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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풍류신학, 우리의 얼을 통해 성서에 증거된 복음 이해 : 기독일보 2009

풍류신학, 우리의 얼을 통해 성서에 증거된 복음 이해 : 기독교 : 미주 종교신문1위 : 기독일보


기독교
한인교회
입력 Sep 23, 2009
 
풍류신학, 우리의 얼을 통해 성서에 증거된 복음 이해
한국 토착화 신학의 대가 유동식 박사 강연
기독일보 김준형 기자

유동식 교수가 한국기독교연구소의 초청으로 시카고 지역의 신학교에서 3차례 강연을 한다. 지난 22일 게렛신학교에서 강의하는 유 교수.

“미륵반가사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태극 문양에서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찾는다.”

87세의 노학자는 “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시카고 지역의 청년 후학들에게 신학적 화두를 계속 던졌다. 1960년대 한국 토착화 신학을 주도한 논쟁의 주인공이자 풍류신학, 예술신학 등 신조어를 탄생시킨 장본인 소금(素琴) 유동식 교수가 한국기독교연구소(Center for Study of Korean Christianity)의 창립 2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 “그리스도와 한국문화”에서 3차례에 걸쳐 강의한다.

9월 22일 오후 5시 게렛신학교에서는 “복음과 풍류도-복음적 실존과 한인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강의가 이뤄졌고 이번 기념강연회를 준비한 한국기독교연구소와 게렛신학교, 맥코믹신학교, 시카고신학교의 학생들, 시카고 지역 목회자들이 노학자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이 강의에는 게렛신학교의 타민족 교수들도 관심을 갖고 참석했다.

유 교수는 자신이 토착화 신학을 시작한 이유부터 밝혔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청소년, 청년기를 보내며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한국문화에 관해 거의 배우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신학부터 접하게 됐다. 나중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을 때 그가 접한 한국 문화 유산들은 자연히 한국적 전통보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토착화 신학의 연구물을 내어 놓았을 때 신학계에서도 비판이 거셌지만 민속학자들 역시 ‘본질보다는 기독교 신학적 해석의 연장’이라고 비판해 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현재 우리가 배우고 연구하는 대부분의 신학은 서구의 라틴 문화, 그리스 문화 속에서 해석되어 온 신학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강의는 아시아적 영성에 관해서, 한국적 영성에 관해서다”라고 말했다.

먼저 유 교수는 칠판에 하늘을 상징하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을 그렸다. 그 사각형을 가로지르는 줄을 X 형태로 그어 삼각형 4개를 만들었다. 그는 삼각형에 대해 “사람은 이렇게 땅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는 천지인(天地人)의 개념에서 ‘삼태극’이란 한민족 고유의 문양의 도출해 냈으며 이 삼태극이 한민족의 심성 안에 흐르는 가장 기본적 ‘영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아름다움”이라고 정리했다. 창조할 때마다, 창조를 다 마치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은 멋있었다, 아름다웠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도 이 아름다움이었다. 유 교수에게 이 아름다움은 한국적으로는 “멋”이라는 용어로 각인됐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스리는 것이다.

유 교수는 한민족의 멋이 가장 압축된 예술작품으로 금동 미륵반가사유상을 꼽았다. 현재 대한민국 국보 78호에 지정된 미륵상은 신라 화랑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미륵은 불교의 가르침 속에 있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화랑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청년상이었고 미륵과 동일시 됐기에 미륵반가사유상 역시 화랑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다. 유 교수는 신라의 화랑들이 풍류도를 즐기며 수련했다는 삼국사기의 최치원 난랑비문으로부터 풍류는 자연을 즐기는 멋을 상징하며 자연 안에 깃든 천령(天靈)과 교제하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그의 그 유명한 ‘풍류신학’이 태동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또 “한민족 불교의 큰 영향을 받은 일본에도 금동 미륵상과 동일한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이것을 본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의 표현’이라 극찬했다”면서 “이 아름다움의 극치는 무엇인가? 바로 구원”이라고 단언했다. 약컨데, 그는 미륵상에서 구원의 아름다움을 찾고, 미륵과 동일시 된 화랑이 추구하던 멋을 하나님이 창조시에 지은 멋과 연결시킨다. 그는 미륵상 외에도 다양한 한국문화 예술품에서 기독교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것에서 “예술신학”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멋을 강조하는 풍류도는 기독교 부활신앙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라는 구절에서 부활의 모습을 찾는다.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되는 것이 부활의 모습이며 이것 역시 신과 인간이 하나되는 풍류도의 신인합일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한국의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면서 “한국의 미술사를 살펴 보면 하나님의 빛이 우리 문화에도 비춰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의 얼을 통해 성서에 증거된 복음을 이해하자는 노력을 풍류신학이라 부른다”며 강의를 마쳤다.

다음 강의는 24일 오후 5시 시카고신학교(George Commons)에서 열리는 “동방의 등불-한국 문화의 역사적 사명”, 28일 오후 5시 맥코믹신학교(Common Room)에서 열리는 “장미와 연꽃, 그리고 무궁화-오늘을 사는 영원한 생명의 아름다움” 등이 있다. 3번의 학술강연 후 29일에는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유 교수의 신학전집 출판기념회가 예정돼 있다.

1922년생인 유 교수는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한 후, 배화여고 등에서 교직에 몸담았다 미연합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아 보스턴대학교로 유학했다. 이후 스위스 에큐메니칼 연구원, 일본 도쿄대 등에서 공부했으며 일본 국학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교수, 연세대 신과대 교수 등을 역임하다 은퇴했다.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100살 신학자 유동식 “우리의 혼 풍류도를 발현해 세계인을 열광케 하라”

2021. 1. 20. 10:43ㆍ성인들 가르침/일반좋은글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이가 고통받고 있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일시적 재앙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가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전환의 시기, 우리는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선각자의 혜안을 얻기 위해 휴심정이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인생 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하는 시리즈의 다섯번째 멘토는 풍류신학의 창시자 유동식(99) 교수다.







유동식 교수. 사진 조현 기자



유동식 교수는 황해도 평산 남천에서 태어나 연희전문대를 거쳐 일본 도쿄 동부신학교에 유학 중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한국전쟁 직후 감신대를 거쳐 미국 보스턴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어 감신대와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그는 한국 나이로 100살이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에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연세대 옆 단독주택에서 홀로 산다. 부인 윤정은 전 이화여대 교수가 4년간의 암 투병 끝에 2004년 별세했으니, 사실상 20년 넘게 홀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며 산 셈이다. 그런데도 초인종을 누르자 2층에서 내려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손수 열어줬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운동 삼아 직접 나온다고 한다. ‘원활한 대화와 인터뷰가 가능할까’라는 염려를 일거에 날리고, 무려 3시간 동안 질문에 자세히 답했다.그는 “코로나19 사태가 기독교인에게는 교회라는 공간을 넘어 참 신앙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 전통의 얼을 풍류도로 보고 풍류신학을 연 그는 케이팝의 원류를 풍류도라고 본다. 그는 “춤과 노래와 예술혼인 풍류도를 마음껏 발현하라”고 젊은 세대를 격려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줬던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영어로 줄줄 외웠다. 그러면서 ‘동방의 등불’은 풍류도를 오늘에 알린 최치원이 썼던 말이라고 했다. 다음은 유동식 교수와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왜 풍류도에 천착하게 됐나.

“일제시대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등의식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됐는데, 한국전쟁 이후 미국 유학을 가보니까, 나는 4대째 기독교 모태신앙인데도 내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그들과는 달랐다. 그러다가 일본의 석학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한국과 예술>이란 책을 봤다. 명치유신때 영국에 유학했다가 육로로 돌아오면서 문화 예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수년에 걸쳐 일본에 돌아갔던 그는 석굴암 본존불을 보고 감탄해 무려 7번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일본이 문화적으로는 절대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시대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 우리 전통을 찾다가 <삼국사기>에 나온 최치원의 난랑비문에서 풍류도를 보고, ‘아, 이게 우리민족의 얼’이구나 생각했다.”







유동식 교수가 우리 전통의 얼과 통하는 풍류신학을 형상화해 그린 그림. 사진 조현 기자



-풍류도를 왜 우리 민족의 얼로 보는가.“고운 최치원이 12세 때 당나라 유학을 떠나 과거까지 급제하고 17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너무 어려서 가서 신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유불도를 다 익히고 와보니 신라에 그것이 다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한다. 실로 이는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 모든 중생과 접해 인간화 한다”고 했다. 중국에도 풍류라는 말은 있지만 그것이 도가 된 건 한국뿐이다. 풍류는 멋이다. 그건 서양의 미의식과는 다르다. 한국인은 특유의 미의식이 있어서 인생을 멋있게 살라고 한다. 유불도를 다 통달해야 나오는 멋이다. 그게 한국인의 얼이다.”-풍류도와 기독교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우리나라의 종교를 살펴보니, 불교 천년, 유교 5백년. 다 중국에서 왔다. 그 뿌리를 캐다보니 무교가 있었다. 나는 무속이라고 하지않고 무교라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보면 만주지역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봄, 가을에 여러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게 나온다. 그들의 노래가 무교인(무당)을 통해 전해온게 700여가지나 된다. 난 박사학위를 그 무교로 했다. 무당박사다. 그래서 이단으로 많이 몰렸다. 그런데 이제 풍류신학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때는 그걸 알아야 우리의 얼을 찾겠더라. 불교, 유교도 풍류도를 통해 재해석돼 한국불교, 한국유교가 된것이다. 기독교도 풍류도로 해석되어야 한국인의 마음에 더 깊게 와닿게 된다. 사람 의식은 일이백년에 쉽게 바뀌는게 아니기 때문이다.”-풍류도를 언급한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이 사용한 ‘동방의 등불’이란 말을 어떻게 타고르가 사용했을까.“1922년 3.1운동 여파로 한국인들이 침울하던 때, 당시 동경에는 한인 유학생 400명이 있었다. 이 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다. 인도도 영국의 식민지여서 한국의 3.1운동에 강한 인상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헐버트가 1905년에 낸 <한국역사>라는 영어 책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논문 등을 통해 타고르도 한국 문화와 예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와이엠시에이에 조선인유학생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타고르를 초대했더니 타고르가 와주고 가면서 그 ‘등방의 등불’이란 시를 적어 건네 줬다고 한다. (영어로 시 전문을 외운 뒤). 일제시대 일본은 일등국민이라고 하고, 우릴 멸시해서 얼마나 심한 열등의식 속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그 땐 영어도 잘 못했지만,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방의 등불만은 다 외웠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의해 속국이 되어도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이 되어 우리 말도 마음대로 못쓰고, 성씨도 못쓰게 한 건 일제시대밖에 없다. 지금 아무리 시대가 힘드니, 나쁘니 해도, 그 멸시를 당한 왜정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 때는 도저히 당당할 수가 없었다. 어떤 세상도 왜정시대보다는 낫다.”-한국 풍류도와 일본 무사도의 비교했는데요. 어떻게 다른가?“교토 동지사대학 창립자 니즈마 주기 때마다.외국석학들을 불러 특강을 시키는데, 100주기 때 특강 강사로 나를 초청했다. 그 때 무사도와 풍류도를 주제로 3일간 강의를 했다. 일본인들의 상징은 칼과 거울이다. 그들은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다. 그들은 생선도 날것 그대로 사시미로 먹는다.. 자연 그대로를 음미한다. 그러나 우린 그게 아니다. 우린 있는 걸 몽땅 넣어 비벼먹는다. 복장도 일인들은 바지를 안입고 남녀가 다 치마를 입었다. 해양족들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같은 기마민족들은 바지에 댓잎을 묶는다. 우리처럼 소고기를 많이 먹는 민족도 없다. 말 타던 북방민족의 특성이다. 야생 사냥을 하던 이들이어서 우리만 쇠젖가락을 쓴다. 이웃 민족들은 다 나무젖가락을 쓰는데도 말이다. 옛날엔 담배 쌈지에 칼을 꼿고 다녔다. 사냥하던 전통이 있어서 그랬다. 일본 도쿄대학 교수가 한때 일본인도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본에서 그 설을 막았다. 왜냐면 기마민족설에 따르면 한국민이 월등한게 드러나고 일본인이 열등민족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기마민족의 원시 종교가 바로 무교다. 기마민족은 동서남북 땅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보고 다니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믿는다. 그게 유일신자에겐 하나님이다. 일본사람들은 하느님이란 말이 없다. 천황을 신으로 믿으니까. 유대민족도 유목민의 후손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거의 없는데 우리나라가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것은 원시 종교인 하느님 신앙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싸이와 방탄소년단, 불랙핑크, 이날치밴드에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몇년 전 홍콩의 대학에서 강의해달라고 했을 때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파키스탄까지 밖에 못왔지만 싸이는 말춤으로 세계를 정복했다고 했다. 한민족은 아세아의 독특한 민족이다. 중국이 주변국을 다 먹었다. 위구르족은 종교도 이슬람이고 민족도 전혀 다른데 그곳까지 다 합쳤다. 그런데 조그만 한국은 못합친다. 합쳐지지가 않는다. 그들과는 다른 우리의 독자성이 있기 때문이다. 춤추고 노래하는 풍류도에 세계가 열광하는 것을 보라. 이제 왜정시대 살았던 우리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기 죽을 게 없다. 우리 얼인 풍류의 춤과 노래와 예술로 마음껏 뽐내보라. 그것이 우리 민족의 최고 장점이다.”-한국에서 기독교가 동양에서 가장 크게 꽃피운 것은 고대에 하늘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고대의 무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연결되나.“무속은 3가지를 빈다. 첫째는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제적거리를 하고, 이어 부자 되게 해달라고 대감거리를 하고, 평화롭게 해달라고 성주거리를 한다. 그것이 열두거리의 핵심이다. 오늘날 교회도 오래 살고 부자 되고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빈다. 그러나 그런것만을 목적으로 하면 무속과 다를게 없다. 그런 것을 넘어서 그걸 극복하고 다른 차원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게 종교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너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서로 사랑하고 살자는게 기독교다.”-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전통 종교와 문화를 미신시하는데, 이를 어떻게 보나“하나님은 한 문화, 한 언어로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불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유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나는 부처님도 공자님도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구약의 이사야만 예언자가 아니고. 그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나라를 더 풍요롭게 했다.”-기독교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뭐니뭐니해도 문화적인 현대화다. 선교사들이 들어오자마자 배제, 이화, 배화 등 학교를 세웠기에 한국이 근대화의 첫걸음을 걸었다. 그들이 전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않고 교육과 자선사업을 하고 나중에 홀트가 와서는 고아들까지 돌보았다. 우리의 바탕에 깔린 어려움을 해소해준게 기독교인들이다. 한국 근대화화는 기독교와 뗄래야 뗄수가 없다.”-신학적으로 영향 받은 인물은

“내 신학의 조상은 불투만이다. 불투만. 그의 ‘케리그마와 비신화화’를 처음으로 번역했다. 유럽에 있을 때 그 댁에 찾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영의 세계를 믿는데, 그것을 표현하려면 이 세상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영의 세계를 이 세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신화라고 한다. 희랍신화는 자기들 영적인 세계를 신화로 표현한 것이다.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려면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것을 해석해야한다는게 불트만은 비신화화라고 했다. 가령 죽으면 천당간다고 하면 저 하늘에 천당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천당은 영의 세계다. 복음을 학문적으로 눈 뜨게 한 것이 불투만 교수다. 그 다음에는 문화신학자인 폴틸리히의 영향을 받았다.”







유동식 교수가 젊은 시절 그린 그림. 사진 조현 기자



-영향 받은 한국인은 없었나.“해방 후 학병에서 돌아왔는데 신학교가 다 문을 닫았다. 감신대가 겨우 문을 열었는데, 일본인들이 다 가고나니 교수들이 없었다. 겨우 변홍규 박사 같은 몇 분이 가르쳤다. 다른 분들 강의는 일본에서 강의듣던데 비하면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종로 와이엠시에이 강당에서 일요강좌가 있었다. 주 강사가 유영모, 함석헌이었다. 그 강의가 오후 1시부터 시작하니,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점심도 안먹고 그리 달려갔다. 유영모는 독특한 용어를 써서 잘 못알아들었지만 함석헌은 달변에다가 한국사를 전공해서 한국적인 기독교 해석을 했다. 그 때 신학생들 치고 함석헌 영향을 받지않은 사람이 없었다.”-윤동주 시인과도 인연이 있었나.“연희전문 다닐때 같은 기숙사에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예의가 바르고 점잖은 신사였디. 사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차원이 좀 달랐다. 일찍 깨달은 사람이다. 시의 세계에서 살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 신앙 세계를 깨달은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학생인데 도사였다. 그러니 일반사람들과 막 사귀지않았다. 그 세계에 통해야지 사귈 수 있었을테니까.”-화엄경의 사사무애 법계 등의 불교 이해 등을 책에서도 언급했는데, 어떻게 불교를 공부했나“해방 후 감리교신학교 기숙사에 있을때 이재각이란 룸메이트와 함께 이름있는 외래 강사들을 쫓아다녔다. 그때는 교수들이 시원치않으니, 이름있는 강사들을 서울시내 전역으로 쫓아다녀 듣는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 때 기독교의 함석헌처럼 뛰어난 이가 불교에서 탄허스님이었다. 탄허스님이 젊었을 때였는데 장자 강의를 했다. 남산 아래 사립대학에서 겨울방학에 하루에 두시간씩 했다. 추운 겨울에 강의하는 사람도 용코, 듣는 사람들도 용했다. 학생들이 교파를 막론하고 지식에 굶주려 있을 때라서 낮에 와이엠시에이의 함석헌 강의에 우르르 몰려가고, 밤엔 탄허의 장자강의에 우르르 몰려갔다. 함선생도 기독교지만 동양 고전 통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탄허도 성경을 다 알고있었다. 그걸 들으면서 ‘아 서양 기독교만 있는게 아니구나’나라는 걸 알았다. 그 때부터 점점 뿌리를 캐다가 한국 종교사를 안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장자를 강의하면서 화엄학을 자주 이야기했다. 우린 불행한 세대임에도 그렇게 다른 종교와 사상도 더불어 배워 회통할 수 있는 세대였다. 그게 큰 특징이다. 동양학 강의를 듣는게 성서를 보는 눈에 트는데 큰 도움이 됐다. 영원한 하나님이 진리인 이(理)법계라면, 생활은 사(事)법계다. 영원한 하나님 말씀이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화엄경의 이사무애법계를 모르면 성육신과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이해못한다. 동양학자들이 포착한 도의 극치에 가면 다 통한다. 그게 삼교를 다 포함한다는 풍류도다. 풍류도를 표현한게 예술이다. 외래 종교 사상만 배운 최치원의 고민이 나의 고민과 같았다. 그래서 최치원이 우리 얼인 풍류도의 눈으로 유불도를 봤는데, 나는 풍류도의 눈으로 기독교를 보려고 했다. 그게 풍류신학이다.”-소금이란 호는 무슨 뜻인가.“원래는 호가 소석이었다. 힌돌이란 뜻이다. 전주 남문밖교회 고득순 목사가 지어줬다. 결혼식날을 잡아놨는데 한국전쟁이 터져서 천사원을 설립한 목사인 장인이 안방에서 주례를 해서 그냥 식을 올렸다. 그리고 난리통에 전주에 내려갔다. 고 목사님은 전주의 10대 한학자중 한분이었다. 사서삼경과 성경을 다 외우신 분이었다. 그 분이 소석이란 호를 지어줬는데, 힌돌은 묵시록에 나온 그리스도란 뜻이다. 예수님 발바닥도 못따라가는 내겐 너무 짐스러웠다. 그런데 도연명이 시를 읽다보고, 1년 사시사철 술에 취해 사는 도연명의 호 소금이 마음에 들어서 칠순부터 호를 소금으로 했다. 소금은 거문고를 거문고인데 줄을 달기 전의 거문고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데 제 소리도 제대로 못내는 내게 걸맞는 호라고 생각했다.”-그 시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목사 안수를 받지않았나.=한국전쟁 때 서울이 수복된 뒤 전주에서 돌아와 배화학교 교목으로 가야하는데, 목사가 아니니 종교주임을 했다. 감리교는 예전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금주 서약을 했다. 그런데 군에서 2년간 술을 많이 마셔서 버릇이 됐다. 지금도 여기에 맨 포도주잖아.그러나 과음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술 마신다고 죄 될게 없는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목사 안수를 포기했다. 감신대 신학교 기숙사에 있을때도 룸메이트하고 술도 마시고, 감리교신학교인 미국 보스턴신학교에서도 보니 학생들이 몰래 술을 다 마시고는 있었다. 지금은 안수 때 금주 규정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그때는 그런 규정이 있어서, 술을 못끊을 것 같아서 나를 속일 수 없어 안수를 안받았다.-코로나19 바이러스의 의미는“나는 평생 연세대교회를 다녔는데, 주일날마다 교회 모이는 것이 내 삶의 중심이다. 코로나로 이게 중단돼 버렸다. 그래서 코로나를 마귀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니, 현대판 마귀 아니냐. 일요일날 천안에 사는 아들이 오면 함께 성경 한장 읽고 예배 드린다. 공동체 예배를 회복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지금 고난은 참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며 건성으로 신앙했다. 그런데 남의 소리 듣고 감동 받는 것도 좋지만, 각자의 신앙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거다. 가령 교회에서 무슨 소리인줄도 모르고 주기도문을 외운 사람이 혼자서 한글자 한글자 생각하게 될수 있다.”-건강 비결은.

“사람들이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자주 묻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시니 사는 것이다. 가난한 왜정시대에 학병 끌려가 죽을뻔했고, 한국전쟁때도 죽을 뻔 한 것을 살려주신 구원의 역사에 감사한다. 1남1녀를 뒀는데, 딸은 일찌기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먼저 세상을 떴고, 천안에서 건축업을 하며 사는 아들이 한주일에 한번씩 먹을 걸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30분 하고, 기도를 한 뒤에 생식을 두유에 타서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아침 8시가 된다. 평생 그렇게 산다”







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유동식 교수. 사진 조현 기자



-100세신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저사람(부인)이 암 4년을 앓고 세상을 뜨면서 19개의 시를 썼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내다보면서 쓴 19번째 시가 ‘제3의 생일’이다. ‘육체로 태어나게 해준 생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번째는 세례를 받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나한테는 아주 감동이다. 죽음이 바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을 생일로 본거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외로움은 어떻게 극복하나.“사람들이 그걸 많이 물어보는데, 난 외로운걸 모른다. 저사람이 갔어도 내가 혼자 있다는 생각이 안든다. 저 사람이 시로 읊었지만 하늘나라에 살아있어서 거기서 여기 들락날락하고, 나는 여기서 거기를 들락날락하니, 혼자 있다는 생긱이 들지않는다.”

-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 휴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