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1

원효대사(元曉大師)와 명혜상인(明惠上人):고산사(高山寺) 관련자료를 중심으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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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元曉大師)와 명혜상인(明惠上人):고산사(高山寺) 관련자료를 중심으로

김임 *6


 * 일본메이지대학(明治大学). Kimsai111@naver.com

【국문초록】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불교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은 원효와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최고의 불교사상가이자 대저술가이기도 한

. 일본의 나라(奈良)시대에는 이미 신라에서 원효의 저서가 전래되어,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씨의奈良朝現在一切経疏目録에 의해서 알려져 있고, 거기다 호리이케 슌포(池春峰)大安寺審詳師経録에 의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원 효의 저서로 판명되고 있는 것만으로 107 231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불과 22 27권에 불과하다.

한편 묘에(明恵)는 일본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聖僧이라 고 평가 받고 있는 가마쿠라(鎌倉)시대 전기의 화엄승이지만, 오백년이라는 시간 과 공간을 초월하여 7세기의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을 매우 추앙하고 있었다. 교토의 高山寺에 전래하는 華厳縁起(국보)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사 람의 전기와 설화를 소재로 한 것으로 묘에가 제자인 죠닝(成忍)이란 화승에게 명하여 만들게 했다고 하는 絵巻(두루마리 그림)이다. 화엄종의 종조라고 한다면 중국의 지엄(智儼)이나 법장(法蔵)을 그린다든가, 아니면 일본의 화엄종의 開祖 인 신죠(審祥)나 로변( )을 그리게 하면 될 텐데, 왜 묘에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행장을 그리게 한 것일까. 그것은 원효와 의상에 대해서 한없는 존경과 흠모 의 마음을 품고, 두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묘에 자신의 사상이나 체험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즉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점 쇠퇴해 가는 화엄교학의 부흥 을 위하여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의 전기와 설화를 문학화, 회화화하여 신자들에


게 알기 쉽게 설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고승 원효는 두 번에 걸쳐서 당에 유학을 시도했지만, 그 도중에 고분 속에서 귀신의 꿈을 꾸고 萬法唯識의 근본원리를 깨달아 신라에 머물면서 평생 민중의 교화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묘에도 석가의 유적이 있는 인도에 순례하 는 것을 오로지 동경하여 두 번이나 인도에 가는 계획을 세웠지만, 가스가묘징(春日明神)의 託宣에 의해서 결국은 천축행(天竺行)을 단념하게 된다. 서역에서 귀 국한 玄奘의 유식학(唯識学)을 동경하여 입당을 시도한 원효와, 석가가 태어난 천축(天竺)에 동경해서 인도에 건너갈 것을 계획한 묘에와 그 형태는 다르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국의 땅에서 석가의 가르침이나 그 정신에 깊이 접해보고 싶다고 하는 의지는, 양자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원효와 묘에(明恵)에 대해서 입당과 인도순례를 단념한 배경과,

사람의 수행관에 주목하면서 高山寺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華厳縁起, 삼국유 사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핵심어 : 원효, 묘에, 입당, 쟁 법, 도천, 사신행

차례

1.   머리말

2.   원효의 입당포기와 開悟

3.   묘에의 印度渡航의 단념

4.   원효와 묘에의 수행관

4.1.   원효의 錚観法

4.2.   묘에의 捨身行

5.   맺음말

1. 머리말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불교발전에 눈부신 활약을 한 인물은 원효와 의상

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최고의 불교사상가이자 대저술가이기도 하다. 일본의 나라(奈良)시대에는 이미 신라에서 원효의 저서가 전래되어,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씨의 奈良朝現在一切経疏目録1)에 의해서 알려져 있고, 거기다 호리이케 슌포(池春峰)大安寺審詳師経録2)에 의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특히 大安寺審詳師経録에는 171645권의 저서가 수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원효의 저술은 3278 권으로 중국화엄종의 제3() 법장(法蔵)730권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라불교 성립에 있어서 원효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간과

할 수 없다. 원효의 저서로 판명되고 있는 것만으로 1072313)에 이르

1)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 奈良朝現在一切経疏目録, 写経에서 본 奈良朝仏教 研究, 東洋書林, 1981, 부록 pp.1156 참조.

2)  호리이케 슌포(池春峰), 華厳経講説에서 본 審詳, 南都仏教史研究 , 法蔵館, 1980, 大安寺審詳師経録 pp.423431.

3)  원효의 저서에 관해서는, 70 90여권에서 100 240여권에 이르기까지 여러 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김영태 , 韓国仏教資料-海外文献抄集-, 동국대학교 불교 문화연구소, 1981, 목록류 pp.255292에 의한다.

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고작 2227권에 불과하다. 한편, 고잔지(高山寺)明恵(11731232)에 있어서 원효 저술의 인용

摧邪輪, 同荘厳記光明真 加持土沙義, 光明真 土沙勧進記, 同別記에 집중하고 있어,4) 원효의 사상적인 영향을 용이하게 엿 볼 수가 있다. 그 중에서 묘에의 光明真 土沙勧進記는 원효의 遊心安楽道의 해설서라고 말 할 수 있는 저술이고, 그 내용은 거의 光明真土沙加持의 신앙을 고무(鼓舞)한 저서이다. 묘에(明恵)는 일본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聖僧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가마쿠라

(鎌倉)시대 전기의 화엄승이지만, 오백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7세기의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상을 매우 추앙하고 있었다. 교토의 高山寺 에 전래하는 華厳縁起(국보)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사람의 전 기와 설화를 소재로 한 것으로 묘에가 제자인 죠닝(成忍)이란 화승에게 명 하여 만들게 했다고 하는 絵巻(두루마리 그림)이다. 화엄종의 종조라고 한 다면 중국의 지엄(智儼)이나 법장(法蔵)을 그린다든가, 아니면 일본의 화 엄종의 開祖인 신죠(審祥)나 로변()을 그리게 하면 될 텐데, 왜 묘에 는 신라의 원효와 의상의 행장을 그리게 한 것일까. 그것은 원효와 의상에 대해서 한없는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품고, 두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묘에 자신의 사상이나 체험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즉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점 쇠퇴해 가는 화엄교학의 부흥을 위하여 신라의 고승 원효와 의 상의 전기와 설화를 문학화, 회화화 하여 신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법할 필 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원효와 묘에(明恵)에 대해서 입당과 인도순례를 배경과, 두 사람의 수행관에 주목하면서 華厳縁起를 비롯하여 高山寺 관련자료 및

 4) 시바사키 테루카즈(柴崎照和), 明恵新羅高麗仏教, 印度学仏教学研究4

5․1, 1996․12) pp.144146.

삼국유사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원효의 입당포기와 開悟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617)押梁郡 仏地村(현재의 경산시 압량면) 栗谷에서 탄생하여 幼名은 서동(誓幢), 또는 新幢이라고 하였다. 그러 나 원효가 70세를 일기로 신문왕 6(686)에 입적한 사실은 以垂拱二年三月卅日終於穴寺라고 하는 誓幢和上碑라는 비문의 기록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이 비문에는 원효의 가계(家系)에 대한 내력은 밝혀져 있지 않지 만, 삼국유사에는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라는 王京人으로 6두품 출 신이며, 부친은 談捺(奈麻)로 신라 17관등 중에 11등급에 해당하는 관리이 다. 法名은 원효이지만, 이것은 불일(仏日)을 밝힌다는 의미로 당시의 사 람들은 始旦(첫 새벽, )이라고 존칭해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15세 무렵에5) 출가한 후, 대승, 소승의 불교학은 물론 유학이나 도교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전국을 행각(行脚)하면서 험 난한 수행을 거듭했다고 전하다. 그 편린(片鱗)은 그의 저술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원효가 출가하여 어떤 사람의 지도를 받고,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삼국유사에는 生而穎異. 学不従師6)라고 있고, 또 송고승전에는 随師稟業. 遊処無恒7)이라고

 5) 원효의 출가에 대해서는 15, 6세의 29세의 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출가한 연대에 관한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송고승전에艸髪之年, 恵然入法라고 있어 艸髪의 해는 15, 6세를 가르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원효의 출가를 15, 6세로 보는 에 의한다(한보광, 신라정토사상의 연구, 東方出版, 1991, pp.7778 참조). 근 년에는艸髪之年이란 10세 미만의 나이 관세(艸髪) 8세~9세라는 견해도 있다 (고영섭, 「원효는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오늘의 동양사상4, 2001, pp.173

187).

보여 원효는 一処一師에게 지도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 원효는 두 번에 걸쳐서 당의 유학에 도전하였다. 삼국유사 의상전 교에는 未幾西図観化. 遂 元暁道出遼東辺. 戌邏之為諜 , 囚閉 累

. 僅免而還8)이라고 보여, 처음에는 영휘 원년(650) 34세 때에 同学인 의상과 함께 입당을 결심하고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 수비병에게 첩자로 의심받아서 감금되었다가 수 일 후에 석방되었지만 입당은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1년 후인 문무왕 원년(661) 45세 때, 즉 백제가 멸망 한 그 이듬해에 의상과 함께 재차 당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지만, 도중에서

그 신념을 바꾸어 입당을 포기했다. 송고승전 의상전9)에 의하면,

(의상의) 나이 弱冠에 이르러 당나라에 교종이 매우 융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遊行하려고 하였다. 길을 떠나 서 본국인 신라의 해문인 唐州界에 이른다. 큰 배를 구해서 창파를 헤쳐 가려고 하였다. 뜻밖에 도중에서 심한 폭우를 만나서 결국은 길옆의 土龕 (토굴) 사이에 몸을 숨기며 심한 비바람을 피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 아서 살펴보니 그곳은 해골이 흩어져 있는 옛 무덤이었다. 하늘에서는 궂 은 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무덤 속에서 묵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6)  무라카미 요시오(村上四男) , 三国遺事 証5 ‘원효불기’(塙書房, 1995) p.119.

7)  송고승전권4 ‘원효전’(大正蔵 50) p.730.

8)  앞 책, 6) ‘의상전교’, p.143.

9)  앞 책, 7) ‘의상전’, p. 729. ‘年臨弱冠聞唐土教宗鼎盛. 元暁法師同志西遊. 行至本国海門唐州界. 計求巨艦 越滄波. 条於中塗遭其苦雨. 遂依道旁土龕間隠身. 所以避飄湿焉. 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 天猶霢 地且泥塗. 尺寸難前逗留不進. 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俄有鬼物為怪. 暁公歎曰. 前之寓宿 士龕而且安. 此夜留宵託鬼郷而多祟. 則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万法唯識. 心外無法胡用別求. 我不入唐. 却携嚢返国.’

깜짝 놀라게 했다. 원효법사는 탄식하며 말하되전날 밤에는 토굴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 밤은 귀신 굴에 의탁하니 근심이 많구나. 이제 알겠구나, 마음이 산란함으로 인해 갖가지 것들이 생 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土龕)과 고분이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을. 또 한 三界는 오직 마음이며 마음이 인식인 것을 알았다. 마음을 떠나서 법 이 없으니 어찌 별도의 법이 따로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 다.”라고 말하고 원효는 바랑을 메고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

라고 하여 두 사람은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에 이르러서 큰 배를 구하 고 있던 중에, 심한 폭우로 인해서 토감(土龕)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냈다. 원효와 의상이 비를 피한 신라의 해문 당주계는 삼국시대에 군사적, 행정 적으로 중점한 거점이라고 말하는 黨 城’(현재의 화성시 남양동)에 가는 도중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이 지역은 황해를 통해서 중국과의 교 류가 가능한 중요한 해상교역의 거점으로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지만, 신라에 의해 점령되고 나서 산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그곳은 고분이고, 주위에는

해골이 흩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려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하룻밤을 그 고분에서 묵기로 하였다. 그날 밤 원효의 꿈속에서 귀신이 나타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효 는 일체의 현상(現象)은 유심(唯心)에 의해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 하자면, 고분인 것을 모른 채 묵었던 첫 날 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잠을 이룰 수가 있었는데, 해골이 있는 무덤이라는 것을 안 이틀 째 밤에는 꿈속 에서 귀신이 나타나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이 마음 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아 입당의 뜻을 바꾸어 포기하고, 혼자서 신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송고승전의 의상, 원효전의 본문을 근거로 하고 있는 華厳縁起원효그림의 문장에는 오늘 밤은 시체가 놓여 있다고 생각하니 귀신이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10)라고 쓰여 있어 거의 같 은 내용이다. 원효는 귀신의 꿈을 꾸고 일체의 현상은 내 마음이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마음 이외에는 스승을 원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입당을 포기하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延寿撰, 宗鏡録(961년 성립)11)에도 원효의 무덤에

서의 開悟가 소개되어 있다. 거기에는 의상과 함께 무덤 안에서 노숙을 할 때, 원효는 밤중에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는데 마침 그의 곁에 고여 있는 물이 있어 손으로 움켜서 마셨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고인 물에 해골 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갑자기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는데, 그 때 三界唯心, 萬法唯識의 원리를 깨닫고 입당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어 송고승전의 내용과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고 하는 일심의 원리를 스스로 체험한 원효는 입 당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그 후 원효는 신라에 머물면서 일체의 経論을 연 구하며 자유무애(自由無碍)의 교화활동에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화엄교학의 근본원리인 유심사상(唯心思想)을 깨닫고 신라로 돌

아온 원효의 행동은 심상치 않았다. 이것에 대해서 송고승전 원효전12)

10)               고마쓰 시게미(松茂美) , 華厳宗祖師絵伝詞書釈文, 華厳宗祖師絵伝 수 록, 続日本絵巻8, 中央公論社, 1990, pp.99104 참조. 이하, 인용하는원효그림’, ‘의상그림의 문장은 모두 이 책에 의한다.

11)               宗鏡録11, 高麗大蔵経巻44, 동국대학교, 1976, p.62. ‘昔有東国. 元暁法師義湘法師. 二人同來唐国 師. 遇夜宿荒止於塚内. 其元暁法師因渇思槳. 遂於坐側見. 一泓水掬飲. 甚美及至來日観見. 元是死屍之汁. 當時心悪之吐. 豁然大悟乃曰. 我聞佛 . 三界唯心. 萬法唯識. 故知美悪在我. 實非水乎. 遂却返故園. 廣弘至教. 故無有不達.’

12)               앞 책, 7) ‘원효전’, p.730. ‘無何発 狂悖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 鐡錫. 或製疏以講雑萃. 或撫琴以楽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禅. 任意随機都無定検. 時国王置百座仁王経大会遍捜碩徳. 本州以名望擧進之. 諸徳悪其為人.

譛王不納居無何.’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말을 미친 사람처럼 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를 거침없이 하였다. 거 사와 함께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誌公과 같이 금칼과 쇠지팡이 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혹은 疏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혹은 거문고 를 뜯으며 祠 에서 즐기고, 혹은 여염집에서 잠자고 , 혹은 산수에서 좌 선(坐禅)하는 등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며 도무지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그 때 국왕이 백좌(百座)의 인왕경(仁王経) 법회를 열어서 모든 덕망 있는 고승을 초대하려 하였다. 본 주(상주)에서는 명망이 있는 원효를 추대하였 다. 모든 고승들은 원효의 사람 됨됨이를 시기하고, 왕에게 비방하는 상소 를 올리고 주거도 일정하지 않아 초대하지 말 것을 간언한다.

의상과 헤어져서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마치 불법을 잊어버린 사람같이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일찍이 당의 현장(玄奘)의 유식(唯識) 학문을 사모하여 후배인 의상과 함께 입당을 하려 했지만, 지금은 萬法唯識開悟에 의한 입당포기야 말로 원효의 파계행위(破戒行為)의 기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는 술집이나 기생집에 드나들고 鐡錫(쇠 지팡이) 을 지니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마치 南朝 神異僧宝誌(418 514)13)와 같았다고 한다. 거사와 함께 술집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다는 기록은 李仁 (11521220)원효성사는 술장사나 백정 등과 같은 시정 잡배와 어울렸다14)라고 하는 것과 서로 통하는 내용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정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즐거워하고, 어느 때는 산수에서 좌선하고, 때로

13)  誌公의 거처는 일정하지 않고 수시로 음식을 먹으며 항상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錫杖을 짚었는데, 그 끝에는 가위나 거울 등을 매달고 다니던 神異風狂僧宝誌 를 가리킨다(梁高僧伝10, ‘釈保誌伝大正蔵 50, p.394).

14)  破閑集 권중에元暁大聖, 混迹屠沽中이라고 전한다(고려명현집2, p.92).

経論를 지어서 강의하면서 민중과 함께 염불가무(念仏歌舞)에 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깊은 산속에서 혼자 은둔하며 자신의 해탈 만을 추구하는 佛道 가 아니었다. 대중을 경동(驚動)시키는 기발한 행위 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한 것이다. 즉 음주가무의 파계적 행동은 서민들에게 불교를 전하기 위한 보살행(菩薩行)의 방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효의 이와 같은 자유무애로운 교화활동은 당시의 귀족적인 승단의 규 율에서 본다면, 매우 파격적이고 비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그것은 국왕이 국내의 고승들을 모아서 백좌(百座)의 인왕회(仁王会)를 개 최할 때에, 사람들이 그 행의()는 광인과 같다는 상소에 의해서 선발되 지 않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효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민중의 교화활동에 힘을 쏟아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 다무라 엔쵸(田村圓澄)씨는 민중 불교를 넓힌 원효의 행동은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서 그 힘을 결집한 교키(行基)집단에 키친 영향은 크다고 지적하고, 당시의 일본 불교계는 신 라불교에 주목하고 신라불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15)라고 말하는 대목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또 원효는 사생활에 있어서는 계율을 어기고

요석공주와 결혼한 적도 있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16)에는

원효는 일찍이 어느 날 뜻밖의 행동으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 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 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인물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

15)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古代朝鮮日本仏教, 講談社, 1993, pp.156157. 同 古代朝鮮仏教日本仏教, 吉川弘文館, 1980, pp.191193 참조.

16)  앞 책, 6) ‘원효불기’, pp.119120.

은 없을 것이다.” 이 때 요석궁(瑤石宮)에는 과부 공주가 있어서, 왕이 관 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서 데려오라 하였다. 관리가 명을 받들어 원효 를 찾으니,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 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시자, 관리가 그를 데리고 가서 옷 을 말린다는 핑계로 그곳에서(瑤石宮)에서 머물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 기가 있더니 薜聰을 낳았다. 薜聰은 태어나면서부터 예민(睿敏)하고 경 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十賢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다. 어느 날 원효가 거리에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기 위하 여 누군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이상한 몰가부 가(没柯斧歌)’를 부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무열왕(김춘추, 603661)은 이 의미를 알아채고, 자루 없는 도끼 는 詩経빈풍벌가편17)에 수록된 시의 伐柯에서 유래하는 중매인의 비 유인 것에서,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구나.”라고 하는 의도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나라에 큰 인물이 태어 나면 그 이익은 참으로 클 것이라 하여 관리에게 명하여, 남산에 있던 원효 를 찾아내어 문천(蚊川)에서 일부러 빠져서 젖은 法衣를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의 공주가 있는 곳으로 원효를 데리고 가서 머물게 하였다. 그 후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신라의 十賢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낳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국가를 위해서 현명한 인재를 바라고 있었 던 태종무열왕의 소원은 이렇게 해서 왕실과 연결되어 이루어 진 셈이다. 여기에서 태종무열왕 시대에 원효를 요석궁의 공주와 동숙하게 하여 설

총을 낳았다고 하는 그 연대가 문제가 된다. 먼저 삼국사기권46 ‘열전

17)  詩経, 豳風伐柯篇」에 수록된 「伐柯」의 전문에 의하면 「伐柯如何. 匪斧不克. 取妻如何. 匪媒不得. 伐柯伐柯. 其則不遠. 我覯之子. 籩豆有践」라고 보인다(詩経梵字 中国古典文学大系, 平凡社, 1969, p.116).

6설총18)에는 설총의 아호는 총지(聰智)로 그의 조부는 奈麻(談捺), 부 친은 원효이며, 원효는 처음으로 승려가 되어 불서(仏書)에 통달하였지만,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姓居士)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어삼국유사 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다만 요석궁의 공주로서 볼 수 있는 배우자의 태생 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권41 ‘열전제1 김유 신19)의 조에, 지소(智炤)太宗大王第三女也라고 있어 무열왕에게는 적어도 세 명의 공주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중에 요석공주는 장녀인가 차 녀인가 분명치가 않다.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야성도독(大耶城都督)金品釈에 게 시집을 가서 선덕여왕 11(642) 백제가 大梁州(현재의 합천)을 함락시 킬 때에, 그 싸움에 휘말려 사망한 고타소(古陁炤), 태각간 김유신(595 673)의 처 智炤가 보인다. 또 요석공주는 화랑 金歆雲과 결혼하였지만, 그 가 태종무열왕 2(655) 양산전투에서 백제한테 패하여 전사한 후, 요석궁 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원효가 결혼한 시기는 그가 45세가 되 던 해, 즉 태종무열왕이 붕어(崩御)한 용삭 원년(661) 6월 이전이라고 보아 야 하지만, 그 해는 입당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렇다면 원효가 당으로 떠나기 전에 요석궁에 들어가서 파계했다고는 생각 하기 어렵고, 필자는 역시 그가 入唐求法의 도중에 唯心所造의 도리를 깨 닫고 난 후, 입당의 결심을 포기하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면서 천촌만락 (千村萬落)으로 민중을 교화하기 위한 길을 선택한 시기로 보는 편이 타당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즉 원효의 결혼은 두 번째의 입당포기 후에 생긴 일로 추측된다. 그래서 설총 탄생 후의 원효는 속인의 옷을 걸치고 姓居士라고 칭하

18)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권46 ‘열전 제6․설총’(乙酉文化社, 1983) p.356.

19)  앞 책, 18) 41 ‘열전 제1․김유신’, pp.290293.

, 화엄경의 구절을 노래로 만들어 무애라고 이름을 지은 표주박을 가지 고,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 민중을 교화했다. 삼국유

원효불기20)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효는 설총을 낳은 뒤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姓居士라 고 칭하였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춤추는 기이한 모양의 큰 박을 얻었

.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라는 문구에 의해서 무애라고 이름 짓고,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유포시켰다. 일 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시키고 읊으 며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 의 이름을 알고, 南無를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컸다.

원효는 무지한 사람들도 南無를 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래와 춤

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원효에게 영향을 끼친 恵空大安도 민중의 교화활동에 힘을 기우렸고, 그들 또한 가무의 방법을 활용했다.21) 노래와 춤은 무지몽매한 민중을 도취와 황홀경으로 몰입시켜서 직접적으로 영향 을 줄 수 있음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원효는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

. 화엄연기의 원효그림 안에는 대안 성자가 동발(銅鉢)을 두드리면서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며 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시대 의 법사들은 민중교화를 위해서 노래나 춤을 포교수단으로서 이용한 것 같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우야(空也)가 시정에서 염불로 노 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 시장의 , 아미타 라고 부르게 되었다.

20)  앞 책, 6) ‘원효불기’ p.120.

21)  김태영, 新羅仏教大衆化歴史와 그 思想研究, 仏教学報6, 동국대학교, 1969 ․5, pp.145192 참조.

일본의 염불춤은 헤이안(平安)시대 중기에 구우야(空也)가 교토의 시중 에서 북이나 정을 치고 박자를 맞추며 염불하면서 춤을 춘 것이 그 시초라 고 한다. 그러나 일찍이 하시카와 타다시(橋川正)22)씨는 원효가 큰 박을 가지고 화엄경의 무애춤을 추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空也 염불춤(

)의 원조라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염불춤의 유래는 원효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교토의 東山에 있는 六波羅密寺에는 입에서 여섯 개의 작 은 아미타여래가 뚝 뛰어나온 형태로 만들어 진 空也像을 보존하고 있다. 이것은 空也의 생전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帰依를 받았다고 한다. 空也의 염불춤은 가마쿠라 시대에 지슈(時宗)의 개조인 잇 펜(一遍)에 의해 계승되어 넓혀져 간 것이다. 현재 원효의 무애가는 전승 되고 있지 않지만, 일본의 염불춤(念仏)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후지 사와(藤沢)시에 있는 時宗의 총본산인 유교지(遊行寺)에서 매년 921일 부터 24일 사이에 해마다 염불춤의 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3. 묘에의 印度渡航의 단념

한편 원효가 입당을 포기한 후에, 自由無碍의 행동에 의한 민중교화에 무척 감동을 받은 가마쿠라 시대의 화엄승 묘에(明恵), 실은 두 번이나 인도에 건너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묘에

22) 하시카와 타다시(橋川正), 空也一遍念仏에 관해서」, 仏教研究2․1, 1921, pp.126130. 고라이 시게루(五来重)씨는 「明恵의 마음 속에 있는 義湘元暁」라 는 논고에서, 원효나 대안은 半俗半僧의 성자로서 산악신앙이나 시중행각을 했다는 점에서 「空也一遍의 선배에 해단된다」라고 말하고, 원효를 구우야(空也)念仏의 원조라고 한다(絵巻新修絵巻全集 月報9, 1976, pp.197201). 또한, 염불춤 (念仏)에 관해서는 五来重, 念仏, 平凡社, 1989에 자세하다.

는 지쇼(治承) 4(1180) 8세에 양친을 잃고, 그 다음 해 교토의 다카오산 (高雄山) 진고지(神護寺)의 몬가쿠(文覚)의 제자인 숙부 죠카쿠(上覚)에 게 지도를 받고, 16세가 되던 해 東大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서 출 가하였다. 法名(나중에 으로 개명)이라고 불렀다. 21세 때에 국가적인 법회의 참가요청을 거절하고, 23세가 되던 가을에 속세와 인연을 끊고서 기노쿠니(紀伊国) 아리타(有田)군에 있는 시라가미미네(白上峰) 에서 험난한 수행을 거듭하였다. 은둔승(隠遁僧)이 된 묘에는 3년간의 수 행을 끝마친 26세 무렵에 재차 다카오(高雄)로 돌아오지만, 다카오에서 소 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또 다시 기슈(紀州)에 돌아와, 그 이 후 8년간은 이카다치(筏立) 등에서 오로지 수행과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 사이에 묘에는 30세가 되던 해, 즉 겐닝(建仁) 2(1202) 무렵부터

釈迦가 탄생한 聖地 인도에 건너가 불교유적을 순례하기 위한 계획을 세 우게 된다. 이것은 석가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땅에 가서 석가의 유적 을 순례하고, 그 가르침이나 정신에 더 깊이 접하고 싶은 열망에 의한 것이 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却廢妄記23)에는,다음과 같이 기록되 어 있다.

내가 만약 인도국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일생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겠지. 오로지 인도 각지에 남아있는 유적을 여기저기 순례하면서, 즐 거운 마음에 마치 살아있는 釈迦를 만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들떠서 학문이나 수행 등을 소홀히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인도에 가서 석가의 유적을 순례한다고 하면, 釈迦를 만난 것 겉은 기분에 깊이 감동한 나머지, 학문이나 수행에 정진할 정열도 없었을 지도

23) 却廢妄記(鎌倉旧仏教수록, 岩波書店, 1971) p.111.

모른다고 말하는 묘에는, 오로지 석가에게 사모의 정만 가슴속 깊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결같이 석가를 숭배하는 뜨거운 마음은, 묘에 의 생애에 있어서 변함없이 일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묘에가 석가에 대해 사모의 정이 강했던 것은, 그가 두 번에 걸쳐서 印度渡航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석가를 아버지 로 존경하고 사모했던 묘에는 겐큐(建久) 원년(1290) 18세 때에 진고지(神護寺)의 서고에 파묻혀 매일 불교서적을 읽는 것에 열중하고 있을 때, 우 연히遺教経을 발견한 극적인 만남에서 비롯된다. 그것에 대해서 明恵

上人行状24),

무릇 이 上人의 나이 18세 때, 西山에 칩거하던 중에 古本(오래된 책)

一切経 안에서 발견하였다. 상인이 소지한 경전의 사본에 기록하여 말하 되, 이 경은 成 의 나이 18세 때, 홀로 西山에 칩거 중에 経蔵에 있는 오래된 많은 경전 중에서 이 경을 구했다. 석가 입멸 후 이천 년이 지난 말세에 처음으로 遺教라는 묘한 경전의 제목을 보고, 환희의 기쁨이 가득 하여 흐르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뒤 항상 곁에 두고 암송하였다.

라고 쓰여 있어 遺教経의 정식명칭은 佛垂涅槃略説教戒経이란 경명 으로 석가가 입멸(入滅)할 때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설법한 것을 기록 한 것이다. 이 경의 사본은 (묘에)18세가 되던 해, 혼자 西山(高雄山神護寺)에서 칩거하고 있을 때, 경장(経蔵) 안에서遺教経을 발견 하여 감격의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그 뒤 항상 몸에 소지하 며 이 경을 숙지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高山寺에 소장하는遺教経

24) 明恵上人行状(高山寺資料叢書, 明恵上人資料第一 수록, 東京大学出版会, 1981) p.49. 또한 遺教経에 관해서는 고마쓰 요스케(松庸輔), 明恵遺教経 (大法輪77․22010․2)에 자세하다.

에는, 孝子伝南朝宋의 관료인 張敷가 한 살 때에 어머니를 잃고, 열 살이 되어서 어머니의 유품인 한 폭의 그림이 그려있는 부채를 손에 넣고,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이 부채를 펼쳐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문장 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遺教経과의 만남이 묘에의 육친에 대한 감정이 종교적으로 승화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印度渡航의 실현을 향해서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묘에는 자신을 釈迦如来滅後遺御愛子25)라고 부르고, 시간과 공간 을 넘어서 오로지 석가의 제자이며 愛子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大宝積経2 ‘律 会我之所愛子, 諸善比丘, 見仏諸遊方, 昔曾安止処, 経行宴坐地, 若石及空閑, 集巳共咨嗟, 為之數啼泣26)이라고 보이는 경문에 근거하고 있다. 말법의 세상에는 을 쌓지 않는 승려가 늘어나겠 지만, 그러한 가운데 바른 수행을 행하고 석가의 유적을 보고 자신을 연모 한 나머지 목메어 우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곳의 아들이라고 석가가 설법하는 경문을 발견하고 묘에는 무척 기뻐했을 것이

. 거기에는 석가와 자신이 부모 자식의 관계로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묘에가 다카오(高雄)에서 수행지인 기슈(紀州)로 내려가는 도중에 神護寺의 석가여래 앞으로 서신을 보냈다고 하는 에피소드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수취인은 大慈悲父釈迦牟尼如来로 되어 있고, 거기에 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는 제자에게 뭐든지 용건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 시요. 가능하면 빨리 돌아오겠지만, 다시 만나 뵐 때까지 당신을 항상 연모 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자신의 이름을 遺法御愛子成 이라고 적

25)               仏眼仏母像賛에는 와카(和歌)1와 함께无耳法師之母御前也. 南無. 仏母哀愍我生生世世不暫離, 南無仏母御前, 南無仏母御前, 南無仏母御前, 南無仏母御前, 釈迦如来滅後遺法御愛子成 紀州山中乞 敬白.’라고 있다.

26)               大宝積経, (高麗大蔵経 6, 동국대학교) p. 12. 明恵上人神現伝記의 안에 도 이 経文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앞 책, 24), p.243.

고 있다. 묘에는 인도로 건너가는 것에 무척 집착하였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인도 도항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것도, 이 와 같이 석가를 향한 그리움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묘에의 첫 번째 인도 도항 계획이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겐큐(建久) 7(1196) 무렵이다. 아직 24세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그 계획의 준비는

西域記慈恩寺伝 등의 서역 구법의 여행전기를 참고로 하는 등, 어느 정도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묘에가 입적한 후에 제자인 기카이(喜海)가 기록한 明恵上人神現伝記(春日明神託宣記 라고도 칭한다)27)에는 인도 도항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西域의 곳곳의 유적, 이것은 석가 入滅 후에 남은 곳이다. 먼 옛날에

三蔵法師가 求法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도보로 걸 어서 방문하는 곳이다. 어찌 목숨을 아끼겠는가. 그렇다면, 인도는 저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갈려고 한다면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그 길이 비록 험난 하고 위험할 지라도 죽음을 각오한다면 더 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서역을 순례한 현장의 여행전기 등을 읽고 준비할 때마다 인도 도항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신명을 받쳐 결행할 각오였다. 당시 高雄 주변에는 몬 가쿠(文覚)를 중심으로 자주 사건이나 소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몇 번이나 고향인 기슈유아사(紀州湯浅)로 거처를 옮기곤 하였다. 겐큐 말 무렵에 喜海道忠, 두 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기슈유아사의 가루모시마(苅磨嶋)에 갔을 때의 상황이 明恵上人行状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저 멀리 바 다가 계속되는 곳의 서해바다는, 먼 천축(天竺)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대양 을 바라보며 석가에 대한 연모의 정에 잠기고, 거기에 있는 작은 돌 하나라 도 그리워하며 돌을 주어서 가슴에 문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苅磨嶋

27) 明恵上人神現伝記, 앞 책, 24) p.237.

묘에는 한 통의 서신을 쓰고 있지만, 그에게는 섬도 사람과 같은 존재였다. 이 서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묘에의伝記行状에 자세하게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겐닝 2(1202) 무렵부터 묘에는 紀州의 이토노(糸野)에서 제자 喜海

등과 함께 인도에 건너 갈 것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데 겐닝 3년 정월 26일 유아사 무네미쓰(湯浅宗光, 묘에의 숙부)의 처(씨의 딸) 가 갑자기 신이 들려서 나는 가스가묘징(春日明神)이다. 貴公이 서역으 로 수행을 떠난다기에 그 생각을 단념시키기 위해서 내려왔다.”[1]) 라고 말 하고, 가스가묘징(春日明神)이 이 여자에게 붙어서 묘에에게 말을 걸어 자 신이 인도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후, 계속 해서 인도행 중지의 탁선(託宣)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 도항의 계획은 단 념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가묘징(春日明神)은 묘에의 꿈에 자주 나타나고 있지만, 숙부의 처가 신들리기 전인 3正月 초의 꿈속에 또 노인의 모습으로 요고(影向 : 신불의 모습으로 나타남)하여 묘에를 지혜로서는 제 일이라고 칭찬하고, 천축행(天竺行)을 단념하고 인간의 로서 궁궐 가 까운 곳에 머물 것을 권장했다고 한다. 春日明神託宣에 관한 이야기 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明恵上人伝 비롯하여 明恵上人神現伝記, 古今著聞集, 沙石集 등에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노오 ()春日明神은 이들의 일화를 소재로 한 것으로, 거기에는 가스가묘 징(春日明神)은 나오지 않고 묘징(明神)使 인 용인(龍人)이 주인공이 고, 조역인 묘에는 龍人의 설득에 의해서 入唐渡天을 포기하게 된다. 특히 明恵上人神現伝記에 의하면, 겐닝 32월 묘에는 가스가타이 샤(春日大社)에 참배할 때에 東大寺의 중문까지 오자, 그 주변에 있던 사 슴 30여 마리가 일제히 무릎을 땅에 굽히고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그 뒤 紀州의 유아사(湯浅)로 돌아갔을 때, 묘에의 숙모인 부인이 託宣을 받아 사슴이 무릎을 굽히고 맞이한 것은, 자신(春日明神)이 마중을 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 기간에 묘에는 몇 번이 나 春日明神과 관계되는 꿈을 꾸고 있다. 묘에는 高山寺鎮守社春日明神을 모셨지만, 高山寺에 소장하는 木像神鹿의 한 쌍은 그 신전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사슴은 春日明神使 라고 하여 무릎을 굽 히고 앉아 있는 사슴의 모습은, 春日大社를 참배한 묘에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하는 사슴의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또 묘에의 행장이나 전기에 있어서는 예를 들면, ‘겐닝 무렵에 春日大明神託宣이 있었다. 이것에 관해서는 별도로 기록한다29)든가 春日大社에 참배시 託宣에 관한 것이 나 부처의 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로 기록한다30) 라고 보여, 明恵上人神現伝記을 반드시 抄出하여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春日明神의 탁선에 의해서 渡天의 계획은 중지하게 되었지만, 묘에 의 가슴에 타오르는 渡天의 뜨거운 열정은 또 다시 불길이 되어 이번에는 한층 더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여 재차 기획되었다.

春日明神의 탁선에 의해서 渡天의 계획을 단념한 묘에는 高雄로 돌아

오지만, 겐큐(元久)원년(1252)歳暮에 부모 대신 묘에를 양육한 紀州의 양부이자 비호자(庇護 )이기도 한 사키야마 료에(崎山良衛, 숙부)가 병 상에 누워 병문안을 하기 위하여 紀州高雄을 왕복한다. 그러나 이 기간 은 어느 쪽의 생활도 전혀 안정되지 않고, 聖教를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장소마저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쿠다 이사오(奥田勲)씨는 이시기에 있어 서 묘에의 환경에 관해서 高雄의 황폐와 湯浅의 곤란에 의해서 묘에는

29)  明恵上人伝, 앞 책, 24) p.374.

30)  明恵上人行状(漢文), 앞 책, 24) p.181.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31)라고 추측한다. 이러한 가운데 묘 에는 겐큐 2년 봄 무렵 5, 6명의 제자와 함께 재차 渡天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그것은 明恵上人物語32),

겐큐 2년 봄 무렵, 天竺에 건너 갈 생각으로 계획을 세웠다. 뜻을 같이 하는 동행 5, 6명과 이미 논의가 있었다. 또 大唐 長安城부터 天竺의 王城까지의 소요되는 거리에 대한 里数의 대소에 대해서 검토하고 기록 하였다. 그 때, 里의 抄出은 지금 上人의 経을 넣은 자루 속에 있다. 게다 가 거리의 계산이 끝나고 의복의 준비까지 갖추었다.

라고 보여 渡天의 결행의 시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묘에는 당의 長安城부 터 天竺의 왕사성(王 城)에 이르기까지의 거리에 대한 里数의 대소에 대 해서 검토하여 자루 안에 넣어 두고, 게다가 의류까지도 준비한 것 같다. 抄出을 기록한 문장은, 아마 지금 高山寺에 전래하는 印度行程表33)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渡天에 즈음하여 당의 장안성에서 마가타국(摩訶陀国)의 왕사성에 이르기까지의 일수를 소상하게 조사 기록 한 인도행의 일정표이다.

그 대략을 보면, 長安에서 王 城까지의 里数로 하여 5만 리로 정해서, 이것을 大里 361에 의해서 환산하면 833312, 하루 8를 걷는다고 하면 왕사성에 도착까지는 천일을 요하지만, 연일수를 360일로

31)  오쿠다 이사오(奥田薫), 明恵-遍歴-, 東京大学出版会, 1978, p.56. 元久2 (1205), 神護寺文覚은 고토바죠코(後鳥羽上皇)로 부터 반역을 꾀한다고 의심 받아서 쓰시마(対馬)로 유배되는 도중에 객사하고, 또 묘에 비호자인 유아사(湯浅) 일족은 地頭職(현지 영주)을 둘러싸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32)  明恵上人物語, 앞 책, 24) p.332. 明恵上人伝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p.376).

33)  印度行程記, (大日本史料 第五編之 7) pp.427428.

한다면 정월1일에 장안을 출발하여 제 3년째인 1010일에는 왕사성에 도착할 수가 있다. 하루에 7를 걷는다고 가정하면, 1330일이 걸리며 제 4년째인 220, 만약 하루에 5라고 한다면, 5년째인 610일에 왕사 성에 도착한다고 하여 매우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묘에는 그 안에 인도 는 부처가 탄생한 나라이다. 연모의 정을 억누를 수가 없구나. 遊学을 위해 서 이 계획을 세우니 무척 애틋하게 느껴져서 가고 싶은 마음이 한이 없구

.’라고 절실하게 감격의 말을 흘리고 있다. 印度行程記에는 번잡한 里数와 일수를 계산한 評定, 묘에의 渡天에의 열의와 진지함을 충분이 가름할 수가 있다. 게다가 그의 講式類의 저서 중에는 利講式, 涅槃講式, 十六羅漢講式, 如来遺跡講式라고 하는 四座講式을 비롯 하여 석가에 대한 연모가 매우 강했던 사실이나 明恵上人歌集 안에 석 가 유적을 읊은 노래가 많은 것도 渡天에의 숙원과 연관 지어 더욱 수긍할 수가 있다.

그런데 또 묘에가 渡天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자, 갑자기 병이 들어

고민하게 된다. 그 병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묘에는 옆에 한 사람의 인간 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오 르는 것이다. 묘에가 제자들과 서로 인도행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마다 그 사람은 한쪽 손으로 묘에의 한 쪽 배를 조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天竺行 을 결정한 단계에 이르자, 묘에의 몸 위에 올라타서 양손으로 묘에의 가슴 을 누르기 때문에 묘에는 괴로운 나머지 기절할 것 같았다. 이것은 흔히 겪는 고통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수일 동안에 걸쳐서 계속되었기 때 문에 역시 春日明神託宣이 아닐까라고 염려되어 제비뽑기에 의해서 점 을 치기로 하였다.

묘에는 본존인 釈迦, 善財五十五善智識, 春日大明神의 형상 앞에서 제 비뽑기를 하여 결정하려고, ‘건너가야만 한다’, ‘건너가지 말아야 한다라는 두 개의 제비를 만들어서 만약 세 군데 중에서 한 군데라고 건너가야만 한다를 뽑았을 경우에는 신명을 바쳐서도 渡天行을 결정하기로 정했다. 또 세 군데 모두 건너가지 말아야 한다라면 그때는 단념하기로 결의하였 다. 먼저 석가 앞에 놓인 제비를 뽑으려고 하자, 두 군데 중에 한 개가 불단 (仏壇) 아래로 떨어져 버려서 아무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머지 한 개를 펼쳐 보자, ‘건너가지 말아야 한다였다. 이 밖에 두 군데도 모두 건너 가지 말아야 한다라고 나와서 묘에는 어쩔 수 없이 渡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병은 즉시 쾌유했다.

天竺行의 단념을 결정한 그날 밤, 묘에가 꿈을 꾼 것이 明恵上人行

(한문)34)上人의 꿈에 이르되, 두 마리의 백로가 하늘을 날고, 하얀 옷을 입은 俗人이 있어 화살을 꺼내어 백로를 떨어뜨렸다라고 쓰여 있다. 묘에의 꿈에 두 마리의 백로가 하늘을 날고, 하얀 옷을 입은 俗人이 한 마 리의 백로를 떨어뜨린 것을 보았지만, 묘에는 이 꿈이 앞서 말한 제비뽑기 에 있어서 한 개의 제비가 잃어버릴 징후이고, 그것이 딱 들어맞았다고 한 다. 가와이 하야오(川合隼雄)씨는 백로가 俗人에 의해서 떨어뜨려진 꿈은, ‘속된 것이 성스런 것을 이기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35)라고 해석 하고 있다. 묘에가 天竺行을 단념하기까지의 경과는, 처음의 渡天 계획과 는 다르지만, 天竺 순례의 포기는 어느 것이나 春日明神의 신의 뜻에 의한 것으로, 묘에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묘에는 그 이후, 인도 순례의 계획은 완전히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묘에는 젊은 수행시절부터 석가의 유적이 있는 天竺으로 순 례하는 것을 무척 동경하여 두 번이나 인도행의 계획을 세웠지만, 春日明神託宣에 의해서 결국에는 단념하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라

34)  明恵上人行状 (漢文), 앞 책, 24) pp.192193 참조.

35)  가와이하야오(河合隼雄), 明恵, 꿈에 살아가다, 京都松柏社, 1987, p.167.

의 고승 원효도 두 번에 걸쳐서 입당을 시도했지만, 고분 속에서 귀신의 꿈에 의해 唯心의 근본원리를 깨닫고, 신라에 머무르면서 민중구제에 힘을 쏟았다. 玄奘唯識学을 동경하여 입당을 시도한 원효와, 석가가 태어난 天竺에 동경하여 인도행을 계획한 묘에와 그 형태와 방법은 다르지만, 이 국땅에서 석가의 가르침이나 그 정신에 깊이 접해 보고 싶다고 하는 의지 는 두 사람 모두 서로 통하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묘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자신과 똑같이 두 번이나 당에 유학길을 단념한 원효에게 강한 친근감과 공감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겐큐(建久) 6(1196)

묘에 23세 무렵부터 3년에 걸쳐서 紀州湯浅白上峰에서의 묘에의 수행

에 관한 내용이 明恵上人行状36)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또 海東의 元暁公은 亡人의 무덤에 묵으면서 매우 깊은 유식(唯識)

도리의 깨달음을 열었고, 이것들은 시작에 불과하니 놀라운 것만은 아니 다. 그렇다면 上人(明恵)은 섬에 임해서 法界法門의 깨달음을 열어 唯心 의 지혜를 수련한 것만은 아니다. 또 세간의 遊宴을 벗으로 하여 마음을 즐기는데 情趣를 더해준다.

겐큐 말 무렵, 묘에는 제자 喜海, 道忠과 같이 白上峰의 암자에서 배를

타고 서쪽에 있는 가루모시마(苅磨島)로 건너가 섬의 남단에 석가상을 걸어 놓고, 그 앞에서 독경염송(読経念誦)을 행하였다. 그리고 해동의 원효는 亡人의 무덤에 묵으면서 甚深唯識의 도리를 깨달았지만, 묘에는 섬에 임 해서 法界法門의 깨달음을 열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점에서, 묘에가 젊은 시절부터 얼마나 원효에 대해 존경과 연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가 있다. 묘에는 화엄종을 신라에 전한 원효와 의상을 화엄종의 종조

36) 明恵上人行状, 앞 책, 24) p.36.

로서 깊이 숭상하고, 두 사람의 행적을 제자인 成忍이라는 화승에게 華厳縁起를 그리게 하고 있지만, 絵巻의 문장은 묘에 자신이 직접 쓴 것이다.

. 원효와 묘에의 修行観

4.1. 원효의 錚観法 앞에서 언급한 대로 원효는 입당을 포기한 후, 마치 불법을 잃어버린 것 같이 어느 때는 산수에서 좌선하고, 어느 때는 술집에 드나들고, 어느 때는 민중을 위하여 무애가(無碍歌)를 만들어 염불가무를 행하는 등, 기괴한 행 동으로 자유분방하게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어느 때는 과부인 요석공주와 동침한 적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단순하게 파계나 타락이라고 봐야만 할 것인가. 아마 원효는 自由無碍境地에 따라서 그 대로 행동했음에 틀림 이 없다. 그러나 원효는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한 佛教 는 아니었다. 음주 가무의 파계적 행위는, 菩薩行으로 민중교화를 위한 방편이었고,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는 중국의 불교자에게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해 에 몰두한 것이다. 원효는 주로 경주의 芬皇寺에 주거하면서 저술활동에 힘쓰고, 그 저서 가운데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법화경종요 등이 있다. 현존하는 원효 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겐쵸(建長) 2(1250)에 성립한高山寺聖教目録 에 거의 정리되어 있어, 묘에에 있어서 원효의 사상적 영향을 쉽게 엿볼 수가 있다.

원효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국을 행각(行脚)하면서 심산유곡이나 동굴

속에서 험난한 수행을 했다고 전한다. 현재 원효의 수행 장소로는 울진 천 량암, 속초 계조암, 동두천 자재암, 장수 영월암, 완주 화암사, 부안 원효굴, 구례 화엄사, 문수사 등이 잘 알려져 있지만, 그 구체적인 수행법에 관해서 는 분명치가 않다. 다만삼국유사권5 ‘廣徳厳荘37) 안에, 엄장의 간청 에 의해서 원효는 쟁관법(錚観法)’38)을 만들어 왕생의 길을 가르쳤다고 하는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문무왕 시대에 광덕(廣徳)과 엄장(厳荘)이라는 두 사람의 沙門 이 있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먼저 극락정토에 가는 이는 서로 자신 의 왕생을 알려 줄 것을 약속했다. 廣徳은 芬皇 西里에 은둔하면서 짚신 을 만들어서 처자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厳荘은 南岳에 암자를 짓고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가 붉은 빛을 띠면서 서쪽으로 지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서방정토에서 왕생하였다. 그대도 왕생을 하고 싶으면 나를 따라 오라. 厳荘은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위에서 天人의 음악이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廣徳이 사는 집을 찾아갔더니 과연 廣徳은 죽어 있었다. 그래서 廣徳의 처와 함께 遺骸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 고 나서 그의 처에게당신의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 겠소.”라고 말하자, “좋지요.”라고 부인이 대답했기 때문에 그대로 그 집 에 머물렀다. 밤에 잠을 자는데 남녀의 정을 통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 녀는 이를 거절하고, “그대가 서방정토에 왕생하려고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厳荘이 놀라서廣徳도 지금까지 그대와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라고 말했

. 그러자 그녀는그 사람은 나와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아직까지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한 적은 없었소. 더구나 저의 더럽혀진 몸을 만진

37)  앞 책, 6) ‘廣徳厳荘’, p.57.

38)  錚観法은 다른 판본에서淨観法으로도 표기되어 있어, 이민수씨는錚観法」혹 淨観法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라고 지적한다. 淨観法이란 이미 생각의 더러움을 없애고 깨끗한 몸으로 煩悩의 유혹을 끊은 假観을 말함이라고 한다. 이민수 역, 삼 국유사, 乙酉文化社, 1993, pp.364365 참조.

적도 없었습니다. 다만 밤마다 단정이 앉아서 阿弥陀佛을 한결같이 외우 며, 観無量寿経가 설법하는 十六観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観法을 達観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그 달 빛 위에 올라서 結跏趺坐를 하였 습니다. 그는 극락왕생을 원하여 그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왕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여도 틀림없이 왕생할 것입니다. 천리의 먼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 걸음부터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극락왕생의 観法은 동쪽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대는 서방정토를 전혀 모르고 있 습니다.”라고 말했다.

厳荘은 부끄러워서 물러나 그 길로 元暁法師를 방문하여 왕생의 요점을

가르쳐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더니 원효는錚観法을 만들어 지도하였

. 厳荘은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一心으로 観法을 수행하여 결국은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었다. 錚観法은 元暁伝과 海東僧伝속에 수록되어 있다. 廣徳의 처는 芬皇寺의 노비이고, 観音経에 있는 十九応身의 한 사람이었다.

이 설화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먼저 통일신라 이전에 원효는 쟁관법(

観法)’이라고 하는 観法厳荘과 같은 서민들에게도 가르쳐 준 점에서 원효가 민중교화에 힘을 기울였다고 하는 좋은 예이다. 廣徳의 서방왕 생에 대한 바램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던가를 엿볼 수가 있다. 관음보살 의 化身芬皇寺의 노비가 廣徳의 아내이고, 廣徳은 이 아내에게 손가락 하나 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극락왕생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錚観法 이란 廣徳이 수행한 바와 같이 念佛의 수행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 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원효에게 지도를 받은 厳荘一心으로 観法을 수행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원효는 厳荘과 같은 범부들도 수행할 수가 있 는 観法을 알기 쉽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원효의 錚観法에 관해서 崔昌述씨에 의하면, ‘錚観이라는 것은 수행자 가 진리를 깨달을 때에 散乱心에 의해서 곧바로 定心(흔들리지 않는 마음) 을 일으킬 수가 없는 경우에 방편으로서 ()소리를 내어서39) 정신 상태 를 집중시키는 것에 의해 散乱心을 단절시키는 수행법이라고 해석한다. 원 효는 큰 박을 가지고 민중에게 염불춤을 장려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범부들 을 위하여 ()을 울려서, 一心不乱念佛에 의한 修行観을 만들었다 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錚観法은 중국에서 이 신라 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원효의 독창적인 修行観이라고 한다. 중국의 이 본격적으로 신라에 전래된 것은 800년대 에 들어가서부터 이지만, 그 이전에 선덕여왕 때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의 제4대 교조 道信(580651)의 문하에서 禅法을 수학한 法朗이 통일신라시 대 초기에 최초로 전했다고 한다. 또 원효의 행장을 기록한 元暁伝, 海東僧伝, 그 당시까지도 전래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거기에 는 원효의 錚観法観法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元暁伝, 海東僧伝 모두 산실되어 버려서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 廣徳이 왕생을 원했던 願往生歌40)를 다음과 같이 들어 보겠다.

달이 어째서 西方까지 가시겠습니까. 無量壽佛前에 報告의 말씀 빠짐

없이 사뢰소서. 誓願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 곧추 모아 願往生 願往生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四十八大願 이루실까.

願往生歌廣徳이 서쪽으로 기우는 달에 비추어 극락왕생의 숙원

西方의 아미타여래에게 도달할 것을 원하는 노래이지만, 왕생의 바람을

39) 최창술, 元暁修行観-三国遺事의 고찰을 통해서, 印度学仏教学研究45․

1, 1996․12, pp.326323.

40) 願往生歌의 현대역은, 김완진 「원왕생가의念丁에 대하여」, 새국어생활11․3, 2001, pp.8593을 인용했다. 또한 「願往生歌」에 관해서는 金思燁, 元暁大師願往生歌, 朝鮮学報27, 1963․4, pp.1761에 자세하다.

달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를 끈다. 게다가 廣徳의 극락왕생은 달 빛 위에 올라서 結跏趺坐를 한 채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는 달빛이 나 달에 의지하여 서방정토를 원하는 신라인들의 풍부한 정서가 보이지만, 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화엄경에서는 서방극락을 설 법하는데 있어서 석가여래를 無碍如来満月’(13, )이나 譬如月盛満’(9, )과 같이 서쪽을 향해가는 을 석가에 비유하고 있다. 즉 이 노래에서는 서방정토를 설명하고, 法蔵比丘誓願을 설법하여 이 정 토에 왕생해야만 하는 것을 ()에게 간절하게 염원하는 중생은, 지성 을 다하여 願往生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원효는 종파주의적인 불교교리의 논쟁과 모순을 바꾸어 종파를 초 월하여 원융(円融)․소통(疎通)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화쟁사상(和諍思想)’41)으로 그의 저서 十門和諍論에는 이 사상이 상세하게 전개되어 있다. 부처의 설법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것을 해석하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원효가 제창한 화쟁사상의 근본원리는 인간세계의 화()와 쟁()이라는 양면성을 인정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화쟁사상은 대 립이나 갈등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소하고, 하나의 세계로 조화와 융화를 꾀한다. 원효는 각각의 이론이 갖는 개별적인 특성을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적극적인 측면에서 수용해야만 한다고 하는 견해를 전개하였다.

게다가 원효는 화쟁사상을 통해서 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구제를

행해야만 한다는 실천원리를 제시하였다. 화쟁의 근거인 一心思想에 의해

41) 원효의和諍思想에 관해서는, 주로 徐輔鉄, 法華宗要에 있어서 元暁和諍思想, 駒沢大学仏教学部論集16, 1985․10, pp.351366; 이시이 코세(石井公成), 元暁和諍思想源流-楞伽経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印度学仏教学研究51․ 1, 2002․12, p.192; 후쿠지 지닝(福士慈捻), 元暁思想和諍思想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仏教学46, 2004․12, pp.2543 등을 참조하였다.

서 열반의 세계가 현세를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 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정말로 真如(진실)의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에 의해 중생은 윤회에 따라서 정해진 삶을 살고 마치 는 것이 아니고, 一心에 이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세에 있어서 깨달음 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정토신앙 과 더불어 불교의 대중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一心에 관해서 원

효는 대승기신론소42)에서,

처음 중에 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는 것은, 능가경(楞伽経) 에서 寂滅이라는 것을 一心이라 이름하며, 一心이란 如来蔵이라 이름한 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心真如門이라고 한 것은 곧寂滅이란 것을 일심 이라 이름한다함을 해석한 것이며, 心生滅門이란능가경 중의일심이 란 여래장을 이름한다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생함 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寂静하여 오직 一心일 뿐인데, 이러한 것을 심진여문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寂滅이란 一心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 이다. 또 일심의 體가 本覚이지만 無明에 따라서 움직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 여래의 본성이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을 如来蔵이라 이름한 것이다.

라고 적혀 있어 一心이란 여래장(如来蔵)이고, 그 일심에 의해서 두 문이 있고, 이 두 문이란 심진여문(心真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고 말 하고 있다. 이 일심이란 楞伽経에서는 적멸(寂滅)이라 하고, 또 일심은 本覚이지만, 本覚無明의 작용에 의해서 生滅門을 만들어 그 생멸문에 숨어 있는 것을 如来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涅槃経宗要仏性之体一心이라고 보여, 금강삼매경론에도 一心本覚如

42)  은정희 역주, 대승기신론소별기, 一志社, 2004․11, pp.8789.

来蔵義라고 말하고, 일심의 원리인 如来蔵思想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원효를 깊이 추모한 묘에는 一心思想의 영향을 받아서 華厳唯心義43) 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중생이 三界一切의 부처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이 터 득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수많은 여래를 만든다고 하는 것을 중생에게 장 려하여, 唯識観을 수학하게끔 하였다. 이르되 三界一切의 부처를 알려고 한다면, 이 唯心의 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즉 부처를 보는 것과 같으며, 즉 心性(청정심)을 가지고 있어야 부처가 된다 는 것을 心造諸如来라고 한다. 이 도리를 깨달으면, 즉 이러한 마음의 표 상에 의해 心性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묘에는 심성(心性)을 깨달음으로 인해서 삼계일체(三界一切) 의 부처를 알 수 있다는 것을, ‘心造諸如来라고 설법하고 있어 원효의 一心思想과의 관련성이 인정된다. 즉 일체의 모든 법이 으로서 마음을 반영하는 표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유식론(唯識論)의 입장이 여기에는 분 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華厳唯心義는 화엄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唯心偈(유심게)’를 중심으로 묘에가 在家의 신자들을 위해서 알기 쉽게 해석한 것으로, 를 수많은 부인들과 친척들의 요청에 부응해서 겐닝(建仁) 원년(1201) 2월에 저술하였다고 권두에서 밝히고 있다. 원효의 저서 십문화쟁론은, 신라승인 심상(審祥)의 장서목록 大安寺審詳師経録, 이시다 모오사쿠(石田茂作)씨의 奈良朝現在一切経疏目録에 수록되어, 일찍이 나라시대부터 일본에 전래되어 널리 유포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 저서는 물론 高山寺聖教目録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43)  華厳唯心義, 高山寺典籍文書総合調査団編 高山寺典籍文書研究수록, 高山寺本에 의한다.

묘에의 손자제자에 해당하는 十恵房 高(1218?1272)起信論本聴集記에서 원효전을 인용한 곳에 元暁和諍論制作. 陳那門徒唐土来有滅後取彼論疏帰天竺国. 了是陳那末弟歟44) 라고 보여 원효의 십문화쟁론 이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에까지 전해졌다고 적혀 있지만, 그 신빙성에 관해 서는 조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4.2. 묘에의 捨身行 한편 고잔지(高山寺)에 소장하는 明恵上人樹上坐禅像, 묘에의 제자 죠닝(成忍)의 붓에 의한 것으로 高山寺의 뒷산을 능가산(楞伽山)이라고 이름 지어, 깊은 산 속에 있는 소나무 가지가 두 갈래로 나누어진 고목에 밧줄로 마루를 만들어 수행 장소로 하고, 그곳에서 좌선에 잠기는 것을 좋 아한 묘에의 일상생활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화엄연기의 원 효그림에 있어서 원효의 모습이, 수상좌선상(樹上坐禅像)’에 그려진 묘에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가 인정하고 있는 바이 다.45) 에마키(絵巻)원효그림冒頭에는 원효가 의상과 함께 무덤 안 에서 오른손을 뻗으며 꿈을 꾸면서 누워 있는 원효의 조용한 얼굴이, ‘樹上坐禅像의 묘에의 모습과 아주 동일인물인 것같이 그려져 있다. 원효그림1 2단에 달을 읊고 있는 곳이라는 글이 쓰여 있고,

44)  , 起信論本聴集記, 大日本仏教全書 巻92, p.103.

45)  가메다 쓰토무(亀田孜), 華厳縁起에 관해서, 華厳縁起 日本絵巻全集, 角川書店, 1959, pp.315; 모리 토오루(森暢), 明恵上人画像에 관해서, 鎌倉時代肖像画 미스즈書房, 1971, pp.4983; 히라타 유타카(平田寛), 明恵周辺-恵日房成忍俊賀의 경우」, 哲学年報34, 1975․3, pp.113130; 가나자와 히로시 (金沢弘), 華厳宗祖師絵伝 成立背景画風, 華厳宗祖師絵伝(華厳縁起), 中央公論社, 1979, pp.7892; 미나모토 토요무네(源豊宗), 明恵上人画像 과 그 필자에 관해서」, 日本美術史論究四, 思文閣出版, 1982 pp.487497 등이 있다.

소나무 숲이 이어져 있는 해변가에 앉아서 달을 바라보고 있는 원효의 모 습과 묘에의 坐禅像이 서로 유사하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가파른 절벽 위의 동굴 속에서 원효가 명상에 잠기고 있고, 그 주위에는 세 마리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지키고 있는 풍경이 더없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원효의 모습은 먼 풍경 속에서 작게 그려져 있지만, 그 표정은 온화 하고 매우 만족스런 얼굴이고, 세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리고 坐禅하는 원 효의 모습은 분명히 묘에의 이미지를 오버랩하여 그려졌다고 추측된다. 거 기에 대응하는 문장은 어느 때는 깊은 산수 주변에서 좌선한다. 금조(禽鳥) 호랑(虎狼)이 스스로 굴복한다.’라고 쓰여 있어 굶주린 호랑이에게 투 신한다고 하는 '사신사호도(捨身飼虎図)’46)에 보여지는 희생의 주제가 여 기에는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즉 원효의 '산중좌선도(山中坐禅図)’에서는 인간이 야수에게 먹히는 처참한 장면이, 여기에는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 는다.

사신사호도(捨身飼虎図)’라고 한다면, 금방이라도 생각나는 것이 나라 의 호오류지(法隆寺)에 소장하는 유명한 타마무시노즈시(玉虫厨子)이다. 玉虫厨子는 구덴부(宮殿部)와 스미자( 弥座)로 되어 있고, 弥座의 정면에 利供養図, 왼쪽 측면에 施身聞偈図, 뒷면에 弥山図, 오른쪽 측면에 捨身飼虎図가 각각 그려져 있다. 捨身飼虎図金光明経捨身品에 유래한다고 한다. 석가 전생의 이야기, 소위 본생담(本生譚)에 근거하고 있다. 원림(園林)을 유행(遊行)한 석가 전생의 살타태자(薩埵太

)는 대나무 숲 속에서 굶주린 어미호랑이와 일곱 마리의 새끼호랑이를

46)  捨身飼虎図」란, 석가전생의 薩埵王子가 굶주린 호랑이 모자에게 자신의 몸을 부 여하여 구제했다는 本生譚이지만, 奈良県斑鳩町 호오류지(法隆寺)에 소장하는 타마 무시노즈시(玉虫厨子, 国宝)飛鳥時代 7세기의 불교공예품으로 수미좌( 弥座) 의 정면에 「利供養図, 향해서 왼쪽 측면에 「施身聞偈図, 오른쪽 측면에 「捨身飼虎図, 뒷면에 「 弥山世界図」가 각각 그려져 있다.

발견하고, 죽음에 직면해 있는 호랑이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호랑이 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本生譚이지만, 불교가 일본인의 정신생활 속 에서 수용되고 있었다는 그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식인 호랑이의 희생 이 된 살타태자(薩埵太子)의 이야기가 法隆寺타마무시노즈시(玉虫厨子)’ 안에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실은 묘에의 전기 속에는, 사신행(捨身行)’에 대한 실천이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다. 묘에는 어린 시절부터 승려가 되는 것에 뜻을 두고 있었지 만, 타고난 용모가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불 젓가락으로 상처를 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3세 때에는 捨身(자살)을 시도해 보고, 24세 때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있다. 이와 같은 과격적인 행동에서 묘에의 捨身에 대한 태도가 표명되어 있지만, 그 의도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요와(養和) 원년(1181) 8월 무렵, 묘에는 아홉 살 때에 다카오진고지(高雄神護寺)에 들어간 이래, 불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년 후, 13세 가 되었을 때에 묘에는 자살을 도모하고 있다. 明恵上人行状47)에는 묘 에의 전기 중에 보이는 최초의 사신행(捨身行)에 대해서 다름과 같이 쓰여 있다.

13세 때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지금 13세가 되었으니 나이가 들 어 이미 늙었다. 죽을 때가 가까워져 무엇을 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는 것 이 아무 것도 없다. 모두 다 죽는다고 한다면, 부처나 중생을 위하여 생명 을 버린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목숨을 바꾸어 호랑이나 늑대에게 먹혀서 죽는다고 생각하고, 그 마음을 실행하기 위하여 俱 論만을 손에 쥐고, 다른 사람에게 눈에 띄지 않게 단지 혼자서 화장터인 고잔마이(五三昧)

47) 明恵上人行状, 앞 책, 24) p.15.

가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이미 늑대가 왔다고 생각하고, 저 薩埵王子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부여한 것과 같이, 나 는 오늘 밤 늑대에게 먹혀서 생명을 버린다고 생각하고, 석가가 옛날 수행 한 것을 계속 생각하며 가엾은 마음이 들어, 一心으로 부처를 염송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날이 새어 유감스럽게 생각 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이 사신행은 묘에가 석가 전생에 있어서 살타왕자(薩埵王子)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부여한 이야기에 감동하여 실행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묘지에는 시체가 방치되어있어 들개 따위가 먹고 있었던 상황이었 기 때문에, 자신도 똑같이 들개나 늑대에게 먹혀서 죽으려고 한 것이다. 묘에가 사신행을 위하여 혼자서 향했던 고잔마이(五三昧)’日本国

語大辞典 고잔마이쇼(五三昧所)’48)의 항목에 의하면, 기나이(畿内)에 있었던 다섯 군데의 화장터를 가르키며 야마시로(山城京都)의 도리베 노(鳥辺野), 후나오카야마(船岡山), 야마토(大和奈良)의 한냐노(般若

) 그 밖에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라고 적혀 있다. 나머지 두 군데를 기록한 자료는 눈에 띄지 않지만, 교토의 五三昧所에 관한 기술은

교하부타에(京羽二重)49)에도 보여 그것에 의하면, 아미다미네(阿弥陀峯), 후나오카야마(舟岡山), 도리베야마(鳥辺山), 사이잉(西院), 다케다(

) 의 다섯 곳이다. 이 다섯 곳 중에서 묘에가 어느 화장터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 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늑대에게 부여하려고 했지만,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묘에의 捨身飼虎의 행위는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묘에가 이와 같이 捨身行을 결 의하게 되었던 것은, 薩埵太子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부여한

48)  日本国語大辞典 第五巻, 学館, 2001, p.726.

49)  野間光辰編, 京羽二重(新修京都叢書 第二巻, 臨川書店, 1976) p.586.

이야기를 어린 시절에 읽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묘에에게는 꿈속에서 늑대에게 먹히는 처참한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분지(文治) 4(1188) 16세 때에 몬가쿠쇼닝(文覚上人)의 문하 에 들어가 東大寺의 가이단잉(戒壇院)에서 具足戒를 받아서 출가하였지 만,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일어나 일이다. 그 체험에 관해서 明恵上人行状50)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도 불법을 위하여 雪山童子가 半偈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羅刹에게 주고, 薩埵王子가 굶주린 호랑이를 불쌍히 여겨 전신을 부여하고, 매에게 몸을 준 尸毘王, 五夜叉에게 몸을 준 慈力王와 같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 고, 어느 날 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때와 똑같이 또 고잔마이(五三昧)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별다른 일이 없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 몸의 모든 것을 버릴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 날 밤 꿈속에서 늑대 두 마리가 다가와서 옆에 앉더니 나를 잡아먹으 려 하는 기색이 있었다. 마음속에서 생각하길 내가 바라던 바이다, 이 몸을 주려고 생각하고 너는 가까이 와서 먹어도 된다고 말하자, 늑대는 다가와 서 먹기 시작한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반드시 뜻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고 참고 견디었다. 전부 다 먹었다. 그래서 뜻을 이루었 다는 이상한 생각에 잠에서 깨어보니 전신이 땀으로 젖은 것을 알았다.

이것에 의하면, 묘에는 한 번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차 묘지(五三昧) 에 가서 경전에 설법되어 있는 捨身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신의 몸을 부여 하려고 하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꿈 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에게 자신이 직접 먹혀서 그 고통은 참기 어려웠지 만, 그 고통을 참고 이겨내어 자신의 몸이 전부 먹혀버린 것이다. 이 꿈의

50) 明恵上人行状, 앞 책, 24) p.18. 그러나 明恵上人伝記에는 자신의 몸을늑 대가 아닌에게 주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p.365).

의미에 관해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씨에 의하면, 꿈속에서 죽음을 보 는 것은 극히 드문 케이스이고, 대부분의 경우는 죽기 직전에 눈을 뜨지만, 죽음까지 가는 꿈을 꾸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고 있 는 경우가 많다51)고 해석하고 있다. 현실체험과 꿈속 체험이 다름을 이와 같은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묘에에 있어서 捨身에의 강한 결의를 짐 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적혀 있는 예는 같은 석가 전생의 체험으로서 전해지는 本生譚이고, 雪山童子薩埵王子의 이야기가 중요한 기연(機縁)이 되어 있다. 雪山童子란 석가가 전생에 있어서 雪山(히말라야산)에서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 ‘諸行無常. 是生滅法를 듣고는 환희하고, 게다가 후반의 를 듣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나찰에게 부여해서, ‘生滅滅已. 寂滅為楽半偈를 얻었다는 이야기(施身聞偈)52), 앞에서의 薩埵王子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부여한 이야기(捨身飼虎)이다. 이 두 개의 자기희생의 장면은 法隆寺에 소장하는 타마무시노즈시(玉虫厨子)弥座의 왼쪽 측면과 오른쪽 측면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묘에는 겐큐6(1195), 23세 때에 神護寺을 벗어나 고향에 가까운 기슈

유아사(紀州湯浅)白上峰에 암자를 지어 은둔해 버린다. 그 후 26세때 다카오(高雄)에 돌아오기까지 3년간 이 암자에 살면서 수행에 힘쓴다. 紀州 白上峰에서의 은둔생활 그 이듬 해 行状53)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우리들이 如来의 本意에 어긋나는 짓을 계속한다고 생각하면, 머리털

51)  앞 책, 35) p.113.

52)  涅槃経14, ‘聖行品’(大正蔵巻12) p.451.

53)  明恵上人行状, 앞 책, 24) pp.2425.

을 깍은 머리를 중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승복을 입은 모습도 역시 원 망스럽구나.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신체에 상처를 입혀서 인간이 기를 거부하고, 의지를 견고히 하여 如来의 뒤를 따르리라. 그러나 눈을 도려내면 経典을 읽을 수가 없고, 코를 자르면 콧물로 인하여 경전이 더 럽히고, 손을 자르면 印契를 맺는데 번거롭고, 귀를 자르면 들을 수 없지 는 않다. 그래서 大願을 모아 仏眼如来의 앞에서 仏壇의 다리에 귀를 묶 고, 칼을 꺼내서 귀를 잘랐다. 피가 튀어서 本 과 仏具 등에 묻었다. 그 피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문장에 의하면 묘에가 白上峰에 칩거하고 있을 때, 仏眼仏母像의 앞 에서 오른쪽 귀를 절단한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말하고 있다. 이 오른 쪽 귀의 절단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것은, 사건이 있던 이듬 해 즉 겐큐8(1197) 6월에 白上에서 서사된 華厳一乗教分記54)권상의 간기(刊記)에 묘에 스스로 귀 없는 법사라고 적고, 일본국보 仏眼仏母像’(高山寺所蔵) 에도 무이법사(無耳法師)’라고 보이기 때문에 분명한 일이다. 묘에는 석 가 생존의 시대에 맞추어 태어나지 못한 것을 언제나 후회하고 있었다. 삭 발이나 승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 교만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本意였 음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불제자는 머리를 멋있게 깎는 것이나, 승복을 눈 부시게 차려 입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석가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 는 것은 분명히 우둔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체에 상처를 입혀서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의지를 견고히 하여 如来의 뒤를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먼저 눈을 도려내면 経典을 읽을 수가 없게 되고, 코를 자르면 콧물이 흘려서 경전이 더럽히게 될 것이다. 손을 자르게 되면 인계(印契)를 맺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귀는 잘라도 経文

54)  華厳一乗教分記(高山寺典籍文書総合調査団編, 高山寺典籍文書目録第一, 東京大学出版会, 1972) p.116.

듣는 데 있어서 크게 지장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仏眼如来(불안존)의 앞에서 귀를 묶어서 仏壇의 다리에 연결시켜 칼로 오른쪽 귀를 잘랐던 것이 다. ‘피가 튀어서 仏具 등에 묻었다. 그 피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다라고 하는 처참한 행위를 한 것이다. 귀를 자른 그 날 밤, 묘에는 무척 인상적인 꿈을 꾸었다. 꿈에 한 사람의 범승(梵僧)이 나타나 묘에를 향해서,

자신은 머리수족 등을 불법을 위하여 難行苦行의 행위를 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번에 그대가 귀를 잘라서 여래에게 공양한 것을 여기에 적어 두겠다고 묘에에게 말하고는 그것을 한 권의 큰 책에 기록한다.

이와 같은 기행(奇行)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묘에의 행위는, 어린 시절 부터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13세와 16세 때에는 사신행(捨身行)을 시도하기도 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꿈속에서 梵僧 은 묘에의 행동에 대해서, 如来菩薩시절에 행했던 捨身行과 동일시하 고 있는 것이다. 묘에에 있어서 꿈은 곧 현실세계에 연속해서 연결되어 있 고, 그것은 그대로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묘에는 겐큐(建久)2(1191) 19세가 될 무렵부터 입적하기 전인 간키(寛喜)3(1231) 59세에 이르기까지 약 4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자신의 꿈을 일기와 같이 明恵上人夢記를 꼼꼼하게 계속 써 온 것이다. 이 귀를 자 른다는 것은 신명을 바쳐서’ ‘如来를 공양한다고 하는 菩薩行를 의식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노무라 타쿠미(野村卓美)씨 는, 꿈속에서 梵僧이 묘에의 행위를 捨身行이라고 단정하고, 한 권의 책 에 기입했다는 것에 의해 仏眼如来에의 오른쪽 귀 공양이 완성하는 것이 다55) 라고 지적한다. 묘에의 오른쪽 귀 공양은 仏眼仏母(불안존)의 신앙 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의 경우는

55)  노무라 타쿠미(野村卓美), 明恵捨身行, 日本文学31․4, 1982․4, pp.28 35.

머니에 대한 동일화의 원망(願望)마저 느끼게 해 준다.

묘에는 일찍이 소년의 거만함도 있어서 다른 승려들의 세속적인 삶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오로지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그는 계율을 어기고 태연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묘에가 귀를 자른 행위는 신체가 번뇌의 씨앗이 되 고, 수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스스로에게 시련을 부여해, 그것을 견딘다고 하는 강한 정신을 고양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묘에 의 사신행(捨身行)에의 뜨거운 결의는 仏眼仏母어머니에 대한 동일화 로 연모하는 종교적 정열에 의해서 그를 여래의 보살행이라는 고행으로 이끌어 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仏眼仏母像 앞에서 귀를 자른 이래, 자신을 무이법사(無耳法師)’ 또는 귀 없는 법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원효의 入唐포기와 묘에의 도천단념(渡天断念)의 배경을 검 토하고, 두 사람의 수행관에 관해서 삼국유사, 華厳縁起 등을 중심으 로 고찰하였다. 신라의 고승 원효는 두 번에 걸쳐서 당에 유학을 시도했지 만, 그 도중에 고분 속에서 귀신의 꿈을 꾸고 萬法唯識의 근본원리를 깨달 아 신라에 머물면서 평생 민중의 교화활동에 힘을 기우였다. 묘에도 석가 의 유적이 있는 인도에 순례하는 것을 오로지 동경하여 두 번이나 인도에 가는 계획을 세웠지만, 가스가묘징(春日明神)託宣에 의해서 결국은 천 축행(天竺行)을 단념하게 된다. 서역에서 귀국한 현장의 유식학(唯識学)56)을 동경하여 입당을 시도한 원효와, 석가가 태어난 천축(天竺)에 동

56) 唯識学, 인도에서 시작되어 玄奘에 의해 유식경전이 중국에서 번역되어 현장의

경해서 인도에 건너갈 것을 계획한 묘에와 그 형태는 다르지만, 시간과 공 간을 넘어서 이국의 땅에서 석가의 가르침이나 그 정신에 깊이 접해보고 싶다고 하는 의지는, 양자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원효는 전국을 편력(遍歴)하면서 심산유곡이나 동굴 속에서 좌선을 하며 수행했다고 전하지만, 그 모습은 에마키(絵巻)원효그림에 가파른 절벽 위의 동굴 속에서 명상(冥想)에 잠겨 있고, 그 주위를 세 마리의 호랑 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지키고 있는 풍경을 상기시킨다. 현재 원효의 수행 장소로는 울진 천량안완주 화암사구례 화엄사 등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수행법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권5 ‘廣徳厳荘안에 엄장의 간청에 의해 원효는 쟁관법(錚観法)’을 만들어 왕생의 길을 가르쳤다고 하는 설화가 있다. 錚観法이란 과 염불이 동시 에 행해지고 있었지만, 원효는 엄장과 같은 범부들에게도 수행이 가능한 관법을 알기 쉽게 가르쳤다는 점에서, 당시의 귀족불교를 민중불교화 시키 는데 진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원효의 삶은 이론과 실천을 일 치시키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동시에, 불교의 대중화를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게다가 민중구제를 위하여 화엄종의 경문을 노래로 만들어 부락에서 부락으로 염불을 외우면서 춤을 추고 돌았다는 원효의 염불춤은, 구우야(空也)와 잇펜(一遍)의해서 계승되어 일본의 염불춤의 원 류가 되었던 것이다.

묘에는 양친의 죽음을 계기로 불문(仏門)에 들어간 이래, 그 생애에 있

어서 혼자만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엄한 계율을 지키며 명상(冥想)에 몰두하고, 동시에 한결같이 불교교리의 깊은 이해를 원했다. 묘에는 당시 에 화엄교학을 대표하는 학승이 되었지만, 불교계에 절망하여 고향인 기슈

제자 慈恩大師 규기(窺基)法相宗을 열어, 여러 나라의 불교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인간의 심성(心性)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紀州)에 은둔한다. 그가 태어난 유아사(湯浅)의 시라가미미네(白上峰)에 서 행해진 오른쪽 귀의 절단과 재차 도천(渡天)의 계획은 사신행(捨身行)’ 을 의식해서 이루어 진 행동일 것이다. 묘에의 경우에는 스승인 몬가쿠(文覚)에게는 교학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聖教本経를 스스로 배우는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탄식한 그가 진정 한 스승으로 추앙한 것은 석가였다. 석가의 유적이 있는 천축(天竺)에 동 경하고, 仏眼如来의 앞에서 칼로 귀를 자른 것도 구도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묘에는 만년에 제자 죠엔(長円)이 기 록한却廢忘記에서 薩埵太子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히고, 雪山童子半偈를 위하여 나찰(羅刹)에게 몸을 바친 것 등은, 그 때의 성품에는 누구 나가 감동을 할 것이다. 당시 내 생각처럼 되지만은 않았다.’ 라고 그 행동 을 찬탄하며 공감하고 있는 점에서, 만년에 이르렀어도 사신행(捨身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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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asters Wŏnhyo and Myōe

- Focusing on the Kōzan-ji Temple Sources -

Kim, Im-jung*57)

Wŏnhyo and Ŭisang can be said to have been remarkably active in the early Unified Silla period with Wŏnhyo regarded as the greatest Buddhist thinker and writer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His writings were already transmitted to the Japan during the Nara period, which can be confirmed in Ishida Mosaku’s (石田茂作) “A Table of Contents of Sutras from Nara to the Present” (Narachou genzai issai kyōsho mokuroku, 奈良朝現在一切経疏目録) and Horiike Shunpo’s (池春峰) edited “Master Shinshō of Daian-ji Temple’s Sutras” (Daian-ji shinshōshi keiroku, 大安寺審詳師経録). The number of confirmed writings by Wŏnhyo is a staggering 231 volumes on 107 subjects, of which only twenty-seven volumes on twenty-two subjects are extant.

On the other hand, Myōe is appraised as the strictest of the ‘holy monks’ in Japanese Buddhist history and although a Kegon monk of the early Kamakura period, highly revered the seventh-century monks Wŏnhyo and Ŭisang despite their five hundred year time span. The Kegonengi Picture Scroll (華厳縁起), a national treasure passed through the ages in Kyoto’s Kōzan-ji Temple, is a scroll painting (emaki) of the lives and tales of Wŏnhyo and Ŭisang that Myōe ordered his disciple Jyōnin (成忍) to illustrate. Rather than painting the Chinese monks Zhiyan (智儼) or Fazang (法蔵), founders of the Huayan School (the Chinese equivalent of the Kogen sect), or the Japanese founders of the Kogen sect Shinshō (審祥) or Rōben (), why would Myōe order that Silla’s Wŏnhyo and Ŭisang be illustrated? It is probably because of his immeasurable respect and admiration for the two, and to borrow their names for his own use in spreading his ideology and experiences. That

 * Meiji University, Japan. Kimsai111@naver.com

is, the lives and tales of Silla’s holy priests Wŏnhyo and Ŭisang were written and pictorialized to revive the gradual decline of the Kegon sect’s teachings and to fulfill the need to easily sermonize to believers.

Although Wŏnhyo attempted to study Buddhism abroad in Tang China twice, he stayed in Silla exerting his efforts in proselytizing the people after a ghost from an ancient tomb appeared in his dream and he realized the basic principle of ten thousand phenomena and one consciousness (萬法唯識). Myōe also yearned to go on a pilgrimage to India, where the remains of the Sakyamuni were kept, and twice made plans to do so, but relinquished them when the oracle of the kami of the Kasuga Shrine dissuaded him. Wŏnhyo, who cherished the Yog c ra School (唯識学) espoused by Xuanzang (玄奘) and sought to enter Tang China and Myōe who attempted to cross over to India were different, but both had in common the will to cross space and time in order steep themselves in the spirit and teachings of the Sakyamuni Buddha.

This study will focus examine the backgrounds of Wŏnhyo’s entering Tang China and Myōe’s India pilgrimage while focusing on their views on Buddhist practice using sources from the Kozan-ji Temple such as the Kegonengi Picture Scroll and others such as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key words

Wŏnhyo, Myōe, Kōzan-ji, Kegonengi Picture Scroll,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1] ) 明恵上人神現伝記, 앞 책, 24)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