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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07 마성스님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불교평론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특집/ 동남아 불교의 재인식

[33호] 2007년 12월 12일 (수) 마성(摩聖) 

ripl@ripl.or.kr

 

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1. 머리말



불교에는 크게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두 흐름이 있다. 남전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곳을 근거로 하여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다. 북전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고,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전자를 남방불교 혹은 상좌불교(上座佛敎, Therav?da)라 하고, 후자를 북방불교 혹은 대승불교(大乘佛敎, Mah?y?na)라고 부른다. 상좌불교는 팔리어로 전승되어 온 팔리문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따라서 ‘남방불교’, ‘상좌불교’, ‘상좌부 불교’, ‘남방 상좌부 불교’라는 명칭들은 모두 남전의 불교를 일컫는 동일한 용어들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을 짧게 줄여 ‘상좌불교’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용어로 통일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일부이고, 대승불교 국가는 중국·한국·일본·몽골·티베트·네팔 등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불교도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상좌불교를 소승(小乘, H?nay?na)이라고 업신여겨 왔다. 엄격히 말해서 현재의 테라와다(Therav?da, 上座部)는 히나야나(H?nay?na, 小乘)가 아니다. 테라와다(상좌부)는 히나야나(소승)와 마하야나(대승)라는 두 술어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승불교도들이 소승이라고 폄하한 것은 부파불교를 가리킨 것인데, 이러한 소승부파는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 동안 멸시해 온 상좌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와 아울러 교통과 통신 및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불교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상좌불교도 역시 대승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는 동남아 상좌불교에 관한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불교평론>에서는 ‘상좌부 불교의 이해’라는 특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자도 두 전통의 불교를 비교한 논문들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는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상좌불교의 역사와 전통



1) 상좌부의 기원과 의미



상좌부(上座部)라는 단어는 팔리어 테라와다(Therav?da)를 번역한 말이다. 테라와다는 테라(thera, 장로들)와 와다(v?da, 말씀 혹은 교리)의 합성어이다. 그 의미는 ‘장로들의 교의(敎義)’라는 뜻이다. 이 부파는 팔리삼장(三藏, Tipi?aka)에 토대를 두고 있다. 수세기 동안 상좌부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늘날 상좌불교도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1억이 넘는다.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 등 서양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재의 상좌부의 뿌리는 불멸 직후에 개최되었던 제1결집 시기에까지 소급된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테라와다’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리랑카의 고대 년대기인 ??D?pava?sa(島史, 4세기)??와 ??Mah?va?sa(大史, 5세기)?? 및 Samantap?s?dik?(一切善見律註, 율장의 주석서)??에 의하면, ‘Therav?da’, ‘Theriya’, ‘Therika’라는 용어는 붓다 입멸 3개월 후 라자가하(R?jagaha, 王舍城)에서 개최된 제1결집 이후 처음으로 불교사에 소개되었다. 붓다의 직제자였던 500명의 아라한들이 참석했고, 마하깟싸빠(Mah?- kassapa, 大迦葉) 장로가 의장을 맡았던 이 결집에서 붓다의 전체 가르침인 법(法)과 율(律)이 7개월 동안 암송되었고, 스승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만장일치로 수용되었다. 이 결집에서 승인되고 동의되었던 것이 ‘Therav?da(장로들의 교의)’, ‘Theriya’, ‘Therika(장로들의 전통)’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는 제1결집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이때 이미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상좌불교도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종가(宗家)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오늘날 현존하는 동남아 상좌불교는 부파로서의 상좌부가 아니라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원래의 불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좌부는 역사적으로는 근본분열 이후에 성립된 부파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2)부파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



상가(Sa?gha, 僧伽)는 출가 수행자 집단을 말하며, 화합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서나 갈등과 다툼은 있기 마련이다. 붓다 재세시에도 꼬삼비(Kosamb?) 비구들의 분쟁이 있었다. 이 분쟁은 지율자(持律者, vinayadhara)와 지법자(持法者, dhammadhara) 사이의 다툼이었다.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툼을 즉각 중지하라고 훈계했으나 그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붓다는 그곳을 떠나버렸다. 나중에는 재가신자들이 이 사건에 개입하여 겨우 수습하였다. 한편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는 엄격한 계율주의로 승단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승인 붓다를 등지고 승단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이와 같이 붓다시대에도 승단 내부의 갈등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상 승단이 분열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붓다의 높은 인격과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 입멸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단이 확대되고 출가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리와 계율의 해석에 있어서 의견의 대립이 생겨 결국 분열하게 되었다.



붓다 입멸 후 100년경 원래의 불교승단은 두 파로 분열되었다. 이 두 파는 각각 다시 분열을 되풀이 하여 마침내 20부파로 세분되었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분열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하고, 그 이후의 분열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최초의 분열은 제2결집으로 알려진 웨살리(Ves?l?, Sk. Vai??l?) 결집과 연관되어 있다. 그 원인은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십사(十事)를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결집에서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주장한 열 가지 사항은 비법(非法)이라고 판정되었다.



하지만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별도로 모임을 갖고 대승가(大僧伽, Mah?sa?gha) 혹은 대중부(大衆部, Mah?sa?ghika)로 알려진 새로운 승단을 조직했다. 이 부파의 이름은 ‘많은 무리의 승려들(大會衆)’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승단은 크게 정통파와 비정통파 혹은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누어졌으며, 그 후 다시 분열을 거듭하여 18부파 혹은 20부파가 되었다.



20부파 가운데 원래의 상좌부는 가장 보수적이었는데, 그들의 교설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티베트 전통에 의하면 웃자인(Ujjain, Ujjeni)에 속하는 마하깟짜야나(Mah?kacc?yana, 大迦?延)가 상좌부를 창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리 전통에 따르면 우빨리(Up?li, 優波離)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빠딸리뿟따(P??aliputta, 華氏城)를 그들의 첫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그들은 점차적으로 꼬삼비(Kosamb?), 아완띠(Avanti), 웃제니(Ujjeni)와 인도 서쪽의 다른 장소들에 정착했다. 사르나트(s?rn?th)의 비문에는 초기에 사르나트에 상좌부의 교도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꼰다(N?g?rjunako??a) 비문에도 상좌부의 교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상좌부의 교도들은 서인도로부터 남인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남인도의 깐찌(K??ci)에서 매우 널리 성행되었다. 얼마 후 이곳은 상좌부 교도들의 중요한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3) 제3결집과 전도사 파견



부파분열 후 다시 100년이 경과한 뒤, 아쇼까(A?oka)왕 재위 기간에 제3결집이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법과 율의 양면으로 비정통파의 견해를 가진 많은 비불교도들이 불교 승려가 되어 승단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포살 의식이 약 7년간 빠딸리뿟따(P??aliputta)에서 실행되지 못했다.



아쇼까왕은 당시 가장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와 상의하여 많은 비정통파 승려들을 승단에서 추방시켰으며, 그들의 이단적인 견해들을 진압시켰다. 왕은 가능한 한 승단에서 계율을 유지하고 승단을 정화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 결집은 목갈리뿟따 띳사의 지도력 아래 빠딸리뿟따에서 오직 정통파 승려들에 의해 개최되었다. 아쇼까왕은 결집을 비호했고, 정통파 승려들을 지지했다. 제3결집은 9개월간 개최되었다. 목갈리뿟따 띳사는 결집에서 결론을 도출한 후 아쇼까왕의 후원 아래 불교의 전래와 발전, 그리고 전파를 위해 다른 9개국에 종교적 전도단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전도사와 지역 혹은 나라 이름은 다음과 같다.



①맛잔띠까(Majjhantika, 末單提)는 캐시미르(K??m?ra)와 간다라(Gandh?ra)에, ②마하데와(Mah?deva, 大天)는 마히삼만달라(Mahisama??ala)에, ③락키따(Rakkhita)는 와나와시(Vanav?s?)에, ④담마락키따(Dhammarakkhita)는 아빠란따까(Apar?ntaka)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리스인이었다고 한다. ⑤마하담마락키따(Mah?dhammarakkhita)는 마하랏타(Mah?ra??ha)에, ⑥맛지마(Majjhima)는 히마완따빠데사(Himavantapadesa)에, ⑦소나(So?a)와 웃따라(Uttara)는 수완나부미(Suva??abh?mi, 金地國)에, ⑧마힌다(Mahinda)는 땀바빤니(Tambapa??i, La?k?d?pa)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맛잔띠까는 캐시미르와 간다라 두 곳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도합 9개국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일론에는 아쇼까왕의 친아들 마힌다 장로가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일론의 전승에 따르면,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지시로 아쇼까왕은 불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까지는 단지 필요한 것을 보시하는 자(paccayad?yaka)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황제 자신이 불법의 상속자(s?sanad?y?da)가 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따(Sa?ghamitta)를 승단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승단에 들어온 마힌다와 상가밋따를 특별히 세일론으로 파견한 것은 당시 인도의 아쇼까왕과 세일론의 데와남삐야 띳사(Dev?nampiya Tissa, B.C. 247-207 재위)왕 사이의 각별한 친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3결집 기간과 이 결집 이후 목갈리뿟따 띳사에 의해 9개국의 다른 나라로 종교의 전도단을 파견한 것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불교의 승려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포교하기 위해 외국에 간 것은 역사상 최초이기 때문이었다. 제3결집은 세일론, 미얀마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상좌부라는 형태의 불교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아쇼까왕에 의해 파견된 불교 승려들에 의해서 세일론과 동남아시아에 전래되었다. 상좌부가 세일론에 전래된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상좌부 불교의 본부가 되었으며, 거기서부터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크게 번성했다. 인도에서 상좌부가 사라진 이후 중요한 본부로서 세일론은 상좌부 형태의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3. 동남아 상좌불교의 현황



현재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상좌불교 국가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이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앞의 세 나라에 비하면 그 세력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동남아의 상좌불교는 근본적으로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각국의 전통과 역사에 따라 그 특징이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이 다르다. 동남아 3국의 불교 현황을 살펴보자.



1) 스리랑카의 불교



세일론(현재 스리랑카)의 불교 개교(開敎)는 아쇼까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에 의해 비롯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왕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는 마힌다에게 귀의하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아누라다뿌라(Anur?dhapura)에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를 건립하였다.



또한 아쇼까왕의 딸 상가밋따(Sa?ghamitt?) 비구니는 마가다의 붓다 성도지로부터 보리수를 이식하였다. 어쨌든 아쇼까왕 당시 세일론에 불교가 초전(初傳)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할 수 있다. 세일론에서 발견된 오래된 각문(刻文)에는 아쇼까왕 시대의 문자와 매우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이 섬에서 전개된 불교는 수많은 성쇠의 변천을 겪어왔다. 띳사 왕 후 200년 정도 지나 둣타가마니(Du??hag?ma??)왕이 출현하여 도시 근교에 마리짜왓띠(Maricava??i) 사찰을 지어 승단에 바쳤으며 여러 가지 탑(塔)도 세웠다.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왓따가마니 아바야(Va??ag?ma?? Abhaya)왕 때 그의 귀의를 받은 마하띳사(Mah?tissa) 장로는 왕이 바친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 vih?ra, 無畏山寺)에 머무르면서 또 다른 부파를 세웠다. 이로써 세일론의 불교는 대사파(大寺派)와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또 그때까지 구송(口誦)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삼장(三藏)을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존하는 팔리문헌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3세기 중엽 고타바야(Go?h?bhaya)왕 때 ‘닥키나 위하라(Dakkhi?a vih?ra, 南寺)’가 독립하였다. 이 파는 후에 제따와나 위하라(Jetavana vih?ra, 祇陀林寺)라고도 불리어졌으며, 4세기에서부터 5세기 초기에 걸쳐 크게 번성한 반면 대사파는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5세기에 들어와 대사파에는 유명한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를 비롯한 주석가들이 나타나 많은 주석서들을 남겼다. 이 무렵 대사파의 세력은 옛날 같지는 않았지만 상좌부의 정통을 고수하려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다.



요컨대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 장로가 세일론에 상좌불교를 전래시켰으며, 거기에서 상좌불교를 굳건하게 설립했다. 세일론의 마하위하라(Mah?vih?ra, 大寺)는 상좌불교의 최고 중심지가 되었다. 상좌불교도들은 세일론에서 테라와딘(Therav?din, 上座部敎徒), 위밧자와딘(Vibhajjav?din, 分別說部敎徒)로 알려졌다. 그러나 ??까타왓투(Kath?vatthu, 論事)??는 스타위라와다(Sthavirav?da) 혹은 위밧자와다(Vibhajjav?da) 대신 사까와다(Sakav?da)라는 용어가 적합하다고 했다. 상좌부 혹은 분별설부는 나중에 제따와니야(Jetavaniya, 祇陀林寺派), 아바야기리와신(Abhayagiriv?sin, 無畏山寺派), 마하위하라와신(Mah?vih?rav?sin, 大寺派)이라는 세 부파로 분열되었다.



그 후 스리랑카는 450여 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포르투갈(1505-1658)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네덜란드(1658-1796)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리고 영국(1796-1948)의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불교사원은 피폐해졌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른바 씨암파(Siam-nik?ya)·아마라뿌라파(Amarapura-nik?ya)·라만냐파(R?ma??a-nik?ya)가 그것이다. 이 세 종파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암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빨리(Up?li) 장로가 비구 25명과 함께 스리랑카로 와서 구족계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씨암파는 다시 아스기리야(Asgiriya)와 말왓따(Malwatta)로 양분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을 두고 있다.



 아라마뿌라파는 씨암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만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 일단의 스리랑카 스님들이 버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10,035개이고, 승려의 총 숫자는 32,715명이며, 이 중에서 비구는 15,397명이고 사미는 17,318명이다.



2) 태국의 불교



태국의 불교 역사는 곧 태국(Thailand)의 국가 역사이다. 국가·불교·왕은 하나 속의 셋(Trinity or Three in one)으로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불교는 국가의 종교, 즉 국교는 아니지만 불교 전래 이후 깊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태국의 불교 전래 시기는 둘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아쇼까왕이 소나(So?a)와 웃따라(Uttrara)를 수완나부미(Suva??abh?mi, 지금의 Nakon Pathom)에 파견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스리랑카의 불교가 씨암의 첫 번째 통일국가의 수도였던 수코타이(Sukhothai)에 전해졌을 때였다. 태국의 상가는 세 가지 원칙, 즉 계율과 승가법, 그리고 타이의 관습을 준수한다.



현재 태국에는 2개의 상좌부 종파가 있다. 이른바 ‘마하니까야(Mah? Nik?ya)’와 ‘담마유트니까야(Dhammayut Nik?ya)’가 그것이다. 마하니까야는 수코타이 왕조시대에 스리랑카의 승려들에 의해 성립된 승가와 연계되어 있는 다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후에 왕이 된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자가 1833년 설립한 소수파이다. 담마유트니까야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작은 규모의 승단이다. 몽쿠트 왕은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가법(Sa?gha Act)’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의 승가법은 1902년에 제정되었으며, 1941년에 제2차 개정되었고, 1962년에 제3차 개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99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태국불교의 두 중요한 전통, 즉 중국과 베트남계의 대승불교와 마하니까야와 담마유트니까야의 상좌불교는 승가법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다만 승왕(僧王, Supreme Patriarch, Sa?ghar?ja)은 왕이 상좌부 중에서 한 명을 임명하는데, 종신제이다. 태국 승가의 중요한 정책은 ‘최고승가회의(Supreme Sa?gha Council)’ 혹은 ‘대장로회의(Mah?thera Sam?khom)’라고 하는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된다. 이 회의는 8명의 종신회원과 승왕이 임명한 순환회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태국의 승려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상가법’에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 점은 태국과 다르다. 태국 불교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국의 불교교육은 크게 교리학습과 팔리학습으로 구분된다. 교리학습은 3단계로 되어 있고, 팔리학습은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태국어로 가르치는 3단계의 교리학습은 비구와 사미를 위한 기본 교육으로 기획되었다. 팔리학습은 태국어를 팔리어로 팔리어를 태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배운다. 9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왕의 지원과 함께 학사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많은 승려들은 이 시험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팔리시험에 응시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승가에서는 팔리학습의 최고 단계를 박사학위와 동등하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태국의 현대 불교교육은 두 파에서 운영하고 있는 두 개의 불교대학에서 담당하고 있다. 마하니까야의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Mahachulalonkornrajavidyalaya University, MCU)와 담마유트니까야의 마하마쿠트 대학교(Mahamakut University)이다. 두 대학은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국립이다. 두 대학 모두 승려와 재가불자 모두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학사에서 박사과정까지 개설되어 있다.



 특히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는 4개의 단과대학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태국 내에 10개의 캠퍼스와 10개의 교육센터(학습장)가 있다. 그리고 한국·대만·싱가포르 등 3국에 자매학교를 두고 있다. 태국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2년 현재 6300만 인구 중 94%가 불교도이고, 32,000개의 사원이 있고, 265,965명의 비구, 87,695명의 사미가 있다.



3) 미얀마의 불교



미얀마의 공식 국가명은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이다. 미얀마는 1989년 5월 27일 국명을 ‘버마(Burma)’에서 ‘미얀마(Myanmar)’로 바꾸었다. 미얀마라는 명칭은 17세기경부터 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미얀마 국명은 범어 Brahma-de?a(‘범천의 국토’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11세기 중엽 상부 미얀마의 파간(P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에 의한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버마족의 영웅 아나와라따(Anawrata 또는 Anuruddha, 1044~1077년 재위, ‘아노야타’라고도 함)왕은 하부 미얀마의 몬족의 나라 타톤(Thaton)을 공격하여, 그곳으로부터 500명의 상좌부 승려를 팔리어 삼장(三藏)과 함께 파간으로 데려와서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 후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 Mah?vih?ra)로 승려를 보내어 대사파 전승의 상좌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파간 왕국은 13세기말(1287년) 몽고(元)의 쿠빌라이 칸(Kublai Khan)에 의해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5천여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면서 상좌부 불교를 발전시켰다.



파간 왕국 멸망 후 200여 년간의 혼란기를 거쳐서 15세기 후반에 몬족 출신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남부 미얀마의 페구(Pegu)를 중심으로 페구 왕조를 일으킨다. 담마쩨디왕은 1475년 스리랑카로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다시 스리랑카 대사파의 상좌불교의 올바른 계율의 맥을 도입하여, 당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의 승단을 통일한다.



 이로써 미얀마는 파간 왕조의 아노야타왕에 이어 두 번째로 상좌불교의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얀마 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미얀마 불교는 16세기의 법난을 거쳐 17세기에는 가사의 착의법을 둘러싸고 승단의 정통성 문제가 생겼다. 즉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 때 가사로 어깨를 가려야 하는가 한쪽만 가려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승단은 편단파(偏袒派)와 통견파(通肩派)로 분열하여 18세기에 그 정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왕은 보도파야(Bodawpaya, 1782-1819)왕이다. 그의 종교 정책은 ⑴ 미얀마의 상좌부를 통견파로 통일하고 ⑵ 종교정화위원회를 설치하여 승단을 정비하려고 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의 낮은 카스트의 사미의 수계를 위해서 스리랑카의 사미 몇 명을 당시의 수도 아마라뿌라에 불러 비구계를 받게 하였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돌아가서 아마라뿌라파를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보도파야왕에 의해 시도된 승단의 조직 체제 정비는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Mindon, 1852-1877)왕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다. 민돈 왕은 8명의 학식 있는 장로로 형성된 종교회의소를 수도 만달레이(Mandalai)에 두고 상좌부 승려와 사원을 지도하고 감독하도록 하였다. 1871년 민돈왕은 상좌부 제5차 결집을 개최해서 2,400명의 승려가 만달레이에 모여 팔리삼장과 주석서를 정비, 편찬하여 대리석 729매에 새겨서 만달레이의 쿠토도(Kuthodo)탑에 보관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식민지 등의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승단 내에서 자체 정화를 위해서 몇몇 종파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종파가 쉐진(shwegyin)파, 드와라(Dwara)파, 켓트윈(Hugettwin)파이다. 민돈왕의 종교회의(Thudhamma)에 기인하는 투담마파는 위의 세 파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승단 내부의 문제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민돈왕이 중재에 나서서 위의 세 파를 인정하게 되었다. 위의 세 파는 하부 미얀마에서 활동하였는데, 계율을 엄수하고 스승과 제자간의 복종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세 파의 활동에 자극받아 상부 미얀마의 승단도 정화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고승들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 시험 제도는 왕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영국 식민지 시대에도 1895년부터 46년간 계속되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하였다. 독립 후 초대 수상인 우 누(U Nu)는 승단 및 불교 진흥을 위해서 많은 개혁을 하였다. 1954년~56년까지 거행했던 제6차 결집은 불멸 2,500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된 불교진흥 사업의 하나였다. 1962년 네 윈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정교(政敎) 분리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팔리 국가시험의 실시, 불탑의 보수 등의 불교진흥을 위한 사업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얀마 전 종파 합동 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와 정치적 문제, 종교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전 9종파를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 등록제와 신분의 규정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 팔리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시험과 사설시험이다. 팔리 사설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s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상좌부 불교도이고, 이슬람이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미얀마 고유의 정영(精靈, nat) 신앙이 1.2% 기타가 0.1%이다. 미얀마는 종교 인구 분포에서 알 수 있듯이 스리랑카·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과 더불어 상좌부 불교 국가임을 알 수 있다.



1995년의 미얀마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미얀마에는 전체 승려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Sudhamma? or Thudhamma)파와 8%를 차지하는 쉐진파(Shwegyin)를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상좌부 종파가 있으며, 미얀마의 승려 수는 비구가 162,195명, 사미가 234,595명으로 총 396,790명이다. 통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성 출가자(thira-shin)의 수는 3만 또는 9만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미얀마도 태국과 같이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의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사미계를 받고 절에서 생활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다.



현재 상좌불교 국가 중에서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는 미얀마이다. 전국 각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명상센터(Meditation Center)가 있고, 이곳에서 다양한 수행법들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상좌불교 국가보다 두드러진 현상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유래된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에 전해진 상좌부는 그곳에서 교의를 정비한 다음 벵갈만을 건너 동남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후일 스리랑카 불교가 유럽의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로 인해 쇠퇴하자, 이번에는 동남아시아가 스리랑카 불교의 재건을 도왔다. 이처럼 상좌불교의 역사는 서로 돕고 보완하는 종교교류의 역사였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11세기에 위자야바후(Vijayab?hu) 1세가 버마의 아노야타왕의 도움을 받아서 법통을 계승하였다. 반대로 13세기가 되어 버마의 파간 왕조가 멸망함으로써 버마의 상좌부도 함께 쇠퇴하고 만다. 그리하여 페구 왕조의 담마쩨디(Dhammacedi, 1472-1492 재위)왕은 1476년에 비구와 사미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콜롬보 교외의 깔야니(Kaly???)(지금의 Kala?iya)에서 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이 왕이 깔야니(Kaly???) 비문을 남겨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버마 상좌부의 주류는 이때 전해진 것이다.



또한 스리랑카는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에 의해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불교도 이때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후반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쇠퇴해 가던 상가에 새로운 정통성과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태국에서도 라마 캄헹(R?ma Khamheng, 1275-1317)왕이 13세기에 비구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당시 대사파로 통일되어 있던 스리랑카의 불교계로부터 다시 정통적 상좌부 불교를 수입하였다. 이것이 태국의 마하니까야(Mah? Nikaya)이다.



버마에서는 11세기 중엽에 아노야타왕이 출현하여 남부 버마의 몬족(族)을 정복하여 파간에 수도를 정하고 몬족을 통해 알게 된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제정했다. 타이에서는 13세기 중엽에 수코타이 왕조의 제2대인 라마 캄헨왕이 스리랑카계의 불교를 국교화(國敎化) 하였다.



 또 캄보디아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종교가 오랫동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9세기에 이루어진 앙코르왓트(Angkor Wat)의 장엄한 불교 유적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다가 자야와르만(Jayavarman, 1181-1218 재위) 7세 때인 1181년에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 앙코르 왕조가 태국인들의 세력에 의하여 붕괴되자, 캄보디아에는 상좌부 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상좌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남방 상좌부라는 한 계통으로만 발전되어 온 것은 아니다. 동남아시아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인도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인도문화가 들어왔다. 이를테면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들이 도입되었다. 일종의 혼돈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상좌부 불교로 정비되었다. 그 이면에는 각각 그 지방이나 나라에서 상좌부 불교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국교적인 위치를 공고히 해 준 뛰어난 국왕의 힘이 밑받침되었다. 현재의 동남아 상좌불교는 그 나라에서 국교(國敎)는 아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보호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성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초기불교 인간관 연구(Man in Buddhist Perspective)’로 부(副)철학박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 불교학과 강사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달라야대학교 한국분교를 비롯한 각종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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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2] 마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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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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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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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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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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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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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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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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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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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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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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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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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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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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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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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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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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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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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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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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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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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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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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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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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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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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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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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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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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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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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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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기 (興起) [명사] 1. 떨치고 일어남. 2. 세력이 왕성해짐. 3. 의기(義氣)가 일어남.
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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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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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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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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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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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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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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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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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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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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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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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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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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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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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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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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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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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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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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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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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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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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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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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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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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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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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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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 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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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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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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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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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교-론 護敎論 noun
1. 종교 일반 종교의 비합리성ㆍ비과학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종교는 초이성(超理性)인 것이지 반이성(反理性)은 아니라고 설명하는 학문. 신학의 한 분야이다. 종교, 계시 및 기독교의 기초를 이성에 의하여 설명한다.

호교론 [ Apologetics, 護敎論 ] 철학사전

변증론이라고도 한다. 2세기에 기독교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역설한 신학자들의 주장이 특히 이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이에 한정되지 않고 신학 중의 한 부분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 그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 변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가톨릭교, 그리스정교회의 신학에는 수용되어 있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이를 배척한다.

호교론이 과제로 삼아 논하는 것은 신의 존재의 증명, 영혼불멸, 기적, 예언을 포함한 성스러운 계시에 대한 가르침, 종교 반대론의 분석이나 이단 신앙의 신학적 분석 등이다. 이 입장에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 즉 근본적인 종교적 도그마는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이성에 호소하여 그 합리성을 입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형식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비합리적이다. 따라서 호교론이 설명하는 바는 궤변일 수밖에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교론 [Apologetics, 護敎論] (철학사전, 2009)
 
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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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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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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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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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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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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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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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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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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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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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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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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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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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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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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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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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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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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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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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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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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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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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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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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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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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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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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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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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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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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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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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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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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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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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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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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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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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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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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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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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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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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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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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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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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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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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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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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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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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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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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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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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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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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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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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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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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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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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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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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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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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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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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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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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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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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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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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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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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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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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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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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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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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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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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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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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http://www.ripl.or.kr/

RIPL.OR.KR

팔리문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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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기억력이 비교적 좋다고 소문난 이들 약 5백여명이 부처님 사후 모여 서로가 기억하는 부처님과의 일화를 대조, 기억이 일치되는 부분을 운문형식으로 확정하여 노래처럼 부르며 전파합니다. (글로 남기면 권력자의 정치적 목적 등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있어서요.) 이런 결집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3차 결집까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토씨 하나까지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면, 영역본으로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그 긴긴 텍스트를 수천 명이 동시에 순서대로도 외우고, 맨 뒷단어에서부터 거꾸로도 외우고, 한 단어씩 건너 뒤면서도 앞뒤로 외우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보존합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문자로 기억되는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된 다른 판본들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게 됩니다.
    암튼, 경전의 성립과정이 이렇다 보니, 경전의 내용도 제자들이 결집하여 기억을 기술한 그대로입니다. "이러저러한 날 이러저러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누구누구가 와서 이런 질문을 했고,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이들,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무수한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재창작하여 기록하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구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죠. 읽는 이들은 당연히, 그 내용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구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불교발전의 역사를 모르면 엄청 헷갈리고 엉뚱한 삽질을 하게 됩니다.)
    위의 2.2. 단락은 대승경전의 이 integrity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대승경전 중에도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많습니다만, 그 자체로 철학이라 볼 수는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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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 주장들 중의 하나.. 불교는 애초에 '기복이나 대중 위로/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기보다 각 개개인을 위한 수양방법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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増谷文雄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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増谷 文雄(ますたに ふみお、1902年2月16日 - 1987年12月6日)は日本の仏教学者、翻訳家。福岡県小倉市(現・北九州市小倉)生まれ。


目次
1 経歴・人物
2 主な著書・編著
2.1 論文
3 関連項目
4 注釈・出典


経歴・人物
第五高等学校を経て、東京帝国大学文学部宗教学科卒業。浜松高等工業学校、東京外国語大学教授、東京大学・立教大学・東京教育大学の各講師、大正大学教授、都留文科大学学長などを務めた。

角川書店に著作集全12巻がある。原始仏教関係では博士論文「アーガマ資料による佛伝の研究」、著書「根本仏教の研究」等、親鸞や道元研究で「正法眼蔵」訳注が著名。著訳書は新装版での再刊も含めると約80冊以上出されている。

戦前に数冊、オックスフォード大学の宗教学者エストリン・カーペンター(Estlin Joseph Carpenter 1844~1927)を訳し、早くから宗教思想史・比較宗教学からの仏教論考・仏伝を著している。NHKラジオ等で講義や、講演を積極的に行っていた。

関係者による評伝に、荒木稔惠『西洋からの仏教を耕した人 明治維新と宗教、そして増谷文雄博士』(風濤社、2004年)がある。

主な著書・編著
増谷文雄著作集 全12巻(角川書店 1981-1982年)
東洋思想
仏教とキリスト教
仏陀時代
根本仏教の研究
仏陀の伝記 資料の研究
仏陀の伝記 仏伝のこころみ
仏教概論
日本人の仏教
宗教的随想
親鸞
道元
近代の宗教的生活者
阿含経典 全6巻(筑摩書房 1987年)→新版 ちくま学芸文庫 全3巻、2012年
「阿含経典」を読む 全4巻(角川書店 1985年)
阿含経典による仏教の根本聖典(大蔵出版 1983年、新版1993年)
根本仏教 阿含経典講義 (筑摩書房 1980年)
旧版「原初経典 阿含経」(筑摩書房「私の古典」 1970年)
無量寿経講話 (新版 講談社学術文庫 2002年)
正法眼蔵 各・全8巻(角川書店/講談社学術文庫 2004-05年)
根本仏教と大乗仏教(佼成出版社 1989年)
仏教講義 根本仏教と大乗仏教の会通を語る(新版 同 2005年)
この人を見よ ブッダ・ゴータマの生涯(名著選1・佼成出版社 2006年)
「ブッダ・ゴータマの弟子たち」を併収。初版は各講談社
親鸞の生涯、歎異抄、親鸞の思想(名著選2・佼成出版社 2006年)
「日本の思想3 親鸞集」(編・訳注、筑摩書房、1969年)
「日本の仏教思想 親鸞」(筑摩書房、1985年)新装版
歎異抄(ちくま学芸文庫 1993年)、旧版・筑摩叢書、1968年
知恵と慈悲<ブッダ 仏教の思想1>
絶望と歓喜<親鸞 仏教の思想10>
梅原猛と共著、(角川書店)、新版 角川文庫ソフィア、1996年
仏教日常辞典(金岡秀友と共編著、太陽出版)
仏陀 その生涯と思想 (角川選書(新版)、1971年、新装版1988年)、初刊は角川新書
仏陀のことば(角川選書 1971年)、新装版1988年
日本人の仏教(角川選書 1981年)
現代仏教入門(角川選書 1980年)
仏教百話(ちくま文庫 1985年)、初刊は筑摩書房:新書判シリーズ、1962年
日本の仏教10 仏祖正伝の道 正法眼蔵〈道元〉(筑摩書房 1967年)
現代人の仏教1 智慧と愛のことば・阿含経(筑摩書房 1965年)
現代人の仏教12 仏教概論(筑摩書房 1966年)
仏教とキリスト教の比較研究(筑摩叢書 新版1985年)、旧版は青山書院ほか
釈尊のさとり(講談社学術文庫 1979年) 講演録
友情について(講談社現代新書 1974年)
業と宿業 新しい自己の発見のために(講談社現代新書 1979年)
新しい仏教のこころ わたしの仏教概論(講談社現代新書 1978年)
論文
INBUDS>増谷文雄
関連項目
在家仏教協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