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6

제 3 과 성경의 제일 요긴한 교훈

  3   성경의 제일 요긴한 교훈

3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5) :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1)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입니다. 2)

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0,31)

2)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6:8) I. 성경은 하나님과 구원, 그리고 구원받은 자의 삶을 다룹니다.

지난 공부에서 우리는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말은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는다는 말인가요?

1) 성경은 백과 사전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는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 또는 모든 것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은 인류의 완전한 역사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주어진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다른 사료에서 배워야만 많은 역사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일반 과학이 요구하는 기술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화학 공식이 없습니다. 전자 공학의 이론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주어진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다른 사료에서 배워야 하는 많은 역사들이 있습니다. 고구려사도 학교에서 배워야 하고 중국역사도 따로 배워야 합니다.

법률학 정보나 컴퓨터 정보도 나오지 않습니다.

2)    사실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바라는 정보조차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성경 인류의 완전한 역사를 제공해 주지 않을 더러, 예수님의 소년 시절, 교육, 또는 가정생활에 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정확한 신체적 모양을 도무지 알지도 못합니다.

원래부터 성경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주어진 정보 책이 아닙니다. 목적이라면 아마 구글이 쉬울 것입니다. 

3)    성경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영원한 문제를 다루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을 가르치려고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0,31)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으며,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있게 충분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충분성을 이야기할 때에 분명히 우리가 기억하여야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II. 성경의 충분성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바로 있는  (열쇠) 성경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답을 얻을 있는 분명한 열쇠와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성경이 없이 세상의 적은 것에서 것까지 어떤 것도,  참된 이해를 가질 없다고 선언할 있습니다.

마치 어두움 속을 걸으면 아무리 눈이 밝아도 아무 것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비춰질 때에는 모든 것이 환하게 보여 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등불의 빛과 같습니다.

"주의 말씀은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니이다'( 119:105) "주의 가운데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9)

하나님을 배제하고 우주만물과 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분명히 근본과 원인과 이유를 바로 수가 없습니다.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왜곡된 지식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으로 존재의 원인을 밝히려는 진화론자들은 존재의 이유를 우연히 화학반응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의 눈을 가지고 어두움 속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아무리 좋은 ,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과학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역사가, 지리학자, 철학자 혹은 다른 학문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의 조명 속에서 때에 참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됩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모든 판단과 결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아래서 판단하고 계신가요?

결국 우리가 세상의 모든 사물과 모든 정신세계를 때에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눈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분의 특별한 계시 , 말씀의 속에서 사물을 때에 지식을 얻게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으로 때에 성령께서 말씀을 깨달을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연구한다하여도 짐작에 불과합니다. 많은 오류를 가지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물을 말씀의 빛에 비추어 바라보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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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진리의 빛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등불입니다. 등불을 비취는 가운데서 사물을 바라볼 우리는 모습을 발견할 있습니다. III. 인간의 전적부패로 인하여 성령의 거듭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이렇게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영혼을 거듭나게 만들어 주신 자에게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창조주의 살아계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바라 봅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참된 위치와 가치를 바로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사람이 과학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경이스러운 창조를 알기 위하여 사물을 연구할 것입니다. 창조 과학자들이 그들 중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가 만약 역사가라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류의 역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물론 다른 모든 영역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자라면 역시 창조주의 인간을 향한 창조 목적과 인간의 근원 등을 빛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의 존재나 인식, 또는 목적 등을 연구하여 나갈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영역에서 근본적으로 바른 지식을 얻기 위하여는 말씀의 빛으로 바라보고 연구하여야 합니다.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믿을 것을 때에 만이 우리는 똑바로 걸을 있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와 본분을 깨달을 있습니다.

IV.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며 믿는 자가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거듭난 자들이 성경의 조명 아래서서 세상의 이치와 진리들을 깨달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질문의 열쇠와 답을 성경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조명 아래,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진리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로 다루는 것은 보다 깊은 영적인 원리들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얻으며, 믿음으로 구언 받은 자가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교리 문답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작성되었습니다. 

1)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것인가를 크게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흔히 무엇을 믿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믿을 권리가 있다.” 말합니다.

다른 이들은무엇을 믿든지 사람이 타인에 대해 신실하고 점잖으면 그가 믿는 것을 받아들일 만하다.” 말합니다.

시인 알렉산더 포우프(A.Pope)조차도 이렇게 읊었습니다.

"몰지각한 독선적 신앙 문제 싸움은 내버려두라. 정직하게 사는 자가 믿는 모든 것은 나쁠

없다."

물론 믿고 싶지 않는 것을 믿도록 어느 누구도 타인에 의해서 강요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든 차이가 없다고 그것은 참이 없습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9)

예수님께서는 우물 가에서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2-24).

인간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을 지라도 올바른 삶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없느니라” (

7:18).

교리 문답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선두에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2) 인간이 신앙, 하나님이 그에게 믿기를 명한 믿음을 가졌을 그는 하나님이 명한 것을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올바른 행위, 실천의 결과가 없는 , 신앙이란 있을 없습니다.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니요 믿음이 능히 자신을 구원하겠느냐” ( 2:14).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체가 죽은 것이다영혼 없는 몸이 죽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 2:17, 26).

교리 문답이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 강조하는 것은 신자가 생활의 참된 자세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죽은 정통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참된 교리들을 고백하고, 이것을 토론하고 주장하며, 방법들을 이해하긴 하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리 문답이 신앙을 선두에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실천이 없는 신앙은 구원 받을 있는 신앙이 아님을 계속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율법(십계명) 우리를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필요를 깨닫게 하여 줍니다.

한가지 첨가적으로 알야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율법(십계명)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가정 교사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정죄를 통하여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우리의 무능을 지적함으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죄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받을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3:24)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로 우리가 예수님이 필요함을 깨닫게 주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의 필요를 먼저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에 이를 없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이, 그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율법에 의해서인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

4) 그러면 율법을 먼저 다루어야 하는 아닌가요?

그러면, 교리 문답이 율법을 먼저 말하지 않고, 구원 받기 위해서 필요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먼저 말하는가요?” 라고 질문할 있습니다. 여기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a.      교리 문답이 율법을 먼저 다루고, 다음으로 신앙을 다룬다 해서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세주를 주시기 전에 율법을 먼저 주셨습니다.

b.      그러나 교리 문답에서 율법이 가장 먼저 취급되지 않은 대한 선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                    율법을 앞에 두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뒤에 두게 되면 그리스도가 율법보다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부주의한 사람들은 구원이, 율법이 명한 바를 행함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먼저 율법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리스도가 영접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을 자는 아무도 없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율법들을 지킬 자는 없습니다.

-                    율법을 먼저 두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뒤에 둔다면 예수 믿은 이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인상이 생길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왔으므로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 율법은 필요 없다.”라고 말할 또한 잘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필요함을 알도록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을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이후 우리가 어떻게 그를 위해 살아야만 하는가를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요한은 말했다(요일

5:3)

결론적으로 교리 문답은 확고하게 교리로서의 기독교와 생활로서의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분리를 배제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결코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둘은 항상 병행합니다. 

[   ]

1)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나요?

2)    그러면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할 있나요?

3)    세상 원리들은 알기 위하여 성경의 조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주의 가운데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9) 말씀에 근거하여 설명하여 보세요.

4)    성경을 조명하여 세상을 바라보기 위하여는 성령의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아무거나 생각대로 믿어도 관계없다"라는 말에 대하여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6)    교리 문답이 기본적인 강조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7)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이 "몽학선생"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8)    교리문답이 율법에 앞서서 믿음을 먼저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십시오.

9)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십계명) 필요한가요? 이유를 설명하여 보십시오.

2021/12/15

Kang-nam Oh | 불교와 성경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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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 [1]

계간지 <불교평론>에서 이어가는 “불교로 읽는 고전” 시리즈의 하나로 ‘성경-불교의 입장에서 읽은 성경 이야기’를 쓰라는 원고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방금 나온 2021년 겨울호 248~265 쪽에 실렸네요. 
1. 성경의 구성, 
2.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3. 성경에 대한 태도, 
4. 해석의 문제, 
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로 구성되었는데, 

5번을 여기 올려봅니다.  즐독 부탁합니다.  (괄호 안은 각주들인데 페북에는 제대로 올려지지가 않네요.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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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불교를 연상시키는 진술이나 사건들 몇 가지를 예거해 본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제들일 수 있기 바란다.  

1) 성경 첫째 권인 <창세기>에 보면 신이 6일 동안 세상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여라....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하였다. 서양 역사는 대체적으로 이 ‘정복’과 ‘다스리라’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땅을 마구잡이로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착취하고 살육하는 일을 계속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말은 자연을 함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각주: Jeremy Rifkin, The Emerging Order: God in the Age of Scarcity, (Ballantine Books, 1979)와 그의 최근 책,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와 동저자, 안진환 옮김, <글로벌 그린 뉴딜>(민음사, 2020) 참조.)
  이런 새로운 이해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창조 이야기와 연관해서 야훼 신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조성하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그 중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른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며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과일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다.  둘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야훼 신은 이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순종·불순종의 입장에서 보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므로 쫓겨난 것이니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 된다는 식의 윤리적, 율법적 해석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의식의 발달사를 다룬 켄 윌버(Ken Wilber)는 이 이야기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도 모르던 동물적인 주객 미분의 의식(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주객 분리의 의식(subject/object consciousness)으로 넘어온 단계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윌버는 물론 의식 발달의 완성은 이런 이분법적 분별 의식을 초월하는 초주객 의식(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라 한다. 
(각주: Ken Wilber, Up From Eden: A Transpersonal View of Human Evolution (Quest Books; Quest ed. edition, 2007) 참조.)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분별식(分別識)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를 넘어서서 분별식을 초극하는 단계로의 완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3) 성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기별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4:17)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개’라고 번역한 것은 본래의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메타(넘어서다)와 노이아(의식)의 합성어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메타노이아 체험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은 다 같이 ‘새로운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않을까?

4)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했다.  여기서 ‘내가’라는 것은 역사적 인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기보다는 ‘우주적 나(cosmic I)’,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우주적 생명력’, ‘본원적인 인간성,’ ‘나의 참 나’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여겨진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친 말이 연상된다.  여기서 ‘나(我)’란 누구인가?  역사적 고타마 싯다르타를 의미할까?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나, 참 나인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언과 부처님의 외침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 아니겠는가?

5) <마태복음>에 보면 최후 심판 장면이 나온다.  임금님이 의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25:35~36)고 한다.  의인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임금이 다시 입을 열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이런 것은 물론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고 결국은 하나라는 화엄 철학의 상즉(相卽) 상입(相入)의 원리나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사람과 임금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임금에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6) 다시 화엄 사상을 원용하면, 예수님이 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19:19)는 말씀도 쉽게 이해된다.  이웃과 내가 따로 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이웃만 하나가 아니라 나와 자연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8:12)고 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면 현재 자연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태학적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절박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학이 가르치는 삼경(三敬) 사상, 곧 경천(敬天), 경인(敬人)과 함께 경물(敬物)을 이야기하는데, 경물이야말로 환경 파괴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깊이 생각할 가르침이라 여겨진다.)

7) 일즉다(一卽多) 다중일(多卽一),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모든 것이 결국 하나 안에 있고 하나가 모든 것 안에 있어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은 <요한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7:21)라고 하였다.  사실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인류의 죄 값을 탕감하기 위해 피흘리셨으니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른바 대속론(代贖論)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비적 합일’ 사상이다.  그러기에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1931-2021) 신부는 <요한복음> 해설서의 제목을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Tales of a Jewish Mystic)”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번역에서는 제목을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이라고 했지만, 영어 원본에는 The Fourth Gospel: Tales of a Jewish Mystic(HarperCollins Publishes Ltd, 2013)으로 되어 있다.  신비주의란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더욱이 류영모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외우는 위의 성경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독생자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심어준 하느님의 씨앗, 신성(神性)이라고 하였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8. 위에서 잠깐 언급한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 속에 빛으로 있는 신성(神性), 나의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고 있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도마복음> 풀이 책 서문 마지막 문장으로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졸저, <또 다른 예수>(예담, 2009), 29쪽.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비불자들을 위한 불교 안내서로, 오강남,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참조할 수 있다.)

나가면서

성경을 필자의 어머니처럼 일 년에도 몇 번씩 읽는 이도 있고, 필자의 사촌 형처럼 국한문 성경을 완전히 필사하고 이제 다시 한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일반 불교 신도들이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같은 것은 외우지만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경을 직접 읽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은 자기들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성경이나 불경에서 나온 진리 그대로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과 ‘교리’를 성직자들이 전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제 그런 전통에 무비판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 문자 너머 심층에 있는 속내를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간취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그 깊이에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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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성경(2)

며칠전 불교와 성경이라는 제목으로 "5. 불교와 관계에서 읽는 성경"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동감'해주셔서 이왕 쓴 것, 3번과 4번도 올려보자 하고 올립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아시는 분은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혹시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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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에 대한 태도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는 말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啓示)’의 책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1) 문자주의적 태도
이른바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근본주의적(Fundamental) 혹은 복음주의(Evangelical) 그리스도인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다. 심지어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縮字靈感說)’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든가, 여호수아가 해가 지기 전 쫒기는 적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께 태양이 멈추도록 해 달라고 하니 태양이 멈췄다든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 나왔다고 하는 등 구약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 등등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이런 문자주의를 받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참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우주를 엿새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경 처음에 나오는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이고, 복음서들도 그 이름대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 마가와 누가가 쓴 것이고, 바울의 편지서도 14권 모두 바울이 직접 쓰고, 일반 편지서도 그 이름을 가진 저자들이 손수 쓴 것이라 믿는다.

2) 문자주의의 거부
한편 18세기 계몽시대 이후 발달된 이른바 ‘역사 비평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은 창조나 출애굽이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느 한 때 정말로 있었던 역사적·과학적 사실이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지 않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진보적 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 끝부분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모세 자신이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모세 오경은 내용이나 문체나 용어 등에서 각각 특유한 몇 가지 종류의 문헌이 나중에 편집되어 이루진 것이지 모세라든가 어느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창세기』 1장1절에서 2장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와 2장4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각각 P문서와 J문서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문서였는데, 후대 󰡔창세기』 편집자가 이 두 문서를 적절히 짜깁기해서 붙여 놓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복음서들이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대에 가서 지금과 같이 저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썼다면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그 정도로 의존해서 거기서 그렇게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또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썼다면 그가 『요한복음』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는 말씀도 사실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verba ipsissima)’이라기보다 거의 다가 후대의 사상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연구한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낸 책으로 Robert W. Funk, 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HarperOne, 1996) 참조.)

  심지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 나사로 같은 인물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나 신이 인간이 되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저자들의 상상에 의한 결과물이라 보기도 한다. 
(존 쉘비 스퐁 지음, 변영권 옮김, 󰡔아름다운 합일의 길 요한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8) 참조.)
바울 서신 등도 바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사상이나 문체 면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 바울 자신이 쓴 것이라 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직접 쓴 것이 7편, 논쟁거리가 된 것이 3편,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이 3편, 따라서 바울이라고 하지만 “급진적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세 명의 바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커스 J. 보그, 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첫 번째 바울의 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참조.)

4, 해석의 문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신학자로는 20세기 최대 신학자 중 하나인  독일의 성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약 성서와 신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등의 저작을 통해 이른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를 주장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화적 서술이기 때문에 신화를 이해할 때 그것이 마치 우주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무엇인 것처럼 ‘우주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실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신학자로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비신화화’라고 하면 신화를 없애는 작업이라 오해하기 쉽고 성경에서 신화를 없애면 남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비신화화라는 말 대신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혹은 ‘신화의 껍질을 깨기(breaking myth)라는 말을 제안했다.  틸리히는 종교적 서술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징이 지적하고 있는 상징 너머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의 임무는 성경의 상징을 그 시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재신화화(remythologizing)’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역사비평적 접근이라든가 탈문자화라든가 신화적인 표현의 껍질깨기 방법 등이 불교의 텍스트를 읽는데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불교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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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89 13uNoveamcb40eor satm 253a9:15glt  · 
오늘은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 몇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 반수연 지음, <통영>(출판사 강, 2021)

캐나다에서 한국에 들어와 2주간 격리 기간을 보내는 동안 폭빠져서 읽은 책이다.  7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통영」은 다섯 번째 나오는 단편의 제목이다.  첫째 이야기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나머지 단편들도 재외동포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상작이다.  1998년 캐나다로 이민한 작가가 캐나다 이민 생활에 얽힌 애환을 그리고 있다.  맛깔나고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메모리얼 가든」은 2005년 󰡔밴쿠버 조선󰡕에 실려서 읽은 적이 있는데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 때의 감동이 되살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경우 이야기들 자체도 감동이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가 분위기가 내가 살고있는 밴쿠버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나에게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좋았다. 󰡔한겨레 신문󰡕에 서평이 크게 나왔다.

둘째, 김소윤 지음, <난주>(은행나무, 2018)

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이 소설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난주(Maria, 본명은 丁命連)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맏딸로 1801년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아내였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그의 아내 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소설은 제주도로 간 난주의 파란만장한 삶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난주는 갖난 아기를 데리고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는데, 풍랑으로 배가 추자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 아기를 바닷가에 떼어놓고 떠났다.  함께 제주도로 가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할 것이기에 차라리 추자도에서 평민으로 살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제주도의 노비제도와 방언이 많이 나온다.  제6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셋째, 박정선 지음, <백 년 동안의 침묵>(푸른사상, 2011)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그 형제들의 삶을 중심으로 소설화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의 일부를 축약한 듯한 밀도 높은 이야기로 여러 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2012년 체육관광부 추천도서.
넷째, 한석훈 지음, <죽음과 친해지는 삶: 심층심리학습소설>(이분의일, 2021)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는 한석훈 교수가 죽음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소설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한 교수는 서문에서 “이 책은 노화를 예감하거나 노화에 이미 접어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적 내면을 탐색해보도록 안내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하여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길잡이용 성인학습소설입니다.”고 하고 이어서 “자신을 잘 알게 된 경우, 죽음을 경외의 마음으로 기다리며 이번 생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어 여생을보다 가치 있게 살 수 있으므로 스스로도 흡족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도 따뜻한 관계를 키울 수 있습니다. 깊이 사랑해야 잘 죽습니다.  내적 성숙에 대한 귀중한 배움의 내용을 지금껏 지상을 거쳐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남겨주었고, 그것을 저는 이야기 안에 담아내어 여러분 앞에 펼쳐보이겠습니다.” 죽음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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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민진의 󰡔파칭코󰡕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기에 여기서는 생략.  미국 Apple사가 8부작으로 제작하는 드라마는 내년 2월에 방영된다고 한다.

한 가지만 더: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2018)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읽은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에 속한다고 극찬.  나는 아직 3분의1 정도 읽다가 중단했는데, 다른 급한 일 끝내면 다시 시작할 예정. 
이상입니다.



2021/12/14

[김조년]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것들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것들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야 할 것들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12.13

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좀 진부하지만, 어제 12월 13일 날짜로 우리사회의 원로라는 이들이 대통령 선거기간에 깊게 생각을 나누고 적극 논의하면 좋겠다는 몇 가지를 제안하였다. ‘원로’라는 말을 쓰기에는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도 그 제안문을 읽고 대체로 찬성하기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 내용을 좀 줄이고 내 생각을 한두 가지 넣어 여기에 소개한다.

코로나 전염병 확산 사태는 문명과정을 새롭게 정립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경제난과 양극화, 기후위기에 따른 자연재해는 인류의 운명이 절박한 상황에 부딪힌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때 미국과 중국이 군비경쟁과 패권경쟁을 벌이면서 나머지 다른 나라들을 자기편에 줄세우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사태는 하나될 인류의 희망에 정 반대되는 사건이기에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은 지난 70여 년 동안 전쟁과 독재를 거치면서도 민주화와 산업화에 뚜렷한 진전을 보이고 문화예술·스포츠에서도 좋게 평가받기에 이르렀고,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단순히 물질의 진보에 대한 것만 아니라, 바람직한 철학의 진화에도 인류에 공헌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의제들이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1. 우선 기후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는 인류문명의 어두운 내일을 미리 알린다. 탄소중립화 정책은 실제 모든 행정, 정치, 문화, 일상생활에서 철저하게 실천할 자세한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원자력활용과 폐기와 관련한 것은 아주 파격이라고 할만큼 진보스런 정책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1. 독재와 부패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망상하는 정치세력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어떤 권력기관이나 인간 집단도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와 부패로 치달을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특히 다시 ‘검찰국가’란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1. 미국·중국이 벌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패권 경쟁은 중단되어야 한다. 특히 올림픽경기에 참여하거나 거부하는 것들을 이용한 경쟁과 모든 다른 나라들을 줄세우기 하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러한 놀이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노선으로 평화유지의 차원에서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1. 미국과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상시체제로 지속되어야 한다. 어떤 지연시키거나 거부할 명분을 찾는 조건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비핵화, 제재 해제 그리고 관계 정상화 협상들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미국과 북한이 워싱턴과 평양에 동시에 임시대표부 설치, 미-북 간의 중단없는 전면 협상을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

1. 남·북 정부는 서울과 평양에 임시대표부를 설치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6·15 남북정상 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위해 서울과 평양에 임시대표부를 설치,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는 일을 원만히 진행하도록 해야 한다.


 
1. 구 일본제국의 가치관을 청산하지 못한 자민당 정권과 군사협력은 있을 수 없다. 자민당 정권과 군사협력 관계를 맺도록 한국에게 계속 요구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한국 정부는 이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1. 지방분권화를 통해 수도권의 비대화, 특권화를 막고, 지역이 활발하게 살게 하여야 한다. 철저한 지방분권 없이는 젊은 세대의 절망, 인구절벽, 부동산 투기, (지방)교육의 피폐, 지역의 소멸에 어떤 대응책도 효용이 없을 것이다. 중앙정부기관들의 분권과 지역의 자치행정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20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1)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 들과의 예산·정책을 협의할 법정 월례회의와 2)광역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조세권의 대폭 이양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실질 지방분권화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수도권 집중이 계속 진행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1. 우리의 희망은 젊은 세대와 함께함을 넘어,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동행이 확립되어야 미래가 열릴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공간을 위임하는 일을 적극 전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의병운동도, 독립운동도, 민주화운동도, 평화통일운동도 청년세대들의 과감한 도전으로 성취해왔고 극복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절망, 인구절벽, 부동산 투기, 교육 피폐, 지방의 소멸 등 우리 사회의 불평등-양극화의 산물도 젊은 세대들의 과감한 개혁운동으로 극복되고야 말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지난 시대의 독재와 불공정 등 기득권으로 돌아가려는 세력들의 절벽에 대해서도 비타협 투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할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소외된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면서 동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민주화-산업화에 성과를 거두고 메타버스(metaverse) 시대를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우리와 젊은 세대들의 동행이 필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 사익을 추구하는 일부 전통언론의 가짜 뉴스, 왜곡 보도에 사회개입이 필요하다. 우리사회의 일부 전통언론은 ‘살아있는’ 권력집단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신문과 방송을 동원, 스스로 권력을 만들어내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자신의 하수인 권력을 만들어내겠다거나 가짜 뉴스를 통한 선전·선동을 일삼는 언론은 가소롭다. 일부 대형언론의 의도된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사회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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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2

Kohei Saito, Karl Marx's Ecosocialism - Progress in Political Economy (PPE)

Kohei Saito, Karl Marx's Ecosocialism - Progress in Political Economy (PPE)
Kohei Saito, Karl Marx’s Ecosocialism
Anna Sturman | September 28, 2021
Tags: Ecosocialism Environment Uneven Development World Ecology | 0 1218
I have the distinctly nerve-wracking pleasure of being the resident ecosocialist* charged with writing up a review of Kohei Saito’s Karl Marx’s Ecosocialism: Capital, Nature, and the Unfinished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hereafter KME), the latest academic tome read by the Past & Present Reading Group. In order to do this justice I will spend the first half of the review explicating the central rift within ecosocialist scholarship itself, before moving to discuss Saito’s contribution.

The unspoken context: Ecosocialist rifts

While it goes generally unexplored in KME, the context for this book is the ongoing cleavage between work in the tradition of so-called ‘first-stage’ ecosocialism, such as James O’Connor’s ‘second contradiction’, and scholarship in the tradition of the metabolic rift school,  ‘second-stage’ ecosocialism, associated primarily with the work of John Bellamy Foster, Paul Burkett and Brett Clark. It is worth setting out some of the key aspects of this supposed opposition, which begins from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Marx had a fully-formed or coherent ecological theory.

The second contradiction is perhaps the quintessential theorisation of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 from the ‘first-stage’ ecosocialists. James O’Connor theorised a second contradiction within capitalism, co-existing with the primary contradiction between labour and capital which tends to result in crises of overproduction (or demand-side crises of profit realisation). The second contradiction, O’Connor held, emerges as one of underproduction (supply-side crises), responding to capital’s expansionary imperative and the finite reproductive capacities of socio-ecological systems. In O’Connor’s original formulation, both the systematic degradation of the conditions of production and the social response to the ongoing appropriation of non-human nature can lead to economic crises. The restructuring of social relations following such crises presents opportunities for demonstrating the non-teleological resolution of crisis tendencies, and thus is a useful mechanism for movement-building. Many scholars following O’Connor have used this approach to reveal so-called ‘environmental limits’ as socially constructed, avoiding the political dead-end of Malthusianism.

As Alan Rudy has argued, the second contradiction often gets mistaken for an ‘ecological’ crisis, when it is more appropriately considered as a theorem of socio-ecological crisis and response, building from Neil Smith’s production of nature argument to see the conditions of (re)production as constantly (re)produced through human labour. Humans are part of nature, and through producing ourselves and non-human nature(s) in-and-against(-and beyond) the capital relation, we can combine and thus strengthen multivalent class struggle across socio-natures. The centering of human labour as the process through which we transform and are transformed by the rest of nature is regularly dismissed as constructivism – but this handy strawman can be neatly countered by some of the contemporary meditations on the ways humans transform and are transformed by the rest of nature, for example the work of Blanche Verlie, on climate and affect. These sorts of discussions help to deepen Smith’s production of nature thesis.

These arguments also tie to the materialist ecofeminist literature, and the double dialectic of socio-ecological reproduction in-and-against the capital relation. Jason W. Moore’s ‘world ecology’ takes this basic dialectic, or ‘double internality’, and considers it at the world-scale. The openness of this approach also makes it legible to the full array of struggles in-and-against the capital relation, embedded in socio-natures. Here in particular we can see the internal links to Indigenous sovereignty struggles.

The metabolic rift school begins from the premise that there is a coherent ecological theory in Marx’s existing work and thus the very premise of ‘first-stage’ ecosocialist theory is wrong. Rift scholars have been concerned to work out the nitty-gritty detail of how capital systematically degrades the ecological systems upon which all labour relies. It is essentially a variant of value-theory: the rift is a constitutive dynamic of capitalism, driven by the rupture between the town and country first induced by the event of industrialisation.

There is a great deal of good to be said about the metabolic rift school’s efforts to build, or parse, a form of ecosocialist theory from Marx’s existing works. The ability to do so, however, is not entirely surprising, given humans are a part of nature and the ‘first’ contradiction is about humans in an historically specific form of (re)production. It is ironic, given their focus on the labour theory of value, that the rift school appears unable or unwilling to grapple with Smith’s elegant treatment of historically-specific forms of human labour and contradictions therein as the necessary centrepiece of any ecological thought.

There is not enough space here to set out the full array of accusations which have been lobbed. I will content myself with suggesting that much of the furore goes to the basic epistemological intent of these mirroring approaches. The second contradiction/production of nature synthesis is focused on labour (and the contours of contemporary labour movements, with concerns about environments, ‘race’, gender, and so on all constitutively part of this consideration—the tensions of which are set out usefully by Stuart Rosewarne). The metabolic rift is concerned primarily with the capital relation. The former is inherently a political strategy. The latter is a theorem.

Into this theoretical morass swings Saito with his freshly available MEGA texts, landing feet-first in the rift school’s camp. The publication of MEGA for the first time in English is promised to reveal new insights gleaned from Marx’s notebooks, which reveal a(n even) more robust foundation for the rift school’s claim that Marx had an ecological theory. Saito sets out to explore the trail of Marx’s ecological development, and engagement with the various characters who were working on similar issues, to suggest that ecology was not a secondary nor negligible consideration within his work. Through careful engagement with this freshly available primary source material, Saito argues, we can trace the development of Marx’s ecological thought and fortify the rift school’s contention that the Promethean Marx was a straw man. ‘Look no further!’ they claim. Our Karl had the answers all along.

Karl Marx’s Ecosocialism as a contribution to ecosocialist scholarship

The bottom line, I suppose, is that Saito’s decision to work entirely within the confines of the rift school battle lines has resulted in a text which—despite its strengths in textual analysis and promise of broader contribution—does very little to advance ecosocialist scholarship, politics or strategy, as a whole.

The research agenda at the base of KME seemed to dictate Saito’s engagement, or lack thereof, with certain historical figures and ideas. One example is the extended discussion of Karl Nikolas Fraas’ influence on Marx’s later ecological thought, despite Saito’s admission that Fraas’ name appeared only once in Marx’s extensive written body of work. Conversely, this doubling down on the rift school agenda led to many missed opportunities to engage usefully with the O’Connor-Smith synthesis, and at times I found myself silently screaming ‘Neil Smith said this!!’ at the page—waiting for the other socio-natures to drop, so to speak.

Still, the novel reading of Marx’s notes might have led to some useful bridge-building across the ecosocialist divide. Alas, despite the promise of juicy tidbits from the MEGA, the carefully reconstructed development of Marx’s ecology did not appear to offer us anything we had not already seen. The small deviations from accepted chronologies do not appear to substantively alter the existing rift school reading. On the other hand, Saito’s efforts to demonstrate that the human-nature relation was deeply important to Marx is a point well-made, even if it has been made before.

A common critique of the rift school, and one that certainly applies to Saito here, is the tendency toward reification of ‘Nature’ and pre-capitalist natures. In existing debates about the double internality of human and non-human natures in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the theorisation of the dialectic is a source of massive controversy. I (along with my frequent collaborator Natasha Heenan) would suggest that not much substantive hangs on this issue. To side with Moore, other than the compulsions of capital driving contemporary academia, it is unclear why it is heresy to suggest that ‘the metabolic rift’ is rather a proliferating and mutating series of rifts. The rifts have not sprung from a single moment, but are necessary to the operation of capital on the global scale.

The insistence on a singular metabolism also obliterates the diversity and, certainly at times the ecologically devastating, internal compulsions of pre-capitalist socio-natures. A lack of engagement with even a handful of the lively socio-natures which co-exist with and against the capital relation in the present moment—Indigenous sovereignty movements, materialist feminisms and the questions of social reproduction, anti-imperialist agro-ecological movements—are all lost within the singular metabolism.

Without an explicit focus on the generative contradictions animating a pluriversal metabolism of human reproduction within the rest of nature, I am left asking: what is the politics of this? The focus on capital rather than the human labour which creates and internally divides the capital relation leaves us wanting for a political imperative. The focus on capital rather than socio-natures in-against-and beyond capital leads, I suggest, to a fundamentally defensive/offensive binary of possible action (think Andreas Malm’s war communism lens) rather than an open programme of political economic transformation operating at the level of the global, strengthened rather than riven by acknowledging the agency of the various sites of socio-natures building in-against-and beyond the capital relation.

Against the charge of rigidity, we can certainly acknowledge that there is a case to be made for the KME’s function at the level of internationalist theory and praxis. Saito’s work here has, anecdotally, almost single-handedly revived interest in the work of Marx in Japan, which is no small political feat! Perhaps this context can tell us more about why this project was so favourably received within the Anglophonic ecosocialist scholarship—it contributes to a properly internationalist ecosocialist project, and is thus deserving of acclaim.

On the other hand, it is imperative that ecosocialism becomes increasingly accessible, and the stories it allows us to tell are grounded in the materiality of socio-natures, past, present and future. Ecofascism is on the rise, the Mathusian politics of ‘population control’ are an ever-present spectre, and how we choose to outline and advance an ecosocialist agenda will have very real political consequences. This is not a book I would recommend to someone as an entry-point to thinking about ecosocialism, either theoretically, historically or politically—a problem, considering the arresting title.

Ultimately, I’m not sure what is to be gained by refusing to see the generative frictions and resonances between so-called first and second-stage ecosocialisms, beyond playing into the established dynamic of academia in capitalism. The unwillingness of the rift school to absorb the vitality and politics which drove first-stage ecosocialist thought, and which quite frankly yielded a theoretical framework which offers immediate and practical opportunities for action, is a real shame. It certainly would be much more useful for us, as ecosocialists (and here materialist ecofeminism should be taken as read as a basic requirement for calling oneself an ecosocialist), to explore how our work strengthens each other’s perspective rather than fighting to the death over What Marx Said.

 

*I am but one of the ecosocialist theorists in the P&P Reading Group and extend my thanks in particular to Tash Heenan and Matt Ryan for their thoughtful comments on the draft of this review. More broadly, the reading of ecosocialist theory and debates set out here is informed by my ongoing, shared research agenda with Tash Hee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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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Anna Sturman
Anna is a PhD candidate in the Department of Political Economy at the University of Sydney. Her research centres on the political economy of climate change, particularly theories of the state, and of non-human nature and value, from a materialist ecofeminist perspective.