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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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19 조회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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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이와 같이 카르마 요가를 닦음에 의하여 이 세계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사람들과 그와는 반대로 세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어째서 생기느냐 하는 문제가 자연 일어나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인 “각 사람의 천성에 의하여서”라는 말을 앞의 제7장에서 했다. 그런데 그 3성, 즉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14장에서 했다. 이제 이 장에서는 그 세 성 때문에 어떻게 여러 가지의 신앙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말한 다음 전체의 제목인 즈나나 비즈나나의 설명으로 이 장 끝을 맺으려 한다. 같은 모양으로 제 9장에서 말이 났던, 신앙의 길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왜 나느냐 하는 문제도 이 장에서 하는 말 로 분명해진다. ―틸라크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크리슈나시여, 성전의 명령을 돌아보지 않으시면서도 믿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경은 어떤 것이옵니까. 선성입니까, 동성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암성입니까.

지경 니슈다(nishtha).

아르쥬나가 이런 의문을 일으킨 것은 앞장 끝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지켜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니슈다는 정신상태란 말이다. 그들의 마음은 어떤 경지에 가 있느냐 하는 말이다. 때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경전을 믿기는 하면서도 모르고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다. 예를 든다면, 무소부재하신 최고의 주재를 예배는 하면서도, 경전에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9: 23), “나는 신에게 갈 수가 있다”고 하는 사람, 아르쥬나가 묻는 말은 그런 사람의 정신상태가 어떤 것이냐 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서 경전과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 즉 귀신바탈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거기 대해서도 이 장에 서는 설명이 있다. ―틸라크

이들은 일부러 경전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렇게 한다. 샹카라는 어떤 사람의 신앙의 성질이 어떠하냐는 것은 경전의 명령을 지키고 아니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인격과 그 하는 예배에 달려 있다고 했다.

라마누쟈는 그보다는 좀 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해서,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간, 모르고 했어도 알고 했어도, 경전을 범한 것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육신으로 난 자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세 가지이니, 선성과 동성과 암성이다. 이제 그 설명을 들어라.

육신으로 난 자 인간, 생령.

아르쥬나의 질문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이 장의 뜻의 정말 알기 어려운 점은 크리슈나의 대답이 직접적이 아닌 데 있다. 그의 대답이 너무도 분명치 않기 때문에 샹카라는, 신앙을 가지는 일에 비하면 경전에 대해 무식하다는 것은 별일 아니라는 교리에 따라 크리슈나를 신용했지만, 라마누쟈는 거기 대한 대답을 5절, 6절에서 찾아냈다. 거기에는 아르쥬나가 말한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은 귀신바탈을 택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크리슈나의 견해를 넓은 마음의 것이라고 믿는 점에서 샹카라보다도 더 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샹카라는 적어도 아르쥬나의 말의 뜻을 “경전의 가르침의 뜻을 모르고”로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신을 예배하는 데 대한 경전의 명령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리낌 없이 제껴놓는 사람들을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다. 아난다기리(Anandagiri)는 거기에 덧붙여 말한다. “그와 같이, 경전은 모르면서도 신앙을 받아가지고 난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을 그들의 신앙의 성질에 따라, 선성이라 동성이라 암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경전을 등지는 사람을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샹카라의 견해가 옳을 수도 있지만, 아르쥬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지 못한달 법도 없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대답이 보여주는 주된 요지는 사실, 신앙이 경전을 무시하고도 있을 수 있다는 제자의 생각을 교정해주기 위한 데 있는 듯이 보인다. 16장 마지막 절에서 아주 결정적인 교훈을 하고 난 다음 크리슈나가 의무를 말하는 마당에서 경전을 낮추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기타」의 저자가 감히, 혹은 의향으로나마 그렇게까지 열렬히 비정통적이려고 했다고 가정할 이유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힐

 

3. 바라타의 아들아, 각 사람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람은 신앙으로 된다. 무엇을 신앙하든 간 그 신앙하는 대로가 그 사람이니라.

성질 본성, 사트바(sattva).

신앙 슈라다(shraddha).

이 절에서 사트바는 타고난 성격, 이성(理性), 혹은 양심의 의미다. 이 의미로 쓰인 것이「카다 우파니샤드」에 있다……쉽게 말해서, 2절에 있는 스바빠바(Svabhava)와 3절의 사트바와는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성질이란 프라크리티와 다른 것 아니요, 이성이란 것, 나가서는 양심이란 것도 프라크리티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은 베단타 철학에서도 삼캬철학에서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믿거나 그대로 그 사람이다” 하는 원리는 “신들을 믿는 사람은 그 신들에게로 간다” 하는 주장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들은「기타」7장 20절과 23절, 9장 25절에 나와 있다……모든 사람이 그 욕구하는 바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경향 혹은 욕망을 받게 되고 안 받게 되는 것은 프라크리티에 달렸다 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성질을 개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자연 일어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즉, 아트만(atman, 자아, 영혼)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성격은 훈련과 내버림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고쳐질 수 있다…여기서 생각할 것은 신앙의 그러한 차이가 왜, 어째서 일어나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에 따라 신앙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난 다음 크리슈나는 이제 설명을 한다. ① 프라크리티 자체가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 하는 세 가지 성(性)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세 종류의 신앙이 나타나게 되느냐 하는 것, ② 그러한 차이의 결과는 무엇이냐 하는 것. 교정해주기 위한 틸라크

(저자는 아마 당시의 신앙, 음식, 희생, 고행, 자선, 내버림, 폐지 등등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신앙’은 하나의 신조를 받아들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모든 힘을 어떤 주어진 이상에 집중함에 의하여 자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함이다.

신앙은 인간 위에 내리는 영의 압력이다. 인간을 몰아쳐 지식의 계열에서만 아니라 전영적(全靈的) 생명의 계열에 있어서 보다 나은 지경으로 올라가게 하는 힘이다.

진리에 대한 내적 감각으로서의 신앙은, 후에 가서는 더욱 광명한 빛이 비치게 되는 그 목적을 향하고 있다.

어쨌거나, 어떤 종교적 신앙의 궁극의 다룰 수 없는 증거는 그 믿는 자의 혼의 증거다.

누구나 잘 아는 노래의 귀절이 잘 증명해준다. 종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목적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어느만큼 신앙하느냐에 따라 증거가 된다. 「바가바타」(Bhagavata)는, “예배의 열매는 그 드리는 자의 신앙대로 된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인 것은 우리의 과거 때문이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이제와 이제 이후로 또 지을 수 있다. 플라톤은 “우리의 욕망의 경향이나 영혼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 자신도 각각 그대로 된다” 했고, 괴테는 “정성됨만이 인생을 영원으로 만든다”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4. 선성의 사람은 천신을 예배하고, 동성의 사람은 야차나 나찰을 예배하고, 그밖의 암성의 사람은 죽은 망령, 또는 유령의 무리를 예배한다.

천신(天神)데바(deva), 신(gods).

야차(夜叉)야크샤(yakshas).

나찰(羅刹)라자샤(raja놈).

망령(亡靈)인귀(人鬼). 귀신(ghosts).

유령(幽靈)지귀(地鬼), 영(spirits).

 

5. 위선과 교만에 쓸려 성전에서 명하지도 않은 고행을 맹렬히 행하는 사람이 애욕과 집착의 힘에 몰려,

 

6. 어리석게도 몸 안에 갖추어져 있는 원소의 무리들을 학대 하고, 또 그 몸 안에 있는 나까지도 괴롭히니, 그런 것은 귀신 바탈을 택한 것으로 알 것이니라.

원소의 무리들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 기관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5대원소로 되어 있다.

자기 몸을 스스로 괴롭히기 위해 머리털 내복을 입는다든가, 날카로운 쟁기로 몸을 찌르는 것 같은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면 혹시 환각을 일으키는 일이 있으므로 그것을 정신적 환상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몸을 괴롭히는 것을 자신의 단련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석가의 훈계를 들어보라. “금욕이나 고행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고통일 뿐, 아무 가치도 이익도 없다. 해서는 아니 된다.” ―라다크리슈난

 

7. 각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도 세 종류다. 희생도, 고행도, 보시도 또한 그렇다. 그 구별을 들어보아라.

 

8. 선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목숨과, 원기, 힘, 건강, 기쁨,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들이니 구수하고, 부드럽고, 자양분 있고, 입맛이 나는 것들이니라.

 

9. 동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쓰고, 시고, 짜고, 뜨겁고, 맵고, 아리고, 입이 화끈거리는 것들이니 아프고 괴롭고 병이 나게 하느니라.

 

10. 암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때가 지난(식은) 것, 맛이 빠진 것, 쉰 것, 썩은 것, 먹다 남은 것, 부정한 것들이니라.

 

11. 희생의 바친 결과를 생각함 없이 의무로 알고,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경전에 지시한 법식대로 바치는 희생은 선성적인 것이니라.

 

12. 그러나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희생의 결과를 기대하며 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바치는 희생은 동성적인 것인 줄을 알라.

 

13. 법식에 맞추어 하지도 않고, 드린 음식을 나눠줌도 없고, 찬송(진언)을 부르지도 않고, 헌금을 바치는 것도 없이 하는 희생은 믿음 없는 희생, 이는 암성적이라 하느니라.

음식을 나눠주고 헌금을 바치는 것은 남을 돕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니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뿐이다. ―라다크리슈난

아스리슈탄남(asrishtannam)을 보통 “음식을 나눠주는 일도 없이”로 번역 하는데, 간디지는 일부러 “거기서는 음식을 생산함이 없이”로 했다. 그렇게 한 것은「마누」(Manu)와「기타」3장 14절에 따라서 한 듯하다. 희생에서 비가 나오고, 비에서 밥이 나온다. 모든 희생은 창조적이 아니면 안된다.

간디지의 아다크쉰남(adakshinnam)의 번역(which involves no 〔dakshina〕 giving up)도 보통의 번역(devoid of prescribed feesto the priests)과 다르다. 정통적인 해석 속에 들어있는 미숙한 이기주의는 그만두고라도, 다크쉬나(dakshina, gift)란 말이 분명히 아주 높은 정신적 의미로「우파니샤드」속에는 씌어 있다. “고행, 자비, 진지, 비폭력, 성실”을 희생으로 바칠 만한 예물(gift)이라고 했다(「Chh Up.」3:17, 4) “내준다, 버린다” (giving up)란 말은 간디지의 번역에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을 내버린다는 의미로 한다. 그런데「우파니샤드」는 한걸음 더 나가서, 희생드리는 자가 위에서 말한 기본적인 맹세를 지켜서 살겠다고 한 그 약속 자체를 바쳐버린다는 뜻으로 보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을 바쳐버리는 순수한 희생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14. 천신, 두 번 나신 이, 스승, 어진 이를 공경하는 것과 깨끗, 정직, 브라마차랴, 아힘사, 이것을 몸으로 하는 고행이라 하느니라.

 

15.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참되고 유쾌하고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과, 날마다 베다를 외는 것, 이것을 말로 하는 고 행이라 하느니라.

 

16. 마음의 안정, 인자, 침묵, 자제, 혼의 순결, 이것을 마음으로 하는 고행이라 하느니라.

 

17. 이 세 가지 고행이 마음이 통일된 사람에 의하여 최고의 신앙으로 결과를 기대함이 없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선성적인 것이라 하느니라.

 

18. 존경, 명예, 대접을 받기 위해 허영심을 가지고 하는 고행은 동성적이라 하나니, 흔들리고 튼튼치 못하니라.

 

19. 그릇된 고집으로 자기를 학대하기 위해, 또는 남을 파멸시키기 위해 하는 고행은 암성적이라 하느니라.

 

20. 보시(布施)란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은혜 갚음이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게 할 것인데, 적당한 곳과 때에 그러한 사람에게 하면 그 보시는 선성적이라고 하느니라.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여라. ―예수

 

21. 그러나 은혜갚음을 기대하거나, 다른 무슨 소득을 바라면서, 혹은 본의 아니게 하는 보시는 동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2. 적당치 못한 때와 곳에서 적당치 못한 사람에게 예의도 없이 업신여기는 태도로 하는 보시는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3. 아, 타트, 사트는 브라만의 세 가지 이름이라고 한다. 거기 따라 브라민과 베다와 희생이 규정됐던 것이다.

브라민(brahmins) 범서(梵書).

 

3장 10절을 보라.

아옴(aun, 唵)은 브라만(梵)의 절대, 최고 성(性)을 나타내는 것이고, 타트(tat, 彼)는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사트(sat, 有)는 실재를 나타내는 것이다.「타이르리야 우파니샤드」에는 “이것이 사트(sat, 존재하는 것)와 타트(tat, 그 너머)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이 물질적 우주인 동시에, 또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의식의 세 경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깰 때(jagrat), 꿈꿀 때(svapna), 잘 때(susupti). 그리하여 마침내 초월의 지경(turiya)으로 올라간다.「만두캬 우파니샤드」와「바가바드기타」7장 8절과 8장 13절을 보라. ―라다크리슈난

 

24. 그러므로 브라만을 닦는 이들은 늘 ‘아옴’을 부름으로써 「베다」에 규정되어 있는 희생, 보시, 고행의 의식을 시작한다.

 

25. 그리고 해탈을 원하는 사람들은 ‘타트’를 먼저 부르고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없이 희생과 고행과 보시의 식을 행한다.

 

26. 프리다의 아들아, ‘사트’라는 말은 실재와 선(善)의 뜻으로 쓰이고, 또 칭찬할 만한 행동에 대해서도 쓰인다.

 

27. 희생과 고행과 보시에 굳건히 서는 것을 가지고도 사트라 한다. 또 타트를 위한 어떠한 행작(行作)도 사트라고 한다.

 

28. 어떤 희생과 보시를 했거나, 어떤 고행을 했거나, 어떤 의식을 지켰거나 만일 믿음이 없이 했다면 그것을 ‘아사트’라고 한다. 오, 파르다야, 그것은 현세에서도 아무것도 없음이요 죽은 후에도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아사트(asat) 비유(非有) 또는 무(無).

 

이것이 세 종류의 신앙이라 이름 붙여진 제 17장의 끝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