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바보새 01-29 1363 0
2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바보새 01-29 926 0
2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6장 거룩한 바탈과 귀신바탈  바보새 01-29 806 0
2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바보새 01-29 99 0
2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4장 3성분별  바보새 01-29 970 0
2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3장 밭과 밭알이와 그 분별  바보새 01-29 918 0
19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2장 박티 요가  바보새 01-29 1740 0
18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 일체상(一切相)  바보새 01-29 1126 0
17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바보새 01-28 1241 0
16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바보새 01-28 1002 0
15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기타 -제8장 브라마 요가  바보새 01-28 1971 0
14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7장 즈나나 비즈나나 요가  바보새 01-23 2783 0
13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2)  바보새 01-22 926 0
12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바보새 01-22 1608 0
11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트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2)  바보새 01-22 928 0
1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바보새 01-22 1029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2)  바보새 01-21 1171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1)  바보새 01-21 112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2)  바보새 01-20 1040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3장 카르마 요가(1)  바보새 01-20 1663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바보새 01-20 476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삼캬 요가(1)  바보새 01-20 1958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제1장 아르쥬나의 고민  바보새 01-20 6532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바보새 05-27 1976 0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보새 05-27 1475 0


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2장 샴카 요가(2)
작성자 바보새 16-01-20 05:54 조회4,766회 댓글0건
검색목록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55.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사람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체의 애욕을 버리고 자아에 의하여 자아에만 만족할 때에, 그 사람을 일컬어 지혜(般若)가 결정됐다고 하느니라.
자기를 위해서 자아(아트만)에서만 만족을 찾는다는 말은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속에 있는 정신을 들여다볼 뿐이요 밖에 있는 물건들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밖의 물건은 그 성질상 쾌락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 정신적 만족 혹은 축복은 쾌락이나 행복과는 다른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예를 든다면, 부(富)를 가짐으로써 올 수 있는 쾌락이란 나를 속이는 물건일 뿐이다. 정신적인 진정한 만족 혹은 복(福)은 내가 모든 유혹을 이기고 비록 가난과 주림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견디어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 간디
어떤 물건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그것 속에서 순수 한 선(善) 곧 하나님을 보는 때에만 그럴 수가 있다. (No creature is to him a comfort save so far as he may apprehend therein pure Good which is God.) — 에케르트
 
56.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쾌락 속에서도 애착이 없으며, 애욕도 공포도 분노도 다 벗어버린 사람, 그 사람을 일컬어 생각이 결정된 성자(牟尼)라고 하느니라.
 
57. 어떤 방면에도 애착이 없고 좋은 것을 얻거나 언짢은 것을 얻거나 기뻐도 아니하고 원망도 아니하는 사람, 그 사람은 지혜가 흔들림이 없느니라.
 
58. 마치 거북이 그 사지를 끊어뜨리듯이, 그러한 사람은 제 감관을 감각의 대상(境)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튼튼히 섰느니라.
 
59. 감각의 대상은 거기에 대해 단식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를 보게 될 때는 그 맛도 사라진다.
이것은 단식 또는 그밖의 자기 억제의 방법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 다. 다만 거기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감각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는 데는 그러한 억제 방법이 필요하다. 다만, 그 뿌리가 뽑히려면 지극히 높은 이에 대한 체험이 있고서야 된다. 고상한 갈망은 저속한 갈망을 정복한다. — 간디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건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 아니다. 만일 욕망이 남아 있으면 물건이 없는 것만으로는 떼어버림이 되지 못한다. 욕망 까지 눌러버려야 떼버림이 된다. 그래야 영혼이 자유한다. 그때는 소유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관계없다. ⎯십자가의 성요한
저자는 겉으로 피하는 것과 속으로 끊어버리는 것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몸의 폭군으로부터의 해방만으로는 아니된다. 욕망의 폭군에서까지 해방되어야 한다. — 라다크리슈난
 
60. 왜냐하면, 쿤티 부인의 아들아, 어진 자가 아무리 노력 하고 잘 알고 있더라도, 욕망이란 억제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의 마음을 억지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61. 일체의 감각을 억누르고, 요가로 자리잡고 앉아 나에게 전심(專心)하여라. 감각을 완전히 다스리는 사람이어야만 그 지혜가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정성된 믿음과 그 결과로 오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사람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 — 간디
자기 단련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와 감정 문제다. 자기 단련은 지고자(至高者)에 대한 환상이 있을 때 쉽게 된다. — 라다크리슈난
종교는 끊임없이 가리워진 돌을 향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모든 제단에 나아감에 있는 것도, 땅에 엎드리는 데 있는 것도, 신의 계신 곳을 향해 손을 드는 데 있는 것도, 짐승의 피로 성전을 물들이는 데 있는 것도,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화평한 영혼으로 보는 데 있다. — 루크레티우스
 
62. 사람이 감각의 대상(境)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거기 대한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애욕이 일어나고 애욕에서 분노가 나온다.
애욕(Kama) 욕망(desire, craving).
애욕은 종국에는 분노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끝이 없고 만족할 줄도 모른다. — 간디
감각의 대상을 골똘히 들여다보면(brooding) 마음이 거기 얽혀버리고 주를 골똘히 생각하면 그이 안에 나를 잃게 된다. — 「바가바타 푸라나」
 
63. 분노는 미망을 낳고, 미망에서 기억의 상실이 오고 기억의 상실에서 이성의 파멸이 온다. 이성이 파멸되면 그 사람은 완전히 망해버린다.
이성이 파멸되면 시비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64. 그러나 훈련된 자아는 아트만으로 감각을 잘 다스리고, 곱고 밉고를 떠나 있으므로 대상 가운데 걸으면서도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65. 마음의 평화에서 일체 고통의 소멸이 온다. 마음이 평화하면 그의 이성은 곧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66. 마음의 통일 없는 사람에게 이성 없고, 마음의 통일 없는 사람에게 영감도 없다. 영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사람에게 어디서 즐거움이 있겠느냐?
영감(bhavana) 간디는 헌신(devotion)이라 했고. 라다크리슈난은 집중력(power of concentration)이라 했고, 세계성전전집에는 정려(靜慮)라 했고, 데이비스(Davies)는 올바른 상태(right condition)라고 했으며. 힐(Hill)은 반성(reflection)이라 했고, 텔랑(telang)은 지식 추구의 유지(perseverance in the persuit of knowledge)라 했고, 에브리맨스 문고판에는 신령 감응(inspiration)이라 해서 가지가지로 번역이 돼 있다.
 
「대학」허두에 있는 “멎을 줄을 안 다음에야 정(定)할 수가 있고, 정하고 난 뒤에야 고요히 할 수가 있고. 고요히 한 후에야 편안할 수 있고, 편안히 한 후에야 깊이 생각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한 후에야 얻을 수 있느니라”(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能後能慮 慮而後能得) 란 말이 잘 참고될 듯하다.
 
67. 사람의 마음이 날뛰는 감각을 따라가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지혜를 휩쓸어가기를 마치 바람이 물위의 배를 휩쓸듯 한다.
 
68. 그러기 때문에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야, 감관을 그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물러나게 한 사람이 그 지혜에 흔들림이 없느니라.
 
69. 모든 산 물건에게 밤인 때가 다듬기운 혼에게는 깨는 때요, 모든 산 물건에게 깨는 때는 깨달은 성자에게는 밤이다.
모든 것들이 감각의 대상의 번쩍거리는 빛에 끌릴 때에 성자는 실재를 깨달으려고 열중한다. ᅳ라다크리슈난
니콜슨(Nicholson)은「이슬람의 신비가」(mystics of Islam) 안에서 수피(sufi, 靈知主義者)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밤이 오면 죄수는 감옥을 잊어버리고
밤이 오면 임금은 권세를 잊어버린다.
슬픔도 없고, 득실에 맘을 쓰는 일도 없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이란 생각조차 없다.
이것은 영지자(靈知者, gnostic)의 모습, 그가 깼을 때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이 잠이 들거든 깬 줄로 알아라.”
그는 세상 일에 대해 잠을 자고 있다. 낮에도 밤에도,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에 드신 펜인 듯.
 
70. 그는,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득 차면서도 넘치는 일 없듯이, 모든 애욕이 속으로 흘러들어도 평화를 지킨다.
그러나 애욕을 즐기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71. 일체의 애욕을 버리고 갈구하는 것도 없이, 나란 생각도 내 것이란 생각도 아니하는 사람은 평화에 이른다.
 
72.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이것이 브라만 안에 머무는 사람의 상태다. 거기 도달한 사람은 다시 미혹하는 일이 없으며, 비록 임종하는 순간에라도 거기 결정하고 서면 브라만의 니르바나에 들어갈 것이다.
브라만에 머무는(brahmisthiti) 영원한 생명.
브라마 니르바나(brahmanirvana) 범열반(梵涅槃). 영원한 평화, 브라만과 하나됨. 브라만과의 합일이라 한 데 대해 간디는 말하기를 니르바나는 완전한 소멸(extinction) 이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한으로는 부다의 생활의 중심인 니르바나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의 완전한 소멸이다. 즉 모든 악독한 것, 모든 썩었고 썩을 수 있는 것들이다. 니르바나는 무덤 속에 있는 캄캄한 죽음의 평화 같은 것이 아니라, 산 평화, 자기 자신을 알고 영원의 가슴팍에 자기 있을 곳을 발견한 줄을 아는 영혼의 산 행복이다. 이 영원의 가슴팍의 있을 곳이 브라마 니르바나다.
니르바나 불교에서는 완전한 상태의 뜻으로 쓰인다. 파다(eamma Pada)는 말하기를 “건강은 최대의 소득이요 자족은 최대의 부요, 신앙은 최선의 벗이요, 열반은 최고의 행복이다”(Health is the greatest gain, contentment is the greatest wealth, fait is the best friend and nirvana is the highest happiness) 라 했다.
이러한 성자들은 니체의 초인, 알렉산더의 신성소유자(神性所有者, deity-bearer)와 공통점이 있다. 즐거움, 정염(靜恬) 내적인 힘과 해방의 의식, 용기, 끈질긴 목적의식, 신 안에서의 단절 없는 생활, 이런 것들이 그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인간 성장의 첨단을 표시한다. 그들은 바로 그 존재와 성격과 의식으로 스스로 인정하는 결점을 넘어설 수 있고 진화의 물결은 보다 높은 새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게 표본을 보여줄 것을 허하고 현재의 이기적이고 부패적인 데서 높이 올라갈 것을 우리게 기대하고 있다.
지혜는 해방의 최고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욕심 없는 작업을 제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브라만 안에 머물고 있으며 이 세상의 불안에서 놓여나 있다. 견고한 지혜의 성자는 무사한 봉사의 생활을 산다. — 라다크리슈난
어떤 사람이 성자를 보고 묻기를 “어떻게 해서 당신은 완전에 도달했습니까” 했더니 그 성자는 대답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합일됨으로써이다. 하나님 이하의 어떤 것에도 나는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했다. (Evelyn Underhill의 신비주의) — 에카르트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안에 있는 브라만의 지식 속에서 요가의 학문에 관해서 크리슈나와 아르쥬나가 서로 문답하는 제2장 삼캬 요가의 끝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