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산다' = '잘 죽는다' >
.
의식도 없고 장기들도 스스로 기능 못 하는데 단지 기계에 의해 심장만 뛰고 피도 기계로 돌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상태로 때로는 몇 년이나 더 '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술이 발달했다. 이런 연명치료에 미국이 사용하는 돈이 연 20~25 billion 달러라고 (현재 환율로는 30조원쯤). 암세포 제거, 장기 이식, 골수 이식, 줄기세포 이식 등등 온갖 수술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고도 그런 연명치료로라도 하루라도 더 유지하겠다는 것이 환자 자신 혹은 의식 잃은 환자의 보호자 의견이라면 의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럴 때 No라고 말하는 건 환자보고 죽으라는 소리 같아서 할 수 없지만, 최대한으로 의술에 의존하다 환자가 죽고 나면 그때는 또 '연장된 수명만큼 오직 고통만 환자에게 가중한 것이 아닌가?'라는 무거운 마음을 의사들은 갖게 된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타인의 생사여부를 결정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며,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선 무엇이 가장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자원사용 방법인지 고민도 하게 된다.
.
이런 다큐를 보면 살고자 하는 의지/본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실감하고, 동시에 이렇게나 질긴 삶에의 집착을 스스로 놓는 자살자가 많은 사회는 여러모로 불건강한 슬픈 사회임도 확인하게 된다. 2025년에 초고령사회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에 진입하여 돌봄공백의 문제가 나날이 악화되며 40년쯤 후에는 노동인구와 피부양 고령인구의 비율이 거의 1:1이 될 거라던데, 노인빈곤률이 이미 OECD 1위이고 온갖 공적기금은 고갈되어 가고 있는 한국. 부디 잘 헤쳐갈 수 있었으면.
.
윤회계의 삶은 머리에 이미 불이 붙어 있는 위험한 상황이고 매 호흡마다 이 호흡이 나의 마지막 호흡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살으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차피 윤회는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 불교의 전제이기는 하지만 (이 무한한 윤회의 반복이 오히려 불교의 문제의식), 내가 다음 생에는 더 낮은 곳으로 또는 더 열악한 조건으로 윤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죽음의 순간이 닥쳤을 때 느낄 집착과 공포는 윤회가 없다고 생각할 때와 다를 바 없을 터. 그러니 불교에서 '잘 산다'는 것은 '잘 죽을 준비를 하며 산다'는 의미이고 특히 죽는 순간의 마음상태가 다음 윤회처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되는데, 이런저런 세상사에 수시로 휘둘리는 마음이라면 죽음의 순간에 탐진치 없기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죽음 이후는 어차피 모르는 일이니 두렵지 않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길고 얼마나 고통스러우려는지 그게 두렵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고 인간적으로 깊이 깊이 공감된다. 보통의 인간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즐거움이 불가능해졌고 이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 상황이 되었을 때, 그때 남아 있는 유일한 편안함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의 원천은 선정뿐이라 하니, 윤회가 없다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에 대한 대비로 불교수행만큼 '현실적'인 것은 없지 않나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이렇게 고통 가득한 세상에서 선정의 행복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니 머리에 불이 붙어 있다는 말 역시 실감이 날 수밖에 없다.
.
의식도 없고 장기들도 스스로 기능 못 하는데 단지 기계에 의해 심장만 뛰고 피도 기계로 돌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상태로 때로는 몇 년이나 더 '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술이 발달했다. 이런 연명치료에 미국이 사용하는 돈이 연 20~25 billion 달러라고 (현재 환율로는 30조원쯤). 암세포 제거, 장기 이식, 골수 이식, 줄기세포 이식 등등 온갖 수술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고도 그런 연명치료로라도 하루라도 더 유지하겠다는 것이 환자 자신 혹은 의식 잃은 환자의 보호자 의견이라면 의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럴 때 No라고 말하는 건 환자보고 죽으라는 소리 같아서 할 수 없지만, 최대한으로 의술에 의존하다 환자가 죽고 나면 그때는 또 '연장된 수명만큼 오직 고통만 환자에게 가중한 것이 아닌가?'라는 무거운 마음을 의사들은 갖게 된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타인의 생사여부를 결정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며,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선 무엇이 가장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자원사용 방법인지 고민도 하게 된다.
.
이런 다큐를 보면 살고자 하는 의지/본능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실감하고, 동시에 이렇게나 질긴 삶에의 집착을 스스로 놓는 자살자가 많은 사회는 여러모로 불건강한 슬픈 사회임도 확인하게 된다. 2025년에 초고령사회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에 진입하여 돌봄공백의 문제가 나날이 악화되며 40년쯤 후에는 노동인구와 피부양 고령인구의 비율이 거의 1:1이 될 거라던데, 노인빈곤률이 이미 OECD 1위이고 온갖 공적기금은 고갈되어 가고 있는 한국. 부디 잘 헤쳐갈 수 있었으면.
.
윤회계의 삶은 머리에 이미 불이 붙어 있는 위험한 상황이고 매 호흡마다 이 호흡이 나의 마지막 호흡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살으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차피 윤회는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 불교의 전제이기는 하지만 (이 무한한 윤회의 반복이 오히려 불교의 문제의식), 내가 다음 생에는 더 낮은 곳으로 또는 더 열악한 조건으로 윤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죽음의 순간이 닥쳤을 때 느낄 집착과 공포는 윤회가 없다고 생각할 때와 다를 바 없을 터. 그러니 불교에서 '잘 산다'는 것은 '잘 죽을 준비를 하며 산다'는 의미이고 특히 죽는 순간의 마음상태가 다음 윤회처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되는데, 이런저런 세상사에 수시로 휘둘리는 마음이라면 죽음의 순간에 탐진치 없기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죽음 이후는 어차피 모르는 일이니 두렵지 않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길고 얼마나 고통스러우려는지 그게 두렵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고 인간적으로 깊이 깊이 공감된다. 보통의 인간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모든 종류의 감각적 즐거움이 불가능해졌고 이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 상황이 되었을 때, 그때 남아 있는 유일한 편안함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의 원천은 선정뿐이라 하니, 윤회가 없다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에 대한 대비로 불교수행만큼 '현실적'인 것은 없지 않나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이렇게 고통 가득한 세상에서 선정의 행복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니 머리에 불이 붙어 있다는 말 역시 실감이 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