, 홍콩, 스리랑카, 인도 등지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주로 소수 민족의 권리, 인권, 토지에 대한 농부들의 권리, 노동자와 도시빈민 그리고 억압당하는 천민계급의 권리,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 및 핵무기와 군비증강 그리고 다국적기업에 대한 반대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소위 ‘급진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독실한 복음주의자들까지도 그러한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예로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 및 개혁 운동, 그리고 한국과 필리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어떤 사회의 억압적인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사회의 대중이 ‘급진적’이거나 ‘복음주의적’이거나를 불문하고 봉기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생명력 있는 신앙과 이념을 지닌 사람들이 이미 정의와 해방 그리고 발전을 위해서 각종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시급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운동의 깊이와 폭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겠는가?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다른 종교나 이념을 지닌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자유와 해방 그리고 발전을 위한 운동을 지지하거나 이끌어 나갈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은 대중들이 사회적인 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사회 참여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계발하여 실시해 나갈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노동자와 농민들, 억압받는 하급계층의 사람들, 피난민과 소수민족들의 고난의 현장을 방문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러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목회 현장에 초대하여 함께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주제로 한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청소년 캠프 및 노동 캠프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사회 참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좀 더 근원적으로 그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이웃종교인들이나 다른 이데올로그의 신봉자들은 물론이려니와 그리스도인도 점차 깨달아 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단순히 제한된 의미에서의 사회봉사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사회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와 해방 그리고 발전이라는 주제를 행동과 반성을 거듭하면서 좀 더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탐색하여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가난과 압제의 원인은 무엇이며,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 어떠한 자원과 방법을 동원해야 할지를 연구·분석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종종 양심회복의 운동과 과정, 혹은 영혼과 정신의 혁명이라고 불린다.
이와 같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영성의 한 표현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경전들은 물론 성경조차도 전혀 새로운 눈으로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거기에 담긴 의미를 훨씬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이러한 사회 참여 운동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서적이나 논문 그리고 정기간행물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도시 아라이 (新井 トシ)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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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계교회협의회(WCC)산하기관인 ‘영적 갱신과 회중생활’(Renewal and Congregational Life)의 간사로 역임했다.
웨슬리 아리아라자(Wesley Ariarajah)는 『타종교의 형제-자매들과 성경』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세계교회협의회 산하 종교간의 대화 관련 기관에서 책임자로 역임했다.
최근작 : <종교간의 대화와 영성>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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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ty in Interfaith Dialogue Paperback – January 1, 1990
by Tosh Arai (Author), Wesley Ariarajan (Editor)

Paperback
from $2.95
https://archive.org/details/spiritualityinin0000unse

"Spirituality in Interfaith Dialogue" was the theme of a consultation which met at the Kansai Seminar House, Kyoto, Japan, from 1 to 5 December 1987. The consultation was jointly sponsored by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Sub-units on Renewal and Congregational Life (RCL) and on Dialogue with People of Living Faiths.... The consultation brought together people belonging in Roman Catholic, Orthodox and Protestant traditions, men and women who had for years lived in dialogue with people of other faiths and, in many instances, shared in depth in the spirituality of these faiths. Its purpose was to explore what such dialogue with and sharing in the spiritualities of other traditions have meant to them personally and to find out whether what they have learned and gained could contribute to the life of ordinary Christians, both as individuals and congregations.

103 pages
Orbis Books
Publisher ‏ : ‎ Orbis Books (January 1, 1990)
Language ‏ : ‎ English
Paperback ‏ : ‎ 10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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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석가를 만나다 - 공(空)의 깨달음과 없이 있는 하나님, 비움과 나눔의 철학 2 
이명권 (지은이)코나투스200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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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쪽
책소개

진리의 도상에서 예수와 석가의 필연적 만남. 예수의 평화와 사랑의 정신은 석가의 평등과 자비 사상에서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와 석가의 만남은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아주 특별한 만남일 수 있다. 서양정신을 예수 속에 다 담아낼 수는 없듯이, 동양정신을 석가 속에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정신의 만남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주 독특한 만남으로 규정될 수 있다. 아직 그 증후는 미미하지만 그것은 분명 창조적 문화의 변형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천 년 후의 역사가가 20세기를 평가할 때 최고의 사건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최초로 만났다는 점’이라고 예언했던 말은 결코, 과장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창조적 만남의 도정(道程)에 나섰다.
목차
머리말_ 예수와 석가의 창조적 만남을 위하여

제1장. 마하(摩訶)와 아하
제2장. 반야(般若)와 믿음
제3장. 바라밀다(波羅蜜多)와 십자가
제4장. 심경(心經)과 성경(聖經)
제5장. 관자재(觀自在)와 여호와
제6장. 보살(菩薩)과 예수
제7장.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와 성도(聖徒)의 길
제8장.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과 하나님 없는 인간
제9장.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과 구원
제10장, 사리자(舍利子)와 예수의 애제자(愛弟子) 요한
제11장.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과 비움과 나눔의 길
제12장.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하나님과 세상
제13장.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와 인식(認識)의 문제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14장.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과 하나님의 여백
제15장. 불생불멸(不生不滅)과 하나님에게 귀의(歸依)
제16장. 불구부정(不垢不淨)과 하나님의 눈, 아가페
제17장. 부증불감(不增不減)과 하나님의 존재 방식, 알파와 오메가
제18장.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과 없이 있는 하나님
제19장.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과 거기 있으며 말하는 하나님
제20장.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제21장.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과 인연(因緣)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
제22장.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제23장. 무무명(無無明)과 구원의 빛
제24장.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과 구원의 길
제25장.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와 영원한 나라
제26장,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과 구원론적 이율배반
제27장.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와 은총의 대문(大門)
제28장.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과 하나님의 어리석음
제29장.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와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제30장.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派羅密多故)와 성도의 직무
제31장. 심무가애(心無가碍)와 자유인의 삶
제32장. 무가애고(無가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와 그리스도의 사랑
제33장.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과 거듭남의 비밀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제34장. 구경열반(究竟涅槃)과 하나님의 나라
제35장.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삼위일체 하나님
제36장.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派羅蜜多故)와 예수의 생존방식
제37장.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褥多羅三?三菩提)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
제38장.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와 십자가와 부활
제39장.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와 십자가의 도(道)
제40장.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와 무상(無上)의 기쁨, 부활의 세계
제41장.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와 하나님의 씨
제42장. 고설(故說)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 즉설주왈(卽說呪曰)과
주기도문(主祈禱文)
제43장. 아제아제(揭諦揭諦) 바라아제(波羅揭諦)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모지사바하(菩提薩婆詞)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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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불교의 마하 체험도 그렇거니와 그리스도교의 아하 체험은 모두가 절대 체험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그 절대 체험은 상대적 가치와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른바 크다, 작다, 높다, 낮다라는 상대적 개념의 판단을 넘어선 초월적 경험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는 반면에 신념체계(belief syste... 더보기
다만 불교에서의 공은 존재의 실상을 말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텅 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에 비해 지금 없기에 비어있다는 그런 상대적인 뜻으로서의 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공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공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오온개공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내재하면 오온충만(五蘊充滿)이 된다. 절대의 세계가 오온과 더불어 하나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신구의(身口意)의 행위는 충만한 행위가 된다. - 본문 47쪽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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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상 - 예수와 만나는 도경  | 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이명권 (지은이)열린서원201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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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하 - 예수와 만나는 덕경

[품절] 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상 - 예수와 만나는 도경

[품절] 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 - 상.하 합본 - 예수와 만나는 도덕경

책소개

노자의 <도덕경> 81장 전문을 해설하고, 이에 더하여 <복음서>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정신과 대비시켜 보았다. 
2,500년 이전의 중국 철학자인 노자와 2천 년 전의 이스라엘의 예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질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화의 상대가 된다. 
특히 노자와 예수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