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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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5장 내버림의 요가(1)
작성자 바보새 16-01-22 01:38 조회1,0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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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내버림의 요가
 
 
제2장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쥬나에게 삼캬와 요가에 대하여서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생의 가멸성(可滅性)과 불가멸성(不可滅性)을 분명히 깨달음으로 인하여서 그가 생의 본성과 그 행위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무지를 극복하고 자기의 영원한 자유의 거룩한 본성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였다.
제3장에서는 카르마 요가를 가르쳐주었다. 즉 하나님과 하나된 상태 에서 하는 행위, 혹은 하나님과 하나됨을 영원히 흔들림 없이 하게 하는 행위, 그리하여 행하는 자와 행위의 존엄성을 더불어 높이게 하는 행위를 가르쳐주었다.
제4장에서는 그 가르침을 계속하여서 크리슈나는 아르쥬나에게 자아와 행위와의 관계를 더 깊이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내적 본성과 외적 활동의 생활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해 있는 단절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였다. 그 결과 아르쥬나는 생명의 실상(實相)과 행동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갖게 되었고 자기의 본체는 행위와는 완전히 독립해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행동은 생명의 본질, 곧 영원한 자유의 본체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제4장의 제목을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행위 포기의 지식의 요가) 라고 했는데 그것은 의미 있는 말이다. 그것은 그 가르침에 의한다면 요가 곧 하나 됨은 내버림의 지식, 즉 자아는 완전히 행위에서는 떠나 있다는 지식에 의하여 얻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내버림의 상태는 우주적인 지경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자연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을 정립시킨다. 우주적인 지경에서는 하나님은 창조와 진화에서 버물리지 않고 계시고, 개인적인 생명의 지경에서는 자아는 행위에 버물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내버림의 자연적인 상태가 모든 생명의 참 된 기초요, 그것을 아는 지식이 해탈을 가져온다. 그것이 제 4장의 짬이다.
제 4장이 얼핏 보기에는 제 3장의 행동의 요가(karma yoga)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만일 행위를 내버리라고 했다면 카르마 요가의 원리에 반대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 내버림의 지식에 의한 깨달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버림은 이해할 것이지 실행할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내버림의 지경은 행위의 요가로야만 이루어진다. 내버림을 실행할 수는 없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내버림의 지식이지 내버림의 실행이 아니다.
우리가 내버림은 실행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은둔생활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은둔자의 내버림의 생활은 외적 물건의 내버림이므로 그것은 어떤 특정한 생활양식에만 관한 것이다. 그 자체가 곧 하나님에 이르는 길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게로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내버림의 행동이 아니고 내버림의 지식이다.
제4장에서 말하는 내버림의 지식은 카르마 요가를 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하고 삼캬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내버림의 지경은 두 길에서 다 경험하는 것이요,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닫지 못한다면 의심이 남아 있어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카르마 요가도 삼캬도 다 같은 공통된 기반인 초월적인 명상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직접 초월적 자아의식으로 들어간다. 거기서는 아무리 세련된 사색조차도 내버리게 되는 것이고, 자아는 순수한 본성만으로 홀로 선다. 이것이 완전한 내버림의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명상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항구하지 못하다. 다만 규칙적이고 계속적인 명상을 행동(삼캬 노선에서 한다면 정신적인 행동, 카르마 요가 노선에서 한다면 육체적인 행동)과 번갈아 함에 의하여서만 초월적 자아의식이 우주적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고, 그 우주의식 속에서만 자아는 행위에서 독립하여 일상생활에서 자연적인 내버림의 상태를 체험할 수가 있다. 그러면 내버림이 항구적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주적인 의식상태가 더 발전해서야만 내버림의 완전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있는 자아와 행위의 분리된 상태가 녹아 없어지고 궁극의 하나 된 신의식에 이를 수 있다.
제5장은 이 제4장에서 얻은 지식의 뒤를 이어서 아주 분명히 삼캬와 카르마 요가를 한데 놓고 모든 행동에서 영원한 해방에 이르는 데 둘 다 꼭같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행위를 내버림에 의하여 요가 혹은 통일에 도달한다는 하나의 가르침을 내세운다. 그것은 카르마 요가에 반대될 것같이 생각되는데 크리슈나는 그것은 반대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카르마 요가와 삼캬를 같은 선 위에 놓고 하나의 새 철학을 짜낸다. 그것이 곧 내버림의 요가다.
내버림이란 쉽게 말하면 없어짐이다. 그러므로 내버림의 요가는 잃어버림의 요가다. 잃어버림에 의한 통일(하나됨)이다. 잃어버림이 완전에 이르는 길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말이다.
내버림의 철학 없이는 행위의 철학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행위를 한다는 그 반대의 극에는 행위를 내 버린다는 것이 언제나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분리와 통일이 서로 대립하듯이, 행위의 내버림은 행동의 요가와 대립되고 있다. 이 통일과 내버림의 두 극을 다 생각하지 않고는 그 철학은 완전할 수 없다.
내버림의 철학은 단순히 행위의 철학에 보조적인 것만도 아니요, 그 철학의 한 본질적인 부분만도 아니다. 사실 그것은 행위 그 자체의 한 완전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버림의 철학은 아주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엄정하게 내버림의 한계 안에 남아 있으면서도 능히 행위의 철학을 지지해줄 수 있다. 카르마 요가의 기반은 초월적 의식에 있기 때문에, 카르마 요가의 철학 전체는 이 내버림의 철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초월적인 의식에 이르는 길은 마음을 외계에 대한 경험의 분야에서 물러나게 함으로써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초월적 의식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을 초월적인 것을 향한 행동으로 설명하든지 외계에 대한 경험에서 벗어나는 행동으로 설명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처음 것으로 한다면 그것은 그 원리를 카르마 요가의 말로 설명할 것이고, 그 둘째 것으로 한다면 그것은 그것을 내버림의 말로써 할 것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은 내버림은 결코 어떤 실제의 행동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버림의 철학의 실제적 모습은 삼캬와 카르마 요가의 방법 속에서 볼 수 있다. 내버림의 교리는 어떤 독립된 실천방법을 마련해주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내버림이란 것 그 자체가 어떤 길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길들의 실천 밑에 들어 있는 하나의 이론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3장에서는 행위의 원리가 설명되었고. 제4장에서는 내버림의 지식 이 설명되었는데, 이제 제5장에서는 그들이 서로 같이 서서 간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탄복할 만한 것은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의 입장에서가 아니고, 추상적인 내버림의 입장에서 해주는 데 있다. 그것은 서로 반대되는 두 극인 행동과 내버림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가운데서 서로 다른 두 길인 요가와 삼캬를 연결시켜주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로 통일 된 생활의 완전한 철학을 설명해준다. 여기에 모든 사람을 부르는 한 부름이 있다. 어떤 길로 오든지, 해방은 네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내버림의 기초 위에서 하는 행위의 높은 수준에서 가지는 신령한 의식 속에 있는 영원한 자유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럴 뿐 아니라 이것은 또 일상생활에서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 하려면 신령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또 신령한 의식에 이르려면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생명의 물질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조화시킴으로써 사람이 어떤 시대에 있어서나, 하나의 가정을 가진 사람이거나 출가한 사람이거나간에, 성공적으로 사는 동시에 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한 길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이 장은 행위를 내버림은 무사(無私)한 행위의 훈련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며, 그들은 결국에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간디
 
아르쥬나 말하기를
 
1. 크리슈나시여, 당신께서는 저에게 행위를 내버릴 것을 찬양하여 말씀해주시고 또 (행위의) 요가를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결정지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내버림 산야사(sannyasa), 포기, 원리(遠離)
행위 카르마(karma). 작위(作爲), 업(業).
 
샹카라는 말하기를 아르쥬나의 질문은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무지한(자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행위(有爲)는 내버림(無爲)보다 좋기 때문이다.
「기타」가 목적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행동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업의 사슬에 얽어매려는 이기적인 행동이요, 어떤 행동이건 도무지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행동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행동이 구원되는 지혜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라다크리슈난
아르쥬나가 미혹에 빠져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깊은 이해를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아르쥬나가 여러 가지 질문을 거듭거듭 하는 것은, 그가 풍부한 지성을 가진 실행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것이거나 무조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의 지극히 작은 실수가 후에 오는 몇 세대에게 큰 잘못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저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크리슈나가 자기에게서 하려는 모든 것을 세밀히 알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크리슈나 말씀하시기를
 
2. 내버림도 행위의 요가도 다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그 둘 중 행위의 요가는 내버림보다 더 좋으니라.
내버림(sannyasa)은 네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로 가장 흔히 있는 해석으로는 모든 세속 살림을 떠난 사람. 둘째는 마음속의 세밀한 생각까지를 버리기 위해 초월적인 명상을 하는 사람. 이것은 산야사의 전관심사다. 상대계의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인생의 나타나 뵈는 것과 뵈지 않는 모든 일에서 떠나는 것. 셋째는 초월적인 의식에 들어간 후, 행동을 통하여 그는 우주적 의식에 들어가 자아가 완전히 행동에서 떠난 것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완전한 내버림의 생활에 이른다. 넷째는 지극히 오묘한 활동에 의하여 그는 신의식에 들어간다. 거기서는 우주의식에서 서로 분리된 것으로 체험되었던 자아와 행위가 다시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변화 하게 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삼캬에서는 지식 혹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요가에서는 의지적인 노력을 강조한다. 하나에서는 우리는 나의 본질적이 아닌 요소를 생각하여 내버림으로써 자아를 알게 되고, 또 하나에서는 그것을 버리기를 결단하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학문을 하면 날마다 더하는 것이 있고, 도를 하면 날마다 덜어버리는 것이 있다. 덜어버리고 또 덜어버려 하는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면, 하는 것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之 以至于無爲 無爲而無不爲矣) —노자
 
3.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그 사람을 영원한 내버림의 사람으로 알라. 억센 팔을 가진 자야, 상대를 떠난 사람은 얽매임에서 놓여남을 얻기가 쉬우니라.
행위가 아니라, 좋고 언짢고의 상대에 집착하지 않음이 참 의미의 내버림을 결정한다. 끊임없이 일하면서도 훌륭한 내버림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하면서도 위선자일 수가 있다, —간디
선비가 도에 뜻을 두었다고 하면서, 나쁜 옷, 나쁜 밥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족히 더불어 말할 나위가 못되느니라.(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공자
아, 어질도다 안회(顔回)야, 한 주발의 밥, 한 표주박의 물로 외진 시골구석에 있는 것을 사람이면 누구나 그 걱정을 견디기 어려울 것인데, 회는 그 즐거워함(道)을 변치 않으니, 참 어질구나, 회야.(子曰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공자
이 몸의 목숨이란 거품같이 뜬 것이니 이리저리 헤치고서 지나가면 그만이다. 일을 내 욕심에다 맞추려면 언제든지 족한 줄을 모르는 법이다. 반대로 한 발짝 물러설 줄만 안다면 근심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잘 산다 못산다 하는 것은 비유해 말한다면 꽃이 피었다가는 떨어지는 것 같은 것이요, 모이고 흩어짐은 마치 구름이 가다가 멎었다 하는 것과 마찬 가지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나는 티끌세상의 생각을 잊은 지 오래고 날마다 재위의 다락에 올라 취한 듯 자연을 바라며 한가히 서 있다. 결코 화를 내서도 아니되고 수심을 해도 아니된다. 타고난 본분에 따라 우주의 대법칙에 일치한 살림을 할 것이지 조금도 억지로 구하려 해서는 못 쓴다. 쓸데없는 말 입밖에 낼 것 없고, 내게 관계없는 일에 머리 내밀 것 없다. 인간의 부귀란 꽃잎 사이의 이슬같이 잠깐인 것, 소위 피를 흘리며 다투는 공명이란 종이 위에 써놓은 것인데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뜬 거품인 듯 맥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옅은 인정의 요구와 영원한 하늘 이치를 비교해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쓸데없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난 다음에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근심 걱정을 해가며 사업을 한답시고 분주히 돌아다니겠느냐?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일이란 “어지러운 세상(紛紛世事)”이라 하는 한 글귀에다 그려진 것이다. 혹할 것이 없고 한적한 숲과 샘의 깊은 자연 속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가장 어진 일이다. 간소한 생활이야말로 행복의 샘이다. 간단한 한 간 초막을 짓는 데 억새 베어다가 송낙으로 엮어 이엉 이으면 그만이요, 도둑 근심이 있겠나, 권세 있는 사람이 찾아올 걱정이 있겠나, 나뭇가지 엮어 사립문을 하나 내고 보면 그 앞으로는 흘러가는 맑고 노래하는 시내뿐이니 얼마나 좋은가? 거기서 마음이 평안하니 한껏 잠을 잘 수 있지, 실컷 자고 깨어나면 그에서 더 즐거움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살진 것을 먹을 필요도 없이 밥을 조금 먹으면 시장한 줄을 모르고 그러면 저절로 근심걱정이 없다. 그런데 무엇을 한답시고 소위 세상의 크고 작은 영웅들이라는 것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며 떠들어대기로서니 그 무엇 때문이냐 하는 호기심인들 어찌 내게 있으며, 누구요 무슨 일이요, 묻기는 고사하고 머리를 돌려볼 필요인들 있겠느냐? (此身壽命若浮漚 只好涯排過了休 事欲稱情常不足 人能退步便無憂 衰榮可喩花開落 聚散還同雲去留 我已久忘塵世念 頹然終日倚岑樓 要無煩惱要無愁 本分隨緣莫強求 無益語言不著口 不干己事少當頭 人間富貴花間露 紙上功名水上漚 勘破世情天理處 人生何用苦營謀 塵世紛紛一筆句 林泉深處任優遊 蓋間芓屋牽蘿補 開筒柴門對水流 得覺閒眼眞可樂 吃些淡飯自忘憂 眼前多少英雄輩 爲甚來由不轉頭) —나윤 (醒悟詩)
그러한 근심 걱정 아니하는 자유의 생활은 자족할 줄을 안 후에야 될 수 있는데, 그러한 만족할 줄 아는 살림은 마음이 은총 의식 속에 굳게 서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초월 절대의 지경이다. 마음의 갈망을 완전히 만족시켜 즐거움이 솟게 하는 행복이란 이 상대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초월적인 의식에 확고히 서서 변함이 없게 된 후에야 모든 얽매임을 벗고, 우주의식 속에서 영원한 자유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완전히 행위의 범역에서 독립하여 영원한 본체의 살림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떠남 혹은 내버림 곧 산야사다. 크리슈나가 “상대를 떠나서”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쉽다’고 한 말이 매우 의미 있는 말이다. 얽매임에서 자유로와짐을 ‘쉽게’ 얻는 것은 상대의 대립에서 본체의 지경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즉 본체와 행동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분리의 상태에서 산야사의 상태 곧 본체의 상태로 올라간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4. 삼캬와 요가를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자의 말이다. 어진 이는 그러지 않는다. 그 하나에만 올바르게 서도 양쪽의 결과를 다 얻을 수 있느니라.
삼캬 곧 이론, 혹은 지식, 혹은 음역으로 승겁(僧怯), 행위를 내버림.
요가 곧 유가(瑜伽), 통일, 행위의 실수(實修).
올바르게 섬 안주(安住), 지(止), 머무름.
앎이 멎은 뒤에 바르게 되고 바른 뒤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한 뒤에 평안할 수 있고 평안한 뒤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 얻을 수 있느니라. (知止而後有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安而後能慮 慮而後能得) —「대학」
삼캬는 생의 가멸(可滅)과 불가멸(不可滅)의 두 양상, 즉 본체와 작용 사이에 있는 단절을 밝혀주고, 요가는 실수(實修)에 의하여서, 본체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지경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역시 본체와 작용 사이에 있는 단절을 밝혀준다. 이러하기 때문에 삼캬와 요가가 다 우리를 얽매임에서 해탈로 이끌어준다.
‘올바르게 선다’는 말이 중요하다. 삼캬나 요가의 가르침 속에 올바르게 서려면 이해와 체험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삼캬나 요가나 다 그 자체만으로 해탈시키는 데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중 어느 것을 먼저 말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5. 삼캬에 의하여 도달하게 되는 지경을 요가를 닦는 자도 도달할 수 있다. 내버림과 요가를 하나로 보는 이가 참으로 보는 이 이니라.
이것은 가정을 지키는 사람과 출가를 한 사람에게 다 같이 해탈의 길을 약속하는 말이다. 이것은 삼캬와 요가를 근본에서 하나로 연결해주고 있다. 영원한 해탈은 가정을 지키는 사람과 출가를 한 사람에게 공통된 목적이다. 참을 본 자는 그것을 안다.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 삼캬의 길이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일이고, 카르마 요가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여기서 말하기를 목적에 도달하면 그 차이는 없어진다고 했다.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지성만이 그 두 사이의 차이점만을 생각하고 있다. 지혜 있는 사람은 그중 어느 것이나 하나를 잡고 시작하여 목적에 도달한다. 그는 차이점을 파고드는 데 시간과 힘을 허비하지 않는다.
 
한걸음 나가서 지식과 행동의 두 가지 길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그 길들 자체가 본래 하나인 것을 알게 된다. 오직 하나 초월적인 명상의 길만 이 양쪽 모두에 완성을 가져다준다. 둘을 하나로 보는 자만이 참으로 보는 자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길이 다 같이 초월적인 명상에서 나와서, 나가는 동안에 다 같이 우주적 의식 속에서 내버림의 체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두 길이 다 같이 이 본체와 작용의 별립(別立)이라는, 직접적인 깨달음이라는 중간이정표에 도달하면서도 아직도 구경의 목적에 온 것은 아니다. 완전한 완성에 이르려면 아직도 더 나아가 신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통일이라는 최종의 한 목적에 빠져들어야 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6. 그러나 마하바후야, 요가가 아니고는 내버림에는 참으로 도달하기 어렵다. 요가에 전심하는 성자는 오래지 않아 브라만에 이르느니라.
마하바후(Mahabahu) 억센 팔을 가진 자. 곧 아르쥬나.
샹카라는 말하기를 “여기서 브라만이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산야사를 의미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절대자를 깨닫도록 이끌어가는 것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문맥을 보면 요가 아니고는 도달할 수 없던 것을 쉽게 도달하게 하는 것은 요가일 것이기 때문에 그 해석은 그럴 듯하다고 인정이 된다. —마하데브 데자이
여기서 요가라는 것은 카르마 요가도 아니요, 초월적인 의식을 얻기 위해서 하는 연습도 아니다. 그것은 통일된 상태 그것, 즉 초월적인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브라만이란 상대적과 절대적 양면이 하나로 다 충족된 상태이므로, 그 상태를 가장 잘 맛볼 수 있는 것은 통일이 항구적인 지경에 이른 때, 즉 초월적 의식이 항구적으로 이루어진 때다. 이 우주의식의 상태가 산야사의 체험, 즉 자아와 행동의 분리를 이루어준다. 상대와 절대의 분리가 여기서 산 사실이 된다.
크리슈나가 “오래지 않아서”라고 한 것은 이러한 통일의 항구화 과정에 관해서 한 말이다. 통일의 상태, 곧 초월적 의식은 그 자체가 복스러운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제 자신의 천성에 끌려 여기 도달하게 되는 것이요, 항상 그것을 더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에 도달하는 것은 쉽게, 반항 없이 이루어진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7. 요가에 전심하여 영혼을 정결케 하며, 자기를 정복하고 감각을 통제하며, 자기의 자아로써 만물의 자아가 되는 자는 비록 행동한다 하여도 물듦이 없느니라.
요가에 전심 정신이 통일된 상태, 하나됨에 이른 상태, 자아에서 떠남이 없는 상태, 노자가 말하는 “범을 이루기를 다시 없이 하고 고요를 지키기를 도타이한다”(致虚極 守靜篤)는 지경.
정결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자기의 자아로 만물의 자아가 됨(有大人者 正己而物正).—맹자
내 함 없어서 백성은 저절로 되고, 내 고요를 좋아하여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며, 내 일 없어서 백성은 저절로 가멸고, 내 하고자 함 없어서 백성은 저절로 등걸이니라(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撲). — 노자
거룩한 이는 제 마음이란 것이 없이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느니라(聖人無己心 以百姓心爲心). — 장자
참 사람은 저가 없다(眞人無已). — 장자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 내게 주셨다. — 예수
 
8. 거룩하신 이와 하나 되어 참을 아는 자는 생각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 한다. 비록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먹고, 움직이고, 숨쉬고, 자고,
참을 아는 자 타트바비트(tattvavit).
 
9. 말하며, 주며, 취하며, 눈을 뜨고 감을지라도 그는 생각하기를 “다만 감각이 그 대상 속에 일하고 있을 뿐이다”하느니라.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공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ᅳ예수
‘거룩하신 이와 하나되어’란 신성(神性)이 행동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졌을 때 자아는 행위에서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 체험 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자기’가 버티고 있는 한은 이러한 떠남(내버림)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감성적인 인간이 이것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의 감각이 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늘 밑에 자기를 숨겨서는 아니된다. 그러한 잘못된 해석은「기타」가 뭔지 올바른 행동이 뭔지도 모르는 무지를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 절이 그것을 밝혀준다. —간디
맹자가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면서 사람을 죽이고도 “내가 죽였나, 칼이 죽였지”(非我也 兵也) 한다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뜻에서다.
예수께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 한 것을 반대할 양심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지로는 꼭 같은 도둑, 강도가 앉아서 남을 능히 재판하여 징역을 시키고 사형에 처하는 것은 무엇으로써 능히 그렇게 할까? 제도와 법의 그늘에 숨어서다. 제도와 법을 만드는 것은 이성(理性)인데, 이성이 스스로 절대의 영(靈)의 다스림 받기를 거부하고, 자기 홀로 서는 것을 자유요 독립이요 인간의 존엄으로 거짓해석을 붙이기 시작했을 때 현대의 횡포와 혼란은 벌써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절대의 영을 세상 밖에다가 두고 무조건 복종을 강조하는 정통주의적인 종교에서도 위에서와 마찬가지 협잡이 일어난다. 우리를 정말 자유하게 하는 진리의 신은 초월적으로 계시는 동시에 반드시 또 내재하시는 이여야 한다.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정치주의는 무조건 복종을 찬양하는 종교에서 나온다. —함석헌
 
10. 자기의 모든 행위를 브라만에게 바치고 집착을 떠나 행동하는 자는 죄에 물듦이 없나니, 마치 연잎이 물에 젖지 않음 같으니라.
브라만 범천(梵天). 하나님, 지고자, 절대자, 보편적인 본체(Universal).
「기타」는 우리에게 행위를 버리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유한한 이기적인 자기와 자기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다 내버리고, 우리의 행동을 영원에다 바칠 때 우리는 진정한 내버림을 얻게 된다. 그러면 그 안에서 현세에서의 자유도 찾게 된다. —라다크리슈난
‘죄에 물듦이 없다’ 란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믿는 자는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 아니다. 그것은 망언이다. 차라리 “마음의 하고자 하는 데 따라 하여도 규칙에 어그러짐이 없다는 공자의 말이 그 뜻에 가까울 것이다.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완전한 데 가자”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인데, “사람인 이상 죄는 아니 지을 수 없다” 스스로 면허권을 내리고, 그담은 그저 무조건 사죄만을 바라는 것은 교리의 말을 빈 하나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주는 복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죄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지 결코 덮어놓고 무조건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페인트칠장이가 아니다. 그런 따위 그릇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의 권세자와 야합하여 역사를 언제까지라도 구정물 속에 썩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리켜 예수는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스스로 죄지은 줄을 알면서도 감히 ‘인간의 연약’으로 방패를 삼으려 하지 않고 심중에 아파하고 슬퍼하는 자는, 회개와 죄짓기를 번갈아 하는 데서 그 무조건 은혜 줌과 다름이 없는 듯하지만, 다르다. 그 아파하는 마음, 슬퍼하는 눈물이 그 영혼을 지켜 죄의 물이 들지 않게 한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서 마침내는 그 더러움이 와닿을 수 없는 자리로 올려놓아주신다. —함석헌
 
11. 요가를 닦는 자는, 다만 몸으로, 마음으로, 이성으로, 혹은 정말 단순히 감관으로만, 자아의 정화를 위하여, 집착을 떠나 행동하느니라.
‘다만’이란 나라는 생각이 없이라는 뜻.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일시 잠깐 잊든지, 혹은 술 같은 것에 취해서 혹은 병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무의식상태에서 나라는 생각 없이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요가 닦는 사람이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힘써서 자아 혹은 영혼을 빼고 행동한다. 비유를 쓰기는 하면서도 그 점이 다르다.
참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습대로인 나의 자아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지만 보통 믿음 없는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내’가 그럴 수 없는 것을 ‘내가’ 하는 줄로 망상을 하는 데 있다. 한다면 몸이 했고 마음이 했고 이성이 했고 감각이 한 것인데 그것을 ‘나’로 아는 것이 망상이다. 무지다. 그러므로 자아 혹은 영혼, 즉 나의 참, 나의 불염성(不染性) 불멸성(不滅性) 불변성(不變性)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음이요 도(道)를 믿음이요 브라만을 믿음이다. 그럴 때 무한의 힘이 온다. 어디서? 저기서라면 저기요 이속에서라면 이속이다. 어디가 없다. 그것이 그때에 은총으로 복스러움으로 기쁨으로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이런 명상에 들어가는 것은 조금 믿는 사람은 체험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죄와 은혜가 번갈아 출입을 해서는 참으로 구원된 상태가 아니다. 물론 구원을 바라는 마음 그 일념 속에 이미 구원이 있지만, 그렇게 들고 나고 함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풍랑 없는 배질은 있을 수 없지만 배가 대기권 밖으로 나가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신앙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부동의 자세를 말하는 까닭이다.
‘자아의 정화를 위하여’ 란 모든 행동의 목적은 자아의 정화에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총에만 매달리려는 마음은 자아의 정화란 생각을 깊이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심하면 그것을 율법주의적인 교만이라고 배척하기까지 하려는 사람이 있지만 이점은 모든 문제를 자아(아트만)를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인도식 사고방식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십계명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나라의 헌법이라 할 만한 산상수훈(山上垂訓)에 있어서 예수도 분명히 마음의 정결을 강조했는데, 십자가의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자아의 정화를 원수같이 아는 열심당이 생긴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익살인 것은 자기 경우에는 자기는 버러지만도 못하다면서 겸손한 듯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는 예수의 비유 에 나오는 빚진 종같이 저쪽의 멱살을 거머쥐고 가차없이 냉혹한 심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자기 자아에 대한 자세한 살핌이 없기 때문에 남의 죄에 같이 아파할 줄을 모른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다.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가 당장에 가라지 뽑으려는 것을 금하는 뜻을 깊이 생각해본 일도 없는 사람이요, 탕자 비유의 맏아들을 지독히 나무라는 또 하나의 맏아들일 뿐이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았다 하고,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면 하나님도 인간 영혼도 기성품으로 되어있는 것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식의 의식작용이 변화되지 못하는 한 “울어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다. 우리 자아가 기성품이 아닌 것은 조금 참되게 반성해보면 알 수 있고, 자아가 기성품일 수 없다면 하나님도 다 되어서 석상처럼 서 있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우리 자아는 흙 속에 묻힌 골동품같이 찾아만 내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영원한 역사를 두고 실현해내야 하는 자아다. 창조적 활동이야말로 자아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 자체의 지혜로 인해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모습인 것을 안다. 자아의 정화란 다른 것 아니고 자아를 통해 실현해내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부터 행위의 요가를 닦는 자는 자기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했다. 잘되고 못 되고가 문제 아니라, 왼통 다 하나님 앞에 바친 것이다. 그러한 태도에 의해서만 깨진 질그릇 같은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실현해낼 수 있다. 실현해 낸다는 말을 예수 식으로 하면 “그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케 하시오” 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죄와 의를 구별할 것 없이 일체의 행동이 번제단(燔祭壇)에서 타는 동물의 각 부분인 모양, 다 의미가 있어진다. 이것이 곧 행위 내버림의 지식이다. —함석헌
 
12. 정신이 통일된 사람은 행동의 결과를 버리고 궁극의 평화를 얻으나, 정신이 통일되지 못한 사람은 애욕에 몰리어 행동의 결과에 집착함으로써 항상 얽매어 있느니라.
정신이 통일된 사람 원어로는 육타(yuktah)라는 말인데, 요가를 닦은 사람,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은 사람, 진실히 믿는 영혼 등으로 번역된다.
지극한 아름다움을 얻어 지극한 즐거움에 노니는 이를 일러 지극한 사람이라 한다……풀 먹는 짐승은 숲을 바꾸기를 싫어하지 않고, 물에 사는 벌레는 물을 바꾸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조그만 변동을 행하더라도 그 큰 떳떳을 잃음이 없으면 희로애락이 가슴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得至美而遊乎至樂 謂之至人……草食之獸不疾易藪 水生之蟲 小疾易水 行小變而不失其大常也 喜怒哀樂不入於胸次) —장자(田子方)
 
13. 우리 몸 안에 주인으로 계시어 스스로를 주장하시는 이는 마음으로 모든 행동을 내버리시고 평안히 아홉 문의 성 안에 거하신다. 그는 하시는 일도, 시키시는 일도 없다.
아홉 문의 성 사람의 몸.
몸의 큰 문들은 두 눈과, 두 콧구멍과 두 귀와, 입과 두 배설기관이지만 자세히 말한다면, 피부에 있는 수많은 구멍들도 역시 다름없는 문들이다. 만일 그 문들의 문지기들이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하여, 정말 나가고 들어올 만한 물건들만을 나가고 들어오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사실로 그 나가고 들어오는 일에 관계하는 것이 없고, 다만 피동적인 증인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하다면 그는 정말 하는 것도 시키는 것도 없는 자이다. —간디
 
14. 주께서는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힘을 지어내시지도 않고 행동하시지도 않으며, 또 행동과 그 결과를 연결시키시지도 않는다. 그것은 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행동하는 힘 능작(能作).
제 스스로 자연, 자성(自性).
하나님은 행하는 이는 아니다. 카르마의 냉철한 법칙이 모든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각 사람이 제 심은 것을 거두게 함으로써 제 보응을 받게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법칙의 이루어짐 속에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와 정의가 있다. 추호도 가차 없는 정의 속에 자비가 있다(In undiluted justice is mercy) 정의와 아울러 서지 못하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다. 그러나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알아서 하는 재판자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법은 그에게는 보류가 되고, 자비 혹은 용서가 순수한 정의다. 저 자신이 언제든지 재판을 받게 될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원하는 것, 든지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해주지 않으면 아니된다. 오직 용서의 정신을 길러냄에 의하여서만 사람은 요가의 지경 곧 어떤 행동에도 얽매임이 없고,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행동을 민첩하게 할 수 있는 데 이를 수 있다. —간디
 
15. 전능하신 이는 어떤 사람의 악도 받으심이 없고 선도 받으심이 없다. 무지에 의하여 지혜가 가리어졌을 뿐이니, 그러므로 중생이 헤매이느니라.
전능하신 이 비부(vibhuh), 편재자(遍在者), 무소부재하고 무소불능하신 이. 개개의 영혼은 영원히 변함없이 갈라져 있는 분자(分子)가 아니다. 비부는 지자(智者)의 자아로 생각할 수도 절대적인 자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드바이타(advaita,일원론) 베단타(vedanta)에서는 그것은 하나다.
무지에 의하여 아즈나네나(ajnanena), 우리로 하여금 다수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은 무지다.
지혜 즈나나, 모든 차별적인 것의 유일한 기본은 지혜다. —라다크리슈난
미혹의 근본은 인간이 오만하게도 행동을 제가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행동의 결과는 상이었든 벌이었든간에 하나님이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있다. —간디
14,15절은 삼캬론에서, 푸루샤(purusha)는 행함이 없고, 행하는 것은 오직 프라크리티(prakriti)라는데 맞추어서 하는 말인데, 베단타에서는 푸루샤 혹은 아트만을 지고자와 하나로 보기 때문에 프라부(prabhuh)와 비부(nibhuh)라는 말을 주(Lord) 혹은 편재하시는 원리라는 뜻으로 여기다 썼다. 간디는 두 말을 다 지고자라는 뜻으로 취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을 개인의 자아로 취하기도 한다. 그 어느 편이거나간 뜻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기타」에서 말하는 지고자를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신, 즉 명상적 추상적 관념의 신으로, 행동하는 일도 없고 우주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가지려고도 아니하는, 군림할 뿐 다스리는 일은 없는 임금으로 착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이 절들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법의 통치다. 물론 모든 법의 궁극의 본원은 모든 것에 편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는 지고의 본체이기는 하지만, 삼캬나 즈나나 요가를 닦는 이들에게는 지고자는 보편적인 법으로 활동하는 이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카르마 요가 혹은 박티(bhakti) 요가를 닦는 이들에게는, 다음의 29절에서 보는 대로, 그는 자기의 예배를 즐거이 받아주시고, 언제나 기꺼이 응해주시는 친구요 위로자이신 하나님이 아니어서는 아니된다. —마하데브 데자이
우리는 모두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보려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보려고, 알 수 없는 이를 알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우리말이 더듬더듬하고, 확실치 못하고,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베다」가 브라만을 그려서 말할 때에 “이것도 아니” “이것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만일 존재한다면 우리의 어버이들과 또 그들의 어버이들이 존재했을 것이요, 그렇다면 창조 전체의 어버이를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만일 없다면 우리도 없다. 우리가 모두 한 하나님을 서로 여러 가지로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이는 원자보다도 더 작고, 히말라야보다도 더 크다. 그이는 대양의 한방울 물속에도 들어 있으시지만, 또 칠대양을 다 가지고도 그를 둘러쌀 수는 없다. 이성은 그이를 알 능력이 없다. 그는 이성을 초월하신 이요 그것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이다. —간디(「청년인도」, 1926년 1월 26)
‘만물에 편재하는 지혜’는 절대의 본체다. 편재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성격을 가지고, 초월적이기 때문에 행동의 영향권 밖에 선다. 이는 상대적 생명 전체의 무언의 증인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6. 그러나 그 무지를 자아의 지혜로 깨치는 자에게는 그 지혜가 태양처럼 그 지극히 높으신 이를 드러내 보여주리라.
이 절을 보면 지혜에 의하여 무지가 깨쳐지지, 무지를 깨쳐서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무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기보다는 직접 체험에 의해 지혜를 얻으려고 힘쓰는 것이 옳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지로 인해 하나로 알았던 생명이 삼캬의 분석으로 두 구성 요소로 갈라진다. 즉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요가에 서는 직접 체험에 의하여 그것을 생명의 서로 다른 두 분야로 인식하게 된다. 삼캬에 의하여 깨달아진 것이 여기서 확인된 것이다. 우주의식에서 자아가 행동에 버물리지 않는 생활을 살기 시작할 때 삼캬의 가르치는 진리가 실생활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으로 인하여서 생명의 이 두 분야, 즉 상대와 절대가 서로 따로따로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이 상대적인 분야에 있어서 이미, 구경에는 고(苦), 낙(樂)에 이르는 선과 악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과 그것은 각각 자아가 행동에 집착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 그리고 그 집착은 결국 지혜를 가지지 못하는데서 나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7. 이성을 거기 두고, 바탈을 거기 세우고, 거기 안주하며 거기 전념하는 이는 지혜로 인하여 모든 죄가 깨끗해지고, 다시 물러남 없는 자리에 이르느니라.
이성(理性) 원어는 부디(buddhi), 지혜, 이해라고도 번역하는 이들이 있다.
두고 혹은 뿌리박고, 혹은 가득 차 있다로 번역하는 이도 있다.
바탈 원어는 아트만인데 아트만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보통 하는 대로 자아로 번역하는 이도 있으나, 또 존재(being) 혹은 자각적인 존재(conscious being)로 번역하는 이도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했을 때의 그 모든 것을 다 합한 지경, 전존재로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
세우고 어떤 이는 ‘향하고’로. 어떤 이는 ‘하나되게 하고’, 어떤 이는 ‘(자아를 거기서) 보고’로 번역한다.
안주하며 영어로는 ‘전념하고 있는’ (intent on), ‘열중한’ (with heart in), ‘머무르다’ (abide in) 등으로 번역했다.
거기 원어로는 타트(tat), 그것이라는 말로서 위에서 설명한 단어, 이성, 자아, 안주, 전념 등으로 번역하게 되는 말들의 첫머리에 거의 언제나 다 붙어있다. 그래서 ‘우리 생각하는 것, 사는 것, 목적하는 것, 힘쓰는 것을 타트 그것 을 위해 혹은 거기다 두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 거기, 곧 피(波)는 여기, 이것 곧 차(此)에 대립되는 말이다. 그러니 생각하는 것, 존재하는 것, 목적하는 것. 노력하는 것을 여기, 이 참이 되지 못한 현상계에 두지 말고, 저기, 참의 세계, 상대, 차별이 아닌 초월의 세계에 둔다는 뜻이다.
다시 물러남 없는 자리 불퇴전위(不退轉位).
사람이 현세에 있어서 성공하는 데도, 또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데도 가장 기본되는 것은 청정한 마음인데, 이 절을 보면 그러한 청정심 (淸淨心)은 지혜, 곧 초월적 지경을 얻음으로써만 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또 이 절이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이 절대 청정의 지경을, 우주 의식까지 올라감에 의하여, 확호부동(確乎不動)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은 언제든지 생명의 낮은 단계로 다시 떨어져 내려갈 위험이 있다는 하나의 원리다.
그것은 곧 이런 것을 의미한다. 즉 초월의식이 항구적인 것이 되지 못하면 아침의 명상으로 얻은 힘이 그대로 충실한 채 하루 동안을 가지 못하고 만다는 말이다. 시간이 감에 따라 그 힘의 강도가 약화되고 거기 따라 생활의 청정도(淸淨度)도 떨어져서 저녁에 다시 명상으로 그것을 회복하여야 한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