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4

유교와 조상숭배

유교와 조상숭배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    


(예장 노인대학 연합회 회보에서 발췌) 


" 유교의 윤리적 중심이 되는 충효사상은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써 대변하게

 하는 조상숭배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유교권 선교는 오랜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 


서언 


  유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보통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륜과

정치윤리론에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윤리적 중심이 되는 충효사상

은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대변하게 하는 조상숭배라는 뚜렷한 종교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유교권 선교는 오랜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끊임없이 시행해 오던 조상 제사는 유교의 종교적인 행사이고, 그 뿐 아니라

무속문화권에  토착화된 고등종교들과 사이비 이단종파들까지도 거의 예외 없이

시행해온  공통적인 의례이며, 심지어는 카톨릭 신자들과 일부 개신교도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처럼 무교적인 영성과 고등종교들의 범신론으로 가득했던

아시아에서는

 영들의 충돌이나 영분별이 요청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불.선교 및 힌두교와

그 이단들은 무교적인 다신론과 함께 병행주의 또는 포괄주의적인 형태로서

공존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문화권에서

만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선교사가

 배척을 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중국의 예수회선교의 경우처럼 제사를 용납하면

서 관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처럼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저지하고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라는(행 14:14-18)

 충돌을 겪을 것인가?

  갈라디아서 1장 6절부터 9절과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23절의 바울서신

내용이 나타내는 복음과 문화의 긴장관계는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음의

 유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사이의 갈등관계와 대조된다.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제시된 토착화 신학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하나는 조상숭배를 단순한 윤리적인 의례로 보아 허용하자는 입장이다. 조상숭배와의

타협과 충돌을 번복해 왔던 천주교회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입장이

 서로 다른 한쪽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현지 선교의 심각한 문제를 기피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 유교의 귀신숭배와 제시원리 


  고대의 의례에 관한 공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고전 '예기'(J B )는

백신(FzIw)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 {{ footnote }}  백신중에는 일월성신, 사방신, 천지산천, 죽은 사람들의

혼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

  그들은 또 괴상한 일을 하는 모든 것을 {{ footnote }}  신(Iw)이라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상제(G M )를 최고신으로 숭배했으며 모든 자연신들은 상제의 군신 내지는

하늘의 현현으로서 숭배했던 것이다. {{ footnote }}  이러한 자연숭배나 상제숭배

및 조상숭배

신앙은 은나라(BC1766~1123)시대의 제사와 정복에 관한 갑골문 16만편을  발견함에

{{ footnote }}

 따라 확실해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제의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 속에서 중국과 한국 초기의 카톨릭 선교를 통하여 크게 문제시된

 조상숭배에 대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대조, 연구함으로써 선교연구에

  공을 세운,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원의 카톨릭

신학대학 교수 최기복 신부는, 고대 조상들이 사후에도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 그들은 후손들이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고 하며 {{ footnote

}}  주대(BC

1222~247)에  이르러서는 신 중심적 관심으로부터 인간 중심으로 바뀌면서,

인격적이고 최고신으로 숭배했던 '상제'와 같은 뜻으로 'O '을 사용하고 점점

군왕의 통치와 덕복을  중심으로 내면화하게 되었다. 이 때에 '인간은 신의

주재자'이며, '백성은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 {{ footnote }} 까지 나타난다. 


%% 공자의 신앙 


  이러한 인본주의적 동향 속에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기근과 홍수와

 질병까지 돌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 {{ footnote }} 을 지도해야 하는 하나의

법무장관 {{ footnote }} 으로서,

 공자의 본래적인 관심은 인륜과 정치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재래 종교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는 윤리철학

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의 효도윤리는 무속신앙과 자연신앙이

혼합되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며, {{ footnote

}}  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는가? 생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듯하지만, {{ footnote }}  그가

귀신 숭배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귀신(대상)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과, {{ footnote }}   제사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조상 내지

귀신(Iw)이 살아  있는 듯이 대할 것을 가르쳤다. {{ footnote }}

  공자 자신도 귀신에게 제사할 때는 반드시 재계(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하고

 의복과 음식, 거처지까지도 구별하였다. {{ footnote }}  논어에는 공자가 식사

전엔 반드시

 고수레(음식을 조금 떼어 바침)를 하였다는 것과, {{ footnote }}  마을사람들이

푸닥거리를

할 때는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는 것과, {{ footnote }}  붉고 뿔이

반듯한 송아지를

산천의  신이 받지 않겠느냐

 {{ footnote }} 는 희생제에 대한 관심과 그의 자연신앙도 진술되어 있다. 


%% 귀신의 개념 


  공자의 개념 속에서는 신(Iw)과 귀신(B4Iw)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는다. 또

 번역가들도 그의 'Iw' 개념을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통유교에서

 '귀신' 또는 '귀'와 '신'은 인간론과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귀신이란 첫째로 신적 근원자를 일컬어 천(O ), 신, 상제, 기(B ) 등과

동일시되고

, 둘째로 만물의 생성(신)과 사멸(귀), 양의 신령(신)과 음의 신령(귀), 펴는

것(신)과 돌아 가는 것(귀), {{ footnote }}  산 사람(신)과 죽은 사람(귀) {{

footnote }} 을 일컫는다.

  성리학자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반은 신이며 반은 귀라고 하는데,  살았을

 때는 신(Iw)이 주(N\)가 되고, 죽은 후에는 귀(B4)가 주가 된다고 한다. {{

footnote }}  '예기'에는

 사람의 몸이 기(B )와 백(F{)이 있어, 전자를 신의 신기한 작용으로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기가 하늘로 또올라서 영원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 {{ footnote }}   후대에 성리학자들은 '예기'의 기와 백 대신에 혼(RH)과

백(F{)의 개념을

사용하며,  혼을 신(Iw)이고 백은 귀(B4)라고 생각하고, 이 혼과 백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갈라진다고 본다.

  혼은 천(O )으로 돌아가고 백은 지(N )로 돌아가, 혼백은 산화되어  일원기(L K

B

)로 돌아감으로써 고유성이나 개체성은 더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교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신화론은 무속신앙과 결합되어 완전소멸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감흥으로 죽은 자의 현재를 경험하는 강신술(spiritism)과 혼합되었다. 유자들은

 원한에 맺혀 죽거나 흉사의 경우엔 혼이 산화되지 않고 한동안 요괴가 되어

'신적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 footnote }}

  위와 같이 성리학은 사령이 근원자로 돌아가 원기(K B )가 되고 기가

산화될지라도

 오히려 그 이(L ;태극과 동일시됨)는 없어지지 않음으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제물을 흠향할 수  있다 {{ footnote }} 는  범신론적  신인동격

사상과  무속적

 강신신앙(spiritism)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조상숭배 제의이다. 유교의 범신론적 사상체계

속에서 조상신은 천신(O Iw)과 본질적으로 동일시되고, 조상숭배가 바로 천(O )

숭배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 조상은 유교에서 유일한 숭배 대상이 되고 있다. {{

footnote }} 
 


%% 성(Hu), 효와 귀신 숭배의 동일 


  유교의 상제례에서 절대적인 요소는 성(Hu)이다. 보통 지성 또는 정성으로

 이해되는 성자(HuL )는 중용에서 만물의 마침이며 시작이라 하고 성실(Hu)하지

 않으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실(Hu)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고 만물을 이룬다고도 하고,  지극한  정성(Hu)은

신과 같은 것 내지 귀신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Iw,K ,B4Iw). {{ footnote

}}

  성(Hu)이란 위와 같이 만물실존의 근거일 뿐 아니라 도덕 실천의 근거로써

 중요 20장에서는 도를 아는 지식(도란 여기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5륜을 말함), 도를 체득하는 인(L ), 도를 실천하는 용기,

즉 지,  인, 용(N , L , Ky)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유교의 개념

중의 하나이다.

  또 18세기 한국 천주교도 이벽(1754~1786)에 의하여 설명된 유교의 정성(Hu)이란

제사 지낼 때 귀신(내지 신)을 파악할 수 있고 귀신을 전할 수도 있게 되는

개념으로서 {{ footnote }}  '음,양' 귀신은 본래 초감각적 이지만 그것이

가감각적(@ @N@%Ms)이

되는 것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상을 제사지낼 때 발현하고,  가장

보편적으로는

  음, 양, 기(B )가 여러가지로 결합함으로써 가감적인 형태를 지닌 물체가

형성될 때 발견된다 {{ footnote }} 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제사드릴 때는 성(Hu)에 의하여 귀신의 존재 여부가 결정되고,

제물의 흠향여부가 결정된다. 율곡도 산 사람이 성경(Hu@ )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거처하신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하던 것, 즐거워하던 것,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사고가 완연히 목전에 계심을 보게 될 때  '산화된

 기(B )'가 이에 격감한다는 것이고 기(B )가 소멸되었더라도 이(L )가 역시

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footnote }}

  그러므로 제사와 성(Hu)은 부모사별을 막는 효행으로 절대시되고,효도의

실행원리가 된다.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기'(J B )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성(Hu)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계의

과정에서 실현된다. 10일간 욕망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음악을 듣지 않고 부정을 피하며 재계함으로써 신령을

 맞을  준비를 하면, 고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고, 제삿날엔 고인의

영혼이 그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든다.

  효애(R I )의 마음이 골몰하면 부모의 영혼이 눈앞에 떠오르고, 효경(R @ )의

정성을 다하면 영혼이 그에 감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을 피워 혼(RH)기를

모시고 술을 부어 백(F{)기를 모셔서 합일시키고 신령을 감흥케 한다는 것이다. {{

footnote }}

 영혼의 감흥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자 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상제례는 완성이 된다.

  신령이 내 안에 있다는 느낌은 슬픔과 공허감을 안정시켜 주고 사자와  일체감과

통교를 느끼는 것이다. {{ footnote }}  '예기'는 귀신의 실재에 대하여, 사람이

죽으면 그 정기가

뭉쳐서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신령이

 강림하면 곧 사라져 버릴 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 footnote }}

  이와 같이 유교는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여 귀신을 섬기고 이를

 효로서 못박아 절대시하였다. 예기는 예(J )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 하고

제사의 10가지 윤리 중에 그 첫번 것을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 {{

footnote }}

  제의의 목적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귀신과 동하게 하는 것과 도의를 흥하게

하는 것으로서, 제사를 통해서 효가 시행되고, 효자가 아니면 부모를 제사할

수도  없다고 한다. {{ footnote }}   효성을 측정할 때는 첫째 생시에 부모를

봉양하며 그 효순(R I&

)으로서 효를 측정하며, 둘째 부모가 죽으면 상례를 시행하되 그 비애의 강도로서

효를  측정하고 셋째 상례 후에는 제사를 지내며, 그 경애함과 정기적인 제사로서

효를  측정한다. {{ footnote }}

  유교 제의의 이러한 양면적(효와 우상숭배)인 의미는 기독교 선교에 엇갈린

견해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본보기를 중국 카톨릭 선교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 전략 


  예수회의 선교 전략에 대한 평가

  예수회는 유자들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 때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어 한문을 연구하며 스스로를 서유(H L )라고 칭하고, 서양인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하면서 중국인의 호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 {{ footnote }}

  이러한 선교 전략은 보통 문화순응설(accomodat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약 반세기 후에 중국에 입국한 도미니크회(Dominikaner 1631)와

프란체스코회(Franziskaner 1633)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혼합주의라고

비난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鑁.

  이들은 조상숭배와 공자 공경 의례를 미신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상제라는

개념도 태극보다 하위개념임으로 오직 천주만을 신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노센스(Innocenz) 10세는 1648년 조상숭배와 공자공경

의례를  금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이들의 17개 항질의서가 시골 무식층과 접촉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함으로써(1651),알렉산더(Alexander) 7세는 1656년에 다시

 미신적인 것이 제거된다면 사자(G L )에 대한 공경의식을 허락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또 다시 도미니크회(Dominikaner)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청은

마침내 1699년 위의 두 훈령을 종합하고 말았다. 즉 1656년에 내린 관용 결정이

 1648년의 금지결정을 무효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훈령에 언급한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하며, 제기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 {{

footnote }} 


  이와 같은 제의 논쟁은 유교권에서 오늘까지 계속되면서 효성이나 우상숭배의

그 한쪽만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을 무시하려는 경향이었다. 1664년에  일어난

 박해 후에 1668년 중국 선교사들은 42개의 조항을 발표하였다. 제41항은 그들이

왜 적응주의적 선교 방책을 택하였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중국인에게 구원의 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

footnote }} 


  사실상 1692년부터는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의 관용령으로 {{ footnote }}

예수회는  법적으로

포교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Clement) 11세가 중국의 제사를

우상숭배로 정함에 따라 예수회는 강희제의 후계자  세종(1721년  즉위)과

고종  황제(1736년 즉위)의 광폭한 핍박과 순교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회는 북경에

머물 수 있었으나 교인수는 줄어들고 교회는 황폐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 footnote }}   그러면 예수회가

취한  적응주의적

선교방버은 전략적으로 합당한가?  물론 악습을 변경하는 일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659년의 훈령과 같이 악한 습관을  변경시킬

 때에 자제와 침묵으로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에 하라 {{

footnote }} 는

 지시는 옳다. 문제는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미신적인 의례에 참여해야 하는

순응주의적 선교 전략이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선교는 충돌과 배척으로 인하여 차단되어도 안 될 것이고, 관용과 타협으로

진리의 절대성이 파괴되어도 안 될 것이다.  하르텐스타인(K.Hartenstein)이

 1933년에 혼합주의는 성경적 증거가 파괴된 아주 위험한 하나의 '새로운 종교'라고

 하는  경고를 기억해야 된다. {{ footnote }}

  한신대 박근원 박사는 유교의 제례에 관하여 진술하며, 현대는 제사를 지내며

절할 때 자기 조상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 footnote }} 고 일축해 버린다.

왜정시대

 신사참배시에도 역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다만 황실이 선조와 그 덕을

찬양할 뿐이라고 하여 기독교인을 참여시켰고, 예수회도 조상제사를 숭배가

아니라 추모와  효성이라 하여 허용하고, 신주를 귀신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자손의 사모지심의 의지처라고 하여 허용했던 것과도 일맥 통한다.

  현대 천주교와 일부 개신교 역시 같은 입장에서 이를 허용하고, 조상제사도

지내고 주일예배도 드리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현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 대상 없이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무속시대로 부터

유자들을 통해 지금까지 숭배해 왔던 불멸의 영혼(또는 B  내지 L )에 대한

신앙이  현대에 와서 잊혀졌거나 파괴되었다는 말인가?  사실 제사행위와

숭배행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제물을 바치는 것이 혹 숭배행위가 아니라고

고집할지라도,  귀신(죽은 조상)과의 친교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기도는 하지 아니할지라도, 사자(G L )와 분리되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현대의 유자들도  세속시대에 살면서 불가지론적이거나 불성실해질 수는 있으나,

영혼불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연령층이 될수록 조상숭배는

더욱 실제적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회와 기독교가 다 우상숭배를 옳다고

 동의한 일은 없다. 동의하는 사람들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전제해 놓고 찬성하는 것이었다. 조상숭배에 개방적인 입장인 박근원

박사도 "제사가 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예식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라고 못박고 있다. {{ footnote }}

  비록 천주교가 마리아 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성도들의 통공(P Af)의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조상숭배의 맥락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에 제사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유교의 제의가 효와 조상숭배가 뗄 수 없이 연합되어 있어서, 둘 중에

하나만을 기호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위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유교제례의

 숭배 대상은 사령임을 논란할 필요도 없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유교식 상례는

불명의 영혼을 위해 초헌(혼을 불러 회복시킴)과 3헌제(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와 위령제(시체매장 후 무덤 앞에서 드림)등을 드리며 상제례를

거행하고  사당에 죽은 조상의 이름을 새긴 신주를 모시고 제물을 드리며 사건을

고하면서 죽은 자와의 교통을 꾀하고 있다.

  예수회나 천주교의 교황청이 중국의 조상숭배를 효성으로서 해석한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카톨릭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제거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근거 있는 진술도 하지 못했다. 
 


  조상숭배 문화권에 대한 선교 전략적 제언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 전략이라면, 우리는 지금 선교적 불모지가 되었던

중국보다는 한국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무방하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유교와

한국의 3대 제일(N L )인 기일(B L )과 추석과 정월 초하루의 절기를 접촉점으로

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첫째로는 기일에 귀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변조한

추도회가 있다. 추도회는 선교적 측면에서 비기독교인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교회 담을 넘어서 봉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추도회는 복음의

 수용도가 비교적 높은 감정 상태와 접하게 되고, 인간의 한계성, 죽음, 사후

세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가 더욱 긴박하게 요청된다.

  그러나 추도회에는 종래의 제례와 잘 분별되지도 않은 채 어떤 변이된 형태의

조상숭배로 알고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끼어든다. 이 때 집례자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포용하고 메시지를 통해서 계몽한다. 일부 신자 중에서도 이런 혼돈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추도회에 관한 철저한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추도회 진행 중에 재래 우상숭배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추도식 거행자와 그렇지 못하고 귀신과 연합하고자

하는 추도식 동참자들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젯상을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려는 고집과, 그것을 거절당했을 때의

섭섭함을 숨기지 못하는 신자들의 갈등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무엇을

전했는가보다 그들이 무엇을 받아들였는가이다. 전한 메세지와 전달된 메세지는

같은 것이어야 한다.

  추도회는 귀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며, 그

공경과 추모의 대상이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효도의 대상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라는 점이다. 고 윤성빈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을 효의 표본이며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게 하는 토착화론을

 제시했다. 그것도 일리가 있으나 효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기독교가 전통문화의 아름다운 유산인 효행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조상숭배와

효행을 다 거부하는 문화 파괴론자로 나타날 것이다. 기독교가 도덕의 근본을

허물어 버린다는 유자들의 비난에 대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길은 효행, 바로

 이것뿐이다.

  죽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산 사람에게의 효행이다. 효행을 통해 전통적인 고부

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가정은 화목하게 될 것이며, 유자들은 예수 믿는 며느리를

 구할 것이 아니겠는가? 효를 이어나가는 것이 제사의 중요한 목적이 되기에

추도회를 통해서 역시 가족 공동체의 화목을 꾀하며 전통적인 대가족 문화 유산에

충돌을 빚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로는 추수 감사를 가장 큰 명절인 추석에 지내는 것이다. 이날을 총동원

 주일로 지켜 온 가족이 전통적으로 지키던 중추절 감사제를 교회로 나와 지키는

것이다. 또 둘째 날은 무덤에서 예배는 드리지 않더라도 성묘를 하여 조상의

덕은 기리고, 가족이 화목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한다.

  전통 성묘와 달라진 것은 예배 대상과 예배 형식일 것이다. 추수한 예물은

 젯상에 놓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강단 앞에 놓고, 젯상 앞에 구부려 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귀신이 내려준 음식을 음복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애찬을  나누고 친교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월 초하루 명절 행사를 부흥사경회로 모이는 것이다. 무속문화에서

익숙해진 한국인의 기복신앙은 범신론자들과는 반대로 타력구원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적 장점이 있다. 신자들의 다수는 기복 신앙적인 이기적이고

유치한 단계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유행이 되고 있는

 '신년  축복성회'의 일반적 동기가 그렇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예수께 나아왔던 열 문둥이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보통 인간의 욕구이다. 신년 축복성회를  개최하는

것이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되어버릴 위험도 있으나 새해 첫날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을 구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은가?

  교회는 평소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기복신앙에 머물지 않도록 잘  양육을

 해야 할 것이다. 태양신을 섬기던 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독교적으로 경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고, 우상숭배를 완전히 제하고 기독교적 신앙으로

대치해  버렸다.

  조상숭배를 중심으로 모였던 과거 유교적인 명절이 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명절이 되며, 아름다운 문화적 덕목인 효행을 기독교에서 실행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은 종교성이 약하고 형식화한 유교윤리에 접목되어 그 활기를 찾게 될

것이다.

  유교권 선교의 심각한 문제는 바로 효행이다. 안일하고 세속적이며 이기주의적인

현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참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 효행 없는 유교권 선교는

 생각하기 어렵다. 효행 없는 복음전도, 선행 없는 기도생활... 이것은 오히려

유교권 선교를 가로막는 역할이 될 것이다.

  문제는 조상제사를 포기함으로써 효성을 실행하는 일이 좌절될  때,  선교사들이

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천주교는 오히려 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것이다. {{ footnote }}   기독교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뿐만이

아니라, 제사 때에 우러나오는 지성과 효를 능가할 만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면, 유교권 선교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기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다.

  세속화 시대의 개인적, 사회윤리적인 부패와 타협, 이것이 교회 안에 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효를 실행하겠는가? 우리는 우상숭배와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대로 살아 있는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한다.  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이것이 조상숭배 문화권에서의 선교의

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업에 앞서 교회의 복음화운동과 회개운동이 더 불가피하게

 여겨진다.

  넷째는 신학의 '토착화'이다. 이미 이조시대에 천주교  학자  이벽(1754-1786)은

유교의 중심 교리 중에 하나인 성(Hu)이라는 개념을 기독론에 연결함으로써

토착화를 시도했다. 그는 성(Hu;일반적으로 지성 또는 정성으로 앎)을 글자

풀이 하여 말씀(J4)이 이루어짐(Hj),즉 성육신으로 설명했다. 이벽은 바로

기독론을  성(Hu)에 접목시킨 첫번째 토착화 신자이다.

  그는 성(Hu)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설명한다. "성(Hu)을 지니고 있는 자는 그의 인간적인 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하니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에 내재하는 성령의 작용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 footnote }}

  이벽이 성령을 인간 속에 내재하는 작용이라고 설명한 것은 성령이 인간

사역의 주체가 됨을 말하나, 성령을 인격이라고 보기보다는 비인격적인 힘과

적용으로  읽혀짐에 따라, 오히려 유교 범신론적인 기(B )와 혼돈될 수 있는

개념이다.  현대에 와서 고 운성범 박사는 성(Hu)의 신학을 저술하고 이벽과

마찬가지로 성(Hu)을  풀이하며 '말씀이 이루어짐'내지 '참말'(Tat-Wort, Wort

Tat) {{ footnote }} 이라  하고,  동양에서 낯선 '계시'라는 개념 대신에 사용할

것을 제시했다. {{ footnote }}

성(Hu)의 임잰는 말씀의  임재요(p.105) 성(Hu)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참

 말씀이며,  말씀의  성육신이고(p.34) 도이며, 로고스라고 한다. 또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간','사람과  사람과의 중간'그리고 '삶과 사물과의 중간'이 바로

성(Hu)이라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성(Hu)의 완성이라 하였다(p.901).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p.48).

  이와 같이 윤성범 박사도 이벽과 마찬가지로 성(Hu)을 성령으로 보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의 생명을 통해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p.104).

윤 박사의 성(Hu)개념은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영, 사령, 귀신과도 혼돈하는

 '영'의 개념이 아니라,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며 신적 본질로 묘사하고 있다. 


  윤 박사가 신학적으로 위에 진술한 것처럼, 정서으이 효력을 통하여  흩어진

 기(B )가 모아지기도 하고 산화되었던 귀신이 다시 형체가 되기도 하고, 만물이

존재하게도 되는 범신론적인 유교적 개념을 통하여 화육하신 하나님과  계시와

 성령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Hu) 개념은 인간을 신적 위치에 두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하려는

인간 신격화의 환상에 빠질 위험이 있는 개념이며, 또 인간의 정성을  통한

 성취, 노력에 의한 구원관 등으로도 발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Hu)이나

또는 다른  범신론적 개념에 의하여 신학을 토착화하려면, 머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명시하고, 신인동격 사상의 위험을

방지하여 인간 기질의 무능과 타락, 죄악으로 인한 파멸을 알게 하며, 또 구원받은

사람조차  철저한  신의존(IwLkN@)에 의한 구원 내지 사역이 있을 뿐, 결코

하나님의 위치에 서거나  대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결어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일은 보렌(R.Bohr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관혼상제

의식집행은 복음선포(Kerygma)외 교제(Koinonia)와 봉사(Diakonia)와  선교적

 기회이며, 교회와 세상의 동반자적 기회로서 좋은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 footnote }}

 우리는 유교의 제례가 기독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효성과 우상숭배의 혼합문화권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선교학적 문제는

이것이다.

  %% 기독교가 유교의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 주어야 한다.

  %% 종교적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바른 신앙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혈연 공동체를 형성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 제자 양육을 통한 교회의 자립과 자력전파의 토착화의 실현이다. 


  크래머(H.Kraemer)가 지적한 대로 유교와 다른 고등종교들은 보통 교리적

차이나 대립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이들은 관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긴다. 이들은 진리 문제가 타오르면

곧 바로 투쟁적이 되고 핍박한다.  그것은 진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동기로 일어난다.

  크래머(Kraemer)는 이러한 비관용성(Unduldsamkeit)을 '가상적 관용' 또는

'표면적 관용'(Schein Duldsamkeit)이라고 칭한다. {{ footnote }}   그러므로

현지인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 공동체 속에 머물러서 더욱 사랑을 실천하고 효행으로

본이  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착한 사람들이고, 전통문화의 파괴자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 유교 문화권 선교사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고, 사역할 때마다 부딪히고 복음과 함께 배척을

당할 것이  아니라,  속히 충실한 현지인 제자들을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전달자와의 이질감을 축소시켜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 배척을 받을지라도  복음은 살아남아야 한다.

  주의 말씀이 흥황하던 두란노서원에서는 현지인들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스스로 그 책을 불사르니 은 오만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행 19:18 이하).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 스스로가 악습을 폐지할 것이다%R 
 
 
 
 


예기 23, 제법. 맹자도 FzIw신앙을 묘사하며, 순임금이 제시한즉 백신이 흥향하니 


O 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맹자 9반장 G  5)

  예기 24.제의.

   금장태,선진유교의 제례<기독교와 관혼상제> 박근원 편, 전망사 1984.

pp.260~266.

   lbid, p.256.

   최기복, 유교와 서학의 사상적 갈등과 상화적 이해에 관한 연구, (Diss)

성균관

대학교 1988.p.90.

    금장태, p.271 하~ 296. 맹자에 이르러도 O 과 FzIw(맹자9만장 상5, 14진심Q\1 


4)과 상제에 대한 신앙은 그대로 전술되고 있다(맹자 8이무 Q\25 : 악인도

재계목

욕하면 상제에게 제사할 수 있다). 
 


   Wilhelm, R., Lao-tse und der Taoismus. Stuttgart 1925.8,12,16.

   Forke, A, Geschichte der alten Chinesischen Philosophie, in;Abhandlungen 


aus dem Gebiet der Auslandskunde Bd.25,Hamburg 1927,pp.99~103."Justizministe- 


rn".

   논어6 옹야20.

   논어11 선진11, 맹자는 성스러워서 할 수 없는 것(불가지한 것)을 신이라고


였다(맹자 14 진심Q\25)

   논어2 위정24.

   노어3 팔일12.

   논어10 향당7.

   lbid.10향당 8.

   lbid, 10향당10.

   논어6 옹야4. 공자의 자연신앙은 맹자에게도 전승되어, 깨끗한  희생제를

 사직(흙귀신과 곡식귀신)에게 드려도 가뭄과 홍수가 나면 사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맹자 14 진심 Q\ 14). 이 토신제는 이조시대에도 주자와 율곡의

주장대로  사시제를 지낸다음에 행해졌고 토신에게 복을 주기도 했다.(김춘동,

한국J 속사<한국민속대관 1. 흥일식 편, 서울 1980, p710)

  중용 16장.

   예기 23 제법.

   최기복,p110f.

   예기 24 제의

    최기복,pp  114~116.  157.219.  M.Ricci,천주실의(이수응  역).   분도출판사

1988.p66.Ricci도 비명에 죽은 사람의 기가 흩어지지 않는다는 당시 중국인의

사상을 기록하고 있다.

   유승국, 한국의 유교 <교양국사 총서>,민족문화 추진회 1977, p305f. 부록

693f

   금장태 p256

   중용24장.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선교

kcm 한국컴퓨터선교회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자료집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선교


여는글
유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보통 하나의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륜과 정치윤리에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유교권 선교는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끊임없이 시행해 오던 조상제사는 유교의 종교적인 행사이고 그뿐 아니라 무속문화권에 토착화된 고등 종교들과 사이비 이단종파들까지도 거의 예외없이 시행해온 공동적인 의례이며,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과 일부 개신교도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입장이다. 한국의 경우처럼 무교적인 영성과 고등종교들의 범신론으로 가득했던 아시아에서는 영들의 충돌이나 영분별이 요청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불선교 및 힌두교와 그 이단들은 무교적인 다신론과 함께 병행주의 또는 포괄주의적인 형태로서 공존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문화권에서 만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선교사가 배척을 받지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중국의 예수회 선교의 경우처럼 제사를 용납하면서 관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처럼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저지하고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라는 (행14:14-18) 충돌을 겪을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제시된 토착화 신학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조상숭배를 단순한 윤리적인 의례로 보아 허용하자는 입장이고,다른 하나는 단순한 종교적인 의례로 보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상 숭배와의 타협과 충돌을 번복해 왔던 천주교회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입장이 다 그 다른 한쪽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현지인의 심각한 문제를 기피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I. 유교의 귀신숭배와 제사원리

고대의 의례에 관한 공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고전 예기는 백신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1) 百神중에는 일월성신,사방신,천지산천,죽은 사람들의 혼 등을 다 포괄하고 , 그들은 괴상한 일을 하는 것2) 을 신이라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상제를 최고 신으로 숭배했으며 모든 자연신들은 상제의 군신 내지 하늘의 현현으로 숭배했던 것이다.3) 이러한 자연숭배나 상제숭배 및 조상숭배 신앙은 은나라(1766-1123)시대의 제사와 점복에 관한 갑볼문16만편의 발견4)에 따라 확실해진 것이며, 그들의 삶은 제의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 속에서 중국과 한국 초기의 가톨릭 선교를 통하여 크게 문제시된 조상숭배에 대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대조 연구함으로써 선교연구에 공을 세운 성균관 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원의 가톨릭 신학대학교 교수인 최기복 신부는 고대 조상들이 사후에도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그들은 후손들이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5) 그러나 주대(1222-247)에 이르러서는 신중심적인 관심으로부터 인간중심으로 바뀌면서 인격적이고 최고 신으로 숭배했던 "상제" 대신에 "天"을 사용하면서 군왕의 통치와 덕목을 중심으로 내면화하게 되었다.이때에 "인간은 神의 주재자"이며,"백성은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6)이 나타난다.

1. 공자의 신앙

이러한 인본주의적 동향 속에서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기근과 홍수와 질병까지 돌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7)을 지도해야하는 "법무장관"8)으로서 공자의 본래적인 관심은 인륜과 정치윤리에 있었다. 그는 재래 종교들에 대한 비판이나 거절이 아니라 수용적인 입장에 선 윤리철학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효도윤리는 무속신앙과 자연신앙과 혼합되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며9),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는가? 생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듯 하지만.10),그가 귀신 숭배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귀신(대상)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과11),제사할 때는 반드시 재계(몸과 마음을 깨끗히 함)하고 의복과 음식과 거처지까지도 구별하였다.13) 논어에는 공자가 식사 전에 반드시 고수레(음식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는 것과14),붉고 뿔이 반듯한 송아지를 산천의 신이 받지 않겠느냐16) 는 희생제에 대한 관심과 그의 자연신앙과 진술되어 있다.

2. 귀신의 개념

공자의 개념속에서는 신과 귀신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고, 또 번역가들도 그의 '신'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선진유교에서 "귀신"또는 "귀"와 "신"은 인간론과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귀신이란 첫째로 신적 근원자를 일컬어 ,天,신,상제,氣등과 동일시되고, 둘째로 만물의 생성(신)과 사멸(귀)17),산사람(신)과 죽은 사람(귀)18)을 일컫는다. 성리학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반은 신이며 반은 귀라고 하는데, 살았을 때는 신이 주가 되고, 죽은 후에는 鬼가 주가 된다고 한다.19) "예기" 에는 사람의 몸이 氣와 魄 이 있어, 이를 역시 신의 기한 작용과 혼의 신기한 작용으로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기가 하늘로 떠올라서 영원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20).성리학자들은 에기의 기와 백 대신에 魂과 魄의 개념을 사용하며, 혼은 신이고 백은 귀라고 생각하고 사람이 죽음으로써 혼과 백은 갈라진다고 본다. 혼은 天으로 돌아가고 백은 地로 돌아가, 혼백은 산화되어 一元氣로 돌아감으로써 고유성이나 개체성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교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산화론은 무속신앙과 결합되어 완전소멸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감흥으로 사자의 현재를 경험하는 spiritism(강신술)과 혼합되었다. 유자들은 원한에 맺혀 죽거나 흉사의 경우엔 혼이 산화되지 않고 한동안 요괴가 되어 "신적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21)

위와 같이 성리학은 사령의 근원자로 돌아가 일원기가 되고 기가 산화될 지라도 오히려 그 理는 없어지지 않음으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제물을 흠향할 수 있다22)는 범신론적 신인동격 사상과 함께 무속적 spiritism의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두가지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조상숭배 제의이다. 유교의 범신론적 사상체계 속에서 조상신은 천신과 동일시 되고, 조상숭배가 바로 천숭배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조상은 유일한 숭배대상이 되고 있다.23)

2. 誠一효과가 귀신숭배의 통일

유교의 상제례에서 절대적인 요수는 성이다. 중용에 성자는 물의 마침이며 시작이다. 성하지 않으면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고 물을 이룬다.24) 고 한바와 같이,제사드릴 때는 성에 의하여 귀신의 존재여부가 결정되고,제물의 음향여부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율곡도 산 사람이 誠敬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거처하신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하던 것,즐거워 하던 것,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사고가 완연히 목전에 계심을 보게 될때 "산화된 기가 이에 격감한다는 것이고 기가 소멸되었더라도 理가 역시 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25) 그러므로 제사와 성은 부모사멸을 막는 효행으로써 절대시 된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큰 악덕이다. 예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성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계의 과정에서 실현된다. 10일간 욕망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음악을 듣지 않고 부정을 피하며 재계함으로써 신령을 맞을 준비를 하면, 고인의 모습이 느껴지고,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든다. 효애의 마음이 골몰하면 부모의 영혼이 눈앞에 떠오르고, 효경의 정성을 다하면 영혼이 그에 감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을 피워 혼을 모시고 술을 부어 魄기\'b8� 모셔서 합일시키고 신령을 감흥케 한다는 것이다.25) 영혼의 감흥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자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상제례는 완성이 된다. 신령이 내안에 있다는 느낌은 슬픔과 공허감을 안정시켜주고 사자와 일체감과 통교를 느끼는 것이다.27) 예기는 귀신의 실재에 대하여,사람이 죽으면 그 정기가 뭉쳐서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신령이 강림하면 곧 사라져버릴 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28)

이와같이 유교는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여 귀신을 섬기고 이를 효로서 못박아 절대시하였다. 禮記는 禮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 하고, 제사의 10가지 윤리 중에 그 첫번 것을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29) .제의의 목적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귀신과 통하게 하는 것과 도의를 흥하게 하는 것으로써,제사를 통해서 효과가 시행되고, 효자가 아니면 부모를 제사할 수도 없다고 한다.30).효성을 측정할 때는 1.생시에 부모를 봉양하며 그 이순으로써 효를 측정하며 2.부모가 죽으면 상례를 시행하되 그 비애의 강도로서 효를 측정하고, 3. 상례 후에는 제사를 지내며,그 경애함과 정기적인 제사로서 효를 측정한다.31) 유교 제의의 이러한 양면적(효와 우상숭배)인 의미는 기독교 선교에 엇갈린 견해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본보기를 중국 가톨릭 선교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II. 천주교 유교제의에 관한 이해

1. 선진 유교에 대한 이해

중국 전통유교에 호의를 가지고 조상제사와 공자숭배 의례에 대해서 수용적인 자세로 접근한 예수회(Jesuit)는 유교를 인간 본성에 따라 조물주를 경외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종교로써 천주교의 기본교리에 위배되지도 않는다고 보았으며,유교의 제의를 종교의식이라기 보다는 단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의례로서 받아들였다. 예수회는 조상제사에 대하여 "생시와 같이 계속 애정과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여 사자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제물을 먹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사자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에게 무엇을 구하지도 않는다"고 변호하고,공자 숭배 의례도 "공자를 신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先師로 생각하여 감사드릴 뿐이요, 그에게 기도문을 염하거나 어떤 청원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예수회는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를 천주교와 접목시켜 천주의 존재론과 영혼 불멸론, 사후 천당 지옥설,愛主愛人의 도를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32),선진유교가 천주를 섬겼다는 것을 유교경전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2. 신 유교에 대한 이해

그러나 예수회는 송대(960-1279)의 신유교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Matteo Ricci는 성리학의 태극론과 이기론을 무신론이라고 배척하고,천주를 상제와 동일시하여,상제에게는 제사를 하나 태극 또는 理에는 제사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태극에서 만물이 생성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천주가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했다고 하여 상제는 창조자이고 또 심판자라고 가르쳤다 33).Ricci는 또 사후인간은 귀신이 아니라 선령(천당에 간 영혼)과 악령(지옥에 간 영혼)으로 칭할 것을 주장하고,인간의 영혼은 타물로부터 생출한 것이 아니라 천주의 창조물이고 자립체임으로 신체가 소멸해도 불멸자존한다고 설명하였다.34).물론 이 "자립체"또는 "불멸자존"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icci는 태극을 物자체도 아니고 物의 성분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가르침이 유교 경전이나 성현들의 가르침에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36) 그러나 선진유교를 들어 신유교 학자들을 비판하며 천주교와 동일시하려던 바로 그점이 Ricci의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Ricci의 선진유교가 무속신앙과 혼합주의를 형성했고,처음부터 범신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고 고대의 상제숭배 신앙만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유지들의 비판 거리가 된 것이다.

M.Ricci는 신유교의 영혼산화론에 반하여 영혼불멸론을 주장하고 이를 선진유교의 사상에서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36) 그는 또한 성리학의 조상제사를 허례라고 비판하고 기독교인(선령)은 죽어 천국과 영복으로 비 기독교인(악령)은 지옥과 영벌로 떨어짐으로 산자와 죽은자의 통감은 불가능하고,제사가 사자의 영혼에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을 뿐더러,죽은 영혼이 제사를 흠향하러 세상에 올 수도 없고,제사는 오히려 악마가 흠향하고 선조가 영혼이 임재한 것처럼 속인다고 하였다. 또 마귀를 섬기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37) 이것은 신유교 학자들의 반감과 반박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회는 조상제사를 허용했으나 추모와 봉헌으로써 이해했고 신령과의 감격은 부인했다. 또 신주를 허용하면서 거기에 혼이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사모지심의 의지처로써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생각 속에서 그 철학적 본질이 파괴될리는 없다. 결국 예수회는 유교의 상제례를 관용함으로써 우상숭배 행위를 허용하고 만것이다. 어떻게 조상숭배로부터 효성을 장려하면서 미신을 분리해낼 수 있겠는가?

III.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전략

예수회는 유자들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때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고 한문을 연구하며 스스로를 서유(西儒)라고 칭하고,서양인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하면서 중국인의 호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38)그러나 예수회보다 약 반세기 후에 중국에 입국한 Dominikaner(1631)와 Franziskaner(1633)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혼합주의라고 비난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조상숭배와 공자공경의례를 미신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상제라는 개념도 태극보다 하위개념임으로 오직 천주만을 신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Innocenz10세는 1648년 조상숭배와 공자공경의례를 금하게 되었다(1651).그러나 예수회는 이들의 17개항 질의서가 시골 무식층과 접촉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함으로써(1651), Alexander7세는 1656년에 다시 미신적인 것이 제거된다면 사자에 대한 공경의식을 허락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또 다시 Dominidaner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청은 마침내 1669년 위의 두 훈령을 종합하고 말았다. 즉 1659년에 내린 관용결정이 1645년의 금지 결정을 무효화 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훈령에 언급한 모든것을 다 지켜야하며,제기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39) 위와같은 제의논쟁은 유교권에서 오늘까지 계속되면서 효성이나 우상숭배의 그 한쪽만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을 무시하려는 경향이었다. 1664년에 일어난 박해 후에 1668년 중국 선교사들은 42개의 조항을 발표하였다. 제41항은 그들이 왜 적응주의적 선교방책을 택하였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중국인에게 구원의 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사실상 1652년부터는 예수회만 법적으로 포교의 자유를 누렸고, 그들이 그때부터 1705년까지 얻은 신자는 30만명이나 된다는 것이다.40) 그러면 예수회가 취한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은 전략적으로 합당한가? 적대감을 피하기 이해서 미신적인 의례에 참여할 수 있으며, 1659년의 훈령과 같이 악한 습관을 변경시킬 때에 자제와 침묵으로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하라41)는 지시는 옳은가? 물론 악습을 변경하는 일은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거이다. 문제는 적응주의적 선교전략이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선교는 충돌과 배척으로 인하여 차단되어도 안될 것이고, 관용과 타협으로 진리의 절대성이 파괴되어도 안될 것이다.1931년은 혼합주의의 필연성을 주장한 H.W.Schomerus는 선교의 과정으로써 전통적인 것이 형성되거나 개종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42)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K.Hartens- tein은 1933년에 혼합주의는 성경적 증거가 파괴된 아주 위험한 하나의 "새로운 종교"라고 경고하였다.43) 이조시대에는 불명의 영혼을 위해 위령제(혼을 불러 회복시킴)과 3헌제(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와 사당에 죽은 조상의 이름을 새긴 신주를 모시고 제물을 드리며 사건을 고하면서 죽은 자와의 교통을 꾀하였다.

현대는 박근원 박사의 진술처럼 제사를 지내며 절할 때 자기조상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44)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면서 유교의 제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과거 예수회나 현대의 천주교인들처럼 조상제사도 지내고 주일예배도 드리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현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 대상도 없이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무속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숭배해왔던 불명의 영혼(또는 氣내지 理)에 대한 신앙이 현대에 아서 잊혀졌거나 파괴되었다는 말인가? 현대의 유자들도 영혼불멸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세속시대에 살면서 불가지론적이거나 불성실해질 수는있다. 그러나 그것이 조상숭배를 더 추구하고 있는 형편이며, 고연령층이 될수록 조상수배는 더욱 실제적이 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회와 기독교가 다 우상숭배를 옳다고동의한 일은 없다. 동의하는 사람들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전제해 놓고 찬성하는 것이었다.조상숭배에 개방적인 입장인 박근원 박사도 "제사가 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예식이라면...그것은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라고 못밖고 있다.45) 비록 천주교가 마리아 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성도들의 통공의 신앙을 가졌을 지라도,조상숭배의 맥락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에 제사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유교의 제의가 효와 조상숭배가 뗄수없이 연합되어 있어서 둘중에 하나만을 기호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데 있다. 위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유교제례의 숭배대상은 사영임을 논란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회나 천주교의 교황청이 중국의 조상숭배를 효성으로써 선택한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제거하지도 못했고,그렇다고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납득할 만하고 근거있는 진술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조상제사를 포기함으로써 효성을 실행하는 일이 좌절될 때 선교사들이 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천주교는 오히려 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것이다.46) 기독교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 뿐만이 아니라,제사때에 울어나오는 지성과 효를 실행할 만큼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면,유교권 선교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기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다. 세속화시대의 개인과 사회윤리적이 부패와 타협,이것이 교회안에 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효를 실행하겠는가? 우리가 우상숭배와는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10계명대로 산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한다.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이것이 조상숭배문화권에서의 최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업에 앞서 교회의 복음화운동과 회개운동이 더 불가피하게 여겨진다.

닫는 글

한가지 주목해야할 일은 R.Bohr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관혼상제 의식 집행은 Kerygma와 Koinonia와 Diakonia의 선교적 기회이며,교회와 세상의 동반자적 기회로써 좋은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47) 우리는 유교의 제례가 기독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효성과 우상숭배의 혼합문화권에서 우리가 대답해야할 선교학적 문제는 이것이다. 1) 기독교가 유교의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한다. 2) 종교적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참 신앙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3)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혈연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H.Kraemer가 지적한대로 유교나 다른 고등종교들은 보통 교리적 차이나 대립을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관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긴다.이들은 진리문제가 나오면 곧 바로 투쟁적이 되고 핍박한다.그것은 진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동기로 일어난다.Kraemer는 이러한 비관용성 (Undrldsamkeit)를 "가상적 관용"또는 "표면적 관용"(Schein-Duldsamkeit)이라고 칭한다48).그러므로 현지인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 공동체 속에 머물러서 더욱 사랑을 실천하고 효행으로 본이 됨으로써,기독교인들이 전통문화의 파괴자라는 오해를 벗도록 해야할 것이다. 유교 문화권 선교사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고, 사역할 때마다 부딪히고 복음과 함께 배척을 당할 것이 아니라 속히 충실한 현지인 제자들을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전달자와의 이질감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배척을 받을지라도 복음은 살아남아야 한다. 주의 말씀이 흥황하던 두란노 서원에서는 현지인들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스스로 그 책을 불사르니 은 오만이나 되었다(행19:18하)는 기록이 있다.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 스스로가 악습을 폐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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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선교역사] 한국의 조상숭배 < 평양대부흥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장로교 선교역사] 한국의 조상숭배 < 기사 및 칼럼 < 부흥관련 자료/사진 < 평양대부흥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유교의 모퉁이 돌은 죽음에 대한 효의 사상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도록 한 조상숭배이다. 
공자는 아마도 자신 스스로 조상 숭배를 실천하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 가족들은 신성시 되었고 모든 미덕의 원천으로 효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하나나 아들 둘이 가장 큰 축복으로서 간주되어왔다. 이것은 결혼의 대상과 일부다처제의 원인 때문이다. 가족이란 혈통은 매우 엄격하게 보호되어
졌고, 중엄한 자리는 주의를 가지고 선택되었으며 신성한 날은 종교적으로 지켜졌다. “한국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세 영혼, 즉 죽음에 대해서, 지옥으로 가는 영혼, 무덤으로 가는 영혼, 조상의 테이블에 가는 영혼을 가진다고 믿는다” 위로하기 위해서 목놓아 애곡하는 것과 상복을 입는 것, 그리고 정해진 날 죽음에 대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집에서 조상대대의 상 앞에서 하는 모든 것
들이 다 조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이 되는 것에 있어서 유교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그들이 그들의 조상에 대한 숭배을 포기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혼합주의

한국의 종교들은 바로 이러한 모든 체계의 혼합을 모든 연구자들에게 증명해 준다. G.H.Jone 박사는 “한국인은 그 자신은 개인적으로 공자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그의 아내들은 자손을 위해서 부다에게 기도하도록 하고, 질병에 대해서 무속인들인 무당과 박수를 불러다가 대가를 지불하기를 기꺼이 한다.”고 말한다.
Gale 박사는 또한 “한국사람들의 종교는, 불교와 도교와 정녕숭배와 점, 마술, 흙점, 점성술, 우상숭배와 함께 혼합된 조상숭배를 하는 이상한 신앙이다. 용들의 역학과 귀신또는 자연신들, 무리를 이루는 도깨비과 같은 것들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34,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번역감수: 박용규

Namgok Lee -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Namgok Lee - 장수에서 처음으로 논어 읽기를 하면서 나누었던 대화들이군요.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 Facebook

장수에서 처음으로 논어 읽기를 하면서 나누었던 대화들이군요.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季路 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논어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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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神)을 섬기는 일에 앞서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다가오네요.
- 신(神)은 미지의 영역이지만 사람은 바로 같이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미지의 신에 대해서는 지극정성으로 섬기면서 바로 이웃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냉담하다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지요.
-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신을 섬기는 바탕을 보면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 같아요. 보통 신앙이 이기적 기복(祈福)으로 흐르는 경향이 많잖아요.
-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지요.

- 신이 영감의 원천으로 되는 것도 큰 것 같아요. 신을 섬기는 것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자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 참된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네요.
- 신에게 맡기면 편해지잖아요. 아집이 많은 우리들이 신에게 의탁(依託)함으로서 그 아집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요.

- 편리할 때만 신에게 맡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온전하게 다 맡기지 못하는 거죠.
- 신을 섬기는 것과 인간을 , 그것도 추상적인 인류라던가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자각이 종교인들에게는 절실한 것 같네요.

====
- 우리들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두려움은 죽음 아닐까요.
- 그렇지요. 그런데 무엇이 그 두려움의 원인일까요.
-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요.
- 생명 일반이 가지는 속성 아닐까요.
- 살려고 하는 것은 생명체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살고 있으면서 죽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닐까요.

- 인간의 관념이 갖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삶이 두려운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 삶이 주는 고통으로부터의 단절이 더 절박한 것이지요.
- 그러나 보통의 경우는 죽음의 두려움이 더 크지요. 저는 그것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천으로 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요. 조금만 힘들어도 편한 죽음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 죽음은 생명 일반의 자연인데, 이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는 관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결국 자연(自然)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관념 아닐까요.
- ‘결국 죽지 않는다’가 목표가 될 수 없고, ‘잘 죽는다’가 목표가 되어야겠네요.
- 그렇지요. 그것이 정상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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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의 결과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지요. 결국 자신의 아집은 임종의 순간에 고통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되고 말지요.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해요. 가까운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게 되요.
- 결국 아집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 알기는 알겠는데, 마음속의 두려움은 잘 없어지지 않네요.
- 그것이 우리들의 실태가 아닐까요.
- 소극적으로 말하면 아집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삶이지만, 그 말 자체가 자기중심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것 같아요.
-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아(無我)를 이야기하는 바탕도 자기중심적이 되기 쉬운 경향이 있어요.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는 결코 진정한 자유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 자비의 실천 같은 것이 훨씬 중요하게 생각되네요.
- 공자님의 인의 실천도 같은 뜻이 아니겠어요.
- 그런 의미에서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다가오네요.

- 개인적인 깨달음이나 삶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한 사회나 문화로 넓혀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런 점에서 보면 ‘나’ 중심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는 사회는 ‘삶과 죽음’을 옳게 바라보는 문화를 만들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

- 지금의 사람들의 욕망 수준에는 자본주의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의 궁극적 자유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언젠가는 보다 자유로운 사회로 넘어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아니지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사회 구성과 운영의 바탕으로 되는 사회라고 생각되는데요. 뭐라 이름붙여질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애주의(社會愛主義) 같은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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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츠 토시히코와 이마미치 토모노부의 대담을 듣고 # 423 | Man in the Mirror | 아세가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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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약심경」을 읽고. 동양 사상, 서양 철학, 현대 과학, 예술 통합의 필요성 # 151
ILP 통합 이론 반사 저널 불교 일기 동양 사상 발달 이론 일반 젊은 심경

페이스북트위터선블로거마음이메일
5월 13일. 최고 기온은 27도까지 있었고, 반소매로 딱 좋은 따뜻함이 되었다.

정원 벤치에서 책을 읽는 것은 정말 기분 좋다.
마음도 몸도 찢어진 상태로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으로 배운 감각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반약심경을 읽었으므로, 몇 가지 언어화해 두고 싶다.

내용물

동양 사상, 서양 철학, 현대 과학의 근연성
불교의 약점, 한계점
통합 이론, 발달 이론의 가치와 앞으로
동양 사상, 서양 철학, 현대 과학의 근연성
이것은,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느낀 것이지만, 반약심경을 읽고 있어, 다른 사상, 철학과 같은 개념이 있어, 동양 사상도 서양 철학도 현대 과학도 추상적으로 말하면 동일하다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절대적 진리가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비이원의 세계관.

'반청'이라는 '궁극의 지혜'는 '무분별지'이다.

명명이라는 언어, 사고, 인지를 사용한 「분별지」를 부정한 앞에 있는 「무분별지」.

이러한 불교적 인식은 양자역학의 「입자이며 파도」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은 진리를 계속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실재론은 다양하지만, 데카르트, 흄, 칸트의 논점도 '나'라는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점은 마찬가지다.

서양 철학, 동양 사상을 배운 니시다 기타로가 말하는 '주객 합일' 도 이 절대적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윌버가 존경하는 물리·철학자 다스타프·페히너도, 식물의 모든 활동의 궁극의 목적이 「개인이 아니고, 전체의 최대의 쾌」도 마찬가지.

불교의 약점, 한계점
그러나 이런 비이원의 세계관은 일반적으로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불교의 가르침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있다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까? 라는 '살아있는 힌트' 수준에 머물러 있어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는 것은 그리 멀다.

지행합일과 같이, 불교의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도, 일상의 사소한 일로부터 체험을 수반한 이해가 아니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고, 이 체험에 의한 이해가 너무 허들이 높다.

불교의 실천의 길만으로도 그 경지에는 가기 어렵다.

여기가 어떤 종류, 불교의 약점이나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심리학, 서양철학, 현대과학, 예술과 연관시키는 것이 실천에 대한 힌트를 풍부하게 해준다.

그 통합을 시도해 가는 것이 절대적 진리에의 길.

통합 이론, 발달 이론의 가치와 앞으로
그런 의미에서 메타이론인 인테그럴 이론은 거기에 큰 공적이 있다.

예를 들어, 관찰하는 자기라는 개념은, 수잔누쿡 그로이터의 이론은 더욱 세분화해 주고 있어, 오히려 이쪽으로부터 탐구하는 편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친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저 자신 실천자이면서 인간 개개인의 다양성을 감안하면 적응은 어렵다.

좀더 좀더 그 개인에게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통찰이 늘면 누구나 그 사람에게 적합한 건전한 발달을 안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통찰을 깊게 해 나가고 싶고, 우선은 나 자신이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 하나를 실천해 나가고 싶다.

2021년 5월 13일의 일기부터 2021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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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최고 기온은 27도까지 있었고, 반소매로 딱 좋은 따뜻함이 되었다.

정원 벤치에서 책을 읽는 것은 정말 기분 좋다.
마음도 몸도 찢어진 상태로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으로 배운 감각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반야심경을 읽었으므로, 몇 가지 언어화해 두고 싶다.

내용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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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약점, 한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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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에 절대적 진리가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비이원의 세계관.

'반청'이라는 '궁극의 지혜'는 '무분별지'이다.

명명이라는 언어, 사고, 인지를 사용한 「분별지」를 부정한 앞에 있는 「무분별지」.

이러한 불교적 인식은 양자역학의 「입자이며 파도」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은 진리를 계속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실재론은 다양하지만, 데카르트, 흄, 칸트의 논점도 '나'라는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점은 마찬가지다.

서양 철학, 동양 사상을 배운 니시다 기타로가 말하는 '주객 합일' 도 이 절대적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윌버가 존경하는 물리·철학자 다스타프·페히너도, 식물의 모든 활동의 궁극의 목적이 「개인이 아니고, 전체의 최대의 쾌」도 마찬가지.

불교의 약점, 한계점
그러나 이런 비이원의 세계관은 일반적으로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불교의 가르침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있다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까? 라는 '살아있는 힌트' 수준에 머물러 있어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는 것은 그리 멀다.

지행합일과 같이, 불교의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도, 일상의 사소한 일로부터 체험을 수반한 이해가 아니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고, 이 체험에 의한 이해가 너무 허들이 높다.

불교의 실천의 길만으로도 그 경지에는 가기 어렵다.

여기가 어떤 종류, 불교의 약점이나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심리학, 서양철학, 현대과학, 예술과 연관시키는 것이 실천에 대한 힌트를 풍부하게 해준다.

그 통합을 시도해 가는 것이 절대적 진리에의 길.

통합 이론, 발달 이론의 가치와 앞으로
그런 의미에서 메타이론인 인테그럴 이론은 거기에 큰 공적이 있다.

예를 들어, 관찰하는 자기라는 개념은, 수잔누쿡 그로이터의 이론은 더욱 세분화해 주고 있어, 오히려 이쪽으로부터 탐구하는 편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친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저 자신 실천자이면서 인간 개개인의 다양성을 감안하면 적응은 어렵다.

좀더 좀더 그 개인에게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통찰이 늘면 누구나 그 사람에게 적합한 건전한 발달을 안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통찰을 깊게 해 나가고 싶고, 우선은 나 자신이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 하나를 실천해 나가고 싶다.

2021년 5월 13일의 일기부터 2021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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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오오츠키 「일본적 영성」을 통해 # 265 | Man in the Mirror | 아세가 준

스즈키 오오츠키 「일본적 영성」을 통해 # 265 | Man in the Mirror | 아세가 준

수국
2021.9.4
스즈키 오오츠키 '일본적 영성'을 통해 #265
통합 이론 윌버 컴즈 의 격자 켄 윌버 반사 저널 불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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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오오츠키의 '일본적 영성'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스즈키 오오츠키가 전하고 싶었던 생각은 무엇인가, 그 생각에 빠지게 되면, 윌버와 마찬가지로 영성(스피리츄어리티)을 되찾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가 야마토혼이라고 하는 그 근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영성을에 ​​각성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적 영성은 뭔가 하면 무분별지.

이곳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이며, 대졸과 교류가 깊었던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와 같은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것도 처음이었고, 양자 모두 선이나 불교 개념을 배우면서 서양 철학을 배우고 그들이 어떻게 통합할지 주제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졸은 이 무분별지를 선이나 정토진종에 의해 언어화되어 민주화되었다고 하는데, 엄밀하게는 이것이 선이나 정토진종이 태어난 것은 아니다.

확실히, 정토 신종이나 선이 태어난 가마쿠라 불교는 일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지만, 원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 머물고 있는 것.

그것이 일본적 영성으로서는 가마쿠라 불교라고 하는 역사를 활용하고 있는 것만으로, 일본을 떠나면, 미국적 영성, 중국적 영성, 인도적 영성, 아프리카적 영성 여러가지 있어, 어느 종교도 그 토지나 민족에 맞춘 것이 되어 있는 것만으로, 근본의 무분별지라는 비이원의 세계는 공통된 진리로서 있다.

원래 우리에게 있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대졸도 이해하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은, 우선 일본적 영성이 있는 것을 주체에 두고, 그 위에 불교를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불교가 밖에서 와서 일본에 심어져 수백년이나 천년 이상이나 지나 일본적 풍토화해 더 이상 외국 도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일본 민족 속에 일본적 영성이 존재하고 있어, 그 영성이 우연히 불교적인 것에 체착하고, 자신 중에서, 그 본래구 유저를 현현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 여기에 일본적 영성의 주체성을 인식해 둘 필요가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물

무분별한 지혜
대지성이란?
막망상이란?
윌버 정리
무분별한 지혜
다시 한번, 무분별 지치란 무엇인가. 분별은 개념이나 언어를 사용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것.

사물은 언어나 개념이라는 어떤 종류의 단절된, 기호화된 정보에 한정되어 버린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사과라고 명칭함으로써 다른 사과와 같은 사과가 된다.

이런 분별이 아닌, 세계의 전체를 포착해,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무분별 지치.

니시다 기타로의 말로 말하면, 주객 합일의 실존 그 자체에 접해 가는, 순수 체험을 하라고 하는 말에 해당한다.

우리가 사고를 사용하기 전의 그 순간, 직감으로서 잡고 있는 것이 해당된다.

그러므로 무분별이란 말을 바꾸면 직감으로 세계를 그대로 잡는 것.

영성, 영성이라는 말에 현대 사회에서는 혐오감을 안고 있는 말이지만, 그 인지는 앵무새 진리교와 강원 계지에 의한 부정적인 인상에 의해 오염되어 있어 본래 스즈키 오오츠키,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해 선의 세계에서도 소중히 여겨져 온 영성이 잃고 있다.

현대사회의 사람을 보고 법을 설한다면 영성이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한다면 '직감'이라는 말이 좋을 것이다.

대지성이란?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니시다 기타로에게 조금 전해져 버린 적도 있어, 다시 스즈키 오오츠키의 「일본적 영성」으로 되돌리고 싶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대지성입니다.

생명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뿌리는 아무래도 대지로 내려야 한다. 대지에 관계 없는 생명은, 진정한 의미로 살아 있지 않다.

 
영성의 안쪽의 원은, 실로 대지의 좌석에 있다

대지는 자신의 존재의 바닥이라고 한다.

여기서 대지가 나온다는 것이 기쁘다. 우리는 대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막망상이란?
막망상은, 망상(≒집착) 하는 것인가.

무분별하게 연결되는 개념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 그 몸 그대로 상대방 가운데로 뛰어든다는 것이 일본 정신의 밝은 곳이지만, 영성의 영역에서도 또 이것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영성은 실로 이 밝은 것을 가장 근원적으로 일으킨 곳에 나타나는 것이다. 밝은 마음, 청결한 마음이 의식의 표면으로 움직이지 않고 그 가장 깊은 곳에 침잠해 가고, 거기서 무의식적으로 무분별하게 허망상에 움직일 때, 일본적 영성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

일본적 영성의 특질은 그 막망상의 곳에 나타나기 때문에 일본적 생활의 면에도 언제나 그것이 읽혀진다. 이것을 보통은 선사상의 침투라고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일본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적 영성이 선형태로 운위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실제로는 항상 뇌가 일하고 있어 어렵다, 사고를 하지 않고는 어렵다. 여기도 어떤 종류의 훈련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예는 마음 가득한 명상의 실천이된다.

이전 저널에서 쓴 과학과 종교의 그루브를 메우는 신경신학으로 쓴 것처럼 뇌과학적으로도 뇌의 작용이 다르다. 실천의 선물이다.

윌버 정리
다시 한번 이렇게 되면 켄 윌버의 메타인지는 무섭다.

즉 동양 사상이나 철학을 의식 ​​상태의 이야기로 하면서 서양에서 전개된 심리학을 의식 ​​단계로 삼는다. 윌버컴즈의 격자가 완성된다.

게다가 일시적인 변성의식이 항상적인 것으로 변하는 제3층의 세계에도 동양적인 세계를 가져온다.

또, 의식의 스펙트럼도 에서, 동양적인 세계를 가장 근저로 가져오는 정리는, 재차 잘 생긴 정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적 영성이라는 일본에 근차한 표현으로 잃어버린 영성을 말해 나가고 싶다.

2021년 9월 4일의 일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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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노자와 통합 이론, 두 가지 깨달음 # 153
통합 이론 윌버 컴즈의 격자 깨달음 동양 사상 노자 노장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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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기 시작했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켄 윌버는 화학이나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도 노자를 읽는 것으로 사상, 철학, 심리학으로 전신해 지금의 인테그럴 이론에 이른다.
노자가 계기가 되는 이유가 조금은 알았던 것 같다.

노자는 역설의 철학으로 생각한다.
약하지만 강하다
지는데
승리 천천히 빠르다
는 역설을 붙이고 있다.

하지만 노자의 진수는 여기가 아니라 타오(道)에 있다.

타오의 진리는 불교의 공성, 무분별지, 깨달음의 경지와 같다.

그 유사성으로부터, 도가 속에서 재미있는 설(노자화후설)이라고 하는, 노자가 인도에 가, 석가로 이름을 바꾸어 불교를 열었다고 하는 설까지 나올 정도.

그리고 중요한 키워드는 "무위 자연" .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모두를 하고 있다.

이 근처가 인테그럴 이론의 제3층의 세계관일 것이다.

비이원이라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 자신이 마음대로 일부를 잘라 인과관계를 만들고, 자신이 하고 있는, 자신이 일으킨, 자신이 이루었다는 추억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은 모든 현상이 상호 작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로 모든 것이 무언가의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거나 생멸하고 있어 확고한 것은 없다는 공성.

그것을 언어, 생각, 분별에 의해 잘라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 남아 버리는 나나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새로 넘겨가는 것이 「
무위 자연」의 경지인 것이다.

자신의 사고가 아니라 대자연의 호흡에 맞춰 간다.
이것을 윌버가 큰 존재의 중첩으로 말하는 마음이 아니라 영혼이다.

이상의 인식이, 나의 이해, 해석, 지금의 의식을 통해서 태어난 산물인데, 제3층의
의식 구조에 대한 이해가 진행된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의 이야기로 누르면 안 되는 일이 있다.

이 무위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탈력계의 이야기가 되기 쉽고, 되기 쉽다고 할까 그런 것인데, 역시 의식 구조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 상태가 비이원, 즉 수평적인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ー(참고)ー
수직적인 깨달음, 수평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는, 윌버컴즈의 격자를 참조.

이미지 1

주로 서양심리학의 성인 발달 이론으로 발전해 온 것이 의식 구조(레벨)이며, 수직적인 깨달음에의 길.
한편, 동양 사상으로 발전해 온 것이 의식 상태(스테이트)이며, 수평적 깨달음에의 길

노자의 말을 인용하면

「학을 하면 매일에 유익하고, 길을 내리면 날마다 손해.

즉, 학문을 하면 말, 지식에 의해 분별이 늘어나고, 그것은 타오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어 버린다. (무분별지에서 멀어진다.)

말, 분별을 줄이는 먼저 무위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사고(마인드)를 가리키고 있어, 지금에 집중할 수 없는 죄인 상태를, 메디테이션에 의해 정돈해 나가는 의식 상태의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학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학문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그것은 그것으로, 의식 구조로서의 발달, 즉 수직적인 깨달음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을 계속하고 있어도 제3층으로의 발달은 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마인드 자체가 한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깊고 넓게 자각해 가는 것으로, 제3층에 수직적인 깨달음을 열어 간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확실히 제3층에는 사고가 한계를 만드는 것, 틸 단계나 터키석 단계(통칭 비전 로직 단계)라는 제2층의 단계는 오히려 사고(마인드)야말로 발달에 필수적 할 수 없다는 것.

사고가 수직적인 깨달음에 대한 길을 걸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사고, 인지에 의해 분별이 늘어나는데, 한편 사고, 인지에 의해 분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메타인지가 진행되어 물건들이 통합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역사를 배우는 것.
알기 쉬운 예는 유발 노아 하라리의 사피엔스 전사를 통해
인류가 허구를 만들어 왔음을 이해한다.

국경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 인위적으로 그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인, 한국인과 국경이라는 개념으로 분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편의상 명명을 한 것만으로, 메타인지하면 같은 지구인임을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본래 지구인, 혹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나였던 것을, 우리는 명명에 의해 분별하고 있었던 것에 역사를 통해서 알아차릴 수 있어, 지식, 인지, 사고는 통합에의 길을 진행시킵니다 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와 같이 사고(마인드)의 단련에 의한 인지의 확장이, 분별을 줄여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사고가 수직적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걸어준다.

지금까지의 의미, 인식이 없으면, 노자의 이야기는 단순히 의식 상태의 이야기에 닫은 것.

오히려 의식구조로서의 발달을 멈추어 버리는 것처럼 착각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근처는 누르고 어색한 점으로 생각한다.

노자는 정말 깊은 것이 있고, 노자를 아직도 탐구하고 싶다.

2021년 5월 15일의 일기부터 202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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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의식으로 책을 읽는 것 #418 | Man in the Mirror | 아세가 준

심층 의식으로 책을 읽는 것 #418 | Man in the Mirror | 아세가 준

심층 의식으로 책을 읽는 것 # 418
슈타이너 융 이츠키 슌히코 심층 의식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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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릴리에라는 1980년의 기관지에 투고되고 있던 「융과 슈타이너~자아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라고 하는 다카하시 료씨의 강의록을 배독했다.

읽는 것은 네 번째 정도이다.

그것을 읽었을 때, 나는 아무래도 지난 반년 정도에 걸쳐 읽어 온 이츠키 슌히코의 「의식과 본질」의 책을 읽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잘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보다는, 이 책에 한정하지 않고, 책 그 자체의 읽는 방법을, 실로 얕은 읽는 방법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용물
  1. 심층 의식으로 책 읽기
  2.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에서 오는 메시지
심층 의식으로 책 읽기

나는 지금까지 심층 의식이 아니라 표층 의식으로 읽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층 의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혀 표층 의식으로 독서를 계속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박자에, 오늘은 다행히 심층으로 읽는다는 것을, 조금 그것을 체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세, 말에는 꽤 어려운 것이지만.

언제였을까. 이전에 스승의 카토 요헤이 씨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떠올렸다.

카토 씨
「아세가 씨, 책을 읽는 것은, 그로스의 의식 상태 뿐만이 아니라, 사틀의 의식 상태, 코자르의 의식 상태, 각각의 의식 상태로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아세가
「에, 아니, 사틀은 아직 알겠습니다만, 코자르는 셧아웃 하고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카토 씨
「읽을 수 있어요. 웃음」

그 때는 왠지 전혀 몰랐지만 지금 마침내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그것은 쓰여진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말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말을 느끼는 것 같다.
이츠키 슌히코 「의식과 본질」에서 오는 메시지

요 전날 행한 「의식과 본질」의 독서회 때, 나는 희미하게 이런 일을 흘렸다.

「결국 이통은 어째서 여기까지 세세하게 본질을 나누어 갔는지? 그 진정한 의도는 어땠을까?」

그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하의 문장을 심층으로 읽으면, 타카하시 료의 말이지만, 타카하시 료로부터 융과 슈타이너를 통해 이통과 연결해, 이통의 「의식과 본질」을 쓰여진 생각을 조금만 느낄 수 있었다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상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 이유 가 설 명 의 하나 가 없는 상징 이 있다 .

산 의 정상 의 사 진 으로 하면 , 지금 말해 준 것 같은 의미 로 , 어째서 그 사진 이 자부 로 하여 특별 소소 하는 것인가 ? 밝은 것이지만 어떤 종류 의 이미지 는 어쨌든 그렇게 마음 에 호소할 수 있을지 생각해도 됩니다 . 음.

하지만 보면 보는 만큼 마음 을 끌어 당깁니다 . 그런 이미지 를 윤 은 본래 의 상징 이라고 생각한 것 입니다 . 그리고 그런 상징 으로 되어 있는 이미지 를 맨다라 라고도 말했습니다 .

그러므로 맨다라를 눈 앞에 놓으면, 그 맨다라와 자신의 무의식의 마음이 대답하고 있는 경우, 그 맨 무언가의 무한한 에너지를, 미래에서 오는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 가능합니다.릴리에 '융과 슈타이너' P32

미래로부터 오는 에너지라는 것은, 나의 이해로 말하면, 그것은 인생 그 자체로부터의 질문이나 말이며, 영혼으로부터의 말이며, 더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인 것이다.


그것을 상징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아마, 이통이 마히아(본질)의 제2형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그러한 상징을 눈에 띄어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인생의 의미, 사명감 되는 것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층 의식 속에서야말로 느끼는 것임을, 상징 을 통해서 느끼는 것임을, 뭔가 이통이 지금의 나에게 전해 준 것처럼 느꼈다.

2022년 7월 5일의 일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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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3

이란에서 만든 「이즈츠 토시히코」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Eastern

이란에서 만든 「이즈츠 토시히코」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Eastern



이란에서 만든 "이즈츠 토시히코"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Eastern (방역 : 샤르기 (동양인))
리플렉션 저널 이즈츠 토시히코 일기 동양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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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전날 이즈츠 토시히코의 NHK 다큐멘터리를 본 후, 이란에서 만든 이즈츠 토시히코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Eastern을 구입해 드디어 도착했다.

닿은 순간, 곧 보기 시작했다.



NHK 다큐멘터리와는 제작자가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영화가 되고 있다.

이즈츠 토시히코 선생님을 입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NHK 쪽이 알기 쉽고, 컴팩트하고 재미있게 되어 있다.

영화는 전문 용어도 조금 늘어나기 때문에 약간 이즈츠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시간도 130분. 인터뷰는 100명 이상.

또 다른 이즈츠 토시히코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즈츠 선생님의 라이프 스타일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침 조기가 아니라, 늦잠 침지기였다고. (지금의 나와 같고 조금 기쁜 웃음)

화난 곳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든가.

은밀하게 관심 깊은 것은 이란 혁명 발발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할 수 없었던 것. 사실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때 이즈츠 선생님은 경제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저명한 대학자였지만, 어느 대학도 너무 위대해서 맡을 수 없다고 거절되어 번역이나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었던 연구의 계획은 머무른 것 같다.

어떤 인터뷰 쪽은 이즈츠 씨에게는 좀 더 정치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싶었다는 뉘앙스가 있었다.

그것은, 이즈츠씨의 재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연구를 계속해 주었으면 하고, 연구 자금을 좀 더 잘 모을 수 있는 것도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연하지만 완벽한 인간은 없고, 이통 선생님에게도 철학적 지성에 뛰어나지만, 비즈니스적인 부분은 전혀 다른 지성으로 고생한 곳이 엿보였다. 아주 인간다운 부분이 보인 것 같다.

또한 영화 속에서 일부 루미의 시가 인용되었다.

루미의 시도 나에게는 몰라.

하지만, 거기에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쓰여 있는 것 같은 예감만은 한다.

지금은 단지, 광맥의 소재만을 전수되고 있는 것 같다.

이즈츠 토시히코는 이슬람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일본은 거기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인터뷰를 보면 유럽, 미국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이 정말 외롭다고 생각한다.


1993년 1월 7일 아침, 이즈츠 토시히코는 집필을 마치고 부인에게 '잘자요'라고 말을 걸어 침실에서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한다.

마지막 끝까지 쓰기를 한다. 만년의 이즈츠 선생님은 지구 사회의 형성을 향해 동양 철학이 가진 지혜를 다음 시대에 맡기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즈츠 선생님의 서적을 통해 자신은 무엇을 받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묻는 것 같다.

학자와 같은 지성은 겸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공시적 구조화를 방어할 수는 없지만, 나 나름의 의식으로 심화시켜, 나 나름의 역할에서도, 계승하고 싶다.


“단지 학문적으로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중에서 새로운 철학을 세계적 컨텍스트에서 만들어내는 노력」

조용히 내 안이 뜨거워진다.


2022년 1월 23일의 일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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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礼二×中島隆博「井筒俊彦と中国——あたらしい東洋哲学のために」(2019/11/26収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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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収録時のイベント概要】近年、慶應義塾大学出版会より井筒俊彦の英文著作が数多く刊行されている。2017年に配本が開始され、今年完結した「井筒俊彦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のことだ。井筒俊彦は、1950年代半ばから70年代までの約20年間を欧米や中近東で過ごしており、その間は英語で執筆や講演活動を行なっていた。この叢書は、ちょうどこの時期の井筒の代表作を集めたものであり、2016年に配本が完了した『井筒俊彦全集』の空白を埋めるものとなっている。『意識と本質』をはじめとする、晩年の日本語による著作の源泉がここにあると言えるだろう。この叢書には、エラノス会議の講演原稿や Language and Magic(『言語と呪術』)、 Sufism and Taoism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などといった重要なテクストが含まれているが、井筒が中国ないし東洋の哲学を積極的に論じていることがわかる内容となっている。日本ではあまり知られてこなかったこれらの仕事は、井筒のあらたな側面を明らかにするだけでなく、東洋哲学へのあらたなアプローチとなる可能性を秘めている。今回ゲンロンカフェでは、文芸批評家の安藤礼二氏と哲学者の中島隆博氏をお呼びして、井筒俊彦と東洋哲学について考えるトークイベントを開催する。井筒と関連の深い折口信夫の研究でも知られる安藤氏は、今回の叢書の翻訳にも深く関わっている。また中島氏は、井筒が提唱する東洋哲学の「共時的思考の次元」における「構造化」(『意識と本質』)を彷彿とさせるような仕事でも知られている。しばしばイスラーム研究のイメージを持たれがちな井筒だが、そのきわめて多様な側面に光を当てることで、私たちはより豊かな「遺産」を受け継ぐ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最新の翻訳によって明らかになりつつある新たな井筒像を通じて、「あたらしい東洋哲学」の可能性を探求する必見の議論! 【井筒俊彦とは】井筒俊彦(1914-1993)は日本の哲学者、東洋思想研究者。日本ではじめて『コーラン』を原典訳するなどイスラームの研究で知られるが、大乗仏教や老荘思想などの研究でも有名。また卓越した語学力をもち、30以上の言語を操ったとも言われている。なお、1950〜70年代を欧米や中近東で過ごし、その間英文で講演や執筆を行なっていたため、欧米での評価が高い。晩年の代表作『意識と本質』のなかでは、自身の試みを「東洋哲学の共時的構造化」、つまり古代の東洋哲学を現代的な文脈と問題意識のなかで再構築することであると語っている。 【ゲンロン編集部員ゐせが選ぶ、イベント予習のための参考図書5冊!】・『コスモスとアンチコスモス――東洋哲学のために』(岩波文庫)今年文庫化されたばかりの論集。イベントまえに、「コスモスとアンチコスモス」と「事事無礙・理理無礙」はとりあえず読んでおくとよいかも。・『東洋哲学覚書 意識の形而上学――『大乗起信論』の哲学』(中公文庫)イスラーム神秘思想などとの比較のなかで大乗仏教を論じた本。簡単ではないが、とてもコンパクトなので手にとりやすい。・『言語と呪術』(慶應義塾大学出版会)今回登壇の安藤礼二さんの監訳で2018年に刊行された。安藤さん曰く「これによって井筒の読み方がガラッと変わる」とのこと。・『意識と本質――精神的東洋を求めて』(岩波文庫)いわずと知れた晩年の主著。時間があってまだ読んでないひとはぜひ。井筒の英文著作はどれも『意識と本質』以前なので、今回のイベントではこの本にいたるまでの道すじが語られるか。・安藤礼二・若松英輔編『井筒俊彦――言語の根源と哲学の発生』(河出書房新社)井筒に関する論集。デリダの原稿がのっている。『言語と呪術』を論じた安藤さんの論考と、安藤さん+若松さんの対談を読んでおくと今回登壇される安藤さんの問題意識が把握できるはず。井筒俊彦と中国 – ゲンロンカフェ
https://genron-cafe.jp/event/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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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2020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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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 上 (井筒俊彦 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

Amazon.co.jp:カスタマーレビュー: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 上 (井筒俊彦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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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筒俊彦英文著作翻訳コレクション』、堂々完結!
▼世界に井筒の名を知らしめた主著、待望の邦訳
▼東洋における二大叡智――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の真髄を解き明かす、比較哲学的考察。

日本語著作の空白の時代を埋める最重要著作――『井筒俊彦全集』と併せて、井筒思想の全貌が明らかになる。
上巻は、イスラーム神秘哲学の頂点、イブン・アラビーの存在論

【目次】

はじめに

第一部 イブン・アラビー

第一章 夢と現実(リアリティー)
第二章 絶対性の状態にある絶対者
第三章 人間の自己知
第四章 形而上の収斂と現象における拡散
第五章 形而上学的混乱
第六章 絶対者の影
第七章 神の名
第八章 アッラーと主
第九章 存在論的な慈しみ
第十章 生命の水
第十一章 絶対者の自己顕現
第十二章 恒常原型
第十三章 創造
第十四章 ミクロコスモスとしての人間
第十五章 個としての完全人間
第十六章 使徒・預言者・聖者
第十七章 完全人間のもつ不思議な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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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第二部 老子と荘子

第一章 老子と荘子
第二章 神話創作から形而上学へ
第三章 夢と現実
第四章 あれとこれを超えて
第五章 新たな自我の誕生
第六章 本質主義に抗して
第七章 道
第八章 衆妙の門
第九章 決定論と自由
第十章 価値の完全な逆転
第十一章 完全人間
第十二章 政治的人間

第三部 結 論――比較考量

第一章 方法論的予備考察
第二章 人間の内部変容
第三章 実の在り方の多層構造
第四章 本質と存在
第五章 存在の自己展開

訳 注
解説(仁子寿晴)
訳者あとがきv 『道徳経』『荘子』引用索引
人名・著作名索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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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저작의 공백의 시대를 메우는 가장 중요한 저작――『이통 슌히코 전집』과 아울러, 이통 사상의 전모가 밝혀진다.
상권은 이슬람 신비철학의 정점, 이븐 아라비의 존재론 
【목차】 
소개 서 
제 일부 이븐 아라비 
제1장 꿈과 현실(현실) 
제2장절대성상태에 있는 절대자
제3장 인간 의 자기지
제4장 형이상의 수렴과 현상에서의 확산
제5장 형이상학적 혼란 
제 6장절대자의 그림자 제
7장 하느님의 이름 
제 8 장 의 물 
제11장 절대자 의 자기현현 
제12장 항상상 원형 
제13장 창조 
제 14 장 
제17장 완전 인간 이 가지는 신기한 역역

===
하권은 노자와 장자의 존재론, 이슬람 신비철학과의 비교철학적 고찰.
이통 의미론의 전개를 해명하는 역자 해설 첨부.

【목차】

제2부 노자와 장자

제1장 노자와 장자 제
2장 신화 창작으로부터 형이상학에 제3장 꿈
과 현실 제4장 저것과
이것을 넘어 제5장 주의에 대항하여 제7장 길 제8장 중묘의 문 제9장 결정론 과 자유 제 10장 가치의 완전한 역전 제11장 완전 인간 제12장 정치적 인간

제3부 결론- ―비교 고량

제1장 방법론적 예비 고찰 제2
장 인간의 내부 변용 제3장 실의
본연의 다층 구조 제4장
본질과 존재
제5장 존재의 자기 전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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ゆっぴ
5つ星のうち5.0 すごいことになる!
2021年9月10日に日本でレビュー済み
Amazonで購入
この本は(百人中)二人しか読まないでしょうね!...

悪いけど...

でもねぇ、その二人は、凄いことになる!!!

多分、何万人にも影響しちゃうでしょうね!

全くとんでもない...
3人のお客様がこれが役に立ったと考えています
役に立った
レポート
オーメンマン
5つ星のうち5.0 きみはどの陣営だ?
2019年9月15日に日本でレビュー済み
Amazonで購入
なぜ神秘主義者たちは現象世界の象徴的性格を解き明かそうとするのか、その質問に答えようと思う。
この世界には何か重要なことが隠れている、そう気が付いたならばきみは神秘主義者である。スーフィズムでは死後に魂はバルザフ(=冥界)で自分が死んだことも気が付かないままに現実的な夢を見るとされる。だから夢と現実の区別が重要であり、ここがバルザフ(=冥界)であると気が付かなければそのまま地獄に引きずり込まれてしまう。
それでは、どうすればここがバルザフ(=冥界)かどうかが分かるのだろうか。
荘子にはその境目を見つけ出そうとする精神的な努力が伝わる。そして、スーフィズムでは現在の世界がバルザフ(=冥界)とするからイスラム教である。つまり,スンニ派やシーア派は現世に惑わされていてここがバルザフ(=冥界)であることを認めようとしないからイスラム教ではない。
それでは、この神秘的な世界に何が起ころうとしているというのだろうか。
スーフィズムをやれば分かることだが、太陽系はアンドロメダ銀河に属している。そのアンドロメダ銀河は天の川銀河を併合しようとしていて、衝突のときに太陽系はアンドロメダ銀河に戻る算段になっている。その過程でさんかく座銀河も併合する段取りをつけて、アンドロメダ超銀河団を成立させようとしている。しかし、おとめ座超銀河団を成立させようとする銀河団はそれを阻止しようとする。Wikipediaのマニ教の解説の通り、魂は壮大な宇宙の戦いに参画している。
どの陣営が有利に宇宙の戦いを進めているのかは神秘に属することなので言えないが、自分の魂が属する銀河の優劣が精神の起伏に影響するので心を研ぎ澄ませば分かるだろう。
スーフィズムと老荘思想は実に奥深いのである。
5人のお客様がこれが役に立ったと考え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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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멘만
5성급 중 5.0 너는 어떤 진영인가?
2019년 9월 15일에 확인됨
아마존에서 구매
왜 신비주의자들은 현상세계의 상징적 성격을 풀어내려고 하는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이 세계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어 있다, 그렇게 깨달았다면 기미는 신비주의자이다. 

수피즘에서는 사후에 영혼은 발자프(=명계)에서 자신이 죽은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현실적인 꿈을 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꿈과 현실의 구별이 중요하고, 여기가 발자프(=명계)라고 깨닫지 못하면 그대로 지옥으로 끌려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여기가 발자프(=명계)인지를 알 수 있을까.

장자에게는 그 경계를 찾아내려고 하는 정신적인 노력이 전해진다. 그리고 수피즘에서는 현재의 세계가 발자프(=명계)로 하기 때문에 이슬람교이다. 즉, 수니파나 시아파는 현세에 당황하고 있어 여기가 발자프(=명계)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신비한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가?
수피즘을 하면 알 수 있지만 태양계는 안드로메다 은하에 속한다. 그 안드로메다 은하는 은하수 은하를 병합하려고 하고 있고, 충돌시에 태양계는 안드로메다 은하로 돌아오는 산단이 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교활하게 자리 은하도 병합하는 단계를 붙여 안드로메다 초은하단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처녀자리 초은하단을 성립시키려는 은하단은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Wikipedia의 마니교의 해설대로, 영혼은 장대한 우주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어느 진영이 유리하게 우주의 싸움을 추진하고 있는지는 신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영혼이 속하는 은하의 우열이 정신의 기복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마음을 갈라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피즘과 노장 사상은 실로 깊은 것이다.
5명의 고객이 이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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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願の人
5つ星のうち5.0 訳が素晴らしい
2020年12月27日に日本でレビュー済み
Amazonで購入
老荘思想を、存在の神秘体験に基づく存在論として捉え、章ごとに主要概念を整理してわかりやすく論じている。内容もさることながら、訳が素晴らしい。
5人のお客様がこれが役に立ったと考えています
役に立った
レポート
オーメンマン
5つ星のうち5.0 絶対零度が光速度で伝わるときに無重力空間が成立する
2019年11月22日に日本でレビュー済み
Amazonで購入
なぜ宇宙空間は無重力なのか、その神秘を解き明かすと絶対零度が空間の内部で光速度で伝達されるからであるが、このような神秘主義的な直感に基づいた真実を現代科学は真実とすることができない。
老子にしても荘子にしても、ひとつの真実の言い換えでしかないのだが、老子のどの部分が荘子のどの部分で言い換えられているのかは、残念ながら、「存在一性」のような科学的アプローチでは探り当てることができない。
空間の内部で無重力が発生するためには絶対零度が光速度で伝わらなければならないが、その伝達速度が光速度より速くても無重力は発生しない。
ひとつの真実を伝えようとする老子の文字数と荘子の文字数とでは違うが、だからと言って真実が変わるわけではないから、そこには「道」がある。
だからこそ、この本は玄人向けであり、老子の第1章の「玄之又玄 衆妙之門」がそのまま当てはまる良書である。
2人のお客様がこれが役に立ったと考え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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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열원의 사람
5성급 중 5.0 번역이 훌륭합니다.
2020년 12월 27일에 확인됨
아마존에서 구매
노장 사상을 존재의 신비 체험에 근거한 존재론으로 파악하고 장마다 주요 개념을 정리하고 알기 쉽게 논하고 있다. 내용도 물론, 번역이 훌륭하다.
5명의 고객이 이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용한
보고서
오멘만
5성급 중 5.0 절대 영도가 광속도로 전해질 때 무중력 공간이 성립
2019년 11월 22일에 확인함
아마존에서 구매
왜 우주공간은 무중력인가, 그 신비를 풀면 절대 영도가 공간 내부에서 광속으로 전달되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직감에 근거한 진실을 현대과학은 진실로 한다 수 없습니다.
노자로 해도 장자로 해도, 하나의 진실의 바꿔 말고 밖에 없지만, 노자의 어느 부분이 장자의 어느 부분에서 바꿔 말해지고 있는지는, 불행히도, 「존재성」과 같은 과학적 접근으로는 찾아낼 수 없다.
공간 내부에서 무중력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절대 영도가 광속도로 전달되어야 하지만, 그 전달속도가 광속도보다 빠르더라도 무중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의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노자의 문자수와 장자의 문자수와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길」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인을 위한 것이고, 노자의 제1장의 「겐노마타 겐 중묘노몬」이 그대로 적용되는 양서이다.
두 고객이 이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