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길] 수학선생의 ‘우공이산’
입력2021.11.25. 오전 3:03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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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인문학 공동체를 하면 재미난 게 많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버킷 리스트에 올라 있는 일의 상당수를 당장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세미나에 온 분의 직업을 물어보니 지휘를 전공한 예술가였습니다. 곧바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자는 것에 의기투합했지요. 내친김에 합주 연습할 장소를 섭외한 뒤 단원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오케스트라까지 만들어 즐길 수 있는 곳이 인문학 공동체입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이와 달리 손쉬워 보이는데 현실화하지 못한 것들도 많습니다. 수학 공부 모임도 그중 하나입니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비리그에서 학위를 받은 수학자도 모셨고 수학사 박사 과정을 마친 연구자도 모셨습니다. 수학 상식으로 책을 낸 저자가 강의하는가 하면 수학과 인문학을 두루 전공한 분이 스터디를 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단명했습니다. 고등수학을 연구한 학자들은 일반인과의 소통에 서툴렀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선생들은 머잖아 떠나갔습니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수학은 고액 사교육 시장의 중심입니다. 과외를 하면 이곳에서 받는 사례비의 몇 배, 몇십 배나 되는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반면, 여기서 수학을 하는 것은 돈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생이 받는 과외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사례비로 인문학 역량까지 탄탄하게 갖춘 수학 선생을 찾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학 공부 모임을 못 만든 것은 수학이 입시에서 너무 중요한 탓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최근 수학 강의를 시작한 선생이 있습니다. 수학과 출신으로, 강남 입시학원의 대명사 격인 곳에서 10여년 수학을 가르치던 강사 출신입니다. 그가 공동체를 찾은 것은 돈벌이 대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수학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입시에 치여 공식을 외우고 문제 풀이에만 급급한 수학에서는 찾을 수 없던 수학의 깊은 맛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느끼고 싶어서였습니다.
많은 이에게 수학 하면 떠오르는 것은 입시지만, 수학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인류 문명의 토대였습니다. 고전 역학에서 상대성이론, 넷플릭스가 취향을 읽는 법, AI의 영상 인식, 번역기, 코로나19 확진자 예측 모델 등에 이르기까지 현대 과학기술은 대부분 수학을 활용한 결과입니다. 또한 수학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초끈이론 연구의 권위자인 오구리 히로시는 수학을 알면 보통의 언어로는 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수학은 무엇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문제 해결 능력을 연마하는 데 최고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가 시작한 모임은 중·고교 수학을 새로 공부하는 수학 테라피였습니다. 수학적 사고법으로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면서 향후 고급 수학을 위한 기초 과정을 재미나게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참여한 이들의 면면은 다양했습니다. 주부, 회사원, 연구자, 교사, 대학교수, 학창 시절 수학을 포기했다는 작가,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수학을 싫어하는 성향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두렵다는 엄마도 있었습니다.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참여자들은 오랜만에 집합, 명제, 증명법 등을 공부하며 입을 모았습니다. 수학이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얼마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습니다. 많은 학생들에게 입시를 마쳤다는 것은 더 이상 수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이제 수십만의 학생들은 방정식과 부등식, 함수, 미적분, 확률, 통계 같은 것들을 점차 잊어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학의 언어와 수학으로 익힐 수 있는 사고법을 외면하고 학문과 문명의 기반에도 눈을 감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딛고 수학의 의미와 재미를 전파하려는 선생의 시도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뭐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무쪼록 그가 걷는 새 길이 외롭지 않고 행복하기를….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