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9

알라딘: [전자책]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



알라딘: [전자책]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

[eBook]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 - 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이은선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1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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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나 아렌트와 유교의 교육ㆍ철학 사상의 비교연구를 통해 이 시대 교육이 인간의 참된 성장과 우주적 생명 공동체의 안녕을 위하는 본질을 회복하고, 나아가 범 생태적인 위기에 처한 우리 삶에 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생물권 정치학 시대를 열어 나가는 비전들을 제시한다. 오늘 우리의 정치가 참된 자유인, 교양인, 상식인 들의 마당이 되고, 오늘 우리의 교육이 그러한 사람들을 길러 내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 이 책의 지향점이다.



목차


제1부 한나 아렌트와 교육
제1장 한나 아렌트의 라헬 반하겐과 한국 사회에서의 졸부의식과 교육적 속물주의
제2장 인간의 조건과 공공성으로의 교육
1. 오늘의 세계정황과 세계소외
2.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
3. 인간 활동적 삶의 세 가지 양식
4. 인간 삶의 제 조건과 교육
5. 탄생성의 교육학
제3장 한나 아렌트 교육사상에서의 전통과 현대
1. 교육에서의 전통과 현대
2. 교육이란 무엇인가?
3. 권위란 무엇인가?
4. 참으로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
5. 정신적 삶이 살아 있는 학교를 위하여
제4장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의 교육사상
1. 아렌트와 양명 비교연구의 의미
2. 아렌트의 활동적 삶(vita activa)과 양명의 심즉리(心卽理)
3. 아렌트의 정신의 삶(vita contemplativa)과 양명의 치량지(致良知)
4. 아렌트의 탄생성의 교육학과 양명의 치량지의 교육사상
5. 우리 시대의 교육적 전체주의에 맞서서더보기



책속에서



P. 91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정황은 국내외적으로 안정과 평화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온통 갈등과 변혁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삶의 정황 중에서 이 위기감의 수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것은‘교육 국란’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도 표현되고, 나라 전체가 이 과거와 미래 사이의 힘의 ... 더보기
P. 147 아렌트는 칸트가 인간의 판단력을 표현하면서 아주 특이하게도 가장 사적이고 즉각적인 미감(취미)으로, 그래서 어쩌면 가장 반대되는 것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는지를 묻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거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미감이란 우리의 이차적인 반성이나 의도가 들어갈 여지가 없이 우리 자신... 더보기
P. 202 한국과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선비문화’와‘사무라이 문화’로 대비시켜 풀이하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 교수의 한국 문화 지적이 흥미롭다. 그는 한국인의 가장 큰 한(恨)은 배우지 못한 것에 있다는 통계 조사 결과를 지적하며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평생 모은 재산을 대학교 장학금으로 아낌없이 내놓았다는 등의 교육 미... 더보기
P. 254 나는 여성들이 세상을 살려 내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어머니 마음이야말로 바로 이 천지가 만물을 살려내고 보살피는 도와 원리(天地生物之道/理)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과 이론, 일상과 배움, 지식과 실천, 자아와 세계를 따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종합하고 통합하여서 바로 일상과 공동체와 ...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은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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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이화여대에서 불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감리교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다가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가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바젤에서 신학박사(Dr. Theol) 학위를 받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성균관대 동양철학대학원에서 한국유교철학으로 철학박사학위(Ph.D.)를 받았다. 1988년부터 30년간 세종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 ‘여성’, ‘종교’의 시각으로 유교적 언어와 기독교 언어를 함께 들어서 우리 삶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말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유교의 ‘聖人’과 기독교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한국 여성이 해체하고 다시 재건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聖性誠 여성통합학문연구 한국 信연구소).

1. 학력 및 경력

1)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철학 부전공)
2) 감리교신학대학원 수학
3) 스위스 Basel대학 신학박사(Dr.Theol.)
4)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한국철학 철학박사(Ph.D)
5) 1988년 세종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교육학과 교수로 2018.2월년까지 만 30년 재직.
6) 현재 세종대 명예교수 및 <한국 信연구소> 대표

2. 주요경력

1) 세종대 교육학과 교수 및 교무처장
2)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및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3)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4) 한나아렌트학회 회장
5) 문화체육관광부 공직자종교차별자문위원회 위원
6) 한국교육철학학회 운영이사 및 감사
7) 한국양명학회, 한국유교학회, 동양철학연구회 부회장
8) 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8) 현재: 한국기독교협의회(NCCK) 화해와 통일위원회 위원,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이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여성상임위원

3. 주요저술 및 논문

지난 30년간 종교와 철학, 교육과 여성 등의 분야에서 통합학문적으로 활동하면서 100여편 이상의 논문과 10여권의 단독 저서 및 30여권의 공동저서를 저술하였다.
-<현대이후주의와 기독교(공저>), 다산서당, 1993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여성신학>, 분도출판사, 1997
-<한국교육철학의 새지평-聖性誠의 통합학문적 탐구>, 내일을여는책, 2000
-<유교, 기독교 그리고 페미니즘>, 지식산업사, 2003
-<한국 여성조직신학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4
-<여성신학의 새로운 지평(공저)>, 여성신학사, 2006
-<종교성, 미래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공저)>, 학지사, 2007
-<동서 종교의 만남과 그 미래(공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8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공저)>, 인간사랑, 2009
-<나는 왜 어떻게 신학을 하는가?(공저)>, 대화문화아카데미, 2011
-<한국 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여성性?정치誠의 한 몸 짜기>,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1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1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유교와 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3.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공저)>, 글항아리, 2013
-<생명과 평화를 여는 정의의 신학(공저)>, 동연, 2013
-<한류로 신학하기(공저)>, 동연, 2013
-<한국사회 정의바로세우기(공저)>, 세창미디어, 2015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묻는다, 이것이 공동체인가(공저)>, 동연, 2015
-<21세기 보편영성으로서의 誠과 孝(공저)>, 동연, 2016
-, SUNY series in Korean Studies, 2016
-<환상과 저항의 신학-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공저)>, 동연, 2017
-<한국적 작은교회론(공저)>, 대한기독교서회, 2017
-<종교개혁500년, ‘以後’신학(공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7
-<세월호와 한국여성신학>, 동연, 2018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교육철학>, 동연, 2018
-<3.1운동백주년과 한국종교개혁(공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9
-<3.1정신과 ‘以後’기독교(공저)>,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9 접기


최근작 : <3.1운동 백주년과 한국 종교개혁>,<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 교육철학> … 총 2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무한경쟁과 부자 되기에 치우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최고 관심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좀 더 인간다우며, 공공의 삶이나 공동체 문제에 관심 갖기에는 지금의 입시 위주의 경쟁이 너무도 치열하다. 대학의 입구에서 벌어진 ‘입시 전쟁’에서 이긴 사람과 패한 사람은 몇 년 후 다시 사회의 입구에서 만나 본게임을 벌이는데, 본게임은 데개 ‘부자 되기’라는 타이틀 하에서 치러진다. 한때는 “그나마 개천에서 용 난다”거나,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믿음은 희망고문(希望拷問)일 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관련 통계까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곳. 그곳은 어쩌면 지옥이 아니겠는가.

전체주의로 치달아 가는 교육 현실
한편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목도되는 교육적 전체주의는 가공할 수준이다. 교육은 온통 실리주의의 도구가 되어서 ‘인적 자원’을 생산하는 공장이 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회적인 생산도구로 단련되고 그 단련을 견디지 못하거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회적 시스템의 본류로부터 소외되어 '루저'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러기 아빠가 일상적인 가족 유형이 되고, 대입 성적을 위한 자퇴가 횡행하며,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에 내몰리고, 학원가를 뺑뺑 돌며 SNS를 통한 ‘비대면 소통’에 빠져드는 현실의 그림들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래서 더 이상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자연에 가하는 인공적 노력은 자연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할 뿐이다. ‘자연’이 바로 ‘살려는’ 또는 ‘살리는’(生) ‘마음’(心)이라면, 오늘의 교육은 자연에 반하는 전체주의로 귀결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위대성과 자질의 씨앗을 알아보고 살펴서 위대한 행위의 인간으로 길러내는” 교육의 본래의 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이 되고 만다.

교육을 매개로 한 동서양의 통섭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인간은 누구나 다 배움(學)을 통해서 위대해질 수 있다.’는 유교의 가르침을 한나 아렌트 등 서구 사상가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부각시키면서 그 해결점을 모색한다. 저자는 그들의 담론은 동서양의 차이가 있음에도 오늘날 한없이 실리주의에 빠져 있고 제도적으로 독재(독점)화된 교육을 개혁할 수 있는 좋은 씨앗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유교적 가르침은 인간 내면의 가능성에 대한 깊은 믿음과 신뢰, 우리 정신의 힘으로서 사람의 자리보다 하늘의 자리를 더 귀히 여길 수 있는 내면적 힘에 대한 강조, 그래서 자신을 쉽게 조그마한 이익이나 명예에 팔지 않고 뜻을 높이는 일에 매진하도록 하는 의지적 결단력,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려는 인간적 상상력과 공동체적 단결력을 이끌어 내는 지혜가 충실히 담고 있다고 보았다.
아렌트는 인간 본유의 능력을 잘 확장하고 키워서 이 세계를 보존하고 문화를 일구어 내고 진리를 담보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데, 우리의 확장된 의식은 그 사심 없음의 덕분으로 이 세상을 그 자체의 미(美)로 판단할 수 있으므로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있는 힘이 되고 그래서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고 보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생물권 정치학과 생물여성 영성
저자는 의도적으로 ‘생명’권 정치학이라는 말 대신 ‘생물’(生物)권 정치학이라는 말을 쓴다. 일차적으로 ‘생물’에서 ‘생’(生)은 형용사가 아닌 동사가 되어서 ‘물(物)을 살리는’의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물(物)은 물질이나 사물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 생명과 무생물을 모두 포괄하는 만물(萬物)과 만사(萬事)가 되어서 샐물(生物)은 생명(生命)보다도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 된다. 유교 전통에서의 명(命)이 기독교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표현이고, 생명과 무생명,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 등을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의식이기 때문에 생명 대신에 중용적 생물(生物)의 개념을 쓰고자 하는 것이며,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 또는 생물지도(리)(生物之道(理))의 의미로 한국적 에코 페미니즘의 영성을 한국생물(生物)여성의 영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생물여성의 영성이란 여성이 생명을 낳고 살리는 ‘생물’과 맞닿는 지점에 천착한 저자의 논의이다.

새로운 인류 문명을 위한 한국의 역할
저자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인간의 삶과 (생활)정치를 더욱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과제에 응답하기 위하여 씌어졌다. 저자의 학문적 탐구는 끊임없이 지금 여기에서의 나와 우리의 삶을 천착하는 일상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당면하는 현실적인 물음들에 온몸으로 대답하는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얻어진 것들이어서 더욱 가치가 있다. 저자는 지금의 인류 문명이 서구 문명의 압도적 우세로 인한 폐해의 극대점에서, 여전히 서(미국)와 동(중국)이 헤게모니 쟁탈을 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위치한 한국이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 앞날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이 새로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위한 담론과 철학과 사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저자의 비전에 대한 논거의 일부로소 제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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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한국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 이은선 2009



알라딘: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 한국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이은선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0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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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쪽

이은선 - <한국 信연구소 오늘> 코로나 19 以後 교회를 위한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읽기...





이은선 - <한국 信연구소 오늘> 코로나 19 以後 교회를 위한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읽기...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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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信연구소 오늘>



코로나 19 以後 교회를 위한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읽기





지난해 가을 3.1운동 백 주년 기념을 마무리하고 조국(윤석렬) 사태를 겪은 후, 남북과 북미 관계가 다시 엄청나게 경색되고 있는 가운데 “한말(韓末)의 저항적 유학자 해학 이기의 신인(神人/眞君) 의식과 동북아 평화”라는 긴 글을 쓰게 되었다. 당시 남한 사회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분열과 갈등은 끝모르게 펼쳐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 문제가 나의 핵심 관건이었다.



그런데 오늘 2020년 봄 코로나 19 전염병 창궐이라는 인류 문명의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특히 한국에서는 ‘신천지 예수교’라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한 변종이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핵심적으로 가르는 것을 보면서, 이 글이 다시 생각났다.



구한말 해학 이기의 사고가 바로 자신 사고의 정점으로서 나라의 참다운 독립과 자주, 주체의 일은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보았고, 그런 가운데 강력한 힘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 기독교(천주교)의 도전에 맞서서 자신을 깊이 반성하면서도 오늘 신천지 종교와 같은 사이비 신앙을 배태할 수 있는 서구 기독교 신앙의 태생적 한계를 미리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대안으로서 한민족 고유의 오랜 역사(古記)와 신앙 전통을 돌아보며 그때까지의 중국적 유교와 서구 기독교를 모두 넘어서 참다운 민족 주체적 신앙을 세우고자 했다.



오늘 세계는 이번 코로나 19 사태를 당해서 한국 정부와 국민이 온 힘을 다해 함께 대처하는 방식과 모습을 보고서 무척 놀라면서 많은 칭송의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 강대국으로 한껏 뽐냈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던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가 큰 위기와 위험에 봉착하자 한국을 본받자고 하면서 우리 진단키트를 얻고자 하는 부탁이 쇄도한다고 한다. 지금 총선을 앞둔 국내에서의 상황은 한국 보수 야당과 언론들의 여전한 왜곡과 트집잡기로 많이 다르지만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 세계가 감탄하는 이러한 한국의 실제가 나는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일제 식민지가 된 후 10년 만에 일어난 3.1 독립운동도 그렇듯이 오랜 역사적 단련 속에서, 여러 종교적, 사상적 경험의 응축을 바탕으로 가능해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위기 때마다 표출되는 민족적 근본 힘이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러한 경험의 응축에 한말의 저항적 유학자 해학 이기의 고뇌에 찬 투쟁도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는 한 해 전에 세상을 떴지만, 그 전에 당시 서구 및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스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우고자 한 사람의 곤궁한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고자 했다. 특히 종교에서의 진정한 독립과 주체야말로 모든 다른 영역에서의 독립보다도 긴요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오랜 고향이었던 유교도 넘고 기독교도 넘으면서 참으로 보편적인 진정한 인간의 종교, 모두가 주체로 서면서도 온 우주를 포괄하는 “진교(眞敎)”를 세우고자 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를 통해서 그 실체가 드러난 신천지 신앙이나 그로부터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는 기성 한국 기독교의 타락을 볼 때 이러한 해학의 사상이 줄 것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휘청거리는 기독교 국가 미국이나 유럽, 그 기독교의 사이비 변종인 신천지나 전광훈 목사 류의 극단적 문자주의 보수신앙으로 위기에 놓여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해학 이기의 사고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은 구한말 저항적 유학자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선생은 조선말 봉건체제가 크게 흔들리던 때 지금의 전북 김제 호남 만경에서 고성(固城) 이씨(李氏) 장남으로 태어나서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28세에 부패한 과거시험을 완전히 포기한 후 온전히 평민으로 살면서 62세인 1909년 국권 상실을 비관하여 스스로 호흡을 절식해서 자진하기까지 그는 온갖 방도로 나라를 구하고자 애썼다. 특히 농촌 현실의 비참과 모순에서 깊은 각인을 받고서 어떻게든 그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고 사대주의와 부패에 젖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구학(舊學)의 유학을 혁신하고자 적극적으로 신학(新學)을 찾아 나섰다.



그 가운데서 10년간 영호남 각처를 주유하며 대구의 천주교 선교사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1863-1922)를 찾아 천주교 서적을 빌려 읽으면서 충격을 받아 <천주육변天主六辯>을 저술하기도 하고, 이후 1894년 갑오 농민전쟁도 경험하고,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등을 겪으면서 정부의 부패한 토지정책에 대안을 제시하는 경세 개혁가로서, 또는 무능한 정부의 외교에 탄핵소를 쓰면서 직접 몸으로 도미하고 도일하여 외세의 탐욕을 저지하려고 하는 큰 뜻과 용기를 보였다. 그것도 실패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노력과 시도가 물거품이 되자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개혁 이상을 1909년 생애 마지막 해에 나인영(羅寅永, 홍암 나철, 1863-1916) 등과 더불어 민족 시조 단군 정신을 다시 ‘중광’하는 단군교(대종교)를 창립하는 민족종교 운동으로 펼치고자 했다.



이때 그의 고성 이씨 가계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던 한민족 고기(桓檀古記)의 가르침을 밝힌 『진교태백경眞敎太白經』을 저술하면서 한민족의 역사와 종교,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이상을 고유한 시각에서 표현한다. 나의 글은 이러한 생애 이력을 가진 해학 사상 중에서 특히 구습에 빠진 당시의 유교 구학(舊學)을 혁신하기 위해서 어떻게 천주교 등의 신학(新學)과 대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가 결론적으로 내세운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 내지는 “진교(眞敎, 참종교)”의 어떤 뜻이 참된 구국의 의미로 여겨졌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그것은 21세기 오늘 상황도 유사하게 나라의 독립과 자주가 위기에 처해 있고, 거기서 극우 보수화된 기독교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에, 구한말 위기 상황에서 일종의 유교(중국)와 기독교(미국)의 대화가 되면서 그 둘도 마침내는 민족의 참된 자주 의식과 세계 하나 됨의 이상으로 극복하고자 한 해학의 사상(진교)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줄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 시대를 위한 또 하나의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라고 할 수 있고, 특히 오늘날 극단적 반(反)지성과 반(反)주체의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신앙의 등장은 이러한 대화를 긴요하게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전세계,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이번 사태로 큰 위기 가운데 처한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남북관계를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서 다시 돌파할 수 있는 호기가 될 수 있다고도 하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해학 이기의 자주와 독립,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위한 실험이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권호용 씨 역학공부 6년 만에 정역 책 출간 - 디트news24

권호용 씨 역학공부 6년 만에 정역 책 출간 - 디트news24

권호용 씨 역학공부 6년 만에 정역 책 출간

임연희 기자
승인 2016.09.22 17:14
댓글 3

‘정역 수지상수’… 주역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주목




대전 출신 권호용(46)씨가 역학 공부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정역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역학자들에 따르면, <주역(周易)>이 복희씨 문왕(文王) 공자(孔子)에 의해 지어졌다면 <정역(正易)>은 주역을 토대로 한국에서 13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역학(易學)이다. 후천개벽 사상을 담고 있는 정역은 논산 출신 일부(一夫) 김항(金恒·1826~1898)이 만들었다.

시인 김지하는 정역에 대해 “세계역(易), 후천 한국역(易), 민중적 개벽역(易), 여성과 혼돈 중심의 생명역(易)”이라고 말한다. 김지하는 그러나 “주역은 알아도 정역은 잘 모른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정역을 특정 종교의 원리로만 치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나 정역 이론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 권영원 선생에게 정역 배워




권호용 씨의 부친 한학자 권영원 선생.

대전 출신 권호용(46)씨가 역학 공부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정역에 관한 책을 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경기도 일산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권 씨는 대전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한학자 권영원 선생(89)의 3남이다. 2009년부터 아버지한테 주역과 정역 공부했다고 한다. 현재는 성균관대(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권영원 선생은 청년 시절, 충남대 총장을 지낸 이정호 선생에게 주역과 정역을 배웠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수지상수에 평생토록 천착했으나 전해줄 제자가 없는 점이 안타까웠다. 아버지의 걱정을 알게 된 아들은 자신이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역학 공부에 매달렸다. 어떤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가 되면서 공부가 깊어졌고 책까지 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처음엔 “이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며 손사래 쳤다. 하지만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믿음직한 제자가 되어 역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권 씨가 낸 책은 <정역 수지상수(正易 手指象數)>다. 수지상수는 왼손을 펴고 오므려 생기는 손가락의 여러 모양으로 주역을 설명한다. 일부가 발견해낸 역학 공부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배우기가 쉽지 않다. 정역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수지상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권 씨는 이 책에서 주역 건곤괘(乾坤卦) 문장에 수지상수를 대입시켜 풀이했다.

그러나 권 씨는 수지상수를 통해 자신이 찾아낸 ‘주역 건곤괘의 효사(爻辭)가 만들어진 원리’에 더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주역 건괘 6개 효(爻)는 각각 자신이 아닌 다른 5개 효의 성분을 받아서 만들어졌으며 이와 달리 곤괘 6개 효(爻)는 건괘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를 증명하는 도표까지 만들었다. 주역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학계에 받아들여진다면 권 씨는 주역 이론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권호용 “정역은 주역 작용원리 설명하는 수(數)와 상(象)의 놀음”





정역 수지상수(正易 手指象數)

주역은 서경(書經) 시경(詩經)과 함께 4서 3경의 3경에 드는 최고 동양 고전이지만 점서 정도로만 아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권 씨는 단 한 번도 주역 점을 쳐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는 “정역은 점보는 책이 아니며, 주역도 점서라기보다는 우주만물이 만들어지고 운행되는 이치에 관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책에서 “주역이 만물 만사의 변화와 형세에 대한 중첩된 우환의 암시를 담고 있다면 정역은 그 이면의 작용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수(數)와 상(象)의 놀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운전하면서도 주역을 암송하고 잠들기 전까지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는 권 씨는 "어릴 적부터 늘 아버지의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다"면서 "이번 책을 낸 후에도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많은 실마리를 찾아냈는데 앞으로도 계사전을 더 연구하고 주역과 정역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인터뷰 : 생명사상 제창한 시인 김지하 - 교수신문



인터뷰 : 생명사상 제창한 시인 김지하 - 교수신문



인터뷰 : 생명사상 제창한 시인 김지하

강성민 기자
승인 2002.10.19

‘律呂’에서 ‘呂律’로 탈중심화한 생명이론 구상중


“사람들이 자꾸 어렵다고 해서 좀더 명확하게 다듬고 있지. 율려는 역이거든. 周易. 역 사상 안에 기본이론이 들어 있거든. 그래서 주역공부를 1년 넘게 하고 있지.”

일산 자택에서 만난 김지하 시인이 원고지 가득한 한자들을 가리키며 던진 첫마디다. 지난 2~3년간 논란이 많았던 율려운동은 그렇게 제2라운드를 위한 몸만들기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김 시인의 말은 “그래서 내년 겨울부터나 작곡가 김영동씨와 같이 율려가 아니라, 여율 운동을 한번 할까 해요”라고 이어진다. 여율이라면 율려의 거꾸로가 아닌가, 하는 좀 묘한 표정을 짓자 그는 여율이 일종의 탈중심화된 율려라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율려는 밝고 웅장해. 종묘음악을 보면 소리가 웅~ 웅~ 하잖아. 하늘의 음악이야. 황종음이 가운데 놓여서 그렇지. 이게 좋긴 한데, 한편으로는 로고스 중심주의거든. 중국·천자·군자·남자가 민중·여자·물건·오랑캐를 다 괄시하는 거라. 그래서 수술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바꾼 게 바로 여율이지. 여율은 협종음이 가운데 있어. 사이 夾에 쇠북 鍾. 이거는 재래악이나 궁정음악보다 속악, 산조 같은 민중음악을 더 중시하거든.”

이를테면, 율려 운동이 초고대사 복원쯤으로 비춰지는 상황을 민중이라는 구체적 계기를 끌어들여 돌파하려는 시도인 것 같았다. 한편 김 시인의 이런 갑작스런 역전에는 계기가 있었다. 19세기 중반 김일부라는 사람이 주역을 민중의 사상으로 재해석한 ‘正易’이 바로 그것. 요즘 그의 하루는 정역을 텍스트로 한 주역의 민중적 재해석에 바쳐지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게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예요. 생명은 물질이 뭔가를 모시고 있는 상태를 말하지. 무엇을 모시냐. 바로 마음이야. 동학에서 ‘內有神靈’이라고 한 것. 그리고 생명은 조직화, 사회화하면서 복잡화하지. 이게 또 동학에서 말하는 ‘外有氣化’거든. 생명은 안에 마음을 모신 것이고, 그 생명이 자체의 원리로 복잡화해간다는 것이 내 이론이야. 또 중요한 것은 ‘各知不移’인데, 이것은 그러한 생명의 원리, 생명의 리듬을 각자 각자가 깨달아서 실천한다는 의미가 있어. 근데 이걸 공부해서 이해하려는 생각은 않고 자꾸 서구 생태이론이나 철학이론만 갖고 해석을 하려니 문제가 생겨.”

김 시인은 자신의 생명사상이 동학, 주역, 풍수학 등에 대한 이해 없이 논해질 수 없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그가 쓴 ‘신비주의’라는 멍에 또한 동학의 ‘신령’과 ‘모심’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말한다. 두 단어가 그대로 “신령을 모신다”는 이미지 연상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축자적으로 해석돼 왔다는 것이 불만의 요지다.

그는 동학의 생명사상이 서구에서 진화에 대한 최신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자기조직적 진화론’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며 그것으로 생명사상의 보편성을 말하고자 한다. 동학의 생명론과 자기조직적 진화론을 종합해서 생명의 운동에 접근하면 “생명이란 안에 있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을 조직화하면서 스스로 안에서도 진화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이 김지하 생명사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못 박고 있다. 이날 김 시인은 생명사상이 문화운동으로 전개돼야 한다는 것을 한번 더 강조했다.

“문화운동이란 자기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거든. 이런 질문의 과정이 없이 생명에 대한 자각이 생겨날리 없지. 앞으로 나는 미학 문제도 ‘모심’으로 밀고 나가려고 해. 모심은 미적 존재론이면서도 인식론이다 이렇게 보는 거지. 대상이 무언가를 모시고 있을 때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마음은 바로 무언가를 모시는 마음이라 이거지.”

마지막으로 그는 생명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성, 모순,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특유의 ‘아니다 그렇다’ 논리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데, 최근의 ‘붉은 악마’에서 그런 모순적 생명의 아름다운 풍경을 목격했다고 털어놓는다.

“생명에 합당한 질서는 흩어지는 질서지. 붉은 악마를 봐. 색이 전부 빨개. 그런데 패션은 전부 제각각이야. 해체적이지. 집중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 이거 완전 반대잖아. 우리는 그동안 변증법과 형식논리에 갇혀 있었어. 둘중 하나가 이겨야 하는 싸움의 논리였지. 그런데 진정한 사유의 평화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곳에 있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거든. 생명의 문제는 이런 논리적 해방에서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지.”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 김지하 > 진리로 가는 양식 | 증산도대학생연합회, 증산도랑郞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 김지하 > 진리로 가는 양식 | 증산도대학생연합회, 증산도랑郞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 김지하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2018-05-10 00:54:08 조회: 1,300회 댓글: 0건

증산사상을 생각한다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음개벽(陰開闢)



김지하 시인 2008.10.29 07:56:00



전라북도 모악산 밑 구릿골에서 주로 활동한 강증산(姜甑山) 선생의 공생활(公生活) 기간은 서기 1901년에서 1909년까지의 8년 또는 9년간이다.



1871년 전북 고부 출신이다.



젊어 동학에 입도했으나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혁명실패 후 산같이 쌓인 시체와 살아있어도 이미 넋이 나간 사람들의 불행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낮 사흘 밤을 통곡했다고 한다.



하늘과 땅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평화적 후천개벽 즉 '정세개벽(靖世開闢)'의 서원을 세우고 1897년부터 3년간 주유천하하던 중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는 태을주(太乙呪)를 얻고 연산(連山)에서는 김일부(金一夫)로부터 정역(正易)의 지식을 얻었다고 전한다.



1901년 모악산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그해 7월 한 밤 오룡(五龍)이 포효하는 폭풍과 비바람 속에 수운 최제우 선생의 깨달음인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의 계시를 보다 신비주의적으로 '내가 한울님이다'로 확대 자각한 뒤 천지 대변동의 후천진리를 또한 깨닫고 하산하여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모악산 밑 구릿골을 중심으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한다.



구릿골 이외에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전북 각지를 순력하며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선포하고 1909년 갑자기 죽은 뒤 그 추종자들은 아내 고판례(高判禮)의 용화교(龍華敎) 이외에 차경석(車京石) 보천교(普天敎)의 육백만 명으로 계승되었고 후천세계에 관한 그의 예언집인 '현무경(玄武經)'이 뒤에 남았다.



그의 사상은 1901년 구릿골에서 첫 제자 김형렬(金亨烈)에게 한 첫 가르침 속에 압축되어 있다.



'수많은 아낙들이 구천을 향해 밤낮으로 끊임없이 염주 굴리는 저 소리를 들어봐라. 수천년을 부엌데기, 천덕꾸러기로 내내 구박만 받던 아낙들의 쌓이고 쌓인 한(限)이 구천에 받아들여졌다. 이제 후천개벽이 일어날 터인데 그것은 분명 아낙을 앞세운 음개벽이다. 그러나 어디 아낙만의 세상이겠느냐, 남녀동등의 세상이겠지.'



음개벽!



이것이 강증산 사상의 핵심내용이다. 여성, 여성성과 혼돈성이 핵심가치가 되는 우주 대변동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는 분명 사랑, 혼돈, 모성의 시대다. 서양사의 경우 희랍신화에서 일찍이 이성(理性)과 질서와 가부장의 주신(主神) 제우스(Zeus)에 의해 집단 살해당한 성가족(聖家族) 에로스(Eros), 카오스(Chaos), 가이아(Gaia)가 되살아나고 있고 시몬느 보브아르로부터 헬렌 피셔, 크리스테바, 이리가라이의 이름을 앞세운 페미니즘과 젠더 투쟁이 한창이다. 바야흐로 생명과 평화, 혼돈적 질서, 색정과 친화력의 시대다.



다름아닌 음개벽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여성을 후천개벽의 주체로 드높인 이후 음개벽·상생시대(相生時代)는 강증산 선생의 중심 명제가 되었다.



강증산 사상에서 연대기는 별로 의미가 없다. 선형(線形)적 발전구조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시점이든 중요하다.



여러 연구자들이 강증산 선생을 가리켜 '촌놈'이라고 부른다. 혹세무민(惑世誣民)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점을 중요하게 본다.



다만 오늘날 그분을 고태종교(古態宗敎)적 양식으로 '계승(繼承)'하는 것은 어떤 한계가 있고 새 시대·새 세대의 문화, 즉 우주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새롭고 광활하게 해석(解釋)해야 된다는 것이 조건이다.



강증산 선생은 일관되게 자기 자신을 '옥황상제(玉皇上帝)' 즉 '한울님'이라 칭했다. 바로 이것을 두고 '촌놈'이라고 비하(卑下)하는 것인데, 나는 도리어 이런 점이 그분의 위대성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사귀었고 주장했던 바가 다름 아닌 '촌놈'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울님인 그가 촌놈이고 촌놈의 친구고 촌놈으로 살았음은 그야말로 촌놈과 촌놈의 친구와 촌놈의 삶이 한울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강증산 선생은 분명 수운 최제우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의 계승자이니 '사람이 한울님(人乃天)'이라는 동학의 근본 명제를 가장 솔직하고 대담하고 촌놈답게 실천한 셈이다.



그 한울님인 남성 강증산이 후천개벽의 주체를 여성 한울님에게 넘긴 것이 바로 음개벽이다.



훗날 보천교를 창설하는 제자 차경석의 정읍(井邑) 대흥리(大興里) 집에서다. 선생은 여러 제자들이 둘러앉은 한가운데에서 누운 채로 자기 아내 고판례로 하여금 식칼을 들고 자기 배 위에 타고 앉아 자기에게 칼을 겨누고 '하늘, 땅, 사람의 삼계대권(三界大權)을 당장 나에게 넘기시오'라고 호령하라고 이른다.



고판례가 그대로 하자 선생은 밑에 깔린 채 즉각 두 손을 싹싹 비벼 크게 잘못을 빌면서 '네. 당장 넘기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말하길 '이대로 하라!'



그 밤에 선생은 마당에다 성경, 사서삼경, 불경과 공명첩(空名帖), 빚문서, 계산서를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서 널어놓은 뒤 수부(首婦, 으뜸여성) 고판례를 앞장으로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밟으며 밤새 춤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다름 아닌 후천이요 음개벽이라고 하였다.



생활의 구체적 실천에서의 음개벽은 무엇이었을까?



선생이 전주 가장자리 김주보(金柱甫)의 주막에 들렀을 때다. 주보의 아내가 말한다.



'지금 전주시내에서는 큰 술도가 주인들이 모여 자그마한 주막의 작은 술장사들이 제 쪼대로 제 째대로 장사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저희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야단 야단이랍니다. 어찌하지요?'



선생이 즉시 대답한다.



'작은 술장사 아줌마들이 모두 모여 손을 잡고 전주시내에서 매일 매일 시위(示威)를 하쇼.'



아까 정읍 대흥리 마당에서 온갖 경(經)들을 찢어놓고 밟으며 밤새 춤추었다고 했다. 그때 어떤 음악에 따라 춤추었을까?



춤이 실천이라면 음악, 즉 소리는 그 원리다. 이 세상 동·서의 온갖 진리를 내동댕이치는 무시무시한 그 대혼돈의 질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 양반들 소리나 중국 소리는 아니었을테고 농민들의 풍물가락이었을까?



어림없다.



'걸뱅이·각설이 타령'이었다. 이른바 '품바품바 들어간다'이다.



농민 근처에도 못 가는 밑바닥 천민들의 참으로 누추한 혼돈의 소리다.



그런데 선생은 이것을 무엇이라 자리매김했을까?



선생은 평소 수운 동학의 첫 번째 강령주문(降靈呪文)인 '지기금지(至氣今至)'를 가장 높이 모시며 '으뜸가는 율려주문(律呂呪文)'이라 평하고 '후천사상은 율려가 통치한다'고 가르쳤다.



율려는 선천(先天, 지나간 역사 시대) 5만 년 동안 우주와 삶을 지배해왔던 이성, 질서, 남성성, 제왕, 율법의 통섭(統攝)적 음악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극한 기운(至氣)'이란 반대로 태초의 혼혼탁탁(昏昏濁濁)한 혼돈적 에너지(混元之一氣)를 뜻한다. 그러니 '혼돈이 곧 통섭한다'는 의미가 된다. 가히 개벽적 반어법(反語法)일 수 있겠다.



선생은 한 발 더 나간다.



바로 그날밤의 그 '걸뱅이 각설이 타령' 자체를 다른 것 아닌 율려라고 부른 것이다. 선생은 여기서 다시 한 걸음 크게 더 나가고야 만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웃는 놈은 그 자리에서 직사하리라.'



이래서 점잖은 학자들이 선생을 가리켜 '촌놈'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촌놈'일까? 표현이 촌스럽다는 까닭이라면 상관없지만 그 내용이 그야말로 틀렸거나 빈약하다면 참말로 '촌놈'이란 말에 하자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하자다. 앞으로 '강증산 촌놈론'은 즉시, 당연히 취소되어야 한다. 왜?



'걸뱅이 각설이 타령'이 음악으로서의 단순 혼돈, 즉 무질서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黃帝) 이후 4천5백 년 역사를 가진 질서정연한 중국 우주율로서의 율려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동아시아라 해서 중국 고대의 율려만이 음악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것 존중하는 중국이라 해도, 또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도 4천5백 년 전보다 더 오래된 1만4천 년 전 한민족의 신화적 모태(母胎)인 파미르 고원의 마고성(麻姑城) 나름의 우주율, 즉 우주 음악질서가 황제류의 율려가 아니라 놀랍게도 그 정반대인 여율(呂律), 그것도 팔려사율(八呂四律)이란 점을 착안해야 한다.



어떤 중국 미학자 가라사대 '1만4천 년 전이면 신화시대인데 그것을 오늘에 와서 어떻게 미학적 기준으로까지….'



허허허허허.



내 대답은 이것이다.



'4천5백 년 전 역시 신화시대다. 황제가 신화적 제왕이 아니라면 어떻게 신농(神農)과 함께 삼조당(三祖堂)에 앉아있는가? 역사에서의 신화와 문화에서의 신화는 실증차원에서는 서로 거리가 멀다.'



팔려사율이 무엇인가?



여(呂)는 여성성, 혼돈성, 신화성, 우발성, 창발성, 개체성, 영성, 감성 등이고 율(律)은 남성성, 질서성, 역사성, 필연성, 규격성, 전체성, 이성, 과학성 등이다. 그것이 하나는 여덟이고 다른 하나는 넷이라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른바 '혼돈적 질서(混沌的 秩序)'다. 유식한 서양말로하면 저 유식하고 또 유명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카오스모스(chaosmos)' 또는 '카오스모시스(chaosmosis)'다.



그래도 시비 건다면, 시간의 아득함을 들어 계속 시비 건다면 또 말하자. 1879년에서 1885년 사이라면 명백히 신화시대가 아니다. 그래도 신화시대던가? 아니라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시기에 충청도 연산사람 김일부(金一夫, 강증산 선생은 그에게 후천개벽론을 배웠다고 한다) 선생이 그의 '정역(正易)'에서 후천 시대의 정악(正樂, 바른 음악)을 분명히 율려가 아닌 '여율'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것은 미친 소리에 불과한가?



그보다 20년 전 동학 최수운의 '지기(至氣)'의 뜻인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元之一氣)' 또한 미친 소리에 불과한가?



대개 그것을 '미친 소리'라고 매도하는 진짜 미친 소리의 주인공은 엉터리 마르크시스트거나 서구 중독자거나 중국 깡통들이겠는데, 그러면 대개 그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중국의 개화주의자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이나 모택동의 스승인 마르크시스트 이대교(李大釗)의 '폭류론(暴流論)' 역시 미친 소리인가? 반론(反論)에 자신 있는가?



중국 깡통들과 동양 마르크시스트들에게 하는 말이다.



서구 중독자에게 또 한마디 하자.



현대 독일의 우주음악 '스톡하우젠'은 피타고라스 이후 서양 고전음악의 우주 율격 그 자체인 바하와 현대 서양 대중음악의 혼돈률인 비틀스를 결합한 것이다. 스톡하우젠도 역시 미친 소리인가?



현대 신세대 한국의 퓨전이나 크로스오버 전문가들에게도 한마디 하자.



금년 초 중국에서 오래도록 음악 공부하고 돌아온 서태지가 귀국 콘서트 계획을 말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태고의 소리 위에 나의 소리를 살짝 얹어보겠다'고 했다.



'가장 아름다운 태고의 소리'라면 서태지가 중국에서 여러 해 공부했을 것이 분명한 율려요 그 위에 살짝 얹겠다는 제 자신의 소리는 신세대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카오스 소리 '록'일게다. 그럼에 그것은 다름 아닌 '여율'이 틀림없다.



아직도 감(感)이 오지 않는가?



이야기를 좀 엉뚱하게 바꿔보자.



율려는 요즘 대유행인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교수의 두목인 미국 사회생물학(다윈주의)의 에드워드 윌슨의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망상적 우주전체주의 통섭(統攝)이론과 똑같은 것이거나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의 엉터리 생명학인 온생명론의 전 지구적 종속신경계 이론과 별로 다른 게 없다.



개체 생명의 중요성, 창조성, 혼돈성, 우주성을 참으로 하잘 것 없는 것으로 경멸하고 전 유전자 체계나 중추신경계 같은 전체주의적 통제력만을, 그것도 남성중심적, 수학적 이성주의만을 숭배하는 이들의 반생명성, 반영성, 반혼돈성, 그 낡아빠진 에코 파시즘을 아가 리를 떠억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존경하고만 자빠졌을 것인가?



똑같은 이야기가 너무 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마도 음개벽과 함께 강증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니 조금만 더 나가자.



이야기의 코드가 거꾸로가 된다.



요즘의 촛불세대, 요즘의 디지털 세대는 매우 훌륭한, 탁월한 새 문화의 창의력을 지닌 새 문명사 창조의 전위임에 틀림없으나 첨단 전위 나름의 한계가 또한 분명하다.



왜?



앞으로 디지털 네트워크와 웹문화 이외에 아날로그 문화, 종이, 책 같은 것은 다 싸그리 망해서 자취도 없을 것이라는 혁신적 신념에 불타오르고 있는 바로 그 점이 오류라는 것이다.



문화의 역사는 그렇게 단선적, 단절적인 것이 아니다. '디지로그'라는 말이 이미 유행하고 있듯이



물론 디지털이 중심이요 초점이 되면서도 바로 그 중심성에 기준을 두고 해체, 재구성되는 조건 속에서 아날로그가 다시 각양각색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곧 문화의 역사다.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 혁명 이후 신문이 나타나고 곧 이후 극히 대중적, 통속적인 신문 연재소설이 대유행했다. 예부터 내려오던, 그리고 중세에도 르네상스기에도 왕성하던 시는 마침내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멀지 않아 신문 연재소설의 통속성이나 가벼움 때문에 미학적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지식대중(고등교육의 보편화와 문화산업의 일반화와 연결된) 사이에 고급 시예술이 부활한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 등이 그들이다. 소설은 이 상징주의 시예술의 미학적 영향력을 제 나름으로 받아들여 질적인 변혁을 꾀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어떠했는가? 처음의 활동사진 '기차의 도착'은 그 유치증에도 불구하고 파천황의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금방 지루해지고 빠리짱들은 사이렌트를 토키로, 흑백을 컬러로, 무음(無音) 영화에 음악과 드라마와 회회와 문학을 끌어들여 다 죽었다고 사형선고 받았던 전통적 기초예술이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관계는 과연 여기에서 예외일까?



해월 최시형 선생은 왈,



'진정한 후천개벽은 후천을 세우고 선천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을 중심에 두되 그 후천원리에 의해 새롭게 의미가 인정된 선천을 거기 배합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



오만 년 후천개벽의 첫 멘토인 최제우 선생의 옥중시(獄中侍)가 있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은 물 위에 밝아 의심할 틈이 없고

기둥은 다 낡은 것 같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다.)



수운 선생의 동학에서 후천 생명의 '수심정기(守心正氣, 고대 풍류선도)'와 선천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함께 있다. 가장 중요한 부적도 후천 혼돈인 '궁궁(弓弓)'과 선천 질서인 '태극(太極)'이 함께 있다.



혼돈은 질서와, 생명은 평화와, 여성은 남성과, 부드러운 사랑의 어머니는 똑똑하고 일 잘하는 아버지와, 그리하여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팔려사율'의 비율로 결합하는 것이 후천개벽이요 음개벽의 새 시대다.



그러나 이때 두 가지 패턴이 나타난다. 하나는 전형적 선천인 남성적 이성 중심의 전체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후천의 여성적 혼돈 중심의 해체주의의 결합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남성성과 여성성, 중심성과 해체성 사이의, 이성과 영성 및 감성 사이의 이러저러한 상생(相生) 상극(相克) 사이의 생극(生克)이라는 드러난 질서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 밑에 숨어서 그 드러난 질서를 추동(推動), 조정(調整), 비판(批判), 수정(修正)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그 스스로 드러난 질서로 열고 나오는 숨은 질서의 생성 즉 '복승(複勝)'이라는 또 하나의 존재다.



바로 이 새로운 복승의 존재는 선천 후천 사이 생극의 모습이 아니라 애당초부터 새로운 근원적 생명인 법이다. 한민족의 신화망에서는 바로 이것을 '한'이라고 부른다.



'걸뱅이 각설이 타령'은 그럼 어디에 속하는가?



애당초 그저 '촌놈'의 싸구려 단순 혼돈물 자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생극 쪽인가? 복승 쪽인가?



생극 쪽에 익숙한 것이 한국학의 전문지식인들이다. 그들이 아니라도 불교나 동북방 샤머니즘 등을 공부하는 서양 지식인들 역시 이 방면엔 체계적 이론들을 갖고 있는 시절이다.



'걸뱅이 각설이 타령'이 과연 복승이라면 이제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바로 이래서 강증산 사상에 있어서의 '율려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여율'을 길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다름 아닌 오늘 우리 문화, 오늘 세계 문화의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른바 '한'이다.



그것이 팔려사율(八呂四律)임은 이미 말했고 그밖에 또한 하늘ㆍ땅ㆍ사람의 삼재(三才)와 음양의 양지(兩之)의 결합이 곧 한이다.



아주 복잡해졌다.



인류 생명사상사, 생명과학사의 새로운 대전환점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통섭'이라는 이름의 유전자 전체주의나 온 '생명'이라는 이름의 중추신경계적 에코 파시즘 따위와의 날카로운 대각(對角)에 연결되기 때문이고 동서양 문화와 문명의 후천 대개벽의 핵심 사안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을 맞았다. 1960년이다. 1961년 5월에는 군부 쿠데타가 터졌다. 그해 5월 16일 직전 판문점에서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학생회담이 계획되고 있었는데 그 회담 중 남북학생 민족미학회의에 남쪽 대표 두 사람(다른 한 사람은 조동일 교수) 중 한 사람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쿠데타가 터지자 나는 열세 살에 떠나온 내 고향 목포로 피신했다. 목포에서 가난한 친척집에 얹혀 도로 공사장의 스테바(삽질)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무렵이다. 내 곁엔 먼 친척의 괴짜 한 사람이 늘 붙어있어 한번은 '소리'로 이야기가 몰리자 그의 인도로 가까운 임성(林城)-일노(一老) 사이 한 벌판에 쭈그리고 앉은 걸뱅이 마을을 술김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늙은 걸뱅이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각설이타령 얘기를 내 평생 내내 결코 잊을수가 없다. 그때의 문답이다.



'품바타령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소리가 아니라 춤이다.'

'무슨 춤인가?'

'들어가는 춤이다.'

'들어간다가 그 뜻인가?'

'그렇다.'

'어디로 들어가는가?'

'그 집 살림 속으로 들어간다.'

'살림 망해먹으러 들어가는가?'

'반대다.'

'반대?'

'그 집 살림 살려주려고 들어간다.'

'어떻게?'

'그래서 소리가 아니라 춤이라고 한다.'

'춤이 살림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그렇다.'

'춤 속에 돈이 들었나?'

'비슷하다.'

'돈 비슷하다면?'

'목숨 같은 것. 재수 같은 것. 좋은 아들딸 같은 것. 산신령 같은 것. 한울님 같은 것.'

'더 쉽게 설명해달라.'

'품바품바는 장단인데, 두 다리와 아랫도리를 흔들며 들었다내렸다 앞으로 뒤로 오금질하는 장단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살림춤이다.'

'그 춤이 어디서 나오는가?'

'꽁무니에서 나온다. 그래서 걸뱅이 각설이타령, 품바춤을 꽁무니타령이니 똥구멍춤이라고 하지.'

'왜?'

'춤이 거기서 나오니까!'

'정확히 말해다오.'

'사타구니가 춤의 첫 샘물이다.'

'사타구니라면?'

'똥구멍하고 불알 사이 조금 안쪽에 있는 것. 씨ㅂ하는데, 애 갖는데, 애 모시는데, 애 낳는데. 거기가 목숨의 첫 샘물이고 산신령, 한울님의 자리라고 하더라.'

'누가?'

'어른들이 그랬어. 다 그랬어.'

'거기서 춤이 나와?'

'타령도 거기서 나와!'

'거기가 살림의 자리라?'

'그렇지. 그것을 집 안에 깊숙이 디밀고 잘살라고. 애 많이 낳고, 돈 많이 벌고, 재수 좋으라고 소리와 춤으로 축수하고는 밥 한술 얻어먹는 거지 뭘!'

'아항!'



이른바 회음(會陰) 이야기다.



나는 이미 나의 <프레시안> 기고문 '유모차부대 엄마'에서 회음의 의미와 역할에 관해 길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



글이 여기에 이르니 내 아랫배로부터 나지막한 흐느낌과 함께 그때의 한 날카로운 기억이 뒤를 치고 올라온다.



'당신 이야기 듣고 있자니 여자들 이야기 같다. 왜 그런가?'

'본래 이 품바타령 춤이 옛날에 여자들이 시작한거다.'

'사당패?'

'비슷해.'

'아항!'

'한마디 더 해줄게. 옛날엔 그 사당패하고 손을 잡거나 그 사당패하고 잠을 자면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데! 힘도 좋아지고 재수 있고 돈도 잘 벌고 얼굴도 좋아지고 농사도 아주 잘된대!'

'아항!'



회음혈(會陰穴)은 전통동의학(東醫學)이나 단전학(丹田學)에서 공식 인정되는 단전 자리가 아니라 18세기, 19세기 이래 몸 안에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천응혈(天應穴), 아시혈(阿是穴) 같은 혼돈혈(混沌穴) 등과 함께 갑자기 그 기능이 활발해지고 강렬해지고 다양해져서 상중하 삼단전 중심의 전통 단전수련자들도 예외적으로 크게 중요시하게 된 기이한 역사를 갖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쯤에서 이 부분, '촌놈'과 '율려주문'과 '품바타령'과 '웃으면 직사한다'에 대한 결론 비슷한 것을 내리겠다.



현대 율려는 결코 대뇌 중심의 유전자 통섭력이나 온 생명의 중추신경계 집중력이 아니라 그 기능의 원동력까지를 모두 함축한 회음, 특히 여성의 회음, 노동, 생식, 포태, 태교, 출산, 육아, 춤, 예감, 신경, 유전자 기능과 우주 대변동의 원형적 움직임이 모두 함축된 회음이며 이 회음을 각 개체 생명의 중심으로 하는 개체-융합의 화엄개벽적 여율(呂律)이 율려 기능을 배합하면서 후천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 바로 나의 결론이다.



사회생물학이니 온 생명이니 하는 에코 파시즘에 그 문을 크게 벌리고 앉아 있는 낡아빠진, 더럽고 데데한 이성과 남성 중심의 전체주의 생명학을 근본에서 무너뜨릴 '회음의 새 생명학'이 탄생할 때가 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생명 평화와 혼돈질서와 개체-융합의 화엄적 자기조직화에 의한 후천개벽을 기초로 각각 일체의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모두 다 거룩한 우주공동주체로 드높이는 <모심>의 원리 위에 전 인류의 각 종교와 사상 사이의 통일신단(統一神壇)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세계조화정부(世界造化政府)를 창건하자는 것이 바로 대혼돈에 빠진 현실 지구와 인류를 위한 참다운 새 UN구상에 연결되는 강증산 선생의 놀라운 우주 정치적 상상력이다.



이미 여러 가지 기고문에서 상세히 밝혔듯이 촛불(촛불을 위장하는 숯불이나 횃불과 명료하게 구분해야 한다. 전혀 다르다.), '쓰나미' 이후의 지구 자전축 북극이동, 지리극(地理極)과 자기극(磁氣極) 상호이탈과 재결합에 의한 기존 북극해체, 동토대 메탄층 폭발, 대빙산 본격해빙, 난류한류 복합의 대규모 남반구 해수면 상승, 북극 해빙과 적도 결빙, 온난화와 간빙기의 교차생성에 따른 더위ㆍ추위의 겹침, 대전염병 창궐, 생명계 괴변, 재진화(re-evolution), 지진, 해일, 화산, 토네이도, 산불, 침강, 융기, 생태계 오염, 멸종, 유전자 변질사태, 새로운 생물종 출현 등 우주와 지구 변동.



미국,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전세계 금융위기, 국유화 등에 의한 중도적 시장문명의 파급, 거대 자본의 아시아 이동, 호혜(互惠)-교환(交換)-재분배(再分配)의 새로운 고대 신시(神市)의 네오 르네상스.



이 모든 것이 후천개벽이요, 여성, 어린이, 쓸쓸한 대중 등 짓밟히고 소외된 <꼬래비> 등 어둠(음, 陰)이 빛으로 뒤집히고 상극(相克) 중심이 상생(相生)으로 중심 전환하는 후천 대개벽을 예언한 강증산 선생의 예언은 매우 신비적 형태의 개벽 로드맵으로 <현무경(玄武經)> 안에 전개되어 있고 또한 이 대개벽기의 우주적 소통 매체로서, 새로운 크립토그램, 픽토그램의 암호문자의 상형적 방향성, 그 디자인 원리가 역시 현무경 안에 제시되어 있다. 이 안에 함축된 신비한 비밀은 참으로 창조적 발상에 의한 근본적 새 해석이 아니면 밝혀낼 수가 없다.



나는 이 해석과 발상 과정에 '콘셉터(Concepter)', 즉 '창조적 발상 지원 시스템'을 걸도록 제안하는 바이다.



콘셉터는 일본 문명의 첨병인 노무라 종합연구소(野村綜合硏究所)의 '창조전략' 안에 나타난 아이디어로 컴퓨터와 정보화가 아니라 그것의 내권(內捲) 운동으로서의 창조화(創造化)를 위한 발상과 논의, 회의구조다.



한 문제의 전문가를 가운데 앉히고, 즉 '모시고' 그를 둘러싼 각 방면 관련 전문가들의 각양각색의 질문이 집중되는 중에 중심 콘셉터인 화자(話者)의 전문적이면서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속출하는 중에 그것을 다방면 다방향에서 현실적 어젠다로 즉각 즉각(컴퓨팅, 네트워킹 과정에서) '살리고', 그에 연속하여 학술적으로 심층논의와 보도와 대중적 코멘트의 확산 속에서 전 대중적 창의적 문화의 현실화로 크게 '깨치는' 과정이다.



이것을 <현무경>을 비롯한 증산 개벽사상과 진행 중에 있는 기위친정(己位親政)의 후천개벽(김일부 정역이론)을 함께 연계하여 그 '창조적 발상'을 '개체-융합'과 '내부공생(endosymtiosis)' 원리에 따라 자기조직화하는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야 한다.



속류 민주주의적 세미나나 패널 구조로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수운 선생의 '각지불이(各知不移, 해체적 중심원리인 화엄경의 실천)'에 의해서만 창조적 내용에 도달한다. 콘셉터는 <현무경>만 아니라 통일신단과 조화정부의 회의와 논의, 합의과정, 즉 고대 화백(和白)의 세계사적 전개에서도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름 아닌 '모심'이다.



수운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주문은 '모심'을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으며 현생 인류가 우주 화엄을 각자각자 제 나름나름으로 선적(線的)으로 인식, 실천한다(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수운 선생 자신이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모심'이 바로 수수억천 년 우주의 지속적인 창조적 진화와 그 완성으로서의 화엄적 개벽의 기본동력임을 말하고 있다.



강증산 선생은 바로 자신의 평화적 후천개벽(後天開闢) 노선 천명과 그 실천으로 '촛불'에서 나타난 생명ㆍ평화의 새로운 후천개벽의 강렬한 예감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선생은 평화적 개벽의 실천방안과 동력을 생명의 명제로 강조했으니 '의통(醫統)'이 곧 수운 동학의 '모심과 살림(侍天主 造化定)'에 해당한다.



수운 동학의 '살림' 즉 '造化定'이 '무위이화(無爲而化)에 일치하고 마음을 비운다(合其德 定其心)'인 까닭이다. 치료와 정신수양, 안심 등 이외에 일상생활과 농사에서의 여러 가지 기적은 결코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라 '함이 없이 아니함이 없는(無爲無不爲)' 한울정치 즉 창조적 진화에 일치하면서 거기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얼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림'인 것이다.



나는 이 원리가 지난 4월 29일에서 6월 9일까지의 '첫 촛불'과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의 '새 촛불' 사이의 '모심-살림 관계' 즉 '十一一言'과 '十五一言' 사이의 역동적 신비로 본다. 그리고 그 신비는 보다 높은 차원, 압축된 형태로 지난 9월 4일부터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오는 이달 10월 26일에 계룡산에서 마치는, 그리하여 내년 봄 다시금 묘향산까지 진행되는 신부-스님의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사랑-생명-평화 기원의 촛불 행사로 승화되어 계승되는 새 시대의 정세개벽(靖世開闢)으로 본다.



여전히 이 모든 개벽 실천에서 핵심은 애틋한, 열심한, 그러나 자제되고 조용한 '가운데도 아니고 양 가장자리도 아닌(非中離邊)' '모심선(侍禪)'이다.



모심선, 선(禪)으로서의 애틋하면서도 단정한 참선법으로서만 화엄개벽이 가능하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강증산 선생은 초기 '나, 즉 한울님은 후천개벽을 위해 먼저 최수운을 이 땅에 보냈으나 수운이 너무 유교에 매달려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스스로 왔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유교, 선교와 기독교를 불교의 큰 틀 안에서 결합하고자 애썼다.



비폭력, 평화에 의한 후천개벽, 즉 정세개벽은 분명 불교적 배경을 가진 개벽사상이요, 실천이다.



후천개벽의 남조선 사상사, 즉 동학, 정역, 증산과 남학, 오방불교 및 소태산의 원불교까지의 모든 사상이 예외 없이 유불선과 기독교를 선도 즉 한민족 전통의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창조적 통합을 이루었으되 그 우주적 크기, 넓이, 깊이 그리고 개체 중심의 해체적 융합의 현대적 접근성에서는 거의 모두 다 불교, 그것도 화엄경적인 배경을 잊지 않고 있다.



강증산 선생이 수운 동학의 유교적 제한성을 선각적 한계로 지적한 것은 수운 동학의 당대 현실적인 시국관이나 혼돈적 질서라는 기본 철학의 구조 안에서 바로 그 선천적 질서의 문제에 한해서는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운 동학의 핵심인 강령주문, 본주문, 후문(後文) 38자(字) 안에 의미심장하고 무궁무궁한 창조적 진화론과 대화엄 사상의 오묘하고 절묘한 압축까지 간파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주문수련이 태부족했던 것이다.



그 대신 강증산 선생은 자기 나름의 독특한 광활한 상상력과 우주적 신비주의 차원에서 화엄사상이나 고대 회귀의 진리관을 여기저기서 펼치고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증산 사상에 대한 상세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갈래와 차원, 수많은 주체와 그 기본사상의 다양성 및 확산관계, 현실 역사적 의미연관 등의 초점에서 여러 가지 천지공사(天地公事) 즉 우주 재판을 분석 검토하는 것은 시급하고도 절실하다. 개벽은 전 세계적 차원, 다양한 복층적 구조 안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전(道典)> 안에 수집된 수많은 어록 가운데 전문 과학자, 신비가나 미학자 이외에 서민 대중이 후천개벽의 대혼돈과 과도기를 통과하는 데에 참으로 절실한 나침반 노릇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조선 뱃노래'는 어떠한가?



강증산 선생은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지식인들처럼 망국(亡國)이나 개화(開化)로도, 화물숭배(貨物崇拜)나 동도서기(東道西器) 따위 짧은 안목으로 보지 않고 서방의 거대하고 장구한 물질문명의 중심이 동방으로 이동하는 장엄한 대 문명사 전환의 중심이동과정으로 보았다. 그 문명이 배를 타고 남조선으로 남조선으로 몰려들어와 드디어 동방에 온 세계와 인류와 전 중생계와 온 우주를 후천개벽하고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대전환, 즉 음개벽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강증산 선생이 목숨을 거두며 자신은 이제 서천(西天) 서방(西方)으로 건너가 그곳의 거대한 물질문명의 정수(精髓)를 모두 몰고 다시금 동방 한반도에 와 5만 년 후천개벽을 완성하고 미륵불의 용화세계(龍化世界)를 현실적으로 완성하겠다는 인식의 초과 달성이었다.



바로 그 이동이 지금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방 시장의 대위기와 동방의 새로운 가능성 사이의 자본과 마음의 장엄한 중심이동이 바로 선생의 남조선 뱃노래 안에 절절히 예감의 우담바라 꽃을 만개 시키고 있다.



선생은 '나는 한없이 악하고 한없이 선하다'는 한울님의 양가성(兩價性)을 단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목하 한국사회와 세계 현실에서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선악(善惡) 불가 융합성에 대해 본디 예수의 원수사랑에 입각한 선악의 상대성이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도성(中道性), 그리고 불교의 근본 중도와 동학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 역(易)의 생극(生克)의 상보성(相補性)이나 복승(複勝)의 은현교차성(隱顯交叉性) 모두를 압축하여 오늘 '한울님이 곧 부처님'이라는 근본적 화해에 목마른 민족 앞에 일찌감치 큰 빛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옥황상제 즉 한울님임에도 동시에 미륵을 자처함으로서이다.



선생은 분명 예언자였다.



19세기 이후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그 참혹한 고통과 침략과 분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와 한울의 가르침을 여러 비유로 제시해주었다.



그 중에도 가장 기억에 뚜렷한 것이 오선위기(五仙圍碁)와 대병겁(大病劫)이다. 민족의 분열과 동북아시아 사강(四强)의 포위에 관한 것이다.



네 신선 즉 사강이 내기바둑을 두는 데에서 주인 신선은 내내 바둑판만 공부하며 자리를 지키다가 네 신선이 드디어 자리를 뜰 때 그 네 신선의 바둑지혜를 모두 다 총괄하여 분열된(정지된 바둑) 자기를 통합하여 가장 뛰어난 세계 바둑꾼으로 몸과 지혜를 솟구치리라는 예언은, 참으로 가슴 후련한 우리의 미래관이다. 이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는 바로 그 바둑판으로 가고 있고 우리가 그 바둑 수를 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신령한 수를 내어놓을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 13년 내지 17년 안에 대규모 전염병 창궐로 세계 인구의 삼분지 이가 죽으리라는 대병겁의 예언이다.



현실의 진행과정이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수운 선생의 예언처럼 그 악질(惡疾)의 대공격 대상이 맨 먼저 우리나라라는 것이고 그때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 과정에 살아남은 민족이 세계를 구하고 우주를 바꾸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때 민족을, 그리고 인류와 전 중생계를 공격할 괴이한 병들을 미리 자신의 몸으로 다 앓으며 긴긴 시일을 독한 소주만 마시면서 미래에 고통 받을 민중의 아픔을 스스로 감당하였다. 그것은 곧 예수의 고통이었고 그것은 바로 모두를 놓아버린 석가모니의 해탈이었다.



우리는 지금 선생의 희생과 저 무수한 질병 앞에 자신을 드러낸 선생의 용기 위에서 후천혼돈을 맞이하는 진리의 촛불, 그 통과의례를 집행해야 한다. 그래야 그 뒤로 다가올 용화세계, 유리세계, 미륵세상과 만물해방의 하늘나라, 만사가 만사를 자력과 타력의 합반으로 깨닫는 화엄개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현대 서양의 최고의 지혜자였던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말한다.



'인류 역사의 대전환기에는 반드시 다가오는 새 시대의 삶의 원형(原型)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심오한 영성과 눈부신 지혜를 지닌 민족으로서 세계를 구원할 이상을 애초부터 제 안에 갖고 있는데 거듭되는 외침(外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