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가난과 이런 저런 사상의 편력 그리고 꽤 고생을 하고 살았지만, 그런 고생보다는 생애를 통해 귀한 인연들을 만나고 맺어 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느끼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천재성(天才性)이 대단한 젊은 학자들을 만난 것도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그 가운데 명상가로 세상에 알려진 박석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전화를 받았는데, 지금 몇 년 째 저술을 하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재성이 있는데, 노력까지 치열한 사람이다.
동서(東西)와 종교 철학 문학 회화(繪畵) 음악 건축에 이르기까지를 회통하는 그의 서사가 머리에 가득하다.
너무 광대하다보니까, 그 무게에 눌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사상 인문의 보고(寶庫)에 새로운 창조물을 더해주리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2013년에 보내준 책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를 다시 읽고 있다.
1 장이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인데, 그 첫 번째 시작인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을 읽고 있다.
어떤 도덕경 해설에서도 만나기 힘든 동서양을 넘나드는 통찰을 읽으며, 감탄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명상가에서 인문운동가로 사회활동가로 삶을 바꾸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노자의 세계를 깊게 들여다보던 중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여름 방학 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58년 생이니까, 계산해보니 그의 나이 36세경인 같다)
당시 나는 도가사상, 불교철학, 힌두교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인식주체와 객체를 초월한 궁극의 의식 세계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무기한 단식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49일째 아침에 마침내 내가 원하던 그 세계를 깨치게 되었고 곧 회복식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회복식 사흘째 새벽, 나는 기존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도는 주객과 시공을 초월한 절대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평범한 일상의 현재의식으로 되돌아오는 데 있다는 통찰이었다.
(중략)
새로운 통찰은 나의 삶을 크게 바꾸었다.
나는 사실 어릴 적부터 은둔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녔고
명상을 하면서 현실 사회의 역사와 문명과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그 날의 통찰 이후 현실 사회를 제대로 알기 위해
뒤늦게 사회과학과 문명사, 동서문화를 공부하기도 하고
현실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시민단체 활동도 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내면의 세계만 들여다보다 비로소 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 보니 이 시기에 내가 박 교수를 만난 것 같다.
나는 그가 경험한 명상의 세계를 모른다.
그래서 더욱 그의 말들이 나에게는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늘부터 이 책을 읽으면서 박 교수의 그 폭 넓은 학문과 명상의 세계에 푹 빠져보려 한다.
특히 문명전환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박 교수의 연구가 무르익기를 기대하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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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나도 박석교수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어 이태전인가 우리집에도 다녀갔지요.
그때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불어를 공부한지 얼마 안되어 꽤 난해한 책으로 알려진 불어책을 번역하여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언어에도 뛰어난 분이지요. 그의 역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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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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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의 책을 보면서, 메모를 틈틈이 남기려 한다.
원체 속독(速讀)하는 습관이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써보며 음미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이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들께 혹 참고가 된다면 좋을 것 같아서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코드로 문명을 탐구 관찰하는 것은 나선형 순환, 즉 순환과 발전을 포함하는 관점인데 나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다.
(대체로 동의한다는 표현은 어떤 코드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오는 경우 그 코드에 의해 시야가 제한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는 의미)
‘문명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서 볼 때, 의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는 가장 핵심적 내용이다.
여러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크게 두 가지 현실적 과제로 압축된다.
하나는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대화 소통 탐구 합의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편의상 ‘연찬(硏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어떤 점에서는 확증편향이 지식 개발의 동력으로 작용해 온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테일러도 전락(轉落) 이후 지식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약(LEAP)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해방하는 분절 과정을 거쳐 무분절의 일체(一體)로 진화하는 것 또한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의식의 도약은 자기중심적 분절과 확신에 찬 탐구과정을 거치고 그 성과들을 포함하며, 자기중심적인 확증편향을 넘어 보편의 세계 무분절의 세계로 의식이 열려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락(轉落) 이전의 무분절과 도약 이후의 무분절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나선형 순환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물질의 소비와 소유를 위주로 하는 물질문명에서 단순(單純)소박(素朴)한 삶 속에서 정신적 풍요를 향유하는 정신문명으로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單純)소박(素朴)함에 대해서 ‘아름다움(美)’에 대한 박석 교수의 표현이 대단히 음미할만하여 적어보고 소개해보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긴다.
세련된 소박미(素朴美),
심오한 단순미(單純美),
숙성된 평담미(平淡美)라는 표현은
단순히 미학적 관점을 넘어서
미래 문명의 단순소박한 삶의 내용을 잘 표현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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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사람 사이에 합의(合意)가 가능할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감각 기관과 입력된 정보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 간에 ‘뜻(意)’을 합(合)할 수 있을까?
실제의 경험을 통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한 말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도 있다. 자기 또한 타인에겐 지옥이겠지만)
이것은 인간 존재 특히 관념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타협(妥協)’이 있는 것이다.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이 ‘타협’이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바탕에서 이루어지도록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분이나 계급, 국적이나 민족, 성별이나 나이 등에 의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사회를 변혁하는 거친 과정들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또 다른 특성은 이해관계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 간의 ‘타협’을 넘어 진리(뭐라고 표현하든 관념과 별개의 실재)를 추구하는 상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무타협(無妥協)’으로 진리나 진실을 향해 합의(合意)를 도출하려는 지향이 있는 것이다.
무타협(無妥協)은 흔히 말하는 ‘비타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대부분의 비타협은 ‘확증편향’과 겹친다.
때로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비타협적 투쟁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데 기여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과정적인 것이다.
‘무타협’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인식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와는 별개의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통과한 상(像 또는 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이다.
그렇게 해서 아집(확증편향)에서 자유롭게 되는 상태로 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가리켜 말한 ‘무의(毋意)’는 바로 이런 ‘무아집’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합의(合意)가 불가능하다는 실태를 넘어서, 무타협으로 진리나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특성은 동물 일반의 1차적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숭고지향성(사랑, 자비)과 보합(輔合)한다.
그 둘을 결합한 말이 ‘성(聖)’이다.
보통 사람의 성화(聖化), 사회의 성화(聖化)가 가능할까?
인류 존속이 걸린 위기의 시대에 물어지는 질문이다.
우문(愚問)인가?
박석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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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성화'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개인과 사회의 성화,
공부하고 깨어있다는 의미가 그것이라 하겠지요.
· Reply · 4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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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박석 (지은이) 들녘 2014
책소개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_ ‘대교약졸’로 꿰뚫는 동서 인문학 5
1장. 대교약졸에서 문명의 코드를 발견하다
모호한 노자, 보는 만큼 보이는 도덕경 16
대교약졸, 현묘한 직관 속에 감추어진 논리 41
대교약졸은 화광동진의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 57
2장. 대교약졸에서 미학의 코드를 읽다
플라톤과는 달리 미에 관심이 없었던 노자 72
나선형적 발전을 보여주는 아름다움들 80
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101
3장. 거룩한 기독교와 범속한 유교
유교는 과연 종교인가? 학문에 불과한가? 120
강렬한 성스러움의 예수, 성스러움을 감춘 공자 135
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164
4장. 복잡한 인도 불교와 단순한 중국 선종
인도의 문화적 토양과 석가모니의 깨달음 186
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201
인도 종교와 중국 선종의 깨달음의 미학 224
5장. 철학: 치밀한 지적 탐구와 중후한 실천궁행
동서철학의 만남, 엇갈린 변주곡들 240
추상적/논리적 사유와 형상적·직관적 사유 263
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288
6장. 문학: 통일된 플롯의 강렬함, 수렴된 감정의 절제미
서사와 카타르시스, 서정과 잔잔한 울림 322
발산적이고 명료한 표현, 수렴적이고 함축적인 표현 347
7장. 회화: 농염한 채색미와 담백한 여백미
사실적 묘사의 인물화, 기운생동의 산수화 378
원근과 채색의 미학, 선과 여백의 미학 400
8장. 음악: 풍성하고 감미로운 소리, 성기고 그윽한 소리
숫자에서 과학으로, 바람에서 정치로 420
화성법에 금속성 악기, 미분음에 식물성 악기 440
9장. 건축: 돌로 만든 웅장함, 나무로 만든 조화로움
영원을 갈망하는 석조건축, 조화를 꿈꾸는 목조건축 464
정원, 동서양의 미적 안목과 자연관이 녹아 있는 공간 493
10장. 발산의 서양문화, 수렴의 동양문화
발산에서 침체를 거쳐 다시 팽창한 서양문화 512
졸에서 교로, 대교약졸로 나아간 중국문화 550
새로운 대교약졸을 기대하며 581
나가는 글_ ‘나’를 잘 들여다보고 ‘세상’을 잘 내다보자 599
참고문헌 603
찾아보기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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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03~104 중국예술은 바로 분산적 통일미를 강조한다. 먼저 회화를 보면 서양회화가 초점투시를 위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는 하나의 시각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중국회화는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개의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국회화도 초점투시 위주의 그림들도 있다. 그러나 중국회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하는 산수화에선 산점투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산을 밑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각과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산 뒤쪽의 감추어진 그윽함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다. 한 폭의 그림에서 여러 개의 시각이 분산되어 나타나면 시각적 통일미는 분명 찾기가 어렵고, 산만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이 어우러져 초점투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운치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건축물에서도 중국은 분산적 통일미를 추구한다. 서양의 대표적인 건축물, 예컨대 성당이나 궁전들이 대개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궁전이나 사원들은 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다.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하나로 집중된 건물에 비해 통일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원림건축에서는 각각 분리된 공간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흩어진 각각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나름대로의 통일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통일미인 것이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에는 반드시 지휘자가 있지만 중국 전통음악의 합주에는 한가운데 서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지휘자가 없다. 각각의 악기들이 지휘자 없이 제각기 놀면서도 전체적인 호흡을 맞추는 것을 중시한다. 한 명의 지휘자가 수십 명의 단원들을 이끌어가는 오케스트라에 비해 통일미가 부족한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 속에는 조화로움이 있다. 다만 집중적 통일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16~117 사실 과학기술은 선진과 낙후가 있지만, 문화는 절대 객관적인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은 제각각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더욱이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동일한 집단 내에서는 아름다움에도 어느 정도의 보편적인 기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칸트는 미적 판단은 취미판단에 속하기 때문에 완전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상호 간의 타당성, 즉 공통의 타당성을 가질 수는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집단이 서로 다르다면 장자가 의문을 제기하였듯이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동양인들은 알게 모르게 문화의 영역에서도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근대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의 위력에 압도되어 주눅이 들어 문화 영역의 아름다움이란 영역에서도 그들이 만든 관점을 좇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주체성을 찾아야 할 때이다. 그냥 겉으로 보면 서양은 교, 동양을 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깊게 보면 그 졸은 단순한 졸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졸일 수 있다. 굳이 서양에 대한 동양의 우월성을 외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름다움에는 절대객관적인 기준이나 서열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자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려미와 소박미, 다채미와 단순미, 농염미와 평담미, 집중된 통일미와 분산된 통일미, 전경을 부각시키는 아름다움과 배경과의 조화미, 그리고 이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서 발산미와 수렴미, 이들은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들이다. _전체를 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들 접기
P. 176~177 물론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다. 사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신의 개념은 원래 아주 소박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의 족장시대의 신은 주로 엘로 불렸는데 초월적 개념은 거의 없고 부족의 번영을 약속하는 부족의 수호신 정도의 개념이었다. 족장시대의 유대의 신은 비교적 친근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 모세를 거치면서 유대의 신은 크게 변모한다. 우선 엘에서 야훼로 그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부족의 신에서 민족의 신으로 바뀌었고, 거기에다 계약을 통해 유대민족이 약속을 잘 지키면 주변 민족들을 내리치면서 유대민족을 축복을 주다가도 유대민족이 계약을 어기는 경우에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엄격한 신으로 변모한다.
사실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착기의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유대민족은 전쟁을 치를 때는 전쟁의 신을 믿었지만,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뒤에는 농경의 신이었던 바알 신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예언자들은 바알 신을 숭배하던 자신의 민족을 질책하면서 야훼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요하곤 했다. 당시의 유대교에는 유일신이라는 개념 외에 특별한 고등 철학이나 윤리도 없었다. 사실 축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대의 야훼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했다.
기원전 8세기에 축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등 윤리와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야훼에 대한 개념이 점차 바뀌게 된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 이 시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야훼는 이전의 가혹하고 무자비하고 희생 제물을 즐기던 모습에서 희생 제물보다는 사회의 정의를 강조하고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는 신으로 점차 변모한다. _대교약졸의 미학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와 유교 접기
P. 226~227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단하선사丹霞禪師가 겨울철에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없자 단하선사는 본당으로 달려가서 목불을 들고 와 쪼개어 장작불을 지폈다. 그 절의 승려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발대발하면서 불제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따지자 단하선사는 태연하게 부지깽이를 들고는 장작 잿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승려는 의아해하면서 도대체 뭘 하느냐고 물었다. 단하선사는 부처님의 사리를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 승려는 어이가 없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단하선사는 사리도 없는 목불로 불을 땠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그 승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공안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컨대 우상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것이다. _불교, 중국에 들어와서 선종을 낳다 접기
P. 314~315 서양은 대체로 이원성을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심한 경우에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있어서는 안 되고, 또한 서로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데카르트는 정신의 작용이 자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의 영향을 받아 극심한 가뭄 때에 스스로 근신을 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던 조선시대의 임금의 행위는 정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자연과 정신을 더욱 확연히 분리시킴으로써 정신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자연의 특징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즉 신이 인간의 정신에 부여한 이성적인 사유의 능력은 더욱 강조되고 아울러 어떠한 정신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자연의 물질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철학자는 인간 이성의 힘을 더욱더 신뢰하고, 과학자는 신학의 간섭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자연에 대한 탐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_전경미의 부각, 배경과의 조화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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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석 (지은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상명대학교 글로벌인문학부대학 중국어권지역학전공 교수
저서: <두보 초기시 역해>(솔출판사, 공저), <동양사상과 명상>(제이앤씨), <대교약졸,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들녘),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문학을 어떻게 보았는가>(역락), <불가능한 누드>(들녘),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들녁), <의식과 본질>(위즈덤하우스), <한산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최근작 : <참선 잘하그래이>,<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하루 5분의 멈춤>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문화사 전체를 하나의 코드로 꿰뚫다
그리스로마?춘추전국시대부터 21세기까지 문화와 인문의 시공간을 탐사하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는 인문학자이자 명상가인 박석이 동서양의 모든 문화 영역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는 인문교양서이다. 저자가 동서양 문화의 특징을 분석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으로 지금껏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구절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에 걸친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교약졸 속에 숨겨진 나선형적 논리구조와 여러 가지 미학적 의미들을 밝히고 이것들이야말로 서양문화와 차별되는 동양문화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선보이는 ‘대교약졸의 논리와 미학’은 여느 인문학 서적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대교약졸’이라는 현미경을 통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물론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 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속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점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특히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예수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 기독교와 유교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나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명상과 깨달음에 담겨 있는 문화적 차이를 비교하는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그것은 저자가 학자인 동시에 명상가로서 오랫동안 여러 종교를 두루 섭렵하며 겪었던 다양한 종교적 체험들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사유체계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것도 이 책만의 개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의 차이가 문학에서, 그리고 회화, 음악, 건축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수천 년에 걸친 서양과 동양의 문화사를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그 전체적인 흐름을 압축해서 소개하고 서세동점 이후의 동양문화가 나아갈 바를 모색한다.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지만 ‘대교약졸’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현미경으로 분석하다 보니 동서양 문화의 특징이 손에 잡힐 듯 일목요연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무겁고 딱딱한 인문학적 용어를 지양하고 평이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안내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동서양 문화의 깊고 풍부한 세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놀라운 인문학 코드, 수렴과 발산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인문학적·문화적 호기심과 궁금증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성스러움을 강하게 발산하는 예수가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하였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왜 일상의 윤리를 강조하는 범속한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았을까? 왜 서양철학은 논리와 분석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철학은 직관과 통찰을 좋아할까? 왜 서양사람들은 확실한 이분법을 좋아하는 데 비해 동양사람들은 두루뭉술하게 하나로 보기를 좋아할까? 서양문학에서는 서사성을 중시하는 소설과 희곡이 크게 발달한 반면 동양문학은 서정성을 중시하는 운문이 주를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회화에는 누드가 넘쳐나는데, 왜 동양회화에서는 누드가 없을까? 서양화는 화려한 채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데 왜 동양회에서는 수묵과 여백의 미를 더욱 중시할까? 서양음악은 화성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왜 동양음악은 화성법이나 대위법이 없는 것일까? 서양음악에는 지휘자가 필요한데 왜 동양음악에는 지휘자가 없을까? 서양 고전건축물은 왜 하나같이 주재료가 돌이고, 동양의 건축물은 나무일까?
굳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위와 같은 의문을 지녀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의문들은 서로 아무런 연관 관계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별다른 뾰쪽한 답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위의 모든 질문들이 사실은 하나의 미학적 코드에서 나온 것에 놀라게 된다. 그 코드는 바로 발산과 수렴의 미학이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대교약졸에 들어 있는 논리와 미학을 탐색하면서 여러 가지 아름다움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발산과 수렴으로 나눈다. 그리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이 발산과 수렴의 코드로 동서양의 종교, 철학, 문학, 회화, 음악, 건축 등의 영역을 탐색하면서 그 차이점들을 하나씩 풀어간다. 한 절씩,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어 보이던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이 점차 하나로 꿰뚫어져 일목요연하게 이해될 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인문학적·문화적 궁금증과 호기심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10장에서는 거대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동서양 문명의 흐름을 탐사한다. 각 문화 영역에서 입체적인 비교와 분석을 통해 정리된 동서양 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은 문명사의 이야기를 통해 한 차원 더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차이를 비교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동아시아 문화의 현황은 어떠하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끝으로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 통찰들을 차분히 체화시켜 자신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데에도 적용해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내다보는 데 활용해보라고 권유한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 책은 잘 일깨워준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숙제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그림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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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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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인문학책이 범람하는 요즘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제목을 보고 흥미로와 주저없이 구입해 읽었다. 인문학 전반에 대한 개론이 아닌 저자의 30년넘는 치열한 수행후에 깨친 깨달음을 바탕으로 `대교약졸` 한마디로 동서양의 모든 분야에 대한 명쾌한 통찰이 놀랍다. 구매
산야 2013-11-2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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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wow !!!
두꺼운 페이지에 망설이고 있다면 기우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물 흐르듯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동서양의 철학, 역사, 건축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엄청난 학식에 감탄하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꿰뚫는 통찰력에 두 번 감탄한다. 특히 1장의 노자의 도덕경 부분에선 무릎을 칠만큼 놀라운 '새로운 도덕경'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접해본 인문학도서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icepray 2013-12-22 공감(2)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